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포스트 코로나 : 교회의 조직과 예배
by 노승수
2020-06-20
코로나 이후가 어떻게 될지를 보려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게 된 것은 1347년,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의 상선이 흑해의 크림반도에 위치한 식민 도시 카파(Kaffa)로부터 모든 선원이 사망한 채로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메시나(Messina) 항구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중국의 풍토병이었던 흑사병은 킵차크 칸국(kipchak khan)에서 카파를 거쳐 이탈리아로 퍼져나갔다. 1347년 메시나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과 러시아, 아프리카에까지 이른다. 1351년에 이르러 잠시 소강기에 접어들었지만 창궐한 지 5년 만에 무려 2,500만 명의 유럽인이 사망했고 50년간 10년 단위의 유행을 반복하면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했다.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자 유럽의 경제 구조에 변화가 왔다. 영주와 농노의 봉건 제도 하에서 노동 인력이 점차 감소됐는데, 이로 인해 농노들이 해방되거나 노동 임금이 상승하여 새로운 중산층 계급이 형성되었다. 흑사병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교회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사제로 지원하는 사람이 줄어 무뢰배가 종교 지도자가 되는 일이 생겼고 이런 현상이 종교 개혁을 부추기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흑사병은 한쪽으로는 급격한 사망으로 인한 공포와 종교심을 불어 넣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과 과학의 발전을 불러왔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르반테스, 에라스무스 같은 대작가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피렌체로부터 원근법에 기원한 미술이 등장했는데 최초의 작품은 지오토의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면서 중산층을 위한 저가의 그림 거래가 많이 일어났고 미술에 대한 저변이 확산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교회에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예술과 종교로 회귀했으며, 더욱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흑사병은 공교롭게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산업이 멈춘 때에 자연 회복에 대한 뉴스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교회의 회복도 일으키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 모임의 축소로 인해서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고 예배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기에 많은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교회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위기는 한국 교회가 가진 교회론의 위기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일 수 있다. 신천지가 자신들의 모략 교리를 통해 교회 내에 침투해 교인들을 빼가거나 교회를 빼앗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이미 우리는 이 위기를 감지했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사태는 신천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여기에는 분명 섭리적인 메시지가 있다. 신천지로 인한 위기나 코로나로 인한 위기는 공통적으로 교회 회원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성경에서 교회는 흔히 가정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로 비유적으로 묘사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가족이라고 하셨다. 교회의 회원권은 혈통이 묶어주는 연대보다 사실 더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실제로 갈라디아서는 우리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혈통에 연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혁 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치리”가 교회에 나타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회원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때 그들이 가진 정서적 연대와 가족의 회원권이 징계를 달게 받게 만드는데, 교회에서 이런 연대감은 거의 사라졌다. 예배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한 가족 공동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이것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은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 이전에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신자들의 어머니는 결국 신자들의 모임, 곧 예배에 의해서 세워진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신자들 간의 연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 심령에서 확인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느슨한 회원권의 문제는 피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느슨한 회원권은 결국 지금과 같은 코로나 사태에서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가족의 일원이 먼 나라에 유학을 가거나 군대에 갔다고 해서 가족의 회원권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이 지닌 혈연적 유대가 무엇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는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교회를 조직 교회로 묶어주는 회원권과 그런 회원 의식을 고취시킬 분명한 복음을 전하는 강단의 문제로 귀결된다. 교회의 회원권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으로부터 온다. 믿음에 의한 연대는 다시 가족처럼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 이어져야 한다. 아무리 말씀이 고상하고 좋더라도 결국 우리가 헌신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만큼이며 그 사랑은 아는 만큼 이뤄진다. 어머니로서 영적 돌봄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공동체를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며 사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교제가 필요하다. 강단에서 선포된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까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봉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교회가 교회로서 유지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상황은 이제 이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흑사병이 50년 이상 유럽 사회에 영향을 준 것처럼 앞으로 이런 상황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그랬듯이 코로나 역시 극복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상황은 더러는 악화될 것이고 더러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자 신자 공동체로서의 연합이 곧 예배임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온전한 주일을 통해서 회복되어야 한다. 연합의 가치가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면 사실상 이런 이해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시간을 함께하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우리는 말씀을 함께 받고 서로를 더 알아야 한다.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신자 공동체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영성
예배
흑사병
포스트코로나
팬데믹
키브리아누스
온라인예배
공동체
코로나19로 교회가 분열되면 안 된다
by Brett McCracken
2020-06-19
COVID-19 사태를 맞은 지난 몇 달, 전세계 교회는 어떻게 해야 교인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지와 관련한 복잡한 도전들로 인해 끊임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다양하고도 복잡한 도전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대두된 문제는 어쩌면 가장 까다로운 것인데, 다름 아니라 현장 예배 재개 여부와 관련한 문제다. 개인간 거리두기, 예배 참석자의 숫자 제한, 마스크 착용 문제, 소리 내어 찬양을 할 것인가의 여부, 주일학교 문제 등등과 같은 물리적 디테일이 필요한 문제들이 별로 도전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배 재개와 관련한 대부분의 대화는 말 그대로 교회를 분열시킬 잠재력으로 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리더십 그룹을 포함하는) 회중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지금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사회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한 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 상황을 참지 못해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또 이와는 정반대로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 양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이처럼 불안정하고 극단적 사고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교회가 부끄러운 분열의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하나됨을(시 133) 보여줄 수 있을까?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은 육체의 소욕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있으며,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이 세상 앞에서 분열과 반목을 이겨내는 반문화적인 모델(countercultural model)을 보여줄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반문화적인 희생자기 우상 숭배(self-idolatry)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때야말로 교회에게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나 자신보다 앞세우는 사랑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마스크를 쓰거나 서로 간에 항상 2미터의 거리를 두는 것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이런 예방 조치가 불필요한 과잉 조치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설혹 이런 예방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당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당신의 그 확신을 잠시나마 접어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교회가 예배를 재개했는데도 여전히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리석고 또는 겁쟁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로마서 14장 속 바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어떨까?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또는 고린도전서 8장 9절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와 마찬가지로, 봉쇄 정책(lockdowns)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행동 제한 정책을 고수하는 정부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쏘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이런 양극단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다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현장 예배 재개에 부담을 가진 교인들 때문에 계속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지속하는 것은 교회에 많은 피해를 가져다준다. 마스크나 사회적 거리두기에 거부감을 가진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온라인 예배와 같은 예방 조치에 동조하는 것이 또 하나의 희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양보가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 보다 훨씬 더 기독교인다운 모습이다(롬 12:1). 우리는 이런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반문화적인 겸손지금의 사태와 관련해서 나 자신부터가 얼마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차 있는지 스스로 돌아본 적이 있는가? 평신도와 리더 또는 소위 전문가들을 가리지 않고 전혀 근거 없는 확신을 퍼뜨리는 것은 최소한 COVID-19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그 누구라도 모든 사실을 100퍼센트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조금씩 더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그런 모습에 앞장서야 한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인은 야고보 사도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계획 수립과 실행을 조금 느리게 만들지는 몰라도, 그 자체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현장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것과 관련해서 시간을 두고 최대한 다양한 의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그와 관련한 포럼을 열어서 교회 내 다양한 직분의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교회 지도자 또는 정부 관련한 사람까지 초대해서 의견을 청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그리스도가 보여준 겸손의 모델을 따라서 반응해야 한다(빌 2:3). 우리 중 그 누구도 '나는 이미 확실한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다른 의견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현재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그와 더불어 마치 "비행을 하면서 비행기를 고치는" 것과 같은 위기의 순간인 지금, 우리 모두는 다 예외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반문화적인 인내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인내라는 단어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자가격리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은 조바심에 안달하는 지금처럼, 인내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도 없다. 다시 함께 교회에 모여서 예배 드리고 싶어하는 갈망은 바른 것이고 또 좋은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처럼 우리는 결코 모이는 것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여서 예배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예외 없이 하루라도 빨리 온라인 예배가 현장 예배로 회복되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정부의 방침보다 빨라도 안 되고, 사회가 합의하는 수준보다 앞서도 안 된다. 바라는 만큼 빨리 되지 않더라도 인내해야 하고, 다시 예배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원할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인내해야 하며, 또한 이런 복잡한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교회 지도자들의 상황도 인내해야 하고, 뉴노멀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서로를 향해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현장 예배가 꺼려지는 사람은 현장 예배를 바라는 사람들을 인내해야 하고, 현장 예배를 갈구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인내해야 한다. 인내하는 게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사태가 비록 몇 달 또는 몇 년이 되더라도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반문화적인 뉘앙스(Nuance)우리는 지금 말에 여지를 두는 대신 모 아니면 도를 주장하는, 뉘앙스가 사라진 시대(un-nuanced age)를 살고 있다. 뉘앙스, 즉 의미에 여지를 두는 것은 클릭수와 뷰어 숫자에 좌우되는 오늘날의 미디어 경제 모델과도 맞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이 극단적으로 편을 가르고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겸손한 자세로 복잡한 상황을 놓고 “둘 다(both/and)”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하나됨과 친교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면, 교회는 무엇보다 반문화적인 뉘앙스의 길, 즉 극단적 주장을 피해 서로를 향해 여지를 두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길은 모든 사항에 대하여 무조건 소리 높여 극단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진리가 결코 트위터 몇 마디로 전달될 수 있는 그런 단순하고 시시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길은 용기와 신중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동시에 극단 및 절망적인 반응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예를 들어, 봉쇄 조치에 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결코 황당한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설혹 사회 정서에 역행하는 정책을 발표하더라도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롬 13). 이런 반문화적인 뉘앙스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우리는 상대에 대해 최악의 생각을 하는 대신 나와 다른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달리 말해 나도 항상 옳지만은 않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상대를 향해 여지를 가지는 이런 자세는 종종 겸손과 인내가 합쳐질 때 생기는 결과물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여지를 두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모든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했던 간곡한 요청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urch, Don’t Let Coronavirus Divide You번역: 무제
교회생활
COVID-19
온라인예배
코로나시대
현장예배
예배회복
봉쇄정책
사회적거리두기
자가격리
전도에도 뉴노멀이 도래하는가?
by 김선일
2020-06-18
코로나바이러스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른바 뉴노멀(New Normal) 시대로 인해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정착을 미뤄왔던 비대면 방식의 일과 교육, 기본소득제, 생태적 실천이 우리 삶의 중요한 지형이 될 전망이다. 전도 사역은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우리의 생활 양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 또한 과거의 익숙함과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문명의 전환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이 소통되고 전파되는 적절한 방식에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뉴노멀은 전도 사역에 적신호와 청신호를 동시에 밝혀 준다. 상황은 늘 위기와 기회를 모두 안고 있기 때문이다. 1. 코로나 시대 전도의 적신호바이러스로 인해서 집합 예배만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도에도 중대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전도 방식이 바로 인력 동원의 집회 전도와 개인 접촉을 통한 노방 전도였기 때문이다. 매년 4~5월과 9~10월은 많은 교회들이 총동원 전도, 새생명축제 등의 이름으로 집회 전도를 여는 시기였으나, 올해는 어떠한 행사도 불가한 상황이다. 불신자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행사는 고사하고, 거리두기로 인해 기존 신자들도 매주 교회 출석이 어려운 상황이다. 아무리 절대 다수 교회들이 방역지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항변해도 옹색한 방어 논리로 들릴 뿐이다. 길거리에서 익명을 대상으로 접촉하는 노방 전도는 어떤가? 이러한 행위는 이제 종교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위생과 안전을 위해서 금기시될 것이다. 누군가와 몸이 살짝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경험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낯선 이들을 꺼리는 정서와 태도는 머지않아 새로운 생활 습관이 될 것이다. 근래에 사생활 침해라는 이유로 거부감이 확산되었던 노방 전도는 이제 변신을 하지 않으면 유물로 전락될 것이다. 왜 ‘변신’이라고 하는지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최근 집회 전도와 노방 전도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추구되던 전도 방법으로 소그룹 전도가 지목되곤 했다. 혹자는 대규모 모임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소그룹이 부상할 것이라고도 한다(존 피니 ‘새로운 전도가 온다’ 124쪽). 과연 그럴까? 소그룹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face to face relationship)를 기본 원리로 삼는다. 비대면이 기본 모드가 되어 가는 사회에서 대면적 만남을 통한 영적 상호 작용이 증진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소그룹 전도는 신자와 불신자가 5:5 내지는 6:4의 비율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모르는 자들과의 만남에 헌신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까? 물론 소그룹 사역의 근본적 가치인 관계적 헌신은 소중하다. 그것은 소그룹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모습으로든 지속되어야 한다. 2. 코로나 시대 전도의 청신호집회 전도, 개인 전도, 소그룹 전도가 모두 난관에 봉착한다면, 이제 전도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서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떠안아야 할 과제다. 그러나 복음은 불변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방법과 관계없이 자명해질 것이다. 또한 새로운 상황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의 (하나님께로 연결되어야 할) 영적 갈망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지난 봄에 구글 트렌드에서 기도라는 단어의 검색량이 크게 늘어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인 제넷 벤첸(Jeanet S. Bentzen)은 미국과 유럽 전역으로 바이러스 감염이 확산되던 3월경 구글에 기도 검색이 두 배 이상 폭증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위기의 상황을 종교적으로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원초적 심리가 작동된 것으로 보았다(“In Crisis, We Pray: Religiosity and the COVID-19 Pandemic” in Covid Economics (Issue 20), 20 May 2020: 52-108). 이러한 검색량의 폭증이 기독교 복음에 대한 관심으로 직결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오늘날의 불확실함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근본적 책무를 일깨워 준다. 교회 안에서만 혹은 혼자서만 기도하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이웃을 위해서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잊지 말자.또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보편적 습관이 될수록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갈망 또한 더욱 커져 갈 것이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인 이상 비대면으로는 만남의 근원적 욕구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이미 현대 도시화와 1인 가구, 개인주의는 인간을 홀로 살아가야 할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 곁에 있어 주는 존재다. 이해관계나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관계적 사람이 필요하다. 이러한 영성과 관계는 성경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교회가 전도 사역의 주된 영역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당연한 영역이다. 영성은 관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실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삶의 초월성에 눈을 뜨는 것이다. 영성적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현실 세계의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기독교의 고유함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복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은 된다. 관계는 복음이 삶으로 표현되는 영역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생생한 인격과 이웃 사랑의 관계로 드러난다. 전도를 위해 관계를 도구화하지 말자. 관계에 먼저 충실하고 전도는 신뢰적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가 되어야 한다. 3. 전도의 ‘오래된 뉴’노멀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전도의 핵심은 무엇일까? 복음의 선포와 실천이 아니겠는가? 복음을 우리의 말과 삶으로 표현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오늘날에는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정기적인 교회의 설교와 개인의 일상적 관계에서 신앙을 권하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을 나누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최근 회심자들에 대한 조사를 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계기나 전략보다는 이러한 일상적인 교회 예배나 관계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된다. (단, 오늘날 온라인 미디어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고려할 때, 유튜브 등을 통해서 기독교를 선명하고 흥미롭게 소개하는 특별한 작업이 요청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 혹은 교회 연합 차원의 프로젝트도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당시의 적대적 환경으로 인해서 극히 제한되고 폐쇄적인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새신자를 환영하기보다 오히려 검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알렌 크라이더 ‘회심의 변질’ 참조). 그럼에도 교회는 전도를 통해서 성장했다. 전도의 열쇠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삶에 있었다. 특별한 방법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 대로다.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너희 선한 일을 보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이러한 말씀들의 실천은 어떤 밀접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바이러스의 위협이 그치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대면적 만남은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관계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가족과 이웃, 직장 동료, 친한 지인 정도일 것이다. 신약 시대의 전도는 오이코스라고 하는 확대 가족 관계를 통해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평소의 관계를 진실하게 성찰하게 된다. 팀 켈러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사역의 역동성은 이러한 일상적이고 비공식적이며 다양한 관계들에서 일어남을 증언한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교인들의 20~25퍼센트가 자신의 일상에서 가족, 친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을 나누고 그들을 환대하는 사역에 참여하면 교회 전체에 큰 효과를 일으킨다고 한다.그렇다면, 오늘날의 전도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유명 인사를 동원한 전도 집회를 열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매력적인 삶을 사는 이웃이 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교회 프로그램이나 봉사를 위한 제자도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선교적 제자도여야 한다. 관계를 이용하는 전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충실한 이웃 사랑의 삶이어야 한다. 특별한 이해관계나 용건 없이도 이웃과 인사하고, 그들의 안부를 묻고, 상대의 말을 성의 있게 경청하고, 그들의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로 오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교회가 되게 하라. 최근 미국 빌리그레이엄센터의 불신자 전도 조사 결과에서는 미래의 전도를 위한 중요한 모델로 ‘마이크로처치’(microchurch 초소형 교회)를 제시한다. 마이이크로처치는 가족, 친척, 이웃 등의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믿음의 공동체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2019). 직장인이었던 Y는 우울증을 앓는 아내의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여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며 기도해 주는 영적으로 친밀한 모임을 시작했다. 우울증 해소에 도움을 받은 그 친구는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믿지 않는 다른 친구를 그 모임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Y의 가정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심과 돌봄을 제공하면서 초대와 환대의 공동체로 발전했고, 몇 년 후 Y는 필자가 재직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이제는 건실한 강소형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전도에 관한한 방법과 전략의 유혹을 버리고, 성경의 단순한 원리를 실천하는 오래된 뉴노멀을 마주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일상의 작은 관계들에서 따뜻하고 진실하며 영적으로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좋은 말이지만 사실 쉽지는 않다. 그동안 익숙했던 가족 및 이웃 관계에서 어색함을 떨치고 관심과 돌봄을 제공하는 용기가 요청된다. 그래서 교회 전체 차원의 격려와 기도가 필요하다. 개인이 알아서 하도록 맡길 문제가 아니다. 전도를 위한 당위로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섬기는 예수님의 행복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교회
전도
팬데믹
비대면
노방전도
뉴노멀
마이크로처치
센터처치
코로나바이러스
부활이 약속하는 우리의 회복
by Petar Nenadov
2020-06-17
“우리 오늘밤에 나갈 거예요 아빠?” 앞줄에 앉은 여자아이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일단 착륙하면 호텔을 알아보고 저녁을 먹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디즈니에 갈 거야.” 아빠가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오빠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마침내 디즈니월드에 가게 되었다며 어린애다운 흥분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나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애비(Abby)라는 여학생이 떠올랐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애비는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애비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열여섯 살 된 학생인데, 최근에 암 진단을 받았다. 일 년 육 개월 전, 감기 증상인 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몸에 백혈병이 있어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나는 디즈니에 가 보려고 올랜도에 간 것은 아니었다. 로젠 싱글 크리크(Rosen Shingle Creek)에서 개최되는 TGC 내셔널 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그 도시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공항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오하이오에서 올랜도까지 나 같은 사람들이 발길을 옮길 만한 공원이라든가 관광지에 대한 광고조차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줄곧 강연을 듣는데, 비행기에서 앞줄에 앉아 떠들던 그 아이들의 기쁨과 언젠가 애비도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이 마음속에 수시로 찾아들며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소’라고 불리는 디즈니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기쁨과 바람을 가져다주는 것일까?’고통과 위로디즈니는 오래 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과 제휴를 맺어 왔다(역주: ‘메이크어위시 재단’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취지 하에 1980년 설립된 미국의 자선 단체로서 두 살 반에서 열여덟 살에 걸친 환자들의 신청을 받는다). 이 재단에 신청되는 소원 가운데 디즈니월드와 같은 리조트에 가는 일은 여전히 인기가 제일 높다. 그런 목적에서 ‘기브 키즈 더 월드 리조트’(Give Kids the World Resort)도 운영되는데, 이곳은 생명에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아이들과 가족들이 환상적인 휴양을 일주일 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70에이커 규모의 비영리 시설이다.애비는 ‘메이크어위시’에 당첨되면 어떤 여행을 할 수 있는지 홀리(Holly)라는 자매를 통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홀리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자매로서 암 투병을 하고 있는데, 8년 전 ‘메이크어위시’에 선정되어 디즈니에 가게 되었다. 홀리와 그 가족들은 암이라는 질병과 그 치료 과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여행과 같은 바람이 환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는 도중에라도 바라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아이들이 ‘메이크어위시’에서 하는 일을 알게 되면, 당연히 흥분되어 가슴이 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꿈에 그리는 여행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말인즉슨 그 아이들이 악몽과 같은 삶을 살아왔음을 뜻한다. 그 여행은 아이들이 겪어 온 아픔과 고통에 대한 위로를 상징한다. 어떤 아이들은 여행을 할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 더 많은 후원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혹 여건이 된다면, 당신도 그 재단을 후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그러한 위로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소망을 제시하는 것일까?부활과 회복내가 참석했던 TGC 컨퍼런스의 마지막 시간이 되자 팀 켈러(Tim Keller)가 나와 누가복음 24장을 해설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내포하는 독특한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24장 40-43절을 다루었는데, 그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0-43).켈러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 식사 장면 속에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을 지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꿈 속에 나타나거나,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신 게 아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손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며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일은, 장차 새롭게 될 세상에서 새롭게 될 육체를 가지게 될 부활의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위로 그 이상을 약속한다. 곧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활은 사실상 우리가 상실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 준다.”당시 켈러는 독신으로 있는 지체들과 어려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했지만, 나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남매와 지금도 자신만의 ‘메이크어위시’ 여행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우리 아들은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할 거야’, ‘우리 딸이 병원에 갇혀 고등학교도 못 다니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는 모든 부모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 모든 자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이 있음을 확신했다. 곧 새로워질 세상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했다.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믿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어떤 좋은 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진정으로 좋은 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들려주는 좋은 소식은 세상이 들려주는 나쁜 소식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보장한다.애비의 몸에는 암이 있지만, 암이 애비를 다스리진 않는다. 예수님이 애비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그녀는 수시로 손을 들어 그분을 찬양한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보며 경배했던 이들처럼 말이다(눅 24:52).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이 들려주는 회복의 약속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약속이 제시하는 기쁨도 이 세상의 어떤 일시적인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가져다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storation: the Promise of the Resurrection번역: 장성우
복음
부활
아픔
고통
위로
회복
소망
약속
팀켈러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1)
by 고상섭
2020-06-16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일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정작 실제 설교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에 급급해서 제대로 된 적용을 선포하지 못할 때도 있다. 브라이언 채플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나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라는 좋은 교재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팀 켈러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를 추모하며 만든 책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우면서 어려웠던 점과 그것을 극복했던 소감을 나누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의 적용팀 켈러도 우리와 동일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고 말한다. 처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많이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을 오고가는 연속성에 대한 성경 신학적 이해가 깊을수록 본문 안에서 복음 조각을 발견해 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브라이언 채플이 말하는 FCF(The Fallen Condition Focus: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 맞추기)를 드러내야 한다.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 속에 나오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 주고,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팀 켈러가 말하는 고민은 좀 더 근원적인 고민이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제를 어떻게 성취했는지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도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적용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적용이 풍성하지 못하고 매번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팀 켈러는 그런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팀 켈러 설교의 적용원리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에드먼드 클라우니나 브라이언 채플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2006년 4월 고든코넬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한 ‘Preaching To the Heart’(마음에 닿게 설교하기)에서 Unintentional Preaching Models (의도하지 않는 설교 모델)을 강의했다(Tim keller, Ockenga Institute Pastor’s Forum 강의안 4쪽). 팀 켈러는 위의 도표를 통해 오늘날 시행되는 설교를 일곱 가지 타입으로 나누었다. 1. A-B : 정보 전달식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의 메시지) 2. A-C : 알레고리적 설교 (성경 텍스트–그리스도의 성취) 성경 주해가 없다. 3. A-D : 교훈적 설교 (성경 텍스트-적용) 4. A-B-D : 조직 신학적 주해 설교 (청교도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세지-적용)5. A-B-C : 구속사적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6. A-B-C-D: 구속사적 적용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적용) 7. A-B-D-C : 마음에 닿게 설교하기 (Preaching to the Heart)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팀 켈러가 말하는 6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A(성경의 텍스트)에서 B(저자의 메시지)를 아는 주해의 과정을 거치고, D(적용)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포하고 나서,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FCF를 드러낸다. 말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고 그 대안으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그 일을 성취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즉 C(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낸다.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A-B-D-C-D의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성경의 메시지(A)에서 주해의 과정(B)을 거치고,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D)을 드러내 주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들(C)을 통해서 그 은혜로 인간이 순종할 수 있다(D)고 결론을 내린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함으로써 그 은혜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제한 도덕적 설교와 다르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는 구속사적 설교와도 다르다. 인간의 마음의 중심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 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사랑의 우선 순위를 바꾸어 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방식은 좀 더 풍성하고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준다. 본문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윤리적인 적용이 되어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간이 할 수 없다는 FCF를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성취와 은혜를 설교한 후에 적용으로 이끌어 가면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선포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영역이 바로 적용 부분인데, 팀 켈러는 본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결한 것이다. 팀 켈러 설교의 예 마가복음 10장에는 부자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 영생에 대해 질문한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주인이 재물임을 아시고, 그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 안다면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만약 도덕적 설교를 한다면 부자 청년은 재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버려야 한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돈이 가진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돈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돈 앞에 늘 연약한 존재다. 주님을 위해 사는지 돈을 위해 사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재물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려놓기도 한다. 그런 재물의 힘과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팀 켈러는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면서 부유하시지만 가난한 인생을 사셨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예수님의 인생은 우리를 위해 가난한 인생이 되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희생하신 삶이었다. 이 복음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동안 돈을 나누지 못했던 두려움과 교만에서부터 자유하게 된다. 돈을 나누지 못한 이유는 그 돈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이다. 내가 일해서 받은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기가 아까운 것이다. 또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나서 내가 돈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또한 나누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이 두 가지 장애물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복음 안에서 해결된다.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이 나를 지키실 것이라는 안정감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복음 안에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아서 고민하는 부자 청년이 아니라, 진정한 부자 청년이었다. 하늘의 모든 보화를 가지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진정한 부자 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 가난해지셨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마지막 적용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돈의 부정적인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전부를 내주신 진정한 부자 청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능력은 권력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팀 켈러는 재물을 나누는 삶을 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며 적용한다. 그러나 단순한 적용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는 적용이 된다. 우리의 모든 순종은 은혜의 반응이며 감사의 고백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팀 켈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설교의 방법론만은 아닐 것이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위해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는 그의 태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다. 설교자들이여!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해야 할 때다.
목회
설교
팀켈러
에드먼드클라우니
브라이언채플
FCF
부자청년
그리스도_중심적_설교
고통, 하나님의 메가폰
by Alistair Begg
2020-06-15
C. S. 루이스가 고통과 아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이래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독자들이 그로부터 지속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를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라는 처방을 통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처방책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해 보인다. 요즘에는 각종 매체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프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듣게 되면, 휠체어에 몸을 맡긴 장애인들이나 복합적인 만성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격려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순례자로서 겪는 지상의 삶과 본향에 이르러 겪게 될 천상의 삶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죽음과 애통,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날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현재 상태를 정직히 돌아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듯, 그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 중 대다수는 루이스가 언급한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비참한 일상에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겪어 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온갖 종류의 시련을 다 피해간 사람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시련은 때로 적군으로 위장해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지만, 그 적군이 사실상 친구로 밝혀지는 경우도 흔하다. 야고보 사도는 독자들을 향해 시련을 당하거든 그 시련을 인생의 침입자로 여기며 분개하지 말고 친구처럼 대하며 맞아들이라고 권한다. 그러한 고통 앞에서 도망치며 숨기보다 그 상황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게 하여 더욱 성숙된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시련을 맞으라는 권면이다. 물론 루이스도 고통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통이 우리의 구속과 성화를 이루는 데 쓰인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나는 32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는 일이 마침내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 한 예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어느 핵물리학자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에 아내와 세 딸의 강요에 못 이겨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차가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존 스토트(John Stott)가 쓴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도 읽어 보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신념에 갇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아이인 11개월 된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메가폰이 그의 인생에도 울렸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그러한 비극과 상실의 경험을 제대로 다루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기존의 세계를 초월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분의 손에 붙들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 끔찍한 시련의 필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반역하는 그의 마음을 정복하시고 평강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이다.실제로 그분은 우리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행복을 맛보는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고통을 사용하신다. 따스한 햇볕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신앙인이 있을진 몰라도, 뜨거운 불길이나 거대한 홍수를 보며 잠에 곯아떨어지는 크리스천이 있을 순 없다. 외관상 모든 일이 잘될 때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고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러다가 혹 조직검사로 악성 종양이라도 발견되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근심의 폭풍이 몰아치며 자기만족 따위의 지난 망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렇게 우리를 일깨우시며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이끄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우리가 받는 고통의 경험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이 될 때, 타인이 직면하는 시련에 대한 의식이 생겨 비로소 온화한 교제도 가능해진다. 고통과 좌절을 통해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되면, 타인의 연약함을 짊어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장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으로서(히 4:15)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셨다. 특별히 우리 중에 가르치고 지도하는 리더의 자리로 부름 받았으나 약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향해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보이는 데 실패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분의 본을 더욱 깊이 새겨야 한다. 나의 경우는 이제 겨우 고통의 바다에 발가락만 담근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밤의 고독한 시간처럼 무거운 인생의 고비를 지날 때에야 화창하고 건강했던 시절에는 결코 배우지 못한 교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가 했던 말에 동의해야 한다. “그분은 험상궂은 섭리 뒤로 자신의 미소를 감추신다.”나는 이 자리에서 고통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만은 깊이 묵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째,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고통과 아픔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훈련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자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히 12:5). 둘째,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고난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지 또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시 119:67, 71).루이스는 우리의 인생에서 또는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친구나 이웃의 삶 속에서 고통의 메가폰이 울릴 때 우리가 피상적인 낙관주의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깊은 비관주의의 심연으로 빠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누군가 내면의 절망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이 겪는 시련과 고통을 뼈저리게 의식하다가 혹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런 시련을 받지 않고 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아픔과 환난에 대해 정직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야기하는 모든 물음에 답변하려 하지 않는다. 감추어진 일은 그분께 속했음을 알기 때문이다(신 29:29).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에워싼 그 미스터리 가운데서도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단언할 수 있다. 이에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신 그분을 오늘도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Pain: God’s Megaphone번역: 장성우
영성
영적성장
루이스
고통
메가폰
성화
존스토트
시대는 변하는 것이다
by R. C. Sproul
2020-06-14
이론상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는 바로 이 질문에 담겨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시간과 공간을 “순전한 관념(pure intuitions)”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시간이 물질 및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과 공간(물질과 운동)이 없다면 시간의 경과를 측정할 방법이 없다. 시간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결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다양한 물질로 시간의 경과를 측정해 왔다. 표면 위를 가로지르는 태양 그림자의 움직임을 사용한 해시계, 쏟아지는 모래를 사용한 모래시계, 시계 안에서 작동하는 기어가 원을 따라 움직이는 분침과 시침. 나는 큰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초침의 움직임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시계 속 12라는 숫자를 보면서 초침이 그 숫자를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눈은 또한 아래에 있는 6이라는 숫자를 보고 있는데, 아직까지 분침이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침이 시계 바닥을 쓸고 지나가며 6을 스치는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느낀다. 분침이 그 숫자를 스쳐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 조금 전까지 미래였던 시간이 어느덧 과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종종 시계를 앞에 놓고 이런 실험을 할 때면 나는 시계의 움직임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누군가가 이미 선언했듯이,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피조물 속 모든 것은 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피조물은 다 변한다. 모든 피조물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불변하다. 하나님, 하나님 한 분만이 시간이 주는 이 가차없는 공격을 피해갈 수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측정할 뿐 아니라 연대 및 시대라는 이름을 붙인 일정한 기간도 같이 측정한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현세대를 살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인류 역사의 변환을 목격했고, 그럴 때면 시간이라는 벽 사이에 끼인 우리는 그 벽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끼기도 한다. 흔히들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시간, 그 자체가 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전히 1분은 60초고 1시간은 60분이며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러나 문화는 패턴, 가치,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나는 극적인 문화의 변화를 목격했다. 루즈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서 미국이 처음으로 원자 폭탄을 시험 투하한다는(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전)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이 암살되었을 때, 러시아가 우주로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인류가 달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도 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십 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1960년대의 십 년이다. 당시 미국이 겪은 문화적 무혈 혁명은 너무도 엄청나서 사람들이 그전까지 자연스럽게 여기던 문화를 1960년대 이후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마치 외계인의 문화처럼 생소하게 느낄 정도였다. 60년대의 혁명은 이상주의의 종말을 고했고 성적 혁명을 포함하여 우리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중에서도 결혼의 신성함이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들을 수 있는 깨끗하고 건전한 연설은 점점 드물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에 대한 신성함은 입법적으로 공격 받았고, 도덕적 상대주의는 이제 우리 문화의 표준이 되어 버렸다.이 도덕적 상대주의와 함께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은 기술 발전도 있었다. 컴퓨터의 등장과 보급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지식이 폭발했고, 사람들은 이제 누구라도 다 어느 정도는 “온라인”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런 상대주의 문화로 인해 약물 중독, 자살, 포르노 중독 같은 사회 문제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도전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교회가 맞은 비극은, 세속 문화가 얼굴을 바꾸면 거기에 따라서 교회도 같이 얼굴을 바꿨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열망에 빠진 교회는 이제 단지 세속적 세상이 내는 소리의 메아리로 전락하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과 “더불어(with it)” 있고 싶은 열망과 이 현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고 싶은 갈망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어떻게 해서라도 극복해야 할 상대성을 가장 열정적으로 도입한 곳이 되고 말았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세와 현실을 다루면서도 변하지 않는 영원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다. 영원과 거룩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유한하고 세속적인 이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교회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한 교회는 언제나 신성함(sanctity)을 추구할지 아니면 신성함을 더럽히는 불경함(profanity)을 추구할지를 놓고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노예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 교회를 필요로 한다. 죽어 가는 죄인의 박수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를 기뻐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필요로 한다. 지금 그런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다.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구속의 사명을 담당하는 교회,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았다. 오 주님, 이런 부르심에 우리의 귀가 닫혀 있다면, 지금 우리를 또 우리가 속한 이 문화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Times, They are a-Changing번역: 무제
시간
문화혁명
도덕적상대주의
1960년대
임마누엘칸트
마틴하이데거
진짜교회
역사
근현대교회
팀 켈러 설교의 일곱 가지 특징
by 전재훈
2020-06-13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팀 켈러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마음은 이야기를 원료로 사용하여 성장한다. 어떤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팀 켈러의 설교는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인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인간은 타락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하여 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이야기의 흐름이다. ‘자유’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가정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었는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넘어 부활을 소망하게 되었고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진짜 선을 행할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긴장을 활용하기팀 켈러는 율법과 은혜를 모두 설교한다. 율법의 빛 아래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밝혀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 두려움에 은혜를 선포하여 안도할 수 있게 만든다. 율법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거룩과 자비,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거룩하심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떠는 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며, 심판자 앞에서 사형 언도를 기다리는 자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선포함으로 감동에 이르게 한다. 팀 켈러는 이런 긴장을 크게 만들려고 인간의 죄악을 깊이 있게 다룬다. 대표적인 방법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우상을 건드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안정, 인정, 통제, 권력의 우상이 존재한다. 이것이 겉으로는 상당히 좋은 것들로 나타난다. 가정, 자녀, 명예, 선함, 건강, 아름다움, 성공 등이다. 하지만 이런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 우상이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목표가 되기 싶다. 인간의 마음에 근원적인 우상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림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결코 피할 길 없는 죄인임을 인식시킨다. 팀 켈러는 또 다른 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선명하고, 특별하고, 탁월하며,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다. 인간이 가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 인간의 역사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성품으로 묘사한다. 그는 복음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고, 인간의 갈망을 극단적으로 완성한 결과물로 설명함으로써 누구나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 복음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의 죄악과 복음의 격차를 하늘과 땅 만큼 크게 벌려 놓음으로써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 주고, 오직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값진 선물임을 깨닫게 만든다. 상황화된 언어 사용하기인간의 죄악을 드러내는 데 종교가 가진 언어들로는 한계가 있다. 전혀 내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기 위해 현대 문화를 파헤치고, 그들의 언어와 예화로 설명한다. 팀 켈러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현대 문화가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자유, 정체성, 행복, 도덕, 인권 등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는 형태를 띤다. 팀 켈러는 설교를 하거나 책을 쓸 때 인간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지향점과 문제점을 설명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팀 켈러의 이야기에 사로잡힌다. 이상향이 가지는 난제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나 인류 역사가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했어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리 좋은 이론과 방법이 나와도 그것을 실행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결국 일을 잘못된 결과로 이끌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지점, 이루고자 해도 이뤄지지 않는 간극 사이에 서서 그 원인을 파헤치고 복음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서 자아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마음을 겨냥하기인간의 마음에는 지정의가 모두 들어있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에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결정된다. 팀 켈러는 이런 인간의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팀 켈러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마음에 소원하던 궁극적인 욕구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장 깊은 안정감,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 내면의 깊은 곳까지 만지는 사랑, 연약함까지 모두 감싸 안는 인정, 깊은 갈망을 이뤄주는 천국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값없이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함으로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한 몸부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로 인해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한다.복음을 뜨겁게 제시하기팀 켈러는 인간의 마음을 구부리는 정도의 따뜻한 복음이 아니라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았던 예수를 소개한다. 그 예수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분이셨는지를 소개하고, 질병과, 귀신과,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위대한 하나님으로 나타낸다. 특히 인간이 저질렀던 수많은 죄악들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을 견뎌 내셨으며, 강한 자 앞에서 담대하고, 죄인들 앞에서 온유하며, 부정과 불의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 주셨음을 알게 한다.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지녔으며 가장 위대한 존재임에도 가장 큰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임을 보여 준다. 주님이 그런 완벽하게 선한 삶을 살다가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한 삶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고 악한 삶의 결과를 주님이 담당하셨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팀 켈러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밖으로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인의 내면이 변화하여 삶으로 드러남),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신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됨) 그 복음을 실체적으로 적용시킨다. 특히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과 악에 맞서는 데 동참하신 분임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절대자이심을 깨닫게 해준다. 팀 켈러가 소개하는 주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서 주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빚어지도록 만든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줌으로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고 더불어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만들어 준다. 이기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의 마음이 겸손함과 담대함으로 바뀔 수 있게 한다. 설득적으로 변증하기코넬리우스 반틸은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유혹 사이에서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판단함으로써 타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결과 자기중심적이며 독립적인 사고 체계를 갖게 된 인간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지식체계를 형성해 가게 된다. 하지만 문화는 자연 속에서 연구하고 관찰한 결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도덕의 당위성, 사랑과 헌신, 인권의 문제, 정체성, 아름다움, 논리적 이성, 자유 등 과학적 결과물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팀 켈러는 인간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한 가치판단 체계를 흔드는 전제주의 변증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전제주의 변증은 그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이 가진 토대가 잘못된 것임을 확인시켜 준 뒤에 복음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주장에는 자신들만의 신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신념의 근거를 들여다보면 비기독교인들은 내세울만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주장하고 설득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전제주의 변증법만이 아니라 증거주의 변증법도 함께 사용함으로써 기독교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들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문화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고 복음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을 이해하고 이루지 못한 꿈을 위로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로 그들을 복음 가운데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삶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 시킨다’는 주제를 그의 설교에서 탁월하게 증명해 내고 있다. 성경과 청중을 사랑하기팀 켈러는 성경 본문을 깊이 연구한다. 단어 하나, 문맥의 흐름, 전체 이야기 속에서 본문이 가지는 위치 등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살펴보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해 내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또한 팀 켈러는 청중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설교자다. 청중의 직업, 갈망, 어려움, 소망 등을 알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런 노력으로 불신자가 회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어려워하는 용어가 무엇인지도 잘 안다. 그는 언제나 불신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어법과 예화로 설교한다. 그가 선택한 본문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결국 청중이 살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적용된다.
목회
설교
팀켈러
반틸
세계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
by Greg Morse
2020-06-12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킹(king)이다. 퀸(queen)이 제아무리 강하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해도 퀸 없이 체스 경기를 이기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킹이 잡히면 경기는 끝난다.그러므로 체스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경우에서든 킹을 보호하기 위해 계산되고 실행된다. 포온(pawn)은 버릴 수 있고 비숍(bishop)이나 나이트(knight),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성(castling) 역시 무너질 수 있다. 킹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퀸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다. 왕관을 쓴 킹은 부하들 뒤에 숨고 성 안에서 보호받는다. 모든 말은 킹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하지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왕이신데, ‘호빗’(The Hobbit)에 등장하는 소인들(dwarfs)의 군주인 토린 오큰실드(Thorin Oakenshield)에 그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다섯 군대의 전투’(Battle of Five Armies) 확장판에서 사악한 오크(orc)들이 소인들과 요정들(elves)의 군대들을 짓밟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어서 토린은 적장인 아조그(Azog the Defiler)를 죽이는 것, 즉 “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계획을 자기 사촌에게 알려주었을 때 그 사촌은 “토린, 절대 안 돼요. ‘당신은 우리 왕입니다’”라고 외친다. 이에 토린은 진정한 왕의 품격으로 단호하게 답한다.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 왕이 앞서 나가신다오늘날 남성들은 그들의 용맹한 왕이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상응하는 남편, 아버지, 성도, 그리고 시민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왕이신가? 그가 처했던 처절한 상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자들이 둘러싸고 그를 배신한 자가 제사장들과 군인들을 몰고 그와 그의 제자들에게로 왔을 때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요 18:4) 그들 앞에 서셨다. 지옥의 진노와 천국의 공의가 예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따랐으나 곧 그로부터 도망칠 이들 앞에 나아가 그들의 죄가 쏜 포탄 앞에 그 자신을 세우셨다. 대적들에게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라고 하신 후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다(요 18:8).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채찍질, 조롱, 십자가, 하나님의 진노, 버려짐, 피 흘림과 수치를 아시면서도 자기 백성 앞에 나아가 서셨다. 이 왕은 자기 백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신 것이다. 전장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군대 뒤에 몸을 숨기고 짖기만 하는 비겁한 개가 아니었다. 그는 가장 끔찍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앞서 홀로 나아가 싸우고 정복하시는 유다의 사자였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요 13:1) 사랑하셨다.영광의 왕께서는 역사의 체스판에서 그의 신하들 뒤에 숨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을 포온으로 쓰지 않으셨고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으셨다. 자기 왕관을 지키려 자기 신하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으셨다. 그의 신부가 그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신부의 십자가를 지셨다. 만일 누군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는 왕이십니다”라고 하거나, 누군가처럼 정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하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 진실된 왕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답하실 것이다. 옛 문이 활짝 열리다십자가를 지지 말라던 사탄의 속삭임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저 다른 이를 위해 죽고자 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셨다. 다른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저 '포온이거나 포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가장 높으신 왕이요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가? 자기 대적들을 살리기 위해 고통의 길을 가기로 ‘그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그리 하셨다. 자신의 신부를 살리기 위해 그 길을 가신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사 53:8) 그가 독사의 머리를 잘라 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쏟아 사망에 이르신 후에(사 53:12) 그의 백성에게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강한 용사시다. 영광의 왕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셔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다.“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우리 왕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신랑은 이런 분이다.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우리 가정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남편 노릇” 같은 말을 할 때, 이런 왕권, 이런 리더십, 이런 머리됨(headship)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남편 노릇의 핵심에 있는 것은 남성적인 용기와 힘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남편 된 우리는 그저 게으른 태도로 지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안락함을 내려놓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퀸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자기 성(城)이 주는 혼자만의 안락함 속에 틀어박혀 아무 문제, 걱정, 상처도 없이 살며 바로 자기들 눈 앞에서 자기 나이트가 목숨을 잃고 비숍이 죽임을 당하며, 나이트와 비숍이 만들어 놓은 성이 무너지고 결국 퀸마저 희생 당하는 걸 보면서도 그들의 충성심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나 던지는 사람은 수치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왕자는 “용감한 여자를 대적들의 손 안으로 들여보내고 우리는 이렇게 안전한 곳에 머물렀다는 것, 이게 우리의 최악의 수치고 슬픔이야”라고 말했다. 냉담함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시작한다면, 소위 머리됨과 복종(submission)에 대한 숱한 논쟁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남자는 자기 일을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머리 역할을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쓰셨던 그 면류관, 즉 가시 면류관을 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설계도에 대한 완벽한 변증이 된다.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서 킹으로 창조된 이들이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가족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심지어 강성 페미니스트에게도 영향력을 미쳐 페미니스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깊은 갈망을 일깨우게 한다. 남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면서도 그리스도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오늘날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남녀평등주의자들(egalitarians)의 세력은 곳곳에서 종결을 고하기 시작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eadship Crowned with Thorns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그리스도의권위
남성
가정
남편
체스
왕
희생
삶을 풀어내는 성경
by 김상일
2020-06-11
“우리가 성경 본문에 접근할 때, 우리는 ‘기존의 이해(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접근한다. 이는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 이미 수립된 신념이 있는 것이다. 이 신념들은 강하고 깊으며, 많은 경우 암묵적이다. 언어화하거나 공식화하기도 힘들며, 심지어는 스스로 인식하기도 어렵다…”(센터처치, 214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각각 1) 성경, 2) 교리와 전통, 3)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매회 다루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첫 번째로 중간 지대에서 성경을 읽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필 것이다. 필자는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를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가 아닌 것은 어떤 모습인지를 먼저 살펴 보겠다.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란,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성경을 읽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좋게 들릴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성경 자체의 용어와 성경이 제시하는 나름의 틀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나은 해석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이 성경에 흡수된 채 거기에만 머무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 심판 같은 개념들, 성경 시대 당시의 문화와 언어, 지리 등에 흠뻑 빠져들어서 능통해지는 것은 성경을 중간 지대에서 읽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간 지대의 성경 읽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에는 현대인의 질문과 고민, 현대 문화가 가지는 독특성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흠뻑 빠져들어가는 그 작업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성경 안에 완전히 푹 빠져들려면 내가 살아가는 문화, 나에게 익숙한 것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나 가치들을 벗어나서 낯선 문화, 익숙하지 않은 것들, 당연하지 않은 전제나 가치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21세기의 첨단 과학과 문화 속에서의 삶을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고대 문화와 그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힘들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의 세계로 흠뻑 빠져드는 일은 모든 성경 해석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경 읽기는 성경이 말하는 것들이 단지 성경 안에서 어떻게 풀리는지에 관한 읽기며,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아니다.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 말하는 성경 읽기는 그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좀 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보겠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주제는 적어도 개신교인들의 성경 읽기에서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 본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개신교 종교 개혁 이래로 항상 끊이지 않았고, 최근 들어서는 소위 옛 관점과 새 관점이라는 두 관점 사이의 대결로 치달으면서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성경을 성경 당시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데 집중하는 서로 상이한 관점 사이의 이런 논쟁의 방향과 흐름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단 이런 논쟁이 성경 본문을 읽어낼 때 주로 보여주는 관심사는 ’지금’이 아니라 ‘그 당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칭의론 논쟁의 핵심은 과연 칭의론이 (옛 관점이 말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죄책을 해결하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 아니면 (새 관점이 말하듯이)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배격과 배타성의 문제, 즉 교회론과 선교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가르침이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일에 이런 논쟁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문적 논쟁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논쟁은 거의 호소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단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바쁜 현대인들이 왜 굳이 바울이라는 몇천 년 전의 인물이 말했던 ‘의로움’을 추구하는 길에 대한 얘기에 귀기울여야 하는가. 더군다나 현대 세상 문화는 의로움에는 별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문화다.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잘못이 아니라는 문화적 내러티브가 대세인 시대에 어느 현대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성경 본문을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어쩌면 의로움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실재가 현대인의 삶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켈러는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의 실례로서 로마서 3장 21-28절을 본문으로 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Justified by Faith)이라는 자신의 설교(2009.3.8)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그는 우선 이미 언급한대로 로마서 본문이 제시하는 '의로움 혹은 의롭게 됨(righteousness = to be justified: 켈러에 의하면 해당 본문에서 두 단어는 사실 같은 개념의 단어임)'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 문화의 오해를 걷어 내고자 한다. 그는 현대인 대다수가 의로움이라는 단어를 단지 도덕적이고 훈계적인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가리키면서, 이 단어는 결과적으로 현대 문화 안에서 거의 아무런 호소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성경 본문에 사용된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사실 알고 보면 현대인들에게 아주 낯선 단어는 아닐 수 있음을 알려준다. 켈러에 의하면, 해당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완벽한 삶의 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 주는 성취나 업적’을 가리킨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주는 성취나 업적이란 무엇인가? 켈러는 영화 '불의 전차'에 등장하는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달리기에 엄청난 열심을 보이는 선수였고, 그의 열심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마침내 그에게 왜 그토록 달리기에 열심을 내는지 묻게 된다. 켈러는 그 질문에 대한 그 선수의 대답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10초 안에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선가—그것이 자신의 직업이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든,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이든—발견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다. 켈러는 이런 자기 존재 가치를 확증 받으려는 시도, 그리고 그런 확증을 가능하게 해주는 업적이나 성취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현대인이—아니 사실 모든 사람은—의로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추가적으로 켈러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로 잘 알려진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이런 의로움의 추구가 보편적인 인생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확증한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번 영화 제작을 마칠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1년 정도 더 벌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불의 전차'에 나오는 달리기 선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 그렇게 하는가? 켈러는 묻는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직업적 성공으로, 자녀 교육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 또 다른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가 존재할 만한 이유를 얻어내고자 하지 않는가. 당장 설교자의 경우를 보자. 왜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설교를 성도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그토록 민감한가? 왜 설교가 좋았다고 하면 우쭐하게 되고, 설교가 별로였다고 하면 그토록 우울해하는가? (이것은 필자 개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어쩌면 설교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나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믿음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라고 켈러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혹은 다른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아서 의로워지고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한낱 과거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믿음 아닌 다른 것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다른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찾는 삶을 살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설교자가 당장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곧바로 이후부터는 설교에 대한 성도들의 칭찬이나 비판에 귀는 기울이되, 거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가 달린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통해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던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곧바로 가르침대로 살 수 있게 될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들을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 파급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는 더이상 성경을 종교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읽기는 결국 교회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성경 읽기는 궁극적으로 인생 읽기가 된다. 중간 지대에서 신학하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성경 읽기는 켈러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우선, 이러한 성경 읽기는 전통과 교리의 가르침을 아무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신,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성경을 읽어 냄으로써 전통과 교리가 말하는 바가 현대적 맥락에서 어떤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이런 성경 읽기는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데 있다고 한다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소그룹을 구성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떻게 그럴까? 성도들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교회 내 활동을 통해서 얻어내려는 노력을 최대한 지양할 수 있게 해주는 소그룹 구조는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을 교회 리더가 던질 수 있다면, 사역 프로그램이나 목회 방법론을 칭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지 고민할 여지가 생긴다. 이런 고민은 목회가 성공했다는 다른 교회에서 소위 잘 먹힌다는 프로그램을 무작정 가져와서 돌리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직 우리 교회의 상황을 알고, 성도들의 필요를 아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사역의 구조와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차원으로 녹여낼 수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단지 듣기만 해서는 변화를 경험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 내의 사역 구조와 방법론이 그러한 칭의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고, 또한 자신들이 섬기는 모든 사역 안에서 그런 가르침이 실제로 구조화되고 체화되어 교회의 삶에 녹아드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면, 성도들이 변화를 경험할 여지는 당연히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이며, 그런 신학함에 맞는,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 ‘센터처치’에서 켈러는 성경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주제들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묶어서 부각시킨다. 그 주제들은 1) 추방과 귀향, 2) 언약과 성취, 그리고 3) 왕국과 도래다(센터처치, 83-88쪽). 이런 각각의 성경 신학적 주제들은 고도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 자체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될 뿐이다. 궁극적으로 성경 읽기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성경을 통해서 삶을 풀어낼 수 있는지여야 한다. 비록 켈러가 이 질문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답을 주기는 하지만, 그가 모든 답을 줄 수는 없다. 결국 독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의 상황과 필요는 오직 그 현장에서 성경을 읽어 내려고 하는 여러분 스스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연재에서는 교리와 전통을 가지고 중간 지대에서 신학함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교회
교회생활
센터처치
팀켈러
중간지대
불의전차
아웃오브아프리카
시드니폴락
성경읽기
처음
이전
136
페이지
열린
137
페이지
138
페이지
139
페이지
14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