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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이 더욱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
by Heather Ferngren Morton
2020-07-05
최근 사태는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팬데믹으로 십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생명을 잃었고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아머드 알버리(Ahmaud Arbery)와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영상은 또 어떤가? 지도자들은 단합이 가장 필요한 지금 국민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가 당면한 위기 상황을 보면서 걱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두려워말라”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언론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제 2의 감염 폭증”을 연일 예견하고 있고, 또한 뉴스에 폭력 장면이 계속 나오는 상황에서 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 4:6)라는 명령이 내가 가야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바로 이럴 때 우리에게는 시편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성경이 다 삶에 도움을 준다(딤후 3:16-17).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상황에 더 도움을 주는 특정한 구절들이 있기 마련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고 잠언 25장 11절은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른 찬송책인 시편은 특히나 더 우리의 두려움을 생생한 기도로 바꾸는 데 적합하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평안을 누리도록 만든다. 고통을 위한 언어시편 중 많은 작품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 속에서 쓰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를 죽이려는 사악한 인간으로부터 도망다닌 적이 없는데, 시편에서 그런 상황은 일상에 속한다. 나는 전쟁터에 나간 적도 없다. 그러나 나도 종종 잠재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그래서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느끼게 하는 위기를 겪기는 했다. 비록 시편이 쓰여진 상황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시편 저자가 느낀 절망은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할 때 시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치 익숙한 전례처럼 구원을 간구하는 시편 저자들의 울부짖음은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불평할 때의 기도시편의 많은 시가 기도로 작성되었다. 시편은 단지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간의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시편은 단지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편은 우리가 불평의 울음을 내뱉을 때에도 여전히 기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반응이 하나님을 향해 수직 방향을 견지하도록 도와준다. 기도는 단지 고통에 빠진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이 아니다. 고통을 누르거나 자기 연민 또는 자기 혐오에 빠지거나 또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화를 쏟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시편은 우리의 모든 감정이 애초에 감정을 창조한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께로 이끄는 이미지시편은 시다. 이미지, 반복 그리고 리듬이라는 특징을 가진 시의 형태는 종종 산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음악과 예술처럼 시는 상상과 감성적 지능 그리고 창의적 표현을 담당하는 우뇌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불안이 압도할 때, 선형적이고 직설적인 산문 형태의 성경 구절은 우리를 위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우리 속에서 또아리를 튼 두려움은 그런 성경 구절이 아예 들리지도 않게 할 지도 모른다. 놀라서 맥박이 뛰고, 손이 떨리고, 숨이 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적인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야 말로 우리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진리로 인도하며 우리를 안정시켜준다. 힘든 때를 만나면 내가 반복해서 읽는 구절이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나는 성문을 통해 쭈욱 이어지는 넓은 조약돌 거리가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도시를 상상한다. 길 주변으로 우거진 풀이 있고 우뚝 솟은 떡갈 나무와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여기는 삶과 휴식과 평화의 장소다. 단순한 환상이나 탈출과는 거리가 먼 이 이미지는 초월적인 현실을 가리킨다. 변치 않는 안전함은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시편 저자는 대조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끔찍한 재난(시46:2–3, 6)을 묘사하고나서 곧 도시의 번영과 평화(시 46:4-5)를 교리적인 진리와 함께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46:1, 11).풍요롭고 푸르른 곳, 치료와 평화가 넘치는 이 하나님의 안전한 도시에 머무는 한, 나 자신과 두려움을 바라보며 떨던 나의 시선은 이제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 하나님은 참으로 나의 피난처시며 요새가 되신다. 시편 저자의 이 시적인 이미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 안에서 안정을 찾도록 한다. 시편을 통해서 나는 문자적이고 직접적인 표현(literal language)이 드러내는 하나님과는 다른, 새로운 측면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음 시편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시 91:4),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시 130:6). 우리 자신을 벗어나서인간의 깊은 감정이 생생한 이미지에 덧입혀져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이게 바로 시편이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울고 있는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어머니처럼, 시편의 시는 우리에게 위로를 속삭이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는 바울의 권고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이끈다.로라 파브리스키(Laura Fabrycky)는 이렇게 말했다. “엄습하는 현실 속에서 시편은 고통의 동반자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교훈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려준다.”지난 몇 주간의 경험을 통해서 두려움이 얼마나 나를 내 자신 속에만 깊이 빠지게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두려움은 내 눈에 온통 나 자신만 보이도록 만든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대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 부서진 세상도 우리 아버지의 세상이며 미래 언젠가는 새롭게 될 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승리자로 앉아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시편은 단지 이런 진리를 가리키고만 있는 게 아니다. 시편은 우리를 실제로 그 진리 속으로 인도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시편이 필요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We Need the Psalms More Than Ever Before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_기도
시편
위기
코로나_바이러스
팬데믹
팀 켈러가 묘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by 김상일
2020-07-04
“안 돼. 네가 ‘내’ 주위로 돌아야 해!” 모두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섯 혹은 열 혹은 백 사람이 무대에 올랐는데 다들 중심에 서려고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는 춤이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무대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 삼위일체의 어떤 위격도 상대에게 자신의 주위를 돌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주위를 돌려고 애쓸 뿐이다. (팀 켈러 ‘왕의 십자가’ 37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지난 시간에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이번 시간에는 팀 켈러가 삶을 풀어내는 교리 특히 그 가운데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다. 현대 문화 안에는 기독교 교리가 추상적인 것, 일상의 삶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 지루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또한 이런 고정 관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팀 켈러는 교리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켈러에게 있어서 교리란,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하심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중요한 주제별로 나누어서 (삼위일체론, 구원론, 종말론, 죄론 등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것이며, 따라서 켈러에게 교리는 성경과 분리된 채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신의 춤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삼위 하나님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다룰 때에도 그렇다. 켈러는 자신의 마가복음 강해서인 '왕의 십자가'(King’s Cross)에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하는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성부), 비둘기 같은 성령, 그리고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삼위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살핀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9-11) 켈러는 실제 유대교의 경전을 살펴보면서 왜 마가가 ‘비둘기’라는 비유를 통해서 성령을 묘사했는지, 거기에 숨겨진 더 큰 의미는 무엇인지까지 파고 들어간다.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마가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유대교의 경전 중에서 성령을 비둘기에 비유한 경전은 마가 시대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Targums) 밖에 없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로 운행하셨다. 여기서 운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훨훨 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령이 수면 위를 훨훨 날아다니셨다. 탈굼을 쓴 랍비들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세상의 창조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세 주체가 참여했다. 이 세 주체는 예수님의 세례식에도 참여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아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성령은 비둘기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태초의 창조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가는 처음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였던 것처럼, 진정한 왕의 오심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왕의 십자가’ 33쪽).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비로운 것이며 인지적으로 도전이 된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신이 조화롭게 일한다고 생각하는 삼신론이 아니다. 또한 한 분의 하나님이 때에 따라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일위론도 아니다. 삼위일체 신학이 가르치는 것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데, 서로 알고 서로 사랑하는 삼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이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면서 셋이시다(‘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워낙 인지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운 교리이기에, 또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개념적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켈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개념 정리를 우선 명확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 분도 아니다.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 만약 켈러가 여기서 멈췄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어렵다, 아니 교리는 다 어렵다’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켈러는 곧바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서, 과연 삼위 하나님이 서로 맺고 계신 관계란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읽어내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오시자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의 말씀으로 입혀 주시고 덮어 주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와 동시에 성령은 그를 능력으로 덮어 주신다.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온 과정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왕의 십자가’ 34쪽)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게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풀어내는 지혜가 되는 걸까? 그에 대한 실마리는 하나님께서 서로 맺고 계신 그런 관계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불러들이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자신이 깊은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묵상, 특히 루이스가 사용하는 삼위일체가 함께 누리는 “춤”이라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런 지혜를 더욱 풍성하게 드러낸다. 켈러의 말을 들어보자.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너무도 존경해서 무엇이든 해 주고 싶은 대상이 당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쁘기 한량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바로 이런 기쁨을 누려오셨다 …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중요한가? 이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세 위격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야 한다 … (기쁨과 능력, 평안,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 왜 루이스는 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자기중심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다. 전혀 역동적이지 않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고 만물이 자신의 주위를 돌기 원한다. 그가 남을 돕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일 뿐이다. 심지어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을 때만 베풀고, 베푸는 목적도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뿌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 (‘왕의 십자가’ 35-36쪽).삼위일체는 어떠한가?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일단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왕의 십자가’ 37쪽)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돈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산다. 우리의 하나님이 권력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는데 모든 것을 건다. 우리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그 만큼, 우리의 삶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서 벗어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창세기는 말한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그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항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 하나님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없이) 닮아가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면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루이스의 표현을 빌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추시는 춤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관계를 그려내시는지를 삶의 지혜로 깨달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그러면 춤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너는 춤을 위해 창조된 존재니라. 나를 믿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가끔 기도하면서 종교인의 외양만 갖추어서는 부족하다. 힘들 때 내 말에서 약간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춤의 의미다.”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막연히 믿기만 하는가? 당신은 춤을 추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주위를 돌아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왕의 십자가’ 38-39쪽).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켈러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만큼이나 우리의 이웃 또한 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과 함께 춤을 춘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맺음에서 크나큰 시사점을 가진다. 이것은 교회 내 사역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시사점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되어 있다. 사역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통한 사람들과의 관계 맺음이기에 그렇다.삼위 하나님과 함께 춤추며 배우는 관계적 진실성 켈러는 자신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역동성에 가장 필수적인 것 중 하나를 ‘관계적 진실성’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관계적 진실성,’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관계적 진실성이란, 1)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같은 점이 있음을 알게 해주고(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은 음식을 먹고 그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언어와 휴식과 문화생활과 공공 활동에 있어서 이웃과 같아야 한다, 588쪽), 2) 이웃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해주며(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관대함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생활수준보다 낮게 살아가는 법도 고려해야 한다, 589쪽), 3) 그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웃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솔직하게 이웃에게 드러내면서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관계적 진실성을 갖고 이웃에게, 특히 신앙이 없는 이웃에게 다가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켈러는 특히 관계적 진실성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두 가지 경우에서 찾는다. 하나는 그가 조화 접근법(the blend-in approach)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거품 접근법(the Christian bubble approach)이다. 조화 접근법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의향을 숨긴 채 관계적으로만 가까워지려는 것”(‘센터 처치’ 592쪽)을 가리키며, 기독교 거품 접근법이란, “비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 것”(‘592쪽)을 가리킨다. 왜 그리스도인임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면 믿지 않는 친구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왜 관계를 피상적으로만 유지하는가? 관계를 깊이 맺게 될 때 따라오게 될 희생을 감당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켈러는 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 양쪽 모두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관계 맺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신자들 사이에 왜 관계적 진실성이 그렇게도 적은가? 그 답은 주로—전부는 아니지만—동기에 있다. 조화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용기가 부족하다. 그들은 영향력을 잃는 것, 무대 뒤에서 고초를 겪거나, 또는 직업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걱정한다. 다른 한편으로, 거품 모드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센터 처치’ 595쪽).조화 접근법과 기독교 거품 접근법은 모두 자기중심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들이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 맺을 때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춤추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신 관계의 방식을 따라서 그 관계 안에 충분히 침잠되어 살아가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웃들과 맺어가는 관계 또한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동기를 통해서 가꿔간다는 말이 된다.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돌아보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 우리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갈수록,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될수록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갖고 사람들과 관계 맺어왔던 이전의 방식을 포기하게 된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으시듯이,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 맺기 시작할 때 그 중심 동기는 단지 도덕적으로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 중심 동기에는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찬양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잃고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내게는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A학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모차르트 음악을 들었다. 취직이 잘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됐다. 다시 말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돈을 주고서라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모차르트 음악이 내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듣는다. 내게 모차르트 음악은 더 이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섬기고 싶어진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섬기겠다”고 말한다면,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통해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그를 이용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세 위격의 본질은 ‘서로에게 자신을 내주는 사랑’이다(‘왕의 십자가’ 34-37쪽).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와 맺어주시는 관계를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바탕에 둔다면, 우리의 사역 프로그램과 목회 방법론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지나치게 열심을 쏟지 않게 될 것이다. 대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될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시작된 교리와 전통 읽기는 이렇게 삶으로 풀리며, 사역의 기술과 목회 방법론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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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노래한 베일에 싸인 종
by Davy Ellison
2020-07-03
영국에는 A Question of Sport라는 오래된 TV 퀴즈쇼가 있다. “Mystery Guest”라고 불리는 단계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참가팀들이 30초 길이의 영상을 보고 그 영상에 나온 유명한 운동 선수가 누구인지 맞춰야 한다. 하지만 선수 본인은 변장을 한 상태로 등장한다. 가령 카우보이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써서 눈을 다 가리고, 목도리로는 입과 코를 가리는 식이다. 베일에 싸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것이 참가팀들에게 주어진 임무다. 베일에 싸인 이가 이사야에도 등장한다. 이사야 40–55장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처음 서른 아홉 장에서 약속하신 소망, 은혜, 그리고 회복을 “여호와의 종”이라 일컫는 베일에 싸인 그를 통해 성취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소위 종의 노래(Servant Songs)라 불리는 네 본문을 통해 이사야는 그 종이 어떤 이인지 보여준다. 그 노래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그 종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첫 번째 노래: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시다(사 42:1–9)이 첫 번째 노래 직전에, 이사야는 우상을 그 종과 대조시키며 그의 청자와 독자에게 우상은 어리석은 것임을 경고한다(사 41:21–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41:29)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중략] 보라” (42:1)“바람”(사 41:29)에 지나지 않는 우상들과 달리 그 종은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자신의 영을 그 종에게 부어주셨다(사 42:1). 그 종이 세울 정의(1, 3, 4절)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숱한 왕들이 못한 일, 즉 정의로 통치하는 일을 해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실 것이기에 이 일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6–9절). 이사야 1–39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들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 종이 정의를 세워가며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두 번째 노래: 그는 선지자다(사 49:1–7)두 번째 노래에서 그 종은 자신이 이스라엘(5절)과 열방에게(6절)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라 말한다. 이 노래의 서두인 1절에 나온 “들으라”는 이 노래의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동일한 말로 지속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 부르셨다(사 48:1, 12, 16). 그 종은 똑같은 말을 사용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과 화살의 이미지(2절)는 그 종이 선지자로서 선포하는 말에 정확히 꿰뚫는 힘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여 그의 선지자적 능력을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과녁을 정확히 맞출 것이다. 이에 더해 그 종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받은 부르심(1, 5절)은 그가 행할 과업이 지닌 선지자적 성격을 강조한다(비교: 렘 1:4–10). 이러한 것들이 그 종이 누구인지를 더 자세히 보여준다. 그는 한 명의 선지자다. 그러므로 그 종이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결국 그 종마저 거부할 것이다(7절). 이 사실은 다음 노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세 번째 노래: 그는 순종하셨다(사 50:1–11)세 번째 노래의 주제는 그 종의 순종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이사야 1–12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후에도 이사야는 계속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상기시킨다(사 42:18–20; 48:18–19).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순종을 보이신 그 종이 세 번째 노래를 통해 무대에 등장한다(4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셨고(4절), 그의 귀를 깨우쳐주셨고(4절), 불순종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5절)는 사실이 그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 종의 완전한 순종(5절)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거부하게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했던(49:7) 두 번째 노래로부터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폭력을 당하는(50:6) 세 번째 노래에 이르기까지 긴장이 상승하는 것이 보이는가? 하지만 그 종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도우심에 의지해 이를 견뎌낼 것이다(7절). 그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했던 것과 해내지 못했던 것을 다 이루고 해낼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완전하게 순종할 것이다.네 번째 노래: 그는 우리의 대속제물이시다(사 52:13–53:12)51–52장은 흥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소망, 기뻐함, 즐거워함, 그리고 감사함을 주신다(51:3). 그의 구원은 영원히 있을 것이고(51:6, 8, 11) 시온은 다시금 아름다워지고 강대해질 것이다(52:1–10). 네 번째 노래는 바로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보여준다. 네 번째 노래를 통해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구원은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을 많이 들어봤지만 이 시가 사실 매우 정교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이 노래는 다섯 연으로 되어 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각 연은 세 절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가운데 연(사 53:4–6)이다. 이 정점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그 종이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우리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고난을 당하실 것이다. 그 종이 당하는 고난은 이 중간 연의 앞과 뒤에 나오는 연들에 의해 강조된다(53:1–3, 7–9). 이 두 연에서 보는 바 그가 홀로 이 고난을 감당하시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종의 무죄 판결(vindication)을 암시하는 이 노래의 서두(52:13–15)와 결론(53:10–12)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이 시는 피라미드 모양처럼 재배열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그 종의 대속적인 고난을 통해서 올 것이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다른 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일에 싸인 그는 누구인가 이사야를 주의하여 읽었다면 이스라엘 자신이 “종”(사 41:8–9)이라 불린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종이 누구인가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종”이라 불리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그’ 종은 바로 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고, 무엇보다 신약 저자들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종은 누구일까? 첫 번째 노래는 마태복음에 인용되었다(마 12:18–21). 마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이 첫 번째 노래의 성취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의 사역은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노래는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예표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대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예: 마 5–7). 그 종이 전하는 말을 칼에 비유한 구체적인 심상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에게 분명히 적용된다(계 1:16; 19:15, 21). 순종이라는 넓은 주제에 대한 세 번째 노래는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다(비교: 마 5:17). 수난에 대해 말하는 이사야 50장 6절은 예수께서 감당하실 고난을 나타낸다. 네 번째 노래는 신약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본문도 이것이다(행 8:26–40). 사도 베드로 역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대속적 희생에 대해 쓸 때 이 네 번째 노래를 암시했다(벧전 2:22–25).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 네 번째 노래를 읽다가 빌립에게 묻는다.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행 8:34). 빌립의 분명한 대답은 이사야가 말하는 이는 타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이사야 자신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였다(벧전 1:10–12). 이사야서 종의 노래에 나온 베일에 싸인 이. 신약은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o’s the Mystery Guest in Isaiah’s Servant Song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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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언제 처음 생겼을까?
by 정요석
2020-07-02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요양원에 가서 설교를 한다. 노인들을 돌보는 요양원인지라 외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발열체크와 손소독을 하고, 종사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근무한다. 가족의 면회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6개월 정도 방역을 철저히 하니, 어르신들이 코로나19만이 아니라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까지 예방되었다. 그간 어르신들이 독감 등에 걸린 것이 외부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유입된 결과였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친분이 있는 의사들이 요사이 환자들 수가 많이 줄어서 의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들이 생활방역을 실천하며 감기와 같은 잔병에 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국민들의 면대면 접촉이 활발히 이루어질 때 병원 운영도 정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국민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외부의 바이러스가 본인과 거처로 유입되지 않게 생활방역을 실천하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언제 처음 발생했을까?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있고, 중국 당국은 이에 맞서 우한을 방문한 외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방역당국은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어느 경로를 통해 감염되었는지 파악하여 더 이상 감염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해외 입국자들도 모두 확진 여부를 검사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국내에 바이러스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2012년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02년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은 모두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들인데, 지구상의 최초의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서 처음 생겼을까?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을까? 아니면 우주 어디에선가 이 지구로 유입되었을까?나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땅이 저주받는 벌을 받았을 때 바이러스도 생겨났거나 아니면 최소한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밭의 채소를 먹고 사는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니 그때부터 사람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땅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의미다. 사람의 몸도 100 퍼센트의 소화와 연소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변과 대변과 노폐물과 땀 등이 발생하고, 그것의 축적으로 피로와 병과 노화가 발생하고 끝내 죽는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과 하는 모든 일에는 100 퍼센트 완성과 만족이 존재하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발생한다.바이러스는 계속 같은 유형을 유지하지 않고 변형된다. 전염력과 치사율이 더 높은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고, 더 낮게 변형될 수도 있다. 도대체 바이러스는 어떠한 체계로 이러한 변형 형태를 결정할까? 그간 지구에 등장하여 몇 년씩 강력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생명을 앗아간 바이러스들은 그 활동 기간과 종식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코로나19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또 코로나19의 종식 이후에 더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낳는다.나는 코로나19가 몇 년 내에 극복되리라 생각한다. 현재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도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이 몇 년의 시간 경과 속에서 해결되었듯, 코로나19도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몇 년 후 더 강력한 전염력과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유형의 자연 재해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공짜로 주신다. 공기, 햇빛, 중력, 물, 부모의 사랑, 인식 능력 등은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시며 사람들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밝히 보이지 않고 행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필수불가결한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권리로 안다. 호의가 세 번 반복되면 권리로 안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자연의 선물에 더욱 적용된다.하늘이 닫혀 비가 없는 것, 기근과 전염병의 발생,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와 메뚜기와 황충이 나는 것,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는 것,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는 것(왕상 8:37), 이 모든 것들이 땅의 저주로 말미암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어, 사람들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불가결한 것들을 계속하여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권리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자극적인 욕망과 뒤틀린 정욕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이것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두신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잠시나마 깨닫고 자신들의 악행을 주춤하도록 잠시 은혜를 거두신다.하나님은 코로나19 이후에 지진이나 기근이나 전쟁이나 가뭄이나 황충 등으로 인류를 경고하실 것이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성을 주춤케 하신 하나님은 그간 허락하신 은혜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둘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누구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큰 일이고 선물임을 더욱 깨달아,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질 것이 아니라(요일 2:16),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코로나19로 인한 불편함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충분히 이겨낼 수 있고, 그간 감사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감사하며 경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발열체크와 손소독과 마스크 착용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백신이 개발되면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체온계와 소독제와 마스크 등의 생산 그리고 백신 개발 등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 대신에 과도한 경쟁에 매몰된다면 비록 코로나19 종식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더 강력한 자연재해나 세계전쟁을 겪을지 모른다. 인류는 단지 외부의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않도록 신경 쓸 것만 아니라, 내부의 죄가 외부로 크게 발현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한다. 이것이 열왕기상 8장 37절에 나오는 재앙들을 물리치는 지름길이다. 물론 근본적 처방은 자신들의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즐거워하고 널리 전하는 것이다. 지금도 태양의 햇살보다 더 풍성하게 끊임없이 유입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없다면 사람들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몇 번이나 멸망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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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리 시대, 어떻게 설득할까?
by Brett McCracken
2020-07-01
현재 목격하고 있는 인식론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진리가 이성의 문제에서 감정의 문제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다수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차원의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대신 개인적 차원에서 느낌으로 발견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가 내게 진리로 느껴지는가의 여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의 진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진리”로 나의 진리를 위협하지 않는 한, 나의 진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진리에 관한 다른 사람의 이해가 내 생각과 충돌하는 경우, 과거에는 서로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토론을 나눴다. 그러다보면 다른 생각이 내 생각에 도전을 주고 또 내 사고를 전환시키기도 했다(물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는 사라졌다. 이제는 진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면, 아예 침묵한다. 또는 아예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고집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잘하는 것처럼, 트위터를 통해서 상대방을 향한 유치한 욕을 퍼붓는다.SNS에서 조금만 시간을 보내보면 이런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들자면, 해리 포터의 작가인 J. K. 롤링(Rowling)이 최근 트위터를 통해 생물학적 성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온건한 주장을 내놓았다. “성 개념을 지워버리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에 대한 의미있는 토론을 할 기회 자체를 앗아가는 일이다. 미움으로 진리를 말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뤄졌고, 내가 여자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나는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군중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롤링이 이해한 진리를 싫어했고, 그녀가 트랜스젠더를 증오(transphobic)한다고 주장했다. 롤링의 말 속에 담긴 논리에 관심을 갖는 대신, 비난자들은 롤링을 악마로 취급했다. 고작해야 다음과 같은 답글을 반복해서 달았을 뿐이었다. “트랜스젠더 여자도 같은 여자다.” 마치 같은 말을 여러 번 쓰면 그게 사실이 되고 자동적으로 롤링의 논리가 반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트위터에서든 아니면 뉴욕타임즈 뉴스룸이든, 우리는 점점 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와 관련한 논쟁을 거부하거나 그런 주제 자체를 무시하려고 한다. 이런 변화는 탈진리 시대를 살아가는(post-truth trajectory) 우리에게 실로 대단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진리를 주장하고 또 진리를 보존해야 하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보다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의 취약함이런 시대가 도래한 데는 복음주의자들도 나름 한 몫을 담당했다. 다른 목소리는 아예 내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위협적인” 생각과 대면하는 것을 무조건 피하기만 하는 태도는 단지 세속적인 진보주의자들만이 아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가 가져다준 “세상적인(worldly)” 사고에 관한 근본적인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복음주의 부모와 목사 그리고 단체들은 그 사고와 대면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그들이 책임지는 사람들이 잠재적 해가 되는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까하며 보호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건 몰라도 복음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에게 쏟아지는 반지성적이라는 비난이 비록 100 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그것은 애초에 예정된 결과기도 하다. 한편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는 믿음을 떠받치고 있는 신학 사상을 강조하는 대신 믿음이 가진 치유적 측면과 감정적 체험을 강조했다. 취약한 교리 학습과 어려운 교리에 대한 회피는 자연스럽게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종교적 정체성이 감정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는 당연히 더 취약해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려운 질문을 만난 기독교인은 당연히 믿음이 가진 지적 측면을 가지고 씨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는 기독교인이 발을 디디고 있던, 카드로 만든 집과 같이 허약한 믿음의 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deconversion accounts)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너무도 많이 목격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인 대화 그리고 믿음의 내용에 관해 조리있게 설명하는 능력이라는 면에서 전혀 훈련되지 않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이 비판하는 “지적 교만에 빠진 세속적인 사람들(secular snowflakes)” 만큼이나 취약한 존재가 되었다.“안전주의(safetyism)”가 주는 매력과 취약성에 대한 가정은 세속적인 좌파와 종교적인 우파 모두를 유혹한다. 우리는 다 공개된 공간(village green)에서 종종 혼란을 주고 진을 다 빼는 이교성을 함축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거품과 메아리로 가득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더 선호한다. 게다가 온라인에서 매일 만나는 나쁜 뉴스와 분노로도 충분한 상황에, 굳이 사람을 더 힘들게 자극하는 새로운 주제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특히나 이미 트라우마에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수 인종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도록 꺼놓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길 원한다면, 그리고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일한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드럽게 진리를 항변하는 세 가지 방법 진리를 쫓는 길이 결코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수호하는 데 굳이 불필요한 어려움을 유발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는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온라인 멍청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생각이 도전 받는 것을 결코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 대단히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두 부류 사이에 중간 지대가 있다. 기독교인이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추구할 때, 담대하면서도 동시에 친절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말투(tone)에 신경써라아무리 조심해서 전달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진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이 말하는 성 윤리(sex ethic)를 아무리 잘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미움과 편협함 그리고 위협이 되는 진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투로 전달하는가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힘들고 어려운 주제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고 나아가서 이성적인 대화로도 이끌어 낼 수 있다. 공격적인 전달은 필연적으로 강한 반발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공감적인 이해심과 친절함 그리고 존경심으로 무장하고, 또 논리적이면서도 사랑으로 전달하는 경우라면(벧전 3:15), 어려운 주제까지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대화를 이렇게 시작했다고 한번 생각해보라.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 4:18). 이런 시작은 사마리아 여인을 단숨에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었을 것이고, 두 사람의 대화는 아마도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어려운 주제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었다고 해서 그가 항상 대화의 시작을 어렵고 딱딱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비난이 아닌 초청하는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말투는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2.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라오늘날 토론에서 아무리 진리를 선포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단지 선포만 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에 배울 마음이 없는, 가르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선생일 뿐이다. 자칭 “전문가”가 떠들어대는 시끄럽고 오만하고 자신감 있는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는 겸손과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의 가르침이 단지 말을 아예 하지 말거나 또는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 주제가 아무리 듣기 힘들더라도 듣는 데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단순히 우리가 가진 패러다임에 도전한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주장을 무시하거나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그런 세상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기독교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압두 머레이(Abdu Murray)는 이렇게 썼다. “탈진리 시대를 맞아서, 증거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나 의견과 일치하면 모든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증거는 아예 용납될 수 없거나 불쾌한 것으로 간주되며, 그런 증거는 이제 얼마든지 건전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토론까지도 무력화시켜 버린다.” 나름 건전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독교의 진리와 다르다는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에 직면한 기독교인의 경우, 비록 그 주제가 우리를 자극하고 감정적인 스트레스까지 유발하더라도 대화를 피하거나 또는 무조건 공격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들어야 하고 토론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가진 의미 중 하나를 실천하는 길이다(눅 10:27).3. 상대방의 모든 주장에 다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부분에 반대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비난에 대응하는 오늘날의 방식을 보면 하나 독특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세 가지를 다 조금씩 합쳐놓은 형태다. (1) 누군가에 대해 절대적 최악으로 생각하기, (2) 밉다는 딱지를 붙이기, (3) 나와 어떤 부분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와는 결코 공통 분모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하기. 그러나 우리의 취약성이 가져다준 이런 증상은 사회에 만연한 자기 방어와 불신의 기운을 증폭시킬 뿐이다. 어떤 글을 읽었을 때 내용 전체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일정 부분에는 동의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의견을 듣고도 그 사람의 주장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몇 가지 의견에는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다. 어떤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일부분에서 서로 동의하는 누군가와 얼마든지 손을 잡고 협력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개혁주의 기독교인이라면 일반 은총의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 완전히 틀린 생각을 하는 누군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부분이 가진 중대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동의하는 부분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부분에서 나와 같지 않으면 완전히 적이라는 식의 당파적 극단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부분에서 보다 더 상대를 향한 여지를 열어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언론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입법과 같은 주제에서 서로 동의할 수 있다. 설득을 다시 한번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자사회는 지금 무서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설득의 가능성을 거의 다 포기한 상태다. 즉,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누군가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다 지성의 힘을 모아 너와 내가 전혀 다른 진리가 아닌, 진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설득의 힘을 포기하게 되면 남는 것은 단지 권력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는 또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초월적인 진리를 포기할 때,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정치 뿐이다. 이 세상은 이제 누가 또는 어떤 당이 리더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만의 진리에 충실해서 살도록 강요받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실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능적 무신론자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백기를 들었으며, 그 대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쥐기 위해 경주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오직 진리를 알 때만 만날 수 있는 참 자유는 이런 식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요 8:32). 이것은 허무하고 위험하다. 이런 접근법은 단지 문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미국을(다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부드러운 설득의 과업이 다시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임시적인 그 어떤 정치적 이득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 그 자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it the Echo Chamber. It’s Time to Persua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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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와 초기 한국 개신교
by 옥성득
2020-06-30
로마서 16장에 등장하는 여집사 뵈뵈(Phoebe)는 ‘첫 방문 간호사’였다. 초대교회는 여집사들의 간호 활동으로 흑사병이 유행할 때 환자들을 돌봄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로 각인되어 성장했다. 중세에는 수도원의 수녀들이 병자들을 돌보며 간호사 역할을 했다.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의 종교 개혁자들은 수녀원을 폐쇄하고 수녀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어 주부가 되도록 했다. 그 결과 독일 등 개신교 지역에서는 숙련된 간호 수녀들이 사라지면서 간호 체계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고 전염병이나 질병을 제대로 대처하는 병원이 부족해졌다. 칼뱅의 제네바에서 괴질이 나돌자 경험이 없는 주부들이 간호하면서 병은 더 유행했고, 상당수 여성들이 전염병을 퍼뜨리는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첫 근대적 간호사양성학교는 1836년 독일 카이저스베르트(Kaiserswerth)에서 프리드너 목사 부부가 설립한 여집사(Deaconesses) 간호단 학교였다. 이 카이저스베르트 간호사양성소는 실용 간호학과 조직적인 간호 훈련을 시작했으며, 1850-52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이곳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영국 성공회와 연관하여 간호가 발전된 측면도 강했으며, 해외 의료 선교에 수녀들이 참여했다. 영국에서는 고참 간호사를 ‘sister’라고 불렀는데 수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내한한 첫 정식 간호사는 1891년에 내한한 영국 성공회 소속 성베드로수녀회의 수녀(sister)인 히스코트(Gertrude Heathcote)였다. 1904년까지 한국에서 최고의 간호는 정동의 성마태병원과 성베드로병원, 인천의 누가병원에 있던 성공회 독신 수녀 시스터 간호사들이 제공했다.한국에서 근대 간호는 개신교 선교와 함께 시작되었고, 간호사 양성도 감리회와 장로회의 선교 병원을 통해 시작되었다. 1885년 서울에 첫 근대병원인 제중원이 개설되었을 때, 훈련된 간호사가 없어서 알렌 의사는 조선 관청에서 ‘약방 기생’으로 불리기도 했던 관기 중에서 간호를 맡았던 기생들을 고용하였으나, 그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자 해고했다. 1886년 제중원의 첫 ‘여의사’로 내한한 엘러즈(Annie Ellers)는 보스턴시립병원 간호사양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했다가 한국에 왔기 때문에 의사로 불렸다. 간호사였으나 명성황후의 시의 등 의사로 활동했다. 그녀가 벙커와 결혼하고 병원을 떠나자, 1895년 4월 제중원 첫 간호사로 노르웨이 출신 야콥슨(Anna Jacobson)이 내한하여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다가 1897년 1월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녀 후임으로 1897년 10월에 제중원의 두 번째 간호사로 내한한 쉴즈(Esther Shields)는 1906년 6월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를 설립하고 1935년에 은퇴할 때까지 봉사했다.미국 북감리회의 해외여성선교회는 한국 선교를 위해 1887년 첫 여의사 하워드(Meta Howard)를 파송했다. 그녀는 1888년 한국의 첫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을 설립했다. 그녀를 이어서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Cutler), 해리스(Lillian Harris) 여의사가 내한했다. 병원의 첫 간호사는 1903년에 내한한 캐나다 출신의 에드먼즈(Margaret Edmunds)였다. 그녀는 1903년 12월 보구여관 안에 한국의 첫 간호원양성학교를 설립하고 1906년 1월에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에게 간호사 모자를 씌어주었다. 마침내 1908년 11월 5일 제1회 졸업식에서 김마르다와 이그레이스를 한국인 최초의 졸업 간호사로 배출했다. ▲ 1906년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 첫 예모식, 김엘렌, 이그레이스, 에드먼즈(중앙), 김마르다, 정와티 ⓒ옥성득 선교사 간호사들은 1908년 3월 20일 ‘대한졸업간호원회’를 조직했고, 보구여관 간호원양성학교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의 간호사들은 1910년 6월 10일 ‘간호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이 발전하여 1923년 조선간호부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07년 군대 해산 때 부상을 입은 대한제국 병사들을 나이팅게일 외과 간호학으로 돌보았다. 1919년에도 삼일 운동으로 다친 수많은 부상자들을 간호했으며, 그 비참한 모습을 본 일부 간호사들은 시위에 참여하여 형무소에서 몇 달을 보내며, 기도하고 찬송했다. 이후 간호사 중에는 애국부인회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중국과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몰래 돕는 자들이 많았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6년 서울에 대한의원이 일본인 의사와 간호사들에 의해 운영되면서 일본 간호사와 일본 간호학이 한국에 진출했다. 총독부의원과 지방의 자혜의원에 근무한 간호사는 거의 일본인이었다. 의사가 일본인이었고 환자도 일본인과 일본인 관리가 우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초반까지 도립 자혜병원에서 한국인 간호사를 찾기는 어려웠다. 1905년 이후 콜레라와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경찰이 한국인의 이동을 통제하고 방역과 격리를 담당했다. 한국인은 식민지의 피지배자요 병자로서 시찰 대상이었으며, 그 몸은 평시에는 생산의 도구요, 전시에는 총알받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병에 걸리면 정부 병원 대신 한국인 의생(한의사)이나 개인 병원을 찾았고, 중병이면 대개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주요 도시의 선교 병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선교 병원은 세브란스병원을 제외하면 일제의 병원들에 비해 시설이 열악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 간호사들이 있었다. 한국인 기독교인 간호사들은 일제 36년 간 한국인을 돌보고 위로하며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간호사는 저임금 속에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에 1920년대에는 많은 파업을 일으키며 병원 측과 협상을 하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최근 코로나19 유행으로 간호사들의 헌신적 수고가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그들을 ‘백의의 천사’로만 이미지 메이킹하면 곤란하다. ‘영웅’이 아닌 전문 직업인이자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다. 정당한 임금과 보수, 차별 없는 근무 조건, 복지 혜택 등이 보장될 때, 환자들은 더 나은 간호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일선 의료진, 특히 간호사들이 지나친 노동으로 혹사당하기 때문에 이직률이 높다. 최근 대한간호협회는 소록도에서 40년 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본 오스트리아인 두 간호사 스퇴거(Marianne Stoger)와 피사렉(Margaritha Pissarek)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맨손으로 ‘아픈 자를 돌본’ 그들에게 노벨상이 아니라도 하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 간호는 초기에는 영국, 미국, 노르웨이, 캐나다 등 여러 나라의 외국 간호사들에 의해 발전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북미와 유럽의 여러 나라 간호사들이 봉사했다.이제 K-간호는 한국인만 아니라 세계인의 고통을 줄이며 생명을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도로서 기독교인은 인류는 물론 지구 생태계를 치유하고 간호하는 일을 맡은 집사요 청지기들이다. 초기 개신교가 한국인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 헌신했듯이, 팬데믹 시대에 교회는 면역력이 강한 교인,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겨레와 세계인을 구호하는 K-Church-nursing 모델을 만들어 나갈 때다. 코로나 이후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요 매일의 교회며, 예배당만의 교회가 아니요 일터와 병상에서의 디아코니아 교회다. 맘몬을 섬기는 의료 제국을 위한 간호가 아니라,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선한 사역을 감당하는 간호사들을 양성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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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시작하는 인종차별 가면 벗기기
by Gene Joo
2020-06-29
마스크를 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나는 이 행진의 목적이 인종차별이라는 마스크를 벗기기 위한 것(unmask)이라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꼈다.흔히들 흑인 민권 운동(civil-rights movement,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 흑인이 주도하여 시민권 신청과 인종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을 인종적 불의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하나의 변곡점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이 인종차별이 정복되기는 커녕, 그동안 인종간에 집단적 의식의 그림자 뒤로 후퇴한 채 오히려 정의와 평등에 대항해 끝없는 게릴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요즘 들어 인종차별이 끼치는 독은 그 어느 때보다 유해하고 교활한데, 그것은 훨씬 더 교묘한 형태로 그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COVID-19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다름 아닌 무증상자로 인한 감염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몇 달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그럴듯한 거부 이유로 포장돼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 정체를 규명하고 제거하는 게 매우 어렵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가 극에 달했던 안티벨럼 시대(Antebellum South, 1781–1860)에 동조하거나 짐 크로우 법(Jim Crow,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인종차별을 강제했던 미국 남부의 법)을 옹호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인정하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일까? 오늘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인종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정할까? COVID-19처럼 인종차별도 제대로 처리되고 추적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규명되고 또 진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정의롭지 않은 시스템에 의존해서 인종차별자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결코 시스템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백과 더불어 회개가 따라야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지난 주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가면을 벗기고 나로 하여금 내 평생 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또아리 틀고 있던, 거기에 있는지 나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죄와 쓴 뿌리를 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구호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이다. 최근의 경험과 과거 여러 사건들을 통해 국가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흑인의 생명이 종종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과연 이런 흑인의 생명이 나한테도 정말로 중요한가? 이론적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그렇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나 다 내재적인 가치, 고귀함 그리고 존엄함을 갖는다. 그러나 정말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이 구호를 최근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내가 겪었던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함께 나눠보도록 하자. 가면 아래서나는 대부분의 이웃이 동양인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웃 중에는 푸에르토리코인, 쿠바인 그리고 도미니카인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의 피부는 검었다. 어디를 가나 나는 “치노(Chino, 중국인을 부르는 스페인어)”라는 말을 들었다. 네 살 때 나는 치노가 내 이름인 “진(gene)”을 뜻하는 스페인어인줄 알았고, 어머니한테 어떻게 저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을 아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 호칭이 사람들이 나를 놀리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었고, 이 기억은 아직까지도 수치심과 분노와 관련한 나의 가장 오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고, 나는 급기야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어머니는 앞으로 절대로 남미 아이들 또는 흑인 아이들과 놀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우리집은 그 즉시 주민의 40 퍼센트가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열한 살 때 LA를 휩쓸었던 폭동 뉴스를 부모님과 같이 보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코리아타운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 사람의 가게가 타겟이 되어 약탈당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드니 킹(Rodney King)을 때린 건 백인 경찰인데 왜 흑인들이 한국 가게를 공격하는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왜냐하면 흑인은 나쁜 인간들이거든.” 어떤 뉴스는 무기로 무장하는 어느 한국 가게 주인의 모습을 방송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뉴욕 콜럼버스 서클에서 옷가게를 했는데, 나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아빠, 만약에 뉴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아빠도 총을 사서 흑인들을 쏠 거에요?” 아버지의 대답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하지.” 아버지의 그 대답은 나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나는 그날 밤, 우리 부모님을 나쁜 인간들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했다.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나는 말 그대로 흑인 문화 속에 풍덩 빠져서 살았다. 나와 친구들은 살해당한 래퍼 투팍과 비기(Tupac and Biggie)의 죽음을 애도했고, 우리는 또 힙합 그룹인 우탱(Wu Tang)과 갱스타(Gang Starr)를 우상시했다. 칼 카니(Karl Kani) 청바지를 엉덩이에 대충 걸쳐 입고 돌아다녔고, 또한 팀버랜드(Timberlands) 옷을 입고 락 음악에 몸을 흔들었다. 고스트패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새 앨범에 사인을 받기 위해 유니언 스퀘어에 있는 버진 메가스토어(Virgin Megastore)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어서 고스트패이스 킬라 앞에 섰을 때, 그는 나를 보고는 눈을 돌리더니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당황했고 상처받았으며 무엇보다 분노했다. 쿵푸와 샤올린 절에 관한 그 유명한 랩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시아인 팬을 그렇게 단숨에 무시할 수 있는가? 콜럼비아에서 미국 역사를 전공한 나는 4학년 때 “미국 내의 인종 그리고 피부색”이라는 한 학기 세미나를 들었다. 백인 여학생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급우와 교수는 다 흑인이었다. 한 학기 내내 아시아인에 대한 단 한 장의 읽기 과제물도 없었다. 나는 교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그의 대답이 충분히 명확하게 들렸다. 내가 그 교수로부터 들었던 대답, 그리고 내가 살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들에 비춰 볼 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마냥 이런 기억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만났던 흑인들은 나로 하여금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만들었다. 나는 한번도 내 흑인 친구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거나 또는 무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 속에는 인종에 대한 잠재적인 어떤 선입관이 있었고, 그것은 시시때때로 수면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회를 본 흑인 배우 크리스 락(Chris Rock)이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의 다양성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한 예다. 아시아인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해야 고작 우스개 코메디거리로만 등장하는 게 현실이니까. 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온라인 토론에서 스타이베산트(Stuyvesant) 학교에 흑인 학생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학생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미디어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반응했던 방식이 또 하나의 예다. 무엇보다 경찰이 정말로 잔인하게 흑인 커뮤니티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에 떠올랐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흑인을 향해 진심 어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비극이고 누가 봐도 부당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수백만 가지의 불의가 난무하지 않는가? 왜 이번 건만 그렇게 더 특별하고 중요하게 취급받아야 하는 건가? 그러나 진짜로 이기적인 내 마음에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가 흑인들한테 중요한 존재가 아닌데, 왜 저들이 내게 중요한 존재여야 한단 말인가?박해받는 자들을 항햔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지난 주의 사건은 나로 하여금 한번 더 나의 무감각함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님은 부드럽지만 강하게 나의 가면을 벗겼다. 하나님은 내가 누리는 특권 때문에 아예 눈이 멀어버려 이제는 불의를 보고서도 내 속에 겸손함과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죄가 여전히 얼마나 견고하고 추악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지난 주일 가족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은 공교롭게도 착한 사마리아인(눅 10)에 대한 것이었다. 여섯 살이 된 아들에게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금 맞아서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네가 지금 맞아서 피를 흘리면서 땅에 누워서 죽어가고 있어. 너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려. 좀 있다 한 사람이 더 왔는데, 그 사람도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좀 있다가 너랑 진짜 사이가 안 좋은 원수가 오는 게 아니겠니? 당연히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안 가고 너를 구해줬어. 우리 예수님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잠시 나는 맞아서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내 아들의 모습과 그 옆에 있으면서도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간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내 아들의 연약한 몸뚱아리가 피를 흘리면서 땅에 엎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내게 불의의 희생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 한구석을 보도록 허락했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죽어갈 때, 또한 그 자리에서 분명 뭔가를 할 수 있었을 토우 타오(Tou Thao)와 같은 아시아인 경찰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나로 하여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왜 흑인의 생명이 내게도 중요한가? 내가 그들에게 중요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행진을 할 때, 너무도 깊은 내 죄, 인종차별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나는 울기 시작했다. 결코 앞으로는 나의 흑인 형제 자매와 관련해서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희생자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아마드 아베리(Ahmaud Arbery)!, 브레나 테일러(Breonna Taylor)!,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내 눈물이 바뀌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울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나는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진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기 전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면서 그 속에 숨은 인종차별과 죄를 놓고 먼저 회개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나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서로에게 자신의 실패와 차가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흑인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더 진심으로 애통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더 잘 배우며 그들 곁에 더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에게만 두어야 한다. 불의를 증오하는 예수님은 언젠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함으로 진정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Unmasking Racism, Starting with M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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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hall Segal
2020-06-28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1–2, 8).다윗이 이 글을 썼을 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좋지 않았다(삼상 19). 축복에 잠겨서 마냥 행복할 때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외쳤다. 어떤 일이 닥쳐도, 아무리 인생이 힘들어져도, 누가 자신을 배반하고 또는 공격을 해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라고 고백하기로 다윗은 결심했다. 모든 것이 다 안 좋을 때다윗은 아직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쫓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왕은 다윗을 향한 분노와 질투로 눈이 멀어 있었다.) 군중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외칠 때, 사울의 피는 끓었고 그는 이새의 사랑스런 아들을 죽이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랐다.사울은 사람들을 보내 다윗을 죽이도록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다윗을 사랑했고(삼상 19:1),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은 스스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다(삼상 19:10). 다윗은 아슬아슬하게 그 창을 피해 도망갔다.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적으로만 충분하지 않았던지 다윗은 이스라엘 근방에 있는 가드의 왕 아기스 영역으로 들어갔고, 그는 다윗을 보자마자 그를 향한 질투와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생명을 보존해야만 했고, 그 결과 그들은 다윗을 놓아주었다. 자기를 증오하는 곳을 떠나 다시 반대와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돌아가면서 다윗이 외친 말이 이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위험한 가운데 주님에게로 피하는 것이 그가 없는 안락함과 안전보다 훨씬 더 낫다.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다윗은 가드의 아기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와 환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라고 고백하는 다윗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윗,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는가? 다윗이 가드에서 도망나온 이후, 사울은 다윗 때문에 놉에 있는 모든 제사장을 죽였다(삼상 22:18).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광야로 내몰았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삼상 23:15). 결국 다윗은 다시 가드로 돌아가야만 했다(삼상 27:2). 가드는 얼마동안은 다윗을 받아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고 다시 내쫓았다(삼상 29:11). 그리고 다윗의 가족과 친구가 급습을 받아 붙잡혔다(삼상 30:2). 또한 다윗의 백성들이 마음을 돌려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삼상 30:6). 하나님은 다윗이 두려워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를 구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루하루 그를 구했다. 비록 내일 만날 고난이 기쁨과 감사로 향하는 그의 마음 문을 막을지라도, 은혜로우신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오늘 하루의 구원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의 승리와 오늘 하루의 자비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 충분한 은혜시편 34편은 약하고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지은 시다.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라. 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하나님, 그의 자녀가 그날 하루 먹을 양식을 책임지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에게로 피하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스트레스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이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우리의 기쁨을 잠식시킬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윗 왕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매일 아침 만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하심에도 불구하고(애 3:22-23),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일 만날 환난에 휩싸인다. 그런 우리에게 다윗은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확실성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그날 만날 은혜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바라볼 때 생기는 평화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던 자기처럼 되라고, 지금 다윗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위대한 아버지이자 왕인 하나님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고, 우리를 온전히 또 영원히 그와 함께 만족함을 누리면서 살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고통, 우리 앞에 닥친 장애를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인지 또한 우리에게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모든 순간순간이 항상 안전하고, 고통이 없으며 형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선함이 언제나 선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고난 중에 하나님 안으로 피할 때, 당신은 보다 더 생생하고 심도있게 그의 선하심과 보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단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오늘 하루 당신을 사랑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에 집중하도록 하라. 그가 참으로 선하시다는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 미래에 완벽한 은혜를 가져다줄 하나님을 신뢰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Be Good Again Tomorrow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선하심
다윗
시편34편
고난
완벽한은혜
자비하심
코로나 시대 신앙 교육을 위한 예기치 않은 선물
by 김형익
2020-06-27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 적어도 두 가지 강제적 변화를 직면하게 했다. 첫째는 예배당이라는 ‘거룩한’ 장소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였고, 둘째는 ‘전문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요구였다. 우리가 보통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을 벗어난 예배, 신앙 교육, 그리고 교제를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 우리는 정말 당황했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또 목사로부터 독립된 신앙 교육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런 변화는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받고 싶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 선물들이다.영국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아프리카 소년들의 성인식을 관찰하면서 경계성(liminality)과 공동체성(communitas)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 개념들은 현재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변화를 잘 설명해주며, 심지어 긍정적인 면들을 전망하게 한다. 경계성은 이전의 안락함이 깨지고 위험을 무릅쓰며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경계성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 정신 혹은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최근에 도서출판 아르카에서 번역 출간한 앨런 허쉬의 ‘잊혀진 교회의 길’ 7장은 이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통해, 지금 이런 경계성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소위 초유(初有)의 경험들이다. 주일 공예배를 각자의 집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경험, 주일에 다수의 교인들이 예배당에 가지 않는 경험, 영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경험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리더들의 마음에 발생하는 것은 염려다. 교회의 예산에는 문제가 없을까? 교인들이 이탈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존재할 수 있을까? 등등 수많은 염려거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과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진짜 신학 작업을 하게 된다. 위의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신학적 질문들이고, 이런 신학적 질문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왔으며,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책상 위의 신학이 아닌 살아있는 신학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이런 진지한 고민과 질문과 신학함은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신약 교회가 세워졌던 처음 300 여년의 시대로 돌아가보자. 그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건물로서의 교회가 존재했는가?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메가처치들이 존재했었던가? 그들은 개인의 집에서 수용 가능한 소수의 가정들이 모이는 형식으로 소위 공예배를 드렸다. 또 하나 생각해보자. 그 시대에 과연 오늘날과 같이 소위 신학교를 나와 석사 학위는 기본이고 박사 학위를 소지한 전문 목회자들이 넘쳐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소수의 사도들로부터 시작한 신앙 교육은 사도들에 의해 길러진 디모데나 디도 혹은 마가나 누가와 같은 제자들, 그리고 다시 그들로부터 충성된 사람들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딤후 2:2). 그들 다수는 사실 무면허 설교자들이었다!초기 300년의 신약 교회를 생각해보니, 이것이 코로나 사태로 당황하고 있는 지금 교회에 뭔가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우리는 교회의 본질로 더 가까이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은 아닐까? 지금의 코로나 위기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참된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경계성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그런데 이런 희망적인 전망을 가지려는 우리를 막아서는 게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던 방향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방향 수정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지나칠 정도로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예속되어 있었고 전문 목회자들에게 의존적이었다. 많은 지역 교회에는 경건한 어른들이 거의 없고 몇몇 전문 목회자들이 쉴 새 없이 돌봐야 하는 영적 유아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지역 교회가 육아(babysitting) 목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많은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건물들은 끊임없이 쌓아올려야 했다.나는 목사 직분의 사역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신약 성경은 분명하게 목사의 직분을 말씀하고 있고 그 직분이 감당해야 하는 말씀 사역의 중심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 말씀 사역의 능력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시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가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와 가정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일차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교회는 상대적으로 불친절한(?) 교회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원리다(신 6:1-9; 엡 6:4). 교회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일 때, 자녀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며 설명해주고 자녀들은 일주일 동안 그 내용을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대로 매일 복습하고 예습해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그 신앙 교육은 삶 속에서 배우는 말씀이 되고 삶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들에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가르치는 부모들의 영적 실력이다(딤전 1:5). 지금까지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많은 교인들을 모으려는 지역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위한 신앙 교육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주일에 교회의 교육 부서에 맡기기만 하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던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는 이 모든 것들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이것은 가정이 교회로부터, 부모가 전문 목회자로부터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부모들의 모범을 따라 신앙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경건한 어른’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때고, ‘경건한 어른’이 되어야 할 소명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나는 지난 아티클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에서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막상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다 보니 너무나 준비되지 않은, 너무나 함량미달(含量未達)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성경과 교리의 지식도 지식이려니와, 거짓이 없는 신앙의 모범이야말로 갑자기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낙심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절감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이미 멋진 시작을 한 셈이니까 말이다. 이제 당신은 물러서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경건한 어른’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당신은 전과는 다른 태도로, 주의 말씀에 천착하고 이전에 배웠던 교리들을 묵상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우리가 기억하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은, 믿는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기가 막힌 진리의 교사고 주의 말씀을 통해 영혼을 낳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전능자라는 사실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하지만 집에서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부모를 통해서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사실을 점점 확신하게 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주일에 교회에서 들었던 단편적 이야기들이 전부인 자녀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현상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과 신앙적 모범을 보면서 형성되는 자녀들의 신앙은 위선적이거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노출되고 숨길 수 없는 가정에서 신앙이 가르쳐지고 형성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모데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우고 신앙이 형성됨으로써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사도 바울이 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딤후 1:5). 가정의 가장들이 영적 가장 역할을 회복하고, 부모들이 영적 교사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의 자녀들이 진짜 최고의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여전히 통제할 수 없이 퍼져가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 속에서 당황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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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라
by Ryan Lister
2020-06-26
부모든 자녀든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우리 자녀들의 소망의 바탕이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의 소망, 감정, 그리고 행동을 이끈다. 기쁨은 우리 자녀들 마음 위에 매달린 당근 같은 것이다. 채소를 다 먹어야 디저트를 준다고 하면 아이들이 울상이 되고, 컴퓨터 게임을 그만 하라고 하면 5분만 5분만을 외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기쁨이 아이들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으면 우리는 자녀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부모인 우리의 역할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신 것은 우리 자녀의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로 부르신 것이다. 이는, 기쁨을 찾아 헤매는 우리 자녀가 ‘최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많은 부모들에게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나 팟캐스트는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기쁨이 지닌 영향력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닫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이미 어떤 방향을 향해 자녀의 기쁨을 인도해가고 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라. 딸이 학교에서 불량배 같은 급우와 다투고 온 날,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 당신 자녀가 학교 운동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해주었는가? 아마도 자녀가 받은 상처를 기쁨으로 바꿔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상처를 기쁨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늘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최상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다. 자녀에게 컴퓨터를 덜 쓰고 책을 더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부모로서 하는 대부분의 일은 자녀가 기쁜 삶을 살길 바라는 우리의 내적 열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되고 영속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 기쁨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에 비유하신다(마 13:44–46; 비교. 빌 3:7–8). 보화나 진주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행복감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라도 그 막대한 부를 차지하려 할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진짜 보화, 진짜 진주는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다. 궁극적인 기쁨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것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가 우리의 기쁨 추구를 왜곡시키기 시작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많은 경우, 찾지 말아야 할 곳에서 찾는 기쁨, 근시안적인 기쁨이 바로 죄라고 할 수 있다. 죄는 가짜 기쁨을 진짜 기쁨인 것처럼 퍼뜨림으로써 우리를 현혹한다. 죄는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기쁨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뱀은 먹지 말라 금하신 그 열매를 먹는 것이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주신 약속들보다 더 좋은 것이라며 유혹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베어 물었을 때, 그들은 열등하고도 망가진 기쁨, 즉 좋아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한때 친밀했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주는 가장 완벽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그 열매를 먹은 것이다(창 3:5–6).자녀 양육과 이것이 무슨 관계일까? 기쁨은 자녀 양육을 재정의해준다. 아이들이 아무 곳에서 아무 기쁨이든 찾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부모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에게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과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라 하신다(요 15:11; 시 36; 시 37:4).자녀 양육 재정의하기그러므로 우리가 이 관점을 수용하면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녀의 기쁨을 위한 청지기로 인식하면, 우리의 자녀 양육은 ‘드디어’ 목적지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가르치고 말하고 시키고 사랑하고 교정하고 위로하는 모든 것은 자녀가 놀라운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들이 되는 것이다(시 16:11). 하지만 단지 우리의 자녀 양육 방식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의 가장 큰 기쁨의 대상이 되면, 우리는 아이들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다는 시각으로 보면, 부모로서 우리의 일이 단순히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로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임을 알게 된다.이는 곧 우리가 완벽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더 나은 부르심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자녀가 완벽한 하늘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를 목표로 삼으면 우리에겐 자유가 생기고 우리 자녀도 자유로워진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자녀들 역시 실수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듯, 자녀들 역시 동일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한다.자녀 양육의 핵심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도록 격려할 수 있을까? 우리 자녀의 마음을 다루는 좋은 청지기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실제적 방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부모가 먼저 기쁨을 누려야 한다누구나 기쁨을 추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부모인 우리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므로 자녀의 마음을 잘 인도해주려면 우리가 먼저 길을 알아야 한다. 부모인 우리의 특권은 우리의 최고의 기쁨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 자녀의 손을 잡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우상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부모인 당신 자신의 우상을 분별하라. 자문하라. 내가 오늘 소망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예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2. 할 수 있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재정의하라나는 자주 일관성 없이 흔들린다. 어떤 때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녀에게 뭔가를 못 하게 하지만, 그저 실리나 피곤함을 이유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이를 개선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할 때는 명확하고도 일관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행동을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녀에게 영속적인 행복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시키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자녀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과속방지턱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는 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해도 된다”나 “하지 말아라”고 대답하기 전에, 당신이 보이는 반응이 기쁨을 향해 가는 아이들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하라.3. ‘왜’라고 물어라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기쁨이 가진 힘을 가르쳐줘야 한다. ‘왜’라는 말을 사용하여 질문하면 좋다. “여동생을 왜 때렸어?” “시험 공부를 왜 안 했어?” 이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물론 “몰라요”나 “그냥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당신은 아이들이 자신의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운 셈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결국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에 휘둘리기보다는 그것을 스스로 평가해보고자 결심하게 될 수 있다. 4.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라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이들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물어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녀의 기쁨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면 아이들 마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신 자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아이들이 그 사랑을 올바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일시적인 기쁨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연결시키도록 도우라 하신다. 자녀와 농구를 하라.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는 이런 선물들이 어떻게 더 큰 기쁨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라. 레고(Lego)나 인형은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녀가 하늘 아버지께 소망을 두도록 이끌 수 있다. 자녀가 죄 짓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길 밖에서 기쁨을 찾음으로써 기쁨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특권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Parenting Is About Treasuring: Four Ways to Nurture Joy in God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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