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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시작하는 인종차별 가면 벗기기
by Gene Joo
2020-06-29
마스크를 쓴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나는 이 행진의 목적이 인종차별이라는 마스크를 벗기기 위한 것(unmask)이라는 사실에 아이러니를 느꼈다.흔히들 흑인 민권 운동(civil-rights movement,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 흑인이 주도하여 시민권 신청과 인종차별의 해소를 요구한 대중 운동)을 인종적 불의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하나의 변곡점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이 인종차별이 정복되기는 커녕, 그동안 인종간에 집단적 의식의 그림자 뒤로 후퇴한 채 오히려 정의와 평등에 대항해 끝없는 게릴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요즘 들어 인종차별이 끼치는 독은 그 어느 때보다 유해하고 교활한데, 그것은 훨씬 더 교묘한 형태로 그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COVID-19가 특히 무서운 이유는 다름 아닌 무증상자로 인한 감염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몇 달의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마찬가지로 인종차별도 그럴듯한 거부 이유로 포장돼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 정체를 규명하고 제거하는 게 매우 어렵다.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가 극에 달했던 안티벨럼 시대(Antebellum South, 1781–1860)에 동조하거나 짐 크로우 법(Jim Crow, 1876년부터 1965년까지 시행됐던, 인종차별을 강제했던 미국 남부의 법)을 옹호하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인정하게 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일까? 오늘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인종적 불의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정할까? COVID-19처럼 인종차별도 제대로 처리되고 추적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규명되고 또 진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정의롭지 않은 시스템에 의존해서 인종차별자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결코 시스템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백과 더불어 회개가 따라야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지난 주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가면을 벗기고 나로 하여금 내 평생 내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또아리 틀고 있던, 거기에 있는지 나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죄와 쓴 뿌리를 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구호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이다. 최근의 경험과 과거 여러 사건들을 통해 국가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흑인의 생명이 종종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과연 이런 흑인의 생명이 나한테도 정말로 중요한가? 이론적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히 그렇다.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나 다 내재적인 가치, 고귀함 그리고 존엄함을 갖는다. 그러나 정말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이 구호를 최근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 내가 겪었던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함께 나눠보도록 하자. 가면 아래서나는 대부분의 이웃이 동양인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웃 중에는 푸에르토리코인, 쿠바인 그리고 도미니카인도 있었고, 그들 대부분의 피부는 검었다. 어디를 가나 나는 “치노(Chino, 중국인을 부르는 스페인어)”라는 말을 들었다. 네 살 때 나는 치노가 내 이름인 “진(gene)”을 뜻하는 스페인어인줄 알았고, 어머니한테 어떻게 저 사람들이 다 내 이름을 아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그 호칭이 사람들이 나를 놀리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었고, 이 기억은 아직까지도 수치심과 분노와 관련한 나의 가장 오랜 기억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간이 가면서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고, 나는 급기야 괴롭힘까지 당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 어머니는 앞으로 절대로 남미 아이들 또는 흑인 아이들과 놀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우리집은 그 즉시 주민의 40 퍼센트가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마을로 이사를 갔다. 나는 열한 살 때 LA를 휩쓸었던 폭동 뉴스를 부모님과 같이 보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부모님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코리아타운에서 장사를 했는데, 그 사람의 가게가 타겟이 되어 약탈당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드니 킹(Rodney King)을 때린 건 백인 경찰인데 왜 흑인들이 한국 가게를 공격하는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이랬다. “왜냐하면 흑인은 나쁜 인간들이거든.” 어떤 뉴스는 무기로 무장하는 어느 한국 가게 주인의 모습을 방송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뉴욕 콜럼버스 서클에서 옷가게를 했는데, 나의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아빠, 만약에 뉴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아빠도 총을 사서 흑인들을 쏠 거에요?” 아버지의 대답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하지.” 아버지의 그 대답은 나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고, 나는 그날 밤, 우리 부모님을 나쁜 인간들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했다.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나는 말 그대로 흑인 문화 속에 풍덩 빠져서 살았다. 나와 친구들은 살해당한 래퍼 투팍과 비기(Tupac and Biggie)의 죽음을 애도했고, 우리는 또 힙합 그룹인 우탱(Wu Tang)과 갱스타(Gang Starr)를 우상시했다. 칼 카니(Karl Kani) 청바지를 엉덩이에 대충 걸쳐 입고 돌아다녔고, 또한 팀버랜드(Timberlands) 옷을 입고 락 음악에 몸을 흔들었다. 고스트패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새 앨범에 사인을 받기 위해 유니언 스퀘어에 있는 버진 메가스토어(Virgin Megastore)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어서 고스트패이스 킬라 앞에 섰을 때, 그는 나를 보고는 눈을 돌리더니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당황했고 상처받았으며 무엇보다 분노했다. 쿵푸와 샤올린 절에 관한 그 유명한 랩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시아인 팬을 그렇게 단숨에 무시할 수 있는가? 콜럼비아에서 미국 역사를 전공한 나는 4학년 때 “미국 내의 인종 그리고 피부색”이라는 한 학기 세미나를 들었다. 백인 여학생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급우와 교수는 다 흑인이었다. 한 학기 내내 아시아인에 대한 단 한 장의 읽기 과제물도 없었다. 나는 교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그의 대답이 충분히 명확하게 들렸다. 내가 그 교수로부터 들었던 대답, 그리고 내가 살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들에 비춰 볼 때,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조금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내가 그렇다고 마냥 이런 기억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만났던 흑인들은 나로 하여금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만들었다. 나는 한번도 내 흑인 친구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갖거나 또는 무시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 속에는 인종에 대한 잠재적인 어떤 선입관이 있었고, 그것은 시시때때로 수면 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회를 본 흑인 배우 크리스 락(Chris Rock)이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의 다양성에서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한 예다. 아시아인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잘해야 고작 우스개 코메디거리로만 등장하는 게 현실이니까. 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온라인 토론에서 스타이베산트(Stuyvesant) 학교에 흑인 학생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학생들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미디어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때 내가 반응했던 방식이 또 하나의 예다. 무엇보다 경찰이 정말로 잔인하게 흑인 커뮤니티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에 떠올랐을 때, 나는 나 자신이 흑인을 향해 진심 어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비극이고 누가 봐도 부당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수백만 가지의 불의가 난무하지 않는가? 왜 이번 건만 그렇게 더 특별하고 중요하게 취급받아야 하는 건가? 그러나 진짜로 이기적인 내 마음에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내가 흑인들한테 중요한 존재가 아닌데, 왜 저들이 내게 중요한 존재여야 한단 말인가?박해받는 자들을 항햔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지난 주의 사건은 나로 하여금 한번 더 나의 무감각함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님은 부드럽지만 강하게 나의 가면을 벗겼다. 하나님은 내가 누리는 특권 때문에 아예 눈이 멀어버려 이제는 불의를 보고서도 내 속에 겸손함과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 죄가 여전히 얼마나 견고하고 추악한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지난 주일 가족 예배 시간에 성경 본문은 공교롭게도 착한 사마리아인(눅 10)에 대한 것이었다. 여섯 살이 된 아들에게 대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지금 맞아서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네가 지금 맞아서 피를 흘리면서 땅에 누워서 죽어가고 있어. 너를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려. 좀 있다 한 사람이 더 왔는데, 그 사람도 그냥 가버렸어. 그런데 좀 있다가 너랑 진짜 사이가 안 좋은 원수가 오는 게 아니겠니? 당연히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안 가고 너를 구해줬어. 우리 예수님이 그런 것처럼 말이야.”잠시 나는 맞아서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내 아들의 모습과 그 옆에 있으면서도 무력하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치는데도 사람들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간다.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내 아들의 연약한 몸뚱아리가 피를 흘리면서 땅에 엎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내게 불의의 희생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마음 한구석을 보도록 허락했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죽어갈 때, 또한 그 자리에서 분명 뭔가를 할 수 있었을 토우 타오(Tou Thao)와 같은 아시아인 경찰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나로 하여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왜 흑인의 생명이 내게도 중요한가? 내가 그들에게 중요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명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행진을 할 때, 너무도 깊은 내 죄, 인종차별 그리고 무관심 때문에 나는 울기 시작했다. 결코 앞으로는 나의 흑인 형제 자매와 관련해서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희생자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아마드 아베리(Ahmaud Arbery)!, 브레나 테일러(Breonna Taylor)!,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내 눈물이 바뀌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가족을 위해서 울었다. 그들의 공동체를 위해서 울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나는 흑인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행진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기 전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면서 그 속에 숨은 인종차별과 죄를 놓고 먼저 회개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나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서로에게 자신의 실패와 차가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흑인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더 진심으로 애통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더 잘 배우며 그들 곁에 더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님에게만 두어야 한다. 불의를 증오하는 예수님은 언젠가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을 새롭게 함으로 진정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Unmasking Racism, Starting with Me번역: 무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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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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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_인권
LA_폭동
하나님은 내일도 선하시다
by Marshall Segal
2020-06-28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1–2, 8).다윗이 이 글을 썼을 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좋지 않았다(삼상 19). 축복에 잠겨서 마냥 행복할 때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외쳤다. 어떤 일이 닥쳐도, 아무리 인생이 힘들어져도, 누가 자신을 배반하고 또는 공격을 해도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라고 고백하기로 다윗은 결심했다. 모든 것이 다 안 좋을 때다윗은 아직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으로부터 무자비하게 쫓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왕은 다윗을 향한 분노와 질투로 눈이 멀어 있었다.) 군중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외칠 때, 사울의 피는 끓었고 그는 이새의 사랑스런 아들을 죽이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랐다.사울은 사람들을 보내 다윗을 죽이도록 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다윗을 사랑했고(삼상 19:1),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은 스스로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다(삼상 19:10). 다윗은 아슬아슬하게 그 창을 피해 도망갔다.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적으로만 충분하지 않았던지 다윗은 이스라엘 근방에 있는 가드의 왕 아기스 영역으로 들어갔고, 그는 다윗을 보자마자 그를 향한 질투와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생명을 보존해야만 했고, 그 결과 그들은 다윗을 놓아주었다. 자기를 증오하는 곳을 떠나 다시 반대와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돌아가면서 다윗이 외친 말이 이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위험한 가운데 주님에게로 피하는 것이 그가 없는 안락함과 안전보다 훨씬 더 낫다.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다윗은 가드의 아기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의 은혜와 환난에서 구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려움도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라고 고백하는 다윗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윗, 당신은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는가? 다윗이 가드에서 도망나온 이후, 사울은 다윗 때문에 놉에 있는 모든 제사장을 죽였다(삼상 22:18).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광야로 내몰았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삼상 23:15). 결국 다윗은 다시 가드로 돌아가야만 했다(삼상 27:2). 가드는 얼마동안은 다윗을 받아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셋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고 다시 내쫓았다(삼상 29:11). 그리고 다윗의 가족과 친구가 급습을 받아 붙잡혔다(삼상 30:2). 또한 다윗의 백성들이 마음을 돌려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삼상 30:6). 하나님은 다윗이 두려워하는 모든 상황에서 그를 구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루하루 그를 구했다. 비록 내일 만날 고난이 기쁨과 감사로 향하는 그의 마음 문을 막을지라도, 은혜로우신 주권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오늘 하루의 구원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의 승리와 오늘 하루의 자비하심에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했다. 오늘 하루 충분한 은혜시편 34편은 약하고 상처받았지만 그럼에도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지은 시다.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예배하라. 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하나님, 그의 자녀가 그날 하루 먹을 양식을 책임지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에게로 피하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스트레스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이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우리의 기쁨을 잠식시킬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윗 왕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매일 아침 만나는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하심에도 불구하고(애 3:22-23),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일 만날 환난에 휩싸인다. 그런 우리에게 다윗은 하나의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불확실성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그날 만날 은혜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바라볼 때 생기는 평화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던 자기처럼 되라고, 지금 다윗은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위대한 아버지이자 왕인 하나님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사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고, 우리를 온전히 또 영원히 그와 함께 만족함을 누리면서 살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고통, 우리 앞에 닥친 장애를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인지 또한 우리에게 지금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모든 순간순간이 항상 안전하고, 고통이 없으며 형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선함이 언제나 선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고난 중에 하나님 안으로 피할 때, 당신은 보다 더 생생하고 심도있게 그의 선하심과 보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지금은 단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오늘 하루 당신을 사랑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에 집중하도록 하라. 그가 참으로 선하시다는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라.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 미래에 완벽한 은혜를 가져다줄 하나님을 신뢰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Be Good Again Tomorrow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선하심
다윗
시편34편
고난
완벽한은혜
자비하심
코로나 시대 신앙 교육을 위한 예기치 않은 선물
by 김형익
2020-06-27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 적어도 두 가지 강제적 변화를 직면하게 했다. 첫째는 예배당이라는 ‘거룩한’ 장소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였고, 둘째는 ‘전문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요구였다. 우리가 보통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을 벗어난 예배, 신앙 교육, 그리고 교제를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 우리는 정말 당황했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또 목사로부터 독립된 신앙 교육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런 변화는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받고 싶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 선물들이다.영국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아프리카 소년들의 성인식을 관찰하면서 경계성(liminality)과 공동체성(communitas)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 개념들은 현재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변화를 잘 설명해주며, 심지어 긍정적인 면들을 전망하게 한다. 경계성은 이전의 안락함이 깨지고 위험을 무릅쓰며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경계성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 정신 혹은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최근에 도서출판 아르카에서 번역 출간한 앨런 허쉬의 ‘잊혀진 교회의 길’ 7장은 이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통해, 지금 이런 경계성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소위 초유(初有)의 경험들이다. 주일 공예배를 각자의 집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경험, 주일에 다수의 교인들이 예배당에 가지 않는 경험, 영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경험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리더들의 마음에 발생하는 것은 염려다. 교회의 예산에는 문제가 없을까? 교인들이 이탈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존재할 수 있을까? 등등 수많은 염려거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과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진짜 신학 작업을 하게 된다. 위의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신학적 질문들이고, 이런 신학적 질문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왔으며,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책상 위의 신학이 아닌 살아있는 신학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이런 진지한 고민과 질문과 신학함은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신약 교회가 세워졌던 처음 300 여년의 시대로 돌아가보자. 그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건물로서의 교회가 존재했는가?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메가처치들이 존재했었던가? 그들은 개인의 집에서 수용 가능한 소수의 가정들이 모이는 형식으로 소위 공예배를 드렸다. 또 하나 생각해보자. 그 시대에 과연 오늘날과 같이 소위 신학교를 나와 석사 학위는 기본이고 박사 학위를 소지한 전문 목회자들이 넘쳐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소수의 사도들로부터 시작한 신앙 교육은 사도들에 의해 길러진 디모데나 디도 혹은 마가나 누가와 같은 제자들, 그리고 다시 그들로부터 충성된 사람들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딤후 2:2). 그들 다수는 사실 무면허 설교자들이었다!초기 300년의 신약 교회를 생각해보니, 이것이 코로나 사태로 당황하고 있는 지금 교회에 뭔가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우리는 교회의 본질로 더 가까이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은 아닐까? 지금의 코로나 위기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참된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경계성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그런데 이런 희망적인 전망을 가지려는 우리를 막아서는 게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던 방향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방향 수정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지나칠 정도로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예속되어 있었고 전문 목회자들에게 의존적이었다. 많은 지역 교회에는 경건한 어른들이 거의 없고 몇몇 전문 목회자들이 쉴 새 없이 돌봐야 하는 영적 유아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지역 교회가 육아(babysitting) 목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많은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건물들은 끊임없이 쌓아올려야 했다.나는 목사 직분의 사역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신약 성경은 분명하게 목사의 직분을 말씀하고 있고 그 직분이 감당해야 하는 말씀 사역의 중심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 말씀 사역의 능력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시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가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와 가정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일차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교회는 상대적으로 불친절한(?) 교회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원리다(신 6:1-9; 엡 6:4). 교회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일 때, 자녀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며 설명해주고 자녀들은 일주일 동안 그 내용을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대로 매일 복습하고 예습해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그 신앙 교육은 삶 속에서 배우는 말씀이 되고 삶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들에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가르치는 부모들의 영적 실력이다(딤전 1:5). 지금까지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많은 교인들을 모으려는 지역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위한 신앙 교육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주일에 교회의 교육 부서에 맡기기만 하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던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는 이 모든 것들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이것은 가정이 교회로부터, 부모가 전문 목회자로부터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부모들의 모범을 따라 신앙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경건한 어른’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때고, ‘경건한 어른’이 되어야 할 소명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나는 지난 아티클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에서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막상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다 보니 너무나 준비되지 않은, 너무나 함량미달(含量未達)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성경과 교리의 지식도 지식이려니와, 거짓이 없는 신앙의 모범이야말로 갑자기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낙심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절감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이미 멋진 시작을 한 셈이니까 말이다. 이제 당신은 물러서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경건한 어른’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당신은 전과는 다른 태도로, 주의 말씀에 천착하고 이전에 배웠던 교리들을 묵상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우리가 기억하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은, 믿는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기가 막힌 진리의 교사고 주의 말씀을 통해 영혼을 낳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전능자라는 사실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하지만 집에서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부모를 통해서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사실을 점점 확신하게 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주일에 교회에서 들었던 단편적 이야기들이 전부인 자녀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현상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과 신앙적 모범을 보면서 형성되는 자녀들의 신앙은 위선적이거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노출되고 숨길 수 없는 가정에서 신앙이 가르쳐지고 형성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모데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우고 신앙이 형성됨으로써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사도 바울이 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딤후 1:5). 가정의 가장들이 영적 가장 역할을 회복하고, 부모들이 영적 교사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의 자녀들이 진짜 최고의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여전히 통제할 수 없이 퍼져가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 속에서 당황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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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라
by Ryan Lister
2020-06-26
부모든 자녀든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기쁨을 누리고 싶은 것이 우리 자녀들의 소망의 바탕이다. 그것이 바로 자녀들의 소망, 감정, 그리고 행동을 이끈다. 기쁨은 우리 자녀들 마음 위에 매달린 당근 같은 것이다. 채소를 다 먹어야 디저트를 준다고 하면 아이들이 울상이 되고, 컴퓨터 게임을 그만 하라고 하면 5분만 5분만을 외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기쁨이 아이들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깨달으면 우리는 자녀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고 부모인 우리의 역할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하나님이 우리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신 것은 우리 자녀의 기쁨을 다루는 청지기로 부르신 것이다. 이는, 기쁨을 찾아 헤매는 우리 자녀가 ‘최고의’ 기쁨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많은 부모들에게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나 팟캐스트는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기쁨이 지닌 영향력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깨닫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이미 어떤 방향을 향해 자녀의 기쁨을 인도해가고 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라. 딸이 학교에서 불량배 같은 급우와 다투고 온 날,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 당신 자녀가 학교 운동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무슨 얘기를 해주었는가? 아마도 자녀가 받은 상처를 기쁨으로 바꿔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상처를 기쁨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늘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으로,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최상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 애쓴다. 자녀에게 컴퓨터를 덜 쓰고 책을 더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이 보여주는 바는 우리가 부모로서 하는 대부분의 일은 자녀가 기쁜 삶을 살길 바라는 우리의 내적 열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되고 영속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 기쁨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감추인 보화나 좋은 진주에 비유하신다(마 13:44–46; 비교. 빌 3:7–8). 보화나 진주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행복감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라도 그 막대한 부를 차지하려 할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는 진짜 보화, 진짜 진주는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다. 궁극적인 기쁨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쁨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것에서 기쁨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죄가 우리의 기쁨 추구를 왜곡시키기 시작할 때 문제가 시작된다. 많은 경우, 찾지 말아야 할 곳에서 찾는 기쁨, 근시안적인 기쁨이 바로 죄라고 할 수 있다. 죄는 가짜 기쁨을 진짜 기쁨인 것처럼 퍼뜨림으로써 우리를 현혹한다. 죄는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기쁨을 오염시킬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뱀은 먹지 말라 금하신 그 열매를 먹는 것이 하나님 자신과 그분이 주신 약속들보다 더 좋은 것이라며 유혹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베어 물었을 때, 그들은 열등하고도 망가진 기쁨, 즉 좋아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한때 친밀했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주는 가장 완벽한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그 열매를 먹은 것이다(창 3:5–6).자녀 양육과 이것이 무슨 관계일까? 기쁨은 자녀 양육을 재정의해준다. 아이들이 아무 곳에서 아무 기쁨이든 찾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부모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에게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과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 자신’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라 하신다(요 15:11; 시 36; 시 37:4).자녀 양육 재정의하기그러므로 우리가 이 관점을 수용하면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녀의 기쁨을 위한 청지기로 인식하면, 우리의 자녀 양육은 ‘드디어’ 목적지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가르치고 말하고 시키고 사랑하고 교정하고 위로하는 모든 것은 자녀가 놀라운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행위들이 되는 것이다(시 16:11). 하지만 단지 우리의 자녀 양육 방식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의 가장 큰 기쁨의 대상이 되면, 우리는 아이들의 기쁨의 대상이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돕는다는 시각으로 보면, 부모로서 우리의 일이 단순히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로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임을 알게 된다.이는 곧 우리가 완벽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더 나은 부르심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자녀가 완벽한 하늘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이를 목표로 삼으면 우리에겐 자유가 생기고 우리 자녀도 자유로워진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 자녀들 역시 실수해도 괜찮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듯, 자녀들 역시 동일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한다.자녀 양육의 핵심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도록 격려할 수 있을까? 우리 자녀의 마음을 다루는 좋은 청지기가 되기 위한 몇 가지 실제적 방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부모가 먼저 기쁨을 누려야 한다누구나 기쁨을 추구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부모인 우리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므로 자녀의 마음을 잘 인도해주려면 우리가 먼저 길을 알아야 한다. 부모인 우리의 특권은 우리의 최고의 기쁨을 향해 가는 길에 우리 자녀의 손을 잡고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우상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부모인 당신 자신의 우상을 분별하라. 자문하라. 내가 오늘 소망으로 삼았던 것은 무엇인가? 내가 예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2. 할 수 있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재정의하라나는 자주 일관성 없이 흔들린다. 어떤 때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녀에게 뭔가를 못 하게 하지만, 그저 실리나 피곤함을 이유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때도 있다. 하지만 기쁨을 누리는 것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면 이를 개선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구분할 때는 명확하고도 일관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행동을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녀에게 영속적인 행복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시키는 일과 가르치는 일이 자녀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과속방지턱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궁극적인 기쁨을 발견하는 길을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해도 된다”나 “하지 말아라”고 대답하기 전에, 당신이 보이는 반응이 기쁨을 향해 가는 아이들의 여정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생각하라.3. ‘왜’라고 물어라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기쁨이 가진 힘을 가르쳐줘야 한다. ‘왜’라는 말을 사용하여 질문하면 좋다. “여동생을 왜 때렸어?” “시험 공부를 왜 안 했어?” 이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물론 “몰라요”나 “그냥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당신은 아이들이 자신의 동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운 셈이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결국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에 휘둘리기보다는 그것을 스스로 평가해보고자 결심하게 될 수 있다. 4.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라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이들이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지 물어보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녀의 기쁨의 근원에 초점을 맞추면 아이들 마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 당신 자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아이들이 그 사랑을 올바른 곳에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부모인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를 부르셔서 자녀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일시적인 기쁨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연결시키도록 도우라 하신다. 자녀와 농구를 하라.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는 이런 선물들이 어떻게 더 큰 기쁨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라. 레고(Lego)나 인형은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녀가 하늘 아버지께 소망을 두도록 이끌 수 있다. 자녀가 죄 짓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길 밖에서 기쁨을 찾음으로써 기쁨을 싸구려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특권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Parenting Is About Treasuring: Four Ways to Nurture Joy in God번역: 이정훈
가정
자녀_양육
부모
기쁨
하나님
창세기
청지기
부르심
성령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6-25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서 성령님도 믿게 된다.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고대의 성령훼손당과 몬타누스주의 등의 이단들을 생각해 보라.) 유난히 성령님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과연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지를 살피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님에 대한 생각이 과연 성경이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성경적 성령님과 바르게 관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다.질문 1: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십니까?”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같은 타종교인들이나 여호와의증인이나 미국의 ‘크리스천사이언스’(Chrisian Science)라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사이언스’라는 이단에서 유행시킨 것 같이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바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는 그 이름과 달리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1894년 미국 보스턴에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가르침으로 첫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6년경에는 27만 명까지 성장했으나 그 후에는 교세가 약화되어 2009년에는 5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그리고,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질상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께 명령을 한다든지, 자신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듯 하는 것은 결국 성령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과연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참으로 신실한 사역자들이 늘 그리했듯이 용어도 “성령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심령에서 그렇게 성령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써야 한다. 그저 용어만 성령님이라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중에서 표현하듯이 “하나 안에서 삼위가, 또 삼위 안에서 한 하나님이 경배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이남규, ‘신조학’ 합신대학원출판부). 성령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아뢰고, 경배해야 한다.질문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존숭하는 것 같이 성령님을 존숭하십니까?”마음 깊이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만큼 존숭(尊崇)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백하게 이교적이거나 이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령님이 성부(聖父) 하나님이나 성자(聖子) 하나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가 자신의 심중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하나님의 경륜상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성자께서 성부보다 낮은 위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듯이,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시고(요 15:26) 그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낮은 위격이 아니다. 위격상의 동등과 경륜상의 복종을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순종의 형태가 보이지만 그 위격에 있어서 삼위는 동등하시다.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우리들은 잘 들어야 한다. 오순절에 교회 공동체에 임하여 오신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기때문에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행 5:9) 하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서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행 5:11)했다(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이레서원).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고전 3:16; 고전 12:13; 엡 2:22)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존숭해야 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 삼위 안에서 아무도 더 먼저 있거나 더 나중 되지 않으며, 아무도 더 크거나 작지 않다. 다만 세 위격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동등하시다”라고 고백했다. 질문 3: “성령님께 순종하십니까?”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핵심적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까?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다른 것, 특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이해하고 성령님과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됨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 성경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야지,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시고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4-15)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일차적으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보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요 14:26) 방식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려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 15:26; 요 16:13-14).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알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했다(고전 2:13). 둘째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성령님을 따르는 것을 동의어로 놓고 논의해 간다(롬 8:4-14).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했으니, 중생하여 하나님을 참된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이다(롬 8:16). 이것은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여 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부르짖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며, 그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아갈 때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질문 4: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십니까?”우리가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표현하는지 아닌지 다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다. 우선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우선 성자께서 아버지, 즉 성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 특히 성부로부터 성령님이 보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말의 “나오신다”(proceed), “나오심”(proc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발출(發出) 등으로 쓰면 안 된다. 특히 고대적 상황에서는 그렇게 쓰면 고대 교회의 대표적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출설과 혼동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현세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는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따라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의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부님과 성령님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계속 쓰다 보니 과거 동방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하시다는 종속설, 즉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하신다는 견해, 즉 성부가 좀더 높으시다는 견해를 자꾸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종속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모인 ‘톨레도 제3공의회’(589)에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고 표현하여 “성자로부터도”라는 어귀를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더 넣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성자가 더 못한 분이라는 종속성을 막고, 성경을 따라 성령님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표현하는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서방 교회의 전통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 제12항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다.“우리들은 또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고 고백합니다.(성령님은) 만들어지신 것도 아니고, 피조된 것도 아니고,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질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지만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권위와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우리들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지를 묻고, 더 나아가서 그 성령님께 과연 순종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신학
교리
성령
삼위일체
바빙크
톨레도공의회
벨직신앙고백
크리스천사이언스
팀 켈러가 말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
by Matt Smethurst
2020-06-24
성경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책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에 관한 책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런데 '팀 켈러의 설교’(두란노, 2016년)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팀 켈러는 “설교란 단지 텍스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움직이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설교자들이 첫 번째 목표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두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과 창의력을 쓸만한 여력이 없는 것을 너무도 자주 봤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 책은 미주가 무려 234개에 달하며, 신실한 설교의 기본인 강해, 예화, 적용을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오늘날의 문화가 주는 도전과 기회가 무엇인지 논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설교에서 예수님을 왜 구원의 핵심으로 선포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논증한다.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현재 서구인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토록 방대한 통찰과 실제적 조언을 주는 설교 서적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설교 매뉴얼'이라기 보다 '선언문'에 가까운 이 책은 설교자들뿐 아니라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신실하고도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TGC의 공동 설립자며 뉴욕시에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섬겼던 팀 켈러 목사와 만나 위대한 설교의 요소, 상상력을 포착하는 법, 상황화 전문가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 많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Q.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가 뭡니까? 그 차이가 중요한 것일까요?A. 좋은 설교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설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5번을 보면 설교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성령은 조명하시고, 확신시키시고, 겸손케 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 밖으로 나오게 하셔서 그리스도께로 이끄시지요.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케 하시며, 사람들을 강건케 하셔서 유혹을 이기게 하시며, 은혜 안에 그들을 세우셔서, 믿음을 통해 오는 거룩과 위로 안에 그들의 마음을 세우십니다. 그럼 ‘위대한’ 설교란 뭘까요? 하나님의 영이 기쁘신 뜻 안에서 방금 말한 이 모든 작용을 증진시키고, 일으키시고, 강화시키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설교를 말합니다. 설교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비상하게 느껴지고, 참된 회심이 일어나며, 영구히 변화되는 삶들이 일어나는 것 등이 바로 위대한 설교의 가시적 표지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설교 준비에 시간을 두 배로 쓰면 성령이 두 배로 역사할 것이라 지레짐작해선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도 이를 통제하거나 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하고 기도도 많이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노력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위대한 설교’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본문을 설교하되 그리스도는 선포하지 않는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리스도는 선포하되 본문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양극단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 있을까요?A.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설교에서 너무 일찍 그리스도를 다루지 말라. 하지만 꼭 그리스도를 다루라' 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선지서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정점에 이르는 어떤 지칭이나 주제가 보일 때 너무 빨리 그쪽으로 달려가지 말라는 뜻이지요. 저자가 그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원래 메시지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인 후에야 신구약을 관통하는 주제를 잡아내고 어떻게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Q. 많은 이들이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단순히 수용하는 것(accommodation)이라 생각하는 데 반해, 목사님은 상황화는 궁극적으로 상대와 대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clarity)이라 주장하시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건강한 상황화의 모본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드신 이유도 설명해 주십시오. A. 상대방의 오류를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첫째,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와 예화를 써서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후, 둘째, 그때 가서야 그들의 신념과 확신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내재된 지식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믿는 전제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딜레마와 자기모순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빈곤에 허덕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했던 설교들, 그리고 그가 교육 받고 부유했던 유럽인들에게 했던 설교들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에드워즈는 각 설교에서 다른 단어, 다른 개요, 다른 논증법, 다른 은유와 심상을 사용했습니다. 정말 놀랍지요. 그게 바로 상황화입니다. Q. 동시대인들과 대화하기 위해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주눅이 들어있는 설교자가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어디서부터 독서를 시작해야 합니까?A. 설교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를 매일 유심히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두껍고 어려운 책으로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회 수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유튜브 뮤직 비디오를 보면 그 비디오들의 대부분이 결국은 우리의 뿌리를 형성하는 정체성, 자유 등에 관해 우리 문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메시지들이 선명해집니다. 먼저 읽을 책으로는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의 'How (Not) to Be Secular'나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A Secular Age'를 추천합니다. Q. 목사님은 사람들의 지성에 새로운 논증을 제시해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상상력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먹여줄 때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셨지요. 예들 들어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논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설교를 위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나 습관들이 있는지요? 이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추천 자료들이 있습니까?A. 아주 오래된 것들을 읽으세요. 동화, 신화, 전설, 모험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그중 많은 것들의 뿌리가 비기독교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 죽음, 희망,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들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는 심오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지요. 시를 읽으세요. 옛 찬송가를 부르세요. 찬송가 역시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고전 영화를 보세요. 너무 많아서 말씀 드리기가 좀 어려운데,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최소 수백편에 이릅니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래도 정말 멋진 장면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더 많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지요. 그리고 기도 중에 당신에게 감동을 주었던 생각들을 설교에서 언급하세요. Q. 목사님은 목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품을 증폭시킨다고 하셨어요. 또한 목회 사역은 사람들을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더 안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설교자들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A. 설교자는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보다도 매우 풍성한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평신도는 목회자만큼 영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그건 이중 잣대가 아닌가요?'라는 반발이 나올 수 있겠지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엄청난 기도 생활 없이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다른 직업들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그 목회자는 위선, 표리부동, 마음의 완악해짐으로 치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Keller Helps Preachers Reach the Heart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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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 교회 목사에게 하는 사탄의 거짓말
by Matt Hodges
2020-06-23
사탄은 거짓말의 명수다. 거짓말을 주무기로 삼아 왕국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려 한다. 하나님 나라 전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이 교회 개척이기 때문에, 사탄은 특히 교회 개척자들에게 거짓말을 많이 한다. 어떤 거짓말은 너무 뻔하다. 항상 그대로 믿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우리 사역의 결과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는’ 있다.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역하는지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의 기반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분별하기 어려운 거짓말은 우리를 현혹한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들었던 속삭임처럼 그런 거짓말은 ‘정말 솔깃한’ 진리처럼 들린다.필자는 교회 개척을 했던 지난 수년간 그런 사탄의 거짓말들을 들었고 또 믿기도 했다. 그중 다섯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제대로 하려면 혼자 해라모든 분야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도 다른 이들과 그 짐을 균형 있게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선장의 일은 배를 조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돛 관리에 인원을 배치하고 육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지도까지 들여다보면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적어도 동시에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모든 일을 다 잘 해낼 수는 없다.당신은 은사도 많고 여러 면에서 자격도 갖춘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비교적 잘 할 수 있는 그 일을 최고로 집중해서 더 훌륭히 잘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바울도 에베소서 4장 11–12절에서 목회자의 역할은 교회 사역을 위해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라 했다. 사역을 혼자서 다 하려고 하면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세울 수 없다.2. 성공하려면 여러 일을 벌여야 한다야후가 구글을 백만 달러라는 헐값에 인수하려 했던 적도 있었는데, 현재 검색 엔진 경쟁에서 구글이 어떻게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구글은 오로지 검색 엔진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야후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야후의 홈페이지는 뉴스, 날씨, 타블로이드 등으로 도배되어 있으나 구글의 첫 화면은 검색 창 하나뿐이다. 사람들이 “구글로 검색해봐” 하지, “야후로 검색해봐”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개척 교회 목사들은 뭐든지 혼자 다 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소셜 미디어를 보면 사역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뭐든지 추진해보라고 하는 아이디어들이 넘쳐나서 그야말로 목회자는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말라.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라. 당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그 일에 집중하라. 야후가 아닌, 구글이 되라.3. 성공적인 설교자가 되려면 역동적인 스피커가 되어야 한다신실한 설교에는 단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짓말 같이 개척 교회 목사를 힘들게 하는 것도 없다. 우리는 교회 설교가 각 교회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에 올리는 글이나 사진과 비슷할 것처럼 기대하는 것 같다. 물론, 필자 역시, 설교는 설득력이 있고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설교의 목적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예배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의 말처럼 우리는 청중이 “즉각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는 설교의 방식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목회자인 우리들은 설교가 계속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진정한 능력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있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중략]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전 2:4–5).4. 복음에 신실하다면 융통성 없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정보 혁명의 시대에 산다는 것은 특권이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아마존에서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임이 분명하다. 경험 많고 지혜로운 이들로부터 뭔가를 배우는 것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쉬워졌다. 하지만 정보의 바다 시대가 주는 단점은 우리의 목회 철학이 반드시 최신식이어야 한다는 거짓말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교회 개척은 독립 변수와 의존 변수가 무엇인지 구별하는 데 달려 있다. 정통 신학과 선교를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자료와 정황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전자를 강화하고 후자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교훈을 준다. 바울은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였고 그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고전 15:1–5). 하지만 바울은 메시지를 상황에 맞게 전달하고 주어진 환경에 맞춰 그의 접근법을 수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행 17:16–34; 롬 14:14–15). 은사가 다른 타인이나, 소유한 자원이 다른 교회의 목회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신실함이 아닌 어리석음이다.5. 교회는 목사 힘으로 세우는 것이다이 다섯 번째 거짓말은 사탄이 개척 교회 목사에게 하는 가장 위험한 거짓말이고, 위에서 소개한 다른 모든 거짓말들의 뿌리다. 즉, 모든 것이 목사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의 운명이 당신의 어깨에 달렸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당신이 믿는다면 사탄은 하나님의 왕국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왜냐하면 이제 당신이 세우는 것은 당신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사탄을 기쁘게 할 만한 일은 없다. 개척 교회 목사여,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사탄은 개척 교회 목사에게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 즉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가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탄이 극도로 싫어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탄이 없애 버리려 하는 일을 붙든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라. 우리의 대적은 언제나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하려 한다. 처음 사랑을 잊지 말고(계 2:4) 최종 결과는 우리와 비할 수 없는 무한하게 뛰어나신 그분께 맡기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5 Lies Satan Tells Church Planters번역: 이정훈
교회_개척
교회
두려움
염려
믿음
약속
사탄의_거짓말
팀켈러
겸손으로 만나는 기쁨
by David Mathis
2020-06-22
축소해서 말하는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신 과대 포장과 화려한 수식이 넘쳐난다. 대중적인 의사 소통은 하나의 장대한 사운드 비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파티, 이벤트, 보도자료, 경연 대회, 정치 집회를 가리지 않고, 새로운 것은 과거보다 더 크고 화려해야만 한다. 과대 광고와 과장, 화려함과 허세가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온라인 프로필을 꾸미는 데 가장 그럴듯한 사진을 선택하고, 가장 내세울만한 성과를 강조하며,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는 데이터를 선택해 타임라인을 신중하게 채워간다. 지금 하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한마디로 말해서, 과잉된 약속과 형편없는 결과라는 시대의 전염병을 견디고 있는 중이다. 최소한 대중의 눈으로 볼 때, 단순한 진리를 겸손하게 전달하는 게시물은 거의 찾기 힘들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도 이런 사회적 압박에 희생되고 있다. 이번 주일 예배, 이번 컨퍼런스, 이번 연구, 이번에 나오는 책 등등을 알리는 메시지는 언제나 지난번 것 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 강조한다. 이런 경향은 교회 개척이나 새로 시작하는 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집단적 불안감과 미숙함은 실제보다 더 좋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증을 불러 일으키고 그러다 보면 사실보다 더 과장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척하는 교회든지 또는 사역 기관이든지 더 지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취약함과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을 위장하고 있는 정교한 포장에 불과하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보는 것은 어떨까?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 한번 겸손해지면 어떨까?당신 자신에 대해서 덜 생각하라지혜로운 자는 겸손하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겸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배우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그냥 마음먹는다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겸손을 추구하는 첫 번째 과정은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만드는데, 겸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과정에 참여해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로마서 12장 3절은 겸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 중 하나며,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겸손케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들여다 보게 한다.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C.S. 루이스(C.S. Lewis)는 겸손에 대해 기념비적인 말을 남겼는데, “겸손이란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단지 당신에 대한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과장된 생각에 빠져있지 말고, 대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나는 이 구절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비록 바울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말라고 했지만,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세상의 패턴을 관찰하라첫 번째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과장된 사고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 세상의 기준을 따를 때, 우리는 결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태초부터 그랬다. 인류의 첫 번째 죄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에 발생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끔찍한 반란이다. 이런 죄가 뿌리를 내려 자라고 또 시간이 흐르면서 퍼지기 시작해 세상에서 열매를 맺은 결과, 어떻게든 자기 사랑에 있어서만은 다른 사람을 능가하고자 하는 인간들로 이 세상은 채워졌다.자기 사랑이라는 면에서 우리 선조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지금 우리의 손에는 우리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디지털 도구가 있다.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고 또 온 세상이 내 컴퓨터 스크린 위에 있다. 우리가 조금만 균형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또한 자화자찬으로 치솟았다가 조만간 자기 연민 속으로 추락할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예배와 경건의 시간을 쉬지 않고 가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다듬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겸손을 갖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과대평가하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요즘처럼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는 겸손이 마치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자아도취에 빠진 이 세상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을 선택하기결혼식에 초대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교만)에 빠진 것을 본 예수님은 비유를 들었다. “상석”에 앉고 싶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0–11).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길 원한다. 많은 양들 중의 하나로서 낮고 평범할 뿐이지 결코 랍비나 선생 또는 스승처럼 특별한 존재(마 23:8–12)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것 없지만, 평범하기에 행복하고 더 나아가 기쁘게 종으로서 섬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누구나 다 작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가 되라고까지 했다(마 18:3). 그런 사람들은 굳이 강한 척할 필요도 없고, 또 다 가졌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다. 그들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스스로의 비천함을 인정할 수 있다. 척하지 않기에 그들은 겸손하다. 자신에 대해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말하라자,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이 추구하는 자화자찬과 자기연민의 패턴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하는 것이고 또 지나친 것이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그건 바로 우리가 하는 말에 달려있다.하루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나 자신에 대해 하는 생각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표현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는가? 당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당신에 대한 어떤 배경을 제시하는가? 당신 자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온라인 소개란에 써놓았는가? 굳이 SNS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얼마나 자주 겸손을 가장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가? 대중의 인정과 갈채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일부러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안 좋게 써놓고 누군가가 나서서 당신을 높여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고 특별석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고 있는가?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말로 나오기 마련이다. 말은 나의 내면을 드러낼 뿐 아니라, 조금씩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형성하기도 한다. 작아도 만족할 수 있다흔히 말하는 “과소평가”는 겸손과 함께 간다. 화술의 일종인 과소평가는 오랫동안 “타피노시스(tapinosis)”라는 기술적 제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어 겸손(tapeinosis)에 어원을 두고 있다. 특정 현상(특히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나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며 최상의 (현대에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겸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는 우리의 풍요함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질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과소평가 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도 겸손이다. 그리스도가 안전함의 근원이기에, 우리는 실제 또는 온라인 대화에서 내 삶에 대해서 거창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에서 더 극적인 삶을 누리며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실제보다 더 인상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미묘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을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과소평가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능가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며, 그의 가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에 대해서 과대 포장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얼마든지 과소평가해도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예수님의 위대함에 점점 더 감동받을수록, 나 자신의 대단함에 감동받는 일은 점점 더 사라진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ell Yourself Short: The Rare Joy of Christian Humility번역: 무제
생활
감정
겸손
기쁨
로마서12장
SNS
CS루이스
타피노시스
자기사랑
사워도우, 기다림의 미학
by Timothy Willard
2020-06-21
사워도우(Sourdough)가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COVID-19 팬데믹이 두려움, 공포, 편가르기식 분노를 일으키긴 했지만, 배우고 마스터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빵 굽기 같은 옛 전통을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다. 격리로 인해 갑자기 시간이 많이 생겨버렸기에 많은 이들이 밀가루 반죽을 하며 사워도우 빵 굽기에 도전하고 있다.뉴스를 보면 사워도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직접 빵을 굽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발생한 효모와 밀가루의 부족 현상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한 가지 팁은 슈퍼마켓에 밀가루가 떨어졌다면 가까운 농장에 문의해 보라는 것이다. 필자는 노스캐롤라이나 더럼(Durham)에 있는 유기농 농장으로부터 유기농 빵 밀가루, 통밀가루, 다목적 밀가루를 대량으로 주문했다.CNN은 사워도우 빵 굽기가 전염병 사태와 관련된 불안감을 다루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방송했다. 어떤 작가는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 사워도우 빵 굽기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뉴요커 잡지는 사워도우 발효종(starter)이 만드는 실존주의적 생각들을 시간 순으로 정리한 아주 재미있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인류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는 모든 빵이 “밀가루와 물만으로 만들어 효모 ‘없이’ 발효시켜 만든 반죽”인 사워도우로 만든 빵이었다. 빵 전문가들은 발효빵의 기원이 공기, 밀가루, 심지어 인체로부터 발효되어 나온 야생 효모를 사용해 빵을 굽거나 맥주를 빚었던 이집트라고 생각한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빵도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빵을 발효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세오경을 보면 출애굽 사건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나 'starter,’ ‘sponge,’ 또는 ‘mother’라고도 일컫는 효모 없는 빵을 구워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빵 굽기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거쳐 그리스, 로마, 그리고 프랑스까지 퍼져 나갔고, 특히 프랑스식 사워도우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인들은 수 세기 동안 사워도우 만드는 일에 높은 수준을 견지해왔다. 프랑스식 사워도우는 1898년 클론다이크(Klondike) 지역 골드러시(Gold Rush)를 통해 결국 샌프란시스코까지 전해졌다. 광부들과 서부 개척자들은 자연 발효 과정이 계속될 수 있도록 사워도우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로 인해 광부 자신들이 “사워도우”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점점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시중에서 파는 효모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다. 빠르고도 편리한 오늘날의 제빵 기술로 인해, 시간이 많이 걸리던 사워도우 빵 굽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름다움은 시간을 요한다빅토리아 시대의 예술가요 비평가였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그의 독자들이 속도(pace)가 아닌 관찰(sight)의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러스킨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쓸모 없는 것들이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극도로 실용주의적이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인 이 세상에서는 논란이 될 수 있는 말이다. 러스킨의 요점은, 아름다움을 ‘보려면’ 시간과 주의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드는 데도 시간이 든다는 것이다. 사워도우 빵 굽기에는 시간, 헌신, 끈기가 필요하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지만 오늘날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보기 힘든 인내를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갈 4:22). 내 친구이자 라이프스타일 작가인 베다니 더글라스(Bethany Douglas)는 “빵 굽기는 인내와 기대를 키워준다. 이 둘이 주는 긴장감으로 인해 우리는 더디 가면서도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거품이 나고, 반죽이 부풀고, 또 반죽을 치대는 것 등 각 단계마다 우리는 멈추고,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라고 썼다. 사워도우의 느림에서 얻는 교훈사워도우 빵 굽기는 내게 있어 요리하면서 느끼는 단순한 기쁨이라기보다 속도와 관련된 영적 훈련 같은 것이다. COVID-19로 인한 격리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바삐 살아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워도우 빵 굽기가 더디게 가는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내게 특히 다음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1. 잠시 속도를 늦추고 중요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발효종(starter)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 발효종을 만드는 것은 3분 남짓이지만 이 일에 전심으로 집중하지 않으면 발효종이 죽어버리고 만다. 이 일로 인해 헌신이 주는 기쁨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일이 지루하다거나 단조로워도 그 일을 꾸준하게 감당해내는 것의 기쁨 말이다. 이는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이 세대에 중요한 훈련이다. 2. 주의를 가지고 둘러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도처에 널려 있다사워도우 빵 굽기의 느림으로 인해 우리는 제빵이 주는 기쁨 안에서 서로 친밀해지고 가까워지는 시간을 누릴 수 있다. 효모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며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 반죽을 잡아당길 때는 서로 순서를 정해서 함께 한다. 아침에 오븐에서 퍼져 나오는 빵의 향기로 모두가 즐거워진다. 우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를 체험한다. 3. 편하게 사는 삶보다 느리게 사는 삶이 낫다현대 사회의 편리함은 삶의 리듬을 망가뜨릴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신속한 해결책을 선택하곤 한다. 가령 “그냥 가게에 들러서 사와” 또는 “온라인으로 주문하자” 등이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다. 사워도우 빵은 내가 편리함을 포기하기로 의지적으로 선택해야만 구울 수 있다. 잘 구울지 아니면 망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내가 정한 목표를 위해서는 내 시간을 들여야 한다. 설사 망쳤다 해도 나는 인생에서 뭔가를 배운 셈이고, 만약 잘 구워냈다면 다른 사람들과 레시피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워도우 빵 굽기가 성례는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속도를 늦추고 소매를 걷어 올려 반죽을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을 부풀어 오른 반죽에 비교하시기까지 하셨다(마 13:33). 바로 그 앞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처럼(마 13:31–32), 복음서에 나온 다른 음식과 농사 비유 중에서, 누룩 비유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특징 짓는 성장, 과정, 그리고 인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워도우 빵 굽기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속도에 대해 묵상하라 초청한다. 우리가 생명을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빵이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그 신비한 과정을 보며 즐거워하라 초청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ourdough and the Spiritual Discipline of Pace번역: 이정훈
영적성장
영성
인내
유기농
빵굽기
효모빵
COVID-19
겨자씨비유
사워도우
포스트 코로나 : 교회의 조직과 예배
by 노승수
2020-06-20
코로나 이후가 어떻게 될지를 보려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게 된 것은 1347년,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의 상선이 흑해의 크림반도에 위치한 식민 도시 카파(Kaffa)로부터 모든 선원이 사망한 채로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메시나(Messina) 항구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중국의 풍토병이었던 흑사병은 킵차크 칸국(kipchak khan)에서 카파를 거쳐 이탈리아로 퍼져나갔다. 1347년 메시나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과 러시아, 아프리카에까지 이른다. 1351년에 이르러 잠시 소강기에 접어들었지만 창궐한 지 5년 만에 무려 2,500만 명의 유럽인이 사망했고 50년간 10년 단위의 유행을 반복하면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했다.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자 유럽의 경제 구조에 변화가 왔다. 영주와 농노의 봉건 제도 하에서 노동 인력이 점차 감소됐는데, 이로 인해 농노들이 해방되거나 노동 임금이 상승하여 새로운 중산층 계급이 형성되었다. 흑사병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교회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사제로 지원하는 사람이 줄어 무뢰배가 종교 지도자가 되는 일이 생겼고 이런 현상이 종교 개혁을 부추기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흑사병은 한쪽으로는 급격한 사망으로 인한 공포와 종교심을 불어 넣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성과 과학의 발전을 불러왔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세르반테스, 에라스무스 같은 대작가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피렌체로부터 원근법에 기원한 미술이 등장했는데 최초의 작품은 지오토의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면서 중산층을 위한 저가의 그림 거래가 많이 일어났고 미술에 대한 저변이 확산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교회에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예술과 종교로 회귀했으며, 더욱 과학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흑사병은 공교롭게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서 산업이 멈춘 때에 자연 회복에 대한 뉴스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교회의 회복도 일으키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 모임의 축소로 인해서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고 예배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기에 많은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교회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위기는 한국 교회가 가진 교회론의 위기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일 수 있다. 신천지가 자신들의 모략 교리를 통해 교회 내에 침투해 교인들을 빼가거나 교회를 빼앗거나 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이미 우리는 이 위기를 감지했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코로나 사태는 신천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여기에는 분명 섭리적인 메시지가 있다. 신천지로 인한 위기나 코로나로 인한 위기는 공통적으로 교회 회원권의 위기를 가져왔다. 성경에서 교회는 흔히 가정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로 비유적으로 묘사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가족이라고 하셨다. 교회의 회원권은 혈통이 묶어주는 연대보다 사실 더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 실제로 갈라디아서는 우리 믿음으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혈통에 연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개혁 교회의 표지 중 하나인 “치리”가 교회에 나타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회원권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훈육할 때 그들이 가진 정서적 연대와 가족의 회원권이 징계를 달게 받게 만드는데, 교회에서 이런 연대감은 거의 사라졌다. 예배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한 가족 공동체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이것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 말은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 이전에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신자들의 어머니는 결국 신자들의 모임, 곧 예배에 의해서 세워진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신자들 간의 연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 심령에서 확인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느슨한 회원권의 문제는 피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느슨한 회원권은 결국 지금과 같은 코로나 사태에서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가족의 일원이 먼 나라에 유학을 가거나 군대에 갔다고 해서 가족의 회원권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이 지닌 혈연적 유대가 무엇보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제는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교회를 조직 교회로 묶어주는 회원권과 그런 회원 의식을 고취시킬 분명한 복음을 전하는 강단의 문제로 귀결된다. 교회의 회원권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으로부터 온다. 믿음에 의한 연대는 다시 가족처럼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 이어져야 한다. 아무리 말씀이 고상하고 좋더라도 결국 우리가 헌신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만큼이며 그 사랑은 아는 만큼 이뤄진다. 어머니로서 영적 돌봄이 실질적으로 이뤄지는 공동체를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며 사랑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교제가 필요하다. 강단에서 선포된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까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봉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교회가 교회로서 유지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상황은 이제 이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흑사병이 50년 이상 유럽 사회에 영향을 준 것처럼 앞으로 이런 상황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그랬듯이 코로나 역시 극복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교회의 상황은 더러는 악화될 것이고 더러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자 신자 공동체로서의 연합이 곧 예배임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온전한 주일을 통해서 회복되어야 한다. 연합의 가치가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면 사실상 이런 이해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연인이 시간을 함께하지 않고 서로를 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우리는 말씀을 함께 받고 서로를 더 알아야 한다. 코로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고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신자 공동체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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