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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다섯 가지
by Emma Scrivener • Glen Scrivener
2018-12-19
신앙에 대한 의심의 문제에 있어 가장 힘든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의 믿음은 마치 도미노와 같아서 한 곳에 의심이 생기면, 전체가 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을 줄 수 있다.의심은 보통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빠른 속도로 증폭된다. 예를 들어, 종종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로부터 시작된 의구심은 곧 ‘하나님이 과연 들으실까?’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신경을 쓰실까?’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긴 한 건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대된다.이런 신앙적 의심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불신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가슴앓이 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주일학교 교사, 구역장, 또는 기독교 단체에 몸 담고 있다면, 이러한 의심을 어떻게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혹은 당신의 가족이 모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마음 속 불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 의심은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 존재는 마치 잡초와 같아서 모른 척 내버려 두어도, 어느새 한 뼘이나 자라나 곧 당신을 삼킬 듯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심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다음의 다섯 가지 사실을 기억하라.1. 모든 비기독교인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믿지 않는 친구들을 바라볼 때, 마치 그들은 믿음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대상인 듯 부러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무신론자조차도 정신적으로는 의지하는 구석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존재를 자신이 눈으로 보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우주의 지속성, 감성과 이성의 실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진, 선, 미, 그리고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매달리기도 한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들도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하지만 그들이 믿는 그 대상 안에는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붙드는 진, 선, 미, 그리고 사랑의 뿌리에는 사실상 변치 않는 어떠한 진리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당신이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무신론과 비교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2. 모든 성도들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의심은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다. 때때로 나는 나의 결혼, 친구들, 합리성, 요리, 저술,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의심한다. 가끔씩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의심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라고 책망하셨다.나는 종종 죄를 짓고, 의심도 한다. 양자 모두 그 자체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놀랄 일도 아니고 예상치 못할 일도 아니다. 의심 없는 기독교인은 마치 죄 없는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죄의 모든 시작은 불신이므로 사실 의심과 죄는 함께하는 것이다(요 16:9).요한1서 1장 8-9절을 이러한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도 지나친 확대는 아닐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의심]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의심]을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의심]을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3.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감정은 혈당과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만일 감정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감정은 나의 직장과 결혼, 신앙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천적 기질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요르(즉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이요르는 항상 우울한 당나귀)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티거(마찬가지로 곰돌이 푸에 나오는 캐릭터로 활기찬 호랑이)이다. 티거가 밝고 명랑하다는 이유로 믿음의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단지 운 좋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복권에 당첨되었을 뿐이다.정신적 건강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병적인 우울증은 누군가에게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아래 5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금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우울증에 걸렸더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4. 믿음은 환상이 아니다우리는 증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설득되었기 때문에 믿는다. 믿음은 배의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어둠 속으로 대담하게 발을 내딛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반짝이는 찬란한 빛을 향해 우리의 눈을 뜨는 일에 더 가깝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 뜰 수 있을까?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라고 말씀한다. 로마서에서 이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무려 274개의 구절이 앞서 배치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무척 중요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당신에게 읽고 들을 말씀이 있음을 기억하라.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닌, 이성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득력 있는 진리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진리를 계속해서 들으라고 말한다. 당신에게 어떤 의심이 생기더라도, 복음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성경과 성경의 인물들로 당신을 둘러싸라. 그러면 당신은 계속 참된 것에 젖어 있게 될 것이다.5.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믿음은 우리가 애써서 끌어당기거나 혹은 밀어내는 무언가가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결정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와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병행을 이루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힘껏 통과해야 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관문이 아니다. 이들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혼인을 ‘결혼하다’(능동적)와 ‘아내가 되다’(수동적)의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가지 묘사이다.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의심의 시간 속에 있다면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 성경, 성례, 기도,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때,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은 다시 살아난다.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것보다 예수님께로 시선을 옮길 때, 의심은 줄어들고, 상대화되고, 대체되며, 심지어 새롭게 승화된다. 의심의 여정은 어쩌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보다 깊고, 풍부하게 알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방법인지도 모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Things to Remember About Doubts번역: 주영식
영성
신앙과소명
의심
믿음
감정
환상
존재
하나님
예수님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세 가지 방법
by Tim Keller
2018-12-19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 이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자녀에게 신앙이 이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 세대가 신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자녀 세대가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일까? 보통은 둘 다 맞는 말이다. 앞선 세대가 바른 신앙을 전달하는 일에 실패하면 종종 다음 세대에서 그 문제가 증폭되기 마련인데, 가장 큰 폐해는 우리 자녀들이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부모 세대의 신앙적 헌신이 세대를 거치면서 안주로 바뀌고, 안주는 다시 시간을 거쳐 세상과의 타협으로 변질된다.초기 뉴잉글랜드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땅의 역사 중 1620년대부터 1640년대를 대표하는 초창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영적 생명력이 살아 있는 성경 중심의 크리스천이었다. 하지만 1662년 즈음, 이들은 자신들의 자녀와 손주 중 많은 수가 이름뿐인 기독교인, 즉 명목상의 크리스천이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유아기 때 부모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으나 성인이 되어서는 입교하지 않는 많은 젊은 세대를 위해 ‘반쪽짜리 언약’(Halfway Covenant)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그들의 투표권을 인정해 주었다.우리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 그리고 6장 20절부터 25절의 말씀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이 본문은 우리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려 준다.1. 하나님을 가슴 깊이 사랑하라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신 6:6). 그리고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라는 뜻은 위선자나 모순을 일삼는 사람처럼 마음과 행동을 따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아무런 감동 없이 기계적으로 섬기거나 부분적으로만 사랑해서도 안 됨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청년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에 민감하다. 이는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의 신앙으로부터 돌아서게 된 첫 번째 이유다. 예를 들어,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하던 청년들은 교회가 인종차별 정책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모순적인 상황을 목격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기독교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고 말았다. 또한 그들은 시민권 투쟁에 반대하는 위선적인 기성 교회를 바라보며 결국 하나님을 떠나갔다.2. 진리를 삶 속에서 실천하라우리는 복음이 삶 속에서 행위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복음은 결코 학문적이거나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들에게 시간마다 주기적으로 말씀 강론을 진행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앉았을 때에든지 [중략]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리가 삶의 일부가 되도록 그들을 이끌라는 의미이다.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일련의 강연이나 수업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자녀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녀들이 삶 속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방향성을 놓고 고민할 때, 복음에 가치를 두며 나아가도록 그들에게 영적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한다.3. 삶을 통해 증언하라 신명기 6장 20-25절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나의 믿음의 행위가 세밀히 연결되어야 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변화, 즉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신 사실이 나의 신앙 생활을 어떻게 선하게 바꾸어 가고 있는지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 우리를 … 인도하여 내셨나니.”스스로의 신앙과 나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알려 줄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자녀들에게 본이 될 수 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겪는 성장통에 대해 그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고, 회개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아름답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을 증언할 때 반드시 격식이나 공식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요약하자면, 우리는 앞선 세대로서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현실적인 선택 앞에서 영적으로 지혜로워야 하며, 그 믿음 생활이 주님과 인격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볼 때, 세대를 이어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제도와 공식적인 가르침에 의지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가르친다면 그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들이 교회에 참석하도록 이끌기만 하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하지만 젊은 세대는 단지 앞선 이들의 본이 되지 않는 믿음 생활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모 세대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적 문제 앞에서 보여 주는 모순, 또 영적 변화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권위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경험하면서 믿음의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Pass on Faith to the Next Generation번역: 이주일
가정
양육
신앙전수
사랑하라
실천하라
증언하라
진리
반쪽짜리언약
Covenant
개혁의 불을 밝히다
by R. C. Sproul
2018-12-19
나는 부흥의 시작을 외치는 교회 홍보 문구를 볼 때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런 교회들은 으레 부흥의 시기를 스스로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부흥에 대한 시간표를 정할 수 있는지 의아하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서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부흥은 성령이 마른 뼈들 속에 들어와(겔 37장), 그분의 능력을 행사함으로 새 생명을 일으키실 때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지 않으신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성격의 부흥은 그 어떤 인간의 프로그램으로도 관리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사람도 종교개혁의 스케줄을 스스로 정한 일은 없다. 웨일스의 부흥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예정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각성도 사람의 시간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 역사의 이런 장엄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 안에서만 일어났다. 즉, 하나님이 죽어 가는 교회에게 그분의 능력을 베풀어 주셨을 때에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부흥과 개혁의 차이를 잘 파악해야 한다.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것처럼 부흥은 생명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가 교회의 핵심 목표가 될 때 선교와 전도 활동은 종종 부흥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적 생명의 부흥이 반드시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교회와 사회가 유지되는 틀이 바뀌는 것을 가리키는데, 부흥이 개혁으로 발전하려면 복음이 사회의 문화를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부흥은 다수의 새로운 크리스천을 낳을 것이나, 이 새로운 사람들이 문화의 변화를 이끌고 결국 개혁에까지 이르려면, 그들이 먼저 신앙적으로 성장해야만 한다. 개혁이 좋은 쪽으로의 변화를 이끈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얻겠지만, 우리는 모든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사람들은 침체 상태에 있거나 진전이 없다고 느낄 때에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변화가 진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독약을 마신다면 몸에 곧 변화가 찾아오겠지만, 그것은 더 좋은 쪽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이처럼 방향성의 위험이 뒤따름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많은 경우 우리를 좋은 길로 이끈다. 오늘날 우리는 기존 칼빈주의 5대 교리에 집중하는 ‘신칼빈주의’의 태동을 목격하고 있다(여기서 지적하는 ‘New Calvinism’은 2006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개최된 목회자 컨퍼런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콜린 한센[Collin Hansen]이 명명한 표현으로서 19세기 네덜란드에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에 의해 주도된 ‘신칼빈주의’ 운동과는 구별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교계는 물론 심지어 세속 매체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5대 교리에 국한시켜 이해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이 5대 교리를 개혁파 신학의 전체 구조로 나아가기 위한 길 또는 다리 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찰스 스펄전은 칼빈주의를 전체 성경신학을 표현하는 닉네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펄전을 비롯한 과거의 많은 신학 거장들은 개혁파 신학의 핵심이 이 5대 교리(곧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의 교리 체계에 반대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정립된 교리)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개혁파 신학은 서로 분리된 여러 개념들을 그저 한데 모아 놓은 혼란스러운 신학이 아니다. 오히려 개혁파 신학은 조직신학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가 곧 그분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보여 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만약 사람의 눈에 더욱 일관되어 보이도록 성경에 다른 무언가를 첨가하고 또 지나친 획일화를 추구한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신뢰할 수 있는 조직신학으로 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참된 조직신학은 성경을 거시적인 관점으로 분석하여, 전체 흐름에 내포된 신학적 구조를 밝혀낸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적인 생각도 덧붙이지 않으며,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일관된 방식으로 풀이하는 학문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다. 즉, 개혁파 신학은 인간에 중점을 두지 않으며, 개혁주의 전체에 걸쳐서도 하나님의 교리가 핵심을 차지한다. 사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다른 모든 교리를 알아가는 근간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선택적 구원 교리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반-가톨릭 신학이 아니다. 사실 개혁파 신학의 뿌리가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행보에 저항했던 종교개혁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정의는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공교회 곧 보편적인 기독교(catholic Christianity)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이는 교회 역사의 초창기 1천 년 동안 정립된 에큐메니칼 신조(ecumenical creeds)를 그 본질로 삼는다. 에큐메니칼 신조는 특히 4세기의 니케아 공의회와 5세기의 칼케돈 공의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들을 포함한다. 따라서 에큐메니컬 신조는 삼위일체나 예수님의 속죄와 같은 정통 기독교의 모든 교파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교리를 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사상 역시 모든 크리스천이 따르는 교리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이전 것과 완전히 구별된 새로운 신학이 아니며, 기독교의 모든 교회가 따르는 공통의 신학적 기초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칭의에 대한 개혁파 신학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와는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개혁파 신학은 과거의 종교개혁이 그러하였듯이 칭의의 중심에 복음이 자리한다. 개혁파 신학은 마틴 루터(Martin Luterh)나 권위 있는 종교 개혁자들의 은혜적 교리 위에 굳건히 서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 오직 성경과 오직 믿음은 비록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명백하게 공표되어 있지 않지만 개혁파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들이다. 이상의 모든 설명은 개혁파 신학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훨씬 넘어서는 총체적인 세계관임을 말해 준다. 개혁파 신학은 언약적이고, 성례적이며, 세상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개혁파 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종속되어 있고, 성경의 가르침 전체를 보게 하는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진정한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단순히 칼빈주의의 부활이 아니다. 참된 개혁은 우리 안에서 복음을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부활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복음이 명백하고 충만하게 선포될 때, 하나님이 펼치시는 구속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세상에서 놀라운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만 구원의 능력을 행사하신다. 우리가 개혁을 원한다면, 다른 누가 아닌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 그만 어둠에서 복음을 끌어내어, 모든 개혁의 고백이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 즉 “어둠 후에 빛이 있다”가 되도록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루터는 “모든 입이 신약성경의 참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라고 소리 높였다. 더불어 루터는 복음을 명백하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세상과의 갈등을 마주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했다. 또한, 본능적으로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약함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숨기고, 복음을 희석시키며, 또 복음을 모호하게 만드는 유혹에 이끌리게도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에 내재된 세상과의 마찰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락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게 복음은 그 자체로 장애물이자 하나의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복음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개혁을 원한다면,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힘써야만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Fueling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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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하나님의영광
시골에서 목회할 때는 천천히 진행하라
by Dayton Hartman
2018-12-18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대도시보다 느리고, 또 작다. 따라서 시골에 교회를 개척할 때는 독특한 노력이 필요하다.신학교 시절에, 나는 대도시에 필요한 교회 개척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특히 팀 켈러(Tim Keller)는 교회의 선교적 목표를 도시 중심적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그렇다. 대도시는 교회가 절실히 필요하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도시 개척에 대한 소명은, 시골에는 교회를 개척하지 말라는 소명으로 오해 받아 왔다. 켈러는 우리가 인구 증가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도시에 더 많은 교회들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런 내용을 잘못 받아들여 시골 지역도 도시처럼 더 발전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시골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복음이 선명하게 증거되는 사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에, 우리는 도시 목회를 강조하는 와중에도 시골 지역이 안고 있는 필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도시 개척과 ‘더불어’ 시골 개척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복음중심적 교회(gospel-centered church)를 개척하려는 노력은 양쪽 상황에서 다 필요하다.수년 전에 우리 부부는 노스캐롤라이나 동부의 여러 시골 지역으로 둘러싸인 한 작은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개척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내용은 대도시 개척을 위한 모델과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내용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환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작은 마을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도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그렇게 리디머교회(Redeemer Church)를 시작한 게 2013년 9월이었다. 이제는 5주년이 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나는 시골에 교회를 개척하며 배운 네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1. (당신이 원치 않을 때에도) 천천히 움직여라록키 마운트(Rocky Mount)와 같은 작은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트랙터 뒤에서 속력도 못 내고 갇히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농부들은 논밭 사이를 지나기 위해 지역 도로를 이용한다.특히 내 마음이 급할 때는, 오히려 그런 순간들이 마치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해 예비된 훌륭한 기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속도를 내서 앞길을 막는 콤바인이나 수확기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그 기다림은 고통스러울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런 경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실제로 중소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이주해 간 사람인 내가, 만일 그런 경우 앞에 있는 농기구 차량을 추월하여 속력을 낸다면, 나는 분명히 외부자로 여겨질 것이다. 이런 단순한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 준 교훈이 있다. 작은 마을에서는 모든 일들이 천천히 진행되고,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개척도 그렇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으로 생각해야 한다.이렇듯 시골에서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좋다. 우리는 마을에 리디머교회의 비전을 제시하기에 앞서 5년 동안은 친밀한 관계와 신뢰를 쌓아야만 했다. 만일 약간이라도 더 빠르게 서둘렀다면, 너무 빠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2. (불편할지라도) 거주할 계획을 세우라대도시는 변화가 빠르다. 그러나 시골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시골 마을을 떠나거나 혹은 새로운 사람이 그 지역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개척은 종종 그 지역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활발하게 사역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소도시에서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의 한 클래스에서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이처럼 대학생들과 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유입이 없기에, 시골 지역의 성장은 느리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헌신하기를 권면한다. 만약 당신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헌신한다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헌신은 크고 작은 행동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신의 헌신을 보여 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지역 사업이나 단체에서 자주 봉사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그 마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빨리 해결할 수 없는 지역 사회의 요구 사항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경제 개발이나 지역 학교에 대한 투자, 또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 등) 지역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이런 헌신은 신뢰를 낳는다. 당신이 지역 사회에 더 헌신할수록, 지역 주민들은 당신을 더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을 신뢰하게 되면, 그들이 당신이 섬기는 교회를 향해 첫걸음을 떼는 일이 더욱 수월해진다.3. (당신의 잘못이 아닐지라도) 그 지역의 죄악을 품어라큰 도시들은 죄로 가득 차 있지만, 작은 마을은 안전하고 청결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이분법이다.죄인이 있는 곳마다 죄가 있다. 우리 마을은 인종 차별, 지속적인 마약 사용, 불신, 폭력 등의 죄악과 싸우고 있다. 죄에 관해서라면, 큰 도시와 시골 마을의 차이는 규모일 뿐, 심각성은 같다. 죄는 대도시에서처럼 시골 마을에서도 심각하다.일단 당신이 신뢰를 쌓으면, 당신은 지역 공동체의 죄를 ‘우리의 죄’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외부인과 같이 지역 사회의 죄악을 지적하기보다는 그 문제에 대해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4.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더라도) 구원자에 대해 말하라결국, 당신이 그 마을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복음의 비전을 제시하라. 그래서 그 마을을 병들게 하는 죄악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라.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 행하실 일이 얼마나 더 밝은 미래를 그 마을에 가져올지에 대해 이야기하라. 물론 당신이 진정으로 그 마을 주민들과 지역 사회를 위해 이런 일을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야만, 당신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궁극적으로 당신은 그 마을을 실제로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혹 이런 일에 실패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구원자가 계심을 기억하라. 시골 마을의 가장 큰 필요도 역시 그분이다.시골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괜찮다. 예수님은 빛나고 반짝이는 마을에 오신 게 아니라,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오셨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ove Slowly in Small-Town Ministry번역: 고갑균
선교전략
시골목회
복음중심적
성화
헌신
친밀한곤계
신뢰
우리의죄
구원자
완전히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소망
by Paul Tripp
2018-12-18
내가 조앤(Joan)을 만나기 수년 전에, 그녀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공해서 부유한 크리스천 사업가인 헨리(Henry)를 만나 결혼했다. 그들은 교외에 여유롭게 맨션을 짓고, 훌륭한 크리스천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몇몇 흥미진진한 사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수년이 훌쩍 지나, 조앤은 건강한 자녀를 셋이나 낳았다. 전반적으로 조앤에게 부족한 것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조앤은 헨리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니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더욱이 그는 항상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기질이 있어 보였다. 조앤은 헨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일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급속하게 확장되는 그의 사업 때문에 그가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조앤이 옳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둘의 부부 관계가 불편하고 느슨해졌다. 그들은 단지 스케줄이나 재정적인 문제가 생길 때에만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의 부재감이 점점 더해 갔다. 조앤은 둘 사이의 소원한 관계에 대해 말하려고 했지만, 그는 항상 대화를 회피했다. 절박감을 느낀 조앤은 결혼 생활을 위해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헨리에게 다시 접근하기 전에 제대로 된 조언을 받기를 원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를 만났다. 조앤은 상처 입고, 좌절하고, 완전히 지쳐서, 주말 동안 가장 가까운 친구 두 명과 함께 멀리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18개월 동안, 헨리도 빠져나갈 출구를 철저히 계획하고 있었다. 모든 자산을 그의 동업자의 이름으로 전환하면서, 회사에서 손을 뗐다. 그는 빠져나가기를 원했을 뿐 아니라, 조앤을 정서적으로나 재정적으로 궁지에 빠뜨리기를 원했다. 조앤이 운전해서 나간 지 30분도 되지 않아, 트럭들이 집에 도착했다. 조앤이 일요일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서 맨 먼저 발견한 것은 집이 완전히 어둡다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목까지 차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문 옆의 라이트 스위치를 찾았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벽과 텅 빈 거실과 커튼도 없는 창문에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히스테리 상태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집안 곳곳을 뛰어다녔지만, 모든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자신의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녀는 부엌의 차가운 대리석 조리대 위에서 한 장의 쪽지를 발견했다. 그 쪽지에는, 헨리가 절대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만약 조앤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보러 오도록 허락하겠지만, 그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조앤이 월요일 오후에 나에게 처음 한 말은 “저는 모든 소망을 다 잃어버렸어요”였다. 오랫동안, 조앤의 소망은 위험한 소망이었다. 그것은 한 남자에 대한 소망, 물질적인 대상들에 대한 소망, 집에 대한 소망, 가정에 대한 소망,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소망이었다. 사람들, 사회적 위치, 또는 재산 등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인 것들은 결코 소망의 원천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헨리는 여전히 그들 부부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조앤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여럿에게 그녀를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고, 그 아이들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 법정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조앤은 이 깨어진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아픈 삶의 현실을 직면하고 있었으며, 달아날 출구가 없었다. 그녀가 매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의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쉬워 보이는 매우 낙심되는 시기였다. 상황이 어떻게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렸는가? 조앤과 당신,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너져버린 집과 같다. 모든 방들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지고 손상되었다. 그 가운데 어떠한 부분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순수한 영광 같은 것으로 빛나지 않는다. 죄는 이 세상을 애석하고 끔찍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당신은 매일 육체적, 정서적, 영적, 관계적인 깨어짐으로 고투하는 우리 각자의 삶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국소 마취 상태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지 잊어버렸다. 우리는 현재의 삶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망가진 집이며, 이것이 우리를 온갖 종류의 문제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이 손상된 시력은 대체로 세상과 관련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성경은 영적 헌신의 신비한 삶을 수록한 고차원적인 두꺼운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일상 생활의 깨어짐으로부터 분리되는 더 없이 행복한 상태를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세상에 대한 책이다. 성경은 불행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진실한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세상을 실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큰 화면으로, 세밀한 내용까지 나오는 고화질의 화면으로 직면한다. 성경은 참되고 정확한 내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의 상황에 대한 성경의 솔직함은 철저하게 진단하는 관찰을 통해 나온다. 좋은 진단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해 주며, 성경은 매 페이지마다 인간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6장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도 거의 같은 말씀을 한다. 이 본문들 각각은 원래 의도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당신과 내가 직면하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성경은 그 진단적인 관찰에서 정직할 뿐 아니라, 타락한 세상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스토리를 보여 주는 데에도 정직하다. 당신은 창세기 4장에서 형제를 잔혹하게 살해한 충격적인 기사를 접할 수 있고, 열왕기와 역대기에서는 표리부동한 이스라엘의 암담한 우상숭배, 그리고 성과 권력과 돈에 얽힌 권모술수를 접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정치적인 동기로 영아들을 살해한 헤롯의 이야기와 메시아에 대한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진 비뚤어진 정의를 보여 준다. 성경의 진단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속에는 성경이 우리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우리가 자신에 대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내용 사이에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당신과 나는 각자 자신을 실제의 모습보다 더 지혜롭고 성화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지적할 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잘못 판단되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세상의 가장 정확한 진단 도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본질을 본다. 이것은 나의 가장 큰 결핍이 환경적인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의 가장 큰 결핍은 타락의 깨어짐이 모든 상황, 모든 관계, 모든 환경을 파괴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내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무엇을 직면하든지 상관없이, 삶에서 내가 겪는 최대의 문제는 나의 밖이 아닌 나의 안에 존재한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인 상태에서 발견된다. 내 안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그것은 내가 갈망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이 무너진 집의 가혹한 현실을 최소화하거나 축소하거나 부인하려는 시도를 거부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죄인인 자신의 정체성만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다. 그 무게를 우리가 감당할 수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죄인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당신은 은혜의 자녀이기도 하다. 이러한 두 가지 정체성은 건강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직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는 사람만이 은혜에 대해 감격할 수 있고, 오직 은혜만이 당신의 죄와 이 세상의 깨어짐의 어마어마한 현실을 겸손하게 직면할 용기를 줄 수 있다. 성경 전체는 과분한 구속의 스토리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기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 가운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임재를 통하여, 이 타락한 세상의 쓰레기 한복판에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본 모습(곧 죄인의 모습)으로부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새로운 모습(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깊고 철저하게 변화시키신다. 오직 은혜만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일깨워서 죄로 망가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성경의 사건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은혜로 인해 영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 결과, 안팎의 잔해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에 귀 기울임으로써, 지금 바로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영원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기 전까지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고, 이 삶에서 직면하는 현실의 진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또는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영원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 상황에서나 기독교적인 참된 소망을 가져다 주며, 소망은 통찰과 용기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손으로 하라고 명령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이라고 하는 분명한 실재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 이생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라고 말한다(고전 15:25-26). 이것은 우리의 세상이 우연과 혼동의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구속주의 인격적인 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이며, 그 구속주는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자애로우시고, 심지어 사망까지도 패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시다. 악은 지금 패배하는 과정에 있다. 사망은 궁극적으로 죽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소망을 품을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정의와 긍휼은 이길 것이다. 그렇다면, 조앤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니, 조앤의 남편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의 아이들은 부모의 결혼 파탄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조앤은 대부분의 친구들을 영원히 잃었고,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수년 동안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조앤은 예전에는 전혀 품지 못했던 소망을 가졌다. 그 소망은 그녀를 결코 수치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낙담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조앤은 영원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소망을 보증하는 것이 그녀의 은행 통장이나 집 크기, 친구들, 남자의 사랑, 어머니로서의 일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이 그녀에게 보증하는 영원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당신도 그 영원에, 바로 당신의 참된 소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여기서 당신에게 주어진 약속들, 즉 당신의 통치자가 하신 모든 말씀들은 믿을 만하며 확실하다고 보증하는 약속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배신, 불의, 분노, 복수 등이 없는 영원한 날이 올 것이다. 더 이상 고통이 마음을 채우지 않고, 더 이상 눈물도 흐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에, 조앤은, 그리고 당신과 나는, 마침내 회복된 집에 들어가며 우리의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말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pe in This Broken-Down World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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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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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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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헌신
하나님의 No에 Yes로 답하다
by Ann Swindell
2018-12-18
하나님이 항상 치유와 온전함을 보장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나를 즉각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그분에게는 정말 작은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과 씨름했다.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쯤, 10여 년 동안 나는 털을 잡아 뜯는 병과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병을 싫어하고 멈추기 원했지만, 매일 내 속눈썹과 눈썹을 쥐어 뜯어 냈다. 신경학적으로 나의 뇌는 그 행동을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었다. 치유를 요청하는 기도에 대해 계속 ‘아니다’(no)라는 답변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고 멀리 계신 것 같았다.어느 날, 하나님께 불일 듯 불만이 일어나자, 나는 기도실로 향했다. 일기장에 분노와 경솔한 말들을 막 쏟아냈다. 하나님이 나쁘고 냉담하며 멀리 계셔서 이런 문제를 잘 다룰 줄 모르시는 것 같다고 써 내려갔다. 속눈썹을 일기장 여기저기에 흩어 놓은 채, 나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울며 눈물을 흘린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나는 외쳤다. “하나님 내가 계속 묻고 있잖아요. 왜, 왜 나를 치유하여 주시지 않는 건가요? 그 많은 시간의 기도와 간구들, 금식한 날들까지, 그것들은 다 무엇인가요? 아무것도 아닌가요?”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지. 그것들은 아무 변화를 주지도 않았어!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고.”나는 그분을 밀어내기 원했다.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기를 원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씁쓸해지고 분노의 씨가 불신의 뿌리로 깊게 자리잡는지를 알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쓴 뿌리와 하나님과 싸운 방식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정신이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상했다.반항이라는 선택우리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요청했는데도 우리의 상황을 바꿔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반항 아니면 순종 밖에 없다. 반항은 우리를 재판관의 자리에 앉힌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당연히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언한다. 그분이 우리의 계획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마음이 상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이 잘못했다고 외친다.물론 하나님께 솔직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솔직함과 반항적인 솔직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진정한 솔직함은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겸손과 신뢰로 간구한다. 반항적인 솔직함은 하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 우리의 솔직함이 반항적으로 변하면, 결국 우리는 거칠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그분을 판단하고 그분으로부터 도망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필요한 위로의 원천을 거절한다.순종이라는 선택두 번째 선택은 순종이다. 우리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네’(yes)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단기간 동안에는 더 힘들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계속 동행하려면, 오직 이 길 밖에 없다.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그 교만한 반항심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셨다. 그 결과 작은 순종의 걸음들을 옮기자, 그분은 자신의 진리와 온유를 내게 상기시켜 주셨다. 그분은 나의 마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첫 번째 방법은 내 교수님의 아내인 니타(Nita)라고 하는 분을 통해 나를 도우시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한 달에 두 번씩 만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도했다.어느 날 오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노, 불만, 상처 등이 거품처럼 커져서 식탁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니타의 말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 손위에 올려놓고 함께 울었다. 그녀는 꾸짖거나 즉각적으로 나를 바로잡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어딘가로 억지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지도 않았다.그녀가 이 말을 했을 때, 그 목소리는 바이올린 소리처럼 울림이 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앤(Ann),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항상 아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늘 알고 있어. 항상 알고 있지.” 내가 말했다. “그분의 응답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니다’라는 대답이 서로 조화가 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렵네요.” “앤, 이해해요. 나도 그래요.”나는 니타가 감내해야 했던 상실들, 겪어야 했던 슬픔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 쉬고 다시 말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내가 동의했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지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어느 누구도요.” 물론,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실 때도 그 말씀은 사실일 것이다. 그날 니타가 건네 준 친절하고 진실한 말은 내게 축복이 되었다. 그녀는 성경 말씀을 들어 이야기해 주었고 내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날 하나님은 나의 상처와 불평, 불만을 치유하기 시작하셨다.두 번째 방법으로 나는 순종하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와 만났을 때, 그분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보낸 성경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이해할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게 되었다. 진정으로 겸손한 기도로 그분께 마음을 쏟아내자, 나는 그분의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다.치유보다 더 나은 것하나님께 조금씩 순종하자, 그분은 내가 반항심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 나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다. 반항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은 어떤 병이나 원치 않는 증상을 계속 다루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치유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다. 그리고 그분이면, 내게 충분하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ghting to Say ‘Yes’ When God Says ‘No’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
반항
순종
선택
치유
yes
no
그리스도
마음의 평안을 확신하지 말라
by Matt Rogers
2018-12-17
사라(Sarah)는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이다. 대학 선택을 앞두고 네 개의 대학 캠퍼스를 돌아본 후에, 그녀는 한 학교로 마음을 정했다. 부모님이 그 선택의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그냥 마음이 편안해서요”라고 대답했다. 또 벤처 사업을 구상 중인 한 사업가는 “그 사업이 어느 정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업을 진행하는 건 옳은 선택입니다”라고 말했다.우리가 ‘평안’이라는 내적 감각을 의사 결정의 궁극적인 이유로 내세울 때, 그 결정에 대해 아무도 당신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어쩌면 이 심리적 평화를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일종의 긍정적 사인(sign)처럼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틀렸거나, 혹은 당신이 느끼는 그 평안이 틀렸다고 말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결정 앞에서결정해야 하는 일이 대학 선택이나 사업 추진처럼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인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심리적 안정을 따라가는 일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선택에 대한 그러한 접근을 삶의 다른 영역으로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예를 들어,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목회자의 설교에서 복음의 선포를 들을 수 없고, 교회 행사의 많은 부분에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만약 다른 이유로 당신이 그 교회에 편안을 느낀다면?또는 배우자와 자주 논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평화롭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을 속단한다면?혹은 동성애가 당신에게 심적 안정을 주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라고 판단한다면?이러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심리적 평안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신호가 아닐까?’ 설마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을 느끼지 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일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고장난 나침반불행하게도 우리의 마음속 나침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망가졌다. 그리스도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거짓되고 부패한 상태로 있게 된다(렘 17:9). 이러한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지라도, 당신의 마음에 평안을 안겨 준다. 죄를 짓는 것은 곧 부패한 본성과 일치하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죄를 지을 때 내적 평화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참된 복음을 알게 하신다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놀랍도록 거듭난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또 그분을 찬양하고자 하는 새로운 심령이 내면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우리의 심령은 그 행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게 된다. 결국 죄는 점점 더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내적인 평화는 사라진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당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한다면, 과연 스스로의 내적 평화가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과연 그 평안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애매모호한 답을 내놓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 때문이다.1. 어쩌면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거룩하지 못한 행동을 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아직 참된 회심이나 거듭남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특히 거듭남은 신앙생활의 연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신이 여전히 죄에 빠져 영적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 마음은 의를 바라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느끼는 평안은 그저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시일 뿐이다. 2.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과거에는 기쁨과 평안을 안겨 주던 죄에 대하여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과거에는 죄를 지으면서 쾌락을 느꼈겠지만 회심한 크리스천이라면 이제 쓰라림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과거에는 그저 순간적인 불안을 느끼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깊은 뉘우침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죄에 대하여 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남을 경험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합리화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죄를 명백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감동이 사라지면서 점차 내적 불안감은 사라지기 시작하고, 심지어 자신의 죄를 정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지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특히나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불편함이나 거부감이 들 정도로 영혼이 메말라 버렸다면, 크리스천이라 해도 이전보다 쉽게 죄를 정당화할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로, 우리는 무언가 선택하기에 앞서 자신의 감정보다 더 신뢰할 만한 다른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은 '내 마음이 평화로운가?'라는 질문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만약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그 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면, 당신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늘 옳으며 변치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만약 죄악을 즐기려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윤리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당신은 성경을 왜곡해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에 속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이 보고, 느끼고, 소유하는 그 모든 감각보다 언제나 앞서야만 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설령 이와 관련된 죄가 당신에게 내적 평화를 안겨 준다고 할지라도, 그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적 욕망을 잠재우며, 죄를 회개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크리스천의 이웃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 같은 이웃일지라도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또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가 비록 내게 심리적 피로와 고통이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인내해야 한다. 2.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조언하는가크리스천 공동체는 성경 다음으로 우리의 선택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인간이 그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고자 쉽게 성경을 왜곡하려 하듯이, 크리스천 공동체에도 당신의 감정적 선택을 옹호하고 부추기는 몇몇의 사람들이 주위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감정적 평안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기쁨, 평안, 만족을 찾도록 배워가는 곳이다.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죄에서 벗어나도록 함께 힘써 나가는 곳이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나의 연약함과 죄까지도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다독여 줄 믿음의 지체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자들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라.또한 신앙적으로 보다 성숙한 지체가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조언할 때에, 이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당신의 마음가짐도 역시 중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올바른 질서, 올바른 평안성경과 교회 공동체는 내면의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당신을 이끌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선택을 격려하고 (또는 적어도 금지하지 않고), 동시에 믿음의 동역자들이 찬성하는 말을 보내온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다. '나는 이 결정에 평안을 느끼는가?' 혹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도 좋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이 결정이 옳다고 말씀해 주시는가?'중요한 것은 질문이 아니라 질서다. 만약 당신이 내적 평안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면, 분명 당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성경을 왜곡할 것이고 또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찾아 위안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구하고, 그 다음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성숙한 지체들의 조언에 귀 기울여라. 선택의 질서를 그렇게 바로잡는다면, 분명 당신은 내적 평안과 옳은 결정이 한 곳에서 일치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삶을 형성할 여러 결정 사항들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Trust the Peace in Your Heart번역: 이주일
생활
감정
평안
선택
내적
거듭남
거룩
질서
나침반
성령님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몇 가지 방법
by Reuben Hunter
2018-12-17
나는 목회자 컨퍼런스 일정에서 ‘거룩한 교회 개척’이라는 제목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목회자들의 참여가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거룩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거룩에 대해 논하는 것은 종종 목회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삶 속에서 거룩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았던 장면들이 슬며시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 ‘선교적 교회 개척’, ‘문화적 교회 개척’, 혹은 그 외의 듣기 편한 수식어가 붙은 컨퍼런스로 발길을 돌린다.하지만 성경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두드러지게 가르치고 또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거룩함에 대해 더 많이 다루어야 할 것이다.피할 수 없는 거룩거룩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거룩함은 그분의 완벽하고 장엄한 초월성을 보여 주고,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와의 닿을 수 없는 간극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묘사한다(사 6:3). 하나님의 거룩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우리를 떨게 만드는 두려운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인내하는 그 거룩함을 강조한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거룩은 교회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성경 속 사도들은 이 새로운 정체성을 온몸으로 품어야 하는 크리스천의 소명 역시 강조한다.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또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부름 받았다”라고 말했다(엡 1:4).오직 하나님 안에 머무를 때, 거룩을 추구하는 삶은 기피하고 싶은 행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변한다. 이전에는 우리를 ‘밀어내던’ 거룩이 이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를 ‘끌어당긴다’는 경험을 해야한다. 한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삶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세상과 대립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할 때에 시대적 혹은 문화적 상황에 맞추어 포용하거나, 혹은 반대로 경계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이를 ‘상황화’라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반드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당신의 사역이 아무리 상황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또 당신이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 또는 지도자라 하더라도, 성경에 충실한 모습으로 사역하고자 한다면 세상과는 불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당신을 고상한 척하는 사람, 고루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 우둔한(혹은 위험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 지역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라교회 개척 초기 단계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기성 교회라 할지라도, 이 또한 변함없이 중요하다.교회를 개척하면, 종종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새로운 교회’를 구경하러 온다. 여기에는 사역에 헌신하려는 준비된 크리스천도 있을 것이고, 의심의 눈초리로 교회 곳곳을 살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끊임없이 계속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며, (바라건대) 비신자도 있을 것이다.이들 중 누가 그리스도의 자녀라고 공적으로 선언하기를 망설이고 있는가? 혹은 누가 당신과 더불어 교회의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하는가? 이들 중 누가 인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마지막 날에 인도자의 청산을 받을 것인가(히 13:17)? 달리 말하면, 회개도 없고 거룩하지도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분해야 할 자들이 누구인가?구별되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일은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도록 이끈다. 경계를 모호하게 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지도 않다.2. 구별되는 예배를 선택하라교회사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위해 모였고, 그 예배의 정확한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모일 때, 예배하는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배를 세상의 문화와 최대한 닮게 하려 애써서는 안 된다.우리는 예배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거행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예배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기쁨이 되지 않으니, 예배를 세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가면서까지 그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말라. 3. 구별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라오늘날의 문화는 낙관주의 못지않게 비관주의에 의해 특징 지어진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점점 더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도시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은 비관론으로 일관한다.이때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설교한다면, 교회는 모든 형태의 죄와 고통까지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죄와 타인의 정죄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지만, 복음을 통한 구원의 소망과 값없는 은혜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희망을 준다.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할 것이다. 마치 좌초하는 배와 같은 자신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안에서 교회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성경 앞에 나아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4. 탁월한 연합을 보이라복음이 주는 은혜보다 더 강력하게 연합을 이끌어 내는 힘은 없다. 정치적 성향, 타고난 인종, 경제적 소속 집단 등을 기준으로 점점 배타적인 사회가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삶에 대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 및 집단에 속한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또 연대를 이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그런 행보를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곳 런던에서는 웹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젊은 부부가 타국에서 이민 온 싱글맘의 창업을 돕기 위해 웹사이트 개설을 지원한 예가 있다. 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이다. 그 젊은 부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도운 싱글맘을 그들이 참여하는 교회에 초대하여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연합을 추구하는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이는 많은 기도와 겸손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분된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연합은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흠 없이 서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거룩함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교회를 세우자. 그리고 그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Become Holy—as a Church번역: 하늘샘
교회
교회사역
거룩
방법
구별
예배
선택
메시지
연합
그리스도
목사님, 예배에 기도를 더 많이
by Jason Helopoulos
2018-12-17
초청을 받아 미국 교회를 순방한 어느 아프리카 목회자 이야기를 들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교회 대표가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미국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내 경험도 그렇다. 미국 교회는 다른 건 몰라도 기도에는 유독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특히 주일예배 같은 회중예배에서 이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배에 3분 정도의 대표 기도가 들어 있는 교회도 찾기가 쉽지 않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독립성을 중시하는 미국인의 정서가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면, 미적지근한 신앙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예배 중에 기도시간이 현저하게 부족한 교회는 이제라도 회개하고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건 이것이다. 기도를 회복하라교회에서 공동 기도를 시행하거나 증진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예배에 기도를 필수 순서로 삼는 것이다. 몇 곡의 찬양과 이어지는 성경봉독만으로 예배를 마친다면, 신앙의 성숙을 기대할 수 없다. 찬양을 기도의 한 형식으로 본다고 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예배에 공동체를 대표하는 공식 기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성도에게 기도를 배우고 직접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나는 여러 차례 세미나에서 가정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본질적인 통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강의가 끝나고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하나같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줄 모르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 회중예배 시간에 기도가 부족할 때 독감이 번지듯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기도함으로써 기도를 가르치라회중예배 시간에 기도 비율이 늘어날수록 자연스럽게 성도는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때 기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기도의 구조, 어조, 어휘, 태도, 강조하는 항목, 적용되는 말씀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기도는 가르치는 만큼 배울 수 있다.주일 예배에서 대표기도 시간을 갖는 것은 성도에게 단시간에 기도를 교육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하지만 대표기도의 이유가 꼭 교육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배에서의 대표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공동체의 필요와 갈망을 간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우리의 영적 삶은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지체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중기도는 모든 성도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회중예배를 위해 여러 형식의 기도를 시도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교회를 위한 일반적인 대표기도의 형식으로 기원하는 기도, 경배하는 기도, 죄를 고백하는 기도, (목회나 중보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 설교를 위한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간구하는 기도는 좀 더 긴 형태를 갖출 필요가 있다. 물론 너무 긴 기도는 회중을 깜빡 졸게 만들 수도 있지만 회중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 길면서도 잘 구성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즉흥으로 기도하기보다는 기도를 미리 적어 두거나 준비해 두어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오늘날의 목사 또는 장로는 사전에 따로 준비하지 않고 교인의 마음을 감화하고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긴 기도를 즉흥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의 방식으로, 모든 성도가 함께 준비된 기도문을 소리 내어 읽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정기 기도회를 열라교회에서 회중기도가 고취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정기 기도회를 여는 것이다. 이 기도회는 말 그대로 ‘기도’가 주가 되는 모임이다. 그런데 나는 기도 대신 가르침, 설교, 또는 찬양으로 가득한 ‘기도회’를 많이 보았다. 기도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무릎 꿇고 공동의 제목을 위해 간구하는 자리이다. 기도회의 횟수는 일주일에 한 번이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좋다.이때 기도회의 순서가 반복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도회 중에 회중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변화의 장치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총 한 시간이 기도회를 위한 시간이라면, 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편이 좋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기도의 방법과 유형, 주제를 사용해 보는 것이다. 기도를 위한 방법이나 유형, 주제의 조합은 무한하고 다양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기도회에서 벗어나, 참여하고 싶고 진짜 기도하고 싶은 ‘기도회’를 만들 수 있다.회중예배에서의 기도가 성숙될 때 성도 개개인의 기도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기도의 훈련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이다. 특별히 나는 복음주의 교회가 기도에 대해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추구하길 바란다. 성도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확신한다.원제: Pastor, Include More Prayer in Your Church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주영식
기도회
주일예배
공예배
대표기도
회중예배
회중기도
정기기도회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
by Glen Scrivener
2018-12-14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이 구절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부터 ‘곤란함’을 느꼈다. 도대체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당신은 ‘그게 뭐가 그렇게 복잡한 것일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히 당신이 이 구절을 읽으며 복음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더욱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본래적인 의미와는 정반대로 이해하고는 한다. 그런 나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도 어리석다는 생각을 한다.거꾸로 된 사랑내 생각의 오류는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착각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구원의 작업이 필요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에 앞서 정결하게 하셨고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 안에서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그래서 시편 18편의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라는 구절을 마주할 때, 성경이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음에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이 말씀을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요 3:16-17).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이유도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라고 말한다(엡 2:4). 더 나아가, 하나님은 무력하고, 사악하며, 죄로 가득 찬 원수들을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기록한다(롬 5:6-11).이러한 구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했는가?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즉, 사랑이 먼저고 구원이 그 사랑의 결과인 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하시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숨이 멎을 듯이 놀라운 사랑왜 이런 구절들이 중요한가? 한 가지 이유는, 죄인인 나를 그리스도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상태여야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악한 나도 사랑하신다.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정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건 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정결하게 해 주셨다.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의문이 찾아올 때면, 죄인인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일에 대한 증표인 십자가를 떠올려야 한다. 내가 구원받은 상태인지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의 정결함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같은 자들에게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분은 내가 가장 선한 상태일 때에 그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내가 가장 더러운 상태에 있을 때에 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을 통해 주어진 귀한 구원은 나를 향한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증명한다. 그분의 사랑은 경건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던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하시는 모든 사역의 밑바탕에는 이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나는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나를 향한 변함없고, 고갈되지 않으며,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8:19).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n’t Die So He Could Love You번역: 주영식
복음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거꾸로된사랑
놀라운사랑
구원
시편18
십자가
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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