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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5-19
지난번에 생각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한 것의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 the divinity, the divine nature)과 성령님의 신성을 확언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좀 더 분명히 생각해 보자. 물론 예수님께서 참된 인성(人性, the humanity, the human nature)을 가지셨다는 것을 전제로 이 논의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인성이 분명히 확립되지 않은 신성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오해와 이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셔서 그 부모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시고(마 13:55; 눅 1:31; 3:23; 4:22; 요 1:34; 6:42),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몸과 영혼의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지금은 ‘하늘’(heaven)에 계시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그때나 하늘에 계신 지금이나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도 “참된 인성”(vere homo, very humanity)을 가지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동시에 그분이 그저 인간만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vere deus, very God)이시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기독교적 고백이다. 일단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강조해야 할 일은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다. 기독교 단체라고 하는 곳이나 심지어 교회라고 하는 곳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믿지 않는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 단체나 사람들이 사실은 기독교 밖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 교회(Christian church)가 아니며,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Christian)가 아니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해야 교회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참된 신성을 가지셨다고 공언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것도 말할 수 있다. 창세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매우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정통적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자께서는 영원 속에서 “독생하신 분”이라고(요 1:14) 말해야 한다. 이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 그가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면, 또 다른 이단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를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한다. 예전에 알렉산드라의 아리우스가 그와 같이 생각하고 주장했던, 그러다가 이단으로 선언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영원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중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주께서 친히 이점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기에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이를 말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이는 다음 몇 가지를 함의하는 말이다.첫째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흔히 영원이라고 부르는 그때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생각할)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셨다(the One Triune God)는 사실이다.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the Triune God)께서 유일하신 존재로 계셨다. 아무 것도 없는[무(無)] 중에 참된 존재가 있었으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영원히 기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이것을 삼위 안의 영원한 교제, 영원한 교통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며(perichoresis), 영원히 함께 하시며, 깊은 교제를 나누신다.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것도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둘째로, 그 삼위(三位, three persons) 중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하자면, 성자는 성부의 “독생자(獨生子)”라고 성경의 묘사를 따라서 표현한다(요 1:14). 성경에 이런 표현이 없었다면 우리는 감히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이 표현을 사용하기에 우리는 이 성경적 표현을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내 아버지가 나를 낳고 내가 자녀를 낳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다 없애자는 의견은 성경에 주어진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고 성경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는 것이 된다.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사상가와 성경적 신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성경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시시때때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리하려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극복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정통적 신학에 의하면, 영원 중에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는데(eternally begotten), 이 말은 성부께서 성자 없이 계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성자는 성부와 같이 영원하다는 의미다. 이 일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 이전에는 성부만 있었고, 이 일 이후에는 성부와 성자가 있게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이단자인 아리우스(Arius)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Arians)이 주장하던 바였다. 그들은 영원 중에 “성자가 계시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 것으로 아주 악명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영원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부께서는 한순간도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며, 성자는 한순간도 성부 없이 계신 적이 없다. 성부와 성자는 (그리고 후에 언급할 성령은) 항상 같이 계셨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예전의 교부들은 “성부께서는 항상 말씀하신다”고 표현한 일도 있다. 성자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언급하신 성경 말씀을 따라서(요 1:1),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영원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은 항상 계속되는 것이니 이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오늘날에는 이런 영원 가운데 있는 소위 내신적(內神的) 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말해야 한다. 성경은 성자에 대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한다(요 1:18).이와 같이 이 땅에 계셨던 그러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분의 정체성(identity)이 다른 사람들처럼 태중에 있게 된 때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이때 “아들”이라는 호칭 때문에 또 다른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 아들[聖子]이니 아버지[聖父]보다는 조금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는 성부께서 사용하신 용어요(마 2:15; 3:17; 막 9:7; 눅 3:22; 9:35, 벧후 1:17), 그의 수태를 알리던 천사가 사용한 언어요(눅 1:3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요(마 11:27; 28:19; 눅 10:22; 요 5:19, 20, 21, 25, 26; 8:36; 17:2), 예수님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세례 요한의 언어요(요 1:34), 사도들이 사용한 언어이기에(마 14:33; 16:16; 요 1:49; 3:16, 17; 10:36; 11:27; 14:13; 20:31; 행 9:20; 13:33; 롬 1:2, 3, 4, 9; 롬 5:10; 8:3, 32; 고전 1:9; 15:28; 고후 1:19; 갈 1:16; 4:4; 엡 4:13; 살전 1:10; 히 1:2; 히 3:6; 5:8; 6:6; 10:29; 요일 1:7; 2:22, 24; 3:8, 23; 4:10, 15; 5:5, 10, 11, 12; 요이 1:3, 9) 우리들이 이 “계시적 언어”를 받아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부보다 조금 못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셨고, 성부와 같이 영원하시며”(He is one in essence with the Father, coeternal), “모든 면에서 성부와 같으시다”(being like the Father in all things)는 것을 바르게 고백해야 한다.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실 때부터가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not only from the time he assumed our nature but from all eternity)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으로 그런 관념을 가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첫째로,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서 이 고백을 참된 것으로 드러내야 한다. 성자께 참으로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않고, 그렇게 높여 찬양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해서 바르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매일 가정으로나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사적인 예배(private service)를 하는지, 특히 그가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매주일에 그분에게 공적인 경배(공예배, public service)에 동참하는지를 점검해보자.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분에게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의 일차적 목표는 모두 다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둘째로, 우리들의 삶 전반에서, 특히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도 그가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여 그분에게 의뢰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도 오직 그분에게 의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서 섬기는 자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합당한 섬김”(reasonable service)이어야만 한다(롬 12:1). 우리 주님께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를 살펴서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할 수 있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는 삶에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신성을 참으로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는 그저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함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복음
그리스도
삼위일체
신성
인성
독생자
아리우스
영원
코로나19
고난을 이겨낼 때 필요한 교훈
by Marshall Segal
2020-05-18
고난을 잘 이겨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돈 카슨(Don Carson) 교수는 “크리스천이 감당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혼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기대 수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우리 스스로가 비극에 당면하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라고도 말했다(‘How Long O Lord?’, 11).이 세상 그 누구도 인내를 가지고 점점 더 집요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고난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폭풍이 밀려올 때 어디에 서서, 어디를 봐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고난이 오기 전에 미리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왜 내게 고난이 닥치는 건지, 모든 대답을 다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알고 싶다고 해도 결코 알 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몇 개 되지 않지만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신앙의 선배 또는 동료가 고난 속에서 걸어갔던, 그래서 이미 그 효과가 증명된 길이다.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필요한 세 가지 교훈베드로 사도는 크리스천이 고난을 잘 이겨내도록 돕기 위해서, 고난 극복에 필요한 여러 교훈을 담은 베드로전서를 썼다. 물론 그들이 당한 고난이 반드시 모든 크리스천에게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사는 많은 크리스천은 이런저런 고난 속에 있고, 또 베드로전서가 담고 있는 지혜와 희망은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지금부터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능력, 안정감 그리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을 알아보도록 하자.1.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하라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제대로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비춰서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고난받는 이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받는 이들이 이 땅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게 한다. 고난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우리가 여기서 겪는 모든 고통이 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또 우리 존재가 겪는 모든 경험이 다 이 고난의 순간 속에서 농축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고난은 결코 이 세상의 전부(ultimate)가 아님도 알고 있다. 고난은 여간해서 죽는 날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라면, 고통이라는 놈이 언젠가는 순식간에 종말을 맞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즉, 천국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고난을 전혀 다른 태도로 맞을 수 있게 된다. 랜디 알콘(Randy Alcorn)도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암에 걸린 부인과 함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천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함으로 그 부부는 지금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천국을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고통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천국에 관해 명상하는 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위대한 진통제다.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의 존재는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은 단지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관문일 뿐이다(‘헤븐-천국은 이런 곳이다’, 46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천국은 당신이 잃은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당신은 더이상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천국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을 통해서 시작하고 또 만들어 가신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똑바로 알게 할 것이다. 천국에서 당신은 약하다고 느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될 것이다. 천국은 당신을 온전히 세울 뿐 아니라 아무런 고통 없이, 오로지 전율만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당신이 이 땅에서 아주 잠깐 고난을 겪은 후에 만날 현실이다. 2. 연단의 소중함을 깨달으라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슬퍼하지만 그럼에도 기뻐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난 속에 감춰놓은 선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한, 이렇게 고백하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연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면서 과연 고난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고난은 다른 축복을 앗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볼 수 있도록 한다. 교묘하게 하나님 대신 피난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 무엇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육신의 소욕과 타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자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는가(마 7:13-14)? 그런 가운데서 고난의 그림자는 그 어떤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성화로 가는 긴 길에 빛을 비춘다.사탄은 고난이 안개와 같이 걷히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맴돌기를 원한다. 사탄은 고난이라는 안개가 우리 눈을 어둡게 함으로 거룩을 향한 우리의 싸움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을 보지 못하길 원한다. 사탄은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또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단의 불이 되길 원한다. 3. 그럴수록 서로에게 더 의지하라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고, 오늘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또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로부터 고립되게 만들어 점점 더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 고난을 당하면 약하다고 느끼기 쉽다. 고립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코 자기 보호가 아니다. 고난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고 봉사하기도 힘들다고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만약에 고난이 당신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누구나 다 도망치고 싶고 또 자기 자신의 슬픔과 치유에만 집중하고 싶은 충동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강하게 하고, 또 치유하신다. 그것도 모퉁이 조각이 아니라 몸 전체의 일부로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의지하도록 하라. 스스로가 약하고 지쳤다고 느낄수록 더더욱 그래야 한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고난이 찾아올 때 누구나 다 기운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사랑은, 약할수록 우리를 더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고후 12:9). 고난이 찾아올 때, 그래서 당신이 약해지고 완전히 지쳤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함으로써 새롭고 더 의미있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기를 기대하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그리스도 안에 거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난을 받는 것 같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1세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베드로가 이런 글을 쓴 이후에 지금 당신처럼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중국에서는 갑자기 교회가 문을 닫고, 믿는 이들이 매를 맞는다. 또 이라크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절연을 당하며, 케냐에서는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크리스천이 죽임을 당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성도들의 군대를 바라봄으로, 바다 건너 또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겪는 고난 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했던 그들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넉넉히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당신은 단지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이들이 고백하는 간증뿐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사 당신을 위해서 대신 고난받게 한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1, 24). 그는 당신을 고치기 위해 상함을 입었다. 그를 십자가에 박은 못은 이제 천국에서 당신의 위치를 보장하는 증표가 되었다. 당신을 위해 흘린 그의 눈물은 이제 당신이 받고 있는 고난 속에서 의미를, 희망을, 아니 심지어 기쁨까지도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피는 당신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족을 가져다주었고, 결코 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그 모든 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넉넉히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고난을 당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to Suffer Well: Three Ways to Prepare Now번역: 무제
베드로전서
랜디알콘
돈카슨
신학
신약성경
고난
폭풍 중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
by Neil C. Stewart
2020-05-17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내면 깊이 고통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안전함을 바라는 갈망이 있다. 우리 인간은 낙원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지 결코 바이러스, 박테리아,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각종 병으로 고통 받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좋아하든지 아니면 참아내든지 간에, 현실은 여전히 고단하고 인생이라는 게임이 시작되면 사냥이 시작되는데, 확률은 결코 인간 편이 아니다. 각종 건강 보험 그리고 의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망률은 전 세계에 걸쳐 언제나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 한 사람에게는 한 번의 죽음이 찾아온다. 영원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영혼에게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통계다. “아마도 내일, 내일 죽을 지는 모르지. 하지만 내가 오늘 죽을 리는 없어. 어떤 경우라도 가장 끔찍한 두려움이 현실로 닥치는 경우는 드물어. 겉으로 보기 보다 현실은 그나마 괜찮은 경우가 많지 않아? 게다가 난 아직 상대적으로 젊고 몸 상태도 괜찮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한다. 상황이 좋을 때만 곁에 있는 친구처럼. 그러나 이런 생각은 힘든 상황이 실제로 닥치기 전까지만 유효하다. 음악이 멈추고 바닥이 내려 앉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바로 그런 순간을 맞았을 때 우리가 불러야 할 많은 노래를 주셨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믿음을 노래하는 오래된 많은 노래 중에서도 시편 46편을 따라갈 노래는 없다. 많은 시간을 거쳐서 이 찬송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죽음, 귀신 그리고 어둠에 고통받은 수많은 영혼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다. 코로나19의 열병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 이 전염병이라는 폭풍우 속에서도 당신이 편히 머리를 뉘고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베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편 46편은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산들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랜드마크의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산들이 지금 바닷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시46:2–3). 소용돌이를 한번 상상해 보라. 세상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 인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도, 인간이 겪은 그 어떤 경험도 이것 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이런 시간을 만나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묻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두려움에 함몰되지 말라“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시 46:1–2). 시편 저자의 자신감은 다름 아닌 그의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어의 배열을 고려할 때, 시편 46편 가장 처음에 나오는 두 단어에 비밀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이 생각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도록 하자.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당신을 돕는다. 그 분이 가진 모든 지혜, 능력, 거룩함, 공의, 선함 그리고 진리가 다 당신을 돕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온전하심을 동원하여 당신의 편에 서서 당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시편 저자는 지금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세 가지 독특한 측면을 규명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달려갈 수 있는 분이 되심으로 우리를 돕는다(피난처). 2. 하나님은 우리보다 강한 분이시기에 우리를 돕는다(능력). 3. 하나님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를 돕는다. 말 그대로 그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된다(시 46:1).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어떤 환난을 가져다주든지, 기독교인이라면 그 어려움을 결코 혼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위험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의 목자는 더 가까이 있다.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바로 그 분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슬픔에 함몰되지 말라두 번째 구절에서 시편 저자는 우리를 시온산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라. 산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었는지 기억하라. 누구라도 패닉 상태가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땅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사방의 벽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사방팔방으로 뛰고 어미들은 멀리 도망가기 위해서 아이들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거룩한 도시의 분위기는 패닉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오히려 평화롭고 기쁨에 차 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4–5).시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는 곳이다(시 46:4-5). 시온에 사는 성도들은 특별한 부류다. 그들은 가장 끔찍한 재난 가운데서도 기쁨이 무엇인지 안다. 그건 그들이 생각이 없거나 고통에 무감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떤 환경에서도 침착하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들을 안전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은 구약 속 인물들이나 우리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도 또는 동 트기 직전이라도, 우리가 적의 공격을 받아 가장 약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시 46:5).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상대로 다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이 한마디만 하면 온 세상은 바로 녹는다(시 46:6). 하나님에 대항해서 일어난 세상 나라들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임재의 가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다 열려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그 가치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는 신비한 요정처럼 감추어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야곱, 선천적으로 불안하고, 힘들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또 방황하고 또 잘 속이는 그런 야곱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신다(시 46:7). 야곱과 같은 사람에게도 손을 뻗는(물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 전)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가 당신을 돕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라힘든 시대를 맞아 고통이 점점 더 커질 때, 우리는 작은 나무만을 보느라 큰 그림을 놓치기 쉽다. 고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다 집어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연민과 같은 감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에 빠졌을 때 가장 쉽게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점도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받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눈을 높이 들라고 말씀하신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시 46:8). 하나님은 역사의 장면 뒤에서 일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그는 세상 나라들이 하나님을 상대로 일으키는 오만한 반란을 제압하시고(시 46:9; cf. 시 2), 또 그의 이름을 이 땅에서 높이시며(시 46:10),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신다(시 46:11).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예술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는 이 명령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를 잘못 인도해왔다. 나는 이 말씀을 읽고 버몬트 주에서 있었던 어느 눈 덮인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차 뒷자리에서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이성, 친절함, 그리고 사랑은 이미 차창 밖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이들의 머리에 든 생각이라고는 자기들의 영역을 지키겠다는 것, 어떤 경우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게 다였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친절하지만 엄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 바로 이 동사가 지금 시편 저자가 쓴 단어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백성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바로 이런 실수야말로 재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가장 잘 저지르는 게 아니던가? 그 재난이 아픈 자녀든, 비정상적인 병원 검사 결과든, 추락하는 시장이든 아니면 무섭게 다가오는 감염병의 위협이든지 간에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작은 것에 연연하는 바람에 큰 그림을 놓치고, 이 모든 어려움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곤 하는가? 로얄벨파스트 어린이병원(Royal Belfast Hospital for Sick Children)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던 때에 나는 아픈 자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보지 못하는 많은 부모를 만났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참으로 종종 하나님은 영적 거인을 병원에 보내주셨다. 그런 영적 거인은 대부분의 경우 낭포성 섬유증과 같은 만성적이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부모였다. 그들은 오랜시간 실망을 통해서 훈련을 받았기에 사실 그리 심각하지 않은 병 때문에 병원에 온 부모가 결코 얻지 못하는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위기를 겪으면서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그런 고통의 강을 건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성하고 진정한 실재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위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를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자녀가 은혜 속에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 구세주를 증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환난”(시 46:1) 속에서 살아갈 때, 나는 온 세상의 선한 것과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이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이런 환난 속에서도 결국은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영광을 향한 역사의 금빛 수를 놓는 과정임을 볼 수 있는 용기와 기쁨으로 가득한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한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수없이 반복했듯이, “하늘에” 보좌가 서 있다(계 4:2).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다 주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아시고 또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다 아신다(시 103:14), 그리고 그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히 2:11). 마리아의 아들은 인간의 약함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약함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히 4:15). 팬토크레이터(Pantokrator), 즉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순간을 다 그의 손에 모으고, 그 모든 것이 다 그의 영광을 위해 쓰이도록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기독교인이여, 오늘밤 베개에 편히 머리를 누이고 쉬도록 하라. 그 어떠한 폭풍이 불어도 당신은 영혼의 평화를 주는 쉼터를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Psalm 46: God, Our Storm Shelter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망
시편46편
피난처
두려움
진정한위로
환난
팬토크레이터
교회와 가족, 무엇이 먼저인가?
by 김선일
2020-05-16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입니다.” 필자가 수업이나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해 하는 표정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해명을 한다. “제 말은 옛날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다 가족을 뒷전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혈연 가족보다 더 큰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입니다.” 이 정도론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중산층 도시 문화에서 가정 사역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하다. 이는 유교 가족주의 영향도 있지만 험난한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대부분 가족 밖에 없었다. 교회는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원의 매개체도 아니다. 이 사실이 바로 정립되어야 교회는 가족을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된다. 육신 가족의 위기피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성경은 일관되게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정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을 금하셨으며 혼인의 신비를 재확인하셨다(마 19:6-9). 사도들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복음을 적용하였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곧 믿음의 증명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었다. 육신의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비하고 각별한 관계 가운데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최근 시대의 풍조 가운데 하나가 혈연 가족의 지위가 흔들리며, 대체 가족들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으로 비판해야 할 점과 수용할 점이 모두 존재한다. 혈연이라는 연결감은 인간의 원초적 감각이다. 자신이 입양 부모였던 작가 낸시 베리어는 ‘원초적 상처’(뿌리의집, 2013)라는 책에서 아기들은 40주 동안 엄마 뱃속에서의 교감을 기억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입양이 되더라도 심리적, 정서적, 영적 단절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9.11 테러가 난 후, 많은 이들의 눈물을 적신 사연들 중에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눈 마지막 사랑의 교신들이 있었다. 그때 생각 깊은 사람들이 의문을 던졌다. ‘왜 인간은 저렇게 가족에 연연하는가?’ 진화론적 과학에 의하면, 그건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려는 태고적 본능에 기인한단다. 약간 허무하지 않은가? 가장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가족의 친밀하고 희생적인 관계가 유전자 복제와 증식의 행동 패턴이라니 말이다. 내게 과학적 가설과 설명을 평가할 전문성은 없다. 그러나 두 개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는 절대적 사랑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적 속성에 근거할 것이다. 가족을 향한 문화전쟁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한 문화 역량이 있다는 점을 누구나 동의한다. 인간은 본능의 패턴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혈연 가족으로 인한 문제들은 너무도 많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인해서 부모가 자녀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친권에 의한 학대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남성 중심의 문화가 결혼 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너무도 큰 피해와 희생을 요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독립된 자기를 찾으려는 욕구가 유행이다. 혼인과 출산도 나의 자유와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비혼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외로움은 동거 등의 방법으로, 출산은 입양이나 시험관 아기로 해결할 수 있다. 유전자의 복제와 전파라는 본능적 욕구가 비생식적, 비혈연적 방법으로 대체 가능해졌다. 이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중시하는 문화에 안성맞춤 아닌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촌스럽게 보인다(이상의 현상에 대해서는 김용섭의 ‘라이프트렌드 2020:느슨한 연대’(부키, 2019) 27-64쪽을 보라).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는 가족 해체의 서사다. 문제는 이러한 내러티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교회와 복음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음모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할까? 물론 이는 문화 전쟁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적과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에 대해서는 분별과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육체의 소욕을 물리쳐야 한다(갈 5:16-17).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비복음적 가족관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였고, 최근에는 자기중심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주의 하에서 여성은 종속적 존재로 차별받아 왔고, 위계주의 하에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 내지 욕구 대리인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5:21-6:9)와 골로새서(3:18-4:1)에서 복음을 가족 관계에 적용하는 지침을 알려준다. 이 지침들은 고대 로마인들의 가족 관계를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 틀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정치학’을 보면 가족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3중 관계로 구성되었다고 보며, 남편과 아버지의 지배권을 정당화한다. 성인 남성만이 성숙하고 권위 있는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의 틀에서 성경은 달리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 3:17),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더이상 지배, 두려움,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경외하며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를 거부한다. 이는 예수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 23:9)고 하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11절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제는 지속될 수 없다. 또한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기중심주의와 어긋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함”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강요' 3권 7장을 시작한다. 복음은 순종과 자기부인을 통한 삶의 행복을 가리킨다. 일차적 가족으로서의 교회 ‘신자의 어머니’인 교회는 복음을 가르칠 뿐 아니라 복음적 삶의 실체를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신자의 참된 정체성과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IVP, 2019)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차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가족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일차적 부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차적 부르심일 뿐이다. 한국계 크리스천 저널리스트인 헬렌 리(Helen Rhee)는 창의적인 제목의 책 ‘미셔널 맘’(Missional Mom, Moody, 2011)에서, 이러한 소명 개념을 가족에 적용한다. “우리의 아빠, 엄마, 남편, 아내로서의 소명이 먼저가 아니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차적 소명이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순서의 역전은 가족에게 역효과를 주며,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이 우리 인생의 일차적 소명이다. 내가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때의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담은(엡1;23) 본질적, 보편적 교회를 말하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차적 소명의 준거점이다. 예수께서는 가족 됨을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셨다. 혈연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그의 가족이 된다(마12:50, 막3:35).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곳으로서 일차적 가족이다(Rodney Clapp, Families at the Crossroads, IVP, 1994). 종종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꾼다. 가족을 하나님의 목적에서 중심 위치에 놓기도 하며, 가족 친화적인 교회를 매우 건강한 이상적 교회로 여기기도 한다. 복음주의 윤리학자 러셀 무어는 ‘폭풍 속의 가족’(두란노, 2019)에서 “교회는 가족 친화적이거나 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 가족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 그는 더 나아가 가족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단일 뿐이기에, 가족을 더 우선시하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능력도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교회가 가족이라는 복음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일차적 가족이라는 사실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첫째, 혈연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자들이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해롭거나 당신을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두운 가족의 전통을 꼭 이어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가족 됨을 반영하는 교회는 불완전한 가족으로부터 고통과 상처를 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회복하는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는 전통적 가정 사역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전통적 가족의 범주가 해체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고 혼자 죽지 않는다. 1인 그리스도인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육신 가족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확대하는 선교적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분도, 1985)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가정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솔선적이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된다. 자기네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예수와 예수의 사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서로서로가 관계를 맺는다.”가족과 교회는 서로 긴장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적 특성을 반영하고, 가족은 하나님의 더 큰 가족, 하나님 가족의 이야기에 참여함으로 참된 정체성과 사명을 찾는다. 예배와 교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가족과 만나고, 선교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풍성한 가족이 있다!
가정
가족
피붙이
교회
대체가족
원초적상처
라이프트렌드
자기중심주의
미셔널맘
예수님, 쉐마, 그리고 영광스런 삼위일체
by Scott Redd
2020-05-15
흔히 쉐마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4절의 첫 히브리어의 뜻은 “들으라!”다)은 모세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과거의 언약(old covenant)을 설명하는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 본문은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다른 이들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마 22:36-40; 막 12:28-34; 눅 10:25-28).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쉐마를 향해 귀를 열어 놓고 신약을 읽는 사람이라면,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 쉐마를 언급하는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바로 이 쉐마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다름 아니라, 그는 신명기가 쉐마를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다”라는 메시지는 삼위일체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를 사용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두 위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성령님까지 이 쉐마의 공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지금 쉐마가 기독교 복음에 의해 쓸모 없게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로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측면까지 고려하여 바로 이 쉐마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쉐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신약 성경에서 쉐마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신학적 읽기와 설명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대제사장 기도(요 17:20-26)의 피날레에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는 그의 백성과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백성의 정체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쉐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1절에서 요약된, 이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에 주목하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삼위일체의 제1위격과 제2위격의 단일성은 실제로 하나됨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인간의 온전함(wholeness)에 대한 근거까지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백성들이 그분 자신과 실질적으로 연합함으로 삼위일체가 누리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성령님의 내주에 의해 이런 연합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됨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이 기도가 말하는 하나됨과 온전하게 됨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 학자인 리차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설명은 이 질문에 도움을 준다. 그는 요한복음이 다루고 있는 ‘하나됨’이라는 주제는 ‘하나’라는 의미 속에 두 가지의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하나’는 고유성 또는 독특성(uniquenes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쉐마의 가르침에서 첫 부분이 바로 여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신 6:4-9).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는 고유하고 독특하다. 그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오로지 홀로 계신 존재다. 하나님의 독창성에 관한 이런 가르침은 신약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쉐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그럼 세 위격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일 수 있는가? 보컴은 요한복음 17장 주석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쉐마가 암시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하나’라는 단어 때문에 쉐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신의 독특함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뤄지는 교통에 있다고 예수님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하나됨에 대한 주장, 하나님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로 인한 하나됨의 주장은 초기 유대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Richard Bauckham, ‘Gospel of Glory’ in Richard Hays, ‘Reading Backwards’를 참조하라).그러나 하나됨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하나는 사물이나 사람의 통일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쉐마의 두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통일된 온전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미인 것 같다. 그들의 마음과 영혼과 힘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다. 보컴은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된 백성의 사례가 구약 성경 속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고 지적한다(사 45:20; 겔 34:23; 37:15-24; 미 2:12; 호 1:11). 그러한 하나됨의 개념은 쿰란과 그 주변의 유대 사막 종파 공동체에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됨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인 예하드(yehad)라고 불렸다(미 2:12). 예하드는 종종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 역시 하나됨 또는 단일성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기도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통일된 공동체가 회복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백성들과의 연합이야말로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현실, 서로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통일됨의 기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일부로서 그의 위치와 또한 그의 백성과의 연합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세 위격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더 나은 일치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모세의 언약보다 더 크고 더 나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대제사장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모세의 쉐마를 역방향(read backwards)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온전함과 사랑에 대한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부르심은 새 언약을 통해서 더 개선되고 더 명확해진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분과 우리의 연합을 이루었고 또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하는 하나됨 속에 참여하게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의 쉐마가 언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이자 또한 우리와 하나된 주님의 성품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성품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우리 주님을 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서 말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고전 12:3),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천명한 목표를 명심해야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2–23).우리가 사랑의 목표, 즉 텔로스(telos, 헬라어로 ‘목표’를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목표도 삼위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그들의 사랑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를 기도했다. 쉐마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사랑은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우리의 목표는 성령님 안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Jesus, the Shema, and the Glorious Trinit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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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by 고상섭
2020-05-14
팀 켈러는 TGC코리아 홈페이지에 있는 ‘마음에 호소하는 설교’라는 영상 설교에서 알렉 모티어의 글을 인용한다. “설교자에게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진리를 다루는 과제고 두 번째는 청중을 다루는 과제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진리를 가장 잘 듣게 될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와닿게, 그들이 가장 수용적으로 듣게 …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상처를 피하게끔 전할 수 있을까?”팀 켈러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책 ‘팀 켈러의 설교’에서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 시킬 수 없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두 가지 과제를 다 완수하는 열쇠가 되는 것일까?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알렉 모티어의 첫 번째 과제인 진리를 다루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의 중심 사상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그 본문에서 풀어내지 못했다면 설교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이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5-27)예수님은 전 구약성경이 바로 ‘자기에 관한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을 질책하셨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드러내지 못하면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을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Edmund P.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11쪽). 사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윤리설교로 끝나게 된다. 설교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초청이 아닌 ‘더 열심히 살라’는 도덕적 권면이 될 때 교회 안에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게 된다.팀 켈러는 결국 성경을 읽는 데는 두 가지 길 뿐이라고 말한다.“‘근본적으로 나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인가?’ 다른 말로 ‘근본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것인가?’”그러나 성경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할 때 과도하게 본문에 그리스도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붉은 색이 나오면 무조건 그리스도의 보혈과 연결시킨다던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본문에서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깨어남은 부활이라고 해석하는 등 성경 본문 하나하나에 일대일로 그리스도를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의 한 형태이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성경 문맥을 통해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고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플은 그의 책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에서 이 과정을 FCF(The Fallen Condition Focus)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초점 맞추기’라고 불렀다. 모든 성경 본문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설교는 결국 복음이 아닌 율법을 설교하게 된다.“예를 들면 ‘~처럼 되라’, ‘선한 사람이 되라’, ‘영적훈련을 실천하라’를 강조하는 설교는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설교다. 설교 내용 자체에는 잘못이 없지만, 영적으로는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39쪽)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다양한 설교 형태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경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의미를 사실상 변질시키는 것이다. 진리를 다루는 일은 결국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라알렉 모티어의 두 번째 과제는 청중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청중의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변화된다고 말한다. 사람의 변화는 언제나 그 마음의 중심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 단순한 감정(emotion)의 변화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 수련회에 가서 눈물 콧물을 다 쏟고 돌아오지만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경우들은 대부분 정감(affection)의 변화가 아니라 감정(emotion)의 변화이기 때문이다.정감(affection)이란 사람의 마음 깊은 좌소에 있는 ‘사랑’을 말한다. 팀 켈러가 설교를 언급할 때 ‘마음을 향한 설교’ 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정감의 변화가 사람의 변화의 핵심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죄를 ‘무질서한 사랑’(disordered love)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무질서’란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며 죄다. 결국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섬기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사랑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그 사랑의 순서는 어떻게 바뀌는가? “물론 정감(affection)도 감정(emotions)으로 가득하지만, 감정과 동일하지는 않다. 정감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했을 때 전인으로부터 나오는 성향이다.”(‘팀 켈러의 설교’ 216쪽)팀 켈러가 청중에 대한 과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했을 때’ 전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감정(emotion)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은 돈을 기부하거나 후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삶이 변화되려면 단순한 구제 사업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정감인 ‘물질주의’가 깨뜨려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의 결단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때 물질주의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결국 진리에 대한 과제와 청중에 대한 과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고 또 청중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복음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여! 진리를 바르게 알고 싶은가?또 청중들의 삶이 변화되는 현장에 함께 있고 싶은가? 그렇다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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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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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교회, 사람인가 장소인가
by Matthew Miller
2020-05-13
많은 이들이 어렸을 적에 손가락 깍지를 끼고 “교회가 있네요 / 첨탑도 있어요 / 열어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하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신약에서는 ‘교회’가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교회’라는 말을 예외 없이 세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청소년부는 오전 9시에 교회에서 출발합니다”처럼 장소를 가리키거나 “교회가 끝나면 교제실에서 점심을 함께 하겠습니다”처럼 모임 자체를 가리킬 때 교회라는 말을 쓴다. 또는 “교회의 기도와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처럼 사람들을 지칭할 때도 있다.이쯤 되면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맞게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답의 이면에는 스토리가 있는데, 이를 들어보면 우리가 왜 ‘교회’라는 말을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쓰는지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시작해보자. 예수께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실 때 “교회”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114회 등장하는데,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칭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한 지역 교회를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엡 5:27; 살전 1:1). 교회론을 뜻하는 ‘에클리지올로지’(ecclesiology)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에서 온 것이며 당회(sessions), 노회(presbyteries), 대회(synods) 그리고 총회(assemblies)를 “교회의 치리회”(ecclesiastical courts)라 부른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는 언제나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을 뜻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처럼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온 로망스(Romance)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은 교회를 가리킬 때 신약의 ‘에클레시아’를 그대로 사용한다. 교회는 프랑스어로 ‘레글리스’(l’eglise)이고 스페인어로는 ‘라 이글레시아’(la iglesia)인데 모두 라틴어 ‘에클레지아’(ecclesia)에서 온 것이다. 영어는 좀 더 복잡한데, 영어의 ‘처치’(church)의 어원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키르케’(Kirche)나 네덜란드어의 ‘께르크’(kerk)와 마찬가지로 영어 ‘처치’(church)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주님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큐리아콘’(kyriakon)에서 왔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는 114회나 등장하는 반면 ‘큐리아콘’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 “주의 만찬”과 요한계시록 1장 10절 “주의 날”에서만 사용된다. 하지만 신약 다른 어떤 곳에서도 ‘큐리아콘’을 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신들이 모여 성만찬을 나누는 장소를 가리켜 ‘큐리아콘’(kyriakon)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줄여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처치’(church)라는 말이 사실상,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실제 건물이나 위치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영어 단어 ‘처치’(church)의 어원론을 따져보면 위에서 소개한 아이들 노래가 실제로 맞는 셈이다. “여기 교회가 있어요 / 이건 첨탑이구요 / 열어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이로 인해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성경을 번역할 때 곤란한 일이 생겼다. 틴데일이 그리스어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하던 1536년, 그는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장소나 건물이 아닌 사람들을 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번역하면서 틴데일은 ‘에클레시아’를 “church”라는 단어 대신 회중이라는 의미의 “congregation”으로 번역했다 (I wyll bylde my congregacion.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yle ageynst it). 하지만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을 비롯해 훗날의 영어 번역본들은 ‘에클레시아’를 “church”로 번역했다. 그리하여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를 가리키던 영어 단어는 지난 400여 년간 소위 “이중직”을 수행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 역시 그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신약 성경에서 “church”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그것이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에클레시아’)을 지칭한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임이며, 성령의 교제하심이다”라고 말한다. 교회를 가리키는 성경의 은유는 다양하다. “congregation”의 원래 의미가 “모인 양 떼”인데, 성경에서는 교회를 일컬어 양 떼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가족, 몸, 성전, 그리고 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유를 사용하는데,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우리의 본질이 뭘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속적인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의 신적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바란다고 한다(엡 3:21). 다음 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eklethete) 그 ‘부르심’(kleseos)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고,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kleseos)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eklethete)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4–5)라고 한다. 교회의 이름인 ‘에클레시아’와 신적인 부르심인 ‘클레세오스‘(kleseos)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의 기원이 신적 부르심에 있음을 생각할 때, 교회의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모든 예배, 교육, 교제, 그리고 봉사는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에서 나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모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끝나는 것이다(계 2:7, 11, 17, 29; 3:6, 3, 22).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유형(有形) 교회”와 “무형(無形) 교회”를 구분한다. 이는 눈에 항상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와 가끔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교회를 구분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온 세계에서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이들, 즉 교회의 회원이기 때문에 당신이 식별할 수 있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2항)과 하나님이 예정의 은혜와 중생의 능력을 통해 들을 귀를 주신 이들, 다시 말해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또는 모여질 택자들의 전수(全數)로 구성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1항)에 대한 구분이다. 목사, 장로, 집사는 “유형 교회”를 섬기라 부름 받은 이들이지만 그들의 사역은 회중의 각 사람이 신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여 그들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름으로 “무형 교회”에 속한 이들임을 증명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돌아오셔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신 후에야 비로소 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가 앞으로 영원토록 완전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마 7:21–23; 25:31–46).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우리의 말과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선한 목자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그의 백성들로서의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강조점을 회복하고 잊지 않도록 하자. 이를 위한 하나의 시도로 필자의 가정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아이들 노래를 조금 바꿔서 부르고 있다. “교회가 있네요 / 첨탑도 있어요 / 열어 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라고 부르는 대신 손 동작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이렇게 노래한다. “교회가 있네요 /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죠 / 이 첨탑 아래에서 / 늘 함께 모이죠.”출처: www.ligonier.org원제: Is the Church a People or a Place?번역: 이정훈
교회
교회생활
유형교회
무형교회
예정
부르심
사람
에클레시아
건물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과 복음
by 노승수
2020-05-12
개혁주의는 항상 율법주의라는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속 교리도 형벌적 대속 교리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했다는 것이 이 교리의 근간이며 받아야 할 이 형벌에는 율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율법 이해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개혁파 교리의 근간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언제라도 율법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복음의 핵심을 전달받은 갈라디아 교회도 쉽게 복음의 정수로부터 벗어나 율법주의에 미혹된 것을 보면 아마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빗겨가기 힘든 함정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신자의 삶을 파고들까?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추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변화시켜서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그럼 이런 종류의 타협은 왜 발생할까?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고 기쁨에 젖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적인 죄에 노출되면서 몇 가지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느낌이 들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자신을 주님이 용서하지 않을 거 같고 그렇게 주님 앞에 서기에 자신이 너무 염치가 없어 보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기 상황을 정당화해 줄 어떤 해석이나 방식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 막 예수를 믿고 감격해하는 십 대 청소년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말씀을 듣고 피 끓는 십대 청소년은 자위행위에 죄책감을 깊이 느끼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자위행위를 하고 밀려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오랜 기간 말 못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예수 믿는 기쁨도 잠시 이 반복되는 죄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합리적인 답들을 인터넷을 뒤지면서 찾기 시작한다. “자위는 해도 괜찮다.” “자위는 죄다.” 등의 조언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중에 더러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자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으로 선택한다. 이것을 답으로 취하고 자위를 정당화하지만 여전히 자위행위 후에 밀려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당황스럽다. 여기서 문제는 자위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그 후에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드는 죄책감은 율법을 의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율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사리 조언한다. 예수를 믿고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참 신자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설교라도 듣는 날에는 내 신자 됨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란 율법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몇 개 깔려 있는데 율법의 죄를 드러낼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 혹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적 부패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런 죄가 드러난 상황에 이것을 예수께 가지고 가기보다 자기 안에 촉발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다. 할례와 같은 의식적 제의를 다 함으로 자기 죄를 덮고 그것을 자기 긍지나 자부심으로 가지고 오는 심리적 태도가 나타난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 심리적 욕구들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이것은 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기부터 있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기제는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명품가방을, 남성들이 좋은 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보며 인정의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명품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면, 마치 내가 뭔가를 해낸 것처럼 내 긍지가 올라가는 것과 같다. 흔히 ‘국뽕’이라는 높은 가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았는데 자기는 뭔가 딱히 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런 높은 가치와의 동일시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율법의 행위를 취함으로 ‘자기 의’를 얻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자기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신칭의라는 근본적 믿음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행동들은 율법을 한갓 의식적 제례로 전락시켜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더 강화시키는 해석을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원래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하며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 통치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율법의 그와 같은 요구를 명백히 드러냄으로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출 때, 우리는 스스로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순종하려고 할 때만 우리가 스스로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과 전적 부패를 자각할 수 있다. 순종이 멈추면 외식이 시작되고 외식은 자기를 성찰케 하는 성령의 조명을 무디게 만든다. 그 결과 외식뿐만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자기 의로 가지고 오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율법이 드러내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인 셈이다. 오히려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수치심은 드러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심각하다고 느낄수록 우리가 더 간절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만든다. 자기 병이 중할수록 더 필사적이 되듯이 율법은 내 죄의 병이 중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는 힘이 내면에 자리 잡아야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내 정당성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대충 통과하려는 자는 모두 ‘자기 의’라는 율법주의나 ‘자기기만’이라는 반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복음
예수그리스도
개혁주의
율법
죄책감
자기의
자기기만
반율법주의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
by R. C. Sproul Jr.
2020-05-11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은 위조에 능한 자다. 그 교활한 수법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신하는 왕국을 세우는 일만이 아니라, 가짜 왕국의 모든 부분이 진짜 왕국과 똑같도록 모방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마디로 그는 위조자다.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는 단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against Christ)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instead of Christ) 자이기도 하다. 가짜 왕국의 가짜 메시아인 셈이다. 따라서 진짜 메시아처럼, 그도 자신을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또 삼중직을 날조하여 가짜 선지자, 가짜 제사장, 가짜 왕으로 행세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모든 복을 내려주시듯, 땅에 있는 자 역시도 그러한 복을 모조한다. 그리고 사악하게도 우리를 꾀어내 그 두 가지 복을 혼동하게 만든다.이 시대의 타락한 문화를 보여 주는 현상이 있다. 바로 가족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꾸준히 쇠퇴하고 있는 현상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허락된 축복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결혼을 해서 자녀를 양육하여 경건한 백성으로 세우라고 명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가정을 이루는 사명과 더불어 그 자유를 행사하도록 인류에게 복을 주셨다. 그러나 뱀은 무수한 버전의 가짜 가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저급하고 어리석은 애정을 거기에 쏟아붓게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유혹하여 그릇된 장소에서 애정을 찾게 만들며, 밀물이 들면 쓸려 나갈 모래 같은 관계 속에서 소속감을 다지게 만든다.진정한 가족은 소속감과 더불어 공통된 신념과 목표를 제공한다. 다수의 크리스천이 모여 구성된 교회와 같이, 크리스천 가족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한 가지 목표를 지닌다. 나의 가족을 예로 들면, 저녁에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서로가 부름받아 함께 이루어 갈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그러나 마귀가 만들어 낸 가짜 가족은 그와 같은 영적 생기를 지닐 수 없다.나의 가족은 ‘브리스톨 모터 스피드웨이’(the Bristol Motor Speedway)라고 하는 자동차 경기장에서 북쪽으로 불과 30마일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자신이 선호하는 레이서를 응원하며 경쟁하는 두 집단의 가족이 있다. 매번 경기마다 데일 언하트 주니어(Dale Earnhardt Jr)를 응원하는 집단과 제프 고든(Jeff Gordon)을 응원하는 집단이 서로 모조된 가짜 가족을 이룬다. 누가 어느 가족에 속했는지는 각자가 몰고 다니는 차량 범퍼에 붙은 스티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특정 레이서를 선호하는 가족에 속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에 맞는 의상과 차량을 고르고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닌다.어떤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삼아 가족을 이루려 한다. 가령 동일한 질병이라든가 취미를 공유한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긴다. 그래서 암투병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끼곤 한다.또 다른 이들은 부차적인 유전 형질에 근거하여 가족을 세우려 한다. 가족이란 유전학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념은 피부색에까지 미친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보며 정통 백인 가문이 아니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조상을 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갈색 피부를 가졌을지 몰라도, 그는 엄연히 스프로울 가문의 자식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하나님 나라를 가장 먼저 구하라고 부름 받았다.나는 그처럼 무의미한 기준을 따라 하나님 나라 바깥에서 자기 정체성과 소속감을 찾으려 하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슬퍼진다. 그런데 훨씬 더 슬퍼질 때가 있다. 바로 그러한 연대 의식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묶고 있는 모습을 볼 때다.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이루신 일보다도 우리가 좋아하는 축구팀에 더 충실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일에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결승에 진출했을 때 가슴이 가장 벅차오른다. 또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나이와 성별 혹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길 좋아한다. 그렇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아니라 각자에게 있는 다른 무엇으로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정체를 규정하곤 한다.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자신을 향해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 관계가 우리를 우리로서 규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충실히 살펴야 할 가족도 이 관계로부터 주어진다. 나의 경우는 사십 대에 이마가 벗겨졌지만, 이런 모습에서 가족의 특징을 찾을 수는 없다. 또 영국 제도(the British Isles)에 가계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나의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의 가족은 결국 어린양의 피로 구속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의 형제고 자매다. 서로 다른 축구팀을 응원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그들이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바로 나처럼 그들 역시 거듭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한 분의 아버지가 계신다. 또 한 어머니와 같은 교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맏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따라서 이 가족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바로 이 은혜로, 우리 모두가 이 땅에 매인 신분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둔 거류민과 나그네로 곧 그분의 가족으로 한 생을 살길 소망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e Are Family번역: 장성우
가족
위조자
적그리스도
정체성
소속감
어린양
가정, 하나님 은혜의 리트머스 시험지
by Tim Kimmel
2020-05-10
어린이와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의 깊이를 가늠할 만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나 노인처럼 인생 연대표의 양쪽 끝에 위치한 이들은 능력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 하루를 어려움 없이 살아내고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호의를 받고도 제대로 갚지 못하며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어린이나 노인같은 사람에게 일관성 있게 호의를 베푸는 성품을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진정한 인격은 우리가 어린이와 노인에게 베푸는 친절, 인내, 그리고 존경의 태도에서 정확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과부들과 고아들을 비롯해(약 1:27)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들 중 가장 작은 자”에 속한 사람들에(마 25:31–46)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 인격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가정의 기본 작동 방식: 하나님의 은혜이제 인격과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우리 삶의 기본 모드인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는 가정 생활을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고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는 중차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되기도 하고, 쓰디쓴 패배를 맛보는 곳이 되기도 한다. 가정 생활이 견디기 쉽지 않은 용광로와 같을 수 있다. 가정 생활 속에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 자체가 무력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만지고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말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고 말로는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우리와 매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 하느니 차라리 굶는 것이 낫겠다고 하거나, 배우자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내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는 무익할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최악의 예를 두 가지 언급했는데, 당신 가정이 그 정도는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가? 당신 가족이 가족 사진에서 당신이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관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회심을 위한 은혜, 매일을 위한 은혜선의를 지니고 잘 해보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십자가로 인해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구속 역사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개념을 잃었다 찾은 바 되고 보지 못하다가 볼 수 있게 된, 다시 말해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면서 어리석게도 여러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축소시킨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성과’를 거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이리 많으니 나는 빚진 사람이야. 이제 남은 인생은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지” 식의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복음을 적용할 때 이런 식의 태도는 거부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 마음의 방에 들어와 방 가운데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서는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일단 우리가 그런 식의 사고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가 복음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가 으레 하는 상투적인 말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신앙 생활에 대해서도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된다. 오늘날 자녀 세대는 “나한테 의미 있는 것만 진리”라는 식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도전할 때, 우리가 자녀를 다루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의 소재로 쓰이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에 맞서기기독교를 성과 중심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들도 많다. 필자는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순된 세상에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우리는 스스로 무능력하다 느끼고, 부담감에 압도당하며, 이 일이 너무도 벅차다고 느낀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 두려움에 눌리지 않아야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내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와 관련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복음주의와는 관련없는 인위적인 규율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임재를 무시하고 두려움 앞에 무릎 꿇게 된다. 소위 금욕적인 삶, 죄 관리, 영적인 이미지 컨트롤, 복음주의적인 행동 양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시는 일들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 지식으로 해석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녀들은 최악으로 행동하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있는지 알아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목자로 믿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사랑, 자비, 친절, 이해, 용서, 소망, 자유, 그리고 잠잠함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녀 양육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우리를 씻기고, 우리에게 스며들며, 결국 우리를 다시 정의하는 은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받을 뿐 아니라 그의 은혜로 늘 단련되는 부모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고의 증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다루시는데(요 1:14) 이 모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대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자녀를 대하라. 이것이야말로 은혜에 근거한 자녀 양육의 핵심이다.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가 행하시는 기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부모 안에 먼저 일어날 때 그 자녀들에게도 일어난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Family: God’s Litmus Test of Applied Grace번역: 이정훈
가족
회심
은혜
두려움
자녀양육
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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