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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도래
by R. C. Sproul
2018-11-09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추가 설명이 없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마가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를 덜 소개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에는 네 개의 비유들이 나온다. 마가는 비교적 긴 내용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시작하여 세 개의 짧고 간결한 비유들로 이어간다. 각 비유는 대부분의 비유들처럼 한 가지 핵심 개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들 세 비유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 무엇을 가르친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파종과 씨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씨가 뿌려지는 여러 종류의 토양들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지 않으며 자연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밤새 비가 내린다. 다음 날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췬다. 발아하여 작고 파릇한 싹이 나온다. 조만간 수확할 때가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산이 이 과정과 흡사함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작게 시작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가 있는 동안에도 자란다. 씨앗의 성장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신비한 과정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전개된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내게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면 그것들은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언행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한번은 예배 후에 내가 교회 문 앞에 서 있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15년 전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교회에서 내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그 예배 후에 그는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고 내게서 들은 대답을 그 이후로 줄곧 간직하며 살았다고 했다. “내가 귀가했을 때, 목사님 말씀을 내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여 저를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셨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껏 내가 사람들에게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상처를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혼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 말이 좋게든 나쁘게든 참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많은 목사들이 사역을 그만둔다. 도덕적인 이유로 떠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회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떠난다. 그들은 자신이 헛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마음을 다해 설교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비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설교자가 자신의 말의 결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설교를 사용하실 수 있으며 또한 사용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와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엿보게도 하신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수많은 목회자 컨퍼런스와 세미나에 참석해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 경험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그들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준비했으나 정작 강단에서 설교하면 교인들의 반응이 별로였던 경우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들은 회중들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설교를 기억하여 유익을 받은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그들이 보잘것없게 여긴 것을 하나님은 큰 유익을 위해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봉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우리가 자는 동안 하나님이 씨앗을 발아시켜서 생명이 나오게 하며 마침내 온전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친히 거두신다. 우리는 봉사의 결실을 곧바로 보려는 생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결실을 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등불을 밝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원제: The Coming of the Kingdom 출처: www.ligonier.or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신학
신약성경
하나님나라
마가복음
비유
설교
씨뿌리는자비유
직업을 선택할 때 해야 할 질문들
by John Piper
2018-11-09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곧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이 빛나시도록 이 직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2. 이 직업을 선택하면 나를 거룩하게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3. 이 직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4. 이 직업이 왕이신 주님을 거역하는 생각이나 감정, 행동을 부당하게 강요하지는 않는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5. 이 직업은 내 삶의 패턴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 곧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완수하는 데 의미 있게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6. 이 직업은 내게 있는 최고의 에너지를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7. 내가 이 직업에 수반되는 활동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도록 내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8. 이 직업이 나로 하여금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상실하게 될 것인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9. 이 직업의 목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당당하게, 신실하게 헌신하고자 하는 나의 삶의 방향성에 부합하는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10. 이 직업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인생을 마칠 때 삶을 제대로 투자했다고 느끼게 할 만한 일인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11. 이 직업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으시고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는 나의 신앙에 부합하는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12. 이 직업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궁극적인 진리에 부합하는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위하여,존 파이퍼 목사원제: Some Questions to Ask When Considering a Job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매일배움
생활
직업
존파이퍼
목적
헌신
십자가
착한행실
신앙관
거룩함
결혼할 수 있을 때 데이트를 하라
by Marshall Segal
2018-11-01
젊은이들은 언제 데이트를 시작해야 하는가? 아마 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일단 당신이 (혹은 다른 사람이) 왜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데이트로 인해 매우 큰 대가를 치를 때가 많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참담한 이별, 성적인 죄, 충격적인 배신, 갑작스러운 실연,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 등 결코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고통 말이다. 그러면 왜 우리들 가운데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렇게 허겁지겁 데이트에 뛰어드는가? 이는 어느 정도 사탄이 데이트의 위험들을 매우 잘 감춘다는 사실 때문이다(계 12:9). 사탄은 로맨스가 멋진 인생의 필요조건이라고 제시하고, 그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공허하고 외롭고 무익하다는 생각을 주입시킨다. 사탄은 우리의 욕망을 이용해 우리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며, 최고의 기쁨과 가장 충만한 경험은 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혹은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우리를 납득시킨다. 사탄은 실연의 상황을 준비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독성을 가진 성적인 죄로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우리 가운데 수백만은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너무 일찍 데이트를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런 데이트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결과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6학년 때 첫 번째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그 해 여름에 (또 다른 여자아이와) 첫키스를 했으며,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거의 해마다 새 여자친구를 만났다. 너무 어릴 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아닌 여자친구들에게서 애정과 안전, 친밀감을 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나는 일찍, 많이 데이트를 했다. 나의 10대는 나이에 비해 너무 진지하고, 너무 오래 지속되고, 그 결과 너무 고통스럽게 끝나는 관계들이 길게 잇따르는 시절이었다. 나는 ‘사랑해’라는 말을 너무 성급하게, 너무 자주 말했다. 사탄은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내 이른 데이트사의 모든 순간을 즐겁게 관람했다. 왜 데이트를 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을 놓고 벌어지는 영적 싸움은 실재하며, 여기에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자리한다. 따라서 먼저 우리가 왜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왜 나는 열두 살 때 (그리고 열세 살, 열네 살, 심지어 열여덟 살에도) 여자친구를 사귀었을까? 많은 이들은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고, 소속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가 어떤 특별한 남자나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충족된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향해 치솟기를 원한다. 로맨스와 결혼의 신비는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우정의 절정처럼 보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고, 소속되며, 그의 삶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 삶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가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의미 있는 명분을 위해 중요하게 기여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필요들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데이트를 한다.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결혼하고 싶어서’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이, 재정상태, 개인의 성숙, 교육, 삶의 단계 등의 면에서 결혼과 거리가 멀다. 사실 우리는 로맨스에서 행복과 소속감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행동할까?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데이트를 하지 않을 것이다(심지어 대학교 1, 2학년 때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 해답은 내가 데이트와 결혼의 중요한 차이점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알게 되었다. 데이트 중인 커플은 때때로 결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결혼한 커플이 아니다. 우리가 이 두 관계의 차이점을 이해할 때에만 데이트에 따르는 모든 고통과 실패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 우리의 현재 관계 상태가 어떻든 간에, 누구의 인생에서나 가장 큰 상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에게 알려지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결혼에서의 큰 상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배우자와 맺는 친밀함이다. 남편 또는 아내와 서로 알고 알려지며 사랑하고 사랑 받는 관계 말이다. 데이트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맺는 결혼에 대한 명확한 이해이다. 로맨틱한 친밀함은 결혼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장 안전하며, 결혼은 명확한 대상이라는 조건이 허락될 때 가장 안전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그런 친밀한 관계를 갖고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결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고 싶다면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 적어도 미국의 경우에는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네브라스카 주와 미시시피 주는 예외인데, 이 두 주는 더 늦어서 각각 만 19세, 21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단 나이만이 아니라 성숙함과 견실함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내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는 장차 50년 간 남편 또는 아내인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할 만큼 충분히 성숙한가? 우리는 정말 충분히 성숙한가? 우리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다 한 가정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가? 내 이성친구가 가진 믿음은 고난을 통해 그 진정성이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검증되었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어떤 이들은 이 조언을 싫어할 테고,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결혼이 가능해지기 훨씬 전부터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데이트할 수 있다고 해서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결혼을 지향하는 데이트를 할 수 없다. 당신은 일찍부터 결혼에 대해 꿈꿔왔을 수도 있다(나는 그랬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당신은 언제라도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결혼할 수 있을 때 데이트를 하라. 내 조언은 (받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18개월 안에 무리 없이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고려사항은 그 기간 안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결혼이 그분의 뜻이며 타이밍이라는 확신을 주신다면 언제라도 결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18개월이라는 단서는 없으므로 내 조언을 하나님의 법인 양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조언이 당신의 마음에 현명하고 안전하게 보이는지는 (하나님, 당신의 부모님, 그리고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시험해 볼 수는 있다.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데이트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라는 말은 아니다. 삶은 결코 사랑과 결혼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심지어 주요 요소도 아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미혼이든 기혼이든, 16세이든 60세이든 간에 예수님으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관계가 당신에게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청년기에 광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재능을 사용해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결혼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강건하고 따스한 미래의 아내 또는 남편으로 만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세상에 나타내고 싶어 하신다. 당신의 청년기를 위한 하나님의 꿈을 경험하기 위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럼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1. 다른 이들에게 담대하고 신실한 모범을 보이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당신은 아직 투표권이 없을 수도 있고 운전면허조차 없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 수는 있다. 오늘 당신의 말(당신이 가족과 친구에게 사용하는 말)은 예수님에 대해 알려준다. 당신의 행동(당신이 무엇을 하겠다거나 하지 않겠다고 날마다 결심하는 태도나 당신이 세상과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습관적인 모습)은 당신의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당신의 사랑(당신이 삶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당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사랑 받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당신의 정결함(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모든 시기상조의 즐거움과 경험보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겠다는 당신의 헌신)은 자기 욕망에 얽매여 있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2. 섬김을 받으려는 삶이 아닌 섬기려 하는 삶을 살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0-11).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소진된 나머지 가까운 이웃들의 궁핍함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당신은 소셜미디어, 쇼핑, 비디오 게임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할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15-16세에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겨루어 금메달을 따는 10대 선수들을 보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해 다른 사람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겠다고 결단하면 어떨까? 교회 부서에서 섬기거나, 후배의 멘토가 되어 주거나,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세상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할 능력이 있다. 당신을 통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라. 3. 하나님이 당신에게 명하시는 미래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25).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결혼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날 때부터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세상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으로 오셔서 그분의 죄 많은 신부인 교회를 위해 죽으신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내라는 명령이다. 선천적인 본능대로라면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많이 좋아하는 상대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데이트할 준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을 한 단계씩 변화시키시며, 또한 당신이 바람직하게 사랑하면서 데이트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준비시키실 것이다. 4. 기다리는 시간에 즐거워함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우리 주변에서 "다들 데이트한다"며 자신의 외로움을 한탄하는 젊은 남녀들을 보게 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 행복, 안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젊은이들을 보기란 훨씬 어렵다.당신이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데이트를 하지 않고도 만족을 누림으로써 당신의 친구들을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하라.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ait to Date Until You Can Marry번역: 매일배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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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데이트
섬김
기다림
로맨스
친밀감
성숙
전전긍긍하는 부모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
by Cameron Cole
2018-11-01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갓난아이를 돌봄이(baby sitter)에게 처음 맡긴 날을 생각해 보라. 아마도 비상 연락처를 여러 개 준비한 것은 물론이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이가 잘 있는지 돌봄이와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가끔 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날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님께서 나를 성인이 될 때까지 이토록 잘 키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심 오늘날의 육아 상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봐 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거의 전문적 수준의 돌봄 매뉴얼을 만들지도 모른다. 또한 교회 주일학교나 놀이방에 아이를 맡길 때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아이와 다른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시간 내내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혹시 모를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느라 초조하게 진땀을 흘릴 수도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처음 보낼 때는 더 큰 고민에 빠진다. 담임선생님이 내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아이를 맡기고 뒤돌아서 나올 때면 대성통곡하는 소리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하원 시간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오늘 하루 우리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자녀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때에 느끼는 불안감은 아이가 크는 내내 반복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도 이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모든 부모는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처럼 제대로 우리 자녀를 돌볼 수는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뛰어난 부모인가? 나는 첫째 아이 카메론을 내가 아닌, 완전한 자격을 갖춘 다른 분께 영원히 맡겨 드려야 했던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은 양육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을 완전하게 하나님 기준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의 세 번째 생일이 지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겪었던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을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보내게 되었다. 아들이 더 이상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음을 온전히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 부부는 아들에 대한 불안감을 여전히 마음속에 안고 살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러했다. 아내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한테 아이를 맡긴 것처럼 안심이 안 돼”라고 말했다. 부모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하여 진심으로 노심초사했다. 하나님은 우리 아이가 잠들기 전에 노래를 많이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우리 아이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이 우리처럼 매일 아이를 충분히 안아 주실까? 잠들기 전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시면 좋겠는데…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매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때는 슬픔의 수렁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였다. 나는 하나님의 필요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지만 내 아들의 부모로서 주님이 완벽한 대리자가 되어 주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에 관해서는 나 아닌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카메론의 두 형제를 이 땅에서 키우는 부모로서 나는 양육의 순간순간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불안이 하나님을 내 아이의 부모로서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자만과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자만과 불신 첫째, 선생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돌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리 양육자를 내 손으로 촘촘히 관리하려 드는가? 이는 부모로서의 본인 역량에 대한 자만이다. 우리는 자녀의 삶 속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자신의 손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자만의 방증이다. 이러한 자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전능하고 끝없는 사랑을 지녔으며 완벽하게 지혜로워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한다. 또한 아이의 행복을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양육을 우려와 통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절망과 독단 사이에서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가? 이는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일 때에 더욱 명확히 알게 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에도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돌보시고 지키신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은 이러한 사실을 생각의 저 너머로 미루어 놓곤 한다. 자신의 손으로만 아이들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를 날마다 쉬지 않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가장 잘 증명된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돌보심을 영원토록 보고 또 누리셨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빛나는 통찰과 지키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몸으로서 신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만 양육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평안의 시작은 내가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모두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부모이다. 반면에 우리의 자녀는 완벽한 아버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부모로서 짓게 되는 죄와 실패는 훗날 우리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그 후손들을 훈육하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또한 너무 절망하지도 말자. 당신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이웃의 ‘완벽한’ 부모들도 똑같이 실수한다). 모든 부모가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 하나님처럼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부모로서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아이들을 향한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불어, 내 양육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아이들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채워진 복음만이 우리에게 희망과 평안을 안겨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어떤 부모보다 훌륭한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우리 자녀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우리 아이의 성격, 남과 다른 부분,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알고 계신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로서 더없이 완전하다. 또한,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부모인 우리들의 무능함을 덮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아이에게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돌봄이 아닌,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큰 은혜로 아이들을 채우실 것이다. 자녀가 이 땅에 있든 하늘나라에 있든,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 인하여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근원적 아버지요 최고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저 더 나은 부모인 그분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만과 불신을 버리고 아이를 하나님께 맡길 때에 진정한 평안과 안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race for the Micromanaging Parent 번역: 고갑균
가정
양육
자만과불신
부모
하나님의은혜
진리
복음
사랑과은혜
희망과평안
불안함
복음이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by Mark Dever
2018-11-01
복음의 목적이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인가? 의미를 추구하는 지적 탐구심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정의를 실현할 목적인가? 혹은 빈곤 문제와 구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가?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은 삶의 특정한 문제 혹은 개별적 상황을 복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복음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가 이러한 것들일까?성경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복음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 근본적인 문제란 우리의 죄와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6).“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5-17). 복음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희생제물이자 속죄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롬 3:25; 요일 2:2; 4:10). 즉 예수님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짐을 지셨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What’s the Most Fundamental Problem the Gospel Addresses?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복음
변증
희생제물
속죄물
자유인
복음의목적
예수님
십자가
매일의 은혜를 주옵소서
by Jeff Robinson
2018-11-01
나는 들뜬 마음으로 그녀의 페이스북 화면을 클릭했다. 그녀의 남편(내 오랜 친구)과 이젠 각자 가정을 꾸렸을 것 같은 그들의 두 자녀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은 한 교회에서 촉망받는 리더십 그룹에 속해 있었다. 당시 내 눈에 그 부부는 마치 영적 거인과 같았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한없이 겸손해졌다. 그들은 성경을 깊이 알고 있었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후 우리 가족은 신학교에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 즈음 그들도 다른 도시로 떠나며, 그곳에서 더 큰 리더십을 맡게 되었다. 20년 전에 우리는 그랬다.그런데 그녀의 페이스북 사진들이 나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남자가 내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두 자녀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몰려왔다. 페이스북 한 페이지에는 그녀의 인생철학이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스도나 어떤 신앙의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인생이 당신을 붙잡기 전에 당신이 그 인생의 주도권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 흔적은 어느 유명한 ‘번영’ 복음 설교자의 기사뿐이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더 멋진 당신 발견하기”였다.‘아, 이러면 안 되는데.’두 번 더 클릭하자 그녀의 전 남편, 내 친구의 페이스북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새 여자와 새로운 세계관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으며, 내가 전에 알던 가족이라고 인식할 만한 어떠한 내용도 없었다.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의 자녀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무엇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토록 바꿔놓은 것일까? 무엇이 그들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멀어지게 했을까? 나는 진정 그들의 신앙과 가정이 그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그런데 한 가지 깨달음이 내 머리를 치는 듯했다.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어. 우리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어.’물론 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언젠가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과 그들의 인생에는 단 한 가지 차이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나와 내 아내에게 ‘끝까지 견뎌내는 은혜’(persevering grace)를 베푸셨다는 사실이었다.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일을 잊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나를 구원의 은혜에 머물게 하는 매일의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거의 감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로 옛 친구인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 기슭에 매일 같이 은혜의 파도가 밀려오게 하시는 은혜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게 되었다.견뎌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의 믿음을 지켜주시는 은혜에 당신이 가장 최근에 기뻐한 것은 언제인가? 나는 최근에 야고보서 4장을 설교하다가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라는 6절 말씀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매일의 죄를 회개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설교하며 가르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한 글을 쓰고, 또한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당신이 사역을 지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명제나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에 대한 논쟁은 흔히 그 미묘한 의미나 강조를 간과한 채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나는 다른 글(“Perseverance of the Saints: Tertiary or Foundational?”)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주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마침내 거짓 신자들이 밝혀질 때가 온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가령, 요한일서 2:19이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예수, 믿음의 용사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서 나를 위해, 당신의 백성 모두를 위해 기도하신다.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는 어떻게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장).예수님은 또한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시험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간구하셨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베드로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낙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길 바란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같지 않다. 주님의 기도는 뒤죽박죽 무질서하지도 않다. 주님의 기도는 그 동기가 복잡하지도 않고, 오류도 없다. 주님은 완벽하게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 매 순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은혜 안에 머물며 견뎌내고 있는 이유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넘치는 은혜 안에서 누리는 기쁨물론 이는 성도의 견인에서 우리가 그저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유혹을 거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된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다는 말과 하나님이 우리를 견뎌내게 하신다는 말, 둘 다 온전히 성경적이다.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힘들었던 전환점들을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함께하셨음을 깨닫는다. 대학 시절에는 나를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교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내 마음속 그 자리에 계셨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을 6주 앞둔 갓 스물두 살이었던 나를 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일련의 사건들로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항상 같은 자리에 계셨다. 우리 부부는 첫 아이를 유산했다. 말할 수 없이 슬펐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 자리에 계셨다. 나의 첫 목회 현장은 시험으로 가득했고, 내 계획보다 훨씬 일찍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 자리에 계셨다.난관과 고난을 겪으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눈앞에 있는 것을 거머쥐라는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꼭 붙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참고 견뎌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셨고,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견뎌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원제: Give Us This Day Our Daily Gra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구원의은혜
매일의은혜
성도의인내
성도의견인
대제사장기도
육아와 술에 대한 우리의 농담
by Tilly Dillehay
2018-11-01
집 근처 가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의 맥주타임.” 혹은 “육아에 지친 엄마를 위하여.” 술병 뿐 아니라 커피를 마실 때 사용하는 컵도 예외는 아니다. “쉿, 이건 와인이에요.” 술과 육아에 관한 농담은 온라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주변의 크리스천 엄마들도 술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진이나 영상을 자주 보내온다. 예를 들어 “엄마란 자녀의 사랑으로 힘을 얻고, 커피로 마음을 채우며, 술로 세월을 버틴다” 등의 것들이다. 물론 술에 중독된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축하할 일이 생기면 “와인타임!”을 외치며 엄마들만의 저녁 모임을 갖곤 한다. 이처럼 엄마와 술을 연결 짓는 농담은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육아는 너무 고되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고된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 술에 의존하려는 것일 터이다. 또한 가벼운 농담을 통하여 긴장을 풀고, 감정을 재조정하며, 더불어 서로를 심심히 위로하는 행위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해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음주에 대해 우리가 입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문”에 “파수꾼을 세우기”(시 141:3) 원하신다. 따라서 육아와 술을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우리의 언어 문화가 누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는 크리스천 자매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저는 그런 농담들이 무척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크리스천이면서 엄마인 한 여성의 말이다. 하룻밤 한잔이던 음주 습관이 이제는 세 잔이 되었다며 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술에 대한 농담을 들을 때 대부분 웃어넘기지만 사실 그런 말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서로를 자연스럽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죠. 온종일 힘든 육아를 버텼기 때문에 위로의 술이 필요하다고 잘못된 길을 부추기고 있어요.”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방법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술이 스트레스 완화제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아의 고단함을 음주로 잊자는 접근은 꽤 그럴 듯 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농담들은 “성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엄마의 고된 하루에는 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준다. 또한 육아와 음주에 관한 사진을 재미로 공유하는 문화도 크리스천 엄마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혹여 그들이 술의 남용이라는 죄에 도달했을 때조차 진지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술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는 분위기 속에서는 누군가의 음주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주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나의 문제도 진정으로 받아주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에게 포도주는 감사함으로 받는 선물이다. 따라서 힘든 오늘을 잊게 하는 약으로 술을 인식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시 104:15) 위하여 포도주를 주셨다. 하지만 이를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봄으로써 얻게 되는 거룩한 기쁨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2.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파한다 육아와 술의 관계를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미디어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다음은 ‘Babble’이라는 이름의 맘카페에 올라온 사라(Sarah Cottrell)의 고백이다. “머리 아픈 수많은 일들을 엄마라는 이유로 끝도 없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이지 힘들어요. 저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지친 하루의 끝을 습관처럼 인터넷과 술로 달랬어요. 그런데 매일 밤 한 잔이었던 습관이 어느새 다섯 잔이 되었더군요.” 리지(Liz Tracy)는 <뉴욕타임즈>에 육아의 고충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만약 술에 대한 기호가 없다면 스트레스와 싸울 다른 방편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살인 사건 시리즈를 시청하는 것이 제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항우울제 복용, 상담 치료, 글쓰기, 그리고 마트에서 카드를 마구 긁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분의 자녀를 점점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해결책은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어떠한가? 음주에 대한 유머를 주변에 전달함으로써,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육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이는 리지가 제시한 TV 시청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3. 금욕주의적 성격의 크리스천에게 시험이 된다 크리스천 중에는 여러 이유로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열망 때문일 수도 있고, 알코올 중독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술에 대한 억눌림이 있는 성도들 역시 음주에 대해 금욕을 실천할 것이다. 여기서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자들이란 바울이 언급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의미한다. 주님이 주신 모든 음식이 깨끗하지만 제사 음식을 우상 숭배로 여겨 먹지 아니한 자들처럼,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마음이 연약한 자 혹은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사람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음주에 대한 농담을 마치 마음이 연약한 자들이 극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문화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충고는 새겨들어야 한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0-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언제나 사랑으로 귀결된다. 바울의 충고대로 술에 대해 억눌림을 가진 자들과 함께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곤란하지 않도록 우리가 술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실천적 사랑이다. 따라서 술에 대해 금욕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음주와 관련된 농담 또한 삼가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저 잠시 웃고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기쁨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엄마로서의 고된 하루를 더 이상 커피나 술로 달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언약이 내일의 새 힘이요, 진정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약함 속에서 피난처인 주님께로 향할 때 우리의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농담과 진실은 거리가 멀다. 삶 속에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 진실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피난처가 아이들이 잠든 후 마시는 시원한 한 잔의 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크리스천은 진정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증거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Mommy Drinking Is No Joke 번역: 정새롬
문화
사회이슈
육아
음주
절제
반기독교적
성찬식
개신교인의 감소가 주는 역설적 희망
by Joe Carter
2018-11-01
상황최근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15년 동안 미국에서 각각의 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특히,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히는 미국인의 수가 급격히 하락했다. 배경15년 전 미국인들의 절반은 개신교인이었다. 그러나 ABC뉴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실시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말하는 미국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조금 넘는 수준까지 하락했다. 그중에서 다시 절반이 약간 넘는 (약 56퍼센트의) 사람들은 자신을 ‘복음주의적인’ 또는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밝혔다. 2003년 이래로 이 '비율'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복음주의적인(evangelical) 혹은 비복음주의적인(non-evangelical) 크리스천이라고 밝힌 사람들의 '숫자'는 각각 7퍼센트와 6퍼센트 감소했다. ABC뉴스는 이 감소가 백인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현재 39퍼센트의 백인들이 자신을 개신교인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2003년 이후 13퍼센트 떨어진 수치이다. 이는 히스패닉 개신교인이(22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8퍼센트, 흑인 개신교인은(64퍼센트에서 61퍼센트로) 겨우 3퍼센트만 떨어진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눈에 띄는 감소이다. 가톨릭이나 ‘다른 교파의 크리스천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신자들’은 그 숫자가 동일하거나 3퍼센트 이하의 수준으로 변동했다. 앞서 언급했던 개신교인 감소의 대부분은 더 이상 자신이 어떠한 종교와도 관계가 없다고 밝힌 기존 성도들에 의한 결과이다. 흔히 ‘무교인’(nones)으로 언급되는 이 사람들은 2003년에는 미국 전체 성인의 12퍼센트에 머물렀지만, 2017년에는 21퍼센트까지 급증했다. 이 무교인들에 대한 조사에서 16 퍼센트의 가장 큰 증가를 보인 연령대와 정치 계층은 각각 18에서 29세에 해당하는 청년층, 그리고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더 높은 연령대의 미국인, 공화당 및 보수정당의 지지자들, 그리고 흑인들은 4-5퍼센트에 머무는 작은 변화만 보였다. 이처럼 어떤 종교도 갖지 않는 현상은 유독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8세에서 29세에 해당하는 이들 가운데 35퍼센트가 자신이 어떠한 종교와도 관계가 없다고 밝혔는데, 이는 50세 이상의 성인들 가운데 13퍼센트만이 무교라고 대답한 것과 크게 대조된다. 또한 남성이 여성보다(25퍼센트, 17퍼센트), 대학 졸업자가 비졸업자보다(25퍼센트, 20퍼센트), 그리고 백인 및 히스패닉이 흑인보다(22퍼센트, 20퍼센트, 15퍼센트) 높은 무교인의 비율을 나타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의 35퍼센트가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이 비율은 중립파나 보수파가 각각 21퍼센트와 12퍼센트에 위치하는 것과 비교하여 높은 수치이다. 민주당원과 무소속 의원의 4분의 1도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이는 공화당원의 10퍼센트만이 무교라고 대답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분석1971년에는 단지 5퍼센트의 미국인들만이 무교라고 대답했다. 사실 1993년까지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8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종교를 버리는 일이 급격하게 증가하도록 영향을 주게 된 요인이 있었다.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최고경영자이자 ‘백인 크리스천 미국의 종말’(The End of White Christian America)을 집필한 로버트 존스(Robert P. Jones)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백인 기독교인들의 두드러진 감소가 종교를 갖지 않는 미국인들의 계층을 증가시켰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의 수는 이제 카톨릭 교인, 백인 주류의 개신교인,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보다 많다. 이들의 증가가 미국을 지난 10년 사이 백인 크리스천 중심의 국가에서 그 반대의 나라로 변화시켰다. 이제는 백인 크리스천들이 소수로 분류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이다. 2015년 에드 스테처(Ed Stetzer)가 한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이 큰 변화는 분명하게도 명목상의 교인들(the nominals)이 무교인들이 되고 있는 반면, 참된 신앙을 가진 교인들(the convictional)은 아직 헌신적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달리 말하면, 그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던 미국인들이 그 이름을 던져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지지합니다. 물론 참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들의 비율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이 이제는 신앙과의 관계를 끊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의 전체 비율도 하락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전반적인 하락이 앞선 조사가 보여 주는 결과이며 이 현상이 가속화되리라고 예상합니다.” 스테처가 옳았다. 지난 3년 동안 명목상 크리스천들의 숫자는 사실상 감소했다. 결국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 미국 사회가 "기독교 이후"(post-Christian) 단계보다는, 러셀 무어(Russell Moore)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명목적인 기독교 이후”(post-pretend-Christian)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회 현상과 작금의 교회를 통찰력 있게 살펴본다면, 미국이 후기 기독교가 아닌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주 접하기는 하되 아직 복음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름뿐인 개신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우리는 참 복음(the Good News)을 전하여 그들이 무엇을 버렸는지 알도록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지금의 무종교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다시 희망(good news)이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the Decline of Protestantism May Be Good News for Christians 번역: 장성우
개신교
희망
복음주의
워싱턴포스트
근현대교회
역사
교회 개척과 기업가적 면모
by Matt McCullough
2018-11-01
“당신은 기업가적인 면모가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자 했을 때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아마도 나의 배경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학위를 위해 장기간 공부한 것 외에는 교회 개척을 위한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거대한 학교 안 여러 학생 중 한 명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처럼, 나는 관심 분야의 범위 안에서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내가 만나는 인연들도 그 생활 안에서 한정되어 있었다. 교회 개척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든 간에 나는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했을 때, 우려 섞인 질문을 듣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교회 개척을 떠올렸을 때 목회적인 측면보다는 우선적으로 사업적인 측면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척을 위해서는 기업가 같은 면모가 있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가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기업가와 교회 개척자의 유사성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업가’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기업가를 "사업을 운영하는 자로서 이윤 추구를 위해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이를 "자원의 한계를 뛰어넘어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정의들은 비지니스 상황에서 유래했기에 지역 교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왜 사람들이 교회 개척과 기업가적 면모를 연결지어 생각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교회 개척자들은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교회를 개척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인적, 물적 자원의 부족분을 자신의 시간과 땀, 창의력과 유연성으로 채워가며 일해야 한다. 이처럼 만약 당신이 교회 개척자라면 필요한 모든 일을 기꺼이 해내야만 한다. 그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교회는 아직 안정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큰 그림을 그리고 계획을 세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때 유의할 것은 교회 개척은 언제든지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개척자는 이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잔업무도 피할 수 없는 임무 중 하나이다. 교회 개척자가 기업가와 동일할 수 없는 이유 감사하게도, 나는 기업가적인 면모를 갖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개척 교회가 충분히 번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목회자 주위에 리더다운 리더들을 세우는 것이다. 교회에 장로들이 많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나의 경우 우리 교회 리더들이 내 부족한 경험과 성품을 많이 채워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경험이 핵심 비결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업가처럼 인적 자원을 풍부하게 연결하고 활용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은 성경이 말하는 개척의 자격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 개척을 위해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장점은 어디까지나 성경 기반의 필수요소가 아니다. 기업가적인 면모가 없더라도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 그러나 목자가 아니라면 교회 개척은 불가능하다. 먼저 교회 개척, 다른 말로 ‘교회를 키우다’라는 말은 부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이 표현은 교회의 근본적인 존속 원리보다는 인위적인 성장의 측면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존재와 성장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므로 개척을 위한 기업가가 필요하지 않다. 강조하지만 교회 개척을 위해서는 반드시 목자가 필요하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성도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사역을 위해 준비되도록 돕기 위해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바울처럼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교회를 개척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하더라도 바울의 우선 순위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위해 목자를 확보하는 일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행 14:23; 딛 1:5). 교회를 위해 목자를 구하는 동안, 바울은 성도와 직접 대면하거나 편지를 통해 목회 사역을 감당했다. 두 가지 질문 당신이 도전을 즐기는 기업가적 기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가적 기질 때문에 교회 개척에 마음이 끌린다면, 위험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은 교회 개척을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할 몇 가지 질문 사항이다. 1. 당신은 왜 개척하고 싶은가? 기업가들은 틈새 시장의 기회를 엿본다. 그들은 수요 대비 충족되지 않은 공급의 차이를 포착하고, 이를 이윤추구에 어떻게 활용할지 구상한다. 기업가에 따라서는 어떠한 종류의 틈새인지보다 그 틈새로 인한 사업적 기회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포브스닷컴>(Forbes.com)의 한 작가는 기업가란 "제품, 서비스, 산업 또는 시장의 상황과는 무관한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즉, 그들은 제품 자체보다 아직 아무도 정복하지 않은 새로운 시장에서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에 이끌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는 건강한 교회 개척에 합당하지 않다. 당신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한다면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과 교회를 이끄는 구체적인 사역에 끌려야 한다. 만일 당신의 주된 동기가 새로운 모험이 주는 긴장감이라면 재고해 보길 바란다. 그 교회가 지속해야 할 목회 사역의 본질을 잃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즉, 모험이 주는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교회 개척자는 매일 반복되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장기적인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또 당신은 사람들의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의 권면에 순종하지 않아 당신을 화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건강한 교회에서도 마주하게 되는 목회 사역의 현실이다. 사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변화를 위한 오랜 시간의 인내야말로 당신과 성도들의 삶에 큰 열매를 맺는 길이 된다. 더불어 이 과정을 통한 인내는 당신에게도 큰 기쁨을 줄 것이다. 2. 당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앞서 나는 기업가들이 시장의 틈새를 기회로 만든다고 언급했다. 기업가들은 시장에 없는 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공급한다. 이는 교회 개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세우고자 하는 교회가 지역 사회에 필요한 건강한 교회의 특성에 잘 부합하는지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어느 특정 지역에 건강한 교회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개척을 위한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 ‘건강한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그 교회는 함께할 때 나타나는 삶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한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해 각자의 책임을 다한다. 더불어 공동체에 주신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이루기 위해 서로를 준비시키는 훈련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시, 공간을 뛰어넘어 건강한 교회들이 갖는 이와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들이다. 당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교회의 방향이 이러한 ‘건강한 지역 교회’의 공통적인 특성과 다르지 않은가? 혹시 기업가처럼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 개척에 접근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은 성경이 규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이 복 주시기로 약속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목표가 지역 교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면, 이는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당신 스스로를 상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교회 개척을 하다 보면 또 다른 유혹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스스로를 교회 개척 시장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독특한 상품, 수요를 일으킬 새로운 대상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이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 온라인 버전은 기업가의 정의에 대해 ‘상품기획자’(a promot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라고 안내한다. 혹시 교회 개척자는 반드시 기업가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있는가? 개척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교회의 얼굴이자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교회 개척의 성공을 위해 선택한 상품이 목회자 자신이라면, 어느 쪽으로 보나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뿌리내리지 못했을 경우, 당신은 매력 없는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신으로 인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도 교회 공동체의 중심을 성경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실패한 목회이다. 이는 영광을 받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본인이 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교회 개척의 성공은 제로섬게임(zero-sum game)과도 같다. 충실한 교회 개척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말에 동의해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Church Plants Need Shepherds, Not Entrepreneurs 번역: 고갑균
교회개척
기업가
교회를키우다
목자
하나님의소명
사역의본질
긴장감
사랑과관심
건강한교회
상품화
바로 지금이 영원히 중요하다
by R. C. Sproul Jr.
2018-11-01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죄는 적절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죄는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보다 어떤 것을 더 사랑하거나 우리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것보다 어떤 것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하게 사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와는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찾았다. 거기까지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하와가 그 열매를 보지 않으려면 눈이 안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와는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보다 그 열매를 더 사랑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했던 것보다 하나님의 법을 덜 사랑했다. 우리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흔히 우리의 시험은 어떤 죄를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며 옹호할 때 찾아온다. 우리가 “진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웃의 명예를 훔치는 일은 사랑으로 또 다른 죄를 합리화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웃의 아내를 훔치는 일도 죄를 옹호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적절한 척도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다.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마땅히 사랑해야 해야 할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이 죄는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모두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여호와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명령 받았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한 열정은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하고, 다른 모든 감정은 이 열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적게 사랑하거나 혹은 너무 많이 사랑함으로써 실패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라는 말씀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적절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이 두 종류의 실패가 종종 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것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너무 조금 사랑하고, 또한 반대로 어떤 것을 너무 조금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한다.예수님도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실 때(마 6:33) 똑같은 요점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염려를 멈추라고 권면하신 후에 이 명령을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진정으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집중할 것을 명령하신다.물론 이것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것이 죄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상적이고 신령하고 거룩한 것을 위하여 더럽고 비천하고 세속적인 것을 피하는 일이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동일한 맥락(마 6장)에서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우리의 양식은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이다(즉, 가치중립적이다). 우리의 음료도 아디아포라에 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이런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롬 14:13). 그러나 우리는 아디아포라에 속해 있는 대상들을 사랑함으로써 잘못된 길로 갈 때 죄를 범한다.한편, 산상설교의 이 맥락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지혜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과도하게 분리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에 관해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촉구하심으로써 천국 지향적인 관점을 견지하여 이방인과 같이 그런 것들을 갈망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는 점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따라서 우리는 그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온갖 좋은 선물에 대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선물에 눈이 어두워져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지 못하는 열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온갖 좋은 선물을 통하여 선물을 주시는 분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세계이다. 아버지의 법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우리에게 감사하지 않을 자유란 없다. 하나님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죄로, 딸기 아이스크림을 의로 보시지 않지만, 바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가 우리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며 자신에게 감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분명히 우리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우리의 감사를 통해 드러난다. 다시 한번, 하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명심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세워진다. 하나님은 우리만이 아니라 이 세상도 다스리신다. 그러나 우리와 세상의 구별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반발하여 분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감사함으로써 드러난다.이 세상의 평범한 일들, 곧 세상 것들은 단순히 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단순히 자연적 영역의 도구들이 아니다. 대신에 그것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온 보배로운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사는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아디아포라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간에, 모든 것이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속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ight Now Counts Forever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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