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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그룹을 교회로 볼 수 있을까?
by Sam Allberry
2018-11-09
소그룹 사역을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통상 열 명 가량의) 소그룹은 성경 토론을 위해서, 또 서로에 대해 기도하며 섬기기 위해서 적합한 모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일 예배에서는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소그룹은 ‘서로’(one another)에 대해 행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활발하게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 간에 신뢰를 형성하고, 통찰을 공유하며, 삶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논의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소그룹이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 간혹 소그룹 자체가 교회로 여겨지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만일 소그룹이 우리의 교회가 되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인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회가 소그룹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작을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는 건강한 교회가 소그룹을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물론 대신할 수 있다). 반대로 소그룹이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물론 대신해서는 안 된다).왜 안 될까?첫째,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가족을 통해 당신을 누구와 화목케 하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그룹은 교회 전체 구성원의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에 주일의 공예배는 그 요소들을 반영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둘째, 소그룹이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몸이며, 각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의 전체 가족 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은사와 사역이 소그룹에는 없다.셋째, 소그룹은 교회 리더십의 지도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행동의 문제가 발생할 때 소그룹 내에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소그룹에서는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힘들다.그러므로 소그룹은 교회의 공적 예배를 ‘보완’하는 방안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그룹을 지닌 교회이지 소그룹이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 생활의 중심은 소그룹이 아니라 전체의 모임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Can I View My Small Group as My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모임
소그룹
구심점
제한적
보완
대체
적용이 없다면, 당신은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by Michael Lawrence
2018-11-09
도대체 강의의 요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경험이 있는가? 나는 대학에서 미적분과 씨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수학 전공자라면 그 강의를 명확하게 이해했겠지만, 영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추상적인 내용의 지겨운 강의였다. 현실 세계에 미적분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 세계를 왜 배워야 하는지 고민했다. 만일 당신이 수학 전공자라면,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해 토론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을 한 번 생각해보라. 설명 ≠ 적용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 대해 논의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매주 성도를 미적분이나 작곡을 배우는 신입생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교사처럼, 목회자는 맡은 과목에 대해 열정적으로 준비한다. 우리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동사 시제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성도에게 교차대구법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식 있는 번역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독법이 옳음을 증명하도록 공부한다. 하지만 이처럼 지식을 풍부하게 준비하고 전달해도, 성도는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을 충분히 설교하고, 성도 역시 그 지식을 흡수하지만, 정작 그 다음 우리는 회중에게 이와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러분에게 달렸어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이러한 접근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성도를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면 이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목자라면 성도가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첫째, 적용은 힘든 일이다. 문법이나 문맥의 분석은 쉬운 반면, 서로 다른 인간의 마음과 각각의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다. 둘째, 적용은 주관적이다.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거나 동사를 적당하게 배치하는 일은 객관적인 검토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말씀을 일상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식이나 문법처럼 객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셋째, 적용은 복잡하다. 성경 본문은 요점이 있다. 그러나 적용은 여러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수많은 상황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건 힘든 일이다. 넷째, 적용은 개인적이다. 하나의 본문을 다양한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할 때마다, 이내 포기하고 결국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고는 한다.이 모든 이유는 목회자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과 관계가 있다. 또한 능숙하지 못하거나 복잡한 일을 피하려는 습관과 연관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핑계에 대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다.적용 ≠ 자각하게 함 적용은 성도의 몫이며 궁극적으로 목회자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시각이 있다. 이는 설교에서 적용을 무시하는 다섯 번째 이유로서 위의 네 가지 경우보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보인다. 본문을 사람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 아닌가? 만일 설교자가 나서서 본문을 삶에 적용해 주려다가 실수한다면, 성도를 말씀의 갈고리에 거는 일에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또한 그러한 실패는 청중으로 하여금 적용의 책임을 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 않는가? 만약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책임지고 적용의 자리는 그대로 남겨둔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 아닌가? 성령은 설교자보다 훨씬 더 적용을 잘 담당하실 것이다. 오늘날 매우 존경받는 설교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러한 논리는 비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는 확신과 적용을 혼동한 예이다. 죄와 정의 및 심판을 자각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요 16:8). 성령 이외의 그 누구도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확신은 심령(heart)의 문제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이 몫을 인위적으로 담당하려 할 때 종종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안에서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기에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게 된다. 하지만 적용은 성령처럼 확신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적용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주해가 성경 본문의 문맥을 이해하게 돕는다면, 적용은 그 본문이 펼쳐지는 오늘의 실제를 탐구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적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골 3:16) 삶과 윤리를 만들고 알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경험한 틀 안에서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목회자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적용에 대한 범위를 넓혀주고자 노력할 때, 성도는 자신의 틀을 넘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범주까지 말씀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들을 때마다, 곧바로 복음에 대한 나의 소명을 떠올린다. 내게는 그것이 자연적이며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교훈적인 적용을 통해 오늘의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한 구절에 대한 적용의 범위를 이토록 깊고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말씀이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적용은 성령의 사역을 침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적용의 예는 다양하다.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한다. 또한 느헤미야 8장 8절에서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향해 율법책을 낭독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이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아는 지식을 넘어 말씀이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해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관심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계속된다.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언하셨다. 또한 산상수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듣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삶 속에서 행하라는 당부로 가득하다. 사도들의 서신 역시 실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도들은 장로에게 적용을 강조했으며, 장로나 다른 가르치는 자들은 실천적인 경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모범을 보였다(딤전 2:2; 4장).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3절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와 교사를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어떻게 주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킬 것인가? 바울은 적용을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로 생각했다. 몇 가지 예들 실제적인 적용의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살인을 저지른 후 이러한 죄를 덮고자 애쓰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성적인 부정과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적용에 적절하다. 하지만 간음이나 살인에 직면하지 않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 본문은 의미없는 말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윗의 죄를 통해 우리는 성도가 죄의 일반적인 패턴을 눈으로 확인하도록 도울 수 있다. 죄의 기만적이고, 우발적이며, 점진적인 특성을 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엄마, 할머니, 대학생, 회사원, 사업가, 또는 퇴직자로서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숙고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적용을 시도할 때, 목회자가 성도의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성도에게 해당 구절의 의미를 알려주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도록 방향을 이끌어 주면 된다.그 다음으로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4절을 읽어보자. 이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곧바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녀가 없거나 더 이상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듣거나 주변의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고만 해야하는가? 아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까지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도가 알도록 목회자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본문 속 부모에 대한 존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의 개념을 성도가 이해하고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인, 장로와 성도 모두가 경건한 권위와 관련하여 분명 배울 것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연령과 은사에 있어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보다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제124문에 대한 답).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으며, 동시에 삶의 다른 현장에서 권위를 행사하기도 한다. 사려 깊은 적용은 그 권위를 바르게 인정하고 행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적용이 없는 설교는 결코 설교가 아니며 단지 강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강의를 듣고서 그 요점을 혼동하도록 방치하여서는 안 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말씀의 적용에 힘써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No Application? Then You Haven’t Preached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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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by 안환균
2018-11-0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마땅히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진정한 믿음의 첫 번째 증거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학교에 가고, 병을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에 간다. 그렇게 해서 함께 어울려 공부하거나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거기에 있는 교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때 소정의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교회공동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통로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진실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한 요청에도 기꺼이 응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분을 온전히 믿기 싫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라는 사람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교회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내 삶에서 더 중대한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 그분을 만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그런 만큼 그에게는 적어도 교회에 나가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야 상식적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구도의 과정에서나 만난 이후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결정적인 축복의 통로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출 수 있다면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 낮거나 좁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교하고도 복잡한 창조물들의 신비를 통해 지성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의식하고도 그분의 간섭을 받기 싫어 별 생각 없이 그냥 무신론자로 남으려 한다. 신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교회 참여만은 꺼리는 이유 역시 간섭받는 삶이 싫어서이다. 그러나 신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기만 하고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로 받아들이며 교제해나가지는 않겠다는 태도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잃었던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한 개개인이 곧 교회이며, 동시에 그 개인들의 모임 또한 교회이다.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 받은 개인들이 서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 공동체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이뤄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기독교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완성된다. 하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는 나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교회는 왜 나가냐?”라는 물음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오해한 탓으로 갖게 된 의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이러한 건실한 공동체성을 올바로 경험할 때 사회의 각 영역에 나가서도 올바르고 건강한 공동체성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신자들을 지체로 삼은 한 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18).“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이러한 교회공동체에 한 지체로 참여하는 일은 각 신자가 경험한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핵심 잣대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동일하게 그 사랑을 아는 다른 신자들과 사귀고 싶어진다. 공동체가 아쉽지 않다면 신앙의 진정성을 재점검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더구나 교회가 한 몸이라면 그 몸에서 떨어져나간 손은 손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만큼 한 유기체의 한 지체인 신자가 생명력을 공급받으려면 그 본래의 몸체에 한데 붙어 있어야 한다. 여러 은사와 기질을 가진 다양한 지체들이 교회공동체로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고 용납하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도 신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를 한 유기체로 고안하신 하나님의 배려는 사랑이지 짐이나 부담이 아니다.천국에 가기는 각 개인이 가지만 천국을 이루기는 혼자선 불가능하다. 천국에 갈 사람은 먼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의 방식을 훈련받아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신앙생활은 목적지를 잃은 방랑생활과도 같다. 교회에 참여하기가 번거롭고 싫다고 해서 천국 훈련을 포기할 순 없다. 물론 무턱대고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영적 영양분을 흡수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매일의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데로까지 나아가야 성숙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인격적인 관계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이 없이는 올바로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풍성하게 맛보게 해주는,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지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로 부여된 예배와 교제,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는 모두 공동체적인 활동을 전제로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4-25).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는 교회라는 구심점이 각 지체들이 각자의 일상 가운데로 흩어져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두세 사람은 증인의 최소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증인공동체인 교회를 무시한 개인적인 신앙생활만으로는 세상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개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이유이다.더구나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림 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 또한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은 교회에 소속된 지체가 죄를 범하면 그를 판단할 최종권위를 교회가 갖는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한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공동체는 늘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예배 공동체였다.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각자의 골방과 일상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는 더욱 귀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신앙 생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성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의 연합을 원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믿음 이후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올바로 강조되지 않으면 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을 따라 “교회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뛰쳐나가도 말릴 도리가 없다.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사원’ 같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관련하여 교회는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이스라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신 에덴동산이 아브라함의 제단으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으로, 그리고 교회공동체로 발전했다. 이것이 장차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교회는 태생 자체가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당신이 모태에서, 아니 태초에 에덴동산의 흙으로 창조된 이야기와 연결되고, 현재 당신의 삶과 죽음에 속속들이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존재의 완성과도 깊이 관련된 존재의 정점이기도 하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전해져 온 각 나라와 민족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 또한 예수님이 성경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진 선교의 역사이다. 교회를 통해 이 명백한 인류역사의 대로에서 이탈하지 않는 참된 믿음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예수님의 몸 된 공동체, 즉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얻기 위해 온 우주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주장해오셨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 인류 역사라는 대하드라마 역시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다.“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교회
교회생활
교회공동체
혼인잔치
천국복음
공예배
하나님 나라의 도래
by R. C. Sproul
2018-11-09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추가 설명이 없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마가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를 덜 소개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에는 네 개의 비유들이 나온다. 마가는 비교적 긴 내용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시작하여 세 개의 짧고 간결한 비유들로 이어간다. 각 비유는 대부분의 비유들처럼 한 가지 핵심 개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들 세 비유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 무엇을 가르친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파종과 씨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씨가 뿌려지는 여러 종류의 토양들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지 않으며 자연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밤새 비가 내린다. 다음 날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췬다. 발아하여 작고 파릇한 싹이 나온다. 조만간 수확할 때가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산이 이 과정과 흡사함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작게 시작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가 있는 동안에도 자란다. 씨앗의 성장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신비한 과정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전개된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내게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면 그것들은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언행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한번은 예배 후에 내가 교회 문 앞에 서 있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15년 전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교회에서 내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그 예배 후에 그는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고 내게서 들은 대답을 그 이후로 줄곧 간직하며 살았다고 했다. “내가 귀가했을 때, 목사님 말씀을 내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여 저를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셨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껏 내가 사람들에게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상처를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혼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 말이 좋게든 나쁘게든 참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많은 목사들이 사역을 그만둔다. 도덕적인 이유로 떠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회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떠난다. 그들은 자신이 헛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마음을 다해 설교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비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설교자가 자신의 말의 결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설교를 사용하실 수 있으며 또한 사용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와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엿보게도 하신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수많은 목회자 컨퍼런스와 세미나에 참석해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 경험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그들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준비했으나 정작 강단에서 설교하면 교인들의 반응이 별로였던 경우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들은 회중들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설교를 기억하여 유익을 받은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그들이 보잘것없게 여긴 것을 하나님은 큰 유익을 위해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봉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우리가 자는 동안 하나님이 씨앗을 발아시켜서 생명이 나오게 하며 마침내 온전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친히 거두신다. 우리는 봉사의 결실을 곧바로 보려는 생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결실을 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등불을 밝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원제: The Coming of the Kingdom 출처: www.ligonier.or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신학
신약성경
하나님나라
마가복음
비유
설교
씨뿌리는자비유
직업을 선택할 때 해야 할 질문들
by John Piper
2018-11-09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곧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이 빛나시도록 이 직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2. 이 직업을 선택하면 나를 거룩하게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3. 이 직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4. 이 직업이 왕이신 주님을 거역하는 생각이나 감정, 행동을 부당하게 강요하지는 않는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5. 이 직업은 내 삶의 패턴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 곧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완수하는 데 의미 있게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6. 이 직업은 내게 있는 최고의 에너지를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7. 내가 이 직업에 수반되는 활동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도록 내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8. 이 직업이 나로 하여금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상실하게 될 것인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9. 이 직업의 목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당당하게, 신실하게 헌신하고자 하는 나의 삶의 방향성에 부합하는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10. 이 직업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인생을 마칠 때 삶을 제대로 투자했다고 느끼게 할 만한 일인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11. 이 직업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으시고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는 나의 신앙에 부합하는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12. 이 직업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궁극적인 진리에 부합하는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위하여,존 파이퍼 목사원제: Some Questions to Ask When Considering a Job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매일배움
생활
직업
존파이퍼
목적
헌신
십자가
착한행실
신앙관
거룩함
결혼할 수 있을 때 데이트를 하라
by Marshall Segal
2018-11-01
젊은이들은 언제 데이트를 시작해야 하는가? 아마 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일단 당신이 (혹은 다른 사람이) 왜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데이트로 인해 매우 큰 대가를 치를 때가 많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참담한 이별, 성적인 죄, 충격적인 배신, 갑작스러운 실연,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 등 결코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고통 말이다. 그러면 왜 우리들 가운데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렇게 허겁지겁 데이트에 뛰어드는가? 이는 어느 정도 사탄이 데이트의 위험들을 매우 잘 감춘다는 사실 때문이다(계 12:9). 사탄은 로맨스가 멋진 인생의 필요조건이라고 제시하고, 그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공허하고 외롭고 무익하다는 생각을 주입시킨다. 사탄은 우리의 욕망을 이용해 우리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하며, 최고의 기쁨과 가장 충만한 경험은 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혹은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우리를 납득시킨다. 사탄은 실연의 상황을 준비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독성을 가진 성적인 죄로 우리를 유혹한다. 사탄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우리 가운데 수백만은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너무 일찍 데이트를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탄은 그런 데이트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결과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6학년 때 첫 번째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그 해 여름에 (또 다른 여자아이와) 첫키스를 했으며,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거의 해마다 새 여자친구를 만났다. 너무 어릴 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아닌 여자친구들에게서 애정과 안전, 친밀감을 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나는 일찍, 많이 데이트를 했다. 나의 10대는 나이에 비해 너무 진지하고, 너무 오래 지속되고, 그 결과 너무 고통스럽게 끝나는 관계들이 길게 잇따르는 시절이었다. 나는 ‘사랑해’라는 말을 너무 성급하게, 너무 자주 말했다. 사탄은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내 이른 데이트사의 모든 순간을 즐겁게 관람했다. 왜 데이트를 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을 놓고 벌어지는 영적 싸움은 실재하며, 여기에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자리한다. 따라서 먼저 우리가 왜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왜 나는 열두 살 때 (그리고 열세 살, 열네 살, 심지어 열여덟 살에도) 여자친구를 사귀었을까? 많은 이들은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고, 소속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어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가 어떤 특별한 남자나 여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충족된다고 상상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어떤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향해 치솟기를 원한다. 로맨스와 결혼의 신비는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우정의 절정처럼 보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고, 소속되며, 그의 삶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 삶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가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의미 있는 명분을 위해 중요하게 기여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필요들을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데이트를 한다.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결혼하고 싶어서’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이, 재정상태, 개인의 성숙, 교육, 삶의 단계 등의 면에서 결혼과 거리가 멀다. 사실 우리는 로맨스에서 행복과 소속감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행동할까?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데이트를 하지 않을 것이다(심지어 대학교 1, 2학년 때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 해답은 내가 데이트와 결혼의 중요한 차이점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알게 되었다. 데이트 중인 커플은 때때로 결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절대로 결혼한 커플이 아니다. 우리가 이 두 관계의 차이점을 이해할 때에만 데이트에 따르는 모든 고통과 실패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다. 우리의 현재 관계 상태가 어떻든 간에, 누구의 인생에서나 가장 큰 상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에게 알려지는 것,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랑 받는 것이다. 결혼에서의 큰 상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배우자와 맺는 친밀함이다. 남편 또는 아내와 서로 알고 알려지며 사랑하고 사랑 받는 관계 말이다. 데이트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맺는 결혼에 대한 명확한 이해이다. 로맨틱한 친밀함은 결혼이라는 관계 속에서 가장 안전하며, 결혼은 명확한 대상이라는 조건이 허락될 때 가장 안전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그런 친밀한 관계를 갖고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결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결혼하고 싶다면 누구와 결혼하느냐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 적어도 미국의 경우에는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네브라스카 주와 미시시피 주는 예외인데, 이 두 주는 더 늦어서 각각 만 19세, 21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단 나이만이 아니라 성숙함과 견실함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내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는 장차 50년 간 남편 또는 아내인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할 만큼 충분히 성숙한가? 우리는 정말 충분히 성숙한가? 우리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다 한 가정을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 있는가? 내 이성친구가 가진 믿음은 고난을 통해 그 진정성이 드러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검증되었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어떤 이들은 이 조언을 싫어할 테고, 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결혼이 가능해지기 훨씬 전부터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데이트할 수 있다고 해서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지도 못하면서 결혼을 지향하는 데이트를 할 수 없다. 당신은 일찍부터 결혼에 대해 꿈꿔왔을 수도 있다(나는 그랬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당신은 언제라도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결혼할 수 있을 때 데이트를 하라. 내 조언은 (받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18개월 안에 무리 없이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고려사항은 그 기간 안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결혼이 그분의 뜻이며 타이밍이라는 확신을 주신다면 언제라도 결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18개월이라는 단서는 없으므로 내 조언을 하나님의 법인 양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 조언이 당신의 마음에 현명하고 안전하게 보이는지는 (하나님, 당신의 부모님, 그리고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시험해 볼 수는 있다.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데이트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라는 말은 아니다. 삶은 결코 사랑과 결혼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심지어 주요 요소도 아니다). 우리 삶은 우리가 미혼이든 기혼이든, 16세이든 60세이든 간에 예수님으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계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관계가 당신에게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청년기에 광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재능을 사용해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결혼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강건하고 따스한 미래의 아내 또는 남편으로 만들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세상에 나타내고 싶어 하신다. 당신의 청년기를 위한 하나님의 꿈을 경험하기 위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럼 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1. 다른 이들에게 담대하고 신실한 모범을 보이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 4:12). 당신은 아직 투표권이 없을 수도 있고 운전면허조차 없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살 수는 있다. 오늘 당신의 말(당신이 가족과 친구에게 사용하는 말)은 예수님에 대해 알려준다. 당신의 행동(당신이 무엇을 하겠다거나 하지 않겠다고 날마다 결심하는 태도나 당신이 세상과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는 습관적인 모습)은 당신의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당신의 사랑(당신이 삶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은 당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사랑 받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당신의 정결함(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모든 시기상조의 즐거움과 경험보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겠다는 당신의 헌신)은 자기 욕망에 얽매여 있는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2. 섬김을 받으려는 삶이 아닌 섬기려 하는 삶을 살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0-11).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소진된 나머지 가까운 이웃들의 궁핍함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당신은 소셜미디어, 쇼핑, 비디오 게임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할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15-16세에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겨루어 금메달을 따는 10대 선수들을 보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해 다른 사람의 삶을 달라지게 만들겠다고 결단하면 어떨까? 교회 부서에서 섬기거나, 후배의 멘토가 되어 주거나,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세상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할 능력이 있다. 당신을 통해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라. 3. 하나님이 당신에게 명하시는 미래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2-25).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결혼하고 싶어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누구도 날 때부터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다.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세상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으로 오셔서 그분의 죄 많은 신부인 교회를 위해 죽으신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내라는 명령이다. 선천적인 본능대로라면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많이 좋아하는 상대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데이트할 준비가 될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을 한 단계씩 변화시키시며, 또한 당신이 바람직하게 사랑하면서 데이트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준비시키실 것이다. 4. 기다리는 시간에 즐거워함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우리 주변에서 "다들 데이트한다"며 자신의 외로움을 한탄하는 젊은 남녀들을 보게 되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 행복, 안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젊은이들을 보기란 훨씬 어렵다.당신이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데이트를 하지 않고도 만족을 누림으로써 당신의 친구들을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하라.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ait to Date Until You Can Marry번역: 매일배움
생활
관계
결혼
데이트
섬김
기다림
로맨스
친밀감
성숙
전전긍긍하는 부모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
by Cameron Cole
2018-11-01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갓난아이를 돌봄이(baby sitter)에게 처음 맡긴 날을 생각해 보라. 아마도 비상 연락처를 여러 개 준비한 것은 물론이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이가 잘 있는지 돌봄이와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가끔 자녀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날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님께서 나를 성인이 될 때까지 이토록 잘 키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심 오늘날의 육아 상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이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어쩌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봐 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거의 전문적 수준의 돌봄 매뉴얼을 만들지도 모른다. 또한 교회 주일학교나 놀이방에 아이를 맡길 때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아이와 다른 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시간 내내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혹시 모를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느라 초조하게 진땀을 흘릴 수도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처음 보낼 때는 더 큰 고민에 빠진다. 담임선생님이 내 아이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만 할 것 같다아이를 맡기고 뒤돌아서 나올 때면 대성통곡하는 소리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하원 시간에는 선생님으로부터 오늘 하루 우리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이와 같이 자녀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때에 느끼는 불안감은 아이가 크는 내내 반복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할 때까지도 이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다. 모든 부모는 내가 아닌 그 누구도 나처럼 제대로 우리 자녀를 돌볼 수는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뛰어난 부모인가? 나는 첫째 아이 카메론을 내가 아닌, 완전한 자격을 갖춘 다른 분께 영원히 맡겨 드려야 했던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은 양육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을 완전하게 하나님 기준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이의 세 번째 생일이 지나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겪었던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을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보내게 되었다. 아들이 더 이상 우리의 손에 있지 않음을 온전히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도 우리 부부는 아들에 대한 불안감을 여전히 마음속에 안고 살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러했다. 아내는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한테 아이를 맡긴 것처럼 안심이 안 돼”라고 말했다. 부모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하여 진심으로 노심초사했다. 하나님은 우리 아이가 잠들기 전에 노래를 많이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우리 아이에게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하나님이 우리처럼 매일 아이를 충분히 안아 주실까? 잠들기 전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시면 좋겠는데…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매일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때는 슬픔의 수렁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였다. 나는 하나님의 필요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었지만 내 아들의 부모로서 주님이 완벽한 대리자가 되어 주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에 관해서는 나 아닌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카메론의 두 형제를 이 땅에서 키우는 부모로서 나는 양육의 순간순간마다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불안이 하나님을 내 아이의 부모로서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자만과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자만과 불신 첫째, 선생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돌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리 양육자를 내 손으로 촘촘히 관리하려 드는가? 이는 부모로서의 본인 역량에 대한 자만이다. 우리는 자녀의 삶 속에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자신의 손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자만의 방증이다. 이러한 자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전능하고 끝없는 사랑을 지녔으며 완벽하게 지혜로워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한다. 또한 아이의 행복을 내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양육을 우려와 통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절망과 독단 사이에서 비틀거리게 되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있는가? 이는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일 때에 더욱 명확히 알게 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시간에도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돌보시고 지키신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은 이러한 사실을 생각의 저 너머로 미루어 놓곤 한다. 자신의 손으로만 아이들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녀를 날마다 쉬지 않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가장 잘 증명된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돌보심을 영원토록 보고 또 누리셨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빛나는 통찰과 지키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인간의 몸으로서 신실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만 양육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평안의 시작은 내가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모두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부모이다. 반면에 우리의 자녀는 완벽한 아버지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부모로서 짓게 되는 죄와 실패는 훗날 우리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그 후손들을 훈육하기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또한 너무 절망하지도 말자. 당신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이웃의 ‘완벽한’ 부모들도 똑같이 실수한다). 모든 부모가 형편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절대 하나님처럼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부모로서의 소명을 따라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아이들을 향한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불어, 내 양육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아이들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로 채워진 복음만이 우리에게 희망과 평안을 안겨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어떤 부모보다 훌륭한 아버지이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우리 자녀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우리 아이의 성격, 남과 다른 부분,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알고 계신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로서 더없이 완전하다. 또한,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부모인 우리들의 무능함을 덮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아이에게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돌봄이 아닌,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큰 은혜로 아이들을 채우실 것이다. 자녀가 이 땅에 있든 하늘나라에 있든,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 인하여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이 근원적 아버지요 최고의 부모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저 더 나은 부모인 그분의 대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만과 불신을 버리고 아이를 하나님께 맡길 때에 진정한 평안과 안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race for the Micromanaging Parent 번역: 고갑균
가정
양육
자만과불신
부모
하나님의은혜
진리
복음
사랑과은혜
희망과평안
불안함
복음이 다루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by Mark Dever
2018-11-01
복음의 목적이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인가? 의미를 추구하는 지적 탐구심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사회 정의를 실현할 목적인가? 혹은 빈곤 문제와 구제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가?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은 삶의 특정한 문제 혹은 개별적 상황을 복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복음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가 이러한 것들일까?성경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복음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 그 근본적인 문제란 우리의 죄와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6).“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5-17). 복음이 다루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희생제물이자 속죄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롬 3:25; 요일 2:2; 4:10). 즉 예수님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짐을 지셨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출처: www.9marks.org원제: What’s the Most Fundamental Problem the Gospel Addresses?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복음
변증
희생제물
속죄물
자유인
복음의목적
예수님
십자가
매일의 은혜를 주옵소서
by Jeff Robinson
2018-11-01
나는 들뜬 마음으로 그녀의 페이스북 화면을 클릭했다. 그녀의 남편(내 오랜 친구)과 이젠 각자 가정을 꾸렸을 것 같은 그들의 두 자녀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래전에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은 한 교회에서 촉망받는 리더십 그룹에 속해 있었다. 당시 내 눈에 그 부부는 마치 영적 거인과 같았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한없이 겸손해졌다. 그들은 성경을 깊이 알고 있었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이후 우리 가족은 신학교에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 즈음 그들도 다른 도시로 떠나며, 그곳에서 더 큰 리더십을 맡게 되었다. 20년 전에 우리는 그랬다.그런데 그녀의 페이스북 사진들이 나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남자가 내 친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두 자녀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안타까움을 몰려왔다. 페이스북 한 페이지에는 그녀의 인생철학이 표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스도나 어떤 신앙의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인생이 당신을 붙잡기 전에 당신이 그 인생의 주도권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종교적 흔적은 어느 유명한 ‘번영’ 복음 설교자의 기사뿐이었다. 그 기사의 제목은 “더 멋진 당신 발견하기”였다.‘아, 이러면 안 되는데.’두 번 더 클릭하자 그녀의 전 남편, 내 친구의 페이스북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였다. 새 여자와 새로운 세계관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으며, 내가 전에 알던 가족이라고 인식할 만한 어떠한 내용도 없었다.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의 자녀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무엇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토록 바꿔놓은 것일까? 무엇이 그들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멀어지게 했을까? 나는 진정 그들의 신앙과 가정이 그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그런데 한 가지 깨달음이 내 머리를 치는 듯했다.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어. 우리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어.’물론 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언젠가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과 그들의 인생에는 단 한 가지 차이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나와 내 아내에게 ‘끝까지 견뎌내는 은혜’(persevering grace)를 베푸셨다는 사실이었다.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일을 잊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나를 구원의 은혜에 머물게 하는 매일의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거의 감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로 옛 친구인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 기슭에 매일 같이 은혜의 파도가 밀려오게 하시는 은혜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게 되었다.견뎌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의 믿음을 지켜주시는 은혜에 당신이 가장 최근에 기뻐한 것은 언제인가? 나는 최근에 야고보서 4장을 설교하다가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라는 6절 말씀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고, 매일의 죄를 회개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말씀을 설교하며 가르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한 글을 쓰고, 또한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당신이 사역을 지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명제나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에 대한 논쟁은 흔히 그 미묘한 의미나 강조를 간과한 채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곤 한다. 나는 다른 글(“Perseverance of the Saints: Tertiary or Foundational?”)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주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마침내 거짓 신자들이 밝혀질 때가 온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가령, 요한일서 2:19이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예수, 믿음의 용사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서 나를 위해, 당신의 백성 모두를 위해 기도하신다. 주님의 대제사장 기도는 어떻게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장).예수님은 또한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시험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간구하셨다. 요한복음의 결론은 베드로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낙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길 바란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같지 않다. 주님의 기도는 뒤죽박죽 무질서하지도 않다. 주님의 기도는 그 동기가 복잡하지도 않고, 오류도 없다. 주님은 완벽하게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 매 순간 말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은혜 안에 머물며 견뎌내고 있는 이유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넘치는 은혜 안에서 누리는 기쁨물론 이는 성도의 견인에서 우리가 그저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유혹을 거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된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다는 말과 하나님이 우리를 견뎌내게 하신다는 말, 둘 다 온전히 성경적이다.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힘들었던 전환점들을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함께하셨음을 깨닫는다. 대학 시절에는 나를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교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내 마음속 그 자리에 계셨다. 아버지는 대학 졸업을 6주 앞둔 갓 스물두 살이었던 나를 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일련의 사건들로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졌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항상 같은 자리에 계셨다. 우리 부부는 첫 아이를 유산했다. 말할 수 없이 슬펐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 자리에 계셨다. 나의 첫 목회 현장은 시험으로 가득했고, 내 계획보다 훨씬 일찍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더 위대하신 분으로 그 자리에 계셨다.난관과 고난을 겪으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눈앞에 있는 것을 거머쥐라는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꼭 붙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참고 견뎌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셨고,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견뎌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그렇게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원제: Give Us This Day Our Daily Gra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구원의은혜
매일의은혜
성도의인내
성도의견인
대제사장기도
육아와 술에 대한 우리의 농담
by Tilly Dillehay
2018-11-01
집 근처 가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의 맥주타임.” 혹은 “육아에 지친 엄마를 위하여.” 술병 뿐 아니라 커피를 마실 때 사용하는 컵도 예외는 아니다. “쉿, 이건 와인이에요.” 술과 육아에 관한 농담은 온라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주변의 크리스천 엄마들도 술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진이나 영상을 자주 보내온다. 예를 들어 “엄마란 자녀의 사랑으로 힘을 얻고, 커피로 마음을 채우며, 술로 세월을 버틴다” 등의 것들이다. 물론 술에 중독된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축하할 일이 생기면 “와인타임!”을 외치며 엄마들만의 저녁 모임을 갖곤 한다. 이처럼 엄마와 술을 연결 짓는 농담은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육아는 너무 고되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고된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 술에 의존하려는 것일 터이다. 또한 가벼운 농담을 통하여 긴장을 풀고, 감정을 재조정하며, 더불어 서로를 심심히 위로하는 행위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해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음주에 대해 우리가 입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문”에 “파수꾼을 세우기”(시 141:3) 원하신다. 따라서 육아와 술을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우리의 언어 문화가 누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는 크리스천 자매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저는 그런 농담들이 무척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크리스천이면서 엄마인 한 여성의 말이다. 하룻밤 한잔이던 음주 습관이 이제는 세 잔이 되었다며 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술에 대한 농담을 들을 때 대부분 웃어넘기지만 사실 그런 말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서로를 자연스럽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죠. 온종일 힘든 육아를 버텼기 때문에 위로의 술이 필요하다고 잘못된 길을 부추기고 있어요.”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방법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술이 스트레스 완화제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아의 고단함을 음주로 잊자는 접근은 꽤 그럴 듯 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농담들은 “성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엄마의 고된 하루에는 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준다. 또한 육아와 음주에 관한 사진을 재미로 공유하는 문화도 크리스천 엄마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혹여 그들이 술의 남용이라는 죄에 도달했을 때조차 진지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술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는 분위기 속에서는 누군가의 음주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주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나의 문제도 진정으로 받아주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에게 포도주는 감사함으로 받는 선물이다. 따라서 힘든 오늘을 잊게 하는 약으로 술을 인식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시 104:15) 위하여 포도주를 주셨다. 하지만 이를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봄으로써 얻게 되는 거룩한 기쁨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2.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파한다 육아와 술의 관계를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미디어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다음은 ‘Babble’이라는 이름의 맘카페에 올라온 사라(Sarah Cottrell)의 고백이다. “머리 아픈 수많은 일들을 엄마라는 이유로 끝도 없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이지 힘들어요. 저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지친 하루의 끝을 습관처럼 인터넷과 술로 달랬어요. 그런데 매일 밤 한 잔이었던 습관이 어느새 다섯 잔이 되었더군요.” 리지(Liz Tracy)는 <뉴욕타임즈>에 육아의 고충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만약 술에 대한 기호가 없다면 스트레스와 싸울 다른 방편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살인 사건 시리즈를 시청하는 것이 제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항우울제 복용, 상담 치료, 글쓰기, 그리고 마트에서 카드를 마구 긁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분의 자녀를 점점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해결책은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어떠한가? 음주에 대한 유머를 주변에 전달함으로써,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육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이는 리지가 제시한 TV 시청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3. 금욕주의적 성격의 크리스천에게 시험이 된다 크리스천 중에는 여러 이유로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열망 때문일 수도 있고, 알코올 중독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술에 대한 억눌림이 있는 성도들 역시 음주에 대해 금욕을 실천할 것이다. 여기서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자들이란 바울이 언급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의미한다. 주님이 주신 모든 음식이 깨끗하지만 제사 음식을 우상 숭배로 여겨 먹지 아니한 자들처럼,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마음이 연약한 자 혹은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사람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음주에 대한 농담을 마치 마음이 연약한 자들이 극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문화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충고는 새겨들어야 한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0-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언제나 사랑으로 귀결된다. 바울의 충고대로 술에 대해 억눌림을 가진 자들과 함께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곤란하지 않도록 우리가 술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실천적 사랑이다. 따라서 술에 대해 금욕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음주와 관련된 농담 또한 삼가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저 잠시 웃고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기쁨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엄마로서의 고된 하루를 더 이상 커피나 술로 달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언약이 내일의 새 힘이요, 진정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약함 속에서 피난처인 주님께로 향할 때 우리의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농담과 진실은 거리가 멀다. 삶 속에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 진실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피난처가 아이들이 잠든 후 마시는 시원한 한 잔의 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크리스천은 진정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증거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Mommy Drinking Is No Joke 번역: 정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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