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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은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by Kathy Keller
2018-11-26
‘도븨라이, 노 프로븨라이’(Doveryai, no proveryai)라는 러시아 명언이 있다. 이 명언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뜻은 ‘신뢰하되 검증하라’이다. 이는 주로 다양한 국제 협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신뢰하지만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신뢰는 정말 좋으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이 명언이 크리스천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신앙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한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처럼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Faith is believing in what you know ain’t true)이라고 정의한다. 둘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가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에는 신화나 사실이 아닌 것, 혹은 거짓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인생이 거칠고 비참할 때, 하나님의 진리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최근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역사적이면서도 검증 가능한 사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한다. 그중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존 및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가 죽지 않고(즉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증거도 없었다면(곧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부활해서 걷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제자들과 교제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불쌍한 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운의 토끼발(lucky rabbit’s foot)과 같은 부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당신에게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부적이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때 회의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신앙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과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신앙, 심지어는 과학, 교육, 정치 권력 등에 뿌리를 두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기초이자 존재의 의미는 좋은 교훈(the good advice)에 국한된다.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삶을 위해 중요한 규칙들을 잘 지키고 선한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삶은 인류 문명에도 괄목할 만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훌륭한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혹 지금 당장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당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 산다든가(이슬람), 환생의 삶을 경험한다든가(힌두교), 무존재(non-existence)의 평화를 누린다든가(불교), 아니면 ‘뉴욕타임스’에 당신의 부고가 게재되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이 신앙은 성경의 윤리적 교훈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도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신앙, 회복을 향한 소망,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어떤 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실제 역사 가운데 살고,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만들어진 이야기(a fairy tale)나 쫓으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바보처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말이다.베토벤과 목격자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한다. 바울은 엄격한 로마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철학과 성경에 정통한 자였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교육 배경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을 실제로 보았던 그 목격자들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이끌어 내었다.나 역시 이런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본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일탈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나는 낡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며 생각하는 일을 즐긴다. 그것도 대부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 Overture)을 들으면서 말이다(다행히도 나의 오래된 러닝머신에는 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TV가 달려있지 않다). 이 서곡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 중에 하나다. 나는 그 음악의 마지막 부분, 승리 파트를 들으며 상상한다. 말하자면, 그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상상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다. 천사들이 돌을 굴리고 예수님은 부활한 몸을 입고 기뻐하며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가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이런 상상을 하며 음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합창단원에게 부활의 승리를 표현하는 나팔을 불도록 사인을 준다.그런데 나는 그때 마태복음의 부활 기사를 읽으며 내 상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낸다(그 돌은 몇 톤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테투리에서 입구 쪽으로 갈수록 경사는 더 높았다. 아마도 돌이 굴려져서 입구가 막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돌을 다시 밖으로 굴려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때(즉 천사가 돌을 굴려 냈을 때)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러 온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마 28:6), “먼저 갈릴리로”(마28:7) 가셨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엘비스는 이미 쇼를 끝내고 공연장을 떠난 것이다(천사가 돌을 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천사가 돌을 움직이도록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셨지만, 자신을 싼 수의를 통과해서 돌로 봉해진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요 20:19).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덤을 나가실 때, 천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천사는 ‘왜’ 돌을 굴렸을까? 만약 천사가 돌을 굴리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위에 그대로 앉은 채,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마 믿었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사는 여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설득력 있는 천사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빈 무덤이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빈 무덤을 보지 않은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헛것을 보았다고 취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여전히 무덤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천사가 돌을 굴려야 했던 진짜 이유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시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천사의 행동은 우리를 무덤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놓여 있던 수의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 신앙은 천사가 무덤을 열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빈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검증된다.그러므로 늘 질문하고 의구심을 표출하길 바란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역사는 성경을 뒷받침한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ith Is Historically Verifiable—Or It’s Nothing번역: 김재덕
복음
부활
검증
진리
천사
무덤
역사
성경
실패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by Cole Huffman
2018-11-26
누군가에게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하길 바래”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사람을 경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혹 약간만 실패하길 바란다고 말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피겨스케이트 선수였던 스콧 해밀턴(Scott Hamilton)은 1984년에 메달을 딴 이후, 오랫동안 이 종목의 분석가로 활약해 왔다. 2018년 동계올림픽 기간에 스콧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선수 생활동안 내가 넘어진 횟수를 계산해보니 41,600번이나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는 41,600번 다시 일어났다.” 그는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 넘어지면 무조건 일어나도록 단련된 ‘강한 정신 근육’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정신 근육은 실패할 때 만들어진다. 물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비극적인 실패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수천 번 넘어져야 한다. 해밀턴의 점프와 백플립이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년간의 연습과 대회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대변인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패로 인해 심각하게 실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악관 일은 실패를 고통스럽게 인식하지 않는 이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영적인 근육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특히 목회자들은 곳곳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신의 실패에 가슴 아파하며 나눌 줄 알아야 좋은 목회자이다. 나는 목회자를 무너뜨리는 도덕적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게으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여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만성적 실패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소명에 필요한 역량, 곧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목회자는 학자의 정신, 어린아이의 마음, 그리고 코뿔소의 가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왜 코뿔소의 가죽인가? 물론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바로 그 사람들이 간혹 비평과 공격으로 당신을 실패하도록 몰고 가는 상황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실패를 모조리 피한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언젠가 항불안제의 후유증에 대해 웃으며 설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가볍게 여겼지만, 내 말을 듣고 한 젊은 엄마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남편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결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감사하게도 나를 용서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교인들의 상처에 관해 알게 되었다. 실패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었을 무언가를 그 날의 실수를 통하여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유일한 방법그 무언가를 배울 다른 길이 없었기에 실패를 통해 배워야만 했던가?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말했다. “화가 났을 때 말하라. 그러면 정말로 후회하게 될 말을 할 것이다.” 나도 그래본 적이 있는데, 바로 설교할 때였다. 나는 그 날의 설교를 정말 후회한다. ‘그 주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자주 생각한다.나는 실패한 교회개척자이다. 몇 년 전 개척된 이 교회는 다행히도 잘 되어가고 있지만, 오늘의 결과는 내 덕분이 아니다. 나는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 부었지만, 내가 이 사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어떤 이들은 내 아이의 문제를 보며 내가 양육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마약 치료센터에서 내가 만나 본 대부분의 부모들은 스스로를 양육의 실패자로 여긴다. 그런데 중독자를 둔 부모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녀들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시도하는 방법들이 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더 실패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방식으로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녀들을 계속 실패하게 만든다. 아마도 부모의 직관에는 반대되겠지만, 우리 자녀들은 홀로 있어야만 한다. 그가 공동체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도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가 주체가 되어 그들을 회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자신의 두 발로 서서 회복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가 잘못된 양육의 길을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패에 대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실패에 관한 한, 나는 결정론자가 아니다. 나는 소망주의자이다. 나는 젊은 목회자나 부모들에게 “도중에 실패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성공이며, 실패 없이는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이 실패로부터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늘 도움만 받는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그러므로 실패할 때 주님께 감사하자. 실패의 원인이라든가 그 실패가 가져오는 고통이나 혼돈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겸손과 감사와 인내를 배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eaders, the Way Up is Down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실패
정신근육
린든존슨
영적인근육
성장
감사
겸손
인내
선한 행실과 증인으로서의 삶
by Don Carson
2018-11-23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증인 된 삶을 설명하기 위해 빛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마 5:14-16).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의 빛이다.예수님은 물리적인 빛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언덕에 드리워진 ‘도시의 불빛’, 그리고 등잔 밑에 드리워진 ‘등불’이다. 여기서 도시의 불빛은 자주 오해되곤 한다. 어떤 이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멀리 떠오르는 도시의 모습에 대해 혼동하여 적절치 못한 예를 넣었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가 의미는 있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관련해서는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산업화 이후 빛과 전기가 너무 흔한 세상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비평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빛의 중요성그들은 어둠의 특성을 잘 모른다. 캐나다에서는 도시나 마을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캠핑을 갈 수도 있다. 구름이 낀 날이라면, 그 곳은 완전히 어둠으로 덮인다. 코앞도 안 보인다. 그런데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도시가 있으면, 어둠은 조금 옅어진다. 도시의 불빛이 구름에 반사되기 때문에 완전히 어두웠던 밤이 더 이상 그렇게 황량하지만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숨겨질 수 없다. 그들이 비추는 선한 빛은 절대적으로 캄캄할 수밖에 없는 그 어둠을 약화시킨다.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막대한 양의 전기. 하지만 전력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면, 우리는 어둠이 얼마나 공포이며 모든 악의 상징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도시로부터 퍼져나가는 불빛은 분명 그 어둠을 이전보다는 좀 더 견딜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빛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름 램프의 불빛이 깜박거린다고 그냥 문질러 꺼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타고 있는 심지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작은 불빛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빛이 없어서 완전히 캄캄하게 된다면, 그 작은 불빛은 놀랍게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출 만큼 영향력을 갖는다(마 5:15).선한 행실의 중요성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본문 속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비추는 이 빛은 어떤 빛인가? 이 문맥에서는 개인에게 도전하거나 교회에게 선언하는 메시지가 잘 읽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 빛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행하는 ‘선한 행실’을 의미한다. 곧, 단 몇 사람이라도 그들을 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선한 행실이다.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그분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일을 게으르게 하여 그들의 고용주를 도적질하지 않으며, 또한 탐욕과 인색함으로 그들이 고용한 일꾼들을 강탈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돕는 일을 우선하며, 가시 돋친 말로 되돌려 주는 일을 꺼려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발전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지저분한 유머는 싫어한다. 또한 그들은 진실하며 참된 마음으로 위로하지만, 거만한 정치인 같은 자기중심적 자세나 세속적인 사람의 자유분방한 태도 모두를 거절한다. 그들은 담대함으로 의를 추구한다.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증인의 모습을 잃었으며, 그 모습을 되찾는 일에도 민감하지 않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세상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실하게 선포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세상의 빛이 되었다(마 5:14). 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감옥 개혁, 의료 봉사, 노동 조합, 주류 판매 통제, 노예 폐지, 미성년 노동 폐지, 고아원 설립, 형법 개혁 등 모든 영역에서 의를 이루어가는 선봉에 섰다. 바로 그들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세상에 드리워진 어두움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들이 자기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났다.“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hristian Witnesses with Good Deeds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선한행실
증인
삶
빛
중요성
주님
그리스도인
제자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by Thomas Schreiner
2018-11-23
성경의 내용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또한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흐름의 특징을 갖는다. 이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새 창조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회심은 어느 부분에 들어갈까? 그것은 구속 부분에 속한다. 분명, 회심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건 아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대목은 회심이 지향하는 ‘목적’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 목적은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장차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며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계 22:4). 동시에, 회심은 성경 이야기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심하지 않고는 새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우 분명한 결론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흑암의 지배로부터 건져 내신 하나님을 천국에서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역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올리는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 줄거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왜 회심이 그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지를 여기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실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어졌다(창 1:26-28).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 통치자여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신뢰하며 순종함으로써 그의 통치권 아래에서 만물을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했으며, 창조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고 피조물인 자신들을 숭배했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다(창 2:17). 그들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회개하지 않는 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운명이었다.죄를 범한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은 회심이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상태일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 그분의 축복을 세상에 확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과 뱀의 후손을 이기리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초기 인류 역사는 인간들의 철저한 죄악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아들과 딸로서(롬 5:12-19), 그리고 뱀의 후손으로서(마 13:37-38; 요 8:44; 요일 5:19) 세상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사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다. 예컨대, 가인은 의로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창 4:1-16).악의 힘이 얼마나 강했을까? 노아 당시의 세상에는 여덟 명의 의인들만 남았다! 인류는 철저히 악했고, 창세기 6장 5절은 죄가 만연한 상태를 증언한다. 뱀의 후손이 땅을 지배했지만, 하나님이 홍수로 죄인들을 멸함으로써 당신의 거룩하심과 통치권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창 8:21). 바벨탑 사건은 새 창조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창 11:1-9). 세상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다. 즉, 새 창조는 새 마음 없이는 도래할 수 없었다.바벨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심판 받은 후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3). 악한 세상에서 다시 한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은 복을 약속 받았다. 다시 말해, 가나안을 새로운 에덴으로 만드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브라함은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후손이 될 것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결과적으로 온 세상으로 확산될 계획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대로,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약속들은 거의 2천 년이 지나도록 성취되지 않았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되었던 그들의 후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족장들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못했으며, 온 세상에 확산되는 축복을 보지도 못했다.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실을 회고한다(출 1:15). 이제 하나님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한 약속을 성취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일종의 새 에덴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실행될 계획이었고, 만민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백성의 의와 평안과 형통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굽을 떠났던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20-38). 그들은 애굽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과 하나님의 모든 표적 및 기사들을 본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길 거부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대부분은 완고하고 반역적이었며,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고전 10:1-12; 히 3:7-4:11). 그들에게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할례, 즉 회심이 필요했다(신 30:6).광야 세대 이후에 일어난 후손들은 예전 세대가 실패한 일에 성공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수 21:45; 23:14).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새 에덴에서 살며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보여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 속 벌레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만민에게 복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이방 민족들을 모방하고 이교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이 회개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악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했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로 거의 1000년이 지났다. 엄청 늘어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살았지만, 전 세계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은 실현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처럼 왕을 원했고, 그들이 세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삼상 8:5).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처럼 또 한 명의 새 아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여호와께 반역함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삼상 13:13; 15:22-23).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는 사울의 통치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셨고, 그는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다(삼상 13:14). 하지만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을 온 세계에 임하게 할 대행자가 아님을 드러냈다(삼하 11장).솔로몬이 즉위했을 때에는 새 창조의 낙원이 곧 눈앞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왕상 2:13-46). 그는 평화 중심의 통치를 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장엄한 성전을 지었다(왕하 3-10). 솔로몬이 이처럼 처음에는 지혜롭게,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호와를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였다(왕상 11장). 그 결과,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왕상 12장), 오랫동안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왕하 17:6-23; 24:10-25:26). 아브라함의 소명 이후로 약 1500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후손 및 축복에 대한 약속들은 성취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가나안 땅이 아닌 유배지에 머물렀고, 그들은 온 세계를 복 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나라들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까? 무엇이 문제였는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거듭 가르친다(사 42:24-25; 50:1; 58:1; 59:2, 12; 64:5).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새 출애굽과 새 창조를 약속하신다. 하지만 새 출애굽과 새 창조는 오직 죄 사함의 역사 안에서만 이루어 질 계획이었고(사 43:25; 44:22), 또한 이 용서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을 통해 현실화될 예정이었다(사 52:13-53:12). 예레미야도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할례 받은 마음이었다(렘 4:4; 9:25). 달리 말해서, 그들에게는 거듭남과 회심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새 언약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1-34).이와 동일하게, 에스겔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그 날을 내다보았다(겔 36:25-27). 그들의 변화된 마음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결과일 것이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길을 걷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전 536년에 포로로 살던 땅으로부터 돌아왔지만, 선지서들에 나오는 위대한 약속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말라기 시대에도 고투를 벌였고, 약속된 성령의 사역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새 창조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심 없이는 이스라엘이나 세상을 향한 축복도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죄 사함과 할례 받은 마음 없이는 새 창조와 새 출애굽도 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의 뜻을 거듭 불순종하고 거역한 일들로 점철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죄 사함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사야는 고난 받을 종을 예언함으로써 그러한 죄 사함이 실현될 것임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 즉 회심이 필요했다.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회심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곧 성경 이야기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세상에 약속된 복은 그들의 회심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Conversion and the Story of Israel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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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
by Christopher Ash
2018-11-23
나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다음의 일곱 가지 이유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 1. 시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모든 크리스천은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또 기도에 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눅 11:1). 비록 거듭난 후일지라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주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의 구조는 시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편은 주기도문의 주제들이 더 확장되고 구체화된 기도이다. 물론, 모든 시편이 다 기도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시편은 여러 측면에서 기도의 틀을 만들고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시편으로 기도했다. 우리 역시 그들의 모본을 따를 필요가 있다(엡 5:19).마틴 루터는 그의 ‘시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선생님이 모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나 짧은 글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듯이, 하나님도 시편을 통해 기도의 언어와 기도하는 방식을 미리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기도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신다.”2. 시편으로 기도하면, 풍성한 성경의 진리에 반응하며 살도록 훈련된다하나님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법을 배우도록 성경에 있는 모든 놀라운 진리를 시편 속에 가득 채워 놓으셨다. 초대교회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성경의 각 권이 각각의 특별한 과일을 가진 정원이라면, 시편은 성경 각 권에 있는 모든 종류의 과일들이 자라는 정원이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이 과거에 성경을 통째로 들고 다닐 수 없는 곳에서는 신약과 시편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시편을 통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시편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기도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각 부분을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시편으로 기도하면,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항상 기도하는 균형 잡힌 기도자가 된다시편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축약해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내가 만난 어느 학생은 시편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묘사하고 이해하며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의 색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팔레트와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림의 기본만 배운 어린이는 그저 몇 가지 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그림을 배우게 되면, 점차 자신만의 섬세한 색조를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도 시편에 점점 젖어 들어감에 따라 어린아이의 단순한 경험을 넘어서서 점점 더 풍부하고 복잡 미묘한 내면의 삶을 경험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시편은 어떤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고, 그 감정을 거울 속에 보이는 것처럼 고정되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편에는 성령님이 각각의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인생의 수많은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감정들은 모든 사람들이 삶 속에서 당면해야 하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우리 내면에 출몰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 슬픔, 두려움, 의심, 희망, 걱정거리, 혼란스러움 등이다.”4. 시편으로 기도하면, 무질서한 애정(affections)이 하나님의 선한 질서 속에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우리는 무질서한 애정을 너무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산다. 싫어해야 마땅한 것들을 갈망하고, 깊이 갈망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본성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가장 필수적인 일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도록 만드시는 일일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허락되는 때와 곳에서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영국 성공회의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있는 고전적인 기도문 중 한 편을 살펴보자.“전능하신 하나님, 죄인의 통제되지 않은 의지와 애정에 질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이 명한 것을 사랑하고, 당신이 약속한 것을 갈망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확실히 고정하고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시편이 바로 이 일을 해 준다. 시편은 우리의 애정을 개선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며 복음의 약속된 축복을 깊이 갈망하게 한다. 5. 시편으로 기도하면, 쓰린 감정이 달콤해 질 수 있다우리가 자신을 적대감, 괴로움, 분노 혹은 절망에 방치할 때,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고 삶 전체를 씁쓸하게 만든다. 시편은 이런 어두움의 감정들을 기꺼이 수용해서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주는 정서로 변화시킨다.칼빈이 언급하듯이, 시편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이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가장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는 고난이 도리어 달콤한 경험이 되도록 각자를 성장시킨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 고난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6. 시편으로 기도하면, 개인주의적 경건에 치우칠 위험에서 보호받는다서구 문화에서 기독교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우리’란 모든 시대마다 세상에 존재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 시편을 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시편이 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시편을 읽을 때마다, 당신은 지금까지 존재한 수많은 충성스런 증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같다. 당신이 지금 읽는 시편은 이전에 수천 번, 수백만 번 언급된 말씀이다. 당신이 시편을 읽거나 노래하거나 기도할 때, 당신의 오른편에는 모세와 미리암이 함께 서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으며, 당신 앞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당신 뒤편에서는 제롬과 어거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더 나아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신자들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7. 시편으로 기도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뜨거워진다마지막으로, 시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제이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를 전율케 하고, 식어진 마음을 뜨겁게 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때로 우리의 가슴은 매우 차갑고 무감각하며 열정과 뜨거움이 전혀 없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가워진 영혼의 상태가 다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오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시편을 읽어야 한다.나는 이 글을 통해 당신이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을 시작하기 바란다. 또한, 내가 오랜 시간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샘솟는 애정을 공급받았듯이, 당신도 동일한 복을 누리기를 고대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Reasons You Should Pray the Psalms번역: 김재덕
영성
묵상과기도
시편
기도
기도하는법
성경의진리
균형잡힌기도자
선한질서
바른방향
경건
소명에 대한 세 가지 진실
by Ivan Mesa
2018-11-22
“저는 이 일에 소명을 받았습니다.”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 자신이 어떤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내적 부르심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신비로운 표현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구체적인 소명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확신을 느꼈다. 나는 삶의 목적지가 분명한 ‘인생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속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혼란과 의문 속에서 소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많은 이들로부터 지혜를 구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명에 대한 진실을 소개하고자 한다.1. 당신의 소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의심할 여지 없이 각 사람은 소명과 은사를 받았다. 소명에 대한 참된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개인의 만족을 위해 소명을 받지 않는다. 즉, 소명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롬 12:4–5; 고전 12:12–31; 벧전 4:10–11). 바로 이 타자에 대한 초점은 팀 켈러(Tim Keller)가 ‘일과 영성’(Every Good Endeavor)에서 말했듯이 우리 시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정신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자아 성취나 권력을 얻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거나 업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힘을 부여 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팀 켈러는 “무엇이 내게 가장 큰 수익을 얻게 해 주고 가장 높은 지위를 안겨다 줄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내가 가진 능력과 기회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가?”라고 묻도록 격려한다.그러나 우리는 직업과 소명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목사와 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둘의 개념이 뒤얽혀 있을 수도 있다. 소명은 종종 사회, 가족, 교회처럼 보다 넓은 영역들을 망라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진 베이스(Gene Vei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어떤 이는 더 이상 직장에 다니지 않지만, 할아버지, 의식 있는 시민, 또는 교회의 장로로서 여전히 소명을 추구할 수 있다. 또 자녀 양육에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어머니, 일할 필요가 없이 부유하여 구제에 전념하는 사람, 몸이 불편하여 집 안에 머무르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기도에 쏟아 붓는 노인 등 자신의 소명을 직장 이외의 영역에서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젊었든가 늙었든가, 몸이 약하든가 건강하든가, 성공적이든가 직장을 잃었든가 하는 상태를 떠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소명을 수행할 수 있다. 당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하나의 단순한 방법은 그저 주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가장 잘 섬길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 이 소명은 직업을 통해 발견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정, 이웃, 교회를 통해 발견될 수도 있다.2. 당신의 소명은 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소명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소명은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자신을 부를 수 없다.하지만 내가 꽉 붙잡지 않으면 이 소명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따라서, 결단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해 염려하게 된다. 또 하나님이 나를 어떤 일에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나의 영안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방향을 상실하게 되거나 인생을 낭비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물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인간적 행위가 개입된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과 돌보심 아래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교회에 나갈 것인지, 어떤 도시에 살 것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를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잠 16:9).또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소명을 확증해 주신다. 베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은 여러 방편들을 통해 일하시므로 종종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혹 그들의 직업을 사용하여 소명을 확장시키신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들로부터 인정과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때가 있다. 이때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시고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엡 2:10) 신실하신 아버지가 계심을 신뢰해야 한다. 이 ‘선한 일’은 여러 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다양한 소명들 속에서 이루어진다.우리는 모든 일에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소명을 존중하고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가운데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3. 당신의 소명은 미래 시제가 아니다당신의 삶을 들여다보라. 소명은 죄를 제외하고 현재 당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무엇이다.하나님은 선하신 계획 안에서 당신을 가정, 이웃, 교회, 직장에 속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내일에 대해 불안해 하지 말라. 그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음을 신뢰하기 바란다(마6:25-34). 나는 이 구절이 부분적으로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기 위해”(살전 4:11)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씨를 뿌린 곳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는 내용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좋은 삶을 위한 즐겁고 평범한 공식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속도를 늦추라. 주의를 기울이라. 좋은 일을 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자신이 있는 곳을 사랑하라. 자신이 거하는 곳에 머무르라.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더 많이 즐기라.”거룩한 야망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당신은 현재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데 힘써야 한다. 갈망의 변화나 타인으로부터의 제안, 혹은 상황의 변화 등 하나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일을 하도록 부르시느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주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소명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변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변화한다. 우리가 변하는 것처럼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소명은 종착역이 아닌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듯이 “무엇인가 채우려고 빈틈없이 계획하기 보다는 현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고 동요하는 세대에서 더 겸손하고 뿌리깊은 신앙, 보다 신실하고 꾸준한 사람들, 즉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을 때 깎아야 할 잔디, 갈아 주어야 할 기저귀, 돌봄이 필요한 교회 구성원, 친구를 필요로 하는 낯선 이를 보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 필요들을 채워 주고 당신의 소명을 수행하기를 권한다.또한 소명에 대한 시기를 경계하고 신실한 일상의 단조로움을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도록 오늘 당신을 부르셨다.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시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라(히 13:5). 그때 우리는 고통, 실망, 실패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신실한 종아마도 당신은 나와 달리 소명에 대한 혼란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겪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당신에게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할 소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삶의 평범함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 바로 오늘, 우리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Things Your Calling Is Not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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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영성
진베이스
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민스러운 문제
by John Piper
2018-11-22
구원의 확신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고민스러운 문제다. 여기서 고민하게 되는 점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객관적 사실들의 진실 여부가 아니다(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는지,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하시는지 등). 이 객관적 사실들은 우리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주관적 확신이다.구원의 확신이 있는가?이는 ‘내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압축된다. 이 문제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은 구원받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따라서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은 진짜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물론, 그들은 선의로 그럴 수 있다). 즉, 구원받는 믿음이란 어떤 진리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결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못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변화를 통하여 믿음의 참됨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데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특정한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같은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진리를 잃게 한다. 또한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줄 것이다.새로운 빛, 새로운 안식우리는 기적적이고 심오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의 속성을 축소시키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와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객관적 보증과, 바로 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주관적 보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객관적 보증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히 10:14)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적 보증은 ‘성화되는 과정’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다.다음으로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의 두가지 정의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로, 믿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또는 아름다움)을 보는 '영적인 시각'이다. 즉,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의 역사를 듣거나 읽게 될 때, 이 복음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기 이전에도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런 일이 있다. 나는 이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4장 4 절에서 얻었다. 바울은 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했다. 믿음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다.믿음은 이 영광의 복음 안에서 ‘보장된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장된 안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보장되지 않은 안식‘을 가진 사람들(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영원한 벌에서 구원받기 위해 믿음을 선택할 뿐,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장된 안식을 받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보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보장된다.빛이 비추는 곳우리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는 십자가와 또한 그분의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엡 1:18).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풍성히 임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Agonizing Problem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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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못하면 어쩌죠?
by Keith Getty & Kristyn Getty
2018-11-22
우리는 “저는 노래를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이는 “노래하려 할 때 제가 원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아요.”라는 말이다.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당신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릴 때 노래하는 대신 입만 움직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학교나 교회 합창단원은 당신이 가진 은사와는 그다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있다면 당신은 노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래하도록 당신을 설계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노래를 잘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은 정확한 음정보다 진심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으시는 분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크리스천의 노래는 입술이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엡 5:19).하나님은 모든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신다나의 딸들이 함께 노래할 때, 첫째가 둘째보다 자신감에 있게 노래하고, 둘째는 막내보다 음정이 더 정확하다. 이런 현상은 이들이 자라면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요점은 다음과 같다. 부모의 귀에는 자녀들의 모든 목소리가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역시 우리가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와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신다. 교회에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합창단원들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진정한 합창단은 회중이다. 진정한 합창단은 심사가 필요치 않다. 모든 성도가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만 한다.이러한 회중 합창단의 아름다움은 찬양으로 우리 목소리와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데 있다. 진리를 함께 노래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나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국 선교사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찬양을 불렀다. 그는 찬양을 마친 뒤, 성도들과 함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살고 있는 중국에서는 찬양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 다시 노래하기를 온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던지요!”라고 감격하며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전문가’ 수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고백자’ 수준에는 속할 것이다.가진 것으로 최대한 노력하라그러나 역시, 우리가 연습할수록 더 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걷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걷기 위해서는 먼저 발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입을 열고 소리를 내야 한다. 음정에 맞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배우려면 시간이 들고, 우리는 노래를 연습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만약 자신의 음정이 한계에 도달해 노래에 조금 못 미치는 상태라면, 약간의 유머 감각이 유용한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을 조금씩 틀리게 부르는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다(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려하고 찬양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틀린 음을 웃어 넘기고 계속 노래할 수 있다.우리 밴드의 일원인 자크 와이트(Zach White)는 자기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들려준 찬양에 대한 영감을 우리와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회중과 함께 노래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는 사실 세 음만 낼 수 있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참 적은 음만 낼 수 있던 것이다(자크 와이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베리 와이트는 유명한 가수이다-역주). 그 세 음 마저도 음정이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회중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크리스틴(Kristyn)의 노래를 14년 동안 가르친 킴 우드 샌더스키(Kim Wood Sandusky)는 여러 장르의 가수를 수십 년 가르친 전문가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모두 가수다. 우리 중 누군가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지만, 누군가는 자기 영혼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가수이다.”건강상 또는 선천적 문제가 있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말할 수 없어 손 또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방법으로 노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입술이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그날까지 한마음이 되어 당신에게 주어진 방법으로 공동체를 축복하며 노래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회중이 노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수화 사역에 감사를 표한다.교회여, 우리 함께 노래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f I Can’t Sing?번역: 하늘샘
영성
예배
노래
목소리
가진것
최대한
노력
하나님
소중히
고백자
복음을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by Russell Moore
2018-11-21
딱 세 단어만 사용해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주 전에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그때 나는 "세 단어로 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더 큰 도전이 되어,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세 단어로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세 단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세 단어는 바로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1. 주(Lord)‘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은 통치하는 왕이시며 사랑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창조주로서 그분이 가진 주권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만물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요 1:1-5; 골 1:16).또한 이 단어는 우리 생명의 절대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단절시키면서, 다른 주인들이나 황제들, 가령 파라오나 가이사와 같은 우상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거나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이 처하게 된 곤경도 지적하는 의미를 가진다.2. 예수(Jesus)다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이렇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가 말씀하시는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다윗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자를 보내시는 사건과 또한 그 이면에 있는 언약의 역사를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지금 이 사람으로 집약되고,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씨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전달한다.‘예수’라는 단어는 ‘구원’과 ‘죄’의 정의를 필요로 한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둘이 함께 만나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롬 1-3장). 이는 우리 죄에서 기인한 저주와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과 희생을 통해 그 저주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함축한다.또한 ‘예수’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이라는 구절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중에 거하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고,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보혈과 기도와 생명으로써 중보하실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와 ‘아멘’으로 나타난다(고후 1:20).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의 상속자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 약속들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갈 3:29).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다.성령에 의해 머리와 몸으로 연합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3. 그리스도(Christ)마지막 단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칭호다. 무엇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의 성령이다. 누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 아버지다. 무엇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왕권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다윗을 통해 예표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소유하신 언약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실이 되며, 더불어 미래에 완성될 소망으로 다가온다. 이 왕권은 죽음과 지옥에서 해방된 온 가문의 장자로서(롬 8:2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구원을 되돌아보았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미래를 바라본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 주시고(엡 1:10-11), 우주적 사명의 완성을 그의 아버지께 넘겨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도록 역사하신다(고전 15:28).우리는 사방에서 타락으로 파괴된 모습을 보며 신음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성령으로 빚어지고,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교회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써 현존하는 그분의 세계로 기쁘게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며, 오실 왕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간다.물론 할 말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66권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말씀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단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You Explain the Gospel in 3 Words?번역: 고갑균
복음
변증
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66권
하나님의음성
공동상속자
신성
절대근원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가?
by Dane Ortlund
2018-11-21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양이나 비둘기 같은 영혼과 성품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크리스천의 마음이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떠올릴 때 온유함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주제는 아마도 ‘열정적인 청교도’일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온유함이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온유한 성품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많이 경시되는 미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에드워즈는 그의 다이어리에 “나의 성품에 아름다움과 광택을 더하기 위해 더 많이 필요한 한 가지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온유함이다. 나에게 온유함이 더해진다면, 나는 더욱더 다듬어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그에게 이 말이 적용되는 진실이었다면, 그 말은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온유함은 남성다운 것인가?어떤 크리스천 남성들은 온유함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유함을 여성스러움과 동일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강함과 온유함은 상호배타적인 가치들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남자답게 가족과 교회에서 리더가 된다는 상상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온유함을 남성다움보다 앞세우는 데 있지 않다. 남성다움이라는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먼저 올바르게 정의하는 데 있다. 결국 진정한 남성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환전상들을 예배당에서 내쫓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내쫓으려던 어린아이들을 기쁨으로 안아 주셨다(마 19:13-15). 이방인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셨고, 친구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또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자답고 건강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13장 23절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기록한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도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18).그러나 예수님의 남성다움은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목숨을 내어 준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남편 됨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남편의 머리 됨과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동일한 희생임을 언급하고 있다(엡 5:25-33). 이러한 희생은 남자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남자다움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미숙한 남성은 강압적이고, 부주의하며, 사랑이 없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남자만이 온유할 수 있다.위풍당당함과 온유함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닮아가는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이 경외로운 장엄함과 부드러운 온유함을 함께 결합시킨다는 사실이다.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장례식 설교에서 성도들이 천국에서 보게 될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한한 장엄함과 위대함만이 아닌 무한한 자비함과 낮아짐과 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끌어안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그들에게 공포가 아닌 기쁨과 놀라움이 배가 되는 일일 것이라고 설교했다.조나단 에드워드가 보기에 진정한 남성다움은 딱딱하고 강인한 겉모습과 부드럽고 연약한 내부를 가진 상태가 아니었다. 도리어 강철 같이 단단한 내부를 통해 아름다운 온유함이 겉모습으로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남성다움은 마초적인 모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불완전한 모습을 완화하려 가식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으로 온유함은 비굴한 것이 아니다. 온유하지 않은 남성다움과 남자답지 않은 온유함은 피해야 한다.우리는 용감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강인하지만 부드럽고, 남자답지만 온유한 삶을 쫓아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합당하게 행하기에드워즈는 에베소서를 통해 크리스천의 삶에서 온화함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논증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 후에, 이 사건이 개인 행동에 대해 무슨 뜻을 가지는지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_____과 _____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2).사도 바울이 빈칸에 어떠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희생과 열정 또는 담대함과 용기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겸손’과 ‘온유’라는 말을 사용했다.에베소서의 1장에서 3장의 결론이 바로 이 부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요점을 이해했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의 아주 높은 신학적 담론은 우리를 평범한 크리스천의 일상생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화함의 향기가 있는 자리로 초대한다. 하지만 그 향기는 결코 일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다. 왜냐하면 그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자리까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ant to Be Like Jesus? Be Gentle번역: 조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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