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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하나님 은혜의 리트머스 시험지
by Tim Kimmel
2020-05-10
어린이와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의 깊이를 가늠할 만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나 노인처럼 인생 연대표의 양쪽 끝에 위치한 이들은 능력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 하루를 어려움 없이 살아내고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호의를 받고도 제대로 갚지 못하며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어린이나 노인같은 사람에게 일관성 있게 호의를 베푸는 성품을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진정한 인격은 우리가 어린이와 노인에게 베푸는 친절, 인내, 그리고 존경의 태도에서 정확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과부들과 고아들을 비롯해(약 1:27)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들 중 가장 작은 자”에 속한 사람들에(마 25:31–46)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 인격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가정의 기본 작동 방식: 하나님의 은혜이제 인격과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로 우리 삶의 기본 모드인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우리는 가정 생활을 통해 천국을 경험하기도 하고 지옥을 경험하기도 한다. 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는 중차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되기도 하고, 쓰디쓴 패배를 맛보는 곳이 되기도 한다. 가정 생활이 견디기 쉽지 않은 용광로와 같을 수 있다. 가정 생활 속에 은혜가 없다면, 그것은 복음 자체가 무력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만지고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를 믿는다고 입으로만 말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고 말로는 얼마든지 떠벌릴 수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우리와 매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 하느니 차라리 굶는 것이 낫겠다고 하거나, 배우자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내 얼굴을 보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은혜라는 것이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는 무익할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최악의 예를 두 가지 언급했는데, 당신 가정이 그 정도는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가? 당신 가족이 가족 사진에서 당신이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관계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축소시켜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회심을 위한 은혜, 매일을 위한 은혜선의를 지니고 잘 해보려고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십자가로 인해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구속 역사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개념을 잃었다 찾은 바 되고 보지 못하다가 볼 수 있게 된, 다시 말해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은혜로만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면서 어리석게도 여러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축소시킨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서 ‘성과’를 거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것이 이리 많으니 나는 빚진 사람이야. 이제 남은 인생은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지” 식의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복음을 적용할 때 이런 식의 태도는 거부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은 우리 마음의 방에 들어와 방 가운데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아서는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일단 우리가 그런 식의 사고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가 복음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가 으레 하는 상투적인 말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신앙 생활에 대해서도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된다. 오늘날 자녀 세대는 “나한테 의미 있는 것만 진리”라는 식의 전제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 도전할 때, 우리가 자녀를 다루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의 소재로 쓰이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에 맞서기기독교를 성과 중심적으로 이해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다른 이유들도 많다. 필자는 “두려움에 뿌리를 둔 자녀 양육”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모순된 세상에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우리는 스스로 무능력하다 느끼고, 부담감에 압도당하며, 이 일이 너무도 벅차다고 느낀다. 두려움이라는 감정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 두려움에 눌리지 않아야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내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와 관련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복음주의와는 관련없는 인위적인 규율을 만들게 된다. 그래서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과 임재를 무시하고 두려움 앞에 무릎 꿇게 된다. 소위 금욕적인 삶, 죄 관리, 영적인 이미지 컨트롤, 복음주의적인 행동 양식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시는 일들을 우리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 지식으로 해석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녀들은 최악으로 행동하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의 반응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목자로 믿고 있는지 알아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목자로 믿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사랑, 자비, 친절, 이해, 용서, 소망, 자유, 그리고 잠잠함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하나님과 동역하는 자녀 양육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우리를 씻기고, 우리에게 스며들며, 결국 우리를 다시 정의하는 은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받을 뿐 아니라 그의 은혜로 늘 단련되는 부모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고의 증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다루시는데(요 1:14) 이 모범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대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자녀를 대하라. 이것이야말로 은혜에 근거한 자녀 양육의 핵심이다.자녀 양육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가 행하시는 기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부모 안에 먼저 일어날 때 그 자녀들에게도 일어난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Family: God’s Litmus Test of Applied Grace번역: 이정훈
가족
회심
은혜
두려움
자녀양육
동역
팀 켈러의 '중간지대' 신학하기
by 김상일
2020-05-09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영향력 있는 사역을 경험하고서는, 그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다른 세계에 가져다가 전혀 변화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45분 동안 한 절 한 절 강해하는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면, 또는 특정한 형태의 찬양 사역에 은혜를 받았다면, 또는 특별한 예배 순서나 시간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아주 자세한 세부 사항까지 그대로 복제한다. 그들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방법론 중심, 프로그램 중심이 되어 사역 방식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센터처치, 206쪽)팀 켈러는 이제까지 30권이 넘는 책을 낸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1989년부터 최근까지도 뉴욕 맨하탄의 리디머장로교회에서 사역했던 목회자다. 그가 낸 책들은 하나같이 모두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그의 목회와 신학을 총망라한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독자들은 아마도 ‘센터처치’를 가장 많이 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켈러가 ‘센터처치’에서 보여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신학이 본질적으로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해야 신학을 잘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해야 신학교 교육이 더 질 높은 목회자 후보생들을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이란 이렇다. 오랜 시간 사역을 하면서 켈러는 신학과 기독교 사역 관련 서적들이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타고 출간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한편에는 성경과 교리적 전통, 그리고 신학에 충실하지만, 실제적인 목회 사역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켈러는 이런 흐름에 속한 책들이 전통과 신학, 교리에 대한 충성(faithfulness)이라는 비유로 대변된다고 보았다. 또 다른 한편에는 성경과 교리적 전통, 신학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지만, 실제적인 사역 방법론이나 사역의 팁(tip)을 제공하는데 치중하는 흐름에서 나오는 책들이 있다. 켈러는 이런 흐름에 속한 책들이 목회적인 성공(success)이라는 비유로 대변된다고 보았다. 앞으로 목회자 후보생들이 목회 현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그 현장이 가지는 지역적, 문화적, 상황적 독특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 복음이 어떤 메시지이며, 2) 복음을 따르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고도 설득력 있게, 또 심지어 복음을 따르는 삶이 돈이나 권력, 혹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충성으로 대변되는 책들도 성공으로 대변되는 책들도 어떻게 해야 현장에서 이런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켈러가 바라보는 신학함이란, 단지 과거에 어떤 탁월한 신학자가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그대로 답습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또 특정한 현장에서 어떤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이 잘 먹힌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나의 목회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켈러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신학함이란, 목회자 후보생 각자가 처한 독특한 목회 현장과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나 고민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교리와 신학적 전통에서 흘러 나와서 목회적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으로 열매 맺게 되는 그 창조적 작업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켈러는 교리와 전통을 한 축에, 그리고 목회적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다른 축에 두고,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 그 두 가지를 유기적이고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일, 즉 중간 지대의 작업이 바로 삶과 목회를 위한 신학함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켈러는 컴퓨터의 비유를 끌어들여서 신학과 교리적 전통을 하드웨어(hardware)로, 그리고 목회적 방법론과 프로그램들을 소프트웨어(software)로 비유한다. 이런 비유는 하드웨어가 잘 바뀌지 않고 유연성이 그다지 없는 반면, 소프트웨어는 필요나 상황에 따라서 유연성을 가진다는 면에서 꽤나 적절하다. 그리고 켈러의 이런 컴퓨터 비유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진정한 신학함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미들웨어(middleware)같은 것이라고 보는데서 정점을 이룬다. “나는 컴퓨터 전문가는 아니지만,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들에 의하면, 미들 웨어라는 것은 하드웨어 및 운영시스템과 다양한 유저 소프트웨어 사이에서 기능을 맡는 층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교리적 믿음과 사역 방법들 사이에는, 어떻게 복음을 특정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순간 안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서 잘 고안된 비전이 있어야 한다”(센터처치, 25쪽). 켈러는 바로 이 미들웨어, 즉 교리 및 신학적 전통과 목회적 프로그램 및 방법론이 한데 어우러져서 특정 현장에서 통합적으로 열매 맺는 비전을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이라고 부른다. 켈러는 자신이 바라보는 신학적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한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적 신념보다 훨씬 더 실천적인 것이며, ‘이렇게 하라’는 방법론들보다 훨씬 더 신학적인 것이다. 일단 이 비전이 서 있고, 바르게 강조되며, 가치가 부여된다면, 교회 지도자들이 도심에 있든, 주택가에 있든, 시골에 있든 간에, 예배, 훈련, 전도, 봉사, 사회 참여 등에 있어서 좋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센터처치, 25쪽)신학적 비전은 중간 지대에 존재한다. 교리나 전통의 단순한 반복도 신학적 비전이 아니며, 어느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몰리더라는 소문을 듣고 그 교회의 사역 프로그램을 무작정 가져와서 우리 교회에서 돌리는 일도 신학적 비전이 아니다. 특정 목회 현장의 신학적 비전은 오직 그 현장 속에서 고민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목회학 석사 3년의 공부를 통해서 학생들은 ‘앞으로 내가 목회 현장에 나가면 어떻게 신학을 해야겠다’는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되는 밑그림을 그리고, 또 어떻게 해야 그런 신학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한 고민도 어렴풋이나마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신학교 교육은 단지 백과사전 식으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정리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학적 비전을 세우는 일은(켈러처럼 예외적인 목회자를 빼면) 특정 목회자 개인이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특히 목회 현장의 빡빡한 일정과 계속적으로 부딪히는 관계의 갈등을 생각해 보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래서 사실 신학적 비전을 키우는 일은 신학교에서부터, 교수님들의 지도 하에,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의 신학교 교육이 그런 초점을 가지고 신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지 못하다는데 필자가 가지는 아쉬움은 매우 크다. 하지만 바로 그런 면에서 켈러가 ‘센터처치’를 비롯한 자신의 저서들에서 중간 지대 신학하기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 또한 매우 크다.
교회
교회사역
리디머장로교회
팀켈러
센터처치
미들웨어
middleware
신학적비전
부모를 용서하라고요?
by Marshall Segal
2020-05-08
현대 사회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돌봄에 마냥 고마워하지만은 않는다.자녀들이 자신의 단점이나 인생의 실패에 대해 말하며 얼마나 자주 부모 탓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나 미묘하게 말이다. 우리는 부모의 죄가 자손 삼대까지 전해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출 34:6-7). 또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점들을 부모들의 부족한 점과 그들의 양육 방법에서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들어왔다.인생의 경험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의식적으로나 무심결에) 부모나 혹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들이나 그들이 아직 터득하지 못한 교훈들, 아직도 변하지 않은 그들의 성격 문제들, 당신을 키우면서 했던 실수들, 당신에게 저질렀던 죄들 때문이라고 말이다.특정한 고통이나 약점의 근원을 생물학적으로 혹은 가정의 내력 등에서 살펴보는 것은 건강한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치유는 원인을 알아내거나 누구의 책임인지를 밝혀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부터 온다.가족에게 당한 배신요셉은 열 명이나 되는 자신의 친형들에게 배신당했다(창 37:18, 28). 요셉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어야 했던 형들은 처음엔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창 37:18), 나중엔 노예로 팔아 버리기로(창 37:28) 공모했다.어쩌면 친형제나 자매 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당신에게 이보다 더 큰 잘못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족들은 요셉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도록 내버려뒀다가 나중에 그 구덩이에서 꺼내어 적은 돈을 받고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노예 신세가 되도록 요셉을 팔아 버렸다. 형들은 동생 요셉이 어디로 보냈졌는지 짐작도 못한 채 단지 그들 눈에 거슬렸던 요셉을 드디어 없애 버렸다는 것에 기뻐했다. 이 일이 그들의 아버지 야곱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소식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수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노예살이를 통해 권력의 자리로 옮기셨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통해 애굽 왕 바로(Pharaoh)에 다음가는 최고 권력자로 만드셨다. 각국에 심한 기근이 들자, 요셉의 가족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갔다. 하나님의 계획하심 대로 형들은 부지중에 그들이 배신했던 동생의 발 아래 엎드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걸하게 된 것이다.요셉은 살인 미수와 인신 매매 혐의가 있는 형들을 바로 알아보았다. 요셉의 위치는 피해자에서 재판관으로 바뀌었다. 이 이야기는 마침내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형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과 그에 합당한 형벌을 알기에 마음이 심란해졌다(창 45:3). 이런 그들을 향한 요셉의 말은 모든 성경을 통틀어서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 말들 가운데 하나다.“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4-5).당신은 요셉의 말에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요셉,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당신의 형들이 당신을 노예로 팔았고, 애굽에서 죽으라고 당신을 팔아버린 거잖아요.’ 하지만 요셉은 다시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십칠 년이 지나고 아버지 야곱이 죽었다.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창 50:15). 요셉이 베풀어 준 용서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형들은 요셉이 당연히 보복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요셉은 연민과 애정으로 울며 그들에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요셉은 형들을 살인 미수범들로 대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로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을 벌하는 대신에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다고 약속했다. 무거운 억울함과 비통함은 제쳐두고, 그의 참담하고 악몽 같은 근심을 하나님께 맡겼다(벧전 5:7). 형들이 저주받아 마땅했을 때 요셉은 그들을 축복하기로 선택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쁨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형들을 향한 요셉의 놀라운 인내와 친절은 사도 베드로가 사라를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사라의 남편이 거짓말로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했을 때 [그녀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했다]”(벧전 3:6).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의탁할 수 없었을 때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다. 요셉도 자신과 형들을 하나님께 의탁했다. 스스로 정의를 실행하거나 변명을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당신은 가족을, 부모를 용서할 믿음이 있는가(엡 4:32)?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도록 내려 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는가(롬 12:19)? 지금 당장 좋든 싫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선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용기가 있는가(롬 8:28)?고통보다 깊은 선요셉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더 깊게 그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배신, 노예살이, 감옥살이, 그 어떤 상황보다도 더 깊은 심오함(sweetness)으로 말이다. 또한 요셉은 자신의 고통이 다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ㆍ“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7)ㆍ형들에게는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창 45:11)ㆍ“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은 아마도 고통 가운데서도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적었듯이 말이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우리 가운데 이러한 사역을 구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아름다운 사역이다. 요셉은 그가 겪은 모든 고통이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위해 하신 일들과 비교해 볼 때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형들의 모든 악한 의도들도 노예생활의 모든 학대들도 감옥에서의 모든 부당했던 날들도 말이다. 당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을 당신은 이토록 귀중히 여기는가?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성도여, 당신의 부모들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 설 수 없다. 그들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 요셉과 함께 당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내 부모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거지.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했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하게 바꾸셨어.’ 모든 어려움과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러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며, 또 그렇게 하실 것이다.요셉은 형들의 사과를 구하며 살지 않았다. 형들이 요셉에게 지은 죄는 요셉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형들이 그들의 잘못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요셉은 비통함과 억울함에서 자유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이미 사신 자유를 누림에 있어 부모가 먼저 사과하기를 기다리지 말라.그들이 당신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 넘기려고 음모를 꾸밀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통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 Can Forgive Your Parents번역: 김은혜
가정
가족
부모
용서
치유
믿음
요셉
고통보다깊은
선
기독교는 분별의 종교다
by 김형익
2020-05-07
요즘처럼 많은 영역에서 혼란스러운 시대가 있을까 싶다.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으로도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린 시절이 있었던가. 가짜 뉴스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요즘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분별은 필수 덕목이다. 세상에서야 우리가 무얼 그리 기대하겠는가? 정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들을 때 이게 같은 기독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프로테스탄트가 해석의 개별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종교적으로 치우친, 진리가 아닌 메시지에 휘둘리는 교인들을 보고, 주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도 있었고, 성경이 기록되던 대부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가장한 거짓도 존재하고, 진리가 있는 그 곳에 유사 진리도 자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행하는 일이다. 아합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시드기야처럼 악한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고(왕상 22), 멸망하기 전 남왕국 유다에는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다(렘 28). 거짓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중병이 든 나라와 백성에게 ‘샬롬!’의 거짓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을 막아섰다(렘 6:14; 8:11). 이들에게 현혹된 왕과 백성들은 참 선지자였던 미가야와 예레미야를 거절하고 핍박했다.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왜 저주를 언급하면서까지 강한 어조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해야 했을까?(갈 1:6-9) 고린도 교회는 왜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그토록 거부했던 것일까?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경험해야 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인 독보리는, 성장 초기에는 그 외형이 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때 가만히 와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 마귀는 이 일을 쉬지 않고 지금까지 행한다.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세상 끝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마 24:4).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고(마 24:5), 요한 사도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말씀하였다(요일 4:1). 성경 시대에 이러하였다면,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유사 복음-거짓 진리의 문제는 다 헤아릴 수도 없다. 2천 년의 교회 역사에서는 진리의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싸움에서 중요한 무기는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근거한 분별력이었다. 다신론이나 미신적 신앙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는 신이고 그 신이 어떤 존재이든 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유사 진리, 참과 거짓을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상상과 필요와 목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분별하여 섬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이것이 먹히는가?(Does it work?)’가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Is this the truth?)’ 또는 ‘이것이 성경적인가?(Is this biblical?)’를 물어야 한다.나는 오늘날 분별력 향상을 위한 진리의 훈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한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셨고, 그토록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교회가 큰 위기들을 경험한 사례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것 같지 않다. 진리의 교육과 훈련을 통한 분별력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교회 안에는 모호함의 영역이 확장되고, 모호함의 영역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고 만다.그 결과를 우리 한국 교회는 고스란히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천지의 기승이 그 한 사례다. 단순히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쓰인 포스터를 붙여 놓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신천지와 같은 이단, 사이비의 가르침을 분별할 줄 아는 견고한 신자들을 길러내는 진리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평생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분별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별을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몫으로 돌리게 되었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요한 사도는 “영들을 분별하라”는 메시지를 목사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성도들이 진리와 유사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신학의 실종이고 교리의 실종이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가 ‘신학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에서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가 현대 세속주의 앞에 굴복하게 된 원인을 진리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현상, 즉 신학의 실종이라고 분석한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를 지적하여 한 말이지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삼사십 년의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지상 목표처럼 강조하는 동안,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목회와 설교에서는 신학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신학과 진리의 자리를 ‘꿩 잡는 게 매’라는 실용주의가 대체해버렸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에서 교리 교육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를 다양하고 세련된 프로그램들이 대체하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 지난 십 년 어간에 한국 교회에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들에서 급증했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말로 번역되거나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교리 교육에 대한 자료들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리 교육 서적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교리 교육 서적들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인 교리 교육이 시행되는 교회들은 미미하기만 하고, 혹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삶에서 유리된 딱딱한 이론처럼 가르치는 미숙함도 많이 보이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자면 희망적이다. 교회의 목회에서 실종되었던 교리 교육이 오래 입어 왔던 옷처럼 교회에 잘 어울리도록 정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지 않겠는가?한국 교회의 한구석에서 섬기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내가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단순히 이단과 사이비에 휘둘리지 않는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하나님을 분별하고, 율법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며, 번영 신학과 같은 유사 복음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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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데이비드웰스
신학실종
신학무용론
번영신학
지금, 엄마에게 새롭게 요구되는 것
by Christina Fox
2020-05-06
“그가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7)최근 몇 달간 안 좋은 뉴스들이 쇄도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암울한 뉴스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받고 숨졌는지를 보도하는 뉴스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저녁, 우리는 정부가 내린 폐쇄 명령과 행정결정을 듣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식들을 SNS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친구와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여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었어?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나쁜 소식으로 평정심을 잃다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로 인해 평정심을 잃기 쉽다. 이 전염병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엄마인 우리의 일상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아이들이 집에 있게 되면서 가사 노동 외에 미처 준비하지 못한 가정 교육도 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친구들, 가족과는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로 마음은 주눅이 들고, 감정은 매몰된다. 두렵고, 외롭고, 동시에 걱정된다. 집안 일을 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하루 종일 비디오 게임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게 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된다. 얼마나 오래 집에 갇혀 있게 될까? 얼마나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게 될까? 얼마나 오래 아이들의 이러한 일상이 지속될까? 그리고 만약에 아프게 되면 어떡하지? 아이들이 천식을 앓고 있는데 바이러스가 병을 유발하면 어쩌지? 남편이 실직하면 어쩌지? 만약에 경제위기로 어려워진다면?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친구와의 관계가 중요한 나이대에 친구들과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힘든 일이다. 아이들이 기대했던 행사들이 취소되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일상을 지루해 하고 삶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우리가 취하고 있는 극단적인 조치의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힘든 마음에 좋은 소식하지만 모든 나쁜 소식에도 좋은 소식은 있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편 112편). 이 시편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묘사한 지혜의 말씀이다. 시편 저자는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영어로는 “주님”(Lord)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는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야훼, 그분은 위대하신 분이다.이 이름은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와 만났을 때 사용하신 이름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살이로부터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3-14).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다. 이 이름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많은 이름 중 하나다.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만물의 통치, 구원의 행위, 그리고 그의 백성과의 언약적 존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다.또한 이 이름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서 스스로 묘사하실 때 사용되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분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예수님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임을 대신 당하셨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보내신 성령님을 통해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나쁜 소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에게 좋은 소식은 우리의 주권자, 영원하시고 강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전염병 가운데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앉아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과 씨름하다가 지쳐 버린 우리를 발견할 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의 구세주를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순간에 인내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적인 엄마가 되지 못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완벽한 분이심을 믿을 수 있다. “만약에”와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에 압도된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 질문들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고, 그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아신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분의 통제 밖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은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으신다. 우리보다 앞서 길을 준비하신다.우리가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분은 여호와 이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그분은 충분하시다. 그분이 우리의 지혜다.친애하는 어머니들이여, 우리는 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쁜 뉴스와 불확실성에 압도될 때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대신, 좋은 소식으로 눈을 돌리라.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 전염병이 유행하는 가운데 그분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소망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ves, Mothers, and COVID-19번역: 송유희
가족
양육
가정
코로나바이러스
사회적거리두기
전염병
불확실성
코로나19
하나님이 만드시는 건강한 가정
by 전재훈
2020-05-05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확진자가 4월 27일 기준 300만 명을 넘어섰으며 7퍼센트 이상의 치명률을 보이면서 2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계속 확산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전 세계는 서로의 왕래를 끊어 버렸고 많은 국가에서 사람의 이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동 제한령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일부 국가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강력한 거리두기 캠페인을 펼치며 가급적 재택근무 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바이러스와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고 말았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집에 머무르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주지 못했고 가족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전 세계적으로 가정 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일부 남성들이 스트레스를 아내 폭력으로 푸는 바람에 가정 폭력 신고 전화가 급증했는데, 미국의 경우 두 배, 프랑스와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30퍼센트 이상 증가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학이 미뤄지면서 육아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고,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단점들로 인해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Make yourself at home.”(집에서처럼 편하게 지내세요)의 의미가 무색한 시대가 되었다.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 3:1)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내용은 룻의 재혼에 관한 이야기다. 룻은 나오미가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얻은 며느리였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죽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작은 며느리였던 오르바는 친정집으로 돌아갔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을 떠나 유대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룻을 아끼던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가 혼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보아스와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고 싶었다. 이것을 나오미는 ‘안식할 곳을 구한다’고 표현한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마노아흐’라는 말은 다윗이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한 일을 두고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대상 6:31) 것이라고 표현했던 말과 같다. 실제로 가정은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려고 했던 이유는 룻을 ‘복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야타브’를 번역한 이 단어는 룻기 3장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하는 데, 7절에서 보아스가 ‘마음이 즐거웠다’고 할 때와 10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가정은 안식할 곳으로서 마음이 즐겁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곳이라는 의미다. 히브리 사람들이 가정을 ‘메누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안식의 터전’이라는 의미로, 가정은 곧 ‘안식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우리는 안식할 곳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도 어렵게 된다.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자주 남편이나 아내 된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장로나 감독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딛 1:6)이어야 한다거나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딤전 3:4)야 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동양에서도 가정의 중요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고대 중국이 통치이념을 정하지 못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이뤄 살아갈 때 공자는 유교를 만들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게 했다. 공자의 유교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 인(仁)이다. 사람 인(人)자에 둘을 의미하는 이(二)를 붙여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인(仁)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과일의 씨’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에서부터 도의 질서를 세워 가고자 했던 공자는 인간의 기본 씨앗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여겼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유교는 가정에서의 효(孝)를 이웃에게로 확대하여 예(禮)를 가르쳤고, 또한 국가에 대한 충(忠)을 강조하며 국가의 기본 토대를 완성하게 되었다. 결국 동양에서도 가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셨으나 ‘독생자’라는 아들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인 양 오해받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 중 가장 큰 언어가 바로 ‘독생자’이기에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할 때 ‘전 재산이나 내 생명을 준다’는 말보다 엄청난 표현이 바로 ‘내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준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실 때, ‘혼인 잔치의 신부’나 ‘자녀’, ‘양자’, ‘상속자’라는 가정의 언어를 사용하신 사실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가정들이 세워져 하늘의 복을 누리는 참된 안식의 처소가 되길 원하셨다. ‘안식할 곳’이 되어 ‘복을 누려야’하는 가정이 코로나 사태를 맞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가정의 위기는 비단 이 시대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였다.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과 하와부터 가정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남자나 해산의 수고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던 여자 모두에게 가정이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은 큰 아들 가인이 작은 아들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고,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그 후손들까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원수처럼 되었다. 야곱의 아들들도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이런 예들은 성경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윗이나 솔로몬도 가정이 행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6)가 된 것은 아닐까? 유대 랍비들은 가정이 ‘메누카(안식의 터전)’가 되기 위해서는 ‘헤세드(인애)’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 분의 관계는 완벽하게 만족스러웠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흘렀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부족함 없는 사랑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메시아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신실하게 이뤄졌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헤세드’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보여주심으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벧전 3:1)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권면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명확한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다. 어린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자녀들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며, 연약하고 부족하기만 했던 부모님을 온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날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가정이 위기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김영안 단국대 교수는 2013년에 ‘88세대 행복론’을 다룬 ‘행복저글링’(세빛에듀넷, 2013)을 출판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일, 돈, 관계, 건강, 자아 다섯 개 공의 행복 저글링”이라고 쓰여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도 관련되어 있다. 돈이 없으면 서로의 관계가 틀어지고 결국 건강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코로나 바이스러가 바로 돈, 관계, 건강의 문제를 모두 뒤흔들어 놓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심각한 폐 손상을 유발하고 기저질환을 가진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뿐만 아니라 호흡기 질환에 속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침이나 고열을 동반하고 비말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 고강력 거리두기 캠페인은 경제조차 위험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정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정마저 무너지면 인간은 더이상 안식할 곳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항상 그래오셨듯이 오늘날에도 위태하기만 한 우리 가정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는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는 한줄기 소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활짝 열어 주셨다. 이것이 가정을 지키고 하늘의 복을 누리며 우리 가정이 살아갈 참된 길이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가정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안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 할렐루야!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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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거리두기
나오미
헤세드
행복저글링
김영안
새롭고산길
우리는 지금 다 어린아이다
by Jeremy Pierre
2020-05-04
MRI 기사는 검사실에 들어선 나를 한 번 더 유심히 봤다. 나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발암물질이었다. 내 얼굴엔 재가 묻어 있었고, 안경은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평소 같으면 하얬을 와이셔츠의 칼라와 어깨 부분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내 몸에서는 시큼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이 날 예정된 뇌 촬영은 사실 내가 조금 전에 막 탈출한 시큼한 냄새가 나던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난 몇 달간 두통으로 시달렸던 나는 여러 의사들에게 갔었고, 뻔한 원인들을 배제하고 남은 것은 정밀 검사였다. MRI 기사는 이제 진짜 심각한 문제가 뇌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협에 가까운 그의 말도 내게는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정작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진짜 위협은 바로 그날 아침 우리 가족이 겪은 일이었다.통상적인 사전 건강 질문 몇 개를 채 던지지도 않아서, 기사는 내 마음이 지금 얼마나 다른 곳에 가 있는지를 알아챈 거 같았다. 내가 멍하니 손에 들고 있던 질문지를 다시 가져가면서 그는 이건 나중에 작성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내게 말하는 어투는 영락없이 여덟 살 난 막내딸 베씨가 하라는 것을 제대로 못할 때 내가 베씨에게 말하는 바로 그 어투였다. 기사는 검사복으로 갈아입게 하고는 나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검사실 천장에는 푸른 하늘과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기사가 내 위치를 잡는 동안 나는 천장만 보고 있었다. 유모차에 누운 것 같은 편한 자세를 잡아서 그런 건지, 잠옷 비슷한 옷으로 갈아입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기계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외국어 대화를 듣는 것 같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어른이 된 이후로 나는 그 때처럼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두려운 때에 우리는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절망감은 어떤 의미에서 선물이기도 하다. 공포와 불그날 아침에 있었던 위협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도록 하자.여느 화요일 아침과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평소와 같이 하루의 시작을 준비했는데, 일곱 식구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또 짐을 싸서 현관문을 나설 참이었다. 다섯 아이는 학교로, 두 어른은 직장으로 그리고 개는 개집으로. 과거에 들은 적 없던 날카로운 비명, 식구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침실에 있었다. 처음에는 유괴당한 아이를 찾아달라는, 빨리 나가서 용의자의 차량 번호 몇 번이 보이는지 보라는 식의 앰버 얼러트(Amber Alert, 정부가 국민의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는 것)라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터치 한 번으로 핸드폰의 소음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불이야”를 외치는 내 아내, 사라의 목소리였다. 아내는 보통 두 가지의 목소리 볼륨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평상시 대화 때 나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미를 보거나 아니면 아이들 중 누가 다쳤을 때 나오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의 비명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었다. 침실 옆에 있는 세탁실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건조기에서 진한 오렌지 빛의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우리 집의 분위기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 빛깔이었다. 나와 사라는 소화기를 가지러 1층으로 뛰어내려갔고,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서 119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2분 후, 다시 이 층으로 올라온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소화기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화기를 작동시키고 끝까지 분사했지만 이미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잡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춤추는 오렌지 빛깔을 노려보았고, 내 손에는 텅빈 소화기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이상 없었다. 이제 연기는 기름 같은 검은색이 되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집 밖으로 나가라고 사라가 내게 소리쳤다. 층계를 반 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분명히 네 명의 큰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막내 베씨가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다시 층계를 뛰어 올라가며 베씨의 이름을 비명처럼 부른 내 목소리에 정작 내가 깜짝 놀란 기억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내게서 터져 나온 소리는 동물의 울부짖음이었다. 그건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을 앞에 놓고도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에만 터져나올 수 있는 통곡 같은 소리였다. 두려움은 우리를 어린 아이로 만든다내가 베씨를 찾던 순간들이 MRI 검사를 받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베씨가 옆집에 있다고 사라가 소리칠 때까지, 베씨를 부르는 절망적인 나의 발버둥은 약 15초 정도 계속되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 15초가 내 안에서 뭔가를 바꿔놓았다. 그 15초는 내가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어떤 절망감을 알게 만들었다. 진한 오렌지 빛깔과 위압적인 검은 색의 연기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조차도 결코 내 힘으로 지킬 수 없다는, 나는 그 정도로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생생하게 깨닫도록 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우리는 두려운 순간에 누구나 다 어린 아이가 된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은 우리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도 지킬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내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정한 위로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콤하고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다. 예수님은 여기서 어른이 된 우리가 결코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어린 아이의 어떤 특징을 콕 짚어서 말하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항상 뭔가를 달라고 요구한다. 이 말씀의 핵심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 바로 이 점이다. 누가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조하는 일련의 이야기와 함께 이 구절을 배치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필요한 마음 상태는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필요를 인정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절망의 순간 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인식하는 때는 없다. 그러므로 절망은 왕국으로 가는 관문이 될 수도 있다.이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예수님 자신도 절망을 알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동일한 상실, 동일한 유혹, 그리고 동일한 고통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은 통곡하기도 했다. 그의 통곡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보다도 더 깊은 고통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차마 상상도 못하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했다(히 4:14–16; 5:7–10). 예수님은 절망이 무엇인지 알았다. 신앙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 증명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믿음을 다름 아닌 위험한 때에 증명해 보였다. 사실상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속 노래를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시 2:13).우리가 바로 그 자녀들이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절망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두려움 가운데서의 평안내가 지금까지 말한 이런 생각을 다 제대로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MRI 기계 속에 누워 있었고, 입술은 마치 불을 끄는 소화기가 된 거 같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MRI 기계 안에 누워서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상한 소음이 뭔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 아침 15초간 동물이 되어 딸의 이름을 부르던 그 절망의 순간과 집이 타 버린 우리 가족이 그날 밤 어디서 잠을 자야 할 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MRI 기계 안에 누워있던 그 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가 그 날 찾아낸 게 무엇인지 아는가? 그걸 알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아니다.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몇 번만 만날 수 있는 순간을 내가 경험했을 뿐이다. 내 마음에 하나의 생각이,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 하나의 생각은 마치 다른 어떤 생각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머릿속 나의 모든 생각을 다 장악한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바로 이 생각이다. 이건 계획한 적도 없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간증을 듣고 깨달아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건 음성이었다. 전혀 기대한 적 없지만 너무도 익숙한, 돕는 자로서의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그의 위로는 너무도 강력하고 압도적이어서 나는 이 생각이 어쩌면 MRI 결과지에 찍혀서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바로 평안이다. 이 평안은 절망의 시간에 더 강해진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녀에게 더 자애롭다.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그 날 저녁 우리 가족은 샤워를 하고 호텔 침대에서 뒹굴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이 이상한 게 퍼지는 바람에 더 강력해진 제한 조치를 발표하는 주지사의 회견을 들었다. 아내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루 사이에 닥치는 이 여러 번의 위협에 우리는 쓴웃음을 지었다.3월의 어느 화요일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그날 우리는 코로나19가 지금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을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가장 뛰어난 의사들도 치료제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세계적인 통계도 이 전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일류 기업도 당장 필요한 의료 물품을 제 때 만들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경제는 하락 곡선을 가파르게 그리고 있다.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전문가들도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다고 여기던 일자리와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다. 화장실 휴지와 빵이 귀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일상 용품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의존하는 게 얼마나 하찮은 허상에 불과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다 어린 아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자녀인가? 어느 누구의 자녀도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고아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누군가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 아니면 딸이다. 절망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이 차이를 제대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죄와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적 때문에 생긴 나 자신의 필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절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도록 자극한다. 절망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자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지옥이 주는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한다. 절망은 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누리는, 안전함이 주는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알도록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절망은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대부분의 절망은 결국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절망을 느끼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이내 당시의 절망감을 떠올리며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느낀 절망감 때문에 나는 부끄러울 수도 있다. 소방관은 상황이 훨씬 더 안 좋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집은 그래도 무너지지는 않았다. 베씨는 지금 임대한 집 뒷뜰에서 다른 자녀들과 함께 신나게, 또 안전하게 놀고 있다. 아마도 그날 아침 내가 절망감을 느낀 건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MRI 검사를 받으면서 내가 느낀 절망감도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 있다. 검사 결과는 나쁜 게 아니었고, 지인들에게 농담 삼아 말하듯이 내 머리가 너무 좋아서 생긴 일이었다. 두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종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의 절망도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지금의 전염병 때문에 느꼈던 절망감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러워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결국 이 전염병도 이겨낼 것이다. 코로나19에 걸린 대부분의 환자들은 회복할 것이다. 경제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사업장은 또 힘차게 움직이며 고용을 창출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안정감을 회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절망감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의 사태는 어쩌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평상시와 달리 좀 더 정확하게 보도록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운 때를 만나면 우리 모두는 다 어린 아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 아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e’re All Children Now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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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연약함을 고친다
by Clarissa Moll
2020-05-03
몇 년 전, 우리가 첫 대륙 횡단 여행을 가기 전에, 남편과 나는 야외 활동 용품점에서 데이트를 했다. 그는 나에게 여행용 배낭을 사주고 싶어했다. 우리는 미 서부를 가로질러 옐로스톤,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그리고 로키 산맥을 지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등산을 하게 될 나를 위해 복장과 장비를 갖추어 주며 즐거워했다.열정적인 등산가였던 그는 배낭 코너를 활보했고, 가장 큰 것 하나를 신나서 꺼내 들었다. “이거 정말 멋진데!” 그가 소리쳤다. “한번 메어 봐!”난 거대한 짙은 황록색 가방을 둘러메고서 몇몇 옷 선반 주위를 걸어 다니면서 연습했다. 어깨 끈은 어깨에 꼭 맞았고 허리 벨트도 내 허리를 편안하게 받쳐 주었다. 사이즈가 약간 과해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고 한번 사용해 볼만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볍게 여행하기로 계획했고, 배낭 하나만 챙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직원이 거리를 두고서 정중히 물었다. “무게를 늘려 보시겠습니까?”우리가 서서 지켜보는 동안, 직원은 배낭에 모래 주머니를 넣기 시작했다. 배낭은 점점 무거워졌고 남편은 미소를 띄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산을 오르고 있는 모습을 예상했다. 하지만 직원이 그 배낭을 내 등에 올려 주었을 때, 나는 등산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똑바로 서 보려고 했지만 계속 휘청거렸다. 내 어깨에 가중되는 짐의 무게 때문에 불안정하게 구부리고 있는 나를 남편이 잡아주었다. 그는 “한번 조금씩 걸어 다녀봐. 곧 익숙해질 거야”라고 격려해 주었다.나는 배낭을 엉덩이 쪽으로 더 옮겨 메고 몸을 앞쪽으로 기울인 채로 옷 선반 주변을 걸어 다녀 보았다. 이번에는 고작 몇 걸음 정도만 가고는 멈추었다. 그것은 너무 무거웠고 결국 “도저히 못하겠어요”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짊어진 것들요즘 내가 지고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내 짐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다고 자주 느끼곤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를 강타하기 전부터 내가 짊어진 짐들은 가볍지 않았다. 8개월 전, 남편은 등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육아, 일 그리고 비통함은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 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그리고, 최근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 식료품이 부족하고 사회적 관계가 거의 없는 자가격리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추가로 일을 하려고 알아보던 중에 며칠 앞서 전달된 공지사항으로 인해 자녀들을 풀타임으로 홈스쿨링 하고 있다. 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격리에 대한 좌절감, 무너진 세상을 향한 의분으로 가득하다.이 모든 것들과 그 이상의 것들은 나를 굴복시키기 위해 위협하는 매우 힘든 짐으로 내 삶을 가득 채운다. 솔직히 나는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도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상황이 힘들어지면 강한 사람은 더 강해진다”는 말 때문에라도 스스로 용기를 북돋으며, 입술을 악물고, 어깨에 짐을 짊어진 채로 내 인생의 진열장 주변을 거닐어 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나는 어려운 시기가 우리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실제 가치롭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통과한 것 때문에 얻어지는 수용의 가치, 사랑의 가치, 상급의 가치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메시지를 찾을 수 없다.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나보고 무거운 돌을 어깨에 지라고 하시거나 내가 짊어진 짐의 고통을 강제로 이겨내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가장 무거운 짐 운반을 목표로 하여 전력을 다하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의 짐을 쉼으로 바꾸라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나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고 몇 번이고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짊어진 분노, 좌절, 슬픔 그리고 걱정의 무게를 인정하라고 하신다! 지금 내게 결핍된 자유, 유연함, 특권과 지위의 상실에 대해 애통해 하도록 말이다! 이렇게 보기 흉한 짐을 짊어지겠다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며 그분의 발 앞에 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도록 주님은 나를 부르신다. 만약 내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쉼을 찾아야 한다면, 이곳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내가 내 짐을 지겠다는 생각을 벗어버려야 하며, 예수님의 더 쉬운 멍에가 내게도 필요하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유독 힘들었던 청년시절 동안,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한 현명한 친구는 내 손으로 직접 기도할 수 있도록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신앙을 보다 외적으로 표현하는 교회에서 성장했으며 손을 사용해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언제나 손을 모으고 갖추어진 자세로 의심할 나위없이 새끼손가락 조차 움직이지 않고 기도했다. 우리가 같이 기도할 때 그녀가 엿보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주로 모은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펴고 기도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러한 열린 자세는 그녀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풀어 놓도록 일깨우는 것 같았다. 기도 중에 간구함을 아뢸 때,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을 들고서 마치 자신의 필요를 실제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처럼 하였다. 아름답게 몸으로 구현된 그녀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생각과 의지로 더 잘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윗이 사울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돌려 주었던 것처럼, 나의 사랑하는 친구는 자기 홀로 짊어지고 갈수도 있었던 무거운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내려 놓았다. 더 이상 그녀가 짊어질 가식이나, 슬픈 포기, 수치 따위는 없었다. 오직 평안 뿐이었다. 그녀는 짐을 내려 놓으며 자신의 영혼을 위한 참된 쉼을 찾게 되었다.요즘에는 분명하게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나의 활동을 스스로 제한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하게 하고 있다. 매일 나를 따라오는 감정과 관심을 마법처럼 지워낼 수도 없다. 하지만 내 통제를 벗어난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이것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매우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내가 다 책임지려고 했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는 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며, 탄식, 슬픔, 불안과 지침 그리고 나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에 기대어 주님이 주시는 쉬운 멍에를 택할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rading Your Weakness for God’s Strength번역: 정진호
영성
고난
역경
승리
평안
위로
코로나바이러스
신앙과소명
기독교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by 장대선
2020-05-02
5월을 가리켜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부부의날 등이 5월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푸르른 5월이라 하겠다. 많은 교회에서도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5월에 기획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5월은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달이다.그렇다면 가정의 달인 5월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어떠한 지침 혹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매년 5월에 교회가 가정과 관련한 행사를 기획할 정도로 가정이 중요하다면, 가정과 관련해서 성경은 어떠한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는지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5월 행사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구약성경이건 신약성경이건 간에 성경은 가정의 ‘가장’(House Head)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톨레도트’(Toledot, 족보)가 가장인 아버지의 계보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household)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함으로써 가장을 중심으로 가정을 언급하고 있다.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 대하여 언급할 때도 개인보다는 ‘무리’(Flock)로서 다루고 있다. 그 무리가 때로는 ‘군대’(Army)로 표현될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질서 있는 무리의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개인’은 대부분 무리를 이끄는 사람, 혹은 무리를 이끌게 될 사람들인 것을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한마디로 성경은 믿음의 무리와 관련하여, 그리고 영적이든 물리적이든 간에 그 무리를 이끄는 인물을 중심으로 모든 교훈과 지침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인 경건을 중심으로 신앙과 생활이 이뤄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성경은 이스라엘의 왕과 사사, 그리고 선지자를 이스라엘 무리(백성들) 가운데 보내어 세우고 질서 있게 이끌도록 하신 것이다. 심지어 신약성경에서도 믿음의 백성들은 사도들과 목사인 감독들의 지도 아래 장로들과 집사 직분의 직무 가운데서 교회공동체가 운영되도록 하셨다.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 1769-1850)가 그의 책 ‘장로회 제도’(Presbyterianism, 1835)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로들을 교회의 치리자로 세우는 장로회(Presbytery)로서의 교회를 신약교회로 세우셨다.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통상적인 경우, 이러한 질서의 원리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맥락인 것이다.이와 관련하여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하신 계명이 나타내는 바를 생각해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계명은 단순히 부모님을 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로 대표되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권세와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고 따르도록 요구되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의 질서, 즉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시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고 이르신 때로부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십계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 권위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이를 명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에 순종하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모범이었다. 십계명의 첫 번째에서 네 번째에 이르는 계명을 준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여섯 가지 계명, 특히 그 가운데서도 다섯 번째 계명을 따라 위에 있는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 것은, 앞에 있는 네 가지 계명들도 지키지 않는 불순종이요 패역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권위와 질서에 있어서 가정과 그 가정의 부모, 그 가운데서도 ‘가장’에게 순종하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이고도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의 장이다. 가정에서 가장의 권세와 권위 아래에서 잘 다스림을 받으므로 그 확장된 형태로서 교회의 치리자들(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이나 국가의 관원들과 같이 위에 있는 권세와 권위에도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권세 혹은 권위의 문제가 갈수록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페미니즘(Feminism)과 소위 성 소수자의 인권 보호와 같은 성 평등(sex equality)의 주장이 갈수록 일반화되기에 이르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어떤 면으로 하나님의 권위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의 바탕 가운데 있는 문화 현상이 분명하다. 그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권위 질서가 이미 심각하게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가정에 대해서는 가장을 머리로 하는 질서에서 생각해야 한다. 개별적인 구성원들의 역할과 권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의 다스림과 그 역할 가운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가정이다. 특별히 신앙에서 가장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장로교회를 비롯한 대부분 교회에서는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의 경건 생활을 권장하며 지도하는 것이다.예컨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을 작성했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채택했었는데, 가정예배 모범의 서문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르기를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에서 이같이 중요한 의무(가정예배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당회(a Consistory, 즉 지교회의 치리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바로 그러한 책임과 의무를 전제하기 위해서 가정을 구성하는 첫 관문인 결혼예식과 실질적인 가정을 구성하게 되는 첫 과정인 출산 후의 유아세례가 모두 예배당에서 교회의 회원인 회중 전체가 바라보는 가운데 행해진 것이다.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과 관련한 가장의 역할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로서 참여했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의 ‘거룩한 안식일’(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이라는 글이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글에 따르면 가장의 역할과 그 수행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다. 사무엘하 6장 12절에 기록된 오벧에돔의 집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며 복을 주신 것과 같이 주일에 가정에서 행하는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이 정당하고 충실하게 이행될 때, 개인의 가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복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하여 “두세 사람이” 그러한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즉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에 그리스도 또한 함께하시는 것이다(마 18:20).그뿐만 아니라 구지는 그의 글에서 주일에 행할 사적인 의무로서의 가정예배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의무들을 이행할 때, 그들 중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항상] 그렇게 해왔던 바와 같이, 다른 모인 자들의 입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리문답을 시행하고, 설교를 되뇌며 신앙의 기초를 가르치도록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가능한 한 가정의 ‘가장’(구지는 여기서 가장을 가리켜 가정의 ‘다스리는 자’라 칭한다.)이 이러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라고 말한다. 그런즉 가정예배를 비롯한 사적인 경건의 의무들은 가정의 목회자인 가장의 책임과 의무 가운데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의 기독교 가정에서 이러한 가장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혹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들, 특히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며, 또한 요구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에 대한 이해와 신뢰, 그리고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분명하게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 근거하는 교회의 신앙 전통이다.이러한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는 공적인 교회의 틀과 예배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서는 바탕이요 기초이다. 그렇기에 일찍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가정예배 모범을 작성하여 지교회의 치리회가 가정의 가장을 권면하고 지도하는 지침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구지의 책에서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구지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교회에 가기 전에, 그러한 경건의 의무를 수행함으로 성도는 공적인 예배에 더욱 적합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 다녀온 후에, 이러한 사적인 의무를 수행함으로 공적인 의무들이 더욱 우리에게 유익하게 된다.”라고 했다. 즉 “이러한 사적인 의무들을 행함으로 우리가 교회에 있지 않을 때도 거룩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가장의 역할,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함에 있어서 가장의 역할과 의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교회의 지도와 관리를 병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정의 달 5월에 교회가 더욱 중점을 두고 강화해야 할 올바른 취지일 것이다. 공적인 회중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기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목사와 장로의 직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을 사적인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는 책임과 의무를 위하여 가장이 있음을 기억하여 더욱 특별하게 실천하는 5월이야말로 진정으로 기독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정의 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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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를 사용하는 지혜
by Michael Sacasas
2020-05-01
우리는 앞날을 알 수 없다. 매일 바쁘게 살다 보면 이런 사실을 잊곤 한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종종 당황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러 나라가 지난 몇 달 동안 전 세계를 집어삼킨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우리는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세상에 살게 되었고, 일상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는 못쓰게 되어 버린 옛 습관과 일상 대신에 새로운 일상의 습관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시간도 예상치 못하게 왜곡되는 듯하다.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위기는 우리의 옛 습관이나 행동, 또는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던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정을 질서 있게 통제하고 시간을 잘 관리해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이 지장을 받는 일은 전례 없는 것이다. 이 사태로부터 많은 사람이 교훈을 얻을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지금은 또한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삶에서 디지털 기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우려했다. 모바일 기기와 그야말로 없는 곳이 없는 무선 네트워크로 인해, 과거에는 데스크탑 컴퓨터를 켜서 가끔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이제는 우리의 삶 전체 영역으로 확대되어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 삶을 뒤덮음으로 말미암아 개인정보의 특성, 시민 사회의 건강성, 노동의 가치, 인공 지능 기술의 발전 상황, 인류 번영의 조건 등에 관한 윤리적, 법적, 철학적, 심지어 신학적인 질문까지 하고 있다. 서로 물리적 간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합당하고도 거센 사회적 압력 때문에, 이제 우리 대부분은 사람들과 연락하고 매일의 업무를 지속하기 위해 디지털 도구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디지털 도구들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이러한 불확실성과 염려의 시대에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고도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우리가 쓰는 앱이나 기기에 이미 많이 설치되어 있고, 코로나19 상황을 추적 및 감시하여 그 확산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디지털 감시 장비를 탑재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이러한 논의를 관심을 갖고 지켜볼 만한 것은 분명하나, 이 글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도 우리가 평상시처럼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에 좀 더 초점을 둘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대부분은 이제 정보를 취득하고 사람들과 연결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더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리라는 것이다.우리의 건강 문제에 직결된 위기의 때에는 우리 자신,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얻게 해 준다. 적은 노력으로도 우리는 전 세계의 대표적인 전염병 학자들, 바이러스 전문가들, 그리고 전문 의료 인력들의 견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여러 나라의 상황이나 국제 보건 기구들, 각 지역의 의료 및 응급 시설에 관련된 상황도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몸의 건강과 우리 사회의 건강에 잠재적으로 독이 되는 가짜 정보 역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공포감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약을 먹거나 확인되지 않은 치료법을 시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보건 관계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 바이러스의 기원을 논하거나, 이 바이러스의 치명적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이러한 정보의 지형도를 탐색할 때는 당연히 지혜가 필요하다. 디지털 미디어 사용자들은 언제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위험한 정보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금은 더욱더 신중해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로 둘러싸인 이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위험은, 우리가 아무리 조심하여 건전하고 믿을 수 있는 정보만 접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디지털 미디어와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최신 정보를 찾아 미친 듯이 뉴스피드(news feed)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불난 집 구경을 멈추기 힘든 것처럼, 뉴스 확인을 멈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SNS는 강박적으로 뭔가에 참견하는 것을 조장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의지할만한 지도도 없이 모두가 출구를 찾으려 애쓰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 위험이 더 커진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보를 습득하고자 하는 갈망이 너무 크면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키거나 감정적으로 압도해버릴 수도 있다.정보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면 당연히 좋은 정보가 있어야 한다. 우리 지자체에서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어떻게 하면 섬길 수 있을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일을 감당키 위해서는 좋은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더 많은 정보나 더 좋은 정보가 있다고 해서 염려가 해소되거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고 끔찍하리만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요량으로 정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지금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면 디지털 기기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기도로 두려움과 염려를 다루도록 해보라. 매일 특정 시간에만 최신 뉴스를 확인한다거나, 필요한 경우 뉴스피드를 완전히 꺼버리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아침에 믿을만한 몇몇 뉴스를 신속히 훑어본 후 곧바로 일과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내가 전문 의료인이나 응급 대책반이 아니라면 코로나19 바이러스 환자 수를 세세하고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내가 입법이나 정책 전문가가 아니라면 바이러스 해법에 대해 논쟁하고 싸우는 정치인들에 대한 뉴스를 계속 읽을 필요는 없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만 취득하는 지혜이다. 상식에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정보를 너무 많이 취득하는 것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것 외에도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영상(screen)에 의지하고 있다. 많은 교회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디지털 도구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교제하는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은 사실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지적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일정 기간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는(socially)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제 디지털 방식으로 서로 연결하는 일에 아주 익숙하다. 문자, SNS, 또는 페이스타임(FaceTime) 같은 앱은 우리 삶에서 일상적인 부분이 되었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사용 빈도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상호 격리의 시기인 지금 화상 회의(videoconferencing) 프로그램들은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도구들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해도 다른 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와 목소리를 통해 위안을 느낀다. 그러한 위로를 잘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교제를 위해 오랜 시간 디지털 수단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사람은 영과 육의 전인적인 필요가 채워질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피조물이다. 다른 피조물들처럼 우리에게도 육체가 주어졌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가 육신의 감옥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에 동참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육신은 우리 인성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나 가족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상으로 듣는 설교를 통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예배드릴 그 날, 서로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할 그 날, 다시 한번 성찬의 떡과 잔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수단을 맛볼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또한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재발견하게 된다. 외로움이 사람의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고독은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한 것이다. 너무 오래, 우리는 서로 피상적으로 연결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고 진정한 고독을 추구하지 못했다. 만일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통해 우리가 디지털 소통 기술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Pandemics, Digital Media, and Anxiety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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