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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by John Piper
2020-04-18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영원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바이러스에 대해 침묵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 어디를 펴도 위기상황과 관련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위기의 상황에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의 목소리는 풀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목소리는 화강암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것은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마 7:24).그분의 목소리는 참될 뿐 아니라, 모든 상황에 있어서 완벽하게 지혜롭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5). 그분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실 때, 그 생각은 확고하고, 흔들릴 수 없고, 영원히 선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다]”(삼하 22:31). 요즘 같은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소중하고 달콤하기도 하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하나님의 말씀은 일생의 달콤함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흔들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의 말씀은 불멸의 생명을 가져다준다.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그리고 그 달콤함은 지금과 같은 혹독한 섭리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비밀을 배운 자에게는 참으로 그러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멈출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주권 역시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비밀이다. 사실 우리의 영혼을 보호해주시는 차원을 넘어서, 죽는 순간에도 그분의 뜻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꿈꾸며 평안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 11:22). 그분의 섭리는 달콤하고도 쓰라리다. 나오미가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시점은 그녀의 상황이 막 변하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지금은 하나님을 감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가 아니다. 하나님이 환난을 보내신 쓰라리고 아플 때이다. 우리는 이것을 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엡 1:11). 하나님은 말 그대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자연은 주권적이지 않다. 사탄은 주권적이지 않다. 죄악 된 인간은 주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그것들 모두를 다스리신다(눅 8:25; 욥 1:12; 2:6; 행 4:27-28). 따라서 우리는 욥과 함께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하나님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로움 가운데 그것을 뜻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지혜로운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부터 흘러나온다(엡 1:11). 모든 뜻이 지혜이다. 모든 뜻에 목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향해서, 그 모든 뜻이 자비하시다. 그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자비로운 경종(警鐘)이다(계 22:17).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1-24)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Coronavirus and Christ: ‘Behold The Kindness and Serity of God’번역: 김종진(개혁된실천사)***존 파이퍼의 신간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 한국어판 e-book을 4월 21일 TGC코리아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2020년 1월 11일, 중국 우한 지역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처음 보고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0년 3월 11일에 마침내 팬데믹을 선언했다. 불확실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존 파이퍼는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Coronavirus and Christ)에서 온 세계 독자들에게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독려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믿는 자들을 위해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을 성취하시고자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돌보시는 주권자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 영혼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존 파이퍼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6가지 성경적 답변을 제공하며,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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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불안한 자녀 돌보기
by Chad Kraska
2020-04-17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 살아가는 지금, 우리 자신의 걱정뿐 아니라 자녀들의 걱정을 다루기 위해 실제적인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얼마나 적절히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1. 정보 수집은 믿을만한 자료를 통하라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디어 대신 믿을만한 뉴스나 정보원을 찾도록 힘쓰라. 신뢰할만한 자료는 아래에서 구할 수 있다.• 미국 질병 통제 예방센터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gov) • 미국 외상성 스트레스 연구센터(The Center for the Study of Traumatic Stress, cstsonline.org)(한국 내 코로나19의 발생 현황은 질병관리본부(www.cdc.go.kr)를 참조할 수 있다-편집자 주)2. 지나치게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정보를 모으고 뉴스를 읽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 뉴스는 하루에 두 번만 확인한다 등의 규칙을 세워 언제 어떻게 최신 뉴스를 확인할 것인지에 대한 범위를 정하라• 기사 제목만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말고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충실하라.•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자녀들 역시 미디어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시키라.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의 복잡한 거미줄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정보를 수집하여 자녀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3. 필요에 따라 자녀들과 정보를 공유하라아이들과 정보를 공유할 준비를 하되, 강제로 그리할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걱정, 두려움, 염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우리의 현재 감정 상태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어떤 감정을 정확히 명명(naming)하고 나면 그 감정의 강도가 감소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을 부모와 나누도록 격려하라.• 아이들의 두려움은 실제적인 것이고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동시에, 예방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보라. • 염려나 두려움, 걱정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든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하라.• 부모인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이 위기를 잘 이겨낼 거야” 같은 말을 통해 안심시키라. 4.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보여주라• 자신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려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실에만 입각하여 말하라.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라.• 자녀들에게 건강을 위한 습관을 가르치고, 이를 가족이 함께 세우는 계획 및 안전 생활 수칙에 포함 시키라.5. 부정적인 생각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당신과 당신 자녀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 것처럼 두려워 떨거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최악을 상상한다 함은 “이 바이러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처럼, 어떤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더 안 좋다고 상상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과도한 일반화는 우리의 염려를 증가시킬 뿐인 것으로, “항상”, “결코”, “아무것도” 등의 부정확하고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우린 아무런 힘이 없다고”와 같은 말이 있다. • 해결책은 각 시나리오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한 진술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건 분명해. 이 위기가 끝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파괴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예를 들자면…” 6. 기본에 충실하라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간과하거나 게을리하지 말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가끔 바람을 쐬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도 야외 모임을 계획해보라. 가능하다면 잔디가 있는 곳으로 나가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 이 시간을 통해 가족 관계가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 • 쉬라. 이 기회에 해야 할 많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잘 먹으라. 카페인이나 설탕을 과도하게 섭취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이 당신의 걱정이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잘 관찰하라. • 웃고, 놀고, 즐기라. 좌절과 침울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모두 보낼 수는 없다. 때로는 실없는 행동, 유머,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과 가족의 마음에 짐을 덜어주라. 그리하면 모두의 걱정이 줄어들 것이다. 7. 일정한 생활 규칙을 세우고 준수하라아이들을 포함한 우리는 모두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일과가 있을 때 좋은 성과를 낸다. 현재는 우리의 가족, 개인, 그리고 업무 등 모든 일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와 염려의 정도는 실로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자유가 점점 제한될수록 더욱 큰 실망과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변화와 예측 불가능에 대해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변화와 염려에 대해 까탈스러움, 분노, 좌절, 포기, 슬픔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와 증상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라. 덧붙여서 기상 시간 및 취침 시간과 더불어 규칙적인 수면 습관, 식사 시간, 노는 시간, 공부 시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 일종의 리듬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8. 다른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라친지와 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을 향한 염려가 다른 이들을 위한 염려로 바뀌게 된다. 이웃이 잘 지내는지 알아보고, 함께 식사도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해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9. 필요할 때는 지원을 요청하라걱정으로 인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자녀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교회 목사나 리더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 목사는, 가족을 목양하는 당신을 목양하기 위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에 더해, 당신이나 지인 중 누군가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 현재 거주 지역에 있는 많은 상담가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상으로 원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10. 당신의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라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라.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책을 읽어라. 가능하면 두세 사람이 모이는 기도 모임, 소그룹 모임, 아니면 친지들과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교제하며 서로 격려하라. TGC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제공하고 있는 자료에 더하여 Crossway에서도 다수의 디지털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TGC코리아에서는 미국 TGC, Desiring God, Ligonier 등에서 제공하고 있는 코로나 관련 자료들을 번역해서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한국 작가들의 글도 제공하고 있다 - 편집자 주)1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이럴 때 더욱 그리하라.• 온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묵상하라(시 115:3).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 부산물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일, 건강, 재정, 가족 등 당연시해왔던 모든 복에 대해 주께 감사하라.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Parenting Anxious Kids in an Anxious Time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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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 유다도 다말의 의로움을 인정했어요
by 배경락
2020-04-16
안녕하세요. 저는 시아버지 유다와 부적절한 관계로 아이를 낳은 며느리,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여자랍니다. 여러분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구약 시대 여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결혼해서는 남편, 그리고 아들을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여자의 삶은 가장 낮은 빈곤층으로 떨어집니다. 우리 시대 남자들의 수명은 매우 짧았습니다. 전쟁으로 죽는 경우뿐만 아니라 양을 치다 사나운 짐승을 만나거나, 도적을 만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만 노후가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씨를 잊게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레비리트(levirate) 제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화겠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는 가나안 여자로서 가나안의 문화와 풍습에 익숙합니다. 어느 날 동네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습니다. 산 위 동네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다 집안이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혈통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고향 땅 하란까지 가서 아내를 얻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부족을 떠나서 우리 가나안 족속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 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동네에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지요. 유다가 우리 부족장 히라와 친구라는 둥, 저들이 여호와 신앙보다는 가나안 족속의 신앙을 더 좋게 생각한다는 둥 이런저런 소문이 있었습니다.1)저는 어려서부터 호기심도 많았기에 유다 집안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집안에서 섬기는 하나님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다 집안은 우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 집 큰아들 엘의 청혼이었습니다. 뜻밖이긴 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결혼 초기에 유다 집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그들은 가나안 족속보다 더 세속적이고 사악했습니다. 남편 엘의 죄악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직접 쳐 죽였습니다.2) 하루아침에 과부가 된 저는 난감했습니다. 관례에 따라 둘째 아들 오난과 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그는 제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고의로 그랬습니다. 형의 재산을 자기가 독식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형의 혈통이나 저의 경제적 상황 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족속도 하지 않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오난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연이어 내리자 시아버지 유다는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죽은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재혼하지 말고 수절하라. 그리고 친정에 가서 셋째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 저는 시아버지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명령을 내린 줄 알았습니다. 보통 가나안 족속 같으면 재혼하도록 해서 여자에 대한 부담을 덜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친정에 와서 시아버지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잊힌 여자가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례도 다 치렀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그제야 시아버지가 말했던 것이 거짓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거십(거짓의 도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로부터 고엘(기업 무를 자, 속량자, 구속자) 제도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동네에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종처럼 신발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게 되어 있습니다(신 25:9). 그리고 첫 번째 사람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 싫으면 두 번째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유다 집안의 첫 번째 사람은 셋째 아들 셀라입니다. 이제 시아버지는 저를 완전히 잊어버렸고, 셋째 아들을 저에게 줄 계획은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고엘 제도의 첫 번째 사람에게 두었던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냥 유다 집안을 ‘신발 벗은 자’의 집안으로 수치와 불명예를 당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희생하더라도 집안의 명예를 회복하고, 가문의 혈통을 이어갈 것인가? 저는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신전 창기로 분장하고 그를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시아버지 유다는 고엘 제도의 두 번째 기업 무를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여자로서 정욕에 불붙어 남자를 구하러 나간 것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함도 아닙니다. 목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가문의 명예와 집안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아실 것입니다. 제 결정을 알아준 분은 의외로 시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제게 말하였습니다.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으니(She hath been more righteous than I)”(창 38:26, KJV). 하나님은 아무나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인정할 때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말했지요.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5-8).저는 경건하지도 않고 잘한 것도 없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시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집안의 죄악을 저 같은 이방 여인을 통하여 가리시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혈통이 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후일 룻이 두 번째 기업 무를 자 보아스와 결혼할 때도 마을 장로들이 저의 이름을 이용하여 복을 빌어준 것3)도 다 이런 까닭입니다(룻 4:11-12). 부디 고리타분한 유교 윤리에 젖어서 저를 윤락녀나 음탕한 여자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4) 감사합니다. _____________1) 유다가 이사 간 동네는 ‘거십’으로 ‘거짓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속고 속이는 것이 풍습이 된 도시로 유명하였다. 유다는 큰아버지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삼은 것 때문에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몹시 마음이 상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나안 사람과 교제를 하고 가나안 여인을 부인으로 맞았으며, 아들에게도 가나안 여인을 주었다. 2)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인류를 향한 심판을 하시긴 했지만, 어떤 개인을 직접 심판하신 것은 유다의 아들 엘이 처음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엘은 살려두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죄악은 극악하였다. 3)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베들레헴 장로들은 두 사람의 결합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한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대(보아스)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그 여인(룻)을, 이스라엘 집안을 일으킨 두 여인 곧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에브랏 가문에서 그대가 번성하고, 또한 베들레헴에서 이름을 떨치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 젊은 부인(룻)을 통하여 그대(보아스)에게 자손을 주셔서, 그대의 집안이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베레스의 집안처럼 되게 하시기를 빕니다”(룻기 4:11-12, 새번역).4) 구약학자 카일 델리취는 그의 주석에서 “다말을 구약의 성녀, 거룩한 여자”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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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좌절을 이기는 지혜
by Abbey Wedgeworth
2020-04-15
얼마 전에 여배우 제니퍼 가너(Jennifer Garner)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코로나19로 인해 게임, 경기, 리사이틀, 작품 제작 등의 취소를 겪은 사람 등 “유치원생부터 전문직 종사자들”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는 글을 올렸다. 집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를 해시태그 #heyjenlookatme를 붙여서 올리면 본인이 직접 “세상과” 나눌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제니퍼 가너는 “제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라는 말을 친절하게 덧붙였다. 사람들이 올리는 춤 영상이나 혼잣말하는 모습 등을 재미있게 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끼친 각종 피해가 떠올라 슬퍼지기도 했다. 예배가 취소된 교회와 교단들, 결혼식이 취소된 부부들, 졸업식이 취소된 고등학생들, 경기가 취소된 운동선수들, 대학 생활 중 적어도 한 학기는 망친 게 확실한 대학생들, 휴가가 취소된 가족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팬들, 생일에 친구들과 함께 컵케익을 먹을 수 없게 된 아이들 등 많은 이들이 피해의 당사자이다. 일정만 조정하면 그만일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개인적인 낙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상실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모를 수도 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의 삶은 크든 작든 고통으로 점철되기 마련이고, 전염병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성경은 우리가 낙심되어 괴로울 때 4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1. 위를 올려다보라깊은 좌절로 인해 모든 삶이 무너졌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보다 많은 고난을 겪으셨기에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고, 해결자 되시는 구주께 나아갈 수 있다(히 4:16). 기도할 때는 솔직해도 된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 혀의 모든 말을 알고 계신다(시 139:2–4).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간고를 겪으셨고 아신다(사 53:3).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히 4:15). 예수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롬 8:28; 요일 4:10).유명 연예인이 우리의 영상을 보기 원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선언을 하신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말이다. 실망하고 외로운 마음을 곧바로 그분께 가져가라.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시고 보살피시며 당신에게 깊은 관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라. 2. 안을 들여다보라갈망(desire)과 기대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좌절이나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취소된 것들에 대한 실망감은 우리 마음에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우리가 ‘무엇’ 때문에 실망했는지를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재미, 가족, 행사 또는 체험, 시합, 공부, 추억 만들기 등이다. 그 실망의 ‘강도’를 보면 우리가 과도하게 바랐다거나 제멋대로 사랑했던 것, 즉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추구하는 무언가를 드러내 보여준다.우리의 낙심을 내어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부드럽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 어떤 것을 무절제하게 좋아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질서를 잡도록 하신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요일 1:9). 우리 마음의 방향을 재정비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빌 4:11–13). 3. 주위를 둘러보라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 하나님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실망의 때에 주께 나아가 그의 위로를 경험하면 우리는 다른 이들이 애통해할 때 그들을 더 잘 위로해줄 수 있게 된다(고전 3:1–7). 하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시고,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순종할 수 있게 하신다(마 22:36–40). 그러므로 좌절의 순간에 바라봐야 할 세 번째 장소는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내 친구 한 명은 예약한 결혼식장에서 결혼식 취소를 통보받았다. 그 친구는 가족들의 방문도 뜸한 곳, 외로움에 시달리는 요양원의 노인들에게 자신의 결혼식 꽃을 기증했다.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은 그의 투어가 연기되자 집에 갇혀 있는 그의 팬들을 위해 책을 낭독하여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포스팅하고 있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가? 지금 몸이 안 좋거나, 외롭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도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있는가? 다른 이들의 실망감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렇게 비상한 시기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선한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으라(엡 2:10).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도’ 그들을 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 4. 앞을 내다보라우리는 이 땅에서 좌절을 경험할 때마다 이 세상이 창조 때의 모습을 잃어버려 망가진 세상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더디 이루어지는 소망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나 실현된 약속은 생명 나무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Yes)가 되어 우리가 아멘이라 선포하게 한다(잠 13:12; 고후 1:20).내일 일에 대해서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지금 순간만을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느끼는 깊은 좌절감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과 삶을 위협하는 슬픔, 실망 또는 아픔이 없는 영원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크고 작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소망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의 닻 같은 것이다(히 6:19).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롬 5:5).낙심의 때에 우리의 신실하신 구주께 나아가면, 그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소경 됨을 치유하며, 다른 이들의 상처와 필요를 보게 하신다. 우리의 눈을 들어 지금 이 순간, 그분이 모든 것의 구속을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보게 하신다. 어린양의 혼인 만찬은 결코 지체될 수 없고 지체되어서도 안 되는 잔치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 언제나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verything’s Canceled! Dealing with Disappointment in Pandemic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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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가너
팀 켈러가 말하는 좋은 설교란?
by 고상섭
2020-04-14
“설교는 영광스러운 소명이다.”현 TGC대표 줄리어스 김의 ‘설교학’ 서문의 첫 문장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때로는 싫증을 내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소명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회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만의 독특한 부르심과 권위가 있다고 말했다. 아마 청중들에게 설교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설교와 성경공부 또는 설교와 강의 사이에는 무언가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이는 하나님의 영이 공식적인 예배 모임에 부여하신 고유한 권위”라고 말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씀 사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설교라는 특별한 사역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설교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설교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설교’에서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철저히 준비하라 먼저, 설교자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이기에 철저히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은사와 기술, 특정 메시지에 대한 설교자의 준비 상태가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를 만들어 낸다. 철저한 주해와 적용까지 설교 전과정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 과정은 고된 작업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구성하는데도 수년의 걸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는 설교자와 더불어 청중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려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첫날을 맞아 기도할 곳을 찾다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빌립보에서 전한 메시지는 바울에게서 나왔지만 듣는 이들을 향한 설교의 효력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최고의 설교 원고를 만들어도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듣는 이들에게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 원고 일지라도 성령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을 오해하게 되면 철저히 준비하기보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매달리며 기도만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열심히 기도한다고 성령님이 기계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2. 간절히 기도하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위대한 설교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또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말도 아니다. 누군가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잘못된 가르침일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설교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설교의 주체는 오직 성령님이시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부흥사로 유명한 어느 목사님은 설교 전에 2시간씩 설교만을 위해 기도하면 강대상 위에서 펄펄 날아다닌다는 말씀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설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마치 인간의 기도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설교자의 기도 생활이 위대한 설교의 비결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이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물론 깊고 풍성한 기도 생활은 위대한 설교와 좋은 설교를 위한 필수요소이지만 그렇게 기도한다고 설교의 위대함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팀 켈러의 책에 나오는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문화의 심장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를 벗겨내고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청중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정감(Affection)을 변화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팀 켈러의 이 정의에 대해 앞으로 TGC코리아 아티클을 통해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이런 위대한 설교의 정의를 위해 반드시 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자질이 있다. 3.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 존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이라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 말은 어떤 수사학도 설교에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남용되어 수사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설교를 경계하라는 것이라 설명했다. 칼빈은 웅변술과 수사학 같은 인간적인 기술이 설교라는 여주인을 섬기는 여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설교는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재미와 즐거움의 요소들이 점점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재미를 추구하는 인위적인 공연이 아니다. 팀 켈러는 “신령한 설교는 복음 진리 자체를 향한 사랑과 그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desperate love)에서 나온다. 그 진리를 받는 것이 청중에겐 곧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마음속에 불타올라야 하는 두 가지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간절한 열망,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다. 또 한 가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대상인 청중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설교자는 그 말씀을 기도하며 철저히 준비하게 된다. 더욱 하나님을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 있을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싶어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한 설교의 주체가 되신다. 오직 성령님만이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단독적으로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청중을 향한 불타는 심령을 설교자 안에 부어 주신다. 설교자는 이 두 가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철저히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설교 시간에 ‘죄의 고백’에 대해 설교한다면 설교자의 기도 시간에 죄의 비통함과 애통함을 먼저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시간에 경험한 것만이 설교시간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 시간에 “주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먼저 설교자의 기도시간에 위대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기쁨과 감격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에 앞서 하나님은 설교자의 마음을 만지시고 거룩한 정서로 가득 채워주신다. 팀 켈러는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개인기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설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설교자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설교자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늘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뇌하며 부르짖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때론 힘겨울 때도 있지만 또한 언제나 영광스러운 길이기도 하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란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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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재택근무
by Joe Holland
2020-04-13
코로나19와 관련한 뉴스와 질병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기업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있다. 이런 경험은 많은 근로자에게 처음 있는 일이다. 재택근무 경험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은 실로 큰 변화이다. 이런 변화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재택 근무자들을 보면서, 지난 6년간 재택근무를 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재택근무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지를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정직하라(Pursue Integrity)첫 번째로 재택근무는 정직을 요구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정직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방식으로 근무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택근무가 지난 몇 년간 좋지 않은 이미지를 준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여러 산업 분야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 중에는 아예 일하지 않거나, 고작해야 일주일에 몇 시간만 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재택근무를 성실하게 하려는 사람에게도 게으름은 정말로 심각한 유혹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사회적 책임감은 재택근무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당신이 근무 중에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쇼핑, 혹은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다면 당신의 동료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동료와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고 일하는 것은 모두가 공유된 직업윤리를 만들어가도록 한다. 열심히 일하는 옆자리의 동료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열심히 일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믿음은 재택근무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를 더 강화할 수 있다. 우리는 상사가 보지 않더라도, 또 급여 수준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무리 재택근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하게 일을 할 수 있다. 비록 일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직이라는 한 단어만 제대로 기억한다면 재택근무는 우리에게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얼굴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재택근무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정직이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기억하면서 재택근무에 필요한 몇 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시간을 배분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오해 중 하나는 출근해서 겪어야 하는 갖가지 잡무 등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집에서 근무하면 정말로 더 높은 생산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가 아닌 인간이다. 우리 속에 엉겅퀴와 쓴 뿌리를 여전히 남겨놓은 인간의 타락은 지금도 여전히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를 저주하고 있다. 출근하는 사람이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집중 근무와 관련한 가장 뛰어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60분에서 90분 정도까지만 집중할 수 있다. 그 후에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 식의 집중은 하루에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여유를 주어야 하고,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해야 한다. 이메일 응답이나 파일 시스템 정리와 같은 단순 작업에 필요한 시간도 적절하게 배분할 필요가 있다. 전화를 하라재택근무라고 하면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얼굴을 보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대부분의 작업 공간이 디지털화되어 있기에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다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과도 커뮤니케이션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직접 만나서 대화하지 않을 뿐이다. 애질 앤 린 방법론(Agile and Lean methodologies, 역자 주: 낭비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경영 기법의 하나)과 같은 효율적인 프로젝트 관리 모델에 따르면,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 팀일수록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횟수가 더 많다고 한다. 재택 근무자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질문이 있거나 전달할 정보가 있는 경우라면, 언제라도 전화기를 들거나 화상 회의를 할 수 있다. 그런 시간을 더 자주 가질수록 더 생산적이고 건강한 근무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지구촌을 휩쓰는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더 자주 의사소통을 하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상사의 기대 수준을 알라전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를 맞아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재택근무를 할 것으로 예측하고 준비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현실을 맞았다. 모든 사람의 근무 환경은 다 다르다. 급여와 관계없이 많은 근로자가 재택근무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상사가 기대하는 재택근무의 수준과 관련해서 최대한 솔직하고 열린 대화를 가져야 한다. 상사는 내가 어떤 시간대에 대기하고 있기를 원하는지? 전화, 이메일 또는 채팅 등의 방법 중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기를 원하는지? 화상 회의를 하는 경우 복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런 모든 사항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의논해야 하고,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당신만의 워터쿨러(watercooler) 공간을 찾으라워터쿨러(역자 주: ‘워터쿨러 효과’에서 나온 단어. 워터쿨러 효과란 사무실에 비치된 물 등의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에서 직원들이 모여 대화함으로 사내 의사소통이 더 활발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워터쿨러는 이제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비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는 상징적인 위치가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도 중간중간 쉬어야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워터쿨러 공간이 필요하다. 전염병 상황을 맞아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자가격리 상태에 들어가 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우리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워터쿨러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일종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 독신자나 가족과 떨어진 공간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의 전화 통화가 워터쿨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해 놓으라새로운 업무나 바뀐 업무는 보통 이메일을 통해서 전달된다. 지금과 같이 복잡한 환경에서는 굳이 전 세계적인 위기가 아니더라도 매일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이메일과 메시지는 상당한 수준이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진짜 중요한 메일이나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메시지와 이메일에 설정된 도착 알람부터 해제해야 한다. 중요한 메시지를 보내는 대상을 선별해서 알람을 별도로 설정해야 한다. 알람에도 우선순위를 정함으로 우리는 좀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다. 알람에 의해 방해를 받더라도 그건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확인하여 업무 효율을 놓일 수 있다.아날로그로 일하라디지털 연결이 없으면 아예 불가능한 게 재택근무지만 우리는 여전히 펜과 종이를 사용해서 일할 수 있다. 특히 알람에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경우에 더 그렇다. 아날로그로 일하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지 않게 하고 불안감도 줄여준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전 세계적인 위기를 맞아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에 중독되어 긴장감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아날로그로 일하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출퇴근(Commute)을 만들라나의 출퇴근 거리는 우리 집 1층에서 지하실 사무실까지 가는 열네 발자국이다. 퇴근할 때 교통 체증이 없는 건 너무도 확실하지만, 십 초 동안 단 열네 발자국을 걷는 일터에서 집으로의 전환은 그리 쉽지 않은 변화이다. 재택근무자에게 집과 직장은 같은 장소이다. 따라서 출퇴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상의 출퇴근 루트를 만들고, 최소한 5분이라도 퇴근 직전에 수행하는 업무정리 등 나름의 루틴을 만들어 놓으면 그건 매우 건강한 습관이 될 수 있다. 하루의 업무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여 다음 날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하루 동안 채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에 대해서 기록해 놓으라. 그리고 퇴근과 동시에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이 직장 외에 주신 다른 우선순위들, 가정, 건강 그리고 개인적인 삶으로 돌려야 한다. 하루 동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퇴근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주님을 계속 섬길 힘과 바른 방향성을 달라고 기도하자. 떨어져 일하는 친구와 대화하라재택근무와 관련한 좋은 내용을 게시물 하나에 다 실을 수는 없다. 이 주제와 관련한 책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더 잘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미 재택근무를 하던 믿을 수 있는 친구 또는 동료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에서 일할 때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이제 완전히 새로운 근무 환경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택근무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할 것인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재택근무라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king Remotely to the Glory of God번역: 무제
재택근무
코로나19
직업
생활
아날로그
코람데오
워터쿨러효과
빈 무덤, 다시 살아나신 주
by Chris Donato
2020-04-12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그냥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 그래서 부활을 소홀하게 다루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도록” 만든 “한 의로운 행위”이기에(롬 5:18) 그렇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의 삶 전체에 걸친 아버지의 뜻과 목적을 향한 순종은 그가 자신의 생명을 그의 백성을 위해서 내어놓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그게 바로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이다. 이것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는 십자가가 상징하는 공적인 부끄러움과 분노 아래에서 사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여길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생각을 조금 더 발전시키면 우리는 고통의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십자가야말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공감을 드러내는 완벽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한 의로운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이가 이뤄낸 확실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직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면 도대체 그는 어떤 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까?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에 실패한, 환상에서 깨어난 어느 한 갈릴리 출신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승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말 그대로 어리석음일 뿐이다. 십자가는 결코 역사 속의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전선을 이룸으로 죄와 죽음의 시대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부활절 아침만큼 죄와 죽음이라는 끔찍함의 패배를 더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부활은 인간 예수님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고” 또한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선언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고 또한 그를 “주와 하나님”(행 2:36)으로 높이셨을 때, 예수님과 그의 놀라운 사역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만약에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약에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이 여태까지 목격한 가장 저주받고, 불행하고, 가여운 운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상 죄와 잡초, 그리고 죽음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기극을 영광스러운 구원이라는 희망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부활은 일어났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쓴 이유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1절). 부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주는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기에는 양보(협상)의 여지가 없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자신을 ‘사도적 기독교’(Apostolic Christianity)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신약 전체의 메시지이며 무엇보다 로마서 10장 9절에 명확하게 나온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친절과 존경’(벧전 3:16)으로 대접받는 사람들과는 친교의 식탁을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고백하는 ‘기독교’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대면해야 하는 질문은 부활의 증거가 아니다. 부활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부활은 타락이 가져다준 저주(죄, 잡초, 그리고 죽음)를 뒤집었다. 물론 그건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부활까지 이어진 다른 모든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예수님(종종 ‘적극적’인 순종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순종(‘소극적’ 순종)이다. 전자의 형태로 볼 때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님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는 완전한 순종으로 아담이 범한 불순종의 죄를 물리쳤는데, 이는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를 극복한 것이기도 했다.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의 빛을 이 세상에 비추려고 했다(사 41:8-9; 49:3-6). 그리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왔다. 오로지 그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또는 왕은 국가를 향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대리자라는 의미 외에 하나님을 향한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삼하 19:43; 20:1).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경우에(사 63:16),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또는 시 2:6-7). 물론 이스라엘의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신성시되지는 않았다(물론 우리 예수님은 예외이다. 그분은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경우,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그의 백성과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최소한 원칙적인 의미에서 그의 백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에게(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롬 9:4-8)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그랬듯이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약속의 상속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롬 6:1-14)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신실성(fidelity)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물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다(“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5).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한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죽음까지 감내한 예수님의 순종이야말로 처음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르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 5:15). 참으로 이 은사는 훨씬 더 위대하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는 아담의 범죄를 가리고도 남는다. 그럼 그 은혜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맡긴 책임은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살아감으로 아담의 타락이 초래한 저주와 멸망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에 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것은 바로 아담이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남아 있는 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선’은 언제나 율법을 어기고 싶은 ‘악’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죄가 정복되고 오래된 아담의 모습이 구원받으려면 주님의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사 53:11). 누가 우리를 이 죽음의 몸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예수님이 오셔서 죽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아담의 믿음 없음을 뒤집었다. 그리고 이 타락하고 더러운 세상이 회복의 길에 들어서도록 했다(롬 8:21-22).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그의 승리와 높이 되심을 같이 누린다는 것이다(롬 6:1).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서 죄가 패배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죄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는 마치 죽음을 받치고 있던 양탄자를 빼버린 것처럼, 죽음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어 놓을 힘을 잃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한 번은 죽어도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이 탁월한 부활은 다가올 위대한 부활의 ‘첫 열매’였다(고전 15:12-33; 51-57 참조). 예수님의 피값으로 살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하나님과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높이심에 참여하고 거룩한 재판관 앞에서 의로운 존재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세 번째 날, 그러니까 부활절 아침은 새로운 날을 목격하는 새벽이다. 그 전에 있었던 다른 날들과 전혀 다른 의미의 새로운 날이다. 이날은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그 속에 품고 있다. 오래된 전쟁을 비유로 한 말이 떠오른다. 승리는 이미 선언되었다. 비록 죄와 죽음은 아직도 그 소식을 들어야 하지만 전쟁은 끝에 다다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죄와 죽음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더 이상 그것들의 노예가 아니다. 승리자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멍에를 감당함으로 파괴했다. 말 그대로 진짜 비어버린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희망이 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겪을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게 한다. 이 세상이 주는 불확실성과 혼돈은 종종 무서울 정도지만 우리는 거기에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슬픔과 비극 속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는 새로운 창조와 이 땅에 이루어질 천국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일이면 반복해서 믿음으로 선언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달콤한 포도 덩굴에 의해 잡초가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다. 진정한 정의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한때 감금된 죄인들은 전능자 앞에서 완벽하고 겸손하게 부활한 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e is Not Here, He is Risen번역: 무제
복음
부활
십자가
예수님
구원
순종
죄
죽음
감사
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은 그리스도!
by Keith Getty
2020-04-11
‘코로나19’에 관한 뉴스를 지켜보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이 사태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가족은 평소 여름 시즌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여름을 보내곤 했는데, 이젠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국내에서만 지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에 비하면 이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이 바이러스의 확산이 언제쯤 진정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먼저 오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그래서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딸들과 함께 피아노 주변에 둘러 서서 새로 출시한 찬양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이 곡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삶의 소망을 찬양하는 곡이다.이 곡이 나오기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작곡가 조던 코플린(Jordan Kauflin)과 맷 머커(Matt Merker)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이 내게 소망에 대한 찬송을 작곡하도록 독려했다. 그 때만해도 작사 팀의 맷 보스웰(Matt Boswell)과 맷 파파(Matt Papa)가 1563년에 완성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번째 문답인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란 내용을 기초로 가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각각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이 곡의 작업을 하기 위해 북아일랜드에 있는 우리 집 피아노 앞에 모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라는 신곡이 탄생하게 되었다.“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왜 이 질문으로 시작해야만 했을까?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 가운데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소망은 죽음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신 분을 믿을 때에만 찾아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오직 이 선언만이 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 알게 하며 소망을 갖고 변화를 지향하게 한다.부활에 대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광스런 미래를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사나 죽으나 내 몸과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 나의 신실한 구세주에게 속해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결코 죽음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닥칠 죽음에 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야만 이 힘든 세상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이 평소처럼 부활절을 앞두고 교회에 모여 함께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각자의 집에서, 또 어느 공간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믿음으로 찬양할 수 있다.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분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 이 곡이 찬양하고 있듯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다.* 오늘 영상QT로 “Christ Our Hope in Life and Death”(한국어 가사)를 감상할 수 있다. 영상 QT로 가기[1절]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은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오직 우리의 믿음은우리 영혼 그분께 속해 있네우리의 삶 누구에게그분의 명령 말고 또 무엇에죽기까지 우리 지켜 주시는그리스도의 사랑 거기 우리 서 있네[후렴]찬양하라 할렐루야!우리의 소망 영원히송축하라 할렐루야!지금부터 영원히 고백하네사나 죽으나 우리의 소망 그리스도[2절]곤고한 영혼 위로할 수 있는 진리는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그분의 은혜와 선하심우리의 크신 구세주의 보혈두려움 일 때 우리 믿음 붙드시는 분폭풍 같은 시련 위에 서 계시는 분누가 그 파도 보내시나해안으로 인도하실 반석 되신 그리스도께[3절]무덤까지 우리 부를 찬송그리스도 살아 계시네 그리스도 살아 계시네천국에서 우리 받을 보상그분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부활하여 거기서 주님 만나리 죄와 죽음 없어지고영원한 기쁨 누리겠네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영원히작사: 맷 보스웰ㆍ맷 파파작곡: 키이스 게티ㆍ조던 코플린제작: 게티뮤직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 Our Hope in Life and Deat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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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Marshall Segal
2020-04-10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빛이신 성자 하나님은 깨지고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어둠을 사랑하여 그를 거부했다. 이제 어둠이 골고다 언덕 위의 그에게 내렸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탄생했고, 대적자들은 생애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걷기도 전에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다(마 2:16).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마4:1)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고소했다(마 10:2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 중에 거하였으나, 그들은 그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구타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조롱했다.이제 십자가에서 그의 침묵은 그들의 반란에 따른 적대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그는 마침내 시편 22편 1절 말씀으로 침묵을 깼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사방으로 에워싸였다못 박힌 손과 기능을 상실한 폐를 가지고 예수님은 시편 22편 말씀을 붙잡았다. 이 구절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죄 없는 사람의 절박한 말이었다. 이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에워쌈을 당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이 찢어질 듯 부르짖는 힘센 황소처럼(시 22:12-13),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혔다. 바리새인들은 독사가 피를 찾아 나서듯이 어떻게 그를 죽일까 강구했다(마 12:4). 그가 결코 매달려 있을 곳이 아닌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중략]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2-42)라고 희롱하였다. 이것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된 시편 22편 8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날카로운 이를 가진 개들처럼(시 22:16), 무리는 그를 죽이고 싶어 들끓었다. 그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 질렀다(마 27:22). 빌라도는 “어찜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다(마 27:23). 무리는 격노한 아이들처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미움으로, 거대한 분노로 표출했다.풀잎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자 무리나 먹이를 짓밟고 있는 야생 황소처럼(시 22:21),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멸시와 고통을 가했다. 그들은 가시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마 27:29). 죄 없으신 얼굴에 침을 뱉었다(마 27:30). 그들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시편에 적힌 그대로(시 22:18),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마 27:35). 그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해 같이 빛날 그의 얼굴을 비웃었다.스스로 죄를 지어 심판에 직면하고 있는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멸시하는 말을 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서기관과 무리, 로마 군병들과 강도들의 멸시와 비웃음으로도 불충분했는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가 죽도록 놓아두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격렬하게 부인했다(마 26:70). 나머지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다(마 14:50). 예수님은 사방으로 에워싸였다. 이제 그는 들소와 개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놓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위협은 그가 감내해야 하는 진노, 위로부터 오는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고 쓰고 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슬픔을 삼켜버릴 만큼 너무나도 큰 슬픔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타락한 인류의 잔학 행위를 싫어하셨는데, 이제 이에 대한 적대감이 마침내 아들에게 엄습했다.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창세 전에 이 참혹한 시간이 있을 것이 기록되었다(계 13:8). 역사의 모든 순간은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죄 없는 어린 양 학살의 순간으로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알고 있었지만(마 20:17-19), 그것이 고통을 줄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가 겪은 괴로움의 깊이를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십자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말씀우리는 시편 22편을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선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1절을 외치실 때, 그는 그 시편이 어떻게 끝나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윗 왕도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느꼈을 때 이렇게 말했다.“[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그리고 두 구절 뒤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 22:26)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1절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통치할 것을 말이다. 죄로 인해 죽었으나 다시 살아 아들로서 보좌에 앉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이루었다히브리서 저자가 피로 물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받은 영광의 왕관을 보았을 때, 그는 시편 22편을 인용했다.“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0-12).예수님이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그 노래를 언젠가 마저 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했을 때는 영원한 왕국 건설을 막 시작했을 때다. 그때 그는 첫 열매를 맺기 전에 시작된 전쟁을 마치고 있었고, 그의 영원한 왕국을 위한 서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그리고, 시편 22편이 예언했듯이(시 22:30-31), 그가 무엇을 이루셨는지 항상 이야기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e Was Forsaken by the Father: The Horror of Good Friday번역: 정은심
시편22편
예수님
골고다
곤고한
복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
by 김은득
2020-04-09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어느덧 한국은 선거철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더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그런 리더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PA)의 설립자, 그레샴 메이첸(J. G. Machen)은 미국에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참된 기독 정치인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We pray God that he would give us an American Abraham Kuyper – a true Christian statesman…”). 정통 장로교회 교인들(Orthodox Presbyterians)이 메이첸을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그의 기도가 실제로 응답된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을 인용한 것은 우리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저와 메이첸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카이퍼는 사실 제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형 아브라함 카이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시급한 것은 교리적 순수함(dogmatic purity)이 아니라 공공성(publicity) 회복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웨스트민스터 출신 신학자와 목회자가 즐비하다고 들었습니다. 메이첸이 제 강연의 일부를 인용했을 때 무엇을 강조했는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의 책, 칼빈주의 강연을 읽어보신 분들의 예상과 달리, 혹은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메이첸은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Calvinism as Worldview)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이첸은 자신과 팔로워들의 상황에 걸맞게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주의 교단과 신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장면은 제 본연의 모습과 다른 미국식 아브라함 카이퍼를, 더 나아가 미국식 개혁주의의 특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저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그저 교단이나 신학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일종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세계관(Weltanschauung, world-and-life view)이라는 것은 사실 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착안하고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유행하게 된 용어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은 개개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초월적 세계관이 우세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유럽 전체를 하나 되게 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세워진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정치의 영역에서 프랑스 혁명을, 학문의 영역에서 자연과학 혁명을, 사회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끌어내면서 유럽인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지배적인 시스템이 됩니다. 또한, 세속화 과정(secularization process), 즉 현대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분화 과정(social differentiation)은 공적 영역(public spheres), 특히 정치와 학문의 영역에서 더 이상 유신론적 사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신앙과 종교는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신념과 견해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니, 유신론적으로 삶의 영역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만큼 구시대적이며 미신적인 것도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회적 발달은 종교라는 미몽에서 현대인들을 깨어나게 하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가운데, 저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소위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주체적인 삶과 객관적인 세상의 실재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방법론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다양한 삶과 세상의 실재들을 유기적이든 혹은 기계적이든 하나 되게 연결하는 원칙으로 조직화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원칙으로 발달(development) 개념이 있는데,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진화(evolution)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진보(progress)로 통용되었습니다. 물론 세계관적 방법론이 가지는 환원주의적 경향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다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면에서, 모더니스트들의 기획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이 경험한 세상의 변화들, 아니 혁명(Revolution)으로 묘사되는 급진적 변화들(그것이 산업 혁명, 과학 혁명,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 혁명 등 무엇이든지 간에)은 누군가의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왜 그토록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세계관이라는 정의에 해당할까요? 세계관에 해당한다면 적어도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관계들의 문제(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관계)나 다양한 삶의 영역에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관성을 가진 설명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원칙을 통해 위의 설명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세계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모더니즘은 제 모국 네덜란드에서도 신학(종교)에서부터 정치, 학문, 예술 등 전체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더니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정책들, 특히 무신론적인 교육 정책(예를 들어, 가치 중립을 근거로 무신론적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에만 국가가 재정지원을 하는 정책)은 유신론적 관점을 가진 학부모들과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의 양심에 큰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든지 간에,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침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신자라는 정체성이 어떤 성이나 인종, 지위, 민족 등에서 획득하는 정체성보다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 모국에서는 대다수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개혁주의 성향의 민중들이 부유한 엘리트 중심의 모더니즘 신봉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이렇다 할 사회 정책적 보호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은 제가 첫 번째로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 최고의 대학에서 모더니즘 신학을 배운 제가 사회와 경제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발투스(Baltus)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표현되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그 세계관을 체계화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 회심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개혁주의 성향의 대중들을 대변하기 위해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하부문화의 소셜 네트워킹(언론 기관과 정당, 대학교, 교단, 교원/노동조합 등)을 조직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은 제 모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교리나 교단의 신학이 아니라, 세계관으로서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작부터 반정립적(antithetical)이며, 전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성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네덜란드는 일렬종대로 획일적으로 심은 튤립만 있는 꽃밭이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경쟁하는 꽃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구조화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체의 확신으로 경쟁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신학적 범주를 따라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 over all spheres of life)을 칼빈주의의 중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 중심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영역 주권, 예정, 일반은총 등)들을 가지고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통해 행사됩니다. 가령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리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아름다움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의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는 신론이나 구원론에 속했다면, 저는 예정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중재자 없이 어떻게 한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각자가 가진 양심의 자유를 따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 확장된 정치적 자유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성경과 칼빈에게서 발견한 일반은총 교리를 통해 신자들이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왔습니다.최근 몇몇 학자들이 공공신학을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거나 공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로 해석한다면, 바로 제가 세계관으로 제시한 칼빈주의가 일종의 공공신학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더니즘의 방법론, 즉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론의 활용으로 인해 등장한 신칼빈주의라는 용어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혁파 대중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다양한 세계관과 경쟁하며, 특히 획일적인 세속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에 대항해 싸우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제가 네덜란드에서 성취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의 성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메이첸과 미국식 개혁주의와의 비교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일 저와 같은 리더십을 한국 교회에, 그리고 한국 정치에 허락하신다면 그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팔로워들이 세상을 등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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