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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성경
by Scott Hubbard
2020-03-16
“요한복음 15장 2절에 나오는 단어, 프룬(prune) 즉 ‘제거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릅니다.”목사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본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영어 성경으로 번역된 걸 보면 프룬(prune)이라는 단어는 제거해버린다(가치를 친다)는 의미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맥락과 원어의 의미를 보면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주장이었다. 이백 명 정도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프룬의 원래 의미는 높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땅에 손을 넣어서 밑으로 처진 가지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우리의 순종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가 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높이 들려있고, 또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강단에서 내려왔다. 회중은 일어나서 그의 백성을 결코 치지않는 하나님, 그들에게 힘든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꼭 끌어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찬송을 불렀다.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방황하게 하는 말씀나는 위에 소개한 이야기를 가지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목사의 독특한 성경 해석,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 환상적인 해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유혹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유혹은 나에게도 있다. 나 역시 양날을 가진 진실의 칼 한쪽을 무디게 하고 싶은, 그래서 살이 베여도 너무 깊이 베이지 않도록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목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목사들이 왜 성경적 권위에서 벗어나서 방황하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 영혼에 붙어있는 작은 의심, 자신감을 흔드는 대화,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관계 등이 그것이다. 대화를 통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왜 그런 방황이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경건의 시간을 마칠 때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위로를 받을 때 보다는 혼란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머리를 책상에 부딪히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발버둥 쳤다. 의심이 내 팔꿈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낀 적도 있다. “너 정말로 이걸 믿는 거야?”그러나 나는 성경으로부터 받는 이런 경험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존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불편하게 하는 말씀아브라함은 그가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났고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상상도 못 했던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아내와 자녀를 거느린 목자 모세는 양을 끌고 호렙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불꽃에서 나오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명령을 받았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언이 주는 경외감 속에서 아이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예언을 들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예수님의 사역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씀이 많은 경우에 상처받은 갈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꾸짖었다(마 16:23). 또 그의 이웃을 공격했고(막 6:2-3), 서기관을 부끄럽게 했으며(마 22:46) 그 결과 그의 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도록 만들었다(요 10:31).만약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제거해버린다면 아마도 성경의 요약본도 채 안 되는 구절만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우상과 관습 파괴자왜 굳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가? 왜 스캔달을 일으키고 공격을 하는가? 하나님은 단지 깃털을 흔드는 정도로 기뻐하지 않는다. 현실은 항상 우리가 가진 망상을 사라지게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는 우리 모두를 어느 정도는 망상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어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하나님을 그려 넣으려고 한다(롬 1:18-21).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는 진리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규한다. “어리석은 소리야!” 우리는 또 외친다. “이 말씀은 너무 공격적이야!”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진리를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언덕으로 끌고 가서 나무에 매달고 싶어한다(고전 1:23; 2:8). 우리는 말씀으로 불편해져야 한다.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적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호세아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친구잖아요? 왜 그런 사람도 말씀으로 불편하게 하는 거죠?”우리를 구원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종종, 그리고 반복해서 우리를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신령하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때그때 부서진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생각을 부순다. 그는 위대한 우상 또는 관습 파괴자이다. 이런 부서뜨림이야말로 그의 실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시 또는 증거가 아닌가?”(헤아려 본 슬픔, A Grief Observed, 66)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우리를 회복시키지만 꾸짖는다. 구원하지만 부순다. 그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간절히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그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앞에 놓고 앉아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두 가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신 가장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우리는 군중들처럼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설마 나의 하나님이 그런 일을…” 그러나 그런 경우도 “나의 하나님(my God)”은 그냥 “나의 신(my god)”, 우리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작은 나무 조각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예의 바르고, 오래 참고 그리고 안전한 신.아니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지금 꼭 예수님이 말한 모든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에 안정된 평안만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점 하나까지도 다 지키기 때문에(요 10:35) 또 신약 성경의 모든 말씀도 지키기 때문에(요 14:26) 우리는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불편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지만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어린아이를 반기고 과부를 격려하며 버려진 자를 찾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범죄자 사이에서 면류관을 쓰고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죽음을 짓밟고 영광중에 다스리며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그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불편하게 하는 그분의 말씀에서 도망쳐 보다 더 평안을 주고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달려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와서 불편함을 느끼라데이비드 깁슨(David Gibson)은 이렇게 썼다. “때때로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울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제야 당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기대를 뒤집어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라. 당신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라”(’삶을 거꾸로 살기’[Living Life Backward]).유한하고 미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지혜를 하나님의 무한하고 실패하지 않는 지혜 앞에 내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은 뼈를 다시 맞추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치료하기 위해서이다(호 6:1).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이다.그러므로 이제 성경을 읽을 때면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겠다고 한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라. 당신을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훈련하신다(딤후 3:16). 꼭 그렇게 해달라고 용기있는 기도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어떤 우상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어떤 거짓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나를 불편하게 하소서. 나를 다시 만드시고 나를 흔드소서. 그것이 당신께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면.”이런 기도는 아프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자만심과 자족함, 평안만을 바라는 환상이 다 부서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자유이다. 영광을 향한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Expect the Bible to Unsettle You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프룬
CS루이스
헤아려본슬픔
호세아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예배의 의미
by Jay Kim
2020-03-15
최근 몇 주간 나는 여러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이 교회론적 난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우리의 결정이 지혜로운 걸까 지혜롭지 못한 걸까? 우리의 행동은 올바른가 아니면 무분별하게 행하고 있는 걸까?혼돈의 상황 속이지만 3월 말에 책 한 권을 출간할 예정이다(Analog Church, 3월 31일 출간 예정). 이 책에서 나는 교회는 지금까지 항상 아날로그 공동체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교제하기 위하여 디지털로 “연결”되는 편리함 대신 아날로그로 모이는 수고를 하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비디오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논의가 조금 더 낯설고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에 최근에 발전되고 있는 상황을 조명해 보면서, 불안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편리가 아닌, 조율빠르게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다. 성도들에게 이를 독려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자 꼭 필요한 대안이라고 보고 있다. 세계 곳곳의 정부가 대규모 집회 금지를 지시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상황은 내가 사는 곳과 섬기는 곳에서도 현실이 되고 있다. 지역 대학교는 이번 학기 남은 기간에 강의실 참석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공립학교도 같은 결정을 했다.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단들은 이러한 방향을 강하게 권하여 직접 참석하는 모든 규모의 집회를 중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최소화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인다.그래서 회중을 온라인 공간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회중에게 디지털 예배의 현실이 편리하지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방편임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점을 명백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나중에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할 것이다. 편안한 집에 앉아서 TV와 컴퓨터로 설교를 시청하는 것은 분명 편리할 것이다. 이러한 편리함은 오랫동안 훈련을 통해 형성된 예배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예배하지 않았던 때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예배당의 공간에 함께 모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면,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을 특정 상황에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직접 모여 예배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다. 여행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면, 나는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집에 도착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 실제로 손을 잡고, 안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는 임시로 행하는 대안이라는 입장에서 행해져야 한다. 시간과 매체를 선용하기잠시지만 새롭고 낯선 디지털 현실 세계에 당면한 우리에게는 시간과 매체를 선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야 하는 동안 공동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다시 구성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는 있다. 진실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강조하고 다시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가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대부분의 실시간 방송 플랫폼은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온라인으로 모이는 이 기간에는 평상시 주일 예배 때보다 좀 더 대화적인 방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 후에 대화로 이어지는 방법을 도입한다면 이 기간에 성도들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눈과 귀만 빌려서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질문으로 소통함으로써 디지털로 분리된 세계를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정한 시간에 성도들이 함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여 “실시간” 집회를 강화할 수 있으며, 온라인 예배라고 언제나 원할 때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기도에도 유사한 접근을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기도를 나누도록 격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온라인 교회들이 이미 실행하고 있다. 디지털 거리의 깊은 골을 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몸이 실제로 함께하여 기도할 때 느끼는 강도보다는 약할 수 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사랑하는 강력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교회 생활에서 겉돌고 있는 성도들을 연결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미 대규모/소규모, 모임/흩어짐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모임이 존재한다. 대규모 주일 예배 모임이 있는가 하면, 도시 전체에서 인근 지역과 마을별로 흩어져 모이는 소규모 그룹도 있다. 예기치 못한 이 기간에 우리는 소그룹으로 주중에 모이도록 하고, “실시간” 온라인 예배 모임을 독려할 수 있다. 대규모로 모일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소규모로 그리고 흩어져서 모일 수 있다. 서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 이러한 시기에 크리스천은 보통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는 성구를 많이 암송한다. “온전한”의 헬라어는 ‘teleia’이며, 여기서 “궁극적 종말 혹은 목적”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telos’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은 우리의 두려움이 끝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죽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다. 이것이 교회가 계속 모여서 찬양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섬기고,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미래의 소망을 실제로 몸으로 구체화하고 미리 행하는 방법이다. 현재 상황이 앞으로 몇 주간 그리고 몇 달간 한 공간에서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혜롭고 책임감 있게 행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쓸 수 있다(살전 2:1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aking Church Online in a Coronavirus Age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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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 묵상하는 하나님 사랑
by 전재훈
2020-03-14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인문학은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셋째,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간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립보행하고 사회적인 행동성향으로 보아 ‘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출생과 가족관계와 하는 일을 통해 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깊이 고찰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는 역사와 철학과 경제와 종교를 두루 거치며 살펴보아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시간은 인간에게 삶을 제공했고 그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는 환경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그와 더불어 생각과 가치관도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시각으로 내 삶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과거의 내 삶을 돌아보고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시간들을 통해 오늘의 나를 규정지으려 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오늘의 나를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고정시켜 주지 않는다. 인간의 생애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역사도 변하고 있기에 삶의 모습도 변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국제적 상황도 변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 삶을 규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지나온 역사는 삶의 참고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용법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각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문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삶은 다양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 같은 부모, 비슷한 DNA를 가진 쌍둥이라도 그 둘의 삶은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 5천만 명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삶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몇 개의 특징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규정해서 여러 개의 카테고리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천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곳에는 서로 다른 5천만 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볼 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미래를 뭉뚱그려 헤아려 볼 수만 있다. 그렇게 내다 본 미래도 막상 다가가 보면 무수히 많은 예측들 가운데 하나를 살아가게 되거나 실상은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오직 인간의 죽음뿐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죽음을 미룰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진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루는 방법에 온 생을 다 바쳐야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문학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범죄한 죄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셨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여전히 변화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을 붙들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영원히 누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고난이라는 문제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고난의 큰 파도를 넘으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더욱 가까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누리기도 한다. 고난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혹은 더 가까워지게 하는 고난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고난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을 출발선으로 삼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이끄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내가 기대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야 할 뿐 사랑 자체가 의심되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 주시는 고통을 감수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출 12:43-45)장자의 죽음이라는 큰 재앙을 피하는 길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양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유월절 양식을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방 사람이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을 수 없었다. 다만 돈으로 산 종만이 할례를 받은 후에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언제까지나 종으로 살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유월절 규례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후에는 그들에게도 종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집에 거류인과 타국 품꾼도 기거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다. 돈으로 산 종과 타국 품꾼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일을 하게 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다른 집에 종으로 팔려온 사람과 자신의 노동력을 대가로 돈을 받는 품꾼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르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종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품꾼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또한 할례 받은 종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고 일해야 하지만 품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품꾼은 자신의 집안이 저 종만큼 가난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고, 종은 너무나 가난한 탓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까지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에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월절의 의미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종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유월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징하고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돈으로 산 종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까지 늘 기억하지는 않는다. 특히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에는 더더욱 잊어버리기 쉽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를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원망의 조건이 되지만, 이 모든 것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는 엄청난 감사의 조건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돈 받고 팔려온 종인가 아니면 구속 받은 죄인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원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감사로 찬양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영원히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살아갈 자녀가 될 것인가?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여러 경험들이 빚어낸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먹고 자고 입는 것의 수준들로 평가될 사람들도 아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자녀 삼은 가장 존귀한 자임을 믿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의 나의 삶을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지게 하기보다 감사와 찬양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늘의 만찬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은 비록 무교병과 쓴 나물로 한 끼의 식사를 해야 하는 돈 받고 팔려온 종의 신세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지금 어떤 곳에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영성
묵상기도
고난
하나님의사랑
유월절
정체성
모세
아론
규례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반응을 요구한다
by Jonathan Parnell
2020-03-1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 사건이다.만일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생애가 끝났다면, 우리는 그 희생이 정말로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알지 못하여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선한 목적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고 한들,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속에 계신다면, 그 죽음이 기약한 모든 내용은 사실상 희망 고문을 안겨다 줄 뿐이다.그러나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불멸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으로 무엇인가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그 죽음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부활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도 부활이 남긴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이 도대체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이 복음의 메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복음이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 준다.단지 독서용이 아닌 이야기기독교의 복음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지 독서용으로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본질상 그 이야기는, 그냥 담담하게 내용을 관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 반응하는 자세를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가는 반응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살아 내는 반응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와 같은 반응을 요구한다.만일 부활이 일반 전설과 같이 하나의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도 필요 없이 그 이야기를 평가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흥밋거리로 읽고 머리로만 내용을 이해한 후에 원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바뀔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실제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그렇다. 정말로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남들의 대화나 엿듣는 자세로 그 사건을 방관하며 지나가는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실제로 등장하는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저들과 똑같이 타락하여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영광을 쫓고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고로 이야기를 읽다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 ‘관해’ 말해 왔던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고.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그분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언제나 그 이야기의 정점에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린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든 혹은 애써 무시하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그 사건에 대해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으려는 자세 또한 일종의 코멘트다.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영향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과 이어지는 토요일까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일 수밖에 없던 그들의 두려움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한 저자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이어 또 다른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불린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그 책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활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최초에는 부활을 목격한 증인만이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었다(행 1:22).누가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를 살펴보면, 동요하는 군중을 향해 시종일관 부활에 초점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그러고 나서 부활과 뗄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한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신분이 공적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성령을 보내어 그 부활 소식이 더 강력히 들리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행 2:32-35). 그리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면서 설교를 마무리한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에 대해 누군가가 단언했듯, “하나님이 그분을 주님이자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바로 오래전부터 약속된 메시아이며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가 어찌할꼬이 설교를 들은 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베드로가 마지막 말을 전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청중은 “마음에 찔려” 당혹스러워했다(행 2:37).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긴 표현이다. 우리 식으로 옮기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의미이다.이에 그들의 영혼은 진동하고, 인생의 위기감이 찾아들었으며, 그저 세상에서나 잘살아보려 애써 온 자들의 마음속에 그 모든 사실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을 자아냈다. 진짜 현실이 그들 앞에 드러난 것이다. 베일에 가려 있던 현실이 원색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졌다.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이제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도 무언가 달라져야 했다.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언급된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사도들은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분개하든(행 4:2),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든(행 17:32), 부활의 소식을 계속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부활의 현실은 모든 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말이다.당신에게 선포되는 복음우리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한 설교를 통해서도 부활을 선포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안디옥은 오늘날로 치면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1세기의 대도시다. 그 도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 이야기의 요점을 되짚어 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메시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 사건을 해석한 후, 그 사건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선포된 메시지가 청중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볼 수 있다. 곧 바울의 설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소식을 듣는 자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부활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나 교훈이 아니다.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사색거리도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진짜 뉴스가 여기에 있다. 그분이 살아 계신다.이처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죄 사함의 소식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듣는 자는 단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부활은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에 무응답으로 일관할 수 있는 중간 지대란 없다.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그 소식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그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 결과 이 순간에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따르라.”저 복음의 사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면, 이 같은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Resurrection Demands Respons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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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코로나19' 속의 교회와 국가
by 이승구
2020-03-13
지방 정부에서 ‘코로나19’ 사태의 추이에 따라, 특히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서 종교집회 금지명령을 검토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여러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교회 공동체는 본래 교우들과 온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그 점을 늘 가르친다. 특별히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르칠 때, 그것의 적극적 의미는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써 왔고, 또 신경을 쓸 것이다. 필요시 제한 명령?혹시 필요하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그 “표현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서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행정부와 교회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협의 결과를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내용을 전달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면,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 제기로 들리기에 이런 식의 표현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국가와 교회의 구별국가와 교회는 각기 독립적인 기관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기관이다. 물론 중세 때나 지금 이슬람권과 같이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때도 있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공산사회처럼 국가가 교회와 종교 활동 전체를 통제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역사의 과정을 통해 국가는 국가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하고,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독립된 기관이라는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간단히 표현해서 ‘국가와 교회는 상호 독립적’이라고 했다(the separation of the state and the church). 정부와 국가는 독립적 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럽 역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를 가지고 시작한 미국은 처음부터 국가와 종교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활동해 왔다. 미국이 국교(國敎)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요즈음 이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고, 또 그것을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면 그들이 겪은 복잡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성도들의 이중적 자격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시에 국가의 국민이므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더 좋은 국가가 되도록 힘쓰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국민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옛 변증론자들이 강조해 온대로 우리는 좋은 시민임이 틀림없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은 우리가 잘 해낼 것이다.그러나 교회가 어떻게 활동을 할 것인지의 문제,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회의 예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성경으로부터 배웠다. 이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 유럽은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과정을 겪었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원칙과 실천이었다. 이 원칙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는 성경의 원칙이 버려지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나라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예배에 있어서 어떤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나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또한 교회의 성원들도 이 원칙,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결정하고 교회가 시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참으로 충실해야 한다.‘코로나19’ 사태는 극복될 것이고 별문제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일이 지난 후에라도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제한을 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촉발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명심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 사태 정도가 아니라 더 크고 매우 복잡한 상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교회 공동체의 정치적 주장?교회 공동체도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의 문제에 관여하여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정부든 지방 정부든 정부는 독립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성도들은 국가의 구성원이므로 개인 자격으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리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견해를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단체를 구성해서 여러 의견을 말하고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는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이름으로는 어떤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에 교회로서의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모든 교회가 일어나 피해를 무릅쓰면서 주장을 할 때 그것을 무겁게 여길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진보라는 사람들과 보수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해왔다. 현재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도 전혀 듣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스스로가 한 것이다.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때의 심각성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에 어떤 요구를 할 때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명확한 교회의 활동을 외부 세력이 간섭하는 경우다. 이때는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각오하더라도 교회 전체가 한목소리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경우다. 신사참배를 하면 예배당에서 예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배당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나서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구성원들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는 국가적 행사이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의했고, 결국 몇몇 분들만 순교 당하고, 옥중 성도가 되었다. 우리에게 또 그런 일, 교회 전체로서 어떤 주장을 해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전과 같이 순응해 버리고 몇몇 사람만이 어려움을 당하는 과거와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사태를 일제하의 상황과 같다고 이야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도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면 이런 정책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성도들은 그것은 안 된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 교회로서 지체 의식이 더 분명해져야만 한다.부디 성도들 각자가 좋은 시민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교회의 성격을 잘 유지하고,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여러 활동을 제대로 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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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by Liz Wann
2020-03-13
내 자녀들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고, 더 많은 디즈니 쇼를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가족에 관한 메시지이다. 어느 연령대를 위한 것이든 오늘날 많은 영화는 가족의 귀중함을 말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일에 중독인 아버지는 마침내 그의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워킹맘은 삶의 진정한 가치는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항적인 십대 청소년은 그의 가족 안에서 결국 치유된다. 이러한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행복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가치인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곳이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가족을 믿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화와 TV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의 가치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가족을 만드시고, 복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가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가족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끔찍한 우상이 될 수 있다.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고 있든지, 아이가 없든지 상관 없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가족은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교회도 당연히 가족 지향적이어야 한다.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고 싶은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의 왕좌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메시지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모든 소망을 부모와 조부모, 형제자매와 자녀들에게 둔다.인식하고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가족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가족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한 그 사랑을 반영하도록 설계하셨다. 가족은 반드시 하나님과 복음을 향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가족은 훨씬 더 중요한 관계와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말하듯이, 가족은 분명히 이 영역 안에 들어간다.분리되지 않는 헌신나는 남편과 아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우선적으로 부여하신 일이라고 보며, 내 삶이 가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은 가족과 함께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32-35절에서 결혼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을 때, 나는 가슴으로 ‘아멘’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것을 염려해야 하기에 하나님과 내 가족 사이에서 분리된 느낌이다(고전 7:34). 이 구절에서 바울은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것이 주님을 향한 헌신이 나뉘지 않으므로 유익하지만, 결혼한 남성과 여성은 마음이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염려하고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과 가족으로 나누어지게 한다. 바울이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은 명백하다.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고전 7:35). 그는 결혼한 사람을 편하게 해주지 않고 있다. 사실 몇 구절 위로 가면 그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고전 7:29)라고 말한다.이 구절 전체를 보면 바울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며 일상적인 일을 잘 하기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결혼과 가족 구조는 우리가 알듯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마 22:30). 바울은 우리가 가족들과 영원을 향하여 살기 원한다. 그는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기 원한다.잔칫상은 차려졌다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12-24절의 비유에서 큰 잔치를 열고 초청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인들은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다. 한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20)라고 했다. 이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한 사람에 대해 경고한 모습과 똑같다. 그 사람은 영원성보다 일상의 일과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에게 넓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가족은 그의 우상이었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았다.결혼하여 자녀를 둔 여성으로서 나는 이 구절들을 가지고 씨름하며,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내 마음은 계속 하늘에 두어야만 한다. 가족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가족이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이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가족으로 인해 그분을 향한 마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잔칫상은 준비되어 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Captivating Power of a Good Family번역: 정은심
가족
선물
우상
보화
잔칫상
헌신
가족지향적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게 하라!
by Brian Howard
2020-03-12
교회 개척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 교회가 다른 교회를 개척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교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일부 교회들은 부목사 중 한 명을 내보내 곧장 분립 개척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개척자에게 적지 않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많은 경우 교회 개척자 본인의 준비가 부족하여 분립 개척이 실패로 이어진다. 이는 모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의 부정적인 인식만을 남겨두게 된다. 부목사를 내보내 분립 개척을 시도하는 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추천할 만한 첫 단계가 아니다. 이 일은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하룻밤 사이에 변모할 수는 없기에, 서두르지 마라. 아래에서 소개하는 단계를 장기간에 걸쳐 따라가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교회 개척을 통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이다.[1년 차]교회의 선교 전략과 철학을 평가하고 다시 정의하라세계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많은가 하면 어떤 교회는 지역 선교를 잘 감당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전인적(holistic)인 3단계 모본에 근거하여 선교 전략을 수립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는 선교의 국면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지역 선교: 예루살렘 - 우리 교회가 속한 도시를 섬기는 사역, 긍휼 사역, 지역 전도- 국내 선교: 유대와 사마리아 - 국내 교회 개척- 세계 선교: 땅 끝까지 - 전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이 세 국면 여기저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많지만, 이들 모두를 하나의 전체론적인 전략으로 통합한 교회는 거의 없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는 선교의 이 세 국면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개척이 선교에 필요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 믿기지 않는가? 팀 켈러(Tim Keller) 역시 교회 개척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전략임을 주장한 바 있다. 시간을 들여 당신 교회의 선교 전략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세 국면을 모두 반영하도록 재조정하라.일 년 예산 중 일부를 교회 개척을 위해 책정하라선교에 있어 이 세 가지를 모두 강조하기로 했다면, 다음 단계는 각 국면에 자원을 할당하는 일이다. 전체 선교를 위한 재정은 얼마인가? 그리고 각 국면 당 어느 정도씩 재정을 배정해야 할 것인가? 내가 소전 네트워크(Sojourn Network) 대표로 사역할 당시, 우리가 돕던 개척 교회들에게 전체 예산의 15퍼센트를 선교비로 배정하고 각 국면당 5퍼센트씩을 할당하라고 주문했다. 어떤 식으로 재정을 배정하든, 이 일을 위해 상당한 재정을 책정하지 않고는 결코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년 차에 이 목표 두 개를 달성했다면 상당한 진보를 이룬 셈이다. 이 두 단계를 마쳤다면 이제 2년 차에서 5년 차 목표로 옮겨가라.[2년 차 ~ 5년 차]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 개척자를 후원하라새로 마련된 교회 개척 재정으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현 단계에서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교회 개척자들을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후원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마 아래와 같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교회가 합심하여 교회 개척자 한 명을 전적으로 후원- 교회 개척자들을 후원하는 연합이나 단체에 참여이 일을 교회 개척 뮤추얼 펀드(mutual fund)로 생각하라. 교회 개척자를 당신 교회 혼자 돕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도와라.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이들을 입양하고 지원하라3단계 전략과 함께, 나는 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사역자를 찾아 관계를 맺어가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 단계는 3단계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아래는 가능한 방법들이다.- 후원할 교회 개척자를 고른다- 그에게 재정 지원을 제안한다- 그와 관계를 형성해간다- 교회 개척자 및 그의 가족을 축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지원할 수 있다) - 당신의 교회에서 그 교회 개척자가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설교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 개척 교회는 당신 교회의 선교 헌신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회중이 늘 알게 하라당신의 교회 안에서 교회 개척 문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라교회 개척을 해보지 않았다면, 일 년 안에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변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도 중 대부분이 교회 개척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를 바꾸고 교회 개척 문화를 세우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되도록 시간을 주라.- 재정 지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을 이야기할 때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여기서 제시한 단계들을 약 오 년 정도에 걸쳐 충실히 이행했다면, 교회 개척이 전체 선교 전략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고, 교회 개척자들에 대한 후원을 시작했을 것이다. 교회 개척 자체에 대해 더 배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하나 이상의 교회 개척을 돕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개척에 대한 당신의 헌신을 이제 수년간 지켜보았다. 이제 당신은 6년 차,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옮겨갈 준비가 된 것이다. [6년 차, 그리고 그 이후]미래의 교회 개척자와 함께 교회 개척 연수를 하라 - 교회 개척자 한 명을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훈련 시킨 후 파송하라.- 교회 개척자는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나올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올 수도 있다.3년에서 5년 후에는 그 개척 교회로 보내어 섬길 수 있도록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보내는 교회로서의 문화를 세워가라.- 이러한 목적의식을 갖고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건전한 연합체와 더불어 평가, 훈련, 코칭을 함께 해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Become a Church-Planting Church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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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
종교개혁 예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by Sinclair Ferguson
2020-03-11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반기의 예배가 일종의 방관자들이 모여 지켜보는 행사로 전락했다는 우려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회중이 거의 수동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했던 것이다.그러한 회중에 대해서도 예배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예배자들은 미사가 연출되는 장면을 관찰만 할 따름이었다. 혹은 성가대의 노래를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의 예배 의식에서 회중은, 그처럼 구경꾼의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적극적인 자세로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따라서 예배의 ‘수준’은 그 예배자들이 거룩한 기쁨을 경험했는지가 아니라, 교회 음악이 시대의 기준에 부합했는지, 성가대의 노래가 훌륭했는지, 미사는 인상적으로 연출되었는지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를테면 사제가 입는 의복이나 미사 때 들려오는 종소리 또는 라틴어, 그리고 성당에 피어오르는 향 등이 그러한 연출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목적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을 위해서만 드려졌다.종교개혁은 그 모든 관습을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 각각의 예배자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말씀을 듣고 직접 성찬을 나누며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을 실어 기도하고 찬양했다.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그러한 종교개혁은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회 예배에 관해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주일 예배의 수준’을 가시적인 기준에 따라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사실 예배의 수준은 누군가의 주관을 뛰어넘어 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시선은 수직적인 차원보다 수평적인 측면에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사야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복하여 그 입을 가리고 경배를 올리는 참된 예배에 대한 갈망을 이미 상실했는지도 모른다.바울이 바라보았던 예배도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와는 사뭇 달랐다.“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현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그 공백을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오늘날 ‘예배의 개혁’은 성경이 위와 같이 제시하는 예배의 비전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씨름했던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다.‘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기쁨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는가?’‘우리는 어떻게 그 기쁨을 회중 가운데 반영하며 예배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목적을 따라 진행되게 할 수 있는가?만일 우리가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 성경을 살펴보지도 않는다면, 예배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을 추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뭔가 가시적인 효과만 가져다주는 방식을 따른다든가, 아니면 다른 교회들이 보기에 좀 더 세련된 스타일만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에는 찬송가를 펴서 거기에 인쇄된 악보를 보며 찬양하다가 이제는 대형 스크린에 가사를 띄워 놓고 한 구절씩 따라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분명 순수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흔히 예상치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곧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룬다기보다 오히려 그 신앙에 손해를 입힐 수 있다.말하자면 스크린에 올라온 찬양을 한 구절씩만 따라 하다 보니, 가사 전체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특별히 젊은 세대는 자신이 부르는 찬양이 시편의 고백을 가사로 취한 노래인지도 모르고 따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앞선 세대와 달리 전체 시편 중 대부분을 암송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편에 나오는 찬송이나 참회의 노래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인용한 가사,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 문학적 재능이나 신학적 통찰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작사했던 수백 편의 찬송 역시 모를 수 있다.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흥미를 느끼고 예배에 참석하게 된 오늘날의 어떤 젊은이가 바로 그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사도신경을 몇 주 안에 자연스럽게 암송하겠는가?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고백을 많은 예배에서 생략하고 있는데 말이다.우리는 모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친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구약성경이 그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한다. 다시 말해, 르호보암이 앞선 세대의 지혜를 무시하고 자기 세대의 조언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재앙에 빠뜨린 잘못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출간된 ‘종교개혁 예배: 현재를 위한 과거의 예전’(Reformation Worship: Liturgies from the Past for the Present)은 아침에 찬물로 샤워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우리 몸이 활기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냉수 샤워처럼 오늘날 예배를 갱신하는 데 유익을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혹 대중음악만 평생 들어 온 사람은 그러한 노래를 선호할 뿐 아니라 마치 그 노래를 음악의 표준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채널을 발견하고 바흐와 베토벤, 멘델스존이나 헨델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감성은 더 깊고 풍요로워져서 이전보다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과거의 예전은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아름다운 질서와 흐름 그리고 리듬을 더해 줄 수 있다.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여기서 나는 경직된 자세로 전통적인 예배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아무런 독창성도 없이 그저 오래된 예전이면 일단 모방하고 보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따른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예배를 질식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유럽에 살지도 않고, 더더구나 16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오늘날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다름 아닌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배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의 예전을 참고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가령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예배의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기 위해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과거의 예전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거기에는 지혜와 슬기와 깨어 있는 감각, 그리고 예배의 원리와 목적을 주의 깊게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선포되는 가르침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올바른 방식을 통해 예배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그들의 마음이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무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예배의 감각을 깨워 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우리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성경을 중심으로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혜의 경이로움과 믿음의 필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힘입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을 상실할 때, 우리의 예배는 세련되기만 할 뿐 차갑기 그지없는 죽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서린 거룩한 권능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내가 어릴 적에는 거의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러한 말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향해 인사합시다.” 물론 우리 각자는 서로를 따뜻하게 환영해야 한다.그러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며, 또한 내면의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초대하셨다는 놀라운 특권을 자각하게 된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를 환영하심으로써 드릴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서로를 환영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유산을 통해 그와 같은 예배의 관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탁월한 예전을 모아 놓은 앞선 책(‘종교개혁 예배’)은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한 자료를 훌륭하고도 지혜롭게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그 손길을 통해 얼마나 큰 복이 교회에 전달되겠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We Can Learn from Reformation Worship and Liturgies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예배
성령
진리
회복
임재
하나님 선물로서의 몸과 영혼
by Robert Cutillo
2020-03-11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고 있다. 몸과 영혼의 분열은 오늘날 교회의 심장부를 흐르는 새로운 단절을 가져오고 있다. 영지주의라는 여전히 매력적인 이단 사상과의 투쟁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 지속되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몸과 영혼의 친밀한 결합을 잘못 해석하거나 무시하는 일에 교회는 주로 방관했다. 이로 인해 육체는 이 시대의 그릇된 사상의 쉬운 먹잇감이 되어왔다. 육체에 대한 의미는 빠르게 물질적인 의미로 축소되었고,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육체의 질병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우리에게 몸과 영혼에 대한 생각을 흐리게 하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을 단절시켰다. 몸과 영혼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합 된 것이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독교적인 믿음은 놀랍게도 점차 흐려졌다.인간이 육체의 올바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신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으며, 삶의 본질적인 본성에서 육체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다.육체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좋은 것은 무엇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상처받기 쉬운 육체육체를 따로 떼어 생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약점을 방어하고 최소화하려는 본능에서 나온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개성으로 인해 상처 입는 현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그것을 감수하기보다는 회피한다. 우리는 길가에 상처 입고 쓰러진 개인과 직접 교류하기보다 프로그램화된 방식으로 자선활동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만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어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성품이 연약한 관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떤가?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영지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친밀한 교제와 연약함을 보완하는 상호작용이라면 어떤가?성경의 이야기는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만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라. 찰스 테일러는“아가페 사랑은 배에서 나온다. ‘불쌍히 여기다’를 뜻하는 신약성서 단어(splangnizesthai)는 창자에서 반응한다."라고 언급한다.복음서에서 나타난 몇 가지 예는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성육신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 순간을 생각해보라.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는 그들을 보았을 때(마 9:36) 또는 수천 명이 사흘 동안 먹을 것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마 15:32). 하나뿐인 아들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과부의 눈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도 있다(눅 7:11-15). 예수님 사역 초기에 설교하려고 하실 때(막 1:40-41)도,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도 그러하셨다(마 20:29-34). 낫기를 원하던 문둥병자와 보기를 갈망했던 두 명의 맹인을 위해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셨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셨다. 깊은 연민(splangnizesthai)을 느끼셨다. 성육신으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지셨기 때문이다.‘가서 이와 같이 하라’성경의 비유 가운데 잘 알려진 것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연민으로 가득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먼 곳에서부터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눅 15:20).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리고 가서 보살펴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셨다.세상의 삶으로 익숙한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나의 처음 “본능적 반응”은 돌보는 것뿐이었다.갑자기 토미가 노숙자 클리닉에 왔을 때 나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랐다. 서른 살인 그는 필로폰에 찌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가 났다. 그의 모습 중 가장 최악은 싸움으로 다친 손을 그대로 두어 곪아 터진 그의 상처였다. 누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학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한참 후 나는 그의 차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버려진 그는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토미는 사랑보다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되풀이해서 학대하고 있을 뿐이었다.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책 ‘사랑의 행위’에서 두 예술가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예술가는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만나 본 사람들은 각각 불완전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두 번째 예술가는 아무 데도 여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그림을 그릴 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하기를 두 번째 예술가는 인간의 만남을 재정의하는 다른 관점, “어떤 무언가”를 그가 마주친 모두에게 발견했다고 했다.토미의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아 준 후에 그의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에게서 전에는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다. 자기 자신을 학대한 그의 눈에 비친 슬픔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안에는 연민의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치유적 존재로의 육체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면 내가 모르는 치유능력에 놀랄지도 모른다. 수년 전, 시카고 쿡 카운티 병원에서 가정의학과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멜빈이라는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멜빈의 아내는 2년 동안 멜빈의 치료를 위해 동행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편의 간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을 때도 그녀는 함께 있었다. 멜빈이 죽던 날 밤, 멜빈 부부는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듯 나를 집으로 불렀다. 내가 돌본 첫 번째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장례식이다. 장례예배가 다 끝났을 때,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내가 함께 있어 준 것에 고마워했다. 그 날 밤, 내가 한 일은 없었다. 젊은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곳에 있어 주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치유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건강을 위해“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육체와 영혼, 지식과 경험, 자연과 초자연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고 분열의 악한 영은 열심을 내고 있다.우리의 생각과 행동, 믿음과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이웃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딜레마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사마리아인과 같이 “내가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고민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내가 가까이 간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것을 걱정한다.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한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Healing Power of Bodily Presence번역: 송유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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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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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langnizesthai
케에르케고르
코로나19
신앙고백서들로 읽는 '코로나19'의 정국
by 장대선
2020-03-10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특히 신천지 집단의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발생한 급격한 바이러스의 전파는 급기야 경기도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했다. 국회에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파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것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기독교 신자이다. 즉 기독교 관원이라 할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혹은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급진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정부 차원의 반대와 퇴진 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과 같은 대책을 신학적인 비평과 국가 권세와 교회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혀 별개로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와 구성원들이 모두 국가라는 제도적인 영역 안에 포함된 이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서로 교차하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 혹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교회의 문제에 국가의 공권력이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정교분리가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미군정 하에서 교회가 받았던 적산가옥의 활용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역할로 받은 수많은 혜택은 전부 불법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사실 장로교회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적절한 영역설정에 성경적인 지침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17세기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시기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신학적 검증 가운데서 적절한 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미 융성한 장로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1559)에서부터 17세기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을 완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신조와 교회 정치의 원리들을 산출해 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 제39조를 보면, 관원의 역할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정욕을 억제할 굴레로 세상에 세속정부와 법률을 세우셨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돌판을 거스르는 범죄까지 억제하시기 위하여 관원들의 손에 검을 쥐어 주신 것이다.”라고 했다. 제40조에서도 관원에 대한 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관원들의 법률과 규칙에 따르며, 세금, 조세, 그 밖의 의무를 수행하고, 비록 그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침해받지 않는 한 자율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다. 벨기에 신앙고백(1561)에서는 제36조에서 위정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감시할 뿐 아니라, 거룩한 목회사역을 보호하며,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도 제23장 국가의 관원에 관하여 서술하는 과정 중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에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그리고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아울러 예배와 권징에서 생기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의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이처럼 이미 언급한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위정자 혹은 관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과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서 동일한 맥락의 문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회들은 이미 그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정리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관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다종교국가로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신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적절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신앙을 가진 관원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적절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관원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일련의 항목은, 작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가운데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이나 무분별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현 실정에 대해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지침들을 서술하고 있다. 선동을 주도하는 일부 세속정치 지향의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기독교 관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가운데 깊이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과 그들에게 빠진 자들에게는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들어야 한다.교회의 사역자들과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맥을 특정한 시대, 곧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지역의 종교․사회적인 특수성으로 이해하고 고려해야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견해를 흔히 볼 수 있다. 신앙고백은 단순히 그 시대의 영주들이나 관원들의 견해나 입김을 의식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결코 섣부르게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중략]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벧전 2:13-16절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행 4:19절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롬 10:17절의 말씀과 그 외의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정리하며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의 문구들을 그처럼 쉽게 시대적인 산물로 간주할 수가 없을 것이다.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많은 신앙인이 의외로 간단하게 자신들의 신앙적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국가 위정자들에 관하여,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에 관하여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오류와 불신앙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결코 간단하고 짧은 생각 가운데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통찰하는 의미로서,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고 검증되었던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차분하고 건전한 열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섣부른 답변을 남발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12)았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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