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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by Marshall Segal
2020-04-10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빛이신 성자 하나님은 깨지고 캄캄한 어둠의 세계를 뚫고 들어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다. 하지만 그의 백성들은 어둠을 사랑하여 그를 거부했다. 이제 어둠이 골고다 언덕 위의 그에게 내렸다. 우리의 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탄생했고, 대적자들은 생애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걷기도 전에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다(마 2:16).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악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마4:1)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고소했다(마 10:2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 중에 거하였으나, 그들은 그를 잔혹하게 공격했다.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고, 구타했으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조롱했다.이제 십자가에서 그의 침묵은 그들의 반란에 따른 적대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그는 마침내 시편 22편 1절 말씀으로 침묵을 깼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5-46).사방으로 에워싸였다못 박힌 손과 기능을 상실한 폐를 가지고 예수님은 시편 22편 말씀을 붙잡았다. 이 구절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죄 없는 사람의 절박한 말이었다. 이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에워쌈을 당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이 찢어질 듯 부르짖는 힘센 황소처럼(시 22:12-13),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혔다. 바리새인들은 독사가 피를 찾아 나서듯이 어떻게 그를 죽일까 강구했다(마 12:4). 그가 결코 매달려 있을 곳이 아닌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들은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중략]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마 27:42-42)라고 희롱하였다. 이것은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예언된 시편 22편 8절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다.날카로운 이를 가진 개들처럼(시 22:16), 무리는 그를 죽이고 싶어 들끓었다. 그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 질렀다(마 27:22). 빌라도는 “어찜이냐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했다(마 27:23). 무리는 격노한 아이들처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미움으로, 거대한 분노로 표출했다.풀잎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자 무리나 먹이를 짓밟고 있는 야생 황소처럼(시 22:21),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멸시와 고통을 가했다. 그들은 가시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웠다(마 27:29). 죄 없으신 얼굴에 침을 뱉었다(마 27:30). 그들은 손과 발에 못을 박았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시편에 적힌 그대로(시 22:18), 그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마 27:35). 그의 고통을 즐거워했고, 해 같이 빛날 그의 얼굴을 비웃었다.스스로 죄를 지어 심판에 직면하고 있는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멸시하는 말을 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서기관과 무리, 로마 군병들과 강도들의 멸시와 비웃음으로도 불충분했는지,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그가 죽도록 놓아두고 떠났다. 베드로는 예수를 안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격렬하게 부인했다(마 26:70). 나머지 제자들은 두려움에 모두 도망쳤다(마 14:50). 예수님은 사방으로 에워싸였다. 이제 그는 들소와 개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놓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위협은 그가 감내해야 하는 진노, 위로부터 오는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고 쓰고 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다른 모든 슬픔을 삼켜버릴 만큼 너무나도 큰 슬픔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타락한 인류의 잔학 행위를 싫어하셨는데, 이제 이에 대한 적대감이 마침내 아들에게 엄습했다.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 사도들은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라고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했을 것이다. 창세 전에 이 참혹한 시간이 있을 것이 기록되었다(계 13:8). 역사의 모든 순간은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죄 없는 어린 양 학살의 순간으로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고난을 알고 있었지만(마 20:17-19), 그것이 고통을 줄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가 겪은 괴로움의 깊이를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십자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말씀우리는 시편 22편을 예수님이 버림받는다는 선언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1절을 외치실 때, 그는 그 시편이 어떻게 끝나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윗 왕도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느꼈을 때 이렇게 말했다.“[여호와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그리고 두 구절 뒤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 22:26)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1절의 무게를 알고 있었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통치할 것을 말이다. 죄로 인해 죽었으나 다시 살아 아들로서 보좌에 앉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이루었다히브리서 저자가 피로 물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받은 영광의 왕관을 보았을 때, 그는 시편 22편을 인용했다.“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0-12).예수님이 시편 22편 1절을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때, 그는 그 노래를 언젠가 마저 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했을 때는 영원한 왕국 건설을 막 시작했을 때다. 그때 그는 첫 열매를 맺기 전에 시작된 전쟁을 마치고 있었고, 그의 영원한 왕국을 위한 서문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그리고, 시편 22편이 예언했듯이(시 22:30-31), 그가 무엇을 이루셨는지 항상 이야기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e Was Forsaken by the Father: The Horror of Good Friday번역: 정은심
시편22편
예수님
골고다
곤고한
복음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
by 김은득
2020-04-09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어느덧 한국은 선거철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더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그런 리더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PA)의 설립자, 그레샴 메이첸(J. G. Machen)은 미국에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참된 기독 정치인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We pray God that he would give us an American Abraham Kuyper – a true Christian statesman…”). 정통 장로교회 교인들(Orthodox Presbyterians)이 메이첸을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그의 기도가 실제로 응답된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을 인용한 것은 우리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저와 메이첸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카이퍼는 사실 제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형 아브라함 카이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시급한 것은 교리적 순수함(dogmatic purity)이 아니라 공공성(publicity) 회복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웨스트민스터 출신 신학자와 목회자가 즐비하다고 들었습니다. 메이첸이 제 강연의 일부를 인용했을 때 무엇을 강조했는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의 책, 칼빈주의 강연을 읽어보신 분들의 예상과 달리, 혹은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메이첸은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Calvinism as Worldview)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이첸은 자신과 팔로워들의 상황에 걸맞게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주의 교단과 신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장면은 제 본연의 모습과 다른 미국식 아브라함 카이퍼를, 더 나아가 미국식 개혁주의의 특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저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그저 교단이나 신학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일종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세계관(Weltanschauung, world-and-life view)이라는 것은 사실 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착안하고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유행하게 된 용어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은 개개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초월적 세계관이 우세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유럽 전체를 하나 되게 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세워진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정치의 영역에서 프랑스 혁명을, 학문의 영역에서 자연과학 혁명을, 사회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끌어내면서 유럽인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지배적인 시스템이 됩니다. 또한, 세속화 과정(secularization process), 즉 현대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분화 과정(social differentiation)은 공적 영역(public spheres), 특히 정치와 학문의 영역에서 더 이상 유신론적 사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신앙과 종교는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신념과 견해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니, 유신론적으로 삶의 영역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만큼 구시대적이며 미신적인 것도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회적 발달은 종교라는 미몽에서 현대인들을 깨어나게 하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가운데, 저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소위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주체적인 삶과 객관적인 세상의 실재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방법론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다양한 삶과 세상의 실재들을 유기적이든 혹은 기계적이든 하나 되게 연결하는 원칙으로 조직화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원칙으로 발달(development) 개념이 있는데,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진화(evolution)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진보(progress)로 통용되었습니다. 물론 세계관적 방법론이 가지는 환원주의적 경향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다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면에서, 모더니스트들의 기획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이 경험한 세상의 변화들, 아니 혁명(Revolution)으로 묘사되는 급진적 변화들(그것이 산업 혁명, 과학 혁명,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 혁명 등 무엇이든지 간에)은 누군가의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왜 그토록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세계관이라는 정의에 해당할까요? 세계관에 해당한다면 적어도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관계들의 문제(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관계)나 다양한 삶의 영역에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관성을 가진 설명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원칙을 통해 위의 설명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세계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모더니즘은 제 모국 네덜란드에서도 신학(종교)에서부터 정치, 학문, 예술 등 전체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더니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정책들, 특히 무신론적인 교육 정책(예를 들어, 가치 중립을 근거로 무신론적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에만 국가가 재정지원을 하는 정책)은 유신론적 관점을 가진 학부모들과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의 양심에 큰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든지 간에,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침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신자라는 정체성이 어떤 성이나 인종, 지위, 민족 등에서 획득하는 정체성보다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 모국에서는 대다수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개혁주의 성향의 민중들이 부유한 엘리트 중심의 모더니즘 신봉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이렇다 할 사회 정책적 보호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은 제가 첫 번째로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 최고의 대학에서 모더니즘 신학을 배운 제가 사회와 경제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발투스(Baltus)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표현되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그 세계관을 체계화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 회심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개혁주의 성향의 대중들을 대변하기 위해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하부문화의 소셜 네트워킹(언론 기관과 정당, 대학교, 교단, 교원/노동조합 등)을 조직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은 제 모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교리나 교단의 신학이 아니라, 세계관으로서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작부터 반정립적(antithetical)이며, 전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성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네덜란드는 일렬종대로 획일적으로 심은 튤립만 있는 꽃밭이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경쟁하는 꽃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구조화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체의 확신으로 경쟁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신학적 범주를 따라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 over all spheres of life)을 칼빈주의의 중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 중심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영역 주권, 예정, 일반은총 등)들을 가지고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통해 행사됩니다. 가령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리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아름다움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의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는 신론이나 구원론에 속했다면, 저는 예정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중재자 없이 어떻게 한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각자가 가진 양심의 자유를 따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 확장된 정치적 자유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성경과 칼빈에게서 발견한 일반은총 교리를 통해 신자들이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왔습니다.최근 몇몇 학자들이 공공신학을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거나 공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로 해석한다면, 바로 제가 세계관으로 제시한 칼빈주의가 일종의 공공신학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더니즘의 방법론, 즉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론의 활용으로 인해 등장한 신칼빈주의라는 용어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혁파 대중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다양한 세계관과 경쟁하며, 특히 획일적인 세속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에 대항해 싸우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제가 네덜란드에서 성취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의 성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메이첸과 미국식 개혁주의와의 비교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일 저와 같은 리더십을 한국 교회에, 그리고 한국 정치에 허락하신다면 그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팔로워들이 세상을 등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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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승수
2020-04-08
1945년,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라는 강연에서 최초로 언급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는 표현은 그 강연 제목처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가 진리의 기초로 놓은 방법적 회의,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어거스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말의 오마주이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근대, 현대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구조를 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마음만이 계시의 빛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간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의식을 수납처로 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우리 인식이 오류를 범하더라도 계시를 대면해서 인간의 자아가 드러난다. 이것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의 인식론적 기초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으로 나눈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연계는 근대와 현대에 들어서 무너지고 만다. 앞서 언급했던 데카르트의 오마주는 계시를 걷어낸 채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자기동일성을 확장해서 만들어낸 세계였다. 데카르트 당시만 해도 스콜라적인 구조가 신학과 과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세계관은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이란 구조를 띠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콜라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해석으로 본질은 신을 내재하는 관념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실존을 말할 때, 실존은 “밖에 서 있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무한하신 분, 곧 신의 밖에 서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사르트르는 데카르트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우주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성경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 그리고 그 아래로 지하 세계의 구조를 지닌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사야 42장 5절, 44장 24절에서 땅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 히브리어 동사 ‘라카(רקע)’는 ‘두드려서 넓고 편편하게 펴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에 비해 하늘은 둥글다고 믿는다. 예컨대 시편 104편 2절에 하늘을 휘장처럼 친다는 표현은 평평한 땅 위에 하늘이 텐트처럼 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사 40:22). 그뿐 아니라 땅은 음부 위에 놓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바다 위(시 24:2, 136:6)나 빈 공간(욥 26:7) 위에 달아 놓으신 것으로 묘사하며, 땅에는 4개의 귀퉁이가 있다고 생각했다(사 11:12, 겔 7:2). 땅의 기둥들(욥 9:6, 시 75:3), 주초(시 104:5), 기초(삼하 22:16, 잠 8:29) 등의 표현도 이런 이해를 반영한다. 창조세계 전체는 하늘의 하나님과 통일적 전체로 이해되는 구조를 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판테온 돔의 천장에 구멍을 하늘의 눈(oculus)이라고 부른 것은 하늘과 땅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건축물에 담긴 고대인의 세계관은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하는 세계관과 같았다. 이 세계관은 12세기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주석을 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Περὶ οὐρανοῦ)의 라틴어 번역판에서 최초로 사용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란 용어에서도 확인된다. 아베로에스의 능산적 자연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소산적 자연은 피조물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렇게 창조주와 자연, 초월과 자연은 실질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렇게 하나로 엮여 있는 세계관을 하고 있다.이런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우주 이해와 신학 이해는 근대에 들어 중력이 발견되면서 큰 변곡점을 맞이했다. 물리학과 미적분학의 발달이 가져온 중력의 발견은 스콜라 신학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계시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지식의 기초로 인간의 의식을 확립한 근대의 데카르트 방식은 신학에서도 변곡점을 불러왔다. 코케이우스는 대표적인 데카르트주의를 채택한 신학자였다(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1’, 116-117). 신적 작정을 중심으로 이해하던 위로부터의 방식은 중력의 체계에 의해서 다양한 중심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스콜라적인 체계는 불가피한 변화에 직면했다. 코케이우스는 최초의 성경신학자로 성경 전체를 언약으로 관통해서 이해했다. 그의 신학은 스콜라적인 전통신학과 대조를 이뤘으며 조직신학의 작정에 따른 이해와도 대조를 이뤘다. 언약의 실체(substantia foederis)는 언약의 경륜(oeconomia)이란 이해를 담게 되었다. 이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런 데카르트의 방식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확보된 세계는 전체주의의 문제를 파생시켰다.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에 이르는 독일 철학은 전체주의의 문제를 낳았다. 그것이 결국 나치즘을 불러왔는데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된다. 이것이 그의 나치 참여의 시작이었다. 전체주의가 빚은 비윤리성을 러시아계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지적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제3성찰, 곧 신의 명증성으로부터 타자의 관념을 도출했다. “타자는 나의 일부일 수 없다. 타자는 사유 될 수도 없다. 그는 무한이며, 무한하게 인식된다. 이 인식은 사유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으로 도출된다.”*라고 했다. 타자 인식이 바로 우리 윤리의 출발점이다.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윤리적이게 만든다. 더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계시하시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참된 기독교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웰스가 지적한 윤리 실종도 이런 자기동일성의 무한 확장이 빚은 계시의 결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어거스틴 신학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하며 칼뱅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이라는 인식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______________* Emmanuel Levina,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Duquesne University Press, 2001).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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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실종
코로나 시대 교회 리더들을 위한 긴급 제언
by Justin Taylor
2020-04-07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 TGC, Christianity Today 등 에디터로 활동하며, 팀 켈러와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를 공저했다_편집자 주)가 기독교인 지도자라면 모두 다 꼭 읽었으면 하는 아주 훌륭한 글을 썼다. 열 명에서 천 명 사이의 사람을 이끄는 공동체 리더에게는 지금과 같은 비정상의 시기야말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 글은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상황을 맞은 기독교 리더를 위한 가이드이다. 크라우치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맞은 미국에서 우리는 이제 다음의 근본적인 두 가지에 있어서 “가능성의 지평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첫째, 바이러스 전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방식(norms)을 바꿔야 한다. 코로나19에 관해 가장 믿을 수 있는 공공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변화라는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변화를 조기에 구현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전염병을 다룰 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는 언제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적용할 때만 가능하다. 둘째, 사회적 에너지를 불안과 공황이 아닌 사랑과 준비로 바꿔야 한다. 이 위기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소규모 공동체를 강화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두려움을 줄이고 믿음을 키우며 자기 보호에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할 때만 가능하다. 지난 한 달 동안 크라우치는 대중에게 공개된 코로나19에 대한 의료 및 공중 보건 정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의 에세이는 다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기독교 지도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코로나19에 관한 개요2.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메시지 목록과 가장 해로운 메시지 목록3.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대규모 또는 중간 규모의 교회 예배, 그리고 가정에서의 소그룹 모임에 관한 권고4.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몇 주 안에 내리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미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을 드러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시 한번 부흥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몇 가지 고찰지금부터 중요한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나는 크라우치의 글을 전체 다 읽어 보기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1.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바이러스 확진자가 보고되지 않았다고 해도 어디에나 이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은 일반 독감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무엇보다 노인과 기저 질환이 있는 취약한 집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이다. 이 바이스러에 감염된 많은 사람은 경미한 증상으로 끝나거나 심지어 증상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위험이 커진다. 감염되었는데도 증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증상자”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취약한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바이러스가 주는 단순한 사망률을 넘어 심각한 위험이 존재한다. 건강 관리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 코로나19 및 기타 원인으로 인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 앞에는 광범위한 재정적 어려움과 전 세계적 경제난이 기다리고 있다. 2.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가능성의 지평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가, 어떻게 말을 하는가, 심지어는 말을 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그들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리더로서 중요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잘 쉬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해야 한다. 개인적인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친구로서,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성도로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두려움을 내어쫓는 진정한 영적 권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고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생각, 몸에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한다.이런 기초가 되는 자세를 근거로 크라우치는 다음과 같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기독교 리더가 줄 수 있는 가장 해로운 메시지ㆍ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또는 “당신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ㆍ 특히 두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 지금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기독교 리더가 줄 수 있는 가장 도움이 되는 메시지ㆍ “우리가 지금 행동 방식을 바꾸는 건 다 사랑 때문이야.”ㆍ “어려움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ㆍ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해야 한다. 3.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크라우치가 보낸 업데이트를 참고하라: 2020년 3월 16일에 있었던 대통령과 연방 보건 당국의 오후 기자 회견 시점에서 볼 때, 2020년 3월 12일 또는 그 이후에 적용할 예정이었던 지도자들을 위한 조언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제한 사항을 준수하도록 돕는 데는 여전히 하나의 모델로서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최대 열 명이 모이는 장소에 관한 조언 등). 나는 더 이상 업데이트는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지도자는 직급을 막론하고 모든 공무원의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다음 규칙만 준수한다면 열 명 미만의 모임은 여전히 가능하다. ㆍ 아픈 사람이 없거나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경우ㆍ 회의 전후에 모임 장소를 소독하는 경우ㆍ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최소 20초 이상 철저하게 손을 씻는 경우ㆍ 음식과 음료는 개별적으로 가져오는 경우ㆍ 서로 다른 가구 구성원과 또 각자의 소지품 간에 가능한 한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경우4.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ㆍ 이 전염병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ㆍ 이 전염병이 초래할 단기적 경제적 비용은 상당하겠지만, 과거의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그 피해는 궁극적으로는 제한적일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둔 확신이다.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가 이 우주의 구속주이자 운영자라는 믿음과 더불어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시려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기독교인의 이런 소망은 단지 우주적으로 그치지 않고 개인적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은 실로 놀라운 말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내가 주님의 것이기에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이 위기가 주는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는 이 문답을 다시 배우고, 우리의 자녀들과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답을 가르치고, 이 문답의 내용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리더십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요한 소망:1. 우리는 위기와 두려움 가운데에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맞고 있다.2.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아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서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곳, 서로를 보살피고 돌보는 곳이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3.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제자도,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새롭게 되는 모습을 목격할지도 모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Guide for Christian Leaders in the Time of Coronavirus번역: 무제
코로나19
사랑과소망
진정한희망
교회지도자
리더십
목회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
by John Piper
2020-04-0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9-10).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그분은 비천한 짐승에 올라타 성읍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곧 어떤 일이 닥칠지를 알고 계셨다. 즉 원수의 세력이 득세하여 자신을 배척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한 세대 안에 예루살렘조차 완전히 파멸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 그들은 “보살핌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the stumbling stone)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당하셨다. 바로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보셨다.왕이 우시다이에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눈먼 상태를 보시며 다가오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우셨다.당신이라면 이 눈물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나는 이를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tears of sovereign merc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그분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운 주권자이신 그분만 예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자비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비로소 그분과 함께(with him), 그분처럼(like him),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for his glory) 자비로운 마음을 품게 된다.그러므로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 함께 경배해야 한다.자비로운 주권을 생각하며 경배하라우리에게서는 상반되게 나타나는 여러 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이들과 다르신 그분을 경배한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바는 이렇다. 곧 최고 통치자의 절대 주권 아니면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비로운 주권과 주권적인 자비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완전한 상태에 어떤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리더라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우리가 종려주일을 소개하는 본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주권을 묵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첫째로, 당시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 있는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눅 19:37).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며 그 몸을 고치신 적이 있다. 또 눈먼 자로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한 자의 귀를 열어주셨으며, 못 걷는 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하시자 그들이 복종하며 떠나기도 했다. 나아가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거니셨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그분의 입성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빌라도가 물러가고 로마 군대도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그분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둘째로,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예수님은 왕이지만 일반적인 왕이 아니셨다. 그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신 왕이셨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굳건한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 그분임을 알고 있었다.“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영원한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통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와 먼 은하계까지 두루 미친다. 또 그분 앞에서는 미국이나 ISIS 혹은 그 어떤 정치 집단이라도 한 줌의 모래나 사라지는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셋째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며 찬양하는 군중의 소리를 바리새인이 멈추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그 이유는, 예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분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결국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자신이 취하셔야 할 영광을 반드시 취하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기쁨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다.실패가 아닌 성취를 보라그럼에도 예수님이 보이신 눈물을 지적하며 그분의 주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까닭은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 결국 실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백성이 구원받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완강하여 그분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끝내는 십자가 처형에 그분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로써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주권을 반대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그분은 돌들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예루살렘 백성으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저들의 반대와 핍박, 그리고 자신을 죽인 행위까지도 다 받아들이셨다. 이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이 세우신 계획의 실패가 아닌 성취를 이루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즉 계획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9:31-33).배신과 희롱, 능욕과 침 뱉음, 채찍질과 살인, 이 모든 일이 다 계획되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완강하게 거절하며 불신과 적개심을 품고 예수님을 대적한 일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계획의 일부일 뿐이었다.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이미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이렇듯 하나님은 저들이 굳은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전능과 자비를 함께 보이시다하나님의 자비는 주권자가 베푸시는 자비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종려주일에 깊이 묵상해야 할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멸망을 앞둔 완고한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비가 깃든 눈물을 보며 마치 흔들림 없는 주권에 상반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판단이다. 예수님은 슬픔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으셨고, 또한 흔들림이 없는 주권 가운데서도 슬퍼하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로운 주권자만 흘리실 수 있는 눈물이었다.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분의 주권적 능력은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상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자비’와 ‘전능’ 같은 속성들이 서로 하모니를 이룰 때,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말이다(“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비로우신 분의 능력이며 또한 그분의 자비가 전능하신 분의 자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찬양한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종려주일에 그 진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기를 소망한다. 곧 주권자가 흘리신 눈물과 그분이 이루신 자기희생적 사랑, 그리고 고난주간의 모든 여정을 홀로 걸어가신 그분의 순종을 묵상하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이 주간에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며 찬양을 올릴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 진리로 인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마침내는 더욱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타인의 필요를 채워 주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avior’s Tears of Sovereign Mercy번역: 장성우
눈물
찬양
경배
군중
성취
예수님
묵상
순종
복음
십자가
부활절을 앞두고 부르는 찬송들
by Bobby Gilles
2020-04-05
부활절을 앞둔 회개의 시간이다.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이 죄의 저주 아래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고백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간을 지혜롭게 잘 보내면 성도가 부활 소망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큰 기쁨으로 누릴 수 있음을 목사와 찬양 인도자들이 돕는 것은 어떨까! 아래에서 소개하는 곡들을 개인 예배 시간이나 공예배 시간에 사용하면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곡들을 부활절을 기다리며 부르는 찬송으로 생각해보라. 이 세상 험하고(Jesus Paid It All) 이 찬송은 아이들 찬양처럼 단순하지만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고자 하는 깊은 진리, 즉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를 잘 전달해준다. 이 기간의 깊은 은혜가 1절에 잘 등장한다.“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나를 붙드시는 그의 사랑(O Love That Will Not Let Me Go) 조지 매티슨(George Mathison)이 쓴 이 찬송은 우리의 “곤비한 영혼”과 “꺼져가는 불꽃”을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불타오르는 햇빛”과 대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찬송을 부르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돕는다. “고난 중에도 내게 기쁨 있으니주를 향해 내 마음 닫지 아니하네폭우 속에도 내게 무지개 주시니주 약속 헛되지 않음을 아네”그 아침이 오면 눈물 그치리 내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토퍼 마이너(Christopher Miner)가 곡을 붙인 ‘지울 수 없는 은혜’(Indelible Grace) 버전을 좋아한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알버트 피스(Albert Peace)가 작곡한 전통 멜로디에 친숙하다면 그걸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같은 곡을 종종 다른 멜로디로 불러보면 마치 새로운 곡을 배우는 것 같은 느낌으로 원곡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How Deep the Father’s Love for Us) 스튜어트 타운엔트(Stuart Townend)와 키스 게티(Keith Getty)는 신학적으로 탄탄한 가사로 된 많은 현대 찬송들을 썼다. 이 곡을 부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 장소에 나도 성난 군중으로 서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에 달린 그를 보라그 어깨에 멘 내 죄그를 조롱하는 내 부끄러운 목소리거기 모인 무리 속에서 들려오네”아마 키스 게티와 아내인 크리스틴 게티(Kristyn Getty)가 함께 연주한 버전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신의 교회가 수용적이라면, 마르스 힐(Mars Hill) 교회 찬양팀인 케노시스(Kenosis)가 연주한 현대 프로그레시브 락 버전을 추천한다. 오! 그 보혈(O the Blood) 게이트웨이 교회(Gateway Church)가 내놓은 이 현대 찬양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이 곡에는 성가 식으로 부르는 후렴부가 있다. 가사의 각 절은 우리 죄, 그리고 예수께서 그 죄를 위해 지불하신 대가가 무슨 관계인지 보여준다. “놀라운 은혜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날 위해 피 흘리셨네”주의 보혈로 나를 씻으소서(Let Your Blood Plead for Me) 지금 섬기는 교회의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 목사와 소전(Sojourn)교회 찬양팀 리더인 제레미 퀼로(Jeremy Quillo)가 나와 함께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의 찬송가를 편곡했다.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혀진 이 아름다운 곡을 교회에 다시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율법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왓츠가 아름다운 시로 정말이지 멋지게 표현했다. 교회에서 이 곡을 부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의 영원한 율법완전하고 거룩하며 의롭고 순전한 그 법을 보기 전엔내 죄가 얼마나 큰지 몰랐네”찬양 중에 눈을 들어(Praise Is Rising, 원제: 호산나[Hosanna]) 폴 발로쉬(Paul Baloche)와 브렌튼 브라운(Brenton Brown)의 이 찬양은 종려주일 예배용으로 좋은 곡이다. 부활주일 일주일 전에 오는 종려주일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날인데, 이 기쁨의 노래는 거기에 꼭 맞는 곡이다. 뭔가를 기쁘게 누리는 곡이 필요할 때 이 찬양을 추천한다. 예루살렘 입성 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이 결국 며칠 뒤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드리셨네(He Never Said a Mumblin’ Word) 최고의 흑인 영가들처럼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드리셨네”에도 많은 반복구가 등장한다. “한 마디도, 한 마디도, 한 마디도” 부분을 부를 때마다 우리 주께서 목숨을 살려달라 애원하며 십자가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기간을 보내듯 그리스도께서도 시간과 이 땅에서의 그의 사역 기간을 보내신 것이고, 자신의 삶을 우리를 위해 드리실 것임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결코 잊지 않으셨다. 비프로스트 아트(Bifrost Art) 버전은 조용한 묵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좋다. 회중들이 따라 부르기도 편하다.내겐 그리스도 뿐(All I Have Is Christ)‘소버린 그레이스 교회개척 네트워크’(Sovereign Grace Churches)에서는 지난 십여 년 기간 동안 풍성한 새 찬양곡들을 내놓았는데, 조던 카우플린(Jordan Kauflin)과 그가 이끄는 Na 밴드(Na Band)가 쓴 이 곡은 그들이 낸 곡 중에서 가장 좋은 곡으로 평가 받고 있는 곡이다. 소개한 여러 찬양곡들의 핵심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셔야 했는지를 묵상하는 것, 즉, 우리의 약함과 타락함,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에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다.“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거부하고”또한 ‘구원 이후’ 선한 삶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능력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선언한다.“당신의 명령을 따를 힘, 결코 내게서 나오지 못하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odern Lenten Hymnal번역: 이정훈
영성
예배
찬송가
이세상험하고
부활절
보혈
예배자
십자가
사회적 거리두기와 새로운 가족
by 김선일
2020-04-04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는 교회에도 엄청난 충격파를 주었다. 모여서 드리던 예배가 온라인 등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었다. 주일 공예배 외 모든 집회는 중단되거나 역시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들은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황이기에 모두가 당황스럽기만 하다. 아무도 앞으로 진행될 일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뜻밖의 흥미로운 경험담도 전해진다. 모처럼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교인은 지난 몇 주간 주일마다 분가했던 형제자매들이 부모님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물론 아무리 가까운 가족끼리 모인다고 해도 신체적 거리 두기와 손 소독은 철저히 한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니던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어느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가? 추측하건대 인기 있고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아니면 서로 돌아가면서 자기 교회의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은 신자가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정상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일시적인 비정상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가족 예배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앞으로 사회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하게 될 때 교회의 예배와 각종 모임이 어떻게 될는지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이전으로 완전히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다. 전 세계인들이 몸소 경험한 접촉에 대한 두려움은 일종의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으로 각인되어 우리가 맺는 사회적 모임과 관계들에 영향을 줄 것이다. 온라인 프로그램은 예배뿐 아니라 양육에도 응용되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앞으로 새로운 기준이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적 갈망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할까? 우선 가족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주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사회적 거리가 넓혀지는 대신 가족 간의 거리는 좁혀지는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가족이 더 많이 모인다고 해서 행복을 더 많이 느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행복과 사랑의 원천이 되어야 할 가족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책임과 희생, 그리고 불평등한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가족은 여전히 중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심히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엄한결 외, ‘2020 트렌드노트: 혼자만의 시공간’). 가족은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정신과 육체를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골 깊은 갈등과 원망이 가족 안에서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혹자는 요즘 많아지는 1인 가족과 비혼자, 결혼 및 출산 포기 등의 현상은 기성세대가 좋은 결혼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김용섭, ‘라이프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스위트홈의 기대는 많은 가족에게 그저 신기루일 뿐이다. 조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3국 중에서 한국인의 가족 가치는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정생활 만족도는 가장 낮게 나온다고 한다(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한국인들에게 가족의 비중은 여전히 높다. 그동안 가족이 모든 사회적 돌봄을 해결해주는 가장 신뢰할만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이 필요하다. 가족의 형태는 다변화되고 있지만,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터전으로서 가족은 늘 필요하다. 전통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족의 보호막이 허물어지고 있다. (전 연령에 걸친) 1인 가족이나 비혼의 증가로 인해 상호 보살핌을 경험할 대안적 가족의 필요가 점점 커지고 있다. 대안 가족은 단지 동거가족만이 아니라 셰어하우스나 소셜 클럽과 같이 생활방식의 공유나 규칙적 교제 등으로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생물학적 가족처럼 신체적으로 끈끈하지는 않지만,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느슨한 연대의 사회적 가족은 앞으로 더욱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사회적 가족의 수요가 많아지는 때,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 됨을 실험하는 것은 현실로 다가온 선교적 과제가 아닐까? 사실 초기 기독교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적 가족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연 가족을 넘어서는 믿음과 순종의 가족(마12:46-50)을 제시하셨고, 바울은 교회들을 향한 편지에서 자신과 성도들의 관계를 가족적 유대감으로 표현하였다.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공동체 사상’이란 저서에서, 이는 단순히 의례적인 친밀감의 표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가족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복음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한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더 나아가 세상 속에서 변화된 관계로 이어지게 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들이 대안적 가족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에게는 먼저 가족을 돌보는 일이 중요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먼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로버트 뱅크스는 바울의 두드러진 공헌은 기독교인들의 세상에 대한 외적인 책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내적 역학(inner dynamic)에 대한 가르침에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공공성을 갖느냐 하는 것보다 교회가 어떠한 공동체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심각한 양상으로 번지면서, 과거 로마제국에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 초기 기독교 교인들이 행했던 구제와 돌봄의 교훈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전염병이 퍼지면 이교도들은 그들의 가족일지라도 감염된 자들을 버려두고 도망갔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돌봐주었다. 또한 가족을 대신해서 죽은 자들을 장사하기도 했다.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 발흥’의 내용을 기초로 살펴보면 이러한 공공적 선행은 계승해야 할 유산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초대교회는 먼저 교회 내의 구성원들이 가족적 공동체로서 상호 돌봄과 위생의 공동생활을 견지해왔다는 점이다. 전염병이 퍼졌을 때, 가족마저 버리고 가는 이교도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의 서로를 향한 헌신과 배려가 더욱 빛을 발하여 훨씬 높은 생존율을 보여주었다. 높은 생존율은 모두에게 기적으로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료된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사회적 관계망을 대치하는 새로운 가족관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기존의 공적, 사회적 집합체였던 기독교 공동체에 새로운 도전이 주어졌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밀집된 장소에서 낯선 이들과 만나는 것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온라인을 통한 신앙 프로그램이 많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가족적 공동체의 열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식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안전하고, 진정한 관계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적 빈곤감에 시달릴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대안 가족을 향한 갈급함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절규(행16:9)에 비견할만하다. 기독교 사역이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 진정한 대안 가족, 즉 두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사회적 가족 형성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면, 이는 분명 그 어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복음을 힘 있게 나누는 발판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 가족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을 충만히 경험하고, 외인을 향하여 지혜와 은혜 가운데 말하며(골 4:5-6), 단정히 행하고(살전 4:11-12), 선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벧전 2:12) 돌리는 이들이다. 이는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불문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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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시대 던져야 할 두 질문
by Joe Carter
2020-04-03
지난 며칠간 워싱턴주 주지사는 시애틀(Seattle) 지역에서 250명 이상 규모의 모임을 금지했다. 켄터키주 역시 교회들의 주일예배 모임 자제를 부탁했으며, 뉴욕주 주지사는 뉴로쉘(New Rochelle) 지역 근교 1마일의 감염 통제를 위해 주 방위군(National Guard) 투입을 요청했다.미국 전역에 걸쳐 학교와 대학들은 문을 닫고 의회에서는 상하원 의원들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고 있다. 주식 시장은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파장은 가장 작은 유기체인 바이러스 하나로 인해 시작되었다.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실제 감염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이러스로 인해 미국 전역을 불확실성(uncertainty)으로 감염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 불확실성의 종류불확실성이란 불완전한 정보나 미지의 정보를 토대로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내리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다. 1921년에 출판한 책 ‘Risk, Uncertainty and Profit’에서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는 불확실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잠재적인 결과를 미리 아는 경우,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나올 확률도 아는 경우이다.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을 “위험”(리스크, risk)이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불확실성은 측정하거나 그 양을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잠언 27장 1절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한다. 인간 활동의 많은 부분에 있어 단순한 위험, 즉 측정 가능한 종류의 불확실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는 것은 부상이나 사망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자동차 사고의 불확실성, 다시 말해 위험은 수량화할 수 있고 그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낮기에 수많은 사람이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운전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불확실성은 수량화할 수 없기에 우리를 마비시키고 두렵게 만들어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 불확실성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한 국면이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 삶에서 지혜롭고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의 힘과 책임감이 커질수록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더 복잡해지고 더 어려워지며, 또한 더 많아진다. 분명한 이해를 위해 질문했던 다윗 왕다윗 왕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늘 사람들의 사연과 요구를 듣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사무엘하 전반에 걸쳐, 우리는 다윗이 뭔가를 결정할 때 전혀 복잡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간단한 것, 즉 분명한 이해를 위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다윗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또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삼하 21:2–4)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질문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윗이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복잡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질문을 통해 정보를 얻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미국의 경영 전문가인 W. 에드워즈 데이밍(W. Edwards Deming)은 “자료 수집의 최종 목적은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뭔가를 추천하고자 할 때 이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복잡한 질문보다는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료를 수집하고, 우리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데 있어 더 도움이 된다.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다섯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지 말라개인적이든 전 세계적이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갈 때는 너무 먼 미래까지 아우르는 결정을 삼가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고, 지금이 우리의 영적인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가정해보라. 광범위하고 복잡한 질문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화는 무엇일까?”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이번 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은 질문을 통해 초점을 좁혀갈 수 있다. 위의 경우 인생 전반의 문제에서 한 주(week)로 좁힐 수 있었다. 우리 문제에 대해 소규모의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이번 주에는 뭘 할까?”처럼 작고 즉각적인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질문을 던지면 “내 삶을 어떻게 바꾸지?”와 같이 더 큰 질문에 답하는 법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번 주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방법은 불우한 아이들을 돕는 것이라 결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더 큰 변화로 이끌 수도 있다. 다른 아이들을 일정 기간 맡아 양육하는 위탁 부모(foster parent)가 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겠다.2. 영향을 주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결정하라정보 수집의 주요 목적은 의사 결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의견 수렴을 위한 정보와 의사 결정을 위한 정보를 혼동하곤 한다. 한 예로 합당한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나머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정말로 국가적 재난인지 아니면 언론이 괜한 공포감을 부추기는 것인지 알아보는 데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SNS에서 사람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데에는 그런 정보가 도움이 되겠지만, 우리 각 개인이 어떻게 이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 도움이 되는 질문은 “공포감에 빠지지 않고 바이러스가 더 퍼지지 않도록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질문의 범위를 이런 식으로 좁혀가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데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평상심 유지하기, 사람 많은 곳 피하기, 손 씻기 등에 이르는 소소한 개인적 행동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3. 지혜롭게 행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지 결정하라자신에게 던져야 할 가장 단순한 질문은 “슬기롭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이다. 잠언 13장 16절은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슬기로움(prudence)은 첫째, 주의 깊고 지혜로운 사리판단, 둘째, 경솔하게 행하거나 말하지 않음, 셋째, 주어진 달란트와 자원을 잘 활용함, 넷째,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다루는 지략과 지혜를 수반한다. 불확실성 앞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슬기로움의 네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지식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4. 불확실성으로 인해 바보가 되지 말라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미래를 위한 저축의 일환으로 주식 시장에 투자한다. 투자 전략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저점에 매수하고 고점에 매도하라”나 만기보유(buy-and-hold) 같은 이미 그 유효성이 증명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원칙들을 자랑스레 말하곤 한다. 하지만 퇴직 적립금을 깨서 투자한 주식의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대규모 손실이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식 시장에서 빠져나가려고 한다.그렇게 경솔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바뀐 게 뭐지?”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해야 한다. 내 투자 원칙이 바뀌었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 짧아졌나, 다시 말해 현금이 필요한 시기가 더 빨리 닥친 것인가? 단기 불확실성의 정도 외에는 바뀐 것이 없다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5. 작은 질문을 큰 질문 두 개에 연결하라불확실성을 핑계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명령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하는 작은 질문은 궁극적으로 큰 질문 두 개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 이 결정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가? 둘째, 이 결정이 나의 이웃 사랑을 담아내는가?두 질문은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함께 섬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 그리고 그의 피조물 모두에게 다윗 왕이 했던 그 작은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Asking Small Questions in an Age of Uncertainty번역: 이정훈
불확실성
신뢰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의사결정
문화
사회이슈
‘이단’에 대한 ‘관원’의 역할
by 장대선
2020-04-02
현대 우리 사회는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의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주변국만 보더라도 여러 대에 걸쳐서 가업을 잇는다거나 전통과 역사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인식과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은 미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 또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개신교 선교의 역사가 이미 백 년을 넘어선 시점이지만, 정작 그 기원과 전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O. J. Brown)은 이단에 관한 그의 책 ‘Heresies: the image of Christ in the mirror of heresy and orthodoxy from the apostles to the present’에서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영속된 옛 관습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 종교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서 전통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인들이 수 세대 동안 전해준 첫 번째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경이다. 두 번째는 간결하고 신비로운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지금 우리가 정통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전통적 이해를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헤롤드 브라운의 설명에서 보자면 한국의 기독교는 가장 중요한 성경은 비교적 잘 전달 받았으면서도, 다음으로 중요한 “성경 구절을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성경 구절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단을 정의하고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근거를 제공한다. 오랜 시간 정립하여 형성된 정통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들이 바로 ‘이단’(Heresies)이기 때문이다.이단의 문제는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다. 다원화된 현대적 사고와 가치관 가운데서는 마치 ‘양심수’(prisoners of conscience)의 경우처럼 법으로 제한할 수 없는 자유로운 양심의 문제로 이해하는 실정이다. 자신의 윤리적·사상적·정치적 신념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어야 함과 같이, 종교 혹은 신앙의 문제 또한 개인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입장이나 견해의 차이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옛 라틴의 격언인 “Corruptio optimi pessima est”, 즉 가장 선한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악한 것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통의 교리에서 살짝 이탈하여 벗어나게 된 이단의 문제는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극악한 피해를 주는 심각한 것이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추구한다거나 시한부 종말론에 바탕을 둔 집단적인 격리 생활, 심지어 광신적 집단자살이나 원시 공산제(primitive communal)의 추구 등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단들의 공통적인 양상이기 때문이다.이단은 이미 신약성경 안에서도 언급되었고, 그들을 정죄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사도는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라고 하면서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라고 했다. 이미 사도들의 시대도 이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정죄하여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라고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인 주 후 325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로부터, 나폴레옹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이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있어서까지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이 같은 중요성에 바탕을 두고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부터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종교개혁의 시대를 거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회의는 순수하게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위정자(군주)와 관원들이 함께 주관하는 가운데서 이뤄졌다. 중세 시대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종교적인 권한(jurisdiction)뿐 아니라 사법적인 권한까지도 종교재판을 통해 사용했다. 교회는 군주 혹은 관원들과 긴밀한 협력 가운데서 이단의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사법적인 절차까지 단행할 수가 있었다.그러나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수많은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은,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고집하게 했다. 그로 인해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로 세속군주와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에서도 이미 세속정치의 야욕과 그로 말미암은 분열 및 쇠퇴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봉건적 왕조체제가 붕괴한 이후부터 시작된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원칙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전래한 기독교 신앙이 연방의 연합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며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하지만 세속정치와 종교 사이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현대적인 정교분리의 모범적인 예로 꼽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여기서는 연방정부든 주정부든 공식적인 종교를 가질 수가 없으며 모든 국민은 그가 택한 신앙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의 제헌헌법 또한 이러한 맥락을 견지했다.)의 의도 역시 앞서 영국의 국교회에서 보여준 폐단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을 뿐이지 정치와 종교를 완전하게 분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교를 근거로 개혁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세속정치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로 수정헌법의 바탕인 것이다.최근 몰아치고 있는 우리나라의 코로나19 사태가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한 사법적인 절차가 필요하다고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종교의 문제와 세속정치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서로 관여하지 않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역으로 신천지 이단은 이미 정치권과 상류 사회집단에 줄을 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이번 코로나 사태뿐 아니라 이미 가정파괴와 같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를 주는 그들을 사법적인 절차를 통해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와 세속정치의 적절한 관계의 설정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만일에 세속정치가 종교의 문제에 전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으로만 정교분리 원칙을 이해한다면, 기독교의 이단인 신천지의 문제에 사법적인 개입이 이뤄지는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역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한 이해가 정당화된다면 사실상 신천지와 같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와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 집단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실정법에서 규정하는 심각한 범죄를 자행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기독교 이단인 신천지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기성교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단에 대처하고 있지만,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신천지 이단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하는 경고문을 출입문에 붙여두는 정도의 대처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단의 폐해와 해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나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1578),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파악되는 세속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종교에 관한 관원들의 분명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 제23장은 “국가의 관원”에 관해 3항에서 규정하고 있다.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며,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하고, 모든 신성모독이나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며, 예배와 권징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고 개혁하도록, 또한 모든 하나님의 규례들이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될 수 있도록 적절한 방안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며,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으로서의 책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도 10장에서 “교회의 기독교 관원들의 직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비록 세상 왕과 군주라 할지라도 그들이 경건한 자들이라면, 때로는 그들의 권력으로 경건한 유다의 몇몇 왕들과 신약시대의 여러 경건한 황제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타락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무너진 교회의 모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목회자들을 배치하고, 주님의 참된 예배를 복원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했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이단에 관련한 관원들의 역할까지도 교회가 차지해서 변질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이후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개혁된 교회들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국가의 관원들이 함께 협력하여 이단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제거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의 이단 문제 또한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관원들이 담당할 역할과 영역을 교회 스스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의 경우와 같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이단들의 확장을 차단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교회가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 상황은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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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
제2치리서
초대교회의 사랑이 세상을 살렸다
by Moses Y. Lee
2020-04-01
초대교회라고 역병, 전염병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를 몰랐던 건 아니다. 기독교와 비기독교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초창기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은 기독교인이 질병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앞에 놓고 보여준 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 교회가 취한 태도가 로마 사회에 주는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이어지자 이교도인 로마 황제까지도 이교도 사제에게 불평하며 좀 더 힘을 내서 수를 늘리라고 독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 면이 달랐기에 로마 제국까지 흔들었다는 것일까?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맞아 초대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서기 249년에서 262년, 서구 문명사회는 인류 역사가 손꼽는 끔찍한 전염병(pandemic)으로 황폐했다. 전염병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염병이 극에 달했을 당시 로마에서는 약 5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죽었다. 그 비극을 눈으로 목격한 교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이렇게 썼다. “이 전염병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비기독교인이다.”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를 관찰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비기독교인에 관해서 이렇게 적었다.“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쫓아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거나 아직 죽지 않은 사람까지도 도로에 던져버렸다. 또한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먼지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치명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결코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기독교인이 쓴 기록은 이런 사실을 확인해준다. 백 년이 지나서 율리아누스(Julian) 황제는 전염병 이후 시작된 기독교의 급속한 부흥을 막고자 이교도 자선 단체를 만들어 기독교인이 보여준 선행을 모방하려고까지 했다. 서기 362년에 쓴 편지를 보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헬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급속한 기독교의 성장 원인을 “이방인을 향한 자비, 죽은 자의 무덤에 대한 돌봄, 그리고 그들 삶에서 드러나는 위장된 성결”로 꼽았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썼다. “이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악한 갈릴리인(그리스도인)은 자기네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본다니 말입니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기독교인의 선행 동기에 관해서 의문을 표현하지만, 헬라인의 자선에 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 특히 전염병 기간 중 기독교인이 보여준 수준에 비해 헬라인의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좋은 씨앗, 2016)에 따르면 다 이유가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제들에게 기독교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이교도들에게는 선행을 추구할 이유가 되는 교리적인 근본 또는 전통적인 관습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을 자기 보호, 자기 관리,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픈 사람을 멀리하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기독교인이 보여준 모습은 그와 정반대였다.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전염병은 기독교인에게 ‘교육(schooling)과 테스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이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자세히 묘사했다.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탁월한 자들(the best)’은 그들 자신이 병에 걸리고, 심지어 죽어가면서까지도 고귀한 모습으로 아픈 이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기록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대부분은 끝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보였고,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로지 타인만을 생각했다.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의 모든 필요에 응답했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리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전염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아픈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스도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비슷하게, 폰티우스(Pontius)가 쓴 카르타고(Carthage)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 전기’(Biography of Cyprian)에 의하면,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당시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까지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만 관심을 쏟고 돌본다면 그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이교도 남자 또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선으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친절을 보이고, 자신의 적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렇기에 선은 믿음의 형제들에게만 행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행해야 한다. 이런 봉사가 끼친 영향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1)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를 향해 기독교인이 보여준 희생은 믿지 않는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공동체적인 사랑을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요 13:35). (2) 비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인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초대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인의 사랑에 힘입어서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비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계속해서 씨름하는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로마 제국 당시 비기독교인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초대교회는 두려움 없는 희생적인 봉사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비기독교인이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고 사랑하는 이들까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버렸을 때, 기독교인은 그 전염병 한 가운데로 행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조차도 감내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보여줄 기회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점점 더 커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과연 우리가 초대교회의 자세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패닉 상태의 두려움에 저항해야 한다. 주변에서 점점 고조되는 긴장 가운데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 않고 꺼리는 식당이나 장소를 일부러 더 많이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의료 전문가가 말하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따르는 동시에 우리의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할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집단 히스테리, 그리고 가짜 뉴스에 휘둘리며 나 자신의 건강만을 챙기기보다는 더 큰 공동체와 취약계층의 건강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의료 전문가의 주의사항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계획한 여행이나 행사를 취소해야 할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감염된 거 같으면 자가 격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대가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사람들은 지금을 축제 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의 시간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다.” 디오니시우스는 그가 겪었던 전염병의 시간을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부연할 필요가 있겠다. 디오니시우스는 지금 전염병에 따르는 고통과 죽음을 축하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그는 그런 시련조차도 믿는 이를 시험하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이 엄청난 공포의 시간 중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봉사하는 것, 소망 중에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the Early Church Can Teach Us About the Coronavir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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