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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계속해서 클릭하고 있을까?
by Adam Pohlman
2020-03-19
마침내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를 보낸 나는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SNS를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이곳저곳 클릭을 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불만족의 구덩이로 빠졌다. 그게 무엇이든지, 뭔가 내 시선을 끌 대상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수도 없이 화면에 떴다. 정치 토론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한 최신 뉴스는 내 지친 영혼에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찾았다.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왜?이곳저곳을 클릭하고 찾아봐도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마우스 클릭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도, 왜 내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걸까?오래된 문제종종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지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깨고 싶다. 그래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릭스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그날 신문을 뒤적인다. SNS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지 들여다본다.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은 쉽게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뀐다.스트리밍 영화와 비디오 게임, SNS가 주는 악영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동역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바울은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다(행 17:16). 거짓된 신을 예배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위대한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우상숭배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테네의 언덕(Areopagus)에 모여서 세계관을 토론했고, 또 사회를 위해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SNS의 고대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모든 형태의 의견이 다 환영받았다.그들은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고,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최신 트렌드와 뉴스를 갈망했다. 온종일 더 큰 흥미를 가져다줄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보내곤 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찾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대했다. 그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우리 귀를 간지럽히는 호기심아테네에서 바울이 설교한 주민들은 그가 나중에 디모데에게 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우리는 이런 경고를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설교자 또는 컬트 종교 정도에만 국한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그리스어 knēthō로서, 종종 가려움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싶은 호기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어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새롭고 신선한 정보 조각”을 향한 충동을 의미한다. NET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들은 욕망을 따르며, 또한 자신들을 위한 선생을 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제나 좋은 소식을 찾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새로운 소식을 위한 이 끝없는 여정은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현재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지속적인 뉴스 피드, 운전하는 중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메시지 알림, 한 번 더 클릭하라는 웹 사이트 화면의 유혹, 친구와 함께 나누는 잡담, 최신 기계를 갖고 싶은 욕구, 최신 TV 드라마 또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대화에서 뒤 쳐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런 욕망이 과거에 우리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쉬지 않는 호기심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육체의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뭔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36-37). 우리의 욕망은 마치 부츠를 신고 운전할 때 느끼는 발바닥 가려움과 같다. 부츠를 신은 발바닥의 가려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긁을 수 없다. 우리의 귀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새로운 소식이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이야기, 모든 세대에게 이미 들려진 최고의 소식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사탄의 속삭임과 공격하는 유혹을 피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소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해방을 약속했다.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 충만한 기쁨, 끊임없는 즐거움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시 16:11).육체의 욕망이 끄는 막다른 삶의 길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성령과 그의 말씀을 주심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가장 분명한 소식, 그것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다 떨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운전하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싶을 때, 세상 현안이 궁금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crolling for Significanc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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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암의 인생과 노래
by 배경락
2020-03-18
안녕하세요? 저는 모세의 누나 ‘미리암’입니다. 저를 좋아하는 분도 계시지만, 싫어하는 분들도 제법 있답니다.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장면 1. 모세와 미리암저는 어려서부터 매우 당돌했습니다. 우리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강제 노역하는 상황이 너무 부당해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온종일 사막에서 노동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 형제 중에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일을 시키는 애굽 사람들은 그늘에서 부채질하며 노닥거리는데, 우리는 소금물을 먹어가면서 일을 해야 했지요. 저는 어머니 요게벳에게 이런 상황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늘 한결같았어요.“어머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얘야!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애굽 사람들은 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데 우리는 아무도 말을 못 하고 있잖아요.”실제로 히브리 민족의 수가 많아진다고 애굽 왕 바로는 명령을 내렸어요. 남자아이를 낳으면 다 죽여버리라고 말이죠. 그때 어머니가 임신했어요. 남동생 아론이 있긴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 욕심이 있었어요. 아들을 낳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식사 때마다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들을 낳게 되더라도 좋은 산파를 만나 목숨만은 건지게 해 주세요.”열 달이 지난 후 출산할 때가 되었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찾아왔습니다.십브라와 부아는 매우 용감한 여인들이었어요. 그녀들은 바로 왕보다 하나님을 더욱 무서워했습니다. 어린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절대로 동조할 수 없다고 하였어요. 십브라와 부아 같은 여인들이 우리 히브리 민족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얼마나 목청이 큰지 엄마는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걱정하셨지요. 저는 그런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우리 아이는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는 하나뿐인 딸인 나에게 은근히 의지하는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든 나에게 상의를 했지요. 석 달이 지나자 더는 아이를 숨겨서 키울 수 없었어요. 엄마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지요. “엄마, 이제 이 아이는 우리 손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 아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할까 봐요. 역청과 나무 진을 사용해서 물이 안 들어오는 갈대 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보내면 어떨까요?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거예요.”어머니는 그 생각이 옳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어요.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한 저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일 강에 띄운 갈대 상자가 어떻게 되는가 따라갔어요.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따라가리라 마음을 먹었지요. 다행히 갈대 상자를 사람들이 보았어요.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를 보고 건져오라고 명령했지요. 저는 숨어서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제 입에 할 말을 담아 주세요.”저는 결례를 무릅쓰고 공주 앞으로 나아갔어요. 자칫하면 가난한 히브리인, 노예 소녀라고 멸시받고 쫓겨날지도 몰랐기에 최대한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나아갔어요. 저의 당당함에 공주는 당황하면서도 제 말을 들어주었지요. “제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찾아서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면 어떨까요?저는 공주가 아이를 키우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이 있어요. 그 필요를 자극하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 ‘Yes’라고 답을 하기 마련이지요. 공주는 제 말을 옳게 여기고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생명을 구하고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의 출발은 이렇게 수많은 여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 히브리 산파, 애굽의 공주, 그리고 저도 미약하나마 힘을 보탰지요. 예수님의 족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출발에도 여러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장면 2. 미리암의 노래 세월은 흘러 80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동생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수많은 사람과 함께 애굽에서 나오는 장면을 여러분이 보셨더라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도 90년 넘게 살아왔지만, 이보다 더 큰 감격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감격스러운 장면을 목격했어요. 바로 홍해가 갈라지고 우리는 무사히 건너왔지만,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수장되었습니다. 그때 무뚝뚝한 모세조차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소리나 음정이나 박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하심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모세는 홀로 소리를 높여 찬양했습니다.“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1).1)모세의 노래는 길게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 노래는 너무 길어 따라 부르기가 힘들었습니다. 높은 곳에 서서 소리 높여 노래하는 모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은 존경과 감동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저는 그 순간 생각했어요.2)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그리고 노래는 모든 백성이 함께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쉽고 간단해야 한다. 저는 모세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함께 노래하자고 했습니다. 90이 넘었는데 제가 노래를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그래도 정성을 다하여 노래하자 백성이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지요.“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1). 독창도 훌륭하지만, 합창은 더욱 훌륭합니다. 백성은 결코 이 노래를 잊지 못할 거에요. 유월절 행사 때마다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이날의 영웅은 모세도 아니고, 이스라엘도 아닙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________________1) 중동의 문화와 역사를 깊이 연구한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교수인 S. D. Goitein은 모세의 노래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미리암의 노래가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명령형으로 쓰인 것에 주목하였다(S. D. Goitein, “ Women as Creators of Biblical Genres”, Prooftexts 8( 1988, 1-33 ), 7p). 국제성서 주석 출애굽기를 쓴 Martin Noth도 모세의 노래는 일인칭으로 되어 있는 독창이지만, 미리암의 노래는 회중을 향하여 찬송하라고 요구하고 함께 부른 회중 찬송임을 지적하였다(Noth Martin,’출애굽기’,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1, p147). 미국의 두 구약학자 F.M.Cross와 D.N.Freedman은 “The Song of Miriam”이란 공동 논문에서 미리암의 승전가가 모세의 노래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리암의 노래가 먼저이며 모세는 그것을 확장한 것이라고 하였다(이영미,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는 있다: 여성 지도자 미리암을 회상하며”, 신학연구 56집 (2010, 43-69) p47).2) 미리암은 이스라엘 최초의 여자 선지자로서(출15:20)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지도적 역할을 했다. 탈굼은 출애굽 당시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모세는 전승과 율법 교사로, 아론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가져오는 자로, 미리암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자로 제시한다(김민정, ‘민중적 여성 지도자 미리암의 재부상’, 신학사상 183집 (2018년 겨울호, 353-388), p353). (장면 3,4는 다음호에)장면 3. 모세에 대항하는 미리암장면 4. 미리암의 죽음과 그 후
신학
구약
미리암
모세
요게벳
십브라
히브리산파
창조 문제,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하는가
by Samuel Emadi
2020-03-18
상대방이 지구의 연대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이 얼마나 긴지를 따져 보기 시작하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의혹의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의 견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 그러한 견해 차이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여겨질 때면 더욱 그렇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만, 유독 창조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과 곧잘 싸울 태세를 갖춘다.지나온 상황을 한번 돌아보면,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오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서로의 도전에 직면할 때 느끼는 불편이나 의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신학계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현대주의자(modernist)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지난 역사가 한몫을 해서인지,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실제 기간 따위를 따지는 문제는 소위 대속의 범위라든가 은사지속론 대 은사중지론에 관한 논쟁보다도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창조 문제가 언급되면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가 경박스럽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이끌려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의 논의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진화론에 대한 우려만 느낀 나머지 지성적으로 천박한 근본주의 신학의 족쇄를 차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결국 창조 교리를 대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할 신학적인 주제를 올바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주제가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복음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은 1차적인 주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예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2차적인 주제는 교단이나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띠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를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아니면 언약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등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달리 3차적인 주제는 복음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훨씬 덜 영향을 미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는 차등적인 접근이 모든 교리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가 지닌 신학적인 확신이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덜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1차적인 주제가 신학 자체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문제에 해당한다면, 2차 혹은 3차적인 주제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불일치를 감수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일부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하면 복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천년왕국설에서 당신이 선호하는 견해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믿고 있는 신학 체계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양보하면 될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여기서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기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 그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한다). 지금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 교리에 있어 1차적인 주제를 2, 3차적인 주제와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가르칠 때 창조 교리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어떤 지점에 있어 서로가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이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입장 차이를 서로 어떤 자세로 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고 있는 신학적인 차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매우 잘 보여 주게 되었다. 원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전천년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등이 1차적인 주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요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천년왕국이라든가 휴거 또는 적그리스도와 같이 부차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1차적인 주제를 설정하라창조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를 구분하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역사적인 선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이라는 작품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일관성과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창조와 관련된 일곱 가지 포인트를 1차적인 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각 포인트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와도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이러한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창조 기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1.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2.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신다.3.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6.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다.7.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실제로 불순종했던 역사적 인물이다.성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를 창조 기사뿐 아니라 여러 본문을 통하여 증언한다(롬 4:17; 고전 1:28; 고후 4:6; 히 11:3). 이 두 가지 포인트는 하나님이 스스로 영존하신다는 자존성의 진리를 대변한다. 세 번째 포인트는 독자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해석에 대해 어떤 접근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문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전제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발흥하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네 번째 포인트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통해 확증된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신학이 바른 궤도를 따라 돌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포인트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창세기 1장의 연대는 복음주의자들 간에 혹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은 논의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 또 배우자를 허락하시며 가정을 세우셨으나 이내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재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반드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다섯 번째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론의 신학적 토대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류가 한 시조를 공유한다는 여섯 번째 포인트를 포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행 17:26). 마지막으로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일곱 번째 포인트를 부정하게 되면, 원죄 교리 역시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을 위시한 핵심적인 성경신학도 세울 수 없게 된다(롬 5:12-21).서로를 받아주며 논쟁하라이와 같은 1차적인 주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대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 물론 서로가 성경의 무오성을 힘있게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창세기 1장이 내포하는 물리적 시간이라든가 지구의 나이 또는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이나 포식 관계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1차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기보다 그에 관하여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결국 창조에 관한 대화 자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에 관해 아예 토론하지 않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자신의 견해를 엄격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얼마간의 잉크를 거기에 쏟아붓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창조 교리에서 1차, 2차, 3차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ological Triage and the Doctrine of Creation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창조
복음주의자
역사성
근본주의자
프란시스쉐퍼
창세기
우리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by Kevin DeYoung
2020-03-17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학을 강조해도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교회로 알려지는 것이 신학적 박식함으로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환경 운동에 힘쓰는 교회”나 “최신 유행을 잘 수용해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회,” 또는 “화려한 무대 장치로 유명한 교회”보다는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를 택할 것이다.건강한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강단에서 시작된다. 2004년에 유니버시티개혁교회(University Reformed Church)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강해 설교라는 확실하고 견고한 유산을 받았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재까지 긴 시리즈로 설교를 해왔다. 지금까지 해온 주요 시리즈를 소개하자면, 창세기, 레위기, 역대하, 에스라, 전도서, 소선지서,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후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다. 주일 오전에 드리는 예배처럼 얕은 물에서만 수영한다면, 교회는 깊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진지한 가르침에 대해 열려있는 이들도 있지만, 새로운 용어, 이름,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회중에게 학습 능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지만, 그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좋은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내 설교가 신학적이라 말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주중에 본문을 열심히 연구했다는 게 느껴진다는 뜻이고, 내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통합한 설교문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따금 설교에서 아주 학문적인 용어를 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 지식을 뽐내는 설교를 좋은 설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수준의 신학자가 세계 수준의 신학을 설교하면서도, 회중에게 세계 수준의 지루함을 선사해 신학적 성찰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좋은 내용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신학적으로 사고하는 성도를 길러내기 위한 신학적 설교에는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첫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전하는 말만 듣는다. 칼케톤 신조(The Chalcedon Definition)에 대해 전할 때도 “지적인 분들에게는 이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별 관심이 없으시겠죠”라는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정말 엄청난 걸 다룬다는 거 모르셨죠? 오늘 예배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처럼 말할 수도 있다. 벤 프랭클린(Ben Franklin)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복음을 거부했던 프랭클린이 휫필드의 설교를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면서 왜 자꾸 그의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프랭클린은 “알아요. 근데 휫필드 저 사람은 믿잖아요”라고 답했다. 설교자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학적 성찰은 성도들을 결코 움직일 수 없다.둘째, 우리는 최고의 신학을 먼저 우리의 가슴으로 가지고 가야 하고, 다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끌어올려야 한다. 만일 내가 요한복음 10장으로 확실한 속죄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도 학구적인 설교를 하면, 헌신된 칼빈주의자들은 좋아하고 나머지는 거부감으로 몸을 뒤틀 것이다. 하지만 내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것이 자신의 양 떼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과 자기 신부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받을만한 존재로 만드실 뿐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완전히 종식되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난해한 교리가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성경의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엄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설교 이상의 것교회 사역에 있어 설교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신학 교육과 신학적 반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 생활을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배의 순서, 심지어 광고를 어디에 넣느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역에 신학적으로 묵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신학적으로 사고하는 교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적 식별력과 소양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어찌 자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사고를 좇아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신학적인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개혁주의를 고백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새신자 교육 내용을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 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을 살찌게 했던 이 신학 문서들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을 항상 새신자 교육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1년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회에 걸쳐 매 주일 저녁 예배 때 설교했다.우리는 모두 신학자들이다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은 리더십 훈련, 장로와 집사를 세우기 위한 검증 과정, 대학부 사역, 소그룹, 주일학교 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신앙고백 전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 성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신학을 강조하는 것 모두 비정상적인 일이 된다.피상적인 것만 좇는 이 세상에는 뭔가를 줄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얕디얕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예배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는 선하고 거룩한 사고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목사로서 내 사역, 교회로서 사역은 우리 모두 신학자라는 전제, 그 전제가 맞는다면, 우리 모두 좋은 신학자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e Need Theologians, Not Smarty-Pants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신학적설교
칼케톤신조
조지휫필드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교리문답
도르트신경
가짜뉴스의 심리학적 이유와 성도의 대처법
by 노승수
2020-03-16
가짜뉴스는 왜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믿고 싶은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다. 소문이란 원래 사실을 따라 퍼지지 않고 감정을 따라 퍼진다. 내가 믿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로 반응하게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내 그럴 줄 알았어!”로 반응하게 된다. 이미 믿고 싶은 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믿고 싶은 것에는 사랑과 미움이란 인간의 감정반응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데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들러(Alfred Adler)는 “거짓말은 진실이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거짓말에 기울어지게 되는 데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짜뉴스는 우리 불안에 기생한다. 불안은 우리 내면에 적개심과 미움을 억압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해서 가짜뉴스가 혐오와 배제, 분노와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각 나라마다 가짜뉴스와 거기에 따라 붙어서 혐오와 배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듣게 된 가짜뉴스는 우리가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어느새 내게 사실이 된다. 가짜뉴스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떻게 가짜뉴스는 우리에게 사실처럼 굳어지게 될까? 이것을 잘 설명해줄만한 심리학적인 실험이 있었다. 이 실험의 결과로 얻은 것은 “환상 진실 효과(The illusory truth effect)”라고 명명된 것이었다. 이 효과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어하기까지 하는 기제를 말한다. 1977년 미국 빌라노바(Villanova)대학과 템플대학에서 린 해셔(Lynn Hasher) 등이 고안한 실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을 검증한 것이다. 피험자에게 60개의 문장을 주고 실험자들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물은 후에 2주 후에 2차로, 다시 2주 후에 3차로 참과 거짓을 묻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는데, 피험자들은 이미 읽은 익숙하고 친숙한 글을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관계없이 사실로 간주했다.1) 예를 들어, “첫 번째 공군 기지는 뉴멕시코에 세워졌다”, “농구는 1925년에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등과 같은 내용이었다.따라서 반복적으로 가짜뉴스에 노출되면 “환상 진실 효과”로 인해 가짜뉴스를 진실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사실로 방어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생각보다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세계관으로 해서 다른 것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가짜뉴스를 접했을 때, 인간의 인지과정은 새 정보를 이미 사실로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하기 때문에 논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반복된 새 문장은 반복되지 않은 문장에 비해 인지과정에서 처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복되고 익숙해진 것이 사실관계 유무와 관계없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신자의 삶에서 소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신자는 가짜뉴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요시다 도오루의 저서 ‘정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원제 : 감정의 정치학)’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인간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지 않으면,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이 표현은 인간이란 존재의 정치 활동에 있어서 옳음과 좋음이 함께 경험되는 세계관이 있을 때, 합리성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르가 다르지만 이 비슷한 말을 한 신학자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신앙감정론’에서 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표현이다. 원래 칼빈은 신앙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것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 마음이 인친 바 된 것”(Inst. 3. 2. 7.)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흑색선전과 온갖 우상이 난무하는 장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감정적이고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을 때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잠 29:18). 인간 내면의 불안으로 인해서 가짜뉴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와 같은 역병이 나돌면 인간의 불안은 더 극대화되고 그 기저에 깔린 적대감과 혐오는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세상에 역병처럼 퍼진다. 이런 문제에 대한 신자의 대처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단지 지성으로만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의 자리에 우리 좋음이 함께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과거 이 나라의 세계관 운동은 학적이었다. 최근 세계관 운동이 주목하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이란 좋음을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옳음이 그것이 우리 정서로서 활성화되는 그 자리에 참된 신앙이 있고 이 신앙의 자리야 말로 가짜뉴스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________________1) Hasher, Lynn; Goldstein, David; Toppino, Thomas (1977). "Frequency and the conference of referential validity"(PDF).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16 (1): 107–112. doi:10.1016/S0022-5371(77)80012-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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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흔들어 깨우는 성경
by Scott Hubbard
2020-03-16
“요한복음 15장 2절에 나오는 단어, 프룬(prune) 즉 ‘제거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릅니다.”목사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본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영어 성경으로 번역된 걸 보면 프룬(prune)이라는 단어는 제거해버린다(가치를 친다)는 의미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맥락과 원어의 의미를 보면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주장이었다. 이백 명 정도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프룬의 원래 의미는 높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땅에 손을 넣어서 밑으로 처진 가지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우리의 순종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가 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높이 들려있고, 또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강단에서 내려왔다. 회중은 일어나서 그의 백성을 결코 치지않는 하나님, 그들에게 힘든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꼭 끌어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찬송을 불렀다.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방황하게 하는 말씀나는 위에 소개한 이야기를 가지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목사의 독특한 성경 해석,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 환상적인 해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유혹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유혹은 나에게도 있다. 나 역시 양날을 가진 진실의 칼 한쪽을 무디게 하고 싶은, 그래서 살이 베여도 너무 깊이 베이지 않도록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목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목사들이 왜 성경적 권위에서 벗어나서 방황하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 영혼에 붙어있는 작은 의심, 자신감을 흔드는 대화,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관계 등이 그것이다. 대화를 통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왜 그런 방황이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경건의 시간을 마칠 때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위로를 받을 때 보다는 혼란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머리를 책상에 부딪히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발버둥 쳤다. 의심이 내 팔꿈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낀 적도 있다. “너 정말로 이걸 믿는 거야?”그러나 나는 성경으로부터 받는 이런 경험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존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불편하게 하는 말씀아브라함은 그가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났고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상상도 못 했던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아내와 자녀를 거느린 목자 모세는 양을 끌고 호렙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불꽃에서 나오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명령을 받았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언이 주는 경외감 속에서 아이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예언을 들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예수님의 사역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씀이 많은 경우에 상처받은 갈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꾸짖었다(마 16:23). 또 그의 이웃을 공격했고(막 6:2-3), 서기관을 부끄럽게 했으며(마 22:46) 그 결과 그의 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도록 만들었다(요 10:31).만약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제거해버린다면 아마도 성경의 요약본도 채 안 되는 구절만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우상과 관습 파괴자왜 굳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가? 왜 스캔달을 일으키고 공격을 하는가? 하나님은 단지 깃털을 흔드는 정도로 기뻐하지 않는다. 현실은 항상 우리가 가진 망상을 사라지게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는 우리 모두를 어느 정도는 망상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어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하나님을 그려 넣으려고 한다(롬 1:18-21).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는 진리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규한다. “어리석은 소리야!” 우리는 또 외친다. “이 말씀은 너무 공격적이야!”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진리를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언덕으로 끌고 가서 나무에 매달고 싶어한다(고전 1:23; 2:8). 우리는 말씀으로 불편해져야 한다.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적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호세아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친구잖아요? 왜 그런 사람도 말씀으로 불편하게 하는 거죠?”우리를 구원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종종, 그리고 반복해서 우리를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신령하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때그때 부서진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생각을 부순다. 그는 위대한 우상 또는 관습 파괴자이다. 이런 부서뜨림이야말로 그의 실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시 또는 증거가 아닌가?”(헤아려 본 슬픔, A Grief Observed, 66)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우리를 회복시키지만 꾸짖는다. 구원하지만 부순다. 그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간절히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그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앞에 놓고 앉아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두 가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신 가장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우리는 군중들처럼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설마 나의 하나님이 그런 일을…” 그러나 그런 경우도 “나의 하나님(my God)”은 그냥 “나의 신(my god)”, 우리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작은 나무 조각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예의 바르고, 오래 참고 그리고 안전한 신.아니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지금 꼭 예수님이 말한 모든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에 안정된 평안만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점 하나까지도 다 지키기 때문에(요 10:35) 또 신약 성경의 모든 말씀도 지키기 때문에(요 14:26) 우리는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불편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지만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어린아이를 반기고 과부를 격려하며 버려진 자를 찾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범죄자 사이에서 면류관을 쓰고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죽음을 짓밟고 영광중에 다스리며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그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불편하게 하는 그분의 말씀에서 도망쳐 보다 더 평안을 주고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달려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와서 불편함을 느끼라데이비드 깁슨(David Gibson)은 이렇게 썼다. “때때로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울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제야 당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기대를 뒤집어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라. 당신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라”(’삶을 거꾸로 살기’[Living Life Backward]).유한하고 미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지혜를 하나님의 무한하고 실패하지 않는 지혜 앞에 내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은 뼈를 다시 맞추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치료하기 위해서이다(호 6:1).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이다.그러므로 이제 성경을 읽을 때면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겠다고 한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라. 당신을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훈련하신다(딤후 3:16). 꼭 그렇게 해달라고 용기있는 기도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어떤 우상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어떤 거짓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나를 불편하게 하소서. 나를 다시 만드시고 나를 흔드소서. 그것이 당신께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면.”이런 기도는 아프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자만심과 자족함, 평안만을 바라는 환상이 다 부서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자유이다. 영광을 향한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Expect the Bible to Unsettle You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프룬
CS루이스
헤아려본슬픔
호세아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예배의 의미
by Jay Kim
2020-03-15
최근 몇 주간 나는 여러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이 교회론적 난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우리의 결정이 지혜로운 걸까 지혜롭지 못한 걸까? 우리의 행동은 올바른가 아니면 무분별하게 행하고 있는 걸까?혼돈의 상황 속이지만 3월 말에 책 한 권을 출간할 예정이다(Analog Church, 3월 31일 출간 예정). 이 책에서 나는 교회는 지금까지 항상 아날로그 공동체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교제하기 위하여 디지털로 “연결”되는 편리함 대신 아날로그로 모이는 수고를 하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비디오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논의가 조금 더 낯설고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에 최근에 발전되고 있는 상황을 조명해 보면서, 불안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편리가 아닌, 조율빠르게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다. 성도들에게 이를 독려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자 꼭 필요한 대안이라고 보고 있다. 세계 곳곳의 정부가 대규모 집회 금지를 지시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상황은 내가 사는 곳과 섬기는 곳에서도 현실이 되고 있다. 지역 대학교는 이번 학기 남은 기간에 강의실 참석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공립학교도 같은 결정을 했다.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단들은 이러한 방향을 강하게 권하여 직접 참석하는 모든 규모의 집회를 중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최소화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인다.그래서 회중을 온라인 공간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회중에게 디지털 예배의 현실이 편리하지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방편임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점을 명백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나중에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할 것이다. 편안한 집에 앉아서 TV와 컴퓨터로 설교를 시청하는 것은 분명 편리할 것이다. 이러한 편리함은 오랫동안 훈련을 통해 형성된 예배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예배하지 않았던 때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예배당의 공간에 함께 모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면,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을 특정 상황에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직접 모여 예배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다. 여행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면, 나는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집에 도착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 실제로 손을 잡고, 안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는 임시로 행하는 대안이라는 입장에서 행해져야 한다. 시간과 매체를 선용하기잠시지만 새롭고 낯선 디지털 현실 세계에 당면한 우리에게는 시간과 매체를 선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야 하는 동안 공동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다시 구성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는 있다. 진실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강조하고 다시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가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대부분의 실시간 방송 플랫폼은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온라인으로 모이는 이 기간에는 평상시 주일 예배 때보다 좀 더 대화적인 방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 후에 대화로 이어지는 방법을 도입한다면 이 기간에 성도들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눈과 귀만 빌려서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질문으로 소통함으로써 디지털로 분리된 세계를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정한 시간에 성도들이 함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여 “실시간” 집회를 강화할 수 있으며, 온라인 예배라고 언제나 원할 때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기도에도 유사한 접근을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기도를 나누도록 격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온라인 교회들이 이미 실행하고 있다. 디지털 거리의 깊은 골을 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몸이 실제로 함께하여 기도할 때 느끼는 강도보다는 약할 수 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사랑하는 강력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교회 생활에서 겉돌고 있는 성도들을 연결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미 대규모/소규모, 모임/흩어짐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모임이 존재한다. 대규모 주일 예배 모임이 있는가 하면, 도시 전체에서 인근 지역과 마을별로 흩어져 모이는 소규모 그룹도 있다. 예기치 못한 이 기간에 우리는 소그룹으로 주중에 모이도록 하고, “실시간” 온라인 예배 모임을 독려할 수 있다. 대규모로 모일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소규모로 그리고 흩어져서 모일 수 있다. 서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 이러한 시기에 크리스천은 보통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는 성구를 많이 암송한다. “온전한”의 헬라어는 ‘teleia’이며, 여기서 “궁극적 종말 혹은 목적”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telos’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은 우리의 두려움이 끝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죽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다. 이것이 교회가 계속 모여서 찬양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섬기고,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미래의 소망을 실제로 몸으로 구체화하고 미리 행하는 방법이다. 현재 상황이 앞으로 몇 주간 그리고 몇 달간 한 공간에서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혜롭고 책임감 있게 행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쓸 수 있다(살전 2:1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aking Church Online in a Coronavirus Age번역: 정은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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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 묵상하는 하나님 사랑
by 전재훈
2020-03-14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인문학은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셋째,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간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립보행하고 사회적인 행동성향으로 보아 ‘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출생과 가족관계와 하는 일을 통해 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깊이 고찰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는 역사와 철학과 경제와 종교를 두루 거치며 살펴보아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시간은 인간에게 삶을 제공했고 그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는 환경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그와 더불어 생각과 가치관도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시각으로 내 삶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과거의 내 삶을 돌아보고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시간들을 통해 오늘의 나를 규정지으려 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오늘의 나를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고정시켜 주지 않는다. 인간의 생애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역사도 변하고 있기에 삶의 모습도 변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국제적 상황도 변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 삶을 규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지나온 역사는 삶의 참고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용법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각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문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삶은 다양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 같은 부모, 비슷한 DNA를 가진 쌍둥이라도 그 둘의 삶은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 5천만 명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삶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몇 개의 특징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규정해서 여러 개의 카테고리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천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곳에는 서로 다른 5천만 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볼 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미래를 뭉뚱그려 헤아려 볼 수만 있다. 그렇게 내다 본 미래도 막상 다가가 보면 무수히 많은 예측들 가운데 하나를 살아가게 되거나 실상은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오직 인간의 죽음뿐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죽음을 미룰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진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루는 방법에 온 생을 다 바쳐야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문학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범죄한 죄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셨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여전히 변화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을 붙들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영원히 누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고난이라는 문제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고난의 큰 파도를 넘으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더욱 가까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누리기도 한다. 고난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혹은 더 가까워지게 하는 고난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고난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을 출발선으로 삼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이끄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내가 기대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야 할 뿐 사랑 자체가 의심되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 주시는 고통을 감수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출 12:43-45)장자의 죽음이라는 큰 재앙을 피하는 길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양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유월절 양식을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방 사람이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을 수 없었다. 다만 돈으로 산 종만이 할례를 받은 후에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언제까지나 종으로 살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유월절 규례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후에는 그들에게도 종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집에 거류인과 타국 품꾼도 기거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다. 돈으로 산 종과 타국 품꾼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일을 하게 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다른 집에 종으로 팔려온 사람과 자신의 노동력을 대가로 돈을 받는 품꾼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르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종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품꾼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또한 할례 받은 종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고 일해야 하지만 품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품꾼은 자신의 집안이 저 종만큼 가난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고, 종은 너무나 가난한 탓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까지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에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월절의 의미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종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유월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징하고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돈으로 산 종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까지 늘 기억하지는 않는다. 특히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에는 더더욱 잊어버리기 쉽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를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원망의 조건이 되지만, 이 모든 것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는 엄청난 감사의 조건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돈 받고 팔려온 종인가 아니면 구속 받은 죄인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원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감사로 찬양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영원히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살아갈 자녀가 될 것인가?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여러 경험들이 빚어낸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먹고 자고 입는 것의 수준들로 평가될 사람들도 아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자녀 삼은 가장 존귀한 자임을 믿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의 나의 삶을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지게 하기보다 감사와 찬양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늘의 만찬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은 비록 무교병과 쓴 나물로 한 끼의 식사를 해야 하는 돈 받고 팔려온 종의 신세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지금 어떤 곳에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영성
묵상기도
고난
하나님의사랑
유월절
정체성
모세
아론
규례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반응을 요구한다
by Jonathan Parnell
2020-03-1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 사건이다.만일 골고다 언덕에서 그분의 생애가 끝났다면, 우리는 그 희생이 정말로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알지 못하여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선한 목적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고 한들,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 속에 계신다면, 그 죽음이 기약한 모든 내용은 사실상 희망 고문을 안겨다 줄 뿐이다.그러나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불멸의 생명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으로 무엇인가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그 죽음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부활은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전체도 부활이 남긴 수많은 결과물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이 도대체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이 복음의 메시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예수님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복음이 그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님을 말해 준다.단지 독서용이 아닌 이야기기독교의 복음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이야기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단지 독서용으로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본질상 그 이야기는, 그냥 담담하게 내용을 관찰하는 태도가 아니라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 반응하는 자세를 독자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신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성경은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가는 반응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살아 내는 반응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와 같은 반응을 요구한다.만일 부활이 일반 전설과 같이 하나의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도 필요 없이 그 이야기를 평가하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별로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흥밋거리로 읽고 머리로만 내용을 이해한 후에 원래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다시 말해 바뀔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실제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한다.그렇다. 정말로 부활이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이라면, 우리는 그저 남들의 대화나 엿듣는 자세로 그 사건을 방관하며 지나가는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실제로 등장하는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저들과 똑같이 타락하여 똑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이다. 결국 우리 각자는 영광을 쫓고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정작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고로 이야기를 읽다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 ‘관해’ 말해 왔던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고.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그분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언제나 그 이야기의 정점에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린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든 혹은 애써 무시하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심지어는 그 사건에 대해 아무 코멘트도 하지 않으려는 자세 또한 일종의 코멘트다.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의 영향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과 이어지는 토요일까지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일 수밖에 없던 그들의 두려움은,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다 사라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한 저자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 이어 또 다른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은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불린다.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그 책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 초기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활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메시지 자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최초에는 부활을 목격한 증인만이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될 수 있었다(행 1:22).누가가 기록한 첫 번째 설교를 살펴보면, 동요하는 군중을 향해 시종일관 부활에 초점을 두고 메시지를 전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메시아에 관한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을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오랫동안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담대히 선포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외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그러고 나서 부활과 뗄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한다. 곧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신분이 공적으로 선포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성령을 보내어 그 부활 소식이 더 강력히 들리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행 2:32-35). 그리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을 내리면서 설교를 마무리한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에 대해 누군가가 단언했듯, “하나님이 그분을 주님이자 메시아가 되게 하셨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 바로 오래전부터 약속된 메시아이며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우리가 어찌할꼬이 설교를 들은 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누가의 설명에 따르면, 베드로가 마지막 말을 전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청중은 “마음에 찔려” 당혹스러워했다(행 2:37).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긴 표현이다. 우리 식으로 옮기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의미이다.이에 그들의 영혼은 진동하고, 인생의 위기감이 찾아들었으며, 그저 세상에서나 잘살아보려 애써 온 자들의 마음속에 그 모든 사실이 소용돌이치며 혼란을 자아냈다. 진짜 현실이 그들 앞에 드러난 것이다. 베일에 가려 있던 현실이 원색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졌다. 정말로 중요한 사건이 이제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었다.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무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도 무언가 달라져야 했다.이와 같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꾸준히 언급된다.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사도들은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이 분개하든(행 4:2),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든(행 17:32), 부활의 소식을 계속 전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부활의 현실은 모든 자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말이다.당신에게 선포되는 복음우리는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한 설교를 통해서도 부활을 선포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안디옥은 오늘날로 치면 터키와 시리아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1세기의 대도시다. 그 도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 이야기의 요점을 되짚어 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메시아에 관해 언급하는 구약 예언에 비추어 부활 사건을 해석한 후, 그 사건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주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우리는 다시 한번, 이렇게 선포된 메시지가 청중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볼 수 있다. 곧 바울의 설교에 따르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 소식을 듣는 자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부활은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나 교훈이 아니다. 또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의 사색거리도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진짜 뉴스가 여기에 있다. 그분이 살아 계신다.이처럼 부활은 우리를 위한 죄 사함의 소식을 선포한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듣는 자는 단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부활은 우리의 반응을 요구한다. 이에 무응답으로 일관할 수 있는 중간 지대란 없다. 그 소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그 소식을 거절하고 멸망의 길로 걸어가든가 둘 중 하나밖에 없다.“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그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 결과 이 순간에도 살아 계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분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고, 따르라.”저 복음의 사자들이 여기에 있었다면, 이 같은 메시지를 당신에게 전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Resurrection Demands Respons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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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코로나19' 속의 교회와 국가
by 이승구
2020-03-13
지방 정부에서 ‘코로나19’ 사태의 추이에 따라, 특히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서 종교집회 금지명령을 검토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여러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교회 공동체는 본래 교우들과 온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그 점을 늘 가르친다. 특별히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르칠 때, 그것의 적극적 의미는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써 왔고, 또 신경을 쓸 것이다. 필요시 제한 명령?혹시 필요하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그 “표현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서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행정부와 교회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협의 결과를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내용을 전달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면,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 제기로 들리기에 이런 식의 표현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국가와 교회의 구별국가와 교회는 각기 독립적인 기관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기관이다. 물론 중세 때나 지금 이슬람권과 같이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때도 있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공산사회처럼 국가가 교회와 종교 활동 전체를 통제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역사의 과정을 통해 국가는 국가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하고,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독립된 기관이라는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간단히 표현해서 ‘국가와 교회는 상호 독립적’이라고 했다(the separation of the state and the church). 정부와 국가는 독립적 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럽 역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를 가지고 시작한 미국은 처음부터 국가와 종교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활동해 왔다. 미국이 국교(國敎)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요즈음 이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고, 또 그것을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면 그들이 겪은 복잡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성도들의 이중적 자격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시에 국가의 국민이므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더 좋은 국가가 되도록 힘쓰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국민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옛 변증론자들이 강조해 온대로 우리는 좋은 시민임이 틀림없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은 우리가 잘 해낼 것이다.그러나 교회가 어떻게 활동을 할 것인지의 문제,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회의 예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성경으로부터 배웠다. 이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 유럽은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과정을 겪었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원칙과 실천이었다. 이 원칙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는 성경의 원칙이 버려지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나라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예배에 있어서 어떤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나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또한 교회의 성원들도 이 원칙,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결정하고 교회가 시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참으로 충실해야 한다.‘코로나19’ 사태는 극복될 것이고 별문제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일이 지난 후에라도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제한을 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촉발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명심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 사태 정도가 아니라 더 크고 매우 복잡한 상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교회 공동체의 정치적 주장?교회 공동체도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의 문제에 관여하여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정부든 지방 정부든 정부는 독립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성도들은 국가의 구성원이므로 개인 자격으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리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견해를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단체를 구성해서 여러 의견을 말하고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는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이름으로는 어떤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에 교회로서의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모든 교회가 일어나 피해를 무릅쓰면서 주장을 할 때 그것을 무겁게 여길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진보라는 사람들과 보수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해왔다. 현재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도 전혀 듣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스스로가 한 것이다.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때의 심각성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에 어떤 요구를 할 때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명확한 교회의 활동을 외부 세력이 간섭하는 경우다. 이때는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각오하더라도 교회 전체가 한목소리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경우다. 신사참배를 하면 예배당에서 예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배당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나서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구성원들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는 국가적 행사이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의했고, 결국 몇몇 분들만 순교 당하고, 옥중 성도가 되었다. 우리에게 또 그런 일, 교회 전체로서 어떤 주장을 해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전과 같이 순응해 버리고 몇몇 사람만이 어려움을 당하는 과거와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사태를 일제하의 상황과 같다고 이야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도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면 이런 정책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성도들은 그것은 안 된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 교회로서 지체 의식이 더 분명해져야만 한다.부디 성도들 각자가 좋은 시민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교회의 성격을 잘 유지하고,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여러 활동을 제대로 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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