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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는 절대 모르는 복음 전도법
by 박용기
2020-06-09
2020년 ‘꼰대’라는 단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표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꼰대는 꽉 막힌 기성세대를 가리키는 은어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이야…. 너 여기 좀 앉아 봐라….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꼰대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근면, 성실 그리고 희생적 수고로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러한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1985년 이후 출생)에게 기성세대가 일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건국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사람들이 그냥 더 똑똑하다”(Young people are just smarter)고 했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협업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화법을 소개하겠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보다 현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신탁을 듣고 그는 당황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당대 현자로 알려진 정치가, 시인, 공예가를 찾아가서 대화한다. 현자들은 과연 그들의 분야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혜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에서 탁월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저들은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내가 저들보다 지혜로운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꼰대는 자신의 무지를 모른다. 자신의 경험, 지위, 나이에서 오는 우월 의식으로 다른 분야도 다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 바울이 1세기 소크라테스의 고향인 아테네에 도착했다. 그는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행 17:16). 바울은 꼰대처럼 아테네 사람들에게 “성경에 의하면, 내가 믿는 진리에 의하면, 너희들은 다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야”라고 일방적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에 가득차서 광장으로 나가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행 17:17)했다. 바울이 했던 ‘변론’은 헬라어 ‘디아레고마이’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성적 ‘대화’였다. 바울이 했던 ‘변론’은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경청하고 공감되는 부분은 공감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진리를 찾는 대화 방법이다. 팀 켈러 목사는 바울이 아테네 광장에서 사용한 대화 방법을 ‘소크라테스 대화법’이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우리는 두 세계관이 전혀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관으로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바보 같다고 판단하는 대신에 당신은 먼저 다른 세계관에 대해서 공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공감하려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비웃으면 안 됩니다. 고함쳐도 안 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멍청한가!’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당신은 상대방 세계관의 전제와 기준으로 그들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준에 의하면 당신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용한 대화법입니다.”(팀 켈러, 리디머장로교회 주일설교, 2015년 10월) 바울은 제우스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여러 신전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아테네 도시 한복판에서 격분했다. 그러나 광장으로 나가서 아테네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경청했다. 바울은 아테네인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인정해주었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소개하겠다고 했다(행 17:22-23). 아테네인은 범신론, 이신론, 무신론, 자연신론을 믿고 있었다. 아테네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믿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입하신다고 소개한다(24, 26, 28절). 아테네인은 웅장한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들을 섬겼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신전 안에만 갇혀 계시지 않고 그 백성의 일상 가운데 동행하신다(28절). 아테네인은 물질을 드림으로 신들을 달래고 얼러 안전과 축복을 얻어 내려고 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받으려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25절). 바울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세계관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이 신을 섬기는 노력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최후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복음을 전했다(31절). 2018년 9월에 LG화학 임원 300여 명이 참석하는 워크숍에 신입 사원 여섯 명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알고 있는 임원들이 신입 사원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경청’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신입 사원들은 임원들에게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부탁했고, 업무와 함께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의 가치도 인정해 줄 것’을 이야기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의 가치와 세계관을 파악한 후, 그 전제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그들의 부족한 점을 드러내어 보여 주고 그 대안으로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예수님과 직면하게 해야 한다.
생활
관계
꼰대
플라톤
소크라테스
변론
바울
팀켈러
경청
어려운 때에 웃음이 주는 세 가지 유익
by Rachel Jones
2020-06-08
내가 속한 소그룹의 줌(Zoom) 모임을 하고 있을 때, 육아에 지친 한 아빠가 18개월 된 아들이 유아용 좌석에서 이유 없이 계속 소리를 지르자 “화상회의에서 하는 것처럼 쟤를 음소거(on mute)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몇 개월 전만 해도 통하지 않을 농담이었지만 격리 기간인 요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유머 소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SNS에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뉴스도 있지만, 정장 드레스를 잘 차려 입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나오는 사람들 사진이나 운동 경기가 아닌 자신의 일상을 중계하는 스포츠 아나운서의 동영상 등 우리를 웃게 할 요량으로 올린 것들도 많다.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 직접 볼 수 있기를 고대하지만 대신 우리는 비공식적인 여섯 번째 사랑의 언어인 인터넷 밈(meme)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계속 표현한다. 은혜가 더할수록 GIF 그림파일들도 넘쳐난다.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슬픔에 빠졌거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내가 웃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당연히 들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앞에서 즐거워한다면 확실히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롬 12:15). “웃을 때”가 있는가 하면 “울 때”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전 3:4). 사도 야고보 역시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할 때에는 우리의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 촉구한다(약 4:9). 이 세상에는 반드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이 세상에는 웃기지 않은 일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를 웃게 하는 일들은 여전히 많다. 어려운 때가 닥치면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유머에 기대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재미를 추구할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유머를 다루는 법은 우리의 성품, 문화,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웃기는 것이 마치 경건함과 같은 수준의 덕목인 것처럼 유머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만, 유머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성경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 팬데믹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유머를 즐겨야 할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웃음은 우리에게 양약이다많은 연구가 이미 밝혔듯 웃음은 우리의 심신 건강에 매우 이롭다. 웃음이 스트레스를 낮춰주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심지어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성경이 말한 바를 과학이 그저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웃는다고 해서 모든 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웃음은 우리의 기분을 한결 낫게 해줄 수 있다. 웃음이라는 양약을 좋은 때나 어려운 때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잠언 15장 15절은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로 시작한다. 그러나 절 후반부에서 잠언 기자는 고난 받는 자들의 어려움을 부자들의 희희낙락과 대조하기보다 일종의 반전을 제공한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이 팬데믹 위기는 분명히 비참한 실제적 사건이다. 하지만 마음이 즐거운 자들은 잔치할 수 있는 이유를 여전히 찾을 수 있다.성경은 우리 감정이 마치 단순한 것인 양 다루지 않는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는 말씀처럼 희비가 엇갈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웃으라 격려하지만 삶의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정죄하지 않는다.2. 웃음은 우리의 확신을 드러낸다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의 한가운데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에 대해 “후일을 웃으며”(25절)라고 묘사한다. 이 여인은 주권자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여인의 그러한 확신은 그의 밝은 심령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염려에 사로잡히는 때가 오면 우리는 유머를 통해 서로의 두려움을 줄여 나갈 수 있다. 우리 마음 속에 걱정이 바람 가득 든 풍선처럼 커졌을 때는 친구가 해주는 적절한 농담 한 마디가 그 풍선에 꽂아 바람을 뺄 수 있는 바늘 역할을 한다. 문제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 8:35)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롬 5:2)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할 때, 우리는 더 웃을 수 있다. 3. 웃음은 우리를 겸손케 한다내가 아는 가장 웃긴 사람들 중 몇몇은 농담을 경건한 겸손함으로 할 줄 아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라도 다른 이들을 웃게 하지만 타인들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사람들을 웃기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경건하게 웃기는 방식이다. 그들의 유머는 그들의 겸손을 드러낸다.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최근의 팬데믹 사태로 인해 겸허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도서 기자가 인류의 암울한 “일반(적인 숙명)”(9:1–6)에 대해 논할 때, 뒤이어 나오는 적용 부분에서는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중략] 즐겁게 살지어다” (9:7–9)라고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주말을 보내는 것에 대해, 내 친구 한 명이 “소소한 일들을 즐기면서 주말을 최대한 잘 활용해보려고 하고 있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다. 이제 SNS에서 뭔가 웃기는 것을 본다면 그저 그대로 즐기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기 때문에, 또한 유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때문에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최악의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래서 웃을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Ways Humor Can Help in Hard Times번역: 이정훈
생활
감정
웃음
유머
기쁨
겸손
고난
확신
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
by Derek Thomas
2020-06-07
간단히 말해서, 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지시사항이 있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왜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이 원칙에는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예배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다 성경이 정해 준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자신을 성경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배에 대해 성경이 정한 원칙을 더 소중하게 가슴에 간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와 예배 자유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말러(Mahler) 교향곡을 어떻게 들어야 한다든가, 우표 수집을 해도 좋다든가, 흰족제비를 애완동물로 키워도 된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성경중심주의 기독교인 중에는 교리주의에 빠져서 그런 모든 취미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환경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시대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에 기꺼이 동의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적 권위가 이 시대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성경은 몇몇 특정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노동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한다. 그에 덧붙여, 모든 가능한 환경을 다 포함하는 아주 일반적인 원칙을 성경은 제시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실로 우리의 모든 삶은, 그게 명령이든, 금지 사항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원칙이든지 간에 다 성경에 의해서 규제 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한마디로 모든 삶을 통제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존 칼빈(John Calvin)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17세기 청교도를 대표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원의 경우 회중 예배를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예배와 관련해서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일반적인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를 받으셔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에 따라 회중 예배에 대한 특정 요구사항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거기에서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이 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을 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명백하게 인정하지 않은 모든 숭배 방식을 승인하지 않으신다”(‘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그리고 1689년 두 번째 런던 침례교 고백서(‘Second London Baptist Confession’)에 따르면, “예배 방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나 창작, 사탄이 주는 연상이나 눈에 보이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22.1)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경 구절이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성막을 세우는 것과 관련해서 엄격한 규범을 설명한 출애굽기는 “네게 보인 양식대로”(출 25:40) 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 또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암시하고 있다(창 4:3-8). 그리고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예배와 관련한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담고 있다(출 20:2-6). 황금 송아지 사건과 관련한 가르침은 예배가 단지 인간이 생각하는 가치와 취향에 맞춰 드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레 10)로 분향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고 하시며,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사울의 예배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마 15:1-14)에 따르는 바래새인의 예배를 거부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성경이 분명하게 정해주지 않은 다른 방식과 인간이 중시하는 가치에 따른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중요한 사례는 골로새와 고린도에서 드려지던 잘못된 예배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 바울은 골로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자의적 숭배”(ethelothreskia, 골 2:23) 또는 “스스로 만든 종교”라고 규정했다. 골로새 교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를 예배에 도입했다(그들은 그 원천을 천사라고 주장했다. 골로새서 2장 18절의 “천사 숭배”가 그런 의미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과도한 방언과 예언이었고, 그로 인해 바울 사도는 회중 예배의 규범을 정했다. 바울은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숫자와 순서를 “모든 삶”에서 다 적용되지는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규정했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못하게 했고(고전 14:27-28), 두세 명만이 예언을 하게 했으며, 그것도 순서대로 하게 했다(29-32). 적어도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가르침은 회중 예배가 규제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식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예배의 특정 요소가 부각되었다. 성경 읽기(딤전 4:13), 말씀 선포(딤후 4:2), 찬양(엡 5:19; 골 3:16), 그 중에서도 말씀 전체뿐 아니라 시편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탄생-삶-죽음-부활-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전개를 드러내는 찬양 부르기와 말씀을 중심으로 한 기도(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 마 21:13)다. 그리고 교회가 담당해야 할 두 개의 성례인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서 말씀을 바라보기(마 28:19; 행 2:38–39; 고전 11:23–26; 골 2:11–12)다. 거기에 추가해서 가끔씩 들어가는 요소인 맹세, 서원, 극한 금식 그리고 감사도 말씀 속에서 인정되고 부각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5 참고).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부적절함과 어리석음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주 예배에 광대가 나와서 성경 말씀을 마임으로 공연할 것이라고 광고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예배가 다 성례만 치르는, 공장에서 나온 똑같은 모양의 과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영역에서 그렇다. 따라서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가스펠송을 부를 것인가, 또는 성경을 세 구절 읽을 것인가 아니면 세 장을 읽을 것인가, 기도를 한 번에 길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번에 나눠서 할 것인가, 성찬식 때 쥬스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진짜 포도주를 마실 것인가 등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적용되거나 언급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러나 누군가가 예배 시간에 춤을 추거나 드라마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성경 어떤 구절이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설교자가 강대상 위를 다니면서 목소리를 연기자처럼 하는 것도 드라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논의에서 벗어난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시도며, 이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시에 이 논의의 핵심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명령은 고사하고, 여기에 관한 그 어떤 언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성경적 해석 규칙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 한, 시편의 내용을 가지고 또는 법궤 앞에서 분명히 벌거벗고 춤을 춘 다윗의 사례를 갖고 지금 이런 문제를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런 식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바로 신앙 양심의 역할이다.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없는 경우, 우리 모두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 회중을 향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예배 인도자” 또는 강력한 목사의 지시를 받으며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 공격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문장은 이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말씀에 위배되거나 말씀에서 이탈된 인간적인 교리나 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양심을 떠나 그런 인본적인 교리를 믿거나 그런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맹목적인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0:2). 하나님이 주신 명백한 지침인 경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속박이고 율법주의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번역: 무제
영성
예배
규범
원칙
참된예배
성경적예배
신앙양심
웨스트민스터
자존심, 자존감 그리고 하나님의 의
by 노승수
2020-06-06
“자존심을 지켰다”라는 우리말 용례에서 보듯이 자존심이란 자기감정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과 시선에 기대어 있다. 즉 ‘자존심’이란 타인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한, 혹은 평가할 것 같은 것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이다. 이 “타인이 평가할 것 같은 자기”는 실제 타인의 평가보다 더 이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짜내게 되지만 사실 자신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속에 비참함과 패배감이 휘몰아치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센 척하게 되고 아닌 척하게 되고 경직되고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더 신경질적이 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기 정당성’ 혹은 ‘자기 정체성’을 ‘타인의 시선’에 두게 됨으로 자신은 여기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도한 자기방어는 적절한 선을 알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불안 때문에 자기 통제 행동이 어느 선이 적절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 그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서 강박적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안 때문에 특정 행동이나 사고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가령, 감기약을 먹더라도 보통은 몸이 회복되면 약 먹는 것을 잊어서 약이 남게 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인간 행동의 자연스런 패턴이다. 이에 반해 건강에 대한 염려나 불안은 이렇게 몸이 보내는 일련의 신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하고 강박적으로 약을 복용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환경 적응에서의 적정선을 잘 알지 못하게 된다.‘자존심’은 적정선을 알지 못하는 자기 방어의 한 종류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지만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자기를 확장함으로써 가족이 가깝고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더 함부로 대하는 패턴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자존심과 같은 ‘자기 의’는 과장되어 있고 일종의 속박 시스템처럼 작동해서 감시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스스로 감시하는 체계처럼 작동한다.심리학은 ‘자존감’이라는 용어를 통해 자존심과 다른 자기 가치에 대한 긍정적 신호들을 밝혀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신뢰 관계를 맺고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형성하는 사회적 인간의 근간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심리학자 에릭슨이 말한 “신뢰 대 불신”의 시기 동안에 애착 경험이 안정 애착 상태인 아이들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안전하다는 믿음과 호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 심상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존감이다.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존심’이든지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자존감’이든지 그 발생적 기원은 본질적으로 같다. ‘자존심’은 주로 불신을 기초로 해서 생기는 감정이고, ‘자존감’은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이신칭의”를 대신할 수 없다.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좀 더 잘 기능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고, 자존심이 센 사람은 내면적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역기능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 속에 있는 죄 문제에 대해서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신자가 갖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루터의 표현을 빌자면 "의롭게 된 죄인"이라는 두 국면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각성을 이룬 사람은 자신의 심상 이미지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부패를 깊이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인인 나를 깊이 사랑하시고 용납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경험을 내포한다.이렇게 하나님의 의로 무장된 사람과 자존심 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가지는 결정적 차이는 자기를 용납하는 방식과 타인을 용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깊은 부분까지 이해한 채로 용서받은 사람은 그런 형편에 처한 사람을 더 잘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을 더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자기를 무조건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자신을 용납할 수가 있다. 자존감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와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서적 이미지들로 인해 인간이 지닌 현실 곧 고통과 비참에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반대로 자존심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내면의 높은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기 힘들고 계속된 자기 정죄로 인해 율법주의로 기운다는 데 있다.자신의 죄와 그에 따른 비참함을 심대하게 깨닫지 못하면 결코 나를 사랑하는 타자 곧 삼위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도 깊이 깨달을 수가 없다. 사랑이란 상승을 위한 동경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깨달아가는 하강의 힘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가 ‘상승의 힘’이라면 성경의 아가페는 ‘하강의 힘’이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의가 획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생활
감정
자존심
자존감
자기의
하나님의의
심리학
이신칭의
오늘날에도 십계명이 필요하다
by Derek Rishmawy
2020-06-05
진창에 빠진 것 같은 우리 사회는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아 여러 격동이 가져다준 역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한편으로, 우리는 모두 다 개인을 제한하는 규칙과 규율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공개적인 개인주의자다. 또한 0과 1로만 표현되는 디지털 세상(binary systems)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나 자신이 하는 이야기 속에 숨은 다양한 측면조차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도덕주의자의 칼날을 벼리면서 오늘날 중대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도덕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며, 진보와 정의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거할 준비가 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불필요한 관습과 불의로부터 구원하기는 커녕, 어떤 때는 오히려 불의가 더 활개치도록 만드는 법률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을 맞고 있다. 한편, 과거에 일찌기 없었던 안락함과 건강 그리고 다양한 놀이에 둘러 쌓인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초조해하고 있다. 지난 20년을 통틀어 지금 가장 높은 십대 자살율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묘사했던 문화적 무질서(anomie, 아노미) 또는 무법 상태에 의하면, 경제와 사회 위기의 시대를 맞아서 공유되던 사회적 규범, 의미 및 응집력의 붕괴는 결국 일반화된 허무감, 절망, 그리고 목적 실종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물론 뒤르켐은 보다 더 광범위한 사회에 관해서 말한 것이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는 너무도 많은 근본 없는(rootless) 젊은이들이 세수하라고 잔소리하는 언니 같은 존재, 엉망이 된 삶 속에 질서를 잡으라며 아버지와 같은 조언을 하는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역자 주: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과 같은 라이프 스타일 또는 자기 계발 코치에게 의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그들이 직장에서 겪는 개인적인 아노미와 심리적 불안을 느낄 수 있다.지금까지 말한 사회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 즉 그의 “열 개의 말씀(Ten Words)”을 설명한, 피터 레이하르트(Peter Leithart)의 소책자, ‘The Ten Commandments: A Guide to the Perfect Law of Liberty’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은 전형적인 레이하르트의 작품이다. 모든 페이지는 거미줄 같이 촘촘한 성경 신학과 세밀한 주석, 히브리 문장 구조 분석(키아즘, chiasm), 역사적 사실 복원, 그리고 신학적 단어 놀이로 가득 차 있다. 속이 꽉 차고(Pithy) 실용적이며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이번 레이하르트 책은 단 한 글자도 버릴 게 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말씀이 책의 구조는 단순명료하다. 첫 두 장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십계명이 지금도 교회에 여전히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리고 십계명의 순서대로 책을 저술했기에(기본적으로 개혁주의의 순서에 따랐는데, 단지 첫 번째 계명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동방 가톨릭 쪽 서문을 포함했다), 이 책의 본문은 총 열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신학적 구조다. 십계명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 있는 ‘테오폴리스연구소’(Theopolis Institute)의 소장인 레이하르트는 십계명을 출애굽기와 성경 전체의 광범위한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바라보면서 십계명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내 산에서 직접 전달해 준 말씀(Words)이라고 주장한다(출 4:23).하나님은 그의 첫 번째 계명을 그의 첫 아들인 아담에게 주었다. 시내 산에서 그는 그의 아들, 새로운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열 개의 말씀은 명령이다. 그러나 이건 단지 명령으로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아버지 되신 야훼가 그의 아들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분명하게 밝히셨다. 열 개의 말씀은 다름 아닌 ‘개인적인 선언’이고 이것이야말로 야훼가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좋은 아버지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방향과 목적 그리고 질서를 주셨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자유의 한계를 분명하게 그려 주셨다. 열 개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부자간의 대화”인 셈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되고 싶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열 개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 개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진술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것은 또한 인류학적 진술, 하나의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성을 지니기 위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물론 구약의 내용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열 개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계속 실패함으로써 아버지 야훼를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아담에게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감사하게도 또 다른 아들이 등장한다. 바로 마지막 아담, 진정한 이스라엘, 아버지 야훼와 똑같이 생긴 존재, 바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열 개의 말씀을 성취하고 또한 그 열 개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했다. 궁극적으로 십계명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기독교인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십계명은 바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아신 자들로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한”(롬 8;29) 형상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진리의 말씀이런 전체적인 구조를 염두에 두고 레이하르트는 각각의 계명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계명은 다 그 뿌리를 신구약 말씀,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예수님의 사명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자유(filial freedom)를 상황에 맞게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예를 들어서, 거짓 증언하는 계명에 관한 장에서, 레이하르트는 구약에 등장하는 다양한 법률과 잠언 그리고 선지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인생 전체에 걸쳐서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들이 다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진실한 간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향한 폭력을 억제하고(출 23:1; 신19:15-21; 약 3:9) 공정한 사회생활에 필요한 조건을 설정한다. 따라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채로 태어나는 우리는 야훼 아버지처럼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우리의 말을 통해서 생명이 창조될 수 있도록 말이다(창 1장).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시대에 가십, 거짓 증언, 중상모략 및 치명적인 거짓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위험이다. 우리는 지금 트위터를 통해 명성을 얻을 수도 있고, 가짜 뉴스에 의해 죽음을 다루는 이데올로기가 나타나기도 하며, 또한 디지털 군중(네티즌)에 의해서 한 순간에 명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식의 다이나믹한 세상 움직임은 교회조차 찢어놓을 수 있으며, 또한 믿는 자들조차 중상모략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랑의 모습으로 가장한 채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는 비겁한 침묵의 방법을 선택하는 대신, 레이하르트는 신자들에게 선지자적 순교(prophetic martyrdom)를 실천하라고 독려한다. 이웃과 적을 담대하게 사랑하는 것은 선지자들처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짓말의 아비인 사탄에게 포로가 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때로는 생명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참되고 충실한 증인 예수”의 형상에 맞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된다. 독자와 목회자를 위한 말씀이 짧은 글을 통해서 이 책의 가치를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이 정말로 기가 막힌 소책자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만약에 조만간 구약을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소스를 바탕으로 구약을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분량과 다루는 주제 그리고 그리스도에 중점을 둔 주제 의식까지, 이 책은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는 데도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마무리하는 의미로 설교자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을 해야겠다. 설교를 가르치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선지자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전달하라고 부름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전에 십계명을 가르친 적이 없거나, 가르친 적이 있어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내년에 다시 십계명을 다룰 것을 고려해 보라. 성과 돈, 또한 권위에 관한 인기 없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자기표현에만 치중하는 개인주의 시대를 살면서 불필요한 불안을 겪지 않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시가 필요하다.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구조와 복음의 은혜 즉 야훼 아버지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열 개의 말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ther, Who Art on Sinai: The Ten Commandments Today번역: 무제
구약
십계명
그리스도론
시내산
열개의말씀
피터레이하르트
무한 경쟁의 군선교 ‘황금 어장’
by 김돈영
2020-06-04
떼창의 강렬함을 아는가“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익숙한 가사의 찬양이 흐른다. 그러나 화면에는 낯선 장면이 나온다. 체육관 크기의 예배당을 가득 채운 젊은 청년들이 반주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흔히 말하는 ‘떼창’이다. 실로암을 수천 명의 젊은이가 떼창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 가수들이 내한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바로 이 떼창이라고 한다. 그만큼 떼창은 열정적이고 듣는 이가 전율을 느끼도록 할 만큼 강렬하다. 그런 이유로 실로암 떼창은 한동안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다. 복음 전파를 위한 “황금 어장”, 젊은 청년들이 가득한 곳, 바로 군대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한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도록 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교회와 교단에서 그 일에 참여하고 있다. 통계를 보면 2018년 한 해 동안 진중에서 세례를 받은 병사는 13만 명이 넘는다. 2017년 14만 명, 2016년 16만 명의 병사가 군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니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통로가 아닐까 생각한다.그런데 수치를 보면서 뭔가 의문이 생긴다. 해마다 많은 청년이 세례를 받고 있는데, 왜 지역 교회에는 청년들이 줄고 있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길어야 2년 정도면 전역하고 사회로 돌아온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매월 세례받은 청년들이 제대한다. 그들이 지역에 있는 교회로 나간다면 청년은 점점 많아져야 정상일 것이다.무엇이 문제일까?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세례만 받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교육은 당연하다. 또한 믿음이 흔들릴 때 옆에서 붙잡아주고 이끌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한 사람의 성도로 신앙의 안정을 찾으려면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군대에서는 어떠한가? 누구를 양육할 것인가?병사들이 다니는 군 교회는 현재 1천여 개 가량 된다. 대부분의 군 교회는 민간 목회자가 사역하고 있다. 충분한 재정의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지출은 있지만, 수입은 후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함께 사역할 사역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담임 목사와 그 가족이 거의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의 종교 활동 시간은 정해져 있다. 주일 오전 예배를 위해 함께 왔다가 함께 복귀한다. 그 말은 훈련소에서 세례받은 초신자부터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함께 왔다가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일 예배 전후의 짧은 시간을 활용하여 초신자의 신앙 상담에서부터 성경 공부, 제자 양육, 리더 교육 등을 진행해야 한다. 지역 교회에서 각 부서의 사역자가 여러 날 동안 진행해야 할 일을 단 하루에 그것도 한두 시간 안에 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능해 보이는가? 결국은 별도로 상담하거나 양육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신병이나 초신자의 관리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다른 병사들도 양육해야 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의 단면을 말해주는 듯 입대 전에 청년회, 선교 단체, 찬양팀 등에서 열심히 활동했다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배조차 참석하지 않는 병사들을 자주 만난다.교회에 가라고 말하지 못한다“오늘은 위문 행사를 왔으니 특별한 종교가 없는 사람은 종교활동 시간에 교회로 가도록”오래전에 전역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안내 방송을 기억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병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맛있는 간식과 좋은 볼거리를 준비하고 병사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볼거리와 간식에 앞서 짧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등록시키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러한 행사의 실효성과 평가는 차치하자. 왜냐면 지금은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이 종교 활동으로 특정한 곳에 가라고 강요할 수 없다. 대대장이 교회 다니고 있다고 해서 교회 나가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활관(내무반)에서도 전도 활동을 할 수 없다. 보통 교회, 성당, 법당으로 나누어지던 종교 활동에 ‘무교’라는 그룹이 더 생겼다. 그래서 무교인 사람에게 다른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예배하도록 권면하고 잡아주고 끌어주는 것이 힘들어졌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예배보다 좋은 것을 찾아‘군대스리가’라는 말이 있을 만큼 축구는 군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강의를 위해 부대에 들어가던 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토요일인데 축구장에 사람이 없다. 농구 코트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병사들 대부분이 생활관에 있다는 것이다. 금요일이면 모든 일과를 마치고 이틀간 휴식에 들어가는데 대부분 실내에 있는 편의 시설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부대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코인 노래방이나 당구장, 사지방(사이버 지식 정보방)으로 불리는 PC방 등이 마련되어 있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개인 휴대 전화를 소지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고스란히 예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배 참석 인원이 꾸준하게 줄고 있다. 휴대 전화를 소지하면서부터는 10~20퍼센트, 많게는 절반가량이 더 줄었다고 한다. 예배에 참석하도록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동안 무언의 압력으로 예배에 참석했던 청년들이 누구의 간섭도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황금 어장은 우리만의 몫인가?병영 생활의 많은 변화로 인해 양육하는 것은 물론 예배에 참석하도록 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황금 어장에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있는 이단들이다.어느 부대에서 만난 병사는 신병인데도 모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공식 예배뿐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신앙 상담과 성경 공부까지 요청했다고 한다. 목회자의 눈에는 이보다 기특한 병사는 없을 것이다. 차기 군종병 1순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입대하기 전 1년 동안 성경을 공부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신학교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그리고 군대에 왔다. 군종병을 시켜달라고 한다. 생활관에서 심방하거나, 전도하는 등 종교활동이 가능한 사람은 유일하게 군종병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면회를 통하여 포교 활동을 한다. 면회를 오면서 풍성한 먹거리를 가지고 온다. 친하게 지내는 병사를 불러서 함께 면회한다. 몇 번 지나면 이제는 여자 청년을 데리고 온다. 면회 나온 병사와 여자 청년이 자연스럽게 연락하도록 한다. 전역할 때까지 서로 좋은 친구로 지내도록 한다. 그리고 전역하면 그 병사는 그가 속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간다. 포교 활동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우리 청년들에게도 노출되어 있다. 아직도 ‘황금 어장’이라고 생각하는가?결론적으로 말하면 병사들을 향하여, 군대를 향하여 생각하는 복음 전파의 황금 어장은 단지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 천주교와 불교를 비롯하여 무교와 이단까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막연하게 황금 어장으로 생각하는 데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고기를 잡기 위하여 고기 잡는 방법을 연구하고, 새로운 도구를 준비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의자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로암 떼창을 보면서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만일 지금까지 그랬더라도 이제부터는 바꾸어야 한다. 머리에 냉수를 끼얹고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만 남게 될 것이다. 황금 어장의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아니 모두 빼앗긴 뒤 이제는 남의 것이 된 황금 어장을 바라보며 ‘그땐 그랬지…’하는 통탄의 시간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황금 어장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살펴보자. 최소한 그물을 던지더라도 알고서 던지자. 그런 노력이라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군선교
선교전략
황금어장
실로암
진중세례식
군종병
신병교육
종교활동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by Brett McCracken
2020-06-03
미국에서는 COVID-19로 인해 세상이 멈추고 재택 명령이 내려진 이후, “필수적인 것(essential)”과 “비필수적인 것(non-essential)”이라는 두 단어가 대화 중에 중요하게 떠올랐다. 필수적인 것으로 분류된 상점과 서비스는 문을 열 수 있는데, 슈퍼마켓, 철물점, 주유소, 애완동물 가게, 세탁소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 외 다른 것들은 “비필수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문을 닫아야한다. 그 중에는 체육관, 영화관, 카지노, 소매점, 스타디움, 그리고 콘서트장 등이 있다. 교회는 다름 아닌 후자 곧 비필수적인 것에 포함되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 명령에 따라 예배를 취소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을 때 발생하는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이라는 상식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하루라도 빨리 예배를 재개할 수 있도록 정부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조금씩 예배를 재개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 모임이 바이러스 전파를 증가시킨다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교회 폐쇄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비필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서 항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지금 COVID-19 감염을 막는 전략 자체에 대해서 엄밀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역 교회의 가치다. 비록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존중해야 하고 또한 교회를 다시 여는 것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교회가 너무도 쉽게 “비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보며 세상이 교회의 위치를 얼마나 손상시킬지에 대해서 걱정해 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교회, 있으면 좋은 것, 그러나 결코 필수적이진 않은 것캘리포니아 사회 활동 재개 계획에 따라서 3단계가 되기 전까지는 교회 모임이 재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지사의 발표를 들었을 때 나는 슬펐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감염 위험이 높다는 사실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주지사의 발표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교회 모임이 얼마나 초라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사회 활동 재개 계획에 따르면, 교회는 네일샵, 체육관 그리고 영화관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데, “있으면 좋은 사치”지만 없더라도 오랜 시간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항목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교회는 한마디로 엔터테인먼트 항목에 속해 있다. 즐기는 데는 필요하지만, 인간에게 또 사회 활동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더더욱 건강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재개해야할 가치는 전혀 없는 것이 교회다. 주류 판매점, 마리화나 판매점, 그리고 골프 클럽은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것”으로 구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굳이 없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생각인지 알고 있는가? 단지 수십 년 전만 해도, 사회에서 교회에 가는 것은 말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중심이 되는 활동이었다.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교회 모임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COVID-19 전염병이 새롭게 만든 현실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현실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은 무슨 반기독교 세력이 만든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기독교인 스스로가 초래한 현실이다. 신앙, 철저히 개인화된 소비재교회에 가는 것이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한 소비자 습관 수준으로, 다시 말해 굳이 없어도 상관 없는 선호도의 문제로 전락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교회에 책임을 지고 있고 또한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대신, 교회를 개개인이 나름의 영적 구도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하다면 사용할 수도 있는 일종의 선택지의 하나로 보게 되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회(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지만(예, 엡 3:7-12), 우리가 가진 무감각한 교회론은 종종 교회를 확실하게 비본질적인 장소로 강등시켰다. 표현적 개인주의를 누르기보다는 더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 하에, 교회가 단지 사람마다 다른 영적 구도의 과정에서 있으면 좋은 것 정도의 수준이라면, 아무리 긴 기간이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 없이 지낼 수 있다. 게다가 얼마든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에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들 흔히 간주한다. 성경책, 괜찮은 워십 찬양, 그리고 한두 개 영적인 팟캐스트만 있다면 신앙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영적 건강을 위해서 우리에게 정말로 교회가 필요한가?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구분 없이 다 신앙과 관련해선 “사유화된 개인 영성”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특히 “개인”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키고 표현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 주권과 개인의 힘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는 “사유화”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적인 삶과 정책으로부터 종교가 분리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앙과 관련해서 “안전하게 집에서 신앙생활 하기”야말로 진보주의자 입장에서 영구적으로 실행하기를 바라는 정책이다.) 그러나 신앙이 사유화되고, 개인화되고 또 소비 영역으로 전락하면, 모든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와 연관을 가지지 않은 개인적인 영성은 언제라도 일관되지 않은 이상한 상태로 변질될 수 있다. 크게 볼 때, 지역 교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사회 또한 적지 않은 손해를 본다. 교회는 여전히 사회 공동체에 너무나 중요하다(푸드 뱅크, 노숙자 지원, 교육 지원, 고아 돌보기, 상담, 등등). 또한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건강에 기여한다. 교회가 다시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할까? 정부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교회가 스스로를 “필수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정부 방침에 저항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 문화 전쟁에 불을 붙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교회를 “비필수적인 것”으로 묶고 있는 이 팬데믹은 기독교인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라졌을 때, 세상은 과연 교회를 그리워할까? 교회가 애초에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또 하나님의 사역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마 16:18-19) 기독교인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허전함을 느끼기는 할까? 어떻게 해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눈에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나는 이 전염병이 그리스도의 연합된 몸이자 영광스럽고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인 교회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메간 힐(Megan Hill)은 그녀의 훌륭한 새 책인 ‘속한 곳’(A Place to Belong)에서 이렇게 썼다. “지역 교회의 겸손한 모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과 교제한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특권은 없다.”나는 또한 이 전염병을 통해서, 사유화된 영성, 소비자화 된 영성이 충분하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깨달으면 좋겠다. 사유화되고 소비자화 된 영성은 개인에게도 또 사회에게도 좋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굳이 집을 나설 필요조차 없게 하는 “나와 예수님 신앙”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바로 건강하고 봉사하고 또 성장하는 지역 교회에 뿌리를 내린 신앙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신앙은 교회를 통한 신앙이다. 교회를 통해 너무도 막강한 존재감을 갖게 된 신앙, 그래서 행여나 교회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바로 눈치채고 애통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신앙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We Don’t See Church as ‘Essentia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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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신자로 양육하기
by 장대선
2020-06-02
과거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신앙심의 패턴은, 목회자에 대한 존경과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꼽을 수 있다. 특별히 그것은 구한말(舊韓末)의 혼란 가운데 민족 계몽에 지대한 역할을 한 기독교 교역자들의 헌신 덕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계몽 운동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제국의 승인을 받은 교역자들 즉 조선신학교 출신들과 신사참배에 찬동한 자들이 아닌 해외에서 들어온 선교사들과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민족지도자들을 통해 이뤄졌다.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지인 조선을 다스리던 일제(日帝)는 개화파 조선민족주의 계열의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적극 탄압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내의 신앙 계몽 운동에 대해서도 핍박과 탄압을 가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우민화 정책(愚民化政策)을 통해 민족정기와 계몽 의식을 말살하고자 했으며, 조선 민중의 역사의식과 계몽 의지를 철저히 박탈하여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를 꾀했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나치도 제국주의 정책으로 유럽을 지배하려 했는데, 일본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나치도 대중 선동에 의한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 핵심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였다.) 독일의 대중 선동 역시 일본 제국주의처럼 단일한 가치관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수립 후 쿠데타로 집권했던 정권들이 그대로 답습했던 특징이기도 하다.제2차 세계대전 무렵의 독일과 일본은 공통적으로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특색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는 쇼와 천황(昭和天皇), 독일의 경우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제국 주의 종교의 특징은 로마 가톨릭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형태를 답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살아있는 신적 존재인 교황을 중심으로 단일화 된 지배력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로마 가톨릭의 장구한 전통이며, 그러한 형태는 기독교 외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이에 반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자신들을 추앙하는 많은 신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사역이 아니라, 성도들이 복음을 깊이 깨닫고 자발적으로 견인(堅忍)할 수 있는 신앙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최우선 관심을 기울였다.물론, 세력과 집권에 연연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낮아짐의 본을 보이셨고, 공생애를 통해 비움의 본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러한 낮아짐과 비움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했던 제자들은 스승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적인 양육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그대로 믿음의 후배들을 양육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자를 양육했던 원리와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어떤 원리나 근거를 밝히기에 앞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제자들과 신자들을 자신에게 구속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신자들이 독립적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모일 수 있는 신앙의 깊이를 갖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질문이나 군중의 물음에 대해 항상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비유(analogy or metaphor)를 들어 그들 스스로 깊이 숙고해 볼 수 있도록 하셨다.비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리송하게 만들려는 의도의 답변 방식이 아니라, 그 본질이나 실체에 더욱 근접하게 설명하기 위한 답변 방식이다. 그러므로 비유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그 생각의 심도를 말함이지 난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비유에 대한 숙고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성경의 기록을 신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사도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한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성경의 기록 방식과 같이 특정 시간이나 장소까지 언급하는 파피루스는 일반적으로 당대에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성경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별히 35절에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사 53:7 이하)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빌립이 결코 간단한 답변이 아니라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길게 변증한 것을 알 수 있다.한편, 1세기 기독교 안에서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회중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본문이 또한 사도행전에 있는데,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라고 적힌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것을 면밀히 조사하여 받아들이는 점에서 데살로니가인들보다 훨씬 고상하더라고 평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경의 본문을 통해 사도들 당시의 1세기 교회가 얼마나 깊이 사고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도들과 직분자들은 신자들을 결코 감정에 휩쓸리도록 이끌지 않았고,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성경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교인들로 양육하지 않았던 것이다.요즈음 한국의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인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참된 믿음이 없는 신자 즉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s)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에 출석하지만 결코 사고하지 않으며 믿음과 실천이 별개인 신앙인은 이 시대의 우민화된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사도행전 8장의 빌립과 같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마 28:20)” 할 사역자들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다.
목회
교육
비유
사도
신자양육
애국계몽운동
성육신
사이비종교
팀 켈러가 드리는 매일 기도
by Tim Keller
2020-06-01
다른 많은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존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에서 ‘매일 기도’와 관련해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칼빈의 말을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랬을지 한번 상상해 보라.칼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권고를 지적하며, 뻔한 이야기 같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루 종일, 또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너무도 약한 우리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고, 또 너무도 게으른 우리는 자극을 필요로 하기에 우리 모두는 이런 훈련(기도)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칼빈은 비록 짧더라도 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지정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오로지 기도에만 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루 중에 다음과 같은 다섯 번의 기도를 권고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일터로 나가기 전에점심 식사 때식사 후에(또는 일이 끝나고)잠자리에 들 준비가 끝났을 때그리고는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기도가 결코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미신적인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하나님께 진 기도의 빚을 갚자'는 식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도록 강요하겠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 기도를 작성하기기도에 관한 칼빈의 이런 권고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칼빈이 이 다섯 번의 기도를 ‘1542/45 제네바 교리문답’(1542/45 Geneva Catechism)에까지 실제로 포함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과 가족 단위로 기도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칼빈의 기도문은 또한 나 자신의 기도문을 작성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내가 칼빈의 도움을 받아 기도문을 작성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고한다. 내 기도문을 사례로 삼아 당신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어 보라. 나의 경우에 기도할 때 참고로 삼기 위해 쓴 일 분 정도 걸리는 기도문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성경을 통해서 매일 아침 배우는 진리를 다시 기억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 그리고 복음과 더불어 온종일을 살 수 있도록 내 하루 전체를 “미리 형성했다”(frame).다음은 내가 쓴 기도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 자신의 기도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만 사용하도록 하라.아침에 깨어나서: 사랑을 구하는 기도아버지, 잠에서 깨는 이 순간까지 제 목숨을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오늘 필요한 사랑을 공급해 주십시오. 먼저 당신의 사랑을 알도록 (그래서 내가 하루를 살면서 두려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 넘치게 (교만하거나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냉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영이 내 마음을 비추게 하시고, 그 비춤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내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지속하지 못하는 좋은 시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당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는 그날까지 나를 향한 당신의 은혜를 하루도 멈추지 말고 더 부어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영광을 계속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도 다 당신의 은혜로 가능하기에, 나로 하여금 오늘 하루도 기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또 나의 의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도 언젠가 내가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는 날이 있을 것임을, 내가 부활하는 날을 맞을 것임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인내를 구하는 기도주님, 하루 종일 당신의 임재를, 당신의 약속 속에 담긴 결실과 인내를, 내게 필요한 지혜와 연민을, 그리고 위험과 역경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느끼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일을 하는 중에 어떤 수준의 성공과 어려움을 맞더라도 다 당신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 생기는 방해라면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루의 중간에: 임재와 기억을 구하는 기도오, 주 하나님, 음식과 피난처를 통해 나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통해 내게 새생명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쁜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좋은 것들을 내게서 빼앗지 않으실 것이라는 평안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완전한 삶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의 임재를 즐거이 누리게 해주십시오. 또한 내가 항상 짓는 죄악인 완벽주의적 일 중심주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기 위안에서 자유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시고, 오로지 내 마음이 저 위에 있는 것들,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곳으로만 향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침 경건의 시간에 깨달은 것을 다시 기억할 것)일을 마치고: 오늘 만나거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주님,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이들을 축복하시고 또 우리에게 해를 입혔거나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는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움과 고통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그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선을 행하시며, 애통해 하시는, 당신의 아들이자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잠자리에 들며: 쉼을 위한 기도오, 주님, 오늘 밤 모든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시오. 몸만 쉬는 게 아니라, 오늘밤 주님이 바라는 모든 부분에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영혼과 양심이 당신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영적인 쉼까지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악을 묻으시고 내가 당신의 임재하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당신의 소유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나의 이 부족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im Keller Seeks to Pray Without Ceasin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존칼빈
경건
기도
팀켈러
제네바교리문답
주일 예배와 전도의 관계
by Michael Keller
2020-05-31
주일 예배에서 전도(evangelism)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주일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 모두 신자들이라고, 혹은 불신자들이라고 넘겨짚어도 되는 걸까?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은 초대교회 예배에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참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배를 위해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자였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미쳤다”며(23절) 거부감을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25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신자들이 자신의 행실을 돌아봐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물론 이것은 예배 구성 요소 모두를 불신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 하려면 예배가 아니라 콘서트나 토크쇼를 열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찬송은 불신자들에게 어렵다. 성찬식도 그들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일 것이다.죄의 끔찍한 본질,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회중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하는 설교야말로 불신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에게는 복음이 언제나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이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배의 많은 부분이 생경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울은 복음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수치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을 감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적절히 상황화(contextualize)하여 불필요한 혼란과 불쾌함을 없애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수준으로 여기지 말라 하신 것처럼(막 7:8–9), 우리 역시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예배 방식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복음을 꼭 들어야 하는 이들을 배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시편 105편 말씀처럼,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할 뿐이다. 어떤 식으로 이 일을 해야 할까? 시편 105편은 계속하여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이를 일컬어 ‘송영(頌榮)으로 하는 전도’(doxological evangelism)라 했다. 엄격한 의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성경은 예배에 대해 엄격한 모델을 제시하지 않지만 찬송, 애통, 죄의 고백, 확신, 그리고 파송에 대한 일반적인 방식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가르칠 수 있는 예배의 공간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 예배에 올 것이라는 가정 하에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친구나 동료를 교회로 초청한 교인들은 그들이 예배 중에 불편해 하는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적어도 다섯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각 항목에는 실천 사항들이 있다. 기준 1: 우리가 쓰는 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난 요즘 상황에서는 이 점이 교회에게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기독교 문화는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기들만의 언어”와 방언을 쓰며 존재해왔다. 필자가 대학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신자 친구 한 명을 교회에 데려온 적이 있다. 예배 중에 설교자가 “어린 양의 보혈이 여러분의 죄의 구속을 위해 흘려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할 시간입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실천 사항: 알기 쉽게 설명하라. 나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종종 교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들이 설교 본문이나 설교에서 설명하는 개념에 대해 가질 만한 반론이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불필요한 기독교 용어를 피하라. 사람들이 모르는 말을 써야만 한다면, 그 의미를 설명해 주라. 기준 2: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어떤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예배라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끊임 없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예배(worship service)라는 개념을 낯설어 한다.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아닌 요즘 시대에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사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실천 사항: 필자가 섬기는 리디머링컨스퀘어교회(Redeemer Lincoln Square)는 각 예배 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보 여백에 설명을 달아 놓는다. 예를 들어, 죄를 고백하는 순서의 경우 이렇게 적혀 있다. “죄의 고백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허상들을 좇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 삶을 재정비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허물들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기준 3: 적합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SNS가 계속 광범위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잘 포장된 자기 모습만을 온라인에 올리면서 불신(distrust)이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성을 갈망한다. 우리 삶이 항상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에만 가면 모두들 행복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진실된 모습, 죄인이지만 소망이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우리 예배 중에 보여 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실천 사항: 예배에는 소망에 관한 것뿐 아니라 항상 애통과 죄의 고백에 관한 요소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개인사를 지나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내가 겪는 어려움을 교인들과 나눔으로써 이 기준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기준 4: 믿지 않는 이들도 예배에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설교 중에,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진 반론들을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진술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한 반론들을 이미 들어봤고 기독교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우려를 가졌는지 당신이 잘 이해한 내용을 진술하면, 예배에 나온 불신자들은 목사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천 사항: 네 가지 정도를 실천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교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동안 믿지 않는 이들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기도문을 인쇄하여 나눠주라. 둘째, 예배 시작 전에 불신자들을 소개하고 환영하는 시간이 있으면 좋다. 셋째,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라는 말을 넣으면 목회자가 그리스도인 된 교인들을 향해서도 설교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넷째, 설교 후 Q&A(질의응답) 시간을 도입해 보라. 우리 교회에서는 이 시간을 Q&R (Question and Response, 질문과 반응)이라 부른다. 질문에는 반드시 반응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주보에는 목사들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어서 질문이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예배 후 15분에서 20분 내에 문자 메시지로 질문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기준 5: 말씀과 삶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불신자든 신자든 모두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 이끈다. 기독교 교리는 중요하고, 배워야 마땅하지만, 교리는 우리가 먼저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된다. 의무감이 아닌 사랑 때문이다. 죄책감에 근거한 의무가 아닌 감사가 우리에게 끊임없는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선한 삶을 위한 능력은 그제서야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실천되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면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배 중에는 사역 보고 및 헌신자 모집 광고를 통해 다양한 긍휼 사역 및 실천 사역을 부각시켜 보여 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예배 참석자들은 이를 통해 은혜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는지 보게 된다. 실천 사항: 이 항목에 대한 실천 사항 역시 네 가지다. 첫째, 분기마다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애통해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의 필요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시도해 보라. 둘째,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사역 기회들에 대해 예배 중에 광고하라. 셋째,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주시하면서 기도하며 걷기(prayer walk)를 해보라. 넷째, 신자든 불신자든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참된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매 설교마다 강조하라. 물론 이 글의 내용이 다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주일 예배가 교회에 오는 모든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는 당신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re Does Evangelism Fit on Sunday Morning?번역: 이정훈
영성
예배
의식
형식
전도
불신자
투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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