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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지혜는 반드시 겸손하다
by Marshall Segal
2021-01-31
교만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교묘하고 소리없이 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내 귀에 속삭인다. 나를 오래 알아온 사람일수록, 그들의 눈에 나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아이러니는 그와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오래 알아온 나 자신이 스스로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망쳐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대 의견 또는 갈등이 수면 위에 떠오르면, 나는 종종 즉각적으로 (비록 무의식의 단계에서라도) 내가 옳다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증거 의무는 나와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이 져야 한다고 확고하게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법정에서 내 의견과 내 입장은 언제나 가장 합리적이다. (이런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단지 좀 더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내 입장을 잘 방어해야 한다. 어떤 대화에서도 내가 옳을 수도 있고 또 틀릴 수도 있지만, 충동은 언제나 거울에 보이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한다.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쓴 단순한 (절망하게 하는) 다음 여섯 개의 단어로 이런 나의 마음속 평안한 법정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는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너무 빨리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아예 네게 지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 그 자체는 물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울 자신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엡 1:16-17).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진짜 지혜는 더 깊은 겸손과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지혜는 단지 하나님을 향한 끔찍한 반란만을 가지고 온다(잠 26:12). 십자가에 못박힌 세 개의 울부짖음만약에 하나님이 그토록 자주 반복해서 말씀하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빨리 진도를 나갔을 것이다. 잠언은 경고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이사야 선지자도 썼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1).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 무슨 말씀이라도 우리는 잠시 멈추고 심각하게 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말씀이 아닌 경고를, 그것도 하나님이 반복해서 하고 또 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 우리는 진정한 지혜의 영을 하나님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는 명령과 더불어, 하나님은 교만과 같은 이 죄성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바울을 통해서 다음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다른 이 속에 있는 은혜를 찾을 것,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볼 것, 그리고 나의 약함이 이룰 수 있는 것을 음미할 것. 1. 나는 다른 이가 가진 은혜가 필요하다때로는 교묘하게, 또 때로는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못하다고 보거나 때로는 아예 다른 사람들을 생각 자체도 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시작된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롬 12:3).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그리고 다른 지체들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롬 12:4-5). 교만에 대항하는 한 가지 전쟁 행위는 우리 편에 있는 은혜의 군대, 즉 또 다른 모든 은혜로 가득하고 은혜의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보면서 감사하는 것이다.교만은 이기적이어서 그 자체를 다른 모든 것 위에 놓는다. 자기가 가진 지혜, 재능, 경험, 잠재력 등 모든 것이 남보다 더 낫다고 여긴다. 교만은 자신의 강점에만 집중하고 약점은 최소화한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의 약점을 극대화하고 강점을 무시한다. 그런 교만이 도전을 받을 때면, 종종 교만은 자신을 갉아먹는 자기 소비적 성찰과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바울은 교만이 우리 자신을 갉아먹도록 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나 자신만을 향한 우리의 눈을 돌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은혜를 바라보도록 했다. 진정한 겸손은 내 것이 아닌 은혜를 소리 없이 멸시하는 대신 오히려 내가 받은 은혜 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사랑하게 한다. 내게서 교만을 멀어지게 하는 방법은, 나는 몰라도 다른 믿는 이들은 잘 알거나 잘 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얼마나 쉽게 성경 구절을 떠올리는지, 얼마나 빨리 그때그때 멈추고 기도하는지, 얼마나 용기 있게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지, 얼마나 너그럽게 자신의 시간과 돈을 이웃에게 쓰는지, 얼마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거룩의 길로 인도하는지, 고통 중에도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묵상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은혜의 영역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은혜를 다 주시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로 겸손하게 하고 때로는 불편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을 의지하도록 한다(롬 12:5). 우리가 겸손 속에서 성숙해갈 때, 우리는 단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은혜 안에서 하나로 묶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하게 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제대로,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싶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고 다른 이들을 나보다 더 낫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 열심히 또 기대하는 마음으로 찾을 때만 가능하다.2.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받은 것이다다른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지혜를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지혜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내가 어떤 특별한 지식, 지혜 또는 은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대하게 드러내기 위함이 그 목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워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의견 또는 전문 지식이 필요해서 그분의 지혜를 우리에게 더한 것도 아니다(고전 1:2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고전 3:19). 어떤 지혜라도 내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혜일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잠언은 경고한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6:12). 겸손 안에서 자라고 싶다면,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게 없고 또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의 교만함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들, 죄와 거룩함, 천국과 지옥, 결혼, 양육, 사역, 섭리, 주권,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까지,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한 지혜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알았던 세상의 지혜 또는 그리스도와 관계 없는 모든 이 세상의 지혜를 다 하찮게 만들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폭력적으로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이자 인간이었던 그 분은 너무도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비극적인 안타까움은 이 세상의 실재와 영원에 대해서 이 세상이 너무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은 특히 인터넷 시대를 맞아 지혜로 위장한 정보로 가득하며, 그 대부분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 우리는 수 세기에 걸쳐 숙성되어 펼쳐질 희귀하면서도 때로는 거친 지혜, 즉 하나님이 말씀으로 드러낸 그 지혜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원한다. 네 자신이 가진 지혜가 주는 자신감을 조심하라. 은혜를 떠나서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 외에는 당신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하늘의 무한한 마음과 상상이 당신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아직도 고통스러울 만큼이나 아는 게 적다는 것을 기억하라. 3. 약할 때 나는 강하다수많은 성경 속 이야기 중에서도 아주 기이한 한 순간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천국을 열어주셨을 때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보거나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들었다. 하나님에 의해 천국까지 들어갔던 바울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지혜와 계시를 받은 것일까?"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엄청난 계시는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과 함께 왔다. 왜 하나님은 바울에게 천국을 보여주시고 나서 바로 지옥이 그를 괴롭히게 한 것일까? 바울은 한 구절 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자만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남용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흐리도록 만든다. 인간의 힘과 지혜가 아닌 약함과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일종의 가시를 지니게 된다.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 잊기에는 너무도 어두운 슬픔, 낫지 않는 병,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약함. 당신의 가시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시가 비록 사탄의 손에서는 칼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탄의 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묶여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가 주시는 가시는 삶을 구원하고, 우리의 교만을 제거하는 꼭 필요한 수술이 된다. 하나님이 반복해서 그의 자만심을 누를 때, 바울은 거기에 어떻게 반응했는가?"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고, 내가 어리석을 때 나는 지혜롭다(고전 3:18). 내가 낮아질 때 나는 높임을 받는다(마 23:12).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교만의 울부짖음이다. 우리는 우리 속의 약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롭고 겸손한 자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그에게 맡길 때 우리의 약점을 통해 일하시는 좋은 하나님을 체험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는 당신의 탁월한 능력이 상한 영혼이라는 바로 그 장소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보기에 지혜롭게 되는 것을 거부할 때, 다른 이들 속에서 넘치는 은혜를 기뻐할 때, 얼마나 내가 아는 게 없는지를 인정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약할수록 그 약함을 자랑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앞에 놓인 거울에 비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느끼는 누군가를 보게 될 것이다. 원제: Never Be Wise in Your Own Eyes: Three Cries of Crucified Prid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교만
지혜
은혜
울부짖음
약함
고통
어려움
겸손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입니다
by 김형익
2021-01-30
교우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은 목회의 타협할 수 없는 목표고 어떤 수고와 고생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갈 4:19). 참된 목회자들은 다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변화를 입게 되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지,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말해야 함에도 너무 적게 말한 것들은 없는지를 생각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회개를 너무나 적게 언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내 반성의 결과였다.마틴 루터가 95개 신학 논제에서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라고 한 것이 그 첫번째 논제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 한—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들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성전(聖殿)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3.3.9).”루터나 칼빈은 회개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로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회개라는 기준으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현저한 변화를 꾸준히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회개의 부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강단에서 회개는 낯선 주제가 되어 버렸고, 많은 신자의 삶에서 회개는 주변부로 밀려나 버렸다.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도 적지만, 그들의 기도에서조차 회개는 그 고유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단순히 회개가 줄었다거나 드물다는 것을 넘어, 회개에 대한 오해의 문제도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하면서, 회개를 오해하지 않도록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먼저 말해야만 했다. 내가 언급한 회개의 강조점을 세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로, 회개는 일생에 한 번 또는 특별한 때만 하는 게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다. 회개를, 그리스도인이 될 때 돌이키는 회심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막 1:15). 또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믿음 없는 회개나 회개 없는 믿음은 참된 회심일 수 없다. 처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일평생 믿음으로 살아야 하듯, 처음 회개로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은 일평생 회개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려서 나는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혹은 수련회에서 회개를 주로 했다. 그래서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 하는 것이란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다. 물론 특별한 때 특별한 방식으로 하는 회개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성과 싸우고 그 죄성을 죽이는 수단으로서의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나 특별한 순간에만 행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칼빈은 거듭해서 회개가 일평생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회개 자체를 위하여 힘써야 하며, 우리 자신을 거기(회개)에 헌신해야 하며, 끝까지 그것(회개)을 추구해야 한다(3.3.19).” 둘째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나는 회심 이후에도 오래도록 회개를 소위 종교적 회개로 오해하고 살았는데, 사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회개에 대해 이런 오해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오해는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나를 벌하실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겠다는 동기 그 이상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런 회개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존 파이퍼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시작되는 철저한 순종의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행동은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깨닫고 맛보는 데서 유발되어야 하며, 이러한 행동에 불을 지피는 설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지존하며 영원히 만족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의 매혹적인 모습에 기초합니다. 형제들이여, 양떼가 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그 실례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공개적으로, 그러나 심하지는 않은 말로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는 공로를 그들에게 제시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를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기쁨으로 나오라고 했을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영혼의 아픔을 느끼며 울기 시작했다.”이것이 복음적 회개다. 이것은 두려움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믿음에 이끌리는 회개다. 죄를 고백할 때 나를 쫓아내지 않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이끄는 회개다. 이런 회개는 자신이 죄를 얼마나 뉘우치는지에 초점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복음 안에서 확신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셋째로, 앞에 살짝 언급된 내용이지만, 회개는 참 하나님을 뵈올 때 발생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고후 3:18; 4:4-6). 회개는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 그 영광을 목도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필연적 반응이다. 어떻게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뵈었는데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회개는 정말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고 했다. 이점에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회개 부재의 신앙이 된 데는, 참된 설교의 부재, 설교의 타락이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강단에서 말씀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성도가 일생에 걸쳐서 행하는 복음적 회개도 회복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강단을 오염시킨 번영신학과 율법주의의 가르침으로는 결코 참된 성경적 회개를 회복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적 회개가 없는 신앙은 결국 기형적이고 괴물 같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회개를 회복할 때, 무너진 윤리도 회복될 것이고, 언젠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주님의 말씀을 한국 사회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날이 오리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은혜의 날을 주님께서 꼭 주시기를!
회개기도
마르틴루터
95개조반박문
기독교강요
존칼빈
회심
존파이퍼
복음적회개
번영신학
율법주의
잠언을 제대로 이해하는 네 가지 원리
by Robert Rothwell
2021-01-29
미국의 산업 현장에서 ‘지혜’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회자라든가 신문의 칼럼니스트는 지혜로운 조언을 구하는 청취자나 구독자에게 필요한 어드바이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규모를 막론하고 수많은 회사들 역시 전문적인 컨설턴트의 도움으로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지혜를 추구하는 인류의 오랜 갈망은 이처럼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지혜가 다름 아닌 성경의 가르침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 중에서도 솔로몬의 잠언이 특별히 지혜를 제시하는 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책의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아봄으로써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지혜란 무엇인가잠언이라는 책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려는 데 있다(잠 1:2). 이와 같은 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일은 바로 지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인생을 살아가는 ‘전문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인생을 올바로 살아간다. 다른 이들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피해갈 뿐 아니라 통찰을 가지고 다양한 일들을 처리할 줄도 안다. 마치 작지만 영특한 동물들처럼, 지혜로운 사람들은 스스로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잘 꾸려 나간다(잠 30:24-28).잠언에 따르면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된다(잠 1:7). 따라서 그러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분의 법을 준수하고자 한다(시 34:11-16; 행 5:29). 바로 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지성적인 요소가 수반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계명을 공부하고 기억해야 한다(신 6:4-9). 물론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그분에게 사랑으로 반응하며 그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려는 정서적인 요소도 포함된다(막 10:28-31; 약 2:14-26; 요일 4:16). 사탄 역시 성경을 인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기에 어리석게도 그분에게 대적한다(마 4:1-11). 예수님은 어느 부자에 대해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유는 그 부자에게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눅 12:13-21).또한 잠언에서 지혜는 ‘공의’와 동의어처럼 언급된다. 예를 들어 그 서문을 보면 지혜와 공의를 추구하게 하려고 잠언이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다(잠 1:3). 지혜로운 교훈과 공의로운 인생은 생명을 낳지만(잠 12:28; 13:14), 불경건하고 어리석은 자는 넓은 길에서 방황하다가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잠 10:14; 11:7). 우리는 분명 거룩하지 않으면서 지혜로울 수 없고, 또 지혜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거룩해질 수 없다.더 나아가 잠언은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성경의 다른 가르침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교회의 진로를 결정지을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모든 행위를 헤아리신다(잠 5:21). 잠언은 이 놀라운 현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분의 법도에 순종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젊어서 만난 아내나 남편을 즐거워하면, 우리는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관계를 누림으로써 결혼 서약을 위반하는 외도에 빠지지 않게 된다고 가르친다(잠 5:15-20).이러한 본문은 ‘평범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독불장군’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28장 13절과 같이) 죄를 고백하라고 권면하는 잠언의 많은 가르침조차도, 결국에는 우리가 그 가르침을 이행할 때 하나님 및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연합할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공의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추구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죄를 진실하게 고백할 때 다른 지체들이 그 짐을 함께 지는 교회를 이루고자 한다(갈 6:2).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경건한 지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잠 15:22).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을 내리며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 모두가 인생을 홀로 살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에서 드러내는 원숙한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잠 1:8; 4:1-6; 24:6).잠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물론 이 책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약 1:5). 그러나 다른 문학과 마찬가지로, 잠언 역시도 그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장르와 배경을 기본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의 지혜로운 격언들을 오용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네 가지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첫째로, 하나의 교훈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원리다. 우리는 일반적인 세상 교훈을 아무 때나 적용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을 솔로몬의 잠언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look before you leap)라든가 “망설이는 자는 기회를 놓친다”(he who hesitates is lost)와 같이 서로 상반된 속담을 들어 이 원리를 설명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처럼, 결정을 내리기 전에 신중하게 살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주저하는 일이 오히려 어리석을 때도 있다. 가령 두 살짜리 아이가 혼자서 찻길을 건너려 할 때 우리는 그 아이를 붙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잠언에 대해서도 한 가지 교훈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기를 바란다면, 결국 실망과 혼란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 미련한 자에게 그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잠 26:4-5).둘째로, 당면한 문제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원리다. 민수기 35장 9-28절은 모든 살인 사건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직 사전에 계획된 살인 행위에 대해서만 사형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사형 집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건이 처음부터 계획된 사건이었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잠언과 율법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적용되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늘 요구된다.셋째로, 한 가지 교훈을 읽더라도 다른 교훈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원리다. 왜냐하면 맥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교훈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다른 교훈을 염두에 두고 그 내용을 함께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잠언의 모든 내용을 마음에 두고 언제든 읊을 수 있으면 좋다(잠 22:17-18). 가령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교훈은 일반적으로 경건한 부모가 경건한 자녀를 양육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잠 22:6). 그러나 잠언 전체는 자녀가 올곧은 길을 떠나지 않으려면 그 자녀 편에서도 주의해야 할 교훈이 있음을 가르친다. 즉 진실한 신앙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자녀 역시도 부모나 인생의 선배가 주는 경건한 지혜에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잠 1:8-9, 32-33; 3:5-6; 7:1-3). 따라서 우리가 다른 교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면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라는 교훈에만 집착한다면, 믿는 가정에서 사려 깊고 착실한 방법으로 아이를 양육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그 아이가 경건한 신자가 되리라는 착각을 하게 될 수 있다. 이와 달리 잠언의 전체 맥락을 기억하게 되면, 우리는 자녀가 신앙 안에서 자랐더라도 그 자녀가 나이가 들면 또 다시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녀가 오래 전에 들은 가르침을 명심하지 않아 이제 와서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면, 현재로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라는 교훈을 다른 교훈과 함께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우리는 그 교훈만을 잣대로 삼아 경건하지 않은 자녀를 키우는 다른 부모의 양육 방식을 손쉽게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 전체뿐 아니라 잠언의 전반적인 맥락 역시도 경건한 부모가 때로는 경건하지 않은 자녀를 양육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어린 자녀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부모라고 할지라도(신 6:4-9), 자녀의 돌 같은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부모 스스로가 할 수 없기 때문이다.넷째로, 마지막을 생각해야 한다는 원리다. 잠언의 수많은 교훈은 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을 피하고 타인과도 화평하게 살아간다고 말한다(잠 12:21; 16:7). 하지만 경건한 자들이 결국에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현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주님의 신실한 일꾼들이 있음을 또한 알고 있다. 잠언도 그와 같은 현실을 간파하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가난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잠 15:16; 19:1). 또한 불의가 세상의 재물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잠 10:2).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다루는 교훈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의인의 형통만 다루는 구절을 일방적인 약속으로 바라본다면, 그와 맞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그럴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며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그러나 잠언이 현재의 삶에 대해 무조건적인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인의 최종적인 형통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증언하는 성경의 여러 본문은 그분의 백성이 승리하고 악인이 멸망하는 때가 있음을 말해 준다(창 18:25; 계 16:5).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인해 그 거룩한 백성에게 행해진 악한 일들에 대해 사후에 반드시 심판하신다. 잠언은 이러한 장래의 소망을 직접적인 교훈으로 제시하기보다 그분의 섭리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이해하게끔 어렴풋이 제시한다(잠 10:2, 25; 11:21; 16:4). 이처럼 의인에 대한 축복을 언급하는 잠언의 약속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두 다 사실로 드러나게 되기에, 우리는 그날을 학수고대한다(단 12:1-3; 계 20:11-15).잠언과 그리스도이처럼 잠언은 현세의 삶 이후를 바라보도록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변호하며 그들의 섬김에 따라 상 주시는 분을 기대하게 만든다. 만일 변치 않는 사랑과 공의가 왕위를 보전하는 성품이라면(잠 20:28), 이러한 성품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통치자만이 자기 백성의 변호자가 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단연 메시아, 즉 잠언의 지혜를 완전히 반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전 1:24). 솔로몬은 어리석은 상태에 빠져 죽었지만(왕상 11장), 예수님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경외하셨고 악을 피하셨다(잠 3:7; 벧전 2:22). 그러므로 우리가 잠언의 지혜를 온전히 반영하신 그분의 가르침을 빛으로 삼아 이 책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지혜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원제: The Proverbs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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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by 이춘성
2021-01-28
세상에는 악이 가득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나 현상을 보기 어렵지만 살다 보면 자신이 악행의 피해자가 되거나 악인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악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악의 노예가 되어 영혼을 팔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도 악을 행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다. 그렇기에 악을 행한 것에 대해서 누군가 처벌하려 할 때, 부당함을 느끼고 자신이 지은 악보다 더 큰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보복을 계획한다. 반대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에 비하여 가해자인 악인이 충분한 벌을 받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다. 자신이 본 피해에 상응하는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처벌을 위해서 피해자의 피해를 어떻게 측정해야 정확할까?자연법으로서의 동해보복법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것이 동해보복법(lex talionis)이다. 이 동해보복법은 성경에도 나온다. 이것은 일종의 창조의 원리인 자연법과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다. 또한, 동해보복법은 합리적이며 이상적인 법 원칙에 속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 법은 현실에서 지켜지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사건 이후에 가인의 증손자 라멕에 의해서 행해진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라멕의 잔인한 복수는,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래서 언제든지 자신의 상처가 가장 아프고, 남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해보복법은 자연의 인과 법칙의 원리지만, 인간의 자기 중심성의 주관성은 이를 결코 실현할 수 없도록 한다.이러한 자연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성경보다 먼저 문서로 남겨놓은 나라가 있다. 이것이 수메르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함무라비 법전이다. 기원전 16~17세기에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에도 동해보복법이 나온다. 하지만 이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았다. 수메르의 동해보복법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노예나 이방인, 여자, 아이들은 법 적용의 예외 대상이었다. 이는 오직 성인 남자이며 귀족과 왕, 종교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법이었다. 만약 노예가 귀족에게 상해를 입히면 동해보복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노예를 죽여도 귀족 한 사람의 상처를 대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로 취급받은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 적용은 다른 나라들과 민족들과는 전혀 달랐다(출 21:23-25; 신 19:21; 레 24:17-22). 십계명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이었듯이 동해보복법도 남녀, 아이, 성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인간의 권리와 가치의 평등에 기초한 동해보복법이 이스라엘의 율법이었다. 이 법은 당시에 누구도 과도한 복수와 보복을 당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나 부당하고 이기적인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해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동해보복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이상적인 법 집행이 가능하였다.라멕 효과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에는 동해보복법의 이상적인 원칙에 따라 그 정신과 원리가 잘 나타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성경에서 말하는 동해보복법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분이 풀려야만 보복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해와 남의 피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라멕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이나 현재 우리 기독교인 모두에게 예외가 아니다.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동해보복법은 유대교의 성경 연구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이끈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새롭게 해석되었다. 또한 그리스 철학으로 계몽된 유대교 학자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랍비들은 동해보복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금전적 보상으로 전환하였다. 그렇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부자들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 없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만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보상과 보복에서 진정한 사죄와 처벌이라는 인격적 요소가 제거되고 단지 경제적 보상과 물질만 남은 것이다.동해보복법의 비관주의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39절에서 악한 자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가해자가 악한 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향해 동해보복을 요구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동해보복법으로는 결국 온전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주의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법치주의라는 이상이 현실에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관주의에서 절망으로 나아가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이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였다(롬 12:21). 예수님은 이를 산상설교에서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차례대로 소극적 방법 세 개와 적극적 방법 한 개다.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1“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6장 29절은 뺨을 때린다고만 하였지 그 방향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마태는 정확하게 오른편 뺨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어느 쪽 뺨을 맞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는 증거다. 만약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왼손으로 때리지 않는 한 오른손일 경우 손등으로 때리는 수밖에는 없다. 당시 이런 행동은 상대를 구타하려는 목적보다는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오른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뺨을 툭툭 치면서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그러면 이런 수모를 당할 때, 왼편을 돌려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도를 넘어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본질이 아닌 것으로 약을 올리고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주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 많은 경우 참고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들의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는 것은 알려주라고 하신다. 참고 있지 말라는 것이다. 오른뺨을 살살 건드려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게 수모를 주려면 차라리 그 오른손으로 내 왼뺨을 세게 후려치라는 것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2“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 5:40)두 번째도 같다. 이런 상황은 금전적인 문제로 채무 관계일 경우다.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채무 관계로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채무로 인하여 전당물을 잡아야 하는 경우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서 임의로 자기가 원하는 담보물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담보물은 채무자가 주는 것이어야 된다. 그런데 만약 채권자가 옷을 전당물로 잡았다면 옷은 반드시 저녁에는 돌려줘야 한다(출 22:26-27).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단벌이었다. 겉옷은 저녁에 담요 역할을 하였다. 즉,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가난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이러한 이유로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최후에 어쩔 수 없는 경우며, 빌려주는 사람은 이것을 결코 요구할 수 없었다(신 24:10-13). 그런데 40절의 고발하는 자는 속옷을 요구하였다. 비록 겉옷은 아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하여 상대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피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겉옷도 줘버리라는 급진적인 행동을 명령하신다. 그래서 이 사람의 원래 의도, 겉옷을 원했지만 차마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그 악한 의도를 세상에 폭로하라는 것이다.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 3“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41)당시 로마 군인들은 식민지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노역을 시킬 수 있었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시켜 강제로 짐을 들고 약 2km(5리)를 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럴 때 그 두 배의 거리를 가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부당함을 항변하라는 것이다. 부당함을 항변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부당함을 항변하는 것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때다. 자신이 당한 손해에 대한 배상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으려 한다는 모습이 보이면 상대는 자신의 부당함을 깨닫지 못한다. 더하여 오히려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한다.동해복수의 법칙은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피해는 대부분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해를 입힌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대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고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감수하여, 상대나 주변이 나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 4“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이 마지막 명령은 이전의 세 개의 예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전의 예들은 피해자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가해자를 향하여 그들의 위선과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을 통해 동해보복을 하는 소극적인 방법에 대한 예였다. 예수님은 일종의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 당하는 구조적으로 허용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한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것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동해보복의 예로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소극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악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을 때 오히려 구조는 개선되지 않고 약자의 피해만 가중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러한 폭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깨고 갈라지게 하듯 변화를 일으킬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듯이 사회는 변하였다. 하지만 문제를 폭로하고 이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으로는 변화의 한계가 있다.변화는 사람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돈이나 물건을 구하고 꾸려는 자들을 이들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차별한다면, 이 또한 신분에 따라 동해보복법을 차등하여 적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해보복법은 가난한 자도 그들의 필요만큼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동해보복법은 노인과 아이, 과부와 고아, 여자와 노예, 이방인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손해를 보상하는 소극적 법인 동해보복법을 역으로 하면 이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고 차별하지 않는 적극적 법의 다른 얼굴이기 때문이다(레 19:10; 신 15:7-11; 24:19-22). 긍정적인 실천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더 가속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자선 실천이 이전에는 자선이란 개념이 없던 로마 사회에 공적인 자선을 제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교회사가인 피터 브라운(Peter Brown)에 의하면 초기 교회는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의 명부를 관리하였다. 교회는 왕과 귀족들이 회심하여 교회에 맡긴 막대한 재물을 이 명부를 통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회복지를 실천하였다. 이를 통해 교회는 부의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교회가 약자들의 대변자라는 인식을 얻게 하였고, 자신이 어떤 이유로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교회가 이를 바로 잡아 주어 동해보복법이 올바로 시행되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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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교만과 겸손
by Nate Pickowicz
2021-01-27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년생 목회자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가 그가 지역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든 인원이 모이자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짐 뉴턴, 팔십.” 그러자 모든 목회자가 웃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빌 월터, 백이십오.” 또다시 다들 웃었다. 이번에는 초년생 목회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기에 이렇게 얼버무렸다. “잭 뷰캐넌, 오백사십일!”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목회자가 모임에서 으레 주고받는 농담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평소 관례대로 자기 이름과 교인 수를 밝히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교회 사이즈를 두고 사역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오늘날의 목회 세태를 조소하는 관례였다.물론 목회자의 교만이 만연해진 오늘날 상황은 결코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슬픈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교만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목회자가 우쭐해지면, 언제나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 때로는 친구의 질책 정도로 미묘한 수준에서 결과가 나타난다. 또는 목회 자격을 상실하고 사역 전체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그 결과가 끔찍할 때도 있다. 이 아티클을 쓰는 나 역시 먼저는 내 자신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 난 젊은 사역자로서 교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통해 그러한 죄의 유혹과 싸우자고 동료 목회자에게 간청하면서 내가 쓰는 글이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교정하는 데 부드러운 지침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자기 과시에 빠지는 목회자교만은 목회 현장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에 따라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중 정말로 포착하기가 어렵지만 그 결과는 불치병처럼 치명적인 방식이 있는데, 바로 목회자의 자기 과시다. ‘자기 과시’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설명해 보면, 자신을 인위적으로 혹은 거짓으로 꾸미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을 타인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뽐내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과장되고 그릇된 자기 이미지를 만들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목회자의 자기 과시는, 자신의 영성이나 업적 또는 영향력이나 존재감 따위를 부풀리기 위해 행해진다.이와 같은 자기 과시는,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에서 교회 규모라든가 최근에 이룬 업적을 살짝 언급함으로써 매우 미묘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혹은 지난주 설교에서 몇몇 성도가 ‘아멘’으로 반응했던 문장을 이야기함으로써 순식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면 인터넷에 자신의 선행을 선전하거나 목회 현장에서 얼마나 수고하는지를 아름답게 묘사하여 마치 성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헌신하는 사람처럼 자기를 드러내려는 모습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된 마음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려고 한다. 비록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행하는 잘못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지는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로 살 수도 있다.교만과 겸손그렇다면 교만이란 대체 무엇일까? 바울이 로마서 12장 3절에서 언급한 말을 빌린다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타인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교만이다. 스튜어트 스콧(Stuart Scott)은 교만을 자기 숭배의 한 형태로 정의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선하고 올바르며 칭찬받을 만한 일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라고 (혹은 그런 사람인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또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해내는 사람이며 모든 일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혹은 그런 사람인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통하여,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교만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선한 일의 참된 근원이며 성취자이실 뿐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롬 11:36). 그러므로 교만을 드러내는 일은 하나님 자리에 스스로를 세우려는 죄악에 다름 아니다. 즉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숭배하는 행위일 뿐이다.따라서 성경에는 교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구절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잠언 6장 16-19절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열거하는데, 그중에 첫 번째로 '교만한 눈'을 언급한다. 또 하나님은 교만과 거만을 '악한 행실'과 똑같이 취급하시며(잠 8:13), 그 결과가 '치욕'과 '멸망'이라고 경고하신다(잠 11:2; 18:12). 나아가 교만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도 기록되어 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게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23: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그런데 성경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미워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도 함께 제시한다(약 4:6; 참고 시 138:6; 잠 3:34; 벧전 5:5). ‘겸손’은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에 대해 죽는 상태를 일컫는다(눅 9:23; 갈 2:20).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를 대할 때 겸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권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이처럼 바울은 우리 마음의 낮아짐을 겸손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우리를 바닥까지 낮추어 아예 일으키지 않으려는 게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이는 모든 신자, 특히 목회 현장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진리다.목회자의 겸손에 대한 요청겸손히 사역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가 맡기신 모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쉬지 않고 수고하셨다(요 5:30; 12:49; 17:1-5). 그러면서 자신의 사역은 스스로를 내주기 위한 섬김이라고 선언하셨다(막 10:45). 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요 13:14-15). 이처럼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6-8). 바로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회 사역의 모델이시다.하지만 우리는 타락하고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약하고 불안정하다. 나는 목회자가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목회는 힘든 일이고, 그에 수반되는 온갖 고초를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만족과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다(고후 3:4-5). 그러므로 열심히 애써 수고한 후에 사람의 칭찬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베드로가 권하였듯이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한다(벧전 5:5).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기에 이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그리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다른 이와 경쟁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에 이 권면도 새겨야 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따라오는 인파에 둘러싸여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교만과 싸우며 그에 반응하였는지 다음 이야기가 잘 보여 준다.“다른 데서는 듣기 힘든 아름다운 열변으로 찰스턴 시에서 설교를 마친 휫필드 목사는 강단을 내려와 교회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방금 들은 훌륭한 설교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오 휫필드, 너무나 감명 깊은 설교였어요.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휫필드는 우쭐하기는커녕 매우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렇게 답했다. ‘형제여, 한발 늦었습니다. 강단을 내려오기 전에 마귀가 벌써 그 말을 하더군요.’”친애하는 동료 목회자여, 이제 교만과 가식의 탈을 벗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만을 높이도록 하자.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말이다(미 6:8).출처: www.ligonier.org원제: Humility in Ministry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교만
자기과시
겸손
휫필드
목회자의 윤리적인 문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by Jim Davis
2021-01-26
내가 속한 교회의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맞서는 일일 것이다.더구나 그 사람이 만일 당신의 목회자라면 어떻겠는가? 만일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걱정하는 점이 있거나 혹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침묵하기보다 교회에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은 목회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당신의 마음을 먼저 점검하라누군가의 잘못을 추궁할 때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동기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 눈 속에 티를 빼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가르치신다(마 7:1-5). 이 말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에게 맞서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라고 한 이유는 질투나 악의에 찬 한 명의 교인으로부터 장로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해보라. 혹시라도 내 마음에 먼저 다루어야 할 질투가 있는가? 비난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나의 목표가 이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허물어 버리기 위함인가? 교회의 번영을 보기 위함인가? 꼭 내가 언급해야 하는 문제인가?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경우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경우는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이 있다. 목회자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상처를 주었는가? 아마도 그가 신뢰관계를 깨고 당신에 대한 소문을 냈거나 당신을 묵살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홀대를 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만일 그가 듣지 않으면 누군가를 데리고 가라고 지시하신다(마 18:16). 당신이 지금 상대하는 사람은 당신의 목회자이므로, 교회의 장로나 다른 지도자와 함께 가기를 제안한다.이때 다른 이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당신이 안다면, 당사자에게 그 문제를 말하게 하라. 그들이 수줍어하거나 두려워하면, 그 과정에 그들과 동행하되 그들이 말할 때 그들 옆에 서서 지지해 주라.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두 번째 경우는 좀 더 일반적인 문제이거나 본성적인 죄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위를 하는 목회자를 목격했지만 그 잘못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 염려되는 부분이 그의 가르침이나 교리적인 문제일 수 있다. 목회자가 교만으로 가득하여 그에게서 겸손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의 생활 양식에 문제가 있거나 관계가 부적절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히브리서 12장 15-16절은 우리에게 서로 살피라고 가르친다. 당신의 목회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이 부분이 필요하다. 그에게 직접 가서 당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 말하고 그가 받은 소명을 그가 잘 이루기를 소망한다는 당신의 마음을 전하라. 당신이 그의 마음을 다 아는 것이 아니므로, 행동에 대한 그의 동기를 추측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일반적으로 볼 때 그의 행위가 어떻게 보일 지와 당신이 목격한 특정 상황에 대해서만 말하라. 그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의 다른 지도자에게 알려 그들이 이 일에 관여하게 하라. 그리하여 만일 문제의 목회자가 자신의 이러한 부적절한 범행을 알아차리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목적은 회복이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의 무게감에 따라 간단한 대화로 그는 당신의 개입에 감사하고 바른 방향으로 옮겨갈 수 있다. 좀 더 심각한 행위의 경우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감독 하에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교회를 축복한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문제가 되는 갈등의 경우성경에 명시되고 있는 장로의 자격을 근거로 목회자로서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딤전 3:1-7; 딛 1:5-16)에 대해 정당하게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알려야만 한다. 권위 있는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혐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로 당신은 본질적으로 위협을 느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교회 안에 당신 곁에 서서 지지해 줄 다른 지도자들을 주셨다. 두세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한 디모데전서 5장 19절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다른 증인을 찾아서 당신의 부담을 줄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고발을 받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당신이 증인들을 찾을 수 있으면 이러한 고발은 금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나 학대를 하는 목회자는 희생자들과 격리시키고 그가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하여 결국 더이상 그 죄를 지속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번 고발이 이루어지면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추가 증인들을 찾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증인을 찾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것처럼 해당 목회자에게 직접 가는 것은 어떤가? 마태복음 18장은 모든 상황에 쉽게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평신도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직접 지은 죄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5절).만일 목회자로서 문제가 되는 죄를 알고 있는데 그것이 성적으로 무분별한 행위, 횡령 및 권위 남용과 같이 당신에게만 개인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라면, 당신은 홀로 그 목회자를 맞서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5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증인들이 요구되는 것은 불의의 비방으로부터 목회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신실한 장로들은 책임을 지고 그 목회자의 사례를 점검하고 그의 죄에 대해 맞서야 한다. 회중의 목자로서 그들은 양떼 중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목회자의 행동이 불법적이라면?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이 사례를 당국에 넘겨야 한다. 교회 자체 조사는 적절하지 않으며 특히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으면 더욱 그렇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위자들을 주셨고, 혐의가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우리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는 범죄에 대해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내 말이 전달되지 않는다면?슬프게도, 목회자가 성공하고 있고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면, 교회 지도자들은 '불편한' 고소 등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고발이 무시되거나 교회의 평화 유지를 위해 죄를 덮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의 교회 지도자들은 당신과 맺은 언약을 깨는 것이며 스스로 리더의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쯤 되면 당신은 몇몇 방안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당신이 속한 교단에 권위 있는 기관과 전체 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교회를 떠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책무를 포기하면 책임이 따르며 대부분의 정관에는 이를 집행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죄는 드러나게 된다목회자의 죄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 심판의 날에는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죄가 다른 사람을 계속 해하는 것을 막으려면 침묵하지 않기를 권한다. 교회 전체가 바로 가게 하는 짐을 당신 홀로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당신이 속한 교회 지도자들이 책무를 행하도록 당신이 기여하고 교회를 잘 섬겼다는 자긍심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도자에 맞서는 일은 항상 어렵지만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을 주시고 용기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당신이 아끼는 것보다 더 아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원제: What Should I Do If I See Moral Failings in My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목회자의윤리적부패
목회직부적격행위
장로의자격
딤전3:1-7
딛1:5-16
형제눈속의티
우리눈속의들보
해 아래 새로운 이단은 없다
by David W. Hall
2021-01-25
약 25년 전, 엉뚱한 몇몇 기술자들이 나를 인터넷으로 끌어들여 어찌 보면 미국 최초의 개혁주의파 웹 사이트라 할 수 있는, Center for the Advancement of Paleo Orthodoxy(CAPO)를 위해 글을 쓰도록 했다. 당시 다소 자유로웠던 정통파(sub-orthodoxies)와 혼동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열띤 논쟁을 피할 마음도 없었다.(우리가 선택한 첫 번째 밈(meme)은 공룡이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 우린 구닥다리 정통을 주장한다. 그래, 어쩔래? 그럼 잘난 당신네들이 주장하는 논지는 뭔데?) 우리는 당시 많은 에세이를 실었는데, 그게 모여서 결국은 ‘현대성의 오만함’이 되었고, CAPO 또는CAPO의 온라인 잡지 격인 ‘Premise’의 한 페이지를 형성했다. 나는 아직도 당시 젊은 혈기에 썼던 치기 어린 에세이를 생각하고 웃곤 한다. 그런 주제를 지금 썼다면 훨씬 더 세련된 글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증에 열중한 추론이 항상 상대를 제압하고 말겠다는 과도한 뉘앙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에세이를 모은 책 ‘현대성의 오만함’ 출간 기념일이 다가오는 지금,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를 담은 질문은 이것이다. “현대성(modernity)은 정말로 그토록 거대하거나 지속적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담은 에세이들이 모두 당시 가장 현대적인 미디어, 인터넷을 통해서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다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현대성은 여전히 오만한가, 아니면 오만함이 덜 해졌는가? 또한 그 어떤 수사학적 주장이라도 '새로운' 연구 또는 혁신적인 계획을 도입함으로 자연스럽게 더 큰 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유행, 소셜 미디어, 또는 현대적인 모든 것보다 분별력 있는 솔로몬의 인식론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우리 사이트가 지향한 원래 모토는 솔로몬의 말, ‘Nihil novum sub sole’, 즉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였다)몇몇 에세이는 꽤 괜찮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다가오는 십 년을 위한 전략’이라는 주제를 다뤘던, 나의 첫 에세이를 1989년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서 발표한 이후, 나는 아직까지도 그 글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계속 발표하고 있다. 이 논문은 전혀 상반되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정통과 전략: 다가오는 새로운 십 년 또는 밀레니엄을 놓고 아무런 전략을 가지지 않는 것에 관하여' 이 논문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접한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 논문이 주장하는 핵심,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그토록 근시안적이고 세상 문화에 굴복하는 접근법을 강요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는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략적인 사고를 가진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 섰지만, 그 상승세 또는 생명력(durability)은 짧았다. 오늘날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때 “연예인급”의 명성을 누렸던 복음주의자들의 추락을 한번 보라. ‘바꾸고, 변형시키며 또 재구성하는 이단’(Heresies That Transform, Deform, and Re-form)이라는 에세이에서는 많은 오류가 형태를 바꾸는데, 그것은 결코 사소하거나 중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변형(deformity)으로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동일한 바이러스가 복제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re-form)되는 경향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는 컬트와 오류로 가득찬 신학 시스템의 반복을 통해서 싹튼다. 결코 묻힌 채로 머물지 않는 펠라기우스 이단은 한층 정교해진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로 부활, 재구성되거나 치명적인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이신론의 영향을 받는 반삼위일체 이단)라는 돌연변이를 만든다. 해독 가능한 증상을 보이는 이단들만 놓고 보자면, “솔로몬 + 오류 진단 = 해 아래 새로운 이단이란 없다, 단지 재활용이 될 뿐”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를 가지려면 역사를 경멸하는 대신 역사에서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이 도덕률 폐기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antinomian evangelicals)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르키오니즘(Marcionism,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단)의 귀환이든 또는 자유주의자인 슐라이어마흐(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가 주장한 이성을 뛰어넘는 감정 절대론(Schleiermachian absolutization of feeling)이든 상관없이 지금 시대에 분별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기독교인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고전이 있다. G.K. 체스터턴(G.K. Chesterton, 20세기 영국 작가)이 1905년에 쓴 ‘이단’(Heresies) 또는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이 쓴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다. 역사의 유용성(The utility of history)을 다룬 아주 짧은 에세이는 우리 중에 있을 지 모를 도덕적 순수주의자들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오늘날 거만한 윤리적 귀족들, 결함을 가진 초기의 사례가 드러내는 악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순수한 눈을 가진 귀족이라면, 실제로 로버트 대브니(Robert Dabney, 19세기 미국 신학자이자 목사, 소설가)가 1854년에 쓴 ‘교회 역사의 활용과 결과’(The Uses and Results of Church History)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대브니는 역사를 포괄적인 학문으로 평가했으며, 역사에 능통해지는 것은 지식인 또는 공적 지도자에게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에 꼭 필요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썼다. 더욱이 그는 현재 목격하는 잘못된 사고가 지닌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고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역사를 예방적 기능을 수행하는 무엇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현대 이단을 무장해제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그 이단이 대단히 진보한 것처럼 드러내는 사상이 사실상 과거 오래 전 기독교 국가에서부터 비난 받은 원조 이단이 가진 오류와 분열적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대브니는 프랑스 혁명을 근대성의 상징으로 분류하고 비판했으며, “교회 역사라는 무기고”는 유용하고 필수적인 무기라고 믿었다. "무정부주의적 오류"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현대 문제에 대한 토론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읽어야한다. 단지 '뉴'(neo-)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무조건 거부하는 그에 대한 재조명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굳이 원한다면, “영국인들이 불건전한 습관을 드러낸다”에서 우리는 체스터턴,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20세기 영국 추리소설 작가), 그리고 마이클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 20세기 영국 철학자)를 가볍게나마 비교할 수 있다. “19세기 교회 개척의 십계명”은 비록 내용이 빈약하지만 초기 장로회 회의 회의록에서 나온 것으로, 대부분의 교회 개척과 관련해서 여전히 탁월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역사를 활용함으로써 도움을 받는 것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게 웨스트민스터 신자들의 영성을 검토하는 일이든지, 아니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9세기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와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20세기 신학자)의 아버지 역할을 했으며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20세기 신학자)에게는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하윌라우머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Groen van Prinsterer, 19세기 네덜란드 정치인)의 기여를 연구하는 일이든지, 또는 이 책의 주제이자 반복적으로 다루는 내용, “해석학: 자신감을 가지고 또는 역사를 가지고”(Hermeneutics: With Hubris or History)의 주된 해석을 살펴보는 데까지 다 유용하다. 역사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예닐곱 개의 에세이는 각기 다른 시대를 다루고 있다. 창조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의 주장, 고해성사의 가치, 그리고 교회와 윤리 그 외에 다른 여러 주제가 이 책의 자료가 되었다. 물론, 이 컬렉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셈페르 레포르만다’(semper reformanda,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칼 바르트에 의해서 주창되었다)에 대한 조롱이다. 그와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달리 말해 정통신학의 거부)의 확장을 막는 데 필요한 활동을 위해 현금 지원을 제안한 글도 있다. 또한 마지막 장에서는 다문화주의, 위기주의(crisis-ism), 포스트 모더니즘 및 기타 자유주의를 놓고 어떻게 역사를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결론으로 P.J. 오루크(P.J. O’Rourke, 20세기 미국 언론인)으로부터 인용한 멋진 글을 담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기하학에서도 실패한다.” 실제로 역사는 현대의 많은 생각과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과거를 버리는 것은 진리에 눈을 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현대성의 오만함’ 개정판이 예정되어 있다.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ies)의 크리스 라슨(Chris Larson)은 “이 책은 엄청나게 팔릴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이 책 안에 있는 몇 개의 에세이는 여전히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성이 그 오만이라는 면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너무도 많은 교회가 숨도 쉬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현대성이 지향하는 바를 그대로 쫓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족쇄로 여기며 여전히 과거를 경멸하는 현대성은 많은 세대를 종합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지 않은 신생 학자들의 손에서는 창피함을 모른다. 오만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행여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 중요성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또는 체스터턴이 그로서는 예외적일 정도로 진보주의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측면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진보적으로 되는 유일한 이유는 사물은 그냥 두면 자연적으로 악화되기 때문이다. … 모든 보수주의가 기본으로 삼고 있는 생각은 이것이다. 사물을 그냥 가만히 놔두면… 그것은 급격한 변화에 휘말리게 된다. 하얀 기둥을 가만히 놔두면, 그 기둥은 곧 검은 기둥이 된다.” 따라서 그는(그리고 보다 거룩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겸손하게 과거를 활용하여 현재를 새롭게 색칠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했다. 체스터턴은 조언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그 오래된 흰색 기둥을 계속 가지고 싶다면, 당신은 그 기둥을 계속해서 새롭게 하얗게 칠해야 한다.”원제: Arrogance of the Modern: Twenty Years Later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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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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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인간과 다른 세 가지
by Scott Swain
2021-01-24
우리 주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따라서 기독교 신학의 목표는 성경적 서사를 삶에 더 유연하게 적용시킴으로 기도와 선포 그리고 찬양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더욱 더 거룩하게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이는 법을 올바르게 배우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그 외 다른 모든 형태의 아버지됨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근본적이며, 독특하고, 또 초월적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우리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 아버지의 이름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1.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근본적이다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아버지가 되는 다른 모든 피조물 이전부터 존재한 첫 번째 형태다. 피조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즉, 피조물 아버지와 피조물 아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아버지와 독생자는 성령과의 교통 안에서 영원하고도 또 상호 교환적인 기쁨 속에 거하셨다(요 1:1, 17:24-26). 더욱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존재의 순서에서 최초인 것처럼 의미의 순서에서도 근본적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아버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신성한 아버지되심을 본받으며 그 순서는 바뀔 수 없다. 그분은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엡 3:14-15)다. 또한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됨은 그의 신성한 아버지되심을 닮은 형상이다(창 5:1-3).2.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독특하다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은 피조물의 아버지됨을 따라 만들어진 게 아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이 피조물의 아버지됨을 포함하는 더 큰 부류의 아버지됨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거룩하고 구별되며 또한 유일무이하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피조물이 만들어내는 아버지됨 또는 신과 피조물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아버지됨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버지되심의 의미는 오로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으로만 결정된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다(출 3:14). 그의 아버지되심은 유일무이하다(고전 8:6; 엡 4:6).3.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초월적이다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근본적이기에 모든 존재의 순서에서도 처음이고 또한 모든 의미의 순서에서도 처음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독특하기에 아버지에 관한 일반적인 외부 표준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모든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다. 피조물의 아버지됨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종속적이지도 않고, 복합적이지도 않고, 또 변화하지도 않으며, 거기에 더해 제한받지도 않고, 또 일시적이지도 않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자존적이고 단순 불변하며 또한 무한하고 영원하다. 빛나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다른 모든 형태의 아버지됨 '위에' 머문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우리의 언어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앞서 논의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피조물 형태가 보이는 아버지됨 사이에 닮은 점을 보게 되는데, 중요한 사실은 후자가 전자의 패턴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피조물인 인간의 아버지됨 사이에는 결코 일대일 비교가 불가능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독특하고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앞선 내용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말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아들과 성령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때, 그분은 몸을 굽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다. 그는 천사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로 “사람처럼”(신 1:31; 8:5) 말씀하신다. 더욱이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여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원래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쓰여진 말, “아바! 아버지!”(갈 4:6)를 우리 입술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시므로 스스로를 낮추어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시며 또한 그들도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도록 초대하셨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시는 은혜를 근거로 도리어 오만방자하게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 피조물의 아버지됨에서 유래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마치 초월적인 의미가 들어있지 않은, 공허한 어린아이의 말장난처럼 간주해서도 안 된다. 비유적 이야기는 거룩한 이야기다성경이 평범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또한 성경의 인도에 따라 기도와 선포, 그리고 찬양을 하며 우리가 인간의 평범한 언어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실상 우리는 일종의 '비유적' 방식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워낙 독특하고 초월적이기 때문에 비록 피조물의 아버지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설명하더라도 결코 '딱 한 가지(univocal)'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 또한 피조물의 아버지됨이 비록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독특하고 초월적인 아버지되심을 희미하게나마 닮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말할 때 결코 '모호한(equivocal)' 방식으로도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됨 사이의 유사성과 비 유사성을 인정하면서 '비유적으로' 말한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독생자와의 관계 그리고 창조주이자 구속주로서 우리와의 관계를 근거로 그분이 참 아버지임을 고백한다. 우리는 또한 그가 모든 지혜(시 145:3)와 모든 말(느 9:5)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기본적이고 독특하며 또한 초월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되심을 고백한다.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다. 그의 이름은 너무도 대단하기에 찬양받아야 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엡 1:3).원제: 3 Ways God’s Fatherhood Is Different Than Ou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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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의미는?
by Trevin Wax
2021-01-23
'복음주의'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특히 논쟁의 중심에 있는데, 선거철을 맞아 '복음주의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그 활동 상태는 어떤가? 최근에 나온 책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짜 기독교 민족주의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 치우친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지나친 표현들과도 연결시키고 있다.데이터는 다르지만 다양한 설문 조사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 (주로 소수 민족 교회에서) 복음적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복음주의 정체성'은 (아마도 이 용어가 주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주장하지 않는 많은 기독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이와 반대로,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지만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핵심적인 복음주의 교리를 고수하지도 않는 수많은 미국인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된 리뉴얼 프로젝트(분리주의 근본주의자와 사회적 복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대응하려는 운동)가 이제 미국에서 사실상 사회-정치적 관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복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우파, 좌파와 관계없이, 기독교인 스스로가 궁극적인 권위로 옹호하는 성경보다 오히려 문화적 배경과 정치 철학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많은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 폴라 화이트(Paula White)에서 팀 켈러(Tim Keller), 그리고 존 파이퍼(John Piper)에서 로버트 제프리스(Robert Jeffress)에 이르기까지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에 '복음주의'라는 이름에 굳이 연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일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조롱하게 만들고 있다. 왜 이 이름을 생략하지 않는가? 왜 우리 자신을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그게 아니면, 복음의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 간, 교파 간 리뉴얼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다른 좋은 용어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러나 더 나은 방법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벗기기 위해 너무 빨리 서두르기보다는 그 전에 한 발 물러서서 시간적 관점과 지리적 관점에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다. 시간적 관점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자.‘누가 복음주의자인가?(Who Is An Evangelical?)’를 쓴 토마스 키드(Thomas Kidd)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당파적, 민족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독특하다'고 믿는다.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다 민족적이었다. 백인만이 '정상적인' 복음주의자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간 드러난 운동의 정치적 요소가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핵심을 정의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주의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운동은 현재 이 순간에 정의될 수 없고 또 정의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에 대한 초점, 전도 사역에 쏟은 열심, 그리고 각종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연결선상에 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친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심지어 미국의 신 복음주의 운동보다도 앞서는). 이런 역사 모두를 다 너무도 성급하게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실한 기독교의 모범을 보였던 과거의 사람들과 단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리적 관점이제 전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보자. 최근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는 현재의 복음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북쪽에서 시작해 '전 세계의 남쪽'으로 진행되는 기독교 전파의 지리적 변화를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의 종교 지도를 살펴보면 20세기 초의 상황과 21세기 초의 상황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 학자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 세계의 무게 중심이 남쪽으로 크게 이동했다”고 설명했다.지나 줄로(Gina Zurlo)는 ‘세계의 복음주의’(Evangelicals Around the World)에서 구체적인 수치를 보여준다. - 복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브라질,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있는 가장 큰 다섯) 교단에 속한 인원을 계산하면, 약 1억 5,060만 명이 된다. - 복음주의 교파 소속 유무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인식하는 개인을 계산한다면, 1 억 3,490만이다. - 핵심이 되는 신학적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선교 단체인 Operation World가 사용하는 방법으로) 계산하면, 그 숫자는 5억 4,590만 명이다!이런 숫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줄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관계없이 복음주의는 분명히 세계적인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발상지인 유럽은 현재 3.8퍼센트로 세계에서 가장 비복음주의적인 대륙이다.”복음주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실은 내가 공산주의 이후 동유럽에서 복음주의 교회를 섬기며 보낸 5년의 경험을 통해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서 직면한 특수한 도전과 정치적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의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우리의 정체성이 단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벌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기독교 운동의 선봉대는 미국 해안에 있지 않다. 따라서 북미 문화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서구의 세속화, 또는 서구의 기독교 주변화가 교회 성장을 제한하는 힘은 허리케인을 막거나 계절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글로벌 기독교의 고유한 성장과 부흥은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글로벌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를 고려할 때 북미에서 목격하는 복음주의와 연관된 정치적 의미 때문에 복음주의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알 수 있다. 워런의 도전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나는 복음주의자들을 생각할 때 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던 싱가포르인, 우간다에서 난민을 섬기던 르완다 가정, 나이지리아 신학생, 또는 남아메리카의 에반젤리코스(evangélicos, 라틴 개신교인을 일컫는 용어)를 떠올린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의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최우선에 그리고 중심에 두어야한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상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다.더 큰 질문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시야를 넓힐 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나열한 모든 도전적인 질문을 다 덮어버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 우리는 왜 '복음주의' 속에 담긴 미국만의 특징이 '복음주의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 과도한 영향을 미치도록 계속 놔두어야 하는 걸까? 미국인이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유일한 주창자도 아니고 또 이제는 핵심적인 주창자도 아니다.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회 정치적 논쟁이 전 세계적 운동을 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세계에 대한 좁은 시각이며 솔직히 말해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글로벌 복음주의자로서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다.(1) 복음주의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에 감사한다.(2) 세계적으로 볼 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회의 성장에 흥분한다.(3) 성경의 권위, 복음의 중심성, 전도의 긴급성, 그리고 복음이 가진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헌신한다.(4) 리뉴얼 프로젝트를 갱신함으로써 교회가 복음과 성경에 비추어 계속해서 새로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새로움이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한다. 나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거나 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그 용어를 어느 한 지역 또는 편향된 정치적 의미를 초월하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의미로 말한다는 점을 꼭 명시하곤 한다. 복음주의의 글로벌 운동이 제대로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정치로 인해 종종 왜곡되는 미국 중심의 정의(definition)를 뛰어넘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물론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가진 세계적인 포괄성을 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전 세계의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알리는 것이다. 원제: The “Evangelical” Label Doesn’t Belong to the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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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복음주의적정체성
옛 언약은 벗어 던지고 새 언약을 덧입자
by Richard L. Pratt Jr.
2021-01-22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성찬식을 할 때마다 “이 잔은 내가 주는 새 언약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한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교회 중에는 교회 이름에 새 언약이라는 단어를 넣은 교회가 적지 않다. 그런데 만약에 기독교인에게 “새 언약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 질문을 받은 사람마다 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새 언약이 무엇일까? 도대체 뭐가 새롭다는 걸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새 언약이란 무엇인가? 새 언약을 예언하는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이 예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말씀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구약의 다른 말씀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날이 이르리니”(31절)라는 시작 구절은 조금 애매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뒤따르는 문맥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이 예언이 매우 정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새 언약에 관한 예언은 예레미야서 30장 1절에서 31장 40절에 이르는 비교적 방대한 분량의 일부다. 이 부분은 종종 ‘회복의 책’이라고도 불리는데 왜냐하면 내용이 이스라엘 포로기 중에 겪은 고난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그 포로 생활이 끝나고 맞을 축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이르리니”라는 표현은 30장 3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 날을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따라서 “날이 이르리니”라는 31장 31절의 말씀은 포로기가 끝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때를 가리킨다. 이사야서 54장 10절, 에스겔 34장 25절과 37장 26절은 이 언약을 '화평의 연약'이라고 묘사한다. 구약의 예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끝날 때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온 세상을 다 포함하는 왕국을 세움으로 이 언약을 성취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새 언약이 새로울 수 있는가?새 언약이 어떻게 '새로운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혼란이 있기에 우리는 너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많은 기독교인은 새 언약이라는 표현을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확실하게 새 것'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로운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다쉬(châdash)는, 이사야서 61장 4절, 에스겔 36장 26절, 그리고 욥기 29장 20절이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utterly new)”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시 새롭게 된', '개혁된', '다시 지어진', 또는 '리프레쉬된'의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31장에서 완전히 새로운 어떤 약속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반면, 많은 기독교인이 새 언약 속에서 무엇이 '새로운가'에 대한 부분을 너무 축소하는 바람에 새로운 언약과 과거의 언약 사이에 차이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은 새 언약이 옛 언약과 완전히 다른 여러 측면 중에서도 한 가지 측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예레미야 31장 32절에서 하나님은 이 새로운 언약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맺었던 언약과 다른, 새 언약의 네 가지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첫 번째로, 새 언약은 파기될 수 없다. 예레미야 31장 3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맺었던 언약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세대를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모세의 법을 위반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악한 나라의 폭정 속에서 포로 생활을 하도록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거짓 신을 섬기도록 했다. 그러나 이 새 언약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던 언약과 달리 결코 파기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의 언약과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어떻게 이 새 언약이 결코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장한다는 것인가?그 대답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다른 두 번째 측면 속에 담겨 있다. 바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의 신실한 종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뤄간다는 것이다. 31장 33절에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지켜야 할 율법을 바깥에 두는 대신 하나님은 이제 그의 백성을 바꾸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식의 내적인 변화는 결코 그 전에 발생한 적이 없던 일이었다. 신명기 10장 16절과 예레미야 4장 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맺은 외양적인 관계를 벗어나서,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율법을 새김으로 구원받는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을 담고 있다. 아브라함처럼 구원받는 믿음을 가졌던 구약 역사 속에 나오는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은 다 그들의 마음 속에 율법을 새겼다. 그러면, 구약 속 이곳저곳에서 일찍이 발생한 적 있는 옛 언약이 만들어낸 변화와 새 언약이 만들어내는 변화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그 대답, 즉 우리가 지금 살펴볼 세 번째 차이는 바로 새 언약이 만들어내는 내적 변화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각각의 사람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았지만 또 동시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몰랐기에, 그 결과 그들은 민족 전체로서는 모세의 율법을 어겼고 포로기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새 언약 안에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지식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 새 언약 아래에서 이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결과는 무엇인가? 그 결과는 바로 네 번째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는다는 놀라운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구약 전체를 통해서 동물 제사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면죄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새 언약은 영원하고 변치않는 죄 용서를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예레미야의 이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이 이스라엘 속에서 믿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가 새로워지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다 변화되어 신실한 종이 되고, 그들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는 그날을 그들은 오랫동안 고대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신약은 많은 구절을 통해서 너무도 명확하게 예레미야 31장의 새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구절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다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은 없다.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에 포함된 사람들 중에서도 아직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신약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주님을 알게 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또 매일매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신약은 예수님이 그의 세 단계 메시아 왕국을 통해서 새 언약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설명한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 역사 속에서 이뤄진 이 처음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실로 새 언약이 가진 예언 속 많은 일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는 도덕적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고, 또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의 불순종이 초래한 죄의 형벌을 대신 지셨다. 그 결과,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또 하나님의 천국 심판 앞에 섰을 때 그 죄를 영원히 용서받는다. 이 사실은 실로 놀라운 진리인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이 진리를 강조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두 번째로 소위 말하는 새 언약 세대는 그리스도의 모든 적이 다 그의 발 앞에서 거꾸러질 그 날까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다스리는 교회의 역사 내내 지속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감에 따라 비록 여전히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 언약 속 더 많은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5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보좌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일한다.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또 그들이 아버지의 지속적인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새 언약 시대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마침내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이 때, 새 언약과 관련한 모든 약속이 다 성취될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가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영원한 용서의 결과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이 도래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새롭게'(계 21:5) 만드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역한 그 날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새 언약이 가져다준 많은 복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이 새 언약을 영원히 온전하게 누리게 될 그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 간다. 원제: Out with the Old and in with the New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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