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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설교에서 변증의 위치
by 고상섭
2021-01-21
팀 켈러 설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을 향한 설교와 문화를 향한 설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향한 설교는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정감(Affection)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하는 것이고, 문화를 향한 설교는 이미 사람들에게 심겨져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생각을 형성하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문화를 향한 설교를 통해 복음과 반대되는 사람들의 마음의 우상을 제거하고, 마음을 향한 설교를 통해 그 빈자리에 그리스도를 심어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팀 켈러는 ‘설교’(두란노, 2016)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향한 설교와 문화를 향한 설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문화 내러티브가 각 개인의 정체성과 양심, 실재를 이해하는 것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의 문화참여 (cultural engagement)는 ‘타당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청중의 삶의 근본을 발가벗기기 위함이어야 한다.”(‘설교’ 36쪽)팀 켈러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 속사람의 마음의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으로 문화를 향해 설교하는데 그 과정이 바로 변증이라 할 수 있다. 변증을 통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그 혼란스러운 상황의 뿌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서 결국 사랑의 순서를 바로 세워주는 것이다. 변증의 원리 팀 켈러는 왜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그 전에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로부터 시작된 ‘전제주의 변증’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 틸은 하나님이 자연과 성경이라는 두 가지 계시를 인간에게 주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을 바로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흔든 후에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스스로 충족하시며, 독립적인 분이시다.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는 의존적 존재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지 않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 가운데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존재 양식부터 하나님과 떨어져서 살 수 없는 인간은 스스로 인식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은 스스로 태어날 때 진리를 알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선과 악을 분별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수납적 재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을 따라 판단하고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진취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꼴이다. 변증의 방법 팀 켈러는, 성경을 떠난 사고는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성경의 진리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화 속에 있는 내러티브는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신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는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고, 신자들 또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못하는 우상을 품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는 것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겨냥하는 설교가 된다. 각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순을 드러낼 때도 팀 켈러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지고 대립시키지 않고 일반 서적들의 권위있는 전문가들의 말을 통해 잘못된 생각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사용한다. 오늘날의 학문은 파편화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주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가 되는 주제라면 종합적이고 균형적이진 않지만 반대쪽 목소리가 존재하고, 그것을 도구로 사람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린다. 이 과정을 팀 켈러는 ‘설교’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변증적 시도는) 단순히 지적 활동이나 약삭빠른 수사학적 전략이 아니다. 다름 아닌 사랑과 돌봄의 행위다. 우리는 사회 문화적인 존재로서, 우리의 내면 동기들은 우리가 속한 인간 공동체에 의해 깊숙하게 형성된다. 성경 본문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신념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이 순간이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설교’ 35쪽)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기 전단계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하는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변증의 역할이다. 문화에 다가가는 설교는 결국 마음에 다가가는 설교를 위한 전단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바울은 그 당시 문화적 열망을 매개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사로잡음으로써, 마침내 그들이 진정한 지혜와 의로움 또한 참된 능력과 아름다움이신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했다.”(‘설교’ 35쪽)변증의 예 팀 켈러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짧은 설교를 살펴보면 다섯 가지 대지 중에 네 가지가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며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팀 켈러는 “왜 오늘날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죽음이 준비되지 못한 삶을 살아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네 개의 문화 내러티브를 제시하며 각각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첫째는 현대 의학이 발달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고, 장례식을 할 때도 장례식장에서 거행되기 때문에 죽음을 직면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둘째, 현세에만 집중하는 세속 문화 때문이다. 셋째, 죽음의 문제를 부정하다가 무의미함에 깊게 빠졌기 때문이다. 넷째, 죽음을 힘들어 하는 이유는 현대 문화에서 죄책이나 용서라는 범주가 없어졌기 때문이라 정의한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챔피언이 되었다는 마지막 대지에 앞서 네 가지 대지가 모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에 할애되어 있다. 흔히 팀 켈러의 설교는 주해가 적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주해가 적다기보다는 주해의 노출이 적다고 해야 할 것이다. 팀 켈러를 굳이 변호하자면 팀 켈러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성경의 이야기를 많이 할애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 같지 않다. 짧지만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려면 먼저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생각의 모순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팀 켈러의 변증 과정에서 인용된 일반 서적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론에서 셰익스피어의 글을 인용하면서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설명하고 오늘날 왜 죽음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애니 딜라드의 소설 ‘The Living’, 죽음에 대해 무시하는 듯한 내용의 웹사이트 내용,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통해 죽음을 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인류학자 리차드 슈웨더를 인용하면서 “고난은 일종의 소음”이라는 문화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영국 목회자인 마크 애쉬튼의 예를 통해 이전에는 죽음을 깊이 생각했음을 알려주고 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과 알베르 카뮈, 뤽 페리, 프로이트, 그리고 실존주의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순들을 하나씩 허물어뜨린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챔피언이 되셨다는 그리스도 중심성을 드러내기 전까지 최소 여덟 권의 책과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죽음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 내러티브를 드러내고 그 문화 속에서 우리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렇게 중요한 문제를 왜 이렇게 가볍게 취급했을까라는 자신의 생각 속에 있던 모순을 발견하게 해준다. 그렇게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충분히 드러낸 뒤에 무주공산인 생각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제시한다. “죽음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너는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 오직 나만이 너에게 멀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영원한 품에 안으리라. 다른 모든 품은 너를 버리겠으나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죽음에 관하여’ 37쪽)“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 2:14)팀 켈러의 설교의 특징은 문화에 다가가기와 마음에 다가가기다. 문화에 다가간다는 것은 문화 속에 있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과정이며, 그 후에 그리스도 중심적인 선포를 통해 복음을 마음 깊은 곳에 심어 준다. 결국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와 변증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변증의 과정에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지만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고, 문화 내러티브만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귀신이 떠난 마음에 주인이 없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사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팀 켈러의 변증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더욱 빛나게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일반 서적들을 읽고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도전하는 일도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기 위한 준비가 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 뿐 아니라, 삶의 정황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변증은 설교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은 다시 한번 팀 켈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복음
변증
팀켈러
정감
설교
문화내러티브
코넬리우스반틸
죽음에관하여
셰익스피어
설교자
그리스도인의 의사결정 원칙: 예배와 자유와 사랑(하)
by Tim Keller
2021-01-20
* 어제 아티클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이 예배와 자유와 사랑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의사결정을 어떻게 현실에서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본다.- 편집자 주오늘날 우리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까? 성경은 우리에게 주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한다. 신약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하며 무엇을 보고 읽을 수 있고 어디에서 일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제시하는 새로운 레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복음은 넉넉한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가는 과정 중 영적으로 오염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이방인을 사랑하며, 가족을 건강하게 부양해야 하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고, 어떤 인종이나 민족인지에 상관없이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도덕적 문제를 분명히 말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것을 적용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유사하게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첨예한 의견의 불일치를 초래하고 있다.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갈등 해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나?나는 고린도전서 최우선의 근본 메시지는 바울이 ‘관용’이라는 현대적인 관념을 머릿속에 확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현대인들에게 관용적이라는 것은 우선 다른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치나 신념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무도 자신에게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 권리를 주장하며, 아무도 자신의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권리도 포기하지 않는다.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런 원칙을 엎어 버린다. 우선 그는 분명한 비판과 판단을 내린다. 그는 믿음의 ‘약자들’은 나약하다고 말한다. 복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얕다. 그들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얼마나 첨예하게 다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나약한 형제들의 이해보다 더 많은 양심의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강자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확실한 교리와 신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8:1-3에서 바울은 그들의 오만함과 거만한 태도를 질책한다. 그는 화합을 유지하고 성도들이 그들이 바라보는 것들에 대한 공통된 신념과 관점을 갖도록 돕기 위해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내려놓으라고 소위 강자들에게 도전한다. 만약 이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들은 적어도 형제자매의 감성과 양심을 존중해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관대한’ 사람은 “나는 너를 비판하지 않지만, 나의 행동이 너를 화나게 한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은 정반대로 말한다. “나는 너를 비판하지만, 비록 내 권리의 일부를 포기하더라도 나는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거야.”로마서 14장에서 다루는 매우 비슷한 내용에 뒤이어 바울은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고 기록하였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약자의 실수를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 주석가인 덕 무(Doug Moo)는 “그들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들의 태도에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사랑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사랑은, 믿음이 강한 자로 하여금 관용이 함축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 주라고 요구한다”고 했다.(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866).오늘날 그것은 어떻게 실현될까? 필자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현대 기독교 문화 충돌에서, 양측은(문화 구별 진영과 문화 순응 진영 - 편집자 주) 자신을 더 성숙하고 강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라. (어쨌든 우린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의 내용이 우리를 향해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자, 여러분이 믿음이 강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을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경고와 함께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꽤 까다로운 규칙을 따라야 한다. 덕 무의 세 가지 단계를 밟아 자신에게 적용해보라.첫째, “그들의 믿음과 태도를 ‘공감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듣기 능력 시험으로 생각하고 잘 들어보라: 여러분은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게 “우리 스스로 그것을 더는 잘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듣고 나서 그들의 믿음을 타인에게 전하거나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들이 여러분에게 아직 그런 말을 하기 전이라면 여러분의 인내심은 아직 부족한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감싸주지 못하고 있다.둘째, “그들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것을 삼가라.”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15장의 내용을 통해 바울이 믿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 비판을 주저하지 말라. 하지만 비판을 할 때 여러분은 깊은 애정과 정중한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모욕, 조롱과 비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종종 말하였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복에 당신의 행복을 더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즐거움으로부터 즐거움을 얻고, 그들의 기쁨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고, 그들이 낙담했다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의 관계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도록” 맺어져 있다.셋째, 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들에게 행해야 한다.” 사랑은 언제나 두 가지 기본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고유성과 깊이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더 완전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우리의 문화적, 정치적 갈등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기존의 신념이 닫힌 체계로 구성된 교류에 의해 증폭, 강화되어 사회적이나 정치적인 의견이 극단화되는 현상-역주)의 근원이 되는 소셜 미디어나 뉴스 기사에 의해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발생한다. 바울이 말하듯이, 그 효과는 우리를 세속적이고, 일차원적이며, 비성경적인 인간 본성과 도덕적 가치에 근거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어 우리의 “양심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는 모든 문화를 (‘일반은총’의 개념으로) 인정하지만, 또한 세속적인 정치 및 사회 이론을 포함한 모든 문화를 비판하기도 한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이런 종류의 신학적 원리에 대해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노리개로 전락하기보다는) 더 큰 양심의 자유를 누렸을 것이며 다른 정치적 연대를 가진 기독교인들에 대해 더 많은 공감을 가졌을 것이다.마지막으로, 다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진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양육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심지어는 다른 문화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다른 성도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사랑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이는 여러분의 공동체 안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예배의 찬양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 있다. 목회자의 설교가 내가 원하는 특정 주제를 강조하며 다루지 않을 수 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옳다고 믿고 그렇게 할 권리가 있지만, 주위의 형제자매들을 속상하게 할 수도 있는 언어와 관행은 자제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사랑 안에서 여러분을 향해 희생을 보여준다면, 마음을 하나로 연합할 진정한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빌 2:1-4).어떻게 이 모든 것이 가능할까?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이것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우리의 가장 부정적 평가 가운데 하나를 가능하게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너는 너무나 망가져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죽음 외에는 너를 구원할 방법이 없단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해 그의 삶 가운데에 우리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복음에는 우리와 크게 다른 사람들을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들이 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신 일 위에 여러분의 정체성을 구축한다면, 여러분은 ‘관대함’을 넘어서는 훨씬 더 나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과 어떠한 악의도 없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권력을 행사할 필요 없이, 어떤 우월감도 없이 정직하고 예리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 존경, 경의, 겸손함을 품은 가운데 예리하게 이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세속주의는 이런 종류의 대화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원을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만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세속주의는 “우리 모두 우리의 방식으로 관용을 베풉시다! 상대주의, 회의적인 인식론을 통해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관용이라는 개념 자체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자유를 희생하셔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셨고 그의 희생적인 사랑은 우리가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겁니다.”라고 말해야 한다.오늘날, 교회는 세상과 더 닮았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차이의 장벽을 넘어 어떻게 말하고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아는 수백만의 기독교인들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원제: God, Freedom, and Lov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god-freedom-and-love/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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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 Keller
2021-01-19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우상 숭배로 뒤덮인 일상 가운데에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상 숭배가 거의 모든 생활의 이면에 있고 심지어 가게의 음식에까지 파고들어 가 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만의 분리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깊이 숨어 들어가기를 원했고, 반면에 다른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마음을 그것에 빼앗기지 않는 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동일한 교리적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만 나날이 더 비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우리의 문화 가운데서 곧잘 정치적 이슈로도 부각되는 관심사들에 대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그리스도인과 문화로마의 문화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마을과 사람들의 모임에는 나름의 신이 있었다. 모든 길드(기능인들의 조합)와 그들의 작품이 그랬고, 심지어 대부분의 가정에도 수호신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회의 여러 분야를 주관하는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가 있었다. 누군가가 어떤 나라, 도시, 또는 가정을 방문하게 될 때 그들은 통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의 신에 대한 예식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것이 기술자들의 모임이건, 학교의 모임이건, 도시의 의회 모임이건, 또는 예술 발표를 위한 청중의 모임이건, 한결같이 모임은 신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매일 아침 신들을 기리기 위해 동물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뒤 조리되었고, 이를 함께 먹으며 도시의 하루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인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 친교, 정치적 담화, 취업 그리고 상업의 현장에서 대부분의 행위가 우상에 절해야 하는 환경 아래에서 행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식품의 보관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 시대에 대부분의 시장과 가게에서 팔린 음식물, 특히 육류는 그날 아침 일찍 거행되었던 다양한 의식 가운데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었다.그렇다면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을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그랬을 것이라 믿었다. 우상 숭배가 거의 모든 모임과 심지어 가게의 음식들 가운데에도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자신들만의 구분된 세상을 형성하기 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으로 그것들을 숭배하지 않는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로 인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씁쓸한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교리적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변의 문화적 관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심각하게 엇갈렸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상대방이 시대정신과 타협하고 우상 숭배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거룩함의 중요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한편, 좀 더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희망 없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독교 자유의 의미를 설파하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자유를 당신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문화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쪽과 문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양측 모두, 상대방이 하나님께 불성실한 자들이라 여겼다(이에 관한 배경은 Roy E. Ciampa와 Brian S. Rosner의 성경 주석,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367-71 참조).오늘날, 거의 동일한 교리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 간에도 때론 정치적인 이슈로 보이는 이러한 심각해지는 이교도적 문화에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고수하며 자신들의 신념과 정서로는 낙태를 반대하지만, 낙태 찬성을 당의 강령으로 내세우는 정당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 반면에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개입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으며, 그런 자들과는 어떤 교류가 있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그런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또한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이슈도 있다. 일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현상 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려하며, 현재의 관습과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성경을 다시 살펴보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진보적이며 강압적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인하는 불의에 대한 모든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다.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게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까지를 읽어 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우상에 제공되었던 육류의 문제로 인해 혼선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오늘날 우리와 관련된 신학적, 목회적인 깊은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바울은 우리가 우상과 관련된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개별적으로 보고 논할 수 있도록 각각을 이해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는 사제가 우상에 바치기 위해 가축을 제물로 희생시키는 의식이 있었다(고전 10:14, 20). 그리고 우상에 대한 숭배의 의미로 음식을 먹는 일이 있었다(고전 10:20-22). 마지막으로, 제사와 음식에 사용된 것 중에 소비되지 않고 시장에서 팔리는 육류가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대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를 예배의 원칙, 자유의 원칙, 그리고 사랑의 원칙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예배의 원칙“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라는 말씀을 따라 바울은 10장 14절에서 18절에 걸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기록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우상 숭배의 행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참석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 여러 종류의 권세와 신들이 있으며 하나님은 많은 신 중 하나라고 선언하는 어떤 의식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는 어떤 예식에 관여할 수도 없다. 이런 기준에 의해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양한 우상을 기리기 위한 어떠한 공개 의식에 초청받는 것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우상을 기리는 제사 중 행하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Larry Hurtado, ‘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151). 이는 그들이 올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회적 모임이 되든 참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던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자들에 대한 질책이었다.치암파(Ciampa)와 로스너(Rosner)는 “객관적” 우상 숭배와 “주관적” 우상 숭배에 관해 도움이 될 만한 분별을 제시한다. 주관적 우상 숭배(Ciampa and Rosner, 369)는 우상 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객관적 우상 숭배는, 자신의 마음이나 신념과 관계없이,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고 참관자들의 가슴 속에 강한 믿음을 갖게 만드는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화적 자유와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위험을 초래한 것은 후자였다. 비록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우상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며 따라서 우상 숭배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오늘날 문화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우상인 섹스, 재물, 권력, 자유의지 등을 세상에 홍보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세속적인 비즈니스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다면, 혹시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위해 동일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거나 그들의 사업 방식에 뭔가 차이가 있지 않다면, 결론적으로 그들의 사업 역시 부와 권력에 관한 우상의 매력을 세상에 소개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사회를 보다 소비 지향적으로 만들고,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착하며, 자신에게 더 몰입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상업적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어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예술, 언론, 또는 많은 다른 문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자유의 원칙둘째,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고 기록하였다. 우상의 신은 가상의 존재를 상상으로 표현한 존재에 불과하여 우리를 축복하거나 저주할 힘이 없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우상에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치암파와 로스너는 “우상 자체는 영적 실재를 갖추고 있지 않고 실제로 신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탄의 사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뒤에는 영적인 실체가 있다”(479)라고 기록하고 있다. 핵심은 성경에서 사탄이 분노나 자존심에 의한 죄악을 이용하고 증폭시키는 것을 묘사한 것과 같이, 우상 숭배는 만들어진 우상과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는 사탄의 권세인 죄악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한다는 것이다(고후 2:11; 엡 4:27; 딤전 3:7; 딤후 2:26). 음식 안에는 ‘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거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영향을 미칠 초자연적인 힘이 없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 8:8). 그러고 나서 바울은 10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육류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자유롭게 사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전 10:23-26). 양심을 구속함으로 참여를 금지하는 성경의 규범은 없다. 그들의 이런 행위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우상 숭배는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또한 바울은 그들의 일상에서 빈번히 마주하며 출세나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인 사회 정치적 네트워크 구축의 열쇠가 되었던 사적인 식사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Ciampa and Rosner, 491). 여기서 바울은 다시 각자의 양심에 호소한다. 바울은 식탁 위의 음식이 이전에 우상에게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초대한 사람이 대놓고 사람들에게 우상에 대한 감사에 참여하자고 요청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과 10장에 걸쳐 이것을 믿는 자들의 ‘자유’(고전 9:1, 19, 21, 10:29)라고 불렀다. ‘예배의 원칙’ 하나만으로 우리를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자유의 원칙’은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을 영적으로 불결하게 만들 수 있다고 느꼈던, 지나친 영적 결벽증과 탈문화주의를 비판한다.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문화와 우상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단지 접촉만으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접촉만으로도 그들을 더러워지게(고전 8:7) 만든다고 믿었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다. 유약한 양심은 너무 쉽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런 양심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15:1)고 수군거렸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너무도 흡사하였다. 복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삶의 다양한 상황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이 두 가지 원칙은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히고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적용 방법을 보여준다. 신약성서 학자 래리 허타도는 바울의 가르침이 엄격함과 융통성을 겸비하여 기독교인들이 살아 계신 유일신 하나님께 구별되고 신실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가족의 일원이 되고 삶의 폭넓은 사회적 구조 속의 구성원으로도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했다고 결론 내렸다(151). 바울의 개인적인 식사 모임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균형 잡혀 있다. 초대한 사람이 모든 참석자에게 아폴로를 위한 건배를 요청한다면 먹지 말라. 그러나 그것이 이전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었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상에 대한 헌사의 행위가 없다면 먹어도 좋다.사랑의 원칙바울은 그가 정리한 원칙들이 모든 논쟁을 끝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판단이 쉽지 않은 개인적 상황들이 다양하게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가 규정한 지혜로운 규칙조차도 서로 달리 적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생각들은 어느 정도 개인적인 기질에 바탕을 두고 있고 각각의 상황에 대해 충분한 의견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양심과 문화적 충돌의 다양한 상황에서의 판단을 위한 세 번째 원칙인 ‘사랑’을 알려주었다. 이 원칙 안에는 적어도 세 종류의 적용 방법이 있다.첫째, 만약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여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8:1-3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 기록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바울은 문화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신랄하거나 고압적이며 거만한 자세가 아닌 사랑을 품은 겸손의 자세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바울은 지나치게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이 은혜의 복음에 깊이 뿌리내린 양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고 경고한다. 비록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먹을 때 우상으로 받드는 신이 실제로 임재한다고 느낀다(7절). 다시 말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성경적으로 허용되기는 하지만, 예전에 우상 숭배하던 자들을 다시 주관적인 우상 숭배의 길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은 “만약”을 위해 예전의 우상들에게 이끌릴지도 모른다. 머리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 복음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바울은 아직 어떤 일을 하기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강하고 성숙한 사람들은 보수적인 분리주의자들을 대할 때 경멸하거나 그들을 깔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잠시 제쳐두고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교류를 위해 사랑을 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렇다, 그들의 양심적 판단을 도울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의견의 차이로 인해 그들과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둘째, 만약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것을 유명하고 감동적인 고린도전서 9장의 가르침으로 기술하고 있다.“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바울의 요점은 만약 어떤 행동이 유대인 형제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의 음식 규정에서 그렇다. 바울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그는 기꺼이 그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그는 주변의 이웃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단계적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다. “어떤 공동체에서든 전도자, 교회 개척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야 복음이 불필요하게 문화적 차원에서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D. A. Carson, ‘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Leadership Lessons from 1 Corinthians,’ 122).이어 바울은 10장에서 사랑의 원칙의 이 원리를 적용한다. 만약 기독교인이 식사 모임에 참석했는데,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바울은 이를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전 10:28). 이는 오직 한 분이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다. 이 경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를 욕구로부터 멈추어 달라고 요청한다.마지막으로, 만일 허용된 관습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는 자유를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본 로버츠(Vaughan Roberts)는 ‘진실한 교회’라는 그의 책에서 고린도전서 8-10장의 내용을 ‘의사 결정 도식(decision tree)’이라는 내용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필자도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의사 결정 가이드’로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Vaughan Roberts, ‘Authentic Church: True Spirituality in a Culture of,’ 133).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1-33).우리는 하나님께 충실해야 하지만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기”(고전 10:33) 위하여 불필요하게 감정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 수호를 위한 용감성’만 가지고 남에게 불필요한 모욕을 주어서도 안 되며 진리가 훼손당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만 신경 써서도 안 될 것이다.*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내일 아티클에서 이어진다.- 편집자 주원제: God, Freedom, and Lov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god-freedom-and-love/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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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 C. Sproul
2021-01-18
이 그림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이번 달 테이블토크(Tabletalk: Ligonier 잡지의 한 콘텐츠-역주)지에 실릴 내 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일반적으로 학생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성경적 또는 신학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이번에는 단순히 성경이나 신학적 관점에서가 아닌,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이번 주제에 관한 글을 쓰는 진지한 과제를 맡게 되었다. 테이블토크의 편집자들은 나에게 슬픔에 대해, 내가 그 슬픔을 나의 삶에서 어떻게 경험했는지 생각해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성경적으로 슬픔을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글을 부탁했다.개인적인 슬픔을 논하기 전에, 나는 슬픔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우리가 슬픔의 실상을 말할 때, 우리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설명하는 고통이란 사소한 자극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부러진 뼈, 부러진 다리, 뚫린 어깨의 고통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피부를 관통하여 그 사람 존재의 가장 깊은 구석으로 내리박히는 고통이다. 이것은 마치 바이스(공작물을 끼워 고정하는 기구)와 같은 펜치로 극심한 아픔을 주며 영혼을 사로잡는 고통이다. 우리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공격하는 고통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흔히 ‘상심’이라는 비유를 쓰지만, 마음이 정말로 바닥에 떨어지는 유리잔처럼 깨지거나 사고로 산산이 조각나는 뼈처럼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하고 깨진 마음이란 사실 울고 있는 영혼, 가장 어두운 밤에 가려져 있는 영혼을 말한다.우리가 슬픔에 관해 말할 때는 성경이 깊이 인식하고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주님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가장 사무치게 드러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애통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분에게 슬픔이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인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슬픔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은 그 자신 안에서 느꼈던 고통이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 아닌 이 세상을 괴롭히는 큰 악을 자각함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거룩한 도시, 그분이 어릴 때 방문했고, 하나님이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시온의 거룩한 언덕이었던 그 도시로 오신 것을 알고있다. 예수님은 약속의 도시인 그곳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그곳으로 오셨다. 그 때는 최악의 불신앙이 예루살렘 성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성읍을 보시고 한탄하며 부르짖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눅 13:34). 이것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밀쳐지고 쓰러질 때 주님을 위해 울던 그 여인들을 보시면서 경험하신 그 슬픔이다. 예수님께서 그 구경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리 주님의 슬픔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긍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반면에 우리가 슬픔을 경험할 때, 우리의 슬픔은 대개 일종의 개인적 상실감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C. S. 루이스의 저서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 인간적 고충에 관한 그의 심오한 통찰력을 기억한다. 내 자신의 경험에서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속으로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몇 가지 기억이 있다. 그중 가장 고통스럽고 처음으로 떠오르는 슬픔은 내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내 영혼의 닻, 우리 집과 내 삶에 반석 같은 존재였다. 그가 쇠약해져 여러 번 뇌졸중으로 장애를 입고 마침내 죽음 그 자체에 스러졌을 때, 나는 절망에 빠졌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의 영웅이었던 그의 죽음은 내 영혼에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상처가 되었다. 또, 2000년에 나의 소중한 친구 짐 보이스가 영원한 영광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개인적인 상실감을 체험했다. 단순히 친구를 잃은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지를 잃었다는 것이 내게 그런 슬픔을 안겨준 것이었다.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의 고통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우리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그것은 배로 늘어났다. 이 영웅이 우리 곁에서 없어졌을 때, 나는 요나단을 잃은 다윗과 같이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라고 울부짖고 싶었다(삼하 1:19).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삼하 1:20). 아무도 이 사람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십자가의 능력이 명백히 패배했다며 기뻐하지 못하도록 하자. 그러한 개인적 손실을 넘어서는 친구들의 상실, 동지들의 상실은 언제나 나에게 어느 정도의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복음이 교회 안에서 적당히 타협되는 것을 보는 것만큼 나를 비통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의 악함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인의 타협이 내 영혼을 비통하게 한다. 끝으로, 내가 슬픔을 보고, 경험하고, 성경에서 그것에 관해 읽으면서, 그 슬픔이 자칫 비통한 감정으로 위험하게 발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 자체는 당연히 정당하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애통함이 슬픔을 넘어 쓰라리다면, 우리는 고통이 종기가 되어 독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결코 죄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슬픔에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도 슬픔에 그렇게 반응하지 않기를 기도한다.원제: A Grief Observed출처: www.ligonier.org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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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본슬픔
고통
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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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토크
리고니어
참된 믿음의 세 가지 요소
by Guy Richard
2021-01-17
“저는 믿어요, 믿는다고요. 그게 어리석지만, 믿는단 말이에요.”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영화인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1947)에서 어린 수잔 워커가 말했던 유명한 대사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서 흔히 믿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잘 보여 준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아도 도약해 보는 일, 아무 근거도 없지만 한번 신뢰해 보는 일이 세상이 말하는 믿음이다.하지만 믿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은 믿음을 설명할 때 비이성적이거나 어리석은 결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신념이라든가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여기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느낌이나 신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나 한 사람을 골라내 그 사람에게 심장절개술을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함으로써 답변해 왔다. 그리고 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라틴어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해 왔다. 곧 지식을 의미하는 ‘노티티아’(notitia)와 동의를 의미하는 ‘아센수스’(assensus), 그리고 신뢰를 의미하는 ‘피두키아’(fiducia)다.노티티아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노티티아, 즉 지식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내용, 이를테면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결코 공허한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믿음은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이 요소를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본문은 흔히 ‘~을 믿나이다’라는 문형으로 표현되며, 이어서 특정 종류의 교리적 진술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문으로 로마서 10장 9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밝힘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장 31절도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명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예문에서 우리는 믿음에 교리적 내용이 수반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믿음은 특정 진술을 믿는 일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앞선 예문에서 그 진술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으로 각각 주어진다.아센수스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아센수스로 불리는 동의다. 이 요소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으로 사실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성적인 확신을 의미한다. 어떤 내용을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되기에 부족하다. 우리는 그러한 내용이 사실이며 또한 우리의 필요를 실제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러한 믿음의 요소는 요한복음 5장 46-47절, 8장 31-38절 및 45-46절, 그리고 10장 37-38절과 14장 11절 등의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피두키아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피두키아, 바로 신뢰다. 이 요소는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요소가 빠지면, 믿음은 그저 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에 관한 사실은 알고 있어도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는 싫어 결국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귀신들의 ‘믿음’과 같다(약 2:19; 마 8:29). 따라서 이 요소는 복음에 제시된 그대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든가(요 3:15-16; 롬 9:33; 10:11)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시 71:5-6; 잠 3:5-6),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요 6:40; 히 12:1-2), 또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딤후 1:12; 마 11:28; 시 37:5) 등을 설명하는 본문에서 이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믿음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예화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이 매우 광활한 지뢰밭 한가운데 갇힌 세 사람이 있다. 이중에 한 명은 마구잡이로 한 길을 선택해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방향을 따라 나선다. 물론 이 경우는 믿음이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믿음은 지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코 맹목적일 수 없다.이어서 다음 상황이 벌어진다. 곧 헬리콥터 한 대가 지뢰밭에 남겨진 두 사람 위로 날아오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가 어느 길로 그 밭을 통과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 조종사의 말을 따라 망설이지 않고 지뢰밭 사이를 헤쳐 나간다. 이 경우 또한 믿음의 예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번에는 (조종사가 알려 준 정보에 대한) 지식과 (그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고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긴) 동의에 근거한 행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알지 못하는 조종사가 알려 준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부족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여전히 맹목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이제는 최종적으로 남겨진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지뢰밭의 탈출 경로를 조종사가 알게 되었는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지, 또 얼마나 확실히 그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조종사가 안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본다. 나아가 자신이 아는 지인 중에 조종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본다. 심지어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으로 돌멩이를 던져서 폭발물이 정말 없는지도 테스트해 본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그 사람은 충분한 지식을 확보해서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노티티아)과 그 지식에 대한 동의(아센수스)에 근거하고 있는 신뢰(피두키아)가 비로소 참된 믿음을 완성한다. 이러한 믿음은 전혀 어리석지 않으며, 오히려 전적으로 이치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믿음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주어졌을 때, 그 모든 요소는 필연적으로 바른 행함을 통해 드러난다. 위에서 소개한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진실하다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그 사람이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하여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거부한다면, 혹은 자기 스스로 생각한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한다면, 그는 조종사의 말을 실제로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조종사의 인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이와 같이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가 모두 갖춰졌을 때, 참된 믿음이 이뤄진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형성되면, 바른 행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바른 행함은 믿음을 구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다. 즉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바른 행함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원제: What Faith Is and Is Not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과소명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
지식
동의
신뢰
믿음
고난은 우리를 강하게 한다
by Scott Hubbard
2021-01-16
고난을 겪는 것만큼 우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경험은 거의 없다. 환난이 닥치면 거의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속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당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나 어떤 이들은 그분을 저주한다. “주님을 신뢰합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엎드려 깨어진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를 떠나고 만다.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분명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개인이 고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는 환난으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시험이 그들에게 무엇을 이루게 해주는지 알기 때문에 시험을 신실하게 감당하라 말한다. “내 형제들아 [중략]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중략] ‘너희가 앎이라’”(약 1:2–3). 야고보가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고난의 유익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유익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런’ 환난들이 ‘지금’ 일어나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또한 그 환난들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몰랐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으로 가득한 그 단순한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낸다. 이 말이 당신의 영혼 속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환난을 대하는 가장 멋진 태도, 즉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불로 연단을 받다야고보는 금속 가공업에서 차용해 온 듯한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약속을 묘사한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 금과 은이 도가니에서 단련되듯(시 12:6; 잠 27:21)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통해 정화되고 연단을 받는다(벧전 1:7도 보라). 불로 금속을 깨끗하게 하는 연단의 이미지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확증해주기도 하고 그 실체와 직면하게 해주기도 한다. 우선, 그 이미지가 확증해주는 것은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를 실제로 불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의 열기를 괜찮은 척하며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환난의 뜨거움으로 인한 화상 자국은 우리 영혼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연단은 불과 같다. 불은 우리 살을 데게 한다. 우리 믿음이 은처럼 강하다 해도 말이다.또한 야고보의 ‘믿음의 시련’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 느끼는 것을 대면하여 보게 해주기도 한다. 고난이 연단이라면, 그 고난들은 무작위적이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는 분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를 연단하시는 그분은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그분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며 환난의 불꽃이 어떤 것인지 몸소 아시는 분이다. 환난이 우리를 뒤덮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신 32:10).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하신 뜻 안에 놓여 있다(엡 1:11). 환난의 불꽃이 높아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사 43:2). 고통이 만들어 내는 것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은 그 고난이 우리로부터 앗아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불길이 마구 집어 삼키는 것을 망연자실한 채로 바라본다. 하지만 잿더미 아래에서 우리의 고난은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고난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고난이 뭔가 영광스러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에 우리가 수없이 던지고 낮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질문, 그리고 흔들리는 우리 믿음 위에 어두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시련이 인내를 이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이 항상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병, 이혼, 외로움, 기나긴 기다림 같은 고통 뿐이다. 우리가 고난이 뭔가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늘 보기 때문이다.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고 모든 성도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종기로 고생하는 욥, 고향을 멀리 떠나 남편마저 잃은 룻, 어두움에 휩싸여 시편 88편을 노래한 헤만 같은 이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들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는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아무 의미 없이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자녀는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단순한 고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환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찢으시나 도로 낫게 하신다(호 6:1). 여호와께서 우리를 낮은 곳으로 던지심은 우리를 다시 올려주시기 위함이다(사 30:26). 하나님이 보내시는 불꽃은 우리를 정련하기 위함이다. 존 리폰(John Rippon)의 찬송시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래를 듣는다.불 같은 환난 지날 때 네 길을 내리라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환난의 불이 널 상치 못하네찌꺼기를 사르리니 정금같이 되리라인내하는 성도들정화된 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선을 창조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천국에 가서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도 야고보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이라 말함으로 그 많은 선 중 하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영어에서 ‘endurance‘나 ‘patience’로도 표현할 수 있는 인내(steadfastness)라는 말은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말처럼 인기가 많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인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삶의 무게를 견디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펴고, 영원한 삶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인내의 영광을 보고 싶다면 사도 야고보가 말한 바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중략] 본으로 삼으라”(약 5:10).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빛으로 나올 수 있는 오늘날의 미가 선지자다(미 7:8–9). 그들은 척박한 땅을 바라보면서도 “기뻐하리로다”(합 3:18)라고 고백하고 인내하는 하박국이다. 그들은 이전에는 풀무불을 두려워했으나 여호와께서 그 안에 함께 하심을 알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드락이다(단 3:25). 인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롬 12:12). 그들은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는 일을 지체하지 않는다(히 12:1). 지치지 않고 환난의 광야를 걸어간다(고후 1:6). 구속을 간절히 바라나 참음으로 기다린다(롬 8:25).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다(마 10:22). 그들의 시선은 승리한 전쟁, 극복한 유혹,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의 면류관에 고정되어 있다(약 1:12). 그들은 의의 나무들(사 61:3)이고 비바람을 많이 맞았으나 여전히 강한 바람에 맞서는 그루터기들이다(롬 5:3–4). 그들은 영광을 향해 흔들림 없이 전진하는 성도들이고, 우리는 그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한다.환난의 고통으로부터 하나님은 오래 참음을 만들어 내신다. 고난의 불꽃으로부터 하나님은 인내를 창조해 내신다. 복합적인 기쁨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어 내는 줄을 ‘안다면’ 우리는 그 고난을 견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만들어질 미래의 인내를 상상해 볼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비한 것은, 환난을 기쁨으로까지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약 1:2). 그런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늘 쾌활한 사람이 짓는 그런 과장된 미소나 웅변가의 활기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기쁨은 복합적인 기쁨, 즉 저 깊은 곳에 이르는 눈물과 슬픔으로 어우러진 그런 기쁨이다(고후 6:10).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질고를 겪은 그분이 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다. 이 기쁨은 그분에게서 온 것이기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약 1:4) 되어, 이 고난의 불꽃 저편에 계신 그분께로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 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최고의 순간을 앗아가는 도적도 아니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꿈을 죽이는 암살자도 아니며 아무에게나 무기를 겨누는 광인도 아니다. 우리의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인내를 주시려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다.원제: Fortified by Fire: How Suffering Makes Us Strong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영성
영적성장
고난
인내
기쁨
연단
시련
시험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by Michael J. Kruger
2021-01-15
우리는 수많은 진리의 가설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매일 우리는 무엇인가는 참이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거짓이라는 외침의 공세를 받으며 살아가며,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듣는다.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행동해야 하며 다른 방식으로는 하지 못하도록 요구 되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발행하는 월간지 칼럼에서 우리의 삶과 관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뉴욕 타임즈의 사설란은 정기적으로 오늘날의 큰 도덕적, 법적 혹은 공공 정책 문제에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국의 무신론자이자 진화론자로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는 우주 내에서 우리의 역사적 기원과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소개한다. 우리는 이 모든 주장을 어떻게 걸러내야 할까? 사람들은 관계, 도덕, 하나님, 우주의 기원 및 기타 중요한 질문 등에 어떤 답을 내려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표준, 기준, 혹은 규준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하다. 비록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규범을 가지고는 있다. 어떤 이들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여 논쟁거리들을 판단한다. 어떤 이들은 경험에 의존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 자신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을 선호하기도 한다. 비록 이들 각각의 접근 방식에는 어느 정도의 진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지식을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서 거부했다. 대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규범으로서 합당하게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만을 용인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우리가 논란이 되는 진리의 주장들의 도전을 마주하는 최초의 세대는 아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태초에 그러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창 2:17). 반면에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정반대로 이야기 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창 3:4). 아담과 하와는 이 논란이 되는 두 주장을 어떻게 판단해야 했을까? 경험주의에 따라서? 합리주의에 따라서? 그들 자신에게 옳다고 판단되는 기준을 따라서?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간절히 붙잡아야 할 유익한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셨던 말씀 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것 대신에 하와는 더 면밀히 알아보는 쪽으로 결정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창 3:6). 사실, 아담과 하와가 과일을 먹은 것 자체가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타락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삶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다음의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었던 논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로마 가톨릭 당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과 교리의 절대적 표준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이 말씀을 성경 밖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세 가지 측면의 권위를 주장했는데 이는 성경과 전통과 교도권을 포함한다. 이 삼중 권위의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바로 교도권(Magisterium)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는 직분을 의미하며 주로 교황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의 공적 선언(Ex Cathedra 혹은 성좌 선언[from the chair]이라고 불린다)은 곧 하나님 그분의 말씀으로 간주된다.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교회를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운동가들은 이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이전에(히 1:1)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셨던 것을 인정한 반면, 성자 예수님 안에서 종결하신 계시의 말씀(히 1:2)이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여전히 지속되어 질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사도의 직분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구속사적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엡 2:20).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활동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증거하며 가르치고 적용하는 권세를 교회에 부여하는 것을 내포한다. 따라서 사도적 가르침이 영구적으로 구체화 된 신약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판으로서 드러나야 한다. 구약성경과 더불어 신약성경만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즉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이 삶과 교리를 위한 무오한 규범이라는 고백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기 위한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진정 이 고백은 종교개혁의 형상인(formal cause)으로 여겨졌다. (반면, 오직 믿음[Sola Fide]은 질료인[material cause]이었다.) 이 교리에 대한 의견은 마틴루터가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은 이후 보름스 의회(1521년)에서 그가 했던 유명한 연설 중에 구체화 되었다. “내가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한(사실 나는 명백히 교황이나 공의회가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 서로 상반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인용했던 성경말씀에 묶여 있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양심에 거슬러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루터에게는 성경이, 오직 성경만이, 우리가 믿는 것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물론, 많은 기독교 핵심 고백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교리는 종종 잘못 이해되거나 적용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오직 성경 교리를 “나, 하나님, 그리고 성경” 형태의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때 교회는 진정한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며 말씀을 적용하고 해석할 때 교회의 역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회의 풍성한 전통과 신조, 그리고 신앙고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반역사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교리의 의미를 오해하여 성경을 유일하면서 무오한 권위로 이해하기보다는 단지 유일한 권위라고만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개인주의적 접근은 실제로 그것이 보존하고자 하는 오직 성경 교리를 약화시킬 뿐이다. 신자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결국 사적이고 주관적인 결론만 남게 된다. 개인의 권위로서 간주되는 것은 결코 성경의 권위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같은 교리가 왜곡될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교부들, 교회 회의, 그리고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의존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이러한 역사적 뿌리는 정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겸손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개혁자들은 그들 스스로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원래부터 믿어 온 것이었으나 후대에 오해되고 왜곡되어 버린 매우 오래된 무엇인가를 회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은 혁신가들이 아니라 발굴가들이었다.오직 성경 교리가 우리를 보호한다는 입장에 대항하는 다른 극단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역사적인 태도를 우리가 피하기를 원하지만, 오직 성경 교리는 신조와 신앙고백서 혹은 기타 인간이 기록한 문서(또는 개념)를 과도하게 수정하거나 성경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는 언제나 로마교회가 저지른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우리가 “전통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수용하지 않도록 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주의”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부분까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속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보호자다. 하지만 오직 성경 교리에 대해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리를 16세기 논쟁(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있었던 옛날의 논쟁이며 오늘날과는 무관한 흔적)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 개신교 교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교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종교개혁의 교훈은 광범위하게 점차 잊혀졌고,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성경 밖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시 오직 성경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교리 그 자체를 가르치기만 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가 교회를 되돌리기 위한 중요한 방안은 진정으로 성경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개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성경에 대해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 우리가 선호하거나 회중이 듣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을(Sola Scriptura) 전파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모든 말씀(Tota Scriptura)을 전해야 한다. 이 둘은 늘 함께 가야 한다. 이 두 교훈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하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제: Where is the Word of God?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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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쇼생크 탈출에 대한 신학적 읽기
by 노승수
2021-01-14
영화 쇼생크 탈출은 1994년 개봉한 영화다. 제대 후 복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당시 유행하던 비디오 방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그런 느낌이 오래도록 남았다. 원래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인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영화화 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원래 종교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그는 그의 소설에서 종교를 신랄하게 다루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화 된 '미스트'라는 그의 작품은 안개와 거기에 나오는 괴수들 때문에 등장하게 되는 사이비 종교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스트'가 종교의 어두운 면을 다루었다면 '쇼생크 탈출'은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적인 복음의 서사를 영화로 옮겨 두었다. 이 서사를 위한 영화적 장치는 이렇다. 영화에서 쇼생크라는 감옥은 자유가 없는 세상에 대한 유비다. 실제로 쇼생크는 애굽의 제23왕조인 세송크(Sheshonk)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왕기상 14장 25-26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5년에 애굽으로부터 침공을 받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침공해 온 왕의 이름이 시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애굽 역사에는 시삭으로 이름하는 파라오가 없다. 이 문제는 애굽의 이름을 모음이 없이 자음으로만 된 히브리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음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삭의 히브리어는 שׁישׁק인데 음가를 옮기면 sysq가 된다. 그것이 바로 애굽의 22왕조와 23왕조의 파라오의 이름인 쇼생크다. 저자의 이런 작명은 이 작품이 성경적 서사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스티븐 킹은 출애굽 서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죄수들이 갇혀 지내는 감옥을 쇼생크라 명명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앤디(팀 로빈슨 분)가 15년 간 굴을 판 조그만 조각용 손도끼를 손도끼 모양으로 오려서 파낸 성경 안에 보관한다. 그리고 앤디가 탈출한 당일 교도소장이 개인 금고에 넣어둔 앤디의 성경책을 펼쳤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그 때 출애굽기의 첫 페이지가 클로즈업 된다. 이는 감옥의 노역과 자유 없는 삶과 출애굽 사건을 서사로 유비한 것이다. 이 서사에는 또 다른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메인 플롯에서 탈출의 당사자인 영화의 주인공 앤디는 회계사로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쇼생크에 들어온다. 마치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 많은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과 유사한 플롯을 구성한 것이다. 영화 속 죄수들은 간수가 허락하지 않으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가면 소변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육체에 대한 자유도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앤디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편지 이중창인 아리아를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게 하는데 이는 앤디의 자유를 묘사한다. 모든 죄수들은 안 될 거라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주정부를 비롯한 관공서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감옥 내에 도서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 보내진 기증품 중에 있던 LP판 중 하나를 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앤디의 친구인 레드(모건 프리먼)는 “그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고 독백을 한다. 이는 앤디의 자유에 대한 묘사이자 그로 말미암은 구속의 묘사이기도 하다. '피가로의 결혼'의 선곡 역시 모종의 장치다. 세빌리아 이발사인 피가로의 연인인 수잔나가 백작부인이 남편 알마비바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 적는 부분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의 중창들은 하모니를 이루고 다른 음역대의 가수 예컨대 테너와 베이스, 소프라노와 알토가 함께 노래하는 반면 이 중창은 소프라노들만의 중창이다. 또, 보통 중창에서 테너나 소프라노의 비중이 다른 반면 받아쓰기 형식의 이 이중창은 같은 비중으로 가사를 반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본받는(Imitation Christ) 삶처럼, 혹은 구원자와 구원받는 자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영화적 장치는 앤디에게 외부 물건을 공급해주던 죄수 레드와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하던 죄수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다. 둘은 모두 가석방 심사를 통해서 석방이 된다. 그들은 가석방 후, 같은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남은 삶을 산다. 그러나 앤디와의 약속이 없었던 브룩스는 자살을 선택하고, 앤디와 약속이 있었던 레드는 약속을 따라 약속의 나무 아래로 가서 앤디의 편지와 돈을 찾아 앤디가 있는 약속의 땅 멕시코 만의 파라다이스로 간다. 그렇게 앤디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영화가 마친다. 이는 성경에서 약속 있는 자와 약속 없는 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의 메인 플롯에서는 앤디가 쇼생크를 탈출하지만 실제로 앤디는 그 마음에서는 쇼생크에 갇힌 적이 없는 자유인이자 죄 없는 자였다. 반면, 레드는 죄인으로 감옥에 갇혔고 그의 마음은 죄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존재로 쇼생크에서 벗어난 가석방의 삶이 오히려 불편했으며 브룩스처럼 자살을 고민하던 이였다. 그런 레드가 앤디와의 약속을 따라 위수지역을 이탈하여 파라다이스로 가는 사건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출애굽이다. 그런 점에서 서브 플롯의 레드의 탈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탈출이며 이것이 모차르트의 아리아 이중창을 선택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는 이 영화에서 간수들과 교도소장이 마치 율법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엄중한 태도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성경이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이 율법의 상징인 교도소장은 앤디의 탈출로 인해서 자살하고 마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이 율법의 고소를 무력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영화적 묘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자유 없는 우리 삶에 대한 묘사다. 무신론자였던 스티븐 킹이 천국과 내세의 삶을 묘사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천재 작가는 기독교의 서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하게 간파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다면 그것은 “자유” 혹은 “해방”이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해방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갇혀 있는 내면의 감옥과 사슬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멋대로 사는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앤디가 모든 불의에 맞서서 자유를 갈망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7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으며, 미국 의회도서관의 National Film Registry에 영구 보존되었다.
문화
영화
쇼생크탈출
출애굽기
미스트
사이비
스티븐킹
피가로의결혼
하나님나라
자유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
by Peter J. Leithart
2021-01-13
최근 손주들 중 셋이 매년 그랬듯 무더운 여름에 남동부로 우릴 방문했다. 물론 엄마 아빠와 함께 말이다. 손주들이 우리 집에 하루 이상 머물 때면, 나는 항상 연극을 하거나, 아니면 “팝스 박사(Dr. Pops’s)의 여름 성경 학교”를 열곤 한다. 첫째 손녀가 여기 와서 머무는 동안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개월과 9개월이다. 너무 어려서 연극으로 리어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팝스 박사의 여름 성경 학교”가 열렸다. 아이들은 손 동작을 사용해서 그룹들(cherubim)의 네 면을 배웠고, 창조 기사의 개요, 창조의 기본적인 구조, 창세기의 요약 내용을 배웠다. 다음에 손주들이 오면 출애굽기를 다룰 계획인데, 짐승을 드리는 제사를 각각 어떻게 했는지 가르칠 생각이다.내 첫 아들이 걷기 시작할 때쯤부터 시작하여 주로 내 자녀들과 손주들을 비롯한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지 35년 이상이 되었다. 그간 배운 것들 중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1.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라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히 1:1–3). 시내산에서 율법에 대해, 왕들을 통해서는 지혜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태우고 부수는 말씀들을 주셨으며, 마지막으로는 말씀이신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정경(canon)의 순서는 이스라엘과 온 인류가 성숙해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마치 우리가 노예와 같은 어릴 적 상태로부터 자유라는 성인의 상태로 자라가듯이(갈 4), 또한 제사장에서 왕으로 선지자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듯이 말이다. 성숙에 대한 성경의 역사가 이야기로 가득한 장문의 책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도 이야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말하고, 걷고, 추상적 사고를 하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훼께서는 최고의 부모다. 이스라엘이 토라, 회막, 복잡한 제사 제도, 토지나 왕정에 대해 지시받기 전부터 그들은 이야기, 즉 어떤 가족에 대한 아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 후에 가정 예배를 드렸다. 나는 무릎에 성경을 펴놓고는 성경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사도행전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창세기에서 다시 시작해서 동일한 프로세스를 반복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계속 아이들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이를 계속 반복했다. 내 자녀들이 자라면서는 신약의 나머지 부분을 다루었는데, 그 때는 신약 본문들을 함께 읽었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던 때,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흥미를 돋우고자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건너뛰고 도덕적 교훈의 핵심으로 달려가고자 한다. 상세한 내용을 무시하면서 추상적인 교리적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성경이 도덕적 교훈을 주고 성경 이야기에 교리적 중요성이 있는 것은 맞다. 그 모든 걸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주셨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읽고, 자녀들에게 이야기 해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대로 살고,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걸 기억하라. 이야기에서 시작하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아이들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2. 예수님을 보여주라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눅 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가르치셨고, 이후 나머지 열한 명도 가르치셨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모세오경, 선지서, 시가서, 즉 구약 전체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성경은 책 중의 책이고 수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거대한 이야기다. 모든 작은 이야기들은 예수님 이야기의 일부이므로 결국 전체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 작은 이야기들은 퍼즐 조각들과 같다. 조각을 다 맞추고 나면, 이레니우스(Irenaeus)의 말처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왕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조각들을 찾아나서야 할까? 성경 인물들에서 시작하라.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예수님이 더 나은 아담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라. 아벨이 가인에게 당했고 요셉도 그의 형들에 의해 그리 되었듯, 예수님도 형제들로부터 공격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라. 삼손이 그의 죽음의 순간에 승리했듯,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그리 하셨음을 보여주라.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보여주면 자녀들은 예수님께서도 우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사건들에도 주목하라. 마태복음 서두를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죽이는 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다시 돌아와 자라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후에 산상수훈을 주신다. 이는 이집트 종살이, 이스라엘 아이들에 대한 바로의 살해 명령, 출애굽, 광야 방랑 생활, 시내산과 율법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지루해 보이는 레위기라 해도 자녀들과 함께 읽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레위기를 읽을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라. 성경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다 예수님께로만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노아는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아담이기도 하다. 다윗은 사사 중 하나처럼 싸우며, 히스기야는 새 다윗이고, 예레미야는 모세와 닮아 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 얘기를 해주면서 “우와, 그러니까 ‘이게’ 성경 안에서 일어난 것이 여기가 처음인가? 우리가 ‘이런’ 인물을 성경에서 보는 것이 여기가 처음일까?” 라든지, “우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사람이 죽은 건 지금 이게 처음이지?”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건 여기가 처음인가?” 아니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가 처음이지?” 또는 “물 긷는 곳에서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난 경우는 이게 처음이지?” 같은 말을 던지면 아이들은 그게 사실은 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아이들은 “아니에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은 사람들은 또 있어요” 하면서 시스라나 아비멜렉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겠지만, 무엇보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기억해 낼 것이다. “남자들은 ‘모두’ 아내 될 여자를 물 긷는 곳에서 만나요!” 아이들은 타고난 모형론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억누르면 그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아이들은 모형론(typology, 마치 틀이나 사본처럼 원형의 그림자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표시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일명 '예표론'이라고도 한다 - 편집자 주)이라는 말은 모르지만 이 놀이를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 놀이를 해보라. 3. 성경을 노래로 가르치라몇 년 전 아이다호에서 목회할 때 초등학생들을 위한 교회 여름 성경 학교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성경 신학의 패턴들을 아이들이 잘 배울 수 있도록 노래를 몇 개 만들었다. 음악의 힘을 뒤늦게야 깨달았기에 그만큼 나는 적극적으로 노래를 사용하려고 했다. 노래를 하거나 구호를 외치면 아이들에게 성경이 더욱 감동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전해졌다. 노래를 사용하면 성경을 아이들의 두뇌와 몸에 새길 수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단지 예쁘거나 귀여운 노래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갈 때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생각의 결을 만드는 데 노래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했다. 한 번 듣고는 유치한 아이들의 노래라며 다시는 부르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랬다. 예를 들어보겠다. 창세기 전반부를 보면 세 가지 타락이 연달아 등장하고 뒤이어 홍수라는 거대한 창조 파괴가 나온다. 홍수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성경은 세 명의 족장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들을 통해 앞서 나온 세 가지 타락이 역전되고 세상이 새롭게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 모든 일을 노래로 불러보면 다음과 같다(굵은 글씨는 강조를 의미). 아담, 가인, 또 하나님의 아들들(세 가지 타락)쏴아아!(홍수를 의미한다. 홍수를 뜻하는 손 동작 사용)바벨아브라함, 야곱, 요셉(세 족장들)아담은 야훼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하나,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임을 알면서도 순종한다.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 당하나, 죽음으로 위협하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간 야곱 또한 아벨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 딸들과 결혼하며 이 땅을 더럽혔으나 요셉은 유혹을 이겼고 온 세상을 굶주림에서 구해낸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 수준의 성경 가수 중 하나는 캐나다 출신 작곡가인 제이미 솔스(Jamie Soles)다. 그가 낸 많은 앨범을 들으면 아이들이 성경의 기본은 물론이요,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구해주는 것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 동일한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민수기 7장 같은 본문마저도 아이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한다. 다른 음악가들도 물론 있지만, 성경의 핵심을 솔스만큼 잘 담아내는 이는 드물다. ‘성경’을 가르치라나는 아이들이라 해도 성경을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잘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재미있게 배울 수도 있다. 내가 성경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잘 가르칠 때, 아이들이 아버지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배웠다. 원제: 3 Ways to Teach Scripture to Children: Tell Stories, Show Them Jesus, and S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성경이야기
예수님
여름성경학교
정경
가정예배
자녀교육
예표론
주님은 보장된 사명을 명령하셨다
by Dayton Hartman
2021-01-12
많은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며 모여들었다.이 장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승천하시는 사도행전 1장의 장면이다. 사도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일까 생각한다. 왕국이 회복되었는가(행 1:6)? 왕국이 도래하는 날짜와 시간을 주시기보다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새로운 과제를 주셨다. 제자들이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가라고 명하셨다(행 1:8). 그것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결정적인 대답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시기를 아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복음을 멀리, 넓게 가져가야 하는 책임을 알면 된다.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세움으로써 이 일을 성취할 것이다.실패하지 않을 사명제자들에게 지상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시기 전,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음부의 권세가 막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16:18).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위대한 확신을 계속해서 되새긴다. 교회 개척은 어렵고 재정이 많이 드는 일이다. 교회 개척은 마치 지옥의 권세 자체와 맞서 싸우는 전투와 같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더 많은 지역 교회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과 자신감을 준다. 이 사실은 특히 어려운 때 나를 앞으로 이끌어 준다.그렇기에 나는 이 지상대명령이 나의 교회나 어느 한 교회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교회는 다음 달이나 다음 세기에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교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확신이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내가 섬기고 전하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모으고 세우시는 데 실패가 없는 분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약속의 그림자최근에 다니엘서를 읽으며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에 대해 생각했다. 미국 복음주의는 이 꿈을 주로 선지자적 예언으로 연관 지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이 꿈이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하며 지상대명령을 수행하는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전진이라고 믿었다. 다니엘은 신상의 금속이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설명함으로써 왕의 꿈을 해석하고, 그 다음 그 금속들의 파괴와 끝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왕국의 진전에 대해 설명한다.“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5).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로 마침내 절정에 이를 교회의 전진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 AD 초대 교회의 교부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학자 – 역주)는 “그러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은 다니엘에 의해 미래의 일들을 보여주고, 당신의 아들로 그 일들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속세의 왕국들을 파괴하고 의로운 자들의 부활인 영원한 왕국을 소개할 손대지 아니한 돌이다”라고 썼다(모든 이단에 반대하여, 5.26.2). 비슷하게,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AD 히포의 주교. 서방교회의 교부이며 대표적 신학자 – 역주)도 다니엘서 2장의 태산을 교회 자체라고 해석하였다. “다니엘의 해석에 따라, 아주 작은 돌이 세상의 왕국들을 추월할 때까지 자라 ‘온 세계에 가득’할 때까지 커진 것이 바로 그 산(교회)이다”(시편 주해 43.4).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계획에 대한 초대 교회의 확신을 일부라도 회복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실패할 수 없는 임무를 추구하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지상대명령을 교회 개척을 통해 수행하며 말이다.기독교 단체(Para-Church) 사역은?하지만 기독교 단체 사역은? 나는 교회 개척에 관한 토론에서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기독교 단체 사역은 지역 교회들에 의해, 그리고 그 교회들을 위해 쓸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 사역들은 여러 방면의 실제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독교 단체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9Marks와 같은 기독교 사역 단체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이 사역이 영적 건강을 위해 지원하고 응원하는 교회의 궁극적인 성공은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독교 단체 사역을 시작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교회를 세울 더 많은 제자를 키우라고 명하셨다.제자들을 만들고, 교회들을 개척하고지상대명령의 중심 명령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다(마 28:16-20). 제자들은 지역 교회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새로운 제자들이 성숙해져 감에 따라 그들이 다른 제자들을 더하여 갈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제자가 만들어지면, 점점 더 많은 교회가 태어난다.그렇다면 제자를 만드는 사명은 곧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다. 지상대명령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각 교회는, 더 많은 교회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할 교회를 만들 필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되어야 할 패턴이다.왜 지역 교회인가?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작동하기 때문이다(마 28:1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되었다(고전 12:12-13).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힘을 얻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의 통치에 복종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양하고 전파하는 곳이다.더 나아가서, 아픈 자를 돌보고, 낮은 자를 높이며, 학대받은 자들을 위해 정의를 구하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을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온다는 좋은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복음을 전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원제: The Great Commission Is Guaranteed, So Let’s Get to Work출처: www.9mark.org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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