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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는 성육신을 묵상하자!
by 김선일
2020-12-22
성탄절은 지구촌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다. 축제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성탄축제의 이유는 물론 구주의 오심, 즉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우리 모두의 생일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축제인 것처럼 설레고 즐거워한다. 올해는 코로나의 확산세로 거리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축제는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왜 성탄을 경축하는가? 사실 예수께서 오신 날이 12월 25일인 것은 365분의 1외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 청교도들은 일부러 성경적 근거가 없는 성탄절을 택해서 메이플라워호의 하적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 공동체가 특정한 날을 정해서 구주의 오심을 기억하는 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되살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체로 성탄절을 장식하는 이미지들을 돌아보자. 성경에 근거해서 나오는 이미지들은 동방박사, 천사, 목동, 마구간과 동물들,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중심에 계신 아기 예수! 여기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매우 소박하지만 평온하고 따뜻한, 그래서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이 물씬 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탄 찬송의 가사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사실 성경이 실제로 그리는 예수께서 나신 상황은 훨씬 억압적인 상황에서 처절해 보이지만, 예수께서 성탄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전체 구도는 옳다. 성탄에 덧붙여진 부가 캐릭터들(산타클로스, 루돌프 사슴, 스크루지 영감 등)도 초점 일탈의 위험은 있지만, 축제의 기쁨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울면 안돼”와 같은 인기 있는 캐럴이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제공의 주체인 것도 그렇지만,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골라서 선물을 줄 것이라는 가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게까지 동요 캐럴을 심각하게 보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요에서 무의식적으로 스며드는 복음의 왜곡은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과거 교육목사 시절 “울면 안 돼”를 교회 성탄절 행사에서 부르지 말도록 권고한 적도 있다.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정도로 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이는 우리끼리의 충만한 흥겨움과 설렘 속에서 성탄의 본질적 의미가 희석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성탄절에 우리의 신성하고 소중한 한 아기의 탄생일을 낭만화시키는 것 이상의 본질적 묵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에 관한 묵상이다. 신학적으로 성탄절은 성육신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 날에 왜 지극히 높으신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에 신자들은 마태복음 1장이나 누가복음 2장에 그려진 예수님의 출생 묘사 외에도, 요한복음 1:9-14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이나 빌립보서 2:5-11에 나오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를 비우심’이라는 성육신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성육신의 의미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설명은 주후 4세기 당시 아리우스 이단에 맞서서 평생 목숨을 걸고 정통 기독론을 수호했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딜레마를 해결한 신비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의 책 ‘성육신에 관하여’(On Incarnation)는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의 사건과 죽으심-부활의 사건을 하나님의 전체 구원 구도에서 본다. 성육신에 관한한 아타나시우스의 중요한 문장들을 고찰해보자(‘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_St. Athanasius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참조).육신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원래 그분은 육체 없는 말씀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입으신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과 선함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대리자도 말씀이어야 한다.(2) 말씀이 이 땅에 내려오시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죄송해야 한다. 우리의 범죄가 그분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고자 우리 중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우리 때문이며, 그의 크신 사랑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시고 나타나셨다.(4)인간은 악마의 꾀임을 받아 영원한 것에서 부패한 것으로 돌아섰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 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인간은 본성상 부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씀과 연합하는 은혜로만 인간은 본성의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범죄로부터 회개할 것을 요구하셔야 했는가?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범죄를 통해서 부패하게 되었으니 회개를 통해서 인간이 다시 부패함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회개는 신성한 일관성(the Divine consistency)을 막을 수 없다. … 회개는 인간을 그의 본성에 따른 것으로부터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죄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직 범죄 행위만 문제고, 이어지는 부패는 문제가 안 된다면, 회개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행해지면, 인간은 그의 자연적 본성에 부합되는 부패의 권력 아래 들어서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신들에게 속했던 은혜를 빼앗기게 된다.(6-7)태초에 무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 외에 누가 은혜와 구원을 베풀 수 있겠는가?. … 말씀이신 하나님만이 부패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성부의 일관된 성품을 유지할 수 있다. … 말씀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와 연합하며 거하셨고 만물에 충만하셨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들어오셨다. 몸을 낮추셔서 그의 사랑 가운데 우리의 수준으로 낮추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다.(7-8) 위의 문장들에서 엿보이는 중요한 통찰들은,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 뿐 아니라 육신을 부패하게 하는 죽음의 법에 종속시킨다. 회개마저도 인간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오직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본래 육신을 입으실 필요가 없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낮추사 육신을 입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다. 아타나시우스의 논증에서 전달되는 성육신의 분위기는 인간의 곤경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우심과 긍휼, 그리고 자기를 내어주신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다. 성탄절은 바로 이 성육신의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다. 필자가 성탄절에 성육신을 상기하자고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종종 성육신은 우리에게 사역의 원리로 제시되곤 한다. 우리의 성육신이 강조된다. 그래서 선교나 목회 앞에 성육신적~ 이라는 수식어가 유행으로 달라붙는 말이다. 필요하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은 그에 앞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것처럼, 성육신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계시하는 사건이다.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대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사역을 하신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얼마나 자주 입버릇처럼 말하는가! 이 모든 은혜의 선물이 성육신을 기점으로 이루어졌다.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 사상을 신학자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십자가의 목회’라는 저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로 인간을 섬기고, 인간의 일로 하나님을 섬기신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요약한다.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신 것은 단회적인 구원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적으로 인간이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대속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부활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구원 사역을 우리와 연합하사, 우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지속하고 계시다. 언제부터인가, 성육신이 우리도 인간의 숭고한 의지로 모방할 수 있는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모본’으로 전락되었다. 성육신을 많이 언급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죽으신 전적인 은혜와 구원의 사건으로서 보다는 사역자의 바람직한 태도와 원리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사역자에게 성육신적 태도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순서를 분명히 하자. 성육신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권장할만한 행동이 아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가장 신비롭고 은혜로운 선물이다. 사역자의 성육신은 오직 이미 우리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의 신비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을 때만 가능하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고 필히 되새겨야 하는 성육신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성탄은 지고지순한 아기의 탄생에 낭만적으로 젖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자기 계시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 성육신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은혜와 열심에 감격하게 하며, 성탄의 기쁨과 감사를 극대화할 것이다.
성탄절
예수탄생
캐롤
성육신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연합
자기희생
십자가
구원사역
인생의 변화가 나를 압도할 때
by Kristen Wetherell
2020-12-21
삶을 단숨에 바꾸려고 너무 큰 변화를 한꺼번에 하지 말라고들 말한다. 조만간 아이를 가질 예정인가? 그럼 당장 새로운 직업을 갖지 마라. 이제 막 결혼했는가? 그럼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가져라. 변화는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동시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만들지는 말란다. 이거, 옳은 말 아닌가? 하지만 때때로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에 굴복해야 한다. 올해 3월 이후 우리 가족은 지속해서 변화에 따른 변화를 탐색하고 있는 중인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유행병을 견디면서, 새 아기를 맞이하고, 또 남편의 새로운 목회 사역을 위해 교회를 옮겼다. 그 정도의 변화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면, 우리는 집을 팔기 위해서 내어 놓았고, 그러는 와중에서도 나는 신생아까지 돌봐야 했다(그건 같이 하는 게 아주 좋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팔았고 또 물건을 챙겨 이사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몇 달간 단단하게 버티던 생존이라는 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무너졌고, 무너진 댐을 통해서 나의 내면으로 홍수가 범람했다.힘에 겨운 짐에 억눌려서압도당할 때(많은 변화 또는 거의 지진 효과가 있는 한 가지 큰 변화에 의해)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라는 말에 우리는 공감하게 된다. 이 얼마나 큰 짐과 무거운 마음에 대한 적절한 묘사인가? 상황과 책임이 마구 복합되어 압도할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고난과 시험, 완전히 새로운 상황 및 변화가 주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 단지 참고 견디는 수준, 더 나쁜 경우에는 상황에 휩쓸리거나 압력에 짓눌림을 당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변화를 단지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바울의 편지는 압도된 정신과 마음을 붙잡아주는 몇 가지 진리를 알려준다. 매일 공급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관여하시며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너무 사소한 도움이란 없다. 우리는 결코 무관심하고 멀리 떨어진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 선물을 가득 안고 있는 하나님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개인적으로 만나는 신이시다. 압도당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또 우리의 필요에 따라 가장 좋은 선물을 가장 완벽한 때에 공급하신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에게 간청하고(그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가 약속한 것을 주실 것을 믿게 된다(그는 선하시다). 우리는 그럼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아들과는 차마 비교도 안 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공급은 종종 인간을 통해서 주어진다. 도움의 손길, 격려의 말, 또는 혼란 속에서 누리는 고요한 순간 등이 바로 그런 것이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다음 내용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를 통한 도움“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8, 11).스트레스와 불안은 우리가 내면만을 향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결과 오로지 자신만을 의존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그에게 자비의 수단, 공급의 통로(portal), 그리고 위로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때가 바로 그들과 더 가까이 있어야 할 바로 그 때이다!우리가 힘에 부치는 압도감에 고통할 때 교회가 주는 두 가지 도움이 있다. 위로와 기도이다. 지금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보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성도들로부터 후원과 공감 그리고 지혜를 얻도록 하라. 바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기도하기도 벅차다고 느끼는가? 교회를 향해 “기도로 도와달라고” 외치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교인들이 기도로 당신을 돕도록 하라. 하나님이 그의 임재와 도움을 통해서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약 5:15 참조).하나님이 주시는 초월적인 도움“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한 매일의 자비와 보살핌과 같은 수단을 통해 종종 우리를 붙드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통해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에 대해 쓰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힘에 부치는 짐에 힘들어할 때,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내 곁에 계시고 또 나를 안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종종 이런 느낌은 시간이 지나 나중에 깨닫곤 한다. 우리 가족은 바울의 말이 참되다는 사실,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또한 우리의 소망이 가진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 2020년에 느끼는 변화의 물결이 너무도 거대해 보이는 지금이야 말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활이라는 소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가장 감사하게 된다. 지금 우리 가족은 소위 말하는 “격변의 계절” 그 반대편에 와 있다. 파도가 가라앉았고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극복했는지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하나님이 주시는 공급을 받으면서 이겨낼 수 있었다.원제: When Change Overwhelms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변화
유행병
생존
로마서8장
수치심
고립
자비의아버지
위로의하나님
야고보서가 기독교적인가 의심하는 당신에게
by Michael J. Kruger
2020-12-20
신약성경 안에는 많은 책이 들어있다. 그 모든 책이 다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 속 모든 책을 다 열심히 읽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주로 바울 서신서(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복음서(요한복음 중심으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상 몇몇 책들, 예를 들어 요한3서와 같은 서신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을 고려할 때 왜 특정한 책이 신약성경에 포함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덜 유명한 책들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걸까? 이런 질문은 야고보서에 이르면 특히 더 심각해진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이라고 부른지 어언 500년이 지났지만, 야고보서가 도대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다. 물론 이러한 회의론이 진보적 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마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는 한 때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심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미묘하게 지속되고 있다. 때때로 야고보서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성경 같아 보이지 않는다. 예수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고(딱 두 번만 이름이 나온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도덕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한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야고보서는 복음주의자로 훈련받은 우리들의 눈에는 율법책처럼 보인다. 구약 시대로부터 전해진 부적절한 유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불행하게도 야고보서에 대한 회의론은 구약과 신약 시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 각각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자.구약도 은혜에 관한 성경이다야고보서에 대한 이 비판 뒤에 숨어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미국 복음주의권 속에 널리 퍼져있는, 구약 시대가 주로 도덕주의에 의해 정의되었다는 깊은 인식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가혹하고 차가운 율법 준수라는 공로(works)였다. 게다가 내면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모든 것이 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정말로 야고보가 그런 구약처럼 들린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와 아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대부분의 캐리커처 초상화처럼 이런 생각에도 진실의 요소가 있다. 확실히 옛 언약은 의식에 초점을 두었다. 옛 언약은 눈에 보이는 유형과 그림자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옛 언약에는 질서라는 강력한 법적인 측면이 있었고, 십계명이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런 캐리커처에서 간과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옛 언약도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공로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구세주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은혜와 구속의 맥락이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사람들이 옛 언약의 본질을 오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자주 싸웠던 바리새인들이 옛 언약의 이상을 구체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옛 언약 자체에 맞서 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산상 수훈과 같은 주요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반대하는 것은 옛 언약 그 자체가 아니라 옛 언약의 바리새인적인 왜곡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약도 여전히 율법을 중요하게 취급한다야고보서의 비판 뒤에 있는 또 다른 오해는 신약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이나 구절은 그 정의상 복음과 정반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에는 “율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또한 야고보서에는 그 어떤 신약성경보다도 많은 명령이 들어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단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약 1:22). 그는 또한 편애(2:1-4), 혀 길들임(3:1-12), 탐욕(4:2), 교만(4:6) 그리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5:1-6)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확장된 도덕적 훈계가 들어있는 책 또는 설교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만약에 도덕적인 훈계를 구원받는 수단으로 제시한다면 그건 분명히 비기독교적이다. 그런 경우 확실히 복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식의 율법이 주는 위험에 관해서 길게 썼는데, 특히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 즉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쓰인 서신서이다. 따라서 바울은 종종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갈 3:10).그러나 율법을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 필요한 긍정적인 가이드로 제시한다면, 그 속에는 그 어떤 “비기독교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진정한 신자라면 새로운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한 힘을 성령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한다(겔 36:27; 롬 8:4).물론 신자조차도 율법이 지향하는 완전한 표준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율법은 친구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시편을 기억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 1-2).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복음에 대항하는 각각 다른 적과 싸우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율법주의와 싸운다면 야고보는 반율법주의와 싸우고 있다(약 2:14). 야고보서가 우리의 사역을 형성하게 하라도덕에 대한 야고보서의 초점이 전혀 비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 심오한 사역적 함의(implications)가 수면에 드러나게 된다. 첫째, 야고보서는 율법주의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리새인 외에 교회를 노리는 위협은 너무도 많다. 그렇기에 성경에 야고보서가 포함되었다. 야고보는 율법주의 뿐 아니라 반율법주의도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가지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단지 믿음만으로 얻는 칭의 설교와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복음과 칭의라는 두 단어는 이제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야고보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하는지를 설교함으로써도 우리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결국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두는 게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오해했었다. 칭의가 복음의 전부라면 야고보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성화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성경이다. 원제: Is the Book of James Really Christi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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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와 ‘공개’를 통해 살피는 복음생태학
by 김돈영
2020-12-19
아침마다 확인하는 숫자가 심상치 않다. 요 며칠 언론에서는 연일 집단 감염 사례를 언급하며 확진자 수가 심상치 않음을 보도한다. 정부에서는 더 크게 확산하지 않도록 철저한 마스크 착용과 모임 자제 등 방역을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다. 상황에 따라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를 격상하는 등 강제적인 조치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저 지금 검사받고 왔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마디, ‘검사’라는 짧은 단어에서 전해오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뭔가를 물어볼 여유도 없다. 머릿속은 멍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냥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사무실 직원 한 명이 확진 판정을 받는 바람에 후배도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나 또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후배는 엊그제 일 때문에 간 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다. 물론 마스크를 썼고 별다른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가볍게 손을 맞댄 것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고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별일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쉽게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며 여러 상황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배가 음성으로 판정받는다면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은 사라진다. 하지만 양성의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감염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은 상황이 머리에 그려진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며칠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다. 내 상황은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와 함께 했기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도 하지 않은 상황,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실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 누가 사람을 만나러 다니겠는가, 누가 감염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전파하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감염 사실을 몰랐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전파자일 것이다.‘전파자’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특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하기에 더욱 그렇다.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등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전달하는 시간이 좀 더 많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과 신학적인 지식, 삶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 등 다른 이의 신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그런데 문제는 내가 전달하는 것이 바른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바른 것을 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애쓰고 노력할 뿐 완전하지는 않다. 아니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언제나 바르지 않은 것, 복음에서 벗어난 것을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바이러스 전파자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바른 신앙에 서 있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다.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크건 작건 사람은 누구나 주변에 영향을 준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에서부터 자주 다니는 마트와 커피숍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전파하는 것이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 바른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수시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 말이다. 내게 있는 것이 전파된다신앙의 점검은 언제나 성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한다. 다른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갈 1:7)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그 무게중심을 그리스도가 아닌 곳으로 슬쩍 옮기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인 양, 숨겨진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이 호들갑 떤다. 지금껏 없었던 것이라고 방법을 제시한다. 세련되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옮긴 정도가 크든지 작든지 상관없다. 단 0.001만큼이라도 옮겼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일 것이다. 올바른 복음은 순도 100%,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한 ‘다른 복음’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다른 모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끝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을 뿐이다. 무증상 감염자일 뿐이지 감염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구별할 수 없는 것, 무게중심이 그리스도에게서 살짝 옮겨진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필 수밖에는 없다. 나를 확인하고, 주위를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유명한 누군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온라인과 유튜브에 쏟아지는 정보와 설교자들의 설교를 무턱대고 믿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매 주일 듣는 설교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설교자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누구라도 바른 복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마게도냐의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들은 말씀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바울의 말이 정말로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행 17;11)는 태도가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바른 복음 앞에 서기 위해서 말이다.어떻게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가?로마서 3장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말한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한다.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벗어난 것을 하나씩 개혁하는 것이다. 죄인의 생활을 정리하고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돌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시간, 그 유효기간이 너무도 짧다는 사실이다. 머지않아 또 집을 나가는 불량한 자녀라는 것이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한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죄인을 살리신 이의 법은 ‘오직 믿음의 법’(롬 3:27)이며,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롬 3:28)하고 의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지지 않도록 ‘틈을 주지 말라’(엡 4:27)고 바울은 말한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도록,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로서 말이다. 바른 것을 가지고 바른 영향을 끼치는 선한 전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동선이 공개된다한 가지 더 생각나는 것은 내가 ‘어딜 갔었더라’ 하는 것이다. 동선이 공개되는 것이다. 감염자는 그의 동선을 파악한다. 동선을 파악하여 다른 감염자가 생기지 않도록 방역하는 것이다. 동선이 밝혀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고 큰일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감추었던 비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에게 보여주었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 있다면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민낯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분에 맞게 행동했는지, 거짓으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의 행적을 감추거나 다르게 말하는 또 다른 불법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느 곳을 다녀야 하는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스스로 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동선이 매일 같이 공개된다면 어떻겠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가? 아니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지금껏 다녔던 곳의 발걸음을 끊고, 그 흔적을 서둘러 지울 것인가? 누군가 보고 있기에, 동선이 드러나기에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면 스스로 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뭔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어떤 다스림을 받는가?동선이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무엇을 의식하는 것인가? 사람들의 이목, 그동안 만들어 온 이미지, 체면 등 주변을 의식하는 것이다. 공개하는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세상의 눈에 통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면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공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건을 사거나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해 다녔든지 모든 행적이 투명한 유리보다 더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실내에 있든지 실외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혼자서 있든지 말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한이 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오픈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숨길 수도 없고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니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에 나만의 비밀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오래전 보았던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의 주인공 트루먼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의 모든 것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일상이 공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기에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말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행동이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행동이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겠는가. 혼자 있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사에 보는 눈을 의식하고, 조심스럽게 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고, 나만 아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을 것이다.우리의 모습이 트루먼 쇼의 주인공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완전히 공개된 공간, 드러난 동선을 인식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공간으로,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의 동선은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선포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있어야 한다. 날마다 매 순간 계속되어야 한다. 내 입술의 선포로, 내 믿음의 고백으로 말이다. 그럴 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라고 말하며 나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결단했던 요셉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동선이 공개되어 돌아올 비난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의 심판을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온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만 한다.날마다 발버둥을 치다감사하게도 음성으로 판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의도하지 않은 ‘전파자’가 되지 않았고, 숨기고 싶은 ‘동선 공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상황을 인식하고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언제라도 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동선이 공개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코로나19의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말이다.그리스도인으로서 ‘전파자’가 되는 것과 ‘동선 공개’는 그 시한이 없다. 이 땅에서 숨을 쉬는 순간까지는 날마다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전파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남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한 삶이 남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어진 마땅한 일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입으로만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말씀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 날마다 발버둥을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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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쇼
음성판정
야곱의 사다리와 바벨탑, 그 아래 예수님
by Russell Moore
2020-12-18
서평: 리처드 보컴의 새 책 ‘Who Is God?: Key Moments of Biblical Revelation’ 만일 성경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성경적 이미지를 선택하라고 하면, 여러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출애굽기 3장의 불타는 떨기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 장면이 복음서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변형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은 야곱의 사다리가 계속 떠올랐다. 왜 일까? 그 이유는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이 새로 출간한 훌륭한 소책자, “Who Is God?: Key Moments of Biblical Revelation”의 한 구절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보컴은 성경의 핵심 장면들 중의 하나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 위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꿈을 꾸는 장면(창 28:10-17) 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야곱의 꿈에 등장한 것이 실제로 사닥다리가 아니라고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계단 아래에 계신 하나님보컴은 문맥 상 여기서 사닥다리가 계단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그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지은 지구라트라고 알려진 인공 산 옆으로 올라가는 넓은 돌계단일 것이다”라고 본다. 야곱의 조상들의 땅 우르에 유명한 지구라트가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 닿을 듯이 장대한 산 정상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신들에게 경배하기 위해 진흙 벽돌로 쌓은 계단형 신전을 지었으며, 신들이 거기 유할 수 있도록 하고, 사람들이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학자 리처드 보컴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연구를 간략히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핵심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언급하기 위해 성경 이야기 속 유명한 순간들의 의미를 깊이 탐색하고 있다.일반인들이 읽기 쉽고 학자들에게는 중요한 내용을 제공하는 이 책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3개의 주요 사건을 탐구하고 있다: 벧엘에서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품성.각 경우마다, 보컴은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주제를 추적해 간다. 그 다음 그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삼위일체를 계시하시는 세 가지 사건(예수님의 세례, 변형, 십자가 사건)을 탐구함으로써 신약 성경이 어떻게 구약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BAKER ACADEMIC. 128 PP. 창세기에서 우리는 인류가 하나님의 능력에 도달하려 한 바벨탑 사건에서 자기 보호와 자기 영광을 표현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특징을 보았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서 이러한 충동적인 경향을 계속 볼 수 있다. 자연이나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려는 원초적인 시도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착각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치유 받거나 부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하는 번영복음 교사들과 디지털 저장 공간에 자신의 의식을 다운로드하고 불멸성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기술 혁신가 둘 다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미묘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보컴은 야곱의 꿈 이야기가 놀라운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계단 꼭대기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계단 밑에서 만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사들이 계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하늘과 땅의 소통을 중재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우회하여 계단 아래에서 야곱과 함께 계신다.야곱이 잠에서 깬 후에 그 곳을 ‘벧엘’이라 명한 이유는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창 28:17)이기 때문이다. 보컴은 그 꿈은 더 원시적이라고 지적한다. “야곱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 자신이 있는 곳보다 더 특별한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시며 그가 가는 어느 곳이나 그와 함께 계실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고 네가 가는 곳마다 너를 지켜 주리라’(창 28:15).” 핵심은 “이제부터는 야곱이 잠드는 모든 곳이 벧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디서든 항상 야곱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벧엘에서의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성과 보편성 두 차원 모두에서 신자의 일상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단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잠깐 비추는 불빛과 같다. 그리고 야곱과 모세와 엘리야와 거의 모든 성경 인물들과 같이 이러한 경험은 보통 승리했을 때나 강한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의존적이고 취약한 순간에 일어난다. 이러한 순간들은 희귀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하나님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말이다.또한 이것은 전부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나아간다. 그분의 함께 하심은 특히 베들레헴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분의 함께 하심은 이제 하늘과 땅을 이어 통일하심으로 나타난다(엡 1:10).야곱 이야기의 울림야곱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서 울린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가장 흥미롭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했다. 나다나엘의 반응은 TV 화면에서 “너는 재능이 있고 특별해!”라고 하는 말을 개인적으로 들었을 때 ‘네가 어떻게 알아? 날 모르잖아’라고 말하는 나의 반응과 똑같았다.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8)라고 말씀하심으로 나다나엘을 당황하게 했다.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에 놀라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0-51). 이 말씀은 야곱의 사닥다리 이야기를 바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중에 그분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계단이지만 그 계단을 오를 수 없으며, 밑에서 우리를 만나실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승천 후에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를 걱정하는 도마에게 하실 “내가 곧 길이다”(요 14:6)라는 말씀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같은 일이 조금 뒤에 요한복음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을 만났을 때 말이다. 그녀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지 - 예루살렘에서인지 아니면 산 위에서 인지 - 에 대해 묻고 싶어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에 대해 숨기고 있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음을 드러내신다(요 4:16-17; 29, 39). 예수님에 대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은 옳은 것이었다. 그렇다 그분은 야곱보다 크셨고 또한 크시다. 그분은 그저 우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시다. 그분은 단지 계단의 꿈에 나오는 이일뿐만 아니라 계단 그 자체이신 분이다.그리고 물론 모든 우주의 역사는 한 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때 천지가 하나가 되며,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계 21:3).하나님이 함께 하심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하다.기술은 도움이 되는 도구이지만 신으로서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경제 발전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는 좋지만 우리의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나뉘어져 있으며 물질적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하다. 우리의 계단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답은 위로 향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닥다리 아래에 있는 분 - 자신의 임재로 우리의 잠을 방해하시며, 거기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 - 을 찾는 것이다.원제: Jacob’s-Ladder Christianity vs. Babel-Tower Christia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함께하심
임재
벧엘
야곱의사닥다리
바벨탑
불타는떨기나무
지구라트
함께 부르는 성탄절 찬양 위험하지 않을까?
by Ken Boer
2020-12-17
함께 모여 소리 높여 크리스마스 찬양을 부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인데 함께 모여 노래하는 게 위험한 건 아닐까?지금 위험하다고 하는 게 진짜일까 아니면 과장된 것일까?육 개월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건 뭐가 있을까?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높아졌다. 전염병 초기에 물었던 질문은 마치 “차를 모는 게 안전한 거야?”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운전과 관련해서 운전자의 나이, 차의 종류, 길의 상태 등등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질문을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충돌 평가 또는 자동차 잡지까지는 몰라도 처음보다는 많이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의 지식은 주로 다음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1) 노래할 때 튀는 비말에 관한 연구, (2) 바이러스의 공중 전파에 대한 연구원 및 공중 보건 전문가의 진화하는 견해, (3) 실생활에서 필요한 완화 및 측정을 위한 실질적인 전략.이 글을 읽기 전에 내가 지역 교회의 예배 담당 목사라는 점에 유의하길 바란다. 비록 의학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글은 의학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했다. 인용된 연구 중 일부는 검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고맙게도 우리의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소개하는 연구에 관해서는 충분한 합의가 있었다. 노래에 대한 연구노래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어로졸을 생성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볼륨의 정도이다. 영국의 연구원들은 가장 낮은 볼륨 수준에서는 호흡, 말하기 또는 노래로 생성되는 에어로졸에 통계적 차이가 없음을 발견했다. 대화 뿐 아니라 노래할 때에도 볼륨이 증가함에 따라 에어로졸의 질량이 크게 증가했다. 가장 큰 볼륨으로 노래하면 가장 큰 볼륨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1.5 배에서 3.4배 더 큰 에어로졸 덩어리가 생성되었다.스웨덴의 연구는 규모라는 측면(sense of scale)에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들이 실험에서 측정한 중간값(median)의 초당 입자 방출 정도는 호흡용 입자 135개, 일반 대화용 입자 270개, 큰 대화용 입자 570개, 일반 노래용 690개, 큰 노래용 입자 980개였다. 마스크를 쓰는 경우라면 큰 노래에서도 방출된 입자는 410개에 불과했다. 독일과 미국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이 실험을 보완하는 결과를 얻었다.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연구원들은 볼륨을 10데시벨 줄이는 게 실내 환기 속도를 두 배 늘리는 것보다 공기 전파 위험을 줄이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공기 전파큰 비말에 비해 작은 에어로졸은 얼마나 위험할까? 전염병 발발 이후, 건강 전문가들은 바이러스가 확산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한 수단을 확인했다. 접촉 전염(물리적 접촉), 비말 전염(일반적으로 6피트 이내의 공기를 통해 확산되는 입자) 및 공기 중 전염(더 작은 에어로졸 입자로서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고 더 오랜 시간 동안 공중에 떠 있음). 그런데 여기 세 번째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전염병이 발발한 이후 계속적으로 변경되었다. 7월에는 에어로졸 물리학, 유동 역학, 건축 공학과 같은 주제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진 2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보건 기관에 에어로졸 전파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예방 원칙을 지켜달라는 촉구가 잇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주간에 걸쳐서 여러 연구 기관의 연구를 종합해서 WHO는 에어로졸에 대한 입장을 어느 정도 업데이트했고, 그건 중앙방역센터도 마찬가지였다. WHO는 현재 ARS-CoV-2가 주로 밀접 접촉을 통해 전파되지만, 공기 중 전파는 “특정 환경, 특히 감염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실내, 혼잡하고 환기가 잘되지 않는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성가대 연습”과 “예배 장소”가 포함된다. 중앙방역센터는 여기에 동의하는 동시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감염은 공기 중 전염이 아닌 밀접한 접촉을 통해 전염된다, 그러나 공기 중 전염은 … 특별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중앙방역센터가 말하는 특별한 상황에는 “폐쇄된 공간,” “호흡기 운동(예: 소리치기, 노래, 운동)으로 생성되는 호흡 입자에 장기간 노출” 및 “부적절한 환기(또는 공기 처리)”가 포함된다. 일부 과학자들은 담배나 담배 연기의 비유가 다양한 상황에서 공기 중 전파의 위험을 대략적으로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깅을 할 때 실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지나쳐 달려가면 약간의 담배연기를 들이마실 수는 있지만, 그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정화기(HVAC)가 켜져 있지 않거나 창문이 열려 있지 않은 작은 방에서 흡연자 근처에 있다면 아마도 상당한 담배연기를 흡입할 것이다. 큰 강당에서 흡연자로부터 몇 줄 떨어져서 앉아있는 경우, 연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퍼지기 때문에 당신이 마시는 담배연기는 희석된 것이다. 따라서 생성된 양, 방의 입방 부피 및 환기 등 모든 요소가 다 감염에 충분한 양을 흡입하는가 아닌가에 영향을 준다. 완화 전략그럼 이런 연구를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까? “장시간” 노래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고, 올바른 공기 처리 및 환기를 위한 표준은 무엇인가? 또 허용 가능한 위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가장 위험한 상황은 과격한 호흡과 불충분한 환기가 장기간 결합되는 상황이다. 천장이 낮고 HVAC 시스템이 유지되지 않고 또 45분 동안 큰 소리로 찬양하는 교회는 천장이 높고 통풍이 좋으며 찬송가 몇 곡만 부르는 교회보다 공중 전파 위험이 훨씬 더 높다.여기 전문가들의 몇 가지 조언이 있다.1. 기본부터 시작하라.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실상 비말 전파의 위험을 제거한다. 마스크는 근본적으로 에어로졸을 필터링하여 공기 중 전염의 위험을 크게 줄인다. 더 복잡한 답을 찾기 전에 이러한 기본적인 솔루션을 간과하지 말라. 2. 건물의 환기에 대해 알아보라. 실내의 입방 부피는 얼마인가? 시간당 몇 번이나 환기를 하는가? 공기 중 몇 퍼센트가 신선한 공기인가? 창문을 열어야 할까? 고효율 필터를 고려해야 할까?3. 실내가 위험해 보이면 추가 조치를 취하여 측정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다양한 과학 논문을 근거로 위험 계산기(risk calculators)를 만들었다. 또 어떤 이는 이산화탄소 측정기(CO2 meter)를 통해서 실내의 환기 측정을 위한 대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권장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찬양하는 경우에는 한계가 있다).4. 각각의 완화 조치는 다 도움이 된다. 뮤지컬 그룹은 국제 공연 예술 에어로졸 연구의 권장 사항과 영국에서 발표한 유사 결과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전염병 상황을 맞아 교회 지도자라면 우선순위라는 측면에서 큰 지혜가 필요하다. 각각의 교회마다 인구 통계, 물리적 회의 공간, 지역에 따른 각종 규제 등등에서 다 상황이 다르다. 찬양은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는 성도 간의 연합을 유지하면서 또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으로 바르게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아무리 완화 전략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완화 전략에 반대하지만 또 사랑도 없다면, 역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전염병 시대를 겪으면서도 모든 것을 견디고 인내하는 자세이다(고전 13:7).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듯 영적 건강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증에 대한 가장 좋은 완화 전략 중 하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시 42:5). 특히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서 찬양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창조주께서 우리를 만드신 방식대로 바르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는 것이 교회에 모여서 함께 안전하게 찬양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는 스트리밍 예배를 드리면서 집에서 즐거운 소음을 내거나, 아침 예배나 가족 저녁 식사에 성탄 찬양을 추가하거나, 또는 차에서 볼륨을 높이고 크게 찬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그분을 찬양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길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도 또 저 영원한 곳에서도 주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서로의 육체적 또 영적인 선을 바르게 추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원제: Is It Wise to Sing Christmas Carols in Church This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코로나바이러스
코로나완화전략
크리스마스찬양
에어로졸
예배장소
성탄예배
비말
마스크
세무원 마태가 전하는 크리스마스
by 박용기
2020-12-16
로마제국 세무원이었던 마태는 숫자 계산에 능숙했다. 그는 숫자 14를 사용해서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마 1:1-17)를 의도적으로 몇 사람을 누락시키면서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구분했다(17절). 마태가 숫자 14를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찾아보자. 스스로 존재하는 구원자족보는 한 사람의 뿌리와 근본을 보여준다. 족보의 첫 줄에는 뿌리가 되는 조상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로 시작한다. 헬라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아들)’ ‘아브라함(의아들)’ 순서로 이름을 기록했고(마 1:1) ‘그리스도’로 마친다(17절).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마쳐진다(마 1:1-17). 예수님은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다. 예수님의 근본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마 1:21). 14, 14, 14와 영원한 왕히브리문학을 해석하는 게마트리아(gematria) 기법이 있다.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22개에 숫자 값을 부여하고, 그 숫자 값을 합산하여 단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알파벳 네 번째는 달렛(D)이고 여섯 번째 바우(W)이다. 달렛, 바우, 달렛(DWD:4+6+4)은 14이다. DWD는 다윗 이름(자음)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 전체를 다윗 이름(DWD)을 기준으로 다윗의 숫자 ‘14’를 3번이나 사용해서 기록했다(17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7절).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후 600년 가까이 흐르면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영원히 견고한 나라를 세우겠다는 다윗 언약은(삼하 7:12-13) 모두에게서 잊혀 갔다. 구원의 소망이 끊어진 듯한 상황에서 마태는 다윗 언약을 상징하는 숫자 ‘14’로 아브라함, 다윗, 포로기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촘촘하게 연결한다. 유대인들은 다윗 언약의 숫자 ‘14’로 족보 전체가 구분되는 것에 놀랐고, 포로기 이후부터 정확하게 14세대 만에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심에 전율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 오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장자와 형제들 그리고 모든 민족 마태는 첫 번째 14대에서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기록했다. “…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2절). 두 번째 14대에서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기록했다.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11절). 데이비드 갈랜드(David E. Garland) 교수는 세 번째 14대에서는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형제들’의 새로운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Reading Matthew: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예수님은 족보에 기록될 수 있는 ‘형제들’을 육체적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형제와 자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모든 민족들’(마 28:18-19)로 확장하셨다. 다말(4절), 라합과 룻(5절), 우리야의 아내(6절)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한 ‘형제와 자매’로 족보에 기록되었다. 다말(4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들을 듣고, 믿고, 목숨을 걸고 쌍둥이를 낳았다(창 38:26).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수 2:11), 목숨을 걸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정탐꾼 2명을 숨겨주었다.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고 목숨 걸고 끝까지 나오미를 쫓아갔다(룻 1:16-17). 밧세바는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한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걸고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세웠다(왕상 1:17).42 이후에 오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옥스포드 대학 신약학 교수였던 R. T. 프랜스(R. T. France, 1938-2012)는 14숫자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4는 완전수 7이 두 번 더해진 숫자이다…. 숫자 14가 3번 반복된 숫자(42)는 완전수 7을 6회 반복한 숫자(42)이고, 완전수 7이 7회 반복될 순서를 가르치는데, 이는 아브라함 시대부터 계속된 그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Gospel of Matthew, NICNT). 팀 켈러(Tim Keller)도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14,14,14. 네, 42입니다. 아직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곱, 일곱, 일곱, 일곱, 일곱, 일곱(42). 예수 그리스도는 일곱이 일곱 번째 시작되는 시점이십니다”(2008년 12월 14일, 1994년 12월 25일, 주일 설교). 예수님은 족장 시대(14세대), 왕정시대(14세대), 포로기(14세대)를 지나 하나님 나라 시대로 전환되는 시점에 탄생하셨다. 하나님은 안식년 7년을 7 회 계수한 후, 희년을 선포하여 모든 종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명령하셨다(레 25:8-10).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시점을 일곱이 여섯 번째 반복된 후(42), 일곱 번째 시작되는 시점으로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자유와 회복을 상징하는 영적 희년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눅 4:18-19).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자유케 하는 구원자로 탄생하셨고(마 1:21), 깨어진 관계를 회복케 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마 1:23).
신약성경
마태
예수님족보
히브리어
영원한왕
구원자
팀켈러
마태복음
Matthew
성탄
대부분의 성장은 느리다
by Scott Hubbard
2020-12-15
천국으로 가는 길은 위험으로 덮여있는데, 문제는 그 위험이 항상 우리가 예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예상한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쾌락, 세상이 속삭이는 거짓 이야기와 엉터리 도덕. 우리는 또한 고난이 주는 위험도 예상한다. 갑작스런 이별, 부서진 꿈, 여러 형태로 오는 핍박. 그런데 세상이 주는 위협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하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방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바로 느려터지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성화 과정(the slowness of our sanctification)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숫자 상 정확한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준비가 된 이들이 적지 않은데요. 무슨 육체적인 고통이 닥치거나 삶에서 무슨 아픔을 겪어서 그렇게 된 사람들보다는 성화의 과정이 너무도 더디게 진행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많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지쳐버린 겁니다.” 우리들 중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려는 일부는 세상이 주는 유혹 때문도, 고난에 지쳤기 때문도 아니라, 단지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속 자기 부인(self-denial)에 지쳤기 때문이다.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한 걸음 뒷걸음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성을 향해서, 끝이 나지 않을 거 같은 이 길을 걷는 데에 지쳤기 때문이다. 환상은 깨어지고 지쳐서 그 길에 주저앉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천만 번 단계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왜 이런 성화의 느린 과정이 놀라움으로 다가올까? 단숨에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처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이 세상이 우리의 기대 수준을 비현실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자존심이 오래 전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어쩌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열 번에서 아홉 번은 우리가 만나는 복잡한 갈등 상황을 너무도 단순화시키기 마련인, 모든 죄를 이기는 “비밀” 또는 “비결”과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제자도의 길이 빠르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던지 간에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은 결코 한 달, 일 년, 또는 십 년 아니, 평생을 살아도 완성되지 않는 것을 본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열 단계 정도의 계획이 아니다. 천만 번의 단계가 필요한, 우리가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과정이다. 길게 볼 것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장의 그림은 성화에 대해서 길게 보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를 빠름에서 느림으로, 즉각적인 것에서 점진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농부이다(갈 6:7).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라는 것처럼 천천히 은혜는 우리 속에서 자란다. 씨앗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서 발아하고, 작물은 천천히 들판을 채운다(막 4:28). 우리는 경작하고 씨를 뿌린다. 물을 주고 돌보면서 오로지 “인내로”(눅 8:15) 결실을 거둔다.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과 같다(엡 4:14-15). 아이들처럼 우리의 뼈는 천천히 자란다. 나이 많은 형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유를 마시다가 서서히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벧전 2:2; 롬 8:29). 그러다보면 언젠가 우리는 완전히 장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가 나타나시면…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가 이뤄질 때이다.우리는 달리기 경주자이다(고전 9:24). 그 달리기는 단거리가 아니다. 심지어 마라톤도 아닌, 평생 달리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딤후 4:7).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히 12:1)를 해야 한다. 처음 백 미터에 힘을 다 빼면 안 된다.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끝까지 달려야 한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는 여행자이다(벧후 1:19). 빛은 중간중간 우리의 어둠을 몰아낸다. 가끔 그늘이 지지만 우리의 길은 다음과 같다.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전 4:18).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위로 솟아오른다. 그 결과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농부, 어린아이, 경주자, 그리고 여행자이다. 이런 각각의 이미지는 심오하고 본질을 관통하는 성화가 평생에 걸쳐서 이뤄지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나 자신에 대한 또 이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꾼다.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일에서 조차 예수님은 아주 천천히 당신의 주되심을 이뤄가신다. 내 삶 어떤 영역에서 성령님은 아주 천천히 순종이 습관이 되도록 만들어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지만 결코 단숨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날로”(고후 4:16) 이뤄가신다.영적인 현실주의바로 이 지점에서 두 가지 확실하게 할 점이 있다. 첫 번째로 성화 과정의 모든 것이 다 천천히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어떤 특정한 죄에 있어서, 그 죄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는데도 그냥 단 하룻밤에 그 죄를 극복했다는 간증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화를 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하는 기도를 쉬지 않게 된다. 두 번째로, 영적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을 악용한다면, 그건 저주받을 일이다. “느리지만 쉬지 말고”는 모든 보통 기독교인이 꼭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내일, 내일”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좋아서 받으면서 하나님의 경고는 무시하는 한 내일은 언제나 오늘과 똑같다.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는” 게으른 자는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전 20:4). 죄에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심판 날 피난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성화에 관해서 긴 시각을 제공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짜 중요한 기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영적으로 적당주의(spiritually complacent)에 빠지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가 영적인 현실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영적 현실주의자는 한편으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노력한다. 그러나 영적 현실주의자는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피가 주는 성결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시온 산으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한, 회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는 가장 필요한 기도이다(마 6:12).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존 뉴톤(John Newton)이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의 나는 되어야 할 나도 아니고, 되고 싶은 나도 아니고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나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John Newton, Christian Life, 268)매일매일 조금씩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제대로만 이해하면 오늘 하루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꿔준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이룰 수 있는 성화에 대해서 겸손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농부는 토지를 경작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확을 거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광야를 지나는 여행자가 하룻밤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계절을 지나면서 느끼는 변화와 농지의 광활함은 농부가 허황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인도 오늘 하루 동안 원하는 만큼의 열매를 즉각적으로 맺지 못했다고 지나치게 낙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또 교제하는 것은 레버를 비트는 일이 아닌, 씨앗을 뿌리는 일에 더 가깝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나서야 비로서 수확에 대한 기대를 품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오늘 하루 내가 하는 작은 순종이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 하루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단숨에 나를 영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 작은 발걸음을 떼지 않는 한 결코 영광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가 말했던 “매일 매일 조금씩”(daily littles)을 이뤄가야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 이 땅 위에 있는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그것은 그 자체로도 여전히 작은 것이 아니지만 그때까지 진정으로 살아왔다면…. 그 살았던 삶 내내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God’s Way of Holiness, 127). 끝까지 인내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매일 매일 조금씩” 이뤄진다는 시각이다. 거룩은 한 번에 하나씩 이뤄진다. 당신 앞에 놓인 오늘 하루 동안의 순종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늘 하루 죄를 고백하고 또 회개하고, 오늘 하루 봉사하고 전도를 하는 일이 다 당신 영혼의 토양에 스며들 것이다. 당신은 오늘 미래의 당신을 만들어낼 씨앗을 뿌리고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Most Growth Will Be Slow Growth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존파이퍼
성장
성화
호라티우스
회개
기도
적당주의
현실주의
남성다움(masculine)의 미래
by Greg Morse
2020-12-14
“당신은 남성다움(masculine),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거야. 황금 사자, 수염 난 황소와 같이 크고, 방해가 되지 않는 소유물은 난장이들이 조심스럽게 만든 침대를 마구 흩어놓을 때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당신의 원시 왕국을 흩어지게 만드는 거지.” 감독은 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남성다움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낀다니.바로 이 지점에서 C. S. 루이스(C. S. Lewis)의 우주 이야기 3부작의 피날레 ‘그 가공할 힘’(That Hideous Strength)에서 불행하게 결혼한 주인공 제인은 오늘날 우리가 현대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된다. 소설 속에서 제인은 강하지만 복종하는 기독교인 아내인 미세스 딤블이 드러내는 여성성과 정반대 위치에 자리잡은, 직업을 추구하는 평등주의 비기독교인이다. 지금까지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던, 사실상 황금 사자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을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던 세상이 기울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인간이 아닌 물물 교환의 대상이자 욕망 및 소유의 목표물로 취급되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 멀찍이 둘 수 있을 정도로 힘든 한숨과 비웃음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서 남편 마크를 선택했다. 마크는 그녀를 “정말로 이해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크가 제인의 자주적인 행동에 그 어떤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갑자기 현실이 그녀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턱수염에 당황해서우리는 지금 제인으로 붐비는 사회에 살고 있다(비록 운전면허증 속 이름은 제이슨이라고 해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턱수염 난 황소에게 반항하며, 그에게 거칠고 억압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포효, 인류의 머리, 창조의 왕, 남자, 등등의 단어에 불쾌감을 느낀다.오늘날의 “덕이 있는(virtuous) 남자”는 그냥 남자보다 훨씬 더 큰 미덕으로 묘사된다. 그는 순응하고, 존중하며 또 부드럽다. 무엇보다 그는 나이스한 사람이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세금을 내며, 항상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스캔들과 “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안전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죄악으로 물든 세대를 향해서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뜨거움도, 열정도, 힘도, 그리고 그 어떤 목적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남성다움-근육질이고, 대담하며, 무게감이 있는 것-은 이제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불쾌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현대를 사는 남자라면 결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제인의 관점에 빠져 있다. 오래된 진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머리와 돕는 자(역자 주: 아담과 이브에게 붙여진 호칭, 즉 남자와 여자를 의미함) 둘 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또한 두 사람 다 그 가치라는 면에서 서로 동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며 또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상속한다(창 1:27; 고전 11:11-12; 벧전 3:7). 그러나 이런 진실도 서로에 대한 구분이 남아있는 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그런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여자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에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고전 11:9). 그들은 공동체 모임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읽을 때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든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2–13).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모든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며 합법적인 한 모든 일에서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결혼 서약서에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겠다고 주장한다(엡 5:22-24).남성다움이 과거에는 지배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었다면, 이제는 무관함(irrelevance)이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결론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제 남자는 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하고 대신 남자는 여자가 힘을 써도 된다고 허락할 때에만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제인의 많은 아들과 딸이 생각하듯이, 이제 미래는 여성다움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그 남자감독의 다음 말은 은유의 힘을 통해서 제인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똑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탈출할 수 있었던 수컷은 생물학적 수준에서만 존재해. 그러나 남성다움, 그 자체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적과 동의하는 게 좋을 거야.”(313)저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적이다.우리 세대가 남성다움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또 왜곡하는 정도에 상관없이 감독은 제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이 땅에서야 남편, 아버지, 그리고 왕을 피하고 부끄러워하고 누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가 오신다.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심판자이자 왕이시다. “영혼은 이 땅의 남성을 우회하여 훨씬 더 남성다우며 또 훨씬 더 높은 분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분 앞에서 더 깊이 굴복해야 한다.”오늘날 고대 바리톤 안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혹적인 반주, 바리톤의 목소리에 맞는 또 다른 목소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성스러운 음색에 감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같은 음표가 피아노에서 연주되고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동등하게 울려 퍼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차이를 결코 보지 못하게 된다. 저기 머무는 이의 소리가 천둥과도 같고 그의 낮은 울림이 참나무를 떨게 하고 숲 전체를 벌거벗게 하신다 (시 29:9). 당신이 만나는 거룩한 성도들 중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실된 남성다움을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룩한 그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아빠라는 이름의 여자?그런데 하나님이 남자(he)라고?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데 왜 우리는 피조물 영역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사소한 성적 구별을 하나님에게까지 해야 하는가? 제인도 처음에는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 또한 영적 영역에서는 성별과 같은 구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영적 세계로 가는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서로 간의 대비가 주는 차이가 더 풍부하고 더 날카롭고 오히려 더 치열할 수도 있겠다는 의혹이 생겼다”(312).다시 말해, 그녀는 이제 평등한 결혼은 중성적인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재고해야 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가 지상에 있는 자신을 침범하는 남성적 머리라는 직분의 흔적이 사실상 “가장 높은 영적 세계에서는 훨씬 더 크고 혼란스러운 수준(modes)에서 반복되는 현실과의 충격적인 접촉의 첫 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쉬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312).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여성적인 은유(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여성적인 칭호나 대명사를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님)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의 경우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이 따라온다(예: 사 66:13; 호 13:8; 마 23:37).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화 ‘오두막’(The Shack)이 악명 높게 묘사한 것처럼 결코 “아빠”(Papa)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여성이 아니다.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해버린 기독교의 성경을 잠깐 상상해보라. “하늘에 계신 그녀가 웃으심이여 그녀가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그녀가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여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4-6)“그 숙녀(Lady)는 전쟁의 여왕이시니 그 숙녀(Lady)가 그녀의 이름이시로다”(출 15: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딸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녀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녀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어머니라, 평강의 공주라 할 것임이라”(사 9:6)“그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영원토록 하나님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니라 영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남성이라고 밝히셨지만, 신약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성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몸을 취함으로써 논쟁을 단번에 해결하셨다. 아들은 남자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성경적인 남성다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남성다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남성다움 자체에 대한 반란은 깨어질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표지판은 거리에 흩어져 나뒹굴 것이다. 아담의 아들들을 다스리려는 현대의 욕망은 침묵할 것이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전쟁의 레이디가 아니라 전쟁의 왕자로서 그가 구출하러 올 것이다. 결코 여왕이 아니라 왕으로서. 암사자가 아니라 유다의 사자로서 말이다.자,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지금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공격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권위와 머리됨이라는 직분 자체의 구분을 무시할 정도로 무섭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은 단번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남자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반역의 큰 죄를 지은 사람들 중 일부가 남성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남자들조차도 다음 이 말을 깊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아버지와 아들,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목사들과 신적 힘을 가진 통치자들 조차도 여성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모든 관계는 창조 세계 속에서는 자연스럽고 또 확실히 남성적이지만,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모두가 다 신부인 것이다. 언젠가 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남성다움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남성다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향해 그 어떤 잠재적인 두려움 없이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하시다. 원제: The Future of Masculini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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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어떻게 준비할까?
by Sarah Eekhoff Zylstra
2020-12-13
평소라면 지금쯤 주일학교며 성가대 그리고 포인세티아로 본당을 장식하는 등등 교회 스태프들이 크리스마스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전국적으로 코로나19 사례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콘서트, 온 가족이 붐비는 어린이 축하 행사와 같은 전통적인 행사를 취소하는 건 물론이고, 시시각각으로 온 나라의 건강 상태가 급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교회 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첫째도 창의성, 둘째도 창의성이다. TGC는 전국에 걸쳐서 다섯 명의 목사들과 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보낼지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는데, 양초를 나눠줄 지 그리고 그들이 대림절(Advent)에는 어떤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목사: 후안 산체스(Juan Sanchez)교회: 하이포인트 침례교회도시: 오스틴, 텍사스규모: 등록교인은 약 500명,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6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평상시 크리스마스라면 천 명 정도가 앉는 이 교회 본당이 꽉 차기 마련이다. “평소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면 교회에 와요. 우리는 아주 단순한 예배를 드리죠.” TGC 이사회 멤버이자 이 교회 담임목사인 후안 산체스의 말이다. 한 시간 정도 하는 예배에서는 크리스마스 찬양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에 알맞은 복음 설교가 선포된다. 이 교회는 올해도 사회적 거리를 지키고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상태로 작년과 똑같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문제는 공간이다. 6월에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참석하는 교인 수는 점차 증가하여 현재 350명을 돌파했다는 게 산체스 목사의 말이다. 문제는 본당이 사회적 거리를 지키는 한 그 인원 이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는 예배에 온 사람들에게 기록을 하고 본당에 들어가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록을 하지 않았는데, 그건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본당 공간이 워낙 충분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번 주 당회 모임이 있는데요. 본당 입장시 신원 기록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겁니다.” 산체스 목사가 말했다. 교회는 25명이 들어갈 수 있는 추가 예배실을 하나 준비했고 또 하나를 준비할 계획이다. 그 방들까지 다 차면 늦게 온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참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배를 한 번 더 하는 건 꺼려집니다. 우리 교회는 대 예배는 단 한 번만 드린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거든요.”대림절에 산체스 목사는 여름부터 시작한 설교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다. “다시 대면 예배로 모이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설교해야 할 지 고민했어요. 인종 문제에 관한 시리즈가 필요할까? 아니면, 정치?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전달하지? 다행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설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요, 이번에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설교가 바로 에베소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사도 바울의 편지는 백인,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미국인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참석하는, 인종 면에서 매우 다양한 이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강력한 성령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인종차별과 관련해서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 보수적인 도시 오스틴에서 강력한 반 인종차별 시위를 했습니다. 나는 성경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본문을 내가 임의적으로 한두 개 고르는 것보다 지속적인 본문 강해 설교를 통해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산체스 목사는 12월 27일에 에베소서 마지막 강해설교를 할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선교를 위한 담대한 복음 선포”이다. 산체스 목사는 말한다. “오늘날도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목사: 데릭 퍽키트(Derrick Puckett)교회: 리뉴얼 교회 도시: 시카고, 일리노이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300명 리뉴얼 교회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보통 찬양으로 보낸다. 중간에 누가복음 2장을 본문으로 하는 5분 정도의 설교가 있지만 설교가 끝나면 일곱 곡을 다시 부른다. 그리고 예배 끝날 때에 교인들은 촛불을 켠다. 그러나 리뉴얼 교회는 그들이 공간을 빌려쓰고 있는 학교가 3월 이후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내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온라인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 드리기로 결정했어요.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있고요.” 퍽키트 목사의 말이다. 찬양에 누가복음 2장 등등, 다 비슷할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교인이 아닌 교회 스태프가 성경 본문을 읽게 된다. 크리스마스 전 화요일에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사무실에서 예배를 녹음할 것이라고 했다. “정상적인 예배인 것처럼 옷을 입을 겁니다.” 퍽키트 목사가 말을 이었다.“보통 때에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하지 않는 다른 교회도 초청을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온라인이다. 사람들에게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라고,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노래하자고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예배 방송을 전파하자고 격려하고 있다.퍽키트 목사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적지 않은 교인들에게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당수의 교인이 시카고 시의 ‘자가 격리 권고’에 따라서 추수감사절에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젊은 독신자 또는 부부이다. “시카고가 원래 집인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쉽지 않아요.”여름에는 교인들이 가끔 만나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회 지도자들도 격주로 심방 전화를 돌렸다. 그런 사역 중 일부는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대면 예배가 없었던 지난 8개월 동안 리뉴얼 교회에는 15명이 새로 등록했다. “우리 교회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교인들은 교회가 더 필요합니다. 최대한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교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평상시 크리스마스 때보다 더 함께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니까요.”목사: 매트 프록터(Matt Proctor)교회: 코너스톤 교회도시: 마리온, 아이오와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3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명코로나 전에도 프록토 목사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몇 명이나 올 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떤 해에는 많이 왔고 또 어떤 해에는 거의 없고요.” 프록토 목사의 말이다. 출석 수는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가지 않고 집에 남아있는가에 달려있다. 코너스톤 교회는 그래도 나름 유대 관계가 탄탄한 교회이다. 올해 여름 다시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교인의 약 95%가 적어도 한 번은 예배에 참석했다. “그 중 일부는 주일 예배에 고작 한두 번만 참석했어요. 교인 일부는 암 치료를 받고 있고요. 또 일부는 설교만 듣고 나갑니다.”지난 몇 주 동안 아이오와 주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를 선택했다. 교인 숫자가 떨어지기 전에 프록터 목사는 예배를 다시 2부로 늘이려고 했지만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건 아름답습니다.” 프록터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예배를 두 번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아, 잘 됐네요.’라고 말할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본당 안에 앉아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합니다.”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는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성경 말씀과 찬양으로 구성된다. 코너스톤 교회는 크리스마스 예배에서도 매주 예배 때처럼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찬양을 부른다. 그래서 말씀만 듣고 싶어하고 노래 부르는 게 불편한 사람은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프록터 목사는 개개인이 촛불을 켜고 들게 할 계획인데 문제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옆에 사람에게 불을 붙이도록 할 것인가이다. “아무래도 가운데 촛불 자리를 따로 만들어야 할 거 같고요.”코너스톤 교회는 또한 크리스마스 전에 비디오를 만들어서 교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때 그때 그때 사용하도록 도울 계획이다. 프록터 목사는 매년 번갈아가면서 한 해는 대림절 설교, 그리고 다른 해에는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말씀으로 설교를 한다. “올해는 한참 전부터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대림절에 맞춘 본문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서 마가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은 13장을 읽고 있다. 그리고 12월 20일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왜 성육신이 꼭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마가복음을 통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목사: 존 마하피(John Mahaffey)교회: 웨스트 하이랜드 침례교회도시: 해밀톤, 온타리오, 캐나다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0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0명웨스트 하이랜드 침례 교회 목사이자 TGC 캐나다 의장인 존 마하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본당에 모여서 놀라운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예배는 하나의 공동체 행사입니다. 모두가 촛불을 들고 조명을 낮춘 상태에서 찬양을 드립니다. 실로 아름다운 가족 시간이에요.”올해 웨스트 하이랜드 교회는 기존 크리스마스 예배를 2부로 나눠서 두 번 할 예정이고, 예배에는 30% (또는 약 250개의 의자)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참석자는 미리 등록을 해야 하며 우리는 가족 별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서 가족 간에 6피트 씩 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마하피 목사의 말이다. 올해 교회는 예배를 3부 그러니까 한 번 더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네요. 새로운 방식으로 사역을 하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찬양을 할 때에도 교인들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이제 크리스마스 캐롤도 마스크를 쓰고 부를 것이다. 문제는 성가대이다. “예배 담당 목사가 꽤나 창의적이에요. 그래서 40, 50명 되는 성가대원 각자가 찬양을 하는 비디오를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 그 비디오를 다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 거지요. 그래서 스크린으로 보면 전체가 다 모여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찬양한 것처럼 보입니다.”스태프는 촛불을 들고 다니면서 불을 붙이는 봉사 인원을 모집해서 최대한 교인들간의 거리를 띄우도록 할 것이다. 또 하나 가능한 선택지는 커다란 초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차례로 앞으로 와서 불을 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모든 것을 못 하게 된 건 좋은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하피 목사는 말을 이었다. “똑같은 성탄절을 지난 20년간 보냈어요. 이제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마하피 목사는 대림절 시리즈 설교 제목을 “미리 예언된 크리스마스- 구약을 통해서 살펴본 대림절”로 정했다.“구약 속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좀 살펴볼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암울했던 시기에 그 예언들이 나왔거든요. 나는 그들이 처했던 그 암흑기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 메시지로는 너무 어두울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우리 교인들이 처한 상황과 일맥상통한다고 느낍니다.”목사: 가레트 켈(Garrett Kell)교회: 델 레이 침례교회도시: 알렉산드리아, 버지니아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55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겉으로만 봐서는 델 레이 침례교회가 맞는 대림절은 다른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교회는 전형적인 개혁주의 침례교회입니다.” TGC 이사이자 담임목사인 가레트 켈 목사의 말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는 이 교회에서도 아주 큰 행사이다. 참석자의 반 이상이 평상시에는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상당수가 일 년 내내 한 번도 교회에 오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는 타지에 있다가 잠깐 들린 경우고요. 따라서 그 날 예배는 복음을 전하기에 정말로 좋은 기회지요.”올해 그는 250명 참석으로 제한된 본당에서 설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동시에 온라인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또 일부 교인은 주차장에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델 레이 교회는 그렇게 해서 약 400명 정도를 현장 예배에 참석시킬 것이다. 그 정도면 평소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을 거의 다 채우는 셈이다.이 교회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는 평소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전도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실직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돕는데 교회가 앞장서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필품을 이웃에게 나눠줄 예정이다.교인들끼리도 서로 돕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교회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누가 혼자 된 상태이고 그래서 누구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해야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내 생각에 올해는 상황이 조금 바뀔 거 같네요. 그러나 실외 히터를 갖춘 가족들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올해에도 좋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 켈 목사는 지금 요한계시록을 강해설교 중이다. “이 성경에는 어두움과 희망을 주는 빛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올해 특히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지금 21장에서 22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새롭게 만드신다는 내용이죠. 감사하게도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그 어느 때 보다도 말이죠.” 원제: Go Tell It on the Facebook Live: Preparing for a COVID Christmas Eve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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