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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by Jim Davis 외
2021-01-11
성(性)은 부모가 아이들과 나눠야 할 대화 중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러나 분명 두렵고 떨리는 일일 것이다.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언제 말을 꺼내야 하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너무 오래 기다렸나?여기 다양한 나이대의 아이들을 가진 두 부부가 말하는 민망한 대화를 더 편안하게 이끄는 네 가지 팁이 있다.1. 문화를 제압하라당신 아이의 성에 대한 순진함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질문이 있다. 놀이터에서 삐걱대다 끝낼 것인가 아니면 안전한 집에서 멋지게 끝낼 것인가?오늘날 아이들은 과잉 성애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발육상 이를 다룰 준비가 되기도 전에 성적인 언어, 이미지, 그리고 행동에 노출되고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10세(3학년) 때 또래 친구들로부터 성에 대해 듣고 있으며, 평균 12세나 13세(5학년 또는 6학년) 때 음란물에 노출된다.문화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아이들이 성에 노출되고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화가 우리 아이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이 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은 아니다. 타인 또는 인터넷, TV, 영화에 이 역할을 맡기기보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들의 성에 관한 이해를 형성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특권이 있다.좋은 소식은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2. 대화를 시작하라아이들과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체크해야 할 점검 대상이 아니다. 시작되어야 하고 지속적으로 가져야 할 대화다. “한번 하고 끝” 접근은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고 차후에 질문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간단하고 단순한 설명은 더 깊어질 것이고 신뢰를 쌓을 것이다. 그러니 일찍 대화를 시작해서 주변 관계를 조성해야 한다.이런 대화들은 거창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재우거나 소파에 앉아 있는 중에, 심지어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일어날 수 있다. “꼼짝없이 타야 하는 차” 안에서 대부분의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한 이런 장소들을 찾아서 의도적으로 그곳에 있어라.게다가 연령대에 적합한 성 정보를 나누고 성경적인 비전을 가르지는 것은 성관계를 둘러싼 불건전한 사회적 규범을 거스르는 일일 수 있다. 연구들은 이러한 대화들이 정보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아이들을 더 건강하게 키워낸다고 한다. 10대의 성관계 전문가이자 ‘Talk to Me First: Everything You Need to Know to Become Your Kids’와 ‘Go-To Person About Sex’의 저자인 데보라 러프만(Deborah Ruffman)에 따르면, “성생활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할 뿐만 아니라 성적 행위를 포함한 다양한 위험한 행동의 참여를 지연시킨다"고 한다.아이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하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관찰, 임산부에 대한 언급, 결혼에 대한 기대감, 심지어 부적절한 빌보드나 TV 광고에 대한 호기심 등과 관련된 발언들은 어떤 측면에서 성에 관한 짧은 대화를 위한 완벽한 시작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부모들은 다음과 같은 열린 질문을 함으로써 성에 관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하니?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 입을 때 왜 문을 닫아야만 하지? 아이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알고 있니?"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당신 아이들의 대답은 무엇을 이미 알고 있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진정한 대화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는가? 아이들이 질문을 하고 있다면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3. 당신이 어색하게 만들 때만 어색하다주제가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이 사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이미 저지른 성적인 죄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 죄책감 때문에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다. 수치와 죄책감은 대화를 어색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적이 원하는 것이다. 어색함은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모와의 신뢰를 방해하는 장벽을 만든다.건강한 대화의 길을 상상해보라. 어색함은 그 길 양옆에 있는 도랑이다.오른쪽에 우리가 필요치 않은 어색함이 있다. 이런 어색함은 “넌 아직 어려” 혹은 “어디서 들었니?"와 같은 말로 대화를 중단시킨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웃으면서 그것은 좋은 질문이며 내게 물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라.왼쪽에는 필요 이상의 어색함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실제로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물을 것 같은 질문을 추측하거나 묻기를 두려워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4세 아이는 8세 아이와는 매우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지나친 공유는 적게 공유 하는 것만큼이나 대화를 억누를 수 있다.4. 더 좋은 이야기를 하라아마도 부모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성을 하나님이 만든 축제라기보다 경고로 가득한 위험한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집 밖에서 불안, 수치, 이기심을 부채질하는 성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몇몇 기독교 가정 안에서 이 이야기는 선의로 “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좋지 않아!”라고 단순화될 수 있다.더 좋은 이야기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과 선을 위해 성을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이를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삶의 기적을 기뻐하고 결혼의 모든 부분을 축하한다. 성이 우리가 더 사랑하고 서로를 더 존중하는 한 방법임을 기뻐해야 하며, 육체적으로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어떻게 복음의 현실을 구현했는지 기념해야 한다.다른 좋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오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홍수처럼 쏟아지는 성적인 문화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에 대한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기쁨과 평화, 온전한 이야기보다 혼란과 비극의 무서운 끝맺음처럼 보이는 “모험을 선택해”라는 이야기에 준비 없이 내보내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일 중에 하나다. 하나님이 왜 성이라는 선물을 창조하셨고, 사랑 또는 위험이 될 수 있을만큼 성이 얼마나 강력하며, 또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서 성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할 수 있다.엄마 아빠들이여, 우리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 우리는 성에 관한 아이들의 정서적, 영적, 심리적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특권을 잘 감당해 보자.원제: Kids, Let’s Talk About Sex(Jim Davis • Angela Davis • Lindsey Holcomb • Justin Holcom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송유희
가정
양육
음란물
성관계
문화제압
대화
창조섭리
성역할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으라
by Jon Bloom
2021-01-10
인내심과 더불어 지성을 치열하게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을 기독교인이라면 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즉 열심히, 치열하게,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경을 읽는 것은 더 큰 믿음, 노력, 기도, 겸손, 약함을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그의 말씀이 뿌리내리기를 원하는 바로 그 장소다.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의미를 설명하기 전에 예를 하나 들도록 하자. 왜냐하면 좋은 예는 종종 좋은 설명이 되니까. 내가 지금 들려는 예는 바로 성경 속에 있다. 내 온 마음을 다해서시편 119편은 하나님께 대한 진심 어린 사랑과 소망의 노래다. 그리고 정말로 마음을 다해서 119편을 읽으면, 시편 저자가 어떻게 그리고 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심지어 필사적으로 온 맘을 다해서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19편 전체를 읽는 게 더 좋겠지만, 그 중에서 일단 몇 군데만 맛을 보도록 하자.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절)“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10절)“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절)“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절)“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24절)“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47-48절)시편 119편을 읽다 보면 두 개의 진리는 결코 놓칠래야 놓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위한 것이며 인간의 마음으로 가는 길은 지성을 통해서다. 사랑해야 할 보물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 모세의 말을 인용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런데 신명기 구절을 인용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지성(mind. 역자 주: 성경에서는 ‘뜻’으로 번역했음)이라는 단어, 모세가 쓰지 않았던 이 단어를 추가했다(마 22:37; 막 12:30을 참조하라). 아마도 모세 시대의 히브리 청중들은 감정에 지성이 포함되었음을 암시적으로 이해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예수 시대의 다양한 군중들에게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이 이 지성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감정과 지성이 둘 다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계(hierarchy)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단지 생각의 대상이 되는 관념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인격이다. 최고로 소중히 해야 할 최고의 보물이다. 우리의 사랑(마음)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이해(지성)을 통해서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마음을 담아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영광을 보기 위해 읽으라기독교인으로서 성경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에도 종종 우리는 왜 성경 읽기가 중요한지에 대한 교묘하고도 간교한 오해에 쉽게 빠지곤 한다. 교묘한 오해는 이런 식이다. 우리가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마치 성경을 읽는 목적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은 나름 진실과 매우 흡사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 기만적이다. 정기적이고 훈련된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수단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그 행위가 그런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알라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다섯 기둥(편집자 주: 이슬람의 5대 핵심 교리)으로 훈련하는 무슬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지도자들이 성경에 접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의 증거로 행하는 일종의 의식으로서의 성경 읽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분은 우리가 성경 읽기를 통해 그분을 볼 수 있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복해서 보기를 원하신다.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영광이 가장 밝고 선명하게 비치는 곳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러하다(요 1:14).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체”(골 1:15)고 또 그분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요 1:17)가 주어진다.이로 인해 성경은 특별한 영광으로 빛나고, 그 안에 담긴 귀중한 보화 때문에 그 말씀은 더 깊이 파고들 가치가 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구약과 신약, 예외없이 우리가 찾아내는 성경 속 모든 세부사항과 특별함에 관해서, 성경을 읽는 목표는 항상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다. 내가 ‘모든 세부사항과 특별함’이라고 말한 데 주목하라. 영광을 보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가스처럼 성경 위에 둥둥 떠다니지 않는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와는 별도로 숨겨진 어떤 장소에 숨어 있지도 않다. 하나님의 영광은 본문 속 의미를 통해서 드러난다.” (‘존 파이퍼의 성경 읽기’ 중)하나님의 영광은 본문 속 의미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저장되도록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시 119:11). 단지 보기 위해서만 읽지는 말아라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지성이 쏟는 관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볼 뿐만 아니라, 그 영광을 음미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같은 책)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독서의 유익은 이해의 방식으로 영혼에게 와야한다. … 신성한 대상을 향해 감정이 솟구치기 전에 마음에 깨달음이라는 조명이 있어야한다...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한다. 그 지식이 먼저 알려질 때, 비로소 그 지식을 통한 환희가 찾아오게 된다.”(같은 책)‘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신성한 것들을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 읽기를 통해 우리가 가장 누리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지식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지식은 바로 사랑하고 즐기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을 위한 것이라는 구절을 나는 ‘모든 갈망의 기쁨’이라는 찬송가에서 빌려왔다. 성경 속 ‘모든 세부 사항과 특별함’을 고려해서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꽤 어려울 수도 있다. 때로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무한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고,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사 55:8-9).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성경을 주셨는지 이해한다면, 그의 말씀을 읽는 것은 기쁨의 추구가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가장 잘 누리도록 설계된 기쁨, 즉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하는 것이다. 보고 음미할 때까지 읽으라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선명하게 봄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음미하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는 브리스톨 고아들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했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의 사역 초기에 중요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신경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는 다름 아니라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행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같은 책). 그는 매일 아침 훈련된 성경 읽기와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시간은 그의 삶에서 오아시스였다. 말씀을 읽는 시간은 밸러스트(ballast, 역자 주: 배의 복원력을 유지하기 위해 배의 바닥에 물이나 자갈 따위를 싣는 것)처럼 작용하여 엄청난 스트레스와 종종 닥치는 격렬한 폭풍우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그의 삶을 똑바로 세워주었다. “특별한 장애물이 방해하지 않는 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하기 전까지 결코 기도하는 무릎을 일으키지 않았다.”(같은 책)조지 뮬러는 시편 119편을 쓴 시편 저자처럼 온 지성을 다 동원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쏟아가면서 성경을 읽었다. 우리도 그래야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거하기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저장하기 위해 뜻을 다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주 안에서 행복해질’ 때까지, 또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신선한 기쁨을 온전히 느낄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말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원제: Read the Bible with Your Hear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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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러스트
성경
영광
시편119편
스펄전
존파이퍼
조지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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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ye
2021-01-09
나는 21세가 채 되기도 전에 목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나의 머릿속에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에 대한 어떤 순진한 감정과 함께 청년 사역의 필요성에 대한 소망이 늘 들어 있었다.이를 위해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목사님들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큰 교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담임목사님을 포함한 선배 목사 모두와 만났다. 특히 담임목사님과 적어도 8주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함께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목사님의 계획표에 스케줄을 잡아 달라고 직원에게 미리 이메일로 요청하곤 하였다. 이러한 나의 호기심은 바로 나의 절박함 때문이었다.나는 이 방법을 우리 교회 이외의 지역 교회 지도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도 적용하였는데, 커피를 함께 나누며 청년 사역, 결혼, 신학교 선택, 재물, 자녀, 제자도, 설교 준비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던 사역자들을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1년 된 애송이 목사였던 나의 옛 모습을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친절히 나의 이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와 만나 교제하는 시간을 할애하여 주기도 하였다.그 이후, 목회 사역을 10년 이상 해 온 나에게, 지금은 20대의 청년들이 멘토를 찾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 멘토를 찾을 때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의 유의점을 통해 멘토를 찾기 위한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1. 현명한 사람들이 먼저 내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소리치고 있는 정직한 여인을 찾거나(잠 1:20) 귀한 은을 찾을 때처럼(잠 2:4) 지혜를 찾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면 스스로 주도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당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항상 자신이 먼저 그들에게 접근하여 만남의 시간을 통해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끔, 현명한 조언을 줄 수 있는 멘토들이 다가와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면서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2. 그들에게 '나의 멘토'가 되어 달라는 요청은 하지 말아야 한다누군가로부터 멘토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은 대단히 긴장이 되는 일이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포괄적 요구에 대하여 거부 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요청을 해 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사용하는 언어들을 좀 정리하고, 내가 해 온 것처럼 지금 그들이 '멘토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하면 몇몇 현명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통해 도움과 조언을 얻되 굳이 그들이 멘토로 여겨지고 있다고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멘토가 되어 있을 것이다.나는 내 주위 몇몇 사람을 '나의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 나는 멘토링 관계의 형성이 여러 차례 커피나 식사 등을 함께 하며 관계를 갖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주요 질문들을 주위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계속 묻고 답변을 얻다가 문득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나의 멘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3.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시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관심 기울이기를 원하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원한다. 멘토와의 만남을 위한 대화나 질문에 대하여 사전 준비 없이 그들을 만난다면 아마도 당신은 만남의 첫 몇 분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화제로 시간을 보내다 대화의 본질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나의 경우, 적어도 몇 가지 질문은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멘토의 전문 분야나 지식을 고려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의 멘토 중 신학이나 학문적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일이나 감정적인 이슈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신학적이거나 학문적인 해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겠지만, 목회 사역과 가정생활의 균형 등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 멘토들을 통해 조언을 받는다.4. 멘토와의 관계를 너무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내가 맡은 많은 청년들이 멘토링을 매주 몇 시간씩의 만남과 언제나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다고 하여 그때마다 멘토에게 연락하여 질문하는 일은 피하도록 하여야 한다. 궁금한 점들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은 내용을 잘 정리하여 그들과의 다음 만남을 통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 시간을 풍성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나는 멘토들을 만났을 때 묻고 싶은 질문이나 주제들에 관한 메모를 핸드폰에 작성하여 보관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도 종종 있을 것이다. 먼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여 보고 고민하는 노력 없이 멘토들을 통해서만 답을 얻고 있다면 결코 자신의 지혜를 발전시키는 계기는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5. '오직 한 사람'의 멘토만을 찾거나 기다리지 말라'유일한 나의 멘토'라는 것은 없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혜는 다양한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개발된다. 잠언 11장 14절에서도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위에 ‘많은 조언자’가 있다면 이는 참 좋은 일이다. 여러 명의 멘토를 통해 조언을 분산시키다 보면 멘토 각자에게 주어지는 부담도 덜게 될 수 있을 것이다.크리스천이 됨으로써 얻는 아름다움 중 하나는 많은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새로운 의미의 가정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헌신을 통해 '많은 조언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에 헌신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인 멘토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깝고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 우리의 멘토들은 일반적인 현명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형태의 제자도를 통한 현명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예수님은 궁극적인 지혜의 음성이다. 아무도 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많은 젊은이들은 예수님을 대체하는 멘토 역할을 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누군가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대상을 계속해서 찾도록 방관하는 것은 그들에게 버틸 수 없는 짐을 지우며 그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기대를 품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멘토들은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고전 1:24) 우리의 주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Not to Find a Mentor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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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멘토
조언
교회
파스칼의 내기 제대로 이해하기
by John Piper
2021-01-08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는 현명한 도전이 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파스칼의 ‘팡세’(Pensées)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 내기는 이런 것이다.“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의 이성은 선택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신의 존재와 부재라는 극단 사이에 놓인 무한한 거리에 대한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이성으로는 … 신의 존재나 부재 중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다. …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골라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내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뭘 고를 것인가? … 무엇을 선택하든 ‘이성’은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반드시 골라야 하므로 고른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의 ‘행복’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고르면 어떤 득실이 있는지 계산해보자. …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만일 하나님이 없다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 이 내기에서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무한히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즉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다. … 무한성을 취할 가능성이 있고 질 가능성은 유한하기만 하다면 우물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득실 가능성이 동일한 어떤 도박에서 만일 유한한 것을 걸고 이김으로써 무한성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도 명백하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를 오도할 ‘파스칼의 내기’흔히들 생각하듯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왜 그럴까?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지 않고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때나 못 박히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하나는 골라야 해,’ ‘하나님을 선택해’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당신에게 확신을 주고 당신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초자연성이 배제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증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이성과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분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죽어있는 영혼 속으로 불어 넣어진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요일 5:1). 이것이 바로 믿음이 세워지는 방식이다.이러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육(肉, flesh)이요, 인간이요, 자연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고(롬 8: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 8: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게만 본다(고전 2:1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개함을 주셔야 한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해주셔야 한다는 뜻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된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의 빛을 비춰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기반이다. 우리의 눈으로 하늘의 태양을 보듯,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압도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그 맛을 거부할 수 없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면 그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게 된다.그러므로 파스칼의 내기를 흔히들 생각하듯 단순하게 대하면 이 내기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체험하지 않고도 말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 그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다.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주는 ‘파스칼의 내기’사실 파스칼 자신도 위와 같은 오류를 인지하고 있었다. 파스칼은 내기의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래도 카드 앞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아마도 성경과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날 보세요. 손이 묶였고 입도 막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자유가 없어요. ‘속박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믿을 수가 없네요. 이제 나에게 뭘 하게 할 건가요?’” 파스칼의 대답은 이렇다.“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오. 이성으로 인해 여기까지는 왔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소.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것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설득하도록 계속 애쓰시오. 믿음을 얻고 싶소?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의 불신앙을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을 찾고 싶소? 당신처럼 한때 속박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자신의 모든 소유를 걸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그들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그 길을 알고 있소. 그들은 당신이 치유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병을 치유받은 자들이라오.”팡세의 간결함으로 인해 우리는 불신앙에 대해 파스칼이 어떤 “치유책”을 제공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대답의 요지는 당신이 이미 믿는 것처럼 가정하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 그 확실함을 모두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단언컨대 … 이 여정에서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분명히 얻는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이 내기에서 당신이 전혀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확실하고도 영원한 무언가를 골랐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하지만 파스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에 네 자신을 헌신하여 거듭남의 기적을 추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파스칼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주의(sacramentalism)에 여전히 갇혀 있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수(聖水)를 받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라 말한다. “이렇게만 해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좋은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파스칼의 내기 자체는 그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준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이제 성수나 미사를 통해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것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내기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복음에 나타난 바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고, 그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확신을 얻고 그것에 압도당한 채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원제: Pascal’s Wager: Misleading, But Challenging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거듭남
회개
영광
치유
팡세
초자연성
불신앙
성례주의
우울증을 겪는 자녀와 이렇게 대화하라
by Christine Chappell
2021-01-07
첫 아이가 세상에 나올 무렵 남편과 나는 자녀 양육에 관한 책들을 샅샅이 살펴보며 우리 아이가 누릴 기쁨과 성취로 가득한 밝은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본 그 책들 어디에서도 우리 아이가 우울증으로 길고도 예상할 수 없는 싸움을 할 것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이 가혹한 현실은 그야말로 우리 가족을 기습했고 우리는 소중한 우리 아이가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잘 이겨내도록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성인이 된 후 겪었던 우울증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내 자녀가 십대 이전부터 동일한 어려움을 겪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우리 딸이 자기 회의, 슬픔, 감정 없는 상태로 인해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나는 내 자신이 우울증을 통과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실 때 주셨던 진리의 말씀으로 반복적으로 돌아갔다. 딸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믿음으로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주신 그 위로를 되새겼고,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구명구와 같은 그것들을 붙들었다. 아이의 절망이 너무도 컸을 때,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불완전한 엄마와 우울증에 빠진 딸인 우리 존재의 근거를 복음의 소망 안에 두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모지 의료 전문가, 전문 상담가, 목회자가 아니다. 자녀가 우울증으로 인해 일반적인 슬픔이나 더 심각한 수준의 질환 증세를 보일 때는 아이가 지금 겪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에게는 부모가 줄 수 있는 소중한 것이 있다. 사랑과 격려다. 우울증을 겪는 자녀와 한 식탁에 앉았을 때나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다음 다섯 가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함께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1. 우울증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당신의 자녀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큰 슬픔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과 아이들이 그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아이들은 이내 더 큰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인간에게 있어 우울증은 일반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모세, 엘리야, 요나, 욥, 그리고 다윗왕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비통한 슬픔에 빠진 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라. 2. 인생에는 슬픈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우울증은 우리가 겪는 심히 어려운, 심지어 우리를 쇠약하게 만들기까지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의 경험들 중의 하나다. 하지만 자녀를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기쁜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계절들이 찾아오기 마련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전도서 3장 4절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두운 시기가 찾아올 때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를 안다고 해서 우울증으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눈물이 깃들일 수는 있겠지만, 기쁨이 회복될 것이다(시 30:5). 3. 슬픔에는 언어가 있다우울증이 주는 어려움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능력을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인 언어 능력이 있는 어른들도 그러할진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광대한 인자하심과 부드러운 보살피심으로 우리에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성경의 언어를 주셨다. 애통하라. 우리가 낙심하여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른다는 것을 그가 아신다. 우리의 짐이 무거울 때 우리가 그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경의 언어를 주셨다. 시편 13편, 77편 또는 88편 같은 애통의 시를 자녀와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언어들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자신의 우울감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면 우리 자녀들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느끼는 걱정, 애통, 피로, 불안을 표현할 수 있다. 4. 예수께서 우리를 앞서 가시고, 우리와 함께 가신다우리 자녀들의 영적인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자녀의 우울증은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초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간고를 많이 겪은 자(Man of Sorrows)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모든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엄청난 슬픔과 비탄을 겪으셨고 모든 인간적인 어려움들을 의롭게 견디셨기에, 이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완전한 구주가 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앞서 가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동반자이시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셨다. 특히 우리가 슬플 때에 말이다(시 34:18). 5. 우리 눈을 영원에 고정하자우울증은, 마치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 가기를 열망하는 마음 같은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이 세상과 그것이 약속하는 것들이 결국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때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의 특권은 천국의 소망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죄 문제가 언젠가는 완전히 해결될 것임을 보증한다. 영원한 천국에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계 21:3–4). 슬픔이 없는 그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이 땅에서 다 이해하지 못하는 고통들이 마침내 모두 해결되는 곳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울증이 우리 삶을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녀를 보살피는 우리 부모들의 격려는 불완전하고, 우리의 인내는 자주 한계에 부딪히며, 아무리 노력해도 낙심해 있는 자녀들의 관점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문 의료인과 상담가들의 케어와 더불어 우리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돌봄 사역의 일부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자녀들을 돌보실 것이다. 우리가 자녀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것은 어두운 구름이 걷히길 기다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기대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슬픔으로 가득한 계절 안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Talk to Your Depressed Child번역: 이정훈
가정
양육
우울증
슬픔
감정
소망
자녀
그리스도
사랑의 섭리
by R. C. Sproul
2021-01-06
최근에, 우리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적어도 사용되지 않았던 한 단어의 발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시대에 들어서 일반적인 어휘에 들어간 그 단어는 바로 옥시모론(oxymoron: 형용모순이라는 뜻)이다. 옥시모론의 전형적인 예는“점보 새우”라고 할 수 있겠다. 특정 사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단어가 자기모순이거나, 아니면 대조적인(antithetical) 관계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에서 쓰는 “일반은혜”(common grace)라는 구절이 바로 딱 그런 옥시모론에 해당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수준의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편재하지만(commonplace), 그것은 오히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피조물은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참으로 그분의 주권적인 관대함을 드러내는 일반적이지 않은(uncommon)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혜택을 받을 자격도, 가치도 없는 존재다.자 그럼, 이 점을 유념하면서 일반적이라는 이 용어를 왜 굳이 은혜와 관련해서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은혜는 일반적이지 않은 은혜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위 말하는 “특별은혜”와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반은혜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가지 현상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은 단지 믿는 자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당신의 신성한 섭리로 부어주신다. 그런 혜택과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과 관련이 있다. 2004년 5월호 ‘테이블토크’(Tabletalk)에서 내가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 중 두 가지 특성이 바로 이 일반은혜와 관련이 있다. 첫 번째 특성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자비함이다. 자비라는 용어는 단순히 말해서 “선의”(good will)를 의미한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가 비록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모든 피조물에 대해 일반적으로 친절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로 정의된다. 물론 이것이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에게 드려야 할 예배와 감사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노여움을 무효화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자비함이라는 특성은 모든 피조물을 향한 그분의 선의를 반영한다.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보여주시는 이 친절함이라는 성향은 하나님의 성품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유형의 사랑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이 가진 선행이라는 측면이다. 자비함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이 있는 반면, 선행은 창조된 전체 영역을 향한 그분의 행동과 관련된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자비함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사랑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예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에게 비가 내린다고 말했다. 나란히 살고 있는 두 농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매일 이 두 농부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한다. 당연히 이 두 농부는 수확을 위해서 충분한 양의 비와 햇빛을 필요로 한다. 만약에 이 두 농부가 신앙이라는 측면에서 갈린다고 할 때, 그러니까 한 명은 거듭난 신자고 또 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비신자라고 할 때, 하나님이 신자의 밭에는 햇빛을 비추고 또 비를 내리지만 비신자의 밭에는 햇빛과 비를 거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앙과 관계없이 두 농부는 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혜택을 동등하게 누린다. 햇빛과 비는 그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선물일 뿐 하나님은 신자와 비신자에게 그것을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선물을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쏟아부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가진 선행에 관해 말할 때, 그분이 베푸는 선행은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이 어느 정도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주시는 재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있는 의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으로 치료하는 믿지 않는 의사에게 갈 수도 있다. 반드시 신앙이 있어야만 재능이 있는 의사, 재능이 있는 음악가 또는 재능이 있는 회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재능과 달란트라는 축복을 주셨고, 이 모든 선물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선물은 단순히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법도 모든 인류에게 다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주어졌다. 하나님은 처음에 낙원 입구를 지키는 천사를 두고 정부를 세웠다. 정부의 역할에는 악을 억제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악이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못하도록 한계를 정했고, 그 구속력 덕분에 온 세상은 유익을 얻는다. 비록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사악한 개인과 부패한 정부에 의해서 엄청난 잔학 행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만약에 일반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심각한 타락과 퇴폐성을 드러냈을 것이다. 악한 사람들과 나라들 가운데서도 악이 제한 없이 마구 뻗어나가지는 않도록 억제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반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일이 사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경우도 하나의 일반은혜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낙태와 인권 침해와 같은 일반적인 악에 맞서서 그리스도인도 무신론자 및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운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 복지를 위한 문제다. 일반은혜와 관련한 문제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경기장에서 일하도록 요구한다.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은혜는 거듭남이 포함된 특별은혜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심에 따라서 오직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다. 오직 선택받은 사람만이 그 은혜를 받는다. 바로 여기서 선택받은 사람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갈린다. 우리는 일반은혜를 무차별적인 구원의 은혜, 또는 인류 전체를 향해 하나님이 미리 특정해서 구분하지 않고 임의로 주는 구원의 은혜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반은혜에 대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협력해서 이룬다는 주장-역주) 또는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주장-역주)로 한 발짝 들어가는 것이 된다. 일반은혜에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그분의 신성하고 주권적인 선택적 은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원제: A Loving Provis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신학
교리
옥시모론
자비
중생
일반은혜
특별은혜
반펠라기우스주의
낙태
인권침해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
by 정요석
2021-01-05
2007년 10월 가수 B씨와 간통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A양은 간통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 다음해 1월 간통죄의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10월 간통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그 후 2013년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던 유부남 C와 여자 D는 간통으로 사법연수원으로부터 파면과 정직의 징계를 받았는데, 유부남 C가 이에 불복하여 간통죄의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했다.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하여 2015년 2월 26일 형법 제241조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간통죄는 “헌법상 보장되는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한다.”라며 7대 2로 위헌 판결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결혼과 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변화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다 중요시하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간통행위에 대하여 이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비록 비도덕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그다지 크지 않거나 구체적 법익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없는 경우에는 국가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 형법의 추세고,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되고 있다.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형벌을 통하여 타율적으로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론지었다.그로부터 4년이 지나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제270조 제1항(의사낙태죄)이 헌법에 불합치하다고 판결하였다. 네 명의 재판관이 불합치, 세 명의 재판관이 단순위헌, 두 명이 합헌 의견을 내었다. 네 명의 재판관은 “자기결정권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생활 영역에서 인격의 발현과 삶의 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결정을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리다. 자기결정권에는 여성이 그의 존엄한 인격권을 바탕으로 하여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활 영역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고, 여기에는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임신상태로 유지하여 출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불합치의견을 내었다. 세 명의 재판관은 “임신 제일삼분기에 이루어지는 안전한 낙태에 대하여 조차 일률적, 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라고 단순위헌의견을 내었다.이에 반하여 두 명의 재판관은 “출생 전의 생성 중인 생명을 헌법상 생명권의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생명권의 보호는 불완전한 것에 그치고 말 것이므로, 태아 역시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태아가 모체의 일부라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에게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소멸시킬 권리, 즉 낙태할 권리가 자기결정권의 내용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라며 합헌 의견을 내었다. 이들은 모자보건법이 다섯 가지의 정당화 사유 때에 낙태를 허용하여 여성의 인간 존엄을 배려한다고 말하였는데, 그 다섯 경우는 아래와 같다.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이처럼 현행 법률은 낙태를 무조건 금지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허용하고 있다.2015년 2월 기준으로 미국의 50개 주 중 21개 주는 간통을 여전히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 주가 사문화되다시피 한 간통죄를 유지하는 것은 간통한 자들이 이혼소송을 당할 때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하도록 하는 이유가 크다. 미국의 간통에 대한 민사 소송의 판결과 사회적 비난은 매우 엄격하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1973년 1월에 7대 2로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시하였다. 그리고 2015년 6월에는 미시건, 오하이오, 켄터키, 테네시 주의 항소법원이 판시한 동성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며, 헌법 14조의 평등 원칙에 따라 동성결혼이 헌법적 권리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5년 2월 26일에 간통죄를, 그리고 2019년 4월 11일에 낙태죄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과연 언제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릴까?미국이 낙태죄 폐지에서 동성결혼금지법이 폐지되는 데까지 42년이 걸렸는데, 아마 한국은 이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것 같다. 이유는 한국이 국제화(?)의 물결에 크게 동참하고 있고, 무엇보다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0조에 근거하여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각 영역에서 존중하는 형태로 판결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이 동성결혼에도 적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참고로 헌법 제1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이고, 제2항은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이다.믿음이 이성보다 우선적인 내적인식원리고, 성경이 법률과 전통과 문화와 학문보다 우선적인 외적인식원리라고 받아들이는 신자들은 간통죄와 낙태죄와 동성결혼금지법이 성경에 합치된다고 여길 것이다. 성경의 어느 구절이 간통과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지 찾아보는 일은 살인과 도둑질이 옳다고 쓰인 성경 구절을 찾아보는 것만큼 어렵다. 네덜란드의 성경학자인 핌 프롱크(Pim Pronk)는 게이임에도 성경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교회가 간통과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국가의 제도와 법과 문화가 제정되고 형성되면 우리나라는 사랑과 효율과 평안이 더욱 넘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는 시대가 흐를수록 힘들어진다. 국민들은 헌법 제10조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을 옳은 의미로 추구하지 않고, 자신들의 소견에 따라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추구하는 데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권과 평등이란 단어의 의미도 갈수록 개인 중심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앞으로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과 과잉금지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사람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존재기 때문이다. 요사이 별의별 종류의 내용과 주장으로 이뤄진 유튜브 시청에 사람들이 쏟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려운 자신의 귀를 시원케 해줄 유튜버들을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 구독하고 있다. 젊을수록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고, 개인주의적이고, 사랑과 정보다 법률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이럴 때일수록 교회는 세상을 향해 지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듣지 않겠지만, 자신들의 소견과 숱한 스승들의 주장이 허망한 것임을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양심 소리를 듣게 되며 우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때 그들은 법과 제도와 문화에 대한 통찰을 갖게 된다. 인생은 만만치 않고, 사회와 국가는 그들의 논리대로 평안하게 효율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사회와 국가는 다수결로 흘러가며 옳은 방향을 잃기 쉽다. 이때 우리가 쉬지 않고 전한 성경 말씀은 이들이 잊고 있었고 일부러 가리고 있던 본성의 감각을 일깨우게 되며, 사회의 제도와 법 제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음행자를 통한히 여기지 않으며 쫓아내지 않자 크게 책망하였다. 바울은 음행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음행자들이나 탐심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은 으레 이렇게 사는 것이므로 우리가 이들을 사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밖에 나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신자들은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와 속여 빼앗는 악을 행하면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향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외칠 때 동시에 교회 내부의 순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낙태와 동성애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습과 재정 횡령과 성적 일탈을 한다면 세상은 너희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함으로(신 5:32-33)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서로 교제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고, 기도하기를 힘쓰고, 자신의 물건을 필요한 자에게 풍성하게 나누고, 사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물질과 정성으로 동참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고, 주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이다.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의 오용을 이겨내는 길은 매사를 성경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고, 매사를 자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남의 행복을 위해서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화
사회이슈
간통죄
헌법재판소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
헌법제10조
생명권
낙태죄
동성결혼금지법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 변증학
by Elliot Clark
2021-01-04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 교회는 오랫동안 변증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서구 문화가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물음이 급변함에 따라, 변증학의 대응도 바뀌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예컨대 최근에 일어나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물음에 속한다고 분류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잘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이 왜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활의 소식이 왜 ‘좋은’ 소식인지도 당연히 알지 못한다.이에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다른 접근을 통해 교회에 변증학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오클라호마 침례 대학에서 철학과 변증학을 가르치는 폴 굴드(Paul Gould)다. 그는 최근에 ‘문화 변증학: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회복하는 법’(Cultural Apologetics: Renewing the Christian Voice, Conscience, and Imagination in a Disenchanted World)이라는 제목이 달린 유익한 책을 저술했다.이 의미심장한 작품에서 굴드는 다양한 문화적인 질문을 다루며 그에 대해 깊이 있고 폭넓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많이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교회 역사의 사상가들도 깊이 반영하여 어거스틴으로부터 아퀴나스를 거쳐 그의 논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C. S.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을 제공한다.아마도 ‘문화 변증학’에서 굴드의 접근 배후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바로 루이스가 자신의 에세이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Talking about Bicycles)에서 선보인 사색일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게 되는 인생을, 환상에 빠질 수 없는 시기(Unenchantment), 환상에 빠지는 시기(Enchantment),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시기(Disenchantment), 그리고 간혹 이상적으로 경험하곤 하는,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Re-enchantment)라는 네 단계로 구분해서 묘사했다. 굴드의 저술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경험이 효과적인 문화 변증학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드가 이해하는 ‘환상’이란, 평범한 일상을 영광스러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에 대해 예배로 반응할 줄 아는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그 환상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제시한 비전인 ‘선교적 충돌’ 즉 복음과 문화의 충돌이 이미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서구 문화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확장되는 카테고리이와 같은 굴드의 시도는 ‘총체적인’(holistic)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메시지를 인식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이런 관심이 책의 논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문을 관대하게 받아 주면서도 그에 대해 올바른 논증을 제시하는 접근을 취하는데, 이는 구체적인 변증학의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방식으로 굴드는 변증학의 카테고리를 명제 중심의 방법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문화의 옷을 입은 실천적인 신앙의 필요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즉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더욱이 굴드의 방법은 사실과 증거만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매력을 중요하게 다룬다. 즉 그가 제시하는 문화 변증학은 하나의 체계로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논증하되 어떻게 기독교가 존재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과연 어떤 세계인지를 보여 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이해한 대로라면, 우리의 사명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일 뿐 아니라 갈망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제시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굴드의 논의에서 반복되는 주제가 있다면, 이러한 변증학적 접근은 상위문화와 대중문화 모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문화가 대규모로 소비되고 구현되는 대중문화에 참여해야 할 뿐 아니라, 사상과 창조 활동의 중심부로서 문화의 원류가 흘러나오는 상위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학계와 예술과 정치 모두에 대한 기독교인의 투자를 장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굴드는 이러한 포괄적인 접근이 세계적인 수준과 지역적인 수준에서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한다.이미 언급했듯이, 굴드의 작품은 최근 등장한 더욱 총체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틀에 속한다(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홀리 오드웨이[Holly Ordway]의 ‘변증학과 기독교인의 상상력’[Apologetics and the Christian Imagination]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주창자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일어난 순전히 이성적인 접근에 반대한다. 그래서 변증학의 방법론에 그동안 자리해 온 ‘증거주의자’(evidentialists) 대 ‘전제주의자’(presuppositionalists)라는 대립과 그에 따른 논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굴드는 그의 방법론이 인식론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들과 통합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그 어떠한 체계와도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는 문화 변증학이 근대 이후의 방법론보다 더욱 통합적인 형태를 갖춘 고전적인 방법론을 지향한다고 간주한다.의문의 여지가 있는 전제비록 굴드의 시도가 ‘기존의’ 접근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논증이라는 방법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달리, 책의 상당량은 갈망과 이성과 도덕성을 모티프로 삼아 (일반적으로는 유신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적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많은 논의가 정말 통찰력 있게 개진되며, 굴드 자신의 경험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아름답게 제시될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의 의견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사실 나는 굴드가 주장하는 내용에 거의 동의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을 여기서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형성하는 일부 전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자 한다.첫째로, 서구 사회가 진정으로 환상에서 벗어난 세상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다. 물론 세속적인 서구 문화가 이성주의(rationalism)와 자연주의(naturalism)의 영향으로 영적 실재에 무감각해졌다는 관찰은 일리가 있다. 게다가 유물론(materialism)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잘못된 영적 존재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교 사상이 또한 현대 문화 속에 확산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내가 사는 미니애폴리스 지역에도 그와 같은 이교 신앙이 침투했음을 작년에야 알게 되었다). 이는 굴드 자신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환상이라는 주제만으로는 변증을 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거짓된 환상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민간 설화나 신화와 같은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통해 이미 그런 환상은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다고 볼 수 있다.둘째로, 교회가 ‘탑다운’ 즉 위에서 아래로 하달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생각에 성경이 정말 동의하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이 의문이 어쩌면 앞서 제기한 의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과 같이 세속 문화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대안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굴드가 제안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우려가 되는 내용은, 굴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부분으로서 바로 교회가 복음을 더욱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기 위해 ‘반드시’ 상위 문화에 동참해서 그 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사도들의 전도에서도 그러한 접근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이해하기로 신약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경험이 일종의 유배 생활과 같다는 관점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힘써야겠지만(딛 2:10),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고전 1:18).이 정도의 의문만 제외한다면, 나는 굴드의 작품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충실하게 변증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변증학 방법들과 같이, 그의 논증 역시도 비기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복음의 메시지를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는 일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신자들은 다시금 진정한 환상을 보며 문화에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아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t’s Time for a Holistic Apologetic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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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흔한 오류 여섯 가지
by Mark Jones
2021-01-03
나사렛 예수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믿음은 지난 2천년 동안 무관심, 음모, 논쟁, 추측, 조롱, 그리고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믿음이 그의 성육신 이후(눅 1:41) 전 세계에 흩어진 신자들로부터 예배와 헌신 그리고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높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도 여전히 그 분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무지와 오해 그리고 오류가 남아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 결과는 언제나 다양한 영적 손상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려면 무엇보다 구세주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오해하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무지는 결코 영적 성장의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형상(골 1:15)이므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요 14:9). 또한 그 누구도 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셨는데, 그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이 세상에 그 어떤 질문이 이 보다 더 격렬하게 논쟁되었던가? 이 세상에 또한 그 어떤 질문이 이 질문처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또는 아예 무시당함으로 누군가를 지옥의 위험에 빠뜨리고 또는 정확하게 대답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한 천국을 얻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된 “말씀”이라고 묘사했다(요 1:14). 도마는 예수님을 그의 “주” 그리고 “하나님”(요 20:28)으로 고백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 그리고 그는 “혈과 육을 함께 지닌 자” (히 2:14)라고 표현했다. 사도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했으며 신성한 이름을 받은 “사람인 그리스도 예수”(딤전 2:5)라고도 표현했다. 또한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자 모든 뛰어난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은 자라고 말했다(빌 2:9-11).이런 증언들 뿐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더 많은 증언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현실을 대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질 수 없는 특징, 또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분되는 신인(God-man)이다. 그는 실로 독특한 분인데 우리기 흔히 쓰는 그런 독특함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그와 비슷할 수 없다는 면에서 독특하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을 영광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감스러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교회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신인(神人)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역사를 망각한 채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동일한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그는 정말로 사람인가?1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세라피온(Serapion, 190-203)을 통해 그리스도 가현설(Docetism)을 믿는 이단이 생겼다. 그는 예수님의 육신이 “영적”이라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었고 그냥 겉으로 인간처럼 보였다는 주장을 했다(그리스어, dokeō = “…처럼 보이다”). 그 후 4세기에 들어서는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5-392년 경)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잘못된 견해를 제시했다. 니케아 신조(Nicene Creed)는 부분적으로 그의 견해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아폴리나리스는 영원한 아들인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입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성육신은 단순히 마음과 영혼이 없는 육체에 거했던 아들의 신성일 뿐이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서자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John Owen)은 “요즘 들어서 그리스도가 가졌던 인간 본성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슬퍼했다. 그럼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이셨다.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 따르면 그는 “진정한 사람이고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다. … 인간다움에서 우리와 동일한데 단지 그는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서술한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다(히 2:17).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그는 배고픔(마 4:2)과 갈증(요 19:28) 그리고 피곤함(요 4:6)과 같은 신체적 반응을 경험했다. 그는 울었고(요 11:35), 통곡했으며(눅 19:41), 한숨을 쉬었고(막 7:34) 또한 신음했다(막 8:12). B. B.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나와 똑같은 인간을 앞에 놓고 만나고 있다라는 강한 인상을 받는데에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나지안조스(Nazianzus)의 그레고리(Gregory)가 서신 101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가 입지도 않은 것을 입은 것처럼 하고 인간을 치유한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속이 필요한 영혼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영혼을 소유해야만 했다. 합리적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이 있는가? 그렇기에 예수님도 합리적인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몸을 입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다양한 오류와 관련해서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인간으로서 주 그리스도는 그의 영혼의 합리적 능력과 능력, 그의 이해력, 의지 및 애정으로 모든 은혜를 베푸셨다. … 오래 전 사람들이 헛되이 상상했던 것처럼 그의 영혼에 자리잡고 있던 것은 신성한 본성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신성이 그가 행한 모든 일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대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 분 안에 있는 이성적인 영혼이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의 모든 도덕적 활동의 즉각적인 기초(principle)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덕적 행위는 진정한 인간적 행위였다. 그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성장했는데, 자라면서 힘이 강해졌고 또한 지혜도 더 자라났다. 지혜와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에게는 새롭고 더 큰 지식이 필요했다(눅 2:52). 이것은 그가 참된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의 유한함을 반영하는 유한한 마음과 영혼을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필수 조항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순종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순종이 아니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온갖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구세주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복음서와 히브리서의 필자들이 수사적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든 단지 속임수(phantom)가 아니었다. 그의 피는 우리 몸이 잘리거나 찔릴 때 나오는 진짜 피였다. 핏방울과 같았던 그의 땀은 십자가의 끔찍한 현실에 대해 괴로워하는 영혼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은 인간을 정복한 죄의 영향을 바라보며 느낀, 진정으로 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비극은 오로지 그가 혼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서만 통해 고칠 수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라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 우리를 영원히 치유했다. 2. 그는 도움을 받았는가?만일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에 필요한 순종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다면(요 4:34; 5:19, 30; 6:29, 42, 57), 그를 도울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존재는 누구일까? 축복받은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다른 두 격이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성령님이시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주의 영이 주의 종인 메시아에게 안주하실 것이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42장 1절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바로 첫 번째 종의 노래이다.“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61:1도 참조하라)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종(그의 아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를 붙잡는다. 이사야서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읽게 되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사 50:7).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실로 아름다운 삼위일체를 증거하는 구절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을 읽는다. 성육신(눅 1:31, 35), 세례(막 1:10), 광야의 유혹(막 1:12; 눅 4:14), 설교(눅 4:18), 기적(마 12:28), 죽음(히 9:14), 부활(롬1:4, 8:11), 그리고 승천과 영광 받으심(행 2:33, 시편 45:1-7)까지, 우리는 성령님이 그리스도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결코 그를 떠나거나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고 아버지를 온전히 기뻐하실 수 있도록 아버지가 내려주신 선물이다. 성경을 보다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냥 자신이 가진 신적 본성에 의존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게 될 때 진정한 종으로 오신 성육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하셨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를 맞추고 준비시키셨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네가 명령하는 것을 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명령하라.”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관계에 대한 탁월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아들이 순종하는데 필요한 (성령님의) 은사를 주시고,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명령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못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로지 자신만이 구세주라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면서 사는 참된 종교적인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까지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3. 예수님도 죄를 지었을 수 있지 않을까?예수님도 분명 유혹을 받았었기에 혹시나 죄를 짓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특히 두 가지가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봄으로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첫째,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진 두 가지 의지(will)의 관계에 관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는 각각 다른 두 본성에 적합한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바로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이다.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신앙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두 가지 자연적 의지는 불경한 이단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서로 상충되는 게 아니다(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간적인 의지는 주저하거나 저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성하고 전능한 의지에 종속된다.”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결코 그의 신적 의지에 어긋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이 공유하는 신성한 의지는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신적 의지에 종속되지만 결코 신적 의지가 인간적 의지에 종속될 수는 없다.이것은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지는데, 즉 그리스도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 일치는 한편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묵상하면 할수록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관여하지 않고서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적 본성은 추상적인 의미로 볼 때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우리는 결코 추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행동하는 인간이지 단지 행동하는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됨(personhood)은 사실상 신인이기에 그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W.G.T. 쉐드(W.G.T. Shedd)는 이렇게 말했다.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사람으로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이 본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 행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으신다면, 그건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신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우리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하나님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된다. 이 세상에 그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았지만 죄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히 4:15). 그가 받은 유혹의 현실은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진짜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영광스러운 선언이기도 하다. 4. 그는 진짜 사람인가?많은 신자들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진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영광 가운데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지금도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인간인지를 물으면 약간 혼란스러워 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가장 큰 오해는 예수님이 승천 후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한테 지금 굳이 인간성(humanity)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요?”오웬은 말했다. “그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이성적인 영혼 뿐 아니라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사항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존재함은 우리가 믿는 종교의 기본 항목이다. 뛰어난 네덜란드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다시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그런 육신이 되었다! 보좌에 앉아계신 지금조차도 그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오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이제 와서 “신성화”되지 않았다(즉, 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본성이 “하늘에서 신적인 본성과 결함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본성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결코 인간이 아닌 방식으로 전달되는 어떤 신성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상태에서도 항상 참된 인간적인 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은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인간됨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인간적인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한때 약함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히 4:15) 약점 때문에 허덕이는 우리를 공감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지금도 제사장이다. 신부된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권능으로 할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이다. 5. 그는 완전한 하나님인가?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인지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예수님, 놀라운 분이죠.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임명하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 250-336년 경)는 아들이자 로고스인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가장 유명한 이단자일 것이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수 없다며 그의 참된 신성을 부인했다. 나사렛 예수의 완벽한 신성의 증거, 즉 아버지와 나누고 있는 동질성(동일한 본질)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편을 들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에 혼란을 주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예 : 빌 2:5-11, 히 1:1-14, 골 1:15-20 참조).요한복음의 프롤로그는 교회가 예수가 참 하나님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 그 어떤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시작하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프롤로그 후반부에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라는 놀라운 요점을 말하는데 이 진리는 아마도 1세기를 살았던 유대인이 믿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구절이었을 것이다. 1절의 “계셨다(was)”는 14절의“되셨다(became)”와 대조되어야 한다. 말씀(로고스)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되신 게” 아니다. 이전에는 그 말씀이 단지 “계셨을” 뿐이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들도 이 진리를 확인하고 뒷받침한다(요 3:13; 6:62; 8:57–58; 17:5; 20:28).나중에 요한은 이사야가 “만군의 주인되신 왕”(사 6:5)을 보았을 때를 언급한다. 이사야 6장의 한 부분을 인용한 후, 그는 이사야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 12:41)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영광을 주는 법이 없다고 쓰여있다(사 42: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스스로 속았을 뿐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요청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런 일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서 묘사하는데 바로 예수님과 구약의 야훼를 연결하기 때문이다.이런 병행이 가르쳐주는 건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다름 아닌 야훼, 그분이라는 사실이다.본질적으로 아버지 그리고 성령님과 동등한 바로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필연적으로 모든 신성한 속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 위엄이 있는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의 능력이 무한하고, 영원하고, 또 변함없이 강력한가? 아들도 그렇다. 아버지가 거룩하고 또 거룩하신가? 아들도 그렇다. 신성한 본성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다. 그는 단지 영광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한하고 변함없이 영광스럽다. 6.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가?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언어(theotokos)는 무엇인가? 이 진술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단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오해했다는 사실 때문에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육신이 되었을 때(요 1:14) 그는 보통 인간(human person)이 아닌 단지 인간의 본성(human nature)만을 취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인격 아래에 존재한다. “두 인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자 같은 아들이며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칼케돈 공의회).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인간 본성이 이랬다” 또는 “그의 신적 본성이 그랬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적 또는 신적 본성에 따라 이렇게 또는 저것을 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로마서 1:3). 주체는 인간, 아들이고 그는 인간적 본성(예: 먹는 것, 눅 24:43) 또는 신적 본성(예: 세상을 유지함, 히 1:3)에 따라 움직인다.따라서 마리아는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낳았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칼케돈 신조(AD 451)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정통성 여부를 확인하는 테스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이유이다. “여러분은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아들이신 하나님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피로서 교회를 얻으셨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죄인인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위한 보상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창 22:17)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는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하나님이 임명하신 메시아이다. 베드로는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믿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했다(마 16:16). 이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도 같은 영광을 볼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소망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신인(神人)이시다. 원제: Christ Confusion: Six Common Errors About Jesu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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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성육신
아리우스논쟁
니케아신조
그리스도가현설
신성
인성
칼케돈공의회
칼케돈신조
리디머교회의 도시사역 전략 5가지
by Tim Keller
2021-01-02
이 글은 2004년 팀 켈러 목사가 “도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복음 변화가 가져다주는 모든 측면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는 다섯 가지 주요 방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며 리디머 교회의 도시 사역을 위해 내놓은 다섯 가지 전략이다. 도시 교회 개척 및 사역에 관심있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오래 전의 글을 게재한다-편집자리디머(Redeemer)는 도시의 안과 밖을 책임지는 교회가 되겠다는 창립 목적 일환으로 다섯 가지의 핵심 사역 전략 사이에서 사역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역의 균형을 달성하는 게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전도, 공동체, 말씀과 행동, 신앙과 일, 그리고 교회 개척이라는 다섯 가지 사역 중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똑같이 강조해왔다. 복음과 그 영향력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 좋은 소식은 무엇보다도 은혜 중심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사셨고(그러나 전혀 반항적이지 않게),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셨다(그래서 우리가 이제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모든 종교처럼 우리의 노력과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노력과 기록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다.두 번째로 이 좋은 소식은 왕국 중심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영혼을 죄로 물든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 속으로 부어주시어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갱신하고 회복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개종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한다. 이렇게 복음 속에 담긴 은혜와 왕국을 강조함으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9장 1-7절에서 가르치시고 또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선교 모습처럼 우리 스스로가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하도록 강요한다. 은혜 중심은 우리가 도시를 경멸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상기시킨다. 왕국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도시의 시민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지상 도시에서도 최고의 시민으로 살도록 인도한다. 도시 사역의 다섯 가지 전략복음에 대한 이런 이해가 기초가 될 때 도시에서 사역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흘러나온다. 첫째, 리디머 교회는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전도를 추구한다. 종교적 도덕주의와 달리 복음은 복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경멸하지 않는 신자를 만들어낸다. 복음은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업에 비추어 서로를 향한 공감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추구하는 문화적 희망과 열망을 해결할 방법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복음주의적 예배이다. 은혜의 복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언제나 필요로 하는 핵심이기에 우리는 신자의 양육과 불신자의 구도, 이 두 가지를 예배를 통해 동시에 이룰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양한 필요의 상황(points of need)에서 복음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설교는 매주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일관되게 표현하는가를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두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주로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영적 형성을 제공하고자 한다. 교리 시험에서 항상 “A”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의 의미가 공동체를 통한 지속적인 성찰, 훈계 및 모델을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여전히 영적 장님이고 또한 영적 침체(deadness)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은혜와 지혜 그리고 품성의 성장은 단지 교육을 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복음의 뚜렷한 의미가 살아 역사하는 친밀한 가족적 관계와 반문화적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에만 가능하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개인주의적 긴장이 존재하는데, 그건 사람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을 들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양보하면서까지 도시나 공동체 속에서 서로에게 봉사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이런 종류의 헌신만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역사하도록 하는 길이다. 세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역하려고 한다. 성경의 기본 이야기는 구원의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또한 물질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전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처럼 봉사를 통해 이웃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은혜와 하나님의 자유로운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준다. 복음을 붙잡는 교회라면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자유주의” 교회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 희생적으로 봉사해야 하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보수적” 교회보다도 더 효과적인 복음주의적 사역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말(성경의 가르침)과 행동(봉사 행위), 모두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통합적(holistic)인 방향이다. 네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사람들이 문화적 갱신을 위해 신앙과 일을 통합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들은 직장에서 일할 때에는 믿음과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을 주는 변혁적 세계관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평화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간주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우리가 비즈니스 거래를 처리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정부를 이끌고, 미디어에서 일하고, 장학금에 참여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리디머는 기독교인의 문화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들이 직업에서 탁월함, 독창성 및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올바른 복음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적이면서도 창의적이고 훌륭한 사업 환경을 개발하는 것은 창조의 회복이라는 사역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쁨과 희망 그리고 진리를 예술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 프로젝트나 공연에까지 지속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된다. 다섯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새로운 교회의 주요 사역에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도시를 위한 교회가 되겠다는 우리 사명의 일환으로 리디머는 복음 전파에 사명감을 가진 교회 개척을 돕고자 하며 또한 그렇게 시작한 교회가 이 같은 다섯 가지의 갱신 사역에 초점을 맞추도록 힘쓸 것이다. 다음 세대에 걸쳐 뉴욕시 지역에서만 수백, 수천 개의 새로운 복음 중심 교회가 시작된다면, 그로 인해 활동적인 기독교인의 수는 열 배에서 스무 배까지 늘어날 것이다. 이 역동적인 인구의 정밀 검사는 순차적으로 뉴욕시의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다. 다섯 가지 사역 전략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이 모든 사역의 전략을 한꺼번에 추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이러한 강조점 중에서 하나 또는 두 가지에 매우 능숙한 교회는 또 동시에 다른 강조점에 약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리디머에서 우리는 왜 이 다섯 가지 모두를 다 시도해야 하는가? 첫 번째로 모든 사역이 복음에 의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복음의 은혜 지향성은 복음적 예배와 깊은 공동체를 가능케 하고 또 필요하게 만든다. 복음의 왕국 지향성은 전체적인 사역과 신앙 그리고 일의 통합을 필수적으로 만든다. 은혜와 왕국 지향성은 교회 개척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한다. 두 번째로 도시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사역 전략이 모두 상호 의존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는 통합적 사역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설득력 있는 복음적 소명에 꼭 필요한 맥락이다(단순히 교회 숫자와 영향력을 늘이는 게 목표라면 도시 사람들이 굳이 왜 우리의 말을 들어야할까?). 또한 기독교인이 복음에 대한 믿음을 직업과 대중에서 계속 분리한다면 아무리 수많은 개종이 있더라도 우리는 문화를 바꿀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교회 개척은 궁극적으로 도시에서 행하는 다른 모든 사역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사역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이 모든 사역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또한 서로 맞물려 있다.결론많은 기독교인들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찾기 위해서 도시로 이주한다. 이것이 도시에 있는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일단 도시에 정착한 후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 29장 1-7절에서 설명하신 도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효율적이고 공감을 가지고 말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또한 현대 기독교인은 다른 교인들과 깊은 공동체를 추구하는 대신 교회에서도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심지어 소비자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공동선에 헌신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재미와 발전을 위해 도시를 이용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과 소명을 신중하게 통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뉴욕에 사는 기존의 기독교인과 뉴욕에 새로 온 기독교인이 앞서 말한 다섯 가지 전략 모두에서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도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늘날 현대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뉴욕시에서 우리가 정기적으로 세속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수천 개의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또한 도시가 추구하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고, 또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새로운 벤처 자금을 지원하며, 산문을 저술하도록 격려한다면, 우리는 이 도시가 번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원제: Five Ministry Fronts in the City출처: redeemercitytocity.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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