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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엔 삼위일체 설명이 없다?
by Greg Lanier
2020-11-26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그 어떤 비유도 다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어정쩡한 비유를 썼다가는 오히려 의도치 않게 오래 전 이단들이 저질렀던 오류에 빠지기 딱 좋다. 주변에 곧 안수를 받을 후보자가 있다면 한번 물어보라. 행여 우연이라도 당신이 “하나님은 세 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주변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또는 다섯 살짜리 자녀가 던지는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똑같아요?”라는 질문에 어떤 식으로 정통 교리를 반영한 대답을 할 것인지, 주변에 아는 부모에게도 한번 물어보라. 이런 개념적 어려움에 더해서 더 큰 문제는 삼위일체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는 신약 성경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신이 난 회의론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믿음 좋은 신자들까지도 왜 하나님이 삼위일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셨는지 곤혹스러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왜 사도들은 어거스틴이 쓴 ‘삼위일체론’(De Trinitat)과 같이 성경에 삼위일체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삼위일체가 그토록 신앙고백에 핵심이 된다면서 말이다.성경은 하나님이 삼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신약 성경 저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왜 더 많은 기록을 하지 않았는지 조사하기 이전에 삼위일체에 관해 이미 밝혀낸 내용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 성경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그의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구속사역을 행하시는, 온전하게 드러난 사랑의 하늘 아버지의 모습-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드러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선재(pre-existence), 고유한 신성한 아들됨의 확정, 구약의 구절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자신에게 적용함, 그를 향한 초기 숭배,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자신에게 적용함- 기꺼이 행동하고 기도하고 또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하는 개인의 대리인으로서 완전한 인격체인 성령님(예: 요 6:63; 행 20:28; 롬 8:26-27; 고전 12:7-11), 비인격적인 에너지장(energy field)이나 생명력이 전혀 아님 - 신성한 삼위 간의 상호 관계(예 : 마 28:19; 눅 10:21-22; 24:49; 요 20:22, 행 2:32-33; 롬 8:9-11).신약 성경 저자들은 우리에게 조직신학 교과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성경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단지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말이다.삼위일체의 숨겨짐이 설명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게 문제가 될까? 불신자가 정통 기독교를 향해 슬램덩크를 때리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신약성경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중요한 이유가 있다.1. 카테고리 조절하기신약성경은 구약성경적 개념으로 가득한 “백과사전”을 바탕으로 유대인 저자들이 대부분이 유대인인 청중을 위해서 쓴 글이다. 고대 이스라엘로부터 물려받은 주요 신앙고백은 참되신 한 분 하나님, 즉 유일신 고백이다(신 6:4). 물론 그럼에도 구약은 정기적으로 성령님을 드러내고 있고 또 가끔은 신성한 아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신비, 즉 삼위일체적 일신론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고 오순절 날 성령이 부어질 때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따라서 초대교회 당시 수십 년 동안 유대인 청중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1980년대 초 십대에게 오늘날 스마트 폰을 설명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카테고리는 분명하게 존재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적절한 조절(stretching)이 필요했다. 너무 빨리 진도를 나가는 경우 생기는 건 혼란이었다(사실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 — 요 5:18 참조). 따라서 신약의 저자들은 주로 청중에게 알려진 범주 내에서 삼위일체를 점차적으로 그리고 종종 암묵적으로 공개했던 것으로 보인다.2. 기본 지원새 언약을 기록한 주된 목적은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하여금 주님의 왕국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마 28:19-20; 눅 24:47; 롬 1:16-17; 계 5:9–10). 이런 상황은 어떤 주제를 더 광범위하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들로 하여금 선택과 집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에게 당장 시급했던 네 가지 주제가 떠오른다.- 예수를 메시아로 변호함(복음서의 주요 초점, 예: 요 20:31)- 믿음으로 의롭게 됨(롬 2-5; 갈 2-4; 엡 2-3; 빌 3)- 새 언약 시대에 맞는 윤리(롬 12-14; 고전 3-14; 빌레몬서; 야고보서)- 종말론적 성취(막 13; 살전 5; 살후2-3; 고전 15; 요한계시록)이런 주제는 교회의 주요 과제에서 가장 중요했고 따라서 가장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이런 각각의 주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는 신약 저자가 삼위일체적 사고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뒷받침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서 의로움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가르침은 아버지의 진노(롬 1:18)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2:29; 5:5) 아들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롬 3:25) 가능함을 보여준다. 신약의 저자들은 삼위일체에 대해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하게 삼위일체적 사고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3. 설명 대신 보여주다마지막으로, 신약성경 저자들은 보다 단순한 구약성경 저자들의 접근 방식을 사용해 교리적 주제가 아닌 개인적인 실체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접근하고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훌륭한 선생님처럼 구약성경은 종종 설명보다는 실제로 보여주는 방법을 채택한다. 사실 구약성경에는 핵심이 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이라는 면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교리들이 여러 개 들어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명령, 인류의 완전한 타락, 대속 속죄, 성경의 교리, 메시아에 대한 소망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오히려 이런 근본적인 교리는 이야기와 율법, 그리고 시편 및 예언 속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세 같은 사람은 이런 주제 중 하나에 대해 최소한 15 페이지 분량의 체계적인 신학적 내용을 서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선택한 방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말씀과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라는 근본적인 진리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한 장의 성경 또는 몇 개의 구절을 갖는 대신, 우리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삼위일체가 드러나는 사실을 놓고 기뻐해야 한다. 삼위일체와 관련한 이런 접근법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도 분명하다. 사도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금만 고민하고 성경을 썼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해 아주 쉬운 답 또는 아주 확실한 비유를 하나 건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경우 우리는 성경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모든 것을 만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인적인 실체를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고맙게도 우리는 이제 삼위일체를 교리가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바라본다. 그럼으로 우리는 단지 몇 페이지가 아닌 성경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보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원제: Why Don’t the New Testament Authors Explain the Tri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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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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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
by Matt Smethurst
2020-11-25
오늘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기도를 하려고 했다. 차에 혼자 있었으니까 기도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무지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산만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무기력한 영혼의 구름은 감사하게도 금방 걷혔다. 나는 거리를 달리면서 어느새 나의 왕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항상 찬양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분의 존재를 느끼면서 말이다. 내가 오늘 아침 그랬던 것처럼 혹시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 그런 느낌을 단숨에 되돌리는 비결이 있다.아, 정말로 단숨에 마음을 바꾸는 비결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도 그걸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결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더 복잡하다.운전하고 가던 길에서 뭔가 마술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게 전혀 아니다. 커피집으로 가서 앉아있는 내내,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영적으로 멍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오늘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와 싸운 것도 아니고 집에서나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오늘과 같은 이런 느낌이 충격적일 정도로 드물게 일어나면야 좋겠지만, 이런 기분은 화요일이면 으레 겪고 있어서 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든다.주님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질 때, 그게 하루든 몇 달이든 또는 몇 년이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술과 같은 처방은 없다. 단지 하나님이 실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냥 관념 또는 개념으로만 느껴질 때, 그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1. 찾으라기도하겠다는 나약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어야만 할까? 나는 계속 기도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는 바로 그때야말로 더 간절히 기도하려고 발버둥 칠 때이다. 만약에 아무 능력도 없는 관념의 신을 섬긴다면, 계속 기도하라는 제안이 무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애가 3장 31-33절의 약속을 살펴보라.“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본심이 아니다”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건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다른 번역을 살펴보자.“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새번역)“주는 사람을 고생시키고 근심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현대인의 성경)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잔혹한 우주적 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결코 고통당하는 당신을 보면서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분께 부르짖으라. 기도가 천정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또 당신을 사랑하신다.2. 점검하라자복하지 않은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경고한다. 지금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진다면 자신을 점검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놓고 반항하는 어떤 부분이 당신 삶 속에 있는 건 아닌가? 어떤 숨겨진 죄를 계속해서 변명으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는 단지 천국에서 주는 주차위반 딱지가 아니다. 죄는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모욕이다. 그렇기에 불순종은 언제나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성경은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거룩하신 주님은 놀랍게도 자비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고 또한 회개함으로 겸손해진 자녀를 품어주시길 좋아한다. 요한일서 1장 5-10절을 마지막으로 묵상한 게 언제인가? 그 구절을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라. 빛 가운데로 드러내야 할 어둠이 행여 당신 속에 존재하는 건 아닌가? 이런 질문은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사실상 자유를 위한 것이다. 어둠은 죄가 자라나고 믿는 자들이 황폐해지는 곳이다. 그와 반대로 빛은 죄가 그 위력을 잃고 믿는 자들이 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자가 검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성경적 공동체의 빛으로 들어가라. 세상의 빛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에게 더 이상 고립된 어둠은 적합하지 않다(요 8:12). 그러므로 다른 빛의 자녀들과 교제하라(요 12:36; 엡 5:8; 빌 2:15). 건강한 교회에 몸을 담그고 목회자들의 감독, 다른 지체들의 보살핌 및 상호 책임에 삶을 복종시키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싶은가?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까이하라.3. 주목하라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묵상하는 것이다.자격이 없는 인간을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감수하셨는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외곽의 작은 언덕에서 그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다. 로마의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메웠다.그러므로 사탄이 절망감을 주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거나 버리셨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갈보리가 메꾼 영원한 틈새를 묵상하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있다. 종종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의 느낌은 진실이 아니다. 당신을 가까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며 피를 쏟으신 그 절정의 장소를 주목하라. 안아주심나는 이 글을 다소 부끄러운 나의 고백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면서 종종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더 슬픈 이유로 인해 그런 느낌을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엄청난 고난이 밀려올 때면 그 고난은 삶에 혼란을 일으키고 그 여파로 반갑지 않은 질문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기기 마련이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가 생각난다. 그녀가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로 마비된 지 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휠체어에 앉아서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그는 나를 고치는 대신 안아주기로 하셨습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의 안아주심은 더 따스합니다.”당신의 상황이 사소하게 느껴지든 또는 압도적으로 느껴지든 간에, 당신에게 안아주심의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믿는 모든 자여,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코 잊으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 원제: What to Do When God Seems Far A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하나님의임재
회개
기도
용서
예레미야애가
공동체
조니에릭슨타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별력’
by 이승구
2020-11-24
온 세상을 돌아보거나 심지어 교회와 교계를 돌아보아도 도처에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 문제를 정확히 살펴 내는 “분별력”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상한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별력”에 대해 살펴보며 온 세상이 문제이지만 먼저 교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복잡한 교계에 필요한 영적 분별력제일 안타까운 일은 교회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타락 이후 이 세상은 항상 문제투성이이지만 그것이 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특별 은총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 의존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상적이라고 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우리들도 사실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지 않고,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가 이 땅 가운데서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교회 안에는 늘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있으며, 또 참 성도라고 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따라서 어거스틴 이래로 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는 “복합적 공동체”(mixed community)라고 하여 왔고,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화되어[단정적 성화, definitive sanctification] 있으나, 아직 아닌 상황에 있어서 우리는 동시에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라면 적어도 교회는 항상 회개하면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고쳐서 항상 개혁해 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와 교계가 이런 모습을 잘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오늘날의 여러 모습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더구나 개개인으로서는 개선의 가능성을 드러내지만 집단화되면 도무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은 죄악이 개인적 수준을 넘어 가면 더 심각해져 간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개개인도 심각한 문제이고, 그 개인들이 합하여 있는 집단들은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도적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대한기독교서회, 2005)에서 사람은 개인으로보다는 한 집단의 일원일 때 죄를 범하기 더 쉽다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을 엄격히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개인적으로도 비도덕적이고 심각한 죄와 부패성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음을 먼저 분명히 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아주 대표적인 예로 (엄격히 말하면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의 하나로) 개개인이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찾게 되는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참으로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단을 피해 나왔더니 또 다른 이단 집단에 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건전한 교회를 만났다 해도 또 번복해서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어떤 종교적 집단이 어떤 결정을 할 때, 얼마나 이상한 결정을 하는 것이 많은지, 특히 그 종교적 조직이 비대한 경우에는 그 비대한 조직 내에서 개개인들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우리들은 곳곳에서 발견한다.그러므로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도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분별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요한의 다음 같은 권면을 들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이처럼 우리들도 성령님의 특별은총 안에서 참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떤 정황에서든지 “정신없게” 되면 대개 일정한 방향으로 치닫게 되니, 그것이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아무 생각이 없든지, 너무 바빠서 어떤 것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행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을 행할 때 우리들은 “정신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고후 11:23)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은 이런 모든 “정신없음”이 우리에게서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정신을 차려서 모든 일에 직면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를 “경성하여”(히 13:17) 또는 “깨어 있어”(마 24:42; 25:13; 막 13:33; 눅 21:36; 고전 15:34; 16:13; 엡 6:18; 골 4:2; 살전 5:6; 벧전 5:8)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매순간 참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경성하여 사는 것일까? 첫째로, 모든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판단의 기준이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어야 한다. 다른 것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이다. 특히 애매한 경우가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행하던 전통이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실제로 중요시 하지 않거나 성경을 읽고 생각해도 바르게 해석하지 않는 것은 결국 바르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장하고 나가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런 잘못된 모습들을 많이 보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계속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sel of God, 행 20:27)를 알아 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바르게 해석된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둘째로, 그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자신의 구체적 정황에 적용하는 일에서 가장 주요한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모든 정황에서 성령님을 의존해 성경의 바른 뜻을 깨닫고 적용해 가야 한다. 누가 가장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는 지는 바로 이런 시금석(criteria)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 과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바르게 이해된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따라 가는가? (2) 그렇게 하고 실천해 갈 때에 과연 성령님을 따라 가는가? (성령님을 따르는 인격적 모습이 과연 나타나는가? 그 삶의 열매가 성경과 성령님을 따름을 잘 드러내어 이 땅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잘 드러내는데 기여 하는가?)세상 문제에 대해서도 영적 분별력이 작용되어야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교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뿐만 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영적 “분별력”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들은 이 세상 속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 세상은 항상 아주 복잡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헤맬 때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주 명확한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방향을 향해 나가도록 부름 받고 있다.물론 이 세상은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 성령님께 의존해서 나아가려는 방향을 따르지 않고, 항상 그와 반대 방향으로 나가 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복잡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는 곳이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의 빛에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때때로 그것을 놓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도 자기 욕심에 따라 나아갈 때 이 세상과 같이 암중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참으로 정신을 차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적용해 주시기를 간구하면,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제일 가까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은 문제들도 있기에 성경의 원칙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바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결국 하나님의 뜻에 좀 더 가까운 길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며 행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복잡한 정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려서 성령님께서 밝혀 주시는 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가려고 해야 할 것이다.이 세상 사람들도 “일반 은총적 분별력”을 가지도록 기도하고 유도해야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이런 분별력을 가지면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 사람들도 결국에는 복음의 빛 안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빛으로 제대로 파악하고 그 길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복음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 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 이전 상황에서의 일도 준비해야 한다.첫째로, 이 세상이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되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그리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서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과 눈으로 이 세상이 각기 소견에 옳다고 하는 대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자기 길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성경의 기준이 없으면 우리는 전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의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우리의 문제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세상이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길로 나가는 것은 타락한 상황에서 그저 지난한 몸짓을 하는 것임을 알기에 참으로 불쌍히 여기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로 제대로 돌이키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 세상의 죄에 대해서 같이 안타까워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둘째로, 그렇지만 아직 복음에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안에도 일반 은총 가운데서 상대적인 분별력이 작용되어 이 세상이 그래도 “상대적으로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에 저항하지만, 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일반은총이 작용하여 세상에 “상대적인 선”(relative goodness)이 있고, “시민적인 선”(civil goodness)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상대적으로는 정직하고, 공정하고 바른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적인 선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말뿐 아니라 참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판별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러려면 이 세상 안에도 일반 은총에 의해, 상대적으로 더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일반은총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성경의 빛 안에서, 성령님께 순종해야 하는 특별은총적인 영적 분별력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옳은 것을 파악하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런 일반은총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그래도 “생명을 위한 운동”(pro-life movement)을 할 수 있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운동, 건전한 사회를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이런 상대적 분별력이 있기를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나가면서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다. 그 복잡성 때문에 모든 것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것이 이 세상이 타락한 세상임을 잘 드러내 준다. 아마도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각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가장 복잡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당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구약 계시가 그쳐지고 신약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1000년 기가 마쳐지고 다음 천년이 시작될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각 시대의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문제투성이의 복잡한 세상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기가 가장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처럼 말이다.이런 복잡한 시기에 참으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모든 정황 속에서 잘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주신 계시의 뜻을 잘 파악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의 삶에 그 가르침을 잘 적용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문화
세계관
분별력
공동체
단정적성화
점진적성화
라인홀드니버
오직성경
일반은총
이웃 사랑, 선택이 아니다
by Will Anderson
2020-11-23
이웃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웃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웃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끔찍한 이웃조차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명령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하지만 … [여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적어보자]. 고대 힐렐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웃이 내 이웃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서류를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 해결 없이 불만만 쌓이다 보면 어느새 이웃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네, 주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복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개가 새벽 2시만 되면 어김없이 짖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는 그 이웃을 아예 없는 셈 치고 살았습니다.”기독교인이라면 이웃이 얼마나 사랑할 만한지,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또 도덕적으로 얼마나 괜찮은지를 이웃 사랑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떤 차이든지 간에 복음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명확하다. 뒤로 물러서는 대신 한 발 더 가까이 가라고 말한다. 로사리오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이렇게 말했다.“한 가지 옵션은 벽을 더 높이 세우고, 우리 집이 우리를 지키는 성이라고 더 격렬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세상은 조만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까 최대한 집안에 틀어박혀서 우리를 세상과 구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성이 된 우리 집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는 항상 접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나름대로 이 세상과 전쟁을 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결코 어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는 영적인 전쟁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떠올리기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란다(시139:23–24; 약 1:22–25).1. 배려심이 없는 이웃때때로 무례한 이웃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시끄러운 음악, 엉터리 주차, 아이들이 있는 옆에서 하는 흡연, 잔디에서 변을 보는 애완견, 버릇없는 자녀 방치, 극단적인 구호를 적은 정치 포스터 또는 스티커를 붙이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다.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면 그냥 그들과의 관계를 버리라고 말한다. 반대로, 예수님의 길은 기꺼이 죄를 용서하고(요 8:1-11), 순결을 본받으며(벧전 2:12), 죄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요 4:1-42).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형 집행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소심함은 사라지게 된다. 실로 엄청난 죄를 짓고도 매일 매일 용서받는 죄인인 주제에(딤전 1:15), 어떻게 감히 우리가 완고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엡 4:32; 마 18:21-35)?2. 이웃 사랑은 내 사역의 핵심이 아니라는 이유사역 때문에 많이 바쁠 수도 있다. 그래서 집에 왔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또 다른 관계의 연장이 아니라 휴식일 수도 있다.가정은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이 행하신 사람과 장소의 현명한 배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지금 그곳에 당신을 두셨다(행 17:26). 그리고 당신 곁에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기에 우리 곁에 누가 사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사역의 원천이 된다.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은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웃차이는 관계를 갈라놓는다. 사람들은 종교, 배경, 생활습관, 취미, 성격, 인종, 정치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 대화가 잘 통하고 안정되며 이해받는 느낌을 받는다.많은 사람이 차이(differences)를 근거로 이웃 회피를 정당화하지만, 서로 간에 건널 수 없는 양립 불가(incompatibility)라는 틈(chasm)을 메우려는 시도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이 가진 불편함, 교만 그리고 두려움이다. 오로지 친숙한 사람들하고만 모이는 경우, 우리는 외모 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기회 자체를 내버리게 된다. 예수님은 종교 엘리트(눅 14:1)뿐 아니라 문제 많은 죄인들(막 2:15)과도 함께 식사하면서 당시 만연하던 ‘동질성 우선(homogeneous)’이라는 사회적 규칙을 깨셨다. 그의 제자 중에는 셀롯파(열심당, 전통적으로 로마에 대해 폭력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리(전통적으로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당신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의미한다. 4.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이웃현대 사회에서 사생활은 불가침의 권리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이제 상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 방해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개인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웃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 개인이나 가족에게 접근할 때에는 용기를 가지고 민감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이웃에게 쿠키를 전달한 후 아무런 답이 없다거나 또는 저녁 식사 초대에 답이 없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실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내를 가져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작지만 소중한 접근 기회를 잡도록 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초대하라.5. 적대적인 이웃최근 동네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몇몇 이웃들이 모여서 심정을 토로했다. 행여 그들이 다시 주거 지역에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고 감정 섞인 대응을 준비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이웃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들의 안전에 위협을 가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장 잘 알려졌지만 가장 무시되는 명령이기도 하다. “원수”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더는 지혜롭지 않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 대답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진지하고 깊은 기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에 이웃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하여 고소장을 내거나,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최악의 경우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이웃을 위한 기도와 자기 보호를 위한 행동 모두를 생각해야 한다.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이 이웃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멈추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그들이 악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골 1:13).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말처럼,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이웃들이라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이 누구이든 간에 내가 그들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끄셨다. 나는 그들 위에 있지 않다. 나는 그들 곁에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역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함께 겪으면서 동행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심판하라고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빛으로 겸손하고 참을성 있게, 또 내가 가진 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능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삶이 영원을 향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을 더 사랑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씨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마 28:20),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과 지혜를 공급하신다. 원제: Loving Difficult Neighbors Isn’t Option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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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윌라드
복음
취소문화
양립불가
종교엘리트
마취된 세상에서 깨어있다는 것의 의미
by Justin Dillehay
2020-11-22
졸음과 술 취함을 함께 묶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둘을 도덕적으로 동등한 대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5장 6절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라고 말했다.바울이 지금 여기서 집단 불면증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 방식, 졸음과 무감각함으로 상징되는 죄와 깨어있음과 금주로 상징되는 의를 사용하고 있다. 낮과 밤, 그리고 빛과 어둠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어두움으로 상징되는 악한 시대에 순응하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상상력이 던지는 강력한 호소를 접하게 된다(롬 12:1-2).이 구절의 배경은 예수님이 적들에게 갑작스런 멸망을 가져다줄 그의 재림날이다(살전 4:13-5:3). 바울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서 그날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깨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바울이 쓴 또 다른 은유를 살펴보자. “깨어서 술 취하지 말라.” 도덕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또 자는 것과 술 취한 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 번째로 이 두 가지 일은 다 밤에 일어난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살전 5:7). 두 번째로 자거나 취할 때 우리는 방어에 허술하게 되어 적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누군가가 당신의 지갑을 훔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때는 당신이 자거나 술 취했을 때이다. 방비가 가장 허술한 그 때 말이다. 그러나 깨어있고 또 정신이 말짱하다면 당신은 언제나 경계심을 갖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당신은 정상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언제라도 행동할 준비를 하고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으라고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꿈속에서처럼 또는 취했을 때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그는 단지 마약이나 폭음을 피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그의 경고에 확실히 포함되어 있다(롬 13:13; 엡 5:18). 실수하면 안 된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할 때 우리의 이성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우리는 마치 총을 든 사냥꾼 마귀 앞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는 오리 꼴이 되는 수치스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은 대마초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세속화라는 죽음과도 같은 잠이 세상은 영적인 마약으로 넘쳐난다. 사탄은 그런 것들을 통해 이 세상을 오염시켰다. 현존하는 악한 시대의 공기는 우리가 죽거나 화물열차와 같이 급박하게 임할 주님의 날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혼을 혼미하게 하는 영적 미로 속에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할 만큼 취하도록 만든다(살전 5:3). 이게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잠드는 것을 구식 용어로 말하자면 “세속화”에 빠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경고한 것이다(요일 2:15-17).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을 대리 구원자로 바꾸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다 당신이 하는 거야’,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자격이 있어’와 같이 대중문화가 주입하는 잘못된 생각을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현실을 잊게 만드는 사탄의 방법이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거짓된 생각으로 채우거나 또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길 원한다. C. S. 루이스(C. S. Lewis)의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임무는 그가 (보고 만지고 또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즉시) 발생하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그런 것들만을 “진짜 인생”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 “진짜”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러분 중 일부가 지금 말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게 가르치는 게 우리 악마의 역할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다. “심각한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깨어나지 않고 계속 잠든 상태로 있을 테니까.”영원한 날을 위해서 깨어나기‘잠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언젠가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잠들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이슬과도 같고 진짜로 중요한 건 영원한 삶인데, 그 삶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딤전 6:19).‘잠들었다는 것’은 당신을 이 우주의 중심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빌 2:3).‘잠들었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당신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을 받아주는 인내심 많은 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차마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시고, 당신은 차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당신의 최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잠들었다는 것’은 주님의 날이 당신에게는 도적처럼 임한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지는 몰라도 그 날이 당신에게 가장 기쁜 축제의 날이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악한 세상은 마치 길고 긴 밤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길어도 이 밤은 지나가고 반드시 영원한 낮으로 바뀔 것이다(계 21:25).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래는 밝다. 심지어 지금에도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샘 올베리(Sam Allberry)는 성화(sanctification)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문화적 충격을 얼마나 줄이는가의 문제’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쓴 이 은유를 조금 수정해 표현하자면, 성화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다가올 시대가 주는 눈부심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후 3:18). 그 날이 오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롬 13:12).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Stay Awake in a World of Spiritual Tranquilizers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성화
깨어남
영적나태
말세
C.S.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편지
샘올베리
작은 교회 목회를 고려해 보라
by Tim Keller
2020-11-21
젊은 목사나 신학생들은 초기 목회사역에서 목회자로서 지혜를 얻기 위해 어떤 경험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 내게 종종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내가 ‘작은 시골 교회 목회자,’ 다시 말하면, 교회의 거의 모든 것들이 도시와는 다른 상황인 작은 교회를 홀로 담당해야 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고려해 보라고 하면 놀라곤 한다.‘고려하다’라는 단어를 잠간 언급해 보자면, 나는 모든 목회자가 이 길을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내게는 큰 경험이었다.행함으로 배우기젊은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첫 부임지로 그들에게 멘토가 되어 줄 수 있으며, 나이가 지긋하고 성숙한 목회자가 있는 큰 교회의 부교역자로 가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이 모델에는 여러 가지 한계점이 있다. 젊은 목회자들에게 실제로 하지 않는 일에 대해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없다. 큰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이 ①담임 목사의 짐을 지고 있지 않으며, ②당회를 인도하지 않고, ③목회에 필요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며, ④상담, 목양, 교육, 설교 사역 전체를 모두 다 하지는 않는다.목사 한 명이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하는 작은 교회에서는, 오직 당신만 노인들을 심방하고,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을 집도해야 하며, 죽어가고 있는 교인의 임종을 지켜보아야 하고, 모든 결혼 상담을 하며, 치리를 하고, 교회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고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남성들을 위한 수련회, 여성들을 위한 수련회, 청년들을 위한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고, 모든 성경공부 교재를 써야 하며, 종종 주일학교 커리큘럼도 짜야 하고, 소그룹 리더들을 훈련시켜야 하며, 양로원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도 전해야 하고, 교회의 구제와 복음 전도 그리고 새신자를 환영하는 집사들과 함께 일해야 하며, 봉사자들을 훈련시켜 이 모든 과제들을 조금 나누어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관계적이거나 재정적인 위기를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멘토링이 다양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일을 직접 수행하면서 배운 것들을 실제적으로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어떤 이들은 내가 도시 목회를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놀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복음적 교회가 도시를 간과해왔다고 굳게 믿는다. 크리스천과 기독교 리더들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도시 지역에서 받는 무시는 작은 도시와 작은 교회에서 받는 업신여기는 태도와 비교하여도 조금도 덜하지 않다. 젊은 목회자들은 작은 교회에 갈 때, 그들이 큰 교회에서 배울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목회 과제와 기술에 대한 전 영역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 말아야 한다. 작은 공동체에 갈 때, 그 목적이 오직 경력을 쌓기 위한 것이라면 가지 말아야 한다. 왜? 주변 사람들의 삶에 투자하는 것 보다 더 큰 것만 열망하면, 초기 목회 경험은 당신이 ‘큰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뿌리내리기어느 곳에서 섬기든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사역을 수행하라.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갈 기회를 주시면 좋다. 하지만 그곳을 ‘실제 목회’를 위한 훈련 기지로 여기며 가지는 말라. 나는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9년을 사역하면서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이 경험은 뉴욕시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나를 잘 훈련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지 큰 교회가 만든 전문가가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모든 이들이 같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가 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알맞을 수 있다.원제: The Country Pars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작은교회
시골교회목회자
초기목회경험
멘토링
큰교회
팀켈러
복음적교회
미리 생각해보는 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by David Mathis
2020-11-20
조만간 가을 추위가 겨울 추위로 넘어갈 것이다. 화려한 황금빛 들녘은 곧 하얀 눈으로 뒤덮일 것이다. 할로윈과 추수 감사절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앞으로 계절이 어떻게 바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크리스마스가 오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사랑하는 시간, 잊었던 사랑하는 감정이 되살아나는 마법과 같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그건 2020년이 되기 전까지 이야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가 지금 전 지구를 휩쓰는 전염병 시대에도 가능할까? 올해도 과거와 같은 크리스마스일까? 전염병만 아니라면 너무도 아름답기만 할 이 시간이 올해도 가능할까? 거리를 두는 크리스마스매일 매일이 새로운 도전을 가져다주지만 우리는 바뀌는 계절 가운데에서 익숙한 리듬을 느끼며 그 속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가장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인생이 처해있을 때에 조차도 우리는 봄이 되면 눈이 녹고, 여름에는 태양이 가장 뜨겁게 빛나고, 또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며, 겨울이면 다시 눈발이 휘날릴 것이라는 사실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2020년 크리스마스는 누구라도 평생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수십 년간 우리는 익숙한 패턴에 젖어있었다. 물론 종종 황당한 기대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이해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것을 만나리라고,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크리스마스의 중심은 친구와 가족이 얼굴을 맞대고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 이사야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까? 정작 하나님은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는데 말이다. 불확실, 예측 불가전쟁과 같은 비극의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었던 우리들에게 2020년 크리스마스는 가장 특이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크리스마스는 결코 우리가 매년 12월에 기대했던 그날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애초에 그런 식으로 전개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기대와 위로에 맞춰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혼이 깨어난 우리가 훨씬 더 높은 수준에 있는 하나님의 방식과 생각을 깨닫는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마도 이번 크리스마스와 강림절은 비록 많이 늦었지만 우리로 하여금 오래 전 이 땅에 찾아왔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는지를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줄 것이다. 아마도 올해 2020년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이상적인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닌, 오래 전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놀라운 우여곡절과 더 조화를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는지 기억하라. 위대한 왕인 다윗과 그의 왕좌를 영원히 세울 통치자가 다윗의 계보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후 무려 천년이 지났다. 이사야가 임마누엘, 아이를 밴 처녀, 어깨에 정사를 짊어진 아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7:14; 9:6)라고 예언한 지 7세기가 흘렀다. 말라기와 히브리어 정경이 끝난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400년을 더 기다렸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약속한 메시아가 그토록 수 세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역사의 첫 조각을 움직이셨을 때, 아무도 나사렛을 추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사렛? 이스라엘 밖에서는 나사렛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그렇게 구석진 산간에서 좋은 것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훨씬 더 적었다. 갈릴리조차도 예루살렘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나사렛이라고?그리고 남자를 모르는 처녀의 몸을 통해서 오신다고? 이사야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고대인들도 이런 사실만은 오늘날 우리와 다를 것 없이 똑똑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탄생할 정확한 시간에 마리아와 요셉을 다윗의 마을로 데려와 미가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미 5:2).그들이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 거룩한 아기가 쉴 장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눅 2:7). 예수가 누구인가? 다윗왕의 후손이 아닌가? 궁전에 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리고 부유한 부모를 상상할 때, 차마 어린 양(눅 2:24)은 말할 것도 없고 비둘기도 사지 못할 만큼(레 12:8) 가난한 부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기인데 위대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태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천사가 방문한 건 초라한 목자들이었고, 천사가 그들을 인도한 곳은 마구간 구유였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멀리서 온 이방인 학자들이 도착했다. 심지어 베들레헴에서 고작 5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학자들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말이다.당신의 영혼을 꿰뚫는메시아의 가족이 유대를 떠나 이집트로 도망쳐야 했을 때 하나님은 또 얼마나 우리의 기대를 뒤집으셨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 노예의 태에서 나왔다. 이집트에서 그의 아들을 불러내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을 오히려 이집트로 부르셔서 요셉을 알지 못했던 바로와 같은 악마적인 폭군을 피하도록 하셨다. 마침내 성전에 있는 시므온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날카로운 말이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언급 정도로 쉽게 간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말이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을 뿐 아니라, 그 메시아는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사건은 그 메시아가 죽음을, 그것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시므온은 마리아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당신의 영혼도 예외가 아니다. “내 영혼이 찔릴 거라고?” 아마도 그녀는 물었을 것이다. “잠깐, 뭐라고? 그런데 메시아가 찔릴 거라고?”첫 진짜 크리스마스인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던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졌던, 세계를 변화시킨 그 놀라운 힘에 익숙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아마도 우리는 연례 일과와 더불어 12월의 교회 이야기,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하 행사를 즐기면서 잠드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졌나 보다. 하지만 2020년의 크리스마스는 다를 것이다. 정말로 다를까? 예상치 못한 2020년 크리스마스와 강림절 서막은 우리에게 환멸보다는 더 큰 희망을 준다. 크리스마스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다시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기대하는 뻔한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올해 하나님은 평생에 걸쳐 축적된 향수와 기대로 범벅이 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는 “당신의 크리스마스”를 12월의 번잡함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다. 아마도 올해 2020년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이상적인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져다준 놀라운 우여곡절과 더 조화를 이룰 것이다. 그런 크리스마스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일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과 소망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크리스마스야 말로 오래 전 진짜 크리스마스와 가장 비슷할 것이다. 원제: Have a Holly COVID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사회이슈
크리스마스
첫번째크리스마스
시므온
전염병과크리스마스
개혁적 알미니안을 한번 만나볼까?
by Jeff Robinson
2020-11-19
매트 핀슨(Matt Pinson)이 강연에서 여러 번 쓴 용어 하나가 며칠 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건 “개혁적 알미니안”이었다. 마치 점보 새우, 가열된 얼음 또는 좌파 보수주의처럼 이 말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매트 핀슨이 “개혁적 알미니안”이라고 말했을 때, 나름 훈련받은 교회 역사가로서 나는 그가 개신교 종교 개혁에서 나온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인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의 가르침을 긍정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르니미우스의 신학은 오늘날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알미니안 신학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이런 내 추측이 맞는 걸까? 나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아래 인터뷰는 내가 매트 핀슨에게 던진 질문의 결과이다. 내슈빌에 있는 웰치 대학(Welch College, 자유의지 침례교)의 총장인 핀슨은 예일대 신학 과정(Yale Divinity School)을 졸업했으며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Perspectives on Christian Worship’, ‘Four Views on Eternal Security’,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Arminian and Baptist: Explorations in a Theological Tradition’을 포함한 수많은 책의 저자 또는 편집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대 아르미니우스의 교리와 오리지널 아르미니우스의 교리 등을 대조하면서 어떻게 같은 사람이 동시에 개혁주의면서 알미니안이 될 수 있는지를 토론했다. “개혁적 알미니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점점 더 많은 알미니안이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지고 있는, 비 웨슬리적(non-Wesleyan)인 다양한 알미니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이 운동의 주류는 자유 의지 침례교 교단(Free Will Baptist denomination)에서 발견되며, 그 기원은 17세기 영국 일반 침례교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접근을 지지했던 초기 신학자 중에는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및 토마스 그랜썸(Thomas Grantham)과 같은 17세기 영국인이 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입장을 지지한 사람으로는 자유 의지 침례교 신학자인 르로이 포린스(Leroy Forlines)와 로버트 피키릴리 (Robert Picirilli)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대부분의 현대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좀 더 정통 아르미니우스 신학에 가까운 알미니안주의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포린스와 피키릴리는 토마스 오덴(Thomas Oden)과 같은 일반/자유 의지 침례교 전통을 벗어난 학자들과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가는 복음주의자는 칼빈주의-알미니안 사이의 토론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혁적 알미니안은 성경이 예정, 은총, 자유 의지에 관한 전통적인 칼빈주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이 거부하는 개혁주의의 전통 교리인 전적 타락, 형벌적 대속, 칭의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전적이 아닌) 점진적 성화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개인들에게 또 전반적인 칼빈주의-알미니안주의 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개혁적 알미니안이 가진 이런 사상의 흐름은 여러 유익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개혁주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이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별로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의 글을 좀 더 접하게 된다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도 바뀔까? 대부분의 알미니안 복음주의자들이 칼빈의 글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대부분의 칼빈주의 복음주의자들도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거의 읽지 않는다. 이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공동체에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편협함이 있는 것 같다. 기존에 고수하는 구원론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만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 구속, 성화, 기독교 세계관, 변증론과 인식론, 문화적 참여, 종말론 등과 관련하여(심지어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부분까지도) 일부 칼빈주의자들과 실로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이런 모든 공통점은 단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종종 무시되는데, 그건 내가 칼빈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나는 무조건적 선택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칼빈주의자만 이런 식인 건 아니다. 알미니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아 세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성령의 은사와 관련해선 서로 간에 아무리 다른 의견을 가지도 있더라도 같은 알미니안끼리는 서로 협력할 수 있다. 그건 칼빈주의자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 사이에서는 그런 협력이 거의 불가능하다. 달리 말해서, 여전히 칼빈주의자냐 아니면 알미니안이냐라는 편가르기는 같은 서클 안에서 복음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름하는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이야 말로 피차 상대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상대편 신학을 피력한 책을 읽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이 되는데, 이는 실로 건강하지 않은 현실이다. 아르미니우스의 글을 통해서 칼빈주의자가 만나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항상 읽고 인용하는 기존의 칼빈주의 책을 쓴 저자들과 매우 흡사한, 복음을 향한 뜨거운 심장 박동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칼빈주의자가 가진 영성 및 교리적 신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이 불가능한 전적 타락한 인간, 오로지 믿음만으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 그리스도의 대속적 형벌의 의미, 신자가 어떻게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성화되는지, 율법주의 대 율법폐기론 등등에 관해서 칼빈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신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최근 내가 쓴 책 ‘알미니안과 세례자(Arminian and Baptist)’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알미니안을 통해서 ‘있는지도 몰랐던 사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를 읽게만 된다면,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비록 그가 예정 및 그와 관련한 교리에서 좀 더 칼빈에 가깝길 바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졌던 선입관을 깨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아르미니우스를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수님이 속한 대학은 자유 의지 침례교 계통인데, 그 교단의 중요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는가?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강조한 사항에 첨부해서, 자유 의지 침례교는 교회와 관련한 교리에서 대부분의 다른 침례교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회의나 협회를 진행할 때 지역 교회 간의 상호 의존성 강화, 침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과도 성찬을 나누는 것(물론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가 의무이다), 병자에게 기름바름과 같은 보다 다양한 전례 의식,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요즘보다는 과거에 주로 더 행해졌지만) 새로 침례받은 신자에게 기존 신자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 등등을 한다. 하지만 칼빈주의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의식이 비록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 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의식은 개신교, 가톨릭,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의 교단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웨슬리 계통 알미니안 신학과 개혁적 알미니안 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개혁적 알미니안 구원론은 보다 더 광범위하게 개혁주의 범주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웨슬리 및 성결 모델(Wesleyan and Holiness models)과는 다르다. 성결 운동에서 발전한 웨슬리식 알미니안 신학과는 달리,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의 원죄와 급진적 타락을 이겨낼 수 있다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입장은 속죄에 대한 철저한 개혁주의 및 형벌 대속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또 동시에 수동적인 순종이 칭의를 통해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알미니안인들은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가 지향하는 완전주의, 완전 성화, 그리고 위기 경험 지향이라는 점에서 많이 다르다. 그들은 또한 기독교인들이 오로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내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에서 배도할 수도 있고, 그 결과 구원을 잃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지만, 이런 배도도 오로지 믿음을 저버릴 때에만 발생한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배도에 관한 개혁적 알미니안의 개념은 개개인이 개별적인 죄를 지음으로써 은혜에서 반복적으로 떨어질 수 있고, 또 동시에 회개를 통해 반복적으로 은혜의 상태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웨슬리적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개혁적 알미니안주의가 현재의 알미니안-칼빈주의 사이의 대화(또는 대화의 부족)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개혁적 알미니안주의는 속죄, 칭의, 성화, 영성의 본질에 대한 개혁주의 가르침이 가진 은혜 지향적 입장을 지지하는 동시에, 거기에 신성한 구원의 은혜에 저항하는 예정과 (개종 전후의) 자유에 대한 알미니안의 입장을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또한 은혜를 붙잡고 있는 독특한 알미니안주의를 제공한다. 훨씬 대중적인 수준의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주의가 정작 아르미니우스보다 오히려 웨슬리나 성결 운동의 믿음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지? 불행하게도 그렇다. 가장 인기있는 알미니안주의는 사실상 웨슬리보다 피니(Finney)에 더 가까운 준 펠라기안(semi-Pelagian)이다. 이제 웨슬리는 오히려 우리보다도 더 개혁주의 신학에서 멀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발전한 피니와 성결 운동만큼 멀어진 건 아니다. 웨슬리는 완전한 형벌 대속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신자들이 회개를 하지 않을 때 반복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화와 영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보다 더 위기 경험과 완전성에 대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웨슬리는 율법폐기론에 반발했기 때문에 율법주의로 방향이 바뀐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후기의 피니보다는 훨씬 더 개혁주의자와 비슷했다. 특히 원죄에 대한 그의 신학은 그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펠라기안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다. 칼빈이 사랑하고 즐겨 불렀던 복음으로 풍부한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를 생각할 때, 그 어떤 칼빈주의자라고 해도 “나는 사실 칼빈주의자와 별반 다른 게 없다”라고 말한 웨슬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웨슬리의 신학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알미니안주의 속에 숨은 개혁주의 요소를 찾아내는 나의 연구 경향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내가 웨슬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을 사랑하는 만큼 웨슬리를 사랑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담긴 큰 액자 두 개를 사무실에 나란히 걸어놓을 생각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웨슬리의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칼빈과 웨슬리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고쳐야 할 잘못을 찾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도 틀릴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큰 경건함, 더 뜨거운 불, 더 넘치는 은혜, 더 불타는 사랑, 더 강렬한 이타심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칼빈과 웨슬리의 결점을 찾고 비판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 내 경우를 말하자면, 태양 속의 반점을 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게 여전히 태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태양 앞에서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초라한 촛불이라는 사실에 흐느낄 뿐입니다.” 교수님은 칼빈주의적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한 동시대 및 고전 작가와 신학자의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 책을 좋아하는가? 나는 칼빈, 오웬(Owen), 번연(Bunyan), 에드워즈(Edwards), 호지(Hodge), 스펄전(Spurgeon), 카이퍼(Kuyper)와 같은 역사적인 칼빈주의자들의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JI 패커(JI Packer), 칼 헨러(Carl FH Henry),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 러셀 무어(Russell Moore),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마크 데버(Mark Dever), 해리 리더(Harry Reeder), 데이비드 도커리(David Dockery), 리곤 던컨(Ligon Duncan), 알 몰러(Al Mohler), 로날드 내쉬(Ronald Nash), 칼 트루먼(Carl Trueman), 나단 핀(Nathan Finn),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나는 현재 그의 책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을 읽고 있다), 필립 젠슨(Phillip Jensen) … 등등 어디에서 멈춰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현대 칼빈주의자의 책을 읽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역사적인 개신교 정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속죄받고 성화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혁적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복음주의적 영성을 찬양하며, 오늘날도 교회에서 은혜만을 통한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개혁주의 인식론/변증법을 가르치고, 잘 짜여진 기독교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참여하는 문화의 중요성을 믿을 뿐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가 주신 큰 사명에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개혁 교회 목사들이 읽어야 할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누가 있을까?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알미니안 신학과 단지 그 신학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자들에 향해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개혁주의 목사들이 읽어야 할 건실한 알미니안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명만을 인용하자면, 르로이 포린스, 로버트 피키릴리, 스티븐 애쉬비(Stephen Ashby, 개혁적 알미니안)을 들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존하는 웨슬리안 작가인 아지츠 페르난도(Ajith Fernando), 토마스 오딘(Thomas Oden), 로버트 콜먼(Robert Coleman),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ent)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저자들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대 작가들 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 자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알미니안 저자들의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불공정한 풍자 만화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원제: Meet a Reformed Armini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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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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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스펄전
존칼빈
알미니즘
준펠라기안
불변의 안식일 원칙이 영혼을 살린다
by Justin Huffman
2020-11-18
토론토에 있는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은 우리 가족은 작년에 이사를 갔다. 나는 첫 예닐곱 달은 교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대신 주로 교인들을 이야기를 듣겠다고 말했다. 장로, 직원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와 함께 심방할 때 마다 나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영혼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고 느낍니까, 아니면 점점 더 말라간다고 느낍니까?”거의 100%의 교인이 “말라가요”라고 대답했다. 스스로를 혹사하면서까지 너무 열심히 사역하기혹시 교회나 가족이나 당신 자신이 반복적으로 너무도 지나치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닌가? “그래도 우리 교회 정도면 이런 건 해야 해.” “우리 애들이 그래도 이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어야지.” 또는 “이걸 완수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쉴 수가 없어.”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왜 모든 복음 사역이 우리의 노력과 스케줄에 달린 것처럼 살고 있을까? 몇 개의 스포츠와 음악 레슨을 받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밤에는 소그룹 모임에 봉사자 저녁 식사, 그리고 새 신자 커피 봉사 등등. 물론 그 어떤 일도 그 자체로서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의무들이 차고 넘쳐날 때 영혼이 지치고 고갈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이런 현실이 지금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막 2:27)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료한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정기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안식일을 지켜야한다는 원칙은 비록 오늘날 그 원칙과 정반대로 사는 교인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신성하고도 탁월한 계시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담이 혼자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와를 창조하신 것처럼, 우리가 고갈되고 지친 가운데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 문제는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이 원칙을 따르는 데에 우리가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변치않는 원칙칠 일로 이뤄진 일주일은 달력 속 다른 절기와 마찬가지로 자연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로지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로 주어진 원칙이다. 십계명보다도 앞서 나온 이 원칙은 그럼에도 네 번째 계명에도 등장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신약 시대 신자들이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구약 시대 신자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하게 안식일의 원칙이 신약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안식일을 직접 지키심으로 그 가치를 확인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떠받치는 원칙,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지정하신 결혼의 원칙처럼, 사실상 율법 그 자체보다 더 우선시된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셨다.우리는 더 이상 구약에서 했던 것처럼 동물을 희생하거나 돼지고기를 금지하지 않는다. 또한 특별한 절기 의식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신자들은 십계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그리스도를 닮으려는 것은 안식일 준수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을 담은 창조 명령(ordinances)을 따르기 위한 노력임을 의미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구약 시대 이후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단 토요일이 아닌 한 주간의 첫 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요 20:19, 행 20:7, 고전 16:1-2) 그날을 “주의 날”(계 1:10)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안식일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내는 이다른 율법들처럼 안식일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을 만날 수 있다. 달리 말해 안식일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향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과 위대한 구원을 만나게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그 어떤 휴가도,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또는 소셜 미디어로의 도피도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영혼을 위한 유일하고도 참되며 사라지지 않는 안식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 그가 주시는 은혜와 가르침에 순종할 때에만 찾을 수 있다. 데인 오틀런드(Dane Ortlund)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안식일이라는 그림자가 가리고 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그림자를 걷어내신 분이다. 그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미친 듯 뛰는 심장박동 음이 차분하게 진정되도록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그 어떤 외부 환경도 그가 주시는 안식을 위협할 수 없다.” 안식의 확인지나치게 바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우리 스스로 공급하려고 노력하는 게 된다. 아예 전능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식일에 누리는 휴식은 내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기적이고 시기적절하게 상기하도록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 세계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일종의 강제적인 안식일이 찾아왔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에 따른 격리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열광적이고 빠르게 추구하던 속도를 늦추고 우리가 그리스도라 믿고 있는 그분을 더 의지하는 방식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일정을 잡거나 전략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나 스스로를 하나님 속으로 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하는 실생활의 일상적인 구원 속으로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쁜 게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 자신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모든 인간의 영혼이 부흥할 수 있는 원칙을 계시하셨다. 안식일 원칙은 단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규칙이 아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회이다. 우리는 이런 안식일 원칙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오늘날 안식일 지키기그럼 오늘날 안식일의 원칙은 어떤 모습일까?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보다는 “지켜라”라는 안식일의 원칙은 다름 아니라 안식일의 목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이다. 특별한 팬케이크를 만들고 또 가족과 함께 주일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신뢰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하는 책을 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의 다양한 지체와 적극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의 활동은 당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이끌어 결국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자비의 행위를 포함한다.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최소한 다른 모든 도모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신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축복을 말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 삶 속에 정기적인 안식과 재충전 그리고 예배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일요일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얼마든지 매주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정기적으로 영혼에 안식을 제공할 수 있다. 안식일이 어떤 요일이 되었든지, 지금까지 설명한 원리를 사용하여 당신과 가족이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또한 그 누구보다 당신은 안식이 필요한 존재이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간구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abbath: An Enduring Principle For the Sou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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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보호하며 교회 개척하기
by 박용기
2020-11-17
팀 켈러(Tim Keller) 목사가 리디머 교회 개척 3년 차에 겪었던 일이다. 하루는 아내 캐시가 발코니에서 혼수로 사 온 그릇들을 망치로 깨고 있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잖아요. 지금처럼 계속 일만 하면 집안이 콩가루가 될 판이란 걸 알기나 해요? 나로서는 당신을 정신 차리게 만들 방도가 없어요. … 이게 바로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이라고요”(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두란노). 많은 교회 개척자들은 모든 에너지를 교회 사역에 소진하면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경험한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관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자신을 내어 주심을 근거로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워지며, 동일한 원리가 가정에도 적용된다(엡 5:25,27). 교회 개척자들이 교회와 결혼 생활을 함께 세워나가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배우자와 잡담을 나누라 앤디 스탠리(Andy Stanley)는 교회 개척자들에게 결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은 잡담을 선택해야만 합니다.”라고 조언한다(It’s Not Personal, Brian & Amy Bloye). 배우자와 심각한 이야기보다 소소한 작은 일들이나 잡담을 나누라는 의미이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읽은 책, 본 영화 그리고 영적 주제들에 대해서 짧게라도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나눌 때 친구가 될 수 있고, 영적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둘이 아니라 하나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은 더 이상 혼자서 개별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편은 전체의 반쪽에 불과하다. 그가 하는 일에는 항상 나머지 반쪽이 참여해야 한다.”(그리스도의 결혼생활, 생명의말씀사). 결혼은 2인3각 경기와 같다.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함께 외치며 한발 한발 내딛을 때 빠르게 전진할 수 있다. 마귀는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자 분리되어 존재하도록 부추기거나 한쪽만 열심히 뛰다가 넘어지게 만든다. 끝까지 함께 하는 관계팀 켈러는 교회 개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주님은 결혼을 인간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계로 세우셨다. 만약 당신이 결혼이나 배우자를 출세 가도에 필요한 지팡이쯤으로 여겨서 2-3번째 우선순위에 놓았다면 당장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남편에게 아내는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1순위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도 하지만 떠나기도 한다. 자녀들도 장성하면 제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난다. 목회자도 언젠가는 개척한 교회를 떠나는 날을 맞이한다. 그러나 배우자는 다르다. 배우자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하는 사람으로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인간관계에서 배우자를 항상 1순위에 놓자.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자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은 그의 책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생명의말씀사)에서 배우자가 느끼는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찾아서 그 언어를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다음과 같다: ① 인정하는 말 ② 함께 하는 시간 ③ 선물 ④ 봉사 ⑤ 스킨십. 교회 개척자는 교회 사역을 위한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배우자만을 위한 것도 준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봉사를 사랑의 언어로 느끼는 아내를 위해서 군대 내무사열 준비하듯이 집안 곳곳을 정리 정돈해보자. 스킨십을 원하는 남편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준비해보자. 서로 이런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면 기쁨으로 결혼 생활을 채울 수 있다. “…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일주일에 하루 쉬자하나님은 천지 창조 사역을 쉼으로 완성하셨다. 하루 안식하신 이유는 피곤하시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교회 개척자들이 사역을 멈추고 쉼 가운데 가만히 교회를 세우시는 그리스도, 가정을 세우시는 주님을 묵상하기 원하신다(출 20, 신 5). 일주일에 하루 사역을 쉬는 것은 교회 사역에 열심이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목회는 단거리 전력 질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배우자와 함께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가서 둘 만의 대화 시간을 보내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자교회 개척자가 최선을 다해서 3년, 5년, 10년을 사역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목회자가 내가 이룬 사역과 교회 개척 결과에 의존해서 자신의 목회를 평가하게 되면 패배감과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이 누적되면 동료 목회자의 부흥 소식이 들려올 때,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하나님 왜 나에게는 그런 부흥을 허락하지 않으시나요? 왜 나만 이런 곳에서 사역하게 하시나요?” 이런 쓴 뿌리는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든다. 목회자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한 일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사역을 평가해야 한다. 예수님은 작은 능력을 갖고도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충성한 빌라델비아 교회 목회자를 칭찬하셨다(계 3:8,10). 예수님은 교회 개척자들에게 성공보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충성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배우자와 함께 바라보며 주님을 신뢰할 때 비록 작은 교회에서 적은 능력을 갖고 사역하면서도 만족감을 느끼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충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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