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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 지으신 이 세상의 경이로움
by Marshall Segal
2021-01-01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어떤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하며 깊고도 부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잠시나마 움직일 수 없었던 적이 있는가?바쁜 삶 중에 그렇게 멈추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피조계를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메시지를 계속 외면한 채 살아간다. 기적으로 가득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헤드폰을 낀 채로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동차, 스마트폰, 팟캐스트, 그리고 유튜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혹(fascination)과 경이로움(wonder) 같은 것에는 이제 관심을 주지 않고,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물려 줄 요량으로 그것들은 서랍 속 깊숙이 처박아 놓았다.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들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내면이 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숙하신 분이다. 매일 아침 태양에게 같은 일을 시키시고 매일 밤 달에게 같은 일을 명하시니 말이다. 데이지꽃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당연히 그래야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데이지꽃을 하나하나 만드시면서도 결코 싫증을 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영원히 소유하고 계신 분 같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나이가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보다 젊으신 게 아닐까? 자연에서 일어나는 반복은 단순한 재발이 아니다. 연주회에서 보는 앵콜(encore) 같은 것이다”(‘Orthodoxy,’ 58쪽).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만드신 것들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신다(창 1:31)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성인인 우리들은 시큰둥해지고, 주의가 산만해지고, 또 너무 바빠진 것 같다. 경이로움이 사라진 일상우리 일상이 얼마나 많이 인공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라. 집 안을 보면, 우리가 자는 침대부터 욕실, 식탁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동차와 사무실 그리고 책상,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TV까지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내 자동차까지 걸어가거나 복도 끝에 있는 창문까지 걷는 것 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하고 놀라운 세상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지낸다. 특히 도시 환경에서는 우리가 하루 중 접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인간의 모든 창의력과 지식은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부끄럽게 된다. ‘누가 과연 이런 나무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집 나무는 비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우리 집 앞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보면 더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해 우리 집 나무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멈춰 서서 우리 나무를 본다면, ‘정말로‘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하나님으로 가득한‘ 나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멈춰 서서 그 나무를 본다면 말이다. 숲과 나무를 그리며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계에 ‘분명히’ 편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밤하늘과 아름다운 해돋이, 파도가 치는 바다와 평화로운 초원, 퓨마와 개미탑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무시해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는 경건치 못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우리는 성경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신 다른 책들을 놓칠 수 있다. 피조계는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계의 모든 부분들을 전혀 틀림이 없고(infallible), 무오한(inerrant)하며, 충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의 창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듣는 목소리를 사랑한다면, 나무, 거북이, 폭풍, 그리고 오늘 아침 앞마당을 짝지어 걷던 오리 두 마리를 통해 들려오는 동일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출애굽기, 이사야, 마태복음과 로마서에서 읽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바다에서 그를 보고 꽃에서 그의 내음을 맡으며 꿀에서 그분을 맛보고 햇살의 따스함이나 첫 눈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피조계를 통해서도 성경에서만큼 크게 말씀하신다. 물론 피조계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 언어가 우리로 온전히 기댈 수 있을 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피조계에서 하나님을 보려면로마서 1장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광대하고 섬세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후에 우리를 그가 창조하신 피조계 속으로 보내셨다. 하지만 동시에 로마서 1장은 우리가 발견하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롬 1:17), 우리는 이 세상’만을’ 사랑하게 되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진리를 억누르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버렸던 죄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영광은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죄인들은 이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롬 1:23) 바꾸어 버렸다. 새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 새를 만드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새들의 진짜 아름다움, 진짜 노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이 본다고 착각했던 그 영광은 사실 끔찍한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실체를 오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나락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롬 1:24–25).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피조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 빛이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을 통해’ 비추어졌을 때, 동일한 빛은 해처럼 떠올라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비추기 시작한다. T. M. 모어(T. M. Moore)는 “피조계의 전적이고도 최종적인 목적을 알려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Consider the Lilies,’ 89쪽)라고 말했다. 피조계를 바라볼 때스티브 드윗(Steve DeWitt)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라고 썼다(‘Eyes Wide Open,’ 116쪽). 파랑새가 부르는 블루스, 펭귄의 어기적거림, 강의 급류와 호수의 잔잔함, 백합 꽃잎,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산사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영원히 예수께 고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으로부터 눈을 ‘떼면’ 피조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을(히 1:2)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기 ‘원할 때’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풀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 다윗왕의 시편을 떠올리며 ‘평범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게 되지 않을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이런 종류의 경외감을 가지려면, 특히 그간 피조계를 피하거나 무시해왔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기억하라. 언제나 시간이 ‘걸린다.’ 다윗은 “주의 하늘 … ‘내가 보오니’”라고 했다. 하지만 피조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평범치 않은 당신의 ‘영원한’ 능력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평균 이상이 아닌 ‘신적인’ 본질이다. 하늘과 땅이 만날 때이 땅에서는 우리가 ‘그의 피조계를 통해’ 그를 보고 즐거워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나, 다가올 세상에서는 그리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과 경험을 풍성케 해줄 것이다. 창조된 세계는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우리도’ 피조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던 소경 됨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 영원한 날이 오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의 의미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이다. 일반계시에 대해 우리가 조심스레 가졌던 그 긴장과 조바심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해내고 드러내는 그 기쁨 앞에서 사그러들고 말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타락하여 망가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이지만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안에서 그의 음성 듣기를 연습한다. 조 리그니(Joe Rigney)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히 드러낸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피조계에 대한 깊고 심오하고도 어울리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를 이루어내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The Things of Earth,’ 62족)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더 주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그를 즐거워함이 마땅하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Wonder We Once Had: Unearthing the World God Made번역: 이정훈
세계관
창조
일반계시
안식
삼위일체
자연
피조세계
GK체스터턴
성경
피조물
예배는 어떻게 용서를 이루는가
by 이춘성
2020-12-31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마 5:23-26)1. 위선 없는 용서는 가능한가?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인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용서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용서만이 진정한 용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조적인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꿈꾸며 내가 생각하는 그 자체의 이름으로서의 가치있는 용서의 순수성이란 권력 없는 용서일 것이다. : 무조적이지만 권능이 없는 용서(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hinking in action). Routledge, 2001, 59.)데리다가 말한 조건 없는 용서란 권력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용서를 빌었을 때,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이러한 권리와 힘을 얻었을 때 용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피해자는 미래에 자신이 직접 가해자를 응징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한다. 가해자를 응징한 후에 무릎 꿇리고 용서를 빌게 하고 멋있게 용서하겠다는 영화 같은 상상을 한다. 데리다는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응징, 복수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주장하는 용서란 극단적으로 말해 가해자가 뉘우치지도 않고, 용서를 빌지도 않았으며, 피해자는 피해를 지속해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용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용서가 가능할까?데리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가 조건 없는 용서를 주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용서, 그 자체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용서 속에 있는 위선의 요소를 철저히 경계한다. 많은 사람이 용서라는 형식을 빌려 또 다른 가해와 복수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용서는 화해 없는 용서를 부추긴다. 진정한 용서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이유가 없는 화해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용서하지만 화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미워하는 감정이 무감각해지는 것, 이것이 다수가 생각하는 용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용서의 말을 하지만, 몸은 상대를 증오한다. 피해자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과해 보인다. 그렇지만 화해 없는 용서는 결국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것이 데리다가 경계한 용서를 위협하는 ‘위선’의 문제이다. 위선은 용서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해친다. 불행히도 데리다는 용서에서 위선을 제거할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위선 없는 순수한 용서는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2. 위선과 이원론예수님은 분노와 살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라카(바보)’, ‘모레(미련한 놈)’라고 욕과 분노로 결국 살인을 저지른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가르치셨다(마 5:22).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폭력을 행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종교적이었다. 마태복음 5장 23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은 이 사람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있다. 그는 형제를 향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용서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의 태도를 지니고 성전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이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는 한 단어가 있다. ‘위선’이다. 그리고 위선의 뿌리에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주로 언급되는 이원론(dualism)이 자리한다.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위선의 뿌리인 이원론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실존적 이원론’이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잘못, 문제를 인정하지 못하고 모든 문제는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높은 자존감 때문에, 스스로 실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인정하기 싫어한다. 외부의 평가에 민감하며, 수치의 감정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는 일종의 완벽주의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완벽하지도,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자기 자신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이 때문에, 결국 이런 사람은 현실과 다른 자아를 만든다. 이것은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부케(부 케릭터)를 주케(주 케릭터)로 착각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이 사람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수군거리고, 그는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생각하면서 더 깊은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위선적이다. 주케와 부케를 오가면서 현실보다 더 나은 나를 추구한다. 이러한 실존적 이원론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있다.둘째는 ‘문화적 이원론’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열등하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고 영적이며, 신에게 속했으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은 노예들과 여자의 일이었다. 반면 성인 남자 자유인들은 여가의 시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였다. 폴라톤(Plato)은 이러한 문화적, 사상적 이원론을 주장한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당시 로마는 정치에 있어서는 로마의 고유 스타일을 따랐지만, 문화와 사상은 그리스의 것을 따랐다. 그래서 당시를 그레코-로만(Greco-Roman) 사회라 부른다. 당연히 로마의 통치를 받았던 유대인들도 문화적으로 그리스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그리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하는 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일이 더 가치 있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지금 성전에 가고 있는 이 사람은 단순히 둘 중의 하나의 이원론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실존적 이원론은 모든 인간이 지닌 위선이다. 또한, 문화적 이원론은 당시 그레코-로만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위선이었다. 지금도 이 두 이원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으로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에 두려워할 뿐 아니라 분노한다. 더하여 이를 막기 위해 살인에 준하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위선은 진실한 사과와 용서를 불가능하게 한다.3. 우리 주변의 위선스마트폰을 소재로 하여 위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재규 감독의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실존적 이원론의 영향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멋진 새집에 친구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교수, 의사, 작가 등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추문과 돈 문제, 거짓으로 얼룩진 어두운 면을 숨기고 있다. 이들은 스마트폰에 온 메시지와 통화 내용을 공개하는 놀이를 시작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각자의 위선이 들추어지고 모든 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것이 상상이었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상이 아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기독교 변증가인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는 강의 도중에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온종일 녹음기를 옆에 둔 후에 녹음기를 틀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바로 알 수 있다.”더하여 한국 사회는 문화적 이원론에 깊숙이 젖어있다. 한국 사회는 사농공상이라는 오래된 사회문화 구조에 영향을 받아 왔다. 지금은 덜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교수나 의사, 법조인이나 정치인, 학자를 더 우대하고 노동자들을 열등하게 여긴다. 외적으로는 노동이 중요하다고 말하나, 여전히 건설 노동자, 배관공들, 공장의 하청 노동자의 일은 대기업 사원이나 의사의 소득에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험은 배나 감당해야 한다.이러한 문화 구조와 실존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만 위선자가 아니라고 그 결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세상에서 보내며, 기도하며 말씀을 보는 시간보다 세상의 이론과 논리에 더 잘 길들어져 있다. 그런 상황과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 가감 없이 실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타성에 빠지고, 영적인 무감각증에 빠져 세상의 문화와 개인의 이기적인 실존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 그러다 혹시 모를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엄습하면,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일요일, 하루 중 몇 시간을 예배에 투자하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한다. 만약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4. 예배의 신비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위의 사람과 같이 실존적 이원론과 문화적 이원론의 위선에 빠진 사람에게도 변화의 기회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이는 데리다가 포기했던, 위선 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 사람이 제사를 드리러 가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 5:23) 이 사람은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제사장에게 제물을 건네려 하는 그 순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불현듯 생각난다. 하나님 앞에 서니, 자신의 위선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 문제없이 경건으로 위장된 위선의 삶을 잘살고 있던 사람에게 이질적인 자각, 각성이 일어났다.처음에 그는 이 이질적인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어떤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제물이나 헌금에 어떤 문제는 없는지, 자신이 혹시 절기나 주일을 잘 지키지 않았는지, 아니면 성전에 오기 전에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없는지 점검해 본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제 옆집에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을 향해 무심하게 던진 말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욕을 얻어먹어도 되는 그런 무가치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잉여 인간 같은 존재,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게 정신 차리라고 모진 말 한번 한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욕하지만,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대다수 사람은 이런 경우 예배드릴 때 느껴지는 찔림이 자신이 누군가를 향해 행한 구체적인 사건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당연히 들어도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찔림은 그가 만난 특정 사람을 향한 구체적인 말과 행동 때문이라고 가르치신다. 더 정확하게는 그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품게 된 미움과 적개심 때문이다.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을 작동하게 만든 엄청난 사건이다. 한번 시작된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이 무서운 이유는 무한 반복하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눈덩이가 돌고 돌면서 집채만 한 눈덩이로 불어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눈사태를 일으키듯 말이다. ‘멸시-증오-복수’의 시스템은 죄악 된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지만, 동시에 종국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핵폭탄과 같다.5. ‘멸시-증오-복수’ vs. ‘회개-용서-화해’그런데 예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배는 ‘멸시-증오-복수’가 아닌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예배는 이것을 예배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이 예배를 중단하게 만든다. 예배의 요구가 이들에게 너무나 무겁고 감당할 수 없는 요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예수님이 제사를 통해 용서의 요구에 관해서 설명하신 것은 구약의 제사는 ‘회개(각성)-용서-화해’의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사람은 죄를 각성하고 이를 용서받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제사장은 제물을 받아 죄인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낸다. 그런 후에 제사장은 제물을 다 태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런 후에 사람은 하나님과의 원래의 관계로 돌아간다. 화해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다.이는 하나님과의 우리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온전한 화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영적인 관계만이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으로 확장된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예배의 완성은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가 교차하는 지점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마 9:23-24). 예수님은 예배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깨워 각성하게 만들며, 이때 예배를 잠시 중단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단순한 예배의 중지가 아니다. 이는 예배의 확장을 의미한다. 예배의 잠시 중지는 성전과 예배당 밖으로 예배를 확장해서 우리의 삶의 터를 지성소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가 삶 속에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공적 예배의 기능이다.그리스도인들은 공적 예배 장소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예배를 마쳐야 한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 또는 형제에게 죄를 용서받는 것, 이후에 회복하는 것이다. 마치 성전에서 ‘회개-용서-화해’의 시스템이 제사를 통해 성취되듯이 말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예배란 ‘회개-용서-화해’의 거룩한 시스템이 예배당 바깥세상에서 작동하게 한다. 바울은 이를 산 제물로 드리는 참 예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의 기도(주기도)로 정하셔서 매일, 매순간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6. 용서와 예배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철저히 이원론과 위선을 거부하는 예배이다.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람과의 화해는 동전의 양면이다. 만약 사람과의 화해가 없다면 하나님과 화해도 없다. 한쪽만의 용서와 화해란 위선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없는 세상에서 용서는 위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의 용서는 정치의 차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순수한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 속에서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는 이를 마지막까지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있는 인간의 종말의 모습이다. 알면서도 바꾸지 않는 교만을 인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오만함 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예수님은 ‘멸시-증오-복수’를 반복하는 위선적인 사람은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위선은 자각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듯, 아무런 문제점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하나까지 ‘멸시-증오-위선’의 씨앗이 하나님 나라에 뿌리 내리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위선이 뿌리내릴 땅은 단 한 곳도 없다. 이것이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신 성부 하나님의 단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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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의지하는 습관 기르기
by Arielle Wellons
2020-12-30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대학 내 기숙사에서의 사역(residential ministry)이었다. 그곳에서 사역은 종종 나와 동료들에게 영적 전쟁과 피로를 겪게 했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청소년들을 상담했다. 하지만 성실하게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정서적 여유와 영적 포용력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격렬한 상황 속에서 리더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냥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겨라”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처럼 쉽게 들렸다. 나는 더 많이 기도하고 모든 순간에 그분을 더 열심히 의지하려고 생각했다. 또 하나님께 충분히 집중할 수 있다면 그분을 더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이를 잊어버리곤 했다. 내 마음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헤매곤 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될 때면 때론 부끄러운 가책을 느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게 틀림없어. 하나님께 집중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왜 계속해서 기억하지 못할까?’하며 내 자신을 닦달했다.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상기시키는 리더의 말은 진실되고 좋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믿는 동안 종종 나 자신의 의지력을 의지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정도로 축소시켰다. 그러고 난 뒤 나는 그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그런 나의 노력을 의지했던 것이다.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이다. 매일 그분께 집중하는 것, 마음, 몸, 그리고 영혼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변화이다.하나님을 통해 힘을 얻으려고 할 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을 단순히 보내는 식으로 끝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우리를 친밀히 아시며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항상 존재하시는 우리의 상담자, 위로자, 동행자(친구), 그리고 변호자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사 41:10).이런 이유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실천하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 4가지 방법이 있다.마음 습관우리는 고통, 상실, 그리고 희생을 경험할 때에도 하나님이 최고의 선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우리의 불안은 종종 고통을 피하려는데 기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신다(마 16:24). 어려운 상황들을 보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그분을 신뢰하라 하신다.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로 우리의 필요를 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해 간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에 드리는 기도 습관은 하루 종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도록 돕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에 집중하여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며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공급과 임재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준비를 한다(시 5:3). 신체 습관우리는 “오묘하고 놀랍게 지어졌다”(시 139:14).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고전 6:19). 이 소명을 신실하게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필요에 만족하며 더 이상 죄된 행위에 우리 몸을 맡기지 않음으로써 신체 건강을 지켜야 한다.창세기 2장 이후, 성경은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적절한 휴식(수면과 안식일 둘 다)이 없으면 하나님께 집중할만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Ask Pastor John’ 팟캐스트에서 존 파이퍼는 ”수면 8시간 대 5시간으로 내 성화의 레벨이 상승하고 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일을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우리를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새롭게 하고 계심을 믿어보자. 마찬가지로 영양 섭취와 적절한 운동은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설계하신 한계를 받아들이며 그 육체적 필요를 존중하기로 선택하자. 정신 습관우리 모두는 좌절된 생각과 감정, 특히 시련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특정한 생각이나 감정을 임의로 멈출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더 우선됨을 명심하자. 그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그분의 약속을 믿기로 마음먹고 진리를 마음에 둠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자”(고후 10:5).우리 생각을 효과적으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진리를 향한 견고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답을 찾아간다. 성경 공부와 설교와 같은 연속적인 헌신의 시간은 진리를 충만히 저장해 갈 것이다.공동체 습관특히 배신이나 포기를 동반한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다른 사람들부터 멀어지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나타내신다(요일 4:12).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헌신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벽함을 즐거워하면서 불완전하게 서로 함께 살아간다. 완벽한 가면을 지켜내기보다 우리는 깨지기 쉬우며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책임감, 성숙함,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발견하게 된다(히 10:24-25). 교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에 서로 기댐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 우리는 관계, 책임감, 그리고 제자도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래서 목사나 상담가 또는 멘토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관계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신다.이 모든 것이 “좋은 기독교인”이 되려면 필수적이어야 할 항목처럼 벅차고 힘들어 보일지 모르겠다. 가당치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조차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후 12:9).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점차 깊어져 가는 과정 가운데 찾아오는 실패 또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 육체, 정신 또는 공동체에서 고군분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날마다 그분의 과분한 은혜와 다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더 깊어질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lying on God Isn’t a Mind Game번역: 송유희
영성
신앙과소명
습관
마음
정신
심리
의지
육체
고난의 신학이 필요한 시대다!
by 김형익
2020-12-29
가짜 복음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참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일처럼 효과적인 일이 없듯이, 번영 신학에 중독된 교회가 필요로 하는 해독제는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다. 조엘 비키는 ‘설교에 관하여’(복있는사람,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질주의와 심리학은 우리를 속여, 인생의 가장 큰 유익은 자신의 신체적, 재정적, 정서적인 번영에 있다고 믿게 만든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이 진리인지를 의심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일을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작정해 두셨는지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 다음 구절을 살펴야만 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29절). 성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셨으며(엡 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엡 5:25-27).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그 아들의 형상을 좇아 거룩해지도록 인도하기 위해 그 어떤 수고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여러분은 회중에게 고난의 신학을 설교하기 바란다.”(656-657쪽).고난의 신학을 설교하라는 조엘 비키의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방편으로서의 고난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교회의 강단에서 성경적 고난의 신학을 설교로 듣는 일은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한편 소위 번영 신학에 기반한 거짓 복음은 많은 강단을 오염시켜왔고 많은 교인들은 번영 신학의 가르침에 중독되어 갔다. 그래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신체적(건강), 재정적(물질), 정서적(안정)인 번영이 되었고 교인들조차 이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는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복음은 박해를 동반하였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가난했던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난의 신학은 설교에서 종종 다루어져야 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잘 살아보세’를 기치로 하는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의 흐름 속에서, 가난과 고난은 깨쳐버려야만 할 악덕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이런 외부 세계의 거대 흐름은 강단에서 전해져야 하는 고난의 신학마저 왜곡시켜버리고 말았다. 이후 80년대를 지나고, 88 서울올림픽을 거쳐 소위 90년대의 경제번영기에 접어들게 되는 동안, 번영 신학은 특정 교단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파 교단을 망라하는 보편적 가르침이 되었다.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법이다(요 12:8). 가난한 자만이겠는가? 20세기를 20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병든 자, 실패한 자, 상실을 경험한 자, 신체적, 정서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번영의 신학에 물든 거짓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일은 할지언정,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에서는 현저하게 실패하게 된 것이 아닐까(롬 12:15).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거나, 우리가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소유한 물질과 건강과 성공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라거나, 가난과 질병과 실패가 하나님이 버리신 결과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에 물을 탄 번영 신학의 가르침은,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증거라고 말함으로써 일부 사람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주는 반면,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가 바라는 물질과 건강과 성공으로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허황된 희망 고문이나 영적 좌절을 안겨주게 된다. 그래서 번영 신학은 속이는 것이고 거짓 복음이다. 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난의 본질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한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의 차원이 있는가 하면, 복음을 위해서 받는 적극적 고난의 차원이 있으며(딤후 1:8), 조엘 비키가 말했듯이 일반적인 고난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번영의 복음이라는 이름의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과(딤후 1:8)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말씀과(딤후 3:12) 같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피해가려고 애쓸지라도, 고난은 그들 자신의 인생에서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난을 가르치는 성경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피해갈 수 있는 논리는 불가능하다. 이런 시대에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을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게 해주는 고난의 신학이다.욥기는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욥기는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놓고 욥이 세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길게 소개한다. 욥기 1-2장을 읽은 독자들은 욥의 고난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욥 자신과 친구들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한 믿음을 사탄에게 자랑만 하지 않으셨어도 욥은 그 고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욥의 믿음을 조건적인 믿음이라고 폄하하였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기 1:10–11).” 믿음에 대한 사탄의 관점은 철저하게 극단적인 번영 신학의 논리를 적용한 관점이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과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셨다. 말하자면, 참된 신앙은 고난이 주어져도, 가진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하여도 여전히 배신하지 않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과율이라는 율법주의에 근거한 번영 신학의 논리를 깨뜨리기로 하셨다. 욥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이 사탄의 마음을 격동하여 욥을 건드리고 싶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을 리 없다. 그래서 고난이 깊어갈 때 욥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 고백은 마치 망치로 독자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욥 13:15).” 이것은 개역개정역의 난외주로 소개된 번역인데, 실로 무서운 고백이 아닌가! 참된 신앙은 이런 고백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욥의 고난의 이야기는 욥이 믿음을 지켰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고 그를 끝까지 붙들어주셨으며 그의 믿음을 지켜주신 이야기다. 욥은 이유를 알 수도 없었던 이 고난을 통해서 결국 이런 고백을 하게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욥은 이 고난을 통해서 더 깊이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가게 되었다. 시편 기자의 고백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고백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67,71).”루터는 좋은 신학자의 세 가지 조건을 기도, 묵상(성경), 시련(고난)이라고 말했다. 세 가지 조건 중에 고난이 들어간다고? 놀랍지 않은가? 기도와 묵상(성경)만으로도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기도조차 없는 신학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루터는 여기에 시련(고난)을 더했다. 그리고 루터 자신이 바로 그 세 가지 조건들 속에서 종교개혁의 신학을 세웠다. 사실, 이 세 가지 조건은 좋은 신학자의 조건을 넘어, 좋은 신자의 조건이라고 말해야 한다. R. C. 스프로울이 자신의 책 제목에서 밝힌 대로, 신자는 사실 모두 신학자이기 때문이다(Everyone’s a Theologian, 2014). 루터의 말이 옳다면,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빚어져가는 일에 기도와 말씀묵상 만큼이나 고난이 필요한 요소라면 성경적 고난의 신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그 고난의 신학은 오늘날 번영의 신학에 중독된 신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해독제가 될 것이다.
영적성장
고난
가짜복음
조엘비키
설교에관하여
번영신학
인과율
스프로울
마틴루터
프란시스 쉐퍼, 2020년을 향해 경고했다
by Elliot Clark
2020-12-28
故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남긴 기독교에 대한 공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종종 스위스 알프스의 라브리 공동체와 그의 주목할만한 저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Live?)’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저서 중 하나인 ‘20세기 말의 교회(The Church at the End of the 20th Century)’는 아마도 2020년 말 현재 미국 교회가 처한 현실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정확히 50년 전에 발간된, 1970년 수준의 보기 흉한 표지가 반영하듯 이 짧은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올드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쉐퍼는 진리와 개인적 책임의 상실, 권위의 붕괴, 그리고 증가하는 폭력이 가져다주는 위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임박한 생태 재앙과 과학적 조작, 심지어 국가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무기화 할 가능성까지도 경고한다. 어쩌면 이런 점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큰 약점일지도 모르겠다. 즉, 책의 진정한 가치가 쉐퍼가 제시한 경고 때문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분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교회에게 총체적이고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방향을 제공한다. 20세기 말의 교회프란시스 쉐퍼“우리 세대에 교회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나는 교회가 지금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믿습니다. … 우리는 현재 엄청난 압력과 더불어 미래의 조작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위기는 너무나 엄청나서 지난 40년 간 교회가 치른 전투가 마치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오늘날 쉐퍼가 예측한 압력과 전투는 복음주의 교회 전체를 휩쓸고 있다. 그 위기는 주변 세계의 도덕적 부패에서 비롯되었다. 그 위기는 기독교적 원칙과 정치 이념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그 위기는 또한 교회 내부, 특히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도덕적 그리고 신학적 타협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만나는 쉐퍼의 통찰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전투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IVP쉐퍼 시대의 혼란쉐퍼는 당시에 있었던 학생 혁명에 대해서 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미국과 유럽의 청소년 문화를 특징지었던 것은 부모와 정치 엘리트들의 권위주의를 보면서 느낀 그들의 환멸감이다. 그들은 그런 권위주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에 관심이 있었다. 거기에 끝없는 전쟁이 가져다 준 피로감도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특히 미국에서 학생들은 빈곤과 인종 차별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불안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 좌파(New Left)로 알려진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책의 서두에서 쉐퍼는 지금 사회가 양극화, 환멸, 희망의 상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쉐퍼는 애초에 자유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유대-기독교와의 분리를 통해 자주적 자유를 추구하던 고전적인 자유주의가 결국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 환경을 한탄한다. 그는 또한 기본적으로 보존할 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탈 기독교 사회를 사는 상황 속에서도 개념상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보수주의의 무익함에 대해서도 경고를 던진다. 1970년에 쉐퍼는 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이미 탈 기독교 국가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문화적인 힘과 영향력을 상실해버린 역사적 기독교가 이제 서구에서조차 소수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쉐퍼는 복음주의자들이 처한 큰 위험을 지적하는데, 안위와 풍요함 그리고 개인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 엘리트의 편을 드는 바로 그 위험이다. 사회적인 혼란과 격변을 맞아 쉐퍼는 기독교인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 안락함을 위해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놀랍도록 선구자적인 작업을 통해서 쉐퍼는 서구 사회를 떠받치던 기독교적 기반이 무너질 때 닥칠 수밖에 없는 자유의 상실을 계속해서 예언한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쉐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닌, 일종의 문화 전쟁을 요구한다. 쉐퍼는 마치 영적 혁신(spiritual reformation)처럼 보이는 기독교 혁명(Christian revolution)을 요구한다.개혁: 더 나은 혁명 오늘날과 놀랍도록 유사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감안할 때, 쉐퍼는 지금 교회에게 꼭 필요한 진정한 혁명의 세 가지 측면을 제시한다.1. “기독교인들은 호전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동맹자가 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특정한 정치 진영의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이상을 긍정하고 또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그 이상의 실현을 이룰 수 있다. 쉐퍼는 이렇게 썼다. “사회적 불의가 있다면, 그렇다고 말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말하세요.” 우리 시대에도 이 점은 여전히 적용된다. 교회는 천국의 가치(예를 들어,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 BLM)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하며, 동시에 여전히 지상 왕국의 가치, 판단 및 행동(예를 들어, BLM이라는 의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측면들)과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쉐퍼가 살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사와 기독교인은 반드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쉐퍼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성경, 진리와 사랑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특정 정치적 세력의 편이 아니라 철저하게 외부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교회는 정치적 양극화와 문화적 종속(cultural capitulation)을 모두 거부하면서도 옳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를 이어 내려온 부모의 정치적 소속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가진 다음 세대를 향해서 던지는 쉐퍼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 현실이 50년 전에도 사실이었다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2. “기독교인과 교회는 진지하게 진리를 다뤄야 합니다”이 혁명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아카데미 차원에서 논의되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동시에 전도를 통해 세계를 품으려는 담대한 진리 선포(truth-telling)를 포함한다. 현대 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종교적, 세속적 세력 모두로부터 경멸을 당해도 기뻐할 정도로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들의 정신(backbone), 변하지 않는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부끄러움과 거절을 기꺼이 감당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쉐퍼는 동시에 위선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진정성에 매력을 느끼는 문화일수록 비진리를 실천하는 얄팍한 교회를 기가 막히게 분별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쉐퍼는 말한다. “지금은 진리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대에게 우리 기독교인이 진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교리 뿐 아니라 삶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쉐퍼는 교회가 불신자들과의 깊은 대화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거대한 컴퓨터가 지배하는 “전자 마을(electronic village)”을 예측했던 캐나다 철학자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을 언급하면서, 쉐퍼는 기독교적 증언이 피상적인 의사 소통에 맞서 싸워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는 언제나 “제대로 된 콘텐츠를 다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전도와 변증은 트위터의 몇 마디 또는 영감을 주는 인스타그램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비난과 폭언의 시대에 기독교인의 반응은 깊은 관계성과 명백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2020년 현재, 쉐퍼가 던지는 위선에 대한 경고는 정치적 음모와 과학적 추측을 퍼뜨리려는 기독교인에게도 적용된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지적 진실성(intellectual integrity)을 통해 상대방의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3.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기독교인은 진리를 설교하고 비진리에 맞서야 한다고 쉐퍼는 말한다. 쉐퍼는 또한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을 향해서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특별한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교회에 도전한다. “세상이 기독교인의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바탕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기독교 공동체가 다툼과 싸움 그리고 내분을 멈추는 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대안적 공동체, 사랑으로 하나가 된 진정한 가족을 의미한다. 그리고 쉐퍼는 그러한 사랑을 증언하고 또 그러한 공동체를 육성하는 실질적인 수단으로서 타 인종 및 전혀 다른 사회 경제적 계급을 향한 급진적인 환대를 주장한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표시”(별도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음)라는 제목의 부록으로 책을 마무리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랑을 호소한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이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 속에서 세상이 보는 것은 우리가 정치적 경쟁자나 이념적 반대자들을 향해 드러내는 사랑이 아니다. 정치적 싸움은 이제 교회 속으로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내 기억에 올해처럼 교회가 갈갈이 찢어진 해는 없는 거 같다. 인종간의 긴장, 과열된 선거, 코로나 대응 방식, 심지어 마스크를 쓰느냐 마느냐와 같은 문제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우리가 전쟁을 벌이려면 그 전쟁은 우리 속에서 일어난 분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020년 말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되어 회복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지켜보는 세상에게 아름다운 공동체의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원제: Francis Schaeffer Warned Us About 20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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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쉐퍼
탈기독교사회
마샬맥루한
교회회복
공동체
진리선포
기독교혁명
문화전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12-27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섭리하신다는 것에 이미 포함된 것이지만 인간의 창조와 그들에 대한 섭리를 따로 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전 신앙고백서들도 하나님의 창조 일반에 대해서 말한 후에 다시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서, 1561년에 공식화된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창조와 섭리에 대한 고백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부터 사람들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제 14조 앞부분)라고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따로 언급한다. 다른 신앙고백서들도 대개 그렇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창조를 과연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난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의 진술을 생각해 보면서 지금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와 비교해 보겠다.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인간 창조를 이해함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과거의 진정한 신앙인들은 인간 창조를 창세기 기록에 따라서 믿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을 땅의 고운 흙으로부터 만드셨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는 말은 모두 창세기에 기록된 말이다. 창세기 기록을 믿지 않으면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셔서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언급되는 인간을 만드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우리들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그 구성 요소들이 결국 땅의 있는 모든 요소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연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매우 정교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그 화학적 구성 물질만 계산하면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주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놀랍다(Francis Nigel Lee의 ‘성경에서 본 인간_도서출판 토라, 2006’ 제2장 참조).최초의 남녀가 창조의 여섯째 날 맨 마지막 피조물로 만들어졌음을 창세기 1장에서 배운(27절, 31절) 우리는 그 마지막 창조의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게 된다. 먼저 땅의 고운 흙으로 남자(아담)을 지으시고(창 2:7) 그로 하여금 동물들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일을 하게 하시고(창 2:18-20), 그 가운데서 자신이 홀로 있음과 “그에게 상응하는 돕는 자”(우리 말 돕는 배필의 더 정확한 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셔서(21절) 그 남자(아담)에게 이끌어 와(22절) 그들이 혼인하게 하시고, 이를 기점으로 하여 이후로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선언하여(창 2:24) 혼인 제도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창세기 2장에서 배우는 것이다.이 땅에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오셨을 때, 사람들의 이상한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 일이 있다(마 19:4-5). 예수님께서 창세기 1장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말씀과 2장의 말씀을 다 그대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대로 본래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창세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과 같이 간다. 더 놀라운 것은 최초의 사람들만 그렇게 놀랍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오늘도 창조하시는 새로운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는 그 놀라운 인간 창조의 일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최초의 남자(아담과)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혼인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는 말로 명령(creation mandate)하시면서 복주셨다(the benediction of God). 이 명령과 복 주심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생육할 때에 새롭게 창조되는 아기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최초의 창조 때에 땅의 고운 흙을 사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더 인격적인 존재들인 부모될 이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제2의 원인으로 작용해도 결국 개별적인 인간 생명은 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자와 난자가 합하여지는 그 때부터를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며, 결국 자궁 외 임신처럼 어머니와 자녀의 생명 모두가 위태로운 때 외에는 모든 낙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인간 복제, 그 위험한 도전’ 이승구, 2006).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 영혼은 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영의 아버지”(히 12:9)이시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인정함그와 같이 놀랍게 창조된 사람을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한다. 이것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하신(창 1:26) 말을 따라 기독교에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 때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을 이전 교부들이나 천주교회처럼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보면서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을 보는 것이 창세기에 대한 유대인 해석자들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전통이다. 그리고 다른 존재가 그렇게 고귀한 명칭으로 불린 일이 없고 오직 사람만이 이런 식으로 창조되었음을 확인하고서 우리들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이는 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단순히 인간은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직 기독교 전통에서만 그 인간의 고귀성을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만 인권(人權)을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인간을 진화된 존재로 말하면 아무리 인간의 존귀함과 고귀성을 말한다고 해도 진정한 인권의 토대를 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권운동은 언제나 한계를 드러내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진정한 인권을 말살하는 결과를 낸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 미명 하에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심지어 억압하며 죽이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인권의 토대로서 하나님 형상 개념이 회복되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본래 이 형상(imago)이라는 이 말은 결국 ‘반영’이라는 뜻을 지닌다. 여기 피조물인 사람이 있는 데, 그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그럴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부여 받아 지음을 받았다는 놀라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할 때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성경에 근거해 잘 궁구해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의 존재 전체로 드러낼 때가 참사람의 모습이 드러날 때인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회가 말하는 참 인간화이다.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잘못 반영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형상의 왜곡하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deformed image of God)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 온전한 참 하나님 형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하나님을 잘 반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은 성경 전체를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회복된 상태를 표현하는 바울 사도의 말이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는 것”(골 3:10)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4)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것은 본래 사람들이 창조된 모습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반영하는 일을 제대로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새롭게 되었을 때, 아주 잘 이루어진다고 바울이 말한 것을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바울이 이것을 강조했지만 다른 분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칼빈을 위시한 개혁파 사람들이 주로 이를 강조하여 말한다고 해서 이것을 ‘하나님 형상에 대한 개혁파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이 신약 구절의 빛에서 이제 우리들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개혁파 사람들은 “의롭고, 거룩하게 만드셔서, 그들의 의지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도록 하셨다”라고 강조한다.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자신들의 의지를 부합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쫓으며, 그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들도 선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하는 것을 본래적인 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라고 해 왔고, 이를 좁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이것이 본래 창조된 인간의 상태였다. 이런 내용물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할 수 있는 기능을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기도 했다. 본래 사람은 이렇게 폭 넓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오늘날 우리들은?이것을 다 인정하면 참으로 기독교적 인간 창조의 이해를 가졌다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안타까운 일은 인간들이 원래 이런 고귀한 창조 상태(원상태)에서 떨어진 타락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들이 본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에 있는 타락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에 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고귀성과 명확히 대조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셔서 우리로 창조의 그 모습을 다시 회복하면서 이제 다시는 타락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 그 분과 연합하여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학
교리
섭리
창세기
인간창조
피조물
하나님형상
반영
개혁파
원상태
그날은 지났지만 이교도 기념일이었다고요?
by Kevin DeYoung
2020-12-26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는 사실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대 로마인들은 12월 17일부터 7일간 ‘사뚜르날리아’(Saturnalia)라고 하는 겨울 축제의 기간을 가졌다. 그것은 방탕과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 숭배로 채워진 완전한 이교도적 사건이었다. 동지를 기점으로, 로마 황제는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라는 태양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만들었다. 기독교는 로마인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 이 이교도의 축제에 교회가 함께 참여하였고 12월 25일에 구세주의 탄생을 끼워 맞춘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은 이미 자리 잡고 진행되던 이교도의 명절을 모방함으로 시작하였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면, ‘사뚜르날리아’와 ‘솔 인빅투스’에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이것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고, 자유주의 기독교인이나 보수적인 기독교인, 심지어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모두 그것이 사실이라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실이 아닌 사실이 숨어 있다.우선 이교도의 기념일로부터 가져왔다는 데에서 기원을 찾는 것과 거부감과 불편함 때문에 새로운 기념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찾아보려는 것은 분명히 구별하여야 한다. 기독교의 축제와 이교도들의 축제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동시대에 잘나가는 이교도의 축제를 모방하여 기독교화한 것이란 의미일 수도 있고, 이교도들의 축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에 기독교다운 새로운 것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교도 축제를 변형하여 기독교화 했다. 그들이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그 일을 진행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확인은 역사적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그 동기는 로마의 이교도들을 멸절시키기보다는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설령 크리스마스가 ‘사뚜르날리아’와 ‘솔 인빅투스’로 인해 12월 25일로 정해졌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독교인들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들의 축제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들의 겨울 축제로부터 유래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예일대 신학교의 앤드류 맥고완이 “어떻게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가 되었는가”(Bible Review 2002 참조)라는 기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맥고완의 훌륭한 역사적 업적을 풀어보도록 할 것이다.기독교인들은 언제부터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축하하기 시작하였을까?훨씬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기념일로 자리 잡았던 부활절과는 달리,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일을 축하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레나에우스 (130-200)나 터툴리안(160-225) 같은 크리스천 작가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제에 관해서는 이야기한 바가 없었고, 오리겐(165-264)는 로마인들이 기념하는 탄생 기념 축제를 이교도의 관습으로 비웃기도 하였다. 이는 크리스마스가 아직 교회력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었고(적어도 널리 퍼지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유사한 로마의 축제일과는 거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증거이다.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 일자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세기 후반 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가 내놓은 몇 가지의 제안 가운데는 예수의 탄생일을 추정해 보고자 하는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것도 12월 25일은 아니었다.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을 처음 언급한 것은 필로칼루스 달력이라 불린 4세기 중반의 연감이었다.수십 년 후, 서기 400년경,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4세기 초기에 북아프리카 기독교회에 출현한 교파)가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 축일을 지켰지만, 1월 6일 주현절(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나러 베들레헴을 찾은 것을 기리는 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거부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현절이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 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312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동안 일어난 도나트투스파는 로마의 압제자들과 어떠한 타협도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12월 25일의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맥고완은 도나투스파가 오래된 북아프리카의 전통에 깊이 빠져 있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가장 이른 기념일은 3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시대보다 앞선 것이며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교도와의 어떠한 교류도 확실하게 피하고자 노력했었다.언제부터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로부터 기원할 수도 있었다고 논의되기 시작하였을까?1세기 교회의 초기 교부 중 그 누구도 크리스마스와 ‘사뚜르날리아’ 그리고 ‘솔 인빅투스’ 사이의 연관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물론 독자들은 ‘그들이 그랬을 리가 없지. 그건 정말 황당한 일이었을 테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기독교의 예수 탄생일을 이교도의 기념일로부터 찾고자 하는 목적이 기독교가 더 인기를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나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분명 누군가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맥고완은 “그것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관계성을 찾고자 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그레고리 대왕은 601년,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이교도 사원을 교회로 바꾸고 이교도 축제의 의미를 기독교 순교자들을 위한 기념일로 바꾸기를 촉구하는 글을 남겼다.디오니시우스 바 살리비(Dionysius bar Salibi)가 크리스마스는 1월 6일에서 12월 25일까지 ‘솔 인빅투스’와 일치하도록 변경하였다고 말한 12세기까지는 예수의 탄생이 이교도의 축제 기간에 맞춰 정해졌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 세기가 경과한 후, 비교 종교학의 계몽주의 학자들은 교회 역사의 첫 천년 동안 그 누구도 그런 연관성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동지 축제를 변형하여 채용하였다는 이론을 대중화하기 시작했다.왜 우리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로 기념할까?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기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방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1월 6일에 기념하는데, 아마도 다른 계산 방식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서양에서 12월 25일에 기념하게 된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로 정해지게 된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과 예수님의 잉태와의 연관성 때문이라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이러한 추론을 위해서는 필요한 세 종류의 날짜가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부터 시작해 보자. 서기 200년경,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은 예수님이 니산월 14일에 돌아가셨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로마 태양력으로는 3월 25일에 해당한다. 동방에서는 지역 그리스력에 의해 봄의 첫 달 14일을 기준으로 계산을 하였다. 로마력으로 환산하면 4월 6일이 된다. 누구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예수님은 3월 25일이나 4월 6일에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수님은 그가 잉태되었던 날 죽었다는 동일한 추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나온 익명의 기독교 논설에 따르면 “3월 25일은 주님의 수난과 잉태의 날이다. 그날, 그는 고난을 겪었던 바로 그 날 잉태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도 비슷한 계산 방법을 이용했다. 4세기경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오 주교는 4월 6일,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거두어 가셨고, 같은 날 “동정녀의 흠 없는 자궁에 잉태되셨다”라고 주장했다. 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전통이 세계의 다른 두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순한 추측 이상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적어도, 맥고완이 관찰한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인들은 창조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일 년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고대 유대의 전승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나, 그가 잉태된 (동일한) 날까지,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날짜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3월 25일에 잉태되었다면,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날짜는 9개월 후인 12월 25일 (또는 동양에서는 1월 6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12월 25일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또한 날짜의 역사성에 대해 독단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지만), 크리스마스의 날짜가 ‘사뚜르날리아’나 ‘솔 인빅투스’와 같은 이교도적인 기념일과 연관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잉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훨씬 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원제: Is Christmas a Pagan Rip-off?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명근
복음
변증
크리스마스날짜
사뚜르날리아
솔인빅투스
동방교회
이교도축제
크리스마스기원
터툴리안
크리스마스에 성령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
by Scott Hubbard
2020-12-25
자주 부르지 않는 크리스마스 찬양 ‘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처럼 크리스마스의 경이로움이 자주 잊혀져간다.아담과 같은 우리 모습 지우시고그 자리에 주님의 형상 만드시네위로부터 오신 둘째 아담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뿐만 아니라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셨다(고전 15:47-49; 롬 5:1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 하나님과 같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시 8:5) 모습으로 오셨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언젠가는 구속될 모습으로 오셨다. 마리아의 태에서 형성되신 분이 이제 우리 안에서 그분의 형상을 이루고 계신다(갈 4:19).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아담의 모습 위에 그분의 형상을 만들고 나면 “우리가 그와 같아질 것이다”(요일 3:2).이러한 경이로움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사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분은 자신의 전능한 신성 덕분이 아니라 완전한 인성으로 섬기고 고난 받고 죽으신 후 부활하셨다. 우리가 찬양 드리면 그분은 “인간으로 인간과 함께 거하시기를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최대한 충만해져야 했다.성령의 사람 이사야는 다가오는 메시아가 성령이 온전히 임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예언했다. 선지자의 말씀에,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강림하시니라”(사 11:2). 아버지의 말씀으로,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사 42:1)이라고 했다.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으로,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사 61:1)라고 했다.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 모두는 그것이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언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더욱 놀랍게도 성령은 그분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교부 바실(Basil)이 말하듯이(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37), 성령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동반자”로 섬기고 있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은 이에 더 나아가 분리할 수 없는 이 동반자의 10 단계 행보를 나열하고 있다(‘Works of John Owen,’ 3:162-83). 오웬에 의하면, 성령의 동반자 역할은 이러하다.*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셨다(눅 1:35)* 그리스도의 몸을 거룩하게 하시고 은혜로 충만하게 하셨다(사 11:1-3; 눅 1:35; 히 7:26)* 그리스도가 지혜와 총명으로 자라게 하셨다(눅 2:40, 52; 사 11:1-3)* 그리스도에게 메시아 사역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름을 부어(특히 세례 받을 때에) 주셨다(마 3:16-17; 요 3:34; 눅 4:1; 사 61:1)*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기적을 베푸는 사역을 하게 하셨다(마 12:28; 행 10:38)* 그리스도를 이끌어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인도하셨다(사 42:4; 49:5-8; 눅 4:1, 14)*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하셨다(히 9:14)* 그리스도의 몸을 무덤에서 보존하셨다(행 2:27; 눅 1:35)*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롬 1:4; 8:11; 딤전 3:16)* 그리스도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고전 15:45)그러므로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듯이, “태에서 무덤까지, 무덤에서 보좌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성자의 영원한 동반자였다”(37).온전한 인간의 거룩성하지만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사역 성취에 왜 성령이 필요했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능력에 의해 지혜로 충만했고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 예수님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그분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는 이런 찬양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위로부터 오신 둘째 아담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키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오셨다는 의미이다그리스도가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 그분은 첫째 아담이 패한 그 전장에서 싸워 이겨야 했다. 첫째 아담이 인간으로서 패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인간으로 나셔야 했다. 그분이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그러나] 죄는 없으시니라”(히 2:17; 4:15)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동물이나 천사는 아담에게 임한 원죄를 풀 수 없다. 그 임무는 완전한 둘째 아담에게 넘겨졌다.퍼거슨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면, “그 거룩함은 인류 안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이다”(72).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새로이 거룩하게 된 인류의 선구자가 되셨다. 그리고 같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그분의 온전한 인간의 거룩성을 심어주신다.우리가 잃어버린 영광의 회복예수님이 배반을 당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 예수님을 충만하게 한 바로 그 성령이 이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도 계신다(요14:17). 그리고 마크 존스(Mark Jones)가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바로 그 성령이 “그리스도의 삶을 취하여 우리 안에 같은 애정과 열망을 갖게 하시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같아진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우리 인성을 그리스도의 인성의 틀에 부어 넣으신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사시면서 형성하신 그 인성의 틀에 말이다. 그 예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가 그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막 14:36; 갈 4:6)*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를 덧입혀 주신다(눅 4:14; 행 1:8)* 육신대로 살지 않고 그 아들을 본받아 우리도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롬 8:13, 2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촉구하신다(벧전 4:13-14)*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 우리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수 있게 하신다(고후 3:18)* 장래에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우리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고전 15:44; 롬 8:11)세상에서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동반자”였던 성령이 보냄을 받아 “우리 안에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제 우리와 뗄 수 없는 동반자가 되신다(‘The Holy Spirit,’ 92). 크리스마스의 영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 정신”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주로 애매한 선의와 길들여진 친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호하거나 길들여지지 않은 또 다른 크리스마스 정신을 발견한다. 그분은 참으로 살아 계신 영이며, 주권자의 영이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우리 안의 모든 모습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우리 외부의 모든 모습에는 위험한 영이다. 그분은 세상에 침입하고 경이롭게 일하며 악마를 쫓아내고 죄를 잘라버리며 죽음을 파괴하는 영이다. 능력은 그분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분의 목적이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허리케인처럼 강력하다. 때로 그분의 사역이 느린 것 같아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형성될 때까지 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말이다.아담과 같은 우리 모습 지우시고그 자리에 주님의 형상 만드시네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여 용기를 가지라.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 그 이상의 의미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분이 당신 안에 들어오신다는 의미이다.원제: The Untamed Spirit of Christma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성령
동반자
신성
인성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 자유케 되다
by James Cary
2020-12-24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21세기 크리스마스와 1세기 크리스마스가 충돌하는 곳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로맨틱 코미디이다.전체 영상을 여기서 시청하실 수 있고, 각각의 에피소드도 따로 시청할 수 있다.1편: 아웃사이더, 아기 예수를 만나다2편: 위장된 이타주의자, 아기 예수를 만나다3편: 정리광 엄마, 아기 예수를 만나다4편: 불통 아빠, 아기 예수를 만나다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인기영화를 “크리스마스 영화”로 분류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크리스마스에 대한 내용이 있어야 하는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이에 근거하여, 어떤 이들은 ‘다이 하드’(Die Hard)가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주장한다. 그 영화는 사실 인질 상황과 같이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이다. (어떤 이들은 보통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과정에 같이 보내면 어색한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을 때 느끼는, 마치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1편 아웃사이더 윌의 이야기처럼 그런 느낌일 수 있다.하지만 크리스마스 영화로 성공할 수 있는 안전한 길은 영화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담고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애매한 말은 여러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산타클로즈가 결국 실제 인물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이나, 크리스마스는 재고가 없는 마지막 장난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이나,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 특히 제임스 스튜어트가 모기지 운용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배움을 의미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그런 영화 말이다. 아닌가?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공격적이지 않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에게 매력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따뜻함을 주며 산타의 썰매가 공원 위에서 부서져 땅에 떨어지게 재미를 더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나 그분의 탄생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 스스로를 믿게 만들 필요가 없다.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서 윌, 클레어, 루스 그리고 켄은 모두 크리스마스 분위기 때문에 이끌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뭔가 훨씬 더 강력하고 고귀한 것을 얻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들은 말구유 헛간에 들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언급하신 그들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들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신다.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잠시 조용히 내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그리고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실수할 것이라고 미리 아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 심하게 분열된 사회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우리는 이러한 불안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겨우 유지해 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살아가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첫 번 크리스마스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탄생하신 왕중의 왕 없이는 우리는 그러한 불안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오!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소망과 두려움의 모든 세월이 그분 안에서 오늘 밤 충족되도다”라고 노래할 것이다.원제: ‘Meet the Nativity’—and Be Free from F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복음
예수그리스도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영화
아기예수를만난사람들
불안
두려움
베들레헴
아기예수
십자가
애통과 위로 사이 성경 속 크리스마스
by Thomas S. Kidd
2020-12-23
블랙 프라이데이를 시작으로 해서 우리가 소비로 행복을 추구하는 크리스마스와 많은 이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크리스마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그 차이를 경험했을 만한 나이일 것이다. 이제 크리스마스를 축하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기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지금의 재정 상태로는 크리스마스가 스트레스로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교회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은 이상화 된 크리스마스와 현실의 슬픔, 상실 혹은 불안 사이에서 오는 차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다행스럽게도 성경의 크리스마스가 그 차이를 잘 설명해 준다. 세속 문화 속 크리스마스가 우리를 더욱 실망스럽게 만들지 않도록 크리스천들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이 때문이다. 성경의 크리스마스는 큰 소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세상의 죄에 뿌리를 둔 슬픔과 고통을 거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성경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살펴보자. 두려움, 위험, 곤란이 그 이야기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이 문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가 되어 오지 마을 말 먹이통에 누워 십자가에서 범죄자의 죽음을 맞이하기로 작정되었을 때 시작된다. 그분은 여관에 빈 방이 없어 배척을 당한 채 탄생하셨다. 그분의 부모들은 성전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려” 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율법에 가장 가난한 자에게 허용된 제물인 것으로 볼 때, 아기 예수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복음 2장에서 경건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가 메시아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아의 오심이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챘다(“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그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마리아의 영혼을 찌르는 칼이라고? 시므온의 송가(the “Nunc Dimittis”)가 크리스마스 예배가 아니라 장례식의 표준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보통 동방박사의 방문이 끝나는 마태복음 2장 12절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 성구 읽기를 마친다. 하지만 그곳이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가장 어두워지는 곳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메시아를 멸하기 위한 헤롯의 유아 살인 작전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쳐야 했다. 실제로 헤롯은 성경에서 가장 끔찍한 행위인 베들레헴 근방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한다.“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8).눈물이 나고 애통하며 위로가 부족한 이들이 있는가? 그것들도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일부라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오해하지 말라. 내가 당신의 교회에 지금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만들라고 조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역대 최고로 즐거운 크리스마스”로 만들려고 하지도 말라. 성경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무얼 하려고 하지는 말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다. 구속 역사에서 놀랍고 중요한 순간이다. 이 성육신은 성도들을 기뻐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하지만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여전히 눈앞에 놓여 있다. 부활절 조차도 모든 문제와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완전한 해결과 화해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셔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을] 때(계 21:4)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원제: Grief, the Holidays, and a Biblical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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