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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예수님은 영원한 형벌을 단 몇 시간 만에 다 받으셨...
by Andrew Menkis
2021-04-01
겉으로 보기에 속죄의 논리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는 우리의 형벌을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된다.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 두 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죄는 영원한 형벌을 부른다(마 18:8; 살후 1:9; 계 14:11; 20:10). 둘째,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영원히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이제 더는 하나님의 진노를 겪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히 9:25–26). 성경이 가르치는 이 두 가지 진리로 인해 우리에게 질문이 생긴다. 예수께서 영원히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그가 죄에 대한 전적인 형벌인 영원한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려면 우리를 속죄의 논리로 인도해주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해봐야 한다. 1. 사망이란 무엇인가?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말한다. 사망은 하나님께 반역한 것에 대한 형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라고 경고하셨다. 아담이 그 열매를 먹자마자 죽은 것은 아니나, 그는 에덴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므로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말하고, 사망의 최종 단계는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는 것이다. 지옥이라 해도 하나님의 존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주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재판관과 형벌을 집행하는 자가 되신다. 2. 영원한 지옥이란 무엇인가?영원한 형벌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존재로 지으셨기에 반역과 불신을 택할 경우 그 결과 역시 영원하다. 둘째, 무한한 창조주에게 범한 죄에 대해서는 무한히 비통해해야 옳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벌 선고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지만, 위와 같은 생각으로 인해, 예수께서 지금도 계속 성부 하나님께 형벌을 받고 있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또는 예수께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우리 죄를 속하는 데 부족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죄에 대한 형벌은 시간이라는 차원에 있어 영원하다. 하지만 질적인 차원에서도 무한하다. 달리 말하면, 형벌에는 ‘시간적인’ 요소가 있는가 하면 ‘완료성’(completeness)의 요소도 있다는 뜻이다. 어떤 선생님이 학생에게 “친구들에게 욕을 하지 않겠습니다”를 100번 쓰게 하는 벌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이를 쓰는 데 30분이 걸리건 세 시간이 걸리건, 그 학생이 100번을 다 써야만 이 벌이 끝나는 것이다. 속죄도 마찬가지다. 형벌이 지속된다는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하게 퍼부어졌다는 개념을 잘 구분하여 생각하면, 무한한 존재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을 보내지 않고도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속량이란 무엇인가?'속량'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네 번 사용되었다(롬 3:23–25; 히 2:17; 요일 2:2; 4:10). 속량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가라앉히거나 잠잠케 하는 희생제물을 말한다. 이 희생제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진노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로 변화된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속량임을 가르친다. 완전한 희생제물로서, 그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실 수 있다. 성경은 이것이 단회적인 사건임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완전히 짊어지셨다. 이런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히 9:24–28). 그렇다면, 예수께서 영원히 형벌을 받지 않으셨는데도 그가 우리의 속량이 되실 수 있을까? 다시금 딜레마에 빠지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이에 답하려면 우리는 지옥의 실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4. 지옥에 죄인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이라 가르치셨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반역 상태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 내내 원하던 것, 즉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 반목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내어주신다.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삶이 아닌 그를 영원히 증오하는 삶으로 내어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이생에서도 바로 그런 삶을 원했다. 누구도 지옥의 고통을 겪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떨어지고자 했던 이들을 지옥으로 보내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죄를 짓기로 결정하고 회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옥에 영원히 ‘있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에 지은 죄 뿐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죄인인 상태라서 지옥에서의 그들의 삶이 영원한 것이다. 죄인들과 죄 없으신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가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죄에 대해 완전한 형벌을 다 받기까지 그 기간이 영원할 필요는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위에 남김없이 부어졌다. 한정된 시간 안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그 사실이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영광 중에 그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사실이 그가 우리의 구주라는 확신을 더해준다.이상하게 들리지만 논리적인 복음을 전하라복음은 불합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원 계획에 있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제시하는 복음 역시 듣는 이들에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논리를 더욱 잘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 더 잘 적용할수록 다른 이들에게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듣는 모든 이들이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이상하고, 불쾌하며, 완전히 바보 같은 소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놀라운 논리에 대해 충분히 묵상했다면, 복음이 일관성이 없고 자기 모순적이거나 비논리적으로 들리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원제: How Did Jesus Suffer Eternal Punishment in Only 3 Hou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형벌
사망
속량
지옥
구원
하나님의진노
완료성
영원한지옥
타락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됐을까
by 이승구
2021-03-31
모든 인간은 첫 인류 아담의 첫 번째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성 전체가 오염되어서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도 못하고, 진리의 빛이 비쳐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요 1:5, 10). 그리고 그 빛을 향해 나아오지도 않는다(요 3:20). 이 무서운 타락의 현실을 생각할 때,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과연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잘못된 생각첫째로,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으며, 혹시 타락했어도 하나님을 알고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생각이 있다. 사람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이런 생각과 이것의 변용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합리성과 합리적 의사소통 방식을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상담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힘을 합치면 문제를 능히 극복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혹시 뜻대로 안 되어도 그런 방향으로 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선택해서 믿고, 순종하면 구원을 얻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펠라기우스 사상(Pelagianism)이라고 한다. 이것은 타락의 심각한 결과를 말하는 성경의 선언과 대조되어 오래전부터 이단시됐지만, 역사 안에서 계속 존재해왔다. 현대에는 성경을 그대로 철저히 믿으려는 사람들 외에는 이런 사고가 거의 승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들도 이런 방식으로 나아가니 다른 영역에서는 얼마나 더하겠는가?둘째는, 인간은 타락했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의 원죄와 그 결과를 해결해 주시면, 우리의 그 순종이 구원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는 천주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이런 생각을 널리 펼쳤다. 그래서 종교 개혁 시기에 이런 천주교적 사유 방식과 구원 이해를 반(半)펠라기우스 사상이라며 종교개혁자들은 강하게 지적했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의 심각성을 철저히 받아들이는 개신교의 교회는 믿기 이전은 물론이거니와 믿은 후에도 사람은 늘 부족하고 흠이 많아 아무리 순종을 잘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의 공로만을 의지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런 철저한 개신교의 입장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그저 교파적으로 개신교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구속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게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것이 고려되어서 마지막 날에 최종적 칭의를 인정받게 된다는 주장을 한다. 이로 인해 개신교 내에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국 천주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에 좀 더 가깝게 가려는 사람들과 성경의 원리에 충실했던 개신교의 본래적 칭의 이해를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의 내적 분열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를 부정하는, 이와 같은 일이 개신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성경적인 생각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그저 하나님의 자비로, 타락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타락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을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우리가 믿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도록 해주신 그 분의 놀라운 자비에 대한 찬양과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영원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16항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신적 작정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이 타락 가운데서 구해내시는데, 그들의 행위를 전혀 보지 않으시고 순전히 당신의 선으로써 구원하시며 자비를 베푸신다.”‘벨직 신앙고백서’의 작성자였던 귀도 드 베레(Guido de bres)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4-7).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1)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셔서 (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즉 죄값이 치러졌고 자유한 사람이 되어(속량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는데 (3) 그 목적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해 왔다. 그러므로 (1)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창세전에 선택된 사람들이 (2)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건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데 (3) 우리를 이렇게 선택하신 목표는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때, 누가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라고 말한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반드시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작정이 이루어진 것이 창세전임을 에베소서 1장이 말하고, 이에 근거하여 다른 것들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 4:19)라고 하셨고,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라고 하신 말씀에 언급된 그 하나님의 사랑도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음을 배운다. 그러므로 존 칼빈의 말처럼, 과거의 좋은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믿음이 창세전에 있던 선택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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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급진적 결단이 아니...
by Brett Mccracken
2021-03-30
최근 몇 년 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자신의 역회심(deconversion)을 발표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인데, 전직 복음주의 작가, 목사, CCM 가수, 또는 교회에서 자란 이십 대가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 같은 엄숙한 표정과 함께 자유로움을 뽐내는 셀프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뒤로는 보통 아름다운 호수나 산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찍은, “불완전하지만, 이게 나야”라는 식의 마음을 표현하는 셀카를 게시한다. 그런 게시물에서 흔히 만나는 문구는 이런 것이다. “차마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 “이걸 게시하는 건 정말로 두렵지만”, 그리고 중간중간 '진화', '여행', '두려움', '발견', '정직', '진정함', '자유', 그리고 '희망' 등의 단어가 들어간 내러티브를 늘어 놓는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역회심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을 진지한 고민과 괴로움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내 관심은 이런 움직임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장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제 예측 가능해지고 평범한 일로 전락하기에, '나 자신을 찾는' 시대가 만든 놀라운 결과물이라고 보기 어려워진다.시대에 역행하는 도발성과는 거리가 멀게도, 이제 누군가가 기존의 제도적 종교와 결별한다는 선언은 사실상 이미 그런 식의 발표를 주류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수십 년 전의 문화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성을 위해 기존의 교리와 제도적 신앙을 버리는 것은 결코 서구 문명을 거스리는 게 아니라 사실상 서구 문명과 발맞추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 자율성을 선언하는 것, 즉 죄와 도덕으로 대표되는 구식 사고방식인 기독교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프라(Oprah) 쇼에 나와 그녀의 생각에 찬성하는 중산층 엄마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한계와 경계를 정하고 분노하는 하나님 대신 내가 바라는 '최고의 삶'을 지지하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존 레논(John Lennon) 스타일의 '사랑'과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이고, “선포하라, 그럼 네 것이 될 것이다”라고 설교하는 조 로건(Joe Rogan)과 같은 번영 설교자에게 열광하는 어리석은 청년들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며, 또한 지난 20년 간 나온 '종교, 영성, 그리고 신앙'에 관한 각종 베스트셀러들의 메시지에 동의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청소년 시절부터 믿던 기독교와의 이혼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무엇보다 당신이 지금 하려는 게 결코 반문화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오늘날 흔해 빠진 이혼처럼 그것은 너무도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나는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고 진짜 반문화적인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엄청나게 힘들고 또한 무엇보다 현대의 시대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진짜 기독교를 체험한 적이나 있는가?믿음을 지키는 것이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참된 성경적 의미의 기독교 신앙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기독교는, 교리에 관해서는 무식하면서도 총기를 소유하겠다는 열망과 국경의 장벽을 더 높이는 데는 열심인, 미국적 문화에 찌든 기독교가 아니다. 또한 동시에 사회 정의 캠페인을 위해 선택적으로 성경구절을 사용하면서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진보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안락함을 추구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급진적이지 않다. 지금 행여나 기독교와의 단절을 고려하고 있다면, 일단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만나 보길 권한다. 이 기독교는 당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기독교는 끊임없이 여러 면에서 당신을 압박할 뿐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왜곡되거나 조작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 기독교는 또한 단순히 당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더 닮아 가도록 끊임없이 당신을 밀어 부칠 것이다. 진짜 급진적인, 즉 진정한 반문화적 선택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니다. 진짜 급진적인 선택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이 기독교는 신비로움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무한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과 관련하여 세상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지적 씨름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해체하려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행여 모든 신앙을 다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 속에 잠재된 모든 긴장은 다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지적 멍청이를 위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이것이 당신이 경험한 기독교라면, 난 당신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당신이 기독교를 떠나려고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떠나려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돌연변이다. 내가 원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길들여 내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패러다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일 뿐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항상 우리의 패러다임에 도전하고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영역을 공격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기독교를 만나는 것은 보람 있지만 동시에 많은 대가를 치르는 일이기도 하다.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 중 하나가 지적인 부분이다. 경험적 증거 없이 계속되는 질문들과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역설들, '희미하게만 보는' 믿음(고전 13:12)의 부담을 계속 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만족하려는 겸손한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을 떠난 신학자 J. I. 패커(J. I. Packer)는 이렇게 말했다. “이해가 안 돼서 더 이상 믿지 않거나, 이해할 때까지 믿음을 미루는 것은 우리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했듯이, ‘믿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우선이고 보는 게 그 이후가 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정한 순서다. 결코 그 순서가 뒤집어질 수는 없다. 따라서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이 정한 순서를 따르려는 의지다.” 정말로 이것이, 즉 “믿음이 먼저고 보는 것(이해하는 것)은 나중이다”가 기독교 신앙이 진짜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런 신앙을 계속 갖는 것이야말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 뿐 아니라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신앙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이성을 힘들게 하는 신앙의 요소들을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맞춤형 영성의 외로움단지 제도적 종교의 해체를 고려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완전한 무신론으로까지 전환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기독교의 일부 측면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유동적이며 기분과 필요에 맞는 다른 철학과 의식 또는 영성을 통합하는 식으로, 보다 직관적이고 맞춤화된 영성을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종교 칼럼니스트 타라 이사벨라 버튼(Tara Isabella Burton)이 ‘이상한 의식: 신 없는 세상 속 새로운 종교(Strange Rites : New Religions for a Godless World)’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감성적 직관, 미학적이고 상품화된 경험, 자기 창조와 자기 개선, 그리고 셀카의 종교. … 제도, 신조, 신이나 우주 또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진리 주장과 결별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가치, 목적, 공동체, 의식 등 종교가 항상 제공하던 그 역할을 감당하는 새로운 종교. 이런 식의 '혼합 및 일치'를 내세우는 종교에서는 기도와 같은 전통 종교의 요소들 일부와 더불어 요가와 명상으로 대표되는 '웰빙' 관행의 일부, 그리고 타로 카드와 같은 뉴에이지 마법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사회 정의 또는 성소수자의 권리 등에 관한 도덕적 열성도 있을 것이다.이런 종류의 혼재된 맞춤식 영성이 급진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주류 소비주의가 지향하는 부르주아적 반복일 뿐이다. 이것은 특히 자본주의가 좋아하는 종교다. 왜냐하면 종교 기관의 울타리 밖에서 의미를 찾고 갈망하는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제품과 경험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문화적 시위와는 거리가 먼 이런 식의 나만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방식대로 만들어 먹어라”라는 믿음의 버거킹 브랜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극도로 소비주의적인 세상에서 맞춤형 영성을 선별하려는 충동에 저항하고 개인 취향에 맞지 않을 때에도 일관되고 확립된 종교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급진적이다. 또한 맞춤식 영성은 대개 특권층에게나 어울린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고급스런 영성을 추구하려면 어느 정도 돈과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가능하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제도의 틀 밖에서 얼마든지 '홀로' 영성이 주는 위험을 의식하지 않고 직관에 따른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생존뿐만 아니라 미래에 출세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구조, 제도, 전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저소득층과 개발도상국에서 무신론과 불가지론을 만나기 힘든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적으로 타인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려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이야기다. 따라서 맞춤형 영성(또는 영성 없음)에 찬성하여 종교를 버리는 것은 편안한 소비주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부르주아적 선택이다. 그것은 당신을 배신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기독교를 떠날 때 새롭고 더 넓은 자유의 문이 열리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당신은 자유와 가능성의 지평을 오로지 단 한 사람으로, 즉 당신 자신으로 좁히는 것이다. 대단하게 들리지만, 이것이 소비자주의자로 사는 내 세상(iWorld)의 방식이다. 이런 식의 나 중심의 영성은 결국 밀실 공포증과 외로움으로 귀결된다. 공동체가 주는 제약, 외부 권위의 요구 그리고 제도적 구성이 요구하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개방적이고 낭만적인 자유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약이 사라진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무한한 자율이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당신이 만든 진리가 아니라, 참 진리,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주는 진리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직감을 믿고, 혼자 가는 것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가 주는 급진적 대가탈기독교와 세속화 문화에서 해체는 급진적인 행위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말이 된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오늘날 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그 어느 때보다 변두리로 밀려났으며, 그 어느 때보다 반갑지 않은 존재다. 서구 문화가 지향하는 오늘날, 그 모든 규범을 파괴하는 진정한 기독교를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을 믿으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라고(눅 14:27) 요구한다. 표현을 중시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진정성, 그리고 튀는 개성을 강조하는 “당신은 당신이 만든다”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라고(롬 8:29), 하나님을 본받으라고(엡 5:1) 요구한다.소비주의적이고 탐욕스러운 문화에서 기독교는 값비싼 관대함(눅 21:1-4)을 가지고 물질적 소유를 기꺼이 포기하라고(마 19:21; 눅 14:33) 요구한다. 자기 홍보와 자기 자랑 그리고 셀카로 대표되는 자기 지향적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종으로 살라고 요구한다(빌 2:3-4; 갈 6:2; 마 20:26-28).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진정한 자유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요구한다(고전 6:20).서로 동의하는 한 자유로운 섹스를 승인하는 진보적인 성 문화에서 기독교는 성은 오로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누는 언약적 결합이라고 말한다(창 2:24; 마 19:3-6.; 고전 7:2).'권력'과 '승리' 그리고 '최고의 삶'을 주는 성공을 특권으로 삼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연약함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한다(고후 12:9-10).당파성을 중시하며 적을 최대한 나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적까지 '소유'하는 것이 삶의 방식인 세상에서 기독교는 그들을 사랑하라는 급진적인 도전을 던진다(마 5:44).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버리고 인종 차별, 성 차별 및 외국인 혐오를 통해 타인의 비인간화를 정상화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창 1:27) 존엄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분열로 가득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는 그 어느 때보다 헤어지기 쉬워진 세상에서 기독교는 화해하라고 요구한다(엡 2:11-22).'모든 길은 어차피 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게 위로가 되는, 다양한 신념의 다원주의 세상에서 기독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하나의 길 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 믿음을 요구한다(요 14:6).과학적 합리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기독교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아이를 낳은 처녀, 죽음에서 부활한 육체, 기적적인 치유).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실행하거나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를 설명하는 목록은 이보다 훨씬 더 길 수 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기독교를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선호하는 정치, 음악 또는 성적 성향 등)에 편리하게 맞추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또 그리스도의 사역에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가 요구하는 모든 대가를 받아들이고, 또한 기독교의 모든 주장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힘들고 이상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 자신들이 믿고 실천하는 것 때문에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랄 이유가 없다(마 7:13-14). 그렇기에 인스타그램에서 역회심을 발표하는 게 일상이 된 현실을 보면서도 놀랄 필요가 없다. 정말로 반문화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기독교를 버리는 게 아니라 기독교를 더 굳게 붙잡으라.편집자 주:이 기사는 브랫 맥크레켄(Brett McCracken)이 쓴 '신앙을 버리기 전에: 교회 속 의심을 해체하기(Before You Lose Your Faith: Deconstructing Doubt in the Church)에서 발췌한 것이다.원제: Deconversion Is Not as Countercultural as You Thin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탈기독교사회
좁은길
역회심
인스타그램
영적자율성
반문화적
JI패커
맞춤형영성
기독교를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
by Justin Bass
2021-03-29
기독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적 증거는 무엇일까?이 질문과 관련한 분야, 즉 고대사, 고전, 그리고 성경 연구 분야에서 가르치는 학자들은 종교적 배경과 관계없이 나사렛 예수와 관련한 몇 가지 기반 사실에 있어서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공생애를 시작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자 귀신 쫒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가 통치하던 시절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그를 따르는 어떤 무리가 예수가 부활해서 자신들 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증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과거 그를 반대하던 바울도 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러면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관한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가장 주된 자료는 1세기에 쓰인 신약 성경이다. 그럼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에게 얼마나 더 시간적으로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역사적 증거는 과연 무엇일까?”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당신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겠다.기반 사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기독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증거 중에는 4세기 초에 만들어진 코덱스 바티카누스(Codex Vaticanus) 즉 바티칸 사본과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즉 시나이 사본과 같은 필사본이 있다.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는 신약 사본 연구에 있어서 인디애나 존스와 같은 인물인데, 그는 1859년 이집트에 있는 성 캐서린 사원에서 시나이 사본을 발견했다.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는 나중에 기록하기를, 자신이 사실상 불에 타버릴 뻔한 시나이 사본을 구했다고 주장하면서 수도원 사제들이 이미 두 뭉치의 사본을 땔감으로 썼고 나머지도 불태우려고 하는 것을 자기가 막았다는 것이다. 그는 시나이 사본을 '현존하는 가장 가치 있는 성경 보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상당 부분에 있어서 시나이 사본보다 더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apyri manuscripts)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 중에는 3인치짜리 양피지에 요한복음(18:31-33, 37-38)의 다섯 구절이 적힌, P52(역자 주: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번호가 붙는다. P52는 학계에서 특히나 유명한, 상징적인 사본이다)라고 불리는 사본이 있다. 이 작은 보물은 학계에서 서기 125년에서 17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물론 50년보다 더 긴 간격을 두는 학자도 많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것들 외에 또 하나의 혁명적인 발견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발견은 시나이 사본보다 더 위대하고 또한 P52 사본보다도 더 탁월하며, 내가 생각할 때,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훌륭하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3절부터 7절에 나오는, 바울 이전(pre-Pauline)에 이미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던 신경(creedal tradition)의 발견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진주'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사도적 신경 진술은 신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다른 어떤 고대 문서를 뒤져봐도 이런 구절은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비록 초기 기독교 운동의 흔적이 바로 이 다섯 구절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다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복음의 진수와 기독교 신앙이 토대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 사실을 발견하기자, 그럼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증거를 살펴보도록 하자.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전 15; 3-4)바로 이 부분이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바울이 나중에 추가한 부분을 뺀, 바울이 받아서 쓴 실제 신경이라고 한다.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신약 학자이자 무신론자인 게르트 뤼더만(Gerd Lüdemann)은 이 발견을 '최근 신약 학계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성취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초대 교회, 중세 신학자, 그리고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 학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이 구절을 인용했고 또 주석까지 썼지만,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구절이 애초에 바울이 쓴 게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서기 49년에서 50년보다 적어도 10년 더 이전부터 이미 성도들이 암송하던 신경, 즉 신앙고백을 인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성경 구절 안에서 이런 사실을 발견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바울은 이 구절을 소개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전 15:3).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그는 자신이 받은 어떤 특정한 전통을 고린도인에게 전했는데, 그 전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을 더 밝히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고전 11:2 참고). 그것은 예수님에 관한 어떤 가르침과 이야기(고전 7:10; 9:14; 11:1; 고후 10:1), 최후의 만찬(고전 11:23–26), 찬송(고전 8:6; 고후 8:9), 그리고 바로 예수님의 죽음, 장사, 부활 그리고 다시 나타나심에 관한 바로 이 신경이다(고전 15:3-7).두 번째는 언어적인 이유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 어디에서도 쓴 적이 없는 단어와 구절을 여기에서 쓰고 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사”, “사흘 만에”, “보이시고” 그리고 “열두 제자” 등은 오로지 여기에만 나오거나 아니면 다른 데서 사용되었어도 당시 전통의 영향을 받아서 쓰였다. 이런 점들 때문에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예외 없이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은 바울 이전에 성도들이 고백하던 신경이라는 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 신경은 심지어 바울이 가장 먼저 쓴 서신서보다도 앞선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앞서는 걸까? 언제 어디서 바울은 이런 신앙고백을 받은 걸까?학문적인 배경 또는 (무신론을 포함해서) 신앙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학자들은 사실상 만장일치로 이 신경이 예수가 죽고 5년 안에 만들어졌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가 죽고 10년 정도 흐른 후에야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몇몇의 학자도 있지만, 또 어떤 이는 심지어 예수가 죽고 일 년 안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약 학자인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 신앙고백은 예수가 죽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신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져서 정형화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나는 제임스 던이 가장 뛰어난 예측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고작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새롭게 믿게 된 사람들은 아마도 사도들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에 이 신경을 외우고 또 그 내용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경은 회심한 사람들에게 입문 교리 교육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서,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은 사도행전 속 설교(행 10:39–40; 13:28–31)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 속 예수 수난 이야기의 교리적 요약이자 기본이 되었다. 그럼 바울은 언제 어디서, 도대체 누구로부터 이 위대한 진주를 전달받은 것일까? 학자들은 아마도 그건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직후(서기 34)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로부터 3년 후인 서기 37년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2주를 함께 보냈고(갈 1:18), 또 그 기간 중에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갈 1:19)를 만났다. 나는 후자가 맞으리라고 본다. 그래야 이 신경 속에 나오는 내용과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바에게 보이시고……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고전 15:5,7). 신약 학자이자 불가지론자인 바트 어만(Bart Ehrman)도 이 점에는 동의한다. “그 예루살렘 방문에서 아마도 바울은 그가 언급한 모든 전통, 그리고 그가 전통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의심됨에도 불구하고 전통으로 간주되는 내용을 전수 받았을 것이다.”기독교인은 공격적으로 나가야 한다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이 땅을 밟고 있는 것은 단지 기독교를 증명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와 최초의 증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강력한 변증을 통해서 21세기 불신자들에게 도전해야 한다. 서기 30년,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고 다시 살아나 만유의 왕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 수제자 베드로 그리고 예수의 적이었던 바울까지, 이 세 사람 모두가 부활한 예수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 세 사람은 부활이 역사적으로 도무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임을 확신했다(고전 15:11 참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 사람이 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그들이 가진 신앙의 진실됨을 증거하고 있고, 이는 바트 어만과 같은 회의론자조차 설득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이 세 사람이 목격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내어놓은 게 아깝지 않게 느낄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오래된 신경에 따르면 열두 제자와 500명이 넘는 사람이 예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는 예루살렘에서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음으로 만나고 있다. 회의론자였다가 오로지 부활 때문에 기독교인이 된 A. N. 윌슨(A. N. Wilson)은 이렇게 썼다. “바하는 이 이야기를 믿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지난 1,500년 간 가장 위대한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이 부활 이야기를 믿었다.”우리는 이제 고린도전서 15장 3-7절이라는 역사적인 근거에 깊이 뿌리를 박고, 이 믿지 않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서 과감하게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들에게 대답을 요구해야 한다. “사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로마 제국을 송두리째 뒤집었으며, 인류 역사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수십 억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이 능력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당신은 생각합니까?”도대체 그들이 누구를,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바뀌었던 걸까? 원제: What’s the Earliest Evidence for Christia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변증
공생애
본디오빌라도
십자가
바티칸사본
시나이사본
파피루스
신앙고백
고린도전서15장
믿는 자는 어리석어 보인다 최소한 지금은…
by Jon Bloom
2021-03-28
하나님의 지혜는 종종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에야 제대로 보인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지나가도, 하나님의 지혜는 마치 오래된 산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지혜는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그와 반대로 시간은 하나님의 지혜가 진실임을 증거할 뿐 아니라, 신실하게 그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들의 참됨을 증거한다. 만약 지금 교회가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다면,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를 생각하길 바란다. 그날 아침 로마 총독의 관저에서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지금 당신이 목격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누가 약자고 누가 강자로 보이는가? 누가 어리석어 보이고 누가 상식을 가진 것 같은가? 두 사람 중에 누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하는 것 같은가? 총독과 주님“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지금 농담하는 거지! 빌라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자신의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대단히 불편한 존재였다. 그날 로마 총독이 예정했던 일정에 산헤드린과 문제를 일으킨 랍비를 재판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도 아침에 처리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정으로는 말이다! 평의회는 빌라도가 그 남자를 반역죄로 유죄 선고하기를 원했다. 그것도 바로 오늘. 그러니까 유월절 전에 말이다. 빌라도는 그런 압력이 못 마땅했다.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인물, 예수에 대해서 과거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 남자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가 받은 첩보에 의하면 예수는 그냥 또 한 명의 유대 신비주의 선생일 뿐이었다.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 황제를 폄훼하거나 또는 로마에 반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는 몇 명의 로마 군인에게 영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로마를 향한 그 어떤 불충도 보인 적은 없다. 쉽게 빠져나오기문제를 일으키는 유대인 하나 죽이는 것은 빌라도에게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처형'을 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예수 자신이 반란을 조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처형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유대인 과격파(zealots)는 적절한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예수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예수라는 인물은 어찌 이리도 정치적인 감각이 없는 것인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은 사실상 빌라도가 지금 본질적으로 예수에게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즉각적인 길을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가 할 일은 그냥 빌라도에게 빠르고도 명확하게 “아니다”라고만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로마로부터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다른 종교 문제는 산헤드린이 해결하면 될 일이고, 빌라도는 이제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중요한 일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대답은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게 뭐하는 거야, 지금? 지금 죽고 싶지 않다면, 상상이든 뭐든, '왕국'이라는 단어를 로마 총독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이제 빌라도는 한층 더 깊이 조사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누가 망상을 하고 있는가?“네가 왕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는 대답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빌라도는 비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 신비주의자군. 망상에 빠진 건가? 어쨌든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위협은 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야.' 예수는 진리의 왕이었으며 그의 관심은 기꺼이 그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빌라도의 눈에 그들은 결코 반란을 일으킬만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요 18:36). 이것은 반역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인 광기였다. 굳이 예수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빌라도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 예수를 풀어줌으로써 로마가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보여주는 길, 산헤드린도 체면을 차리고 유대 군중의 분노도 잠재울 수 있는 길. 바로 유월절 죄수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빌라도는 이 진리의 왕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세상과 교회그날 아침 관저에 앉은 빌라도, 로마 제국을 등에 업은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예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거기 서 있었다.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사 53:3).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빌라도의 말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들린다. 예수의 말은 망상에 빠진 것 같고 이상하기만 하다. 빌라도는 부당한 처형을 막고자 했고, 좌절감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 평의회와 최대한 등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았으며 또한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예수는, 불가사의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 우리는 예수가 강했고 빌라도가 약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빌라도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었다(요 19:11). 이제 우리는 지혜로운 이는 예수였고, 빌라도는 어리석었음을 안다. 빌라도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전 2:14).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가 아닌 예수야말로 그와 관련한 모든 이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단지 한 도시의 평화만을 생각하던 빌라도는 수십 억명의 평화를 위해 걸어가는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위치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요셉'과 '다니엘' 그리고 '가이사의 집 사람들'(빌 4:22)처럼 정부의 요직에 둔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세상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권력자들 눈에는 망상처럼 보이는 진리를 말하고, 오해를 받고 얼마든지 잘못 해석될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약한 곳에 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더 강하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나의 증인이 되리라예수가 빌라도에게 증언하듯이, 또 바울이 증언하듯이 (그리고 그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우리 중 누군가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권력자 앞에 서든지, 아니면 직장 동료나 이웃 또는 가족 앞에 서든지, 우리가 말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맥락에서만 보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귀에 어리석은지, 또 우리가 지금 얼마나 약자의 위치에 있는지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빌라도 앞에 서 있던 예수를 기억해야 할 때다. 중요한 것은 어색한 상황이 아니다. 설혹 생명이 달린 심각한 상황에서라도 보이거나 들리는 게 얼마나 이상한가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담대한 말이 아무리 비웃음을 사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신실하게 붙잡는가의 여부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이 그 순간에 실제로 행하고 있는 역사가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Faithful Will Look Foolish — for Now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세상
교회
빌라도
진리
증인
유행
지혜
복음주의 교회는 지금 표류 중인가
by Trevin Wax
2021-03-27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비록 개신교 전체가 몰락하고 있지만 그중 복음주의 진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며 승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죽어가지만 우리는 번성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그러나 이런 낙관주의는 믿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지난 몇 주 간 나는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와 마이클 에머슨(Michael Emerson)이 쓴 ‘미국의 복음주의(American Evangelicalism)’를 다시 읽었다. 1998년에 나온 책인 만큼 저자가 사회학적 분석을 위해서 사용한 자료는 유효 기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전투하고 번성하는' 운동에 대한 묘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한 울림이 있다. 또한 스미스와 에머슨이 실시한 복음주의 교회와 (이미 지난 세기말부터 급격한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주류 및 자유주의 교파 사이의 대조 분석에서는 여전히 얻을 것이 많다. 당시 그들이 목격한 적지 않은 강점들은 오늘날 통계에서도 여전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특히 독립 교단(non-denominational churches)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근 25년 전에 쓰인 이 책에 실린 주류 개신교 교회 신자들의 말을 정독하면서 내가 놀란 것은 오늘날 전국에 산재한 복음주의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그들과의 차이점이 아닌 유사점 때문이다.신앙 전통이슈가 되는 몇몇 경향을 살펴보기 전에, 종교 기관에게 영적 활력을 주는 요소가 무엇이었는지를 저자들의 시각에서 고려해야 한다. 저자들은 신앙 전통이 가진 강점 여섯 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신실하게 고수하는 것2. 삶에 있어서 신앙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3.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큰 자신감과 확신을 갖는 것 4. 다양한 교회 활동과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 5.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신적, 실질적으로 헌신하는 것 6. 교회의 오랜 전통을 중시하고 새로운 회원들과 그 전통을 중심으로 교제하며 또한 지속적인 전도를 통해 회심자를 만들어내는 등, 등록한 교인들의 지속성을 꾸준히 높게 유지하는 것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에머슨과 스미스가 복음주의자의 강점이라고 발견한 영역들이 주류 및 자유주의 개신교 사이에서 오히려 약점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여기 내가 소개하는 25년 전 주류의 사고방식을 오늘날에는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에게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런 사실이 다가올 미래에 역사적 복음주의 교단이 만날 상당한 수준의 감소를 예고하는 걸까? 아직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과거 주류 개신교의 경향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언제라도 바뀔 수도 있다. 몇 가지 관찰한 사항들을 살펴보자. 1. 기독교 신학과 윤리를 향한 헌신의 부족당신은 무엇을 믿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또는 교단이 표류하면 이 질문에 대한 응답도 애매해진다. 기독교적 믿음과 실행을 둘러싸고 조금씩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경우에 따라 기독교의 진리는 단지 다른 많은 종교들 중 하나처럼 주관적 확신으로 그치기도 한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 간의 구별은 간과되거나 아예 무시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교회 출석자들의 내면과 삶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이 가능한 확실한 내용과 헌신을 찾기는 힘들다. 오늘날 전통적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믿음과 도덕은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과거 기독교 전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25년 전만 해도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핵심이 되는 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표현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다. 리고니어(Ligonier)와 라이프웨이리서치(Lifeway Research)가 발표한 보고서, ‘신학 현실(The State of Theology)’에 따르면 오늘날 복음주의자 사이에 교리적 혼란이나 성경 문맹이 만연하다. 기독교 신학과 윤리의 많은 핵심 요소가 수정되거나 또는 아예 무시되는 것은 그래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2. 신자들 사이에 만연한 행복 추구복음주의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삶의 목적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불신자인 이웃과 비교할 때 특별히 다른 점이 있을까? 1998년 에머슨과 스미스는 주류 개신교인을, “미국의 문화적 실용주의와 개인이 스스로 정의하는 행복이라는 도덕적 권위가 기독교적 가치를 재정의하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이 말은 일상에서 기독교 교리와 윤리적 지향점이 노골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삶의 목적과 자유에 관해서만은 보다 더 일반적인 미국적 관점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주류 개신교인에게 신앙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다름 아닌 '개인적 만족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묘사했다고 에머슨과 스미스는 지적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적 권위는 자신의 삶에 대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나 헌신적인 제자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된다. 신앙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잘 지내도록 만들어 주고 또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딱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이런 진술은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신자들의 사고 방식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같은 말을 반복했을 뿐 아니라, 굿페이스(Good Faith)가 제공하는 충격적인 통계를 계속해서 인용하면서 노골적인 신앙의 개인화에 대해서 경고했던 것이다. 다양한 통계를 통해서 오늘날 미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생각하는 삶의 목적이 전반적인 미국인의 사고와 다를 바 하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내면의 성찰을 통한 은밀한 욕망의 추구다.) 많은 숫자가 부흥을 의미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너무도 많은 교회 신자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는 영적 활동이 아메리칸 드림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신론적 도덕 치료로 만들어지는 기독교 그리고 사람으로 넘치는 교회다. 물론 그런 상황도 그리 오래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3. 삶의 핵심이 아닌 한 부분일 뿐인 신앙지난 세대에 복음주의자들과 주류 개신교인들 사이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신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믿음의 중심성 여부였다. 복음주의자들은 믿음을 언급할 때 자신의 삶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고백했지만, 주류 개신교인은 '신앙은 단순히 삶의 여러 중요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해서 마치 삶의 한 구석에 있는 가구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은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질서와 의미를 제공하는, 강렬한 개인적 헌신이 필요한 무엇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하는 당연한 삶의 한 측면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주류 기독교인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 참여를 그들의 삶에서 바뀔 수 없는 근본이 아니라 다른 우선순위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많은 주류 및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은 교회 출석을 사회 생활의 중심이나 영적 생활의 핵심이 아니라 일주일을 살면서 거치는 일상 중 하나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20여 년 전 에머슨과 스미스의 설문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보다도 적은 빈도로 교회에 참석한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버리는 이런 상황과 관련해 몇 년째 경고를 하고 있는데, 교회보다 다른 사회 활동(운동 경기 참여, 가족 여행 등등)을 우선시하는 가족이 어떻게 해야 율법주의에 빠져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인 교회 참여와 관련해서 적절하게 도전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도 한 세대 전 주류 개신교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삶의 가장자리로 밀리고 있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4. 식어버린 전도 열정복음의 내용을 모를뿐더러 복음의 진리가 주는 확신도 없는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기독교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개인적 취향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왜 전도하려고 땀을 흘릴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영원이 존재하지 않고, 유일하신 구세주를 믿는 신앙이 아니라 성실함으로 받는 게 구원이라면, 굳이 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전도해야 할까? 스미스와 에머슨은 1990년대 후반, 자녀들 전도조차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식어버린 주류 기독교인의 전도 열정을 지적했었다.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전 선배들이 걸어갔던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론급속한 수적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말 이미 영적 쇠퇴의 증거가 주요 교단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들이 다가올 세대에도 여전한 영적 활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과거의 성공이나 현재 경험하는 성장 또는 건강한 징후들 때문에 빠지는 안일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계심을 잃지 않을 때, 어쩌면 우리를 미래의 붕괴로 이끌지도 모를, 우리의 선배가 겪었던 동일한 문제에 빠지는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원제: Is Your Church or Denomination Drif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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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
복음주의
주류개신교
낙관주의
기독교신학
기독교윤리
신학현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
by 고상섭
2021-03-26
고난 주간이 다가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교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이 땅의 고통과 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에서 피터 버거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고통의 해결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모든 문화는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방법들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바로 성육신과 대속의 교리다.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 알베르 카뮈는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 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상할 수 없는 위로들로 가득 차 있다. 절대자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쓴 잔을 경험했다는 것은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 당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라고 가르친다. 자기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는 삶을 사셨다고 말한다. 거절과 배신, 가난과 학대, 낙심과 좌절,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극심한 고통, 그리고 죽음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경험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조차 감당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셨다. 전능하신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자신의 힘을 버리고 약함과 어두움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목회자인 존 딕슨은 ‘하나님의 상처’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메시지를 들었던 어느 무슬림 남성은 “우주의 창조주가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세력에 굴복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군요”라고 말했다. 존 딕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슬림 청년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던 사실을 크리스천들은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신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 가운데 오로지 기독교만이 신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을 없애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고통이 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없는지는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류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안겨 주시려고 더없이 깊은 고난에 스스로 몸을 던지셨다.” 이것은 고난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알려주신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세 살짜리 아이는 부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안다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무언가를 과연 아끼실까?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이라면 우리에게 더없이 유익하고 합당한 것들을 은혜로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이미 넘치게 주셨다.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면 어째서 이 땅에 가득한 고통과 어둠을 단번에 손보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세상에 있는 비극을 왜 멈추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택하기보다 직접 불의를 산산이 부수고 악을 끝내셨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 모든 악을 없애주셨어도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악은 이어질 것이고, 지속적으로 악을 무너뜨리는 일을 계속 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악과 어둠은 대부분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악과 고통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손에 쥐고 오셨다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내셨다. 두 손에 칼을 쥐시는 대신 못박히셨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온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를 끝내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대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는 더 근본적인 회복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악 앞에서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과감히 맞서고 견디게 한다. 또한, 우리 마음에 도사린 악을 몰아내는 특별하고 강력한 능력을 가진 신인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빛이 되신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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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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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카뮈
팀켈러
고통에답하다
십자가
부활
성육신
대속교리
애틀랜타 혐오 살인 사건을 애통해하면서
by Julius Kim
2021-03-25
나는 오늘 처음으로 애틀랜타 지역의 스파 세 곳에서 죽임을 당한 여덟 명의 이름을 모두 들었다.다오유 펭현정 그랜트순자 김폴 안드레 미셸순 C. 박샤오지에 탄엘라이나 애슐리 연용 A. 유 이 이름들은 익숙한 만큼 또한 멀게 느껴진다. 그래서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의 내력이나 배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것 하나는 있다. 이 여덟 명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놀랍고도 아름답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목숨은 이제 무모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고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내 사랑하는 가족들도 이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어 또한 슬프다. 내가 사는 곳은 그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곳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져 있고 거기서만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는 남일 같지 않다. 한국계 미국인인 내 아내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 여성들의 나이와 비슷하다. 18세와 20세인 내 딸들은 2020년 3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아시아인에 대한 괴롭힘, 차별, 폭력 등의 인종차별을 당한 3,800명에 속할 수도 있었기에 불안과 걱정이 밀려온다. 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섭리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아내와 두 딸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이 명단에 있는 여덟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내 마음을 다독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너무나도 내 개인의 일처럼 느껴지고 너무 고통스럽다.성경은 하늘 아버지께서 알고 정하지 않으시면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진리를 가르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영원무궁하며 변하지 않는 분이며 지혜와 능력과 거룩함과 정의 그리고 선과 진리이시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4).그래서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들어 있다. 하나님이 선하지 않고 통치하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거나 믿을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절망에 빠질 것이다.'기독교 강요'의 특히 통찰력 있는 한 부분에서 존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평안과 자유를 준다고 말한다. “이전에 그를 압박했던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뿐만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중략] 그분의 위안을 말하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권능으로 모든 것을 유지하시고 권위와 뜻으로 통치하시며 지혜로 다스리시므로 그분이 정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1.17.10).칼빈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심지어 어두운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지혜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참새가 날아가고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 없이 되어지는 것은 없다(마 10:26-33)는 진리에 복종하면서 위로와 평안을 찾았다.고통하지만 칼빈은 또한 죄와 그 결과가 계속 우리 마음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계속해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알았다.성적 중독에 포로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개인에 의해 살인이 촉발된 것은 사실일지라도 이러한 변태적 행위가 아시아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 장소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그래서 살인을 이끈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유색인종, 특히 여성을 비인간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현실과 씨름해야 한다. 그 다음 이 사악한 행위를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봐야만 한다. 개별적 사건뿐만 아니라 상황적 맥락 모두를 살펴봐야 한다.그렇게 보면 내가 느끼는 고통은 피해자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별과 편견의 고통을 겪은, 다르다는 이유로 비인간화되거나 무시되는 수치를 당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1871년 중국계 미국인이 몰매를 맞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을 강제수용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아시아계에 대한 반감의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해 왔다. 내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고통과 수치심을 느꼈다.더욱이 상관관계가 항상 인과관계와 같지는 않으며,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란 범인의 어린 시절과 그의 죄악된 행동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따라서 더 많은 정보가 나오고 해석되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데 주의하고 싶지만, 살인자들이 조지아와 캘리포니아 출신이며 나와 비슷한 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기도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나의 신념은 내가 고통 속에서도 기도하게 만든다. 내 친구 마크 브르홉(Mark Vroegop)이 그의 책 “Weep with Me: How Lament Opens a Door for Racial Reconciliation”에서 가르쳐주듯이, 성경 중 특히 시편에 나오는 슬픔의 언어는 내 영혼의 깊은 신음 소리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슬픔의 기도는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고통의 기도는 신뢰로 이어진다. 눈물, 사랑, 단결은 오해, 불신, 상처를 치유해준다.”그래서 나는 우는 자들과 함께 계속 울고자 한다(롬 12:15). 이념이 아닌 긍휼로 시작할 것이다. 상처받고 무너진 이들을 계속 예수님 발 앞으로 이끌고, 복음을 통해 치유와 회복으로 이끌고자 한다. 우리가 함께 … 애통해할 수 있을까?내 주변의 모든 죄와 망가짐으로 인해 나는 복음이 필요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애통의 기도를 올리면서, 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걱정으로 호소할 뿐만 아니라, 온전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와 수치를 모두 십자가에서 감당하시고 나를 의롭게 하시고 양자 삼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좋은 소식에 나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 순례 여정은 고통으로 표시되지만, 신뢰와 순종으로 그분과 함께 계속 동행하고자 한다.이제는 어떻게 할까?이 비극을 내 안에서 처리하고 돌아보면서, 이 세상이 내 집이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를 원한다. 종말론적 순례자로서 모든 부족, 언어, 민족, 국가의 형제자매들과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서 잔치를 기다리고 있는 천국으로의 어려운 여정을 고대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한 목소리로 새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싶다. 내 가족 특히 내 딸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과 걱정을 쫓아낸다는 것을 알도록 돕고 싶다.나는 더디 말하고, 빨리 듣고, 더디게 화 내기를 원한다. 특히 인종 차별의 역사와 고통,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그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인지 이해하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려고 노력할 때 더욱 그러하다. 친절은 회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너무 지나친 자만과 절망이 기도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결국,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품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그런 다음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커짐에 따라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보화를 사용하여 가정과 교회, 기관과 지역 사회에서 더 많은 복음의 충실함과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기를 원한다. 마라나타. 오시옵소서 주 예수님.원제: Reflections on the Killings in Atlant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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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의사인 내가 목자의 심정이 될 때
by Scott James
2021-03-24
각종 의료 장비와 튜브, 그리고 동물 인형들이 만들어내는 만화경과 같은 병실 중앙에는 매우 아픈 아이가 누워있다. 내가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의 혈관으로는 진정제가 흐르고 있는데, 행여나 아이가 축축해진 폐에 산소를 집어넣고 있는 인공 호흡기를 잘못 움직여서 뽑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침대 끝에 서서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전혀 건강에 문제가 없던 제이콥은 지금 이렇게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 우리 아들은 언제 완쾌되나요?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병실 한편에 앉아있는 부모는 아직까지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힘들어하는 게 역력하다. 부모의 마음속에 제이콥은 여전히 건강한 아이다. 그들의 삶에 침입한, 생각지도 못한 이 병을 놓고 그들은 지금 “왜?”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놓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리고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나는 의사 경력 내내 부모가 자녀에게 발생한 상황을 바로 이해하도록 도우려 했지만, 두 번째 질문인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에 관한 의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일이 생긴지를 이해하게 된 부모라고 해도, 내 아이를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그들이 정말로 듣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부모에게로 다가가자 그들은 희망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전 제임스 박사고, 이 병원 감염내과 의사입니다.”그나마 상황이 좀 좋을 때면, “난 부모님이 만나고 싶어하는 의사가 아니랍니다”라는 식의 농담을 건네곤 한다. 사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경우가 그런 경우인데, 그 부모는 지금 그들이 느끼는 긴장을 얼굴 표정만으로도 내게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도움을 주는 게 나의 목적이지만 그럼에도 때로는 부모가 힘들게 붙잡고 있는 정서적 안정 마저 파괴하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게 나의 입장이다. 병실에 들어갈 때면, 제발 나쁜 소식만은 전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들의 표정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나는 나쁜 소식의 잠재적 전달자고, 나의 한마디가 부모를 더 큰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나는 일단 제이콥의 발병 원인과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주치의가 내게 연락을 했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아직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 병원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어떤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의사인 우리도 모르는 일, 또 예상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못한 돌발 변수에 관한 솔직한 전달이 제이콥과 같은 발병 초기 단계에서 부모와 나눠야 할 이야기다. 지금 제이콥의 부모를 만나는 이유가 무엇보다 그들에게 안정감과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지만, 그렇다고 지킬 수 없는 지나친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뢰를 손상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 희망을 주는 것은 바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직까지 내 의사 생활 내내 거짓 희망을 듣고 싶어하는 부모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중요한 질문 던지기나는 일단 제이콥의 상태가 오늘 아침에 어땠는지 묻는데,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들의 소중한 아이는 지금 부모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퉁퉁 부은 얼굴로 병원 침대에 누워 튜브와 전선에 연결된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는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제이콥이요? 아주 좋았지요, 선생님은 오늘 아침 어떠셨어요?”그러나 이 질문에 부모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부모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단지 낙관적인지 아니면 심지어 희망을 갖고 있는지, 비관적인지 아니면 이미 포기한 상태인지를 알려준다. 이런 질문은 나로 하여금 지금 이 병실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함으로 부모에게 좀 더 나은 정보를 전달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이콥의 부모는 희망적이다. 현실을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아들이 지금도 매우 위중한 상태고 한때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제이콥의 부모가 이해하는 아들의 아침 상황을 들으면서 나는 병실 내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한다. 제이콥이 입원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낸 카드와 메모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는 내 딸이 연습하고 있는 초급 서예 수준의 꼬불꼬불한 글씨로 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적힌 카드도 보인다. 병실 구석 접이 침대 위에는 이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보낸 위로 물품도 놓여있다. 교회가 도와야 한다자녀가 중병에 걸렸을 때 가족이 받는 지원 수준과 부모가 느끼는 정서적 안녕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 관계가 있다. 이때야말로 소속감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회가 슬픔에 잠긴 가족을 돕는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제이콥의 가족은 서로의 짐을 짊어지라는 명령(갈 6:2)에 순종하는 믿음의 가정이 받는 축복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한때 그 명령을 추상적으로 이해했었지만, 가까이에서 비극을 접하는 일을 하다보니 그 명령은 다름 아니라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형제를 돕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현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제이콥의 부모는 분명하게 그 사랑에 휩싸여있다. 제이콥 가족과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나는 그들이 이 끔찍한 상황을 영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들의 언어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드러내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내게 있어서는 이런 영적 단서를 찾아서 그들을 가장 잘 도울 수있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체적인 문제로 자녀를 병원에 데리고 온 많은 부모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진짜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놀랍게도 육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이며 영적인 분야다. 나는 제이콥을 진찰하고 부모와의 대화를 정리하면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검사 결과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치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검사 결과와 현재 치료에 대한 제이콥의 반응에 따라서 치료법을 수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초조하지만 감사를 표하며 희망을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진짜 희망을 가진 부모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다. 하지만 내가 상대하는 병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부모를 탓할 수도 없다. 언젠가 만난 한 아이의 어머니는 딸의 상태를 말하는 내 이야기를 잘 들었을 뿐 아니라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은 나를 향해 병원의 노력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오늘 밤이 내가 아이와 보내는 마지막이 될 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력감은 전염성이 있다. 그 어머니의 눈빛은 내게 명치를 때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공감과 넘치는 열정 사이의 애매한 균형을 찾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나는 그런 무력감까지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고난의 계곡을 걸어갈 의사를 원하지만 정작 의사인 우리가 희망을 잃고 비틀거리며 그 계곡을 걸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를 기억하라제이콥의 부모는 움츠러든 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희망의 우물에서 힘을 얻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병실을 떠나기 전에 나는 벽에 붙은 카드를 가리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새로운 소식이 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저 말씀을 함께 믿도록 해요.”그날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에서 제이콥이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검사 결과들, 가능한 발병 원인들, 최선의 치료방법, 움직이지 않는 팔 아래에 있던 동물 인형, 부모의 눈에 깃든 아픔. 이런 것들이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 차가 우리 동네에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병원에서는 제이콥과 그의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집에서만은 내 가족에게 100퍼센트 헌신해야 한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떨쳐내며 기도한다. 집 주차장에 들어올 때면 항상 하는 기도다. 주님, 제가 오늘 만난 어둠을 집으로 들고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너무도 약하다잘 시간이 되면 나는 막내 딸과 함께 책을 읽는다. 번갈아가면서 큰 소리로 읽는 동안에도 나는 제이콥에 대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내 딸은 제이콥보다 조금 더 어리다. 지금은 너무도 건강하지만, 제이콥도 지난 주까지는 내 딸과 다르지 않았다. 보통 때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지 않는 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딸이 제이콥처럼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내 머리에서 억지로 몰아내야만 한다. 제이콥과 같은 일이 내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닥칠지 알 수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제이콥의 부모가 겪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얼마든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단단한 땅에 바로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생각과 내가 씨름하는 동안에도 빛은 반짝인다. 나는 제이콥 부모의 눈에서 그 빛을 보았다. 그들이 겪는 고통 뒤에 숨은 그 빛을 보았다. 그것은 희망, 궁극적인 희망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상처가 진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또한 그 상처가 마지막이 아님도 알 수 있었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이상 질병과 죽음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런 현실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는 이미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번 주에 만날 푸른 초장은 어쩌면 시기 적절한 진단과 제이콥의 생명을 구하는 효과적인 항생제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목자는 더 오래 지속되는 초장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나는 첫 번째 초장을 위해 싸울 뿐 아니라 두 번째 초장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데도 내 평생을 바치고 싶다. 원제: My Pastoral Moments as an Infectious Diseases Docto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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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하나님이 주신 과제
by John Piper
2021-03-23
1981년 6월 14일 주일, 존 파이퍼 목사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7:17-24로 설교하였다. 이 설교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선포와 기도로 요약할 수 있다.우리가 직장 생활을 통해 부딪치는 여러 가지 직무 수행의 요구 사항들을 어떻게 이행하느냐 하는 것은 제자도의 본질이다. 바꾸어 말하면, 부여된 직무 수행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순종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우리의 모든 업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한다.파이퍼는 이 선포와 기도가 어떻게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와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하였고, 직업과 관련된 네 가지 유익하고 실질적인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설교를 마무리하였다.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 설교를 듣는 회중 에는 간호사, 교사, 목수, 예술가, 비서, 사서, 변호사, 안내원, 사회 복지사, 각종 수리공, 엔지니어, 사무 관리자, 웨이트리스, 배관공, 판매원, 경비원, 의사, 군인, 상담원, 은행원, 경찰관, 실내장식 디자이너, 음악가, 건축가, 화가, 가정부, 학교 사무직원, 주부, 선교사, 목사, 가구 제작자, 그리고 그 외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어떤 직종이나 직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일을 처리하는 방식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기꺼이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이다.둘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회심 이후에 자기의 직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직업을 바꾸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15절)에서 예외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인정하고 있다. 구약성경 중에는 노예를 해방한 일에 관한 구절이 있으며, 전도자가 된 세리와 제자가 된 어부들의 이야기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어떤 종류의 직업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매춘이나 외설적이고 타락한 수많은 형태의 오락 관련 업종들, 그리고 사람들을 착취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는 업종들이 그런 류의 직업이다.바울은 절도범이나 고린도의 매춘부가 자기가 부르심을 받았던 그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린도서에서 보여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버려야 할까’라는 질문에 바울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그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바울은 이직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을 자문하여 보라는 교훈을 준 것이다. 이것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그리 환영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인 야망에 대한 관심을 단절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그저 세속적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성공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서 더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의 야망과 추진력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즐기는 믿음의 열정에 대신 쏟아 부으라는 것이다.셋째, 스스로 ‘나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질문해 보았을 때 ‘하나님의 뜻은 내가 그분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계명을 따라 순종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라고 확고부동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직 취업의 문턱을 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본문의 요약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분의 뜻(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유일한 뜻)은 우리의 직업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살전 4:3)뿐이다. 전심을 다하여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맡도록 하라. 우리 젊은이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말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아 노력을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그들의 영향력이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마지막 네 번째, 우리가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그곳에서 하는 우리의 업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임무다. 17절은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우리가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어찌하다 보니 지금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룩한 임무 수행을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은 설교자의 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적 과제다. ‘우리가 어떻게 그 직무상의 요구를 만족시키는가?’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삶에서 필수적이다. 이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태도로 삶을 대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일터로 나가기 전에 기도하자. “하나님, 오늘도 저와 함께하셔서 아버지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제가 절망하려 할 때 제 마음을 북돋아 주시고, 우쭐대려 할 때는 저를 겸손케 하옵소서. 하나님, 제가 알고 있는 주님의 모든 계명 중 핵심이 되는 내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아멘.”원제: Your Job is God’s Assign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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