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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척은 파송 교회를 복되게 만든다
by Tony Merida
2021-03-22
가장 좋은 성도들을 파송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까?이 질문은 많은 회중들이 교회 개척에 대한 생각을 마주할 때 궁금해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질문과 걱정을 이해하면서 그 근본적인 사고방식에 도전을 하고 싶다. 최고를 보내라“우리는 가장 좋은 사람들을 보낼 수 없어”라는 사고방식은 신약 성경의 사역 모델이라기보다는 마치 최고의 선수를 트레이드하고 싶지 않은 야구 단장의 모습에 더 가깝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았고 (행 13:1–3),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해 하늘에서 가장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요 17:18).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제자 훈련에서 결핍을 나타낼 것이며 건강한 성장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교를 위해서 성화될 뿐 아니라, 선교를 통해서 성화되어 간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 개척의 과제가 파송하는 교회를 복되게 할 수 있을까? 총 여섯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1. 교회 개척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상 대명령에 집중하도록 한다 소비 지상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게 될 때,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 교회 개척에 집중하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소비 지상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된다. 교회가 교회 개척에 동참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교회의 성도가 되는 것이 영화를 보러 가는 문화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군대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회는 목회자가 설교하는 동안 '팝콘이나 먹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정반대로,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함께 선교를 위한 보내심을 받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다. 교회가 주님의 지상 대명령에 관심 갖는 것을 멈추게 될 때, 사망이 찾아올 것이다. 보내지 않는 교회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2. 교회 개척은 성도들이 천국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한다교회 개척은 성도들로 하여금 많은 '복음의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한다. 이는 복음의 목적대로 인도된 고통스러운 작별이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사람들을 보내고 싶지 않다. 이는 아픔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곧 그리스도께서 합당한 분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영광을 위하여 함께 보내게 될 수십 억년의 시간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의 단 몇 십년 간의 작별 인사는 그만큼 가치가 있다. 이것은 하늘 시민권의 빛 가운데 살면서 보여지는 삶의 한 부분이다(빌 3:20).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어떠한 고통도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직접 얼굴로 뵐 때 이것들은 더 이상의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3. 교회 개척은 제자 훈련을 위한 높은 목표가 된다 제자 훈련은 (그것이 중요한 만큼) 절대로 단순 정보 전달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도들이 삶에서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도들을 선교의 관점에서 훈련해야 한다. 교회 개척은 제자 훈련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선교를 강조한다.4. 교회 개척은 관용과 연합의 문화를 조성시킨다 교회가 복음과 선교를 그 중심에 둘 때, (일반적으로 말하면) 많은 사소한 논쟁들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핵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성은 사람들이 주요 쟁점에 집중하는 곳에서 배양된다.교회 개척은 또한 관용을 북돋는다. 내가 섬기는 교회에 74세이신 어떤 사장님은 프랑스에 교회를 개척한 젊은 사역자에게 직접 선물을 보내고 정기적인 선교 후원을 하고 있다. 그 교회 개척자가 고국을 방문할 때 두 분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 이는 관용과 세대를 넘어선 복음의 동역자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습이다.5. 교회 개척은 성도들로 하여금 상황화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교회가 교회 개척을 위하여 세계 곳곳으로 성도들을 파송할 때, 교회 개척자들은 많은 민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이상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을 가지고 돌아온다. 우리도 그러한 민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람들을 매우 쉽게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수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하지만 다른 이들의 우상숭배에 노출되는 일의 긍정적 측면은, 파송하는 교회 성도들이 “내 우상은 무엇인지, 내 이웃들은 어떠하며, 그들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복음을 ‘많은 민족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지속적으로 고심하는 교회 문화 속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동일한 복음을 우리 이웃들 가운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필연적으로 생각하게 된다.6. 교회 개척은 기도를 강조한다 모든 성도들의 간절함이 고조되기 때문에, 교회 개척 팀을 보내는 것은 교회가 기도 생활에 열심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교회 개척 팀이 개척을 시작할 때 그들의 기도 생활이 전과 다르게 활짝 열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팀 켈러 역시 리디머교회를 개척하려고 결정했을 때 자신이 경험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부흥하는 기도 생활을 경험한 개척 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파송하는 교회 역시 대체로 이러한 경험을 한다. 교회 개척에 대한 최신 소식을 받으면 파송 교회는 기도한다. 목회자들이 합심 기도시간을 인도할 때, 파송 교회는 새로운 사역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또한 전 세계의 복음 발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기도를 어떻게 더 강력하게 만드는지 바라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회가 기도하기를 원하는가? 교회 개척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엄청난 축복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당신의 교회를 놀랍게 축복할 것이다. 많은 비용을 요하는가? 그렇다. 복음의 작별인사가 고통스러울까? 물론이다. 많은 도전이 있을까? 확실히 그러하다. 이것이 과연 '교회 성장을 위한 확실한 비결'인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어둠 속으로 빛의 공동체들을 흩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를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 교회 개척의 자리로 우리 자신을 보낼 때, 하나님께서 또한 이를 사용하셔서 파송하는 교회를 구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제: 6 Ways Church Planting Blesses the Sending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진호
교회
교회개척
파송
기도
우상
관용
제자훈련
카이퍼 통신 9 :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
by 김은득
2021-03-21
학문 영역을 중심으로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이전 카이퍼 통신 8호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 삶의 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각 영역의 주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각각의 영역들에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규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려는 원리, 학문 영역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원리, 예술 영역은 아름다움에 기여하려는 원리를 따라 운영됩니다. 이렇게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신자들은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역 주권을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삶의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따를 때, 굳이 신자일 필요가 있겠는가?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든지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그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면, 그 영역은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지 않겠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라고 주장해 놓고서는, 영역 주권 원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역 주권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주로 교회의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영역 주권에 대한 위의 질문들은 주로 신자들에게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대답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아니나 다를까 영역 주권은 각 영역의 세속화, 특히 학문의 세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와 걱정들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1880년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설립 기념으로 영역 주권을 연설한 날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입니다. 먼저 설립식에서 자유대학교의 관계자가 들고 서 있던 홀(scepter) 위에 새겨진 미네르바(Minerva)의 동상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1834년 국가 권력에 종속된 화란개혁교회(NHK)와 분리되었던 성도들(the Seceder)의 비난이 상당했습니다. 로마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여겨지는 미네르바 (그리스 신화에선 아테네)를 기독교 대학의 홀로 사용한 것이 '이교도적(heathen)'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런 비판은 '광신적 성상파괴주의(iconoclastic fanatisicm)'에 불과하며,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인 “푸치우스(Voetius)의 작품에도 배움의 상징으로서 미네르바를 다룬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자유대학교 설립식 이후에 벌어진 공식 만찬에서 연회 참석자에게 포도주가 제공되었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던 것입니다: “개혁주의자는 와인에 물 타는 그런 류가 아니야!” 즉, 술을 마심으로 기독교 진리를 훼손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와인에 물 탄다는 그런 비판에 대해 저는 동일하게 물 탄 우유의 비유로 반박했습니다: “아무 쓸데없는 초콜릿 주전자나 물 탄 우유로는 결코 담대한 칼빈주의자들을 길러낼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삶의 각 영역의 주권을 영역 자체에 부여하면, 그 영역들은 세속화될까요? 여러분이 세속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십니까? 세속화라는 단어는 본래 교회나 성직자가 소유하고 관장하던 것을 평신도나 교회 이외의 기관에게 그 소유권 혹은 감독권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중세 교회는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정치, 학문, 예술 등을 그 날개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정교 분리의 원칙은 근대화된 국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헌법적 명제가 되었습니다. 1848년 네덜란드 역시 국가의 주권이 더 이상 왕이 아닌 의회에 있음을 헌법을 통해 명시할 때, 정교 분리의 원칙 역시 공표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이었던 유럽의 수많은 대학들이 국립 혹은 공립대학으로 변화되는 등 학문 영역 역시 세속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 수도원을 주축으로 발달한 모든 기독교 대학들이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 혹은 초월적 세계관을 통해 운영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상업적 성공은 유럽의 대학들을 지식 혹은 진리를 전달하는 강의 중심에서 새로운 지식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연구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 산업화된 세계에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양적 연구로 진행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대표하고, 이런 방향으로 전환하여 가장 성공한 대학교가 독일 베를린의 자유대학교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인간의 종교적 경험으로 제한하면서, 신학을 종교학의 일부로 격하시켰다고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학 방법론을 강조하는 근대화된 대학교에서 점점 학문으로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신학을 위한 일종의 제스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 영역, 특히 그림의 대상이 교회와 연관된 성스러운 것들에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나 정물화로 확대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원근법이 처음으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삶의 다양한 공적 영역들이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그 자체의 독립된 영역으로 분화되는 것을 가리켜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라고 일컫습니다. 저 카이퍼는 이런 의미의 세속화 과정을 매우 찬성 했는데, 왜냐하면 칼빈주의 자체가 이런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 세속화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가정, 경제, 학문, 예술 등의 영역이 하나님이 창조 때 부여하신 영역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봅니다. 삶의 각 영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기적으로 각 영역으로 발달되게끔 하신 것입니다. 가정 영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간 연합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하게 하심으로 생겨납니다. 가정은 이런 영역 원리를 통해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인간의 지적 본성이 학문 영역으로, 인간의 미적 감각이 예술 영역으로 발달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영향 아래, 삶의 영역이 이렇게 각각 세속화되는 과정을 거칠 때, 저와 동시대의 경건주의 신자들의 반응은 그런 삶의 영역들을 포기한 채 교회 생활에만 충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따라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장 능동적으로 극복한 것이 칼빈주의 세계관입니다. 무엇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선합니다. 아무리 죄로 얼룩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창조에 기반한 영역 주권 원리는 사회적 분화과정으로 인해 이미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각각의 독립된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각 영역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냅니다.그러나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월적 세계관을 거부하거나 아예 적대시하는 '세속주의로서의 세속화'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말할 때, 세속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양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학문에 임하는 경우,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이라는 즉각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순수과학이나 수학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학문에 참여하는 학자 역시 각자의 세계관이나 주관적 확신과 동떨어져 학문에 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경우, 학자의 인격적인 요소가 학문 자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은 학문을 할 때 페미니스트 관점, 인종적 관점, 가난한 자를 위한 관점, 동성애자들을 위한 관점 등 다양한 관점들을 허용하지만, 기독교적 관점만 유독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으로 치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많은 기독교 대학들(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이 세속화 (혹은 세속주의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세속주의화 경향성은 학문의 영역을 너머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어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아예 기독교적 혹은 초월적 관점을 적대시합니다. 개인의 기독교적 신앙은 사적인 것으로만 치부되며, 결코 다양한 공적 영역들과 공론장에서 표출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런 세속주의화 과정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칼빈주의적 확신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의 구원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역들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단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회복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세상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이런 성경적 근거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가 약속한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도 세속주의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불신앙을 토대로 생겨난 프랑스혁명은 정교가 일치된 사회로부터 정교가 분리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약속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기독교적 가치를 띄면서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기독교적 가치를 가지고 정치 영역에 참여하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양심은 불편하며, 그들의 자유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억압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에서 보여지듯이 기독교적 관점과 가치는 다른 관점과 가치와는 다른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에게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기독교인은 그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사적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그 신앙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 영역을 세속적 가치가 주도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후배 신학자 바빙크가 말했듯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 경건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도 소중하지만, 더욱더 값진 신앙은 이런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신앙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속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이 분화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각각의 독립된 영역에 참여할 때, 그 영역의 운영 원리와 방식에 맞게끔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참여한 그 삶의 영역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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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존재를 잊지 말라
by Jon Bloom
2021-03-20
언젠가 A. W. 토저(Tozer)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상반된 차원에서 C. S. 루이스(Lewis)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토저의 말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리는 영혼의 은밀한 법칙을 따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그렇다면,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생각할 때는 어떤 내용이 떠오르는가? 물론 그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보다 하나님이 사탄에 대해 생각하시는 내용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다.과연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한 영들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또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그러한 마음은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나아가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유혹과 두려움, 가정의 문제와 교회 안에서의 갈등,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복음의 열매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나 대외적인 사건 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한 문제들에 반응할 때 우리는 어떤 영적 전략을 가지고서 행동하는가?이러한 물음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의 계책을 알고 있는가신약 저자들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영적 전쟁을 심도 있게 의식하며 본문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이적을 살펴보면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의 간섭이 계속해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역을 시작하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부터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온갖 사건에 휘말리시기까지(마 4:1-11; 요 13:27) 사탄과 그 세력은 항상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든 그분의 백성을 속박하고(눅 13:16), 종교 지도자들과 기관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요 8:44), 복음의 역사에도 힘을 다해 대적하며 그 결과를 약화시키고 훼손시키려 한다고 가르치셨다(눅 8:12). 또한 사탄이 막대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쳐 '그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도 가르치셨다(눅 11:17-18).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한 제자는 그분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사도들이 불신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 목적도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었다(행 26:18).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고 있다(엡 6:12).그래서 사도들은 반복해서 경고했다. “근신하라 깨어라!” 왜 그러한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벧전 5:8).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혹시 나는 사탄의 계책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자가 진단여기에 자가 진단을 해 볼 수 있는 질문이 있다. 혹 당신은 이 글의 서두에서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악한 영들에 의해 야기되거나 악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내용에 대해 어떤 정서적인 반응을 보였는가? 그러한 말이 현대 문화에는 맞지 않게 여겨져 좀 당혹스러웠는가? 너무 비과학적이고 심지어는 미신적이어서? 또는 그러한 말을 듣고 뭔가 변호하고 싶은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는가? 특히 정신적 고통의 경우 누구도 함부로 그러한 고통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항변하고 싶지는 않았는가?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당신의 정서적인 반응을 평가해 보는 시간부터 갖도록 하자. 만일 당신이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 뭔가 항변하려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감정은 마귀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경험이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연주의적 가정만을 인정하는 현대 문화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여기서 우리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러한 반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반응이 우리의 신앙에 자리한 비성경적인 불균형이나 그 안에 감추어진 사각지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에는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다.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순진하게도 우리는 악한 영들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신약 저자들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사탄의 계책에 대해 결코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물론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전부 다 악한 영들의 역사로 야기되거나 악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며,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어링갓’(Desiring God;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선교 단체 - 편집자 주)에서도 영적 전쟁에 관한 여러 자료들과 더불어 정신적 아픔이나 질병 혹은 장애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취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초자연주의를 배제하려는 현대 문화일반적으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마귀의 역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러한 관점을 특정 현상에 과도히 적용하려는 문제를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능적이고 비성경적인 자연주의로 인해 그러한 관점을 거의 적용하지 않으려는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문화의 사각지대에 자리한 그릇된 전제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는 더 큰 이유는, 이 시대의 문화가 초자연주의를 계속해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세계관을 마치 암흑시대의 어리석은 종교적 유물처럼 취급하려는 후기계몽주의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혹 마귀의 역사로 누군가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면 어리석게 생각할 뿐 아니라 무례한 독설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이미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수치심만 더하는 일로 비쳐진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세계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일 뿐이다.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정서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은 때로 우리의 영적 세계에까지 전달된다. 문제는 둘 중 하나다. 악한 영들이 실재하고 그들의 존재를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부정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 아니면 악한 영들이 실재하지 않은데도 그들의 존재를 들먹이며 어떤 현상을 진단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이다. 물론 우리 중 누구라도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고통 받는 자를 가해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에는 둘 중 한 가지 문제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당연히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부정할 때 그러한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견고히 맞서자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지상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행 26:18) 일을 보고자 한다면, 마귀의 역사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고 마침내는 불편한 상황까지 야기할 수 있는 현대 문화의 시선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마귀에 사로잡힌 희생자로 살도록 그들을 비참히 놔두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리석게 비쳐지는 일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결국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그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악의 현실을 직시하는 성경의 관점과 우리 마음이 더욱 일치할수록, 우리 각자는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람들에게 더욱 영적인 도움을 주며, 어둠의 권세에도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감당하신 치욕을 우리도 짊어질 수 있다(히 13:13).성경은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확고히 제시하는 책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그리고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 이 양자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과 각 진영을 대변하는 사람들 간의 다툼이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친다.“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우리 모두 이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래서 사람들이 마귀의 계책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저들을 도와주자. 그리고 어떠한 공격에도 견고히 맞서자.원제: We Dare Not Ignore the Devil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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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자가진단
초자연주의
젊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
by Phil Anderas
2021-03-19
친애하는 형제에게이번에 특별히 네가 중요한 생일을 맞이한다고 하면서 너의 아버지가 내게 한 가지 요청을 하셨어. 누구나 어렸을 때 알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때는 알 수 없는, 인생에 관한 교훈을 담은 편지를 네게 써주면 좋겠다고 말야. 아주 좋은 생각이라 여겨지기에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게, 성화된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든 삶의 여정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인생 학교라는 사실부터 말하고 싶구나. 십자가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단다. 오로지 고통만이 있을 뿐이지. 네가 부름받은 이유도 힘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고, 때로는 두렵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네 곁에 계시니 조금도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복음이 약속한대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데, 이 세상이 어떻게 감히 너와 대적할 수 있겠니?자, 나는 이제 의인이 된 죄인(sinner-saint)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는 순례자라면 거쳐야 할 세 가지 단계를 너에게 알려주고 싶구나. 덕(virtue)에 관해서첫 번째로, 젊은이라면 어떤 동기에서든지 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단다. 내 경우에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책을 통해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덕을 의미하는 ‘Virtue’는 '힘'을 의미하는 오래된 라틴어 ‘virtus’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는 또한 사람을 의미하는 ‘vir’와도 연결된다. 즉, 진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덕을 많이 쌓아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 돈, 성적 매력, 스포츠, 성공 중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단다. 오로지 덕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렴. 그리고 네가 꼭 얻어야 할 네 가지 기본 덕(목)은 지혜, 정의, 용기, 그리고 자기 통제란다. 지혜는 겉모습에 가려진, 숨겨진 진짜를 볼 수 있는 능력이으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 건전한 판단을 하게 된단다. 성경은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어. 그 이유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주님되신 하나님의 완전한 실재를 체험함과 동시에 너무도 형편없는 나 자신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허물어질 때, 사람이라면 겪는 가장 자연스런 반응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야. 다음은 정의다. 정의는 인간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타인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는 데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 능력이지. 세상이 갖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네가 해를 입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굴하지 않으며 의롭고, 옳고, 선하고, 충실하고, 진실하고, 또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 세상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간다고 해도 정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세 번째는 용기다. 용기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는 능력을 말하지. 오해하지 마라, 그것은 두려움이 실종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야. 어리석은 인간은 아예 두려움 자체를 느끼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또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지. 그러나 세상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그렇기에 용기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정의의 길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단다. 그런 지혜를 바탕으로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 부귀, 심지어 생명보다도 정의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선을 위해 기꺼이 손해까지 감수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덕목은 자기 통제다. 자기 통제가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떠나버린, 벽이 무너진 도시와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해라. 자신을 지배하고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힘, 이 덕목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음식이나 술, 이성 또는 복수심과 같은 욕망이 너를 지배하게 놔둬선 안 된다. 그것들은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주인이 되어 너를 노예로 부릴테니까. 대신 너는 그것들을 지배해야 한다. 기억해라, 자제력을 가져야만 진정한 자아를 소유하게 되고, 네 자신을 온전히 소유할 때만 진정한 자유 속에서 바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덕에서 은혜로두 번째 단계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듯이, 덕에서 은혜로 '전환'하는 것이다. 해 아래에 덕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덕을 쌓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결코 네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덕이란다. 사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내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깨달을 뿐이지.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흐르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 너의 죄는 실로 엄청나게 중하다는 걸 알고 있니? 도무지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까. 아무리 고대 지혜와 각종 기법을 동원해도 죄 문제만은 해결할 수 없지. 게다가 문제는 죄만이 아니다. 네가 자랑하는 도덕적 미덕조차도 그 안에는 영적 암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네 선함조차도 교만의 악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상태고, 네가 자랑하는 최고의 업적 또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아라는 심각한 병에 걸린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네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이야.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한 아담은 다름 아니라 덕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지. 나 또한 아담의 자손으로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는 덕보다 더 나은 게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다. 너는 세례를 받았고 또 복음의 약속도 받았어. 하나님은 너를 너무 사랑하셔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까지 내어주셨으니까. - 스스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는 너의 지혜다. - 네 자신의 불의를 인식할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는 너의 의가 되신다. - 네 자신의 비겁함을 알아차릴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오로지 그분만이 네게 용기를 주신다. - 정욕의 노예가 되었음을 알아차릴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의 피는 너의 모든 죄를 속하시며 또 그가 주시는 성령은 육신을 이기고 너를 거룩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하니까. 네가 어느 날 정말로 크게 잘못을 범하고, 덕을 추구하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에 굴복했을 때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높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은 두 번째 아담이자 또한 최후의 인간으로서 너와 나 같은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분이다. 네 자신의 무력함을 더 빨리 깨달을수록,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는데 그건 네 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또한 그리스도는 진정한 인간(the Vir)이 되신다. 우리의 진정한 아담인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에까지 순종함으로 첫 번째 아담이 초래한 재앙을 마침내 해결하던 바로 그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했지.가장 위대한 것첫 번째 아담에서 떨어져 나와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진 우리는 이제 예술 중의 예술인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다.왜 그럴까? 그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요일 4:8) 때문이란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 언젠가 너도 직업을 선택할 날이 오겠지. 그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야. 좋은 직업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취미도 좋고, 사냥은 재미있고, 책을 읽는 것은 즐거움과 지혜도 함께 가져다주지. 그러나 결국에 인생에서 남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다. 사람, 그리고 그들과 나눈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삼위 일체로 존재하시는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이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셔서 다시금 자신의 형상을, 곧 사랑을 회복하게 하셨다. 사랑이 무엇일까?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아담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 위해 왕 중의 왕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그 신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또 희생의 길을 배우게 되면, 너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 너는 이미 좋은 출발을 했고 아주 잘 살고 있다. 그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고, 또한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내게도 도움을 나눠주길 바란다.너의 형제, 필 목사가원제: Letter to a Young Christian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덕의중요성
신앙훈련
첫번째아담
자기통제
사랑의의미
덕에서은혜로
용기
정의
고통 중에 팀 켈러를 인내하게 만든 것
by Matt Mccullough
2021-03-18
이 글은 부활절을 앞두고 부활의 의미를 새로 조명해 보는 팀 켈러 목사의 신간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Hope in Times of Fear: The Resurrection and the Meaning of Easter, 두란노, 3월 출간)’를 소개하는 글이다. - 편집자 주1970년 봄, 팀 켈러는 버크넬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는 크리스천이 된 지 얼마되지 않은 새 신자였다. 그 당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을 확대하고 있었다. 버크넬 대학교 학생들이 광장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시위와 토론을 할 때, 켈러와 몇 명의 크리스천 친구들도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군중의 가장자리에 앉아, 시위대의 구호와는 조금 다르지만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맞는 문구가 써진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지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실존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써 있었다.켈러는 최근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때는 우리가 최근에 경험한 것과 비슷한 불안과 양극화된 분노가 시위로 나타난 또 다른 분열이 있던 해였다. 켈러는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 사용한 현수막 문구를 그대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내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그동안의 그의 사역을 잘 요약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이성적 질문과 감성적 갈망에 대답을 하며, 예수님은 여러분이 찾고 있던 바로 그분이다’라고 말이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독자들에게 예수 부활에 담긴 의미를 풀어놓고 있다. 부활절은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숙연하고 중요한 절기로 여겨진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며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을 기뻐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는 순간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분을 눈으로는 보았지만, 진정으로 영적으로는 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그분이 진정 누구인지 보라고 했을 때였다. 이 책은 팀 켈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날카로운 통찰력,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대한 심오하고 새로운 접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부활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PENGUIN RANDOM HOUSE. 272 PP.)부활을 중심에 놓기어떤 면에서 이 책은 2020년의 방향감각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이상 그의 독자였던 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세 가지 이유로 독특하고 절실히 필요한 책이다.첫째, 켈러의 책 중에서 이보다 더 성경으로 가득한 책은 보지 못했다. 물론 그의 책들은 모두 성경으로 가득 차 있고 성경에 충실하다. 이 책에도 루이스(C.S. Lewis)와 볼프(Miroslav Volf), 톰 라이트(N.T. Wright)와 테일러(Charles Taylor) 등과 같은 저자들의 글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는 한 저자에서 다른 저자로 이동하며 논리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책 전체의 흐름은 체계적이만 정형화되지 않았고, 앞 장들은 구속에 대한 반전의 성경신학처럼 읽힌다. 켈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현자의 지혜가 무색하도록 약함에서 강함을, 슬픔에서 기쁨을, 궁극적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대반전’이라 부르는 이 논리의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까지 이어진다. 둘째, 이 책은 켈러가 수년에 걸쳐 제공한 통찰력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를 활용하여 하나의 중심점을 만들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이것은 모든 잠금 장치를 여는 마스터 키다. 또는 성경의 은유로 강조하자면 이것은 모든 것이 안착되고 결합되는 모퉁잇돌이다. 켈러는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한 첫 번째 장 이외에 다른 장들에서는 대부분의 페이지를 부활의 현실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부활에 대해 꼭 알아야 하지만, 부활을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말처럼 ‘부활의 능력을 아는’(빌 3:10) 것이 중요하다”(xxi).켈러는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부활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상 숭배에서 정의에 이르기까지, 성 윤리에서 무아지경에 이르기까지, 영적 체험에서 회복력 있는 정체성과 크리스천을 세우는 고통의 능력에 이르기까지 빠르고도 놀랍도록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이것은 마치 켈러가 최근 10년 동안 우리에게 권했던 핵심적 통찰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 그도 가짜 신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얻지 못한다. 정의에 대한 소망이 없고 우리의 사역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망각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지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실존적으로 만족을 주지도 못한다.“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켈러는 매 페이지마다, 살아서 숨쉬는, 그리고 육체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이 실제적 진실이 어떻게 우리의 현실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지를 보여준다.마지막으로 또한 이 책은 그리스도가 켈러를 어떻게 붙들어 주시는지에 대한 간증이다. 2020년은 대부분의 우리보다 그에게 더 격동적인 한 해였다. 69세가 되는 작년 여름 초엽에 그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치명적인 질병을 친구로 삼으며 이 책을 저술했다.서문과 감사의 글에서 짧게 언급한 것 외에 켈러는 이 책을 써 내려갈 때 그가 직면한 질병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초점은 끝까지 예수님께 있다. 하지만 그는 “힘든 시기에 글을 쓰는 것은 내가 부활에서 위로와 능력의 깊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왔다”(217)고 인정한다. 이 책의 생동감과 힘은 그가 오랫동안 알았던 것에 대해 힘겹지만 새로 얻은 지식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체험된 진리조나단 에드워즈가 남긴 유업에 대한 학술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 대학생이던 나는 팀 켈러의 강연을 처음 들었다. 켈러는 설교자 에드워즈에 대해 강연을 하도록 초대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마음의 영적 감각에 대한 에드워즈의 호소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꿀이 달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아는 것과 먹어보고 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 에드워즈가 언급한 것 말이다. 켈러가 설명했듯이, 에드워즈는 새로운 정보를 주기 위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만들도록 설교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이 확인한 진리를 진리로 경험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알기를 원했다.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팀 켈러가 언급한 에드워즈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켈러가 처한 실존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가 지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을 해석해 보았다. 멸망하게 될 최후의 적, 우리의 대적을 마주하고 있는 한 형제가 여기 있다. 그는 수십년 동안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섬겼는데 이제 그 통찰로 무장하여 이 적을 맞이하고 있다. 이 진실의 순간에 그가 여전히 실존적으로 만족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꿀은 달콤한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켈러의 대답이다.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달콤하다. 모퉁잇돌은 지금도 그를 지탱하고 있으며 특히 지금 더 그러하다.’그래서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더 귀중한 선물이며, 대반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고통을 통해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생명을 주는 소망을 얻게 하신다.원제: The Hope That Sustained Tim Keller Through 20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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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듣는 마음’
by 이종훈
2021-03-17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왕상 3:26)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는 바로 솔로몬 왕일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런 모습을 좋게 여기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때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솔로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을 알지 못하고 …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즉, 솔로몬은 자신은 너무 어리고 그가 다스려야 하는 백성들의 숫자는 많은데 자신이 어리석어서 백성들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잘 재판하여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간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을 지혜롭게 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의 하소연을 잘 들을 수 있는 마음이고, 둘째는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잘 아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솔로몬의 ‘듣는 마음’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이 솔로몬을 찾아와 재판을 청합니다. 그 두 여인은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창기입니다. 그리고,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밤중에 실수로 자기 아들 위에 누워 어린 아기가 죽게 되자, 이 여인이 자기의 죽은 아이를 한 집에 살고 있던 다른 여인의 아이와 바꿔치기를 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이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친자 확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그런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집에는 두 여인만 살고 있어서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다라고 판단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놀라운 판결을 내립니다.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서 두 여인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기까지 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황당한 판결에 두 여인의 반응이 갈립니다. 한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0점을 받으면 그 사람은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또는 내가 10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100점을 받는다면 물론 내가 100점 받은 게 기쁘기는 하지만 나 혼자 100점을 받았을 때만큼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0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0점을 받았습니다. 내가 0점을 받은 것 때문에 속은 상하지만 다른 사람도 0점을 받았으니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0점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은 100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마 가장 최악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100점 받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점점 내가 100점 받는 게 쉽지가 않다면 다른 사람이 0점 받기를 은근히 바라게 됩니다. 이유가 뭘까요? 최악은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잘 되는 것 이상으로 남이 잘 안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합니다. “내 것도 되지 말고, 네 것도 되지 말게 하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 다 0점이 되자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0점인데 상대방은 100점이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둘 다 0점이 돼서 내 최악의 비참함은 피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기 인간의 죄성이 있습니다. 내가 소망을 잃어버리면 다른 사람도 소망을 잃어버리길 바랍니다. 내가 비참해지면 다른 사람도 비참해져야 내가 조금 덜 비참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내 인생에 소망이 끊어진 사람은 때때로 다른 사람 역시 자신처럼 비참해지기를 바라며 삽니다. 이것이 범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엄마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진짜 엄마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아이를 안 가져도 좋으니 이 아이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가 엄마 안 해도 좋으니 이 아이가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이 진짜 엄마입니다. 가짜 엄마는 자기의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다른 아이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진짜 엄마는 자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진짜 목회자라면 교회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자존심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가짜 목회자는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교회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짜 성도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가짜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아기에 대한 태도를 보고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구별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한 태도,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본다면 우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진짜라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덕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짜라면 내 자존심을 위해 그리고 내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죽이는 것에 아무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기준을 갖는다면 진짜와 가짜를 쉽게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듣는 마음’이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셨던 듣는 마음이 있어서 나를 잘 분별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솔로몬
지혜
일천번제
듣는마음
판결
진짜
공동체
‘미나리’, 아칸소에서 에덴동산을 추구하다
by Eugene Park
2021-03-16
이삭 정(Lee Isaac Chung) 감독의 영화 ‘미나리’의 예고편을 처음 보았을 때,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들떴다. 지역 사회 사람들은 이민 2세로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공감하는 카타르시스적인 눈물을 예상하며 전화기가 폭발할 정도로 내게 전화를 했다. ‘미나리’를 실제로 본 후로 내 어린 시절의 향수나 트라우마로 인한 눈물은 말라버렸다. 하지만 내 영혼은 충만해졌다. 정 감독은 자신이 양육받으면서 느꼈던 기분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적인 문제와 인간이 된다는 것, 남자가 된다는 것, 실패할 때의 느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크리스천인 정감독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써 보내 주었다.“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많은 공통점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를 희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때로 한국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로 지역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으며 부모와 조부모 세대와의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장벽으로 인해 가족 내에서도 더욱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소망은 이러한 분명한 분열을 뛰어 넘어 이 영화의 배경과 사람들 안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찾는 것이었습니다.”‘미나리’는 우리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이며 “본향을 찾는” 이들이라는 히브리서 11장 13-14절의 진리가 생각나게 한다.에덴동산을 향한 꿈엄선된 극장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 영화는 ‘크고 위대한 정원’을 만들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안락함에서, 아름답지만 외로운 아칸소의 오자크로 가족을 이끄는 제이콥 이(스티븐 연 분)의 뒤를 따른다. 그는 “미국 최고의 흙”을 사용하여 자기 농장의 농작물이 풍부하고 수익성이 있기를 희망한다.정 감독은 관객들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을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그는 내게 자신의 이러한 바람을 말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대본을 쓰는 데 가장 크게 참고한 자료는 성경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정원과 농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으며,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정원 속의 배신과 구속의 중요한 순간을 배치하는 듯합니다. ‘미나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그 중심은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한 정원을 떠나 다른 정원을 찾고 있습니다.”영화의 중심 갈등은 번성하는 정원에 대한 제이콥의 꿈이 그의 아내 모니카(한예리 분)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녀는 가족 자체가 잘 되기를, 특히 심장이 약한 어린 아들(앨런 S. 김)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제이콥의 정원 작업의 목표는 단지 건강한 작물을 생산하고 성공적인 농부가 되는 것 이상이 된다. 건강한 남자와 남편, 아버지와 친구로 자신을 일구는 것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우리 정원의 샘물 찾기영화 속 이야기 전개의 대부분은 제이콥이 농장 작업의 필수 요소인 수원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 영양이 풍부한 우물―성경에서 참조한 “야곱의 우물”(요 4:6)―을 찾는 그의 탐색은 좌절로 가득 차 있다.모든 정원은 번성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물이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성취, 부, 권력, 인정 등으로 우리 영혼의 정원을 채우려 한다. 영화 속 제이콥처럼, 우리도 스스로 자신의 정원에 물을 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외부의 도움에는 회의적이다. 충분한 노력과 기지로 우리는 우리 영혼을 지탱해 줄 우리의 우물을 찾는다.크리스천으로서 정 감독은 우리가 어디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요 4:14)를 궁극적으로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영화 속 가족이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이 아니긴 하지만, 정 감독은 잘못된 곳에서 물을 찾는 것에 대해 성경적 강의로 청중에게 교훈을 주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구속의 활로 감싸는” 교훈이 감춰져 있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미나리’는 신앙의 복잡성과 미묘함을 묘사하고 있다.정 감독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저는 스스로 다양한 믿음의 표현과 불신을 경험해 보았으며,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책에서 믿음에 접근했던 그 방식으로 저도 이 영화를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다른 인물들이 작품 속에서 작가 자신의 내면 생활의 한 면을 표현하거나 씨름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말입니다. 그는 자기 작품 속 인물들에게 자유로운 고삐를 주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은혜와 구속을 찾도록 합니다.”주인공인 이(Yi) 가족이 어떤 계시나 기도 끝에 단순히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쁘다. 대신 그들은 기쁨, 고통, 웃음, 비통함 등 불완전한 행동의 결과를 함께 다룬다. 정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하는 방식은 생수이신 그리스도께 가는 길에 더듬거리는 이들의 삶과 스토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 길은 종종 곧게 뻗어있지 않고 엉망이며, 잘못된 일들 가운데 제대로 된 것을 찾는 일이 계속 반복되는 길이다. 때로 우리는 성경의 진리로 정원에 물을 주는 것을 잊거나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할 때가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다(딤전 1:14-16).미나리의 회복력한인 이민자 가족의 아들로서 나는 ‘미나리’에서 부모님의 낯선 문화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분개심이나 오늘날 사회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받는 정체성에 대한 좌절감 대신 내 가족의 회복력에 감사함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부양하려는 부모님의 투쟁 속에서 싸움 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나름의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가족이 전부였기에 서로를 의지했다.대부분의 이민자 가족들은 젖은 토양에서 쉽게 자라는 한방 허브인 미나리와 같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순자 할머니(윤여정 분)는 농장의 개울 근처에 미나리를 심으며 ’잡초처럼 어디서나 잘 자란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물론 번성하는 농장에 대한 제이콥의 모든 꿈에 맞게 생산되는 수확 작물은 결국 미나리뿐이다.나는 미국 교회가 특히 지금 ‘미나리’에서 묘사된 회복력과 교회의 지체들인 수많은 이민자 크리스천들을 주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신앙을 양육하기가 이미 어려워진 세속화된 시대에 인종이라는 날을 세워 분리하기보다는 다양한 그리스도의 지체 전체에서 힘을 발견한다면 어떨까? 우리 자신의 정원에서 홀로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다른 ‘정원사들’과 더 많이 협력하고 서로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우면 어떨까? 모든 인간은 ‘미나리’가 훌륭하게 보여주듯이 에덴동산에 대한 갈망이 있는 정원사다. 하지만 우리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가 정착하거나 혹은 이주한 지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더 나은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할 ‘천국’(히 11:16)이다. 거기서 우리는 에덴동산을 다시 찾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이주 농부며 그곳을 항상 쉼없이 찾고 있다. 그 여정에서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생수가 공급되는 토양에 뿌리를 두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도록 하자.‘미나리’ 속의 이(Yi) 가족이 보여주듯이, 계절과 농작물은 피고 지지만 가족은 항상 지속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인종이나 언어나 국가에 상관없이 영원히 가족이 될 것이다. 이제 그 빛 가운데 살아가자.원제: ‘Minari’ Searching for Eden in Arkans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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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지 못하는 리더십은 무너진다
by Matthew J. Hall
2021-03-15
재료 하나가 빠질 때 요리 전체를 다 망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것은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때,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신뢰야말로 리더십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면, 그것은 당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뢰를 잘 관리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학생은 선생을 믿고 싶어한다. 부부라면 서로를 믿기 원한다. 교인은 담임목사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종업원은 그들의 관리자를 믿고 싶어한다. 신뢰가 실종될 때, 따르는 자들은 사라진다.나 역시 리더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나의 역량을 신뢰하길 바란다. 그들이 나의 판단력을 믿기를 바라고, 또 다가올 도전과 기회를 잘 예측해서 우리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혁신적인 역량을 가진 리더로 나를 신뢰하길 바란다. 나는 아내와 자녀들로부터도 그런 신뢰를 받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 역량은 인격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한순간에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다. 만약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인격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떤 역량을 가졌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고 또 강화할 수 있을까? 네 가지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1. 진실을 말하라언제나 그래야 한다. 기독교인 리더십이라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얼마나 쉽게, 보이지 않게, 서서히, 거짓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지, 또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두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반만 말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 만약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글쎄, 저 사람이 말하는 건 10퍼센트 정도만 믿어야해. 너도 알잖아? 저 사람 얼마나 과장이 심한지.” 집, 직장 또는 교회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드러난 하나님은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2. ‘미안하다’고 말하라당신이 리더라면 ‘미안하다’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한다. 당신은 이 말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편에서, 판단 실수를 할 수 있다. 플랜 A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틀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당신의 판단이 분명히 옳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해야만 하고 때로는 그들의 트라우마까지 자극해야 하는 경우다. 꼭 대단한 일 때문에 누구를 해고하거나 누구를 강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동료에게 또는 가족에게 또는 교회 지체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사과할 일이다. 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을 때,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물론 어떤 리더에게 있어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가장 힘든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리더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그런 리더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 말을 빨리 그리고 겸손하게 하는 법을 배워라. 그렇게 할 때, 장기적으로 리더로서 당신의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실패를 잊지 말고 성공을 나누라혹시나 무엇인가 잘 되면 다 자기가 잘 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또 뭔가가 잘못되는 경우에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리더를 본 적이 있는가? 왜 매출이 늘었을까? 물론, 리더 때문이다. 왜 매출이 줄었을까? 그것은 절대로 리더 때문이 아니다. 이런 리더는 분명 마케팅 부서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유형의 리더는 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세상적인 나르시시즘은 너무도 쉽게 기독교인 리더와 기독교 단체를 오염시킨다. 잘 인도하다는 것은 비난을 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신이 중요한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비록 당신의 결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의 책임 하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리더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리더가 그렇게 할 때, 신뢰가 쌓인다. 충성심은 깊어진다. 그러나 리더가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얼마나 빨리 직원들이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집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인도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4. 책임감과 독점욕의 차이를 배우라이것은 미묘하지만 아주 위험한 차이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뢰하게 하는 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인도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 전략, 그리고 사람 등에 관해서 당신이 일종의 무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그것은 종종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종종 너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고, 대신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리더라면 맡은 책임과 관련해서 결코 이런 식의 한가한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신경 안 써.” 왜냐하면 리더는 책임지는 자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책임감과 독점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 특히 당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사람 또는 당신의 팀'이 아니다. (그들이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굴복할 때 누리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이 더욱 충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훨씬 덜 자기 방어적인 리더가 될 수 있고 또한 아주 작은 일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비판받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일수록 자기 방어에 빠져 상대를 공격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에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팀원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적 독점욕이 강한 리더보다 리더를 향한 신뢰를 더 쉽게 깨부수는 것도 없다. 수단으로서의 신뢰신뢰는 정말로 효과적인 리더십의 통화 수단(currency)이다. 그것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다.신뢰가 조직 내 새로운 리더에게 부여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뿐이다. 궁극적으로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신뢰를 쌓는 데는 수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리더로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당신의 한계와 약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리더로 살다보면 사람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 구주는 불완전한 리더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구주에게 완전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쓰러져도 구주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좋은 소식이다. 원제: The Non-Negotiable Virtue in Leader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인격
신뢰
진실
책임
미덕
역량
다시 시작해보고 싶지 않으세요?
by 정명호
2021-03-14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자기만의 문제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픔이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고 해서 내 삶이 달라질 것도 아니라는 현실적인 성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중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여겨지는 사람에게 한두 번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자리에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전해 들을라치면 마음이 더 닫혀버리고 말지요. 그래서 마음에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내 속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아픈 사람들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성도들 중 힘든 문제 가운데 살아가는 분들, 고통의 눈물 가운데 기도하며 살아가는 분들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자주 듣습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말이 마음에 사무칩니다. “그냥 사는 거지요 뭐.” 정말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묻고 사는 문제, 그냥 품고 사는 문제들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힘든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나 도전이라는 것도 호사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그래서 남의 인생을 멀리서 볼 때는 ‘인생을 왜 저렇게 살까?’하고 이상하게 여기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 배경 이야기를 듣다 보면 머리를 끄덕이며 그분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데는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합니다.수가성 여인의 이야기 (수가성에서 온 편지)저는 사마리아 땅에 속한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여인입니다. 처음 한 남자를 만났을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할 때까지만 하여도 저는 제 인생에 내리 비치는 행복이라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뜻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내 방법으로 남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잘해 보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우리 관계는 꼬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도록 지쳐버려서 결혼이라는 관계를 깨고 말았습니다. 지옥처럼 여겨지던 결혼이라는 굴레, 나랑은 맞지 않는 이 남자만 벗어나면 내 인생이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으로서 혼자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혼 생활을 지켜나가는 것만큼이나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 남자와 함께 하는 상상을 하는 저를 발견하고서는 머리를 흔들며 또다시 지옥 같은 결혼의 악몽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마음에 다짐하곤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끌리고 있었는데, 머리로는 이것은 아니라고 흔들기를 반복하던 중 결국은 가슴이 머리를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놈이 문제였어!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한 번 실패하지 두 번 실패하겠어?’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재기를 꿈꾸며 재혼을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실패와 아픔을 이제는 잊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것도 잠깐.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자와의 관계도 변해갔습니다. 뭔가가 자꾸 뒤틀렸습니다. 이러려고 재혼한 것이 아닌데 … 반복된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감까지 더해지자 삶은 더 힘겨웠습니다. 새 남편은 걸핏하면 나의 인격까지 무시하며 이제 툭하면 옛 남편을 들먹거립니다. 누가 결혼에 실패하고 싶어 그랬겠습니까? 참다 참다 또다시 이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두 번을 이혼하고 나니 이제는 남자에 대해서도, 결혼에 대해서도 모든 꿈과 기대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일 뿐입니다. 남자에 대한 기대란 다 부질없는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 같다고 여겼습니다. 누군가가 사랑, 행복, 결혼을 이야기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서라도 ‘꿈 깨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그렇지만 여전히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의지해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를 거쳐 간 남자가 첫 남편을 포함하여 다섯 명, 이제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저를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내가 나를 봐도 싫은데 어느 누가 고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 주겠습니까? 아니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 여기고 관심을 꺼 주었으면 오히려 좋겠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뒤통수에다 대고 수군거립니다. 안 들어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사는 것에도 이제는 지쳤습니다. 모든 것이 꼴 보기 싫고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귀신 만나는 것보다 싫습니다.여러분이 사는 세상처럼 집 안에 수도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에 가려면 사람들이 가장 뜸한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마음 편하답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이 정오의 뙤약볕을 피해 다들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에 저는 우물로 갑니다. 터벅터벅 가기 싫은 걸음 억지로 옮기며 … 힐끗힐끗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살피며….그런데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그 우물가에는 어떤 유대인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 시간에 여기 와 있지? 왜 하필이면 지금이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냥 못 본 척 외면한 채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남자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게 마실 물을 좀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유대인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가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을 혼혈 후손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대면하지도 않던 때였습니다.그래서 제가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서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은 유대인 남자인데 어찌 나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대답하더군요. “지금 내가 당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이 우물 말고 다른 곳에 우물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제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저는 혼자 조용히 그곳으로 물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적부터 우리 동네에는 우물이라곤 이곳밖에 없었습니다.”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와의 대화는 영생, 저의 과거, 예배,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저는 저도 모르게 흥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아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도 아니고, 무언지 모를 희열, 기쁨, 기대, 감격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남자 아니,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 분은 메시아인 것 같다!”그래서 저는 저도 모르게 동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도 꼴 보기 싫었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왜 뛰어갔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어쨌든 저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리 나와 보세요.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어떤 분을 내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리 와 보세요. 이분은 메시아인 것 같아요. 여러분이 저를 잘 알잖아요. 제가 이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시잖아요. 한 번 와 보세요.”사람들도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동안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랬을지도 모르죠. “드디어 저 여자가 미쳤나 보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까? 무엇을 보긴 본 모양인데….”사람들은 우물가의 예수님을 모셔다가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길 떠나려는 예수님을 그 동네에서 이틀이나 머물게 하면서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몇몇 사람이 저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제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은 당신이 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귀로 직접 듣고,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이 세상의 구주시라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과거가 지워지거나 잊힌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지금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여인이 염려하던 막연한 미래에 대한 무슨 보장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달라졌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돈? 지식? 사람의 도움이나 약속? 그렇습니다. 진리와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전과 전혀 다른 태도와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는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이 글을 읽는 분 중에도 아마 이전에 교회를 다녔거나, 한두 번 교회에 나가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상처를 안고 교회를 떠나셨던 분도 계실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을 허구로 여길 만큼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상실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 나쁜 경험이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의 삶은 언젠가 머지않은 시간 안에 끝이 오리라는 것은 누가 봐도 거부할 수 없이 분명한 현실입니다.바로 이 시점에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혼자 사는 인생 얼마나 외롭습니까? 얼마나 지쳤습니까? 왜 또 그 길을 다시, 계속 홀로 가려고 하십니까? 누구를 핑계 대고, 누구 탓이라고 비난해도 여전히 우리 인생은 변하지 않습니다.여기 다른 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우리가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는 중에 예수님을 삶의 구세주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아버지로, 성령님을 우리의 상담자로 모시고 살게될 때 이전보다 나아지면 나아졌지 나빠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달라졌던 수가성의 여인처럼 더 나은 삶, 변화된 삶, 기쁨의 삶, 적극적 삶, 무엇인가를 기대함으로 기다리는 소망의 삶이 우리에게도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믿음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십시오.저나 여러분에게나 인생의 목마름이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살아가다가도 불쑥 ‘이게 전부인가?’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으시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이 여인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구해보면 어떨까요?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4장 15절) 이런 질문 끝에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한복음 4장 28절) 그렇게도 멀리하던 사람들에게로, 그렇게도 피해 다녔던 그 자리로, 기쁨과 환희의 감격을 가지고 달려 들어가는 여러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익숙하게 걸어왔던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습니다. 내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수많은 사람이 이 길에서 새 삶과, 늘 꿈꾸어 왔으나 그동안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기쁨, 평안, 확신, 안전과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심하십시오. 작정하십시오. 성공적인 인생의 새 출발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복 주심과 안아주심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최근 발간한 '초청'이란 저서에서 직접 부분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교회
교회생활
전도
초청
수가성여인
야곱의우물
메시아
안아주심
만남
복음중심성은 강단에서 드러난다
by Yancey Arrington
2021-03-13
많은 개척 교회들이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교회 개척자가 매 설교마다 예수님을 언급해야 한다는 말인가? 예배마다 구원으로의 초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개척된 교회가 얼마나 복음중심적인지 '테스트' 해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강단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가 홈페이지에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자주 썼더라도, 그 교회가 복음의 중심성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저 유행을 따르는 것인지는 주일에 그 교회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이 승리하셨다복음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음 예화를 보라.침략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성을 나서는 왕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왕이 패하면 그는 자신의 참모들을 성으로 돌려보내 안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뿐 아니라 참모들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적군이 진격해오고 있소. 저격수들은 이쪽으로, 전차들은 저쪽으로 배치하시오”라고 말하며 새 전략과 기술을 안내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로지 백성들을 준비시켜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백성들은 이제 전쟁의 승패가 자신들의 어깨에 달렸음을 직감하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만일 왕이 적들을 제압한다면, 그는 사자들을 보내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은 “왕이 적들을 무찔렀소! 우리 주군께서 백성들에게 선사하시는 평강과 복을 누리시오!”라고 외치며 성 안의 광장으로 달려 들어갈 것이다. 이 기쁨의 선언에 백성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자유를 다시 만끽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의 왕을 향해서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중심적 교회란, 이를테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쟁취하셨다는 사실을 설교, 목회, 선교에서 힘써 강조하는 교회를 말한다. 진실로 왕이 승리하신 것이다. ‘훌륭한 충고’ 와 같은 설교이런 식의 접근이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먼저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전형적인 요즘 교회는 자기 설교가 실제 삶과 '연관성'이 있고 '실용적'이라고 홍보한다. 많은 교회 홈페이지에는 “우리 교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성경적 원리를 통해 여러분의 매일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주는지 오셔서 확인하세요”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다. 이에 더해, 소위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해야 많은 교인들을 유입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제 막 시작한 개척 교회가 역동적으로 자랄 수 있는 탄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 결과, 회중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재정, 가정, 결혼 등에 관한 주제 설교의 불균형적인 반복뿐이다. 너무도 자주, 그런 설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적용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춘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얻어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일련의 '괜찮은' 충고 정도라 하겠다. 사실, 그 적용이라는 것은 최신 자기 계발서나 토크쇼 출연자들이 하는 말들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것들과 거의 흡사하다. 그런 설교가 바라는 바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할 일'을 깨알같이 적은 설교 노트를 가지고 교회를 나서서 그것들을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삶의 기타 국면에서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설교들이 성경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와 같은 설교를 하는 이들이 설교 결론부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넣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문을 따라하거나, 강대상 앞으로 나오거나, 방문카드를 작성하거나 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설교 전략은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출석한 이들이 설교가 아주 통찰력 있고 실용적이라고 칭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설교 내용이 교인들의 관심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들은 인생에서 '성공'을 원하기에 그 성공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조언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설교의 잠재적인 문제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훌륭한 충고식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성경의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예수님이 성경의 전체요 본질이 아닌 성경 이야기의 ‘일부’로 전락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설교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는 예수님이 필요하지만 그 외의 영적 성숙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자기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훌륭한 충고식 설교는, 듣는 이들을 은혜가 아닌 율법에 뿌리 내리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선한 의도로 했는가에 상관 없이 실상 복음으로부터 분리된 설교다.그런 설교들이 문제가 있는 이유는,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나의 성장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성장을 강화하고 유지시키기까지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문 같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방 자체다. 복음중심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사역과 성령의 신실한 권능에 의해 시작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임을 늘 반복해서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설교바울은 “훌륭한 충고”식 설교에 대해 뭐라 말할까?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사역과 설교를 세워간다.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사역으로 곧장 나아간다. 다시 말해, 바울 역시 '실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가르쳤지만, 그는 그렇게 함에 있어 예수님이 또 하나의 좋은 인생 코치, 자기 계발 전문가, 문제 해결사, 혹은 성공에 관한 구루(guru)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다른 선택지가 없고 다른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중심적 교회들이 매일의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다루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교회들은 행함(doing)을 의도적으로 존재(being)와 연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우리의 모든 행함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 즉 그 결정적인 “다 이루었다”(요 19:30)에서 흘러나온다는 뜻이다.그래서 복음중심적인 개척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는, 복음의 좋은 소식이 설교의 결론 뿐 아니라 본론 역시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설교자는 자문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자이기 때문이다.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단순히) 훌륭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중심을 두는 설교를 행하는 교회다. 이러한 설교는 회중의 '행함'이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 위에 세워질 수 있게 한다. 원제: How Can You Tell if a Church Is Gospel-Centered? Start with the Pulp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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