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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어져 온 최초의 죄와 그 결과
by 이승구
2021-02-20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역할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이런 정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혹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그 지위를 지키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하는 정보 선택의 오류를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명백하게 이야기하는 인간 창조와 타락이라는 두 사실을 다 받아들이고, 그 함의를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인류 최초의 죄“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창 2:16-17)에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 5)는 뱀(사탄)의 말에 인간은 더 귀를 기울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다. 이런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여인은 결단하고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창 3:6). 그들은 자원해서 불순종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긴 것이다.” 이 표현은 벨직 신앙고백서의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그 고백자들이 얼마나 성경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인류 최초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어긴 것이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고, 자신들의 길을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의지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죄다.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 하나하나가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또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금지 명령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 하시는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최초의 인류는 이 말씀들의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이를 지키기 위한 방도를 마련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라”는 말을 하면서 여기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창 3:3). 죄에 빠지는 과정인류 최초의 죄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준으로 낮추어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왜 이 금령을 주셨는지 이 금령이 왜 생명의 계명인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하면 이를 어기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하여 나름대로의 방책을 찾는다.둘째, 자신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여 판단한다. 단순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말을 넣음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장로들의 유전을 더했던 것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또한 성경이 완성된 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면서 각종 이단들이 만들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성경 자체가 항상 경고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계 22:18, 19). 그것은 반드시 죄에 빠지는 길이다.셋째, 하나님께서는 명백히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창 2:17)고 하셨고,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한 것 같은 명백한 반립(反立, anti-thesis)이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점차 드러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쪽으로 드러난다. 넷째,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고귀한 위치에 있게 하였는지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사탄이 유혹하는 대로 “하나님과 같이”(창 3:5) 되려는 욕망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성을 중시하지 않으면 스스로 고귀하게 되려고 하다가 망하는 것이다.인류 최초의 죄의 결과이렇게 고의적으로 범과함으로써 인류는 죽음과 저주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선언하셨던 대로 되었다. 죄에는 항상 죄에 대한 책임, 즉 ‘형벌 받아 마땅함’이 발생하기에 이런 죽음과 저주가 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삶을 살고, 결국 물리적인 죽음에 넘겨지며, 그 이후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사망과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죽음과 저주는 매우 심각한 결과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모든 인류는 최초의 죄 이후 그들의 본성 전체가 완전히 부패되었다. 따라서 악하고 왜곡된 존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잘못된 것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신 모든 선한 것들과 뛰어난 것들이 그 흔적만 남기고는 다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전적 부패’라고 말한다.더 나아가서 이 최초의 죄로 인해 인류는 참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켰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이 문제가 가장 큰 문제다.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문제들이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믿음만일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삼중의 난제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말씀을 전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저주와 죽음 가운데 영원히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곧바로 하나님께서 오셔서(창 3:8) 인간의 죄를 드러내시며 형벌을 선언하시면서도(창 3:14-19) 그 안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고(창 3:15) 말한다. 또한 그 구원의 약속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점점 구체적으로 보이시고, 결국에는 약속된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한다. 최초의 죄인들인 아담과 하와가 그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듯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으면 이 저주와 죽음의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복된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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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선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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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죄책
원죄
전적부패
“네 아들을 죽여라” 이 끔찍한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까?
by Alex Duke
2021-02-19
성경을 진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도 그 중 하나다.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정말 사랑하는데, 단지 성경 속 몇몇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단어 하나까지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21세기까지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은 순진한 네안데르탈인이 아니다. 또 어딘가 문제가 있거나 사악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보통의 거듭난 기독교인일 뿐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성경 이야기 중 하나가 도킨스가 진짜 싫어하는 창세기 22장에 있다.여기 도킨스가 그 부분을 설명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서야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이삭을 묶었다. 이삭을 죽일 칼은 이미 그의 손에 들려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천사가 나타나 변경된 계획을 알려준다. 하나님은 결국 농담을 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을 '자극함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한 것이었다...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 두 가지 형태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의 괴롭힘, 그리고 뉘른베르크 방어(나치 전범들을 재판한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을 의미한다. 나치 전범들은 거의가 다 ‘나는 그냥 시키는대로 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역주)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 “나는 단지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야.”표면적으로만 보면 도킨스의 해석은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상당히 합리적인 해석처럼 들린다. 사실 나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킨스가 제기한 이런 의문들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보여주는 것은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약자에 대한 괴롭힘일까? 은총일까 아니면 비은총일까? 아동 학대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믿음 좋은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축복일까? 조금만 깊이 조사를 하게 되면 도킨스의 주장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사실, 그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창세기 22장은 일종의 ‘테스트’다거의 전지적인 서술자로서 모세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이런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벌하셨다거나 아브라함을 유혹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아마도 분별력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왜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시지? 그건 여호와가 아니라 몰렉 같은 이방신이나 하는 짓이잖아?”라며 의아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의문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엔진의 소음처럼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 속에 있는지, 하나님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하나님이 이삭을 진짜 죽이라고 명령하신 건 아니잖아.” 그러나 이런 해석이 가능하려면 거의 올림픽 체조 선수 수준의 과감한 해석을 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 그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부도덕한 행동을 명령하는 부도덕한 신이라는 이 힘든 매듭을 풀 수 있을까? '테스트'라는 단어가 핵심이 되는 열쇠다. “아브라함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이 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그전까지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서 'F(실패)'를 받았다. 기억하자. 아브라함, 이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내에 대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고(창 12, 20),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창 16) 아내의 종과 동침한 남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물론 하나님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계신다. 모세는 반 정도만 전지한 해설자인지 모르지만 여호와는 100퍼센트 전지전능한 신이다. 이 시험은 하나님이 모르는 이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모르고 있던 믿음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이 본문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가 최악의 국선 변호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한 나의 방어가 감각과 감수성에서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 당신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배심원이다. 당신은 여전히 궁금하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이런 사람이 지금 당신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아브라함과 비슷하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누구라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과 관련한 당신의 경험은 하나님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증거로만 잔뜩 쌓여있다. 당신의 상황은 지금 주님을 기소하고 있고, 사실 정직하게만 본다면, 당신이 모은 증거는 종종 압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불리하다. 괜찮다. 우리는 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아마도 창세기 22장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테스트일 수도 있다.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도 “너는 나를 믿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의 멘탈을 시험한다. 명령 자체만 본다면, 이것은 마치 도킨스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이삭을 죽일 칼을 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창 22:2). 모든 구절마다 칼날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그로 인한 심장의 상처는 깊어지면서 불꽃이 튄다. 하나님의 이 요구는 아브라함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믿을 수 없는 압력을 가한다. 그는 몇 년 동안 스스로를 갉아먹는 바로 이 질문을 던져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한 약속을 지키실까?”이번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과연 바뀌었는가? 그렇다, 그는 바뀌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창 22:3).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의 종들을 일부러 속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과 함께 다시 돌아올 것을 믿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그리고 모세가 자세히 서술하는 이어지는 사건을 보면 아브라함은 또한 이삭을 죽이겠다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아브라함의 마음을 괴롭혔을 이삭의 이런 순진한 질문 때문에 아브라함의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았을까? 나무를 지고 올라가면서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다 있는데, 번제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애매하게 대답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내 아들.” 우리는 지금 히브리어 해석이 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내 아들”이 애정 어린 말일까,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일까? 그는 지금 “내 아들아,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어린 양인 내 아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전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나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한다. 모래 시계에서 모래가 서서히 떨어져감에 따라, 그는 스스로 계획한 줄 알았던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하나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있었다. 신약에 들어가게 되면 창세기 22장을 덮고 있던 모든 안개는 사라진다. 리처드 도킨스의 황당한 설명은 잊어버리자. 이제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아하! 우리는 지금 막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뭔지 생각하기 전에 계속해서 읽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창세기 22장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하시는 역사도 정확하게 알아냈다. 그는 이것이 '테스트'(히 11:17)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최소한 비유적으로 볼 때 그게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히 11:19). 아브라함이 손에 쥔 도살용 칼은 이삭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창 22:10). 그런데 그때 그가 들은 소리는 엔진에서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덤불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였다(창 22:13). 이삭은 사실상 죽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까지는 말이다. 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던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삶 자체가 부활이라는 말로 정의되고, 아마도 모리아 산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님의 이상한 요청을 듣는 아브라함의 눈앞에서는 그의 전 생애가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마침내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므로 그를 신뢰하자고. 아마도 그는 아내와 자신이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고” 또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창 18:11; 히 11:11)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식을 준다고 약속하셨음을 기억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봤던 사라의 웃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던 사라의 냉담한 대답도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주님의 부드러운 꾸짖음도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18:14). 아마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 부활, 부활이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삶은 부활의 연속이었다.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에게 부활의 능력을 계속해서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과 사라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히 11:12)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 없었지만 그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2; 창 22:17)가 실현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하심인가!간단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사람 하나를 부활시키는 것이 주님에게 어려울까? 당연히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활시킨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지 못하시겠는가?무엇을 보는가?창세기 22장에서 무엇을 보는가? 아브라함이 본 것을 여러분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물론 이 모든 사건은 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는 네온 사인과도 같다. 그 연결점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사건이 생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명하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순종적인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의 등에는 나무짐이 들려있다. 그리고 저기에는 대속하는 숫양이 있다.그러나 그러한 세부사항보다 더 예측 가능한 것은 창세기 22장 속 사건이 발생한 장소, 바로 모리아 산이다. 다름 아니라 미래에 성전이 들어선 바로 그 자리다(대하 3:1). 이것은 이삭이 피했던 희생이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에서 몇 번이고 희생을 바치는 사이에 아브라함의 역사와 경험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은 희생을 드렸고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공급하심을 찬양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 모든 것을 끝냈다. 그의 피는 더 이상 반복적인 희생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게 만들었다(히 9:11).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삭의 희생이 우리를 위해 제도화 될 필요가 없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단지 믿고 또 믿을 뿐이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믿음은 이제 의로 간주된다(창 15:6; 갈 3:6). 그리고 이삭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이것이 바울이 인간적인 공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데 집착하는 한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한 이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6–7, 13–14)다시 묻겠다. 창세기 22장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바라건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신뢰, 그리고 믿음을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약속된 축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축복은 이제 당신에게까지 다다랐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함인가!원제: Kill Your Son, Abraham: Making Sense of a Shocking Comma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변증
부활신앙
아브라함
창세기22장
히브리서11장
이삭
리차드도킨스
번제
성경은 무조건적 연합을 말하지 않는다
by Quina Aragon
2021-02-18
올해 초 미국 국회 의사당에서 일어난 난동 이후, 국가와 교회가 연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 논의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이러한 딜레마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여러 해 전 일어났던 ‘처치투’(ChurchToo, 교회 안에서의 MeToo운동-편집자주) 운동으로 그동안 ‘연합’이라는 명목 아래 학대를 은폐하려던 교회들의 상황이 드러났다. 그 후 2016년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대다수의 교회에서 흑인 교인들이 ‘조용한 탈출’을 했다. 이들은 교회에서 인종에 대한 정의(racial justice)가 부족하다는 우려를 표명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분열을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연합은 '분열되지 않은 상태’ 또는 ‘하나됨’이다. 그러니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먼저 성경이 말하는 ‘연합’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성경적인 연합삼위일체 하나님은 연합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모델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요일 4:8)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완벽하게 순전한 연합체로서 영원히 존재하고 계신다(신 6:4; 마 28:19).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평화롭게 교제를 누렸지만, 그들의 죄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분열을 가져왔고, 그 결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분열이 생겼다(고전 15:22). 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셨다(벧전 3:18). 그리스도 아래 모든 것이 하나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전 우주적으로 실현될 것이다(엡 1:7-10; 빌 2:9-11).기독교의 연합은, 하나님이 인종과 배경과 사회 계층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한 가족(혹은 몸)이 되도록 모으신 결과다(고전 12:27; 갈 3:26-28). (이미 영적 실체지만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교회의 연합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를 반영하며 이를 바라보는 세계가 복음의 진리를 믿도록 촉구한다.크리스천들은 불신자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합당한 목표를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지만, 불신자들과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연합할 수는 없다.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구체화(행 2:42-47)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연합은,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요 17:17; 엡 4:13)을 통해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힘을 얻어 사명을 공유하고(마 28:19-20), 형재애와 봉사를 실천하며(갈 6:10; 벧전 1:22), 서로 화목하는(엡 2:11-22; 마 18:15-20) 것이다.비성경적 연합1. 연합 그 자체“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시 133:1) 선하고 아름답다고 했지만, 연합 그 자체가 반드시 미덕은 아니다. 바벨탑에서의 연합(창 11:1-9)이나 헤롯과 빌라도 간의 연합(눅 23:12)은 연합이 선이 아닌 악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는 수단임을 보여준다. 진리와 정통을 인정하고 이를 적용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성경적 연합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이다.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노예 소유를 인정하는 크리스천 노예 소유주들과의 연합을 거부하면서, 이런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른 신조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는 주의 만찬에 함께 참여하지만, 노예 소유주들과는 어떤 교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교회 안으로 살인범을 받아들이면 곧…사람을 훔치는 도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연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와의 연합이 목표다.2. 획일성더욱이 성경적 연합은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족은 믿음으로 한결같은 성숙을 위하여 서로 섬기는 은사를 받은 다양한 사람들이다(엡 4:11–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은사와 능력과 개인적 선호, 혹은 성별이나 나이 같은 다른 특징들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지워버리지 않으신다(계 7:9).당파적 충성을 요구하거나 개인의 고유 유산을 버리게 하거나 혹은 문화적/사회적 계층의 규범을 영적 의무와 융합시키는 일체의 요구는 성경적 연합이 아니며, 단지 그 요구에 동화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이다.3.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구약 시대 이후로 하나님은 범죄자들이 사죄하게 하는 것보다는 피해자를 온전하게 하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범죄자가 주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자신이 피해를 준 이웃에게 배상해야 하는 배상법(레 6:1-7; 출 22:1-15; 마 5:23-26)을 참조하라.유대 동족의 돈을 빼앗은 세리 삭개오는 이것을 알고 이렇게 말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기독교 연합은 취약한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받는 동안 '쿰바야'를 부르며 춤추는 원을 유지하기 위해 악을 은폐하거나 강한 비평이나 갈등을 무시하지 않는다(암 5:21–24; 고전 11:17–21). 다윗 왕은 자신의 딸 다말이 암논에게 강간당한 후에 이에 대한 정의를 집행하지 못했을 때, 그 교훈을 힘들게 배워야 했다(삼하 13). 그 결과로 가정과 왕국에 치명적인 분열이 일어났다.바른 정의를 저버린 연합은 가짜 연합이며,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정말로 연합을 원하는가?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가해자가 회개하도록 촉구하지 않는 공허한 연합에 참여하도록 우리가 요구받을 때는 특히, 성경적 비전을 반드시 새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참되고 덕이 있는 연합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리고 그 참됨과 덕이 모두 성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연합을 표현하는 것인지, 우리의 뜻만을 고집하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빌 2:3-4; 눅 10:25-37),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회개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 새로이 결심해야 한다.성경적 연합이 때로 쉽거나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성경적 연합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라는 말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것이다.원제: What Do You Mean by ‘Un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연합
분열
하나됨
삼위일체
획일성
융합
부당함
영적학대
때로는 분리가 맞다
by Carl R. Trueman
2021-02-17
분리(separation)는 오랫동안 교회를 괴롭힌 까다로운 주제다. 사실 성경은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정작 누군가와 분리해야 한다는 개념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각 세기가 끝날 때면 그 시기는 어김없이 인종 갈등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거부하면서 발생하기 마련인 무수한 피의 증언으로 채워졌고, 또 한편으로 분리주의 개념에 대항하는 강력한 문화적 힘이 발생하기도 했다. 독자들이 행여 단지 설명이라는 목적 때문에 내가 이것을 언급한다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두 가지는 분리에 대해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분리가 결코 가볍게 다뤄져야 하는 주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리라는 개념은 교회 역사에서 오래되었고 또 논쟁의 중심에 있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그와 반면에 내가 가진 믿음의 내용과 형태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는 적극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 환경에서 분리라는 주제는 보다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백 년 전,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문제가 된 이슈는 단순했다. 그것은 초월적 기독교(supernatural Christianity)를 주장하는 사람과 기독교의 초월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초월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불일치는 모든 논의의 전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어떻게 이 뜨겁고 또 복잡한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분리라는 주제에 접근해야 할까? 이 짧은 글로 모든 경우에 다 적용할 수 있는 만능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분리와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하는 기본적인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려고 한다. 가장 먼저, 현대에 들어서서 발생한 분리와 관련한 대부분의 토론은 다 교리 때문이었지만, 우리는 또한 성경이 특정한 부도덕성도 분리의 문제로 분명하게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5장은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성적 부도덕에 빠진 사람은 기독교인 교제에 참여할 수 없고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분리라는 생각이 공격적이고 또는 바리새인처럼 들릴지 몰라도 우리는 교리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야말로 분리를 일으킨 진짜 주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진실된 교리를 떠나 분파를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사람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순서를 기억하자. 바른 교리에서 떠나간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분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바로 믿는 사람들의 반응은 단지 잘못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교제와 분리의 정도가 가진 차이를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나는 장로교회 신자로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침례교회에서 장로나 목사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침례교도는 내가 있는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침례교 친구들과 다양한 환경에서 교제를 나눈다. 어떤 경우는 공식적이고 또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나는 침례교 발표자와 함께 컨퍼런스를 하기도 한다. 침례교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침례교 친구와 온전하게 사역에 수반된 교제를 즐길 수 있는 한,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들인양 우리가 서로 분리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어떤 경우에 분리가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게 한다. 분리는 바로 믿음과 불신앙의 차이로 일어난다. 이 차이는 분리라는 방정식이 가진 도덕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을 모두 포괄하며 또한 기독교인 개인과 교회 전체까지도 포괄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온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14절).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 또는 데이트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물론 이런 해석도 이 구절을 적절하게 바라보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직접적으로 결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이 구절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반적인 원칙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이 쓴 다른 글을 보면, 그는 기독교인도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분리주의자 또는 컬트 신봉자처럼 교회 밖 다른 모든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결코 바울이 말하는 방식이 아님은 확실하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여기서 신앙이 없는 사람이 장사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사업을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가 믿지 않는 건축업자를 통해서 교회 건물을 짓거나 하수도 공사를 하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지금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와 세상이 협력해서, 또는 복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협력해서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내 침례교도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기에 나는 침례교도인 내 친구 목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는 데 조금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근본 요소를 부정하는 누군가가, 비록 그가 장로교회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바울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복음을 믿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간에는 결코 동등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적지 않은 윤리적인 원칙이 보다 광범위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을 고려할 때, 분리의 문제는 종종 보다 더 종합적인 맥락과 시급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낙태 문제는 어떤가? 또는 동성 결혼은? 이런 윤리적인 문제는 많은 전통적인 종교를 하나로 만들었다. 개신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유대인 그리고 무슬림. 그러면 분리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이런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개신교도인 내가 다른 종교인도 함께 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석해도 되는 걸까? 다른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내가 공동전선을 형성해서 이런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바로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의 기독교인과 사회 속 기독교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교회를 다니는 나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고수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는 바울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나는 무슬림을 교회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복음을 듣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 안에서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를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속 기독교인으로 나는 주일 교회를 나서는 순간 더 이상 내 믿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대신 비록 영적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맥락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낙태 반대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 그 집회가 종교적인 목적을 가져서가 아니라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확신 아래에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 얼마든지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집회에 참석하는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게 아니라 단지 사회 정책에 있어서 특정 윤리 문제에 관해서 내 확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논리가 결혼과 성적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모임이 어떤 특정 종교가 더 과도하게 드러나는 데 선전용으로 사용되거나 또는 복음의 핵심적인 차별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쪽으로 악용된다면 나는 더 이상 그런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맥락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지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은 경계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부담이 되어가는 분리와 관련한 주제인데, 바로 교단간의 연합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불필요한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개신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분리의 역사다. 그것은 그동안 얼마나 개신교회가 일치에 관해서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큰 교단 안에서 발생한 정통의 붕괴가 평범한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도전을 초래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다 교회 지도자가 딱 한 번 심각한 문제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지만, 문제는 얼마나 더 참아야 하는가다. 언제 바울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는 이 명령에 따라서 결단해야 하는가의 여부다. 모든 상황은 다 다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기본 원칙이 있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 고백을 적용하기 위해 확립한 기본 과정을 통해 지켜지는 복음의 기초가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교회가 타락했다면, 그때는 그 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가 부활을 부인한다고 그 즉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능한 교회법에 따른 모든 법적 절차를 다 동원해도 지도자가 여전히 그런 이단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때는 떠나야 한다. 분리는 힘들고 또 지금 이 시대의 문화와도 맞지 않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환경에 처하면 분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명령이다. 원제: Reasons for Separ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교리
분리
부도덕성
교제
믿음
불신앙
근현대교회
교회역사
성경을 읽는 데 시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
by Jessica Hooten Wilson
2021-02-16
“누구든지 들을 귀 있는 자가 듣게 하라” 예수님은 말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신다면, 만약에 우리가 그의 음성을 향해서 귀머거리가 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상황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만약에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만약에 비유적인 설교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듣지 못하는 상태라고 경고했다.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ity)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라일 제프리(David Lyle Jeffrey)는 ‘성경과 영시의 시적 상상력’(Scripture and the English Poetic Imagination)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제프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님이 굳이 허구적이고 비유적이며 또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고 싶은 만큼 또 동시에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간절하게 찾는 사람만이 그가 들려주는 말씀의 뜻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귀를 시에 기울여야 한다.“하나님은 시인이다”라고 제프리는 말한다.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뿐 아니라 그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는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듣는 이가 메시지의 형태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메시지 속 내용이 아예 상실될지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제프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매우 자주… 하나님은 시인처럼 말씀하신다.” 성경을 펴고 제프리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해보라. 성경을 소리내어 읽을 때, 얼마나 자주 비유적인 언어를 만날 수 있는가? 창세기 속에 있는 히브리식 형태, 시편 속 시적 표현들, 그리고 잠언과 아가서를 보면 더 확실하다. 하나님은 이사야와 에스겔에게 시적으로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의 비유 등등 성경 속에 담긴 이런 다양한 시적 표현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높고 거룩한제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를 듣거나 또는 시를 즐기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30년도 더 전에 탁월한 시인이었던 다나 지오이아(Dana Gioia)는 이제는 더 이상 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시가 여전히 중요할 수 있을까? 비록 시가 계속 쓰여지고 있지만, 시는 이제 문학 생활의 중심에서 뒤로 후퇴했다.” 시를 읽는 것은 이제 시대와 동떨어진 일이 되었다. 시는 이제 베레모를 쓴 뉴요커 또는 동부 오스틴의 힙스터(hipster, 1940년대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속어로 유행 등 대중의 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역주)나 즐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프리는 시가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지금 시대의 현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를 읽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 만한 좋은 점이 시에 있다. 제프리의 시각에서 볼 때, 시가 가진 수준높은 스타일은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거룩함을 더 강화시킨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를 가지고 일상의 대화를 할 수는 없지만, 시는 얼마든지 미스터리를 담아낼 수 있고, 또 시를 듣는 이는 그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제프리는 충고한다. “하나님 왕국에서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함에 더 잘 나아가게 하는 시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시는 바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주일이 거룩한 시간으로 다른 날과 구분되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처럼, 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중요함과 경외로움을 다시금 알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된다.지금 현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인터넷 중독이라는 집단적 마취 상태가 끝나고 그나마 상상의 힘이 남아있는 미래의 삶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채우는 싸구려 대체품에 의해서 시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그 옛날에는 세상이 어땠지?”라는 질문에 대답할 정도의 기억은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한다.종교개혁 이후의 시제프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종교개혁 이후’와 ‘나 자신(self)을 도덕적 의무의 권위자 및 중재인’으로 상향시키려던 종교개혁 속 인본주의자들의 경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종교개혁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런 경향은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작가들로부터 시작해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종교개혁 당시 영국 시인인 존 돈(John Donne)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작품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글이지만, 또 동시에 시는 대단히 개인적인 면을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은 고백과 회개, 구원에 대한 열망을 시로 썼지만 허버트는 기도문을 쓰고 그 글을 목양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그의 집에 모이는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신학과 정치 그리고 교회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던 단테(Dante) 또는 초서(Chaucher)의 시적 서사는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 성찰을 다룬 시로 대체되었다.낭만주의 시가 가진 이단성을 논하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이것은 그냥 내 생각이지, 저자인 제프리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다), 제프리는 17세기를 지나 자기 참조적 시(self-referential poetry)라는 거짓된 생각을 그대로 계승한 근대로 넘어온다. 그는 1953-1954년에 있었던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 1887년부터 시작한 영국 신학계의 강연-역주)에서 있었던 존 맥머레이(John MacMurray)의 경고를 인용한다.“가장 먼저 근대 철학은 나(self)를 시작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는 이제 고립된 개인이다… 그렇게 전제가 된 자아는 이제 지식, 그러니까 유용한 정보를 찾는 사상가다.”나에 대해서 이런 가정을 하는 이상, 굳이 뭐하러 시를 읽어야 할까? 더 나쁜 것은, 이런 식의 사고, 고립된 개인의 본성을 전제로 한 사람이 쓰는 시는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표현은 거창할지 몰라도 넌센스로 가득할 뿐이다. 제프리는 이런 근대성의 모토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미가 무엇인지는 당신이 정하기 나름이다.”아마도 이런 현실은 왜 시가 더 이상 인기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제프리는 이렇게 썼다. “현대 시인은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공공 시각 영역 밖에서 느낀다.” 만약에 우리가 의미라는 면에서 동떨어진 소리만 한다면, 우리는 독자에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의 틀 외의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 굳이 열정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지배하는 그 어떤 권위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제프리는 이렇게 한탄했다. “현대 시인이 가진 몇 안 되는 딜레마 중 하나는 독자들이 아는 단어가 점점 더 적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더 나아가 과거와의 대화가 단절되도록 만든다.”그러나 현대 시인들과 현대 영어시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 “관계 속에서의 개인의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공유된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시는 우리에게 “공통 비전의 일부를 돌려줄 뿐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이 된다.”시의 급박성이미지의 한 조각으로서, ‘종교와 예술의 저널’(Journal of Religion and the Arts)에서 캐서린 윌리스 퍼쉬(Katherine Willis Pershey)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쟁 범죄와 자동차 광고가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시는 평범한 아름다움과 궁극적인 중요성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외치고 있다.”시는 이해불가한 수수께끼에 이름을 붙여준다. 과열된 모니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평범한 단어가 둔탁한 소리처럼 느껴질 때, 시는 신적 개입처럼 그런 소음을 부수고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며 또 우리는 누구인지를 다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시가 없으면 우리는 컴퓨터의 코드처럼 말하는 운명으로 전락할 것이다. 의미 없는 슬로건으로 가득찬 광고처럼 말하거나 또는 짖거나 우는 동물 소리나 내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시는 우리를 창조 질서 속에서 창조된 바른 피조물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제프리의 말처럼, 만약에 하나님이 ‘최초의 시인, 이 세상이라는 최초의 시를 쓴 존재’라면, 우리는 그 시를 들을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경고한대로 우리는 눈은 가지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는 가지고 있으나 듣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원제: Why Christians Need a Poetic Imagin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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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가 당신을 떠났을 때도 소망은 있다
by Craig Luekens
2021-02-15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이 글 쓰는 것을 꺼렸다. 행여 이 글이 이혼이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적인 고충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유쾌하게 전달하는 이 시대의 가벼운 유행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느낀 연민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더욱이 가십거리나 중상 모략으로 독자들을 유혹할 마음도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이혼이 끔찍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만연한 문제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와 목회자의 삶에까지 찾아오는 이혼의 현실을 정직하게 그려서, 이혼이 주는 잔혹한 아름다움 속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자비를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이 당신으로 하여금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고, 또 이혼의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란다.기본적이고 또 공식적인 사실은 12년 간 나의 아내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여자는 신앙을 버렸고 이어서 이혼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미 교회를 떠난 그녀는 이혼과 관련해 그 어떤 성경적 근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가 결혼 생활을 버린 것은 사실 내게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고, 또한 내가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남편이 되는 데 실패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결혼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작년에 이혼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섯 가지 교훈이 있다.1.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했다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애통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고난과 죽음이기에), 나는 사실 그동안 수많은 개인적인 고난으로부터 크게 보호받아 왔었다. 내가 겪은 슬픔의 과정은 여러 형태를 띄었고,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내가 지금 진짜 슬픈 것인지 의아할 때도 있었고, 또 당장 몇 분 후에 어떤 감정이 닥쳐올지 아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평생 가졌던 꿈의 상실, 내가 준비하던 계획의 종말, 이제 사라져버린 내 아이들과의 그 소중한 시간들, 오, 내 자식들! 가슴을 후벼파는 통증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시편 말씀과 더불어 '지친 영혼 피난처 있으니', '십자가를 내가 지고' 그리고 '주님께 물었네'와 같은 귀한 찬송이 없었다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그 슬픔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다. 어떤 날은 시편과 찬송가 속 모든 가사가 내게도 진리로 다가왔다. 그러나 또 어떤 날은 찬송이 울려 퍼질 때면 바닥에 얼굴을 대고 따라 부르며, 그 속의 가사가 내게도 진리가 되기를 바라곤 했다. 또 어떤 날은 도무지 그 가사가 진짜라고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리라는 사실만으로 그 찬송을 듣기도 했다. 슬픔의 어둠 속에서 나는 그때처럼 절실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했던 적이 없었다. 2. 부당한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다특권으로 가득했던 내 삶에서 이혼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고통과 불의였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꿀 수도 없던 고난에 시달리던 그때, 내 침대 옆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쓴 문학 전집이 쌓여 있었다. 나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과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을 재발견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작가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은 고통은 내가 개인적으로 겪는 슬픔과는 그 형태에서도 또 깊이에서도 차원이 달랐지만, 나는 고통이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작가들의 생각을 통해 유대감이 주는 위로를 발견했다. 비록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따르는 제자라고 해도 고통을 추구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고통이 알아서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부당한 고통을 겪는 내내, 나는 힘든 길을 걸어야만 했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또 위로를 받았다. 3. 쓴 뿌리를 버려야 했다나는 오랫동안 분노했다. 그 감정은 아직도 가끔 나를 찾아온다. 그러나 결국 나는 분노를 긍휼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었고, 결국 나를 자기 연민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켰다. 거룩하고 죄 없는 분이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에 쓴 뿌리를 계속 품고 있을 수 있겠는가?성령께서 내 속에서 일하셨고, 나는 이제 좋은 마음으로 믿음을 가지고 전 아내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정말로 100퍼센트 그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도달하려면 아직까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로 놀랍게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부드럽게 하셨다.4. 내 속에 깊이 숨은 죄를 대면해야만 했다 “자기 자신을 영적 멘토로 택하는 것은 바보를 멘토로 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교부가 있다. 또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믿을 때 쓰러지지 않은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행히 나는 훌륭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며, 진실하고 은혜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자주 나 자신을 고립시킴으로써 죄의 기만적인 계획에 빠지곤 했다. 예를 들어, 새롭게 연애를 시작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죄가 가진 커다란 힘에 관해서 여전히 순진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셨고,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셨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이렇게 썼다. “의인들 가운데 갑자기 진짜 죄인이 발견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린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과 위선 속에 살면서도 죄와 더불어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죄인이다! [중략]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경건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은총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진리를 들이대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죄인이다. 대단히 절망적인 죄인이다. 이제 죄인인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원하신다. 그는 당신에게서 희생도, 공로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그는 오로지 당신만을 원한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잠 23:26).”이혼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또 내 마음을 하나님께 더 드릴 수 있다면, 나는 이혼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결혼은 여전히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드라마다나는 최근에 이혼 이후 처음으로 결혼식 주례를 하는 놀라운 특권을 누렸다. 나는 그 부부가 나의 개인적인 상황을 혼전 상담이나 결혼식 주례자의 장벽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 고무되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부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 부부의 공개적인 결혼 서약을 목격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결혼에 대한 나의 확신이 흔들린 것은 아니다. 건강한 결혼은 여전히 가능하다. 결혼은 변함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내 경험이 진리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6. 가장 힘든 시간에 나는 종종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혼이 최종 확정된 후 사람들이 했던 이런 말을 나는 싫어한다. “이게 최선이었어. 이제 당신 두 사람은 각자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애들도 잘 자랄 거야.”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복음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단단히 붙들도록 요구한다. 죄는 끔찍하고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과 그분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선을 위해 죄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사용하신다.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혼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또한 하나님이 이혼까지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분은 나를 지키셨고, 내게 자신을 더 많이 보여주셨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더 닮아 가도록 만드셨다. 나는 이혼이 남긴 수많은 상처들이 너무도 싫다. 그럼에도 나는 시편 기자와 함께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고후 1:3-4)라는 말씀에 의지하면서 나는 이전보다 더 영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분이 주시는 피난처에서 당신의 지친 영혼도 위로받기를 기도한다. 원제: Hope When Your Spouse Divorces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디트리히본회퍼
위로의하나님
이혼
영적성장
위로
결혼생활
애통
쓴뿌리
기도는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특권이다
by Burk Parsons
2021-02-14
지역 교회 목사로서 나는 수많은 배경과 문화, 그리고 다양한 나라와 종교가 섞인 다민족 공동체인 중부 플로리다 지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또 어떤 종교를 반대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아버지되심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즉시 이렇게 반응한다. “글쎄요,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맞다. 바울이 아테네(행 17:29)에서 선언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소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이 전가해준 의로 인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가 될 수 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까지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있지만,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믿음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과 연합한 자들만이 오직 하나님에게 입양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바울이 자신을 포함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대상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또한 참고하라. 요 1:12; 롬 8:14–21; 9:8; 갈 3:26).가족으로 입양'아버지'라는 단어와 함께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었을 때, 그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하는 전 우주적 의미로 그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또 우리와의 관계와 관련해서 보다 더 심오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단지 그냥 아버지(a Father)가 아니라 유일한 아버지(the Father)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을 때, 그는 우리를 가족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우리를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 새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도록 부르신다. 공동체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예배하도록 하신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믿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언약 공동체인 살아있는 몸의 생명력 있는 한 지체임을 되새기게 된다. 독생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1세기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오만하게 여겨졌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1:14; 8:19; 14:7).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당시의 유대 랍비들의 눈에 좋게 봐줘야 교만한 행동, 최악의 경우에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백하게 예수님이 자신을 거부하는 몇몇 유대인을 꾸짖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바로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요 8:39-47). 유대인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았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본성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린 여자의 후손, 오랜 기간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창 3:15; 사 9:6).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본성의 상태였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복하고 친구와 아들로 삼기 전까지는 우리도 하나님의 적이었다. 환영받고 축복받음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와 형제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그가 우리도 맞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많은 형제들 중 맏이가 되었고 따라서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거룩함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벧후 1:3-4). 우리의 아버지는 자애롭고 또 너그러운 아버지이기에 이 땅에서 만나는 육신의 아버지가 돌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우리를 돌보시고, 이 땅의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데, 이는 다 그가 이 땅의 아버지가 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히 12:9-10; 롬 5:8).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욕망과 죄를 다 알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꾸실 수 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고, 또 우리의 아버지가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아예 간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는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고아처럼 간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는 단지 우리를 '입양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었고 또 다윗 왕과 원수 관계에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리를 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로 죽었고 우리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원수가 된 존재다. 그러나 다윗이 므비보셋을 환대하고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축복하신다. 그는 우리를 맞아서 씻어주심으로 그의 식탁에 편히 기대앉아 쉬게 하시고 또 함께 식사하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셨다(삼하 9; 요 13:1-20).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가 그의 영광 안에서 완전하고 세상을 초월한 존재며 하늘 위 영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항상 존재하고 언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소통할 준비가 된 아버지라는 것을 예수님은 상기시킨다(시 145:18; 렘 23:23; 행 17:28; 약 4: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어떤 권력자나 너무도 바빠서 결코 우리 근처에 오지 않는 그런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대신 아침이든 밤이든 항상 그 언제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온 우주를 운행하는 이, 주권자이자 삼위일체이신 전능한 하나님께 겸손히 그러나 자신있게 “아버지여~”라고 울부짖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을 때, 그는 또한 거룩히 여김을 받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도 가르쳤다. 하나님이 스스로 공개한 언약의 이름은 여호와다(출 3:14).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또는 거룩한 이름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스스로의 선포에 의해서 거룩해졌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권위나 권세로 인해 구별되거나 성화된 것이 아니다(히 6:13). 그의 이름이 거룩한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과 같지 않으며, 그의 이름은 단순히 우리가 그를 부르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의 이름은 그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여호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이름이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에게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확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리고 거룩한 이름으로 존중받게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며, 일단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상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신 31:6; 히 13:5).원제: Humbly Coming Before Our Father: The Privilege of Christian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입양
자녀
축복
기도
특권
독생자
삼위일체
아버지되심
나이 든 부모님이 도움 받기를 거부할 때
by Gaye Clark
2021-02-13
“난 됐다.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못들어 봤니? 이게 네가 나를 공경하는 방법이냐?” 나이 든 한 여자가 병원에서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요양원으로 가야한다는 딸의 말에 그 여자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2011년 이후로, 매일 만 명의 베이비부머가 65세를 넘긴다.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인구 예상에 따르면, 2030년까지 18퍼센트의 인구가 65세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점점 많아지는 고령 인구를 돌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돌봐야 할 노인층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도전은 하루하루 겪어야 하는 고통이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이상의 노인을 돌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족을 돌보고 또 일도 해야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데 소요되는 신체적, 정서적인 부담 외에도 나이 든 혈족과의 관계는 때때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의 연속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또 약 처방을 받으면서 점점 소외감을 느낄 뿐 아니라 정신 질환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나이 든 가족을 돌보는 것은 마치 재난 지역을 돌보는 것 또는 선교지에 있는 것, 아니, 그 두 가지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이런 스트레스에 더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당신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공격적으로 나올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한 마음과 강한 멘탈이다. 여기 열 가지 제안이 있다. 1. 미리 대비하라요양원에 가는 것, 그러니까 이제는 자동차 키도 포기하고 은행 계좌도 자식한테 넘기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개 병원에서 넘어져서 크게 다치거나 아니면 심각한 병이 발병했을 때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오히려 대화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요양원에 가는 것과 같은 심각한 이야기는 당신의 부모가 그나마 괜찮을 때 하는 것이 낫다. 그러니까 치매 또는 다른 증세가 나오기 전에, 병원에 입원해서 이미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하는 것이 낫다. 2. 질문하라부모에게 최후통첩을 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대신, 가능하다면 당사자를 의사 결정 과정에 포함시켜라. 당사자가 느끼는 공포와 걱정을 당신이 다 알고 있다고 간주하지 마라. 당신 생각을 피력하기 전에 먼저 묻고 배우라. 다음과 같은 열린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라. “내가 어떻게 기도해주면 좋을까요?” 3. 치매라고 간주하지 마라부모의 고집스런 생각을 그냥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고 치부하는 것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요양원과 관련해서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어머니를 알츠하이머라고 쉽게 단정하면 안 된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다 피차 선입관에 입각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잠 18:17). 안전 또는 복지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있는 게 아닌 이상, 당신의 부모는 당신의 의견에 얼마든지 반대할 권리가 있다. 4. 의학적 진단을 요청하라부모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는 것이 반드시 치매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떤 의학적 원인 때문일 수 있다. 그런 경우 주치의와 약속을 잡을 필요가 있다. 신장 감염 또는 약물에 대한 부작용과 같은 의학적 상태는 노인의 판단에 영향을 주고 혼란과 동요를 유발할 수 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이러한 상황이 제대로 알려질 때, 판단 능력이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최대한 빨리 외부 카운슬링을 받으라부모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개입해야 하는 경우라면, 가능한 한 많은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라. 가족의 도움과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쓴 경우라면, 노인에 관한 법을 잘 아는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후견인을 얻는 문제에 도움을 받으라. 목회를 돕는 직원 뿐 아니라 의료 전문가, 요양 관리자, 노인 이동 관리자 또는 노인 돌봄 관리자와 같은 다양한 전문가는 당신이 힘든 여정을 걷는 중에 만나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 15:22). 6. 공감하라“나한테 가장 힘들었던 일 중 하나가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는 거였어.” 한 노인이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내 아들은 그때 내가 어떤 상실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을 거야.” 대부분의 노인은 배우자, 건강, 독립성, 소중한 소지품 또는 주택 등등, 여러 번의 상실감에 고통받는다. 당신도 같이 마음 아파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변화를 제안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충분히 슬퍼할 시간을 제공하라. 7. 인내를 연습하라“처음에는 내가 아버지 통장을 관리하는 것을 아버지가 대단히 반대했어요. 한참이 걸렸어요, 아버지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는요.” 한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재정에 관련된 결정을 할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야 한다. 재정적인 정리를 하거나 또는 재정 규모를 줄이는 데는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주말에 불쑥 나타나서 굿윌(Goodwill, 미국에 있는 기부센터-역자 주)에 가져다줄 물건을 트럭에 잔뜩 쌓아서 바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올 때마다 가구 하나씩 처리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8.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라비협조적인 부모는 스트레스와 가족 갈등을 가져올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다(롬 8:28). 나는 사이가 벌어졌던 형제가 부모를 돌보는 중에 자연스럽게 화해하는 것을 보았다. 말기 질환으로 호스피스에 대해서 의논하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맡길 수 있다. 9. 교회를 끌어들여라당신이 출석하는 교회 또는 부모가 다니는 교회에 상황을 알려주라. 그리스도의 몸은 지친 가족에게 꼭 필요한 휴식과 격려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지역 교회는 간병인과 그 가족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10. 복음을 굳게 붙잡으라나이를 먹는다고 항상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더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독립성을 잃은 부모는 가장 편하게 느끼는 대상, 즉 자녀에게 그 분노를 쏟아낼 수 있다. 이런 경우 성인이 된 자녀는 지치게 되고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 든 부모를 돌봄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한 그리스도에게 더 큰 감사를 할 수 있게 된다(롬 5:7-8). 그 누구도 자연적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의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간병을 통해 우리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구주를 더 의지하게 된다. 오로지 그분만을 붙잡게 된다. 원제: When an Aging Parent Rejects Your Hel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부모님
공경
예방
치매
돌봄
공감
인내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 세워지는 가정
by Paul Tripp
2021-02-12
나는 삶의 방식에는 오직 두 가지 방식만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든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삶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방식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삶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이 되려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역동성이 자녀 양육과 결혼 생활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녀 양육성공적인 자녀 양육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대로, 올바르게, 통제권을 내려 놓는 것이다. 자녀 양육의 목표는 한때 완전히 우리에게 의존했던 자녀들을 독립적이고 성숙한 성인이 되도록 키우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독교 공동체에 바르게 연결되고, 그들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육아 초기에는 부모인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우리는 육아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로 불평을 하면서도 그런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즐긴다.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그들의 음식, 쉬는 시간, 운동 방법, 그들이 보고 듣는 것, 가는 장소, 심지어 친구까지 모두 우리가 선택해 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때 뒤집지도 못했던 아기가 이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화장실 안으로 기어 들어가 화장실에 걸려 있는 화장지를 풀어 버릴 수 있게 된다. 그 아이는 곧 자가용을 몰고 집을 떠나 부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선택한 친구들로 인해 힘들어 하는가? 친구를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그 부분은 성숙해 가는 자녀에게 통제권을 넘겨주어야 하는 영역이다. 자녀들의 성숙과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지 않는 것에 자녀 양육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그런 종류의 통제를 행사하실 수 있다. 따라서 자녀 양육은, 말씀의 원리를 통해 자녀들 안에 자제력이 커가도록 심어 주어 그들에게 훨씬 폭넓은 선택 상황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 통제하고 독립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돕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나는 상담사이자 목회자로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싶어하는 부모들을 정기적으로 돕고 있다. 내가 상담했던 부모들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십대 자녀를 어린 아이와 같이 취급하려 했다. 결국에는 부모라기보다는 마치 교도소장처럼 명령과 통제로 자녀들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 힘들고 중요한 순간에 복음으로 자녀들을 보살피는 것이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자녀 양육 문제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1.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그분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상황은 없다(엡 1:22).2.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약속하신 선한 일을 이루고 계신다(롬 8:28). 따라서 성장해가고 있는 자녀의 모든 욕구와 생각 그리고 행동을 우리가 통제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적 다스림을 받고 있다. 3. 자녀 양육의 목표는, 자녀에게 우리의 형상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취향과 관점 또는 습관을 자녀 안에 복제하려 하거나 그들 안에서 우리 형상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들 안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정직하게 보지 않고는 자녀 양육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자녀들의 성공과 감탄할 만한 일에 맞추어져 있고 그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으면, 그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기보다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녀가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기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려움의 순간들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자녀를 단지 좌절감을 주며 실망과 짜증을 일으키는 존재로 보게 되며, 그들을 돌보라고 하신 부름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분노만 커져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결혼통제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원리는 결혼 관계에서도 똑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 결혼 생활을 한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깨진 세상에 의해 매일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어쩌면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우리 생애와 결혼 생활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하는 주요 문제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도록 선택해주신 환경을 우리가 피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결혼으로 인한 우리의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운명이거나 혹은 우연한 기회에 얻은 행운이 아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다. 사도행전 17장은 하나님이 우리가 살 곳들과 살 날들을 정확하게 결정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로 인해 놀라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맞이하더라도,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 세상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를 그 속에 두신 목적을 아는 것은 결혼 관계를 연합과 이해와 사랑 위에 세워 가는 데 근본이 된다.우리는 대부분 개인적인 행복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워할 능력을 주셨고 즐거워하도록 우리 주변에 놀라운 것들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작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뭔가 깊고 필수적이며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거룩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계신다. 거룩이라는 용어 때문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 단어는 하나님이 일상의 상황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려 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분은 우리의 현재 모습이 모두 원래 창조되었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다. 시인하기가 어렵겠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 죄가 있으며, 그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원래 모습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죄는 모든 이들이 연합과 이해와 사랑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방해물이다.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현재 마주한 어려움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온전히 우리를 살피시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을 잠정적으로 중단시키거나 보류하실 수도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처한 삶이 이해되고,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이 불합리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도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결혼 관계에 소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 가운데 계시며,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던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위하여 그 상황들을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는 더 낳은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결혼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이 타락한 세상의 것들이 우리 가정의 문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서 이러한 어려운 것들이 우리를 통하여 선한 결과를 내도록 일하시기 때문이다.원제: Ordering the Home without Being Controlling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은심
가족
양육
통제권
결혼
거룩
패러다임
순종
질서
자녀영육
행복
예수님처럼 당신은 화해의 메신저입니다
by Rod Mays
2021-02-11
관계는 왜 이렇게 꼭 복잡해야만 할까? 왜 좋은 친구들도 서로 간에 '복잡한 상황'을 맞아야 하는 걸까? 왜 가족끼리도 사이가 벌어져서 몇 년 동안 말도 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되는 걸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적이자 동시에 서로 간에도 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바로 화해의 메시지다(그것은 서로 갈라진 관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묶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바울이 쓴 화목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그 의미는 적대감과 적개심 또는 악의를 종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소통은 방해받았고, 그 관계는 깨어졌다. 이사야 59장 2절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에게는 그의 백성에게 사랑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 극단적인 회복책이 필요했다. 극단적인 회복책은 십자가 예수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우리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서 해결하길 원했다. 하나님 은혜의 수혜자는 이제 이런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메신저가 되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린 능력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준다. 옛 생각, 옛 행동, 옛 의견, 옛 성격과 태도는 사라졌다. 그것들은 이제 다 죽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남자와 여자는 이제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하나님이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하신 일과 같은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바로 그런 극단적인 관계의 회복을 우리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은 그 죄로 인해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려고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기 자신이 모든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주된 이해 당사자처럼 행동했다”('순전한 기독교'). 하나님이 바로 모든 갈등에서 '가장 상처를 받는' 존재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이 상처와 분노를 잊어 버리고, 너무도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죄가 궁극적으로 하늘 아버지를 대적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문제는 이 화목하게 하는 의사 소통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감정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화목이 필요함을 깨닫도록 하실 때에야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세상에 만약에 갈등이 없다면 화목에 대한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 죄를 짓는다. 또는 서로 다른 이의 죄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갈등이 싹튼다. 자존심, 잘못된 가정, 분노, 그리고 마음의 쓴뿌리는 다른 이들의 행동 또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을 때, 화목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죄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성경은 또한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러나 죄가 특별히 큰 상처를 주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가지거나, 또는 교회의 권징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면, 거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당연히 갈등의 당사자들에게는 사적인 소통이 훨씬 더 편할 것이다. 갈등이 막 시작됐을 때 특히 더 필요한 명확하고 온유한 소통은 잘못된 가정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또 당사자의 영혼에 지속적인 슬픔을 초래하는 성급한 조언을 막을 수 있다(시 13:2).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다(엡 4:15). 그것은 말을 할 때, 인내와 온유함을 가지되, 자랑, 거만, 무례, 초함, 그리고 원한을 갖지 않는 것이다(고전 13).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화목을 전달하는 소통의 본질이다.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 왜 이런 수고를 해야 하나?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그의 백성이 하나되게 해 달라고, 하나됨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요한복음 17장 20-23절에서 기도했다.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관계를 해치는 갈등의 문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명성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우리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도망가게 한다. 쓴뿌리와 원한은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함을 사라지게 한다. 회피는 다른 이와의 열린 관계가 주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런 감정의 근원에는 자만심이 있다. 어쩌면 말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진짜 칼과 총 때문에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수도 있다. 음주 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이들 간의 잡담에서 나의 인격이 묵살당했을 수도 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시편은 상실과 아픔 속에서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표현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선한 이름이 바로 보존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의로운 분노가 되어야 한다(시 37:7–13; 4:4–8; 13:3–6; 55:12–14, 19–23).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 숙고하고 생각하라. 무엇을?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짐으로써 상실했던 진리의 달콤함과 풍성함,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우리와 화목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할 때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를 대하실 때 하셨던 방법, 우리의 죄를 동쪽에서 서쪽이 먼 것처럼 제거하시고(시 103:12)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더이상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바로 그 방법으로 하도록 만드신다. 때로는 화해에 실패할 때도 있다. 다시 소통의 길을 열어서 의미가 있는 관게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하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럼 화해의 노력을 끝내고 화해하지 않은 당사자 간에 반목만 더 커지도록 놔둬도 될까? 아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 6:27).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는 있기 마련이고 친구로서 회복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 사랑해야 한다(롬 12:17-19 참조). 어떻게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까? 그가 우리에게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화해는 고통스런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해하신다. 하나님에게 화목은 그에게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죽이는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이 세상의 원수와 화목하기 위해 아들을 데려다가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신 자만심을 버리고 그가 보여주신 화목의 메시지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그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런 노력이 실패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에게 이타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는 우리가 이제는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행동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임을 기억하라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원제: The Necessity of Reconciliat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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