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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을 오용하지 말라
by Donny Mathis
2021-03-12
스티브 커(Steve Kerr)는 심판에게 항의하는 데 있어서 전형적인 코치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Golden State Warriors,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연고지로하는 프로농구 팀-편집자주) 코치인 그는 심판이 틀린 판정을 내렸을 때, 종종 그들을 거의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평상시에 만나는 사람한테는 내가 심판한테 하는 식의 그런 말은 절대로 안 합니다.” 스티브 커는 최근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와 나눴던 팟캐스트에서 말했다. “심판이 판정을 잘못 내릴 때, 나는 내 자신이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은 느낌을 가집니다. 말도 안 되는 불평등한 일이 생긴 것처럼 말이죠.” 나는 스티브 커의 말을 백분 이해한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대학농구 팀인 켄터키 와일드 캣(Kentucky Wildcats)이 불리한 판정을 받을 때면 심판에게 외치곤 하니까. “이 심판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 누구라도 듣기 싫어하는 말, 틀렸다는 말을 듣는 것이 단지 심판과 스포츠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실은 걸음을 막 뗀 아기에서부터 은퇴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다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화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심판이 틀린 판정을 해도, 그 판정은 상대팀에게 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친구와 가족이 우리의 선택을 다 좋아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SNS에서 만나는 모두가 다 나를 지지하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는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 판정이 내게 유리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우리는 판사 옷을 입은 사람 중에서도 내 편이 되는 변호사를 기대한다. 결과적으로 마태복음 7장 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은 오늘날 자율을 우상화하고 심판을 경멸하는 문화에서는 아주 멋진 말(mantra)이 된 셈이다. 어떤 사람이 나의 행동을 판단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단지 이렇게만 말하면 된다. “판단하지 말라.”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말씀 덕분에 오늘날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투표 결과로 선출된 정치인, 최근 스캔들에 휘말린 연예인, 또는 누구라도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결정을 한 사람을 도와달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나사렛 예수에게 요청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함축성 있는 짧은 구절은 논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고의 카드가 되었다. 이 구절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 한번 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너부터 비판하지 말라.”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거나 포용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다음 예수님과 함께 차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마이크 드롭(mic drop) 중에서도 최고의 마이크 드롭이다. 슬프게도, 이런 장면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이니고 몬토야(Inigo Montoya)의 말을 기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구절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번영과 판단 예수님의 이 유명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들어있는 그 유명한 설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중들의 귀에 생생한, 근심을 이기는 해독제를 알려준 예수님은 설교의 방향을 바꾼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잠깐, 뭐라고? 조금 전에 예수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매일 해야 하는 판단,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데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판단을 정죄하고 있는 거지? 산상설교는 번영을 향한 길을 보여주는데, 그 길은 온갖 판단으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은 지금 타락한 세상에서 살면서 그의 통치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도덕적이고 관계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다. 5장 17-20절에서 예수님은 듣는 이들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율법과 선지자의 명령을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취시킨다. 그런 다음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율법의 명령을 지키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의를 드러내라고 명령하고 있다. 5장 21-48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왕국에서 순종은 단순히 율법을 범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관해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의 핵심과 정신을 설명한다. 6장 1-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나누고, 기도하고, 금식하라고, 그리고 사람의 칭찬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기로 부를 추구하라고 말한다. 그런 순종은 하나님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판단될 것이다.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과 그의 왕국 아래에서 번영으로 이끄는 좁고 험한 길을 비교한다. 7장 15절-19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선지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의 삶과 가르침이 맺는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명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여러 다양한 종류의 판단을 사용해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판단을 정죄하는 것일까? 부서진 저울로 무게를 재지 말라마태복음 7장 2절에서 예수님은 '판단하는 것'이 재는 것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설명한다(막 4:24-25; 눅 6:37-42). 우리가 사는 문화는 실제로 균형을 맞추는 저울을 가지고 정의를 묘사함으로써 이와 비슷한 비교를 한다. 시적인 병렬 구조를 통해서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불공평한 저울이 아니라, 공정한 저울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말한다. 위선이 아닌 온전함과 공감을 가지고 판단하라는 것이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예수님은 농담을 한다. 이것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고 재미있으며 또 확실한 한방을 가진 이야기다. 예수님이 말하는 시나리오를 한번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눈에 작은 티가 있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가로 2인치, 세로 4인치의 들보가 들어있다. 누구나 눈을 불편하게 하는 작은 티가 들어올 수는 있지만, 들보가 들어온다면 단지 눈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어떻게 거대한 들보는 보지 않으면서 작은 티는 볼 수 있을까? 두 번째로, 어떻게 얼굴에서 튀어 나올 정도로 큰 들보를 가진 사람이 이웃에게 고통스러운 눈 수술을 하라고 권유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들보를 가진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른다. 그럼 해결책은? 예수님이 그 두 사람에게 다 거울을 들고 눈을 살펴서 문제점을 스스로 해결하라고 했던가? 아니다. 예수님은 들보를 눈에 갖고 있는 사람이 먼저 그 들보를 빼고, 그 후에 티끌이 들어간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죄를 발견하고 그 죄를 없애도록 하는 신자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5).이 구절은 예수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금지하기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다. 이 구절이 어려운 이유는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판단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겸손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고, 위선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판단하지 말라’의 원칙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 또한 말씀하지 않는 것을 살펴볼 때 최소한 네 가지의 원칙이 두드러진다. 1. 말하고 싶은 포인트를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 딱 하나를 사용하는 것을 주의하라누구라도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비틀어서 곡해하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도 마찬가지다. 2. 공감과 은혜를 가지고 판단하라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도덕적인 판단을 할 때 자기 자신의 죄성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갈 6:1-2).3. 위선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죄에 대해서 판단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죄를 짓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4. 분명한 판단을 해야 할 때 두려워서 숨지 말라우리는 인기없는 진리(복음)를 선포하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고 가장 갈구하는 바를 옹호하신다. 예수님은 의로우시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만드신다(롬 3:26). 그는 죄를 못 본 체 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는 죄를 정면으로 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판단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또한 그의 현명한 통치 아래에서 바로 살 수 있도록 하신다.예수님이 다스리는 왕국에서 함께 번성하자. 명확함, 겸손, 용기, 그리고 눈에 들보를 넣지 않고 판단하는 힘을 달라고 그분께 기도하자. 원제: ‘Judge Not’ Isn’t the Ultimate Mic Dro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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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파괴하는 뉴스
by D. J. Marotta
2021-03-11
평소에 알고 지내는 목사 아무에게나 이 질문을 던져보자. “교회에서 제자도와 관련해서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뉴스요.”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교인들에게는 이제 각자가 선호하는 뉴스 미디어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뉴스는 이제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 문제와 관련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뉴스는 이제 아예 성경과 기독교 신앙, 또 교회까지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지를 알려주는 렌즈가 되었습니다.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다음 말에 동의할 것이다.네, 자극적이고 심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뉴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특정 미디어만을 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뉴스의 영향을 받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영지주의 다시 보기뉴스가 매력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뉴스 콘텐츠는 우울하고 끔찍한 소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런 뉴스를 보고 또 보는 걸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대부분의 뉴스 미디어가 일종의 영지주의적 복음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유사 기독교로 시작했다. 교부들은 즉각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판정했는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가르침 대신, 특별한 신비적 지식이나 밀교적인 통찰력을 믿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식의 특별한 통찰력이 오늘날 뉴스가 제공하는 것이다. 뉴스 미디어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부 특종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이제 바보 무리가 아니라 진짜를 깨달은 소수 중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뉴스는 특별한 지식을 통한 구원을 제공한다.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뉴스는 이제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던져진 유혹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한다. 바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편재하고 전지하심으로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관리하신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단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현대의 뉴스 미디어는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제시한다. 이제 인간이라면 지역을 초월하여 글로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지’라는 어둠을 뒤로 하고 ‘속보’라는 빛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런 메시지에는 중독성이 있다. 우리가 뉴스를 놓치지 않고 챙기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내가 신과 같이 되었다는 환상이 숨어있다. 조치 불가의 뉴스대부분의 뉴스는 나쁜 소식이다. 지진, 허리케인, 살인, 그리고 스캔들. 또한 대부분의 뉴스는 조치가 불가능하다. 당신이 뉴스를 접한 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 조치가 불가능한 나쁜 뉴스들을 자꾸 들어서 당신 속에서 생기는 결과는 뭘까? - 불안: 하루 24시간 내내, 마치 소방 호스의 물처럼 연중 무휴 당신 속을 파고드는 사악한 뉴스는 결코 당신의 얼굴에 평화와 만족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 무력감: 고칠 수 없는 문제와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의 뉴스를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이제 당신 속에서는 심각한 무력감이 자라나게 된다. - 분노: 내면에 도덕적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라면 뉴스를 보며 분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당신 속에는 불의를 볼 때마다 정의감이 주는 분노가 생긴다. - 미움: 분노는 마치 곡물을 발효할 때 증발하는 알코올과 같다. 그 알콜을 증류해서 조금씩 병에 담게 되면, 그 결과는 증오로 가득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뉴스를 많이 보거나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사랑이 아닌 이웃에 대한 미움을 품기 마련이다. 관음증적이고 어찌 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한 영혼은 아예 변형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좋게 볼 때) 무지한 자, 또는 (최악의 경우) 악한 자의 강력한 무리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작지만 영웅적이며 소수에 불과한 선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물어보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뉴스를 자꾸 듣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온 뜻과 정성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간단히 말해서, 쓸데 없는 짓이다.지역 뉴스를 선택하라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예 사회 생활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아예 발을 빼라고요?”아니, 정반대다. 뉴스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식의 참여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당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사람들과 더불어 실제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영향을 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모든 것에 다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회는 바로 당신이 사는 지역 사회 속에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뉴스는 지역 뉴스다. 지역 뉴스라는 것은 내가 사는 도시 또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역은 바로 내가 사는 ‘동네(hyper local)’를 말한다.- 암에 걸린 이웃에 관한 뉴스- 첫 아이를 낳은 이웃에 관한 뉴스- 실직한 교인 뉴스- 처음으로 교회에 온 아는 사람 뉴스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뉴스다. 이런 뉴스는 당신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도하고 또 봉사할 기회를 준다. 같은 인간으로 함께 웃고 울도록 만든다.이런 지역 뉴스에 반응할 때 우리 속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일어난다. 불안이 자신감으로, 무력감과 분노, 미움이 기쁨과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당신은 이런 지역 뉴스를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뉴스를 만나려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원제: News as Spiritual Deform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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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씨름하는 것이다
by Guy M. Richard
2021-03-10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선택한 이름들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창세기 32장에서 이 이름이 주어진 정황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창 32:22–32; 호 12:3–4).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 즉, ‘씨름하는 자들’을 부르기로 선택하신 듯하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시간들 사이에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이스라엘로서(롬 2:28–29; 4:11–12; 갈 6:12–16) 크리스천은 원래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의 의미처럼 상속자이며 바로 ‘씨름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들 사이를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야곱처럼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씨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씨름해야 하며 극복해야한다(호 12:2–6).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물든 세상, 즉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 속에 있다. 죄로 인한 아픔, 질병, 기근 그리고 자연재해 등은 ‘아직’ 새롭게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결과들이다. 무법, 폭력, 테러 그리고 전쟁도 ‘아직’ 새롭게 되지 않았거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죄인들이 거주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의 결과들이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러한 결과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씨름은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분의 섭리가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여 다투거나 혹은 그분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서도 안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왜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순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혼의 순간에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자녀가 도망가거나, 가정을 등지고 떠나거나,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어찌해야 할까? 한 번의 사건으로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상실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범국가적인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누군가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의 기능을 파멸시켜 버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천은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이 씨름했던 것 아닌가? 욥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섭리하신 그 어둠의 순간들로 고군분투했으며 야곱처럼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씨름했고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승리했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의 여정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머리를 덮고 있는 구름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욥처럼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며 끝나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야곱처럼 고백하며 씨름해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의미다. 기쁨없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둠이 제거될 때까지 고통없이 참아내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께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보내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잘 씨름하는 것이다.둘째로,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은 크리스천이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비록 우리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분명 아직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삶이 필수적으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롬 7:15–25). 크리스천은 반드시 죄를 억누르며 거룩과 의로움을 추구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되 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롬 8:12–14; 빌 2:12–13).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써 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와 악한 영들을 대항하며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날과 그림자가 물러가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야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밤새 씨름하고 승리해야 한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씨름을 예상해야 한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죄와 악한 영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씨름하는 것은 씨름하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씨름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잘 싸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원제: Our Blessed Struggle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고난
영적성장
씨름
영적여정
이스라엘
야곱
욥
축복
승리
이미와아직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
by Clarissa Moll
2021-03-09
남편의 장례식이 있기 며칠 전, 친구에게 네 명의 자녀와 함께 나를 묘지로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롭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이었다. 끔찍한 슬픔의 어둠 속에서 안정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당장 장례식 날을 어떻게 견디어내야 할지 미리 생각해야 했다. 일단 묘지를 먼저 둘러보고 그가 묻힐 곳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예배가 열릴 그 자리에서 잠시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장례식 날 신을 새 신발을 미리 집에서 신고 다니면서 길을 들일 생각이다. 친구가 모는 차가 묘지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엔진을 꺼달라고 했다. 토요일이면 하이킹을 하기 위해 우리 가족이 자주 오던 산이었다. 예전에는 이 산에 공동 묘지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조용히 앉아 공동 묘지 입구 너머의 고요하고 푸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정말 아름답고 고요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가 공동 묘지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 기쁘다고, 최소한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충격은 아니라고. 지난 일 년 반 동안 슬픔을 상대할 때면, 묘지에 갔던 그날처럼 미리 준비하고 또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슬픔은 여행처럼 계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정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 슬픔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또 거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슬픔이 주는 놀라움은 종종 우리의 영적 생활을 힘들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따라 고통받는 것이라는 복음의 경고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기꺼이 동참함으로 그분의 생명이 주시는 충만함을 누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C. S.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이렇게 썼다. “고통은 인생에 이미 예정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프로그램 되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나는 고통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다. 물론 고통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이, 그리고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만날 때 모든 게 달라진다.”고통에 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다가오고 슬픔이 뒤따를 때 우리는 놀란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교인을 위로하는 경험을 거의 정기적으로 하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넘어서 고통이 주는 슬픔의 시련으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다음 네 가지를 통해서 당신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좀 더 잘 도울 수 있다.1. 슬픔이 얼마나 아픈지를 공감하라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저주가 가진 깊이와 넓이 때문에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다. 죽음과 슬픔은 우리의 연약함, 통제력의 부족, 그리고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녀라는 혈통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에덴동산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고대 조상들처럼 우리 또한 묘지에 서서 과거를 한탄한다. 먼지인 당신은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무덤에서 바로잡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도 죽은 이는 듣지 못한다. 죽음이 주는 종착역이라는 고통은 살을 찢는 아픔이다. 그룹(cherub)들이 불칼을 들고 지키는 에덴동산을 바라보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놀라서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이별의 고통이 이토록 큰 상처를 줄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힌 아담의 저주를 인정함으로 우리는 고통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를 줄 수 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몸은 썩어가고 있고, 비극이 일어나며 죽음은 혼란을 가져다준다. 이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다(롬 8:1-23). 상실의 고통 속에서 아파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 내내, 조용히 곁에 앉아 함께 아파함으로써 우리는 그나마 작은 위로를 제공할 수 있다. 2. 오래 지속되는 슬픔의 현실을 인정하라나이 든 여인의 부고에 그녀가 신생아 자녀를 잃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내용을 읽을 때면 나는 놀라곤 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슬픔이란 평생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삽 속의 흙이 관을 덮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남아있다. 새로운 자녀를 낳아도, 재혼을 해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이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중심으로 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여전히 예전의 사랑과 삶을 기억한다. 우리는 종종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지속성에 놀라고, 어리석게도 그것이 믿음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충만한 삶을 약속하셨다. 그러면, 슬픔이 어떻게 충만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저주가 완전한 구속의 날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슬픔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할 적은 죽음이라고 기록했다. 이 시간표에 따라 우리는 몇 가지 기대치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유족을 돌보는 사역은 한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사역은 교회의 틈새 사역이 아닌 전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유족을 만나는 경우,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다시 일어서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3. 친구를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인정하라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냉동 식품을 찾는 것은 쉽지만,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뻔한 이야기, 또는 침묵, 아주 나쁜 경우에는 비판까지 하는 것이 사람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가장 크게 놀라는 사실은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가이다.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한 욥은 그의 친구인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을 '끔찍한 위로자'라고 불렀는데, 나는 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욥 16:2). 이 세 사람은 욥이 고통에 빠졌을 때 자신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라며, 마치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는 것 같은 말을 위로라고 했다. 이 세상에 그런 친구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남편을 잃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바라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내게 헌신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슬픔에는 관계 자체를 바꿔버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2차 손실'이라고 부른다. 특히 장기적으로 슬픔에 잠긴 사람의 친구가 되고 지속적으로 돕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일에 용기를 내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음식 제공, 연속 기도, 틈새 지원 등등, 교회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상실의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몇 년에 걸쳐서 친구가 되어 꾸준하게 돕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정을 담은 이야기를 건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욥의 친구들이 제대로 한 게 하나 있다. 그들은 시종일관 욥의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당신이 하는 말이 다 옳을 수는 없다. 한 번 이상 심각한 말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뢰가 깊어지면 교회의 진정한 의도가 빛을 발할 것이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누군가를 잃은 후 모든 관계에서 점점 더 거리감을 느끼기 마련인 사람에게 기쁜 놀라움이라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4.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라슬픔은 타락한 인간의 핵심을 건드린다.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슬픔은 타락한 세상이 가진 어둠을 드러낼 뿐 아니라 가장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마저도 흔들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주먹을 흔들지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침묵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침묵은 가장 고통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공동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팟 캐스트에서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게 매달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생의 슬픔이 우리를 압도할 때 예수님의 부활은 희망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이 우리가 고통받는 중에도 우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함께 하신다는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슬픔을 보게 된다.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찬양하자. 교회는 승리의 빈 무덤뿐만 아니라 피 묻은 십자가를 계속 강조해야 한다. 슬픔에 빠져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슬퍼하지만 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자. 슬픔은 깊고 오래 지속된다. 슬픔은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공동체로부터 고립시킨다. 그러나 슬픔은 또한 우리를 공동체에 더 단단히 묶도록 만들 뿐 아니라, 복음에 더 깊은 닻을 내리도록 한다. 여러분의 교회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원제: 4 Ways to Love Someone Blindsided By Lo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고통과은혜
슬픔의본질
고통의의미
욥과친구들
C.S.루이스
고통을이기는방법
헤아려본슬픔
십자가
자녀 양육의 목표를 높게 잡으라
by Adrien Segal
2021-03-08
부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초조하고 활동적이며, 또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런데 이게 좋은 걸까? 자녀에게 쏟는 모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눈물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부모라면 누구나 부모의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자녀를 사랑하고 또 그들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런 소망을 자녀에게 갖고 있다고 할 때,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자녀 양육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뻔한 대답이지만, 부모라면 자녀가 사랑스럽고 의미있는 관계, 좋은 직업에 필요한 훌륭한 교육,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돈과 자원, 그리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원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고귀한 소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녀를 이 땅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삶 정도를 살라고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를 위해 진흙 파이를 만들기우리의 자녀가 이 땅에서 7, 80년 정도를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편안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시간 관리와 함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환경 조성에 집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단지 이 세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위로나 소유 또는 성취도 결코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의 기대 수준을 높게 잡는다. C.S. 루이스는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이렇게 말했다.“우리 주님의 눈에 우리의 욕망은 강하기는커녕 너무 약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반쪽짜리 마음을 가진 피조물이다. 무한한 기쁨이 저기서 손짓하는데도 고작해야 술과 섹스, 그리고 야망같은 것에 눈이 팔려 집적거리고 있으니까. 그런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하는 아이가 빈민가에서 진흙으로 파이나 만들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 기뻐한다.” 이 땅에서 얻는 성공과 기쁨이 반드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가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과 비교하면 그것은 단지 진흙 파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훨씬 더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창조되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알아야 할 것은 단지 이 땅에서 칠팔십 년 살면서 진흙 파이나 만들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신 우리의 창조자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 땅에서 기쁘게 살기 위해, 또 그에게 영원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관점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모든 것이 바뀐다. 부모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우리가 이런 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한 대답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복해서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저렇게 하시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모든 만물과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그 날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만약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이는 실로 절망적인 소식이다. 그러나 죄를 용서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누리고 있고, 또한 예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의 삶을 기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헌신하는 한(고전 10:31),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지금 그리고 또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 예수님과 함께 새 창조의 공동 상속자로서(롬 8:17)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또 자녀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해야 할 기도를 바울이 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라는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C.S. 루이스가 말한, 우리의 자녀들이 영원히 경험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이다. 열심히 가르치라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에 순종하는, 예수님이 알려주신 그 기쁨을 자녀들이 알아갈 수 있도록 부모는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로 삼지 않을 때, 너무도 쉽게 이 세상에 휩쓸린 우리의 삶은 진창에서 허덕이게 된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 우리는 자녀의 목적과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움과 초조함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주는 진리, 그리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삼으라는 그의 명령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가 자녀들에게 쉬지 않고 가르치기를 바라는 바로 그 교훈이다(신 6:7).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바로 그 토대 위에 우리와 자녀들의 삶을 세워나갈 때, 그는 신실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일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가져다 주신다(롬 8:28). 자녀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또 있을까?첫 번째 그리고 가장 큰 교훈아마도 누군가는 바로 물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도 가르치지만 또 열심히 일해서 우리 자녀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우면 안 될까요?” 물론 대답은 예스다. 그러나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하는가는 우리의 진짜 마음이 무엇을 진짜 목표로 믿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자녀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교훈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러니까 사실상 우리가 믿는 것이 자녀가 일자리를 얻고 좋은 집을 사고 가정을 꾸미는 것과 그렇게 상관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결국 자녀들에게 경건의 시간이나 또는 주일 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과학 및 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정보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단지 이땅에서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또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소한 일에까지 다 빠짐없이 관여한다고 (달리 말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어떻게 맺는가에 달려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녀 교육에 관한 우리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가치가 한순간에 부차적인 것으로 바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로서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이다. 부모는 하나님의 경이로움과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깨어있기자녀를 이렇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자 주권자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부터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런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 이런 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이는 또한 온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를 다니고 있음을 뜻한다. 아이들은 부모인 우리가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상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책임지고 손에 쥐고 있다(골 1:17). 우리가 세상 모든 사물과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의 자녀들도 그런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돕고, 또 역사와 과학, 그리고 예술의 모든 고비고비마다 크고 작은 모든 업적이 오로지 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뤄졌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도록 가르칠 때, 우리의 자녀들은 비로소 눈을 뜨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광으로 인해 빛나는 이 세상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자녀 교육은 믿지 않는 부모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과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를 양육하며 누리는 아름다움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우리도 함께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자녀들의 미래가 주는 두려움과 초조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또 항상 곁에서 우리를 격려하고 도우며 우리가 맞을 결과에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는 권능의 하나님이 주는 이 약속에 의해 부모로서 하루하루를 살게 되며 또한 영감까지 얻게 된다. 더 높은 기준자녀 양육의 목표는 단지 자녀가 이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도록 돕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만족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할 때,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의 길과 자녀의 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여, 목표를 기억하라. 자녀에게 진정한 행복과 성공은 오로지 창조 목적에 따라서 살 때에만 따라오는 것임을 가르치라.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으로 바라보도록 가르치라. 그리고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영광의 소식을 기뻐하며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동참하도록 가르치라. 이런 현실을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자녀들이 단지 자신감과 기쁨으로만 충만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보냄받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너무도 다른 목표다. 그러나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차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런 목표다. 원제: When Parents Set the Bar Too Low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가정
양육
루이스
정체성
임재
사랑
교훈
충족감
관계
주권
교회의 멤버가 되어야 한다
by Nate Shurden
2021-03-07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부터(창 12:1–3) 하늘로부터 임하는 새 예루살렘 가운데 묘사된 동일한 약속의 최종 성취까지(계 21장),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명백하게 증거한다.여기서 ‘사람들’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한 부분에 주목하라.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구원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거나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개인에게도 관심을 두신다(롬 10:9–10). 내가 ‘사람들’ 대신에 ‘백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말씀이 강조하는 바, “성도의 정체성은 반드시 관계적이어야 한다”(벧전 2:9)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 육체의 출생이 가족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 출생 역시도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깊은 연관성을 지닌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다. ▪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요 15:1–17)▪ 예수님은 모퉁이 돌, 우리는 성전을 짓기 위해 연결된 살아있는 돌들(엡 2:20; 벧전 2:5)▪ 예수님은 머리, 우리는 그의 몸의 구성원들(엡 4:1–16; 고전 12:1–27)그러한 은유들 속에는 개인주의 혹은 독립성을 암시하는 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홀로 살 수 있는 것으로 묘사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 개인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가족이다(롬 8:14–16; 엡 2:19–22).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헌신과 적극적인 참여는 결코 수지타산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교회와 실제적이고, 활력이 넘치며, 생명을 제공하는 관계를 어떻게 세우고 유지할 수 있을까?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첫째, 우리는 반드시 교회의 멤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멤버'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마치 회비를 내고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서 이를 통해 멤버가 누리는 유익을 취하는 것을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 멤버십이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언어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4–5절에서 말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손이 몸의 지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한 몸된 지체들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서로의 일부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지역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그렇게 살아간다는 의미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는 우리가 필요하다둘째, 우리는 매주 교회 출석에 헌신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교인 명부에 올라간 공식 멤버가 되기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충성된 참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히 10:25).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는 대신에 운동 경기, 음악회 혹은 댄스 경연에 참여하기로 선택하거나 휴가를 선택했을 때, 영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속사람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마 6:21). 비록 우리는 어린이 야구시합이나 몇 가지 삶의 소소한 일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하진 않겠지만,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일보다 세상의 활동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눅 14:26).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것들과 더불어 사랑 안에서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것의 가장 최고봉은 바로 교회다(엡 5:25). 따라서 주일에 예배를 위해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야말로 우리의 영혼이 가장 참된 보화를 마주하는 곳이며, 구원의 기쁨을 더 많이 측량할 수 있는 곳이고, 또한 우리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영광으로 성장하게 될 곳이다(고후 3:18).셋째,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성도의 교제는 주일 예배 만큼 중요하지만 충분히 교제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진정한 신뢰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한 두시간 이상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 삶의 여정 전반을 위한 끊임없는 동반자로서의 교회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기록한 교회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성전에서의 공예배 시간이 성도들 가정의 식탁에서의 비공식적인 친교의 모습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런 작은 모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나누며, 죄를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고, 영적 은사를 분별하며,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며 또한 궁금해 하는 이들과 복음을 나누기 위한 기회들을 제공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소그룹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더 강화시키며 교회의 지속적인 제자 훈련과 선교 사역을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밑거름이 된다.넷째, 우리가 어떤 전환기에 있더라도, 반드시 교회의 멤버십을 유지해야만 한다. 많은 합리적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아마도 한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 출석하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소속 교회의 리더십에게 연락을 취해야 한다. 장로들은 우리 영혼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장로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왜 공동체를 떠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히 13:7). 우리는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솔직해야 하며 새로운 교회를 찾기 위한 계획에 대해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조언을 열린 자세로 들어야 한다. 장로들은 성도가 다른 교회로 옮기는 중에 교회 멤버십을 유지하는 방법과 원활한 이명 절차를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새롭게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도 가능한 빨리 이를 알려야 한다. 새가족반과 같은 수업에 참여해서 교회의 역사와, 비전, 교리, 사역, 그리고 성도의 자격 요건등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만약 성경적인 교회의 표지가 나타나고 그곳이 우리 가정과 같다면, 우리는 멤버가 되는 일에 결코 지체해서는 안된다. 오랫동안 교회와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며, 살아있는 돌이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자들이다. 우리는 교회가 필요하며, 교회 역시 우리가 필요하다. 원제: Joining and Being a Member of a Church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교회생활
성도
교제
출석
지체
멤버십
모퉁이돌
제자훈련
지역교회
포도나무
마태가 새롭게 풀어놓는 구약 이야기
by Patrick Schreiner
2021-03-06
나는 한동안 복음서의 진가, 특히 마태복음의 아름다운 특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태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그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확신에 차서 들려주는 메시지는 단지 본문의 기사뿐 아니라 그 기사의 배열, 즉 마태가 저자로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을 고려할 때 더욱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마태가 사용한 이야기의 형식을 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를 얼마나 정교하게 엮어 놓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한마디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진전되는 이스라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더 쉽게 표현해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마태복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반영되는가?-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는가?-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 이야기는 어떻게 진전되는가?그러므로 마태복음을 읽을 때, 한 눈은 옛 이야기에 두고 또 한 눈은 새 이야기가 보여 주는 변화에 맞춰야만 그 메시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마태가 풀어놓는 요셉 이야기먼저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예로 들어 보겠다. 얼핏 보면, 마태복음 1장 18절에서 2장 23절에 소개되는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여기서 예수님의 탄생은 요셉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초반부에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꿈을 통해 그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장차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이심을 알게 된다(마 1:18-25). 그러다 2장으로 넘어가면, 예수님의 가족이 헤롯 왕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가족은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이후에는 라마로 올라와 결국에는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된다. 이 모든 여정은 환난을 피해 진행된다(마 2장).그런데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또 다른 요셉이 등장한다. 그도 꿈꾸는 자였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었다. 그리고 환난 가운데 자기 가족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이후에는 그 가족(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나게 된다. 바로 이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제 마리아의 남편인 새로운 요셉을 통해 반영되고, 성취되며, 진전된다. 창세기에서 요셉은 자기 가족을 애굽에 청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일시적으로 기근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지만, 마태복음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으로써 아기 예수님을 살리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진짜 대적인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된다(마 1:21).물론 마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탄생과 피신에 관한 내러티브는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처럼, 이스라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때 독자들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꿈쟁이 요셉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는 옛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이 비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마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새로운 요셉으로 묘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을 새로운 요셉으로 그려낸다. 이를테면 요셉과 예수님 모두 각자의 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았고, 형제들에게는 배척을 받았으며, 고난과 유배의 시간을 거치다가, 이방인의 법정에 세워지게 되며, 마침내는 자신을 배신한 형제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그 백성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소망이자, 새로운 구원이며, 누구라도 그 면전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하신다. 이렇게 옛 이야기가 들려주는 메아리가 우리 귓가에 들리면, 그때부터 이야기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더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마태가 풀어놓는 모세 이야기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마태복음 17장 1-8절에 등장하는 변화산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이야기 역시, 일견 단순해 보인다. 예수님이 어느 산에 오르셨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그 곁에 함께 나타나더니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공관복음 전체가 바로 이 변화산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유독 마태복음만 모세와 시내산을 특별히 떠올리도록 독자들의 시선을 모은다. 즉 마태가 이 본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옛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킨다.우선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세처럼 6일 후에(출 24:16) 한 높은 산에 오르시는데(출 24:12), 이때 세 명의 사람이 동행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출 24:1). 그리고 구름이 산에 덮이더니(출 24:15-18), 그 구름 속에서 어떤 음성이 들린다(출 24:16). 그런데 마태복음은 여기서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모세 이야기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 세 가지 요소를 포함시킨다. 첫째로, 마태는 마가와 달리 모세의 이름을 엘리야보다 앞에 둔다(마 17:3; 막 9:4; 여기서 누가복음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비교하며 마태의 의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가운데 가장 이른 저술로서 마태의 저술에 참고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로, 마태는 장차 오리라고 예언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암시한다(신 18:15). 가령 변화산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에 관한 음성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려왔던 음성과 동일하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소개되는데, 여기에 한 가지 명령이 덧붙여진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이다. 이 명령이 첨가된 이유는, 모세가 훗날에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나타날 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했기 때문이다(신 18:15). 셋째로, 마태는 마가라든가 누가와 달리 예수님의 얼굴이 빛난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마 17:2; 출 34:30 참조).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유사점을 통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는 예수님을 새로운 선지자요 새로운 중보자로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변화된 자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는 분으로 묘사한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그 역시도 변화되었다. 이는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출애굽의 목적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화되신 사건은 다름 아닌 모세 이야기를 완성시킨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새로운 중보자로서 새로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임재를 반영하셨던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 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을 성취하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세 이야기를 진전시키셨다. 그리고 모세와 달리 예수님의 얼굴은 영원히 빛나면서도 그 얼굴을 가리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빛나는 얼굴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마태가 풀어놓는 ‘의로운 피’에 관한 이야기 마태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더 깊이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요소는 모세나 요셉과 같은 ‘인물’만이 아니다. ‘상징’ 또한 그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면서 마태의 저술 목적을 이루어 낸다. 예를 들어 그는 ‘의로운 피’라는 주제를 들어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킨다. 다시 말해 구약의 서두부터 결말에 걸쳐 등장하는 피에 관한 내러티브를 하나로 묶어 예수님의 피를 통해 그 내러티브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 준다. 예컨대 마태복음 23장 34-35절에서 그는 (구약의 첫 살인 사건을 가리키는) “아벨의 피로부터” (구약의 마지막 살인 사건을 가리키는)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언급한다. 그리고 여러 메신저가 이스라엘에 보냄을 받지만 그들이 배척당하게 되리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닥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4-35).여기서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의로운 피’라는 주제를 사용한다. 이러한 ‘피’의 주제는 마태복음 26-28장 도처에 널려 있다. 아래의 여섯 가지 예를 한번 살펴보자.1.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언약의 피'와 '죄 사함'을 함께 언급하신다(마 26:28; 렘 31:27-40).2. 유다는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아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아벨과 사가랴의 피에 관한 앞선 진술을 반영한다(마 27:4).3.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받은 돈을 '핏값'이라고 하며 그 돈으로 밭을 산다. 그래서 이 밭은 '피밭'이라고 일컬어진다(마 27:6, 8).4. 빌라도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라고 선언한다(마 27:24).5. 이스라엘 백성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친다(마 27:25).6. 빌라도의 아내는 '저 옳은 사람', 즉 예수님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전갈한다(마 27:19).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아벨이나 사가랴처럼 의롭지만 고난받는 자로 묘사된다.이렇게 피를 언급하는 예를 살펴볼 때, 독자들은 마태복음 23장 35절을 떠올리며 ‘피’에 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이스라엘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장면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은, 그 백성에게 버림받은 목자, 다시 말해 무고한 피를 흘린 새로운 목자로 그려진다. 또한 이방인 적으로 인해 피신했다가 마침내는 그 손에 죽임을 당해 성전인 육체가 찢기는 고통을 겪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그려지신다. 바로 이분의 피는 완전무결한 피였기에, 그 피로 인해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이처럼 무고했으나 피를 흘린 이야기와 자신의 죄 때문에 대적한테 침략을 받아 피를 뿌린 이야기가 이스라엘 역사에 공존한다. 예수님의 피는 그 두 가지 내러티브의 목적을 함께 성취한다. 그분의 죽음을 다룬 마태의 이야기는 표면적인 수준에서도 의미를 전달하지만, 앞서와 같은 상징이 자리한 더 큰 문맥을 살펴볼 때 심층적인 수준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결론이 글의 지면상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새 아브라함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동서로부터 많은 백성이 이르는지), 새 다윗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진정한 왕으로 다스리시는지), 새 솔로몬이 되시는지(즉, 어떻게 참된 지혜를 가르치시는지), 또 새 예레미야가 되시는지(즉, 어떻게 예루살렘의 운명을 바라보며 슬퍼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밖에도 다루지 못한 요소는 많다. 가령 가룟 유다는 새로운 이세벨이나 아히도벨 또는 압살롬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반역하는 유형에 속한 인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새 열두 지파로, 유대 지도자들은 애굽과 앗수르 및 바벨론의 새 통치자로 그려질 수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산들은 시내산과 비교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한다. 나아가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닐던 광야를, 그리고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강물은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던 바다를 새롭게 연출할 수 있다.이처럼 마태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반영하고, 성취하며, 진전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다가오는 세대를 제자 삼고 가르치고자 했다. 바로 그 기록이 자신이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지혜는 다름 아닌 마태복음의 ‘형식’ 속에 잘 묻어나 있다.그러므로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넓은 문맥에서 읽어 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새롭게 눈에 띄는 진리로 다시금 놀라운 깨달음을 얻도록 하자. 원제: Matthew’s Gospel as You’ve Never Read It Befo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마태
요셉
모세
예수님
의로운피
변화산
시내산
회의론자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by Dan DeWitt
2021-03-05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당신 자신이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관점을 비웃고 복음에 대한 당신의 헌신을 조롱한다. 당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당신이 믿는 바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류의 많은 유혹들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그리고 회의론자들에 대한 사역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할 때 생긴다. 회의론자들을 겨냥한 전도는 주로 변증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너무도 좁은 시각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전도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확증하는 것과 복음에 대한 반대, 공격, 오해에 대해 방어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렇게 균형 잡힌 방법이 아니면, 그저 모호한 공통 분모를 붙잡기 위해 성경적 근간을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 나는 여섯 가지 필수 요소를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1. 진리의 인식 가능성을 선포하라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인텔리' 계급에 속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쉽게 위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실제를 설명함에 있어 기독교 세계관이 대부분의 견해들보다 더 풍성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기본적인 논리 법칙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어떤 주장의 참ㆍ거짓 여부를 평가할 때 우리는 늘 비모순의 법칙(the law of noncontradiction)을 사용한다. 한 명제는 동시에 참과 거짓일 수 없다. 자연주의적 사상체계가 그런 법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불변하고 비지성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질이 어떻게 우리의 사유를 안내하는 그런 논리 법칙을 만들 수 있겠는가? 두뇌가 단순히 진화의 산물이라면 자신이 하는 생각들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했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이러한 회의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다윈은, 만일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자연이 전부라면, 우리 두뇌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과 우리 생각은 믿을 만하다는 것을 결코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변증학자들은 이러한 세계관의 약점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자연주의의 이러한 난점을 일컬어 자기 모순이라 했다. G. K. 체스터튼(G. K. Chesterton)은 이를 “모든 사고(思考)를 중지시키는 사고(思考)”라 했다. 이성 자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독교 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논증들조차도 영원하시고 최고의 지성이 있으시며 인격적인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으면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논리 법칙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합리적 토론을 위한 기반을 세워준다. 2.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듯 그분을 전하라복음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희석시키면, 종국에는 우리는 진정한 전도를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무력한 신에 대한 흐릿한 이미지로 그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애쓰며 우리가 만들어낸 이 신을 팔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잘 팔기 위해 그의 하나님 되심을 희석시키지 말라. 우상숭배를 퍼뜨리지 말라. 성경은 인간의 담론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다. 바로 그 성경이 말하는 바 주권자 하나님을 전하라. 3.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전하라인간의 서사(敍事)는 죄책, 수치, 그리고 후회로 물들어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조차도 죄책의 존재 자체는 실제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본성적 지식과 내재된 도덕적 죄책에 대한 그들의 인식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죄책은 그저 증상일 뿐이다. 진정한 문제는 죄, 그리고 그로 인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은혜 뿐이다. 가장 똑똑한 회의론자들에게 하는 전도 역시 단순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나야 한다. 우리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하신 예수님 자신보다 결코 더 좋은 말을 할 수 없다. 기쁜 소식을 전할 책임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우리 자신의 논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4. 성경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선포하라우리가 지닌 모든 책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화해 가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이 책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 4:12).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얼버무리거나 다른 문서들과 비슷한 수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라. 당신은 하나님이 쓰신 원고의 편집자가 아니라 그 책의 홍보 담당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의 일은 하나님의 원고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이미 출판하셨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논증이 설교나 성경 주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회의론자들의 반대 의견을 완화시키기 위해 성경의 신뢰성에 대해 언어나 태도를 통해 타협하지 말라는 의미다. 전도에 임하는 당신에게 주어지는 권위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기억하라. 당신도 누군가가 성경을 펼쳐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당신에게 전했을 때 믿음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계시의 권위 위에서 당신이 전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치 말라(롬 1:16; 고전 1:18). 5. 중생(重生)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함을 선포하라전도에 힘쓰는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이들은 회심으로 사람들을 이끄시는 성령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알고 있다. 나는 자신들의 논증 그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변증학자들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의 빈약한 시도들이라도 사용하셔서 지적인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많은 이들은 만나보았다. 또한 그들은 성령이 복음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도록 같은 열정으로 기도한다. 회의론자든 누구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사탄이 다스리는 어두움의 영역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이다. 당신 자신의 힘만으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이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복음 안에 담긴 은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엡 1:18)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노력은 헛될 뿐이다. 6. 겸손하게 전하라교만한 변증가나 지나치게 날카로운 전도자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그들이 전하는 진리가 얼마나 옳으냐에 상관 없이, 우월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앙의 변증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교정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기독교의 진리를 전할 때, 우리는 성육하신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우리가 겸손하다면 회의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우리의 죄성, 그리고 그로 인한 성령의 필수성을 인정한다면 불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에게 하나님을 높이는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제: 6 Tips for Sharing Christ with Skept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권위
논리법칙
계시
회의론자
기독교세계관
복음전도
찰스다윈
CS루이스
피상적인 신앙을 배격하라
by 김형익
2021-03-04
리처드 포스터는 1978년에 출판한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저주거리다”라는 인상적인 말로 1장을 시작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헤르만 바빙크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기독교를 향해 이렇게 썼다. “종교적 생활에 관하여, 미국의 도덕적 낙관적 이원론적 문화, 경험이 이끄는 문화가 엄청난 피상성을 초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죄와 은혜의 대조는 심히 약화되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사역은 그저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도덕만 다룰 뿐입니다. 선택과 칭의와 같은 전체 신앙적 요소는 부족하거나 아예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중략] 어떤 이는 “미국인의 신앙생활에는 깊이가 없는 대신 넓이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제임스 에글린턴,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하지만 피상성의 문제는 비단 서구나 미국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이것은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20세기 말인 90년대 중반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한 이메일이라는 혁명적 통신 수단, 그리고 핸드폰의 보급과 함께 시작된 문자 메시지, 스마트폰의 출현과 함께 보편화된 SNS 사회관계망의 유행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지식의 축적과 신속한 공유를 가능하게 했지만, 이 현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피상성을 촉진시킨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시대의 상황이고,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깊이를 추구한다. 신앙은 피상적일 수 없고,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무한히 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상성은 예로부터 언제나 신앙과 교회가 직면하고 넘어서야 하는 도전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피상성이라고 지적한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8:11).” 거짓 선지자들이 전한 평강은 피상적 평강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치명적인 영적 질병을 가볍고 사소한 상처 정도로 여기고 반창고나 발라 줄 뿐이었으니, 그들은 깊게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입 속에 고기만 물려주면 피상적 평강을 빌어주고 입에 아무 것도 채워주지 않으면 전쟁을 준비하는 천박한 자들이었다(미 3:5). 이런 거짓 목사들은 지금도 많다!초대 교회는 어떠했는가? 초대 교회에서 바울 사도가 지적한 거짓 사도나 거짓 교사들의 특징도 결국 피상성이었다. 바울 사도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고후 2:17a)”라고 말할 때, 그는 복음에 물을 타서 희석시킴으로써 피상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언제나 수많은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들도 역시 탐심으로 사람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자들이었으니,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천박하고 얄팍한 자들이었다(벧후 2:3). 이들의 특징은 돈이 되는 자들에게 피상적 축복을 빌어주는 일이었다. 그들에게서 영적 깊이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은 일이다. 피상성과의 싸움은 우리 시대, 우리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백성들은 언제나 깊이 있는 신앙과 교회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피상성을 극복하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워나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적어도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첫째는, 깊이 있는 말씀 선포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놓지 않았던 주요한 무기였다. 히브리서의 묘사대로,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히 4:12), 성도들이 피상성에 머물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드러낼 때, 중생과 회심이 일어나고(벧전 1:23; 약 1:18; 롬 10:18; 고후 4:6), 그 말씀 속에서 주의 영광을 본 성도들은 깊이 있는 성화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고후 3:18).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시대의 피상적 문화가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침식해 들어오게 된 것은, 깊이 있는 말씀 선포의 부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초 미국 교회에 대한 헤르만 바빙크의 지적을 좀 더 들어보자. “교회 건물은 안락하고, 친구를 사귀기에 좋으며, 언제든 환영하고,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 되었지만, 강단은 없습니다. [중략] 교회당처럼 오늘날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는 오락이 들어왔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는 [중략] 매우 흥미진진한 방식으로 짧고 다양하고 생동감 넘치며 극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말할지를 잘 아는 가장 인기 있고 수요가 넘치는 인물입니다. 활기차지만 가볍고 즐거우며 유머로 양념을 했습니다. 설교는 노래와 합창과 독창과 성악과 기악 사이에 배치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 교회를 지적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강단의 회복이 없이, 신앙이 깊어지고 깊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둘째로,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는 죽음과 고난의 사건들을 공유하는 일이다. 구성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는 없다. 죽음은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누군가에게는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죽음을 순차적으로 경험하게 되어 있다. 작년에 나는 교우들과 줌(ZOOM)으로 데이비드와 낸시 거스리 부부가 쓴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라는 책으로 독서 나눔을 했다. 어린 두 아이를 연이어 잃은 부부가 상실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뎌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공동체 안의 한 가정이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하게 될 때, 그 경험이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공동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경험은 비단 죽음의 경험만이 아니다. 공동체의 지체들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의 사건들 또한 공동체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이 겪는 고난의 사건이 적절하게 공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인생을 희희낙락하는 가벼운 태도로 바라볼 수 없게 해준다. 문제는, 그 죽음 같은 상실의 아픔이나 통과하고 있는 고난의 이야기들이 그저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개별적 사건들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아픔과 고난으로 적절하게 공유되게 하는 일이다. 상실과 고난의 현실을 언제나 직면하는 공동체는 깊이 있는 교회로 성장해 갈 수 있다.셋째로, 깊이 있는 사귐(코이노니아)이다. 죄가 가져온 두려움과 수치심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DNA가 되었고, 이 죄의 성향들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의 담을 끊임없이 쌓아 올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타자들로부터 영적 거리두기를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피상적이고 예의바른 관계 맺음으로 만족하게 되었고, 이것은 깊이 있는 결속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자유하게 해준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누리게 된다(고전 4:3-4). 그래서 그는 거절당할 두려움, 자신의 민낯이 드러날 두려움을 버리고 형제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복음으로 자기를 벗어난 사람은 진정으로 형제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있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결속과 사귐은 깊이 있는 교회로 우리를 인도한다.주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큰지를 묻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 전체가 달려있다는 말씀이고, 이 두 계명은 결국 하나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결속하고 이웃과 결속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결속된 관계라고 정의하신 셈이다. 바울 사도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도, 천사의 말도, 예언하는 능력과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전 재산과 심지어 온 몸을 내어주는 구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말씀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전 13:1-3). 깊이 있는 신앙은 깊이 있는 관계를, 그리고 깊이 있는 교회를 세운다.우리는 너무 가볍고 피상적이다. 피상적인 말씀, 피상적인 교제, 피상적인 기도, 피상적인 묵상, 피상적인 섬김, 피상적인 성장에 우린 너무 오래도록 익숙해져 오지 않았는가? 피상성과 거짓 목사들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고 상생적이다. 피상성의 문화는 거짓 목사들을 양산하고, 거짓 목사들은 피상성의 문화를 촉진한다. 당신은 피상성과 싸우고 있는가? 하나님과 맺는 당신의 관계는 충분히 깊이가 있는가? 당신이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맺는 관계는 충분히 깊은 결속을 경험하는가? 피상성의 시대에 깊이 있는 신앙, 깊이 있는 교회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생활
피상성
교회공동체
초대교회
말씀선포
코이노니아
상생적
헤르만바빙크
낸시거스리
삶에 기쁨이 없을 때
by Scott Hubbard
2021-03-03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지만 여전히 기쁨이 멀게만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성경도 이미 읽었다. 묵독과 음독으로. 한 번에 다섯 절씩. 심지어 한 자리에서 성경의 책 한 ‘권’ 전체를 읽은 적도 있다. 약속의 말씀들을 메모지, 화이트보드, 그리고 손등에까지 적어두기도 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이들과 함께 모이기를 힘썼고, 마음의 짐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회개하지 않은 죄는 없는지도 찾아보았다. 물론 기도도 했다. 홀로, 그리고 여럿이 함께. 골방에서,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도 말이다. 절박함 가운데 수련회에도 참석해봤다. 긴 시간 금식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같은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두움, 적막, 그리고 의심은 여전히 당신 곁을 배회한다.‘내 기도를 들으시는건가? 나를 아시기는 하는 걸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나는 정말 그의 백성일까?’우선 기억해야 할 것들기쁨이 멀게 느껴질 때면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들’이라 함은 그저 ‘단순한 해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많이 경험했겠지만, 도와주려는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시키고 단순한 해결책만 제시하는 사람들이 주는 조언 말이다. 이 사람들은 보통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네요”라고 말하곤 한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단순화된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계속하여 우리가 늘 잊곤 하는 단순한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가 어두움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들처럼 그 어두움 위에 빛을 비추고,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지만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준다. 다윗 왕은 시편 40편에서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음을 꼭 기억하라고 말한다.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다. 기쁨의 날이 올 것이다.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다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어두운 시절은 정상적인 것임을 상기시킨다. ‘시절’(seasons)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시편 40편이 묘사하는 어두움은 어느 오후 동안 잠시 느끼는 슬픔이 아니라 길고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어두움이다. 다윗이 통과해야 했던 그 어두움의 시기가 얼마나 길었는지를 보라.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말로 시를 시작한다(40:1). 다윗이 얼마나 오래 그 어두움을 견뎌야 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주께 울부짖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그의 어두움의 시기의 ‘지속성’에도 주목하라. 이 시편의 중간 부분을 보면 다윗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짐을 받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40:2), 그는 다시금 갑자기 어두움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40:11–13). 이로 인해 심각한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다윗은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40:12)라고 부르짖는다.마지막으로, 다윗의 어두움의 ‘상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라. 이 시의 끝에 이르렀을 때에도 다윗은 여전히 어두움의 포로가 되어 있다. 기쁨의 노래는 간 곳 없고,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라고 애통해 한다. 찬양하는 대신,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간구한다(시 40:17).잃은 후 다시 찾은 행복, 하지만 다시금 상실한 행복에 대한 다윗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기쁨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다스릴 수 있다. 많은 이들을 비롯해 다윗이 경험한 것이 주는 교훈은 우리가 천국을 너무 급히 붙잡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기쁨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약한 육체를 입고 살며, 죽음이라는 우리의 대적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실제기는 하나 어두움과 공존한다.이 어두움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나 혼자만 이런 어두움을 겪는 것은 아니다. 시편 기자들,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 역시 같은 어두움을 통과해야 했다. 우리 앞서 살았던 성도들, 그리고 현재 우리 곁에 있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우리 구주 역시 이를 겪으셨다. C. S. 루이스는 “우린 아무도 지나가 보지 않은 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아주 넓은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이지”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말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Malcolm)).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하지만, 다윗은 어두운 색 물감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편은, 놀랍게도 소망으로도 가득하다. 어두움은 정상적인 것이 맞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다윗의 기도가 하늘에까지 상달되지 않는 듯 보일 때조차도,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듣고 계셨다(시 40:1). 다윗이 다시금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함으로 가까이 다가오셨다(시 40:11). 스스로 가난하고 궁핍한 것처럼 느끼고 그 마음이 심히 낙심되었을 때에도(시 40:12), 다윗은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시 40:17)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그리 가까이 계시다면, 어떻게 어두움이 정상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에게 어두움이 임한다. 다윗의 어두움 역시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시 40:12).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시나 우리 스스로 구덩이에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잘못을 범하지 않더라도 어두움을 통과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께는 오직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만 빚어낼 수 있는 계획이 있으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이 시편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시 40:6–8; 히 10:5–7). 예수께서 감당해야 했던 어두움에 비하면 다윗의 어두움은 그저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의 길은 우리 중 누구의 길보다도 어두웠다. 당신이 보는 하늘이 얼마나 밝은가로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우신지를 판단하지 말라. 당신이 예수께 속한 자라면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버리거나 잊지 않으신다. 무한하신 당신의 주께서 당신을 생각하신다(시 40:17).기쁨의 날이 올 것이다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고 해서 우리가 어두움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은 그 어두움이 결코 ‘끝’이 아니며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겪는 어두움은 기찻길이지 역이 아니라는 의미다. 집으로 가는 길일 뿐이지 아늑한 집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어두움의 길을 지날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조율하셔서 다가올 찬송을 준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시간에, 멀게만 보이던 기쁨이 다윗에게 돌아왔다. “나를 [중략]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 40:2–3). 기쁨이 다시 멀어졌을 때, 다윗은 기쁨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했던 것을 기억해냈고, 이로 인해 이 시편의 말미에서 다윗은 담대히 기도한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다가올 기쁨에 대해 다윗이 확신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겪었던 어두움이 사실은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어두움보다 기쁨이 언제나 더 깊고 더 확실하다는 뜻이다. 이 기쁨은 끝없이 더욱 깊어지고, 영원히 더욱 확실해진다. 당신은 아마도 현재로서는 이 진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다시금 찬양하고 웃으며,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고 선포하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상실된 기쁨이라고 해서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기쁨이 회복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기쁨이 지금은 그저 깜박거리는 수준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활활 타오르게 될 것이다. 이 땅 순례 여정의 남은 모든 기간 동안 어두움이 늘 당신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해도, 반석 위에 우뚝 서 걸음이 견고해지고 입에서 탄식이 멈추며 새 노래를 부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회복하기 위한 이 싸움에서 당신이 아무리 혹독한 어두움을 마주한다 해도,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가 말했듯, “천국에서의 첫째 날에 누리게 될 환영식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그리스도의 사랑스러움’(The Loveliness of Christ)). 그리스도인이여, 기쁨 가득한 날이 오고 있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 끝없이 영원한 기쁨이 오고 있다.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하지만 기쁨의 날이 온다는 약속을 어두움 속을 걷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 약속은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의 것이다. 다윗의 기도에서 이를 묘사하는 문구에 주목하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시 40:16). 다윗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지체하시는 것 같을 때조차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라.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그것들을 붙들라. 하나님이 들으시는지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계속하여 부르짖으라.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계속하여 그의 얼굴을 구하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에 지쳤을 때 거짓에 치우치고자(시편 40:40) 하는 유혹, 다시 말해 즉각적인 도움을 약속하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달려가고픈 유혹에 저항하라. 기다리고, 매달리고, 기도하고, 찾으며, 하나님이 오실 것임을 신뢰하라. 얼마 있지 않아 어두움은 비정상적인 것이 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워질 뿐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기쁨이 진정한 실제가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토마스 켈리(Thomas Kelly)가 '구세주를 아는 이들' 5절에서 썼듯이 말이다. 그날에 천국문 들어가 한량 없는 기쁨 누리리이 땅에선 부족하나온전해지리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hen Joy Feels Far Away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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