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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교회 지도자의 리더십 회복
by Don Carson
2021-03-02
넘어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회복의 조건은 무엇인가?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죄, 특히 성적인 죄에 빠져들고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남에 따라 이 질문이 주는 긴급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 주제를 다룬 책들도 이미 많이 나왔기에, 필자의 이 짧은 글의 의도는 모든 관련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바가 무엇인지 네 가지 면에 있어 제시해보고자 한다. 1. 구체적으로 질문하라우리가 던지는 질문 자체가 때로는 애매모호하거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하면 당연히 “무엇이 회복되는 걸 말하세요?”라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성적인 죄라고 가정할 때, 회복이라는 것이 '가족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해당 배우자에게 달린 것이고, 그 배우자의 반응에 따라 우리가 고려해야 할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다”이다. 그 성적인 죄악이 얼마나 비통한 것이든 상관없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니다. 하지만 주님과 관계를 회복했고, 출교에 해당하는 징계를 받았지만 이제는 교회 회원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교회에서의 리더십까지 자동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정회원이라고 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이유로 누군가가 어떤 직분으로부터 제명되었다면, 그가 그 직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그 사람이 해당 직분에 대해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로 귀결된다. 2. 그 직분에 대한 성경적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가그 사람이 그 직분에 대해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련 문제가 있다. 좀 더 실제적인 교훈을 배우기 위해, 간음의 죄로 징계를 받은 이전 목회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목사는 회개했고, 교회 장로와 목회자들의 감독을 받기로 동의했으며, 박탈당했던 교회 회원 자격도 다시 회복했다. 이제 문제는 이 사람이 목회자의 직분을 다시 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생각해 볼 문제 두 가지는 아래와 같다. (가) 혹시 같은 죄를 다시 범할 위험은 없는가? 이에 답할 수 있으려면 그가 얼마나 깊이 회개했는지, 영적인 회복은 어느 정도인지, 그가 합의를 보았다면 그 합의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가 앞으로 어떠한 책무를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목회적 판단이 필요하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목회자를 포함하여 성적인 부분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다시 동일한 죄를 범할 확률은 지극히 높다. 장로들에게는 성적 범죄 경력이 있는 목사로부터 양 떼를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는데, 미국처럼 소송이 빈번한 사회에서는 장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의무를 실천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죄를 범한 목회자가 같은 죄를 다시 범하지 않을 만큼의 도덕적 결단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목회적 결정을 내려야 할 의무도 있다. 성경적인 용어를 쓰자면, 장로들은 이 목회자가 이제 진실로 '절제'(딤전 3:2)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또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딤전 3:4)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가 간음함으로 감독, 즉 목회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러한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나) 신자들 뿐 아니라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도덕적 죄가 그 목사의 신뢰성을 얼마나 망가뜨렸는가?3. 신뢰도 측정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만일 타락한 그 목회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간음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목회자의 지위를 회복시키지 않는 것은 장로들이나 교회가 사랑이 부족하고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항변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본질을 흐리는 논리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적인 신뢰성이다. 바울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딤전 3:2)라 말하며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딤전 3:7)라 가르친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않는 완벽성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될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책망하는'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이 목회자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묶여 있어, 그가 비통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가 회개했다는 표시만 보여준다면 교회 안의 많은 이들이, 심지어 대다수가, 그가 계속 목회를 하도록 해준다. 하지만 외인들은 어찌 할 것인가? 외인들이 그 목회자의 간음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어도 괜찮은 일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조롱을 받는 것은, 목사 자신이 간음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교회가 자기 정욕도 주체하지 못하는 목사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아도 상관 없다고 말하기 떄문일지도 모른다. 이 목회자가 신뢰성을 심각하게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가 도덕이나 신뢰성에 관해서는 어떤 설교를 하건,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할 것 없이 그의 설교를 결코 마음으로 받지 않고 듣는 척만 하게 될 수도 있다. 4. 어려운 질문을 던지라이 점에 비추어 봤을 때, 장로들은 이 넘어진 목회자가 개인적인 수준에서 잘 회복되고 있는지 뿐 아니라, 교회 및 외인들이 이제 그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전자의 영역에서 목회자가 잘 해내고 있다고 해도 후자의 영역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점에 이르면, 한때 넘어졌다가 현재 회복되고 있는 이 목사가 다시 목회 리더십을 수행할 수 있는지는 그가 공적인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 공적 신뢰도 손상은 영구적이므로 타락한 목회자는 결코 다시 목회 리더십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자들과는 생각을 달리 한다. 이 강경론자들의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자기 마음대로 정한 세 달 근신 후에 이제는 사역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했던 1980년대의 유명 사역자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 같은 경우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닥에서부터 작은 일들을 다시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재기하는 것을 통해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건물 청소, 연로하신 분들을 위한 교회 주차 봉사, 또는 기도회 참석 등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구역 모임에 수년간 겸손하고 탁월한 자세로 참여하고 나면 종종 그 모임을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신실한 집사 같은 이가 되고, 더 많은 시간이 가면 그의 신실한 가정 생활과 그의 깊은 성경 지식이 합쳐져 더욱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제 가끔씩은 설교를 하기 시작할 것이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공적으로 회복하고 영적인 리더십을 수행할 수 있는 지위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목회직이 회복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암시되어 있다. 첫째, 타락 전에 가졌던 목회적 권위를 그대로 회복하지는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 일을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상당한 신뢰성을 회복했음을 모두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그의 타락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거나 가르칠 때면 사람들은 항상 그 목회자의 끔찍한 잘못을 기억해낼 것이다. 둘째, 타락 전에 유명했던 목사일수록 공적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넘어짐으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완전한 신뢰성 회복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원제: Can a Fallen Christian Leader Ever Be Restor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목회
신뢰성
타락
회복
목사
회개
직분
권위
리더십
교회에서의 짧은 만남의 가치
by Megan Hill
2021-03-01
교회에 린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코로나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는 거의 매주일 교회에서 만나면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또는 복도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를 자주 안아주었고 우리는 이번 주에 할 일에 관한 세부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린과 나는 성격도 다르고 생활 환경도 비슷하지 않다. 사실 그런 차이가 우리의 대화를 즐겁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린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가끔 교회의 예배실 건너편에서 그녀를 봤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화장실에 있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고 복도에서 우리 사이의 거리를 넓혔다. 우리 교회는 예배 사이에 있던 커피 타임을 폐지했고, 뉴잉글랜드의 추운 겨울은 주차장에서 서로 만나는 시간마저 줄어들게 만들었다. 린과 이야기하던 시간이 그립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정기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무슨 모임을 갖는 것은 우리 관계의 특징이 아니다. 코로나 관련 팟캐스트 멤버를 선택할 때도 우리는 상대방의 멤버에 속하지 못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다. 단지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한다.린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특히 교회에서 나누던 소소한 잡담을 사라지게 만든, 전염병이 가져다준 슬픔의 한 예일 뿐이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예배가 끝나면 내가 앉은 의자에 와서 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그립다. 그 아이들은 이제 예배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다른 문으로 총총히 떠날 뿐이다. 십대들과 농담하던 때도 그립다. 분홍색 카펫이 깔린 펠로우십 홀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 번에 오 분씩 이 사람 저 사람과 얘기하던 그 시간이 그립다. 사실 교회에서 주고받는 이런 식의 잡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그 시간을 그리워할까?우정의 범주(category)아만다 뮬(Amanda Mull)은 디아틀란틱(The Atlantic)지에 실은 글을 통해 주변(peripheral) 관계의 실종을 한탄했다.“코로나는 인간 관계를 가족 및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에게로만 묶어버렸다. [중략] 코로나는 우정의 전체 범주를 증발시켰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또한 인간의 건강함을 부양하는 기쁨을 고갈시켰다.”사회 과학은 우정의 다양한 범주를 식별하고 또 가장 사소한 관계조차도 우리의 웰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러한 약한 관계 내지 중간 고리 관계 또는 가벼운 관계는 소속감에 기여하고 커뮤니티를 강화하며 심리적 행복을 증가시킨다. 이 범주는 또한 교회에서의 우정을 포함하여 우리의 규칙적인 상호 작용을 설명한다. 현대 심리학이 탄생하기 수천 년 전에 예수님과 바울은 모두 다 다양한 범주의 우정이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지상 사역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요한)에 대한 특별한 사랑, 세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과의 친밀한 우정, 열두 명에 대한 깊은 헌신과 일흔 두 명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에게도 친애하는 동반자(디모데), 몇 명의 동역자(디모데, 실라, 에바브라), 사랑하는 많은 친구들(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오디아, 순두게), 그리고 수많은 헌신적인 지지자들이 있었다.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없는 예수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없는 바울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사역을 지원하고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수십 개의 느슨한 유대가 없는 그들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때때로 교회에서 우리는 소그룹, 멘토링 관계 또는 책임 파트너십을 통해서 자라나는 친밀한 우정을 특히 강조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매우 중요한 연결이다. 하지만 관계가 가깝지 않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산이다.이름을 부르며 친구와 인사하자요한의 마지막 서신서는 이런 명령으로 끝난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요삼 15b).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 훈육을 실천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편지의 결론으로는 약간 이상한 것 같다. 게다가 “쓸 것이 많다”고 말한 후(13절)에, 이런 권고를 하는 것은 양피지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그러나 교회에서 인사하는 관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먼저 '친구'를 맞이해야 한다. 단순한 미소와 환영의 말(또는 더 좋은 날에는 악수)로 우리는 모두가 함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의 친구는 내 친구라고 말한다. 임의의 개인으로 구성된 자발적 조직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인 조직이다(고전 12:18). 각 부분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인해 전체에 속한다. 서로를 보고 인정함으로, 비록 아주 작은 울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의 일부로서 각 사람의 정체성을 간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간에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한다. 이름을 시작으로 상대에 관해서 알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독특한 은사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 유익을 주는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전 12).우리의 많은 관계는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주로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비슷한 삶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된다. 반대로 우리가 교회에서 맺은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구속받은 광범위한 사람들과의 접촉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나이가 많거나 또는 더 젊은 사람, 성별이나 인종이 다른 성도들의 관점을 통해, 다양한 시련을 겪으며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삶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서로의 짐을 함께 지고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매주 동네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다른 교회 교인과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가 걷는 트레일은 약 30분 정도 걸리는 숲길인데, 처음 20분 동안 우리의 대화는 그냥 말 그대로 잡담이다. 날씨 또는 코로나 감염자 수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아이들이나 그녀의 고양이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교환한다. 거의 차로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때로는 실제로 열쇠를 들고 주차장에 서 있는 경우도 있음) 우리는 마침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산책한 몇 달이 지나면서 깊은 맘을 나누기 시작하는 시점은 점점 더 빨라졌지만, 그럼에도 상호 신뢰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잡담이 필요하다. 우리는 잡담을 쓸데없는 수다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서 신실한 관심을 보여줌으로써 진짜 중요한 시련을 만났을 때 필요한 신뢰까지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는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을 위한 명령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에 보낸 각각의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일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간단한 사실, 회중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공통된 정체성에 대한 몇 가지 진술로 시작한다. 이 인사말을 잡담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비슷하다. 그들은 각각 당사자가 처한 고유한 상황을 인정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 몇 문장을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쓴 후, 신앙과 삶의 더 깊은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일이나 취미에 대한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 매주 몇 분을 소비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동료 교인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결국 그들의 더 많은 문제까지도 맡는 권리를 얻게 된다.물론 잡담이 사라진 것이 100퍼센트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다. 수십 년 동안 현대 생활 속 기술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우연하고 계획되지 않은 상호 작용의 기회를 서서히 줄여갔다. ‘세 조각의 유리: 우리는 왜 스크린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점점 더 외로워지는가(Three Pieces of Glass : Why We Feel Lonely in a World Mediated by Screens)’ 에서 에릭 제이콥슨(Eric O. Jacobsen)은 자동차, 전화 및 TV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를 강화하는 인간 관계를 어떻게 약화시켰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오늘날 스크린 뒤에 숨는 것은 아주 쉽다. 즉, 우연한 대화 조차도 이제는 어느 정도의 의도가 있어야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약해져도 우리는 여전히 교회 잡담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과의 어색한 대화(중요한 문제일수록 일부러 천천히 언급하는 식의 대화)는 결코 편리하거나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원제: Church Small Talk Was More Important Than I Though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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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J. Leithart
2021-02-28
교회 교부들이 남긴 길거나 짧은 설교를 읽을 때면 겸손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주해’ 중에서 아무 부분이나 펼치고 읽어보라. 시편에서 시작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그리고 계시록으로, 또 복음서에서 시작해서 계시록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펼쳐내는 놀라운 미로 여행을 경험할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8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가 모든 모래 알갱이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훈련했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속 모든 구절에서 만화경처럼 신비한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것은 그가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올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종종 그가 만든 뒤틀림과 굴곡 중 일부는 출구가 없는 골목으로 이어지기도 했고, 천하의 아우구스티누스도 후퇴를 할 때도 있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 겸손해지는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지금 성경을 읽을 때 의지하는 갖가지 수단과 도구 없이 성경 전체를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관련 소프트웨어와 검색 엔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손에는 그 흔한 관주 성경도 없었다. 초대 교부 시절부터 종교 개혁 시대까지, 기독교 지도자는 사실상 성경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속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다. 그런 수준의 성경 지식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수는 있지 않을까? 만약에 우리가 다음 네 가지 교훈을 지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1. 본문을 신뢰하라내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저자를 신뢰하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이 글에서 하는 어떤 말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필요한 구절이고, 또 모든 것에는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님은 단 한 번의 호흡도 낭비하지 않았다. 성경 속에 우연히 끼어들어 온 구절은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장병을 데리고 있었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또한 성령님은 환자가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38년간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길 원한다. 153마리의 물고기가 단지 현지 상황의 결과일까? 아니다, 이것은 다 주님 말씀의 일부다. 만약에 누가 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흘간 있었냐고 묻거든 그냥 “그거야 뭐 나흘간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라고 대답하지 말라. 그럼 왜 나흘일까? 당신이 보기에 성경 저자가 이상해 보이는 구절을 사용한 경우, 그냥 엉터리 학자들처럼 “그것은 고대 히브리 관용구야”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내리지 말라. 그 표현이 뭔가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대하라. 본문을 신뢰한다는 것은 또한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고백할 게 있다. 나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많은 주석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몇 장을 읽고는 이제 좀 내용이 이해되어 속도를 내려고 할 때면, 사도 요한은 주변의 다른 장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삽입' 내지 '이탈 또는 후퇴'로 본문을 채운다고 주석은 설명한다. 신령한 저자를 괴롭히지 말고 잠시만이라도 좀 가만히 놔두라. 왜 사도 요한이 그 책을 그렇게 힘든 방식으로 구성했을까? 결국 마지막 순간에 다다르면 브레이크를 밟을텐데 뭐하러 그 전에 속도를 내는 이상한 전개 방식을 택했을까? 인간인 저자를 조금만 더 믿도록 하자. 그가 그렇게 쓴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무엇보다 궁극적 저자인 하나님을 믿자. 하나님은 수십억 개의 인류 역사 속 다양한 주제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당연히 일관된 내용의 책을 쓸 수 있다.2. 지름길은 없다여러 해에 걸쳐 성경 해석학을 가르쳤을 때, 나는 종종 로버트 펜 워렌(Robert Penn Warren, 20세기 초 미국의 평론가·소설가·시인)이 시에 대해서 했던 논평을 다음처럼 풀어서 말하곤 했다. 시를 가장 자연스럽고 잘 이해하는 것은 처음 읽었을 때가 아니다. 열 번째 읽을 때도 아니고 쉰 번째 읽을 때도 아니다. 바로 백 번째 읽을 때다. 백 번째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뒤를 보면서도 기억하지만 '앞을 향해서도 기억(remember forward)'하게 된다. 시 전체가 비로소 한 줄 한 줄마다 우리와 함께 있게 된다. 워렌의 주장은 요즘 문화가 길러내는 환경을 역행하는 발상이다. 우리는 즉각성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가장 처음 노출되었을 때 가장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워렌이 맞다. 시를 읽을 때나 성경 한 권 또는 성경 전체를 읽을 때, 지름길은 없다. 읽고, 또 읽고 또 읽는 길 밖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구절 하나 하나와 함께 당신 곁에 머물 때까지 읽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야 비로소 본문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성경 주석을 쓸 때, 나는 성경을 최대한 많이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요한계시록 주석에 매달린 칠 년 동안 하루에 세 장씩 읽으면서 대충 한 주마다 요한계시록을 한 번씩 다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각각의 구절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때때로 가장 신선한 영감은 계시록 전체를 읽고 또 읽는 중에 떠올랐다. 3. 당신보다 뛰어난 가상의 독자를 찾으라내 막내아들은 작곡가다. 우리는 종종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가 음악을 듣다가 멈추고는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아빠, 저거 지금 들었어요? 지금 막 피아노 소리가 난 거 말이에요? 조가 바뀌는 거 들었어요? 리듬이 복잡해지는 거 알아챘어요?” 그러면 나는 멍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아니, 난 아무 것도 안 들려.”물론 내 아들이 망상에 빠져서 있지도 않은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는 더 단순하다. 조금 겸손하게 말하면, 그의 귀가 나보다 낫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계속 쉬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이런 식의 불평등을 굳이 성경 읽기에까지 적용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 개신교도는 성경의 명쾌함과 더불어 모든 믿는 자가 다 대제사장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도서관 책장 사슬에 채우지 않는다. 누구나 다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음을 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성령의 은사 때문에 또는 긴 훈련 때문에 다른 이보다 성경을 더 잘 읽는다. 다른 사람이 그냥 넘긴 것을 잡아내는 사람이 있다. 훌륭한 독자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용을 연결시킨다. 장식용 벽걸이 천에서 패턴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턴은 고사하고 그냥 실의 형태만 보고 있을 뿐이다. 성인이 된 내게 제임스 조던(James B. Jordan)은 변함없는 스승이다. 나는 수십 년간 그의 메시지를 들었고 또 그와 함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언제나 내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한다. 그는 구절과 구절 사이에서 튀는 메아리를 찾아낼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A'를 이야기하던 그는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Z'로 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회의적인 생각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오 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나는 비로소 그가 건너뛰었다고 생각한 B부터 Y 사이를 채우게 되고, 그가 옳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그나마 지난 수 년에 걸쳐서 성경을 읽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은 대부분 내가 그를 따라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당신만의 제임스를 찾으면 된다. 당신에게 자극을 주고 기쁨을 주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누군가를 찾아내라. 당신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이를 찾도록 하라. 잘 들으라 그리고 흉내내라.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지금 그가 곁에 서서 행여 당신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인도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4. 말씀이 차고 넘치는 의식을 치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근대 이전에 살았던 성경 교사들은 우리보다 이로운 점이 있었다. 우리는 성경 소프트웨어, 인터넷 그리고 차고 넘치는 책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대신 의식(liturgy)이 있었다. 중세 수도사들은 경전에 둘러싸여 일하면서 성경 텍스트를 복사하고 공부했다. 그들은 또한 매주 시편 전체를 암송했고 기도 시간에도 상당량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영혼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귀에도 있었고, 또 그들은 그 말씀을 입으로 맛볼 수도 있었다. 슬프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이런 식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회 이름에 '말씀'을 넣은 많은 교회가 정작 예배 중에는 말씀을 경시한다. 찬송가에도 말씀은 아주 조금 묻어있는 정도다. 목회자는 설교를 위해 몇 구절 읽는 것이 전부고 그것 외에 예배 중에 말씀이 들리는 것은 거의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의식을 집례하는 교회가 성경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말씀에 깊이 몰입한다. 만약에 복음주의자들이 교회 교부들이 누렸던 깊이를 따라하고 싶다면, 그 시작은 루터교 또는 성공회 예배처럼 예배가 성경적으로 말씀에 깊이 빠지도록 하는 것이다. 말씀은 지금도 선포하고 있다당신이 목사라면, 예배 속에 말씀을 더 많이 포함시켜라. 목사가 아니라면, 말씀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 말씀을 더 많이 공급해달라고 크게 외쳐라.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말씀을 읽고 읽고 또 읽어라. 그리고 모든 구절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기대하라. 멘토를 찾고 그의 눈을 통해서 더 많이 배우도록 노력하라. 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한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당신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Revolutionize Your Bible Read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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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
요한계시록
복음주의자
코로나 시대, 교회의 위기 대응법
by Ken Bohney • Mark Strand
2021-02-27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단지 교회의 권위와 리더십 문제를 뛰어넘어 복음주의 교회가 현재 당면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강제적인 마스크 착용과 비대면 예배를 요구하는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 관한 최종 결정은 교회의 누가 해야하는 걸까?보통의 경우 복음주의 교회는 교단과 매우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사실상 담임 목사 또는 소수의 리더들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형태를 가진다.2020년 3월 15일, 내가 시무하는 살렘복음주의자유교회(Salem Evangelical Free Church)는 코로나 전염병이 미국 중서부 북부 지역에 산불처럼 퍼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소집된 교역자와 직원 및 장로들 간의 긴급 회의에서, 당회는 코로나 사태가 주는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가진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5인 COVID 대응팀을 구성했다.그날 이후, 목회자와 장로들이 함께 동역하는 대응팀의 리더십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찢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대응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고 몇 가정은 갈등 속에 교회를 떠나기도 했지만, 대응팀은 교회 내 갈등을 최소화했다. 대응팀은 장로들의 감독하에 교회를 위한 결정을 내리고 지침을 제공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우리의 목적은 교회가 제자를 만드는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코로나 확산을 최대한 늦추는 데 필요한 확실한 행동 지침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다양한 달란트와 영적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팀을 만드는 것은 개인의 독단과 영웅주의를 막을 수 있다(롬 12:4-5).여기 우리가 코로나 위기를 맞아 대응한 몇 가지 방법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1. 믿음과 과학을 기반으로 대화하라복음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소망이지만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생물학적 문제에 기반을 둔 전염병으로 인한 새로운 신앙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분열에 저항했다.대응팀은 감염자 숫자와 그로 인한 우리 교회의 위험 수준에 따라 3단계의 유행병 대응 방침을 만들었다. 추정컨대, 2021년 1월 현재, 코로나 발병 이전 교인의 75퍼센트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중 절반은 대면 예배로 나머지 절반은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는 또한 재정적으로도 건강하게 한 해를 마쳤는데, 이는 2019년 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놀라운 일이다. 2. 정부 당국의 지침을 존중하라“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정부의 제한 조치에 반대하는 용도로 쓰는 교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 말씀에 근거해서 대응 방향을 잡기로 결정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3월 22일부터 6월 21일까지 우리는 대면 예배를 중단했다. 모든 교역자와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했고 또 모든 사역은 온라인으로 진행하였다. 우리는 주 정부의 방침을 따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그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강압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이런 결정과 그 이유를 최대한 확실하게 공지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의 의견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지도자를 존중하고, 전염병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교회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는 문제라고 인식했다. 반대 의견에 관해서도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은혜롭게 말하려고 주의를 기울였으며, 무엇보다 과학적 요소와 신앙적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진리로 전염병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높은 기준을 설정했을 때, 대부분의 교인은 교회의 가르침에 잘 따라주었다. 3. 자주 의사소통하라전염병이 시작되고 소셜 미디어에 관련한 정보가 넘쳐나면서 우리는 교회 가족에게도 신앙과 과학에 대한 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확신했다. 첫 번째 비대면 예배에서 우리는 온라인 커뮤니티, 전화 통화, 기도 요청 및 재정적 필요 충족에 대한 계획을 공유했다. 규칙이 변경될 때면, 우리는 다음 주일부터 달라질 것에 대해서 즉시 알려주었다. 비디오, 이메일, 전화 통화 및 웹 사이트를 활용한 의사소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디오를 자주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공감과 연민을 표현하는 데 비디오가 적절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교회 모든 교역자들은 비디오 사용에 전문가가 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예민한 문제가 되었던 시절, 5월 13일 교회는 마스크 착용과 관련해 재미있고 유익한 비디오를 제작해서 공유하기도 했다.4. 공동체를 육성하라온라인 활동, 전화 통화 및 줌(zoom) 이벤트를 통해 최대한 서로 소통하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전염병이 거의 일 년이 되어가는 지금, 인간 관계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다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일부 소그룹은 아예 유명무실해졌다. 또 어떤 소그룹은 줌으로 하는 것에 지쳐갔다. 교회에 새로 등록한 가족은 기존 교인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자, 그럼 우리 교회는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코로나 이후 사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 힘든 시간 동안 우리 주님이 우리 교회를 하나로 지켜주고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그룹 공동체를 어떻게 건강하게 양육할지를 놓고 분투 중이다.더 광범위한 적용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사용한 접근 방식과 그로 인해 배운 교훈은 교회 리더십이 처한 도전이라는 문제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2020년 말과 올해 초에 미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나 대통령 선거 불복종 등과 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위기를 만나는 경우다. 또는 종말론이나 영적 은사와 같은 2차 또는 3차적 교리 문제와 관련된 도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교회 정치 문제 또는 어떤 성경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갈등은 교회 지도자들의 결단을 시험하고 연합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와 도전에 상호 공감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또한 강력하고 통일된 리더십으로 교인들의 은사와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그들과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한다면, 교회는 그 어떤 도전에도 분열없이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교회는 외형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분열되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8장 31절에서 한 말씀을 기억하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원제: Learning to Respond to Church Cris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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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가장 평가절하된 성경
by Andrew Wilson
2021-02-26
사람들은 역대하를 과소 평가한다. 전편에 해당하는 역대상의 전개가 너무 느린 것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대상 1–9장에 나오는 긴 족보는 역대기 저작에서 중요하지만 현대 독자들에게는 매우 지루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역대상 후반부 역시 제사 직분 맡은 자들과 찬송 직분 맡은 자들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상세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는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신학자들이나 열정적인 찬양 인도자들에게나 관심거리가 되는 내용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상을 마칠 즈음이 되면 독자들은 역대기 저자를 현학적이고 지나치게 작은 부분에 집중하는 사람, 즉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역대하가 열왕기상하의 내용 중 엘리야와 엘리사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모두 동일하게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대하에 엘리야가 잠시 등장하긴 하나, 흥미진진한 갈멜산, 세미한 주의 음성, 까마귀가 갖다 준 떡과 고기, 도둑맞은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나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성전 건축도 나오고 선한 왕과 악한 왕들의 이야기들 역시 등장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웅들의 이야기들은 빠져있다. 역대기를 얕보는 독자라면, 저자가 그저 우리를 짜증나게 하기 위해 역대기를 썼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역사우리는 겸손한 태도로 역대기를 읽어야 한다. 역대하를 그 자체의 빛에 비추어 읽으면 역대하가 북왕국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지 않기 때문에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대하는 여러 면에서 성경 중 가장 명확하고 예언적이며, 기도와 경배로 가득한 역사서다. 이를테면 역대하는 구약의 사도행전이다. 역대하는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영으로 그 전이 채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고 찬양하지만 또한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는 역사,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가나 다시 풀려나 귀환하는 역사, 또한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오는 역사를 담고 있다.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 같은 영웅들이다. 아하스나 아몬은 헤롯 같은 악당들이다. 역대하에는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같은 신실한 신자인 스가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악당에서 제자로 거듭난 바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리에서 은혜의 상징이 된 므낫세의 이야기도 있다. 남왕국 유다에 초점을 맞춘 역대하 저자는 유다의 왕들을 통해 당시의 복잡한 윤리적 상황을 보여주며 각 왕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솔로몬, 르호보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웃시야,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 같은 이들을 각 인물이 지닌 미세한 차이들을 묘사하며 아주 자세히 다루는데, 소설가들이 사용하는 등장 인물 발전 기법이 엿보인다. 역대하에는 이 왕들의 생각, 말, 그리고 기도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여호사밧 왕의 기도다.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2) 선한 왕이 처참한 결과를 불러오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그저 그랬던 왕이 지혜로운 결정을 내려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며, 악한 왕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기도 한다. 이들은 여호와 경배는 선하고 우상 숭배는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순한 이차원적 만화 주인공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이들은 전적으로 실제 인물들이다. 장점과 약점을 갖고 있으며, 겸손, 지혜, 순종,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자들을 위한 교훈역대하 저자는 제사장들도 비중 있게 다루는데, 오늘날 목회자들이 여기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대하에 이르기까지 구약을 읽다 보면, 제사장들이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주관하던 이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구약 제사장들과 오늘날의 목회 리더십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대상과 역대하를 읽으면, 제사장들이 그러한 제사를 주관한 이들인 것도 맞지만 그들 역시 예배자들이요 성전 문지기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역대하 31장 2절은 제사장의 세 가지 역할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휘장 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제사장들은 음악, 노래, 찬송, 그리고 기도가 있는 예배 인도를 통해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했다. 휘장 문에 서서 하나님의 임재를 지키는 역할을 하며, 웃시야처럼 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든, 아하스처럼 금을 훔쳐내어 적들에게 바쳐 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든, 백성들이 함부로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오늘날의 장로들은 역대하에 묘사된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선견자와 예언의 역할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역대하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선견자들과 그들이 하는 예언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열왕기상 및 열왕기하에서는 선지자들이 행하는 역할을 감당한 반면 역대기서에서는 선지자들이 ‘가르치는’ 일을 수행하는데, 이는 당시는 물론이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많은 적용점을 준다. 스마야는 겸손을 가르치고(12장), 아사랴는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15장). 하나니는 평화(샬롬)와 '전심으로'(샬렘) 하나님께 향하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대하 16:9)미가야는 여호사밧에게 아합과 연대하면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흩어질 것이라 경고한다(18장). 예후는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19:2)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 야하시엘은 남유다를 향해,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중략]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20:15–17)고 선언한다. 스가랴, 오벳, 훌다 및 다른 여러 선지자들에 이르는 많은 예들이 있다. 보화로 가득한 곳역대하는 보화로 가득한 곳이다. 아비야 왕, 그리고 히스기야의 어머니인 아비야를 통해 표현된 역대하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도 있고, 아사랴라는 이름을 지닌 선견자, 제사장, 왕, 그리고 족장에 대해서도 논할 수 있다. 이 등장 인물들 각각은 이 책의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역대기 저자가 쥔 붓을 통해 선견자, 제사장, 왕, 그리고 다른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이 책의 핵심을 형성해간다. 역대하의 핵심은 또한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회개하고, 믿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비하면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원제: Why 2 Chronicles Is the Most Underrated Book in th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신학
구약성경
역대기
목회자
선견자
아비야
아사랴
보화
능력주의 문화 내러티브에 도전하라
by 고상섭
2021-02-25
“우리는 세속 문화의 내러티브들을 평가하면서 동시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성경 주제와 교리와 진리들을 제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팀 켈러, 설교, 155쪽) 팀 켈러는 세속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설교를 할 때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복음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라 말하며 그 중심에는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문화 내러티브란, 성경의 진리와는 배치되지만 일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공리를 말한다. 한번 더 생각하면, 모순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모순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청중들이 모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문화 내러티브의 분석은 설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하기 위해 팀 켈러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활용해 논지에 힘을 실으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들이 신뢰하는 근거 자료를 통해 성경본문에서 얻은 가르침을 강화할 때 사람들은 더 설득력있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2021년 현대 사회를 이끄는 문화 내러티브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문화 내러티브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 사회’며, 그것의 한계를 다양한 책들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z) 교수의 ‘엘리트 세습’과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오늘날 능력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 내러티브를 도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내용이 많다. 1. 능력주의 문화 내러티브의 평가와 도전 현대 이전의 시대는 세습의 시대였다. 재산을 세습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부정이 일어났고 평등하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불평등이 많이 해소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능력’이라는 것이 동일하게 세습되고 있음을 두 책은 지적하고 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양극화 현상을 낳았는데 교육과 직업과 정치 영역이다. 미국에서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사람들 중에 2/3는 소득 분포가 상위 5%의 가정 출신이다. 예전에는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자주 거론되었지만 이제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능력이 세습이 되는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신분이 바뀌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돈을 자녀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이제는 자녀에게 돈이 아니라 능력을 물려주는 엘리트 세습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극대화 될 것이다. 또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세습된 능력으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얻은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이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소위 ‘갑질 사건’도 능력주의의 또 다른 면이며, 엘리트들이 능력으로 많은 것을 독식하기 때문에 중산층이 사라지고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더 두드러지는 사회현상을 낳게 된다. 이런 사회현상은 엘리트들에게는 무한 경쟁이 주는 압박으로 스스로 쉬지 못하는 올무가 되고, 또 중산층의 붕괴는 일반 서민들에게 엘리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어준다. 바로 이로부터 사회적 갈등과 계층 갈등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교육도 인격 함양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능력주의적인 입시와 취업용 교육으로 변하면서 자녀들이 인격이 아닌 능력주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이로 인해 바른 인성교육을 받지 못한 사회적 엘리트를 양산하는 사회가 되고 그 경향은 나날이 더욱 비인격적으로 강화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런 능력주의 사회의 모순과 어려움에 대해서 ‘신 없는 섭리론’ 이라고 말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모든 성취를 은혜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엘리트주의가 만연할수록 더욱 불평등이 가속된다고 말한다. ‘엘리트 세습’과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라는 오늘날 현대 문화 내러티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해주지만, 그 대안은 명확하지 않다. 팀 켈러는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기도 하지만 도전하기도 한다. 그 도전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잘못된 문화적 생각의 모순을 드러낸 후 복음이 능력주의 사회의 해답이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2. 능력주의 사회를 향한 복음적 대안 첫째.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능력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착각은 ‘공정하다는 확신'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 은혜의 결과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것의 결과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이 싹트고 다른 사람을 향한 멸시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게 되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내어줄 수 있게 된다. 1-3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는 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크게 성장했는데 그 원동력이 바로 ‘은혜로 인한 구원 교리’에 있었다고 신약학자 래리 허타도(Larry Weir Hurtado)는 분석한다. 다른 종교는 제사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대신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더 많은 성취라는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는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를 만났을 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나는 현재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때 달라스 윌라드는 “당신의 삶의 급하고 바쁜 것을 가차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바쁨은 우리 시대 영적인 삶에서 가장 큰 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바쁘게 사는 것이 멋있는 삶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으로 치명적인 질병 중의 하나다. ‘미친 듯이 바쁜’의 저자 케빈 드영(Kevin DeYoung)도 영적으로 퇴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은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했다. 능력주의라는 문화 내러티브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라는 트랙 위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영원한 것이 아닌 영원하지 않은 가치에 쏟아 부어야 한다. ‘영끌’(영혼을 끌어 모으는 것)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시대의 능력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게으른 삶과 너무 바쁜 삶이라는 두 가지 오류를 벗어나는 균형있는 삶을 소개한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 4:5~6) 전도서는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극단을 피하라고 말한다. 첫째는, 두 팔을 사용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우매자다.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의 피말리는 경쟁을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둘째는, 두 손 가득 일하면서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이다. 두 손 가득 일하며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 쉬지 못하고 두 손 가득 일하는지를 돌아보게 되면 결국 내 안에 있는 욕망과 결핍 때문이다. 복음이 주는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성취와 일이라는 외부적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손만 일하고 한 손은 쉬는 삶의 균형이다. 능력주의 사회를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크리스천인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속에 직장과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복음이며, 은혜로 얻은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많은 노력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존재들이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건강하고 균형있는 열심을 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일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균형있는 열심으로 살아가게 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는 힘은 결핍이나 성취라는 목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능력주의라는 트랙 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달려가는 것을 멈추게 한다. 또한 게으른 삶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살도록 하게 하지도 않는다. 양극단의 오류에서 벗어나 은혜로 인한 건강하고 균형있는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결국 복음만이 능력주의라는 문화 내러티브의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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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선교지와의 교류가 교회에 주는 유익
by Jen Oshman
2021-02-24
매주 당신도 정신없이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예배팀과 미팅하고, 소그룹을 인도하고, 위기에 빠진 부부도 만나 상담하고, 게다가 설교문까지 작성하면서 말이다. 또는 예배 규모까지 생각보다 커져 어떻게 돌봐야 할지 모르겠는데, 주일학교를 맡던 사역자가 갑자기 그만두기도 한다.나는 이밖에 더 많은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남편이랑 거의 이십 년 동안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교회 개척자로 섬겨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시급한 일이 교회 개척자의 일상을 얼마나 쉽게 장악하려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그렇게 바쁜 일상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나저러나 결국에는 잠자리에 엎어져 곯아떨어진다. 교회 개척은 분명 고단한 사역이니까.이처럼 늘 시급한 하루하루의 사역은 마치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당겨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그러한 생활이 당연하긴 해도 원래 의도한 바는 아니어서, 우리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며 그렸던 그림에서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어쩔 수 없이 안으로 쏠리게 되는 교회 개척자당연한 말이지만, 교회 개척자란 선교를 지향하는 사역자다. 예수님의 제자를 삼고자 하는 열정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이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교회 개척자란 말은 무색하다.그런데 교회를 개척한 후에 그 지역 교회가 요구하는 엄청난 일로 시달리다 보면, 지상명령을 위해 다른 나라로 나갈 수 있는 여력은 거의 남지 않게 된다. 오히려 지역 교회의 필요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내부적인 사역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한 의도는 감히 품지 못하게 한다.더 나아가 자칫하면 교회에 혼란과 위기를 초래할까봐 세계 선교는 엄두도 못 낸다. 그래서 국제 사역이 가져다줄지 모를 골치 아픈 과제를 피하려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 사회의 필요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또는 세계 선교를 하는 데 필요하다 여겨지는 예산이나 스태프 혹은 교회 규모가 확보되는 날이 오면, 그날에야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하며 미루기도 한다.그 결과, 우리가 목양하는 교회의 성장만 확신하게 될 뿐 세계 선교는 뒷전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사실 국제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가 않다. 오히려 그러한 파트너십은 놀랍게도 우리의 지역 공동체를 훈련시키는 데 매우 큰 유익을 준다.세계 교회의 성장이 낳는 지역 교회의 성장이 시대의 문화나 우리 각자의 본성 또는 교회 성장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내용과 달리, 진정한 제자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 할 때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우리를 희생할 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풍성한 생명(요 10:10)은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타인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누릴 수 있다(마 16:25).이런 차원에서 다른 나라에서 제자 삼고 훈련하는 사역에 교회가 동참하게 되면, 그 교회의 성도들 또한 함께 훈련되고 성장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도 가서 그러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셨다. 이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추구하는 일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고 세상의 논리와도 상반되지만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물론 그 일에는 시간이 든다. 곧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전통적 장벽을 뛰어넘는 데만 수년이 요구된다. 이러한 사역에서 성공을 맛본 자들은 국내 교회와 해외 교회가 함께 열매를 맺는 데는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하나님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실" 분이다(시 46:10). 그러기까지 일정 기간의 사역이 우리에게 요구되겠지만, 그 사역은 우리의 영원한 기쁨을 위한 일이 된다. 그분은 이미 자신의 교회를 세계 곳곳에 세우고 계신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꼭 필요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를 초청하고 계신다.상호적인 유익을 얻는 파트너십문화의 장벽을 넘어 두 교회 간에 이루어지는 파트너십은 서로가 공유하는 신앙을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상대편 교회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파트너십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더 넓고 풍성한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상호 유익을 주고받는 관계는 두 교회가 소통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재정적인 부담까지 나누게 될 때 활성화된다.따라서 상황이 허락된다면, 각 교회 리더들과 사역팀들은 상대편 교회에 방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각 방문자는 일종의 대사로서 상대편 교회의 이야기와 사진 그리고 필요를 가지고 돌아와 기존 성도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두 공동체 사이에 교제의 길이 잘 닦여 마침내는 문화를 초월한 형제간의 친교가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마치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던 초대교회처럼 말이다(행 2:44).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단기 선교 여행을 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 곧 현지에 가서 새로운 광경에 놀라기도 하고 나름의 보람도 느끼면서 여행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해외에 있는 파트너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사역은 현지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로운 결과를 남길 때도 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단기 선교 여행을 추진할 때 현지 교회가 장기적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는 데 초점을 두고 일정을 진행한다면 좀 더 효과적인 동역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보내어 상대편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현지에 연락을 취해 물어봐야 한다. “그쪽 교회의 강점을 개발하는 데 저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현지에서 진행 중인 사역을 저희가 가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예상한 선입견을 다 내려놓고, 겸손하게 상대편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그에 맞춰야 한다.그렇게 하면 우리가 겪지 못한 사역의 장애 요인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파트너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럽에는 매우 적은 수의 기독교 인구가 살고 있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경우가 흔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여전히 물질의 빈곤을 겪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지역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게 되면 그 교회가 속한 환경에서 요청되는 구체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에 따른 도움을 제공하며 상대편 교회를 격려할 수 있게 된다.나아가 두 교회가 서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게시하고, 최근 소식이나 기도제목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연중 절기를 앞두고는 카드를 써서 함께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교제하는 게 좋을지는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정하면 된다. 이때 각 교회는 파트너에게 유익이 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상대편 교회를 한 가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끝으로 두 교회 간의 교제에서 재정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흔히 우리의 신경을 예민하게 하면서도 파트너십을 다지는 데 큰 몫을 하는 게 재정이다. 당연히 더 부유한 교회가 상대편 교회를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이때 상대편의 요청을 따라 주의 깊게 도와줘야 한다. 이때 양측이 강자와 약자의 구도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되며, 형제 관계에 근거한 섬김으로 그러한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재정 상태의 투명성과 상호 겸손, 그리고 이러한 섬김을 훌륭하게 이행한 적이 있는 다른 교회의 조언이 필요하다.우리의 과제성령이 우리에게 권능을 주셔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다(행 1:8).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각자의 교회만 돌보려는 내향적인 시선을 돌려 외부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우리 사역 가운데 신실하게 역사하신다.이런 점에서 현재 교회 개척이 어느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Acts29.com(또는 당신이 가입하고 있는 교회 개척 네트워크가 있다면 그 웹사이트)에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어떤 교회와 파트너십을 새롭게 맺을 수 있을지도 알아보기 바란다.더 나아가 우리 각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안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이 밖으로 옮겨져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도록 리더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열방에 있는 세계 교회를 위해 물질과 기도로 섬기며 직접 방문하여 도울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선교의 불꽃을 일으킬 것이다.우리는 예수의 이름에 모든 자가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로 시인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빌 2:10-11). 그러므로 지역 교회의 다급한 사역을 위해 세계 선교의 영원한 사명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오히려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가 섬기는 지역 교회까지 함께 성장시키시는 그분의 역사를 목격하도록 해야겠다.원제: How an International Partnership Could Benefit Your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선교전략
교회개척자
파트너십
재정
기도
성령
지역교회
지도자의 성범죄와 하나님의 심판
by Collin Hansen
2021-02-23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로서 작년에 타계한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생전에 다수의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고 최근 라비 재커라이어스 국제사역본부(RZIM)가 공식 발표했다. 이 글은 그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다. - 편집자주나는 라비 재커라이어스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그를 사랑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는 책과 강의를 통해서 수천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고 또한 성경 저자를 신뢰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도록 돕는, 믿을만한 안내자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정말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방식으로 우리의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차마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하고 끔찍한 그에 관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쓴 수많은 인터넷 댓글들을 읽었다. 그토록 높은 프로필을 가진 복음주의 지도자가 이렇게 추잡한 형태로 수 년간의 학대 패턴을 지속하는 게 과연 가능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재커라이어스를 위해서 사역한 많은 사람들은 특히 그를 더 신뢰했기에 그의 혐의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모든 사실을 부인함으로 이미 끔찍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학대는 신뢰를 배반한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전형적인 성적 착취의 패턴이기에 그 자체로는 별로 놀랍지 않다. 성적 착취에는 단계가 있고, 각각의 단계를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는 일단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사역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피해자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성범죄자라는 괴물일 리가 없다는 확신을 세상에 심어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전형적 성적 착취 패턴에 딱 맞는 인간이다.아무도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2018년 봄, 처음으로 그에 관한 혐의가 제기된 후 그와 나눈 대화를 나는 기억한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 세계적인 변증가를 협박한 것으로 알려진 어떤 고발자와 맺은 합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물어봤다.나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합의사항의 내용과 관계없이 조만간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희생자들을 자기 비하와 자해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도록 만든 돈과 권력의 방어벽이 무너지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난 것은 결국 그의 죽음 이후였다. 재커라이어스는 결국 이 세상에서는 정의의 심판을 피했다. 그러나 다음 세계에서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심판날 그와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은 없다. 그가 과연 자신의 끔찍한 죄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해 용서를 구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와는 별개로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6:9-10).하나님 우리 모두를 도우소서.디지털 혁명우리는 진취적인 언론인과 용감한 피해자가 디지털 출판을 통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재커라이어스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은 사실을 세상에 밝힌 일부 언론인은 그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재정적 보복에 대한 위협이 너무나 자주 희생자와 조력자들의 입을 막았고 또한 정기 간행물이 그들의 이야기를 출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는 바뀐 환경에 따라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언제라도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실이 드러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수백만 달러의 사역 단체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영웅을 사랑하지만, 이제 조금씩이나마 피해자를 믿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제는 더 많은 피해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가해자는 동네와 교회를 바꾸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은 그들이 감시망을 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팬이 나타나 또 다시 잘못된 가르침과 가학적인 행동까지도 숭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은 이제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계속해서 침묵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동시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재커라이어스의 범죄를 도왔다. 사실, 성적인 이미지를 촬영하고 공유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데 스마트폰이 없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누드 셀카를 어떻게 요구하는지 아는 것은 중학교 소년만이 아니다. 한때 빌리 그래함 규칙(Billy Graham Rule, 자신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규칙)과 목사 사무실의 문에 달린 창문이면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섹스의 형태는 포르노의 보편화로 인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성적 범죄도 같은 패턴을 따른다. 예방 및 보호를 위한 사역 기관의 정책은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나?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기독교 지도자의 성범죄는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영웅들에게서 온전함을 찾지 못해 절망하거나, 또는 성범죄를 막기 위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 또는 요구라는 그 어떤 방법도 지속적인 변화로 이끌지는 못한다. 재커라이어스와 그 이전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믿음을 가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리더를 향해 낮은 기대치를 갖거나 아예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책임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보시는 하나님의 책임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다. 지도자는 재커라이어스가 지금 분명히 겪고 있는 것처럼(히 13:17), 우리에게 따라가야 할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지도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변화에 대한 요구가 보장된다. 그러나 노골적인 인터넷 콘텐츠를 필터링하는 방법에 익숙한 기술자라면 그 어떤 필터링도 회피하는 방법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를 짓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필터링은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의로움을 전달할 수는 없다. 성범죄를 방지하려는 모든 요구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역은 다 좋은 계획과 의도를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재커라이어스는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전문적인 도움까지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최상의 계획도 항상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좋은 계획과 더불어 동시에 그 선한 의도를 회피할 숨은 동기를 함께 갖고 있기 마련이다. 보안 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한 사람은 모든 허점을 알고 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 국제사역본부(RZIM) 내부에서 누가 언제, 무엇을 알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초기 보고서에는 빈틈이 많다. 앞으로 더 많은 지도자들이 진실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가진 인간 본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를 불신하고 사역 기관의 이름을 보호하려는 모든 세상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수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면서 또 고위직에 주로 가족을 등용하는 사역 기관의 끝이 좋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재커라이어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의 재정적 지원을 원하는 많은 사역 단체의 일반적인 형태가 가족 운영이다. 상속 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있다. 돈과 가족이 결합한 경우 그 결과는 고통과 신뢰의 상실이다. 오직 한 길만이 있다라비 재커라이어스는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취약하고 노출된 여성의 믿음을 배반함으로써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괴로워하며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는 이 끔찍한 악을 한탄한다. 우리는 불의가 파괴한 것을 다시 고치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한다. 오직 한 길, 우리의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 길만이 가능하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지도자들이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성적인 목적으로 또는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 타인을 착취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 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약한 자들을 돌볼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심령이 짓눌린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시 34:18).과거 또는 현재 성적 학대를 받은 사람들은 확신해야 한다. 언젠가 정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원제: Ravi Zacharias and the Judgment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라비재커라이어스
성적학대
하나님의정의
디지털혁명
신뢰의배반
목회자
성범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방법
by Terry Glaspey
2021-02-22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과거에는 비싼 카메라가 필요했다. 그리고 초점을 맞추는 방법도 알아야 했고 현상을 하려면 암실도 있어야 했다. 사진은 까다롭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그러나 스마트폰으로 이 모든 게 바뀌었다.이제 모든 사람이 거의 모든 것을 사진 찍는 세상이 왔다. 눈에 띄는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찍어서 보관하고 또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많이 찍게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진은 느리고 신중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눈앞에 있는 사물에 집중하며 모든 신경을 다 쏟아야 한다. 물체, 사람을 둘러싼 빛, 사진을 구성하는 방법, 접근 각도, 그리고 색상이 배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한마디로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함을 의미하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오늘날처럼 빠르고 과도한 자극이 넘치는 디지털 시대에 영적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훈련인 집중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예술은 우리가 이 중요한 능력을 회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집중은 경건의 시작이다스스로를 “관조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더크 데브리(Dirk DeVries)는 이렇게 썼다.사진은 명상과 성찰의 수단, 기도의 방법, 상상력을 여는 열쇠, 그리고 고요함과 깊이 및 의미로 통하는 문을 제공한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관조 사진은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게 하며, 인식을 높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도록 도와준다. 사진은 명상 뿐 아니라 영적 훈련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뭔가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 대신 과정과 열림 그리고 현재 속에 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언제라도 새롭게 되어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가능하다.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산책하다 중간중간 멈춰서서 흥미로운 질감, 화려한 색상, 신기한 형태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다.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노력하라. 낙엽의 복잡함, 나무 껍질의 문양, 그리고 야생화의 다채로운 색의 향연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는 사진 찍을 게 없네”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자세히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 없이도 얼마든지 이런 관조적 활동을 추구할 수 있다. 당신의 눈은 카메라 렌즈와 똑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속도를 늦추고 집중해서 사물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바로 그 원칙을 육안으로 사물을 볼 때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다. 작업이 끝났을 때 자랑할 사진을 갖는 게 핵심이 아니라 사진작가처럼 자세히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훈련하는 게 핵심이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라. 당신도 그 사물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마치 실사 사진 같은 시를 쓰는 메리 올리버(Mary Oliver)는 “집중은 경건의 시작이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단지 사진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인식하고 또 진정으로 존재하도록 가르침을 준다.예술은 현재를 살도록 돕는다우리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을 누리지 못한다. 예술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지금 이 순간 속에 대충이 아니라 온전히 거하도록 말이다.영적인 글을 쓰는 장 피에르 드 코사드(Jean-Pierre de Caussade)에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삶은 다름 아닌 진정한 현존(the Presence)의 의미다. 그는 이러한 인식의 태도를 '현재 순간의 성찬'이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경험을 통해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때, 매 순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삶에서 만나는 가장 작은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음성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잠재적 마이크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것에 대해 쓴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라는 수도사가 있었다. 그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고 매 순간 삶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 부엌에서 겸손하게 일하면서 냄비와 프라이팬, 접시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웠다. (아마도 그는 설거지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꿀지도 모르겠다...)이 위대한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영적 체험을 위해 어떤 압도적인 경험을 추구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평범하고 사소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어떻게 깨어있을 것인가우리는 집중해야 한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이렇게 썼다.우리가 무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수는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신분을 감추고(incognito) 이 세상 모든 곳을 걷고 계신다. 아무리 신분을 감추었다고는 해도 하나님을 알아보는 게 반드시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억하고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그것은 깨어나는 것이다. 또한 계속 깨어있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와 위대한 영적 작가는 다 한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우리로 하여금 깨어있도록 하는 것 말이다.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내면의 혼돈을 진정시킬 수 있다.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을 제쳐두고 단지 존재하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자. 그리고 사물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자. 낡은 부츠, 단순한 흰색 그릇, 빗방울이 어린 잎, 일출, 새들의 노래 등등.예술은 우리가 집중하도록 도움을 준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음악이나 시를 듣거나, 소설의 문학적인 표현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나를 느리게 만들고, 불안한 생각을 잠재우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새롭게 엿볼 수 있도록 한다. 실로 평범함 속에 숨은 경이로움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 평범한 것은 없으니까.* 이 아티클은 작가가 자신의 책 ‘Discovering God through the Arts: How Every Christians Can Grow Closer to God by Appreciating Beauty & Creativity' (2021)에서 요약한 것이다.원제: In a Distracted Age, Art Helps Us Pay Atten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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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덩이에서 나를 건져 준 말씀의 밧줄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1-02-21
언젠가 절망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능력을 발견한 적이 있다.첫 번째 남편이 나를 버렸을 때였다. 당시 나는 깊은 구렁에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회오리바람에 붙들려 이전에 누리던 행복하고 안전한 생활로부터 번쩍 들리더니 이내 캄캄한 우물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며칠 간 홀로 있었다. 다시 걸어갈 여력이 있는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나 있는지 고민했다. 거기에는 빛이 없었다. 앞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살 수 있으리라곤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용기를 감히 내지 못했다.그렇게 회오리바람이 내 인생에 몰아치기 전, 나는 시편 119편을 읽고 있었다. 그 고백을 음미하며 내용이 좀 길고 지루하며 짜증스럽게 반복되는 구절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자, 나의 태도는 더욱 비관적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그 구절들이 행복한 시절에만 그럴 듯하게 적용되지 평범한 시절에는 속이 텅 빈 약속일 뿐이라고, 아니 불행한 시절에는 잔인한 조소를 들려주기나 하는 속삭임이라고 여겼다. 그전부터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전심으로 그 말씀을 따랐건만 결국에는 부끄러움만 얻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했다(시 119:2, 6).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진짜일지, 내 인생의 모든 게 나를 실망시켰듯 그 약속도 결국에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게 아닐지 의심하게 되었다.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그렇다고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소망의 빛을 보기 원하는 심정으로 시편 119편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빛을 찾게 되었다.곧 안식을 찾아 헤매며 흐느끼다가 다음 구절을 읽게 된 것이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불현듯 이 구절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그 구절을 붙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나에게 생명을 달라고 간구했다. 내 힘으로는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나를 살게 할 수 있을지 미심쩍게 여겼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때부터 시편 119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유익을 주는지 나열해 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대충 넘어갔던 미묘한 의미를 담은 약속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약속들을 붙들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를 가르치고 위로하며 인도하신다는 확신이 생겨났다. 그때부터 나는 시편을 읽기만 하기보다 본문을 연구하고 밑줄을 그으며 거기에 기록된 고백을 묵상하고 각 단락을 암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낮에는 하나님 앞에서 반복해서 읊조리고 밤에는 깨어서 시편으로 기도를 올렸다.내게 필요한 그 말씀결국 시편 119편은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아침마다 나는 말씀을 읽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또 나의 슬픔을 대신 표현할 말씀을 찾다가 시편 기자의 이 질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중략]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시 119:82, 84).하나님은 그런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 내게 지혜를 주고(시 119:66), 내 길에 빛이 되어 갈 길을 지시한다는 확신을 주셨다(시 119:105). 실제로 그 말씀은 내게 소망을 주고(시 119:49), 고난 중에 위로를 주었다(시 119:50). 또한 나를 세워 주고(시 119:28), 내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을 일으켜 슬픔을 몰아내었다(시 119:111, 165). 그래서 나는 그분의 견고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시 119:76).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나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지 못했다면, 나는 절망감을 벗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성실하심으로 나를 괴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시 119:75), 그분이 나의 고통 중에 선을 이루시리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변함없는 유일한 진리이후로 하나님은 날마다 나의 필요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마음을 이끄셨다. 물론 그전부터 이 말씀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이 유배지에 있던 백성, 다시 말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느끼며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경험한 실망이 내가 느끼는 실망을 대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이전에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분명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사 30:21). 그때는 이사야 30장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그처럼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기 전에 그 백성이 환난과 고생을 겪고 있었다는 사실은 파악하지 못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0-21).또 한 번은 절망 가운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다가 이 말씀을 읽기도 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나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눈을 뜨고 성경을 읽었다. 그러자 진정으로 내게 필요한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게 되었다. 그래서 그날 하루에 필요한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찾고 또 찾았다. 마치 지치지 않고 매달리는 과부처럼, 또 진주를 찾아 헤매는 상인처럼 말이다.이후로는 기대감을 안고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만나 주셨다. 또한 나를 가르치고 위로해 주셨다. 그렇게 그분의 말씀만이 한결같이 기댈 수 있는 변함없는 반석이 되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바람에 이는 모래 같다 여겨질 때 나는 그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절망의 구덩이에서 나를 건져 준 밧줄이와 같이 나는 매일을 생존하는 데 필요한 교훈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내가 배운 교훈을 든든하게 받쳐 주는 반석과 같은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한 진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보여 주는 큰 그림이 되어 주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매일매일의 필요를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바로 그분이 주신 말씀에서 하루에 한 가닥씩 뽑아 낸 실이 마침내는 서로 연결되고 엉기어서 튼튼한 밧줄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밧줄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밧줄을 통해 시련과 역경 끝에는 영광스러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음도 확신하게 되었다.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다. 정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라면,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허락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이다(롬 8:28-32).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더 귀히 여겨졌다. 그리고 심히 어두운 시절을 만난 나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예레미야가 역경 가운데 슬퍼하면서도 이렇게 증언했듯이 말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렘 15:16). 이처럼 우리가 고난당할 때조차, 아니 고난당할 때야말로, 그분의 변함없는 말씀은 우리를 세우고 이끌어서 마침내는 영원한 안위를 누리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사 40:8).원제: My Rope Out of the Pit: The Word I Needed in My Worst Day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영성
묵상과기도
시편
말씀
경건
시간
안식
절망감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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