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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위기에 있는 찬송가 살리기
by Leland Ryken
2020-03-09
우리는 특정 생물이 계속해서 멸종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루에 약 200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하니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멸종이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찬송가를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일어나기도 하고, 순식간에 벌어질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많은 교회에서 찬송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찬송가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찬송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편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은 혁명적인 게 아니다. 경건 묵상을 위한 찬송가 선집(anthology of hymns)을 위해 조사하는 중 ‘찬송가: 독서의 역사’(The Hymnal: A Reading History)라는 책을 만났다(이 책에 관해 내가 TGC에 쓴 리뷰를 읽어보라). 이 책에 의하면 1870년대까지 전통적인 찬송집은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세로 13센티에 가로 8센티로 된 시 모음집이었다. 거기에는 악보가 없다.이런 찬송시 모음집은 주일날 예배시간에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일 삶 속에서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다. 찬송가 속의 시는 개인 또는 가족 경건의 시간에 사용되었다. 교인들은 사무실, 학교, 들판 그리고 시장으로 갈 때도 항상 들고 다녔다. 찬송시 모음집은 아이들의 교육, 특히 글을 읽도록 가르치는 데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찬송시를 외웠고, 또 선물로 찬송시 모음집을 받기도 했다. 부모는 가족의 추억을 거기에 기록했고, 그 속에 열차표에서 사업상 편지까지 끼워두고 보관했다. 전통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든지 아니면 전통 찬송가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교회든지 찬송가의 가사를 읽고, 그것을 시로 묵상하는 것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찬송은 시다찬송가는 노래로 불리기 전에 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작사가가 노래로 불릴 것을 고려해서 썼다고 해도 그들은 찬송가를 먼저 시로 만들었다. 찬송가를 오직 노래의 가사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찬송가가 가진 시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몇 가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한 가지 한계는 이것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시선을 가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노래하면서 가사 속에 숨은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뉘앙스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찬송시를 부를 때 생기는 또 하나의 한계는 다음 절의 가사가 앞 절의 가사 바로 아래, 그리고 같은 흐름의 멜로디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음 절의 시작은 앞 절의 시작과 동일하다. 그 결과 절마다 같은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가사에 담긴 의미,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의미의 선형적 전개(linear unfolding of the text)는 크게 손상되고, 같은 구역만 반복적으로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게 된다. 애초에 찬송가 가사는 반복되는 사이클이 아니라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선형적 전개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찬송가를 시로 경험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제 접근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찬송을 시로 읽기일반적인 시를 읽을 때 쓰는 방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시인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서 시를 쓴다. 약 50년 전 내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Language That Poets Use)라는 책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시인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를 시적 관용구(poetic idiom)라고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시인들은 은유와 직유라고 부르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이런 시적 관용구는 읽는 사람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첫 번째로 빨리 읽는 게 정상인 우리의 삶에서, 또한 교회에서 멈추지 않는 음악을 계속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천천히 읽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읽게 될 때 시 속에 숨은 이미지와 형체를 찾아내어 펼치게 되고, A가 B와 같다고 말하는 시의 은유와 직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어와 구절이 주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 잠시 멈추는 것이다. 시인의 시적 능력이 만든 효과를 누리고 감상하는 것이다. 시가 가진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시인의 사고가 선형적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찬송가 선집에서 찬송시를 설명할 때 말했듯이 위대한 찬송가 속에 들어있는 순차적 전개(sequential progression)가 중요하다. 찬송가를 모든 시가 다 나올 수 있도록 절에 따라 순차적으로 프린트해 보라. 찬송시가 이런 식으로 프린트된 것으로 알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위대한 찬송시의 작사가가 절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실었는가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절은 전체 흐름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각각의 절마다 그 자체의 이미지와 단어 패턴이 있었다. 각각의 절을 하나의 독립된 작은 세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다음 절이 앞선 절 속의 사고 또는 느낌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때까지 전개된 각각의 절의 일관성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 한눈에 각각의 절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 시가 말하고자 하는 통일된 주제를 제대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시의 세 번째 요소는 장르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찬송가를 하나의 장르, 즉 “찬양”이라는 한 장르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찬송시 모음을 우리가 영국 문학 모음집처럼 접근할 때 여러 가지 사실들이 드러난다. 우리는 먼저 문학과 성경 장르라는 익숙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찬송가 속 다양한 장르가 발견된다. 개인의 체험을 담은 시, 승리의 노래를 담은 시, 대관시, 자신을 고백하는 시, 특정 상황의 시(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일을 당했을 때 지은 시) 그리고 그리스도 찬양시 이다.찬송시를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시의 카테고리 속에 놓고 볼 때, 우리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태라는 시적 질감(poetic texture)의 측면에서 유익을 얻는다. 특별히 중요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가 익숙한 찬양은 정말로 많은 경우 성경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찬송시를 설명할 때 “성경적 참조의 모자이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찬송시를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경우에만 우리는 비로소 시인들이 성경적 암시라는 네트워크를 얼마나 신중하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찬송시의 유익위대한 찬송가의 멸종이라는 위기를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로 간주하고 읽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독교 문화(기독교 문학 작품과 그 외에도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형태)의 중요한 요소인 찬송가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경건을 위한 시라는 측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향해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새로운 발견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문학과 경건의 승리라는 보석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여태 아무도 몰랐던 찬송가를 알게 된 것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 발견한 이 보물을 우리 개인과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경건에 도움을 주는 찬송시를 교회 게시판과 웹 사이트에 올릴 수 있다. 목회자와 성경공부 리더는 설교와 연구에 포함 시킬 수 있다. 더 이상 부르지 않기 때문에 찬송가를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회중들이 내가 제안한 이런 형태로 찬송가를 들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찬송가를 부르자고 먼저 요청할지도 모른다. 이런 공동체적인 찬송가 사용은 얼마든지 개인적인 사용으로 더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시리얼 제품의 TV 광고가 생각난다. “먹어보세요. 당신은 좋아하게 될 겁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가 제안한 것을 한번 해 보라고. 그렇게만 하면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것을 장담한다고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Hymns Be Saved from Extinction?번역: 무제
영성
예배
송시
찬송가
멸종
경건
장르
이 때, 참된 영적 기도가 절실한 때
by 이승구
2020-03-08
이 어려운 때, 기도할만한 때에 열심히 기도에 힘쓰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기독교적 기도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말씀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적인 교제이다. 이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도록 하자.1. 구속받은 사람들의 기도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건을 통해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해서 감사하고, 그 감사의 최고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사람들만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라고 말할 수 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약속하셨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구속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들의 구속자에게 감사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그저 참된 기도와 유사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 유사한 기도로 보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이미 마음속에 역사하여 이루어지는 진짜 기도일 수도 있다. 그것은 후에 자신들이 참으로 믿게 되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미 역사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참된 기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는 기도와 모든 이교적 기도는 다 참된 기도의 유사물로 인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참으로 기도에 힘써야 한다).2.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참된 기도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제대로 반응하면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대상이 오직 성부, 성자, 성령 – 삼위로 계시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진정으로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그러므로 성자에게는 기도할 수 없다는 아리우스주의가 이단이라고 교회는 선언했었고, 성부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자께도 기도하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께도 기도하는 것이니 - 성부, 성자, 성령 각 위에게 성경에서 돌려진 일을 언급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고 -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성부에게만 기도하고 예배하는 유니테리안(unitarian)은 이단이다).따라서 그저 말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성경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배워 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도 기도의 성숙의 한 측면이다. 점점 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 가는 것이다.3. 구속 사건에 근거한 기도우리가 무엇을 주께 구하는데 주께서 그것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 행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느냐, 얼마나 고난 받으며 기도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구속받은 사람들인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참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부지런히, 힘써서, 열정적으로(fervently),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도하는 시간, 열정, 헌신에 의존하지 않는다).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고, 성립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속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롬 4:25). 그러므로 이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우리의 예배도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고, 찬양도 받으시고, 기도도 받으시는 것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다(벧전 1:18-19). 우리의 대속자이신(마 20:28//막 10:45; 딤전 2: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기에(갈 1:4) 대속함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가 중생하였다(벧전 1:3).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리(代理) 구속(救贖)”, 즉 대속(代贖)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히 9:14). 그러므로 구속받지 못한 자가 아무리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주께 상달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의 간구만이 주께 상달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구속만이 우리의 기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이다.4.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인 기도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에 있는 인간인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전 5:2)과 날마다 영적인 교제를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런 실재를 표현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했다. 우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 14:16). 또한 성자께서도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실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날에는 ...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했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했으니, 이것을 참으로 믿어야 한다. 성부께서도 그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한다고 했다(요 14:23). 그러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비한 교제를 표현한다.우리 존재에 구현된 이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기도이다. 먼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생각을 주께 아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바와 이 세상의 모든 정황, 특히 우리의 모든 정황을 우리가 생각한 대로 아뢴다. 그런데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구속함을 입은 사람이면 그저 자기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주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아뢴 말들을 점점 받게 된다. 주께 아뢰다가도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각과 표현을 교정해서 아뢰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다.기도가 참된 것이라면 (1) 하루 종일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식이 점증해 가면서, 동시에 (2) 일정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특히 이와 같은 때에 더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혹 금식하면서 기도하게 된다.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지를 드러내는 기본적인 시금석이다. 이것을 외적인 시금석(outer criterion)이라고 해보자.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참된 교제인지를 드러내는 몇 가지 내적인 시금석들(inner criteria)이 있다.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하고, 그 가르침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기도의 내용까지도 교정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까워진다면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은 있고, 열심히 기도한다고는 하는데 점점 더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수 1:8; 시 19:14).둘째로, 그 결과 우리가 점점 더 명확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cil of God)를 깨닫는 데 나아가게 된다. 기독교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광대한 사상을 형성하는 데 나아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서울: SFC, 2018], 특히 제 3장을 보라).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세상 속에서 진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회적 제자도를 실천하며, 바른 실천(orto-praxis)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바른 실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묵상과 기도 생각과 실천』 (서울: 나눔과 실천, 2015)이라는 책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다.셋째로,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잘 표현하는 데 나아가게 되어 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여 점점 더 성화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그의 인격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하여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으니,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형상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의 형상이니,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면 하나님의 참 형상이 잘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 우리가 제대로 된 하나님 형상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시금석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자. 그리하여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이 어려운 시기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의 선상 기도회와 같은 어리석은 기도를 반복하지 아니하려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가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참 하나님 백성들이 여기 제시한 시금석을 잘 드러내는 참 하나님 백성의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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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은 이해 못하는 십자가 의미
by Matt Bennett
2020-03-07
지난 1,400년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화 주제는 “예수가 정말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었다. 코란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반면(수라 알-니사 [4]:157),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을 복음과 직접 연결한다(고전 15:3-5).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이야기한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중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었을 때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라는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구약의 레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구약의 제물에 관한 제도를 알지 못하면, 무슬림 친구들은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부분에서 오해하게 될지도 모른다.1. 속죄의 의미첫 번째 오해는 언어에서 온다. 코란은 “카파라”(Kaffāra)라는 단어를 사용해 죄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이 단어는 아랍 성경에도 “속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키퍼”(유대교의 대속죄일, 욤 키푸르가 여기서 나옴)를 번역했다. 성경에서 속죄가 포함하는 것은 대표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대체 제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생명을 상징하는 피이다. 속죄의 결과는 죄에 대한 용서와 불결함의 정화이다.코란에서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 속죄의 대리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함, 선행, 혹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뉘우침을 보고 죄를 덮거나 없앤다. 이슬람에는 용서를 받거나 정결해지기 위한 제사장,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없다. “카파라”라는 단어는 이슬람의 코란과 기독교의 성경 모두에 쓰였지만, 그 뜻은 매우 다르다.2. 제사의 목적코란에도 제사가 등장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무슬림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한 것(수라 알-사파 [37]:99-111)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기 위한 하나의 행사로 생각하지만, 코란은 이 제사를 각 신앙의 공동체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린 의식으로 보고 있다(수라 알-하지 [22]:34-67). 그렇다면 이슬람에게 있어 매년의 희생 의식은 유대교와 기독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과도 같다. 이 주장은 코란의 한 부분(수라 알-임란 [3]:67)에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닌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희생 제사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이슬람 전통에 속하는 무슬림으로 확인하고, 이슬람교 신앙을 종교의 최종적인 은혜 베풂으로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3.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속죄와 제사가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무슬림에게 설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려움의 가장 큰 이유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속죄와 제사가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코란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인지, 그의 지도를 따를 것인지, 그의 방식을 기억할 것인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삶을 제시한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초연하고 냉담하다. 코란은 자신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악행의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그들이 한 행동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것이다. 무슬림에게는 1세기의 어느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속죄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세 가지 장벽은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의 속죄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세 가지 문제, 즉 속죄와 희생, 그리고 양쪽 모두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다.하나님은 한 민족을 부르시고 이끄시며, 그 사이에서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 레위기(특히 16-17장)는 거룩하고, 정결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 많고 불순하며 의롭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만든 계명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레위기의 가르침에 익숙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레위기의 대제사장, 그리고 그 이전의 제사와 다른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여긴다.이 세 가지에 비추어 볼 때, 히브리서는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장직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히브리서는 성육신 훨씬 이전부터 그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슬림 친구를 초대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의미와 용서, 그리고 정화를 담은 제사의 목적을 보여줄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신학적인 부분에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속죄를 정의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성경적 제사가 올바르게 자리 잡기를 기도한다. 성령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면서 말이다. 그 구원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감사와 기쁨을 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Help Muslims Understand the Cross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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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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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히브리서
코란
카파라
복음
십자가
성경의 권위가 살아있는 교회
by Reuben Hunter
2020-03-06
더미(Dummies)를 위한 책들은 엄청난 성공을 했다.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프랑스 와인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을 위해 복잡한 내용을 쉽게 엮은 책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이러한 책이 성공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쉽고, 단순한 방식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에도 “더미를 위한” 안내서가 많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기독교 출판사들이 “성공적인 교회 개척을 위한 쉬운 5가지 단계”라는 책을 출판했다.우리는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러한 책은 유용하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들은 성경적 가르침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개척하기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 개척은 성경에 따라 설립되어야만 한다.교회를 개척할 때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사역의 모든 측면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말씀 중심 사역바울의 사역을 간단히 살펴보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다음과 같다.“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2:2).“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2:4).“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2:9).“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2:13).바울의 사역은 하나님 말씀이 가장 우선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이 중심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성화의 자리로 이끄신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역의 지휘봉을 넘겨줄 때 복음 선포를 우선시하라고 촉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우선성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조직에서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없다면 다른 기능적인 것을 우선시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선한 일이고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말씀보다 앞선다면 심각하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성경 말씀을 개척하는 교회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분명한 규칙을 세우고,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며, 믿음을 키워야 한다.1. 규칙 세우기교회를 새로 시작할 때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해야 한다. 모금하기, 사람들과 만나기, 홈페이지 만들기, 주보 만들기, 주일학교 커리큘럼 만들기, 예배 후 다과 제공하기, 그리고 교회 위치 홍보하기 등 끝이 없다.이 모든 것이 중요 하겠지만 체크리스트의 가장 우선순위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시하는 것은 다른 일들에 “NO”라고 말하는 훈련이 포함된다.2. 겸손교회 개척을 할 때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드러나게 하거나 멋진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연구에 마음을 두고 매주 성경 가르치기에 몰두한다면 당신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화려한 것이 아니다. 칭찬받고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을 우리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개척을 위해 많은 활동과 노력은 좋은 것이지만 겸손이 필요하다.3. 믿음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스스로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과 같이 생명을 살리고, 성화시키는 말씀 사역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지역에서 특히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당신 사역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당신의 이웃과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원하고 있는가? 말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마이크 맥킨리(Mike McKinley)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 말씀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라.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그리고 공적 예배를 시작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계속 설교하라끝으로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복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일부 사람들은 지루하고 힘들게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설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딤후 4:2)고 했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것을 실천해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여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는 메시지를 겸손히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 뜻을 깨닫게 하신다.모든 교회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ive the Bible Functional Authority in Your Church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말씀중심사역
설교
성령사역
성경의권위
제자
Dummies
빚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
by Paul Tripp
2020-03-05
수많은 사람이 심각한 빚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 빚 해결과 재정적 독립으로 가는 길이 급여 인상과 예산 수립, 그리고 투자라고 믿는다. 돈의 흐름을 아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예산 수립으로 실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돈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시작점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축구공 던지는 것은 가르치면서 축구 경기의 기본규칙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빚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빚 문제도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하여 빚을 지는 행동과 소비 패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비추어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 빚, 재정 운용 등의 이해와 실천 방식이 교정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돈의 소유권 포기빚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일은 돈의 교육과 예산 수립, 정보 제공 등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소유권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삶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돈을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재난과 같은 돈 사용 습관을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설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할 임무를 받았다. 돈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내거나 일련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의 개인적 행복을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돈을 만든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빚은 없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할 수 없다.우리 대부분은 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 문제는 우리가 돈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서 야기되므로 우리는 괜찮지 않다. 돈을 다루는 건강한 생각은 돈을 창조하신 이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자족하는 소비빚은 근본적으로 과다지출의 문제가 아니다. 자족의 문제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돈에 대한 사랑은 돈보다 더 큰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바울은 돈의 문제를 자족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돈과 관련된 문제의 뿌리는 거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진정으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 우리는 이기적 욕망을 따르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오해하지 말라. 가족을 위해서 혹은 자녀를 잘 먹이기 위해서 사용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휴식을 위해 좋은 곳에서 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 당신이 돈을 소비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욕심이 이를 주도하고 있는지 말이다.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자족하게 된다. 자족하면, 소비를 통해 만족해하는 습관을 버리고, 과다지출로 발생하는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개인을 위한 과다지출은 결코 행복을 지속시키지 않는다. 빚을 늘리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스트레스를 초래할 뿐이다.복음적 소망 빚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특별히 사려고 하는 것이 없음에도 내 마음은 뭔가를 찾는다. 내가 필요치 않은 것에 여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필요하지 않은 지출을 정당하게 포장하는 것에 능숙하다. 여전히 내가 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돈 지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달리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시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지배하는 자가 굴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빚을 딛고 올라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 선하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력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은혜만이 재정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빚이 아무리 산더미 같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크지는 않다. 돈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심오하지는 않다.우리가 돈 문제에 당면하면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를 탓하며 우리의 불안을 풀어낼 필요가 없고, 소망을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소망으로 돈 문제를 대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여 변화시키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ebt Is Not a Money Problem번역: 정은심
세계관
빚진자
소유권
디모데
신용카드
돈과은혜
로마서 8장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by Justin Dillehay
2020-03-04
강대상에 서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십니다. 단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한 번씩 웃음을 삼키곤 한다. “만약에 스물두 살이던 내가 지금 앞에 앉아서 현재의 내가 전하는 이 메시지를 들으면 뭐라고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과거에 나는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자유의지 침례교(Free Will Baptist)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알미니안으로 자랐다. 십 대 때 리로이 폴라인(F. Leroy Forlines), 매튜 핀슨(J. Matthew Pinson)의 신학뿐 아니라, 좀 더 오래된 제임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와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신학에 심취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구원에 있어서 은혜는 꼭 필요하지만, 그 은혜가 반드시 불가항력적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버릴 수도 있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다.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함, 미리 결정되지 않은 자유함이 필요하다. 폴라인을 인용하자면 “영향을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관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방식이었지, 결코 칼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원인과 효과(effect)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이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우리의 인간 됨(personhood)을 존중한다. 하나님은 이 방식을 고수한다. 그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과 원인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차이는 바로 다음 한 단어, 보장(guarantee)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폴라인은 그의 책 ‘진리를 위한 추구’(The Quest for Truth)에서 이렇게 설명했다.칼빈주의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상당 부분 영향과 반응이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과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라도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원인과 효과를 다루는 것이다. 그 보장이 사라지면 칼빈주의도 사라진다.그의 말은 맞다. 그때는 그에게 동의했다. 지금도 그에게 동의한다. 단지 나는 편을 바꿨을 뿐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짧게 말하면,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거꾸로 되짚어 보았다. 열정적인 설교자, 문제의 구절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는 종종 “구원의 황금사슬”이라고 묘사된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예지, 예정, 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라는 다섯 가지 “고리” 때문이다. 알미니안으로서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문제가 많은 구절로 보았다. 특히 29절은 예지 된 믿음에 근거한 선택(election-based-on-foreseen-faith)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주석가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 해석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절은 그냥 문제가 많은 예외적인 구절로 치부했다. 사실 그 어떤 신학 이론도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거 아니던가? 그러다가 나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로마서 설교를 듣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2004년,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때까지 어디서도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파이퍼의 흠잡을 데 없는 주해는 그동안 그 구절에 대한 내 해석의 약점을 알게 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설교 때문에 확실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설교로 인해서 최소한 내가 갖고 있던 자신감은 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나는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바울의 황금 사슬은 상당 부분 보장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슬은 떨어질 수 없는가?한번 29절에서 30절까지 펼쳐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 위에서 아래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라. 그리고 이탤릭으로 된 단어와 그 단어 위에 있는 알파벳에 주의를 기울이라)"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A)을….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B)…. 또 미리 정하신(B)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C) 부르신(C)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D)의롭다 하신(D)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E) 하셨느니라"알미니안으로서 조셉 벤슨(Joseph Benson)과 같은 성경주석가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동의했다. “사도는 지금 부름을 받아 의롭게 되고, 그래서 영화롭게 된 사람의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연구하면 할수록, 바울은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는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슬을 하나씩 살펴보자. (정확하게 하려고 나는 다섯 가지에 각각 알파벳을 붙였다.)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행한 어떤 특정한 그룹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에게 추가로 한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또한….미리 정하셨으니”). 각각의 연결에 등장하는 “또한”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이 바로 그가 미리 정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B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각각의 사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이제 각각의 구절 사이에 중복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두 번째로 사용된 동사가 다음 구절에서는 첫 번째 동사로 사용된다. 바로 이런 동사의 쓰임이 이 다섯 구절을 하나의 사슬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결국 벤슨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분명하게 똑같은 숫자의 사람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을 하나님은 예정하고 예지하며, 또 부르시고 의롭게 만들어 영화롭게 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 = B = C = D = E.알미니안으로서 나는 이 다섯 가지 단계는 단지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신앙 여정 정도로 이해했다. A그룹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E 그룹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고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과녁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 있는 만점짜리 동그라미(bullseye)를 향해 갈수록 동그라미가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를 자세히 연구할수록 이런 내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부름을 받은 모두가 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결국 그 부르심은 믿음을 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화보다 앞서기 때문이다(롬 5:1). 의롭다 함을 받은 모두가 다 영광스럽게 된다면 의롭다 함은 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외롭다고 하신 그 선언을 번복하지 않으신다.이런 사실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로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파이퍼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파이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를 알게 했다.황금 고리의 보장바울은 왜 이 고리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28절에 나온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여기서 바울은 단지 어떤 사실 주장(factual claim)을 하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는 지식 주장(knowledge claim)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바로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데?”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 황금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29절은 “그렇기에”(for)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28절의 내용을 입증하는 논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역자 주: 우리말 성경에는 for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즉 29절부터 시작하는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전에 너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입었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사슬 안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폴라인도 맞았다. 알미니안의 주장, 즉 영향을 주고 반응하는 형태 속에는 결코 보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이 전하려는 애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장은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사슬 속 어디가 되었든지 믿는 자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선을 이룰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결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롭다 함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슬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설교 또는 믿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족을 만드는 이 일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단지 영향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리 정하신다. 그렇기에 부름을 받은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롬 8:29).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결과는 확실하다. 형제들이여,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Romans 8 Made Me a Calvinist번역: 무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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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8장
황금사슬
존파이퍼
칼빈주의자
알미니안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by 김은득
2020-03-0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손봉호, 강영안, 류호준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이들은 모두 제가 설립한 화란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에서 공부한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Kuyperian)입니다. 한국 이외에 저의 모국인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캐나다,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돌아보니 거의 반세기(1870-1920) 동안 네덜란드 정치와 문화 영역의 중심에 서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저는 목회자/신학자로서 출발했지만, 세상의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정치인으로서 정통 칼빈주의적 색채를 띠는 민중들(Calvinist Common Folk)을 정치적·문화적 소외로부터 해방하고, 억눌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최초의 현대식 정당을 세웠습니다. 40년을 이끈 정당은 몇 번이나 집권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가 총리까지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 제임스 브랫(James D. Bratt)은 인류 역사상 침묵과 압제를 당하는 비주류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성공적으로 각성시킨 사례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과 저의 정치적 활동을 제시합니다(James D. Bratt, “Abraham Kuyper’s Public Career,” Reformed Journal 37, 10: 9-12.). 비주류의 해방과 각성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무엇보다 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공적 영역에 참여하면서도 종교가 다른 사람이나 비(혹은 반)종교적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도 충분히 인정하도록 한 점입니다.이런 노력은 현대 네덜란드에서 이념적 기초에 따라 분류하여(verzuiling, pillarization) 정치사회를 구성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하게 분열된 정치 구조 속에서도 국가 전체의 공공선(the common good)을 위해서라면 정파간에 상생과 타협을 이루었습니다. - Arend Lijphart, The Politics of Accommodation: Pluralism and Democracy in the Netherlands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이 책은 카이퍼가 구축한 현대 네덜란드의 범주화된 정치사회 구성이 적어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 부분은 아마도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면서도 타자와 공생하고,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정치적 영역의 성공이 아이러니하게도 저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198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제 경우를 보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생겨난 오해들이 상당합니다.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보수적 기독교 단체를 창설해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운동을 일으켰던 제리 팔웰(Jerry Falwell) 목사는 1980년 대통령 선거 때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on)을 지지하면서 정치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레이건의 당선에 이바지하면서 팔웰 목사와 제가 한 공적 활동의 유사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유사성은 첫째, 저와 팔웰 목사 둘 다 지역교회 목사로 시작했지만, 국가 전체를 성경적 가치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에 참여했습니다. 둘째, 개인의 경건을 최우선시하고 공적 영성에 무관심한 복음(개혁)주의자들을 각성시켜 동시대의 세속적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항하도록 했습니다. 셋째, 국가 전체를 개조하기 위해 기독교 교육 운동을 전개하고, 풀뿌리 정치적 네트워킹, 기독교 대학(팔웰의 경우 Liberty University)을 설립하는 등 동일한 스텝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1988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직접 참여한 팻 로버슨(Pat Roberson) 목사 역시 저와 동일한 스텝을 밟았습니다. 그와의 유사성은 첫째, 시대와 문화에 뒤떨어졌다고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공론장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었던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그런 목소리를 위해 신문(일간De Standaard, 주간De Heraut [The Herald])을 활용했다면, 로버슨 목사는 텔레비전(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을 이용했습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대학교(로버슨의 경우 Regent University)를 세워 학문적 성과는 물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셋째, 기독교-민족주의적 비전(Christian-Historical Imagination)을 제시함으로 팔로워들이 정치사회적 활동, 특히 기독교적 가치에 합당한 법률 제정 활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John Bolt, “Abraham Kuyper,” The Routledge Companion to Modern Christian Thought, eds. Chad Meister & James Beilby (London: Routledge, 2013), 86-87.). 이런 의미에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정치신학의 한계와 가능성, 2014, 31).다원화된 네덜란드의 정치와는 달리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가로 전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이념에 기독교적 가치가 종속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적인 가치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선택한다고 해도, 매우 강력하게 이원화된 미국 정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최선이든 차선이든 편향된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팔웰 목사나 로버슨 목사 모두 공화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목회자들의 정치적 편향성 문제는 미국보다 한국 교회가 더욱 심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제가 참여한 정치를 그런 편향성의 일례로 치부할까 염려됩니다. 물론 저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런 편향성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다원화된 정치 영역에서 분명하게 소신을 지키면서도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했습니다. 저와 한국 목회자들의 정치참여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진보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메시야처럼 바라보며 정치를 종교화합니다. 반면 보수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이용하여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인에 대한 표적 설교를 하거나 정파 편향적인 발언으로 종교를 정치화합니다. 즉 한국에서 목회자가 정치 무대에 나서면 나설수록 본질을 잊고 복음이 아닌 어느 정파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 역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지역신문사에서는 저의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성향 때문에 민주당원으로 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그 표기를 빼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이런 정치적 편향성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와 문화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인정합니다. 기독교적 가치에 맞는 입법활동에 성공할 때마다 정치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미국 기독교의 세속화를 가속했습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드 드레허(Rod Dreher)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적 정치인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을 주창했습니다. 베네딕트 옵션은 입법활동이나 이슈 중심적인 정치참여에 주력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교회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대항적 문화 공동체로서 변화를 위한 교회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인격과 심성을 배양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규칙을 활용하고, 기독교 교육, 기독교 노동, 기독교 마을 등과 같은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크를 실질적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트 옵션: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 2017, IVP). 그런데 로드 드레허가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으로 제시하는 베네딕트 옵션을 저는 이미 실행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 저의 정치적 성공을 벤치마킹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 실질적으로 제가 조직한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킹 부분을 영혼 없이 따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정치적 승리를 쟁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결성한 기독교적 소셜 네트워킹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일종의 해방 운동의 성격이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처럼, 정치적 승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제가 대변하는 이들이 편견과 무시에서 벗어나 동등한 투표권, 공평한 수업 권리를 획득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1981년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에서 개최된 기념 강좌에서 저와 해방신학의 유사성까지 주장할 정도였습니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The Kuyper Lectures for 1981 Delivered at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Grand Rapids: Eerdmans, 1983).). 그리고 저의 공적 활동은 결코 개인적 경건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공격한 부분이 바로 경건과 사회참여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바라보는 루터주의(Lutheran)적 관점입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제가 얼마나 애타게 그리며 목말라 했는지 궁금하다면 미국 칼빈신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던 제임스 드 용(James De Jong)이 최근 번역한 제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Abraham Kuyper, Honey from the Rock: Daily Devotions from Young Kuyper, trans. James De Jong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8).).저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를 올바르게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세계를 변화시켰던 저의 공공신학이 한국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세속화의 위협 가운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세상만큼이나 악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심지어 세상이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공공성 회복이 미국 복음주의의 경우처럼 공적인 영역,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증가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한국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Kingship) 아래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ro Rege! (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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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by John Piper
2020-03-02
Podcasts_Ask Pastor John 특별 중계! 긴급 ‘코로나19’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팟캐스트 인터뷰를 아티클로 전합니다.[토니 랭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의 특집 녹음을 위해 존 파이퍼 목사님과 함께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현재 53개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습니다. 감염자는 세계적으로 8만3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망자 수는 거의 3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에 확산되던 현상에서 이제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져가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부통령에게 미국에서 이 바이러스를 멈추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또 많은 이들은 절망적으로 봅니다. 바이러스 전파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몇 달 동안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결국 많은 미국인들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거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여전히 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수출입과 국제 무역 중단으로 다우존스 지수는 이번 주에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헤드라인과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로 정보에 대한 신뢰를 잃고 두려움에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불확실성이 이제 미국에도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남부아시아에 사는 팟캐스트 경청자들로부터 현지의 최근 정보를 제공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싱가포르에 사는 한 남성이 이런 질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여러 나라를 감염시키는 양상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싱가포르에 들어왔을 때, 정부와 시민들은 이에 대처를 잘했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잘 대응하여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응은 엇갈렸습니다. 몇몇 교회는 예방 대책을 주지하면서 주일 예배를 지속해서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예배를 모두 중단했습니다. 몇몇 목회자들은 ‘믿으면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죄악 가득한 도시와 교만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사님, 크리스천들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존 파이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물은 질문에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해보려 합니다. 우선 답을 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의문을 품도록 잘못 말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비하도록 돕는 것과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제가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신학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현재 죽어가고 있으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그분들의 삶과 시간적으로 잘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교회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말할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이제 받은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해 봅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 임상적, 역사적 사실과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사실로 시작합시다. 2004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양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던 사람들도 예외없이 쓸려내려 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크리스천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이러한 일은 크리스천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성경적 사실을 봅시다. 마가복음 4장 41절은 “그(예수님)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그래서 이 두 사실-역사적 사실과 성경적 사실-을 함께 연결하면 이러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자연 재해를 멈출 수도 있었으나 2004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지혜롭고 옳으며 정의롭고 선한 것을 행하시므로, 그 치명적 재해 속에 지혜롭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이번 ‘코로나19’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지할 수도, 제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죄나 사탄, 질병이나 피해 그 어느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잃어본 적이 없으며, 원치 않는 일을 용인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님이 모든 죄악되고 사악한 차원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감독하고 제한하며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 그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입니다.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우리가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4가지 성경적 근거들이 여기 있습니다.1. 타락의 결과로 탄식하게 된 세상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인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창조된 만물들이 타락과 허무를 경험할 것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육체적 타락과 허무와 사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0-23절의 요점입니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다음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모든 창조물이 질병과 재해와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유를 물려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크리스천들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우리들도”라고 말합니다-타락과 허무와 질병과 재해와 죽음을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나누며 탄식할 것입니다. 탄식하며 (부활의 때에 일어 날)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다른 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타락한 현실이 정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정화시키기 위함이지 징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살전 5:9). 우리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처럼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처럼 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습니다(고전 15:55). 이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입니다.2. 은혜로서의 질병하나님은 때로 그분의 백성들을 정화시키고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질병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은혜 행위입니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을 근거로 합니다. 이 본문은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하는 점을 다루고 있지만, 그 원리는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크리스천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질병과 연약함과 죽음으로]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어린 아이와 같이]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이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합시다. 주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치유실 때(마 4:23; 8:17; 14:14)와 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때를 묘사하기 위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의 행보를 끊으시고 그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죽지만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전 11:32)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린도에 있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 몇 명을 그리 하실 수 있다면, 지금도 ‘코로나19’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에게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죄악된 행보에 대해서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죽음이 특정한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근거입니다. 3. 심판으로서의 질병하나님은 그분을 거절하고 스스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 때로 질병을 사용하십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스스로 높여 신이 되려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우리의 많은 통치자들이 매일 바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는 순전히 일반 은혜와 자비일 뿐입니다.또 다른 예는 동성애적 성교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것은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것이 세 번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실 수 있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4. 하나님의 천둥소리모든 자연 재해, 즉 홍수, 가뭄, 메뚜기 떼, 쓰나미 혹은 질병 등은 심판을 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천둥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영원한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 있든지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바르게 하라고 부르시는 촉구입니다. 이 근거는 누가복음 13장 1-5절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성전에서 예배자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옆에 서 있던 사람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그 이유를 듣기 원합니다. 제가 받은 질문처럼 말이죠. “좋아요. 예수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 좀 시켜주세요. 이 자연 재해와 그 잔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사람들은 그냥 그 옆에 서 있다가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5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이것이 이 순간 ‘코로나19’로 탄식하는 이 세상의 모든 개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 토니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 이에 대해 듣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천둥소리 메시지를 받고 있는 겁니다. (저는 중국 당국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최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점점 가혹하게 대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에 맞추기를 바랍니다. * 방송 직접 연결 Podcasts_Ask Pastor John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Do We Make Sense of the Coronavirus?번역: 정은심
재해
질병
회개
코로나19
바이러스
타락
정죄함
성경적
심판
존파이퍼
전염병 앞에 역사적 기독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by 장대선
2020-03-01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약시대로부터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회로서의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바에 따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형성된 소위 ‘초대교회’(Early Church)로 본다. 그리고 그 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던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통상직원’(Ordinary Officer)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직원들 혹은 사역자들은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그런 직원들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는 통상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과 관련한 치리규정들은 통상적인 운영의 원칙들과 규정들로 정해져 있다.그러나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이 항상 통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전쟁이나 전염병 혹은 재해와 같은 비상적인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을 기록한 여러 치리서들에서 쉽게, 혹은 세세하게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독특하게도 16세기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에서는 이미 그러한 경우들에 관해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먼저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제10장에서는 “신실한 모임에서 행해진 신앙 행위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3조에 명시하기를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 내용: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임직을 받을 때, 그리고 전국 총회의 소집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능하면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며, 그들이 만장일치로, 편리하게 그것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가능한 한 많이 행할 수 있다.”고 언급하여 명시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12장에서도, 10조에서 “성찬이 시행될 때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병자들이 들어올 경우 건강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잔을 취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므로, 이 경우에 목사와 장로들은 최대한의 신중한 태도로 이 일을 행하며, 경건한 질서가 유지되고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공히 언급된 전염병의 상황에서 교회는 최대한 신중하고 성숙한 고려 가운데 행하도록 권장하되, 아울러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특별하고 비상적인 행실 가운데서 그처럼 신중함과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한 비상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프랑스 개혁교회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대책 마련뿐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최근 한국의 교회들은 공예배 중지 및 예배당 폐쇄와 같은 초유의 일들을 급작스럽게 겪고 있다. 특별히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와 행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그동안의 교회 운영으로 볼 때에, 그처럼 공예배 및 각종 모임들을 중지하거나 잠정적으로 폐쇄하는데 따른 대비책 또한 실질적으로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이기에, 그 충격과 혼란이 상당하다 하겠다.하지만 일찍이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도록 했는데,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고 하여, 그러한 기도와 금식이 결코 신비적으로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렇다면 그처럼 신비적이거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고려 하에 시행하는 비상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의 실제적인 시행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흔히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으로서, “개인 및 사적 예배와 성도 간의 상호 교화를 위해, 그리고 가정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들을 책망코자 총회는 아래와 같이 지침을 마련하여 준수하도록 결의한다.”고 한 문구를 배경으로 한 개인 및 사적 예배, 그리고 가정예배를 지도하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의 역할이다. 즉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들에서 이 같이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지교회의 치리회(혹은 당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처럼 책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와 같이 심각하게 당회의 지침을 위반하는 그 강퍅함으로 인해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로 간주되고 이를 뉘우치고 돌이키기까지 성찬참여를 금함이 마땅하다.”고 한 지침과 같은 맥락으로, 평소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인 예배와 행사 뿐 아니라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그리고 각 가정에서의 예배를 통해서도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도모할 수 있는 훈련과 여건이 전제될 때에,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를 제대로 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패턴에 있어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가정예배를 통한 신앙과 경건생활이다. 양적 성장을 위주로 하여 구성된 대부분의 교회들 가운데서 이처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건생활, 그리고 가정에서의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예가 드물며, 그조차도 지교회의 지도와 치리와는 거의 별개로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안으로만 인식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동안 우리들이 드려온 예배와 공적인 모임들이 혹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기에 공적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까지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재앙과 질병의 때를 극복할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각 가정을 책임지는 영적인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지원이 교회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는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코로나19
가정예배
기도
금식
경건생활
공적예배
성찬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놀라우신 주, 그리스도를 보라
by Marshall Segal
2020-02-29
세상에 있는 많은 놀라운 것들, 높고 가파른 산과 깊은 협곡, 넓은 대양이라도 하늘에서 보낸 아들과 비교될 수 없다. 그분이 누구신지 온전하게 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관하여 놀라움과 뜨거운 마음으로 매료되었던 것이 언제인가? 혹시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가 더 이상 그분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예수님은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무한한 지혜, 정의, 힘, 사랑을 육신으로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이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만으로도 모든 대륙, 행성, 그리고 은하계를 운행하시고 통치하신다.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태평양의 파도까지도 다스리신다. 모든 새와 곤충을 먹이시며 모든 들판에 있는 풀잎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신다. 70억의 인구가 호흡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행 17:25).하지만 우리는 종종 무감각하게 잊곤 한다.당신의 눈을 열어주신다우리가 무감각한 것은 본질의 의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영광의 광채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둔하고 연약한 사람이다(고후 4:4).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창문의 조각을 빠짐없이 막았다. 우리의 망막은 지금 보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상의 표면을 보지만 실상의 근원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는 우리에게 지혜와 눈을 주셨으며 처음으로 참된 경이로움을 깨닫게 해 주셨다.“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빛이 당신의 마음에 넘쳐흐른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그곳에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행복을 찾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탐색을 끝내셨고, 당신의 찢긴 마음을 고쳐주셨다. 그분은 죄와 수치의 커튼을 걷어 주시고,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며, 우리의 눈을 점점 더 넓게 열어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당신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성경책을 열 때,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받는 혜택을 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따분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떨며, 기쁨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가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무뎌진 이유는 묵상할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그분을 만났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흥미로움에서 놀라움으로, 경이로움으로, 모든 것으로, 그리고 위대한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깨닫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몇 주간 그분의 말씀을 먹었을 때, 마치 식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많은 것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그분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셨을 때 우리는 숨을 쉴 새도 없이 받아마셨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팔았던 사람처럼,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의 진주와 보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땐 그분이 정말 멋지지 않았는가?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잃게 된다. 우리가 적은 시간이라도 그분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분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분과 함께한 시간은 그분 없이 보낸 수많은 시간보다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만일 그것이 실패한다면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 외에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그분 안에서 놀라움을 보기 원하면 사탄(그리고 누구든지 혹은 무엇이든지)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매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놀라우신 분을 응시하라모든 것을 다해 그분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응시하라. 그러면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예수님의 사랑에 무감각하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그에게는 모든 대양에 있는 파도보다 더 큰 힘이 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대학의 학자보다 더 현명하다. 최고의 진주나 다이아몬드보다 더 고귀하고, 순수하며, 가치가 있다. 가장 치열한 전쟁에 출전한 용감한 용사들보다 더 담대한 용기가 있다. 그는 신생아와 함께 있는 엄마보다 더 온화하다. 법정의 어떠한 재판관보다 더 정의롭다. 그의 사랑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느껴왔던 것보다 더 크고 놀랍다. 그 힘, 그 지혜, 그 사랑이, 그 광채가 지구상에 왔고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그분은 놀라우시고 아름다우시며, 정의롭고 강하시며, 경이롭고 거룩하시다. 그렇지 않은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e Yawn Because We Forget: uncovering the Wonder of Christ번역: 이현석
무감각
묵상
시간
경외감
사탄
지혜
경이로움
복음
예수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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