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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회복을 갈망하는 기도
by David Mathis
2020-02-17
시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 감사도 아니다. 그건 애통함이다.이 사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대에 살면서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짓는 것을 생각하면, 또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인(고후 7:5)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찬양과 감사만 할 수 있을까? 항상 그런 건 아니더라도 종종 우리는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고쳐 달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또 환난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시편의 찬양시가 주는 영광은 명확하다. 우리의 환경과 관계없이, 또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찬양하는 게 맞는가 아닌가 하는 우리의 느낌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애통하는 시 속의 영광은 이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환난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당해도 다른 곳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행동 자체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피난처임을 알게 된다.우리의 영혼이 시들어갈 때찬양과 감사의 시가 영광스러운 만큼, 또 시편 속에 애통하는 시가 많다는 사실은 지금 세대를 돌아보면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ggemann)이 “방향을 읽어버린 시들”이라고 불렀던 애통하는 시가 시편 속에 많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애통하는 시는 우리에게 더더욱 도움이 된다.시편 6편을 예로 들어보자. 다윗이 만난 힘든 상황이(그 상황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관련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자신의 죄를 보게 했고, 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절규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시를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 “참회의 시편” 여섯 편(32, 38, 51, 130 그리고 143편) 중의 첫 번째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해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에 시편 6편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통과 혼란은 매우 심각하다. 이렇게 방향을 잃어버린 소용돌이 속에 빠진 다윗에게, 또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지 이를 악물고, 미소 띤 얼굴로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며 고통을 이겨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에서 아슬란이 샤스타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한다. “너 힘든 거 다 내게 말해봐.”라고 말이다.하나님은 우리의 혼란을 아신다. 그 혼란을 단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옷장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영감을 주어 기록한 시편 속 가장 흔한 형태의 시를 통해서 그 혼란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고통을 연습해서 익숙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첫 일곱 구절에서 다윗은 절망 속에서 절규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간구는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지막 세 구절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며 시의 어조를 바꾸어버린다(8-10절).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방향 상실의 수준을 뛰어넘길 원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성경의 애통하는 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영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즉 그분의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설계했다.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시편 6편에서 고통과 혼란을 호소하던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과 확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정말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자신이 수척하고 뼈가 떨린다고 했다(2절). 그리고는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고 했다(6절). 그랬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선언한다.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8-9)이제 방향이 바뀌었다. 그는 선언한다. 자신의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게 될 것이라고(10절).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었다는 것을, 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었을까? 새롭게 드러나는 그의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그건 처음 일곱 구절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귀에 새로운 계시를 속삭여서 받아낸 게 아니었다. 또 우리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 마지막 세 구절이 다윗이 처음 애통하는 기도를 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러니까 기도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서 추가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10절은 두 번에 걸쳐서 구원이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ESV 성경은 “shall”로 표기되었다) 암시하고 있다. 그 구원이 이미 벌어진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강력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도 다윗처럼 영혼이 낙담하고 지칠 때 다윗과 같은 자신감을 가지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방향을 바꾸시는가거기에 대한 대답은 시편 속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진리를 상기하는 것(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이름 야훼, 즉 여호와를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당신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죄성 속에서도 드러나는 다윗의 정직함,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과 자신감이라는 은혜가 다윗에게 주어졌다. 방향 상실의 중심에서도 영적 온전함(spiritual sanity)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또 그가 하신 약속을 붙잡았기에 가능했다. 애통함은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먼저 영적 방향 상실에서 방향 재정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외부 상황이 좋게 바뀔 그때까지, 하나님이 정한 그때까지 필요한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누가 감히 왕과 비교 하랴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다윗 왕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왕이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나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나는 주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 세상 수십억 기독교인 중 한 명일 뿐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듣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내가 다윗처럼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이 들으셨다. 그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라고? 내가 다윗이 가진 자신감 비슷한 것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당신도 다윗이 가졌던 그 자신감과 100% 동일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의 후손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이 실현하고 싶었던 모든 일의 완성이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장차 그의 민족의 왕이 될 존재였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 위대한 이유가 그의 후손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 주님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우리의 죄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능력도 다 우리 것이 되게 하셨다. 자신감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어떻게 다윗과 비교할까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다윗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할까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애통함도 들으셨다면, 다윗의 호소를 듣고 그의 기도에 응답했다면, 어떻게 그가 독생자 아들이 외치는 애통함을 듣고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하게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 6편 10절에서 말하듯이 “갑자기”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당신이 지쳐서 낙담하고 있다면, 당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오래입니까?”(3절)라고 물었다면,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기도를 들었고 당신의 기도를 응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건 하나님이 당신의 환경을 당장 바꾸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보통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다윗의 확신과 희망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내적인 회복을 통해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부르는 애통의 기도를 듣고 그에게 필요한 영적인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때에 마침내 완전한 구원이 올 때까지 그가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는 그의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는 단지 찬양과 감사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향해 울라고 초대하신다. 우리의 고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오라고, 그리고 모든 슬픔을 다 털어놓으라고 하신다. 그는 들으시고 그분의 시간에 반드시 움직인다고, 그리고 그날까지 필요한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Church and the Offices of Christ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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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회복
윌터
슬픔
언약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소식
by Robert B. Strimple
2020-02-15
나는 1935년 세례(침례)를 받은 이후로 규모가 큰 ‘주류’ 개신교 교단에서 자랐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시절 유행했던 옛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목사님들에게 많은 실망을 해서 부모님께 다른 지방의 정통 장로교회로 옮기자고 말했다. 우린 교회를 떠났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깊은 성경적 믿음을 주셨다.오늘날 미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주류 교회들은 성경적 신앙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어떻게 성도를 끌어모으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 결과 매년 성도의 수가 줄어들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하다. ‘신생’ 교회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음주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상은 과거의 낡은 자유주의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성경적 복음을 고수한다고 여전히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의 풍성한 기쁨과 성령의 힘으로 설교하기보다는 청중을 지나치게 의식 한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배우자, 부모, 자금 관리자가 되는지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설교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견고한 토대 없이 이런 설교만 듣는 청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빠져서는 안 된다. 성도의 수가 증가하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선포돼야 하고 그것이 믿어져야 한다(롬 10:13-15). 복음이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참담한 여론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 본 자료에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1950년대에(내 세대)는 75퍼센트에 달했으나, 다음 세대(내 자녀 세대)는 35퍼센트로 줄었다. 그리고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에 의하면 그다음 세대(나의 손주 세대)에는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연구에서는 “교회에서 자란 십 대들은 신앙을 급격한 속도로 거부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다가서도록 할 수 있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소위 말하는 ‘실용적’ 설교 주제가 왜 복음을 대체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캐나다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전달 도구가 마사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는 “교회의 문제는 나쁜 소식이 뉴스인 세상에서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있다”라고 주장했다. 성경의 메시지는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린 기적의 소식이다. 이러한 소식은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방법에 관한 일상적인 뉴스보다 더 믿기 힘들다.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큰 것이기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증거들로 참되고 입증되었기 때문이다(히 2:3-4).나는 당신에게 요한복음 11장 17절부터 45절에 있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 번 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믿느냐”(26절). 마르다가 “예 주님, 믿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성령은 우리 각자가 대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신다.마르다의 대답은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절). 하나님 말고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고 나서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했다. “네, 주님. 내가 곧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하나님이 행하실 엄청난 구원의 행위라는 것을 정확히 보았다. 그녀는 구원이 “마지막 날”에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메시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것이다. “예 주님, 당신 안에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마르다는 사실상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 세상에 오기로 약속하신 분입니다.”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권위적인 기적을 알고 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예수님이 부르시자 실제로 죽은 자가 나왔다(43-44절). 예수님은 부활의 능력을 행하셨다.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참된 마지막 구원자이자 참된 말씀이심을 증명하셨다.대학 시절에 꽤 유명했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무신론자인 소설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페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원은 나에게 너무 큰 단어야. 나는 그렇게 높은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라고 말이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너무 높은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예수 안에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크고 놀라운 소식이기에 믿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출처: www.ligonier.org원제: Too Good to Be True? 번역: 송유희
복음
부활
자유주의
복음주의
실용적
생명
마르다
마샬
자녀 양육에 필요한 세 가지 안경
by Champ Thornton
2020-02-14
“결혼하기 전에 나는 자녀 양육에 대한 6가지 이론을 알고 적용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 나는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자녀 양육 이론을 한가지라도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이 말은 17세기의 시인 존 윌모트(John Wilmot)의 말이지만 부모라면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자녀 양육은 복잡하다. 하지만 자녀 양육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이 현실과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돕기 원한다.”이 소망은 아내와 나에게 자녀 양육의 원리가 되었고, 안개 속에서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었다. 어느 부모라도 말할 수 있는 단순한 원리이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과제는 확실히 단순하지 않다.자녀 양육에 요구되는 일들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각각 고유하고 다양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 이 말은 자녀 양육이 한 가지 이론으로 모든 경우에 다 통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자녀가 한 명씩 증가할 때마다 그 복잡성은 더 커진다. 수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도 더 다양해지며, 구성원 각각의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자녀 양육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 중의 하나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다.풀어야 할 주제도 많다. 오늘날 당면하는 복잡한 주제들에 대해 자녀들과 어떻게 이야기할까? 부모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에서 동성애와 성전환까지 모든 주제에 대해 준 전문가의 역할을 하도록 요구된다.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은 양육, 가족, 자녀 등에 대한 정보가 넘친다는 점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름대로 조언을 한다.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 책꽂이에 가득하게 있을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은 웹사이트, 블로그, 유튜브, 팟캐스트 등에서 내보내는 정보가 핸드폰에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자녀 양육에 대해 풍부하다고 생각한 정보는 금방 쌓여 이제는 선택하기 어려울 만큼 많아진다.자녀 양육을 위한 명료성자녀 양육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은 그 복잡성을 극복해가도록 인도한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성경 말씀은 몇 구절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신명기 6장 20-25절 이다.“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의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본문에서 아들의 질문에 대한 부모의 대답이 우리가 예상한 바와 다름을 알아차렸는가? 자녀는 하나님이 많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에 대해 묻는다. 그런데 부모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자녀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다시 말해준다. 만일 내 아이가 우리 집에서는 왜 어떤 것을 할 수 없는지를 물었다면 나는 여러 가지로 답변을 했을 것이다. 특정한 행동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들을 말하거나,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사랑이 없는 행동인지를 설명할 것이다.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내가 그리 말했으니까!”라고 했을 것이다.부모로서 우리의 자녀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의 선한 다스림 속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기를 원한다. 이 본문은 우리가 일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빛은 하나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백성들을 구원하신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신명기 6장 20-25절은 양육에 관한 지혜에는 도움이 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의사 결정과 자녀 양육을 명료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살아가는 실제 이야기일 때 명료성이 생긴다는 의미이다.세 가지 안경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정확한 그림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 안경을 통해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안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원래 좋았다(창 1:31)는 사실을 알려 준다. 두 번째 안경은 이 좋은 세상은 이제 나쁘게 되었으며 죄로 오염되었다(창 3장)는 사실을 보여 주며, 세 번째 안경은 예수님이 오셔서 죄로 깨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다(롬 8장)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좋다. 나쁘다. 새롭다.’ 이 세 가지 안경은 복잡한 것들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한다.만일 어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를 보기 원하면 이 세 가지 안경을 동시에 사용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음식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좋은) 것 중의 하나이다. 음식을 남용하면 해가(나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음식도 구속하여 제자리로 (새롭게) 돌려놓으신다. 음식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도록 말이다. 언젠가는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해야 하는 일이 영원히 없어지고, 기쁜 잔치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다(계 19:9). 이 세 가지 안경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계획하신 선한 것을 볼 수 없게 된다.좋다ㆍ나쁘다ㆍ새롭다부모인 당신을 바라보는 자녀의 관점을 가져보라. 아이들은 당신이 부모로서 잘못했을 때에도 부모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이 안경을 무시하면 아이들은 냉소적인 아이로 자랄 수 있다. 자녀들은 어느 부모도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나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안경은 자녀들이 괴로움과 환멸을 느끼지 않도록 돕는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그분의 가족으로 (새롭게) 부르셨다. 이것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 이라는 새로운 신분과 사랑을 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우선순위를 갖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 가지 안경은 자녀가 그의 부모를 성경적 관점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좋다ㆍ나쁘다ㆍ새롭다부모로서 이러한 복음 이야기의 줄거리를 아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안내자로서 역할을 하게 한다. 이 세 가지 안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당신의 이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당신의 여정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의 현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울 것이다.이 세 가지 안경을 통해서 볼 때 복잡했던 자녀 양육의 문제는 명료해진다. 이 세 가지 진리는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녀 양육의 난제를 모두 해결하고 바꾸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를 밝게 비추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도해 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Lenses Every Parent Need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윌모트
명료성
창조
성품
성경
안내자
그리스도인 리더십의 핵심, 진정성
by Matthew Capps
2020-02-13
세계적으로 유명한 은행과 투자 회사의 CEO가 최근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회사의 리더를 선발하는 특이한 방식을 공개했다. 후보자들을 아침 식사에 초대하는데, CEO가 그들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는 사람들의 음식 주문이 엉망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보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다. 그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후보자들의 마음 속을 보고자”하는 것이다. 이 CEO는 자기 회사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이들을 선발할 때 그 사람의 성품과 진정성(integrity)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하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자격을 갖추고 학위까지 있는 리더들이 많지만, 진정성과 성품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근래 복음주의권 리더들이 하루가 멀다고 뉴스에 등장한다. 간통, 권력 남용, 차별주의적 발언 등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권 리더들은 각종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이다. 보수적인 신학을 한다는 우리 역시 윤리적인 문제와 마주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개인의 진정성 결여는 사회의 부패로 나타난다.도덕적으로 타락한 수많은 리더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일 뿐이라는 J.C. 라일(Ryle)의 말을 떠오르게 된다. 우리는 자기 의로 우리 마음을 부풀리려는 성향과 싸워야 한다. 은밀하게 저지른 죄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성적인 죄로 무너진 동지들을 떠올리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모범적인 예: 욥의 성품욥기는 처음 구절부터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우리가 갈구해야 할 진정성과 성품을 보여주는 한 사람에 대한 놀라운 요약문이기 때문이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저자가 그의 이름과 출신지를 아주 간략히 소개한 후 욥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그의 성품에 관한 것이다. 그는 완벽한 진정성의 소유자였다. 욥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위선적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욥기 내내 욥 자신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고 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심판의 주에 대한 깊은 경외심만큼 우리 안에 진정성을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욥은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였다. 이는 욥이 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러 면에 있어 욥기 1장 1절이 크리스챤 리더의 비석에 쓸 수 있는 가장 멋진 비문의 예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성품은 내적 거룩의 외적 표현이다우리가 개인적인 거룩, 진정성, 그리고 성품을 추구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은 투항이지만, 성화는 전투임을 깨달아야 한다. 저절로 거룩하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의 추구는 각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다. 교회를 섬기는 본보기가 되는 리더들의 경우에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공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늘 살펴야 한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고 권면했다. 우리의 진정성이 점점 사라져갈 때 이를 계속 못 본 척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져 내려 그 잔해에 깔릴 수도 있다. 에릭 가이거(Eric Geiger)는 자신의 책 ‘당신의 삶은 어떻게 망가지는가?’(How to Ruin Your Life)에서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건물 해체 작업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작업에서는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쓴다는 것을 알 것이라 말한다. 우선 건축물 파괴용 철구를 사용하여 외부로부터 건물을 해체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밖에 있는 이들에게 훤히 보이는 방법이므로 나중에 건물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는다. 다른 방법은 건물 내부에서 건물의 중심축(integrity)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폭약을 설치함으로써 건물을 해체하는 방법이 있다. 이 두 번째 방법은 구경꾼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건물의 구조 자체가 폭약에 의해 파괴되면서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게 된다. 가이거의 논지를 간단하게 말하면 리더는 무너짐과 그로 인한 잔해를 외부에서 보기도 전에 내부에서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 리더로서 우리는 죄가 우리를 망가뜨리기 전에 먼저 죄를 부지런히 제거해야 한다.진정성의 내부적 파괴가 지닌 잠재적인 힘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준다. 리더로서 우리가 섬기는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경건과 거룩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리더십에 있어서 진정성은 죄가 하나도 없음(sinl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품과 진정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덜 짓는(sin less)”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깨닫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예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에게 얼마나 회개가 필요한지를 더욱 절실히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죄를 적극적으로 혹은 계속해서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찬 리더는 자신이 먼저 회개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한다. 회개하는 리더는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부정(Denial)과 절망은 성품을 파괴한다 리더의 마음속에서 성품을 계발해가는 성화의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의 대적이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부정(denial)이다. 어느 주일에 목사가 죄에 대한 설교를 전했다. 한 성도가 예배 후 목사에게 다가가서는 “설교 좋았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오랫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목사는 “와, 정말 자랑스러우시겠네요!”라고 했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이는 이런 사람과 같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힌 크리스찬이 교만한 마음에 의해 자기 삶 속에서 자기 죄마저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음을 보라. 자기의 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기 전에 다른 이들의 죄를 쉽게 찾아내곤 한다는 것도 이 사실을 드러낸다. 크리스찬 리더인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자신과 비교하며 그들을 업신여기려는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자기의 의로 가득한 반(反)은혜의 문화를 세우는 태도라 할 수 있다.리더가 성품을 계발해가는 성화의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의 대적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절망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크리스찬 리더들이 절망감에 빠지기 쉽다. 그런 사람은 수치심과 정죄감에 너무 짓눌린 나머지 홀로 동떨어진 채로 자기 죄에 대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다 결국 무너지곤 한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이다. 내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나이 지긋한 목사 한 분이 초빙 강사로 와서 수업했다. 그분은 “목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려움이나 잘못을 절대로 공개하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분은 어려움을 고백하면 리더로서의 신뢰도에 심각한 손상을 받게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 생각은 정반대이다. 나는 리더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믿는다. 이런 고백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준다.복음이 우리의 성품을 진작시키는 방법죄와의 싸움 속에서 절망과 부정으로 기울어졌던 추가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양쪽 진영 모두에게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싶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자기 죄를 부정하기만 하는 이들에게 복음은 겸손을 알게 한다. 복음이 우리 크리스찬 리더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의 죄성이 너무도 중하였기에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의의 세계에 갇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복음은 소망을 선물한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을 만큼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복음이 주는 겸손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해야 할 자들임을 깨닫고, 복음이 주는 자신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회개할 용기가 생기게 된다. 이 진리 때문에 우리는 회개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할 용기를 얻게 된다.우리가 리더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속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찔린 상처로부터 진정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봐야 한다. 그것이 진실하고 거룩한 성품이건 겸손한 회개이건 말이다.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에 지금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성품을 지닌 남성과 여성들이다. 우리의 지도를 받는 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 중 하나는 우리의 인생을 다 마쳐갈 때,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노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했노라고, 성령의 힘으로 악에서 떠났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더이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성은 우리의 공적 사역을 반드시 진작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 원제: Integrity in Christian Leadership번역: 이정훈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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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부정과절망
복음
욥
험담일까 정보공유일까
by Brad Larson
2020-02-12
저는 사교적인 사람이며 사교성을 요하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교성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이지요. 그런데 각양각색의 사람을 대하며 하루를 보내면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릴 수도 있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내가 꼭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내가 비밀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요청 받지 않았을 때 특히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온화하고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신뢰할 만한 경청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정보를 적절하게 나누는 것인지, 아니면 소문을 퍼뜨리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남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만 이런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사교적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이 위험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행위인지 알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누군가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이야기의 당사자를 허무는 행위다. 그것은 동료를 짜증나게 하거나 상사에 대해 숙덕거리는 것처럼 뻔한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 대해 걱정거리를 말하며 고의로 그들의 결점을 드러내는 치졸하고 은밀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우리는 보통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의 수다는 이러한 유혹이 특히 심하게 작용한다. 나를 드러나게 하는 것과 남을 끌어내리는 것은 둘 다 나의 위치와 관련된다. 때에 따라서는 승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명령이 직장에서의 험담이나 수다에 적용될 수 있다.1. 진실을 말하라. 참된 것만 말하라.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모습은 나를 드러내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즉 우리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실도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 누군가의 잘못, 의심되는 동기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말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동료가 실연당한 사실을 덮고 다시는 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상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얘길 꺼낼 수도 있다. 말하려는 내용이 사실이라도 그 내용을 알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우리는 진실을 너무 적게 나눌 때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거나, 사람들이 서로 공감을 나누도록 도울 수 있다면,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을 공유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야기와 정보의 나눔이 없는 직장 사무실은 외로운 곳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활동적인 공동체를 조성한다.2. 사랑 안에서 말하라. 어떤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말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날카로운 질책이나 솔직한 말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한다.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 전에 그 정보를 나누려는 자신의 동기와 그렇게 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 보라. 그것이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공감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불필요한 분열을 만들어 낼 것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그것이 함께 웃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창피를 줄 것인가?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의 어려움을 널리 퍼뜨리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누군가 사적인 이야기를 당신에게 얘기하고 특별히 비밀을 유지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누설하지 않음으로 그 사람의 품위를 지켜주라. 만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확실하게 모르겠다면 황금률을 적용하라. ‘내 이야기라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을까?’나는 당신이 직장 동료를 사랑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교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인의 속성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림으로 내가 우뚝 설 수 있다는 유혹을 받는 것이다. 특히 더 위대해 보이고, 더 존경을 받거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에 어떤 동기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감사하게도 우리 안에는 성령의 은사가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신다. 성령은 결코 다른 이를 무너뜨리거나, 조롱하거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를 의지해야 한다.끝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가져올 수 있다. 동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준 정보를 가지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원제: Where’s the Line Between Helpful Info-Sharing and Office Goss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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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 교리가 왜 그토록 달콤한가!
by Aaron Menikoff
2020-02-11
판사가 몇 마디 선언과 함께 망치를 친다. 그러면 한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이 주어진다. 미국 전역에 있는 법정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일이라고 할까. 친부모에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없거나, 그 부모가 아예 양육 자체를 거부할 때, 아이는 입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 아이는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새로운 부모에게 완전히 소속된다.최근 몇십 년 동안 입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그 관심은 야고보서 1장 27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구절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순결한 신앙에 대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크리스천으로서 이 구절을 적용하기 위해 실제로 고아를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입양이란 어느 한 구절에 근거해서 이뤄진다기보다는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입양 교리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우리를 입양하신 하나님입양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신 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자비로운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긍휼과 보호와 공급과 훈계를 받고, 결단코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획득으로 입양을 설명한다.세상에서는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입양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새로운 가정에 소속되었으며 그 가정이 자신에게 주어진 게 맞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입양하시는 일에는 그와 같은 의심이나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죄인을 자기 자녀로 삼으신다(요 1:12). 이와 같은 의지는 완전하여 결코 바뀌는 법이 없다.하나님의 입양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그칠 줄 모르는 사랑에 기초해 있다. 산맥이 형성되고, 강물이 흐르며, 하늘에 새가 날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인을 자기 가족으로 입양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그렇듯 창조 사역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를 향해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사 41:8; 약 2:23) 자녀라고도 부르신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러한 자비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가장 달콤한 교리입양을 가장 달콤한 교리로 표현하면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신학자는 그 교리가 얼마나 우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지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존 대그(John Dagg)는 “칭의보다 높은 수준의 은혜를 보여 주는 축복”이라며 입양을 칭송했다. 누군가를 사면하는 일은 판사가 하지만, 그 사람을 입양하는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도 입양이야말로 칭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표현했다. 로버트 웹(Robert Webb)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우리 모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 자녀를 부드러이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콤하게 느낀다. 때로 고난이 우리를 덮치고 근심이 홍수처럼 밀려오면, 우리는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손을 뻗친다. 혹 죽음의 천사가 문간에 들어서며 사랑하는 이를 데려갈 때조차,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며 가장 친밀한 위로를 얻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위협이 물결치며 크게 범람할지라도, 우리는 저 별들 너머로 빛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거기에 세워진 아버지의 집을 묵상한다. 그러면 무너져 가는 이 땅의 장막 가운데서도 큰 격려를 받게 된다.”이러한 교리는 단지 전문적인 신학자들만 음미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입양에 내포된 보석 같은 진리는 미국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크리스천 노예들을 붙들어 준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잔혹한 속박을 견디게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만들어 준 진리가 바로 입양 교리였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단지 주권을 행사하시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없이 자애로우신 아버지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가정의 노예로 살았던 앨런과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Ellen and William Craf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의 입양 교리를 묵상하면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을 끄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기도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듯이, 이제 우리도 잔인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입양을 주제로 한 성경 이야기크래프트 부부에게 성경이란 입양을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원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돌보시며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면서 동산을 거니시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창 3:8).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산 밖으로, 즉 아버지의 임재 밖으로 그들은 추방되었다(창 3:24; 롬 5:12).이후 아브라함을 통해 번성한 아담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 자손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며 다시금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출 4:22-23). 하나님은 타락한 그 백성을 불러내어 자기 곁에 두고자 하셨다. 그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면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고 약속하셨다(레 26:12). 마치 지난날 에덴에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을 거부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가 되시건만(시 103:13), 그 누구도 그분을 그렇게 경외하지 않았다.이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큰일을 행하셨다. 바로 완전한 주권자요 공의로운 창조자이신, 그 영원하신 아버지가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으시며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큰일을 이루셨다.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또한 그 대속을 적용하여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3:24),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고후 5:17). 그리하여 자기 가족으로 그들을 입양하신다(갈 3:26; 4:4-7).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있을 수 없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어딘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늘 아버지만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따라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속감을 주실 수 있다. 곧 세상의 죄인들을 자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다(롬 8:17).입양 교리가 달콤한 이유그러므로 입양 교리는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진리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첫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든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확신을 갖게 된다(롬 8:15-16). 이 확신은 방탕한 아들을 한없이 품었던 그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마음이다(눅 15:11-32).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면, 당신을 자기 자녀로 입양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기 바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당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둘째로 입양 교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혹 당신이 해외에서 다른 신자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당신과 비슷한 모습들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언어나 문화에서 느껴지는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깊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전 세계에 가족을 둔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한다.그와 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우리에게 가족으로 허락하셨는데, 특별히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그 가족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때 기존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바가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함께 주셨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우리의 신앙생활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다. 곧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그 모임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고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자신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셋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 역시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도와준다. 몇 년 전에 아내와 내가 한 아이를 입양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 그 일을 한 게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27절이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에게 고아를 돌보며 가정을 제공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는 성경 전체가 입양에 대해 가르치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즉 우리 자신이 약하고 추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었다(롬 5:6-11). 그렇기에 우리 부부가 딸아이를 입양한 일은 그저 우리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었다.그러므로 당신도 입양 교리를 한번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그 교리가 얼마나 달콤한 진리인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혹 언젠가는 고아를 입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입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doption: The Sweetest Doctrine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입양
성령
사랑
로버트웹
정체성
존대그
의도는 좋아도 결과는 나쁠 수 있다
by R. C. Sproul
2020-02-10
좋은 의도로 포장된 길을 따라가다가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목적지에 이르기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는 선한데 결과는 비참한 경우가 우리 주변에 더러 있다. 최근 여러 교회에서 예배의 방식을 뜯어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현상을 보며 좋은 의도로 포장은 되었으나 위험한 목적지로 향하는 도로를 떠올린다. 그와 같은 교회에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예배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전통적인 예배의 스타일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교회 생활이 시대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지루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런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지난 수십 년에 걸쳐 그와 같은 예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예를 꼽자면 ‘구도자 중심의 모델’(seeker-sensitive model)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도자란 교회 밖에 있는 비신자로서 특히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구도자를 전도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주일 예배를 바꾸려는 시도가 사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사실을 생각하며, 비신자란 하나님이나 그분의 나라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힘을 다해 그분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란 인생의 궁극적 의미나 목적,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참된 기쁨이나 행복과 같이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추구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익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혜택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때만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사람들이 찾아 헤맨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그들은 단지 혜택을 바랄 뿐 그 혜택의 수여자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신자에게 맞추기 위해 예배의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상 잘못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회심을 통해서만 시작된다. 만일 우리가 구도자를 감안하여 예배를 개선해야 한다면, 오히려 신자를 위해 그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만이 사실상 구도자이기 때문이다.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다 함께 기도하면서 떡을 떼는 데 집중했다(행 2:42). 이는 비신자의 모임이 아닌 신자로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물론 주님의 경고와 같이, 신자의 모임에는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좋은 곡식 사이에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자랄 수 있다(마 13:36-43). 그렇다고 해서 그 가라지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려고 밭을 갈아엎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으로 모이는 목적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직 그분께만 찬양과 경배를 올리기 위해서이다.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을 따라 그분을 예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을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에 관한 가장 뚜렷한 사례는 레위기 10장에 소개된다. 거기서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그분 앞에 분향함으로써 현장에서 바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젊은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불편하게 여기시는 방식을 따라 한번 ‘시험 삼아’ 예배를 드려 본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레 10:3).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세속적인 방식을 따라 드려져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혹 주일 아침에 스타벅스에 모여 신앙을 나누며, 기존의 예배를 대체하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될 수 없다.예배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에는 잘못된 오류가 전제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세대가 최첨단 기기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문화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격변의 과정을 거쳤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만 해설하는 설교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20세기 초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도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와서 저 옛날 사도나 선지자들이 남긴 메시지를 듣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포스딕은 그런 메시지가 시대에 완전히 뒤처지기 때문에 설교의 초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도 현대 문화의 변화를 겪은 이들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는 뭔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더 이상 지성을 통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능력을 상실하여 뭔가 더 강력하고 역동적인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체 수단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시도에 담긴 의도가 혹 선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에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od Intentions Gone Bad번역: 장성우
영성
예배
의도
구도자
방식
해리에머슨
비신자
아퀴나스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라
by David Mathis
2020-02-08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것만 찾는 시대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던(행 17:21) 옛 아테네 사람들과 같아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IT와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즉 문자 그대로 “뉴스”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래된, 영광스럽도록 오래된 진리들을 붙든다. 이 진리는 뉴스에 탐닉하는 이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의 현위치를 파악하고 영적 판단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D. A. 카슨(D. A. Carson)은 한 가지 위험을 감지한 바 있는데, 그 위험은 한 세대가 지난 현재도 여전히 시급한 문제로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생각들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사람들이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십자가가 응당 누려야 할 중심적 위치로부터 밀려날 위험에 늘 처해 있다”(‘십자가와 목회’[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동일한 경고가 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목회자이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9)는 그의 책 ‘거룩을 향한 하나님의 방도’(God’s way of 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만들어내는 귀한 열매들, 죄 용서, 평강, 그리고 거룩함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닌 공상의(fancied) 성화는 바리새주의와 다를 바 없다. 거룩해지고자 한다면 십자가로 가서 그 아래 머물러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 금식, 기도, 선행 같은 행위에도 불구하고 참된 성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얻을 수 없다.보나르의 권면은 우리 시대의 흐름에 대한 처절한 도전이다. 또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오래된 진리를 붙잡고자 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각을 보나르의 오래된 언어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모든 진실한 거룩함과 선행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온다”라는 말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성자 하나님께서 못 박히셨을 때 모든 것이 변화된 것이다.부활 직후 일어났던 사건에서 “못 박히심”은 우리 주님을 나타내주는 표현이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5–6; 또한 막 16:6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오십일이 지난 후 행한 오순절 설교의 절정에서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한다.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고친 후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그 앞에 섰다. 그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라고 묻자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4:10)라고 답한다. 예수님을 구별하여 보여주는 “못 박히심”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 선포한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라는 것은 우연하거나 부가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계시적인 사건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숨기지 않고 밝히 드러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을 뿐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 된 것이다(롬 5:8). 카슨이 십자가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행위 중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대표적인 묵상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장 5절에 등장한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의 생각을 허물어버릴 만큼 놀라운 계시적인 십자가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즉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메시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할 때(고전 1:23)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다(고전 1:20).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죄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나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한다(고전 1:2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영광을 본다. 못 박히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고전 1:30) 되신 분이라 믿는다.십자가는 불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쓰는, 복음 메시지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시는지(“지혜”),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화목하고(“의로움”) 거룩해질 수 있는지(“성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지를(“구속”) 보여준다.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뿐만 아니라 그가 간 모든 곳에서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행 20:27) 전하였다. 십자가가 지극히 중심적이고, 모든 분야에 연결되어 있으며, 지극히 계시적이어서 어떠한 주제를 이야기하든지 그가 말한 모든 것(“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은 보나르의 표현처럼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왔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대한 카슨의 주석처럼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윤리, 교제, 하나님에 관한 교리, 또는 어떠한 것이라 해도 십자가와 연결하지 않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은 복음 중심적이다. 그는 십자가 중심적이다.” 초기부터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빈 무덤보다 십자가가 그리기 쉬웠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고 부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신앙 전체를 대표한다. 세상의 지혜와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내세적인 힘을 보여주고, 십자가는 인간의 관점을 부끄럽게 만든다.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는 부활에 나타난 능력을 볼 수 없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는 특별히 구별되고 기독교 신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부활을 꿈꾸기는 할 것이다.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직 기독교에서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다.공상의 성화와 참된 성화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중략] ‘거룩함’ [중략] 이 되셨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어로 ‘하기아스모스’(hagiasmos)이다. 보나르는 공상적인 성화와 참된 성화라는 두 종류의 성화에 대해 논하는데 “공상의(fancied) 성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기반”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존 오웬(John Owen)도 말한다. 시편 130편 4절(“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 이다”)을 주석하면서, 용서하심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다. “시편 기자는 이 경외함과 예배의 기반, 즉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경외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가 바로 이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죄 용서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죄인도 그분을 경외하거나, 섬기거나, 예배할 수 없다”(‘존 오웬 전집’[Works of John Owen]).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참된 예배와 “참된 성화”는 십자가 구속으로부터 흘러나올 뿐 아니라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믿는 믿음으로 그 힘을 얻는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롬 6:6).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말한다. 우리도 똑같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거룩한 여정의 비밀그렇다면 보나르의 권면처럼 어떻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 것”인가? 보나르는 “성도의 거룩한 여정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피로 보증된 삶으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증”이라 함은 객관적 사건과 사실로서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은혜로운 마음이며, 그의 영원하신 호의를 보장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보나르는 십자가로 “계속 돌아가”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주님과의 교제에 매일 참여하라고 권면한다. 카슨 역시 바울의 십자가 중심의 시각을 분명히 보여주며 복음의 실제를,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으라”고 권면한다.바울과 보나르, 그리고 카슨도 “지속적으로” 또한 “계속하여”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머물기 위해 당신이 취하는 구체적 방식은 내 방식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정말로 십자가로 다가가고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 머물고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항상 물어야 한다. 얼마나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다가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물든지” 아니면 세상 속에 머물든지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는 진실한 것이든지 아니면 공상적(fancied)이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다.보나르는 “매일”이라는 다른 일반적 기준도 제시한다.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못 박히신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피곤한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진리와 더불어 살아온 지 어느덧 십오 년이 되었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는 날마다 새로운 진리라는 사실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Get to the Cross and Never Leave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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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주의
베드로 아내의 남편 보고서
by 배경락
2020-02-07
어느 날 남편은 집을 떠났습니다. 계획도 없이.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남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배 한 척 마련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생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왔던 그였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친정어머니를 모시자고 했을 땐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이 남자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변하였습니다.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를 만난 이후 남편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매일 같이 배를 손질하고 그물을 청소하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 그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는 데 떠나겠다는 남편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이제 생계는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결단하고 가는 길이라면, 기쁨으로 격려하지 못할망정 울고불며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집을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방황하였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남편 소식은 간간이 풍문으로 들려왔습니다. 예수에게 정신이 팔려 목숨을 내놓고 따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동태를 살피고, 험악한 낯으로 눈알을 부라리며 위협하다가 가곤 했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돈 한 푼 가져다주는 것이 없지만, 베드로는 나의 남편입니다. 그가 비록 위험한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만 나면 회당에 나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심한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고, 손 쓸 방법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고 있는 그를 번거롭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남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안 좋아요. 한 번 오셔서 어머니를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나 자상하였던 남편은 그 소식을 듣자 예수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하시더니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고열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가버나움 동네는 그야말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마다치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오랜만에 남편을 보았지만, 기쁨을 나눌 시간도 없었습니다. 허리 펼 시간도 없이 부엌에서 음식 장만을 하였습니다. 열병에서 회복된 어머니도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남편은 예수님을 따라 다시 집을 떠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메시아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사 61:1-2)리라 하였더니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 일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병으로 죽어가던 어머니가 일어났고, 우리 집을 찾아왔던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결정이 얼마나 옳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종교인들이 흉악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할 자이시며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칠 때라도 엎드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숨어 살던 남편은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그물을 정리하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바다로 나가는 남편은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무슨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남편은 인생의 낙오자 같았습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는 아침에 남편은 신나서 뛰어 들어왔습니다. 고기를 잔뜩 잡은 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때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 야망은 순전하기보다 어쩌면 사심이 섞인 야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뭔가 한자리할 것 같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집을 떠나는 남편은 달랐습니다. 더는 인간적 야심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남편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도 남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남녀 구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500여 성도에게 보이실 때 나도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동행하면서 함께 사역자로, 복음의 증거자로, 전도자로 살았습니다(고전 9:5). 핍박을 받아도 같이 받았고, 눈물도 같이 흘렸고,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기에 두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죽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로서 남편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늘 기도했습니다.1) 나의 기도가 정말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늦게 들어가든, 일찍 들어가든 우리는 함께 만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모르는 모든 사람도 그 날에는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룰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설교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남편의 필요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이야기에 무관심했던 남편도 여러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에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 - 머리 모양, 몸에 걸친 보석, 옷차림 - 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계발하십시오. 내면을 온화하고 우아하게 가꾸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전에 거룩하게 살았던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이 아름다웠고, 남편에게도 착하고 성실한 아내였습니다. 예컨대 사라는 아브라함을 보살피면서 그를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걱정과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하면 사라의 참된 딸이 될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권합니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십시오. 아내를 존중하고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아내는 여자이기에 여러분보다 연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로운 삶 안에서는 여러분과 동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벧전 3:1-7, 메시지 성경) -----1)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말에 따르면 베드로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주를 위하여 순교하였다고 전하였다. 클레멘트는 베드로의 가정은 행복하였고, 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하였다.
가정
결혼
눈물
거룩
감화
결단
기도
내적
마음가짐
내면
청소년 사역에 필요한 다섯 리더
by Chelsea Kingston Erickson
2020-02-07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청소년 리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 교회의 청소년 리더는 결혼한 젊은 커플이거나 대학생이 십대들과 함께 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소명이라 여긴다.만약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리더의 신앙을 닮아 간다면 그들에게는 다양한 신앙의 모델이 필요하다. 삶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리더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청소년 사역팀의 리더로 선호하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1. 학생 부모현재 학생의 부모보다 더 좋은 청소년 리더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부모는 이미 영적으로 아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이들의 친구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있고 효과적으로 연락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개인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 그들의 필요를 파악할 수 있다.청소년 사역자는 부모 참여가 그들의 아이들과 잘 맞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소년 사역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그분의 아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파악하라고 물어야 한다. 중등부까지는 부모와 부모의 아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다. 고등부에서는 아이들이 믿음에 대한 질문과 갈등으로 고군분투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나이와 성별에 따라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운영할 수 있다면, 부모는 그들의 아이가 포함되지 않은 그룹을 인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다른 청소년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우리 교회에 몇몇 아버지들은 중학생이 된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기로 했다. 사역의 연속성과 함께 더 많은 학생을 섬기는 것이다.2. 집에 있는 부모집에 있는 부모들은 청소년 리더를 양육하기에 좋다. 만약 그들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행정 업무, 행사 계획, 그리고 학생들과의 연락을 도울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다른 나이의 그룹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우리 교회에 한 젊은 엄마는 고등부를 섬긴다. 바쁜 엄마지만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종종 그녀의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도록 한다. 어떤 부모들은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3. 빈 둥지 부모빈 둥지 부모는 능력 있는 청소년 리더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사역의 원동력이 되고 조력자가 된다. 자신의 자녀는 성장해서 독립했기 때문에 양육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 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거나, 조직의 리더, 혹은 경영자 등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오전 6시에 만나야 할 수도 있다. 이른 아침에 열리는 회의가 힘들겠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이 연령층은 십대들을 만나기 전에 많은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자녀가 이미 성장해서 그동안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사역자는 그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좋은 리더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용기를 북돋아 주고 함께 한다면 빈 둥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다.4. 조부모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잠재력 있는 청소년 리더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 32장 7절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어른들로부터 지혜와 경험을 찾으라고 말한다. 나이 든 어른들은 지혜를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해줄 시간이 있다. 만약 그들에게 손주(또는 조카)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젊은 사람들에 관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어떤 청소년 그룹과 어울려서 게임을 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생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그들의 능력은 누구보다 앞선다. 우리 중등부에는 종종 하이킹 계획을 세우거나,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야외활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학생에게 삶의 중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인생의 멘토가 된다. 고등부에 한 나이 든 부부 커플은 최근에 학생들과 건강 문제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이처럼 귀한 커플을 존경한다. 그들과 기도 제목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5. 독신자결혼한 커플이나 양육 경험이 많은 사람들만으로 팀을 꾸리고 싶지만, 독신자를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전문가든 나이 든 어른이든, 싱글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들은 청소년 사역 프로그램 외에 별도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가족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학생들이 아직은 싱글이기에 독신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봉사할 독신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함으로써 우리는 학생들에게 결혼과 독신 모두가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보여준다.(고전 7)청소년 사역자들은 독신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시간을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사역자를 대신하여 학생들에게 상당한 에너지를 쏟을 것이고, 사역자는 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독신 리더들은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의 필요를 논의하는데 더 많이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사역자에게도 큰 힘을 준다.청소년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청소년 리더로 재미있는 대학생과 신혼부부만을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고정된 생각을 버리고 넓게 생각하면 청소년 사역이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Leaders Every Youth Ministry Needs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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