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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와 성에 대해 대화하라
by David White
2020-01-31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다. 대화가 무르익자 친구는 자기 결혼 생활, 특히 성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열변을 토하다가 “결혼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성생활이 어려울 줄은 몰랐다니까!”하고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식당 안에 다 들릴 정도였다.나는 불쾌한 듯 우리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친구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친구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유지”했다면 결혼 후 성생활은 아주 멋질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부부의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외형적인 차이를 포함하여 많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sex)은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는 신비로운 것이다.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물론 서로의 욕구, 기대, 그리고 특별한 기호 등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들과 교제하면서 계속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성생활에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녀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되면 부부간의 만족스러운 성생활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 의지, 그리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부부의 성생활이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바르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배우자 간의 열린 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성생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논의는 성경이 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성경이 결혼 후 성생활에 대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섬김과 사랑의 행위로서의 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사실 부부의 성생활에 관한 구체적 가르침을 주는 본문은 한 군데뿐이다.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3–5)나의 몸은 상대 배우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생활의 주목적은 상대를 섬기는 것이다. 신약을 관통하는 윤리는 결혼의 성생활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이기심 없이 섬기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서로를 섬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부부는 자신들의 성행위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이 대화를 위해 생각해봐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각자가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가?남녀가 아주 다르게 지어졌기 때문에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안 좋은지, 어떤 행위가 흥분을 주고, 어떤 것이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의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배우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성행위 전이나 도중에, 그리고 후에도 부부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신혼 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러한 대화를 멈춰서는 안 된다.횟수에 대해서도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헌신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각자의 기대감을 조정하고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성적 희열에 대한 내 욕구를 내려놓아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 반대로 나는 전혀 욕구가 없을지라도 내 배우자를 위해 섬겨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억지로 상황을 만들거나 투덜거리며 화를 내기보다는 사랑의 섬김으로 배우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내 의견과 욕구를 무조건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의 실수를 최소화한다. 배우자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혹은 육체적으로 어떤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자신의 욕구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어떻게 상대를 섬길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부부의 모든 성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을 내어주는 태도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배우자와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이 가진 욕구를 다음 질문에 비추어 생각해보라. 이 행위를 통해 배우자가 사랑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성적 표현들이 사랑의 행위 속에서 위로와 안정감을 증진 시키는가?이 행위가 배우자에게 기쁨과 풍요로움을 선사하는가?2.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인류의 타락이 우리의 성적관심(sexuality)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결혼 전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로 인한 죄책감이나 과거 혹은 현재의 포르노 탐닉은 현재 부부의 성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주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과거에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성적인 고통도 현재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이들도 결혼 후 성생활을 어렵게 느낀다.많은 이들이 과거의 성생활에 대해 자신의 배우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간의 대화가 열려있다면 과거의 상처와 죄악을 고백함으로 죄책감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다. 당신의 숨겨진 내면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의 배우자이지만, 안내자로서 목회자나 상담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거의 죄나 트라우마만이 결혼 생활에서의 육체적 친밀감을 방해하는 문제는 아니다. 결혼한 부부도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싫어하거나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적 표현을 타자 중심적으로 디자인하셨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성적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배우자와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우리는 삶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만난다. 결혼 생활 동안 부부의 성생활은 변화를 겪는다. 어떤 면에서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결혼 후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일들 역시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각 단계마다 성생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가 성에 대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서로의 기대감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위에서 언급했던 내 친구가 힘들게 깨달았듯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분명하게 도움이 된다. 대화를 시작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onversation About Sex You Need to Have with Your Spouse번역: 이정훈
가정
결혼
성생활
섬김
의사소통
동의
지속적대화
선교의 전략을 바꾼 세 단어
by Darren Carlson ㆍ Elliot Clark
2020-01-30
1974년 서방의 거의 모든 선교 단체가 채택한 전략은 다음 세 개의 그리스 단어 때문에 바뀌었다. 그것은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이다. 이 단어는 특히 마태복음 24장 14절과 28장 19절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74년 로잔 회의(Lausanne Conference)에서 랄프 윈터(Ralph Winter)와 도날드 맥가번(Donald MacGavern)은 “숨겨진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윈터는 언어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선교 사역에서 제외된 약 만 육천 개의 숨겨진 민족이(나중에 그는 만 칠천으로 바꾸었다)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세계를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민족 그룹”(people group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천 개의 독특한 민족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라며 참석자들의 생각에 도전장에 내밀었다. 랄프는 이렇게 썼다.예수님이 “모든 민족”이라는 구절을 썼을 때 그는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단어 (그리스어 ethne)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류를 구성하는 확장된 가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대 선교 운동이 변화되었다. 최근에 존 파이퍼(John Piper)와 데이비드 플래트 (David Platt)와 같은 사람들의 사역은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시한다.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ethnolinguistic people)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이제는 복음주의 글로벌 선교 사업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인 이해와 함께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모든 민족이 다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러한 기대는 다른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을 다 구분하고 그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여 “임무를 완수하라”는 독특한 선교 명령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하는 곳이거나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각각의 민족에게 언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까지 정의하도록 했다. 크리스챠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최근 기사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식의 선교 접근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 대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에 전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을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쓰는 개별 민족”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단순한 데 있다. 그건 성경 신학적 정의보다 현대 인류학적 정의를 더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50년 전, 맥가번과 윈터와 같은 선교 학자들은 민족(ethne)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전히 지리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해로만 접근했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와서 사용하게 된 사회과학적 정의로 성경의 단어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민족을 지리적, 문화적, 또는 언어적 범주의 국가들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민족(ethne)을 20세기에 들어서나 도입한 국가 또는 민족 그룹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1세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추종자들은 주로 성경에 언급된 민족, 즉 성경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이방 나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인들과 다른 동시대인들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이고 지정학적인 구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민족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범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은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그래서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비유대민족이었다(엡 2:11-12; 막 11:17절에 나오는 만민(pasin tois ethne)은 비 유대민족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언어학적 또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인구 통계를 놓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구절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이 구절은 구약이 말하는 이방인에 대한 범주와 기대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사 66:18-19참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사역 내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마 8:11). 그의 말을 들었던 일부 유대인에게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약속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도 나중에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 모든 나라들(갈 3:8의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창 12:3도 참조)이 그를 통해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성취되었다.그러므로 모든 나라에 관한 예수의 약속(마 24:14)과 사명(마 28:19)에 대한 마태복음 기록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족에 관해서는 예언서, 특히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구약이 가지고 있던 모든 민족에 관한 것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최초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은 성경 신학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창세기 10장에서 11장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와 오순절에 등장한 민족들 사이에서 문학적 연관성을 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행 2:1-11).오순절 사건에 관한 누가의 기록은 모든 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천하각국”(pantos ethnous)에서 온 유대인들로 예루살렘이 넘쳤다고 말한다(행 2:5). 이러한 보편적인 언어(다른 사람도 아닌 주의 깊은 의사였던 누가가 이런 용어를 썼다는 점은 중요하다)는 용어에 대한 현대적 정의와 성경 기록의 차이를 강조한다. 우리는 오순절 그날 예루살렘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하게 글을 쓰지만, 반드시 사실 묘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장하여 기록할 수 있다. 바울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했다(골 1:23). 그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떻게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이 복음을 듣도록 하셨는지에 대하여 썼다(딤후 4:17).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해석하면서 과학적이고 세밀하게 그리고 인류학적인 정의만 가지고 접근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나 사도들이 모든 민족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이 당시에 존재하거나, 그 후에 존재하게 될 고유의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증거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모든 민족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현재 존재하는 고유한 언어를 쓰는 민족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민족은 복음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멸종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통용되는 모든 민족의 정의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충족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생각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도 하기 전에 죽은 모든 아기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이야말로 미전도 종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미전도 종족을 대표하는 아기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선포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계 14:6). 그런 주장은 선교에 대한 동기 부여를 약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말하는 모든 민족은 이 시대가 끝날 때 존재하는 모든 민족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비약적인 주장으로 보인다.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1세기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그때는 없었는데 지금 새로게 생긴 새로운 언어는 어떤가?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도 고려해야 하는가? 보좌 앞에서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를 동시에 다 포함해야 하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그룹은 한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두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복잡한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모든 선교사와 연구 그룹이 세계에 존재하는 민족을 정의하고 계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성서 신학적으로 모든 민족을 바라보면 바로 해결될 수 있다.선교적으로 중요하다열방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이 선포된 적 없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접 선교사로 가거나 아니면 보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가? 그렇다! 지리적 또는 민족 언어 범주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 당연하다! 사도들 자신도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 국가(스페인) 또는 민족 그룹(스구디아)을 고려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민족 그룹에 중점을 두는 과정에서 우리는 선교 방법을 수정하느라 선교 사명 자체를 희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복음전파, 세례, 교육, 교회 설립 및 지도자 양성)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사명을 마무리하는 것(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마태복음 24장이 마태복음 28장을 잡아먹어 버렸다.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략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선교에 필요한 자재 및 인력, 자원이 빠져나갔다. 복음이 일단 “도달한” 국가에는 신학교 하나 세우고는 그냥 방치했다. 가장 힘들고 많은 손이 가는 일, 유능한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은 그냥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선교 연구는 이제 민족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게 되었다. 선교 보고는 이제 전도를 강조하고 우리의 방법은 속도에만 중점을 둔다. 빠르게 교회를 증식하는 접근 방식이 발전함으로 서구의 선교 방식을 장악했고 동시에 세계 교회를 약화시켰다.이 모든 것이 다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슬픈 것은 복음이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선교 지역은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 그 지역에 사는 민족이 다시 미전도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교 사명을 완수하는 데 충실했는가? 핵심은 무엇인가?당연히 우리는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야 한다. 맥가번과 윈터가 제기했던 선교에 대한 수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 미전도 종족을 위해 삶과 사역을 다 바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또한 인류학을 선교 사역과 연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학문은 사탄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그러나 핵심은 우리가 세상과 세상 속 민족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선교 목표를 정해야지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선교 노력을 하고, 선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복음을 들어 본 적 없는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오래 머무르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민족으로 분류하고,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선교를 정의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예수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어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우리를 보내신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3 Words That Changed Missions Strategy—and Why We Might Be Wrong번역: 무제
선교전략
윈터
미전도
맥가번
핵심
이방인
아브라함
언약
사명
진정한 기쁨의 근원
by Matt Smethurst
2020-01-29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순종이 항상 기쁜 건 아니다. 올바른 순종은 기쁨과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항상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싶다. 성경 전체에 기뻐하라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언가 이상하다. 기쁨은 행동이 아니라 감정이 아닌가? 느낌을 어떻게 명령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이런 경우가 많지 않을까?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생각하지 않는 문제를 한번 다뤄보자.창조의 기쁨으로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행복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 기쁨은 있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세 위격이 한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교제하며 신성한 기쁨을 나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했을까? 뭔가가 부족해서 보충할 피조물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다. 천지 창조는 기쁨의 폭발이고 넘쳐남이었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게 아니었다. 이 점을 잠시 생각해보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놀라운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도 하나님의 넘치는 기쁨의 결과이다. 삼위일체 세 위격의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피조물과 무한한 기쁨을 나누기로 결정했다.이러한 신학 정보가 성경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쓰인 책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부수적인 게 아니다창세기 1-2장의 모습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시간은 짧다. 지금 우리는 어둠과 죄가 만연한,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한 창세기 3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아직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면 계속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성경이 왜 그렇게 긴지 궁금한 적이 있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오래 참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 대한 긴 이야기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래 참으실까?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계획된 일을 신중하게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과 자신의 끝없는 기쁨을 나누는 바로 그 계획이다(계 7:9).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힘든 일을 이겨낸 성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도 아니다. 기쁨은 인내하는 것이다. 기쁨은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기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기쁨은 인생의 거친 물결이 우리를 위협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탄 배의 복원력이고, 폭풍 속에서 붙잡는 닻이며,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이다. 기쁨은 성경 속의 사소한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도 그 구원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잠시 살펴보자.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죽음이 무엇인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교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2 12).성경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 15:16).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속의 진짜 기쁨이 요란한 잔치와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문화가 주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기쁨은 내 자신이 기준이 되어 나의 말을 듣는 것에 있지 않다.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진짜 기쁨이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할 때”(시 1:2),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그리고 말씀 속에서 퍼내고 퍼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을 찾을 때 진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똑같은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여기 그가 아버지에게 기도한 내용이 있다.“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요한의 말도 살펴보자.“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 1:4).계속해서 구절 속에 나오는 후렴구를 알아차리겠는가? 이것, 이것, 이것 - 바로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또는 요한의 글을 통해서 나오지만,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호흡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쁨과 그 생명이 말씀 속에 들어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목적, 그러니까 성경의 목적은 당신의 마음에 기쁨의 홍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기쁨이 말라갈 때성경적인 기쁨은 겉모습으로 활기차게 보이고,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다. 지옥은 그런 사람으로 가득하다. 진정한 기쁨은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나는 성경을 읽는 기쁨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진다.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기쁨이 된다. 그것이 훈련의 본질이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단번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기쁨은 우리가 왕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고,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그 날까지, 그래서 영원한 기쁨으로 가득해질 그 날까지 멈추지 않고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사 33:17; 고전 13:12).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al Joy Has an Address번역: 무제
생활
감정
창조
훈련
죽음
복음
성경
구원
기쁨
유대인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
by Adam Stewart Brown
2020-01-28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매년 여름 보솔레일 섬(Beausoleil Island)에서 2주간 야영을 했다. 호수가 잔잔한 날 물이 맑은 곳으로 가면 4야드가 넘는 깊이의 호수 바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하얀 물보라가 칠 때면 텐트를 친 호숫가의 불 옆에 앉아 다음날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책이 보트이고 독서가 그 보트를 타고 항해하는 것이라면, 파울라 프레드릭슨(Paula Fredriksen)의 신간인 ‘기독교인이 유대인이었을 때: 첫 번째 세대’(When Christians Were Jews: The First Generation)를 읽는 것은 금광을 표시해놓은 지도를 손에 들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항해하는 엄청난 모험이 될 것이다. 학문적인 측면으로만 본다면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것은 많지 않다. 프레드릭슨의 책은 정교하게 기술되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추구하는 목표에 있어서 명확하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난파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정통 교리가 주는 안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프레드릭슨의 기본 전제는 좋은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유대인 운동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진실을 재발견하려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권위자가 아니다. 기독교 첫 세대의 재구성보스톤 대학에서 종교학을 연구하는 프레드릭슨은 바울 서신서,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당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했다.그녀의 논지는 원래 “예수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가 군주가 되어 종말론적 다윗 왕국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는 유대인 종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왕국이 실현되지 않자 그 운동은 빠르게 적응했다. 네 단계의 확장이 이뤄졌는데 처음에는 유대인, 예루살렘 거주민, 예수 공동체였던 것이 오늘날 “기독교”로 알려진 이방인 중심의 글로벌한 예수 제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프레드릭슨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가 대관식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서기 30년경) 처음으로 종말이 좌절되었다. 종말에 대한 환상이 두 번째로 깨어진 것은 예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고 중단되었을 때였다(서기 30-32). 세 번째 타격은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성전을 더럽혔을 때,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가증한 것”이 분명함에도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은 묵시적인 종말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였다(AD 39-40). 이방인을 통한 기독교의 시작으로 연결된 마지막 실망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지만, 영원한 왕국이 예루살렘에 도래하지 않았을 때였다(AD 70).프레드릭슨은 깔끔하고 강력하며 잘 정리된 이론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기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1. 그녀의 이론은 성경의 무오함을 무시한다프레드릭슨에 따르면 베드로전후서와 야고보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쓴 게 아니다. 또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예수가 다시 올 거라는 바울의 기대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복음서는 고작해야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에 쓰인, 왜 하나님의 왕국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수정한 기록에 불과하다. 가장 늦게 쓰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애초 진짜 예수가 주장한 종말론적 가르침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를 합법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프레드릭슨은 성경을 진지하게는 받아들이지만 믿음으로 받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그녀의 회의적 시각은 우리가 왜 그녀의 결론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준다. 프레드릭슨은 말씀 앞에 복종하기보다는 행여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말씀의 배경이 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한 마디로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의 정신을 거부하고 있다. 2. 그녀의 이론은 말씀 속 예수를 역사 속 예수와 대치시킨다프레드릭슨은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사회학적 목적을 위해 예수가 하지도 않았던 말과 행동을 성경에 기록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성경의 어느 부분이 역사적이며, 어떤 부분이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순간, 우리가 딛고 있는 믿음의 땅은 빠르게 침식해버릴 것이다. 성경 속 예수가 다름 아닌 역사적인 예수라는 확신은 정통 신앙의 근간이다. 3. 그녀의 이론은 부활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 프레드릭슨은 부활한 예수를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만남이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예수 운동을 태동시킨 부활의 객관적인 권위를 무시한다. 만약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진짜로 살아났다면, 곧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주장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몇 달에 걸친 집단 환상을 경험한 것에 불과하다면, 예수 운동은 단지 사회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은 프레드릭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4. 그녀의 이론은 예수의 생애 이후에도 다윗 왕가를 요구한다프레드릭슨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출생 이야기가 불일치한 것처럼 주장함으로 나사렛 예수의 족보 배경은 그의 죽음 이후에 다윗 혈통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다윗 혈통으로 바꾼 것은 예수 공동체가 정복하는 왕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군인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예수 자신의 역사적 모습과 사명에 모순된다.강철 막대로 세상을 정복할 다윗 혈통의 왕을 기대했다는 그녀의 해석은 옳지만(시 2). 구약은 또한 고통받는 종의 오심을 기대했다(사 53). 프레드릭슨의 주장과는 달리 예수를 따랐던 공동체는 예수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이해에 상충하지 않는 두 가지 형태의 기대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막 14:60-62).5. 그녀의 이론은 4세기,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신격화를 주장한다양자됨(sonship)에 구약의 구절을 활용하고, 또 고대 로마 황제 숭배 관습에 호소함으로써 프레드릭슨은 예수의 신성한 아들 됨에 관한 바울 서신서의 모든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다윗 왕가의 가계도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레드릭슨에 의하면 예수는 성경이 쓰이고 한참이 지난 4세기에 들어서야 이방인이 만든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4세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프레드릭슨은 바울이 예수를 완전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주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바울 서신서 외에 다른 많은 신약 성경에서 드러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고, 하나님과 동등한(co-eternal and co-divine)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비록 그녀가 왕의 혈통이라는 구약 속 양자됨의 측면을 올바르게 해석했지만, 시작부터 예수에게 온전한 신성을 부여하는 성경 본문 전체와 구약의 구절을 상호 연결해서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앞을 조심하라유대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레드릭슨의 연구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녀의 사회 역사적 재구성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성경의 불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당신 지적 수준과 신앙의 확고함을 먼저 확인하라. 그리고 믿음이 충만한 멘토를 꼭 곁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될 폭풍우를 함께 지나야 한다.* 아담 스튜어트 브라운(Adam Stewart Brown) 박사(PhD)는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Southshore Bible Church의 담임 목사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Christians Were Jews번역: 무제
복음
율법
그리스도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팀켈러
신앙
제자훈련에 상보주의가 중요한 이유
by Jonathan Leeman
2020-01-27
목회자들과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호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가 기독교 제자훈련에 있어 중요하다. 나는 상호보완주의가 성경적이라 믿는다. 이 방향으로 제자훈련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성숙한 그리스도인 남성과 성숙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둘째, 교회 안에 경건한 남성상과 여성상을 보여주는 실례들이 필요하다. 셋째, 이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고 갈 목회 전략이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입장만 집중하여 논지를 전개해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논의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나의 생각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상이한 영역들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과 신학적 차별성우선 제자훈련에 대한 상호보완주의적 신학의 통찰력에서 시작해보자. 내가 섬기는 교회의 장로들은 결혼에 관련하여 예비부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준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주 되심과 그의 통치하심이 이 땅에 임하도록 함께 애써야 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을 보면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한다. 남자는 동산으로 향하나, 여자는 남자를 향하고 그를 적절하게 돕는 배필이 되도록 하셨다. 여자가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를 모두 드려 남자가 경영하는 일을 촉진하도록 하신 것이다. 반대로 남자는 여자의 은사가 최대한 발현되도록 도와서 그것이 땅에 묻혀버리지 않게 해야 한다. 한 사람이 권위를 갖는 구조적 관계인 결혼 안에 들어가 있는 남자와 여자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 안의 미혼 여성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듯 교회 안의 모든 남자에게 복종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직장에서 일하는 기혼 여성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기혼 남성은 집, 교회, 직장, 또는 다른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여성들과는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남성이 젊은 남성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후배 여성에게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질문들이다. 주일학교, 소그룹, 또는 귀납적 성경공부 등에서 다룰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을 키우려면 창세기 2장이 성경의 다른 본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가정, 직장, 교회 및 공공 영역이 지닌 독특성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우리는 함께하는 신자들이 그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각기 다른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남성적으로’ 그리고 ‘여성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삶의 영역: 지역 교회의 예지역 교회의 경우,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는 남성성이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말씀을 배우고, 말씀 사역을 증진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모든 남자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든 남자가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가르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예: 각 가정에서). 행정의 은사나 관계 형성의 은사처럼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말씀 사역을 장려할 수 있도록 모든 남자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가족을 차에 태우고 가버리는 수동적인 남자들로 가득한 교회가 아닌, 말씀 사역을 촉진하기 위해 앞장서는 남자들로 가득한 교회를 상상해보라. 남자들이 이 일을 강단에서, 음악사역에서, 아이들사역에서, 예배 후 2부 순서에서, 전도사역에서, 돌봄사역에서 행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감히 말하건대 ‘바로 그런 교회’야 말로 경건한 여자들이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남자들이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리더십을 행하는 일을 자주 맡게 된다는 뜻이다. 남자들이 교회라는 동산에서 씨를 뿌리고, 땅을 일구며 열심히 일하는 만큼,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그 남자들을 도우며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여자들은 존경할만한 남자들의 리더십을 따르며 이 일을 한다. 남자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영역까지 말씀 사역을 확장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지역 교회라는 영역에서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를 설명했다. 그러한 사유로 다음 세대 신자들이 지역 교회 사역에 참여하도록 제자훈련을 할 때 남녀 구별을 없애는 것은 곤란하다. 말씀 사역을 증진 시키는 일에 우리 모두 애써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차이도 엄연히 존재한다. 남자들은 리더십을 행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여자들은 조력하고, 격려하고, 도울 수 있도록 가르침 받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모든 영역에 있어서 경건한 남성성을 추구하는 남자들과 함께할 때, 여자들은 경건한 여성성을 더 잘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이 그리 하지 못한다면 이는 대부분 남자의 잘못이다.목회적 전략신학적 통찰력에서 제자훈련을 위한 목회적 전략으로 옮겨가자면, 교회 지도자들은 아이들과 청소년 프로그램에서, 남성과 여성 사역에서, 또한 교회 설교 강단에서 남녀의 성숙함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 생활의 많은 부분은 가르침으로 채워진다. 그러므로 하나씩 다시 되새겨보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각 영역에 대한 당신 교회의 가르침은 남녀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는가, 아니면 성경적인 남녀의 다름을 지지하는가?가르침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은 양 무리 안에서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의 좋은 사례를 찾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칭찬해야 한다. 어떤 남자들이 장로로 인정받는가? 공적인 목회 기도 중에 언급되는 여자들은 누구인가? 어떤 남자와 여자가 청소년부의 리더로 세워지는가? 상호보완주의에 대한 논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갈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인 여성이 남자 고등학생들을 가르쳐도 되는가 하는 논의에 집착하면서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묻는다. 적합한 경계선 긋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은 마치 사귀고 있는 남녀가 “우린 스킨십을 얼마나 할 수 있지? 손잡는 것까지? 키스까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그런 질문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젊은 남성들과 여성들 가운데 성경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세우는 것에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사귀는 남녀는 “스킨십을 어느 선까지 할 수 있을까?”라고 묻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서로를 더 잘 섬기고 결혼을 위한 준비를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 여자 고등학생들이 성숙한 여자로 자라고, 이 남자 고등학생들이 성숙한 남자로 자라기 위해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위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자. 성인 여성들이 남자 고등학생들을 가르쳐도 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단지 그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남자들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또한 교회 안의 여자 고등학생들이 교회 안의 남성 리더십을 사랑하고, 응원하고, 지원하는 것을 배워가기를 진실로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을 아이들 앞에 리더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 신중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사랑하고 주도적으로 리더십을 실천하는 성인 남자들을 세워 청소년부 전체를 가르치도록 하고, 성숙한 여성들을 세워 그 사역을 지원하고 돕도록 할 것이다.상호보완주의, 그리고 제자훈련의 목적일반적으로 상호보완주의가 기독교 제자훈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일종의 목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남자로서, 나는 내 주위의 다른 남자들이 리더로 솔선수범하는 자가 되고, 용기를 내고, 다른 이들을 보호하며,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도록 하고자 한다. 반면 내 아내는 주위의 여성들이 지지자, 돕는 자, 조력자, 상담자, 또는 팬(fan)이 되고, 가끔은 꾸짖는 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나는 남자들이 이 일을 교회, 가정, 그리고 가능하면 어떤 곳에서나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내 아내는 여자들이 이 일을 교회, 가정, 그리고 가능하면 어떤 곳에서나 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더 어려운 질문은 성경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는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이러한 본보기 사례들을 키워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상호보완주의와 복음이러한 다른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할까?’. 그렇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한 세계에 이러한 다른 모습을 심어놓으셨다. 왜일까? 모든 피조물이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울도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사랑 안에서 복음을 그려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경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르치면 복음에 대한 이해도 쉬워진다. 본보기 사례들이 없으면 복음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이는 양이나 제사에 대해 전혀 배경 지식이 없는 정글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설명해야 하는 성경번역자의 딜레마 같은 것이다. 복음을 증오하는 자들이 남자나 여자의 다름을 무시하고 똑같은 것처럼 만들어서 복음을 흐릿하게 만들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제자훈련을 상호보완주의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호보완주의를 거부하는 인식 안에서 제자훈련을 한다면 믿음에 유익이 아닌 해가 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Why Complementarianism is Crucial to Discipleship번역: 이정훈
영성
신앙과소명
제자훈련
상호보완주의
통찰력
차별성
전략
상보주의
상보성
평등주의
왜 구원의 투구라고 할까?
by Iain Duguid
2020-01-25
이 투구는 공격으로부터 날 지켜주는 것. 하지만 날은 덥고 투구는 무겁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 그래서 벗어 던지네.길버트(Gilbert)와 설리반(Sullivan)의 합작 오페라인 ‘이다 공주’(Princess Ida)에 나오는 인물 중 하나가 결투를 시작하기 직전에 이렇게 노래한다. 필자가 펜싱 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무딘 플뢰레(foil)를 쓰는 펜싱 시합이라 해도 요구되는 장비를 착용하면 정말 덥고, 무겁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노래에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펜싱에 동반되는 위험을 알고 있다면, 필요한 장비를 반드시 구입하려고 할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는 뭘까? 어떤 인생을 목표로 하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원한다. 인생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옷차림도 간편하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헐렁한 슬리퍼와 같은 마음가짐이다. 그들은 강력한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매 순간 깨어 있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영적 안전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저 무심히 햇살이나 즐기며 종일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할 뿐이다.구원의 투구바울이 “구원의 투구”(엡 6:17)라 부르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걸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투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의 호심경처럼, 구원의 투구도 이사야 59장 17절에서 묘사된 전사(warrior)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빌려온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자로서 모습은 이사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자기 백성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모든 대적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적인 그들의 죄, 그 죄로 인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이 투구를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완전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이 쓰는 이 투구는 구원의 확실한 소망이다.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투구를 분실해버린 듯하다. 대부분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망”하는 수준인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것은 전쟁에 나갈 때 투구 대신 햇볕만 가리는 헐렁한 모자를 쓰는 것과 같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그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결국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식의 모호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안정된 확신을 가리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있다(벧전 3:15). 반면 자신이 천국에 갈 것 같다는 모호한 느낌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어떤 전도 프로그램에서는 “만일 당신이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묻게 한다. 많은 이들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혹은 “저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 답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불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한가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결정된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선한가? 인생 후반기에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악한 일들을 볼 때, 내 개인의 노력과 공로에 의지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 자신의 선함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결단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고도 견고한 소망성경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라고 말한다. 요한은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길 바라며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생명이 있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영생은 그의 아들 안에 담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와 더불어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동시에 천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천국을 얻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면 우리에겐 언제나 불확실성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천국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국을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선하심을 받고 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악을 그분께 맡기면 분명 천국을 얻은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붙이면, 우리가 누릴 영생에 대해 전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제대로 쓴 것이고, 이제 삶의 폭풍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삶은 고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방이 고난과 유혹으로 포위당해있다. 외적인 환란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도 씨름해야 한다. 전투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갑옷으로 무장하고 삶의 환란을 대할 때, 흑암의 세력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해도 전장의 안개가 걷히면, 소망 안에,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is the Helmet of Salvation?번역: 이정훈
복음
변증
소망
천국
확신
그리스도인
이사야
명절에 만난 가족 간 갈등 해소법
by Joe Carter
2020-01-24
17세기 정치철학자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시민 사회가 없다면 인간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될 것이라 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명절 가족 친지 모임 때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경험한다.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기도 전에, 선물 상자들을 열어보기도 전에, 우리는 옥신각신하며 부모/형제들과 상처를 주고받는다. 최초의 인간 갈등이 가족 내 갈등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는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담이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 아내인 하와를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창 3:12), 그들의 두 아들 중 첫째가 둘째를 살해했으며(창 4:8), 이는 결국 성경에 나온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가족 내 갈등에 휘말리셨던 적이 있으셨다(막 3:21). 리차드 프랫(Richard Pratt Jr.)은 “창세기 초반부는 오늘날 가정생활이 거의 모든 면에서 망가져 있는 이유가 인류 최초의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임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우리 가정을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가정은 그 시작일로부터 이미 깨어져 있다.”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이들이 계속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라면 죄의 속성을 가진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녀들이 자기 친구들보다 자신의 형제자매와 더 많이 싸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연구자인 사만다 펀치(Samantha Punch)는 형제자매 관계란 어떤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형제자매 관계는 인간관계가 어디까지 악화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한다. 펀치에 의하면, 이 관계 안에서 “분노와 짜증은 여과 없이 표출되고 친절과 인내는 등한시된다.” 연구에 의하면 3세에서 7세 사이의 형제자매가 함께 있을 경우 한 시간에 평균 3.5회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 싸우는 시간을 합하면 평균적으로 시간당 10분이다. 그러므로 하루 열두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 어린 자녀들은 평균 두 시간을 싸우는 셈이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성인 형제자매들 역시, 함께 거주하거나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경우 갈등과 대립적 경쟁을 경험한다고 한다. The Atlantic 기사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갈등 양상은 형제자매의 연령차가 적은 경우, 또한 동성(同性)일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렇기에 가족 내 갈등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계는 우리 모두 죄인이고 이로 인해 우리의 가정이 깨어져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간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는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 가족을 향한 그의 명령을 깨닫기 위해 계속하여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 가족 간 갈등을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원칙들이 있다. 당신의 역할을 알아야 한다갈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파괴하거나 회피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남편과 아버지(엡 5:25–33; 골 3:19, 21; 벧전 3:7), 아내와 어머니(엡 5:22–24; 골 3:18; 벧전 3:1–6), 그리고 자녀(엡 6:1–3; 골 3:20)의 의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헌신적으로 순종하라.자녀가 있는 경우 이는 더욱 중요하다. 당신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녀도 그 길을 따를 것이다.교제의 의무우리는 보통 “교제”라는 말을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회합을 뜻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피상적인 수준에서 사람들과 교제한다. 하지만 신약에서 이 용어는 더욱 풍성한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기독교 가정 안에서의 교제에 적용될 수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사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요일 1:3). 당신 가족들도 신자라면 가족 내의 관계는 단순히 가족적 유대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요 딸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들의 형제요 자매이다. 이는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문제에 접근할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갈등 상황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우리는 이것을 가족 구성원 대 가족 구성원으로 풀어야 할 문제인지, 아니면 신자 대 신자로 다루어야 할 문제인지 판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자 관계나 손위/손아래 형제 관계처럼 가족 내의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갈등을 해결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가족 밖의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에서처럼 좀 더 동등한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판단해야 한다. 가족 관계와 신자 간 관계는 결코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이 두 관계는 어떤 경우에는 겹치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적용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가족 구성원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신자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갈등 상황에 대해 좀 더 선명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바울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고 말한 것처럼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는 것인데, 이는 내가 가진 힘과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 사태가 발생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저 그 자리를 피하셨다(눅 4:28–30). 자신에게 위력을 행사한 이가 누구이든 예수께서는 그를 힘으로 제압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셨기에 사람들과의 대결을 피하셨다.불필요한 갈등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잘못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넘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소한 모욕과 무례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용서해버리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라고 말한다.하지만 용서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갈등 역시 존재한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학대를 참거나 다른 이들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삶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체로 인간관계의 갈등에서 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끝없고 피할 수 없는 전장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 우리 자신,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갈등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전(前) 대통령은 언젠가 “평화는 갈등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이 갈등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갈등을 평화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Handle Family Conflict This Holiday Season번역: 이정훈
가족
명절
갈등
용서
역할
교제
화목
토마스홉스
관계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 치유하기
by David Gibson
2020-01-23
죽어가는 교회는 화난 언어를 사용하고, 차별하고,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은 어디에서 오는가? 둘로 분열된 마음에서 온다. 둘로 나누어진 자아,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는 겉으로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면의 이중성(double-ness)이 어떤 형태로 외면에서 드러나는지 살펴보자.“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우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 둘로 나뉠 수 있다.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둘을 서로 갈라놓는다. 교회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설교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화요일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명령한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야고보서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유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우리 중 일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를 사랑하지만, 다른 일부는 부와 명성 그리고 특별한 지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있는 영광에서 둘로 갈라서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우리는 믿음과 선행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가 없이도 다른 하나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왜 그럴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분열하는 그 선이 다름 아닌 우리의 입술까지 나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말은 형태와 내용에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세상이 교회 안에 있을 때우리는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하나 되라고 한 곳이 두 개로 나누어진 이중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서신서의 핵심은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방에 있는 부자 또는 가난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있어서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4).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이 진짜 문제이다. 바로 이 진짜 문제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교회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눈을 감는다. 야고보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건조한 의학적 처방을 내리는 것, 그 이상을 보여준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간음이라고 부른다. 간음은 이중성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 왜곡되어 두 개로 변형된 것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젊은 부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모험을 함께 시작했다. 새 아파트의 현관에서 벨이 울린다. 문을 열자 남편이 몇 년 전에 사귀었던 애인이 거기 서 있다. “안녕, 자기랑 같이 몇 년 살려고 왔어.” 아내가 놀라서 소리를 치기도 전에 젊은 남편은 옛날 애인을 끌어안고는 말한다. “정말로 재미있겠다. 우리 같이 진짜 멋진 가족을 만들어 보자고!”신부가 왜 울고 있는가? 시기심 때문이다. 거룩한 시기심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진짜 사랑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침대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다. 당신은 세상과 결혼한 사람이다. 세상은 부자를 좋아한다. 세상은 싸우고 죽이고 더러운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하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할 때, 그 사실은 당신이 사랑에 이중적인 인간임을 보여준다. 당신이 진짜 믿는 것은 무엇인가?야고보서가 폐부를 찌른다고 생각하게 한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툼, 절제되지 못한 혀, 우리 속의 분열, 그리고 이 서신서 속에 있는 또 다른 수많은 증상은 우리가 하나님 속이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주님, 저는 온전히 당신만을 따릅니다.” 말은 얼마든지 이렇게 한다. 그런데 행함을 보면, 우리가 하는 결정을 보면 나는 온전히 나 자신만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야고보서는 가장 아픈 서신서이다. 내 친구 앤디가 말한 것처럼 야고보서는 의사와 같다. 그 의사는 우리의 말과 삶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자세히 조사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진짜로 믿는 게 뭔지를 드러낸다. 마치 발진과 기침 그리고 거친 숨소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의사와 다르지 않다. “문제가 심각한데요.”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교회에서 몇 달만 같이 생활하게 해주세요. 그럼 내가 잘 관찰하고 살펴봐서 당신들이 진짜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겠습니다.” 야고보서는 또 말한다. “당신이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볼게요. 교회 지체들과 가족, 자녀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도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당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주겠습니다. 당신이 외부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보겠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를 알려주겠습니다.”우리 속에서 그런 증세들이 발견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알려준다면 우리가 의지할 도움은 무엇이 있을까? 은혜, 하늘이 준 치료제교회를 죽이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은 교회가 어떻게 진짜로 죽는지 알고 있는가?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할 때 교회는 죽는다. 가정에서 복음을 죽이고 싶다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또 부부 관계에서 복음을 죽이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이고, 목요일이잖아. 지칠 때도 됐지.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어리석고 칼과 같이 날카로운 혀를 가진 사람은 변해야 한다. 복음의 사람이라면 결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경고이다. 야고보서는 지금 우리 속에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혀는 엄청난 손상을 입힌다. 선한 행함이 없다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두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서진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처방제를 써야 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이런 질병에 대한 치료제는 회개이다. 정기적으로, 매일 그리고 마음을 쏟아서 회개해야 한다. 이 처방제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목요일이잖아”라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이건 죄야”라고 말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지금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흔히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완곡하고 모호한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건 죄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를 더 좋아하고, 듣기 좋은 식으로 말하고, 도울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태연하게 잘 지내냐며 상대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분열된 마음 치료하기야고보서는 하나님과 함께 더 깊이 들어가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당신이 말하는 것, 타인과 관계 맺는 것, 그리고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도록 가르친다. 도대체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죄와 은혜 그리고 용서에 대한 주제가 식탁이나 침대에서, 커피를 마실 때 오가는 대화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못 했거나, 당신이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야고보서이다. 이 서신서는 내게 도움이 되었고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눠진 마음을 치료하는 것은 복음이다. 은혜이다. 용서해 달라고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말한 게 언제인가? 당신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소리높여 회개한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가? 그게 바로 우리가 치료제를 섭취하는 방법이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 속의 단어를 가지고 지금 바로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자비하시고 또 오래 참으신다. 불안한 연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해보라. 간음이 들통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거기에는 분노가 있고 배척과 갈라짐이 따른다. 환대와 따뜻함의 시간은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간음한 여인들아...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약 4:4,8).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를 치유하신다. 지금 바로 상처 입은 자를 온전하게 회복하고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Symptoms of a Dying Church번역: 무제
교회생활
분열
회개
치유
회복
은혜
치료제
TGC 신임 대표 줄리어스 김이 걸어온 나그네길
by Sarah Eekhoff Zylstra
2020-01-22
- 이 글은 TGC 신임 대표로 선출된 줄리어스 김의 성장 배경과 사역 비전을 설명하는 아티클이다. 여기서는 원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함을 밝힌다.줄리어스 김(Julius Kim)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줄리어스는 미군 부대에 소속된 사립학교를 다니며 한국 문화와 영어를 동시에 익혀 나갔다. 그러다가 열두 살이 되자, 그의 가족은 다시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다.그는 중학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가정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미국에 온 후로는 인종 차별을 겪었다. 그러다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그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저는 지금도 두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문화권 속에 있긴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진 않습니다.”이러한 느낌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보다는 학창 시절에 그러한 느낌이 더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대 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듯, 저 역시 제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엄청나게 씨름했습니다. ‘나도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죠. 그러면서 스스로를 미워했습니다. 제게 있는 놀라운 재능이나 강점 그리고 기회는 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그렇게 지나온 시절은 마치 유배지에 있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한 마디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하지만 줄리어스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두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이방인처럼 살게 된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많이 있었다는 이점이다. 또 하나는 열두 살 때 집에서 쫓겨나 잔혹한 전쟁 가운데 생존한 후로 두 번이나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아버지가 자신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 주었다는 이점이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타문화권 속에 살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거운 경험을 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갔다. 그러면서 어떻게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기독교인이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는 나라에 살다 보면, 신자들은 때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세속화도 가속화되면, 점차 유배지로 추방되는 기분까지 맛보게 된다.그러나 줄리어스는 바로 그 경험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아버지의 회심그처럼 나그네로 살아가는 비결을 줄리어스는 그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원래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난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호의호식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곧 줄리어스의 할머니)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에게 쫓겨나 다른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아버지가 찾아와 불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식량을 구하거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그러다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해서 철수하게 되자, 그는 정부가 지원하는 무상 교육과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한 친구의 인도로 마을에 세워진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명목상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밤이면 교회에 가는 아들이 집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이후 1950년 6월에 북한군이 쳐들어오며 전쟁이 터지자 학교와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에 두려워진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비록 아버지는 자신을 쫓아냈고, 어머니는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궜으며, 나라는 그를 안전히 지켜 주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시련은 그의 믿음을 좌초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경건한 생활1959년에 아버지는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약 10년 후 줄리어스가 태어났다.그러다가 줄리어스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와 공군 제트기에 장착할 컴퓨터 메모리 시스템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회사는 전성기 무렵에 직원을 천 명 가량이나 두었다.당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지역 교회의 목사를 초대해 복음을 전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줄리어스의 증언에 의하면 “수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줄리어스는 아버지가 직원들을 어떻게 돌보는지, 또 지역 교회의 사역을 어떻게 후원하는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평신도 리더로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며 자라게 되었다.“아버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멘토입니다. 그 경건한 생활이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남겼죠.”그런데 1980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줄리어스는 자신의 짙은 피부색과 검은 눈동자가 다른 이들과 달라 두드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관심을 두는 문제나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선호하는 집안 장식이나 주말 활동 등도 모두 미국인 친구들의 생활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처럼 줄리어스의 가족은 주류 문화권에 속하진 못했지만, 다른 한국인 가정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1980년에 캘리포니아로 돌아올 당시 그의 가족은 똑같은 바다를 건너온 29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 대열에 속하게 되었다.그 이민자 물결은 1965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이 해제되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970년에 3만 9천 명 정도였던 한국인 이민자 수는 1990년에 56만 8천 명으로, 2010년에는 110만 명으로 늘어났다.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미국으로 넘어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 초기 한국인 이민자들은 대체로 야망이 크고 똑똑하다는 등 공통점이 많았다. 그리고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엮어진 커뮤니티를 이루어 한 동네나 교회 혹은 가정에서 자주 모였다.줄리어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주일 밤이면 3,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늘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죠.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성경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에 가서 백인 친구들과 지내고, 주말이면 이민교회에서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줄리어스의 신학교 동창이자 장로교 목사로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오웬 리(Owen Lee)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한국인다운 애들이 있었는가 하면, 좀 더 미국인다운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애들은 그 중간에 끼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웬의 동생인 로빈 리(Robin Lee)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저는 대학에 가서야 제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혐오감을 지닌 채 오랫동안 살았죠. 백인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말입니다.”오웬은 집에서는 한국 문화에, 밖에서는 미국 문화에 맞춰야 하는 생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이며, 그 현실의 렌즈를 통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문화 속에 있지만,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되죠.”혼자가 아닌 삶이처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낯선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자신과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존재라 할 수 있다.로빈은 대학 시절에 한인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회장으로 있던 줄리어스를 만나 개혁신학에 대한 소개를 받으며 그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줄리어스도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간 이유는 다른 신학교보다 그곳이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목사로서 생을 마감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담임 목사와 아버지의 권면으로 결국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그때 저는 너무 어리고 미숙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목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이전에는 알지 못한 방식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열어 주었다. “새롭게 개혁신학을 알게 된 후로 성경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러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계획하지 않았던 길당시 PCA에 소속된 한인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사용하는 2세 사역자를 늘 필요로 했다. 이에 줄리어스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하며 어느 한인 교회에서 청장년부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그렇게 주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금요일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또 토요일이 되면 리더십 훈련이나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상담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다시 설교를 한 후 온종일 교회를 섬겼다.그 시절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교수들은 그에게 박사 과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그에 대해 줄리어스는 이렇게 답변했다. “목회학 석사 과정도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울 만한 도구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교수들은 한번 기도해 보라며 권면했다.결국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에 가서 존 우드브리지(John Woodbridge) 교수의 지도하에 역사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과정만 끝나면 해외로 나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였다.그러다 박사 논문 제안서를 준비하는 중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전화였다.하지만 그는 일단 20년 정도는 해외에 나가 선교 사역을 해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에게, 최소한 학교에서 기도를 한 후에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줄리어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이 학교가 보여 준 배려에 깊이 감사합니다. 바로 그 초창기 수년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를 용납해 주었습니다.”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설교학과 타문화권 선교, 그리고 목회 사역과 설교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설교학 교과서를 포함한 저술 사역과 일 년 동안 한국에서 가르친 경험을 포함한 교수 사역을 감당하며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에 있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에서 협동 목사로도 섬겼다.그러면서도 그는 좀 더 광범위한 선교 사역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세월줄리어스가 트리니티신학교에 있을 때 돈 카슨(Don Carson)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딱 10년 후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TGC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 시대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는 복음주의 리더들의 연합을 이루는 게 당시 TGC의 목표였다.이러한 프로젝트는 누구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그 성과를 드러내었다.그래서 현재 TGC는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스물한 개 지역의 대표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는 열두 개가 넘는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웹사이트 방문자 수만 1백만 명에서 3천 2백만 명으로 늘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웹사이트가 되었다.그리고 지금까지 TGC 대표를 역임해 온 카슨은 다가오는 6월에 TGC 신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줄리어스가 본격적으로 대표직을 수행하게 된다. 줄리어스는 기독교를 잃어버린 현대 문화 속에 복음을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목사들을 목양하고 교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전 세계에 걸쳐 수행하게 될 것이다.“TGC가 이미 감당하고 있는 사역에 맞아떨어지는 온갖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오신 주님의 섭리가 불가사의할 따름이죠.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려고 지난 세월 그 많은 일들을 허락하신 주님이 그저 놀랍습니다.”세상 문화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오랫동안 미국은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선택받은 땅처럼 여겨졌다. 공립학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었고, 법정에서는 판사가 성경을 인용했으며, 지역 의회에서는 의장이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했다. 나아가 토마스 제퍼슨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은 개신교에,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는 가톨릭에 속했다.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있다. 2007년부터 20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밝히는 미국인의 비율은 78퍼센트에서 65퍼센트로 떨어졌다. 이에 반해 스스로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다고 밝히는 비율은 16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증가했다. 또 낙태와 동성 결혼은 합법화된 반면에 교회 출석과 기도 생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두 다 쇠퇴하고 있다.이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유배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인 조엘 킴(Joel Kim)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우리가 들고 다니는 여권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혹은 우리 이름에 뒤따르는 직함이 아닌 다른 데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곳은 일시적인 집,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있는 무언가를 꽉 붙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물론 세상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러한 삶이 큰 유익을 준다고 줄리어스는 말한다. “그와 같은 삶은 저로 하여금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또 장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결국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온 여정은 줄리어스를 두려움에 위축된 사람이 아니라 그 담임목사인 테드 해밀턴(Ted Hamilton)의 표현처럼 “겁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아내의 고백처럼 “매력적이고 사려 깊으면서 희망차고도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그러한 나그네길이 줄리어스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TGC가 우리의 본향이 이곳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다른 분에게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의 인생과 관계, 우리의 꿈과 목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Unlikely Pilgrimage of TGC’s New President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문화권
정체성
아버지
멘토
이방인
소속
나그네
줄리어스
지속 가능한 설교를 위하여!
by Dan Doriani
2020-01-21
목요일 오후 두 시, 젊은 교회 개척자인 마이클(Michael)은 마냥 늘어져 있다. 마이클 생각에 자기 교회는 살아남아도 자신은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지쳐있었다. 수요일은 밤늦게까지 이메일 답장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자 제자훈련 모임을 인도해야 했다. 늘 같은 방문자와 커피를 마시고는 교회 재정에 관한 점심 회의를 준비하느라 오전을 다 보냈다. 회의는 길었고 녹초가 된 마이클은 주보 자료를 늦게 보내주었다. 설교 본문과 다소 진부한 제목은 있었지만 개요도 없고, 인용할 다른 본문과 설교의 대지도 없었다. 한숨만 나왔다. 예배 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은 찬양, 기도, 간증을 설교 내용과 맞춰 달라는 그의 요청을 이미 오랫동안 무시해왔다. 어떻게 매주 이런 식으로 온 것일까? 매주 월요일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는 “설교 준비”에만 쓰겠노라고 달력에 표시는 해두었지만, 아침에는 늦잠을 잤고, 뉴스, 스포츠, SNS를 훑어보느라고 “중요한 책”인 성경을 읽을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신학교 마지막 학기 생각이 났다. 당시 교수님에게 과제 하나에 대해 기한 연장 요청을 했는데 “자네는 지금 과제물이 여러 개라서 이런 요청을 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가 본데, 목회 현장에 가면 주일 아침은 놀라울 정도로 정기적으로 돌아온다네. 주중에 무슨 일이 있었든, 교인들이 기한 연장을 해줄 것 같은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더 안 좋은 것은, 마이클이 자신이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교 졸업생들처럼 마이클도 한때는 설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신학교에 간 것도 그가 학부 시절에 존경했던 설교자들 때문이었다. 마이클에게는 살고 있는 도시를 섬기고자 하는 부담감, 이 땅의 문화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자 하는 열정 등 많은 것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 년 만에 열정은 소진되었고, 괜찮은 예화는 바닥났다. 신학교 시절 썼던 주해 노트를 재활용해야 했다.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자꾸 미루는 걸까?’ 마이클의 고민이 깊어갔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막에 있는 것처럼 영적인 메마름을 경험한다. 마이클이 정말로 자기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일단, 매주 설교하지 않아도 되는 사역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매번 다른 이들이 해놓은 말씀 연구를 가져와서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다. 했던 설교를 다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 교인들은 매 주일 모든 본문에서 거룩하라, 신실하라, 사람들과 교감하라, 성경을 공부하라, 교회 사역에 헌신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용의 설교만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이클이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중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설교는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게 싫다면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설교를 향한 길 말이다.가장 좋은 길지속 가능한 설교에 관한 짧은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이 글에서, 나는 강해 설교의 밑바탕이 될 뿐 아니라 강해 설교를 풍성하게 해주는 성경 읽기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설교를 위한 가장 쉽고도 좋은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해 설교는 주어진 성경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의 적용을 시도하는 설교를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강해 설교자가 신구약 성경전서를 정기적으로 읽는 것이다. 짧은 본문은 더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며 읽는다. 설교를 풍성케 할 것을 자신의 성경 읽기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메시지는 원문을 번역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 구조를 분석하고,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문맥을 고려하여 본문이 저자와 원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신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는지를 찾아내어 전달해주는 작업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강해 설교를 기피한다. 일단 시작하면 너무도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본문 강해와 실제 적용이 서로 대립적 관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강해의 기교를 잊어버렸거나 본문과 교리를 깊이 다루는 설교에 대한 열정을 잃은 이들도 있다.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마태복음, 또는 로마서 같이 긴 책들은 여러 시리즈로 나눠 설교하면 된다. 잠언의 경우 십 수가지 주제들을 선별하여 충실하게 설교하면 되고, 시편에서는 열 편에서 스무 편 정도의 대표적인 시를 강해하면 될 일이다. 덧붙여 말하지만, 아주 짧은 본문을 극도로 자세히 강해했던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식의 설교를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성경 본문 자체가 주는 단락을 따라가라.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설교 한 편을 구성하거나(삼상 17:1–58), 팔 복 본문으로 설교 두어 편 정도를 쓰거나(마 5:1–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를 본문으로 하여(마 23:13–36) 설교 한두 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면서도 강해 설교자는 본문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드러나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한 번에 몇 절씩만 다루면서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다양한 장점들강해 설교의 강점은 여러 가지다. 강해 설교는 지속 가능한 강단 사역을 다음과 같은 면에서 돕는다.1. 혼자 하든지 교회 직원들이나 동료 목회자와 함께 하든지 간에 강해 설교는 설교자가 수개월 전부터 설교를 쉽게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설교자가 신구약 중 책 하나를 골라 여러 번에 걸쳐 읽고, 좋은 개요서를 한두 권 정도 읽는다. 그리고 해당 성경을 10회, 20회, 또는 그 이상에 나눠 설교할 수 있는 본문들로 나눈다. 해당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깊어졌다면, 이제 시간을 정해 집중할 계획을 세우면 된다. 정해진 설교 본문 하나마다 문서를 하나씩 만들어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문서를 만드는데, 각각의 문서마다 대주제, 핵심 질문, 본문의 개요, 가능한 적용 내용을 기록해 놓는다. 설교자가 각 본문을 충분히 연구할수록 예화, 적용, 신학적 묵상, 그리고 병행 본문들을 발견하고 저장해 두기가 쉬울 것이다.2. 강해 설교는 좋은 연구 자세를 확립하게 해준다. 연구 결과가 여러 주에 걸쳐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에 설교자는 본문 배경 연구에 더 진력할 수 있게 된다. 설교하는 본문의 문법과 어휘에 점점 더 익숙해짐에 따라 번역 능력도 자라게 된다.3.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강해 설교를 통해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다. 또한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켜준다. 성 윤리나 돈 같은 주제를 다뤘다가 괜한 논란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목사가 있다고 가정해보라. 성경이 성과 돈 문제에 대해 정말 많이 언급하기 때문에 제아무리 과묵한 설교자라 해도 그 주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교인들이 “목사님이 왜 저 주제로 설교하지?”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가 좋아하는 주제만 반복적으로 설교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4. 강해 설교는 설교 시리즈와 연관된 주석 등의 자료들을 많이 모을 수 있도록 이끈다. 동역자들이 강단 사역이 향후 몇 달간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기획할 때 예측할 수 있고 - 설교자가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 예배 및 설교 메시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강해 설교는 ‘벌써 목요일인데 설교 준비를 시작도 못했네’하는 끔찍한 느낌을 회피할 수 있게 해준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청중들의 상상력과 교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효과적으로 적용되도록 한다. 말씀 읽기와 설교 계획 세우기를 실천하면 사실과 사건,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사를 교회의 말씀 사역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지속 가능한 설교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폭넓게 읽기(wide reading)와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를 병행하는 것부터 시작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ustainable Preachin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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