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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지닌 한계와 그 너머
by 노승수
2020-02-27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공동체여야 하지만, 현실 교회들은 지역적인 색깔이나 계층적인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목회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빌렘 벤게메렌(W. A. VanGemeren)은 “현실정치”라고 했다. 선지자의 메시지에 백성 대중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현상을 두고 한 표현이다. 예를 들면 가진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진 자의 편으로 더 기울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난한 자의 편으로 더 기울어지는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칼 막스(Karl Marx)는 물적 토대가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유물론에서 비롯된 통찰이지만 놀랍지 않은가? 그가 처한 현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골 3:2). 즉 목사는 가진 자의 편이나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마저 허무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했고(엡 2:14), 실제로 교회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일 때 계층의 갈등이나 양극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네 개나 받았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공감대를 얻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잘 다루었다. 그리스어로 기생충(Παράσιτα)은 “남의 식탁에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묘사는 훌륭하다. 영화를 통해서 모두가 느끼고 공감하지만,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현실로 남아 있다. 교회는 이런 문제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이럴 때 목사는 어떤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고 위의 가치를 구함으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양극화의 문제든지,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문제이든지 말이다. 이런 문제에서 다수의 소리, 회중의 목소리가 목사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벤게메렌이 말하는 현실정치의 구체적인 사례를 성경 속에서 찾는다면 예레미야서에서 볼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까불지 말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라. 이것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과 거기에 편승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다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외쳐댔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는 여러 가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로 인하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았던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를 취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버렸다. 유다 백성의 시각에서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비쳤고, 거짓 선지자들은 애국주의자이자 참 선지자처럼 이해되었다. 이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상황과도 너무 잘 어울린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마치 일본이나 북한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며, 나라를 파는 매국노처럼 보인다. 내부적 논리로는 일본을 혐오하는 것이 더 인기 있을지 모르며, 북한에 대한 경험적 반공주의를 부르짖는 태극기 부대의 메시지가 더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상황을 경험적으로 보면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을 향해 “토착 왜구”라는 표현과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보이며, 보수 진영은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반공 이미지와 기독교가 완전히 결탁한 상황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오늘 우리 사회라면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더 인기 있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던 소리였다. 벤게메렌은 다수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현실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우상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이런 현실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경의 메시지여야 한다. 우리가 물적 토대인 생산수단에 기대어 살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며 목사가 지닌 태도가 중요하다. 오늘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현실 정치화한 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기독교인이 촛불집회와 태극기부대로 나누어 같은 성도들끼리 척을 지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란 단지 설득의 절차만은 아닌 것이다.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목소리는 소수자 문제를 들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가 틀렸다고 한다. 지금 자라는 세대의 젠더 교육에 이런 시각이 가득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과 성경이 하나님과의 관계 왜곡에서 비롯된 죄로 인하여 정죄한 동성애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도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 성경의 메시지는 때로 매국적 상황을 부르기도 하며, 때로 사회적 상식에 반하기도 하며, 다수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기도 한다.목사의 시각은 교회의 양무리를 목양하면서 그들과 시선을 맞추면서도,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간혹 어떤 연로한 목회자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때면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렇다고 젊은 목사들이 무조건 낫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속한 시대의 다수는 대중의 목소리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되고 말 테니까 말이다. 목사는 자신의 속한 그룹의 한계를 넘어 성경에 그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
리더십
벤게메렌
교회공동체
핵심감정
동성애
목회자
현실정치
칼막스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을 돕는 네 가지 팁
by Dominique McKay
2020-02-26
그리스도인에게 직장은 부담스러운 곳일 수 있다.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동료들의 개인적, 영적 필요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감당하고자 하나 일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웃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해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주신 업무도 성실하게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시에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도록 힘쓰라성숙한 어른이라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맞는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시에 출근하는 것은 맡은 직책, 그리고 일하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직장에 다닐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정시에 출근하면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라고 동료들이 장난삼아 놀려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당신은 일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이다(골 3:23–24).오늘날 많은 직장인은 일 중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며 사무실의 불을 마지막으로 끄고 퇴근하는 이가 되려고 한다. ‘절대 그러지 말라.’항상 정시에 퇴근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일찍 퇴근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당신이 업무 시간에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 혹은 동료들과 잡담하지 않고,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정한 시간이 되면 일을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일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업무가 아닌 삶의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2. 함께 즐거워하라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생일, 기념일, 진급, 또는 약혼 등 기쁜 일들이 있을 때도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들과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신의 우선순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롬 12:15). 어떤 직장이든 동료들의 진급, 생일 축하 등에 앞장서는 직원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그 일을 담당하거나,’ 그런 직원을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왜일까? 어느 직장이든 소외감을 느끼거나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은 인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의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축하해주면 그들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직장 밖에서 하는 동료들과의 식사 등 사교 모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하여 주선하는 것이 좋다. 사무실의 스트레스나 각 개인의 가정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편하고 부담 없는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는 동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당신이 주선한 모임에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을 생각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열릴 것이다. 자신을 초대하고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3.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라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마 5:43–45). 동료들이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면 처음에는 동정하는 마음을 갖지만 금방 잊어버리기가 쉽다.이런 경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다. 누군가 어려움을 나누었다면 마음속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라. 만일 충분히 가까운 사이라면 그 사람 앞에서 함께 기도하라.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라면 포스트잇이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그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두고 나중에 꼭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라. 2012년 미국 대선 기간에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하나는 당시 후보였던 릭 샌터룸(Rick Santorum)과 릭 페리(Rick Perry)에 대한 것이었다. TV 토론 테이블에 둘러앉은 두 후보는 대통령이 된 후에 펼칠 정책들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토론을 하고 있었다. 보통 그런 토론에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봐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후보들이 직접 메모를 하곤 한다. 샌터룸이 토론 주제를 의료보험에 대한 것으로 돌리며 본인의 딸인 벨라(Bella)가 겪는 건강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토론은 끝났고, 후보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샌터룸이 페리가 앉았던 토론석 옆을 지나갈 때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는데, 페리가 적은 노트에 “벨라 위해서 기도하기”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기도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가까워지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적이라도 가까워지게 한다. 매일 혹은 매주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을 미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할수록 당신은 더욱 진실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4.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라“일을 정말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마라”(Don’t leave before you leave)는 2013년에 나온 인기 서적인 ‘린 인’(Lean In, 안기순 역, 와이즈베리)에서 쉐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한 말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미래 목표가 무엇이든 현재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한다. 이 원칙은 현재 직장 생활 중인 그리스도인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는 직장인은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들은 동료들이 자신이 못한 일을 해줄 거라 기대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동료들과 상사들은 당신이 직장을 위해 한 것은 없다고 여길 것이다. 오히려 직장이 당신을 지금까지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라고 부르셨는데 이에 반하는 삶의 방식이다(빌 2:3–4). 퇴사가 결정되었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업무에 임하고, 회사가 인수인계 과정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후임으로 올 사람이 업무에 빨리 적응하도록 정리된 업무 인계 서류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퇴사하는가는 직장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만큼 중요하다. 당신은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섬기는 청지기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도미니크 맥케이(Dominique McKay)는 미상원(U.S. Senate)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고 있다. 2012년 Liberty Universit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로 줄곧 의회에서 일해왔다. 제임스 인호프(James Inhofe) 상원의원 사무실, Committee on Education, Workforce in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등에서 일했다. McLean Presbyterian Church에 출석하며 그 교회에서는 여성 사역에 관한 이사회에서 섬기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Practical Tips for Faithful Workplace Witnes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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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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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교회개혁’은 목사를 ‘엄선’하는 것부터
by 장대선
2020-02-25
우리의 신학 현실을 보면, 의외로 교회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즉 교회라 할 때 ‘개별 교회’로서만 이해를 할 뿐,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처럼 부정확한 교회에 대한 이해를 보완(혹은 극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부터 대안을 모색하는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하게 대처할 수 없다.사실 참된 교회는 오직 천상의 교회이며, 그런 교회가 이 지상에서 구현되는 것은 예배당이나 회중들의 규모, 혹은 조직과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가시적 교회’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한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2항)고 했다. 그처럼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으며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서, 그것은 ‘유형적인 교회’(A tangible church)가 아니라 ‘가시적 교회’로서 이해할 때 비로소 교회의 바른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상의 교회, 즉 가시적 교회는 항상 교회의 표지(sign)에 의해 분별이 되니, 잘 알고 있는바 말씀 선포와 가르침,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따른) 시행, 또한 (성경에 근거한 규정적 원리로서의) 권징의 시행이라는 세 표지에 의해서다. 따라서 그런 표지에 연계되는 직분들, 특히 치리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치리장로의 직분은 교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이다.일찍이 개혁된 교회로서 장로교회 정치를 광범위하게 구현했었던 프랑스 신앙고백(1559)은 교회에 관한 고백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의 직원에 대한 고백을 제시한다. 즉 제29조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에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확립된 규율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하면서, 곧장 이르기를 “그러한 교회에 목사, 장로, 집사가 있는 까닭은 순전한 교리를 전수하고, 악덕을 개혁하고 억제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거룩한 집회에서 성인과 아이 모두 교화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바로 이 같은 고백의 기초로부터 교회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시작하고 있다.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 또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바로 교회 직원에 대한 규정(canon)인데, 특별히 목사에 관하여는 무려 57개의 규정으로 목사에 관한 전반을 다루고 있다.그 가운데 1조를 보면 “성직의 조건을 갖추고서 목사로 선택될 사람은 사도들의 규정(Canon of the Apostle)을 지켜야 하므로, 가능한 한 모든 성실함으로 그들이 교리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 점검을 하며, 또한 [그것을] 가르칠 수준이 되는지, 아울러 그들의 행실 또한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2조에서는 이르기를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신자인 경우, 특히 사제와 수도사는 오랫동안 그리고 성실한 질의가 없거나, 교리와 생활면에서 증명이 없거나, 개종한 지 적어도 2년이 지나고 그들이 속한 삶의 자리에서 선한 증언으로 확인된바 없이는 성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지방 대회와 전국 대회의 조언 없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에게 안수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신앙과 인격에 있어 확실한 자가 아니면 목사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피신한 영어권 회중들로 구성된 제네바 피난민 교회의 예배와 치리에 관해 규정한 제네바 치리서(1556) 역시 치리에 관해 규정하면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목사에 관한 것인데, “1. 목사들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기를 “교회가 선출될 사역자를 부지런히 숙고하게 하여 사도 바울이 그 소명을 가진 사람에 대해 꾸짖은 그러한 과실을 발견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장점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임을 맡을 수가 있었고 부지런히 이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라고 한 디모데전서 3장 2-7절 말씀을 목사에게 직접 적용하고 있다.이처럼 16세기 개혁된 신앙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목사에 대한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에 대한 바른 이해였다. 그것 없이는 그 어떤 지엽적인 개혁이나 개선도 아무런 실효성이 없으며, 특별히 가르치는 사역과 다스리는 사역에 공히 참여하는 목사 직분이야말로 아무나 세울 수 없는, 그리고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절대적이고도 중요한 직분이였던 것이다.오늘날 대부분의 교단 현실에서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2조에서 말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목사의 경우에 그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면직의 사유가 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권계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16세기 개혁된 교회들의 치리규정 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을 얼마든지 묵인하며 숨기고서 직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야말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더구나 그런 자에 의해 개혁이 언급되고 개혁신학이 논의되는 일까지도 일어나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치리 혹은 권징의 수준이다. 더디다 할지라도 목사들을 엄선하여 세우는 것이야말로 참된 교회개혁의 시작이자 정도일 것이다.
역사
중세교회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가시적교회
사도들의규정
목사안수
직분
낙심될 때를 준비하라
by Lindsey Carlson
2020-02-24
남편이 목회 사역 이 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과연 목사의 부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회의감에 빠졌다. 쉬지 않고 닥치는 시험을 거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에, 동역자들 사이의 갈등에, 또 나의 죄성 때문에 생긴 회의감과 낙심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깨지고 상하고 또 아팠다. 그 누구도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이런 낙심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정말로 포기 직전까지 갔다. 낙심하여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중에 목사 부인들을 위한 어느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 여자는 나를 몰라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의 남편은 존경받는 유명한 사람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낙심에 빠진 내게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박한 상황에 있던 나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위안의 말 또는 격려의 말을 간절하게 요청했다. “목사 부인이라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 건가요?”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는 목사 부인인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너무도 큰 충격에 부끄러워진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내가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그 목사 부인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사역자 부인은 엄청난 장애물을 만나고 그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한다. 목사의 부인으로 한 달, 일 년, 십 년, 오십 년을 살았더라도 언젠가는 어둠의 시간을 만날 것이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상처를 받았든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이 죄 많은 세상 때문에 절망했든지 간에 그것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속성으로 치유하는 빠른 치유법은 없다. 당신이 낙심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해주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쳐버린 목사의 아내로서 당신이 회복되려면 불평으로 가득한 입술과 절망의 말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 은혜 그리고 상처를 싸매 줄 구원이다.현실을 인정하라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남편이 목사로 사역하는 한 가정이나 공동체 간의 문제,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 등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또 쌀쌀맞기 이를 데 없는 행동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남편이 가졌던 사역의 꿈이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남편의 인격이 공격받고 놀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또 남편의 사역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신실하게 사역하려고 발버둥치는 당신을 버리고 떠나는 친구의 배신을 경험할지도 모른다.이런 힘든 환경은 당신과 당신의 남편, 심지어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역자의 삶에는 교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이 당신을 데려다 놓으셨다고 해도 목사의 부인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평강의 하나님이 아픈 경험을 통해 당신을 성화시킬 것과(살전 5:23) 미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지금 당신을 강하게 준비시키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롬 16:25). 도움을 구하라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낙심했거나 아니면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는 중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는지가 궁금하다면, 하나님이 언제 응답하실지 그 시기가 궁금하다면, 또 도와 달라는 당신의 절규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지가 궁금하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낙심한 사람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런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라. 개인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의 짐을 고백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라.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또 필요하다면 성경적인 상담을 받으라.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믿는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21). 인내하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낙심의 시간에도 남편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당신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당신이 더 배우고 당당히 서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낙심의 시간 속을 지난다고 해도 당신은 생각하는 만큼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 그는 낙심한 당신을 가장 불쌍하게 여긴다. 하나님, 당신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당신의 절규를 듣고 있고 고난의 시간에 도와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능한 조언자이며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줄 최고의 경청자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당신이 고통을 그리스도와 나눌 때 하나님은 당신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세우고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자비함으로 위로하신다. 고통은 영원한 게 아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응답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은 구원한다. 낙심한 마음이 밤사이에 계속될지 몰라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거기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바로 그가 정한 그 시간에, 아침과 함께 기쁨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일지 아니면 죽은 후 영광 속에서 그와 연합할 그때일지는 몰라도, 당신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기 바란다. 함께 할 사람을 찾으라목사의 부인은 격려가 필요하다. 목사 부인으로 십오 년 차에 들어서는 나는 이제야 목사 부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서로 이해하고, 사역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목사 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께 이런 동역자 목사 부인을 달라고 기도하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학적으로 깨어있으면서 또 많은 경험을 가진 목사의 부인을 만나야 한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믿음의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인내심을 위해서는 당신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 때로는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동역자의 모임을 만들라. 낙담하는 시간뿐 아니라 즐거울 때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될 것이다. 당신이 목사 부인이라면, 낙심의 계절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전략을 준비하고, 또 낙심의 계절에도 자신을 격려할 방법을 찾아내라. 낙심의 계절을 맞아 이미 쓰러졌다고 해도 아직 격려를 찾는 데에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당신은 그의 도움과 격려를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을 것이다. 목사의 부인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견딜 힘을 주실 것이고, 당신은 얼마든지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을 잃지 않고 그를 닮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포옹이 필요하다면,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Wife, Prepare for Seasons of Discouragement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낙심될때
준비하라
현실인정
도움을구하라
혼자가아니다
할사람을찾으라
믿음의사역
바울
번영신학에 대해 알아야 할 것
by Joe Carter
2020-02-22
몇 년 전 미국의 우정국(USPS) 검열관들과 미국 국세청(IRS) 범죄 수사관들이 “건강과 부”의 전도자요 신유 사역으로 악명 높은 베니 힌(Benny Hinn)의 사무실을 급습했다. 명성으로만 듣던 힌(Hinn)이라는 인물과 번영신학(혹은 “복음”)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번영신학이란 무엇인가?“건강과 부의 복음” 또는 “믿음의 말씀”(Word of Faith) 운동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번영신학은 예수님의 복음을 왜곡한 것으로써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상급이 늘어나며, 건강과 부도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헌트(Stephen Hunt)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 (번영신학) 중심에는 믿음을 통한 ‘신성한’ 육체의 건강과 번영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는 ‘건강과 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자동적인 신적 권리라는 의미이며, 구원과 함께 얻는 부산물의 한 부분으로서 믿음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죄의 제거뿐만 아니라 아픔과 빈곤의 제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왜 번영신학이 거짓 복음인가?데이비드 W. 존스는 번영신학 교리의 오류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아브라함 언약은 물질적 자격요건의 한 수단에 불과하다. - 예수님의 대속은 물질적 빈곤의 “죄” 까지 확장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얻기 위해 베푼다.- 믿음은 번영으로 인도하는 스스로 만들어낸 영적 능력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번영의 축복을 부어주시도록 촉구하는 도구이다. 존슨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번영신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잘못된 관점을 주기 때문에 거짓 복음이다. 만일 번영신학이 진리라면, 은혜는 쓸모없는 것이요, 하나님도 필요 없는 분이고, 인간만이 모든 것의 기준이라는 의미다. 아브라함 언약, 대속, 베풂, 믿음 혹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번영신학 선생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대가를 지불하는 거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린다.”번영신학은 어디서 발생했는가?번영신학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오순절파(Pentecostalism)의 부산물로서 발생하게 되었다. 작은 텐트 규모로 지역 성도들의 부흥집회로 시작되었으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더 큰 규모의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텔레비전선교”의 등장과 함께 튼튼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모든 번영신학 설교자들이 오순절파 혹은 은사주의파(대부분의 은사주의나 오순절파 기독교인들은 번영신학과는 관련이 없다)인 것은 아니지만, 이 운동은 여전히 주로 부흥 운동가들이나 은사주의 교회들과 관련된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그 밖에 오순절 운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세계 각 지역에서 쉽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누가 번영신학을 설교하는가?현대 번영신학 설교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인물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이다. 신앙요법 전도자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는 오랄로버츠대학교(Oral Robert University, ORU)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전성기에 로버츠는 연간 1억1천만 달러(원화 약 1280억원)의 수익을 창출하기도 하였다.오랄로버츠대학교의 학생이며 오랄 로버츠의 기사로 일했던 케니스 코프렌드(Kenneth Copelan)는 번영신학 교사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이들은 짐과 태미 페이 베커(Jim and Tammy Faye Bakker), 베니 힌(Benny Hinn), 펫 로버트(Pat Robert), 그리고 로버트 틸톤(Robert Tilton)을 포함한 1980년대에 유행했던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번영신학의 교사들로는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T.D. 제익스(T. D. Jakes), 귈러모 말도나도(Guillermo Maldonado), 조엘 오스틴(Joel Osteen), 그리고 폴 화이트(Paula White)등이 있다. 어떻게 번영신학 설교가를 구별할 수 있을까?2014년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번영신학을 식별하는 6가지 핵심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성경적인 고통과 회복에 관한 교리의 부재, 즉 고통 교리의 부재- 자기 부정이라는 명백하고 중요한 교리가 없음- 성경 주해의 심각한 부재- 성경 말씀에서 긴장을 다루지 않음- 지나치게 화려한 삶을 사는 교회 지도자들- 개인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지 않음(미국의) 어떤 이들이 번영신학에 매료되는가?2015년에 유고브(YouGov)라는 기관에서 자신이 “거듭났거나” 복음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미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조사에서 특정 설교자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부유함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증거 인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기도가 당신을 더 부유하게 한다고 믿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백인의 15%, 흑인의 42%, 그리고 히스패닉의 25%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부유함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증거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백인의 9%, 흑인의 34%, 그리고 히스패닉의 24%가 “매우 그러하다” 혹은 “아마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흑인 번영신학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흑인 복음주의자들은 히스패닉이나 백인 복음주의자보다 많이 “매우 호의적”이거나 “다소 호의적”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백인의 10%, 히스패닉의 24%라는 비율과 비교하여 흑인의 70%가 T.D. 제익스에 대해 호의적인 답변을 했다. 크레프로 달러(Creflo Dollar)의 경우 결과는 더 낮게 나타났다. 백인의 3% 그리고 히스패닉의 8%와 비교하여, 흑인의 28%가 호의적인 답변을 하였다. 반면 흑인 복음주의자들은 흑인이 아닌 번영신학 설교가들에 대해서도 더 높은 비율로 선호하는 의견을 지지했다. 그들을 조엘 오스틴(Joel Osteen: 51%, 백인의 22%, 히스패닉의 39%), 펫 로벗슨 (Pat Robertson: 41%, 백인의 17%, 히스패닉의 14%), 베니 힌(Benny Him: 23%, 백인의 4%, 히스패닉의 12%), 그리고 케니스 코프랜드(Kenneth Copeland: 34 %, 백인의 8%, 히스패닉 12%)에 대해서 “매우” 혹은 “다소” 선호한다는 견해가 더 높았다.흑인과 히스패닉 복음주자의 4명 중 1명, 백인 복음주의자 7명 중 1명은 종교활동을 통해 부유해진다고 생각한다. 번영신학을 다루는 자료들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Prosperity: Seeking the True Gospel’이라는 책은 무료로 다운로드 할 수 있다. 또한 TGC, 9Marks, Desiing God, 그 외 다른 웹사이트에서 관련 아티클을 찾을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You Should know About the Prosperity Gospel번역: 정진호
복음
변증
번영신학
스티븐
존슨
오순절파
은사주의파
존파이퍼
설교자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by Barry York
2020-02-21
참된 교회를 구분하는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순수한 복음의 선포, 성례의 바른 집례, 그리고 신실한 권징의 행사. 그러나 참된 교회를 가르는 이런 특징이 매주 회중 예배를 드리는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리고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할까?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교회의 표지(標識, notae ecclesiae)로 알려진 세 가지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특징을 가지는 진정한 목적을 잃을 수도 있고, 또 그 특징들이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잃어버릴 수 있다.가장 먼저 기억할 점은, 참된 교회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이 땅과 하늘에서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모이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지금 여기에서 주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보이는 교회를 구분했다. 참된 교회를 가르는 세 가지 특징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가 진짜로 그리스도에게 속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한다.눈에 보이는 교회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질들과 속성들 그리고 활동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오로지 몇 가지 특징만이 참된 교회를 가르는 잣대로 쓰인다. 흔히 교회를 묘사하는 형용사로 거룩과 사랑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또는 주님의 몸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호칭을 교회에 붙일 수도 있다. 교회는 예배, 복음 전도, 봉사 그리고 빈민 구제와 같은 여러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참된 교회를 규정하는 세 가지 전통적인 특징을 강조할 때에 우리는 교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가? 복음을 설교하고 세례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성찬을 집례하고, 공식적이고 올바른 권징을 행사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회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변증신학 강요’(The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른 교회를 알려주는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목자 되신 진짜 양우리와 늑대의 소굴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종교개혁 내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도 벌어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진짜 교회의 정의를 “우리는 유일하고 거룩하고 통합된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라고 정의한 니케아 신조 속의 네 가지 자질(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에 근거해서 판단했다. 로마 교회는 이 점을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가 채택한 경전과 신조에서 명확하게 했다. “교회의 특징”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교회를 결정하는 네 가지 특징인 하나 됨, 거룩함, 통합됨 그리고 사도성은 개별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교회라면 예외 없이 이런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황의 왕좌에서 이 하나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진짜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니케아 신조에서 표현되었듯이 하나 됨을 구성하고 있다. 멀리까지 넓게 흩어진 수많은 무리가 하나라고 불리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그리고 하나의 세례. 교회는 오로지 한 사람의 통치자와 관리자가 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이고, 영원한 아버지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 통치하고 다스리게 했고, 교회가 그의 몸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존재, 즉 교황은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사도의 자격(Apostolic chair)을 유지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하나 됨이 교황으로 인해서 가능하다는 로마의 주장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모두의 머리가 된다고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이렇게 서술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이 어떤 의미로라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WCF 25.6).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확증할 때 우리는 가장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면 교회는 그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엡 1:22-23; 골 1:18). 그리고 교회는 몇몇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 특징을 만드는 머리(Marker)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는 바로 그의 백성인 우리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면 특히 더 그렇다.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과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물의 상속자, 그리고 세계의 심판자로 선택하고 임명하기를 기뻐하셨다.” (WCF 8.1).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참된 교회라면 당연히 이런 그리스도의 직분(offices)을 제대로 반영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다르게 표현하자면, 머리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왕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정체성과 역할을 함께 나눠 가진다. 그래서 베드로가 교회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기서 우리는 교회도 교회의 주인인 구세주처럼 선지자적이고, 대제사장적이고 또 왕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된 교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세 가지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예배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선지자적인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한다. 신자는 매주 강단에서 경건한 목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 바른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맞게 경건한 삶을 사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행 20:20-21, 26-28). 매주 당신은 교회에 올 때마다 복음을 듣고 싶은 열정으로 넘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당신 위에 있음을 안다는 것은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을 향해 적합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청중은 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기회를 통해서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바른 교회라면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이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모든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나날이 퍼져가는 곳이라고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대제사장적인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돌(living stone)로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벧전 2:4-5). 그럴 때 교회 성도는 모두가 다 거룩해짐으로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들이 교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주님은 각각의 성도에게 성수를 통해 세례를 받게 함으로 세상과 구별한다. 주님은 이제 성찬식을 통해 성도를 양육해나간다. 새로운 성도에게는 새로운 세례가 적용된다. 신앙을 점검하며 주님의 식탁에 앉는 성찬식에 참석할 때마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깨닫고 감탄하게 된다. 성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교회와 함께 제사장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라.왕으로서의 교회는 다시 살아나신 왕의 아들과 딸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권능과 능력을 가진 한 분의 명령을 받아 모든 성도를 제자로 만들어 감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보여줄 수 있다(마 28:18-20). 지역 교회의 신실한 성도로서 당신은 성경의 명령을 배우고 거기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었는가? 경건한 멘토와 지도자가 주는 훈계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삶을 수정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의 교회가 죄악에 빠진 형제를 향해 사랑과 신실한 노력으로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 또 필요하다면 그에 따르는 바른 권징을 행하는가?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가 진정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자를 찾고, 헤매는 자를 데리고 오며, 상한 자를 싸매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세상의 강하고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고 있는가(겔 34:16)? 바른 삶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곳임을 보여주도록 하라. 지금 당신이 참된 교회의 특징이 분명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참된 교회의 특징이 없다면 그건 그 교회에 뭔가 심각하고 무서운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주의 백성 가운데 성령님이 분명히 내주하는 참된 교회로 인도하길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hurch and the Offices of Christ번역: 무제
교회생활
종교개혁
참된교회
교회의표지
변증신학
니케아신조
사도의자격
산돌
직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오스카는 외면했지만,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0-02-20
‘저스트 머시’(Just Mercy), ‘다크 워터스’(Dark Waters, 3월 11일 국내개봉 예정), 그리고 ‘히든 라이프’(A Hidden Life)는 지난번 있었던 오스카상에서 그 어떤 부분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2019년에 나온 이 영화들은 연말에 있는 각종 요란한 시상식에서 사실상 외면받았다. 이 영화들은 선명한 도덕성과 용기를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2019년 팝 문화에서 만나는 좋은 순간을 요약한 글에서, 나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종종 만나는 “정의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열망”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사회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하고, 우리는 현실에서 불의와 악이 가져다주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비록 이런 현실에 있지만 우리는 완전한 정의를 향한 연합된 갈망이 여기저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2019년에는 이러한 정의를 열망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넷플릭스가 만든 ‘언빌리버블’(Unbelievable)과 ‘그들이 우리를 볼 때’(When They See Us)가 특히 그런 작품이었다) ‘져스트 머시’, ‘다크 워터스’, 그리고 ‘히든 라이프’는 우리 삶에서 특히나 중요하고 유익한 정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두드러진다. 정의는 인내가 필요하다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인내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의는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종종 오랜 그릿(GRIT) -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로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투지를 의미한다 - 이 필요하다. 하루 종일 트위터에 글을 쓴다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십 년에 걸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행동만이 정의를 가져올 수 있다. ‘쇼트 텀 12’(Short Term 12)를 감독한 데스틴 다니엘 크레튼(Destin Daniel Cretton)이 메카폰을 잡은 ‘져스트 머시’는 제이미 팍스(Jamie Foxx)가 연기한 월터 맥밀란(Walter McMillian)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월터 맥밀란은 흑인으로 알라바마주에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마이클 조던(Michael B. Jordan)이 연기한 젊은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Bryan Stevenson)이 맥밀란의 변호를 맡았다. 이 영화는 맥밀란 외에도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여러 죄수를 석방하기 위해서 애를 쓴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스티븐슨이 2015년에 발간한 그의 책을 원작으로 한다. ‘져스트 머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수년간의 삶을 감옥에서 보낸 무고한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을 강렬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무고하게 유죄를 받은 이들의 싸움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남아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원더스트럭’(Wonderstruck)을 감독한 토드 헤이네스(Todd Haynes)가 메가폰을 잡은 ‘다크 워터스’는 정의를 추구하는 오랜 과정을 아주 잘 포착한 영화이다. 2016년 뉴욕타임즈 잡지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오하이오주 변호사, 마크 루팔로(Mark Ruffalo)가 연기한 롭 빌로트(Rob Bilott)의 이야기이다. 롭 빌로트는 공개적으로 유해 화학물질을 웨스트버지니아의 파커스버그(Parkersburg) 상수원에 버린 듀퐁(DuPont)과 무려 이십 년에 걸친 법정 분쟁을 벌인 인물이다. 독성에 오염된 물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암, 선천적 기형아, 그 외에도 수많은 병의 원인이 되었다. 두 시간 동안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나이 먹어가는 이십 년의 시간을 관객들이 훑어보도록 만든다. 특히 길고도 힘든 싸움을 벌임으로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게 된 빌로트가 늙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테런스 맬릭(Terrence Malick)이 감독한 ‘히든 라이프’도 정의를 위해 홀로 싸운 한 남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싸운 오스트리아 농부, 프랜츠 에거슈테터(Franz Jägerstätter)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거슈테터를 다룬 것은 ‘60분’(60 Minutes)과 같은 다큐멘터리나 잡지 기사도 없다. 그는 평생 추구하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이야기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며 때로는 살아서 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정의는 주인공이 살아있는(life) 동안에는 숨겨진(hidden) 그 무엇이다. 희망은 미뤄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실로 힘든 현실이다. 종종 정의는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정의는 외로운 싸움이다이 세 편의 영화는 정의를 추구하는 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각각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다.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싸움의 대가는 혹독하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자의 정신 상태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정도이다. 반대자, 비판자, 그리고 적은 사방에 널려있다. 내 편은 거의 없다.‘져스트 머시’에서 스티븐슨은 뼛속까지 인종 차별로 가득한 전체 시스템과 싸우는 한 명의 변호사이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롯은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와 싸우고 있다. ‘히든 라이프’에서 에거슈테터는 그의 확신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라 전체(그리고 교회 기관)와 싸우는 초라한 농부이다. 이들은 싸우는 동안 하나둘 친구를 잃고 또 명성까지 잃어간다. 주인공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들의 싸움이 가치가 있는 건지 의심할 정도이다. 싸움의 과정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내적으로 절망의 시간을 만난다. 어쩌면 냉소하는 자들이 맞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인지도 모른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레트는 앤 해써웨이(Anne Hathaway)가 연기한 그의 부인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어떤 시스템도, 그게 회사이든 정부이든, 또는 규제 기관이든 우리의 유익에 관심이 있는 곳은 없다고 한탄한다. “시스템 자체가 조작되었어.”라고 빌레트가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길 원해. 그러나 우리를 보호하는 건 우리 자신이야. 우리 자신뿐이라고!” 이건 너무도 슬픈 현실이고 또 너무 냉소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상은 실로 냉담하기 이를 데 없다. 바른 일을 한다고 반드시 보상이 따라오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건 이익도 또 인기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익이 되기보다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건(이 타락한 육체가 추구하는 논리와는 반대되게도), 정의의 추구가 결코 당신 자신을 높아지게 하거나,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싸움이든, 기업의 불신, 무모한 오염, 대량 학살, 낙태, 성매매, 또는 다른 각종 악에 대항하는 싸움이든지 관계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다. 약한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정의는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정의는 사랑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높은 진실성을 추구한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있는 고귀함을 알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한다. 양심으로부터 들리는 소리, 또는 그리스도로의 부르시는 소리, 정의를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결코 거만하고 허영심 가득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물론 분노도 포함된다. 각각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분노의 순간을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외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악당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다. 스티븐슨은 제이미 팍스가 연기한 맥밀란의 지치고 힘겨운 얼굴을 보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빌레트도 이와 비슷하게 사랑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건 듀퐁의 화학물질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어가는 사람, 성실하게 일하는 지역 주민들을 향한 사랑이다. 에거슈테터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향한 사랑, 그리고 민족주의에 오염된 교회, 또한 파시즘이 퍼지면서 피해를 받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치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일어났다. 인터넷이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차고 넘치는 오늘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성격 급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꾸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낙태를 막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도 자유주의자를 물리치려는 마음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환경 운동도 오염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염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정의를 해시태그 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오늘날 금세 증발하는 가연성(combustible)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정의”는 비극적일 정도로 추상적이고 정치화되어버린 단어이다. 정의는 단지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해야 하는 어느 한쪽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정의는 성경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단지 해시태그 다는 것, 또는 “탈진실”(woke: 최근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신조어) 전쟁에 참가하는 빨치산 병사가 되는 것으로 축소할 때,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놓치게 된다. 영화와 TV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는 진짜 얼굴, 진짜 고통과 불의를 만날 수 있다. 정의를 추구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우리의 영혼은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지금 소개하는 이 세 영화를 꼭 보기를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원 차일드 네이션’(One Child Nation), 또는 ‘사마’(For Sama)와 같은 다큐멘터리도 꼭 보기를 바란다. ‘하얀 거짓말’(White Lies)과 같은 팟캐스트도 들어야 한다.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릴 수만 있다면, 여기에 쏟는 시간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scar Ignored These 2019 Films. Christians Shouldn’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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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착각
하나님께서 사울이 죄 짓도록 하셨을까?
by Richard McDonald
2020-02-19
판사가 교통법규를 많이 위반한 운전자의 면허증을 정지하겠다고 경고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경고를 받은 운전자는 다시 붙잡히게 되었고, 결국 그의 면허증은 정지되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판사는 운전자가 또 다른 위반을 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경고만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면허 정지는 반복된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하나님도 같은 의미로 심판하신다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우리 삶의 죄를 심판하신다(겔 18:23–32; 히 12:10). 이러한 심판은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그렇게 심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 하신다.재판관 되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사무엘상 16–19장에 나타난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씀을 읽고 나면 즉각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사울을 꾀어 다윗을 죽이도록 하신 것인가(삼상 18:10–11; 19:9–10)? 하나님께서 사울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셨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그가 살인을 선택한 것인가?얼핏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심으로 사울을 실패로 인도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야고보서 1장 13절에 비추어 이 말씀을 읽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무엘상 16–19장과 야고보서 1장 13절 말씀 간에 조화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 사울과 악령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1.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사울 통치 초기를 볼 때 그가 왕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울은 전도유망한 왕이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며 몇 차례 중요한 승리를 이루었고(삼상 11; 13:1–4; 14:16–23), 또한 지혜와 자비를 행사했던 왕이었다 (삼상 11:12–13).하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 일어난 두 번의 사건은 모든 게 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사울은 자신과 군대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번제를 드리는 일을 감행했다(삼상 13:5–14).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모습을 꾸짖었고, 주님께서 마음에 다른 왕을 이미 택하셨다고 주장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오해한 점, 하나님을 반역하며 불순종한 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점 때문에 사무엘은 또 한 번 사울을 꾸짖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호와께서는 사울의 왕권을 폐지하셨고(삼상 13:14; 15:23) 그에게서 성령이 떠나게 하셨으며(삼상 16:14), 그에게 악령을 보내셨다(삼상 16:14).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을 통해 사울을 유혹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사울의 완강한 불순종에 대응하는 심판의 행위로써 악령을 보내신 것이다.성경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에 따라 모든 영적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삿 9:23; 삼하 24:1; 대상 21:1; 눅 22:31).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의 고집스러운 불순종을 심판하시기 위해 악한 영을 보내셨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사울은 다윗의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은혜와 자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삼상 16:23).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를 회개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롬 2:4).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셨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한 일의 책임이 어떻게 사울에게 있는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저항할 수 없는데 말이다.2. 사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있다사울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방향키를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제불능의 배와 같지 않다. 사울은 그의 삶에 있어서 키를 잡고 선장이자 주인공이었다. 그는 사무엘상 16–19장에서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던 책임이 그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사울은 다윗을 궁전 주변에 두어 하프 연주를 하도록 했다. 악한 영이 사울을 지배할 때면 언제든지, 다윗은 하프를 연주했고 사울을 회복시켰다(삼상 16:23). 사울은 연주를 위해 다윗을 소환함으로써 다윗의 사역을 수용했다. 더구나 버림받은 왕인 사울은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었던 다윗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의 성공을 질투하며 그의 의도를 매도하는 선택을 했다(삼상 18:8–9).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사울의 밑에서도 다윗은 형통할 수 있었다. 다윗은 왕의 무기를 드는 자가 되었고(삼상 16:21), 골리앗을 죽였으며(삼상 17),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으로 승격하였다(삼상 18:5). 다윗의 형통함과 그를 향한 백성들의 사랑(여인들이 그를 찬양했던 것도 포함해서)은 사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삼상 18:7–8). 사울은 그날부터 다윗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질투와 불신의 마음을 품기로 작정했으며, 이는 결국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질투와 불신을 품기로 선택했던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베푸시는 평화의 방편을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 악한 욕구를 쫓았다. 사울은 다윗을 향해 두 번이나 창을 던졌고, 이 두 번 모두 악한 영이 그를 지배했을 때였다(삼상 18:10; 19:9).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다윗의 음악은 더 이상 사울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사울은 스스로 악한 욕구에 몰두하였다. 사울에게 야고보서 3장 16절은 꼭 맞는 말씀이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사울 인생의 열매는 그가 신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주지만, 그의 삶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적용점을 제시한다. 사울과 악한 영에 대해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하시지 않는다. 야고보서가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자신의 악한 욕심에 미혹될 때에 유혹을 받는다(약 1: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임의대로 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 하지만 그 목적은 회개에 있다(겔 18:23, 32; 롬 2:5–11; 히 12:10).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타락한 세상의 판사는 너무 성급하거나 가혹하게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만, 하늘의 재판관께서는 놀라운 모습으로 인내하신다. 사울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완강하게 불순종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후에야 심판을 받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내가 만료될 수 있다(시 103:9; 벧후 3:8–10). 반면 심판 가운데서도 신자와 불신자들을 향한 자비를 연장하시면 그들이 돌이키기도 한다(롬 2:4).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죽을 때까지 회개치 않는 불신앙과 반역을 고집했다(삼상 31). 비록 신자의 구원이 확실한 것이지만, 우리는 유혹이나 죄를 완전하게 이겨낼 수 있는 면역성이 없다(고전 3:3; 약 4:1).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통해 악한 영을 대항할 의지를 갖게 된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내주하는 죄악을 대항할 의지를 갖는다. 불신자의 경우, 불신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롬 1:24;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회개하는 믿음을 통해 진정된다. 우리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유혹하고, 그들을 멸망시켜 복수하시려는 재판관이 아니시다. 그는 정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두가 회개하고 생명 얻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딤전 2: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Made Me Do It!’ Why Did God Tempt Saul with an Evil Spirit?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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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게 하라!
by 고상섭
2020-02-19
팀 켈러는 복음이 단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로 여겨지는 위험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복음은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역이 복음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으로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복음의 결과여야 한다.” 또 이것을 오케스트라의 조율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려면 악기가 조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연주자는 기준이 되는 한 음을 중심으로 악기를 조율한다. 복음이 바로 그 한 음이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되어 복음 안에서 통합되고, 하나로 조율되어야 한다. 복음과 사역이 바르게 관계 맺지 못할 때1. 회심자의 숫자가 줄어든다만일 어떤 사역의 요소가 복음의 결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교회 설교와 가르침에서 복음이 아닌 것이 복음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상담, 제자훈련, 사회정의, 문화 사역, 교리학습, 심지어 전도조차도 복음을 대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이 더 이상 교회 사역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회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회개하는 일이 복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설교가 단순 권면이나 정보 전달이 된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의 결과인 다른 활동들과 혼동되거나 분리되면 설교는 단순한 권면 또는 정보 전달이 된다. 복음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순서가 바뀌게 되면 율법주의나 공로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도하라는 권면이 복음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권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권면하고,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소개한다. 이때 ‘영적 예배’는 ‘Spiritual service of worship’(ESV)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reasonable service’(KJV) 또는 ‘intelligent service’(YLT)라고 번역한다.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당연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인생을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깨달을 때 자연스러운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복음이 사역과 바르게 관계를 맺을 때 위의 그림은 리디머 교회의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그림이다. 다섯 가지 다양한 사역의 중심에는 복음이 있다. 즉 복음이 사역의 기초가 되고, 복음으로 시작된 사역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경우에도 개인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사회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개인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는 사회 구원에 관심을 좀 더 기울여야 하고, 사회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는 좀 더 개인 구원, 즉 복음선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분리되는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개의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도록 힘쓴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온 정서이다. 즉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라는 단어 때문이다. 미쉬파트는 일반적인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벌이나 보호, 보살핌 등 어떤 형태든지 상관없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참된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복음의 은혜가 정의와 자비를 세우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의롭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기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교회 안에 ‘정의와 자비’는 단순히 사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교회 사역이 복음과 연결되어서 뿌리 깊은 신학적 기반을 마련해 줄 때 더 열정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소그룹을 형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교회의 공동체를 창조한다. 팀 켈러는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절반에 못 미친다면, 그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문화센터에 가깝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문화센터에서 개인적인 기술을 배우듯이 교회에서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강의를 듣고, 그것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열심과 권면으로 서로 사랑하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봐도 그 사랑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참된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본 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들의 교제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다. 이것이 ‘외부적 의’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성경적 메시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군가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회복하게 함으로 다른 사람과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다. 결국 복음이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은 달력에 표시하는 연간 스케줄로 끝이 나서는 안 된다. 한번 치르는 이벤트성 행사여도 안 된다. 모든 부서와 모든 사역의 프로그램은 복음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고 복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목회자들이여! 복음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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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하고 흠 없는 삶을 위하여!
by John MacArthur
2020-02-18
이십 년 전 읽었던 기사 한 토막이 기억에 생생하다. 1987년 3월 조지아주 코녀스(Conyers)라는 도시에 있는 락데일 카운티 고등학교(Rockdale County High School)의 불독(Bulldogs) 농구팀이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조지아주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학교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었다. 18년이나 팀을 지도했지만 한 번도 우승으로 인도하지 못했던 클리블랜드 스트라우드(Cleveland Stroud) 감독에게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이 기쁜 결과였다. 결승전을 마치고 몇 주 후 스트라우드 감독은 늘 하던 대로 선수들의 성적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3급 선수 중 한 명이 몇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그가 학과 성적 미달로 농구 선수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뜻했다.사실 성적이 안 나온 그 학생은 팀의 승리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오긴 했지만, 시즌 내내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후보급 선수였다. 준결승전 시합에서 팀이 20점 이상 앞서고 있을 때 스트라우드 감독은 모든 선수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바로 그 경기에서 이 학생이 뛰었는데 시간은 45초가 채 되지 않았다. 성적 미달로 선수 자격이 상실되었던 그 학생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 경기 결과에 이 선수가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지아주가 정한 자격 기준을 위반한 것이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다. 만일 규정을 위반한 사실을 보고하면 자격 상실로 팀의 우승이 취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학교 외부의 사람들은 위반 사실을 알아챌 수가 없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이 일에 연루된 그 선수는 규칙 위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팀의 다른 선수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감독이 고의로 선수 자격 기준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스트라우드 감독 자신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이 공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는다면 자신이 감독으로서 이룬 최대 성과, 곧 팀의 승리는 유지 되겠지만, 규정 위반을 숨겼다는 죄책감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었다.스트라우드 감독은 그 위반 사실을 깨달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다른 대안은 생각지도 않았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세워두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팀의 ‘승리’보다 선수들의 ‘성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믿었다. “사람들은 농구팀의 점수는 잊어버리지만, 그 농구팀이 보여주는 진실한 행동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그는 위반 사실을 보고했고, 팀은 최초로 거머쥐었던 조지아주 우승컵을 반환해야 했다.하지만 스트라우드 감독과 팀은 그들이 포기했던 우승컵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명예를 얻었다. 그들은 진실을 지켰고, 주위로부터 엄청난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올해의 교사상’, ‘올해의 감독상’, ‘올해의 시민상’을 수상했고, 조지아주 의회가 주는 공식적인 상도 받았다. 몇 년 뒤 그는 코녀스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그 위치에서 섬기고 있다. ‘스트라우드 감독이 옳았다.’ 불독팀의 조지아주 우승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지만, 그 팀의 감독이 보여준 진실성은 잊지 않았다.윤리적 진실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속성이다. 올바른 교리로 무장하고 성경의 진리를 신실하게 가르치는 일 역시 중요하지만,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의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에 일관성 있게 순종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하는 도덕적 기준은 보편적인 인간 윤리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산상수훈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산상수훈 전체는 율법의 도덕적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율법의 도덕 원칙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논박하는 담화였다.예수께서는 제6계명이 살인 행위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도 금하심을 가르치신다(21–22절). 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 역시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금한다(27–28절).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원수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43–44절). 하나님의 율법이 세우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얼마나 높을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우리로서는 당연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이 목표를 향해 정진해야 한다(빌 3:12–14).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진실성을 희생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야 한다. 중요한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명성(reputation)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지위, 계급, 또는 경제적 위신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명성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빌 2:7)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좋은 명성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특히 윤리적 진실성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장로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3장 7절 말씀과 같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윤리적 진실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한다면 좋은 명성은 단번에 무너진다. 사람들은 부주의 한 실수나 실패와 같은 잘못은 관대하게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무너뜨릴 수 있다. 수년 전 교구의 한 성도가 목사라면 듣고 싶지 않을 말을 내게 했다. 사업에서 알게 된 사람 한 명을 교회로 초대했는데, 그 사람이 “그 교회 다니세요? 저라면 그런 교회엔 안 갈 겁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부패한 변호사가 그 교회를 다니잖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누굴 가리키는지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변호사들은 상당히 많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뭔가 착각했거나, 그 부패한 변호사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다음 주일에 나는 강단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일 그 사람이 말한 그 변호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면, 삭개오의 교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고, 이 지역에서 당신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그리고 당분간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히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교회 전체의 명성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언 22장 1절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윤리적 진실성이 온전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만, 당신에게 명예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성품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품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도덕법에 대해 강해하실 때,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의 정직함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진정한 바로미터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무슨 일을 하는가, 아무도 내 생각을 보지 못할 때 내가 하는 생각들, 그리고 우리 양심의 질문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도덕적 윤리적 특질에 대한 진정한 측정기이다. 공동체 안에서 좋은 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성품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 도덕과 윤리 문제를 다루실 때는 우리 마음의 내적 생각들로부터 ‘시작’하신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진실성을 위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지가 당신의 마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승리와 패배는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패배했다면 당신의 성품 역시 망가진 것이다. 성품이 오염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명성 역시 망가지게 되어 있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7:18).도덕적, 윤리적 진실성을 지키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증언(testimony)이다.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가 당신의 ‘명성’이라면, 당신의 ‘증언’은 당신의 성품과 언행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윤리적 진실성이 없을 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생각해보라. 쉽게 말해 그 사람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명백히 진리라 가르치는 것들을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 등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윤리적 진실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태도로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하나님의 자녀라 고백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윤리적 진실성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윤리적 기준들을 입맛에 맞게 조정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유혹에 빠져서 우리의 명성, 성품, 그리고 증언을 망가뜨리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 일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bove Reproach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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