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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틈새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찾아
2023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리뷰
by 김선일
2023-08-21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가 발간됐다. 이 조사는 1998년부터 한국인의 종교 실태와 신앙 의식을 파악하기 위해서 시작되었고, 2012년부터 5년 단위로 이번과 같은 체계를 갖추었다. 이 조사는 현재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장 광범위하고 다양한 영역에 대한 종단연구의 성격을 지닌 가장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조사 결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 조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 종교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20대와 30대의 비종교화는 더 심해지고 있다. 종교 이탈률에서 개신교가 가장 높다. 교회 다니다가 떠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 추세 또한 꾸준하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믿음과 윤리적 신념도 약화하고 있다. 교회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른바 ‘가나안성도’는 조사 때마다 올라서 이제 거의 30퍼센트에 다다른다. 2012년 조사에서 10.5퍼센트였는데, 2017년 조사에서는 23.3퍼센트, 이번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개신교인 10명 가운데 3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없는 셈이다. 비종교인들의 종교별 호감도에서 개신교는 불교(32.9%)와 천주교(29.9%)는 물론이고 유교(11.3%)보다도 낮은 6.8퍼센트가 나왔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개신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가 이제는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유교나 토속 신앙이나 미신 취급받는 샤머니즘(3.9%) 사이에 위치했다는 결과는 쓰라리다. 그런데 이번 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 교회가 가능성과 방향성의 좌표를 찍을 수 있는 몇 가지 결과들이 있다. 이를 긍정적인 혹은 희망적인 결과라고 말하면 자기 위로의 정신 승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찾아서 교회의 사역을 보완하고 갱신하기 위한 지표로 본다면 유용하리라 본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음의 열 가지 결과에 주목한다. 1. 젊은 기독교: 29세 이하에서 개신교 인구는 불교와 천주교에 비해서 훨씬 높다. 20대의 개신교 인구는 11퍼센트로 불교(3.5%)보다는 3배, 천주교(4.5%)보다는 2배 이상이 높다. 30대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14.6퍼센트인데, 이는 불교(4.7%), 천주교(4.8%)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물론 젊은 세대에서 종교인구와 개신교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젊은 층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친밀한 종교이다.2. 개종 의향 종교: 종교가 없는 이들에게서 향후 개종하거나 믿고 싶은 종교로 개신교가 1순위로 나타났다(32.1%). 응답 표본이 91명에 불과하고, 천주교(30.2%)나 불교(29.7%)와 별 차이가 안 나지만, 조사 이래 처음으로 개종 의향 1순위 종교가 된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3. 가족 종교: 개신교는 가족 구성원들의 종교 일치도가 가장 높다. 개신교가 가족 종교화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외연 확장 없이 기존 개신교인들만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지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여전히 가족 내 유대감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이는 잠재성도 지닌다. 가족 사이에 종교가 다를 경우 신앙이 더욱 절실한 가족에게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다만, 개신교 부모들의 자녀 신앙교육 여부가 지난 조사에 비해서 하락한 것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사안이다. 4. 종교적 귀속성: 현재의 종교를 바꾸거나 포기할 의향을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15.4퍼센트가 그러한 의향을 나타냈다. 불교인은 20.8퍼센트, 천주교는 16.2퍼센트로 그럴 의향이 있다고 했다. 개신교인이 가장 강한 종교 귀속성을 보인다. 이는 전반적인 신앙 활동에서 개신교인이 가장 높은 것과도 상응한다. 5. 신앙적 정체성: 신앙생활의 이유를 묻는 질문에서도 개신교는 개인적인 요소보다는 종교적인 요소를 더 많이 선택한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은 개신교의 경우 35.9퍼센트인데,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에 불과하다. 불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개신교와 뿌리가 같은 천주교와도 큰 차이가 난다. 구원의 확신에서도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있다’고 대답했지만, 천주교는 47.7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다.6. 가나안성도의 귀환: 가나안성도가 많이 늘어난 상황에서 그들에게 교회 재출석 의향을 물었을 때, 그들의 42.9퍼센트가 다시 교회로 돌아올 마음이 있다고 답했다. 신앙단계가 높고, 소그룹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는 경우에 더욱 재출석 의향이 높게 나타났다. 가나안성도를 교회와 무관하거나, 분리된 자들로 단정 짓지 말자. 그들 중 상당수는 교회가 갱신된다면 돌아올 마음이 있다!7. 성경 공부와 봉사에 대한 관심 증가: 교회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봉사활동이 22.9퍼센트, 성경공부 모임 참여가 22퍼센트로 가장 높게 나왔다. 성경공부 모임은 2017년보다 9.2퍼센트의 가파른 상승률을 보였다.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2017년의 55.2퍼센트보다 대폭 감소한 27.7퍼센트로 나타났다. 향후 교회 활동에 대한 참여 의지도 이전 조사보다 크게 높아졌다. 8. 가족 외의 전도: 가족 종교화가 심화하는 가운데도, 전도를 한 개신교인들의 경우에는 전도 대상에서 가족보다 친구/선배, 이웃/친척의 비율이 높아졌다. 특히 20대와 30대에서 친구/선후배를 전도했다는 응답(20대=50.8%, 30대=54.4%)이 높게 나왔으며, 60세 이상은 이웃(45.6%)이 가장 높게 나왔다. 이는 연령별로 어떤 대상에게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전략적 포인트가 된다.9. 신앙의 촉매로서 소그룹: 여러 조사에서 소그룹 참여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신앙 정체성과 소속감이 높다는 결과가 일관되게 나온다. 교회 재출석 의향이 있는 가나안성도에서도 과거 소그룹 경험자들이 많다. 개신교는 소그룹 소속 비율에서 다른 종교보다 높다. 소그룹이 전부는 아니지만 가장 유력한 신앙 공동체의 유형인 것은 분명하다. 10. 기독교 이미지 형성의 주체: 비개신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주변 교인들의 언행’(30.1%)이 가장 높게 나왔다. ‘목회자/교회 지도자의 언행’(25.2%), ‘매스컴 보도’(17.9%)가 그다음이다.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낮아진 책임을 목회자나 언론에만 돌릴 것이 아니다. 목회자와 교인 모두를 포함한 하나님 백성의 변화된 삶이 중요하다. 교회는 새로운 성품과 습관을 형성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열거한 희망을 찾기 위한 열 가지 조사 결과는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부정적 인식을 상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여전히 한국 교회에는 위기의 경종이 훨씬 선명하게 울린다. 그러나 반복되는 부정적 진단에 익숙해지고 관성이 생긴다면 더욱 위험하다. 전략 차원에서는, 우리의 약점과 잘못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 앞에 놓인 가능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희망을 찾아 나서는 걸음을 더욱 힘있게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악인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악인이 아닌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창 18:16-33). 한국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를 지적하고 한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의 효능을 삶으로, 공동체로 증언하는 겸손하고 신실한 하나님 백성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Mark Jones
2023-08-19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스티븐 차녹(1628-1680)이 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청교도 시대가 낳은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이다. 신학적 거물들의 펜에서 수백 권의 방대한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은 대단한 성취이다. 차녹이 죽고 2년 후에 출판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미완성 상태였다. 총 14개의 담화 또는 14장이 완성되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에 관해서 더 쓰고 싶은 내용이 남아있었다. 책이 출간되고 차녹과 책을 향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역사가 에드먼드 칼라미(1671-1732)는 신학자로서 차녹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녹은 대단한 학자였다. 그가 손을 댄 학문에서는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다. 그에게는 구약과 신약을 원어로 이해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확고한 판단력과 생생한 상상력의 소유자인 차녹은 거의 신적 수준에 근접한 탁월한 학자였다. 에라스무스 미들턴(1739-1805)은 그를 “진정한 신성에 대해서 깊이와 명확성과 정확성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섭리에 대해서 가히 비할 데 없는 담론을 남긴 저자였다.” 영국 성공회 찬송 작가 아우구스투스 토플라디(1740-1778)도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위대함에 대해서 비슷한 언급을 했다. “명확함과 깊이, 형이상학적 숭고함과 복음주의적 단순성, 엄청난 배움과 평범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론, 더불어 인간의 신성한 판단력과 천재성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드는, 차마 그 가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인간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조엘 비키는 언젠가 내게 청교도 시대가 이해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라도 차녹의 이 걸작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 하나만으로도 순금에 비할 가치가 있으며 모든 영문학 작품을 통틀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책이다.” 제리 브리지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담론을 여섯 페이지 정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압도당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잠시 후 다시 일어나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서 그는 또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혼자 남겨진 내게 딱 두 권의 책만 허락된다면, 나는 기꺼이 성경과 차녹의 걸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안에서 나는 매일 매일 행복하게 또 바쁘게 지낼 것이다!평신도를 위한 신학오늘날 독자들에게는 이 책의 각 장이 설교 목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실제 설교에서는 약간의 편집이 필요했겠지만, 오늘날 독자들이 읽는 내용은 다름 아니라 애초에 차녹이 토마스 왓슨과 함께 사역했던 교회의 성도들이 듣도록 준비되었던 내용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서, 당시 영국에 살았던 가장 재능 있는 두 신학자의 설교를 들었던 교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이 작품의 내용이 정교하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작품이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다름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교리(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학자와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까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쓴 차녹의 능력이다. 물론 오늘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가벼운 기독교 서적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14개의 담화에는 예외 없이 잘 알려진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이 포함되어 있다. 차녹은 각각의 주제와 관련해서 주로 가장 유명한, 일종의 표준 구절(locus classicus)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개혁주의와의 연관성을 고려했다(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시편 14:1). 이것은 신학 교리에 대한 설교적 담론의 전형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바로 눈치챌 수 있듯이, 차녹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진 실제적인 의미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내용 중에는 실천적 무신론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그 시기에 하나님의 존재라는 교리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다음 두 가지였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전적 이해에 대한 공격, 둘째, 마치 우리의 삶과 생각에 관심을 가진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이었다. 차녹의 작업은 이런 실질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통찰력 있는 분석이었다. 더불어서 그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마치 무신론자처럼 행동하는 교인이 귀를 기울여야 할 많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차녹의 작업이 초점을 두는 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라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를 경시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담론 전반에 걸쳐서 흩어져 있는 내용은 말 그대로 황금 덩어리이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설명한다. 차녹은 각 장의 “용도”(uses) 섹션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그의 관찰을 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적용할 때조차도 차녹이 그 내용을 그리스도의 인격에 고정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명쾌한 세련미“용도” (또는 “가르침”) 섹션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얼마나 실용적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식의 적용이 없었다면, 그의 작품은 바퀴 없는 아름다운 자동차에 그쳤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독자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신학책이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반대로 실용적인 책은 신학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을 만나는 순간 이런 고민은 바로 사라진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은 신학적이면서 실용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신학적이다. 차녹보다 훨씬 더 유명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1616-1683)과 리처드 백스터(1615-1691)는 매우 정교한 논문을 썼다. 그들의 학식은 아마도 17세기 영어권 신학자들 사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종종 일종의 “번역가”가 필요할 정도이다. 외국어도 아닌 영어로 쓴 글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차녹의 책은 “번역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글은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하다. 오웬과 백스터보다 훨씬 더 맥락을 따라가는 게 쉽다. 말하자면, 이 세 사람 중에서 트위터 세상에서 성공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단연 차녹(과 왓슨)이다. 칼뱅이 “명쾌한 간결함”으로 알려져 있다면 (애초에 칼뱅에게는 그것이 목표였다), 차녹은 명쾌한 세련미로 유명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차녹의 언어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가 자신의 학식을 설교를 듣는 평신도를 고려해서 적절하게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한 은유와 비유는 자연 세계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았다(“들의 백합화를 생각하라.” 눅 12:27). 또한 그는 탁월한 르네상스인이었다. 더불어서 그가 받은 의학적 훈련은 대부분의 페이지에 나타나는 은유, 삽화 및 비유에서 빛을 발한다. 그의 성경 주석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력 때문이다. 차녹이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학식 있는 이해를 통해 독자는 은혜를 입은 상태에서조차도 인간 영혼의 심연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죄악된 특성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강한 인상을 받는다. 큰 책 그리고 크신 하나님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왜 읽어야 할까? 차녹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게, 20세기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결코 위대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 관해서 비정통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아마도 형편없거나 부적절한 가르침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었을 것이다. 치료는 강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강단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개인 또는 그룹 연구를 통해서도 치료가 일어나야 한다.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이 다시 출간됨에 따라서, 이제 목회자들은 시간을 뛰어넘는 이 고전에 더욱 쉽게 접근하여 자신의 설교를 다시금 조명하도록 돕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J. I. 패커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했던 최고의 칭찬은 그가 하나님을 강단으로 불러냈다는 것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는 실로 분명했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강단으로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차녹이 그토록 유창하고 자세하게 설명한 바로 그 하나님에 목회자가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관계없이, 차녹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사상가 한 사람을 읽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크고 넓은 기독교의 전통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던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서 수 세기와 다양한 전통에 걸친 다른 사상가들을 (심지어 이교도 시인과 철학자들까지) 만날 것이다. 크신 하나님을 배우면서 동시에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700쪽이 넘는 책을 읽는 것은 대단한 성취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묵상과 기도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결코 과거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책은 진정으로 인생을 바꾼다. 책의 두께가 부담스럽다면, 일단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담론을 먼저 읽으라. 그리고 하나님이 매일 당신에게 보여주시는 다양한 자비에 대해서 겸손한 감사로 무릎 꿇을 준비를 하라. 아마도 당신은 지금도 쏟아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 백성의 지성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움직이실 하나님에 대한 더욱 견고하고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는 평소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는 생각에, 차녹의 이 대작을 두 권으로 편집하면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관점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 요구가 이 책으로 충족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에 지난 수백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차녹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처럼 교회를 준비시키고 도운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책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결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원제: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모든 것이 예수님: 팀 켈러 추모 예식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17
캐시 켈러는 팀 켈러를 추모하기 위해 오늘 모인 2,000여 하객들에게 “오늘 예배가 보통 하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추모식에는 고인을 기리는 물건도, 또 켈러의 사진과 비디오도 없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이건 팀이 원한 방식입니다. 그는 다른 성도들도 이런 식으로 장례식을 하길 좋아했어요. 예, 장례식은 죽은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예, 맞아요.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는 고인이 지금 만나고 있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켈러 추모 예배에서 일어난 일이다. 뉴욕 시에 있는 리디머 장로교회의 설립자이자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팀 켈러가 췌장암으로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일흔두 살의 나이였다. “팀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캐시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교회의 하나인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90분 예배 중간 정도에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추모 예배 참석은 배우 Max McLean, 여배우 Patricia Heaton,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David Brooks, 래퍼 Lecrae, 최근에 회심한 역사학자 Molly Worthen, 그리고 The Gospel Coalition 공동 설립자 돈 카슨을 포함한 초대 손님으로 한정되었다. 전 세계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Redeemer City to City에서 방송하는 생중계로 동참했다.“팀은 St. Michael 묘지에 묻혔습니다. … 하지만 그곳은 워낙 커서 아무리 찾으려고 돌아다녀도 못 찾을 거예요.” 캐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덤에 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끝부분을 보면, 누군가가 죽은 사람 기념비 앞에서 고인과 마음속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죽은 사람하고 대화한다고? 그 사람이 거기에 없어요. 그래서 그런 장면을 볼 때면 우리 부부는 항상 불편했습니다.”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신 팀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치유받고, 사랑받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고, 더 행복합니다. 비석과 관련해서, 나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고려했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어요. …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알려드릴게요.”그녀가 이사야 25:6-9을 읽고 말했다. “이건 비석에 새겨놓을 게 아닙니다. 이걸 다 새기면 높이가 20피트는 될 거예요. 이 말씀은 단지 맥락일 뿐입니다.”그녀가 이사야 26장에서도 특히 주목한 건 1, 12, 19절이었다. “그 날이 오면, 노래를 부를 것이다. …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이사야는 더 이상 죽음이나 눈물이 없는 미래의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캐시가 말을 이었다. “팀은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 잔치에 함께 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팀이 지금 얼굴을 맞대고 경배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모두 믿고 의지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사랑하는 아빠이어서 그녀는 28쪽짜리 프로그램으로 짜인 대본을 벗어나 장남과 막내아들에게 “조나단, 뭐 하고 싶은 말 있어?”라며 마이크를 넘겼다. 조나단은 할 말이 있었다. “아빠는 정말 뛰어난 격려자였습니다. 친구들과 가족 여러분, 슬프지만 그의 삶을 기억하면서 격려를 받읍시다. 제 아버지의 삶이야말로 이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크고 영원한 다른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조나단의 형제 데이비드는 기도하는 동안 눈물을 참기 위해 여러 번 멈춰야만 했다. 추모 예배에 참석한 모두의 감정이 가장 격해진 순간이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상실감이 슬프지만 아버지가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습니다.” 캐시와 조나단이 옆에 선 상태에서 데이비드가 기도를 이어갔다. “하나님, 슬픔에 잠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이 시간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희생의 사랑으로 당신께서 이미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본향으로 부르실 때, 우리도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를 본향으로 불러주소서.’” 복음에 찍힌 방점추모식 나머지는 순서에 따라서 성경과 C. S. 루이스 낭독, 켈러가 선택한 찬송가 부르기, 가족 친구인 샘 올베리의 강론으로 이어졌다. 올베리가 말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팀의 모든 자질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발견하는 바로 그 자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팀이 불완전했던 부분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완전하셨습니다. 팀이 했던 말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을 하나 빌리자면, ‘예수는 참되고 훨씬 더 나은 팀 켈러이다’입니다. 따라서 팀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살았던 가장 강력한 한 사람인 예수가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왔다고 올베리가 말했다.“팀은 예수님의 섬김을 받을 만큼 비범한 종이었습니다. 팀이 그토록 아름답게 우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다면,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섬기도록 하시겠습니까?”올베리의 복음주의 메시지의 어조는 복음주의 인물 중에서 마지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한 사람의 장례식을 떠올리게 했다. 2018년에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 그가 죽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긴 메시지도 장례식에서 복음을 나누라는 것이었고, 2,000명 넘게 참석한 추모 예배에서는 그의 유언대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올베리는 TGC 인터뷰에서 말했다. “팀은 추모 예배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는 점을 매우 분명히 했습니다.”목적이 분명한 예식복음 선포라는 똑같은 목적은 찬송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켈러는 지난 4월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열린 예배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는 모든 찬송가를 선택했고, 거기에는 순서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선택한 이유가 프로그램에 실렸다. “영원히 계시는 주 하나님은”은 하나님과 그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고, “굳도다 그 기초”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에 관해서, 그리고 “Jesus Lives and So Shall I”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구원받은 천국의 성도들”은 세상의 수고로부터 쉼을 얻은 모든 성도가 언젠가는 다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켈러의 추도식은 말씀으로 넘쳤다. 개회와 축도 시에 낭독한 구절 외에도 요한복음 14장, 고린도전서 15장, 고린도후서 4장, 로마서 8장, 그리고 마가복음 10장을 리디머 교회 캠퍼스 네 곳의 리더들이 낭독했다. 모든 메시지가 다가올 부활을 가리킨다. “우리는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 속에서 슬퍼합니다.” 켈러의 차남이자 목사인 마이클 켈러가 예배를 마치면서 말했다. 그는 사실상 안내서에 인쇄된 D. L. 무디의 말을 반복한 것이다. “언젠가 여러분은 신문에서 East Northfield의 D. 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 말을 믿지 마세요! 신문에 부고가 실리는 그 순간, 나는 더 살아있을 겁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가 있을 겁니다.” 마이클이 말을 이었다. “다가올 세상은 더 밝고 더 좋고 더 생생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그를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곳은 기쁨과 은혜, 사랑과 빛이 영원합니다. 이 사실로 나는 여러분이 위로받기를 원합니다. 지금 그리고 항상 이 진리가 당신을 지탱하도록 하십시오.”원제: All About Jesus: Tim Keller’s Memorial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내륙 선교의 길목을 트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춘천중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8-17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강원도 지역의 선교는 다른 도(道)에 비해서 많이 늦게 시작되었다. 또한 이후에도 남북으로 이어진 태백산맥과 그 지맥들이 깊은 계곡과 강을 품고 있고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전도인들의 접근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의 시작도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다른 지역으로의 확산도 어려웠던 것이 강원지역이다.그런가 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루트도 산맥과 길을 따라서 각각 다르게 접근되었다는 것이 이 지역 선교 역사의 특징이다. 즉 먼저 철원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루트, 다음은 여주나 충주에서 원주와 강릉으로 이어지는 루트, 그리고 원산에서 고성, 속초, 양양으로 이어지는 루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현 춘천중앙교회는 강원지역의 내륙선교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세워진 교회이다. 강원지역의 선교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은 것은 지리적 환경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따라서 먼저 도착한 선교부는 자연스럽게 강원지역을 선교함에 있어서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부 사이에 선교 협약을 맺으면서 지역을 분할해서 선교구역을 담당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선 유리한 지역부터 선교구역으로 맡다가 보니 역시 강원지역은 적극적으로 맡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닐까. 그러니 자연스럽게 후발주자인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맡을 수 있도록 남겨졌다고 할 수 있다. 1885년 10월 18일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감리교회 해외선교부 헨드릭스(E. R. Hendrix)감독과 리드(C. F. Reid) 선교사가 입국해서 조선 선교 가능성을 살펴본 다음, 이듬해인 1886년 리드 선교사 부부가 서울에 입경하여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리드 선교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한 남감리교회는 1897년 강원지역을 자신들의 선교구역으로 확정하면서 전도인을 파송했다. 그것이 춘천 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1897년 12월 강원지역에 대한 선교를 결정한 선교부는 1898년 서울 광희문교회의 나봉식과 정동렬, 두 사람을 춘천에 전도인으로 파송했고, 이들이 퇴송골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것이 춘천중앙교회의 시작이다. 그들의 활동과 함께 1898년 9월에 퇴송골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음을 보면 춘천중앙교회의 시작을 그해 4월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온전한 교회로 자라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이에 적극적인 공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교부는 1902년 경기도 장단 고랑포교회의 이덕수 전도인을 파송해서 전도하게 했으며, 그가 정주할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돌보면서 이 공동체를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덕수 전도인이 춘천에 와서 거처를 마련하고 자리를 잡으면서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춘천에 선교사를 상주시키는 것과 함께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남감리교회는 1908년 무스(Robert J. Moose) 선교사 가족이 직접 춘천에 이주하여 정주하게 했다. 이미 정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던 이덕수와 함께 대판리(현 조양동)에 양옥을 매입하여 선교 거점으로 활용했다. 이 시점이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사실상 춘천선교부를 설치한 것이고, 춘천을 경기, 강원 내륙선교를 위한 교두보로 만든 것이다.이렇게 되기까지 이덕수의 활동이 큰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04년 공동체가 성장함으로 춘천구역이 독립되었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내륙지방에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남감리교회 선교부는 1907년에 병원, 학교, 예배당, 선교사 주택 등을 건립했다. 이때까지 춘천에 정주하는 선교사들은 없었고 순회하면서 공동체를 돌보는 역할은 콜리어(Charles T. Collyer)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서 감당하다가 1908년 무스 선교사가 이주하여 정착하게 됨으로써 춘천 선교 거점이 완성되었다.춘천 선교 거점의 중심에 세워진 춘천중앙교회는 1925년 마이시(Mamie D. Myers) 선교사가 주선하여 허문리(현 강원일보 건너편 요선동)에 ‘ㄱ’자 모양의 예배당 갖춰진 선교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선교관으로 지었기 때문에 1층은 유치원, 2층은 강습소, 성경공부교실, 양재교육실 등을 갖췄다. 또한 이 건물은 춘천 최초의 근대식 건물이며 서양식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내부는 남녀가 동석할 수 없는 구조였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은 아쉽게도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에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사변이 끝나고 다시 수복된 상태에서 춘천중앙교회는 예배당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장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에 옥천동에 있었던 남감리교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병원 건물을 인수해서 예배당으로 수리하여 예배 처소로 사용했다. 이 건물이 춘천중앙교회로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역시 아쉬운 것은 처음부터 예배당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같은 선교부가 운영하던 병원 건물을 예배당으로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다가 그 옆에다 1970년 아폴로 우주선 모양의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서 사용하게 되었다.그 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던 붉은 벽돌 건물은 교육관으로 사용하다가 춘천시에 매각했다. 이 건물은 비록 처음부터 예배당으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춘천중앙교회 역사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이다. 그런데 다행히 이 건물은 춘천시에서 매입하여 건물을 보존하고,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춘천시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언덕 위쪽으로 3만 5천여 평의 부지가 남감리교회 선교부가 각종 시설을 마련하고 운영했던 선교지부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미술관 이외에는 선교부와 관련한 어떤 건물이나 상징성을 가진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 결코 좁지 않은 넓은 부지에 각종 시설이 있었지만,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역사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춘천중앙교회는 2001년 100주년기념예배당을 완공하고 현재 자리하고 있는 위치로 이전을 했다. 이때 100주년기념예배당에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는데, 예배당 뒤뜰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여 춘천중앙교회 설립 초기에 초석 역할을 한 이덕수 전도인의 묘지를 옮겨왔고,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 그리고 창립70주년기념비, 100주년기념비 등을 조성해놓았다. 이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해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공간으로써 의미가 깊은 곳이다. 또한 교육관 1층을 이덕수 전도사의 이름을 따서 덕수홀로 명명하여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옛 건물을 만날 수는 없지만 새롭게 조성한 이 공원에서, 특별히 이덕수 전도인의 묘지와 기념비를 만날 수 있고,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 이덕수 전도인은 춘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성경을 팔고 전도했는데, 1910년 4월 급성폐렴으로 별세했다. 이에 춘천중앙교회에서는 그를 ‘조선의 바울’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옥천동에 있었던 춘천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와 병원, 그리고 선교사들의 주택들 가운데 병원 건물 하나 외에는 찾아볼 수 없어 못내 아쉽다.
“나는 강간범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by Paul Carter
2023-08-16
몇 주 전 나는 목사와 성경학자가 종종 ‘죄인 안내서’(The Sinner’s Guide)라고 부르는 본문, 시편 51편을 가지고 설교했다. 흔히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이 본문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 선지자 나단에게서 책망을 들은 후에 쓴 글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덕적, 영적 재난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쓴 시편이라는 의미이다. 설교에서 나는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살인에 관해서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강간은 그렇지 않았다. 몇 명이 와서는 정말로 다윗이 밧세바를 강간한 게 맞냐고 내게 물었다. 다윗이 정말 밧세바를 강간했는가? 흔히들 그 이야기를 끔찍하고 죄 많은 일종의 “비열한 사건” 정도로는 생각하지만, 강간이라는 엄청난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다. 합리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강간이야말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매우 가깝다. 따라서 우리가 강간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리처드 데이비슨(Richard M. Davidson)의 설명이다. 성인과 미성년자 사이의 성관계, 심지어 미성년자가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그건 “법정 강간”으로 불린다. 마찬가지로 다윗과 그의 아랫사람인 밧세바 사이의 성관계는 (설혹 밧세바가 권력자가 주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성교를 묵인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적 법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야기 속 두 사람의 성관계는 강간으로 보는 게 맞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사건을 “위계에 의한 강간”이라고 부르며 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오롯이 가해자에게 있다.[1]다윗 왕은 무장한 군인을 보내어 밧세바라는 신하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이런 식의 행동은 모든 문명 국가에서 강간으로 간주된다. 다윗은 강간범이다. 강간죄를 숨기기 위해서 그는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 본문에서 명확하게 다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처음 5절에서 다윗은 죄와 관련해서 가능한 모든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최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1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페샤”(pesh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흔히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된다. 말 그대로 인간이나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의미한다.[2]다윗은 자신이 반역자임을 인정한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여러 개의 한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2절에서 그는 “죄악”(iniquity)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아온”(aon)을 사용했다. 죄책감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한데,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알았을 뿐 아니라 기꺼이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2절에서 그는 히브리어 “카타아트”(khatta’ah)라는 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죄”(sin) 또는 “악”(evil)로 번역된다. 다윗은 자신이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야말로 악한 사람이라고 그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흔히 듣는 소위 말하는 고백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욕먹는 정치인과 스포츠인이 자주 쓰는 말이 있다. “판단에 오류가 있었다.” “실수였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식의 단어를 칭찬하지 않는다. 머핀 반죽에 설탕을 한 컵 대신 두 컵을 넣었다면, 그건 실수이다. 그러나 이웃을 강간하고 그 남편까지 죽이는 것은 악이다.다윗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도 또 하나님 앞에서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시편 51:1)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다. ESV에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헤세드”(khesed)이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 또는 “신실한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창세기 15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자신이 둘로 쪼개진 제물 사이를 통과하며 피의 길을 걸으셨다. 사실상 인간이 저지를 미래의 불순종과 관련된 저주를 스스로 짊어지시겠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그 사건을 기억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이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갔다.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시편 51:4-7)우슬초에 대한 언급은 유월절 이야기에 대한 암시이다. 출애굽기 12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고 명하신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를 모두 불러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들과 함께 먹을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여, 유월절 제물로 잡으십시오. 우슬초 묶음을 구하여다가 그릇에 받아 놓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십시오. 여러분은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치려고 지나가시다가,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른 피를 보시고, 그 문 앞을 그냥 지나가실 것이며, 파괴자가 여러분의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1-23)유월절 이야기에 따르면 어린 양의 피 아래 피난처를 찾은 사람은 누구나 이집트인에게 내려진 심판으로부터 안전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을 위해 유월절의 은혜를 주장하고 있다.“어린 양의 피 아래 나를 숨기소서!”“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좋은 회개이다. 다윗은 끔찍한 죄인이었다.다윗은 강간범이자 살인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동시에 선한 회개자였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자신의 죄를 미워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고 주님께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근거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약속을 근거로 다윗은 자비를 구했다.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추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추악한 죄와 아름다운 구주의 이야기이다. 너무도 정직한 성경 내용에 마음이 상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 추악하고 비열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잘못된 상황에 처하고 또 잘못된 시기를 만나면, 인간은 누구나 사악하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다.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치유 받을 수 있다. 용서받고 강건해지며 회복될 수 있다. 다윗에게 가능했던 그 은혜의 기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능하다.지금, 죄를 회개하라. 어린양 보혈을 붙잡고 용서를 빌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것이 자비하심이다. 옛 언약이요 또 새 언약이다.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1.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 A Case Study in Narrative Theology in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7/2 (Autumn 2006): 81?95. Article copyright ⓒ 2006 by Richard M. Davidson.2. KM Hebrew Dictionary, Accordance Version, H7322.원제: Did King David Rape Bathsheb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음욕과 분노를 유발하는 소셜미디어, 당장 끊으라.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by Wyatt Graham
2023-08-15
소셜미디어 때문에 음욕이 치솟는다면, 소셜미디어 때문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당장 소셜미디어 앱의 작동 방식을 바꾸라.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예 앱을 삭제하라.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마 5:30)예수님은 지금 점잖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주님으로서 좁은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신다. 맥락상 여기서 지금 예수님은 간음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8). 요즘같이 섹스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충격을 받아야 한다. 섹스 산업이 잘 되는 건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다들 음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욕은 결코 게임이 아니다. 그냥 교환 거리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정욕 극복을 위한 5단계 프로그램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는 정욕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생생한 언어로 잔인하게 보여주실 뿐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마 5:29).왜 몸까지 잘라야 하냐고?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마 5:29).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30). 여기에서 그는 마음이 정욕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특정 부위인 눈에서 전반적인 형태로 이동한다. 죄를 짓게 하는 게 손이라면, 그 손을 잘라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손은 종종 우리를 죄로 이끈다. 살짝 클릭하고 또 스크롤 하는 손가락 때문에 파멸이 올 수 있다. 예수님은 음욕을 심각하게 여기신다. 그렇다고 단지 음욕만을 잔인한 용어로 정죄하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은 분노도 정죄하신다. 분노는 내면화된 살인이다(마 5:21-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2).분노와 음욕은 열정(분노)과 의지(욕정)를 왜곡한다. 이런 죄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같이 파괴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또 우리가 저지르는 일탈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죄를 명명하고 또 정죄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 그리고 그는 음욕과 분노가 우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아신다. 그런 죄는 실로 무자비한 폭군이다. 음욕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묶어야 한다(마 6:23). 화를 이기려면 우리는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만 한다(마 5:43-48).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이 짐을 가져가서 완전히 제거하실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약하고 지친 우리를 향한 주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신다. 할렐루야!“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예수님은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음욕을 파괴하고 분노를 분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를 가볍게 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단지 제안을 하는 게 아니다. 명령하고 계신다. 좁은 길을 걸으라고, 주님으로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과 애통의 짐까지 다 짊어지셨던 그분이 지금 우리의 지치고 연약한 모습도 다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음욕과 분노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는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죄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를 향해서 손짓하신다. 어서, 어서 내게 오라고. 소셜미디어가 당신의 영혼을 망치게 놔두지 말라. 음욕 또는 분노를 일으킨다면, 당장 잘라버리라. 당신의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원제: If Social Media Causes you to lust or Incites Anger, cut it off. Your life Depends on i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책이 사라지는 시대
by 박혜영
2023-08-14
지난 3월 말로 제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단골로 다니던 신학 전문 서점이 폐업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라비블’이라는 곳인데, 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출판된 신학 및 경건 서적을 판매했으며, 주문 대행도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작은 사무실 정도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강남 사거리 그럴듯한 건물에서 판매 공간도 널찍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이사도 다니고 했지만, 판매 공간만큼은 그럭저럭 유지했는데, 2-3년 전부터 다시 작은 사무실로 규모를 축소했고, 그러다 이제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한 달에 평균 일십만 원만 잡아도 삼천육백만 원, 그중 지난 10년간은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구매한 적도 부지기수니 그동안 그곳에서 책을 산 액수를 다 합하면 아마 오천만 원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게 애정을 쏟은 곳이라,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보았을 때 아쉬움은 정말 컸습니다. 이제 기분 전환하러 어디로 가야 할지….저는 계속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는 서점인지 잡화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변하더니, 이제는 서점 안에 유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매장에서 책을 찾아 검색하면, 직원에게 문의하라는 안내가 뜨며, 그렇게 문의하면 직원은 한참 지나 창고에서 책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래전에 자주 찾던 ‘아이브이피’ 서점도 그랬습니다. 선배를 통해 그곳을 알게 된 후로, 한때는 미국인 문서선교사가 직수입해 놓은 영어 경건 서적을 살펴보는 데만 오후를 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영국이나 미국 복음주의자의 책을 직접 대면했으며,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신학 서적도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영어 원서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날엔 서가에서 사라지고, 모퉁이에 몇 권 있다가, 또 얼마 후에는 그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국내 기독교 서적도 대폭 줄이더니, 이제는 책꽂이를 장식용처럼 세워 둔 카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을 한 군데 잃은 저는 라비블에 집중했는데, 이젠 그곳마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원보다 잘 알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 같아 서글프며, 앞으로 외출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멍할 뿐입니다. 잔가지를 열심히 입에 물고 만들던 둥지를 한전 직원들에게 갑자기 빼앗긴 까치들 심정이 이럴까요?이렇게 계속 서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책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비블이 문을 닫는 건 기독교 쇠퇴와도 연관되지만요.) 물론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그 증거로 들겠지요. 무엇이든 과거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 책도 그렇기야 하겠지요. 그러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책이 위태롭게 된 정도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 자체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지식을 대체하고 있으며, 지식을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젠 생각조차 필요 없는 그런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생성 인공지능’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생성해 내고, 대화도 생성해 낸다니….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통해 생각이란 걸 하게 될까요?어떤 분들은 이제야말로 질문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문해력이 더 필요해졌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인공지능에 맡겨 버리고, 그 대답에 의존하는 형편이라면, 과연 문해력을 키울 수나 있을까요? 생각의 도구인 책이 하찮아지고 있는데, 과연 문해력은 어디서 키워야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 낙관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잘 쓰는 인간의 능력을 계속 신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생각 자체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로 주는데, 과연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어떤 통제도 없이 너무 빨리 개발되다 보니, 태슬라 사장과 몇몇 사람은 인공지능 연구를 6개월 동안만이라도 중지시키자고 제안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는 자들도 이런 변화의 속도는 두려운가 봅니다. 이런 시대가 한 사람의 취미만 끝장내는 거라면 별문제 아니지만, 생각이 사라지는 시대의 징표라면 인간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이제 신학 책을 검색하고 사러 다니던 저의 시간은 강제 종료를 당했으니, 그 시간에 자리에 앉아 루이스의 인간 폐지나 읽고, 열심히 사둔 책이나 읽으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진보’ 기독교는 내가 떠났던 복음주의보다 더 얄팍하다
by Ian Harber
2023-08-12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떠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묻는다(요 6:67). 그러자 내가 추측하기로 많은 사람이 자기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떠나는 데에 마음이 상하고 민망했던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 6:68-69).이게 바로 내 이야기이다. 나는 두 가지 신발을 신고 걸었다.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의 신발과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베드로의 신발. 나는 ‘진보 기독교’를 위해 젊은 시절의 신앙을 버린 경험이 있는, 소위 말하는 전직 복음주의자(#exvangelical)였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돌아왔다. 다음은 다시 재복음주의자(#revangelical)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내 신앙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내가 자라고 배운 기독교 전통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하는 우리 세대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발견한 성경 비평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복음주의 거품 속에서 자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손끝에 모든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구글 검색이나 유튜브 영상에서 만나는 진지한 비판에 비해서 교회가 주는 답은 얄팍하게만 보였다. • 특정 성경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모순과 비과학적 내용은 어떻게 된 것인가? •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원수와 자녀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는 단지 어깨만 으쓱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는가? •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을 영원한 고통으로 정죄할 수 있는가? 다른 종교는 어떤가? 그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다 기본적으로 같은 소리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던 성경의 권위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단지 성경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 신앙이 추구하는 정치 문화와 성경을 어떻게 일치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과제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책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사회에 특히 더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내가 자란 텍사스 마을에서 더 잘 살겠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사례가 그토록 많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출산 후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낙태에 신경 쓰는 것만큼 마음을 쏟는 게 당연하겠지?나는 성경이 알려주는 이야기보다 이 세상의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 예수님 또는 교회와 아무 상관 없이 살고 싶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다시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나와 소원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한 복음주의 환경에서는 고난에 대한 실질적인 신학이 빠져 있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피하거나 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처럼 성경, 정치, 그리고 고통에 관한 삼각형 질문은 내가 진보 기독교를 탐구하도록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재건 없는 해체나는 랍 벨이 쓴 Velvet Elvis와 사랑이 이긴다를 읽었다.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도 읽었다. 아직도 나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은혜의 세계만이 아니라 정통 교리에서 자유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한 재즈처럼 하나님은의 한 단락을 기억한다. 마이클 겅거의 팬으로서 나는 그가 새로 시작한 팟캐스트 The Liturgists를 듣기 시작했다.내가 새롭게 만난 광경은 감동적이었다. 성경 때문에 굳이 과학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도가 동전 던지기처럼 느껴졌을 때, 신비주의는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했다! 믿음은 소외된 집단까지 돌보도록 정치에까지 영감을 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겅거와 “Science Mike” 맥하그(McHargue)의 해체 이야기에 나의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침내 믿음을 해체하고 다시 처음부터 재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게는 재건에 필요한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신념이 정밀한 조사를 위해 깔끔하게 분해되어 바닥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어떻게 조립하면 된다는 지침은 전무했다. 재건이 결여된 신앙 해체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위험하고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해체의 목표가 단순한 자기 발견이나 미덕 과시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제나 예수님을 향한 더 큰 신실함이 되어야만 한다. The Liturgists의 여정이 진행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좌파가 추구하는 진보 플랫폼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 눈에 공화당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으라고 소리치던 보수 그리스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6년 대선이 끝났을 때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국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우려를 공유했지만,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은 어린 시절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리트머스 종이였다. 단지 반대편 통로에 서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당신이 역사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고수한다면, 이제 당신은 시대에 역행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당신은 반여성적인 사람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근본주의자들만큼이나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단지 리트머스 종이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치에서 깨어남(wokeness)의 여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보 정통주의의 정당 노선을 정확하게 밟지 않는다면, 이제 당신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바로 이단자 말이다.‘진보라는’ 브랜드, 똑같이 얄팍한 외침이제는 미국인에게 일종의 기본 신앙이 되어버린 도덕적 치료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 MTD)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슬픔 없는 품위 있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진보 기독교를 향해서 달려간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런 식의 천박한 믿음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몇몇 용어만 다를 뿐 MTD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깨어남은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치료는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고, 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새로운 교회 규율이 되었다. MTD와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삶에 어떤 것을 요구하는 개인적인 하나님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식의 “진보적” MTD에서 남은 것은 이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비유뿐이다. “하나님도 이제 당신과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거한다.” 나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방법이 사라졌다. 이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이제 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깨어남(anti-woke) 또는 반-치료주의자(anti-therapy)라는 건 아니다. 구조적 불의는 현실이며 깨어남이 가져다주는 대화는 필요하다. 나는 대학에서 거의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치료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사랑을 깨어남과 치료로 대체할 수는 없다. 마크 세이어즈는 세계의 진보적 비전을 “왕 없는 왕국”으로 묘사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과 통치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받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진보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가 실종된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화해 없는, 사회를 위한 복음의 수평적 혜택을 원한다. 우리는 개인의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 없이 이 사회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우리의 표준에 순응하기를 원한다. 정통 기독교로의 복귀2016년 선거 이후 나는 신앙을 재건해야 할 때임을 확신했다. 몇 달 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시작했고,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비극적인 사고로 잃었다. 그 죽음은 다시 한번 나를 극심한 고통에 빠뜨렸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신학적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스승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빛 속에서 신학을 한다. 그래야 어둠을 만났을 때 신학이라는 발판 위에 설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와 통일된 이야기로서의 성경, 그리고 성경을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 읽는 방법을 배웠다. 형벌 대속과 승리자 그리스도와 같이 상호 모순된다고 생각했던 교리들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성경적 그림을 형성하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에 관해서 배웠다. 영적 훈련과 훈련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할 때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자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내 눈 앞에는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이 가져다주는 넓고도 풍부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내 이야기는 특별한 게 아니다. 사실 이런 간증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목회자를 향한 나의 간청은 다음과 같다. 1. 유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1:22)라고 말한다. 거친 대답이나 무시 또는 얕은 수준의 답변으로 의심이나 질문 또는 고민을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 어려운 질문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포괄적이고 분명한 답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라. 2. 기독교 전통의 풍요로움을 가르쳐라. 더 나은 삶을 위한 지침으로 기분 좋게하는 MTD 수준의 진부함에 안주하지 말라. 복잡한 질문에는 복잡한 답변을 제공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분인 예수님이 연민과 사랑과 은혜로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라. 우리 교회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신학, 뉘앙스, 은혜, 연민,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정통 교리 때문에 어려워진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가능해졌다. 의심과 질문이 반드시 믿음에서 불신앙으로 진행하는 추진력에 의해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다. 건강하고 사려 깊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의심과 질문이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이신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제대로만 다뤄진다면, 도리어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신앙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 열매 맺는 삶을 생산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의 맹렬한 바람까지도 견딜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은 굴곡지고 복잡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길은 우리가 한동안 그 길에서 벗어났을 때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세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길이 있다. 이 세상은 다양한 영적 “깨달음” 또는 스스로의 믿음을 큐레이팅하도록 돕는 다양한 옵션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는 길 외에는 참된 행복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없다(요 14:6). 그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좁지만(마 7:13)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가져다준다(시 16:11).믿음의 여행 중에 내가 베드로와 함께 발견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찾기 위해 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유 1:3) 믿음의 경계를 떠나야 하는가?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 그는 생명이시다. 진리이시다. 그리고 길이시다. 그분 외에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원제: ‘Progressive’ Christianity: Even Shallower Than the Evangelical Faith I Lef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진보기독교
보수기독교
복음주의기독교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01 복음의 재발견02 문화의 상황화03 기독교 변증04 복음 생태계05 그리스도 중심 설교06 우상숭배와 복음07 정의와 자비 사역08 신앙과 직업09 통합적 사역10 팀 켈러의 저서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0) : 팀 켈러의 저서...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에 팀 켈러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아내와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내 책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다” 라는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팀 켈러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서 40권이 넘는 책을 남겨주신 것은 귀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팀 켈러가 직접 쓴 책뿐 아니라 팀 켈러와 관련된 책들도 속속 연구되어 나오고 있다.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팀 켈러를 공부하고 싶지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이해가 다르니 어느 하나의 로드맵을 그리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팀 켈러의 저서 전체의 숲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팀 켈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팀 켈러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전체 책의 목록을 정리해보았다. 분류 기준 팀 켈러의 다양한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필자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 나오는 통합적 사역을 중심으로 전체 내용을 분류했다. 독서를 위한 분류 체계이기 때문에 팀 켈러가 말한 “∼에게 연결하는 것”이라는 큰 틀을 따랐지만 세부 주제들은 임의로 정했다.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교회 사역의 통합성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의 사역 접점을 소개한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사역을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5.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의 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팀 켈러의 저서들을 분류해보았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1) 복음 ① 탕부 하나님 /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두 책은 동일한 The Prodigal God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역간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복음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팀 켈러의 복음에 대한 기초 이해를 가지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 탕부 하나님의 기초가 된 설교는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3장 ‘아버지의 환영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누가복음 15장의 설교이다. 탕부 하나님을 클라우니의 책과 비교해서 보면 팀 켈러가 복음의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에게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② 방탕한 선지자 원서 The Prodigal Prophet의 제목이 탕부 하나님과 비슷하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인간에 내재된 본성임을 알려주고 복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탕부 하나님과 함께 읽으면 복음에 대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는 책이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유했다면,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요나서 1-2장을 통해서 둘째 아들의 모습을, 3-4장을 통해서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는 늘 복음을 거부하는 두 성향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할 때 생기는 영적 질병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복음의 감격을 제시한다. ③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센터처치라는 한 권으로 된 책을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권으로 나누면서 팀 켈러 인터뷰를 부록처럼 포함했다. 센터처치의 제1권 ‘복음’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와 설교에서도 시작을 ‘복음’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가 말하는 은혜의 복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와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 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④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짧은 소책자이지만 내용의 힘은 엄청난 책이다. 복음을 단순히 신학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칭의의 복음이 인간의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원서는 The Freedom of Self Forgetfulness로 ‘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세속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 말하지만, 성경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이 결국 자기를 망각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통해 정서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⑤ 내가 만든 신 / 거짓 신들의 세상 팀 켈러는 죄를 설명할 때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단순히 행위로 짓는 죄를 넘어 마음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모두 우상숭배임을 알려주고, 우상을 숭배할 때 노예 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 불렀다. 결국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의 순서를 회복할 때 참된 질서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상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 ‘복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주제로 만든 성경공부 교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복음이 적용되는 대상인 마음, 공동체, 세상, 그리고 영원까지 변화시킨다는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날 임할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⑦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 복음이 핵심이다 /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2018년 한국에서 개최된 ‘센터처치 콘퍼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에게 설교하기’와 ‘복음의 상황화’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실렸다. 비신자에게 설교하는 구체적인 원리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복음이 핵심이다는 The Gospel Coalition에 속한 저자들이 열네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D. A. 카슨과 ‘복음중심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TGC 정신에 대해 썼고, 브라이언 채플, 케빈 드영 등의 저자들이 한 편씩 기고했다.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 2017년 TGC에서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책이다. 팀 켈러는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6장을 설교했다. 2) 전도와 변증 ① 하나님을 말하다 / 살아있는 신 팀 켈러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The Reason for God을 번역한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기독교를 변증한다. 팀 켈러의 변증은 복음을 향해 나가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어떤 믿음이 존재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논증해준다. ② 답이 되는 기독교 하나님을 말하다 출간 후 제기된 다양한 의견과 반대의견에 대해 다시 반론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요즘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신념들을 밝히고 복음이 가장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증명한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하는데, 그 문화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으로 답을 해준다. 문화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③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다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도와 전도설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팀 켈러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다. ④ 탈기독교시대 전도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도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전 시대는 교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회에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통용되었지만, 지금 교회의 메시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 내러티브와 동떨어져 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소개한다. 3) 개인 경건 ① 묵상: 예수의 노래들 시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② 오늘을 사는 잠언 잠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③ 고통에 답하다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해주고 고난 속에서도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어 준다. ④ 기도기도 안내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하는 대화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임을 아우구스티누트, 루터, 칼뱅 등 교회사의 기도의 거장들로부터 기도를 배우고, 더 깊은 기도를 위한 지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교본으로 균형 잡힌 책이다. 4) 예배 ①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예배라는 주제를 다양한 교파의 목회자가 공저한 내용이다. 팀 켈러는 ‘대도시에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해 다양한 논쟁들이 있지만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역사적인지를 구분하며 사랑 안에서 질서를 세워가는 과정들을 설명한다. 또 리디머 교회의 예배 형식을 예로 소개하고 있다. ② 21세기 복음전도 예배예배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21세기 복음전도 예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센터처치 제7부 통합적 사역의 제2장 ‘사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의 내용과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1) 교회와 공동체 ① 복음과 삶: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복음과 삶’ 성경공부 교재의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는 공동체와 전도,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교회에 대해 다루지만, 특히 Part 2 ‘통합적 사역을 추구하라’의 제6장 ‘공동체를 만나도록 연결하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③ 개혁주의 실천신학팀 켈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이다. 목회 사역의 근거와 특별직무, 소명, 목회사역을 위한 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용서를 배우다팀 켈러가 직접 쓴 마지막 작품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어떻게 복음이 용서로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팀 켈러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이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로잡고,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 오직 은혜임을 알려준다. 복음이 대인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가정 ① 결혼을 말하다 결혼에 관한 여덟 편의 설교를 모은 책이다. 독신에 관한 내용도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제6장 ‘다름의 복을 누리라’에서 서로 다른 부부를 포용하는 것에 대해 또 남편의 머리됨에 대해서는 케시 켈러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② 결혼의 의미결혼과 가정에 관해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캐시 켈러와 공저. ③ 인생 베이직 시리즈 :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소책자이다. 전도와 변증의 책으로 유용하다. 팀 켈러 소천 이후에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마치 생생한 그의 신앙고백처럼 들린다.3.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1)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① 여리고 가는 길정의와 자비 사역을 다룬 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도시를 섬기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주로 개인 구원에 편향되어 있고, 사회 구원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교회는 복음이 약한 편인데, 팀 켈러는 그런 공식을 깨고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이웃과 세상을 섬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웃을 섬기는 구체적인 적용들도 많이 제시한다.② 정의란 무엇인가‘여리고 가는 길’에 기초한 확장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역을 섬기는 정의 사역이 필요한지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정의의 문제로 바라본다.③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센터처치의 ‘도시’ 부분을 따로 분권한 책이다. 복음의 상황화, 도시비전, 문화참여로 구성되어 있고, 팀 켈러와 앤디클라우치의 인터뷰가 있다. 교회와 도시의 관계와 도시목회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2)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① 일과 영성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추구하는 책이다. 일과 직업의 관계를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으로 구성했고 서문에 나오는 돌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예를 통해 회복의 관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와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는 도시와 문화라는 구분 없이 두 주제 모두 포함하고 있다. 특히 복음 생태계를 이루는 과정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③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소개한 책이다. 팀 켈러는 프롤로그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2장 세속 도시 속에서 소금이 소금되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4.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것 ① 센터처치 /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② Church planting (교회 내부 자료) 5. 그 밖의 자료들 마인드맵(이 글 끝에 있음)에서는 설교와 설교집, 주석 및 성경공부 교재를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1) 설교와 설교집 ① 팀 켈러의 설교 ②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 설교집 ③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읽어버린 이름 성탄 설교집 ④ 천국 묵상 천국에 대한 설교 2015년 TGC 콘퍼런스 설교(1장 생명을 선택하라, 패널토의)⑤ 그분의 사역 누가복음 설교 2014년 TGC 콘퍼런스 설교(누가복음 24장 무죄를 입증하다, 패널토의)2) 주석 및 성경공부 ①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2② 당신을 위한 사사기③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④ 당신을 위한 팀 켈러의 90일 성경공부: 갈라디아서, 사사기, 로마서⑤ 로마서 성경공부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3)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팀 켈러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팀 켈러와 함께 사역한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이 3년 동안 팀 켈러와 주위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팀 켈러 전기이다. 팀 켈러의 업적을 기리는 전기가 아니라 팀 켈러를 오늘날 팀 켈러로 만든 팀 켈러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 켈러의 저서를 읽기 전에 팀 켈러의 전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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