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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스’와 흙
by 양혜원
2023-07-19
서울에 있는 큰이모네 집은 마당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많은 집이 그랬듯 마당에는 개가 있었다. 울산에 살던 우리는 방학을 이모네 집에서 보낼 때가 많았는데, 어느 여름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꼬물거리는 강아지가 여러 마리 있었다. 그해 여름, 또래의 사촌들과 나와 여동생은 각자 강아지를 한 마리씩 안아 들고는 신나게 데리고 놀았다. 원래 집 안에는 들이지 않는 강아지를 집 안에까지 안고 와서 놀다가 강아지가 마룻바닥에 쉬를 하는 바람에 이모에게 혼을 나기도 했다. 자아의 경계가 아직 분명하지 않던 그 어린 시절, 나는 망설임 없이 강아지들을 끌어안았고 이뻐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털 달린 것들을 꺼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무서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다시 털 달린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둘째 아이를 보내고 나서였다. 힘들게 진통해서 낳은 아이를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보지도 못하고, 바로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보내서였을까. 불어난 젖을 물릴 아이도 없이 말려야 했던 나는 아무런 열매 없이 푹 꺼진 배가 그리 허전할 수가 없었고, 아이를 안아야 할 품은 너무도 공허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이 털 달린 것들에 눈을 돌리게 했다. 어느 가게에서 내 다리를 쓸고 지나가는 고양이가 사랑스러웠고, 품에 안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양이를 들일까 생각했다. 그 무렵 지인도 마침 고양이를 막 키우기 시작해서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았기에 솔깃했지만, 개냥이 같은 고양이를 만나는 것은 확률에 의지해야 했기에 우리는 강아지를 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온 녀석이 빈스(Beans)다. 하지만 원해서 들였음에도 나는 쉽게 친해질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 강아지 녀석이 부엌에서 일하는 내 다리를 스쳐 지나갔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 ‘엄마야’ 비명을 지르기까지 했다.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으니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데도 내 예상 안에 들어오지 않는 행동 패턴은 제법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빈스는 식구들이 일터로 학교로 나가고 나 홀로 집에서 번역 일을 할 때, 내 곁을 지키는 동지가 되어 주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한 번씩 집에 올 때면, 이러다 숨넘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정신없이 좋아서 매달리며 나를 반겼다. 그 빈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일본에서 연구원으로 머물 때였다. 저녁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 길거리에 서서 전화를 붙들고 나는 수화기 건너편의 아들과 같이 한참을 울었다. 이유를 모른 채 둘째를 보내고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들였던 빈스가 또 이유를 모른 채 떠났다. 그러한 빈스의 죽음은 이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하나의 신호처럼 내게 다가왔다. 일본에서 체류 연장을 위해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가능성이 별로 없겠다 생각하던 차이기도 했지만, 그냥 그 모든 것이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돌아와서 취직을 하기는 했으나, ‘코시국’으로 나가는 날보다 집에 있어야 하는 날이 많던 그 시절, 나의 외출은 글을 쓰거나 연구를 하다가 마스크를 쓰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게 거의 전부였다. 사람과의 만남이 극히 제한되었던 그 시절에 내가 자주 마주쳤던 또 다른 털 달린 것은 비둘기 떼였다. 비둘기에 대한 기억은 강아지에 대한 기억과 달리 썩 좋지 않다. 어린 시절 동네 놀이터에 늘 무리로 구구거리던 비둘기 떼 틈새로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갈 때 사방으로 흩어지던 그 모습은 재미가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물체는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 날,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장이 다 드러난 비둘기 사체를 보고 난 이후로 비둘기는 조류 공포증이 생길 만큼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대영 제국의 전성기를 자랑하는 트라팔가 광장의 높디높은 넬슨 제독 석상에, 인간의 업적을 비웃듯 그 머리와 어깨와 얼굴에 사정 없이 배변을 해대는 비둘기 떼의 광경도 비둘기에 대한 인상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마스크를 끼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또 하루의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나는 비둘기 떼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고, 무심결에 비둘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빈스의 눈에 비하면 아주 작은 팥알 같은 눈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빈스가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아, 나는 언제 한번 내가 사는 세상을, 그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제대로 살을 맞대어 본 적이 있던가? 이런 털 달린 것들이 밟고 다니는 흙의 질감을 한 움큼 제대로 만지며 느껴본 적이 있던가?’ 사실 내게 이 세상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었고, 거리를 두고 싶은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라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세계관도 배웠고, 그런 책들도 여러 권 번역했지만, 결국 거기에서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을 판단하여 뒤집으라는 말뿐, 내가 사는 세계와 친밀해지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내가 비둘기를 새삼스레 보며 빈스를 떠올리고, 인간의 원료인 흙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더듬어 보니 그 시작은 아무래도 내 아이를 잃은 그 일이었지 싶다. 그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강력한 힘으로 나를 세상의 밑바닥으로 던져 넣었고, 그 바닥에서 아마도 나는 조금씩 세상의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 시작에 빈스가 있었다. 나의 글쓰기가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글쓰기와 이 바닥의 경험, 나의 흙됨을 마주하는 이 경험이 가지는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미국의 가톨릭 여성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소설 쓰기는 손에 흙을 묻히는 행위라고 했다. 소설은 인간에 대한 것인데 인간은 흙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흙 묻히는 게 싫은 고상한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말 것을 권했다. 나는 이 말이 비단 소설 쓰기에만 국한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다는 이 땅, 이 세상, 그 안의 인간을 알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 모두 손에 흙을 묻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신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알기 위해서도 흙의 것들을 알아야 한다. 혹 흙을 경유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수단이 없는 나와 같은 범상한 사람들은 계속 손에 흙을 묻히기로 택하는 수밖에. 글과 흙. 생뚱맞은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슴은 땅에서 비로 마당을 쓸고, 선비는 몇 계단 올라 있는 방 안의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글을 읽었던 시절의 습성 때문일까. 우리는 글을 높은 단상에 올리고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습성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글을 통해서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을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에 대한 기록, 곧 글을 통해서이다. 이 글을 처음 기록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우리에게 만지는 것처럼 전달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흙의 모습으로 오신 이분을 글로밖에 전달할 수 없다면, 분명 그 글은 손에 흙을 잔뜩 묻힌 글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건너 우리에게 전달된 이 글에서 우리는 흙은 툭툭 털어버리고, 경건주의자는 경건주의자대로,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자대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글을 이용할 때가 많다. 내가 번역한 작가들 가운데 이러한 식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사람이 유진 피터슨이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네에서 축구를 하는 소년들을 보면서 그렇게 또래들과 땀범벅이 되어 흙바닥을 뛰어다녔을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성경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된 예수님은 그런 예수님이었다. 흙을 잔뜩 묻힌 글에서 그 흙을 제대로 읽어낸 셈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글과 흙의 조합은 사실 매우 중요한 조합이다. 그래서 나의 글도 어느 순간 흙을 초월해 거창한 이념의 세계로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그때 잃는 것은 단지 흙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흙이 된 한 사람을 앎으로써 얻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무심천변 아픈 역사는 비(碑)가 되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청주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7-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충청도’가 충주와 청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이는 과거 충청도의 중심은 오늘의 충청북도가 중심이었다는 의미이고, 충청남도에는 견줄 만한 유력한 도시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조선시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충청북도가 충청권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므로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선정할 때도 중요하게 여긴 곳이 아닐 수 없다. 충청북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먼저 감리교 선교사 스웨어러가 청주지역에 복음을 전했지만,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은 장로교 선교사 밀러가 이곳에 선교거점을 만들면서이다. 그러면 충청북도는 어떤 선교 루트를 따라서 복음이 전달되었을까? 충청북도는 경상도로 가는 지름길이며 가장 중요한 길목이었다. 따라서 부산, 대구, 안동, 문경을 거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충청북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자연스럽게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또 하나의 루트이면서 청주 읍내보다도 먼저 복음이 전해진 곳은 현재 흥덕구 신대동이다. 청주에서 서쪽에 자리한 신대동은 복음이 죽산(현재는 안성시 일죽)을 거쳐서 청주로 유입된 경우이다. 이 루트를 통해서 복음이 청주에 가장 먼저 전해졌고, 이 루트를 통해서 설립된 충청북도 최초의 교회는 신대교회이다. 이 교회는 지금도 청주 시내와는 거리가 있는 위치(흥덕구 신대동 426)에 있다. 해주 오씨 집성촌인 이 마을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해는 1901년인데, 죽산(둔병리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이 마을 사람 오천보, 오삼근, 문성심 등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돌아와서 오천보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밀러(Frederick S. Miller, 민노아)와의 만남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밀러 선교사는 1901년에 충청북도 지역의 선교 책임자로 임명받고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청주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밀러는 김홍경이라는 전도인을 대동하고 청주지역을 방문하여 전도했다. 그러한 수고의 열매가 1904년에 비로소 맺게 되었다. 남문 밖에 초가 한 채를 마련해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설립했고, 1년 만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만큼 성장했다. 이 교회가 예배당을 마련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사람의 소원이 있었다. 임원배라고 하는 이가 개종해서 신앙인으로 살다가 별세하면서 예배당 마련을 위해서 100원을 유언으로 남긴 것을 계기로 새로운 예배당을 위한 건축헌금을 시작했고, 첫 예배당인 초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1,500평 부지를 마련했다. 그곳이 현재 이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은 청주 진영의 영장(領將)이 거처하는 관사와 감옥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1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함으로써 그동안 뜻은 있었지만 할 수 없었던 큰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그것은 곧 선교부의 전략에 따라서 교회 설립과 동시에 학교, 병원을 함께 시작하는 것이었다. 인력과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든 사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청남학교를 먼저 시작했고, 예배당을 마련한 다음에는 여자학교인 청신학교(1907)를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은 없었지만, 시약소(施藥所)를 설치하여 급한 대로 필요한 처방과 투약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운영했다. 밀러 선교사는 청주읍교회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선교를 전개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교회를 세우고, 각 교회에는 학교를 세워 선교 정책에 부합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했다. 그래서 청천교회는 청동학교를, 신대리교회는 청서학교를, 청주읍교회는 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를, 북망교회는 청북학교를 세웠다. 멀리 괴산에도 교회와 학교를 세웠는데, 괴산읍교회와 곽신여학교 등이다. 이렇게 남자학교 4개, 여자학교 2개를 세워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충청북도 지역의 복음화와 신교육과 의료사업을 선도하였다. 청주에 제일 먼저 선교거점을 만들고 선교 현장을 이끈 밀러 선교사는 1892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하지만 그는 조선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아들 둘을 1899년과 1902년에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장남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차남은 하루 만에 잃는 슬픔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슬픔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슬픔을 넘어서는 고통이었다. 이듬해인 1903년에는 아내인 안나(Anna Reinecke Miller, 1864~1903)마저 복막염으로 잃어야 했다. 그녀는 별세하기 전까지 서울에서 정신여학당(연동여학교, 현 정신여고)에서 교육 선교사로 섬겼는데, 이렇게 거의 같은 시기에 가족을 잃고 밀러 선교사는 청주로 내려와 선교거점을 세우고, 충청북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다.청주읍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예배당이 비좁게 되었다. 따라서 1914년 200석 규모의 목조 예배당, 1939년 500석 규모의 고딕양식 2층 구조로 된 벽돌조 예배당을 마련했다. 현재도 이 교회의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다만 이 예배당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증축한 것으로, 외부에서 2층 예배당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설치했다.그런데 현재 이 교회가 터를 잡은 이곳은 조선시대 이 지역 죄수들을 수용하고 있던 옥사(獄舍)가 있던 곳이다. 그렇다 보니, 신유사옥(1801), 기해사옥(1839), 병오사옥(1846), 병인사옥(1866) 등 조선 후기에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마다 이 감옥에는 수많은 천주교도가 투옥되었고, 또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무심천(無心川) 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 교회 터가 본래 청주 감옥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도가 투옥되고 처형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곳에 서린 아픈 역사이다. 처형당한 천주교들의 잘린 머리, 팔다리, 몸이 방치되어 나뒹굴다가 비라도 내리면 그대로 무심천으로 씻겨내려 갔다. 하여 무심천이라는 천명(川名)은 보는 사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이러한 내력 때문에, 청주제일교회 마당 끝, 시장통으로 나아가는 곳에는 천주교회에서 세운 순교자 기념비와 순교지 정원이 있다. 매우 이례적이고 특별한 공간이다. 모르긴 해도 청주제일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그런가 하면 청주제일교회 마당 구석구석에는 여러 비석이 세워져 있음이 특별하다. 비석 한둘쯤이야 예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청주제일교회에는 비석이 여럿이다. 관심을 가지고 그 비석들에 담긴 인물, 사건, 역사를 찾아본다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주교회가 세운 기념 공간을 비롯하여 이곳에는 청주지역 여성교육과 선교에 일생을 바친 로간 부인 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는 1909년 조선에 와서 이곳으로 부임한 후 1919년까지 10년 동안 청주지역의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가 별세한 로간을 기념하는 비이다. 이 교회의 여선교회 회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충청북도 최초의 한글 기념비이다. 그밖에 충청북도 기독청년, 기독여성, 민주화운동요람, 창립백주년기념비 등의 비석이 있다. 아주 크고 특별하고 낯선 비석도 하나 있다. 망선루(望仙樓) 터를 알리는 비석이다. 고려시대(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음) 누각인 망선루가 청주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데, 그것을 1922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헐어버리려고 하자 이 교회 청년 김태희가 중심이 되어 청주청년회가 망선루 보존 운동을 전개했고, 그것을 1923년 청주읍교회 경내로 옮겨온 것이다. 결코 간단하거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 건축물이자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을 파괴하려는 일본에 저항하면서 교회 경내로 이축한 것이다. 망선루를 교회 경내로 옮긴 다음, 이 건물에서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상당유치원 같은 교육시설로 사용하면서 민족과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근대교육의 장으로 사용했다. 이 망선루는 1999년까지 이곳에 있었는데, 보수관리가 필요해서 2000년 청주중앙공원으로 옮겨갔고, 그 자리에 망선루 터라는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그러한 의미에서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특별한 장소이다. 옥사 터 위에 예배당이 세워진 것이고, 또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곳으로, 속죄와 영원한 소망을 증언하는 복음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의미를 더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시키려는 과정에서 파괴하고자 했던 망선루를 지켜낸 터라는 의미도 더해지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러나 끝내 마음과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일제 말기에 건축된 붉은 벽돌 예배당의 외벽에는 민족의 아픔인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곳도 전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어, 외관의 고풍스러움에 젖다가 이내 탄흔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70년 전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교회의 예배당은 찾는 이들에게 발걸음을 멈춰 그 역사를 잊지 말라고, 그 역사를 치유하여 꼭 통일 공동체를 세우라 외친다.
청주제일교회
이종전
장명근
망선루
선교거점
청주읍교회
밀러선교사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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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제품, 쓰지 않아야 하나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17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화장품을 쓰고 있는데, 그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가 이단과 연루된 곳이라고 합니다. 이 제품을 계속 사서 써도 되는지 고민입니다. 제품은 좋은 것 같은데, 그 회사의 매출이 늘어나게 함으로써 결국 이단의 포교를 돕는 것이 아닐까요?김: 저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신학대학 다닐 때, 학교에서 강의하시던 미국인 선교사님이 한겨울에 석유난로를 많이 쓰지 말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석유 판 돈으로 이슬람이 선교한다고요. 이: 저는 이 질문을 보고 자칫 율법주의 관점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이 보이콧해야 할 회사들이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정책이나 윤리를 지지하는 회사들의 제품을 불매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낙태나 동성애를 옹호하는 회사들의 리스트를 만듭니다. 제가 그 리스트를 갖고 있는데, 굉장히 많습니다. bibleblender.com에 의하면, 아마존부터 있네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서 책을 사야 할까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항공사 대부분, 코카콜라, 펩시콜라, 드롭박스, 이베이, 애플, 골드만삭스, 페이펄, 마이크로소프트 등등 100개도 넘는 것 같습니다. 이런 회사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다 거부하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요? 질문자는 화장품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지만, 아마 고민 없이 아이폰을 쓰고 있을 수도 있어요. 김: 저는 그러한 생각에는 순결주의 강박도 있는 것 같아요. 좋은 신앙은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것이지요. 사실상 그렇게 살기는 불가능하고, 늘 경각심은 가져야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신앙의 동력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우리는 이 문제를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봅시다. 11절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1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에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not of the world) 않은 것이 예수님께서도 인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환경을 기독교의 관점으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김: 저는 그다음 15절 말씀도 주목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분리된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신실하게 살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세상과 완전히 차단돼서 사는 것은 불가능함을 아십니다. 제가 아는 권사님도 한때 이단이 경영한다고 의심받은 화장품 회사에서 세일즈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 말씀이 그 회사의 경영자가 종업원들을 굉장히 잘 지원한다는 거예요. 또한 좋은 화장품을 싼값에 공급하는 게 회사의 모토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품이 많이 팔리면 이단 포교를 돕는 것이라는 하나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회사의 종업원들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창출되고, 회사에 매출이 늘어나면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연구 개발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지 내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김: 일의 신학이 이러한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겠군요. 아무리 이단이나 타종교에서 운영하는 회사라 하더라도 그들이 일의 신학에 부합되는 가치를 실천하며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도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라고 하셨습니다.이: 저는 누가복음 6:32-33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35절 후반부에서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종교가 다른, 심지어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비즈니스와 일에 대해서 먼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김: 그들이 노동을 착취하거나 불량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한다면 일의 신학의 관점에서 거부해야겠지요. 전에 이단들이 신도들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서 번 돈으로 자기네 조직과 교주의 배만 불린 적도 있었으니까요. 이: 예. 맞습니다. 그들이 낙태 옹호 단체에 돈을 보내거나 기독교 가치나 생명윤리에 명백히 배치되는 일을 공공연하게 한다면 거부해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로마서 14장입니다. 20절을 보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적용하자면 우리가 이단의 제품이나 서비스 자체가 악하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이단의 것인 줄 알면서 자유분방하게 애용하거나, 또는 약간이라도 불편한 마음을 품고 사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김: 오래전 신학생 시절에 신학 교수님이시고 목사님이신 분과 차를 타고 지방에 가다가 휴게소에 들렸는데, 거기서 그 교수님이 통일교에서 판매하는 음료수인 맥콜을 사서 거리낌 없이 마시고 저에게도 괜찮다면서 나눠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일로 며칠 동안 저분이 정말 제대로 믿는 분인가 하고 고민했었습니다. (웃음) 이: 로마서 14장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는 이유는 또 다른 더 중요한 원칙,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김: 나는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덕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고려하여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헌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그런 좋은 화장품을 만들어서 방문판매 하는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이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피라미드식 판매를 통해 실적을 쌓아서 다이아몬드를 이루면 한 달에 1억을 번다.’ 이런 점이 오히려 일의 신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봐야 할 사항 아닐까요? 이: 그건 우리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단 포교를 얼마나 하느냐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공주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처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가 물질적 성공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선교적 소명으로 삼고 운영하는 기독교 회사라면 모를까, 세상에서 운영하는 회사를 그런 문제로 탓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에 갈 때까지 ‘이 모순된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까’라는 숙제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김: 그런데 때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질주의와 성공주의를 포장하는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모든 회사가 다 그렇다고 하면 결국 내 안의 욕망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나 자신이 윤리적으로 바로 서는 게 중요합니다. 나의 현실과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이웃을 배려하고,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들을 섬기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늘 헤아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 아니요로 나뉘지 않습니다. 김: 그리스도인이 이단 회사의 제품을 이용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음과 같이 대답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먼저 일의 신학적 가치를 고려하라. 그 회사가 노동착취를 하는 반사회적인 사교 집단이거나 불량제품을 만드는 곳이지 않은 한, 또는 공공연히 기독교 가치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한, 무조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둘째, 이단의 포교와 같은 문제는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라. 그들의 비즈니스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안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셋째, 그렇다고 이단의 제품이라는 걸 알면서 굳이 계속해서 애용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도 알아보라.넷째, 믿음이 약한 이들을 배려하라. 이단의 제품을 사용하는 나의 자유가 그들에게는 시험이 될 수도 있다.
성전
by Stephen Witmer
2023-07-1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는 어떤 시인과 시를 시장 노점에 전시된,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당신의 눈을 즐겁게 하는 신선한 농산물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반면에 어떤 시인과 시는 당신 안에서 자라는 식물과 비슷하다. “농산물을 검사하기도 전에 이미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통과하는 것 같이 느끼는 경우이다”(Stepping Stones, 50).많은 독자에게 조지 허버트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변혁적 시인이었다. 세상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독자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고뇌에 찬 윌리엄 쿠퍼는 허버트의 시에서 위안을 찾았다. C. S. 루이스는 가장 큰 영향을 준 열 권의 책에 성전을 넣었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허버트의 시 “사랑(III)”을 낭송하는 동안 그리스도가 직접 내려와서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고백했다 허버트를 사랑한 다른 작가로는 리처드 백스터, 찰스 스펄전,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W. H. 오든, 그리고 T. S. 엘리엇이 있다.허버트의 시가 거의 다 종교적이지만, 그의 시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T. S. 엘리엇은 허버트의 시가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몇 년 전, 팟캐스트에서 토론하고 싶은 시를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은 영국 배우이자 자칭 타락한 가톨릭 신자인 앤드류 스콧이 꼽은 것도 허버트의 시였다. 연설가, 목사, 시인조지 허버트는 누구이며 무엇을 썼는가? 허버트는 1593년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애 초기에 학문으로나 직업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그는 학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케임브리지 대학의 펠로우가 되었고, 1620년에는 대학의 권위 있는 연설가로 선출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삶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었다. 그에게 딱 맞을 거 같았던 법정 경력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부유한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진로를 타진하던 중에 결국 솔즈베리 근처의 베머턴 마을에서 성공회 교구 목사가 되었다. 거의 무명의 목사로 삼 년을 사역한 그는 마흔 살 생일 직전인 163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그 시대에 허버트는 세련된 라틴어 연설로 존경받았다. 그의 유일한 산문집인 시골 목사들을 위한 짧은 지침서, The Country Parson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 글은 수백 년 동안 널리 영향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연설도, The Country Parson도, 잠언집(천 개 이상)도, 또 라틴어 시도 그가 동시대 독자들에게 미친 놀라운 영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끼친 영향력을 제대로 알려면 사망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약 160편의 영시(숫자는 당신이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를 담은 얇은 책에 주목해야 한다. 임종 당시 그는 친구인 니콜라스 페라에게 모든 시를 넘기면서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페라가 보기에 괜찮다면 인쇄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시를 읽은 페라는 깊이 감동되었고, 즉시 성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왔다. 왜 성전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가성전은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 “The Church-porch”는 다소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시로 구성된 77개의 연으로 구성되었다. 때로는 기발하고 재미있고 또 기억에 남는 이 부분은 중심 내용으로 이어지는 도입 역할도 하지만, 이 책의 주요 매력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와 미래 심판의 비전에 관한 긴 시로 이뤄진 마지막 부분, “The Church Militant”도 핵심 매력은 아니다. 허버트가 미친 거대하고도 지속적인 영향력은 중심 섹션, “The Church”로 설명된다.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독자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시인으로 그를 꼽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실린 시 때문이다.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1. 허버트는 하나님께 직접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허버트가 가장 좋아한 신학자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을 앞두고 큐레이트에게 물려주었다). 허버트의 전기 작가 존 드루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속 자전적 특성이 허버트의 시가 자전적 느낌을 띠는 데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고백록과 마찬가지로 허버트의 시도 상당수가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는 형태이다. 이 점은 그의 시에 매력 넘치는 진지함과 더불어 절박함을 가져다준다. 모든 시가 신선하고 생생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다. 기도로 이뤄진 모든 시는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리처드 백스터가 말했다. “허버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말한다. … 마음으로 쓴 시이자 동시에 하늘의 시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The English Poems of George Herbert, xxi). 많은 독자가 여기에 동의했다.2. 허버트는 참으로 정직하다안전하고 감상적인 시를 쓴 경건한 시인이라는 오해와 달리, 허버트의 시는 매우 정직하고 심지어 날것에 가까운 감정까지 드러낸다. “The Collar”에서 그는 요나와 같은 반항심을 보여준다. “denial”은 “나의 헌신이 당신의 침묵하는 귀를 뚫을 수 없을 때, 내 시처럼 내 마음이 상하였으니, 내 가슴은 두려움과 무질서로 가득하나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의 초기 전기 작가 아이작 왈튼에 따르면, 허버트는 성전 속 시를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에 나를 온전히 복종시키기 전까지, 하나님과 내 영혼 사이에 있었던 많은 영적 갈등의 그림”이라고 묘사했다(George Herbert: The Complete English Works, 380). 약함과 영적 투쟁 그리고 육체적 질병 및 수많은 실망 가운데서 쓴 시가 성전이다. 허버트의 약함이야말로 독자를 그의 시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3. 허버트는 다가가기 쉽다시라는 장르는 단순하거나 얕지 않다. 그러나 허버트는 일상적인 이미지(창문, 꽃, 폭풍, 도르래, 화환)와 쉬운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의 시를 어떤 학자는 “평범함의 미학”으로, 또 어떤 학자는 “뛰어난 명확성”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명료함 덕분에 그의 시를 읽는 일반 독자는 좌절감에 빠져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깊이를 발견한다. 읽을수록 깊이 숙고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4. 허버트는 언어의 장인이다허버트는 끝없이 창의적이며 주로 형태시(“The Altar” 및 “Easter Wings”에서와 같이 주제가 특정한 모양을 가진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를 썼고, 그 속에 기도와 우화, 소네트와 찬송뿐 아니라 성경 구절(“골로새서 3:3”)도 곳곳에 숨겨놓았다. 같은 연으로 반복하는 시는 성전에서 찾기 힘들다. 그의 시가 가진 형태의 신선함은 놀라운 적합성뿐 아니라 단어 및 구문의 아름다움과도 결합한다.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기억에 남는 언어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루 종일 내 심장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위를 향할 때마다 당신을 높이는 손”• “당신을 넘치도록 찬양하나이다”• “나의 기쁨은 울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슬픔은 노래하기 위함입니다.” • “그 심장 속 맥박까지도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눈에 가득 찬 당신의 사랑”• “당신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보나이다.”이런 단어와 문구는 시를 낭독하는 혀에 생기를 일으키고 우리 마음에 불을 붙인다. 5. 허버트는 크신 하나님을 믿었다허버트는 하나님의 크심에 매료되었다. 헬렌 윌콕스는 “성전 속 모든 시의 주제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다”(The English Poems of George Herbert, xxi)라고 썼다. 그게 다가 아니다. 허버트는 시 자체를 하나님을 위한 것이자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봉헌 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주님, 첫 열매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는 당신에게서 왔기에 다시금 당신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허버트의 하나님은 주권자였다. 허버트의 신학과 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칼뱅주의라고 진 에드워즈 비쓰는 주장한다. 허버트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심히 좋은 소식으로 찬양했다. 다음은 “Providence”의 한 연이다.우리 모두는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기뻐합니다 정확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하신 권능과 사랑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시는 분, 세상 만물이 당신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당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나이다.그의 시에서 하나님이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인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분의 뜻은 최고이며 또한 좋은 소식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 부르심의 교리를 받아들인 허버트가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보편적 호소라는 특징을 전혀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비쓰가 주장하듯, 종교개혁 전통에 뿌리를 둔 허버트의 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내부로부터” 전달하여 모든 종류의 독자와 연결한다. 성전 제대로 읽기허버트를 처음 접하는 독자가 성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세 가지를 제안하겠다. 먼저 내용, 형식, 언어 또는 기타 이유에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시를 찾아라. 그리고 그 시와 함께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라. T. S. 엘리엇의 말이다. “모든 시가 다 그렇듯, 허버트의 시를 감상할 때도 시작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시인의 마음을 꿰뚫기 전에 시를 즐겨야 한다. 이해하려는 수고가 헛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시라면 이해하기 전에 먼저 즐길 수 있어야 한다”(George Herbert, 28-29). 허버트의 시를 충분히 많이 읽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먼저 만나도록 하라. 둘째, 전후 맥락에서 성전과 연결된 시를 읽고, 이어서 더 큰 맥락에서 이어진 시를 읽어라. 허버트의 시는 순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허버트의 고통과 고군분투를 다루는 “Grief”와 “The Crosse”가 “many deaths”를 통해 그를 “once more smell the dew and rain”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the Flower” 바로 앞에 온다는 점은 중요하다. 성전에는 주제별로 시를 모아놓은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시퀀스에는 예배당의 여러 부분에 대한 시가 담겨있다 (“Church-lock and key” “The Church-floore” “The Windows”). 특정 문맥 내에서 개별 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울림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신선한 빛을 비춰준다. 또한 허버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corpus)와(성전과 The Country Parson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삶(존 드루리의 Music at Midnight는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성경이라는 맥락 내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허버트는 성경을 사랑했고(“O Book! Infinite sweetness!”), 그의 시는 성경에 대한 인용과 암시로 가득하다. 이런 다양하고 넓은 맥락에서 시를 읽는 것이 유익하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 당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허버트의 도움을 받아라. 그의 간절함과 통찰력, 그리고 열정과 정직 및 경건이 큰 도전과 감동을 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신선함과 아름다움은 당신의 가슴과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그의 시는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셰이머스 히니의 말을 빌리자면, 허버트의 시가 당신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라.원제: The Temple: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성전
조지허버트
기독교고전으로의초대
“청년회장” 목회
by 조성돈
2023-07-14
외령리는 충북 괴산군에 있다. 인터뷰를 위해 교회를 찾아가는 길이 정말 첩첩산중이다. 중간에 음료수라도 사 가려고 했는데 살만한 가게를 결국 만나지 못해 그냥 가야 할 만큼 깊었다. 마을에는 57가구가 있다. 최근 귀촌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45가구에서 이렇게 늘었다. 현재 교인이 20여명인데 원 토박이는 4명이고, 나머지는 귀촌한 이들이다. 그만큼 교회가 귀촌으로 인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목사는 40대였다. 교회에 부임한 지 이제 5년. 인상이 푸근했다. 손님 대접이라고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직접 커피를 내려 주고,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치 오랜 친구 만난 듯이. “특별할 것 없다”고 그가 말한 그의 목회는 그냥 그의 모습 그대로의 목회였다. 푸근하게 마을 청년으로 마을 가운데 들어가 사는 목회였다. 동네는 지하수를 수도로 연결해 썼다. 식수로 쓰기에는 냄새도 나고 흙탕물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정수기를 달았다. 좋았다. 주변에도 달아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물한 개나 달아 주었다. 현재 관리까지 하는 곳은 열네 곳이다. 정수기를 달아 주니 서너 달에 한 번씩 가보아야 한다. 필터도 갈아주어야 하고 손도 봐야 한다. 그렇게 그는 마을의 세대들을 ‘심방’ 한다. 한 번은 자기 집에 LED 등을 달았다. 역시 좋았고, 또 마을 분들도 달아드렸다. 이건 한 집에 다섯 개도 달아야 하니, 쉽지 않았다. 예산도 필요했다. 교회에 요청해서 예산을 따로 세웠다. 그렇게 등을 사서 마을 세대들을 돌아다니며 달아드렸다. 형광등을 달고 살다가 더 환한 LED등을 다니 좋아들 하신다. 시골이다 보니 간식이 마땅치 않다. 논일 밭일 하다가 새참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빵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사택에 빵 굽는 기계를 들여놓았다. 새참 때가 되면 구운 빵을 들고 논으로 들로 나간다.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신다. 충북 괴산군 외령교회농촌에 있으면 마을사업도 자주 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 외령리에도 그런 일들이 있다. 이장님이 수고를 많이 하시는데, 같이 할 사람이 없다. 그러면 역시 목사를 찾는다. 주변에 같이하자고 하고, 교인들 격려해서 함께 하면서 마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동네 와서는 내내 교회와 사택 수리를 했다. 교회 올라가는 계단도 새롭게 하고, 사택도 수리해서 이층으로 만들고, 교회 내부도 수리하고, 창고도 정리했다. 외부 교회의 지원을 받았다. 재정 지원도 받고, 자원봉사 단체를 통해서 인력 지원도 받았다. 그렇게 사택과 교회가 점점 번듯하게 세워졌다. 이렇게 해 놓으니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연다. 어느 분은 지나가며 ‘이제 이렇게 지었으니 목사님 어디 안 가시겠네요’ 하더란다. 목회자가 자주 바뀐 교회였다. 교회 역사가 51년인데, 지금이 13대째다. 목사가 되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그런 목회지였다. 목사가 되는 조건으로 담임 목회를 해야 하는데, 그 조건을 채우는 자리였다, 교회 옆에서 농사짓는 어르신은 여든이 넘으셨는데,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더란다. “내가 여기 농사지으면서 목사님을 몇 명 보낸 줄 알아? 일곱이야.” 눈앞에서 떠난 사람이 일곱이니 당신도 곧 떠나는 거 아니냐는 속내였다. 그런데 목사가 교회와 집수리를 하니 마을 사람들이 안심도 하고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아마 이제는 정착해서 사는 목회자가 왔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실제로 교회도 사택도 손볼 곳이 많았다. 전임 교역자들이 오래 살 생각이 없으니 그냥 살았다. 그래서 수리한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목회가 되다니…. 어쩌면 농촌교회는 정착하는 모습만 보여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외령교회의 목사는 그의 말 대로 ‘특별한 것 없는’ 목회일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청년회장처럼, 마을 어르신들의 손자처럼, 그는 그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로써 농촌교회의 한 형태를 빚어냈다. 아마 담임목사의 인터뷰 내용이 그걸 잘 말해 준다. 그의 목회 철학처럼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이 현재 농촌목회가 아닐까 한다. 부흥을 바라본다면 희망이 없는 지역이지만, 어르신들 모시면서 살아가는 정주형 목회, 귀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 맞이하는 환대의 목회로, 외령교회의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더 특별한 목회는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꿈도 있고 계획도 있는데, 저는 그런 건 별로 없어요. 그냥 있는 곳에서 어떻게 그냥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까 그런 생각 정도만 하지. 어떤 분들은 도시에서 큰 목회하고 옛날 오대양육대주고 그런 얘기 했잖아요. 저한테는 그냥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의 복음, 두 각도, 그리고 네 ‘움직임’
by Matt Smethurst
2023-07-13
현실을 직시하자.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끼리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정작 복음 속 중요한 의미가 사라지거나 억제되기도 한다. 복음 속 좋은 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식”(news)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결국에는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원천이다. 기독교는, 그 본질을 말하자면, 좋은 ‘조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좋은 소식의 선포이다. 복음을 이해하려고 신학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사역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5분도 기다릴 필요 없다. 꼭 알아야 하는 건 2,000년 전에 어떤 침략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천국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고, 예수님은 새 나라를 열었다. 33년 동안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확고하고 완벽하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당신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기에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믿는 사실은 이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삶을 산 나처럼 취급받았고, 그래서 이제 나는 예수님의 의로운 삶을 내가 살았던 것처럼 대우받는다. 예수님은 묻혔다. 그러나 사흘 뒤에 벌떡 일어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명백하게 사악한 삶이건 교묘한 “종교적” 다양성이건 관계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반역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도 예외 없이 이생과 다음 생에서 그와 연합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새 땅에 적합한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며, 그분 아래서 영원히 우주의 왕이 되어서 다스릴 것이다. 할렐루야!회의적인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속기 쉬운 아이들에게나 통할 억지스러운 동화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 소식은 온전히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찬양 가사처럼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까? 아, 나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자비란 원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자비라고 불린다. 하나의 복음, 두 각도나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사역하는 목사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면 더 잘 보이는 것들—우리 도시만의 크기, 윤곽, 인구 밀도 등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대로를 걸으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하늘에서 보는 것과 걸으면서 느끼는 것, 두 가지 관점 모두 리치먼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체 조감도가 없는 거리 수준의 관찰에도, 거리의 관점이 생략된 조감도에도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물론 단지 지리학적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리치먼드의 역사와 문화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요는 한 도시를 관찰할 때도 다양한 각도에서 보지 못하면 일차원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트 챈들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두 가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공중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에서 보는 관점이다. 버지니아에 수도가 하나인 것처럼, 복음도 하나이다. 하나의 복음을 두 각도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감탄한다. “공중에” 있는 복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가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예: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한편, “땅에서” 보는 복음은 이 장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지를 구체화한다(예를 들어, 하나님, 인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반응).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복음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다. “공중”과 “지상”, “와이드 렌즈”와 “줌 렌즈” 같은 상호보완의 관점을 가장 잘 종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복음 이야기를 네 가지 움직임(movements)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통치자(Ruler), 반역(Revolt), 구원(Rescue), 응답(Response)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보다 더 풍부한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누군가와 믿음을 나눌 때 훨씬 더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자“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성경은 현실에 관한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또 다스리신다. 현대 문화가 흔히 범하는 잘못된 개념과 달리, 하나님은 하늘의 산타도, 우주의 자판기도, 짜증만 내는 교관도, 그리고 아이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아빠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며 사랑의 주님이시다. 영원한 백성의 공동체이시며, 성령의 기쁨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은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있다.다름 아니라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그분만이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의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도록(그분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신다는 의미) 창조되었다. 인간은 성공과 인기, 오락과 로맨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안에서만 제대로 된 의미와 성취감을 추구하도록 맞춤 설계되었다.자,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삶이 창조주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고 그를 모든 것 위에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확실히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반역우리 마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죄의 바다에 빠뜨렸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그 두 사람으이 일으킨 비극의 여파이다. 창조주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 죄의 촉수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우리의 사랑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물든 본성과 자의로 사랑의 주님에게 반역했다. 죄를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간주하는 건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약함 또는 하늘나라에서 범하는 주차 위반 딱지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심각하다. “우주적 반역” 곧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한 반란이다. 죄의 본질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죄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것은 단지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중심에서 시작한 배신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속였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종종 영적 간음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중심으로 삶을 구축하려고 발버둥질한다. 창조주께 받은 좋은 선물을 우리는 오히려 창조주를 대신하는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한다. 2. 죄는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인 문제이다. 죄가 미치는 수평적 영향도 파괴적이지만, 죄는 근본적으로 수직적 문제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인 다윗은 우리 모두가 처한 곤경을 고백한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시 51:3-4; cf. 창 39:9; 눅 15:21).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sin”(죄)은 단수형이지만 의미는 단지 단수에 머무르지 않는 유일한 영어 명사이다. “Sin”은 “sins”보다 더 포괄적이다. 깊은 수준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 게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다. 이것을 숙고하라. ‘나-주의’(me-ism)와 우상숭배의 결과는 다름 아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파멸적 갈라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그 결과 생명과 사랑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공의의 심판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죄의 결과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진노,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확고한 반대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바울은 신자들에게 묻는다. 이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반대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 편을 들겠는가? 복음을 알고 싶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면 얼마나 선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나님만큼 선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도덕적 완전성은 실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소식이다.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의로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앞에 두고 있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움도 없는 곳이다. 여기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한 설명이 있다.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그런데 이렇게 계속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나열해 나가는 대신에, 바울은 “그러나”라며 말을 돌린다. 당신의 영원 여부가 이 작은 한 단어 “그러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구원그런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궤적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그러나”가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2:4-5)수 세기에 걸친 하나님 백성의 반역이 있고 나서, 영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아, 아기, 청년,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히 2:14-15). 나사렛 목수는 33년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끊임없는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지만, 고백할 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 번도 참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담이 살지 못한, 이스라엘이 살지 못한,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살지 못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빌 2:8). 율법을 만드신 이가 율법을 지키다가 율법을 어긴 이들을 위해서 죽었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법을 어긴 이들을 대신해서 죽었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아들에게 벌을 내렸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온전한 그의 아들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유일한 사건은 단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뿐이었다면, 십자가의 결과는 다시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NBA 정규 시즌에 모든 팀은 여든두 경기를 치른다. 그 어떤 팀도 무패의 완벽한 시즌을 달성한 적이 없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잠깐만요. 우리 팀 기록은 지금 0-0이거든요? 완벽한 시즌입니다. 한 경기도 진 적이 없습니다!”누구라도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반응할 것이다. “당신 팀은 경기를 하나도 안 했잖아요? 모든 경기를 치르고 다 이겨야 진짜 완벽한 시즌입니다.”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도덕 기록은 말하자면 0-0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기에 “무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의로움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시즌”을 보낸 게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했다. 그들의 기록은 0-82로 급락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물려받은 도덕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82-0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농구의 예를 계속하자면, 요점은 이것이다. 예수님이 단지 죗값만 치렀다면 우리의 도덕 기록은 0-0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단지 82패라는 손실만 흡수한 게 아니다. 그는 또한 빈 무덤으로 증명된 여든두 번의 승리를 신자에게 안겨주었다(롬 4:23-25). 우리의 기록은 순식간에 0-82에서 82-0, 그러니까 전패에서 전승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한 번도 그분을 화나게 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그분을 기쁘게 할 뿐이다. 할렐루야!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로 가득한 죄인으로 대하셨고, 우리를 흠 없는 삶을 산 그리스도처럼 대하셨다. 신학자들이 이것을 “달콤한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음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 모든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청교도 리처드 십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들어라.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요즘 같은 문화 환경에서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거나 도덕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런 식의 관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의 수준으로 왜곡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려고 건방지게 날뛰었기에, 하나님이 몸이 구부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내가 좋아하는 존 스토트의 설명이다.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 두 가지 모두의 핵심이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맞서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만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을 두셨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기꺼이 받으신다. 아멘.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계속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잔인한 죽음 후, 그의 시체는 “안전한” 무덤에 안치되었고(마 27:65-66), 다시는 그 무덤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없었다. 죽음의 세력이 생명의 주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행 2:24; cf. 3:15). 그는 약속한 대로 셋째 날 무덤에서 나왔다. 믿음을 나눌 때, 부활이 단지 복음의 “추가 사항”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희생이 받아들여졌음을, 죄에 대한 공정하고 완전한 대가를 치러졌음을 공개적으로 확언하셨다. 하나님이 구원 수표에 서명한 날이 성금요일이라면, 수표가 현금으로 바뀐 날이 부활 주일이다.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고 자기 백성을 위해 지금 중보기도 하는 예수님은 어느 날 재림하실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은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죄가 일으킨 재앙이 훼손하지 않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성경은 그 현실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용어인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cf. 벧후 3:13; 계 21:1-4)이라는 미래의 집으로 묘사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우리는 통통한 천사들과 황금 하프를 연주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달리고, 일하고, 놀고, 노래하고, 웃고, 쉬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베푸는 끝없는 경이로움을 즐길 것이다. 당신의 응답고속도로 통행료 부스에서 돈을 받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 있는 경험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건 단지 비즈니스 거래이다. 당신이 돈을 내면 그 사람은 차단막을 올린다. 당신은 당신 할 일을 하고 상대도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런 식의 관계가 아니다. 무감각한 거래 관계가 아니다.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개인적인 결합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자비에 당신 전부를 던진다. 그는 당신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 복음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준비 되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돌아서라첫째,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을 고백하는 데에는 하나같이 능숙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내가 가장 황폐해져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이다. 마음을 바꾸고 180도 돌아서라.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2. 믿으라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죄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향해서는 “예”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일과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변하지 않는 약속을 받아들인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3. 보물로 받아들이라우리는 예수님을 소중히 여긴다. 기술적으로 이것은 세 번째 단계가 아니라 두 번째 단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치아 임플란트 뿌리를 박는 것처럼 단계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 보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지옥행에서 나를 구해주는 무료 승차권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르고, 경배하고, 또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분을 아는 것만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다(요 14:6; 17:3). 그를 통해 우리는 용서의 기쁨과 성령의 도우심, 나아가서 내세의 소망까지 경험할 수 있다.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가거나, 기독교 정서가 담긴 글을 올리거나, 기도하거나, 카드에 서명하거나, 교회 복도를 걷거나, 여름 캠프에서 솔방울을 불에 던진다고 구원받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은 이런 식의 모든 외양적 요소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진짜 질문은 당신의 심장을 겨냥한다. 바로 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생명을 걸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가?복음은 응답을 요구한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고후 6:2). 우리의 믿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자. 무엇보다 영원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의 지점으로 그들을 인도하자. 복음이야말로 지금까지 전해진 최고의 위대한 소식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소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Matt Smethurst의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The Gospel Explain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복음전도
구원
대속
회개
반역
죄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8) : 신앙과 직업
by 고상섭
2023-07-1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사역’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다. 영국 교회가 부흥할 때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레슬리 뉴비긴이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의 영국 사회는 마치 이교도의 국가처럼 보였다. 쇠퇴하고 있는 영국 교회를 보면서, 뉴비긴은 교회가 신자들의 개인적 삶을 위한 내적 활동(성경공부와 기도 등)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하고 있을 뿐, 공공 영역(정치, 예술, 사업 등)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도록 훈련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1] 팀 켈러도 직업이라는 영역이 신앙과 분리되는 시대정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전 시대에는 신자의 제자도와 훈련을 기도, 성경공부, 전도로 국한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장과 이웃과 학교에서 비기독교적 가치를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오늘날 선교적 교회는 신자들이 현저하게 비기독교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 오늘날 문화는 신자들의 종교적 신념은 직장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그들이 직업을 수행하는 방식과 단절시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2]신앙과 직업의 통합이런 시대 속에서 직업과 신앙을 통합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사명으로 대두된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의 다섯 가지 중요한 영역 중 하나를 ‘세상 문화와 사람들을 연결하기“라고 명명하며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강조한다.팀 켈러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된 계기가 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한 유명한 탤런트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그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제 방송에서 연기할 때 제가 해야 하는 역할과 하지 말아야 할 역할이 있습니까? 화내야 하는 연기를 할 때 정말 화를 내야 합니까? 아니면 화내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또 누군가와 연애하는 연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팀 켈러는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현실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만큼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직업과 신앙의 통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여성 CEO 캐서린 알스도프와 함께 쓴 팀 켈러의 일과 영성, 그리고 다양한 직업에 관한 리디머 교회의 프로그램들이다.[3] 캐서린 알스도프도 팀 켈러의 설교에 매력을 느낀 이유의 하나가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과 직장처럼 내게 대단히 중요해 보이는 영역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고백했다.[4]오늘날 직업과 그 직업을 통해 이루고 싶은 욕망은 하나의 큰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는데 오늘날 시대는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의 시대이고 …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하는 자유,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도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5]이전 시대에는 공장장이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스스로 착취자가 되어서 더 많은 성과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한병철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전 시대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 문화 속에서 신앙과 직업을 연결하지 못하면 신앙과 직업이 분리되는 이원론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그래서 팀 켈러는 문화 속에 있는 우상들의 모순을 드러내어 성경 메시지와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목회자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설교자는 성경 메시지와 그 문화의 근본 신념들(그 안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잘 안 보인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사람들이 ‘아,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깨닫게 된다. … 사람들에게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6]성경적 믿음이 일에 미치는 영향 1. 일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준다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전문직일 경우에는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의사나 목사 등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사람들을 섬기는 노동을 한다고 생각해서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기 쉽다. 결국 자신의 직업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로 최고의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고 단순히 살 곳을 마련하는 정도의 마음이 아니라 더 은밀하고 깊은 두 번째 의도가 숨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최고의 기술을 통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자신들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이것이 인간 나라의 특징이다. 팀 켈러는 이 노동의 동기가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 삶 속에서 있는 문화 내러티브라고 규정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동기는 바뀌지 않았다. 권력과 영예, 만사를 제 뜻대로 통제할 권한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7]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둔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오늘날도 자신의 일에 정체성을 두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게 된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성공에 이르렀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교만해지게 된다. 자신의 성취와 노력으로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노력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더 따뜻하게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친절한 행위까지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해서라기보다 자신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자선처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성취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라는 교만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오직 은혜를 이해할 때만 그 교만을 버릴 수 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 노력까지도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성공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 은혜의 복음은 실패했을 때도 좌절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준다. 복음은 일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2. 모든 일이 가치 있는 존엄한 일임을 알려준다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다시 말해, 태초에 ‘일’이 있었다. 일과 노동은 타락한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주셨다. 결국 일과 노동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며,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직업에 가치의 높낮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성경이 아니라 세상의 사고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세상에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한다. 오늘의 시대는 물질주의의 영향으로 지위가 낮거나 수입이 적은 일을 할 때 그 사람의 존엄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경비원, 가사도우미, 정원사 같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을 업신여기는 사례들이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2017년 6월, 그리스의 환경미화원들이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서 파업을 한 사건이 있었다. 열흘째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자 도시 곳곳에 악취가 심했고 관광 사업도 차질을 빚었다. 만약에 청소를 하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전부 파업하거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 세계가 악취와 병균으로 들끓고 수많은 사람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청소하는 노동자들을 존경하지 않고, 또 그들이 많은 보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게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존엄한 일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소젖 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고 말했다.[8]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며 이웃 사랑을 위한 실천의 장이다.[9]3. 우리의 일을 탁월하게 행하는 동기를 부여한다모든 일이 존엄한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든지 주님에게 하듯 해야 하며 탁월하게 일해야 한다. 탁월함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경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팀 켈러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일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마도 그는 성경공부와 기도와 전도를 하라는 말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일을 잘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 중 하나는 바로 일을 잘하는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렇게 말했다.교회가 총명한 목수를 대하는 걸 보면 보통 취하도록 술을 들이키지 말고, 여유 시간에 망나니짓을 하지 않으며 주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출석하라고 타이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교회가 해주어야 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10]4. 믿는 자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즈니스는 주로 ‘목적이 없는 수단’으로 표현된다. 현대인들은 브랜드를 통해 페르소나를 창출하고, 행복한 삶의 기준을 잘 되어 가는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반면 고대 문화는 성품과 용기, 겸손, 사랑, 정의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마케팅과 홍보는 단순히 상품을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11]회사에서 도덕적으로 너무 힘든 스트레스를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직장에서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있으십시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과 관계를 사용하여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때까지 정직하게 올라가십시오, 그러나 정말 양심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으면 그때는 사직서를 쓰고 새롭게 창업하십시오.” 오늘날 사회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둔다. 하지만 복음은 직장의 문화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한다. 겉보기에는 다른 회사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복음이 기반이 된 회사는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을 갖추기 마련이다. 복음이 아닌 다른 직업관은 자신의 이윤과 이익에 따라 선택하게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도덕적 나침반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더욱 윤리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며, 더 건강한 직업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12]5. 직업에 소망을 불어넣는다직업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직업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낙관주의이며, 또 다른 오해는 내가 열심히 일해봤자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이다. 양극단을 오가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해야지!”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선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라고 여건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 이런 양극단을 배제하면서도 믿음으로 일하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팀 켈러는 타락한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18)팀 켈러는 먼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타락한 세상에서 일은 가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가 많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 원하는 직업을 가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직업이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만족시키는 자기만족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사회의 불안 요인은 개인주의라고 꼽는다. 개인주의를 근대 문명의 최고 업적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테일러는 말한다. “개인주의는 자기 자신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보다 광범위한 시야를 상실해 버렸다. … 개인주의의 어두운 면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의 초점 이동에 있다. 이를 통해 삶은 덤덤하게 되고 협소해진다. 우리의 삶은 갈수록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우리는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진다.”[13]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협소해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인생의 의미란 나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할 때 오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말한다. 목사가 되고 싶었고 주위에서도 권유했다. 또한 열심히 목회해서 어느 정도 성공한 목회자가 되었지만, 돌아보면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사람조차도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던 이상적인 삶을 직업에서 찾았다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 서문에서 톨킨의 니글의 이파리를 소개하고 있다. 화가인 니글은 하나의 이파리로 시작해서 큰 나무를 그린 후 그 나무 뒤로 마을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나무를 그리지 못하고 고작 이파리 하나를 그렸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아직 못다 한 일들에 대해 아쉬워했다. 큰 꿈을 가졌지만, 그가 인생에서 이룬 것은 고작 이파리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니글은 아주 익숙한 곳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얼른 그리로 달려갔고 거기에는 늘 꿈꾸었던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의 나무가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잎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지는 길게 자라서 바람에 나부꼈다. 자주 느끼거나 어림짐작으로 추측해 보았지만 좀처럼 포착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상태였다. 니글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천천히 팔을 들어 활짝 벌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선물이야!”자신은 이파리 하나를 그렸지만, 자신이 상상하던 그 나무가 천국에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곳의 소제목을 “There Really is a Tree”(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다)라고 붙였다. 그리고 일과 영성의 원 제목은 “Every Good Endeavor”(모든 선한 수고)이다. 결국 모든 선한 수고에는 선물이 있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니글의 이파리를 통해 우리에게 이 땅에서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완전한 모습을 구현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지 못하지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수고와 땀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팀 켈러는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라는 뜻이다."우리의 일을 통해 이 세상이 완전히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땅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완벽한 모델, 완벽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을지라도 우리 순종의 방향이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순종은 결국 천국에서 아름답게 완성될 것이다. 모든 선한 수고에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 이것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에서 우리가 땀 흘리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이다.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의 방향이 옳다면 그 이파리는 결국 천국에서 나무로 완성될 것이다. 실제로 그곳에 나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경적 믿음은 우리의 일터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 준다. 열매가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의 순종은 천국에서 하나의 퍼즐 조각이 될 것이다. 하나의 퍼즐로만 보면 별로 이루지 못한 인생일지 모르지만,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완성되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 하나의 퍼즐 조각으로 동참하게 되면 내 작은 인생이 하나님의 큰 역사의 작품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인생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이루도록 동참시켜 주신다. 우리가 힘든 직장생활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 가면 정말로 그곳에 나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오늘도 힘겹게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7-58)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고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이 땅을 살고 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세상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먹을 밭의 소산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로하신다.주1. 팀 켈러, 센터처치, 525.2. 센터처치, 690. 3.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77.4. 팀 켈러, 일과 영성, 12. 5. 한병철, 피로사회. 27. 6. 팀 켈러, 설교, 35. 7. 일과 영성, 144.8. 일과 영성, 88. 9.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93. 10. 일과 영성, 94. 11. 일과 영성, 184. 12. 팀 켈러을 읽는 중입니다. 299. 13.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13.14. 일과 영성,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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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신학
탈 기독교 시대에 목회자-신학자가 필요한 이유
by Kevin J. Vanhoozer
2023-07-11
칼 마르크스는 한 때 “철학이 하는 일이라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게 고작이다. 관건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라면서 철학을 향해 불평을 쏟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신학은 어떤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서 철학보다 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오늘날 신학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과거의 유물이라며 경솔하게 일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견해는 근시안적이다. 사실 목회자-신학자야말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엡 4:8). 말씀으로 정보를 받고 성령으로 권능을 얻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해석하고 바꾸기 위해서 목회자-신학자를 쓰신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탈 기독교 세계라는 위기 가운데로 들어가 그 시대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제자를 훈련한다. 진행 중인 재난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다. 탈 기독교 세계의 숨길 수 없는 징후로는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 줄어드는 교인 수, 교회에 대한 존경심 저하, 우리 문화의 주요 요소인 신앙, 가치 및 관행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 등이다. 탈 기독교 세계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고 반응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존 업다이크의 소설 In the Beauty of the Lilies에 나오는 목사처럼, 20세기 어느 시점에선가 서구 세계는 신앙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탈”(post)이라는 단어가 기독교를 재정의하는 속도는 말 그대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떤 하나의 주장 또는 과학적 발견 때문에 기독교 시대가 종말을 맞은 건 아니다. 찰스 테일러의 A Secular Age는 사회가 세상을 이미지화하고 그 속에 인류를 자리매김하는 방식에서 볼 때, 탈 기독교라는 혁명은 내부적이었다고 말한다. 이유는 복잡하지만, 결과는 명백하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를 명백하게 느끼거나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제 거의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질과 현재가 전부이다. 탈 기독교 문화가 빚은 많은 결과 중 하나가 눈에 띈다. 문해력의 상실(post-literacy)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그리고 종교 개혁과 인쇄술 이후로도 언제나 활자(word) 중심이었다. 그러나 탈 활자 문화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멀티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글자는 더 이상 자랑할 만한 매체가 아니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넘치는 문화에서 (장황한 설교를 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집중하는 시간은 단 몇 분을 넘기지 못한다. 탈 기독교와 탈 활자를 합친 결과는 성경 문맹이다. 더 이상 성경 기독교의 문법, 이야기 또는 논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을 갖는 것과 성경 속 66권의 다양한 책과 장르를 통일된 정경의 일부로 읽어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탈 기독교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조차도 성경을 잘 읽는 방법 및 해석상 불일치의 해결을 놓고 고군분투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뉴스를 소비하지만, 복음(좋은 소식)은 탈 기독교 세계에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넘쳐나는 정보와 끊임없는 속보는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소식, 곧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 세상에 침입하고 있다는 진짜 속보에 대해서 둔감하게 만든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생각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최초 대응자로서 목회자-신학자세속주의자에게 세상은 움직이는 물질이며, 그 물질은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어느 정도 환멸을 느낄 정도로 디스토피아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즐기다가 죽기를 원한다. 지금은 목회자-신학자가 최초 대응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재난 상황이다. 이들이 긴급 상황과 위기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와야 한다. “최초 대응자”라고 하면 보통 소방관, 응급구조사, 또는 수색 및 구조 요원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목회자-신학자도 부서진 삶, 분열된 가족, 죽음, 절망의 전투가 벌어지는 치열한 참호 속에 있다. 그들은 윤리, 영성, 그리고 정치에 관한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교회의 성경 문맹은 목회자-신학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위기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만든 사회이며, 목회자는 회중의 상상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버지가 성령을 통해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려(엡 1:10) 아들 안에서 이루시는 이야기가 되도록 만들 책임을 진다. 그렇게 함으로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화목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고후 5:17-19).목회자-신학자는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 삶의 긴박함과 성경 읽기의 주석적 도전에 응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새로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실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기뻐하는 것이다. 지역 교회: 성경적 해독력과 거듭난 기독교를 위한 장소지금은 절망할 때가 아니다. 교회를 재발명할 필요가 없지만 재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학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모든 생각과 모든 사회적 상상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더 깊이 파고들 때이다. 지역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드러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성경 읽기 능력을 배양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을 때만 지역 교회는 세상의 희망으로 남을 수 있다. 더불어서 교회를 통해서 독서 습관을 기르고, 또 읽은 말씀이 선포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천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신학자는 일정 부분에서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돕는 사역을 감당한다. 즉, 그들이 기독교 문서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우도록 촉매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의 이름이 비롯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배우는 곳은 지역 교회이다.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의 삶을 통해서이다. 그게 바로 탈 기독교 세계에서도 지역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의미이다. 탈 기독교 세계가 기독교를 재정의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그리스도의 통치는 새로운 인류의 선두에 선 사람들을 부르시고, 모으고, 또 화해시키실 때 가시화된다. 당신은 바람처럼 움직이는 성령의 능력을 볼 수 있는가? 기독교 시대는 반드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마르크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탈 기독교 세계가 되었다고 해서 결코 기독교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 24:1).원제: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post-christian-pastor-theolog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탈기독교세계
목회자신학자
성경문맹
지역교회
일의 즐거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10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대담을 위한 질문 선정 및 내용 정리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김선일 교수가 맡았다. 이금주(Jewel Hyun)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핵물리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도미하여 세계적 금융투자사인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에서 28년 근무했다. 그후 고든콘웰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석사와 목회학박사를 취득하고, 아프리카의 여성과 교육을 위한 선교단체인 Matthew 28 Ministries를 설립하였다. 일의 신학과 변혁적 리더십을 전문으로 하는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의 한국어 과정 위원장이며, 미국과 한국,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의 신학을 가르쳐왔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의 즐거움과 소명’ 강연에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터를 소명으로 삼는 것은 알겠는데,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은 알아서 하겠는데 일에서 즐거움을 못 느끼겠어요. 많은 일들을 하는 가운데서 즐거움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의 즐거움을 어떻게 찾고 누려야 할까요? 김선일: 이 질문은 일터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겠네요. ‘일의 즐거움’이라는 사상은 마태복음에서 충성된 종들에게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23)라고 한 말씀에 근거하는데요.이금주: 일의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은 이론이지 실제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다른 문제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렵습니까?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도 실제로는 얼마나 힘듭니까?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는 “나는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일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질문이자 일터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를 조망하는 큰 그림입니다. 김: 그렇군요. 유독 일터에서만 겪는 문제는 아니겠어요. 엄밀히 말해서 그리스도인만이 처한 고민도 아닐 수 있고요.이: 우선은 왜 내가 일에서 즐거움을 못 찾고 스트레스를 받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문제가 있는지, 일의 요구가 너무 많은지, 일터에서 동료와 불화를 겪기 때문인지, 상관의 부당한 대우나 지시 때문인지, 아니면 일 외의 요인들 때문에 즐거움을 못 누릴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프시거나 아이가 말썽을 부리거나 배우자와 사이가 안 좋다거나 하는 문제들이 우리의 일 뒤에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일 자체가 내 적성과 안 맞을 수도 있죠. 사무직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장사하는 일을 하면 적성이 안 맞아서 괴로울 수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왜 일이 즐겁지 않은지 실제적인 이유를 찾아서 열거해 보세요. 그리고 가장 먼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부터 다뤄야 합니다. 김: 일로 인한 괴로움인지 일 외의 문제로 인한 괴로움인지를 분별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좁혀 가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초점을 바꿔야 합니다.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즐거움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찾아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일의 즐거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께서 무슨 뜻을 갖고 나를 이 자리로 보내셨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이 일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목적을 위해서 내가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김: 그래서 일의 소명을 모르고서는 일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미국 회사에서 일할 때 즐겁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저를 시기하고 뒤에서 제 흉을 보며, 심지어는 제 상관에게 저에 대해서 안 좋은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업무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김: 혹시 그때는 인종차별도 겪으신 것 아닌가요?이: 예, 인종차별뿐 아니라 저는 삼진아웃 당할 수 있는 여건이었습니다. 아시아인에다, 여성에다, IT 전공자도 아니었으니까요(웃음). 일은 많았지만 제 시간과 역량을 잘 조절해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일의 신학을 알았다면 아마 즐거움을 찾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옮기기도 힘들어서 하는 수 없이 참고 일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서는 즐거움을 못 찾았고, 대신 나중에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면 즐거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김: 그래서 은퇴 무렵에 신학 공부를 하러 가신 것이고 선교단체도 설립하신 거군요. 이: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면서 일의 신학을 배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좀 더 일찍 일의 신학을 알았다면 그때 힘든 일 속에서도 초점을 바꿔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먼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통해서 어떤 소명을 주셨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일을 합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거나 고객 관리하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십니다. 또는 하나님을 내가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소명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하는 동료를 위해서 기도하는 소명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잘 못했습니다(웃음). 김: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그러한 위로자와 격려자의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 자신이 하는 일의 궁극적인 결과를 생각하십시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일하는 택시 기사가 어떻게 기쁨을 찾겠습니까? 피곤하기만 할 겁니다. 하지만 그 기사가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하는 손님을 인도하고, 그 결과로 그의 일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오전 내내 바쁘게 일하다가 오신 분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그들이 힘을 얻고 일로 복귀하도록 돕는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한다고 즐거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일터로 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김: 하나님께서 바로 이곳에서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 초점이 돼야 하겠군요. 즐거움 그 자체가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내 일을 통한 소명을 발견하면 일의 즐거움을 찾는 길에 들어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일터에서 힘들어하는 교인들에게 단순히 믿음으로 견뎌라, 기도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네요. 이: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일을 통한 하나님의 소명을 찾는 과정은 미래의 다른 일을 위한 훈련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회사에 다닐 때 미래에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저는 회사에서 프로젝트 기획과 매니지먼트, 그리고 실행 결정과 평가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었고 억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케냐에 가서 대학 안에 신학부를 설립하기 위해 총장, 부총장과 같은 리더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펀드레이징을 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일에 참여할 때 과거 피델리티 매니지먼트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금주 박사는 케냐 세인트폴 대학교(Saint Paul University) 신학부를 재건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 우리의 일터 경험으로부터 이러한 열매가 나올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평생 고용이 없어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의 일터에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다는 인식은 내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대할 때 즐거움이 옵니다. 저는 과거에는 성-속 이원론에 빠져서 이러한 원리를 몰랐습니다. 견디고 견디다 신학교에 가서 나중에 선교 일을 하다가 일의 신학을 배우고는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초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기보다, 일에서 하나님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십시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라고 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일터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초점을 둘 때 즐거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쓰임 받는 나의 위치와 내가 하는 일을 조명해야겠네요. 이 어마어마한 우주에서 티끌만도 못한 나를, 그리고 극히 작은 내가 하는 아주 작은 일을 통해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놀라운 기쁨입니다. 이: 그래서 우리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건강을 주셔서 오늘도 일하러 갑니다. 비록 힘든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기도하고 이제 출발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이고 청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니,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겸손히 따르기를 원합니다. 오직 저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김: 아멘!☞여기에 일터에서 지금 겪고 있거나 겪었던 여러분의 고민과 질문을 적어 보내주세요. 익명으로 하셔도 좋습니다. 함께 답을 찾아 나가겠습니다.
산을 오르듯 한 걸음 한 걸음
by 박혜영
2023-07-08
제천 쪽에 있는 충주호에 가면 구담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남한강 뱃길을 따라 단양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이는 경승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산이라기보다는 절벽 형태로 서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에 아주 가파른 계단으로 힘겹게 올라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보통 계단이라 하면 한글 니은[ㄴ]이나 기역[ㄱ]자 모양 아닙니까? 그런데 여긴 계단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알파벳 제트[Z]자 모양이었습니다. 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오직 발 딛는 계단만 하나하나 보면서 올라갔습니다. 열 개 올라가면 쉬고, 열 개 올라가면 쉬고,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올라갔습니다.지난 20년을 돌아보면서, 그 계단이 떠올랐습니다. 매번 한 주씩, 한 주씩 오르다 보니 20년이 지났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은 올려다보면 먼 미래처럼 보이고, 내려다보면 아득하기만 하여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그런 세월입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났다는 겁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여러 교인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20년이 지났다는 건 분명한데, 그 긴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났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빨리 지났는지, 책상에 꽂아둔 참된 목회라는 책이 손 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산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펼쳐보니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참된 목회를 다짐하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10년이 됐다고?’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꼼꼼히 읽어야 할 책도 아니고, 다짐까지 담아 놓은 책이었는데도 읽지 않고 있다가 그냥 10년이 지난 것입니다. 느낌은 마치 어제 꽂아둔 것과 같았는데 말입니다.세월은 그렇게 빨리 흘렀지만, 돌아보는 마음에는 감사함이 넘쳤습니다. 설립 20주년 기념행사 중에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더욱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첫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 많은 분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 떠나버렸다면, 그래서 교인 구성에 변화가 있었다면, 20주년을 기념하는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 세월을 함께 지낸 교인들이 지금 여기 있기에 20년이란 시간이 온전해진 거 아니겠습니까? 20년을 함께했다니!그리고 기념행사를 위해 예배당을 꽉 채운 지금의 교인들 모습을 보면서 또 한 번 감사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늘 수 있었다니! 새로 오신 분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미 와 있던 분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 산오름교회 설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 분이 써낸 글들을 읽어 보면서, 저 또한 산오름교회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모이지 않았다면, 들어주지 않았다면, 들은 내용으로 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면, 산오름교회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교인들이 과연 가능이나 했겠습니까? 그 여러 글을 읽으면서 이번에는 참된 목회를 기필코 읽으리라는 다짐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러면서 앞으로 10년을 생각했습니다. 20년 세월이 이토록 빨리 흘렀다면, 앞으로 10년도 그렇게 빨리 흐를 텐데, 과연 산오름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과제는 분명합니다.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최근에 ‘지속가능한 교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도가 성도를 돌보는 지도력, 그런 지도력에 의한 운영 체계,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후임자,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전통적인 제도권 교회는 이런 세 가지 요소와 기존 교회 제도라 할 수 있는 장로-권사-집사 체계와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 또 다른 과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교회에는 양육과 돌봄을 자기 일처럼 감당하는 훈련된 교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를 위해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런 마음을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는 어떤 과정도 필요할 것입니다. 훈련과 체계와 정체성은 지속가능한 교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력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지도력 전환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행 20:32). 교회를 계속 든든히 세워나가려면 “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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