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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0) : 팀 켈러의 저서...
by 고상섭
2023-08-1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에 팀 켈러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 마지막 죽음 앞에서 아내와 대화하면서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내 책은 필요하지 않으신 것 같다” 라는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팀 켈러의 책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서 40권이 넘는 책을 남겨주신 것은 귀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팀 켈러가 직접 쓴 책뿐 아니라 팀 켈러와 관련된 책들도 속속 연구되어 나오고 있다.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팀 켈러를 공부하고 싶지만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이해가 다르니 어느 하나의 로드맵을 그리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팀 켈러의 저서 전체의 숲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팀 켈러의 유산을 정리하면서 팀 켈러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전체 책의 목록을 정리해보았다. 분류 기준 팀 켈러의 다양한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정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분류될 것이다. 필자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 나오는 통합적 사역을 중심으로 전체 내용을 분류했다. 독서를 위한 분류 체계이기 때문에 팀 켈러가 말한 “∼에게 연결하는 것”이라는 큰 틀을 따랐지만 세부 주제들은 임의로 정했다.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교회 사역의 통합성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의 사역 접점을 소개한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사역을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5.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생태계를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의 틀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출간된 팀 켈러의 저서들을 분류해보았다.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1) 복음 ① 탕부 하나님 /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두 책은 동일한 The Prodigal God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역간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복음 안에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은 팀 켈러의 복음에 대한 기초 이해를 가지게 하고,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 탕부 하나님의 기초가 된 설교는 스승인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3장 ‘아버지의 환영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누가복음 15장의 설교이다. 탕부 하나님을 클라우니의 책과 비교해서 보면 팀 켈러가 복음의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엿볼 수 있는 책이다. 평신도와 목회자 모두에게 첫 번째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② 방탕한 선지자 원서 The Prodigal Prophet의 제목이 탕부 하나님과 비슷하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인간에 내재된 본성임을 알려주고 복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다. 탕부 하나님과 함께 읽으면 복음에 대해 더욱 선명하게 이해되는 책이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유했다면,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요나서 1-2장을 통해서 둘째 아들의 모습을, 3-4장을 통해서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는 늘 복음을 거부하는 두 성향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할 때 생기는 영적 질병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복음의 감격을 제시한다. ③ 복음으로 세우는 센터처치 센터처치라는 한 권으로 된 책을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권으로 나누면서 팀 켈러 인터뷰를 부록처럼 포함했다. 센터처치의 제1권 ‘복음’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와 설교에서도 시작을 ‘복음’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팀 켈러가 말하는 은혜의 복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와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 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④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짧은 소책자이지만 내용의 힘은 엄청난 책이다. 복음을 단순히 신학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칭의의 복음이 인간의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원서는 The Freedom of Self Forgetfulness로 ‘자기 망각의 자유’이다. 세속 심리학에서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자기를 사랑하라’ 말하지만, 성경은 ‘자기 부인’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이 결국 자기를 망각하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선포하고 있다. 복음을 통해 정서의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⑤ 내가 만든 신 / 거짓 신들의 세상 팀 켈러는 죄를 설명할 때 ‘우상숭배’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단순히 행위로 짓는 죄를 넘어 마음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모두 우상숭배임을 알려주고, 우상을 숭배할 때 노예 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 불렀다. 결국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랑의 순서를 회복할 때 참된 질서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상의 문제를 깊이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 ‘복음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키는가’라는 주제로 만든 성경공부 교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복음이 적용되는 대상인 마음, 공동체, 세상, 그리고 영원까지 변화시킨다는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날 임할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까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⑦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 복음이 핵심이다 /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2018년 한국에서 개최된 ‘센터처치 콘퍼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에게 설교하기’와 ‘복음의 상황화’라는 주제로 강의한 내용이 실렸다. 비신자에게 설교하는 구체적인 원리들이 자세히 정리되어 있다. 복음이 핵심이다는 The Gospel Coalition에 속한 저자들이 열네 편의 글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D. A. 카슨과 ‘복음중심의 사역’이라는 주제로 TGC 정신에 대해 썼고, 브라이언 채플, 케빈 드영 등의 저자들이 한 편씩 기고했다. 복음, 자유를 선포하다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면 2017년 TGC에서 갈라디아서를 강해한 책이다. 팀 켈러는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6장을 설교했다. 2) 전도와 변증 ① 하나님을 말하다 / 살아있는 신 팀 켈러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The Reason for God을 번역한 책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기독교를 변증한다. 팀 켈러의 변증은 복음을 향해 나가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어떤 믿음이 존재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믿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의 원리를 따라 세상을 바라볼 때 가장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논증해준다. ② 답이 되는 기독교 하나님을 말하다 출간 후 제기된 다양한 의견과 반대의견에 대해 다시 반론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과 요즘 시대 사람들이 가지는 잘못된 신념들을 밝히고 복음이 가장 삶을 행복하게 한다고 증명한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문화 내러티브’가 존재하는데, 그 문화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 주고 복음으로 답을 해준다. 문화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해준다. ③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다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요한복음을 통해 복음을 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전도와 전도설교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팀 켈러가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다. ④ 탈기독교시대 전도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전도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전 시대는 교회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회에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로 통용되었지만, 지금 교회의 메시지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화 내러티브와 동떨어져 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소개한다. 3) 개인 경건 ① 묵상: 예수의 노래들 시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② 오늘을 사는 잠언 잠언을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아내인 케시 켈러와 공저했다.③ 고통에 답하다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임을 알게 해주고 고난 속에서도 주와 동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어 준다. ④ 기도기도 안내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하는 대화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묶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임을 아우구스티누트, 루터, 칼뱅 등 교회사의 기도의 거장들로부터 기도를 배우고, 더 깊은 기도를 위한 지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교본으로 균형 잡힌 책이다. 4) 예배 ①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예배라는 주제를 다양한 교파의 목회자가 공저한 내용이다. 팀 켈러는 ‘대도시에서 드리는 개혁주의 예배’라는 주제로 기고했다. 오늘날 예배에 대해 다양한 논쟁들이 있지만 무엇이 성경적이고 무엇이 역사적인지를 구분하며 사랑 안에서 질서를 세워가는 과정들을 설명한다. 또 리디머 교회의 예배 형식을 예로 소개하고 있다. ② 21세기 복음전도 예배예배에 대한 내용을 묶은 책이다. 팀 켈러는 ‘21세기 복음전도 예배’라는 주제로 글을 썼다. 센터처치 제7부 통합적 사역의 제2장 ‘사역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의 내용과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1) 교회와 공동체 ① 복음과 삶: Part 3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복음과 삶’ 성경공부 교재의 ‘복음이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는 공동체와 전도, 두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교회에 대해 다루지만, 특히 Part 2 ‘통합적 사역을 추구하라’의 제6장 ‘공동체를 만나도록 연결하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③ 개혁주의 실천신학팀 켈러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이다. 목회 사역의 근거와 특별직무, 소명, 목회사역을 위한 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용서를 배우다팀 켈러가 직접 쓴 마지막 작품이다. 용서를 거부하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어떻게 복음이 용서로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팀 켈러의 인격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책이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바로잡고,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 오직 은혜임을 알려준다. 복음이 대인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되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가정 ① 결혼을 말하다 결혼에 관한 여덟 편의 설교를 모은 책이다. 독신에 관한 내용도 한 장이 포함되어 있다. 제6장 ‘다름의 복을 누리라’에서 서로 다른 부부를 포용하는 것에 대해 또 남편의 머리됨에 대해서는 케시 켈러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② 결혼의 의미결혼과 가정에 관해 365일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캐시 켈러와 공저. ③ 인생 베이직 시리즈 :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태어남, 결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짧은 소책자이다. 전도와 변증의 책으로 유용하다. 팀 켈러 소천 이후에 ‘죽음에 관하여’의 내용은 마치 생생한 그의 신앙고백처럼 들린다.3. 사람들을 세상과 연결하는 것 1)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① 여리고 가는 길정의와 자비 사역을 다룬 책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도시를 섬기는 과정을 설명한 책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주로 개인 구원에 편향되어 있고, 사회 구원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교회는 복음이 약한 편인데, 팀 켈러는 그런 공식을 깨고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이웃과 세상을 섬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웃을 섬기는 구체적인 적용들도 많이 제시한다.② 정의란 무엇인가‘여리고 가는 길’에 기초한 확장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왜 지역을 섬기는 정의 사역이 필요한지 설명한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을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돌려주는 정의의 문제로 바라본다.③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센터처치의 ‘도시’ 부분을 따로 분권한 책이다. 복음의 상황화, 도시비전, 문화참여로 구성되어 있고, 팀 켈러와 앤디클라우치의 인터뷰가 있다. 교회와 도시의 관계와 도시목회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2)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① 일과 영성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추구하는 책이다. 일과 직업의 관계를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으로 구성했고 서문에 나오는 돌킨의 ‘니글의 이파리’라는 예를 통해 회복의 관점까지 소개하고 있다. ②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와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는 도시와 문화라는 구분 없이 두 주제 모두 포함하고 있다. 특히 복음 생태계를 이루는 과정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③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가이드라인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예로 들어 소개한 책이다. 팀 켈러는 프롤로그에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과 2장 세속 도시 속에서 소금이 소금되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목회자로서 어떻게 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4.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것 ① 센터처치 / 운동에 참여하는 센터처치② Church planting (교회 내부 자료) 5. 그 밖의 자료들 마인드맵(이 글 끝에 있음)에서는 설교와 설교집, 주석 및 성경공부 교재를 ‘하나님과 연결’이라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1) 설교와 설교집 ① 팀 켈러의 설교 ② 왕의 십자가 마가복음 설교집 ③ 예수, 예수: 이 시대가 읽어버린 이름 성탄 설교집 ④ 천국 묵상 천국에 대한 설교 2015년 TGC 콘퍼런스 설교(1장 생명을 선택하라, 패널토의)⑤ 그분의 사역 누가복음 설교 2014년 TGC 콘퍼런스 설교(누가복음 24장 무죄를 입증하다, 패널토의)2) 주석 및 성경공부 ① 당신을 위한 로마서, 1, 2② 당신을 위한 사사기③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④ 당신을 위한 팀 켈러의 90일 성경공부: 갈라디아서, 사사기, 로마서⑤ 로마서 성경공부 ⑥ 복음과 삶 성경공부3)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팀 켈러가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팀 켈러와 함께 사역한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이 3년 동안 팀 켈러와 주위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팀 켈러 전기이다. 팀 켈러의 업적을 기리는 전기가 아니라 팀 켈러를 오늘날 팀 켈러로 만든 팀 켈러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팀 켈러의 저서를 읽기 전에 팀 켈러의 전기를 먼저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대배교에 관해서 알아야 할 열 가지
by Paul Carter
2023-08-10
예수님과 사도들은 재림과 그의 나라가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에 일어날 대배교를 예상한 것 같다. 다음은 대배교에 대해 알아야 할 열 가지이다.대배교와 배역은 거의 같은 것이다흔히 감람산 담화로 알려진 마태복음 24장의 중간 부분에서 예수님은 말세에 대규모로 발생할 일종의 배교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그리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바로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야 할 “배신”(the rebellion)을 가르친 배경이 된 것 같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을 두고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영이나 말이나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에 속아서,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생각하게 되어,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데살로니가후서 2:3에서 바울은 “배교” “걸려 넘어짐” “반역” “배신”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아포스타시아(apostasia)를 사용한다. 따라서 지금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과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배교는 가시 교회 또는 제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대배교란 기독교 신앙에서 심각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신자들이 일으키는 정부에 대한 반란이 아니라, 이전에 믿고 한 형제였던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대한 반란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개혁파와 복음주의 학자들 대부분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안토니 A. 후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배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다.”[1]그레고리 빌(G. K. Beale)도 비슷한 말을 했다.“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참된 성도들이 존재하는 가시 교회 공동체가 너무 배교하여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공언하겠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2]대배교는 종말의 방아쇠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마태복음 24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모두에서 대배교는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또 많은 사람이 걸려서 넘어질 것이요, 서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홀릴 것이다. …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모든 민족에게 증언될 것이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10-14)위에 인용된 데살로니가후서 부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데살로니가후서 2:3).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배신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를 설명한다. “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따라서 두 기록 모두에서 대배교로 대표되는 불법자의 행동이 주님의 재림 직전에 발생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예수님은 감람산 말씀에서 하신,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는 진술을 포함하여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그 기간에 일어날 일을 설명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종말의 사건은 분명히 일종의 정해진 패턴을 따라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열심히 읽는 성도와 표적 관찰자라면 종말이 가까웠음을 분별하고 적절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감람산 말씀을 직접적인 맥락에서 보자면야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만, 말씀 자체라는 큰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종말을 예고하는 크고 마지막 산고를 예견하도록 돕는 성경 해석에 꼭 필요한 렌즈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배교 자체와 주인공인 불법자의 행동은 궁극적인 종말 직전에 발생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종말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대배교는 “불법자”와 연관되어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반역은 불법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4)3절에 나오는 “그리고”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과 주석가들 사이에 약간의 논쟁이 있다. 바울은 반역이 불법자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역이 발생한 와중에 불법자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의미일까? 불법자와 반역이라는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문법상 의미가 결정적이지 않기에 둘이 별개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도 가장 단순하고 안전한 해석일 것이다. 반역의 계절은 단지 한 사람의 행동이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넓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계절에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들어서는 순간 불법자라는 중요한 인물이 하는 행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불법자는 적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인 것 같다대다수의 저자와 주석가는 “불법자”와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 예를 들어 샘 스톰스(Sam Storm)는 그가 쓴 ‘Kingdom Come’의 17장에 “성경적 종말론의 적그리스도: 데살로니가후서 2장 연구”(The Antichrist in Biblical Eschatology: A Study of 2 Thessalonians 2)라는 제목을 붙였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적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 구절에서 바울은 단지 “불법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신약학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스톰스에게도 이 용어는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적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사도 요한이 유일하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2:18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어린이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요한이 말하는 의미는 확실하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항상 우리 가운데에 거할 뿐 아니라 크고 마지막에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의 신비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동시에 또한 위대하고 전형적인 불법자가 미래에 올 것을 말하는 바울과 다르지 않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바울은 특정한 시대의 끝에만 나타날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불법자는 종말론적 인물이다.”[3]이 두 용어가 다니엘서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야기, 마지막 때에 예언 단계를 성취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해서 싸우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묘사한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니엘 7-10장에서 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요한이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하고 바울이 불법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가진 일종의 패턴 또는 “예증된 사례”라는 역할을 한다. 트렘퍼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로 이해하던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4]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혀도 된다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함으로 유대 민족의 독특한 종교적 표현을 지우려고 했다. 실로 잔인하고 절박한 계절이었지만 결과는 26-28절에 예언된 그대로였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다니엘 7:26-27)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언약 백성의 믿음을 말살시키려고 시도하던 중에 하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붕괴했고, 그의 영토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통치할 성도들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환상의 끝이다. 마태복음 24:14에 주어진 결말과 도무지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 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로도 알려진 불법자는 다니엘서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통해서 확립한 패턴 그대로 삶과 망상과 타락이라는 단계를 그대로 이행한다. 적그리스도 또는 불법자는 현재 억제되고 있다데살로니가후서 2:7에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신약성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나중에 일어나고 나서야 명백해지는 사건, 현재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숨겨진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데 자주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일이 결국에 가서는 훨씬 더 두드러지게 될 것이며 억제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훤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는 항상 성육신을 자신의 조잡한 해석으로 훼손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사탄의 모든 노력은 실패한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주인공을 아직은 역사의 무대 중앙에 두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의 노력으로 인한 영향력과 활동은 영적 눈을 뜬 사람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레고리 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비록 이 마귀가 아직 역사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눈에 띄게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속이는 자들, 거짓 선생들을 통해 언약 공동체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5]억제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지금 그것을 억제하는 자”의 정체는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6-7에서 바울은 말한다.“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자가 지금은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벌써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억제하시는 분이 물러나실 때까지는, 그것을 억제하실 것입니다.” 혼란이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성 및 남성 명사의 비정상적인 사용 때문이다. 6절에서 중성 단어를 사용한 바울이 7절에서는 남성 단어를 썼다. 당신은 “무엇”이 억제하는지 알고 있다. 현재 억제하고 있는 오로지 “그”만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억제할 것이다. 후자에 나오는 “그”가 진짜 “그”인가 아니면 “그것”인가? 그게 질문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가가 구속자와 로마 제국을 동일시했다. 테르툴리아누스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제국 자체에 초점을 두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또는 통치하는 황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그”로 언급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현대의 주석가들도 보다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동일한 견해를 채택한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현재,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정부로, “그”를 실제 지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천사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다니엘서에서 감지된 유사점에 근거하는 경향이 있다. 다니엘 10장에서 우리는 영적 존재(일부는 천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를 만난다. 그는 또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해 대적되고 세 번째 영적 존재인 대천사 미카엘의 도움을 받는데, 그 결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 지상과 천상의 영역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 다니엘 10:13-14은 이 신성한 존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왕국의 천사장이 스무하루 동안 내 앞을 막았다. 내가 페르시아에 홀로 남아 있었으므로, 천사장 가운데 하나인 미가엘이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 때에 네 백성에게 일어날 일을 깨닫게 해주려고 왔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다니엘서는 땅에서 발생하는 지정학적 현실이 어떤 면에서 영적 영역에까지 작동한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역학을 활용해서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의 “그/그것”의 언어를 설명할 수 있다. 천사가 “그”일 수도 있고, 그가 활용하는 어떤 종류의 지상 계획, 공급 또는 능력이 “그것”일 수도 있다.이건 가능한 해석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그것을 막는 자”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그는 가죽끈을 잡고 있다. 열고 닫는다. 그리고 그는 죽이기도 하고 살아나게도 한다. 그분은 다양한 대리인과 수단을 통해 일하시지만 완전하고도 전적인 주권자이다. 이사야서 마지막 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문제가 논의될 때, 하나님은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 나오게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사야 66:9)흥미롭게도 9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ESV에서 “닫다”로 번역되었으며, 문자적으로는 “제지하다”를 의미한다. 히브리어 atzar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이사야 66:9에서 “내가 항상 자제해야 하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담긴 암묵적인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태를 완전히 여실 것이며 영원 전부터 계획되고 정하신 모든 것이 나올 것이다. 이 구절과 가장 가까운 신약 평행선인 디모데전서 6:14-15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그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이 구절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날이 언제가 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그분은 언제 예수님을 이 땅에 다시 보내실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타임라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그의 백성들에게 굳이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있지?”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결과가 그게 아니었다면, 바울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후서 3:9)베드로에 따르면,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하나님의 무관심이나 무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모든 지연은 복음의 진보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올 것이다. 베드로는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자기가 받은 지혜를 따라서 여러분에게 편지한 바와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3:15)베드로는 자신이 말하는 포인트가 바울 서신서 속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가정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바울의 글은 데살로니가후서일 것이다. 억제는 결국 제거될 것이다감람산 말씀의 예수, 데살로니가후서의 바울, 그리고 베드로후서의 베드로까지 예외 없이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구원의 복음이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하나님이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말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관리 아래에 있다. 그 과업이 완수되면 억제가 풀리고 말세의 대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끝이 올 것이다. 신약성경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깊이 파고들라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 단지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사도행전 1:6)이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나쁜 질문이 아니다. 구약의 독자로서 그리고 1세기 유대인으로서 제자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묘사하신 산고의 궁극적인 지점을 모든 이방인을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재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국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환상 직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 37:16-17)일단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수단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 관해서 묻는 것은 큰 비약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각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구원받았고 성령 충만을 입었다.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완전한 성취를 위한 시간표가 어느 시점에서도 제자들과 공유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작을 엿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살아서 마지막까지 목격할 거라는 약속은 받지 못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필요한 호기심에 빠지지 않도록 그들의 관심을 당면한 과제로 돌렸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7-8)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을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일을 시작하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나가라. 지금 논의에 적용해서 볼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종말론적 사건의 시기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예 묻지 않는 게 좋다는 권고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무법하고 반항적이고 유혹적이며 선동적인 활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상 명령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복음을 들을 기회의 창을 열어 두신다는 사실이다. 그 일이 완성됨에 따라, 마귀의 사슬은 더 길어질 것이며 사탄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반역이라는 문이 열릴 것이다. 큰 환난과 박해, 체질의 계절이 시작되고, 그 후에야 비로소 끝이 올 것이다. 불법자가 성도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기를 높일 것이다우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사례에 비추어 불법자가 그에게 주어진 확장된 허가 기간에 어떤 활동을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롱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티오쿠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적그리스도라고 아는 한 사람의 적절한 상징이 되었다.”[6]다니엘서 7:25은 그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가 가장 높으신 분께 대항하여 말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며, 정해진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할 것이다. 성도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권세 아래에 놓일 것이다.”삼 년 반 동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광범위한 허가를 받았고 그 기회를 끝까지 다 썼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유대 땅에 헬라식 휴일, 관습 및 법률을 부과하려고 했다. 아예 그들이 지켜온 삶의 방식을 지우려고 했다.그는 또한 자기 자신을 충성과 종교적 신앙의 궁극적인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려고 시도했다. 다니엘 8:9-11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작은 뿔”이라고 언급한다. “그 가운데의 하나에서 또 다른 뿔 하나가 작게 돋기 시작하였으나 남쪽과 동쪽과 영광스러운 땅 쪽으로 크게 뻗어 나갔다.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강해지더니, 그 군대와 별 가운데서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그것이 마치 하늘 군대를 주관하시는 분만큼이나 강해진 듯하더니, 그분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마저 없애 버리고, 그분의 성전도 파괴하였다.”성경 본문은 안티오쿠스가 “지상 수준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하늘 그 자체, 심지어 하늘의 군대와도 전쟁을 벌일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마치 우주적 분쟁에서 라이벌이 되어서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하늘 군대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이것은 주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대천사 미가엘을,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웅인 가브리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는 단지 아는 건, 영적 전쟁이 분명히 매우 치열하다는 사실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지상과 천상의 영역 사이의 경계선이 흐려지고 잠시나마 그 결과는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4에 나오는 구절과 아주 잘 일치한다. 사도 바울은 불법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바울이 다니엘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 때의 무법자에 대한 그의 묘사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역사적 현실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람산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위대한 마지막 사건의 시기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심어놓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마태복음 24:15-16)예수님은 마치 다니엘 이야기가 반복되는 현실을 만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거 같다. 산으로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예수님 자신이 다니엘서 패턴의 반복을 하나의 방아쇠 사건, 특히 그가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게 과연 무엇인지 호기심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다니엘은 이런 식의 표현을 8:13, 9:27, 11:31 그리고 12:11에 걸쳐서 총 네 번 사용한다. 이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 해석이 어렵기에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몇 가지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1:20-22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예루살렘이 군대에게 포위 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 도성의 파멸이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그 도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산골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그 때가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징벌의 날들이기 때문이다.”누가의 버전에서 예수님은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기 시작할 때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도망가라! 위대한 복수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예루살렘의 멸망을 첫 번째 “큰 환난”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면, 마지막 “큰 환난”에도 동일한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 24:15-16에서 방아쇠 사건을 주시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적들에게 온통 둘러싸인 교회를 볼 때, 모두에게 미움받는 교회를 볼 때, 그리고 불법자가 교회의 목을 발로 누르며 마치 교회가 완전히 그의 손에 잡힌 것처럼 보일 때, 도망가라! 주님의 날이 다가왔다!이 모두는 데살로니가후서 2:4에서 바울이 불법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해 말할 때 필요한 모든 맥락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불법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일어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물론 물리적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은 없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이미 파괴되었는데, 지금 그런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그 부분에 있어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이다. “성전에 앉는 것은 신성한 속성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신성한 영예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대부분의 주석가들도 그렇게 이해한다. 프레드릭 F. 브루스(F. F. Bruce)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진 그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8]이 예언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실제로 물리적인 성전을 재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데살로니가후서 외에 열 번 사용되었으며, 그중 무려 아홉 번은 기독교의 교회를 의미한다. 스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신약의 다른 곳, 특히 바울의 글에서 성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이 단어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유일한 성전 이외의 것을 가리킬 수 없도록 만든다.”[9]따라서 우리는 일단 적그리스도가 겉보기에는 교회를 완전히 자신의 권세 안에 두게 될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맞을 거 같다. 그는 우리의 목을 발로 누르기 시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교회가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그게 바로 방아쇠 사건이다. 그럴 때는 산으로 도망가야 한다. 모든 것의 끝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대배교와 불법자는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종말을 맞을 것이다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잠시 동안 하늘의 군대와 경쟁하는 사건 속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합리적으로 볼 때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고 또 놀라운 힘을 축적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참혹한 종말을 맞았다. 다니엘 7:26-28은 이렇게 말한다.“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나 다니엘은 이 생각 때문에 고민하여,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오만하고 불경스러운 원정을 벌이던 기원전 164년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했다.그가 왔다. 그리고 그는 허락받은 일을 했다. 그리고 죽었다.“이것이 그 환상의 끝이다.” (다니엘 7:28)이러한 패턴은 우리로 하여금 갑자기 나타난 말세의 불법자가 급속히 세력을 키우고 마귀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다가 파국적으로 멸망할 것을 예상하게 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 같다.“그 때에 불법자가 나타날 터인데, 주 [예수]께서 그 입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고, 그 오시는 광경의 광채로 그를 멸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그의 통치는 짧고 잔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끝은 갑작스럽고, 아무도 그의 패망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다니엘 7:27)불법자의 출현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끔찍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전조이다. 그가 휘두르는 잔인함과 공포의 통치는 최종적인 체질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재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정금처럼 단련하고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망하는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끔찍한 산고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잠긴다. 진통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그 고통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6:20-22)하나님께 감사하자!1.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53. 2.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0.3. Leon Morris,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ssalonians i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221.4.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5.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in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87.6. Tremper Longman III, Daniel i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09.7. Herman Ridderbos as cited in Anthon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60.8. F.F. Bruce, 1&2 Thessalonians in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1982), 169.9. Sam Storms, Kingdom Come (Geanies House: Mentor, 2013), 530.원제: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Great Apostas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회개하지 않는 개구리
by 필립 정
2023-08-09
내가 사는 이곳 텍사스 댈러스는 최고 기온이 요즘 42도까지 치솟는다. 밤 7시가 넘은 현재 기온이 40도다. 이 기온이 앞으로 열흘은 더 지속된다는 예보다. 밖에서 잠깐 일하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거인국으로 끌려와 위험과 공포에 시달리며 사는 걸리버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환경을 개선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며칠째 시달리고 있다. 이 무력감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보려고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교회와 신학을 따라가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내 무력감이 역설적으로 내가 의지해 왔던 교회의 자기 생존 본능에서 왔다는 근거들을 찾게 되었다. 결국 그 공동체에 속한 나 자신도 내 문제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힘이 없이 무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내가 사는 이곳에는 Southern Baptist Seminary, Dallas Baptist Universit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있다. 또 이곳은 ‘바이블 벨트’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가 많은데, 매우 보수적인 남침례교 교회들이 대다수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양한 달란트와 은사로 사역하는 초교파 교회라 그 개방성이 마음이 들어 줄곧 다녀왔다. 복음적이면서도 매우 활발하게 선교, 봉사, 구제 사역을 펼치는 교회다.그러나 팬데믹 당시부터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갖는 한계를 이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설교와 기도 제목이 ‘교회가 어떻게 이 위기를 견뎌낼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복음 전파’도 교회 생존의 연장선에 있어 보였고 지역 사회와 인류의 안녕은 주요 기도 제목에 들어가지 않았다. 옆집 구경하듯 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당시 중국 탓을 하거나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을 음모론으로 가볍게 취급하였고 백신 주사 거부는 물론 마스크 쓰는 것조차도 격렬히 저항하는 교인이 너무 많았다. 교회 청소하는 한인이 마스크 쓰며 청소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 변화와 지구 열대화가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들다운 모습 더도 덜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신학교나 다른 보수 교단 신학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내가 속했던 교단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를 피하는 방법은 일관되게 동일하다. 일제의 핍박과 폐교 위기를 1938년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가결로 피해 버렸고,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했고,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 242명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지지하여 정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 혼란기를 회피하며 교회는 안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1980년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주요 참석자들 역시 박정희 3선 개헌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주요 보수 교단들의 변명은 일관되게 “교회 생존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였다. 이 대답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모순이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왜냐면 이 대답 자체가 교회가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쇠락한 원인은 자유주의 신학, 교회 세속화, 성직자들의 타락, 교회 성장주의라고 박용규 총신대학원 교회사 교수는 말한다.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에 비판 없이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온 좌우/젠더 이데올로기, 경제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 같은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예측할 수 없는 경제와 기후 문제를 겪는 뉴노멀 시대 위기에도 여전히 교회는 예전과 같이 ‘보신주의’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의 앞가림만 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빛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희망을 찾았던 교회1980년대 한국 교회의 역동성은 청년들에게서 나타났다.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신앙 서적의 핵심 주제는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게할더스 보스 같은 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였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런 책들이 읽히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그 세대를 지배하던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주체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 우리가 알던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영적 천국이었는데, 새로운 하나님 나라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이며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실현하시는 이미 임한 그러나 앞으로 임할 완전한 통치”라고 하여 사회 정치 현안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숨통을 틔워 주었다.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 정점을 찍어가던 198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호헌 철폐, 직선 개헌 문제에 조금씩 직간접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시국 문제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하며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미 민주화 운동은 천주교회나 사회단체, 대학이 끌고 가고 복음주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2010년 복음주의자들의 제3차 로잔 대회에서 인류의 자원 낭비와 지구 오염을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의미 있는 선언이 있었다. 케이프타운 선언 제8항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을 허비하고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며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 숭배에 공조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잔 언약과 그 운동의 영향력은 한국 보수 교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전부터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소비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시대에 들어섰고 경제 주체인 교인들에게 “과한 소비는 죄”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뿐일까. 빈부 양극화를 초래하는 부동산 문제를 복음주의 교회는 언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부동산 투기는 이웃의 땅을 빼앗는 죄악”이라고 할 목회자 또한 버텨 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 그렇게 돈 버는 시대에 교회는 위험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교회가 무력한지 알 수 있게 할 근거가 될 뿐이었다.이곳은 연일 타들어 간다. 텍사스 보건국(Texas State Health Department) 조사에 따르면 “더위나 더위와 관련된 질환으로 306명이 2022년에 생명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는 700여 명이 같은 원인으로 해마다 생명을 잃는다. 민승기 포항공대 환경학과 교수에 의하면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2030년대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게 되고 저 배출 정책을 쓰더라도 2050년대에는 북극의 빙하가 다 사라져 홍수 화재, 폭염, 폭풍, 같은 기후 변화가 급증할 것이다.” 이 이상 더 끔찍한 인류의 종말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뛰어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결국 죽었다는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인류는 삶겨지는 위기에 처한 개구리와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도 어제처럼 산다. 교회도 지금까지 생존 본능을 발하며 버텨 왔지만, 이 위기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최근에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 열대화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학자가 지구 열대화를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가 처한 재앙을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영화 ‘투모로우’가 생각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누구나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추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 무력함이 교회의 나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마지막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신자는 신자와 결혼해야 한다. 왜?
by Matt Boga
2023-08-08
지난 수년간 대학생과 이십 대를 제자훈련하면서 끊임없이 받은 질문이 있다. “불신자와 연애해도 되나요?” 그리스도인의 데이트 목적은 배우자를 찾기 위한 것이기에 이 질문은 결국 “불신자와 결혼해도 됩니까”로 바꿔도 무방하다. “안 된다”라고 성경은 여기에 아주 간단하게 답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짧은 대답에 많은 사람이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당신이 이 질문과 씨름하고 있든, 아니면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제자훈련시키고 있든, 성경이 왜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씀을 검토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결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관해서,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관해서 발견할 것이다. 결혼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명령 앞에서 불평하기 보다는 그 속에 숨은 보화를 기대하며 갈망하는 게 마땅하다. 한 몸이 됨으로써 이루는 연합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다 그렇듯,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해서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답도 그 동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가복음 10:2에서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을 받은 예수님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결혼이 태초에 어떻게 설계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 현재에도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대답도 그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태초에 일어난 창조의 정점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류(남성과 여성)였다(창 1:27). 비록 하와가 나중에 아담의 몸에서 나와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론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하나가 된 두 사람의 모습이다. 성경은 그들을 “한 몸”이라는 결합된 형태로 표현한다(창 2:22-24).아담과 하와라는 한 몸의 결합은 풀로 붙인 것이 아니라 아예 용접한 상태였다. 나무 조각 두 개를 강하게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주로 접착제를 쓴다. 접착제는 두 개를 강력하게 하나로 묶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두 개는 여전히 두 개이다. 그러나 용접은 전혀 다르다. 용접이 하는 것은 접착이 아니라 융합이다. 융합에 의해 두 조각은 아예 하나가 된다. 접착제로 붙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각각의 금속이 녹아서 아예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금속이 녹는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특징을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이 이와 비슷하다. 단지 남자가 주도한 계약에 따라서 결합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결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따라서 새로운 창조물이 되기 위해서 융합된다. 물론 창세기 3장의 타락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까지도 영원히 바꿔버렸다. 원칙의 목적타락의 여파로 성경의 구속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죄 많은 인간의 손에서 결혼은 이제 추악한 일탈을 겪는다. 족장들의 실패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로 나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혼에 관한 법을 주셨다. 이방 여자들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도망쳐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을 우려한(출 34:11-16) 하나님은 앞으로 정복할 땅의 딸들과 결혼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신명기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반복된다(신 7:3-4). 그리고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포로들에게 선포된 10장의 언약 갱신 의식 과정에서 이 주제를 다시 강조한다. 이 명령이 21세기 서양인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하나님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결한 혈통이 아니라 순결한 예배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순결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이 명령의 중요성은 솔로몬 왕의 생애에서 생생하게 드러났다. 솔로몬: 케이스 스터디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오로지 하나, 백성을 인도할 지혜였고 그 사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왕상 3:10). 하나님은 상으로 그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부와 지혜를 주셨다(왕상 4:29-34).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지혜와 다스림을 기이히 여기고 그로 인하여 여호와를 송축하였다(왕상 10:1-10). 그러나 비극적으로 솔로몬은 그를 여호와에게서 돌아서게 한 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왕상 11:4).하나님의 풍성한 지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에서 여전히 돌아섰다. 나는 솔로몬과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주변의 이야기지만, 나는 여태껏 믿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서 믿음이 더 깊어지고 주님과 더 가까워진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없다. 불신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거부하는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단지 불경건한 길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과 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스라엘 이야기가 아닌가? 교회는 다르지 않을까?’구속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옛 언약으로 정의되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정학적 실체를 초월한다. 따라서 새 언약으로 정의되는 교회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혼은 변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그리스도의 왕국은 물리적 경계로 정의되지 않고 대신 땅 끝까지 확장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거룩한 나라”이며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도록 부르심 받았다(벧전 2:9, 15).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이 결혼 윤리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신자와 결혼한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라면 이혼하지 말라고 말한다(고전 7:12-17).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결혼인 경우에 그 자체로 인정하신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미혼자를 향한 그의 명령은 전혀 다르다. 반드시 “주 안에서만”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7:39). 교회에 대해서 보다 더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다른 서신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매지 말아야”(고후 6:14) 한다고 말한다. 결혼의 최고 목적우리가 결혼을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제일 수도 있고, 함께 정착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찾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쁜 욕망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든 욕망을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아래 두고 그분의 목적에 따라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지 우리는 쉬지 않고 물어야 한다. 돛이 올라간 배는 의도하든 아니든 바람을 타고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배는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결혼도 다르지 않다. 불신자와 평생을 약속하고 서로에게 충실하며 가정을 꾸리게 되면 누구라도 세상 바람에 휩쓸릴 것이다.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사랑하신다. 불신자도 얼마든지 좋은 결혼생활을 할 수 있고, 불신자 간의 결혼을 통해서도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결혼이라는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데에 만족하면 안 된다. 결혼이라는 배를 만드신 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살 때 우리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남편이 자기 자신을 죽이고 또 아내가 십자가와 같은 남편의 리더십에 사랑으로 복종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자(엡 5:21-33).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예수님의 사랑의 산 증거로서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불신자와 어떻게 예수님을 중심에 둔 결혼의 성약을 맺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결혼 생활이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심오한 결혼의 신비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겠는가? 연합이라는 목적을 삶의 정면과 중앙에 위치시키자. 결혼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른 방법일까? 하나님의 영광과 명성,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더 멀리까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을 중심으로 결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배우자는 오늘도 믿음의 경주를 인내하면서 달리도록(히 12:2) 돕는 사람, 하나님을 더 경배하도록 돕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도와줄 사람이다. 믿는 자는 믿는 자와 결혼함으로 하나로 연합한다. 원제: Christians Should Marry Christians?but W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과거에 얽매인 삶을 넘어서
by 정현구
2023-08-07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위해서는 과거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타인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교훈을 얻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지금 해야 할 것에 더욱 매진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옛날이 지금보다 더 좋은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라. 이런 질문은 지혜롭지 못하다”(전도서 7:10). 과거의 영광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과거만 되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현재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찾고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전도서 7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려 놓으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그런 과거가 있습니다. 바꿀 수만 있다면 바꾸고 싶은 후회되는 결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거에 사로잡혀 늘 후회하고 살면 안 됩니다. 어떤 이유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건 과거는 이미 끝난 일이고, 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셨다면 그것을 내가 곧게 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붙잡고 후회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지난 과거를 큰 섭리 안에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많았던 사람이었지만 과거의 영광과 추억에 매여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과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고 회심 이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13-14).바꿀 수 없는 것, 이미 지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체념적이고 운명적 자세로 살면 안 됩니다. 바꾸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추구해야 할 목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그런데 이와 함께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바꾸어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잘 알려진 기도문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하나님,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해 주소서.”전도서 7장 14절이 그런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살다 보면 형통한 날도 오고, 또 곤고한 날도 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형통함과 곤고함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과거에 매이지도 말고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나아갈 일입니다.‘해 아래의 관점’으로 볼 때 결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 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경기를 시작하던 그 첫 출생의 날, 가족들로부터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그날만이 좋은 날은 아닙니다. 인생의 경주 속에서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날이 있지만 그런 날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 모든 좋은 날들은 추억의 뒤안길로 물러갑니다.우리에게는 더 좋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섰을 때 주님에게서 받을 박수갈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있을 때,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을 수 있고,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내일이 두렵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내일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되는 것입니다.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열정을 품고서 추구해야 할 참으로 멋있는 인생이 아닐까요! 내일이 더 좋은 삶, 이 삶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요 영생입니다.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하나님 추구하기, 나의 모든 만족
진짜 보물에 관한 토저의 가르침
by Dieudonne Tamfu
2023-08-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로다.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만족을 아는 사람은 만족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때 텅텅 비어서 갈망으로 가득하던 영혼이 참된 기쁨을 맛보면, 결코 다시는 빈 수조 같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면서 산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요 6:35). 대신 더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구하며 평생을 보낸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충만함을 구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자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우리의 갈망은 단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기쁨을 다시 경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복용량으로는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점점 더 양을 늘리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을 더 맛보기 위해 매 순간 더 높이 오르는 등산가이다. 토저와 함께 하나님 추구하기내가 막 신학 공부를 시작한 2002년, 1963년에 죽은 A. W. 토저가 나를 제자 삼기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 어릴 때 나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심시키셨고,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폭넓게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첫 성경 NIV 검은색 양장본은 수도 없이 많은 밑줄과 하이라이트 별표로 가득하다. 그 후 나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한 여정에 푹 빠졌다. 특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아가는 여정은 황홀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2002년, 성경 외에 나는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우연히 A. W. 토저가 쓴 하나님을 추구함을 만났다. 얼마 읽지 않아서 다음 구절을 만났다. 현대 과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로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다. … 한 인격을 제대로 아는 게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두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길고도 사랑스러운 정신의 교제를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23)나는 인생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한 번 만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갈망을 온전히 채워 주신다. 신학 과정에서 하나님 추구하기토저 덕분에 신학을 하는 내내 내 목포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위해서 불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토저의 생각이 옳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세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족의 근원이심을 선포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에게 주님을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만 구한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 27:4). 바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삶의 유일한 과제로 삼는다(빌 3:10). 영생을 정의하는 건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그리스도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라고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직도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향한 굶주림을 모르는 영혼은 아직 생명의 떡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선교로 하나님을 추구하기하나님께서 나를 카메룬에서 미네소타로 옮겨서 공부하게 하셨을 때, 나는 더 부유한 나라가 가져다주는 유혹을 예리하게 느꼈다. 그래서 일기에 기도를 기록했다.주님, 제가 주님을 더 잘 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이 도시와 미국의 아름다움을 감사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미국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제 눈을 세상에서 돌려 온전히 주님께만 향하게 하소서. … 오로지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의미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소서. 미국인 같이 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소서. 미국은 그냥 미국일 뿐입니다. 주여, 예수님만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모든 만족이요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유학 전보다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교회 개척과 신학 훈련을 위해 나를 카메룬으로 옮기셨고, 다른 사람들도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똑같은 경험을 돕는 데에 도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의 그 어떤 보물도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기쁨을 전하는 나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를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했다. 하나님은 내가 미국의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모든 만족, 모든 기쁨, 모든 즐거움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본 자유를 토저도 맛보았다.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이다.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보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설혹 그것들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로 인한 기쁨은 너무도 소소해서 그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거의 상실감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잃더라도,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순전히 합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으로 다 가진 사람이기에. (28)이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당신에게 이런 만족을 바라는 갈망이 있는가?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보물이 주시는 기쁨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분을 추구하라. 당신이 현재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도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언제나 희망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이렇게 기도하자.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90:14)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우리를 되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85:6)당신은 확신을 품고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이사야 57:15)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러면 그 어떤 상실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소유물은 더 이상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궁극의 보물을 즐기게 하는 통로로 바뀐다. 꿈과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고통조차도 소망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모든 즐거움, 모든 만족, 그리고 모든 욕망까지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온전하게 소유하게 된다. 원제: My Satisfied Seeking of God: What Tozer Taught Me About Treasur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어떤 열정도 기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714 기도대성회를 경험하며
by 김형석
2023-08-04
내년에 있을 로잔대회를 앞두고 한국 교회는 연합하여 함께 기도했습니다. 연합기도에 관한 기사는 신약성경에는 최초로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120명의 무리가 한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전하면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한 장소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요?그것은 사도행전 1장 4-5절을 보면 그 기도는 예수님의 명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부탁을 남기시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은 그다음 절에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제자들은 지금 몹시 격앙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 주셨으니 제자들은 이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하루빨리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갈 기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넘겨질 때는 다들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떠나고, 심지어 부인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원망하거나 책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믿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또다시 스승이신 예수님께 실망을 안겨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멈추게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인간의 열정과 열심이 성령과 기도보다 앞서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교훈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출범이자, 첫 선교사역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대단한 각오가 되어 있고, 너희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 이 일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우는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표면을 봐서는 사람의 일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의 엄청난 공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지금 마가의 다락방 앞에 딱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열정에 가득한 그들, 자신감에 가득 찬 그들을 이미 넘어뜨리고 꺾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열심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계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하는 것은 육의 열매를 거둘 뿐이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그래서 예수님은 열정만 앞선 제자들을 멈춰 세운 것입니다. 제동을 건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나갔다가는 무조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함에 있어서 기도의 배수진을 단단히 치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고, 좋은 협력자가 있고, 좋은 환경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덥석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로 승기를 잡고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모든 방해 세력을 결박시켜 주시도록 기도의 든든한 기초를 단단히 다진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714 기도대성회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여 같은 비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회를 통해 로잔대회를 준비하는 우리 모든 한국 교회가 다시금 이 일이 육으로 하여 육의 열매를 거둘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여 영의 열매를 거두는 영적 대회가 될 것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마치 초대교회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대회가 인간적인 열정과 자신감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를 받으며 서서히 시동을 걸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714 대성회를 통해 기도의 배수진을 단단히 치고 이 일을 시작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모든 준비과정에 기도가 앞서게 되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로잔대회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은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는가?
by Robert W. Yarbrough
2023-08-03
편집자 주: 교회 안에서 자주 오해되는 성 역할이라는 주제를 기사 하나로 제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유익한 “성경 전체”의 설명이 궁금하다면, “아름다운 차이: (성경 전체에 걸친)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을 지역 교회에 적용하기란 정말 까다롭다.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물론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말에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 이 말이 갈라디아서 3:28(“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회 봉사와 성별은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견지하는 교회(complementarian church), 즉 자격을 갖춘 남자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교회에 출석하는 경건한 여성이 디모데전서 2:12을 보고서 이런 궁금증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과연 어떤 결론을 무엇을 근거로 내려야 할까? 이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10절)가 배워야 하는 것들(11절)의 맥락에서 좋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오랜 동료인 디모데에게 목사의 중요한 책임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한 것처럼, 충실한 성경 해석을 통한 가르침, (2) 예수님이 추종자들을 돌보고 또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방한 것처럼, 자비로운 감독과 목양(예: 벧전 5:1-5).디모데전서 2:12의 적용을 간략하게 다루는 정도로는 전체 문맥에 비춰서 바라봐야 하는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이를 수 없다. 나도 이 주제를 다루었고(‘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137-89), 이 사이트에서도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을 포함해서 여러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조차도 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의 난해 구절을 그 구절만으로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 구절이 주장하는 바는 그 구절에 빛을 비추는 구절들로 이루어진 더 큰 집합의 일부이다. 성경 전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디모데전서 2:12에서 만나는 것은 경건한 여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건한 여인, 곧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헌신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추구하라고, 그리고 피하라고 권하는 몇 가지가 있다.경건한 여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추구”라는 측면에서 다음 것들이 있다. 1. 여성은 남성과 나란히 완전한 존엄성을 확보해야 한다(창 1:27).2. 여성은 남자의 특징을 보완하고(창 2:18) 출산을 통해 인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창 1:28) 성적 특징을 확증해야 한다. 3. 여성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징벌적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속적) 영향을 미치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창 3:14-19).4. 여성은 개인적 죄와 공동의 죄를 의식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 여선지자 안나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담긴 기쁜 소식을 보아야 한다(눅 1-2장).5.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후(막 1:15), 여성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눅 8: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막 15:40-41), 제자들이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간증하고(눅 24:10-11), 그 이후로도 초대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많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은 뵈베, 브리스가, 마리아, 루포의 어머니, 드루배나, 드루보사, 유니아 같은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신약 전체에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인도하는 데에 대한 통찰은 결코 여자로부터 고립된 남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은 여성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여성의 은사를 확인했으며, 그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와 세상에서 복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세워나갔다. 6. 마지막으로, 여성의 위치는 열두 제자를 오로지 남자로만 뽑은 예수님의 선택, 그리고 오로지 경건한 남자만 목회 교사와 감독의 위치에 임명하는 사도적 정책(신약 전체에 걸쳐서 통일되게 진술되는 사실) 속에 반영된 회중 질서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를 다시 디모데전서 2:12로 돌아가게 한다. 경건한 여인(2:10)은 예배 현장에서 배움에 헌신하라는 권면을 받았다(2:11). 그녀에게는 목회 교육(“가르치다”)과 감독(“권위를 행사하다”)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건한 여인과 아내라면 자연스럽게 목양에 참여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한다. 안수받은 남자들은 교인들을 향한 특정한 책임을 맡으며 교인 가운데 있는 여인들의 지혜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목회자와 여성 사이에 건전한 관계가 있다면, 목회자가 자매들의 관심과 의견을 그들의 기도와 봉사와 지도력 측정에 반영할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내용을 마음에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운영되지 않는다면, 교회에는 기능 장애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조정이 필요하다. 더 나은 목회 관행과 영적 갱신, 남편과 아내가 결혼 생활에서 경건한 역동성을 추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교회 전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앙금을 해소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경건한 여인이 피해야 하는 것 디모데전서 2:12은 경건한 여자에게 무엇을 피하라고 권고하는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서구 환경에서 남자에게만 주어진 특정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개심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제자 양육의 명령에는 여성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하지만(마 28:19-20), 성경을 가르치고 또 권면하는 목회 교육에 해당하는 의무는 교회에서 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자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서 교회의 구조와 관계없이 남자를 목회 감독해서도 안 된다. 제자 사역에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여자는 (믿는 모든 여자가 다 그렇겠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보살핌과 영향력이 필요한 다른 여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원칙이 교인 전체의 행정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종종 전체 목회자가 전체 교인 구조라는 틀 안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 행정가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 행정가는 목회자가 아니다. 역할이 서로 얽혀 있을 수 있지만 병합되거나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 겹칠 수는 있으나 같지 않은 사역의 영역짧은 글에서 너무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기란 어렵고 또 현명하지도 않다. 교단 관행과 회중 역학은 매우 다양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적용 범위에 따라서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 사도를 거쳐 초대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성이 아닌 남성(비록 과분한 역할이기는 하나)이 목회자로 임명받은 사실을 확인한다. 여성들은 사생활에서부터 회중의 모든 활동과 이웃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봉사라는 측면에서 남자와 여러 영역에서 중복된다. 그러나 여자의 사명은 남성과 동일하지 않다. 개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달콤한 시너지 효과에 달려있다. 여자와 남자의 상생 효과를 일으키는 목회 지도력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서 상호 증진과 상호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세우려는 교회에 임하시길 기도한다. 디모데전서 2:12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선한 빛을 비추시기를 기도한다. 원제: What Exactly Does 1 Timothy 2:12 Tea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9) : 통합적 사역
by 고상섭
2023-08-02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균형’ 또한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의 하나이다. 그의 삶을 통해서 학자로서 삶과 목회자로서 삶의 균형을 이루었고, 또 목회 이론과 사역의 균형을 이룬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일 것이다.팀 켈러는 복음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능력있게 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은 말씀을 통해서 세상에 선포되는 것만이 아니라 실천과 공동체를 통해서도 선포되기 때문에 복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고 강조한다.[1] 교회 안의 각 사역은 독립적이거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전도, 교회 성장에 초점을 두고, 어떤 교회는 교제와 공동체에 역점을 둔다. 또 빈곤층을 돕는 정의 사역에만 집중하는 교회도 있고,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는 교회도 있다. 빈곤층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는 것”을 엘리트주의라고 여기고, 공동체, 제자훈련, 경건을 강조하는 것은 영적 천박함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상 이 모든 접점에 참여하는 것이 요구된다.“깊이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경험하면서 복음에 의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수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알려지는 그리스도인의 수가 모두 증가해야 한다.”[2]네 개의 사역 접점 어떤 교회도 은사와 강점의 완벽한 균형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한 리더십과 재정 능력을 다 갖춘 교회도 없다.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비유들에 충실한 교회란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가? 교회는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단점을 강화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루어야 하는 힘든 균형이다. 모든 것을 균형 있게 다 잘할 수 있는 교회는 없지만, 어떤 역할이라도 성경이 요구하는 전체 그림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3]팀 켈러가 말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점을 제안한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을 통해) 팀 켈러가 제시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접의 특징은 ‘연결’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결국 팀 켈러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세 가지 방향으로 설명하고 있다.[4]교회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세상을 향해 사역하며 전도하는 전도 공동체이다. 또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 자신을 위해서 서로 교제하고 양육과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양육 공동체로 존재한다. 릭 워렌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예배, 교제, 훈련, 사역, 전도이다. 이 다섯 가지 목적도 하나님을 위한 예배, 교회를 위한 교제와 훈련, 세상을 위한 사역과 전도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사역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이런 교회의 존재 목적의 분류와 팀 켈러의 분류를 비교해보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에서 예배뿐 아니라 전도를 포함시킨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 전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세상을 향해서도 ‘도시에 연결하기’와 ‘문화에 연결하기’로 나눈다. 도시에 연결하는 것은 사역에 해당하지만, 문화에 연결하는 것은 기존 교회의 목적에는 볼 수 없었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다. 직업과 신앙을 연결해 주지 못하면, 진정한 교회로서 이 땅을 바르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 : 예배, 전도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예배이다. 팀 켈러는 성경에 예배에 대한 규정적인 방식이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성경, 전통, 문화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예배의 형식을 바꾸어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로지 시편 찬양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역사적 예배의 수호자들도 있다. 이런 의견들 속에서 팀 켈러는 “사랑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안전하다”는 칼뱅의 가르침을 수용한다.[5]또 팀 켈러는 예배를 통해 비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동시에 신자들의 영적 성숙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첫째,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를 만들라’가 먼저와야 하지만 팀 켈러는 의도적으로 둘째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이 직무는 사실 두 번째로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이 이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전도적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비신자들을 예배에 오게 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 순서가 맞다. 예배가 이미 전도적이지 않다면 비신자들은 예배에 오지 않는다. 비신자들이 예배에 참여하려면 평소의 설교를 듣는 성소들이 “아, 이 설교 예수님 믿지 않는 내 친구 ○○가 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는 비신자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비신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으며 복음 앞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의 목적은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6] ① 친숙한 어휘를 사용하라오랫동안 로마가톨릭은 모든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했다. 매우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오늘날도 비슷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려면 그들이 친숙한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칭의’ ‘언약’ 등의 개념이 나온다면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진정성을 원한다. 가식으로 보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 너무 영적인 표현들을 삼가고, 대신 친숙하고 평범한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선별해 사용해야 한다.[7] 문화에서 공인된 권위자를 인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배우나 강연자나 베스트셀러 작가 등의 일반 대중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과 연결되는 가르침이 있다면 사용하는 것이 좋다. 바울도 사도행전 17장에서 아레오바고의 철학자들을 전도할 때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28)라고 말한다. 또 아라토스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도 말한다. 철학자들이 잘 아는 사람의 인용구를 통해 바울은 진리를 더욱 밝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청중이 그 인물을 존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교할 때 비그리스도인이 존경하는 어떤 권위자를 인용하여 대화를 펼치면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좋다. 오로지 성경만으로 대화를 주도하게 되면, 상대가 완전히 설득되지 않아 이야기를 끌고 가기 어렵게 된다. ② 예배 흐름에 따라 설명을 제공하라 예배에 의미를 짧게 설명하는 말을 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예배 가운데 교육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③ 비신자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환영하라정기적으로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들 중에 이것을 믿지 않는 분들 또는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몇 가지 반대 질문을 다루어라. 그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진지한 공감을 갖고 표현하라. ④ 수준 있는 예술을 예배에 사용하라 음악의 수준, 당신의 설교, 그리고 예배의 시각적인 미적 요소들이 특히 문화 중심지에서는 전도적 역량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음악적 수준이 탁월하면 사람들은 초월을 경험하기가 쉬워진다. 심미적으로 뛰어난 예술은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을 고취하라교회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추락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뿐인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비와 정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외부인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전도적 예배는 실천 사역을 위한 헌금을 강조하며 그 사역들을 보고하고 증언하고 기도해야 한다. ⑥ 복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성례를 시행하라세례 받을 때 개인 간증을 하는 기회를 주라. 그리고 질문에 답하도록 하라. 성찬은 보이는 복음으로 청중의 삶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⑦ 은혜의 복음을 설교하라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복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하라, 복음은 단순히 구원 얻는 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도구이다. 결국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적용할 때 비신자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신자들은 예수님을 닮도록 성장하게 된다. 사람들을 결신으로 이끄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고 또한 예배 후 지속적인 후속 모임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결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함으로 전도와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한다.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 제자도“사람들을 제자화하는 주된 방법은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이다. 은혜, 지혜, 그리고 성품에서 성장하는 것은 수업과 강의, 그리고 대형 예배 모임, 또는 고독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성장은 깊은 관계와 공동체에서 일어난다.”[8]팀 켈러는 사람이 변화되는 제자도의 중요한 요소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어떤 요소들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① 공동체와 전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단순한 지원 그룹이 아니라 오히려 대안 사회이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 다른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인간은 모두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공동체는 반드시 교제의 수준을 뛰어넘어 반문화를 구현해야 한다. 복음이 아니라면 결코 함께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연합하여 사랑하는 것을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하며 자기를 주는 방식으로 성, 돈, 힘을 사용하는 것을 세상이 보아야 한다.”[9]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대안 사회가 되어서 ‘언덕 위의 도시’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추어야 한다.[10] ② 공동체와 성품공동체는 성품을 만든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강의실에서 강의로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교실이 아닌 삶을 이끄셨다.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진리를 토론하고 대화하고 적용하면서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셨다. 우리가 학문적인 상황에서가 아니라 소그룹과 우정 관계 속에서 가장 잘 배우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강점과 재능을 긍정하고, 동등하게 중요성을 인정하고, 가시적인 애정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공간과 물건과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의 필요와 문제를 공유하며, 서로 신앙과 생각과 영성을 공유하고, 상호책임 관계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섬기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성품이 자라게 된다.[11]③ 공동체와 윤리적 행동 공동체는 우리의 윤리를 형성하며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는 명시적이며 암묵적인 규칙들을 형성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윤리 명령은 개인보다 공동체에 훨씬 많이 주어지고 있다. 모세오경은 한 개인에게 준 성경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주신 것이며 신약성경에 나오는 빌립보서, 에베소서 같은 서신서는 교회 회람용 서신이었다. 성경을 묵상할 때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하지만 또한 공동체적 적용이 필요하다. 로마서 12:1-2의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흔히 개인적인 헌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너희 몸들을 거룩한 산 제물들로 드리라”는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다. 성경은 단순히 개인 신자들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 아니다. 사랑과 거룩의 영적 열매를 맺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는 모두 경험상 개인으로서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훨씬 힘든 일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책임 있는 관계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반복적으로 미끄러지고 쓰러질 것이다. … 공동체는그 자체로 믿음을 따라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줄 수 있다.”[12]④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감 혼자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함께 공동체 안에서 나눌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더욱 풍성해진다. C. S. 루이스는 찰스 윌리엄스, 톨킨과 친구였지만 윌리엄스가 죽고 톨킨과 두 사람만 있었을 때는 우정을 혼자만 더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윌리엄스와 톨킨이 있을 때 누렸던 풍성함이 줄어들었다고 고백했다. “내 친구들 각각 안에 오직 어떤 친구만이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있다. 나는 나 혼자서 한 사람의 전체를 끄집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 … 찰스가 죽은 다음 나는 더 이상 캐롤라인의 농담에 로날드가 하는 반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찰스가 가면서 로날드가 “내게만” 남게 되었는데, 로날드는 더 작게 남았다. 진정한 우정은 사랑을 질투하지 않는다. 두 친구는 세 번째 친구가 오길 기뻐한다. 셋은 네 번째가 오길 기뻐한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친구의 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각각의 친구를 덜 갖는 것이 아니라 더 갖게 된다. … 우리는 천국의 떡 되신 분을 더 많이 나눌수록 우리들은 더 많이 서로를 갖게 된다.”[13]인간은 혼자서는 하나님을 정말로 알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죄가 들어오기 전이지만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해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끽하고 계시므로) 삼위일체의 행복을 나누시기 위해서이다.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정의와 자비 사역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치유하고 먹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자비와 정의의 행동이라는 두 가지를 통해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봉사하는 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자신을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말씀하셨다. 팀 켈러는 “교회의 제자훈련은 반드시 멤버들이 지역을 사랑하고 신앙과 직업을 통합하며 더 정의롭고 건강한 사회와 문화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공공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많이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14]① 구제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② 개발사람이나 공동체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자급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돕는 과정이다. ③ 개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15]이 세 가지는 정의와 자비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이지만 제도 교회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구제와 개발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개혁은 한 교회의 일이 아니라 지역이 연합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종 단체에 들어가서 지역을 위해 협회와 조직을 통해 개발에 동참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일 것이다. 또한 얼마나 도와야 하는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가? 언제, 어떤 조건에서 도와야 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이런 일들에 대해 고민을 통해 각 지역교회에서 적절한 과정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 오늘날의 문화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직장이라는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속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문화를 바꾸려면 문화 내러티브를 거부하며 문화에 참여하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하여 탁월성, 구별성, 책임성을 갖고 직장에서 일해야 하며 그 정신과 발판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 직업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일에 대한 동기에 변화를 준다. 많은 사람이 일을 통해 자신의 중요함과 정체성을 찾는다. 그러나 복음만이 “마음을 다해 주를 섬기듯이 일할” (골 3:23) 동기를 부여한다. 또 복음은 일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킨다. 일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수단이다. 또한 복음은 일터에서 높은 윤리 수준을 제공하며 또 일을 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는 기초를 제공한다. 이런 복음을 수단으로 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과 직장을 연결해 주어서 도시 안의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① 책임감 있게 일하기: 직업에 관련된 영적 성장 기본적으로 은혜의 수단들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 창조적인 방법으로 월간으로 직접 모이고 주중에는 온라인으로 모이는 등 다양한 방식의 영적 공급이 필요하다. 또한 도덕적 쟁점, 윤리적 난제, 유혹, 실망 등 그리스도인들이 직업에서 겪는 온갖 어려움을 다루어주어야 한다. 같은 직군별로 서로 보살피고 지지하는 그룹을 만들어 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 ② 구별성을 갖고 일하기: 세계관 개발과 훈련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시라면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주님의 주재권을 실현하도록 가르칠 것인가? 팀 켈러는 의도적인 학습 공동체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나이 있고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 둘째, 젊고 이제 막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셋째, 성경, 신학에 정통한 교사들, 이 세 부류가 한 공동체를 만나서 직업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어떤 것을 수용하고 반대해야 하는지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③ 탁월성 있게 일하기: 멘토링 및 문화 갱신 “일반적으로 문화 창출에 협력한다는 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악한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지어 비신자들과 함께 일하여서 세상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무에서의 탁월성이다. 업무의 탁월성은 우리 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일이 형편없다면 말로 하는 전도는 듣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단지 경멸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요 문화 중심 지역 속에 살면서 그들의 일을 탁월하게, 그러면서도 구별된 방식으로 한다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이루어낼 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 이런 종류의 공동체가 성장할 때 세상 속에서 복음의 문화를 심을 수 있게 된다. 이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을 추구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직업적인 성공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이런 문화적 내러티브를 변화시키는 원천이 된다. “남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는 것들(구원, 자부심, 선한 양심, 평안 등)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면 그만이다. 즐거이 감당하는 희생이자 자유가 보장된 제한이다. …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16]팀 켈러는 존 아니주와 함께 편집한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문화를 가진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연합하여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의 원제는 ‘Uncommon Ground’이다. 신앙인과 다른 그라운드를 가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복음적 확신을 유지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질문하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복음이 주는 겸손과 인내, 관용과 용기를 통해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겸손은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게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의견보다 더 뛰어난 의견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이 행위가 아닌 은혜로 받은 구원임을 인식할 때 더욱 겸손히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런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인내는 경청하고 이해하고 질문하도록 권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서 이념적 거리를 늘 넘어서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 깊은 경청과 공감적 이해, 사려 깊은 질문으로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관용은 우리가 공유하지 않는 믿음과 실천을 실제로 참아내는 일이다. 관용하라는 말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을 수용하거나 그런 실천에 찬성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과 생각을 분리하는 어려운 일, 즉 상대의 믿음이나 행동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관용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두려움을 제거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하심을 온전히 확신한다면, 비판과 불안정을 직면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자질을 통해 직장생활을 한다면 변화가 보장되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길은 어려운 길이며 성공이 보장된 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명의 길이다.[17]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설교와 가르침, 기도, 예배, 성찬, 교제와 우정을 사용하여 교인들의 마음에 복음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도록 부채질하면,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자라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사랑은 반드시 길을 찾기 마련이다.”[18]복음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도 한다. 인생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사역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팀 켈러는 복음이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들과 세상과 연결해 주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죄로 인해 분리된 관계가 회복되면서 복음은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된다. 팀 켈러는 이런 사역들이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변화를 꿈꾸며 기도했다. “그러나 상상해보라 만일 맨해튼과 같은 곳에 많은 신자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많은 도시 거주민들을 기독교의 메시지로부터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이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만 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과학, 학문, 기업 등에서 핵심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권력, 재물, 영향력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19]복음은 개인의 삶을 균형 있게 하고 또한 교회의 사역을 균형 있게 한다. 복음을 통해 통합적 사역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겨준 또 다른 유산이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610.2. 같은 책, 612.3. 같은 책, 616.4. 팀 켈러는 네 가지 사역 접점에 ‘도시 교회 개척’을 추가하여 다섯 가지 접점으로 소개한다. 5. 팀 켈러 외,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 284.6. 센터처치, 637.7. 팀 켈러 외,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 26.8. 센터처치, 651. 9. 센터처치, 653. 10. 팀 켈러, 복음과 삶, 100.11. 복음과 삶, 101-122.12, 센터처치, 656. 13. 센터처치, 658.14. 센터처치, 681. 15. 센터처치, 685. 16. 팀 켈러, 일과 영성, 91. 17. 팀 켈러, 존 이나주,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16-17.18. 같은 책, 6-67.19. 센터처치, 789.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온라인 식단
by Trevin Wax
2023-08-01
우리가 하루에 보고 듣는 정보의 양은 우리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 과부하로 우리의 감각, 특히 영적 감각은 점점 더 무디어진다. 무감각이 미치는 영향은 단지 사소한 사건까지도 쉬지 않고 스크롤하는 엄지손가락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진다. 단지 기사 하나를 통해서 자연재해나 끔찍한 비극을 접한 우리는 즉시 다음 기사로 넘어간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논평, 아이들이나 동물이 나오는 재미있는 비디오, 그리고 건강과 웰빙을 개선하라는 각종 기사를 스크롤하기에 정신없다. 그 결과가 뭘까? 모든 게 흐릿해진다. 너무 많은 정보, 지혜라고는 찾을 수 없는 시끄럽기만 한 배경이다. 나는 매일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할애한다. 때로는 꽤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더불어서 신학, 정치, 문화 분석 등 다양한 경향이나 주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다양한 미디어와 각종 정보 채널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얻은 유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셜 미디어에서 좋은 것을 찾아도, 오로지 유익하고 교육적인 팟캐스트만 들음으로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는 자료만 섭렵한다고 해도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예를 들어, 우리는 얼마든지 팟캐스트 피드의 메뉴에 있는 “지금 듣기”(listen now)에 중독되어 그때그때 올라오는 최신 정보를 받지 않으면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모든 최신 소식을 듣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갈망은 우리의 영혼에 깊고 미묘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실온라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최신 정보와 발맞추려는 욕구는 과거 아니, 최악에는 영원까지 희생하면서도 오로지 현재에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시대에서 벌어지는 토론과 논쟁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앙의 기초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실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단지 뉴스 속보나 이번 주 핵심 토론 주제 등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바른 신앙인은 믿음의 기반에까지 더 깊이 파고 내려가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든든히 설 곳이 있음을 점검한다. 아무리 거센 문화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 없는 나무처럼 우뚝 서기 위해서 우리는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뿌리가 없다면,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리고 매일 소용돌이치는 뉴스와 정보에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내가 The Thrill of Orthodoxy를 쓴 목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이 주는 짜릿한 아름다움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교회가 만난 가장 큰 도전은 새로운 오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오래된 진리가 더 이상 놀라움을 주지 않아서이다. 온라인에 종속될수록 성경의 깊고 풍부한 진리는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은 마비되고 가슴은 쪼그라든다. 오늘 하루도 쓸모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 채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 얕은 곳으로 향하는 낡은 길세상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은 표면 아래 정도를 살짝 파헤치는 정도로 충분하다. 우리가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은 성경이 펼쳐놓는 이 세상의 위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세상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의 진리와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하게, 또 끊임없이 상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없이 천박해질 것이다. 두 마음을 품고 모든 길에서 헤매며(약 1:8), 오늘을 살아가는 데 가장 신실한 길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혜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주의가 분산된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파스칼은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인류에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산만함과 자극을 찾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독과 성찰의 시간을 피한다. 그러나 고독과 성찰이 사라진 기독교는 시들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정기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음미할 충분한 공간과 집중이 필요하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상상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쁨과 안정을 찾을 것이다. 바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신경(creed)과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팟캐스트보다 신앙 신조? 수많은 신경에서도 특히 사도 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 이 셋이 두드러진다. 이 속에는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설명이 담겨있다. 더불어서 기독교의 핵심인 삼위일체를 적시한다. 종교개혁 기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는 마치 잘 짠 직조물처럼 신앙의 충만함을 자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다. 신경이 하나의 상부 구조, 그러니까 청사진을 제공한다면, 고백은 세부 사항을 채우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큰 명료성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은 수천 페이지의 산문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실과 인간의 위치를 연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물으셨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 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그분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확신을 품고 고백하려는 우리의 시도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고 그의 의로운 성품과 구원 행위의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다. 고대의 신경은 끝없는 수다와 논쟁이 펼쳐지는 소셜 미디어 같은 온라인 세상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신경이 중요하다. 신경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먼지투성이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문서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우리와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신경은 신앙의 기초를 설명한다. 정통을 지키는 난간이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목소리이자 진리의 기둥, 그루터기인 교회의 증언이다(딤전 3:15). 신경은 모든 시대에 불어닥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언제나 우리를 안정되게 유지한다. 소음에 대항하는 전략소음이 진동하는 디지털 시대에 지혜를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이라는 천박함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실을 담은 우물에 우리 자신을 깊이 잠기도록 하는 관행을 구현해야 한다. 첫째, 매일 아침 “휴대폰보다 성경”이라는 규칙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휴대폰은 다른 방에 두고 구식 알람 시계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로 옆에 성경과 기도 가이드를 준비하라. 세상의 소음이 끼어들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시간을 보내자. 매일 아침 하나님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나는 종종 Psalms in 30 Days(30일 시편 묵상)이라는 기도 여행 가이드를 따라서 아침 시간을 보낸다.) 둘째, 온라인 기술을 유익한 방향으로 전환하자. 영적 성장을 돕는 (성경에 깊이 잠긴 목소리, 신경 정통에 기반을 둔 조직 등) 소셜 미디어 계정을 팔로우하라. 팟캐스트 구독 리스트에 교회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추가하라. 셋째, 스크롤을 공부에 활용하자. 온라인 섭취에 대한 제한을 설정하라. 그리고 거기서 얻는 정보의 일부를 실질적인 신학 내용으로 대체하라. 하루에 15분 또는 20분 이상 앱을 사용하면 알림이 울리도록 휴대폰을 설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생각 없는 습관에서 마음을 스트레칭하는 습관으로 바꾸고 싶다면 최소한 소셜 미디어에 보내는 시간만큼은 책 읽는 데에 보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꿰뚫는 두꺼운 신학책을 하나 집으라. 가장 두꺼운 조직신학 교과서나 교회사 책이라도 하루에 두세 페이지씩 꾸준히 읽으면 일 년 안에 완독할 수 있다. 넷째, 혼자 하지 말라. 최신 뉴스보다 변치 않는 진리를 우선시하려는 믿음의 친구를 찾아라. 신경은 나 혼자 믿는 게 아닐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진술이다. 애초에 개인이 고백하는 믿음의 진술로 시작한 사도 신경은 세례 의식으로 발전했고, 세례식은 개종자의 선한 고백을 축하하기 위해 온 교회가 참석하는 축제가 되었다. 폭풍 속에서도 꾸준히 열매를 맺자마음 없는 스크롤에 대한 해결책은 오로지 집중뿐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고대 신경과 신앙고백을 숙고하는 것은 우리가 지식과 지혜를 키움으로 예수님을 더 잘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다 최신 소식에 요동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오로지 주님께 뿌리를 내림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변하는 뉴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깨워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만날 격동의 시대에도 꾸준히 열매 맺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원제: Man Cannot Live on Feeds Alone: The Christian Diet for a Digital Ag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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