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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
by 양혜원
2023-09-01
여전히 높은 온도와 습도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어야 했던 8월 중순 막바지 주말, 마지막으로 내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충무로역에 내려서 문학의 집 서울로 향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문학기행 강연 시리즈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작품을 소개하는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작품을 골랐고, 강의 제목은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로 정했다.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30명 인원 제한이 있는 강의였는데, 좌석은 거의 다 찼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 노부부 커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으러 왔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박완서의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박완서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걸 ‘낚글’이라고 해야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정원을 채웠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구나, 싶었다. 하긴, 출생의 비밀에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가 여전히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을 보면, 혼인율과 출생률이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가운데도 가족이 여전한 항간의 화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누가 엄마고 아빠고 아들이고 딸이고 하는 이런 관계들이 ‘진실’로서 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에서부터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아저씨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친아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라는 개인의 서사는 달라진다. 내 탄생의 근원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써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서사의 핵심을 구성하는 부모 자식 관계의 서사, 그리고 부부 관계의 서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관계가 개인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날 가족에 대한 고민이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면, 아마도 이 변화의 폭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족 서사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강의 내용의 핵심이었다. 가족의 힘과 굴레를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니, 결국 제목이 ‘낚(는) 글’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여성 한 분이 같이 내려가면서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고 하시길래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은 힘이 되는 건가요? 굴레가 되는 건가요” 하며 운을 떼시는 것을 보니, 역시나 제목에 끌려 강의에 오신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나의 귀를 청하셨다. 자신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술 문화가 곧 직장 문화였던 옛날 옛적에, 좀 더 가정적인 문화를 찾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아들이 자신은 다시 한국 가서 살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한국을 오고 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남편의 동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였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아들이 아직도 장가를 가지 않고 있다며 은근한 우려도 내비치셨다. 두서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안에는 오늘날 한국 가족의 복합적인 서사가 다 들어가 있다.우선 이민 이야기부터 보자면, 아주 오래된 농담을 포함하여 박완서의 소설에서 미국 이민은, 한국 가족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아들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의무와 도리의 부담에서 벗어나,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다. 캐나다 이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에서 특히 여성에게 중요한 부분은 남편과 대등한 관계이다. 굳이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까지 내세우지 않더라도, 순종적인 아내라는 고전적 미덕이 아닌, 남편과 친구 같은 관계, 파트너 같은 관계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기대한다. 물론 이처럼 변화하는 의식에 여성운동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여성운동은 여성을 가족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 개인으로 내세우고자 했는데, 요약하자면 여성이 (그리고 남성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상대와 가족을 이루거나 해체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운동이 내세우는 가족의 새로운 규범이다. 그리고 이 규범을 틀로 하는 서사의 핵심 주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과 그 개인들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셨다는 그 여성분도―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여성 단체에서 일하셨다―정작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 것을 보면, 독립적 개인과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아직 이념일 뿐, 우리의 피는 여전히 전통과 끈끈히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홀로 헤쳐 나가기에 세상은 너무 팍팍하며, 그러한 팍팍한 세상에서 그래도 의지가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운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유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정말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이상 난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사실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우리의 유전자는 마치 낙인처럼 우리 존재의 중심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발가락이라도 닮아버리는 그 유전자 말이다. 그리고 이 유전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화목한 가정의 서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현실적인 콩가루 집안의 서사든,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족의 서사는 빠질 수가 없다. 그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원초적인 가족 서사는 아마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일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가 하는 소속은 아버지에 따라 정해지고, 양육은 어머니가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유교 사회의 가족 이야기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되어서, 아버지가 없는 집안, 어머니가 자식을 양육하지 않은 집안은, 문제 있는 집안이 되고, 역으로 모든 문제는 이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안에 아버지가 없어서 혹은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유교 가족의 서사에서는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가족 서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가족이라며 혈육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킨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그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기독교 서사보다는 여전히 유교 서사가 더 강하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는 아직도 우리에게 따라붙는 트라우마 같은 질문인 것이다. 물론 가끔, 나의 백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 든든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허풍에 가까울 때가 많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금, 은, 동수저의 아버지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일쑤다. 그래도 기독교의 가족 서사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지난번 글에서도 썼지만, 기독교 서사에서 가족은 똘똘 뭉치기보다는 떠나고 흩어져야 하는 관계다.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고, 죽은 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맡기고 떠나야 한다. 가족을 뭉치는 관계가 아닌 떠나는 관계로 설정한 것은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가 공통으로 가지는 전통적 서사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의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 서사에서 떠남은 더 큰 자를 따르기 위한 떠남이고, 여성주의 서사에서 떠남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떠남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서사는 떠나는 행위 자체에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할 때 더 큰 반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가족이 굴레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저항의 서사는 큰 힘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누군가와의 애정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벗어난 후에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 하는 단계에서 이 후자의 서사는 맥을 잃는다. 그래서 한국의 엄마들은 남편과의 투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아들과의 투쟁에서는 전통 서사의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깨끗이 치운 집에 더 강력한 적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처럼, 속박의 관계는 또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는 것이다.일본 가톨릭 여성 작가 중에 소노 아야코라고 하는, 남편을 몇 년 전에 먼저 보내고 지금은 90대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 홀로 사는 이 노작가는, 부부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면, 상대를 위해서 그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은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부인을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즉 이혼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건 무슨 한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가족을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도 아니고, 자기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적 관계도 아닌,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혼은 그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다. 서로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이도록 미워질 수도 있는 게 남녀의, 부부의 관계이기에, 격렬한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화로운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찐 가족은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며 보내줄 수 있는 관계라는 설정은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다 적용할 수 있다. (부모만 자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가 가진 떠남의 서사 때문이다. 유전자의 속박과 법적 구속으로 맺어진 관계들을 떠나 더 큰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길을 가는 우리의 관계는 그분의 ‘뜻’이라는 신비 안에서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고 또한 범사에 잘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드리며 지금의 인연들을 환영할 수 있다. 이 큰 서사 앞에서 가족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어쩐지 조금은 시시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기독교 서사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작은 교회도 얼마든지 파송 교회가 될 수 있다
by Stephen Witmer
2023-08-31
예수님은 슈퍼 교인이나 대형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교회에 세계 선교의 임무를 맡기셨다. 이것이 마태복음 28:18-20의 의미이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신다. 따라서 그가 주신 임무는 그를 섬기는 모든 백성의 사명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라면 과연 어떻게 세계 선교에 기여할지 궁금할 것이다. 작은 교회라면 어디를 가도 글로벌 차원에서 선교사를 재정으로 지원할 뿐 아니라 특별 프로그램까지 운영하며 정기 선교팀을 파송하는 대형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형편이 좋은 대형 교회와 달리 작은 교회는 목회자 사례비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관리비를 지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 그런 교회가 파송 교회가 될 수 있을까?좋은 소식은 그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대사명에 깊은 관심을 품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단지 접근 방식에서 더욱 사려 깊으면 된다. 작은 교회가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1. 희생하는 마음으로 바치라작은 교회가 대형 교회와 같은 수준으로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얼마든지 대형 교회에 풍부한 자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관심이 결코 돈의 액수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큰 금액을 헌금하는 부자들 사이에서 고작 동전 두 닢을 헌금한 과부를 주목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자. 과부는 가난 중에 구제했기에 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헌금했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막 12:41-43). 바치는 재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액수가 아니라 희생 정도이다. 이 원칙은 단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가치를 부여하는 선교는 희생의 헌금이다. 작은 교회들이여, 바로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교회가 작기에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희생하며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신약에서 가장 관대한 교회의 하나가 마케도니아의 작은 교회들이었다.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습니다. …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고후 8:2-3). 희생하는 헌금에는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뛰겠다는 관대하고 헌신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작은 교회는 헌금 액수에 고민하는 대신 세계 선교에 얼마나 헌금을 늘릴 수 있는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해야 한다. 2. 창의성 있는 파트너가 되라뉴잉글랜드 지역에 더 많은 교회를 개척하겠다는 목표로 나는 지금 뉴잉글랜드 한 지역에서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다른 교회에 비하여 규모와 자원이 열악한 우리 교회는 교회를 함께 개척하기 위해 다른 일곱 개의 소규모 교회와 협력했다. Village Green Collective의 목회자들은 깊은 형제애를 키워 왔으며, 우리는 지금 새로운 교회 개척을 위해서 재정 자원을 공유하고 있다. 작은 교회들끼리 맺는 관계, 재정 파트너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세계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같은 지역의 다른 작은 교회들과 힘을 합쳐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건 어떨까? 세계 선교라는 사명이 진전됨에 따라 이런 파트너십이 여러분의 교회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지 한번 상상해보라. 파트너 교회 회원들이 모여서 팀을 만들어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를 방문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교회가 작을수록 쉽게 고립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창의성 있는 파트너십을 위한 많은 기회가 있다. 나는 최근에 미시시피주 허리케인 피해자들에게 수천 달러의 구호금을 제공하기 위해 교단과 협력한 경험이 있는 소규모 침례교회의 이중직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거기에 더해서 이 교회는 세계 선교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교단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80개의 작은 교회가 함께 헌금한다면, 그 전체 금액은 결코 적지 않다. 열방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을 보기 위해 작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새롭고 창의성 있는 파트너십의 구축을 함께 꿈꾸는 것은 어떨까?3. 관계에 투자하라세계 선교를 앞두고 작은 교회는 할 수 없는 일을 한탄하기보다는 대형 교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거기에 투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워싱턴주의 어느 작은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야말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선교사를 지원하는 데에 특히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교인이 70명인 교회의 경우에 교인 모두가 다들 선교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은 교회는 방문 선교사에게 훨씬 더 쉽게 강단을 오픈할 수 있으며, 이는 교회와 선교사와의 관계에 대한 교인들의 이해와 지식을 더 깊게 만든다. 작은 교회는 가족과 같다. 교회에 방문한 선교사에게 온 교회가 존경과 환대를 보여줄 수 있고 한 가족으로서 따뜻하게 환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워싱턴주의 목사는 어느 아프리카 선교사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인 대부분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눴다고 말했다.내가 목회하는 교회는 대형 교회에 비해 선교사를 지원할 자원은 적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관계의 성장에 창의성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교회 소그룹은 각각 선교사 한 사람을 선택해서 기도하고, 또 돌봄 패키지를 보낸다. 우리는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평신도 지도자를 포함한 팀을 보낸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에게 이보다 더 큰 격려는 없다. 4. 쉬지 말고 사랑하라작은 교회는 길게 내다 봤을 때 사랑을 나누는 데 능숙하다. 끈질긴 믿음이야말로 작은 교회의 생존 수단이다. 그들은 어쩌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깊이 사랑한다. 한때만의 사랑이 아니라 그치지 않고 사랑한다. 선교 동역자에게는 필요한 게 바로 꾸준한 헌신이다. 작은 교회가 탁월한 부분이 바로 선교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견고한 사랑이다. 나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서 선교사로 사는 가족을 꾸준하게 지원한 아주 작은 교회를 알고 있다. 그 교회 목사는 예배 시간에 종종 선교사 가정의 자녀를 포함하여 가족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면서 기도한다. 선교사 가족은 그 교회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교회 목사들이여, 우리 한번 솔직하게 말해보자. 우리가 지금 세계 선교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교인 수가 적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도록 하겠다는 열정이 부족해서이다. 예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에 우리가 품어야 할 관심이 너무도 작다.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희생의 사랑을 베풀려는 우리의 의지가 너무나도 작다.더 잘 파송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꼭 숫자로 성장해야 하는 건 아니다. 진짜 키워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열방에 대한 당신과 나의 사랑이다. 원제: How a Small Church Can Be a Sending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헛된 꿈을 쫓다 비참하게 끝난 인생
by William Boekestein
2023-08-30
“한 성공한 작가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살했다.”1961년 7월 초 어느 신문에 이런 헤드라인이 실렸을 수도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버지, 형제, 누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손으로 삶을 마감했다. 나는 그가 1935년에 쓴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Green Hills of Africa)을 읽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두 달에 걸친 사냥 사파리 이야기를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소년 헤밍웨이가 방학을 맞아 사냥을 배웠던 북부 미시간과 같은 지형에서 나도 사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책을 다 읽은 나는 많은 비평가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고 홍보된 책이었지만 여행기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시시콜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냥에 관한 세부 사항, 그리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줄거리.그러나 지금 이건 책이 나오고 거의 90년이 지나서야 쓰는 서평이 아니다. 사실상 그의 인생 리뷰에 가깝다. 헤밍웨이의 삶을 구성한 서사는 과연 무엇이었고,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값비싼 대가를 치른 큰 꿈헤밍웨이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가 평생 원한 것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꿈을 쫓았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의 첫사랑은 글쓰기였다. 소설 부문 퓰리처상(1953)과 노벨 문학상(1954)을 받은 그는 낭만적이고 장황한 빅토리아 시대 문학을 거칠고 간결한 현대 문학으로 전환하는 데에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다. 낚시와 사냥을 좋아했고 심해 낚시 기록까지 보유했다. 첫 번째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사자 세 마리, 치타 두 마리, 그리고 코뿔소와 표범 등 무려 백세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사랑”했다. 네 번 결혼했고, 기혼과 독신을 가리지 않고 여러 명과 연애를 즐긴 그는 말 그대로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이었다.그런데 그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백발이 성성한 그의 셋째 아들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보며 자신은 단지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을 뿐이라며 울먹였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깊이 나누기 위해서는 꿈까지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헤밍웨이가 사랑한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볼 때 그의 이야기에 독특한 건 없다. 자랑할 이유가 많았던 그는 자랑이 주된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가장 큰 시험에 실패한 것 같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기독교를 거부했다. 물론 어머니가 그리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두 번째 아내의 호소에도 단지 건성으로만 반응했다. 무분별한 알코올 남용이 모든 상황을 악화시켰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게 친구들의 증언이다. 능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이 없었던 헤밍웨이는 성벽 없는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잠 25:28).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을 알았던 그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종종 아들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그렇다. 좋은 사람이 되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성공을 이루어내는 힘은 자기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른 모든 면에서 헤밍웨이에게 도움을 준 재능이 그를 의롭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몇 가지 좋은 규칙을 따랐다. 처음으로 일한 신문사에서 간결한 단어와 짧은 문장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인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다른 규칙을 무시했다. 나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눅 9:23).더 안전한 야망1930년대 이슬람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는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다. “신분(caste)을 주는 뭔가, 또 뭔가 믿을만한 것…. 뭔가 당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것, 해마다 조금씩 고통받으라고 신이 주는 무언가.”그러나 그건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자신의 자연적인 생명까지 잃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무리 쫓아가도 가질 수 없는 진짜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찾는 것이다. 세상을 쫓다 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만날 수도 있다(눅 9:24-25).이 세상의 꿈을 쫓다 보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원제: Hemingway Chased His Dreams to Their Bitter 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직장 동료가 내 신앙을 무시할 때
by Miranda Carls
2023-08-29
가시덤불과 엉겅퀴_신앙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득한 일터(창 3:18) 현장의 조언을 들려드립니다.회사 동료들이 내 신앙을 비웃습니다. 그렇다고 비열하고 적대적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들은 도무지 신앙의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내가 세속 공간에서 다양한 신자들과 나누었던 여러 대화의 핵심을 다 짚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동료들이 종종 우리의 믿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의 머리는 한 가지 생각이 들어오면 거기에 덧붙여 여러 다른 생각을 쌓아갈 수 있다. 우리 팀원들이 신앙을 가진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공통점이 없다. 동료들은 아마도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착각에 빠져서 성경이나 읽고 있는 덜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 사람은 내 믿음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마음의 널뛰기는 상황에 따라 훨씬 더 심하게 오르내릴 수도 있다. 동료들이 내 믿음을 우습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고객이나 친구에게 나는 보통 이렇게 묻곤 한다. “그래? 그렇게들 생각한다고?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안다. 내 대답이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 사람을 더 성가시게 할 수도 있을 반응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깊은 사랑과 좋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사실을 제대로 분별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느낄지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것이다. 진짜 기독교가 뭔지 모르는 회의적인 동료라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다들 반응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를 대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과 부정적인 경험으로 엮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따라서 당신이 과거의 그 사람과 과연 얼마나 다를지 궁금할 수도 있다. 또는 아예 당신이 말하는 믿음이 우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 전파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불필요한 망설임에 발목이 잡혀서도 안 된다. 직장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영의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탄 원수는 관계를 망치거나 복음 전파의 기회를 원천 차단하려고 동료의 비웃는 말 또는 싸늘한 시선까지 악용할 수 있다. 사람이 두려워서(잠 29:25) 후퇴한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결코 동료들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를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올바른 관계를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가지 상기할 점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세상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를 미워한다고 놀라서는 안 된다(요 15:18). 세속 직장에서 당연히 만날 수밖에 없는 저항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투지와 더불어 굉장한 기도가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은 직장에서 당신을 쓰실 것이다. 목사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과 장사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불신자에게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지금 나는 복음을 전파하는 목회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인 우리는 세속 직장에서 일하는 독특한 소명과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 네 단계직장에서 상황을 개선하고 그리스도를 보다 더 온전하게 전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1. 씨 뿌릴 기회를 모색하라어떤 동료에게는 당신이 진짜 기독교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일 수도 있다. 언론 또는 확신에 찬 온라인 무신론자가 말하는 엉터리 예수에 그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전해야 한다. 직장 안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로 전할 기회가 당신에게 달려있다. 당신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것이고 반드시 복음의 씨를 뿌릴 기회가 생길 것이다(고전 3:6-9).2. 신앙을 변증하라많은 그리스도인이 지금 당신이 제기한 바로 그 이유로 믿음 나누길 주저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여라도 신앙을 농담으로 받아들일까 걱정한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가 전혀 근거 없는 믿음 체계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질문받을 때 믿음을 변증할 책임이 있다(벧전 3:15).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효과(중요한 이유), 복음의 실제 메시지(복음이 말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담고 있는 성경 본문의 신뢰성(믿을 수 있는 이유)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당신이 기독교 변증론을 어느 정도 공부할 것을 권한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믿음의 중요성과 신뢰성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는 데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서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되새김으로써 당신 자신의 신앙을 더 강화하는 효과까지 있을 것이다. 3. 교제에 참여하라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무시하는 바쁜 전문가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함께 걸어가는 형제자매 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이겨낼 것이다. 서로가 기도의 용사, 책임 파트너, 그리고 공유하는 성경 세계관의 렌즈를 통해 모두가 함께 겪는 도전을 논의하는 공동 공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런 공동체가 아직 없다면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라. 교회 소그룹에서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교회 친구 몇 명과 주간 커피 일정을 잡는 건 어떨까? 직장에서 점심시간이나 일과 전에 갖는 성경 공부는 어떨까? 당신의 초대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될지, 당신은 분명히 몹시 놀랄 것이다. 4. 전체적인 관점에서 직장을 바라보라대부분 전문가가 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직장에서 만나는 문제가 훨씬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도 이 부분에서는 유죄이다. 팀장이었을 때, 우리 팀이 분기별 목표를 초과 달성할 때면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확실하다고 믿던 거래가 날아갔을 때는 세상이 끝나는 것 같았다.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직장에서 믿음을 반대하는 반응을 접할 때,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단단히 유지하고 진리에 닻을 내리라. 하나님이 계신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있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줄 형제들을 가까이 두라. 예수님 안에 닻을 내리고 말씀 안에서 기도하는 데에 소홀히 하지 말라. 영성 훈련을 통해서 당신은 나무에 연연하지 않고 숲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동료들이 비열하지는 않다고 언급했다. 직장 동료들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황이 더 심각해지고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선택 사항을 기억해야 한다. 직장에서 종교 차별이 있는 경우, 인사담당자와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 그리고 상황이 당신의 영적 건강과 안녕에 계속해서 심각한 방해가 된다면, 신뢰할 수 있는 목회자나 멘토의 조언을 구하라.마지막으로, 어두운 세상 직장에서 빛이 되어 준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계시며 직장에서 당신을 크게 들어 쓰실 것이다. 원제: When Colleagues Think Your Faith Is a Jok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디도서 3장이 가르치는 선한 일
by Justin Dillehay
2023-08-28
성경에는 “행위” 특히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이 많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그러나 “선한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ESV 검색에 따르면 복수 명사 “선한 일”이라는 문구는 신약성경에서 13회 사용되었으며 목회서신에만 8번 나온다. 이 표현은 예외 없이 모범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긍정적이며 또한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선한 일을 디도서 3장만큼 엄격하게 강조하는 장도 없다. 행여 주변에 선한 일의 필요성에 관해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디도서 3장을 알려주라. 여기서 우리는 선한 일의 세 가지 측면, 곧 그 기초와 중요성과 정의를 확인할 수 있다.선한 일의 기초윌리엄 윌버포스처럼 선한 일에 평생을 매진한 사람도 한때 기독교를 “기획”(scheme)이라고 정의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거룩함의 열매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화목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한 일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이다. 이 비유를 조금 비틀면, 선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집의 기초는 아니다.바로 이것이 바울이 디도서 3:8에서 말한 요지이다. “이 말은 참됩니다. 나는 그대가,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 바랍니다.”선한 일에 힘쓰라는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임에 주목하라. 구원받는 믿음과 선한 일은 따로 노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선행의 기초가 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는 지금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구체적인 믿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8절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하라. 선한 일은 디도가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한 결과이다. 우리는 신자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이러한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이러한 것”은 무엇인가? “참된 말”은 또 무엇인가? 대답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디도서 3:4-7).선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도록 하는 유일한 메시지는 우리가 공로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말처럼 들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선한 일이 가득한 집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 일을 위한 견고한 기초부터 닦아야 한다. 선한 일의 중요성때때로 복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선행에 소극적일 때가 있다. 일단 복음만 전하면, 선한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디도서 3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좋은 일을 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14절)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 바랍니다”(8절)라고도 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설교에서는 도통 만나기 힘든 긴급성을 목격한다. 선행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다(엡 2:10). 따라서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순간 주입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잠재력이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학습된 기술이 필요하다. 대사명으로 드러난 제자도의 내용 중 일부가 다름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마 28:20).진보 또는 사회 구원을 중시하는 복음이 종종 복음 자체를 제외하고 오로지 선행만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게 복음을 중시하는 개혁주의는 복음은 강조하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헌신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 전자는 기초를 놓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이고, 후자는 기초만 쌓고 아무것도 세울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둘 다 디도서 3장에 반하며, 어느 쪽도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리를 빛나게 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다. 선한 일의 정의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알겠어요. 선한 일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게 정확하게 뭡니까?” 감사하게도 디도서 3장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선행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실천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나는 이 정의를 디도서 3장 속 몇 군데에서 찾아냈다. 8절에서 바울은 선한 일에 관해 말하면서 “선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논쟁”이나 “율법에 관한 싸움”(9절)과 달리 선행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리고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교우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을 마련하여 줄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필요를 알고 사랑으로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드러내는 그리스도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다.우리는 13절에서 구체적인 예를 본다. “서둘러 주선하여 율법교사인 세나와 아볼로를 떠나 보내 주고, 그들에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게 해 주십시오.” 복음을 위해 교회에서 누군가를 파송할 때, 그들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지 확인하라. 이것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위해 행한 일이며(빌 4:15-18), 또한 바울이 세나와 아볼로를 위해 그레데 교회가 행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한 일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물질적인 일일 수도 또는 영적일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다음은 몇 가지 예이다. •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나쁜 꿈을 꾸고 새벽 두 시에 깬 네 살 아이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아주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자기네 말로 쓰인 성경이 필요한 종족은 여전히 많다. 언어학을 공부하거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워 그들에게 성경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기도와 긍휼이 필요하다. 그들을 안고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아기들은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싼 오물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긴급한 필요이다. 부모라면 아동 센터에 가서 방치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번 확인해보라. 그러면 앞으로 기저귀를 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그리고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며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 따라서 사업의 재능을 활용하여 회사를 세우고 의미 있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회사에는 믿을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 술에 취하지 않고 제시간에 출근하고, 또 상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시민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따라서 총격범을 사살하는 경찰관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경찰관, 군인, 변호사, 사회복지사가 되어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모두 다 선한 일이다.선한 일을 향한 열정을 갖는 것“선한 일”은 결코 눈을 가늘게 뜨고 힘들게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다. 밭은 무르익었고, 필요는 넘치며, 기회는 어디에나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누구도 게으르게 놀 권리가 없다”라고 했다. 세상에는 항상 “깨뜨려야 할 무지, 고쳐야 할 잘못, 공급할 부분, 완화해야 할 불행”이 넘친다. 선한 일을 한다고 당신이 꼭 유명해지는 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윌버포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이 땅에서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조지 엘리엇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좋은 일은 부분적으로 역사에 전혀 남지 않은 행위로 인해 가능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은 다 숨겨진 삶을 신실하게 살았고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무덤에서 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덕분이다.”그러나 복음은 언젠가 그 무덤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부활하고 이름 없던 그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의해서 온 우주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배고플 때 네가 나를 먹였다. 내가 벌거벗었을 때 네가 나를 입혔다.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찾아주었다. 내가 무서울 때 네가 나를 위로했다. 내가 더러워졌을 때 네가 나를 씻어주었다. 내가 무지할 때 네가 나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위협받을 때 네가 나를 지켜주었다. 내가 고아였을 때 네가 나를 입양했다. 내가 목적을 모를 때 네가 나를 인도했다. 내가 실직했을 때 네가 나를 고용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네가 복음을 전했다. 나는 인기가 없었지만, 너는 기꺼이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삶이 헛되지 않았고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딛 2:14) 사람으로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선한 일에 더 헌신하는 방법을 배우자. 원제: Good Works According to Titus 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by 최창국
2023-08-26
12세기의 영성가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는 신자의 영적 성숙에 따라 경험하는 하나님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하였다. 제1 단계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기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 사랑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온 인격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마 22:37-40). 제2 단계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을 받고, 환난 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타산적 사랑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기복신앙에 머무르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이기도 하다.제3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나의 영적인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그 자체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제4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 알아 나를 사랑하는 단계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제2 단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여기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둘째 단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창조주의 사랑에 의해 압도된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계시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충만한 자신을 의미한다. 제2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지만, 제4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내가 가진 소유나 명예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나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나의 자랑할 만한 것이 내 자존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다.버나드가 제시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가리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정체성의 덫에 빠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모든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가 계시된다고 이해하고, 모든 영적 유혹은 이 근본 진리를 의심하고, 그 밖의 다른 정체들을 믿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행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눅 3:21-22)는 말씀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깊은 방식으로 체득하게 된다. 나우웬에 따르면, 광야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눅 4:1-13)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진정한 정체성을 앗아가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의 진짜 자기(true self)를 가짜 자기(false self)로 대체하려고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은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자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자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 권세에 절하게 만들 수 있는 자다”라고 유혹하였다. ‘네가 하는 것이 곧 너다. 네가 가진 것이 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다’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라고 선언하신다. 나우웬은 영적 삶의 가장 큰 적은 자기 거부라고 진술한다. “삶의 가장 큰 덫은 성공이나 인기나 권세가 아니라 자기 거부, 자신의 참 존재를 회의하는 것이다. 성공과 인기와 권세도 과연 큰 유혹일 수 있으나 그 유혹의 질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 우리를 무익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를 믿게 되면, 성공과 인기와 권세가 어느새 매력 있는 해답으로 다가온다”(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 51).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을 망각할 때, 수많은 형태의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된다. 자기 거부나 부정의 유혹은 때로는 교만의 형태로 때로는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부정은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나친 자만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거부는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버나드가 설명한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기복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진짜 자기를 가짜 자기로 대체하기 쉽다.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자기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감각적인 소유와 성과와 인기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자기를 가짜 자기로 쉽게 대체한다. 물론 우리에게 소유와 성과와 인기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자기 부정의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 가짜 자기로 대체 될 때 무엇보다도 낮은 자존감에 노출되기 쉽다. 가짜 자기는 우리를 끊임없는 욕망과 비교의 터널로 끌고 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버나드가 제시한 제4 단계의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단계다. 이 사랑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나 소유에 따라 우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 사랑에 이를 수 없고, 감각적인 우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게 되므로 가장 복된 자기 사랑이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도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by Andrew Voigt
2023-08-25
정통 교리와 전통 기독교 윤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인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점점 더 적대시하는 예술 분야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은 후원자 또는 예술인으로서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상황은 지난 세기 정도에 들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음악, 문학, 미술,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구현하는 성공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건 이제 당연한 게 아니라 큰 놀라움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과감하게 예술 분야에 투자하기에는 예술이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정통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는 잠재력을 지닌 가장 강력한 영역이 바로 예술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분야를 마냥 무시하는 게 맞을까? 놀랍게도 예술 분야에 관한 한 교회의 입장은 무관심 내지 완전한 포기이다.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불어넣는 예술을 창조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역에서 멀어졌고, 그럴수록 예술은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우리 주변에 널린 예술의 풍경에서 그리스도를 거의 볼 수 없는 건 이제 놀랍지 않다. 예술과 아름다움처럼 강력한 대상은 초월적인 진리와 분리될 때 도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은 예술계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을 비난하고 항의하면서 더 멀리 후퇴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다시 그 무대에 뛰어들어 변명이 필요하지 않은 진리 선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하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신앙 해체를 겪는가지난 수십 년 동안 CCM 장르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케빈 맥스(DC 토크), 데릭 웹(캐드먼스 콜), 조너선 스타인가드(호크 넬슨)의 신앙 해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언급하자면, 내게 맥스의 해체는 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한때 인터뷰를 즐겼던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의성과 상상력, 흔히 기독교 예술에 결핍되었다는 이 두 가지를 구현한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모범이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해체주의가 그토록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적으로 뛰어난 많은 그리스도인일수록 경력 초기에 아무리 신앙이 신실해 보일지라도 현대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라는 고도로 세속적인 영역에 오래 머물수록 점차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거의 불가피한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음악 산업에서는 여행과 투어가 중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주변 사람 대부분에 반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또 다른 도전은 CCM이 고도로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이 되었다는 점이다. 정통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는 진짜 기독교 노래보다는 신학적으로 모호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영감을 주는 노래일수록 많은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CCM에는 정말로 잘 봐줘서 “기독교적 음악”이지 문화나 시장의 압력이 조금만 가해지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취약한 신앙을 가진 예술가로 넘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기독교 예술가는 각종 논쟁에 침묵으로 일관할까? 기독교 예술가라고 공언하는 인기 있는 예술가들의 또 다른 경향은 낙태나 LGBT+ 문제와 같은 논란이 되는 문제에 관해서 회피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앙 해체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이들은 일부 청중이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철저하게 안전한 신앙만을 추구한다. 그들의 두려움 중에는 근거를 가진 것도 있다. 기독교 신앙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오늘날 세속 문화에서 옹호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과 공공연하게 연관되는 것은 온라인 분노, 팬들의 반발, 취소 가능성까지 불러일으킨다. (비신자까지 포함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도덕성과 윤리에 대한 모든 견해를 공유해야만 할까? 아니다. 하지만 공인이라는 위치를 단지 부담(“내가 행여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어쩌지?”)으로만 여기는 대신에 은혜롭게 진실을 말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술 분야의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동기가 청중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그들의 신실함을 높이실 거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정통 견해를 타협하거나 숨기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사례가 바로 존 쿠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스킬렛(Skillet)은 몇몇 멤버들의 굴복하지 않는 입장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양극화 밴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주하고 주류 공연과 함께 투어를 진행 중이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신실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에 미움받을 거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필요한 것: 변명하지 않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 모든 가수가 스킬렛만큼 큰 관객층을 확보하는 건 아니다. 쿠퍼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 쿠퍼와 같이 충실한 제자를 키우는 건 결코 쉽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명성이나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쿠퍼처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좀 더 담대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창작 활동에 대한 지지가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의 다른 영역에는 명백한 보수 기업 그리고 미디어 기업을 위한 큰 시장이 존재한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조직과 사역, 예술가들의 지원을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C” 레이블(Christian)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보다는, 신앙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좋은 것이라며 당당하게 믿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싶어 한다. 단순히 낙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노력으로 생명의 기적과 기쁨, 생명의 신성함을 아름답게 찬양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을 상상해보자. 이혼과 불신앙으로 인해 분열되지 않은, 온전하고 건강한 가족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LGBT+의 자존심에 맞서 단순히 전통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옹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결혼이라는 유대 안에서 거룩한 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기독교 예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멀리 보기그리스도인은 멀리 보아야 한다. 예술의 포기는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 없다. 기독교가 다시 한번 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려면 수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기독교가 예술 분야에서 한 번 더 영향력 있는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 신앙 예술가가 취할 몇 가지 조치가 있다. 1. 좋은 예술을 더 가치 있게 만들자.현대 기독교 예술은 대부분이 기껏해야 평균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수준 이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세속적인 상대를 복음화하겠다는 욕심으로 세속 예술을 모방하려 애를 쓴다. 그 결과 우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아름다운 예술이 가진 힘의 가치, 그 자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술이라는 언어 자체에 더 능숙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복제하기보다는 관객이 잠시 멈춰서 생각하고 영원을 엿볼 수 있도록 하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2. 인기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을 목표로 하자. 뛰어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라. 하룻밤 사이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부지런히 인내하라. 좋은 예술을 창조하는 데 충실하고,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충실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라. 플랫폼의 크고 작고와 관계없이 성공은 그 자체로 이뤄질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핵심이다. 3. 도구를 맘껏 활용하라. 기독교 예술가들에게 좋은 소식은 그들이 상상하는 작품을 관객의 손에 전달하기 위해 더 이상 음반사, 에이전트, 미술 큐레이터 및 기타 문지기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플랫폼 및 기타 다양한 도구로 인해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당신은 화가인가? 아니면 스케치 아티스트인가? 업무용 인스타그램을 만들어보라. 혹시 작곡가인가? 집에서 노래를 녹음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에 바로 출시하라. 당장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세상의 관심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라.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최고가 될 때까지 당신 자신을 채찍질하라.원제: Can Theologically Conservative Christians Flourish in the Ar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by Brian Tabb
2023-08-24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시편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 1편은 두 가지 (단 두 가지) 삶의 길을 제시한다: 세상의 길과 말씀의 길.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들을 쫓아다닐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패망에 이르는 넓고 편한 문이 열려 있다(마 7:13).겨가 아니라, 나무가 되어라.시편 1편의 “악인”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오로지 인간의 관점, 세상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성공과 인기와 번영의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시편 73편을 보라). 그렇지만 시편 1편은 우리가 궁극적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게 한다: 악인의 번영은 덧없으며, 이는 그들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기 때문이다.달리 선택해야 할 삶이 있다. 하나님의 교훈에 의지하며 즐거워하는 삶이 그것이다. “의인”은 세상의 지혜와 가치의 빈곤을 알아보며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삶은 곧 신앙의 삶이다(예레미야 17:7-8을 보라). 이러한 삶은 지금 그리고 영원히 복되고 열매 맺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이끈다. 아름답고, 튼튼하고, 물이 풍족하고, 열매 맺는 나무를 그려보라(3절). 바람에 나는 겨가 아니라, 이런 나무가 되어야 한다. 꾸준한 생각과 따뜻한 응답2절이 핵심 구절이다.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과정에 주목하라: 즐거워함, 그다음에 묵상. 즐거워함은 무언가의 또는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런 반응이다. 하지만 묵상은 신중하고 꾸준한 사고를 요한다. 묵상은 실행과 의지가 모두 필요하다.잘 이루어진 묵상은 즐거움을 제공하고 강화하며 지속시킨다. 묵상은 말씀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에 더욱 깊이 파고들게 한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이 새로워지고 변화가 일어난다”(롬 12:2). 묵상은 우리의 뿌리가 더욱 깊이 내려가도록 하여, 말씀의 생명수를 더욱더 많이 흡수하게 한다. 묵상 향상하기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분산되어 있다. 우리는 멀티태스킹, 서핑, 스키밍에 능하다. 그러나 묵상은 너무나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의식적으로 향상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되도록 일관된 시간과 장소와 계획을 찾자. 그다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집중해서 읽자. 다시 읽고 또 읽자. 소리 내어 읽자(시편 1:2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는 큰 소리로 읽는다는 뜻이 들어 있다). 기도하는 자세로 읽자. 손에 펜을 들고 읽자. 읽은 본문을 암송하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고 내가 본 것을 함께 나누자. 좋은 주석서를 활용하여 성경을 연구하자. 성경 묵상 계획을 세워 기도하고, 나의 계획을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들려주자.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가치 안에서 즐거워하고 의지적인 묵상을 통해 그 즐거움을 지속해 나가고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당신에게 시편 1편의 복이 함께하기를. 원제: Psalm 1: When Delight Overcomes Distrac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모든 목회자가 강해 설교를 말하기 시작했다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08-23
월터 카터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하기까지는 이 년이 걸렸다. “우리 흑인 교회에서는 말이죠, 부르심을 받으면 바로 즉시 설교 기회가 생깁니다.” 카터도 다르지 않았다.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는 청년부 지도자로 바로 사역을 시작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일반 성도에게까지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신학교를 간 적이 없는 카터의 말이다. “제가 틀리지 않았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했어요. 그리고 가르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맡은 건 주로 주일학교 공부 수준의 주제였어요. 세 가지 포인트만 잘하면 되는 거죠. 시작을 잘하고, 기발한 예화를 들고, 그리고 결론을 열정적으로 맺는 겁니다.” 약 15년 후, 그는 시카고에 있는 Union Tabernacle Missionary Baptist Church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위원회 주도에서 장로 주도의 교회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던 카터는 Nine Marks of a Healthy Church(건강한 교회의 아홉 가지 지표)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나는 교회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인들이게 이 책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첫 번째 지표인 강해 설교는 나의 몫이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그는 H. B. 찰스의 교회에서 열리는 설교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여러 선생에게서 배우고 싶었던 그는 데이브 헬름의 클래스에 가장 먼저 앉는 실수(?)를 저질렀다.“한마디로 나는 완전히 매료됐어요. 사흘 내내 하루 종일 그의 수업을 들었어요. 다른 사람 클래스는 아예 참석도 안 했지요. 완전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카터의 그날 경험은 사실상 헬름 자신이 25년 전 영국인 목사 딕 루카스로부터 강해 설교를 처음 배웠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헬름의 말이다. “내 속에서 전구가 켜진 것 같았지요.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시려는 명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 같았습니다.”단지 배우는 데에 만족할 수 없었던 헬름은 2001년에 그와 몇몇과 힘을 합쳐서 루카스의 원리를 전파하기 위한 Charles Simeon Trust(CST)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전구는 점점 더 많이 켜졌다. “2007년 다시 시작했을 때는 워크숍은 고작해야 10개 남짓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여성을 위한 주제만 25개를 포함하여 전체 150개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CST의 여성 워크숍 책임자인 콜린 맥패든의 말이다.워크숍 책임자 케빈 워커에 따르면 지난 일 년 동안 전 세계에서 6,300명 이상이 워크숍에 참석했다. 거기에 더해서, 온라인 참석자도 6,300명에 이른다. 몇 달 전 나이로비에서 모임을 연 개혁파 케냐인 크리스 키아기리의 말이다. “여기 와서 이런 경험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카터가 말을 이었다. “나는 우리가 대각성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의 필요성을 분별하도록 우리를 떠밀었습니다. … 그 결과 지금 복음이 역사하고 있습니다.”무의식적 무능CST를 시작한 것은 헬름과 College Church의 켄트 휴즈 목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해도 그들이 모르던 게 있었다. 설교에 있어서 정작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요즘 CST 팀은 그것을 “무의식적 무능”이라고 부르는데, 4단계 교육의 첫 번째 과정이다. 물론 당시에는 휴즈나 헬름도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았다. 헬름이 말하는 휴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성경에 푹 빠진 사람”이다. 헬름은 일리노이 휘튼에 있는 College Church에서 휴즈의 직원으로 일했다. 휴즈와 헬름은 모두 성경 속 하나님의 계시가 설명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모세가 십계명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바울이 청중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가르쳤던 시절부터 이어진 사실이었다.그리고 두 사람 모두 설교가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수준의 역량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대부분 설교자가 성경을 사용하는 형태를 보면 일종의 주제-교리적 설교라고나 할까요?” 미국 장로교 서기이자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의 저자인 브라이언 채펠의 말이다. 설교자는 용서, 섭리, 결혼 같은 주제를 일단 먼저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성경 구절과 철학을 조사함으로 일종의 교리 설교를 발전시킨다. “시사적 메시지가 항상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도 종종 깊고 아름다운 진리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그러나 채플도 The Gospel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인 돈 카슨의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잠재하는 위험을 본다. 카슨의 말이다. “주제 설교에서 당신의 의제를 결정하는 건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 주제는 설교자의 상상을 자극하는데, 현재의 필요 또는 이 주제가 필요하다라는 인식 때문이죠.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을 거치면서 ‘정체성’에 관한 설교가 얼마나 많이 선포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20년 전만 해도 그 주제로 설교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현재 논의되는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유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주제의 우선순위가 성경 말씀의 인도함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슬픕니다. 이게 반해서 좋은 강해 설교는 교인 중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를 놓고도 충분한 성경 자료를 바탕으로 다루는 일입니다. 그게 바로 설교자의 사명입니다. 인기 있는 주제로 구성된 설교 시리즈는 거의 항상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는 일부 주제를 무시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는 순간,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아사 상태에 빠뜨립니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교회가 주일 아침 예배는 복음 전도를, 주일 저녁 예배는 성숙한 신자들과 함께하는 더 깊은 성경 연구 시간이었다는 게 카슨의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델이 하나 간과하는 게 있는데, 죄를 자각하고 용서를 확신하는 기본적인 복음 메시지는 가장 성숙한 신자에게조차도 정기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복음이 단지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해당하는 ABC가 아닙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전부, A부터 Z까지입니다.” 카슨은 친구 팀 켈러를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면에서 복음은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그 포용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최근 수십 년 동안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가 채택한 모델이다. 그런 교회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쉬운 방법으로 주제 설교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설교자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비록 4, 50년 동안 교회를 다니며 수천 편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교회가 이사야나 요한복음 또는 로마서가 말하는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영영 모르는 신자들로 넘칠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는 바른 방법을 가르칩니다!” 카슨의 주장이다. 주제 설교에서 강해 설교로딕 루카스가 1991년 시카고 지역 목사들의 초대를 받고 방문했을 때, 설교의 발전을 갈구하던 휴즈와 헬름은 그를 만나러 갔다. 그때까지 루카스는 이미 삼십 년 동안 런던의 St. Helen’s Bishopsgate에서 강해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의 교회는 부흥했고, 사업가들을 위한 성경 강의도 성공적이었다. 오 년 전에 그는 목회자를 위한 설교 세미나 Proclamation Trust를 시작했다.“딕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몇 가지를 살펴보았고, 켄트와 데이브,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에게 강해 설교라는 게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켰습니다.” CST의 사역 책임자인 로버트 키니의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지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송가가 아니라는 게 루카스의 주장이었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보면 사실상 그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임을 알 수 있다.“딕은 제대로 본문을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특정 부분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가 풀어내는 논증 전체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이전에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 우리가 하는 설교는 종종 마치 특정 구절을 독립된 내용으로 다루면서 설교했으니까요.”루카스가 보여주는 성경 관찰 방식은 짜릿하고 생명을 주는 경험이었다고 헬름은 고백했다. 더 배우고 싶었던 그는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가는 다섯 시간 동안 루카스의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단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강해 설교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또 쉽다. 가장 기본적으로 말해서, 내가 정한 주제를 뒷받침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찾는 대신에 성경 구절로부터 내용을 뽑아서 설교하는 것이다. 헬름은 강해 설교를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텍스트의 모양과 강조점이 설교의 모양과 강조점을 알려줄 때입니다.”해당 구절이 원래의 맥락에서 원래의 청중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파악한 다음에, 그 메시지를 지금 청중에게 적용함으로써 강해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게 헬름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레위기의 율법이든 요한계시록 속 말 탄 사람이든, 일단 그 구절이 어떻게 성경의 요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요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경의 요점이라는 측면에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목회자에게 콜린 스미스가 제안하는 방법이 있다. “이슬람 모스크나 유대교 회당에서 당신이 설교하면 과연 쫓겨날까요?” “나는 …. 내가 전에 했던 설교 중 일부는 기독교의 내용이 아니라(sub-Christian)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몇 년 전 Simeon Trust 모임에서 콜린 스미스가 말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한 경우에, 하나님과 삶, 성경, 경건 등에 관해 많은 좋은 것을 말했지만, 그중에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명확하게 인도하지 못한 설교가 꽤 있었습니다.”따라서 훌륭한 강해 설교는 항상 성경의 요점인 예수님을 가리켜야 한다. 의식적 무능“헬름과 휴즈는 오후 시간 어느 시점에 자기들이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다가, ‘이봐, 우리가 지금 문제가 많아, 배울 게 너무 많아’라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은 더 나아지겠다는 데에 열광적으로 헌신했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많이 배웠다. 그 결과 전에는 결코 다루지 않았을 구절을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 무엇을 설교할까 하는 걱정을 벗어던졌고,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속에 성장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그 후 오 년 동안 휴즈와 헬름은 되도록 많은 시간을 루카스와 함께 보냈다. 헬름은 런던에서 반년의 안식년을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사역을 좋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교사로서 딕의 사역은 재현 불가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딕은 사실 약간 특이한 사람이었지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거의 유기적으로 나타나는 건데요. 그렇다고 거기에 반드시 무슨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고, 왜, 그리고 어떻게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이에요.”좀 이상하긴 해도, 정작 거기에 설명을 하는 건 헬름이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는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루카스의 작업을 역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과정을 인턴들에게, 또 연례 Wheaton Workshop에서 다른 목사들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수업을 강화하는 작은 과제까지 만들었다.“2000년까지 약 백 명의 사람들이 Wheaton Workshop에 왔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그들이 가졌던 유일한 불만은 시카고가 일부 참석자에게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그렇다 보니 헬름은 지역에 기반을 둔 워크숍과 인턴십, 목회 레지던트 및 자료 제공 등의 사역 잠재력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 헬름과 공동 목사 존 데니스, 휴즈,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학습이 가능한 게 설교다’라고 믿었던 19세기 목사의 이름을 딴 Charles Simeon Trust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시므온은 죽기 전까지 영국 성공회 목사 3분의 1에게 설교를 가르쳤다).그 후 삼 년 동안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헬름에게 CST를 운영하는 건 전혀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었다는 게 키니의 말이다. 게다가 헬름은 거기에 시간을 쓰기에는 다른 사역이 너무 바빴다. 헬름과 데니스는 1998년 시카고에 Holy Trinity Church를 세웠고, 2002년에 두 번째 교회 캠퍼스를 시작했습니다.마침내 헬름은 모든 사역을 혼자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키니를 고용했다. 사역의 인수인계는 길지 않았다. “이게 캘거리에서 워크숍을 주최하는 사람 전화번호고, 이게 Spokane에서 주최하는 담당 전화번호야. 그리고 리치먼드 쪽은 전화번호를 찾아봐야 해. 아, 그리고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필 라이큰 목사가 그쪽에서 시작하고 싶어 하던데, 잘 도와줘.” 키니는 헬름의 인수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의식적 유능처음에 키니가 하려고 한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 진행되는 대면 수업을 중심으로 루카스의 Proclamation Trust를 따라 CST를 패턴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영국은 전국이 두 시간 거리 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니지요. 둘째, 미국 교회는 영국 교회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자격증(credentials)을 강조합니다.”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공인된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목회자를 기대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러나 학위는 CST가 제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원래 계획했던 책, 팟캐스트, 그리고 기사 등의 자료를 제공할 시간이나 인력도 없었다.그래서 키니와 헬름은 집중 영역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사용한 은유는 스프링 트레이닝입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올스타든 신인이든 매년 2월에 애리조나나 플로리다로 가서 기초부터 다시 배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설교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확신과 기술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키니의 말이다. 전임 목회자들이 수업받을 수 있도록, 그들은 지역 사흘간 진행되는 워크숍과 온라인 사전 녹화 수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식 방법을 사용했다.남아프리카에서 Simeon Trust 워크숍을 가르치는 머빈 엘로프의 말이다. “많은 달 동안 저는 신학교에서 설교 수업을 진행했는데, 주로 말을 하는 건 나였어요. 결국 학생들이 나에게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질문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원리를 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내게는 큰 기쁨입니다.”CST 도구의 명확성과 의도성이 “학생들이 정확하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데 정말로 큰 도움을 줍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나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엮어 놓은 게 아닙니다. 이 훈련을 통해 전에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는 성경 구절과 레위기 같은 책까지도 다룰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어려운 성경 중 하나가 까다로운 이미지로 악명 높은 요한계시록이다. 카터가 이어서 말했다. “방금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CST 워크숍을 인도했습니다. 내가 이 시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 그만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그게 그가 목격한 유일한 변화가 아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적절하게 설교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눈을 뜨게 된 것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카터의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회중은 성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의 설교에 더욱 뜨겁게 반응했으며, 교회가 장로들을 선임하는 데에 관해서도 더 마음을 열었다.확장설교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CST 워크숍도 크기 시작했다. 2008년이 되자, 여성 사역자들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이 워크숍을 여성에게까지 확대해야 할지를 이사회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패든은 성경 이해와 교육에 대한 여성 워크숍을 진행했다.기본적인 골격은 같았지만, 설교 대신에 성경 공부, 커리큘럼, 자녀 교육 커리큘럼에 더 많은 내용을 할애하도록 내용이 구성되었다. “남녀 워크숍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여성 워크숍은 여성 성경 교사가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치길 원합니다. 남성 워크숍이 신학교 교수가 아닌 설교 목사가 이끄는 것처럼 여성 워크숍은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강해를 가르치는 여성이 주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보완주의를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워크숍에는 여성을 교육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맥패든의 말이다. 첫 번째 워크숍이 매진되었다고 맥패든이 말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거, 더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워크숍을 두 개로 확장했습니다. 계속해서 확장했고 이제 내년에 제공할 여성 워크숍은 25개입니다.” CST의 모든 워크숍이 미국에서 하는 건 아니다. 2013년이 되자, 쿠바와 인도, 케냐의 목회자들로부터 지역 워크숍에 대한 요청이 들어왔다. 국제 워크숍의 경우에 참석자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에 키니는 이사회의 의견을 물었다.“전 세계에 오픈하자”라는 게 이사회의 결정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2개국에서 31개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케니의 말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이 운영하기 어려운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면으로 이루어지며,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조만간 CST 대면 워크숍이 열릴 예정이다. 비슷한 시기에 헬름은 Expositional Preaching: How We Speak God’s Word Today를 출판했다. “이 책의 출간은 확장할 준비가 된 성숙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키니가 말했다. 출간과 국제 사역을 오가며 “사역의 모든 부분이 빠르게 증가했습니다.”2019년까지 CST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합숙 교육을 다시 한번 살펴볼 준비가 되었다. 가을에 시카고 코스를 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에 직면했다. 축소“당연히 대면 행사는 불가능해졌습니다.” 키니가 말했다. CST 직원은 온라인 워크숍으로 전환했지만 출혈을 멈출 수 없었다. 시카고 과정 등록이 어려움에 빠졌고, CST는 35개의 워크숍을 취소해야 했다. 이것은 그해에 제공되는 과정의 40퍼센트 이상이었다. 2021년에는 71개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온라인 과정 등록자도 줄었다.프로그램 감독을 위해 시카고로 이사한 제레미 닉스의 말이다.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6개월 후에 코로나를 만나는 것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최악이었어요. 지난 사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회복이 가능할까? 아니면 CST는 단지 찻잔 속 태풍에 불과했던 걸까? 다시 확장믹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자를 채우고 교육 과정 준비는 엄청나게 힘들지만, 매일 하는 수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입니다. 하루 종일 내 속에서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는 게 신기해서 나 자신을 몇 번이나 발로 찹니다. 정말 최고예요.” 천천히 등록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로나는 실로 많은 방식에서 세상을 바꿨습니다.” 믹스의 말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교회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모든 목사가 자신의 설교를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코스에 온 사람들 가운데 세 명은 자기네 학교 졸업생이 하는 설교를 듣고서 ‘어디서 그런 법을 배웠지?’하고 물어서 온 사례가 있어요.” 믹스가 말했다.2022년, CST 워크숍 등록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나이로비에서 라스알카이마에 이르기까지 설교를 배우려는 목회자들이 다시 대면으로 모였다. “훈련이 참석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관해서 수천 개의 간증문을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일 년에 15-20번 워크숍에 참석합니다. 비행기 타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목회를 해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선한 눈으로 접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키니의 말이다. 탈진 직전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동기를 찾고, 외로운 목회자들이 동지를 찾고, 고군분투하는 목회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 모습을 키니는 목격했다. CST는 또한 그들 주변에서 더 큰 움직임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강해 설교가 크게 부활했습니다.” 채플이 말했다. 그는 2005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무미건조하게 주석이나 빠는 게 강해 설교라는 개념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본문에 충실할 뿐 아니라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본문을 보는 것이 강해 설교라는 점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측면에서 점점 더 많은 방법을 발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The Gospel Coalition 이사로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텍스트의 설명과 더불어서 복음이 어떻게 동기를 부여하고 또 적용까지 가능하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설교에서 큰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복음이 없는 설교는 단지 바리새인일 뿐입니다.”시카고에 있는 카터의 교회는 또 다른 일곱 명을 CST 워크숍에 보냈다.카터는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하게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일로 인해 내 인생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할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헬름의 말이다. “나에게는 CST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핵심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 같이 미약한 인간에게 어울리지도 어떤 영향력이 있다면, 그것은 다 주님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그가 사용하는 도구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모든 찬양은 오로지 주님만이 받으셔야 합니다.”원제: Why Everyone Started Talking About Expositional Preac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다
by Steve Bateman
2023-08-22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 설교는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또는 그즈음에 있었다. 마태복음 23:1-39에 나오는 설교 내용은 위선, 특히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교만한 설교자에 대한 경고이다. 4월 3일 금요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가 역사상 가장 비범한 겸손함을 보여주며 예루살렘 도성 밖에서 처형당했다.그의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호흡 사이에는 딱 사흘이라는 간격이 있었다.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달리 우리 대부분은 무슨 설교를 할지 알 수 없다. 다음은 역사에서 만나는 몇 번의 사례이다. 장 칼뱅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개혁을 이끈 칼뱅은 성경 48권을 주석했다. J. I. 패커는 기독교강요를 “문학계의 불가사의”라고 불렀다. 이 모든 집필 과정에서도 칼뱅은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빡빡한 설교 일정을 유지했다. 주일에 두 번, 주중에 여러 번 설교했는데, 평균 “두 주마다 총 열 번의 새로운 설교”를 했다.1564년 2월 6일, 칼뱅이 의자에 앉은 채로 교회로 옮겨졌을 때, 모든 사람은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오도르 베자는 칼뱅이 “천식 때문에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설교했다고 썼다. 육체의 고통과 연약함 속에서 이 위대한 개혁자는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나는 그날 칼뱅이 설교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단, 그는 임종을 앞두고 여호수아서 주석을 완성했다. 그 서론에서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재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키셨다가 없애시기도 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러나 그분은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항상 준비하신다. … 그의 강력한 능력은 결코 사람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보기시에 좋은 적절한 후계자를 때에 그때그때 맞춰서 찾아내신다”라고 덧붙였다. 며칠 후 1564년 5월 27일에 칼뱅은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리고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무덤에 묻혔다.존 플라벨칼뱅의 사역은 대부분의 미국 목회자라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환경에서 무려 41년 동안 설교한 존 플라벨에게 영향을 미쳤다. 옥스퍼드에서 교육받은 그는 성경 강해와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했다. 그러나 찰스 2세 치하에서 국가는 설교 내용과 예배 형식, 그리고 모임 장소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국가의 정책에 반대했던 플라벨은 교회에서 파문당했고, 5마일 이내 교회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든, 다른 사람의 집에서든, 밤늦은 숲에서든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돌보며 여러 해 동안 불법 설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를 포함한 후세의 설교자들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여섯 권의 두꺼운 책을 출판했다. 1691년 6월 21일, 엑서터를 방문한 플라벨은 고린도전서 10:12을 설교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닷새 후에 그는 64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조나단 에드워즈플라벨은 “모든 미국 신학자 중 가장 뛰어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가 살아있는 동안 설교집 17권이 출판되었지만, 그 이후로 더 많은 설교집이 나왔다. 그의 모든 작품은 현재 예일대학교출판부(Yale University Press)에서 출판한 26권에 담겨있다. 에드워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잡힌 죄인들”로도 유명하다. 1758년 1월 15일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에서 행한 고별 설교는 예일 컬렉션에 포함된 그의 마지막 설교이다.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1:36이었다. 현존하는 내용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제시하는 에드워즈 특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는 회중에게 모든 사람이 심판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날에는 “두려운 일이 많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장차 올 그 두려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권고했다. 두 달 후, 천연두 접종에 실패한 그는 1758년 3월 22일 54세의 나이로 프린스턴에서 죽었다. 조지 휫필드역사가 마크 놀은 영국 태생의 조지 휫필드를 “조지 워싱턴 이전까지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인”으로 평가한다. 설교를 들으려고 온 군중을 수용할 건물이 없었던 당시에 그는 종종 옥외에서 설교해야만 했다. 평생 그는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두 대륙에 걸쳐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무려 천만 명을 넘었다. 1770년 9월 29일, 뉴햄프셔 엑서터에서 휫필드는 무려 6,000명의 청중을 향해서 두 시간 동안 노천 설교를 했다. 그 설교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외쳤다. “공로로! 공로로! 사람이 공로로 천국에 간다고? 차라리 모래로 만든 줄을 타고 달에 오르라고 하십시오.” 그날 밤 피로에 절어서 잠자리에 든 55세의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찰스 스펄전역사상 설교가 가장 널리 읽힌 설교자인 스펄전은 다른 어떤 목회자보다도 설교가 많이 인용되었다. 2,500만 단어로 이뤄진 그의 설교가 지금 63권의 인쇄본으로 제공된다. 이 런던 목사의 삶은 고통, 반대, 상실, 우울, 육체의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극심한 고통을 주는 통풍을 “바이스에 발을 넣고 최대한 조이는 아픔”으로 묘사했다. 그러함에도 그는 주일마다 강단에 서서 설교했다. 1891년 6월 7일, 병든 스펄젼은 사무엘상 30:21-26을 본문으로 그의 마지막 설교를 선포했다. 그가 평생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으로부터 교인들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믿음이 적은 자들, 낙담한 자들, 두려움이 많은 자들, 마음이 연약한 자들, 노래하는 것보다 한숨을 더 많이 쉬는 자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영적 투쟁에서 항상 패배하는 자들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자녀에게 사랑과 은혜와 호의를 베푸실 것입니다.1892년 1월 31일,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곳에서 회복 중이던 스펄전은 57세의 나이에 통풍과 신부전으로 죽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대부분의 런던 교회가 쇠퇴할 때도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er Chapel)은 로이드 존스의 지도력 아래에서 성장을 구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래, 그의 사역은 그곳에서 3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그는 강해 설교를 고집했으며, 이를 “타오르는 논리”라고 정의했다.로이드 존스는 영국 전역에서 설교하면서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1980년 5월 18일, 그는 웨일스의 애버리스트위스에서 시편 2편을 설교했다. (그는 그 본문을 가지고 여러 차례 설교했는데, 그 하나는 온라인에서 들을 수 있다.) 암으로 약해진 몸을 이끌고서 그는 1980년 6월 8일 영국 바콤에서 여호수아 4:6을 가지고 마지막 설교를 했다. 7월 26일에 그는 이안 머레이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설교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매우 힘들 거라고 말하곤 하는데요. 아뇨, 설교 못 해서 힘든 거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설교에 의지해서 살지 않았으니까요.”마틴 로이드 존스는 1981년 3월 1일, 81세의 나이로 죽었다.그들의 마지막 설교에서 배우는 네 가지 교훈1. 모든 목사는 마지막 설교를 한다.어쩌면 그건 최고의 설교도 또 훌륭한 설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설교를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디모데후서 2:15에 드러난 두 가지 특징은 기본이다. 바로 성품과 능력이다. 성품과 관련하여 설교자는 자신을 겸손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설교하는 내용을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설교자라면 디모데전서 3장의 기준에 따라 “책망할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온전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슬프게도, 위에서 다룬 사례가 공적인 삶에서는 이 기준에 모두 다 부합하는 건 아니다.) 능력에 있어서, 설교자는 말씀을 올바로 다뤄야 한다. 힘들더라도 주석 작업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능숙하게 설명하고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2. 모든 목사는 불완전한 성화 상태로 마지막 설교를 할 것이다.맹점이 가져다주는 결함에서 자유로운 목회자는 없다. 그리고 그건 여기에서 논의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 설교와 마지막 숨결 사이 어느 시점에서 칼뱅은 “나는 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 수없이 실패했다”라고 고백했다.이런 고백은 결승선을 앞에 둔 목회자 대부분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3. 모든 목회자는 마지막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 수 있다.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유명 목회자를 보면서 세상은 즐거워하고 조롱한다. 난파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마지막 설교가 좋은 설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설교라는 것을 알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가 마지막 설교일지 모르는 우리는 모든 설교를 좋은 설교로 만들어야만 한다. 좋은 설교를 할 수 없다면, 아예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4. 모든 목회자는 섭리가 가져다주는 역경이 필요하다.많은 교인을 끌어모으는 목회자도 있다. 스펄전의 말을 빌리자면, “그분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하십시오”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은밀한 곳에서 충실하게 수고한다. 그리고 채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잊힐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가 정죄하는 교만을 키우는, 숫자가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유혹이 언제라도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경과 성공을 같이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9).겸손하게 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움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설교를 준비시키신다. 원제: You Don’t Know When Your Last Sermon Will B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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