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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은사 활용 기회를 제한하는 교회, 떠나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31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교회 봉사는 시키지만, 리더의 역할은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은사를 활용해서 가르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교회를 옮겨야 할까요? 김선일: 이 질문은 교회를 옮기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일, 여성, 은사 등의 문제들도 결부된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향상되듯 교회에서도 여성들이 리더의 역할을 맡는 일도 요즘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렇게 남성 중심적인 교회들이 있군요. 이금주: 우선 ‘교회를 옮겨야 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보자면, 저는 ‘쉽게 옮기지 말라’고 조언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교회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나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를 옮긴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해도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 옮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마다 교회를 옮기는 습관이 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 먼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는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교인들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 영적인 신뢰를 갖지 못할 때는 교회를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이: 물론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먼저 자신의 은사를 점검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나중에 교회를 옮겨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옮겨야 할 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김: 예. 주관적 경험이나 느낌으로 쉽게 교회를 옮기는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이: 저도 질문자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때,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물론 쉽게 떠난 것은 아니고 고민과 기도 끝에 결단했습니다. 김: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시면서 어떠한 과정이나 절차를 겪으셨나요? 그래도 혼자 끙끙 앓을 것이 아니라 목사님과도 상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이: 제 경험에 비추어 질문자에게 이렇게 권면하겠습니다. 첫째, 목사님과 진지하게 대화하십시오. ‘나의 은사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목사님께서 조언해주시고 지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혼자서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거나 궁리하지 말고 먼저 목사님과 상의하라는 것입니다.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을 하게 되더라도 교회의 목회 방침에 따르겠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이런 대화를 통해서 목사님이 설득되는지, 목사님이 자기 교인의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김: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습니다.이: 둘째,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떠한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때 마음도 평안해집니다. 현재의 교회에 계속 머무는 것이 마음에 불편하다면 다른 교회를 찾아서 옮길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교회가 나의 상황을 잘 헤아리고 동역할 수 있는 교회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또 목회자를 찾아가서 요구하고 논쟁하면 안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결국에 교회를 옮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섬김의 은사를 활용할 수 없음을 발견해서 옮긴 것입니다. 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와 소명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겠군요. 이것도 일의 신학과 관련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라는 클 틀에서 봐야겠네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뿐 아니라 자기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에서 계속 있어야 할지 떠나야 할지 고민합니다.이: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이 교회가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거저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인가? 교회가 당신에게 그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는다면, 목사님의 문제나 여성 차별의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이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김: 우리가 은사와 소명에 관해서 중요하게 보는 구절이 에베소서 4장 12절인데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과제는 성도를 온전하게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에베소서 4장 7절에서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이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발견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 은사를 활용하고 계발하도록 돕는 것은 교회 지도자의 주된 책임이라고 봅니다.이: 그래서 초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목사님도 죄인인 인간입니다) 이 교회가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활용하는 곳인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물론 남녀 차별의 문제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김: 교회를 옮기는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이: 죄송하지만, 다시 저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목사님은 부모님과 일찍 이민 오셔서 미국에서 공부 마치고 안수받은 한인이었고 장로님드르 교인들 대부분이 미국인이었지만 회중에는 미국인과 한인 2세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박사논문으로 연구한 여성 사역에 관한 특별 주제를 금요일에 대학부 성경공부 시간 전에 가르칠 수 있겠냐고 했더니 당회에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일에 예배 끝나고 30분 정도 세미나를 인도할 기회나, 혹은 수양회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한 세션을 주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1년은 걸렸습니다. 장로님인 제 남편은 이미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마음의 결정을 할 때까지 기다렸노라고 나중에 말해주었습니다. 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없음을 깨닫는 데 1년 반이 걸린 겁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로 옮겼습니다. 원래부터 알던 교회였는데, 그곳에서 제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김: 교회를 옮기기 전까지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뜻을 묻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찰해야 할 주제는 교회나 목사님이 아니라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요. 그러고 보니, 일의 신학이 교회 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군요. 요즘 한국 교회의 젊은 목사님들은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이: 교회 내 여성의 동등성이 중요합니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동등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주의 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자칫 여성운동의 차원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납니다. 제가 다녔던 미국 교회는 오랫동안 여자 장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의 장로들이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한 뒤에 여성 장로가 가능하도록 교회 규정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장로들이 많이 뽑히니까 남자들이 장로로 추천돼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이 더 많아지니까 남자들이 소수가 돼서 불편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협력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여자도 남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하고, 남자들도 여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이들에게 은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몇 명이었을까?
by Philip Ryken
2023-07-29
성경은 이집트 탈출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런데도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근거는 자주 도전 받는다. 출애굽기 12장 내용을 놓고 가장 흔히 맞닥뜨리는 반론은 출애굽의 규모이다. 이건 대답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출 12:37-38). 이 기록에는 훌륭한 역사가라면 누구라도 빠트리지 않을 육하원칙에 입각하는 정보가 제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몇 명인가?’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가?좋은 질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일반적인 답변이 있다.답 1: 부풀려진 숫자다남자가 600,000명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200만 정도였을 거다. 이 숫자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빠져나갔는데, 왜 이집트 역사에는 전혀 거기에 관한 언급이 없을까? 게다가 이만하면, 이스라엘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를 자랑하는 민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센 땅이 과연 이 정도 인구를 먹어 살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왜 우리는 시나이반도에서 그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걸까?출애굽은 세계 역사에서 발생한 최대 인구이동 중 하나였다. 이동하고 있을 그들은 15킬로미터가 넘는 긴 줄을 형성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하면서, 성경 저자가 숫자를 부풀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드라이버(S. R. Driver)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규모가 크게 과장되는 전통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되었다”라고 썼다. 스나이드(N. H. Snaith)는 전체 숫자를 놓고 “환상적이고 또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답 2: 글자 그대로부풀려진 숫자라는 이의 제기를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성경이 참으로 600,000명이라는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여성과 어린이 포함)이 이집트를 빠져나왔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이집트 역사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건, 그들이 단지 노예였고 또 그들의 탈출 방식이 이집트인들에게 워낙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에 증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유목민이었고, 그 유해는 3,000년 동안 모래로 덮여 있었다. 또한 600,000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가지 타당한 이유는, 이것이 출애굽기 다른 내용(출 38:26) 및 민수기의 내용(민 1:46; 2:32; 26:51)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답 3: 천이라는 숫자는 ‘씨족’을 의미성경 본문에 충실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엘레프(eleph)는 “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 초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가리키는 부정확한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씨족’(clan)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소대와 같은 전투 부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2:37은 이렇게 읽어도 된다. “600개의 씨족이 있었다.” 또는 “600개 정도의 군사 단위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만 정도였을 것이다. 제임스 호프마이어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기 12:37의 쟁점은 해석의 문제이다. 엘레프라는 단어는 “천”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씨족” 또는 “군대 단위”로도 번역된다. 이집트 학자로서 이 질문을 볼 때, 이집트 제국의 전성기에 이집트 군대의 총인원은 20,0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이성 전투에서 전사한 36명은 이스라엘로서는 심각한 군사적 실패였다. 정말로 600,000명의 군대가 있었다면, 그 정도 숫자가 죽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출 12:41).원제: How Many Israelites Exited Egyp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출애굽
영적 게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by 최창국
2023-07-28
그리스도인은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을 종교적 차원에만 제한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영적 경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경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일상의 영역에서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뉴욕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원과 의료 혜택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센터들을 만들고, 노인들을 보살피며, 젊은이들을 길러내는 탄탄한 사회로 이끌었다. 성경의 유산과 신앙에 기대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헌신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팀 켈러, 일과 영성, 22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 의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깨달음이나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성은 교회 공동체나 종교 기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상의 여러 영역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영적 게토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빠지기 쉽다. 영적 게토주의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만을 통해서 영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이 일반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팀 켈러, 일과 영성, 237).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영적 경험도 종교적 차원에만 종속되는 것도 아니다.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 또는 영적 장소와 세속적 장소로 구분하거나 범주화하는 데서 영적 경험의 장을 잘못 이해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잘못된 구분이나 왜곡된 범주화는 영적 경험을 교회나 종교기관과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할 수 있다고 여기게 하였다. 일상의 영역인 정치 사회 교육의 영역에서는 영적 경험을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신념을 갖게 하였다. 신학적 관점에서 영적 경험은 분명히 특별은총의 영역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일반은총 안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경험과 생활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 차원, 윤리적 차원, 사회적 차원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만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범주화하여 일상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들을 영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길 때 영적 게토주의를 낳을 수 있다. 영적 게토주의는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의 장을 교회나 종교적 기관으로만 한정하거나 영적 또는 신령한 직분(spiritual estate)을 종교적 일이나 소명으로만 여길 때 심화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고린도전서의 ‘부르심’(고전 7:24)이란 단어를 ‘직업’을 의미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해서 신령한 소명을 종교적 소명으로만 여긴 중세 교회를 비판하였다. 중세 교회는 신부와 수도사 또는 수녀만을 신령한 직분이라고 여겼다. 신령한 직분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관점은 일상의 노동이나 직업은 영적인 일과는 무관하다고 보았을 뿐 아니라 신령한 직분이 아니라 천박하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교황, 주교, 주부, 신부, 수도사들을 ‘신령한 직분’으로 정하면서 왕족, 귀족, 장인, 농부들은 ‘세속의 직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지어낸 허구이다. 철저한 기만이요 위선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였다(Martin Luther, Three Treatises, 12). 루터에게 직업이나 일을 영적 분야와 세속적 분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관점은 영적 경험이나 깨달음도 교회나 종교적 기관이나 종교적 활동에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층 짜리 집에 비유했다. 아래층은 평범하게 지속되는 잘 정돈된 일상적인 삶을 가리키고, 위층은 기도하며 가꾸어 나가는 영적 삶을 가리킨다. 온전한 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세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가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영적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전화하는 일에서 거룩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일기를 쓰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설거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들을 거룩한 삶 또는 영적인 삶과 일체화시킴이 없으면,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는 인간의 상황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타당성을 잃게 된다. 일상을 떠난 영적 추구는 거룩한 것을 이상화시키거나 고귀하게 만들려는 의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거룩한 것에 대하여 순전하게 느낄 감수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적인 삶은 작은 일상의 활동 속에서 싹이 나고, 햇순이 돋고, 꽃이 피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은혜의 통로가 된다. 그것을 세속에 맡기는 것은 이원론에 굴복하고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의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은 삶의 부차적인 것과 본질을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고, 또한 두 가지를 모두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모든 삶에서 영적인 렌즈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 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넓게 충만하게 누리는 방법을 놓쳐서는 안 된다. 프란시스 휴댁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 생활이 건조해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기도나 교회생활 외에도 폭넓은 경험을 통해 역동적인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통 ‘쉼, 자연, 관계’ 같은 것을 통해 발견된다. … 기도가 갑자기 안 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새로운 감격과 행복이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Francis Houdek, Guided by the Spirit, 88-9).하나님의 은혜는 기도를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지만,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고, 노동하고, 정의를 위한 사회 운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바른 신학 없이는 온전한 제자 될 수 없다
by Jen Wilkin·J. T. English
2023-07-27
마태복음 28장의 가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보통 전도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은 소책자를 들고 세상에 흩어져서 전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상한다. 복음을 받아들여 기쁨에 넘치는 회심자들이 희열에 차서 세례를 받는 장면도 떠오른다. 그다음은 뭘까?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전도자가 된 그들이 여러 도시를 이동한다.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를 거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사명에 대한 이해가 단지 전도에 대한 부르심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 바로 신학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제자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사명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종자들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마 28:20)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제자도라는 측면에서, 믿음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교리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회심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교리를 실천하는 제자도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을 포함한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통계 지표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22년, Lifeway Research와 Ligonier Ministries는 “신학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대상으로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 즉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믿음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했다. 비그리스도인들의 결과는 예상대로 암울했지만, 정작 놀라운 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내어놓은 답변이었다. • 복음주의자의 48퍼센트가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접하면 거기에 맞게 학습하고 적응한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65퍼센트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태어났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56퍼센트가 “하나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아들이신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43퍼센트가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에 동의했다. 이 통계를 한번 곰곰이 숙고해보라.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앙의 핵심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신념에 자신의 생명을 걸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신학 지식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는 게 조사 결과이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개종자는 만들고 있는지 몰라도 제자는 기르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제자 삼는 사람은 선생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달받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먼저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코 다른 누구에게 신앙의 기본 신념을 가르치려는 열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 우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교리 학습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뭘까? 다음 거짓말 중 하나를 믿기 때문이다. 거짓말 1. 신학은 학문의 영역이다.때때로 신학은 지나치게 학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접근 불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평신도라면 결코 하지 않을 수준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 모두가 신학을 기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중 응용 수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기초 수준 이상으로 수학을 학습하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리는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 부모,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또는 검정 고시를 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 2.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누구라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지지하는 명분, 정치 신념, 심지어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살펴보라. 우리는 모두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신학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이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 즉 궁극의 실재라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또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그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제대로 사는 삶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 신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나님이 준비시킨 수단이다.거짓말 3. 신학에는 감정이 없다.신학이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신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목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롬 12:2).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결코 차갑게 죽어서 먼지투성이로 남는 지식 유희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과 열정만 남아서 이성적인 믿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마음만의 종교도 아니다.제대로 된 성경적인 신학은 지성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식 활동에만 머무르는 신학은 실패한 신학이다. 활기찬 지성의 활동으로 마음에 뜨거운 연료를 공급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이성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성에 어휘와 비전을 부여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생각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깊은 느낌이라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송영(예배)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학은 헛된 지식 추구에 불과하다. 살아 숨 쉬는 신학: 제자도의 열쇠그렇다면 신학은 학문의 영역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제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실제적인 일이다. 신학은 감정이 부족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참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신학은 지적 수준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실제적 수준에서 우리를 형성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은 우리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고, 또 다르게 행동한다. 신학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학은 누가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또 찬양할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직장에 가고, 휴가를 떠나고,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죄와 싸우고, 자녀를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할 때도, 돈을 쓰고 늙어갈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신학이 왜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이야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다. 원제: Theology: The Missing Piece in Disciple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사명
지상명령
제자도
전도
신학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소서
714 기도대성회 소회
by 김창현
2023-07-26
오랜 슬픔슬펐다. 많이. 울었다. 오랜 시간. 누구의 잘못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은가? 굳이 찾은들 또 다른 분열만 일으키지 않겠는가? 마귀의 특징이 ‘분열’이라 하였던가? 그렇다면 교회의 분열이 그놈의 짓거리인가? 정녕 당신은 이 분열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 하신 것인가요? 교회는 이미 하나인 것.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 힘써, 노력, 의지, 자기 부인, 내려놓음.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여 가능하다면 내 수십, 수백 단어를 말하리이다. 714 기도대성회2023년 7월 14일 송도 컨벤시아에서 ‘714 기도대성회’가 열렸다. 7월 14일은 역대하 7장 14절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2024년 로잔대회 준비와 한국 교회의 영적 대각성이다. 현장에는 전국 450여 교회와 6,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였다. 모인 분들을 붙잡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로잔대회보다는 한국 교회의 영적대각성에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 같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나뿐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간절함대학 시절 전국대학생 여름수련회 이후 이런 대형집회는 오랜만이었다. 우뢰와 같은 찬양 소리, 하늘에 닿을 듯한 기도 소리. 가슴이 벅차 첫 찬양에서부터 눈물이 흘렀다. 이 찬양과 기도 소리가 주님께 닿을 수만 있다면 목이 터져라 소리치리라.예수보다 정치이념이 우선 되어버린 한국 교회. 담임목사와 정치이념이 맞지 않다고 떠나는 성도. 정치이념으로 편이 갈려진 목사들. 선교단체 단톡방에서 정치 이슈로 논쟁하다 집단으로 단톡방을 나가버린 젊은 간사들. 교회마다 정치 이슈로 갈기갈기 찢긴 권사회, 안수집사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진짜 마귀짓거리라면 “네 이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한국 교회에서 떠나갈지어다!” 코로나로 집회와 예배 금지를 경험한 한국 교회 성도들. 그 마음에 이러한 기도의 자리를 얼마나 사모하고 열망하였는지 그 간절함이 현장에서 느껴졌다. 이것이 한국 교회 회복의 시작점이길 간절히 기도하였다. 2024년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니, 이것이 어떤 모양으로든 한국 교회 회복의 마중물이 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염려. 그럼에도…누군들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한국 교회의 회복을 위해 왜 부르짖지 않았겠는가? 1907년의 평양대부흥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길 바라는 울부짖음은 이번 기도대성회보다 어찌 작다 하겠는가? 이번 대회도 ‘이벤트’로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기도하는 징검다리들이 있어야 진짜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또 다른 누군가가 이 기도 모임을 딛고 한 발을 내디디어 진짜 회복과 부흥의 때를 맛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징검다리 되어 줄 수 있다. 연합1980년대, 1990년대 부흥의 끝자락을 경험한 것은 목사로서 큰 기쁨이고 행운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 시절 목사는 유명 연예인처럼 보였다. 나도 그런 부류를 꿈꾸던 사람이었다. 교회는 보이지 않았고 유명 목회자 뒤에 숨겨진 수많은 목회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목회 16년 차가 되어보니 예전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부흥 1세대 목회자들 가운데 그 끝이 아름답지 않은 분들을 보게 되었다. 반면 소위 복음주의 4인방이라고 불리는 부흥 2세대 목회자들은 조금 다름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바로 ‘연합’이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연합이 아니라 친밀한 인격적 관계가 있었다. 복음주의 4인방 중 한 목사님이 고급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다른 사모님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다. “목사님 많이 변하셨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이 바로 차를 파셨다고 한다. 친밀한 인격적 관계에는 위로와 격려가 있음과 동시에 도전과 긴장도 존재한다. 이것이 참된 연합의 유익이 아닐까?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과 같음과 동시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는 유익 말이다. 연합의 유익을 선배 목회자들이 보여주었다면 이제 다음 세대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생명력이 있는 복음적 생태계가 한국 교회에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 시작점에 이번 기도대성회가 자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 교회는 오직 복음 안에서 새로운 연합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로잔운동나는 복음주의 연합대회인 로잔운동(Lausanne Movement)이 좋다. 그 역사와 배경을 잘은 모르지만, 그 이름 자체가 정체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잔은 ‘조직’이 아니라 ‘운동’이다. 연대와 연합을 강조하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합은 ‘조직’을 잘 갖추면 된다고 여겼다. 조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운동성’이다.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714기도대성회는 2024년 9월에 열리는 로잔대회까지의 기도 운동이다. 조직은 간소하지만 운동성은 강할 것이다. 전국에 450여 교회가 한국 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위한 영적 회복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아닐 수도 있다. 더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 할 수도 있다. 출애굽 1세대들처럼 지금의 한국 교회 성도들이 광야에서 생을 다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소망한다. 간절히!주여! 이 땅에 다시 부흥을 허락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모든 분열을 회복시키소서.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사야 61:3)
교회는 AI를 내칠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
by Patrick Miller
2023-07-25
지난 5일 사이에 AI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까지 침투했다. 처음으로 ChatGPT의 언어 슬롯 머신이 가동되었고, 어려운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좋은 답변을 내놓았다. 수십 년 전 생산직 근로자가 겪은 일을 지금 사무직 근로자가 그대로 경험하고 있다. 자, 진짜 적은 비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해내는 기계가 등장했다.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한 경고음이 전 세계 문화에 걸쳐서 울렸다. ChatGPT 이전에 AI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직업 사상가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소셜 미디어와 팟캐스트에서 최신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사상가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그들은 AI가 만들어갈 생성 가능성을 즐기며 세상을 바꾼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AI 제품의 가내 산업을 시작했다.고작 몇 달 사이에 AI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1) 생성 AI가 일자리를 빼앗고 영적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비판적 입장. (2) AI가 목회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실용주의 입장이다. 급속한 기술 양극화는 하나도 놀라운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AI에 관해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부분이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윤리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생성 AI가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그렇다고 내 속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기술 전쟁에서 한 쪽 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잠시 멈추고 대화하고 또 생각할 때이다. 잠언 저자의 말이 옳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잠 19:2). 오로지 비판만 하는 것도, 오로지 실용주의 입장으로만 보는 것도 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입장 다 비윤리적인 AI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AI 비판의 위험두려운 것부터 시작하자. 생성 AI는 (말하자면, 텍스트, 이미지, 코드, 비디오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설교 연구, 설교 그래픽 생성, 소그룹 질문 생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서 설교, 블로그 및 팟캐스트 스크립트 작성도 수행할 수 있다. 영적 질문이 있는 평신도가 목사와 멘토를 찾는 대신에 얼마든지 AI에 의존할 수도 있다. AI가 기꺼이 그들에게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이 컴퓨터는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고 지식을 만들어내는가? 모든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특정 데이터 세트를 사용하여 학습한다. 예를 들어 ChatGPT는 2021년 이전 버전의 인터넷에서 교육을 받았다. 질문마다 질문의 매개 변수와 만족스러운 답으로 간주되는 자체 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의 만족스러운 답변을 예측한다. LLM은 크라우드 소싱된 답변을 제공하며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제공하도록 조금씩 수정된다. ChatGPT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뻔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ChatGPT의 답이 뻔하다는 게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무한해 보이는 정보에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도를 얼마든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봇(bot)을 통해서 쉽게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배우고 또 열심히 지혜를 키우려고 노력하겠는가? ChatGPT 같은 LLM이 주는 약속이 무엇인가? 노력 없이도 얼마든지 숙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광범위한 인터넷 세계마저도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AI는 엄청난 기술 변화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하늘이 무너진 건 이미 한참 전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 속에서 살고 있다. ChatGPT가 AI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일깨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AI를 일상생활로 도입한 게 ChatGPT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맞춤법 검사, Google 검색, 내비게이션 앱, 차량 공유 앱, Siri, Alexa, 음성 텍스트 변환, 소셜 미디어 피드, 비디오 게임, 얼굴 인식, 스팸 필터, AI 코딩 앱, AI 자동화 배송 및 물류, AI 지원 의료 스캔, 나아가서 AI 전쟁에 이르기까지,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존재했다. 온라인에서 지금 당신이 보는 내용 대부분은 AI가 당신의 취향을 분석해서 내어놓은 내용이다. AI가 위험하다며 당신이 온라인에 분노를 표출할 때 정작 그 분노를 중재하는 것도 다 AI이다. 누가 무엇을 보는지 결정하는 것도, 어디에 참여하고 또 어떤 식으로 현실을 보도록 할지를 조종하는 것도 이미 AI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기술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우리가 기계 학습, 신경망 또는 알고리즘 계산에 분노할 수 있는가? AI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기술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춰야 한다. 고맙게도 목회자, 신학자, 윤리학자에게 다양한 분야에 걸친 AI 적용을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글과 팟캐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이 정도의 학습으로는 보다 세분화된 수준에서 AI를 이해할 수 있는 실무자(AI 엔지니어, 개발자 및 연구원)와의 대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AI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AI가 미칠지도 모르는 기형적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싶다면서 새로운 변종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AI라는 기술 상자를 열고 내부를 살펴보고 모든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사용 사례를 숙지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 윤리적으로 대응할 제자를 준비시켜야 한다. AI 실용주의의 위험모두가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는 건 아니다. 주변의 구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AI가 몰고 오는 안개에 대해서는 알지만, 심각한 윤리적 질문 없이 무작정 AI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유용성이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들은 단지 관리적인 질문만 던진다. 시간 절약이 가능할까? 돈을 아낄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까?교회와 같은 기관을 이끄는 누구에게나 실용적인 질문은 중요하기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런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은 효율성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부합해야 한다. 생성 AI는 얼마든지 (단조롭고 관습적인)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목회자의 성경적 의무이다. 이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현명하지 않다. 아무리 발전된 기계라도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살아 움직이는 진리로 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때그때 설교를 조율할 수 없다. AI는 결코 설교 내내 우리가 의지하고 또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에게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 신념 없이 AI를 받아들인다면, 윤리적 실책을 범하게 될 것이다. 왜? 윤리적 원칙이 y라는 목표 달성에 x의 수행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x를 수행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공리주의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길사도행전 17:26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국가 질서를 주권적으로 정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초기 AI 시대에 사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믿어야 한다. 다윗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긴”(행 13:36) 것처럼 우리도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우리가 AI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우리 자녀들이 물려받은 윤리적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여 AI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실용주의자들은 미래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기에 멀리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도 현재에 갇혀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AI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이지 않게 통합하고 있는지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기에, AI에 관한 속보에 단지 반사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진짜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할, 보이지는 않지만 진짜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AI의 운영 방식에는 둔감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역량(신학, 윤리 및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일상생활에 미치는 AI의 윤리적 파급 효과를 탐구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용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평신도가 자신의 AI 사용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간단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빠진 비판주의자와 실용주의자 사이의 논쟁에 에너지를 계속 낭비한다면 우리는 AI의 발전 단계에서 어쩌면 중간 단계에 살고 있는 독특한 우리 세대의 책임을 간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연 대화이다.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원해서 시작하지 않은 이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윤리적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꼭 필요해서 AI 세상 속에 우리를 두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원제: Should We Embrace or Evict AI in Church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주일에 일해야 하는 직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07-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현재 직장을 구하고 있는 40대 싱글여성입니다.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습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 혼자 살고 있고, 생활이 넉넉지 못합니다. 주일에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사명이고 기쁨입니다. 서비스 업종(카페 매니저)에서 일해 왔는데, 제가 원하는 조건의 직장은 주일에 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중에만 일하고 주일에 쉴 수 있는 곳은 그에 비해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계속 주일에 쉬며 교회에 갈 수 있는 직장을 기다리는데 잘 나오지 않네요. 우리 교회에는 주일 오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저녁 시간에 교회에서 영상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해줍니다. 계속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주일에 일하는 곳에서 소명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이금주: 저는 이 질문이 한국적 기독교 신앙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미국에 있는 교회가 많이 느슨해졌지만, 과거에는 주일성수를 율법처럼 엄격하게 지켰죠. 한국에서는 여전히 주일성수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선일: 한국 교회도 과거보다 주일성수라는 개념이 조금 이완됐고, 사회 전반적으로 주일에는 일하지 않는 매장들도 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지요. 이: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째, ‘주일성수란 무엇인가?’ 둘째,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김: 주일성수의 의미와 일의 목적이군요.이: 먼저 스스로 주일성수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까? 교회당에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교인으로서의 습관입니까?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는 제쳐두고, 근본적으로 ‘내가 왜 주일성수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한 주에 하루를 정해놓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일을 희생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까? 만약 후자라면 주일성수의 의미로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성경에서 공허하게 제물을 드리러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김: 이사야 1:12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고 경고하십니다. 이: 이 또한 큰 그림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이 왜 나에게 중요한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됩니다. 질문자가 주일에 일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이유가 ‘원하는 조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그 조건이 월급도 많이 받으면서 주일에도 교회 가도록 보장해주는 직장을 얻는 것이라면 주일성수는 어떤 순위에 있는가요? 중요한 질문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입니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내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김: 질문자의 고민에 이미 우선순위와 가치의 문제가 반영되어 있군요. 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상에 바친 고기를 알면서 먹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가 대접할 경우에는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김: 예, 고린도전서 10장을 보면 27절에서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26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다음 구절인 28절에서는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합니다. 즉, 상대방을 배려해서 어떤 때는 먹을 수도, 어떤 때는 먹지 말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그 원리가 이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나의 신앙 가치라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 때문에 교회를 빠진다면 그것은 신앙 양심에 배치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도 일터에서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갖고 일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안입니다. 하지만 단지 조건 때문에 절충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김: 저는 주일에도 하는 일이 사람들의 생명과 기본 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대로 본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자제하기를 권해요. 병원이나 대중교통, 안전을 위한 경비와 관리에는 상시 인력이 요구되니까요. 그런데 사실 주일에도 교회에서 예배 뒤에도 교인들끼리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를 많이 이용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그런 곳들을 거리낌 없이 이용하면서 주일성수를 적용한다는 것이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와도 연관되네요. 이: 맞습니다. 주일에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본인 마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주일에 일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신앙에 방해가 되느냐의 여부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서 14:2에서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먹느냐, 안 먹느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시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입니다. 김: 그 말씀이 이 질문자의 상황에는 어떻게 적용될까요?이: 질문자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사로서 아이들이 ‘왜 주일에 선생님 교회에 안오시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하는 큰 그림에서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주일성수에만 매달리면 안 됩니다. 김: 사실 주일성수라는 단어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신학적 의견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좀 전에 말씀하신 로마서 14:5에서 바울도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이: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일성수만큼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로 인해서 그들이 시험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김: 예수님께서도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거듭 경고하셨지요. 이: 질문하신 분은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기쁘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미국 교회에 다닐 때 목사님이 저에게 장년부 성경공부를 맡으라고 하셨습니다. 동양인인 저에게 미국인들 성경공부를 맡긴 것입니다. 몇 년간 장년부 주일 성경공부를 기쁘게 지도한 후에 좀 쉬어야겠다고 했더니, 목사님이 그럼 주일학교 아이들부터 가르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부터 가르쳤는데 저에겐 잘 맞지 않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4학년 아이가 저에게 귀한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아이는 자폐증이 있어서 당시 초등학교 선생이신 목사님의 사모님도 그 아이 때문에 너무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라 충고도 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성경을 가르쳤더니 1년 만에 다른 아이가 된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서 많이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학교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김: 주일성수로 인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문제, 그리고 일의 소명과 은사를 탐구하는 과제로 이어지는군요. 이: 이처럼 여러 가지 관련된 사안들의 목록을 만들어서 성경적, 신학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김: 우리가 문제를 넓고, 깊이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이: 우리는 날마다 기도할 때, 삶의 작은 경험과 일들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주일성수, 예배함의 의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일의 소명 등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웃을 섬기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김: 지금까지의 대화를 토대로 질문자에게 제가 목회자로서 질문자에게 권면한다면, 좋은 조건을 포기하더라도 당신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겠습니다. 아울러, 어디에서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얻은 기쁨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거기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그 은사와 소명을 선하게 사용하시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일성수
팀 켈러의 당부: 당신의 세계관을 재점검하라
by Tim Keller
2023-07-22
기독교 신앙이 독특한 세계관을 구성한다는 생각, 그 세계관을 통해서 모든 현실을 바라보고 또 그 세계관 때문에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생각은 적어도 한 세기 동안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은 이제 대부분의 미국 교회에서 사라졌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왜 그럴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다음 비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너무 합리주의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를 교실에서 논증을 통해 전달되는 일련의 명제나 요점으로 간주한다.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단지 지적 또는 학문적 프로젝트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다 보면 세계관과 관련해서 상상력과 이야기가 끼치는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세계관 자체의 기능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너무 단순하다: 세계관의 일관성에 대한 강조(“이러한 믿음은 항상 이러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일관성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이 넘치는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일관성 없는 믿음과 이런저런 세상에 관한 관점들을 대충 엮어놓은 결과처럼 보인다. • 너무 개인주의적이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세계관 사고”는 공동체와 문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무시하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주로 나 개인의 생각과 선택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세계관 개념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관이 공동체 형성의 산물이며 공동체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통된 이야기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 너무 승리주의적이다: 믿음과 불신앙의 시작점이 가진 대립을 강조하고 근본적인 믿음 내지 전제를 강조하는 경향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만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다양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화적, 정치적 견해까지도 “성경적 세계관”의 일부로 간주하고 아예 토론의 여지조차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이른다. 세계관 대안J. H. 바빙크가 쓴 Personality and Worldview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내 생각에 지금 제기한 비판을 거의 다 피할 수 있는 세계관에 대한 훨씬 더 의미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Personality and WorldviewJ. H. BAVINCK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조카이자 제자인 J. H. 바빙크가 쓴 Personality and Worldview는 누구에게나 있는 세계비전(worldvision)과 성숙하고 현명한 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worldview)을 구분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은 바빙크는 독자들에게 경건한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복음이 그들의 세계관과 성격을 재구성하게 하라고 도전한다. 제임스 에글린턴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이 책은 바빙크의 쉬운 산문 덕분에 얼마든지 개인 적용이 가능하다. 목회자와 학생과 평신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CROSSWAY. 208 PP.세계관이 개인의 성격(personality)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바빙크의 강조는 세계관이 단지 칠판에 적힌 일련의 중요 항목 이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접근법은 세계관을 지적 수단에 의해 전달되는 단순한 지적 틀로 보는 시각을 방지한다. 이 책은 단지 세계관 형성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사려 깊고 “객관적”이 되기 위해서 세계관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계비전”과 “세계관”을 구별하는 그의 독특한 공헌을 통해서 우리는 왜 이 세상에는 일관되고 일치하는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이 이처럼 극소수인지를 알 수 있다. 세계비전(또는 세계에 관한 “사고방식” 또는 “정신상태”(mentality)는 오늘날 환경이 만들어낸 일련의 기본적인 직관인데, 단순하고 환원주의적 사고라는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이에 반해서 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의 의미를 찾아가며 하루하루 기록하는,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일종의 지도와 비슷하다. 심리학에 대한 바빙크의 강조는 공동체 형성을 수반한다. (그는 종종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남겨둔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이전 시대의 심리학을 반영하지만, 에글린턴이 서론에서 설명하듯 바빙크는 “성격”이 단지 “타고난 기질의 특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가족과 가정 환경, 교사와 교육, 그리고 광범위한 문화가 모든 개인 속에 형성한 세계에 대한 일련의 직관”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12). 따라서 이 책은 “사회적 상상”—세상을 상상하는 법을 익히는 공동체—이라는 찰스 테일러의 세계관 개념을 예고하고 있다. 지도 만들기로서의 세계관지도 만들기로서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J. H. 바빙크와 그의 삼촌 헤르만 바빙크의 포인트는 중요하다.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세계비전의 한계와 환원주의를 초월하려는 노력이다. 세계관이 정말로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힘들게 만들어내야 하는 무엇이라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따라온다. • 이 은유에 따르면 세계관은 결코 상대에게 휘두르는 완성된 무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은 승리주의를 방지한다. • 세계관은 항상 미완성이며 성장한다. 그렇기에 겸손하다. • 인도네시아의 그리스도인과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인이 만든 지도가 같을 리 없다. 그리스도인의 교리를 삶 전체에 적용한다면, 장소에 따라서 직면하는 질문과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Personality and Worldview’가 이 점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문화에서는 중복되고 모순되지는 않지만, 다소 다른 기독교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의 근거를 제시한다. 이 점 또한 승리주의를 허문다. 나는 요한 헤르만 바빙크의 Personality and Worldview가 영어로 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게임 체인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고 서문을 쓴 에글린턴에게 감사한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오늘날 세상에서 당신의 믿음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이 글은 제임스 에글린턴이 영어로 번역한 Personality and Worldview에 실린 팀 켈러의 머리글(forward)을 간추린 것이다. 원제: Tim Keller on How to Reexamine Your Worldview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세계관
바빙크
숙면하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by Joe Carter
2023-07-21
취미가 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딱 하나, 낮잠.”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올해 들어서 단지 농담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매일 퇴근 후 나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그런데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서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늦잠을 잤고, 또 주말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낮잠을 잤다. 그런데 그건 상황을 악화시켰다. 자도 자도 항상 피곤해하는 내가 혹시 계절성 정서 장애(SAD)나 겨울 우울증 같은 병이 있는 건 아닌지, 아내가 의사를 만나보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된 것은 만성으로 굳어져 버린 나쁜 수면 습관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굳이 의사까지 만날 필요가 없었다. 젊었을 때는 카페인의 힘으로 나름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 더는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나쁜 수면은 가족과 직장, 신체 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나의 영혼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잠, 영성 훈련시편에서 다윗은 평화로운 잠이 믿음의 행위이자 겸손의 표시임을 보여준다. 다윗은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3:5-6)라고 했다. 또한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4:8)라고도 고백했다. 숙면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가장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제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잠은 믿음과 겸손의 표시이자, 동시에 영성 훈련이라고 D.A. 카슨은 말한다. 우리가 이 우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일이 숙면을 취하는 것이다. 철야 기도가 아니라 잠을 자는 것이다. 밤새도록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영성 훈련을 하려면 몸이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성 훈련과 마찬가지로 가장 효과적인 수면을 위해서도 태도뿐 아니라 습관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다음은 휴식이라는 영적 활동을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배운 몇 가지 사항과 실제적인 실천 단계이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휴식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밤 얼마나 오랫동안 잤는가이다. 사람마다 수면 시간은 다르며 또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일생을 두고 변한다. 그러나 당신이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한 쉼을 위해서 꼭 필요한 양의 수면을 지금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다음은 나이에 따라서 매일 필요한 평균 수면 시간이다.6-13살: 9-11 시간 14-17살: 8-10 시간 18-25살: 7-9 시간 26-64살: 7-9 시간 65 이상: 7-8 시간 당신에게 필요한 수면의 양은 주로 유전적 구성에 기인한다. 그것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통계를 참고해 말하자면, 잠을 적게 자도 별문제가 없을 그룹에 당신이 속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자도 괜찮아 식의 농담은 그만두고 실제로 필요한 수면 시간을 계획하라.밤에는 블루라이트를 피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잠들 때와 일어날 때 영향을 미치는, 흔히 일일 주기 리듬이라고 알려진 자연 시계가 들어있다. 호르몬 멜라토닌을 언제 생성하는지 알려주는 게 바로 이 일일 주기 리듬이다. 멜라토닌 수치는 잠을 준비하는 저녁 중반에서 늦은 저녁 사이에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밤 시간 내내 높은 수치가 유지되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직전에 떨어진다. 멜라토닌 수치를 방해하는 한 가지 요인이 빛, 특히 스펙트럼의 파란색 파장 영역에 있는 블루라이트이다. 하버드 대학의 신경과학자 앤-마리 챈은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 연구에 따르면 빛은 멜라토닌을 억제한다. 이른 저녁에 접하는 많은 양의 빛은 일일 주기 지연을 일으켜서 생체 시계를 아예 나중 시간으로 재설정한다.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접하는 빛은 생체 시계를 앞당겨서 이전 일정으로 재설정한다.”당신과 눈과 뇌에 가장 많은 블루라이트를 쏘아대는 게 무엇인지 아는가? 맞다. 취침 전에 사용하기 좋아하는 모든 기기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TV. 취침 전에 블루라이트를 방출하는 전자 장치를 사용하면 뇌는 명령한다. “멜라토닌을 분비하지 마라. 해가 떴고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가장 확실한 방법은 취침 전에 이런 장치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항상 가능하지는 않다. 다행스럽게도 노출을 제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밤에 랩탑이나 데스크톱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무료 소프트웨어 f.lux를 다운로드하여 추가하라. 이 프로그램은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색상을 하루 중 시간에 맞게 조정해서 밤에는 따뜻한 색깔로, 낮에는 햇빛과 같이 만든다. 더 나은 솔루션은 블루라이트 차단 보안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거나 아이패드를 읽을 때마다 나는 Uvex S1933X Skyper Safety Eyewear를 착용한다. 저렴하고(아마존에서 $8.52) 비교적 편안하다. 파란색을 모두 걸러내므로 TV를 시청할 때 화면 색상이 아예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찾은 최고의 수면 도구 중 하나이다. (잠자리에서 보안경 끼고 있는 거 좀 웃기지 않나? 물론 그렇다. 하지만 나는 취침시간에 아이패드로 즐기는 독서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니 사람들의 놀림 정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다른 빛도 차단하라. 안타깝게도 블루라이트가 멜라토닌 수치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빛이 아니다. 외부에서 침실로 들어오는 빛―가로등, 자동차 조명, 달빛―도 수면에 영향을 준다. 방을 최대한 어둡게 해야 하므로, 창문에 암막 커튼 추가를 권장한다. 암막 커튼은 어디에서나 쉽게 살 수 있다. 차단 효능이 가장 높은 것을 선택하라. 빛은 99.9퍼센트 이상, 자외선은 100퍼센트 차단해야 한다. 암막 커튼이 아니라면 수면 마스크 착용을 고려해보라. 비행기에서 주는 것과 같이 저렴한 제품은 편안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다. 제대로 된 제품을 구입하라. 내가 찾은 최고의 제품은 Sleep Master Sleep Mask이다. 눈을 완전히 덮고 벨크로 스트랩으로 단단히 고정하기에 나처럼 머리 크기가 농구공 정도 되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된다. 25.90달러로 다소 비싸지만, 한번 사면 수십 년 동안 쓸 수 있고, 한 달만 제대로 써도 본전은 뽑을 것이다. (한 가지 단점은 새틴 소재로 만들어서 통기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머리가 평소보다 더 따뜻해질 수 있으므로 침실이 덥고 습할 때는 권장하지 않는다.)시원한 상태를 항상 유지하라. 수면에는 온도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머리는 시원하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베개의 시원한 쪽을 찾는다), 몸은 그보다 따뜻해야 한다. (뜨거운 머리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쿨링베개나 쿨링캡을 추천한다.)보통 실내 온도를 65도로 설정하면 이 두 가지 상태를 모두 다 달성할 수 있다. (나는 60도를 선호한다.) 너무 시원해서 편안하지 않다면 잠옷이나 시트, 이불을 덮어라. 방 온도는 65도에 불과해도 피부 온도는 90도 범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명심하라.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침구를 장만하라. 평균 수준의 자동차를 타고도 출퇴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좀 더 편하게 출퇴근하려고 수만 달러를 추가로 차에 지출하는 게 미국인이다(예: 더 고급스러운 좌석, 더 많은 헤드룸). 하지만 이런 사람도 잊고 있는 게 있다. 자동차보다 보내는 시간보다 무려 네 배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침대에 투자하지 않는다. 고작 수백 달러를 쓰면서 많다고 투덜거린다.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이집트산 면을 구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 비싸다고 해서 반드시 품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몇 수”로 뽑았다는 소리에 솔깃하지 마라.) 그러나 생필품을 사고 여윳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침구류에 투자하라. 다른 건 몰라도 베개만큼은 최고의 제품을 사라. (나는 푼돈을 모아서 65달러를 주고 Palais Royale™ Pinnacle Goose Down Side Sleeper를 클리어런스에서 구입했다. 현명한 지출이었다.)알코올과 카페인에 시간제한을 두라. 알코올은 수면 패턴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늦은 시간에는 마시지 말라.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대신에 다이어트 콜라를 정말 많이 마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다이어트 콜라를 마셨고, 자정에도 별생각 없이 마시곤 했다. (그렇지만 새벽 2시 30분 이후에는 안 마시려고 했다.)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는 내가 섭취한 모든 카페인이 30분 이내에 “내 몸에서 빠져나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살았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트레비스 브래드베리의 설명이다. 카페인의 반감기는 6시간이며, 이는 체내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 24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이다. 오전 8시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면, 오후 8시에도 아침에 마신 그 커피의 카페인이 25퍼센트가 내 몸에 남아있다는 말이다. 정오 이후에 마시는 음료는 취침 시간에 50퍼센트 수준으로 도수가 유지된다. 당신의 혈류에 흐르는 카페인, 복용량에 따라 부정적인 영향이 증가하는 모든 종류의 카페인은 숙면을 어렵게 만든다. 나는 낮잠 자기 전에도 또 밤에 자기 전에도 쉬지 않고 몸에 카페인을 들이부었다. 내가 잠을 자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요즘은 오후 두세 시 이후로는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는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하나의 시작이다. 규칙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도록 계획하라. 내가 어른이 된 이후 내게 “취침 시간”은 대부분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시간을 의미했다. 하지만 기상 시간은 그나마 규칙적이었는데, 시간에 맞춰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의 취침과 그나마 규칙적인 기상 시간이라는 그 수학이 결코 몸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건 당신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토요일 늦잠으로 부족한 잠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생체 시계에는 따로 “주말”로 표시된 설정이 없기에 상황이 더 나빠져 갔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수면 패턴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고, 내 몸은 마치 시차 때문에 생기는 피로 비슷한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요즘 들어서 나는 취침과 기상 시간을 일주일 내내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규칙을 정했고, 페이스북을 확인하거나 넷플릭스 몰아보기를 하는 걸로 새벽 4시까지 깨어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 시간에서 우선순위를 더 잘 조정하게 되었다. 이건 다 아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실행 여부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이다. 나도 다 해봤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 “사람들에게는 지시보다는 자주 상기시켜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취침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지금까지 내가 소개한 방법을 시도해보라. 되도록 다 활용해보라. 숙면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함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신 육체를 잘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라. (덧붙임: 위에서 소개한 제품이 팔린다고 내가 무슨 커미션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글 속에 있는 Amazon 링크를 사용하여 구매하면, TGC가 약간의 수익을 얻는다.)원제: How to Love God by Getting More Slee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암에 걸린 은사지속론자의 고백: 나는 여전히 신유를 믿는다
by Tim Shorey
2023-07-20
나는 예후가 좋지 않은 4기 암 환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만지심으로든 또는 중보 기도를 통해서든, 신유를 믿는 사람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또는 우회하여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순간이 있다고 확신한다(고전 12:7-9). 그리고 그런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다른 이유가 필요 없다. 오로지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의 능력이 치유의 기적을 만든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그런 역사가 일어날 때 육신은 해방을 맞고 영은 기쁘게 뛰며 입술은 찬양하게 된다. 한 가지 분명히 하자면, 나는 사기꾼 신유 은사자, 믿고 외치면 다 이뤄질 거라고 주장하는 종교 호객꾼, 번영 복음을 파는 행상인 또는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종교 전문가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은 나의 믿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몸과 영과 마음을 치유하는 실제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신유 능력을 믿는다. 진짜로 병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이름이 가진 권위에 의해서 완벽하게 치료되고 또 종종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중보에 의해서도 치료가 촉진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암 환자이다. 나를 위한 수많은 기도가 있었다. 믿음도 충분하고 또 안수까지 받았음에도, 나는 여전히 암 환자이고 지금도 시계는 똑딱거리고 있다.이런 현실은 나를 믿음의 곤경에 빠뜨린다. 나는 치유의 은사를 확신하는 은사지속론자이지만 또한 동시에 낫지 않는 병이라는 현실에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콧물이나 모기에 물린 상처, 또는 종이에 베인 상처 등등의 자연 치료를 놓고 치유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치유도 나름 중요하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방을 차지한 두 마리 코끼리치유 은사 신봉자로서 나는 방을 꽉 채운 거대한 코끼리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첫 번째는 35년 동안, 365일 24시간 7일, 나를 떠나지 않는, 의사가 진단한 신경 손상 유발 두통이다. 두 번째는 4기 암이다. 이 두 가지 다 치유되지 않았다.아이러니는 고통스럽다. 나는 환자를 위해 기도했고 또 기도로 치유되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치유가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도 아마 나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바울도 치유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고쳐 달라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고후 12:7-10).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 드로비모도 낫지 않는 병 때문에 남겨져야만 했다(딤후 4:20).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이 사랑한 디모데의 고통스러운 위장병과 (낫지 않는) 병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고작해야 적당한 양의 포도주를 처방하는 게 전부였다(딤전 5:23).비록 내 경험이 전혀 다른 현실을 반영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치유하실 수 있고 또 반드시 치유하신다고 믿는 것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마땅히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이다. 내 경험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한다. 성경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과 경험 그리고 선호도 및 인식은 종종 틀리기 마련이다. 중간에서 살기그러나 이런 현실은 나를 실존적 수렁에 빠뜨린다. 사랑이 많으신 하늘의 아버지, 치유하실 수 있고, 또 치유하고자 하는 자비로운 사랑도 있으신 아버지, 게다가 종종 치유하시기도 하는데, 왜 나는 아닌가? 이럴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하나밖에 없다. 나를 위한 더 좋고, 더 현명하고, 더 사랑스러운 계획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 나 자신과 싸우는 길밖에 없다. 내가 아직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그분의 놀라운 목적, 내가 알려야 알 수 없는 신비, 내가 아직 분별할 능력이 되지 않는 계획, 그리고 내가 아직 볼 수 없는 영광이 그분 안에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하루하루 암과 싸우며 살고 있다. 내 삶은 다음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끼어 있다. 겉보기에는 충만한 믿음으로 “믿고 선포하면 다 이뤄진다”며 모든 병이 다 낫는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이면 낫게 하실 거야”라며 마치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상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 변명에 지나지 않는 믿음을 읊조리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 중심을 아신다. 전자의 말투는 믿음을 가장한 주제넘음으로 들리고, 후자의 말투는 겸손을 가장한 의심으로 들린다. 나는 최대한 중도를 취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 치유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성경과 실생활에서 그가 항상, 심지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전혀 치유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영원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주 최강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용광로 속의 하나님나는 점점 더 조심스럽게 침묵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은 결코 예측할 수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길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아간다. 그분은 회오리바람과 폭풍우 속에 계시고 천둥소리는 그분의 권능에 비추어 속삭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유롭고 길들지 않는 존재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거하시며 빛으로 어둠을 삼키시며 온 땅을 밤낮으로 두루 다니시며 자신의 강함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돌보심을 나타내시고 또 그때그때 목적을 이루어가신다. 그분은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을 펼치시는 분이다. 하나님 같은 분은 세상에 없다. 엇비슷한 존재도 없다. 할렐루야!(창 1:1-3; 대하 16:9; 욥 26:12-14; 사 46:9; 57:15; 나 1:3; 고후 4:6; 계 21:22-25).비록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는 내 병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고 시급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에는 처리해야 할 죄와 구원, 사탄과 사망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종종 질병을 사용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하고, 사탄과 세상에 신자의 삶을 유지하는 그분의 은혜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 물질을 향한 육욕적인 사랑에서 멀어지도록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궁극적인 목적지로 인도하신다.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더 이상의 질병과 죽음이 없는 영광 속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는 우주의 119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고 항상 현장에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콧물감기 또는 암 4기에 걸리는지 아닌지의 문제보다 훨씬 더 깊고 개인적 또 우주적으로 중요한 일에 마음을 쏟고 있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이 모든 사실은 내게 세 명의 히브리 청년이 가졌던 믿음을 갖도록 했다. 하나님이 구원과 치유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확증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나도 그들처럼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할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오늘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변함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족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단 3:17-18).하나님은 용광로와 불 속에 빠진 나와 지금도 함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상상하기에는 너무나도 놀랍고 지혜로운 무엇인가에 지금도 열중하고 계시다. 이것이 바로 영혼까지 지치게 하는 암에 걸려 약해지는 내가 매일 매일 쉬지 않고 싸워가며 지키는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내 앞에 놓인 길이 치유일지 아니면 천국일지 몰라도 오늘 하루 나를 지탱하는 생명줄이다. 원제: I’m a Continuationist with Cancer. I Still Believe in Hea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은사지속론
신유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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