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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매일 큐티

믿음이 어디 있느냐?

7월 23일 말씀 QT_누가복음 8장 16-25절

2022-07-23

누가복음 8장 16-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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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빛과 어둠


흰색에는 검정이 없다. 마찬가지로, 참 빛에는 어둠이 없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16절). 빛은 숨은 것을 드러내며 감춰진 것을 알리고 나타낸다(17절). 


사람들은 저마다 빛을 찾아내려 한다. 사람들이 찾아낸 빛은 돈과 과학이다. 그런데 이 빛은 밝은 면도 있지만 어두운 면이 더 크다. 사람보다 돈이 앞서면 인격이 무시당한다. 과학이 주는 편안함보다 그 피해가 더 큰 불안 요소가 된다. 돈과 과학은 조금의 편안함을 줄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불안을 준다. 삶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두려움과 공포가 돈과 과학에서부터 비롯된다.


“빛이 있으라(창1:3)” 하나님의 말씀은 맨 처음 빛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빛은 그림자가 없는 온전한 참 빛이다. 이 빛을 덮어두는 사람은 말씀을 듣지만 행함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 듣고 행하는 사람은 빛을 등경 위에 두는 사람이다.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18절)”라고 하신 것은, 듣고 행함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 이유는 있는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편과 저편


줄타기를 잘하는 자가 고수다. 그리스도인은 경계선 위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면 경계선 밖의 사람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경계를 넘어 저편으로 나아갈 때 주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끼리만 있으면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이편에만 머물러서는 저편의 상황을 알 수 없다. 사탄은 우리가 이편에만 있기를 원한다. 저편으로 가는 길은 때로 험하고 위험하다.


저편으로 건너가려는데 마침 광풍이 불어 위태롭게 되었다(23절). 사역에 지치셨는지 예수님은 배에 오르시자마자 곧 잠이 드셨다. 뱃사람인 제자들도 감당하지 못할 광풍이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다. 전문가인 그들도 어찌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해보시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목적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과 오랜 시간 함께였다. 시간이 긴데, 허무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풍랑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한 장치였다. 왜냐하면, 풍랑, 즉, 큰 위기의 순간에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꾸짖으신다(24절). ‘꾸짖으시니’의 원어는 헬라어 ‘에피티마오’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가알’(비난하다, 꾸짖다)의 역어로 사용된다. 특별히 하나님의 질책에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시9:5)”, “홍해를 꾸짖으시니(시106:9)”,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슥3:2).”가 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질문하신다. 평행본문에서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로 표현이 다르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믿음은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내 안에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며 한 몸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찾아낸 빛은 어둠이 없는 참 빛인가? 나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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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 8시 말씀 QT가 현대인들이 성경을 쉽고 감동적으로 읽도록 제작한 오디오 성경 '드라마 바이블'과 함께 합니다.

    해당 본문 듣기를 클릭하면 본문 말씀을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성자 :권대관(동두천은성교회)
출처 : Next세대mini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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