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묵상의 불길로 영혼을 덥혀라
by David Mathis
2019-12-09
인간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깨달으라고 말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골똘히 생각할 수 있고, 그 의미를 깊이 느껴볼 수 있다. 어떤 실재에 대하여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보고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하려는 특성이 있다.이러한 자질을 성경적으로 ‘묵상’이라고 부른다. 돈 휘트니(Don Whitney)는 묵상을 “이해와 적용 및 기도를 목적으로 성경에 계시 된 진리와 영적 실재를 깊이 생각하기”(Spiritual Disciplines)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의 삶에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이다.기독교적인 묵상인간에게 있는 묵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뇌 건강과 혈압 저하를 위해 묵상을 하며, 묵상을 통한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효과를 만들려고 한다. 세계 여러 종교에서도 묵상에 관련한 활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묵상은 여러 비기독교적 단체에서 대중적으로 말하는 ‘묵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적인 묵상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생각을 채우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와 그 묵상한 내용을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다. 크리스천에게 묵상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골 3:16)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의 생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묵상과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것을 천천히 소화 시킨다.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고, 즐기며 깊고 풍부한 맛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이다.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못하므로 묵상을 통해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주야로 하는 묵상우리는 지금 믿음의 선배들이 행하였던 묵상의 모습을 많은 부분 잃어버렸다. 죄의 오염으로 손상된 현대의 삶은 쉴 틈이 없을 만큼 빠르고 분주하다. 이러한 분주함으로 인해 묵상을 잃어버렸다. 창세기에서는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했다]”(창 24:63)고 한다. 성경은 묵상을 위해 분주함을 버리고 차분하게 앉아서 집중하며, 방해 거리를 차단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묵상에 관한 내용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모세의 죽음 이후에 구속 역사의 핵심 연결 고리로 여호수아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수 1:6, 7, 9)라고 세 번 명령하신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강함과 담대함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묵상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수 1:8)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의 의미는 단지 율법책을 친숙하게 읽어내려가라는 뜻이 아니다. 말씀에 붙잡혀 그 진리로 그의 삶을 세우라는 말이다. 그의 생각과 느슨한 마음이 말씀을 향하도록 그 줄을 잡아당겨 팽팽하게 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으로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풍성한 정서를 통하여 행동에 영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시편에서의 묵상묵상에 관해서는 시편 두 곳에서 길게 나온다. 시편 1편 1-2절은 여호수아 1장을 떠오르게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고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단숨에 읽고 끝내지 않는다. “주야로 묵상한다.” 시편 119편에서는 묵상과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는 내용이 주로 나온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도들”(15, 78절), “주의 교훈들”(23, 48절), “주의 기이한 일들”(27절)을 묵상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린다]”(99절)고 했고,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절)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에게 구약의 교훈이 귀중했다면, 신약의 복음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묵상이 되고 있는가. 묵상은 잃어버린 연결 고리이다성경 묵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가장 잘 누리게 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오랫동안 교회 역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교도들은 무엇보다도 많은 묵상의 선물을 즐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말씀 섭취) 귀 기울이는(기도)데 주목했다. 휘트니는 유명한 청교도들이 언급한 묵상의 효과를 인용하며, 묵상은 “말씀 섭취와 기도를 연결해 주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했다. 여러 묵상가들은 기독교의 전통적 묵상 방식을 다시 찾아 삶에서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읽기나 듣기로 시작하라. 묵상으로 나아가고, 기도로 마치라”(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말씀은 묵상으로, 묵상은 기도로 이어진다. [중략] 묵상은 듣기를 뒤따르고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중략] 말씀으로 섭취한 것은 묵상으로 소화 시키고 기도로 내보내야 한다”(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우리가 말씀 읽기에서 그리 멀어진 이유는 묵상의 불길로 우리 영혼을 덥히지 않기 때문이다”(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우리의 기도가 효과적이지 못한 주된 이유는 기도 전에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크리스천에게 묵상은 기능 면에서 다른 훈련들과 관련 있다. 묵상은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완전히 동떨어진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묵상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그분께 말하기 사이에 있는 간극을 좁혀준다.묵상할 때, 우리는 잠시 멈추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그것이 우리 가슴에 불을 붙이게 한다. 묵상의 불길로 우리 영혼이 뜨거워지도록 말이다. 우리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다. 하나님의 계시에 깊이 들어가서 그것을 우리 영혼 속으로 가져온다. 그분의 진리로 인하여 변화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말하듯이, “묵상은 기도를 위한 최상의 준비이므로 기도는 묵상이 내놓는 최상의 것이다.” 참된 치유기독교의 묵상은 우리 몸의 자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자세에 관한 것이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거나, 발을 바닥에 대고 곧게 등을 펴며,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의자에 앉는 등 어떤 형식적인 자세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묵상은 눈을 성경에 두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혹은 암기한 성경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일이다.우리의 이목을 끄는 특정 구절을 택하여 그것을 좀 더 폭넓게 읽고, 시간을 할애하여 그 속에서 깊이 머무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에 의식적으로 펜을 들거나 키보드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고 집중한다. 그분의 사랑으로 깨달음으로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하며, 우리를 기도로 이끌고 그날 하루로 이끌도록 한다.쉼이 없고 분주한 사회에서, 묵상은 우리의 정신 건강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에 참된 치유와 회복을 선물해준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arm Yourself at the Fires of Meditation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과기도
돈휘트니
치유
시편
은혜
호프 씨의 마지막 희망
by Michael A. Rogers
2019-12-07
나는 최근에 호프 씨를 묻었다. 호프 씨는 성숙한 기독교인 여성이고 86세였다. 그녀는 이름이 호프인 것처럼 내가 그녀의 목사로서 알고 지낸 20년 동안 희망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재활센터에서였고, 그녀는 교통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상황이었다. 호프 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지팡이 두 개나 필요할 만큼 매일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이런 그녀는 여러 가지 건강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기뻐하며 조금도 절망하지 않았다. 호프 씨는 애초에 4개였다가 갑자기 6개로 늘어난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에 나는 다른 목사 한 명과 병원에 방문했다. 야고보서 5장에 근거해서 그녀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치유를 위한 기도를 했다. 그녀는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호프 씨는 48시간에 이르는 엄청난 심장 수술을 견뎌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야고보서 5장 15절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마지막 날에) 그를 일으키시리라.”목사들은 이제 종말이라는 궁극적인 주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주님의 날에 있을 모든 영혼을 향한 심판, 믿지 않는 자들을 필연적으로 기다리는 지옥,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에게 준비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좀 더 자주 설교해야 한다. 요즘 주로 들리는 얕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복음주의 설교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당연히 선포해야 할 궁극적인 희망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몇 세기 앞선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급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했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전염병의 위험 속에서 살았다. 훨씬 더 짧은 수명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를 좇지 않았다. 주변에 산재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강단에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희망을 선포하는 설교가 울려 퍼졌다. “죽어가는 한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 나는 다시는 설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라고 말하는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설교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가?성경을 보면서 환상적으로 멋진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원하는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약에서는 믿는 이들에게 현재를 넘어서는 내세의 구원 약속이 극히 드물게 나타난다. 극히 드문 약속도 고통이라는 우울한 배경에서 나온다. 욥기 19장 25-26절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16편 11절도 욥기와 유사한 위로를 보여준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조차도 기독교인은 죽은 뒤에 두 단계를 거친다는 신약의 가르침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가장 먼저는 죽은 후 몸을 떠난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즉각적인 경험이 있다(빌 1:23). 히브리서 12장 23절에서는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그 위대한 부활의 날까지 주님과 함께 있는 왕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린다. 오로지 홀로 죽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영과 혼은 불사(immortality)의 선물을 받았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의식을 가진 영혼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육신 없이 영혼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육신을 실재로 간주하고, 영혼은 형체가 없는 일종의 유령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영혼의 무게를 재거나, 영혼을 측정하거나, 영혼을 셀카로 찍은 사람이 있던가? 그러나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중요하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영적이지만, 실질적인 존재를 영유한다. 바울은 이어서 고린도후서 5장 7-8절에서 말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을 때에 육신은 무덤에 남기고 떠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 신학자들은 보통 죽음을 통하지 않고 영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중간 상태”(intermediate state)라고 부른다. 이 말은 사이(between)와 불완전함(incompleteness)을 함축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영원의 단계로 들어가는 첫 과정을 “즉각적인 천국”(immediate heaven)이라는 좀 더 긍정적인 말로 부르고 싶다. 강조할 부분은 바로 이 시작 단계에서 접하는 ‘즉각성’이다. 예수님은 회개한 십자가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성경적인 희망은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는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육체적으로 사망한 즉시 주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with)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인의 희망에는 두 번의 단계가 있다. 놀라운 예수의 재림은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시작이 된다. 그리고는 다음 단계가 급작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 앞에서 분명하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는 신자들의 영혼과 함께 온다(살전 4:13-18). 모든 믿는 자들이 부활의 몸으로 새로워진다(고전 15:51-57). 그 놀라운 날에 기뻐하며 왕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은 구세주의 확실한 보호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호소해도 정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차단된다(마 25:31-46). 창조는 이제 그 자체로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롬 8:20-21; 벧후 3:10-13). 성도가 누릴 미래 경험의 정점은 성경의 마지막 두 장에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예언한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이것은 모든 악, 죄, 죽음, 슬픔의 흔적이 사라진 궁극적이고 완전한 상태이다. 요한계시록 22장 4-5절은 주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마지막 핵심이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중략]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마지막 때 하늘 전체를 덮는 파노라마는 너무나도 놀랍기에 수백만 명의 회의론자들이 성경의 결론을 환상 또는 신화로 여긴다. 냉소주의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기에 “과장된 상상속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들이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무엇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만연해있는 고통과 죽음을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악과 고통을 마지막 결론이라고 믿지 않을 뿐이다.‘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희망은 미래 세계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중략] 그런다고 지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방치하라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했던 그리스도인은 다음 세상을 가장 열렬하게 기다렸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은 미래로 확장되는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확실한 약속이라고 믿는다.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기에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지 반드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희망을 한번 살펴보자. 로마서 4장에서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처럼 자식을 낳을 수 없고, 태가 죽은 것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아내 사라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한 존재가 하나님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절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중략]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 4:18). 바울은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라고(21절)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살아있는 희망의 핵심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그의 역사적인 재림을 상상하는 것, 놀라운 부활의 몸을 받는 것,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행하는 것, 이러한 미래의 희망을 모두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고, 경험해본 사람도 없기에 그것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세상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아담(Thomas Adam)은 이 문제를 이렇게 결론 내렸다.“희망은 맑은 얼굴을 가진 현숙한 여인이다. 그녀는 이 땅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목표는 하늘에 있다. [중략] 믿음은 그녀의 변호사, 기도는 그녀의 간청자, 인내는 그녀의 내과의사 [중략] 감사는 그녀의 귀중품 보관소, 자신감은 그녀의 해군 제독, 하나님의 약속은 그녀의 닻 [중략] 그리고 영원한 영광은 그녀의 면류관.” 우리 부부는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묻힐 땅에 놓을 비석을 작년에 샀다. 누구나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항하여 희망의 간증을 새긴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거기에 빌립보서 1장 21절을 새겨 넣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은 부활 신앙에 근거하여 오늘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확신으로 서 있는가? 출처: www.ligonier.org원제: Our Final Hope번역: 무제
복음
부활
중간상태
재림
천국
희망
루이스
보험금이 당신을 대체할 순 없다!
by Jay Hohfeler
2019-12-06
의사가 내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 줬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잘됐네.”의사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한 건 아니지만, 나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기본 계획이 갑자기 제자리를 잡아 간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의 은퇴 연금은 더 늘어날 것이고, 55세의 나이에, 그러니까 내 생명보험이 만료되기 전에 죽음을 맞음으로 진짜 큰 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나는 아내와 세 딸이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순식간에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재정적인 성공을 느꼈다.내가 이 이야기를 다른 남자들에게 하면, 대부분 그들은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여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내 생각에 예외 없이 충격을 받았다. 사실, 여자들의 그러한 반응이 옳다. 비록 내 생각이 남자들에게는 일반적이더라도, 이는 왜곡된 판단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우상 숭배의 증거이자 거짓 신을 의지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친구인 한 의사는 “글쎄, 나는 자네 부인 베스와 아이들 생각을 했어”라고 말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숙한’ 나의 확신, 즉 내가 이 세상에 연연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의 이면을 꿰뚫어 보았다남은 가족을 먼저 고려한 의사 친구의 생각은 정확했다. 나는 내가 죽었을 때 가족이 느낄 고통과 트라우마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명보험이 유효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경우, 보험금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비교하여 베스에게 설명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당신은 정말로 보험금이 당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글쎄, 뭐, 그렇지 않을까? 처음에야 힘들겠지만, 당신하고 애들은 잘 이겨낼 거야. 그리고 또 다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뭐.”“우리는 극복 못해요. 당신은 우리 가족에게 당신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 가치를 너무 깎아내리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경우 우리가 느낄 충격도 너무 과소평과하고 있어요.”이 대화는 하나님이 내 생각과 마음을 바꾸시기 시작한 중심점이 되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가진 것 안에서 자족하며 사는 삶보다, 내가 죽어서 받게 될 큰 돈으로 풍족하게 사는 게 가족에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런 식의 우상을 부자 청년 비유를 통해서 경고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거짓말을 리허설하기남자들이 특히 쉽게 믿는 몇 가지 공통된 거짓말이 있다. 내 직장이 가족에게 풍요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미래의 경제 상황을 예수님께 맡기면 내 삶의 질은 떨어질 것이다. 부를 얻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니까, 결혼 생활 및 가족과 관련된 일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주간, 새벽 3시 정도에 나는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내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해 뭐가 더 나은가? (1)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존의 저축 금액으로 사는 것, 또는 (2) 가족에게 엄청난 현금을 남기고 죽는 것.5년 동안 이어진 상상할 수 없는 림프종 고통, 그리고 골수 이식으로 두 번이나 겪은 거의 죽음에 이르는 합병증을 통해, 주님은 내 영혼을 변화시킴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준비해두신 맞춤형 고통 없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우상 문제에도 손을 대셨다. 처음 아팠을 때에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인생은 계속되었고 모두 다 바빴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가족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또 보험금이 얼마나 가족에게 큰 힘이 될지를 생각하는 중에도, 내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변화의 기초이고 핵심이었다. 아내는 내가 미래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가족에게 더 가치를 두기를 원했다. 또한 아내는 나의 용기, 그리고 냉소를 누르는 유머 감각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순간에조차,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오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우리 가족은 돈보다 나를 더 필요로 했다. 내가 너무도 늦게 깨달은 교훈이었다. 진리를 리허설하기나는 이제 나를 유혹하는 거짓말과 싸우기 위해 진리를 리허설해야 한다. 부를 얻는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신 8:17-18).하나님에게 나는 가치가 있다. 그분은 내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내게 주저함 없이 그분의 왕국을 주셨다(눅 12:24, 28, 32).가정에 돈을 가져다준다고 내가 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돈이 좀 없다고 열매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거짓 신이 그런 삶을 가져다준다.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내가 주는 부요함이 아니다.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 진리를 붙잡고 살고 있다.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높은 의료비, 세 명의 대학생, 그리고 투병생활 5년간의 실업으로 인해, 우리의 퇴직 연금은 상당히 소진되었다. 긴 투병 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변화된 삶을 위해서라면 그 시간을 기꺼이 반복할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우리는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냉소적이지 않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당신이 구원하신 자녀를 향한 흔들림 없는 관심을 본다. 나는 항상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너의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를 알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그 은혜는 결코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몇 방울이 아닌 강하고 자애로운 흐름이다. 몇 년 전, 나는 병원에서 구원을 위해 물질적 풍요에 매달렸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붙잡는다. 그리고 내 통장의 잔고가 아무리 적더라도 그분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그분이 이끄시는 한 어디라도 따라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풍요롭게 사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Family Needs More Than Money번역: 무제
가족
보험
생명
풍요함
거짓말
진리
리허설
말씀과 긍휼의 사역은 뗄 수 없는 친구!
by Cynthia Ruble
2019-12-05
18년 전 일본에 선교사로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발걸음의 목적을 명확히 해 두어야 했다. 그곳의 비기독교인들은 내 사역의 성격과 의도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다. 한 일본인 크리스천은 심지어 내게 “일본에는 더 이상 선교사가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면, 나의 일은 인기가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우리의 전도 활동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당신을 회심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섬기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라고 응수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면 은혜의 복음을 놓칠 수 있다. 우리 주위의 문화와 더 적극적으로 상호 작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큰 의미의 복음과 더 넓은 의미의 선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그들이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일본에서 하는 일이 고작 빈둥거리며 겉치레로 하는 것이라면, 내가 전하는 메시지는 존중받기 어려울 것이다. 매일 과로에 시달리는 일본인들의 눈에는 그저 게으름으로 비춰질 뿐일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10년간 영어를 가르쳤던 것도 근면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회의론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다.사람들은 우리가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말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충실히 증거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방도들을 모색해야 했다. 당시 일본에는 미혼모들을 위한 시설이 전무했고, 태어난 아이들은 입양되기보다는 주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낙태를 경험한 이들을 위한 상담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내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몇몇 일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임신한 여성들을 위한 시설이며 또한 낙태를 경험한 이들을 위한 상담소인 임신상담센터(Crisis Pregnancy Center)를 운영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나와 함께 거주하는 미혼모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동네에 카페 하나를 열어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말씀 사역”과 “긍휼 사역”을 동시에 해 온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사회적 실천주의(social activism)에 깊이 천착한 이들이 “우린 그저 사람들을 ‘회심시키려고만 하는’ 이들과는 달라. 우리는 이 세상과 전인적으로 소통하면서 이곳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라고 말하며 너무도 쉽게 자기 의의 덫에 빠지는 것을 많이 목격해 왔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군가를 사회적 행동에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그렇다면 소위 바꾸고자 하는 이 세상과 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사회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우리에게 가장 우선되는 부르심은 ‘지상 대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순한 기독교 사회 운동가들이 아니라, 십자가 군병들이다. 십자가 군병들사회 정의 사역을 하면 이 세상이 우리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고, 우리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 줄 수도 있다. 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는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 군병들로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고, 그것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2011년에 한 일본 영화 제작자가 만든 입양 장려 다큐멘터리에서 우리의 사역이 소개되었고, 거기에서 나는 기독교 선교사로 안내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필두로 연이어 나온 작품들을 통해 일본 내에서 입양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다. 이 다큐멘터리 때문에, 그리고 다운 증후군이 있는 남자 아이를 입양한 나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일본 내 입양 지지자들로부터 하나의 부탁을 받았다. 바로 입양 규제 정책을 새로이 입안 중인 일본 정부 관료들을 동경에서 만나 그들을 설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그 관료들은 기독교 입양 단체 같은 사립 입양 기관의 활동을 계속 허용해 주기로 결정했다. 정말 신속하게, 일본 정부는 입양에 반대하는 쪽에서 입양을 장려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지방 자치 단체는, 매일 밤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한 교회도 다녀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혼모들을 우리 단체로 보내어 거주하게 한다. 사역에 임할 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씨를 뿌릴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의지가 강하고 성실했던 시주카(가명)는 아이를 낙태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임신 초기에 나와 나누었던 전화 통화가 그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임신 40주 차가 거의 다 찼을 때, 시주카는 노숙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그로 인해 우리 센터에 들어오게 되었다. 들어올 때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시주카는 분노에 차 있었다. 낙태를 했어야 했다며 나를 비난했다. 성경 공부를 할 때면 시주카와 그녀의 친구는 자주 조롱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난 후, 시주카는 일을 구할 수 있었고 자기가 낳은 아들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녀와 연락을 했고 계속 기도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시주카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녀는 근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그 교회 목사의 아내가 시주카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시주카의 세례식 사진을 받았다! 바로 며칠 전, 그녀는 아들과 함께 떠난 휴가지에서의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거칠기 짝이 없던 이 회의론자가 이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어머니가 된 것이다. 그저 사회 운동가로만 사역한다면 나는 ‘내가’ 뭘 하는지에 집중할 것이다. ‘내가 정말 충분히 잘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십자가 군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낙태를 경험한 내담자들과의 상담을 마치고 기도를 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은 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이유이다. 많은 경우, 상담을 받는 여성(혹은 남성)이 기도 중에 흐느껴 울고는, 복음에 초점을 맞춘 상담을 계속 받을 수 있는지 묻곤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 군병들로서 자신이 뿌린 씨가 언젠가는 화려하게 피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그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이들을 위한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관점이 있다.근본적 문제, 근본적 해결책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말씀하셨다. 천사들마저도 기쁨으로 춤추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원하고 또한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힘은 오직 은혜의 복음에만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마 9:1–8). 이를 무시하면, 이생에서는 개선된 삶을 살더라도 종국에는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덧붙여 말하지만, 십자가 군병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최후의 전사이시다. 그때까지 우리는 지상 대명령을 받들어 행할 뿐이다. 우리가 그분을 증거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문화의 어떤 국면들을 새롭게 접하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양 떼를 먹이고 단조로운 삶 속에서도 신실하게 섬기도록 하시며, 때로는 우리를 박해나 순교의 자리로 부르시기도 한다. 이를 분별하는 일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은 짧기 때문이다. 우리 각각을 향한 독특한 부르심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3–14)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Are Close Friends번역: 이정훈
선교전략
전도
회심
긍휼
지상대명령
십자가군병
말씀
사역
내 감정이 끔찍한 신이 될 수도
by Greg Morse
2019-12-04
우리는 지금 이모티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지금의 세상에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진짜 내가 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 어떤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느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때로는 자동 반사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담은 웃는, 우는, 놀란 또는 화난 얼굴의 그림을 메시지 또는 댓글에 표현한다. 차마 바닥에서 뒹굴 수는 없다고 해도, 감정을 참는 ‘가짜’(fake)가 되기보다는 어떤 감정이라도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다른 선택은 없다. 이제는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우리의 감정생활이 모든 사람에게로까지 확산된다. 배우자, 부모 그리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들에게로까지. 화가 나서 하나님에게 소리치는 것도 잘 하는 것이라고 칭찬한다. 이 모든 것에는 하나의 가정(assumption)이 있다. 좋든 나쁘든 간에, 감정이 바로 너라는 것! 네 감정을 누르는 것은 곧 너 자신을 누르는 것이라는, 바로 그 가정이다.그러나 그게 항상 맞는 건 아니다.C. S. 루이스가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에서 기술하기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고착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훈련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마땅히 훈련되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가슴이 머리를 지배하면 안 된다. 가슴은 머리에, 이성에 복종해야 한다.” 가슴속에서 가마솥이 끓기 시작할 때, 우리의 내적 양심은 이런 지시를 받아야만 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싶은 이 감정은 완전히 잘못된 거야.”“잘못되었다”(out of line)는 말은 고대 사람들이 감정을 평가하고 재조정할 때 잣대로 사용한, 현실(reality)이라는 거대한 저울을 쉽게 풀어쓴 말이다. 바로 이 기준에 따라서, 감정은 적절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정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 그리고 표현되어야 할 것과 억눌려야 할 것으로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은 당연히 표현되어야 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시기심에 의한 슬픔이라면,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하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슬퍼한다면, 그건 잘못 표현된 슬픔이다.교사가 학생들의 감정 훈련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활동하던 시대도 있었다. 단지 곱셈과 영문법을 교육하는 대신, 교사는 학생들이 미워해야 할 것을 미워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고, 선과 악에 각각 어떻게 대응할지도 가르쳤다. 감정적인 단어를 포함한 광고(emotional propaganda)에 회의를 품는 오늘날, 우리는 이런 감정적 선동을 하는 광고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왜 전혀 검증되지 않은 감정을 광고에 마구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궁금해한다. 이제는 어린 딸이 학교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부모가 아이에게 독단적인 분노의 감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감정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훈련하길 원하실까?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은 그런 훈련을 명령하셨다.하나님은 ‘마음으로’(롬 6:17) 하는 순종을 명령하셨다. 종종 우리는 마음을 통제가 안 되는 그 무엇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부모와 달리 하나님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지를(눅 12:4-5),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기뻐하지 말아야 할지를(빌 4:4),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를(롬 12:9), 우리가 어떻게 화를 내고 어떻게 안 낼 수 있는지를(엡 4:26),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빌 4:6) 알려 주신다.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을 다룰 때, 우리는 기독교가 아닌 도덕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면은 더러운 감정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만 그럴듯한 행동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마 23:27).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롬 8:27).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소녀도 어느 지점에서는 하나님이 그녀에서 단지 참으라고만 하지 않으신다는 좋은 소식을 들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변화를 제안하신다. 하나님은 새로운 감정을 명령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자신이 명령한 그 감정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게 놀라운 소식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감정에 종속된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거룩함에 어울리는 감정을 느끼도록 가르치시는 걸까? 이는 최소한 다음 네 가지 도움을 통해서이다. 1. 그분의 아들거룩을 위해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기초는 복음이다. 우리가 과거의 분노, 정욕 그리고 냉담함에 대해 여전히 정죄받고 있는 상태라면, 감정을 개혁하거나 감정을 조절하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조절되지 않는 악을 향한 열정, 또는 선을 향한 부족한 열정 때문에 고통을 겪는 모두에게 좋은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다. 그분은 완벽한 감정 조절자이셨다. 그분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인 삶을 살았고, 우리를 위해 감정이 부서지는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 그 모든 사역이 우리 안의 원초적 감정의 핵심까지 새롭게 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보다 감정적으로 더욱 고통에 찬 외침이 있을 수 있을까(마 27:46)?2. 그분의 영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분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롬 8:9). 우리는 더 이상 혼자라고 느끼지 않는다. 모든 이해와 기대를 넘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만드셨다(벧후 1:4). 거기에는 우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실로 놀랍고도 새로운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고후 5:17). 감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정을 느낄 뿐 아니라 감정을 다스리는 영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감정적인 열매도 맺도록 하셨다(갈 5:22-23). 미움이 아닌 사랑, 절망이 아닌 기쁨, 혼란이 아닌 평안, 분노가 아닌 인내, 단절이 아닌 친절, 악함이 아닌 선함, 일시적이지 않은 신실함, 가혹함이 아닌 자비로움, 열정에 휘둘리지 않는 자기 조절! 그분은 감정생활의 핵심, 바로 우리의 마음을 다루신다. 3. 그분의 백성하나님은 감정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리에게 자기 계발서, 토크쇼 또는 요가 클래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의 백성이다. 성화는 공동체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공동체 안에서 늙은이가 젊은이를 지도하고, 각자가 다양한 은사로 서로를 섬기며,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생활한다. 우리는 서로를 세우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엡 4:15) 행한다. 건강한 정서적 상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의 건강한 정서 생활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가 하나님에게 중독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감정에 대해서는 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다. 4. 그분의 말씀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대문자 “R”로 시작하는 진짜 현실(Reality)을 드러내신다(히 11:1).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할 때, 그리스도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골 3:15-16). 예를 들어, 다음 네 구절에 걸쳐, 바울은 믿음을 갖게 될 때 드러나는 현실, 즉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키고 참을 수 없는 기쁨으로 넘치게 할 진짜 현실의 한 측면을 언급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그는 단지 “주 안에서 노래하라” 또는 “주 안에서 춤춰라” 또는 “주 안에서 웃어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럼 언제 기뻐해야 할까? 항상이다. 언제 멈춰야 할까?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언제 염려해야 할까?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왜? 하나님의 진짜 현실은 우리에게 염려할 이유를 아예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은 곧 다시 오신다. 이 세상의 허무한 현실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네가 독신이고, 속았고, 초조하고, 또 피해를 받았다면, 너는 충분히 불행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르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을 앞에 놓고도 행복하게 회복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말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비극을 맞아 삶 자체에 절망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세상 앞에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된다(고후 6:10).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 아주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아주 가까이 계신다.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떨어뜨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롬 8:37-39). 슬픔이 바다 물결처럼 닥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내 영혼, 평안해!” 모든 고통 너머에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계신다.이처럼 진짜 현실은 우리가 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거부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감정이라는 신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기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 있는 감정을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도 감정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그분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로봇이 아니다. 그러나 감정은 훌륭한 종인 동시에 끔찍한 신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이 하나님의 영과 그분의 현실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마구 흐를 때, 감정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나 자신에게 위협이 되도록 만든다. 무자비한 감정과 냉담함에 함몰되어 버린 세상, 사소한 것들 때문에 무감각해지고 영원에 대한 느낌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의 합리성을 알릴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같이 미워하며, 그렇게 살고, 웃고, 또 울면서 가장 높은 진짜 현실, 즉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그분의 재림이 우리에게 가깝다. 하나님은 감정에 휘둘리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마음을 고정한 사람들을 완전한 평화 속에서 지키신다(사 26:3).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Emotions Make Terrible Gods번역: 무제
생활
감정
훈련
루이스
도덕주의
무감각
아들
영
백성
말씀
십자군 전쟁이 남긴 교훈
by Robert Godfrey
2019-12-03
성경은 잘못 사용되면, 위험한 책으로 바뀔 수 있다. 지난 교회 역사를 보면, 성경을 오해해서 야기된 수많은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다. 거짓된 교리가 형성되었는가 하면 율법주의적인 관례들이 생겨났고 그릇된 방향으로 인생이 치닫는 경우가 수도 없이 발생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예가 있다면, 아마도 십자군 전쟁이 아닐까 싶다. 이는 중세 유럽인들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중동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의미한다.누군가는 기독교인들이 그 대의를 위해서라면 칼을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들어 그러한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11).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시 2:8-9).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시 110:5-6).혹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구절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각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영적으로 확장되는 역사와 그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 심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히려 비폭력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다.“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7-19).“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3-5).십자군 운동은 11세기 유럽에서 일어나 최소한 16세기까지 그 정신이 지속되었다. 이 전쟁을 이끈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는다는 명목 하에, 1096년으로부터 1229년까지 최소 다섯 차례를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십자군을 선동했던 인물들은, 원래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땅이 기독교 인구가 차지하던 지역이었는데 7-8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력이 정복하게 된 역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632년 마호메트가 죽은 지 6년 만에 이슬람 군대는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이후로도 이슬람 군대는 남쪽에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까지 진격했는데, 이러한 북진은 732년에 프랑스 푸아티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은 841년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약탈했고, 15세기부터 17세기에는 군비를 다시 갖추어 동방에서부터 유럽을 공격해 들어왔다. 그 결과 1451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후에는 비엔나까지 그 세력을 확장한다.이처럼 이슬람 세력이 어떻게 그 시작부터 단기간에 힘을 모아 성공적인 확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도대체 그 무엇이 유럽으로 하여금 중동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했는지도 하나의 의문처럼 여겨질 수 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에게 장악된 지 이미 4백 년도 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1세기 말, 정확한 사실인지 알기 어려운 어떤 소식이 유럽 사회에 퍼지게 된다. 바로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은둔자 베드로(Peter the Hermit)는 자신이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 나타나셔서 그 거룩한 성에서 이교도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도 이슬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유럽에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었다.그러다가 1095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그곳에 모인 성직자들에게 설교를 하며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촉발시킨다. 이미 예루살렘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독교인을 정복하고 있는 무슬림과 싸우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나는 이 사안과 관련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권하노니, 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여러분에게 명하시는 바이다. 이제부터 기사와 보병,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말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어떤 포고를 내려서라도 더 늦기 전에 그 거룩한 땅에서 악한 인종을 쫓아내도록 하라. 나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없는 자들에게도 뜻을 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니, 바로 이 전쟁에 참여하라. 그리하여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혹은 이교도와 싸우는 전장에서든 그 어떠한 결말로 생을 마감하게 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따라 그들에게 면죄를 선언하노라.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백성,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빛나는 이 백성이 악마한테 정복당해 능욕당하고 타락하여 노예로 전락한다면,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여러분과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들을 여러분이 돕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죄책을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시겠는가!그동안 신자끼리 무가치한 싸움을 일삼아 온 자들아, 이제 개전되어 승리로 마치게 될 이 전쟁, 저 불신자를 몰아내는 이 고귀한 전쟁에 참여하라! 지금까지 약탈자로 살았던 자들아,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라! 돈 몇 푼을 위해 일했던 자들아, 이 영원한 상급을 받으라!”이처럼 우르바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적을 죽이기 위해 칼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영적 의무이자, 영적 보상을 위한 일이라고 선언했다. 이 설교는 교회 역사상 기독교의 관심사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선포한 최초의 경우일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십자군에 참여해서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면죄를 약속했지만, 이후 등장한 교황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만 하면 면죄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거대한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다.그렇게 해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은 놀랍게도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다. 1096년에 출군된 유럽의 군대가 1099년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국(The Latin Kingdom of Jerusalem)이 그해에 세워져 1187년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또 그와 함께 다른 십자군 도시들도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 성공에 따른 폐해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었으며,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자행한 끔찍한 대학살은 이슬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기독교에 대한 평판이 그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다.1189년에서 1192년에 걸쳐서는 세 번째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었는데, 그에 앞서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찾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 그리고 (사자의 심장을 지녔다고 일컬어진)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1세처럼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왕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였던 살라딘과 전쟁을 벌였다. 바로 이 십자군을 배경으로 하여 (존 왕자와 싸운 로빈 후드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낭만적인 설화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네 번째 십자군 전쟁은 1200년에서 1204년 동안에 일어났는데, 이는 유독 결과가 안 좋았던 전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 진군했다. 거기서 비잔틴 제국의 왕좌를 둘러싸고 경쟁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204년에 십자군은 동방 기독교를 대표하는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엄청난 파괴 행위가 뒤따랐다. 위대한 예술과 문학 작품이 손실되었고, 십자군이 약탈한 수많은 유물이 배에 실려 서유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특히 베니스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물건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인들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the 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을 세워 1204년에서 1261년까지 군림하게 되었으며, 교황은 로마에 종속된 라틴 교구를 그곳에 창설하였다. 이런 사건은 동방 정교회를 격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1261년에 다시 회복되었지만, 이 십자군 전쟁의 여파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를 못했다.다섯 번째 십자가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했다. 그는 기독교인, 유대인, 이슬람교인 모두에게 예루살렘에 올 수 있는 권한을 약속함으로써 그 성지에 대한 통치권을 거머쥐게 된다. 이로써 기독교인은 1229년부터 1244년에 걸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교황 그레고리 4세는 프리드리히가 이교도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그를 파문에 처한다.이후로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1248년과 1270년에 각각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매우 경건한 마음을 지녔던 그는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리더였다. 결국 루이 9세는 1270년에 이집트에서 사망하게 되었고, 로마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십자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에 오른 예였다.이와 같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대한 기독교의 통치권을 영구적으로 쟁취하는 일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여러 가지 결과들을 남기게 되었다. 가령 유럽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또 비잔틴 제국은 반대로 쇠약해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에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는,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가 이슬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사실 여기에는 모종의 아이러니가 있다. 분명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영토를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그때 그들은 이후에 일어난 십자군만큼이나 잔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역사에서 십자군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들은 서구 기독교를 상대로 여러 차례 난폭한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무슬림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폭력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국가와 분리되지 않은 체제를 과거에 갖추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유럽에서 정교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을 내비치고 있다.이러한 십자군의 역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 있다. 바로 이 전쟁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에 얼마나 큰 손실이 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군’(Crusade)이라는 용어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한 세기 후에 등장했는데, 이는 ‘십자가의 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부터 유래한 말이었다. 그렇게 보면 십자군은,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를 품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쏟으신 분, 그리하여 세상의 불의를 몸소 감당하시며 평화를 이루신 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얼마나 상반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분의 대의를 널리 추구하되, 언제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자기희생을 동반한 진리를 통하여 그리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rusades번역: 장성우
역사
중세교회
십자군전쟁
이슬람
폭력
사랑
자기희생
진리
교회에서 시편으로 찬양하라
by Keith Getty • David Robertson
2019-12-02
시편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읽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교회 모임에서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 사실, 3천 년 동안 시편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노래책이었다.여기 오늘날 교회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10가지 이유가 있다.1. 성경에서 말한다가장 강력하고 훌륭한 이유이다. 우리가 시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면, 성경에 대한 우리의 헌신도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2.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시편의 기자는 성령이시다. 시편은 순수한 성경이다. 작년에 시편에 집중하면서 가진 기쁨 중 하나는 아내와 성경을 읽으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또한 내 어린 딸이 집안을 뛰어다니며 시편 8편과 139편을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3. 시편은 예수님이 부르시던 노래이다예수님이 소년이었을 때 시편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배우고 외웠을 것이다. 시편은 성경의 노래책이다. 시편은 예수님의 삶의 사운드트랙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신의 삶의 사운드트랙이 될 수 있다.4. 시편은 하나님의 ‘진짜’ 모습을 우리에게 더 많이 보여 준다현대인들이 ‘진정한 예배’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트렌드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교회 리더들의 편견 혹은 그들이 따르는 운동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예배의 오직 3프로만 영원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노래할 때 당혹감에 놀라게 한다. 또한 시편은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놀랄 만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기도 한다.5. 시편은 기독론이다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신약이 얼마나 자주 시편을 인용하는지를 보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셨는지 알기 원하는가? 시편 22편을 읽으라.6. 시편은 인간 감정의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한다시편은 신학과 감정, 정의와 복음주의, 개인과 공동체의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와서 우리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기에 우리 교회에 왔다고 말했다. “당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교회”는 현대 사회에서 최고의 광고 슬로건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때때로 우리는 그녀가 우울증을 표현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였다.현대적인 예배는 공적인 감정을 크게 강조하는 반면, 교회는 종종 인간 감정의 경험을 크게 생략하여 줄이기도 한다.7. 시편은 가정 예배를 변화시킨다시편은 당신의 개인과 가정 예배를 변화시킬 것이다. 수년 전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나는 스코틀랜드의 산악지대인 테인에 있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가 식사를 마쳤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책을 볼 거야.” 책이라고? 무슨 뜻이지? 나는 곧 알아차렸다. 누군가 성경과 시편을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을 기도했고, 성경을 노래했다.나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었고, 왜 이 가족이 강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의 가족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 이후로, 시편은 우리 가족의 DNA가 되었다. 나는 적어도 매일 시편을 한 편씩 읽거나 노래했다. 이제 작고 빨간 시편 책은 내 생활 공간의 어디에나 있다. 2011년, 내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우리 가족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큰 고통 가운데 있었고, 매일 밤 가족들은 내 옆에 앉아 시편으로 기도했다. 컨설턴트인 나의 친구는 시편 91편을 내 침상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그것들이 나를 지탱했었다. 8. 시편은 교회 구성원들을 연합시킬 것이다현대의 교회는 “예배 전쟁”과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 혹은 교회에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시편은 모든 기독교계를 하나로 연합시킨다. 또한 시편은 모든 세대를 통합시키는 “전근대적”이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성을 지닌다.9. 시편은 교회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무엇을 노래하느냐가 회중을 정의한다. 우리는 자신이 부르는 것을 외우게 된다. 만약 시편을 노래하면 회중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어마어마한 성경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지난밤 우리 교회는 시편 8편, Getty 버전을 불렀다. (또한 시편 25편과 107편의 일부분을 불렀다.) 아름다웠다. 몇몇 성도들은 우리 교회의 장점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랄 것 없이 바른 정통파 신자가 빈정대듯이 말했다. “왜 시편을 노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왜 안 되는가? 나는 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원한다면, 진리의 성령이 직접 영감을 준 노래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10. 시편은 선교적이다시편은 오늘날의 복음 전도를 위한 최고의 책이다. 몇 년 전, 한 히피 중년이 우리 교회에 왔다. 그는 “데이브, 시편은 너무 좋아. 특히 단선율 음악 말이야. 팔레스타인의 3천 년 된 역사적인 말을 노래하다니, 멋지다!” 시편은 모든 민족의 마음을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담긴 시이다.교회에서 시편을 노래하라그러면 어떻게 교회를 개선할 수 있을까?시편을 노래하는 운동은 예배의 차세대 혁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노래로 교회를 교육하고 고무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다시 돌아가는 데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시편은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경적인 노래이다.우리가 시편을 다시 되찾아 올 수 있는 5가지 방법이 있다.1. 집에서 매일 시편을 읽으라. 우리는 3년 전부터 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신이 매일 헌신적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노래하도록 돕는 데 팀 켈러의 “묵상”(The Songs of Jesus)을 추천한다.2. 당신의 집을 시편의 노래로 채우라. 시편으로 당신의 정신, 마음, 입술, 상상, 그리고 영혼을 채우도록 하라.3. 모든 주일 예배에서 시편을 읽으라. 만약 예배 형식이 없다면, 예배의 부름으로 시편을 사용하고 또한 전교회가 시편을 읽음으로 화답하도록 하라.4. 시편으로 기도하라. 당신의 기도를 시편으로 채우라.5. 시편을 노래하라. 현대적인 시편 찬송뿐만 아니라, 시편으로 영감을 받은 더 오래된 찬송가도 부르라.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함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둘 수 있다. 그리고 시편을 노래함으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세상과 천사들에게 선포할 수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Reasons Your Church Should Sing Psalms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시편
노래
기도
기독론
감정
가정예배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순종
by John Piper
2019-11-30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다고 가르친다(롬 5:19; 고후 5:21; 롬 4:6, 11: 10:3). 이 가르침은 그분이 공생애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고 돌아가신 사역만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이런 질문은 칭의의 원인을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본문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본문은 이러한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9).“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위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죄 사함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의 무죄한 생애를 주장하는 가르침은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감당하신 사역만으로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충분하지 않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의 죗값이 탕감받고 용서받는 일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본문을 찾을 수 있다.“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그 죽으심이 바로 ‘무죄한 생애의 절정으로서’(as the climax of a sinless life) 이해되어야만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하고 죄가 없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힌다.“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7-28).“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9).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생애의 절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를 덮는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십자가 사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설명이 아니다. 또한, 그 사건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설명도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생애의 절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분의 전 생애가 바로 그 십자가를 향하도록 계획된 삶이었다고 증언한다(막 10:45; 요 12:27; 히 2:14). 그분이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사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죽으심이 지닌 구원의 효력을 논하는 일은 그분이 사신 무죄한 삶의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그 죽으심이 과연 어떤 효력을 갖는지 논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다.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순종은 무죄한 생애의 절정에서 이뤄진 행위로서 그 백성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하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순종을 십자가에 이를 때까지 보이신 순종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어느 시점에서 그 둘을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이 박히도록 자신을 내어주신 시점에서인가? 아니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던 시점에서인가? 마지막 만찬에서 자리를 떠나는 유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시점이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눅 9:51)하신 시점에서인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으시던 시점에서인가? 그 어떠한 시점에서도 예수님의 순종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인위적인 결과만 낳을 뿐이다.따라서 바울이 칭의의 원인으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관해 설명할 때도 그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이신 순종만이 아니라 공생에 전체를 통해 보이신 순종의 절정으로서 십자가 사건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그와 같은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서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진행된다. ‘그분은 사람이 되셨다. 즉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 그리하여 자기를 낮추셨다. - 자기를 낮추신 방법은 복종이었다. - 그 복종은 죽음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완전한 순종이었다. - 심지어 그 죽음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사건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이 본문은 예수님이 사신 생애의 시작점에 일어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과 그 생애의 종결점에 일어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사이에는 자기를 낮추시어 순종하신 삶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순종의 삶이 결국에는 가장 끔찍하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그분의 모든 순종이 지향한 절정이자 결론으로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몇 시간의 순종을 그 이전까지의 순종, 즉 처음부터 그 죽음의 시간을 향해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살아오며 보이신 순종과 분리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을 그 이전의 모든 순종과 구분해서 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여기서 아담의 경우에는 한 가지 죄로 인해 완전히 실패하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생애 전체를 통해 완전히 승리하게 되셨다. 이런 방식으로 두 사람의 불순종과 순종은 대비된다.바울이 아담의 “한 범죄”와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를 비교할 때, 그는 아담이 금기의 열매를 먹은 행위에 상응하는 어느 한 가지 행위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아담처럼 또다시 실패하지 않으려면 전 생애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 한 가지 범죄만으로도 아담처럼 실패하기에는 충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둘째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생애 전체에 걸친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이처럼 완전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생애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와 ‘죽음’이란 결코 그 이전의 삶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분이 보여 주신 순종의 절정이자 결론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이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한 교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십자가 사건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내용을 함축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지 않다’이다.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분이 완전하게 순종하신 삶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완전한 순종의 삶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를 얻게 만드는 최상의 행위,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완전한 순종으로 무죄한 삶을 사신 생애의 정점에서 이루어진 행위였기 때문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의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ufficiency of Christ’s Obedience in His Life and Death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관계
회복
순종
복종
죽음
바울
여러번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에 관해
by Kyle Schwahn
2019-11-29
지금 사역하는 교회에서 목회한 지 12년이 넘었다. 주일 오전에는 항상 1부와 2부 예배를 따로 드렸는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깊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별문제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예배를 그런 식으로 드리는 것은 내게 있어 교회 성장의 표지이자 수단이었다. 주일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것은 목회에 있어 더 큰 성공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두 번에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는 목회를 ‘성공’으로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스탭 회의에서는 주일 오전 3부 예배를 추가해야 할지를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교인 수가 늘고 있었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예배 횟수를 늘리면 교인이 더 늘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회의에서 누군가 “사람들은 예배 시간의 선택 범위가 넓은 교회를 선호할 겁니다”라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내가 섬기는 교회는 여전히 주일예배를 2회에 나눠 드리고 있다. 전 교인들이 한 번에 한자리에 모이기에는 교회 건물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교회가 하나이므로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것은 어떨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바꾸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는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일까?주일예배에 대한 우리의 교회론적 인식들이 바뀌게 된 이유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 때문이다지난주 주일에 캐롤(Carol)이 성경의 한 부분을 읽고 기도했다. 그때 많은 성도가 그녀의 열정과 확신에 감동을 받았다. 캐롤의 기도는 복음을 기반으로 했고 우리의 마음을 찬송으로, 죄의 고백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용서하심을 받아들임으로 이끌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려 냈듯이, 캐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 모두 “아멘”(고전 14:16)으로 화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아멘”이라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과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로 인한 영적 유익을 누렸다. 캐롤의 이야기가 사소하고 단편적인 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약은 한 몸에 속한 신자들은 각자 옆의 지체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송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복음이 풍성히 거하게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진리들을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에(골 3:16),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했다(엡 5:19–20). 교회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좋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행 2:42; 몬 6). 교회는 안수함으로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고 세운다(행 6; 딤전 5). 교인들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예언의 말을 서로에게 줄 수 있다(고전 14:3). 형제자매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인내를 가질 것을 격려한다(히 10:24–25). 교인들은 서로의 영혼을 살펴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히 3:12–13).마지막으로, 회심과 교인됨에 성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식할 때(바비 제이미슨(Bobby Jamieson)이 쓴 ‘회중을 향해 고백하는 신앙’[Going Public]을 보라), 성도들은 새 회심자가 그들과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아 그들의 보살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십자가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뿐 아니라 성찬 테이블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의 남은 부분을 바라보며 성찬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잠시 멈추고,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된 책임들은 모두 교인됨에 관한 것들인데 이를 그리스도의 몸의 반에 대해서만 수행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도를 교인 중 일부만 듣고 회개와 기쁨을 누려도 되는가? 옆 지체들이 드리는 찬송과 감사를 양 떼의 일부만 듣고 격려를 받아도 되는가? 한 헌신된 성도가 옆 지체를 위해 기도해 주고, 권면해 주고, 함께 교제하고, 때론 그들의 상태를 상세히 살피고자 할 때, 이를 일부 형제나 자매들만 누려도 되는가? 예언의 말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막론하고, 격려와 세움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교인들의 반만 들어도 되는가? 새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보살펴 줄 교인들의 반만 세례식을 볼 수 있도록 막는 것이 옳은가? 2. 성만찬의 본질 때문이다위에서 언급한 책임들을 우리 교회가 이해하기 시작할 즈음, 나는 40주에 걸쳐 고린도전서를 설교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교인들의 하나됨과 서로를 향한 실천적 사랑이 증진될 것을 알긴 했지만, 주일에 여러 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내 견해에 고린도전서가 결정타를 날릴 줄은 모르고 있었다. K.O. 펀치는 바울이 성만찬의 속성과 실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0–11장에 이르렀을 때 나왔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길,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10:16)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성찬은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합도 의미하는데,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10:17)이기 때문이다. 11장에 이르자 이 주제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모임을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한다(17, 18, 20, 33, 34절). 더 놀라운 것은 11장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성만찬의 본질 자체보다 성만찬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모일 때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11:18). 10장에서도 바울이 보여주듯, 성만찬은 각 지역 회중을 이어주는 무형의 끈의 유형적 표식이다. 바울은 분쟁이나 불공평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1:20)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인들은 성찬을 분별하고, 성찬을 보살피고, 심지어는 성찬을 기다리기까지 해야 한다. 마치 그 성례에 지역 교회의 경계를 설정해 주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한 하나됨이 교인들의 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옳은가? 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라면, 우리 교회가 1부와 2부로 나뉘어 성찬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성찬을 할 때마다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주님의 양들이 양 떼의 반만 돌아보는 것이 합당한가? 주일 오전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모든 교회는 고린도전서의 텍스트를 읽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결론방법론에는 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내 목회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지역교회의 예배 모임에 관해 고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과 성만찬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한 교회 안에서 모두 모여 한 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wo Reasons a Church Shouldn’t Have Multiple Gatherings번역: 이정훈
교회생활
성만찬
캐롤
주일예배
제이미슨
회심
교인됨
그리스도인이 뉴스를 대하는 법
by Paul Conner
2019-11-28
“왜 읽을거리가 많은데, 굳이 신문 기사를 읽는가?”C. S. 루이스는 ‘문학 비평의 실험’(An Experiment in Criticism)과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이러한 물음을 던졌다. 그는 오로지 신문만 읽는 사람을 “가장 비문학적인 독자”라고 표현했다. 이는 “제일 하찮은 소설”을 읽는 독자보다도 수준이 낮은 독자를 의미했다. 또한 루이스는 신문 기자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거의 “상스럽고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려 글을 쓸 뿐 어떤 사실도 원래의 맥락에서 다루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우리는 루이스의 이런 지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뉴스를 아예 끊어 버리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러나 루이스의 지적처럼, 우리가 어떤 자세로 뉴스를 대해야 할지는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한다.그래서 이 글에서는 언론 매체를 대할 때 크리스천으로서 지녀야 할 성경적 원리를 다섯 가지만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1. 진위를 분별하라“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먼저 우리가 읽고 있는 기사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연 그 내용이 인간의 상태를 바르게 묘사하고 있는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지, 현실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사실 누구나 객관성을 강조하지만, 어느 기자도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러 각도로 생각하며 신문 기사를 읽는 게 현명하다. 혹 뉴스의 목표가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인은 항상 진실만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는 그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든지 진실은 언제나 가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그러므로 늘 분별하라. 뉴스 속보조차 잘못된 내용일 때가 많다. 그러니 신문 기사를 읽고 공개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시간을 두고 어떻게 루머와 추측이 서서히 걸러지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2. 어리석은 내용을 피하라“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쓸데없고 어리석은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나 케이블 방송 뉴스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넘쳐 난다. 그중 소셜 미디어는 간결한 문구로 소식을 전달하는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이는 짤막한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데 안성맞춤인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사안에 관해 미묘한 대화가 오가며 끔찍한 결과를 낳는 공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한다.케이블 방송에서 소개하는 뉴스는 진솔하고 유익한 논의를 도모하기보다 다툼을 조장하는 기사를 다룰 때가 더 많다. 그 내용은 흔히 시청자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더 심하게 각색되기도 한다. 피디는 게스트가 방송에 나오기 전에 해야 할 말을 미리 정해 주기도 하고, 특정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그에 맞는 사람을 초청하기도 한다. 당연히 사려 깊은 토론보다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3. 공감하려고 노력하라“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앞선 부정적인 측면과 달리, 각종 뉴스는 다른 민족이나 연령 또는 경제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하며 진정한 연합을 이루어야 할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나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경험인지 잘 몰랐다. 그러다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는 흑인 차별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교회에 있는 지체들의 경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사를 읽기만 한다고 해서 관계가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그와 같은 이해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데 큰 도움을 준다.4. 걱정에 사로잡히지 마라“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뉴스를 통해 사회가 당면한 문제만 계속 접하면 불안에 휩싸이기 쉽다. 그런 순간에는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도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불의를 미워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만사를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와 같은 진리는 세상의 소문이 흉흉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5.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언론 매체가 전달하는 소식은 지역 사회와 세계를 위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뉴스 때문에 생긴 걱정을 떨쳐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사를 접한 후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만일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어느 지역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며 선교 사역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물론 당신이 속한 도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우리에게 전달된 최고의 뉴스나는 언론 매체에 대해 C. S. 루이스만큼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진 않다. 각종 미디어는, 이를테면 아내와 어디에 가서 데이트를 하면 좋을지 또 누구에게 투표를 하면 좋을지를 알려 주기도 하고, 기도해야 할 구체적인 제목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혹은 이웃과 만났을 때 대화의 소재가 된다거나 내가 종사하는 분야의 최근 소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세상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타인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니면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 읽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도 내용을 작성하는 기자나 언론인이 진실을 추구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며,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를 제공한다면, 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의 한계를 또한 인식해야 한다. 여러 언론 매체는 인간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데는 훌륭하게 기능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성경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사망과 지옥이라는 형벌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 형벌이 거두어지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그분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이 소식이 바로 우리에게 전달된 최고의 뉴스이다.그러므로 진짜 현실을 규정하는 뉴스는 미디어가 전달해 주지 못한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헤드라인을 접하게 되었든 간에, 오늘도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의 왕이시다. 이에 우리는 소망한다. 머지않아 그분이 오셔서 어리석은 자의 입을 잠잠케 하시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이슈도 다 제거하시며, 진정으로 새로운 기사를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기를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Engage with News Media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뉴스
진위분별
공감
걱정
기도
루이스
구원
처음
이전
156
페이지
열린
157
페이지
158
페이지
159
페이지
16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