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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의 불신자 구원 플랜
by Jon D. Payne
2019-12-27
전도는 단순한 과제나 방법이 아닌 생활 방식이다. 프로젝트나 시스템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전도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우리의 관점과 이해도를 넓혀준다. 설득력이나 변증법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전도에 대한 시선이 이러하다면, 누구라도 영혼을 전도하는데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전도에 대한 열망도 생길 수 있다. 전도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그리스도의 증인다운 삶의 방식이며, 신자의 독특한 은사와 능력, 지위 등을 통하여 부르심에 맞게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삶 속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변화조차도 친구와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기회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렇게 전도해야 한다. 참된 증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다(마 5:13-16). 스펄젼 목사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다. “진정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든,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이든 기독교인은 전도라는 커다란 사명을 받았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마 28:18-20 참조).영혼을 구하는 전도는 기독교인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러나 전도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항상 충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직장 동료, 가족 그리고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이웃의 영원한 생명보다 스포츠 경기의 점수나 휘발유 가격에 신경을 더 쓰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욱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안다면, 왜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조차 복음이 빈혈 상태에 빠져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의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열심히 기도하며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복음적인 생활 양식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놀랍도록 평범한성경에서 전도 사례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기록이 담겨있다. 서신서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들의 용기 있는 기록이 이곳저곳에 담겨있으며,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전도하는 모습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도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성경의 강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우리도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예 복음을 전하지 말까하는 고민을 할 정도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도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도 많지만, 그들이 감당한 독특한 사역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전도사역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길거리나 시장 광장에서 전도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다는(이런 전도에 특별히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따로 있다) 평상시 삶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이 흘러나오는 전도가 내게 주어진 전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며 바로 그 주권에 따라 우리 각 사람을 그가 원하는 곳에 지금 있도록 했다(시 115:3; 행 17:26-27).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롬 8:28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그 현장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발휘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데에 필요한 특정한 위치에 지금 우리를 두셨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의 주권은 지금 당신을 특정한 공동체에 데려다 놓았고 특정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집에 살게 하셨다. 그는 또한 당신에게 독특한 직업을 주었다. 왜? 당신이 평범한 삶의 과정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방문 전도나 특별한 봉사 같은 보다 전략적인 복음 전파 활동이 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으로 입증된 것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일관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믿지 않는 동료와 복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자녀의 축구 경기에서 옆에 있는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젊은 어머니들과 어떻게 복음으로 육아를 할지 토론하고, 위기에 처해서 조언을 구하는 믿지 않는 가족과의 대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임을 알려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게 있었던 행복한 방해는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제대로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친구가 방문하도록 하셨고, 우리는 복음에 관해 따뜻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이런 종류의 전도는 기독교 잡지 표지에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인도하고 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발생하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삶을 통한 전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알았으면 하고 바란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예상치 못한 전도의 기회를 우리가 제대로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할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이다. 우리에게 이런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서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끊임없이 기도하기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꾸준하고 간절한 기도는 꾸준한 전도의 원동력이다. 기도 없이는 전도의 열기가 식기 마련이고, 죽음을 향해가는 비참한 영혼의 상태에 관해 무관심해진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할 때, 그 영혼을 향한 열정이 점화된다. 기도는 열정의 연료가 된다. 기도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키운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의지하게 되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깨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도 함께 커진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우리지만 죄인들에게 초자연적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주시고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행 26:18; 겔 36:26; 엡 2:4-5; 골2:13 참조) 이는 오로지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찢는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매일 매일의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간구와 더불어 우리의 육체적 건강과 행복을 위한 끝없는 탄원이 포함된 기도 모임을 활발히 가져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간절한 기도는 양보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기도야말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겸손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양보하지 않는 신실함복음이 없는 전도는 글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많은 행위가 복음 속에 당연히 담겨야 할 진리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고작해야 개인적인 자기 이야기 또는 예수를 통해 세속적인 성취를 이루려는 인간 중심의 호소는 결국 복음을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축소 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야 할 것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19세기 중반 고전인 ‘영혼을 구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Words to Winners of Souls)에서 호래티우스 보너(Horatius Bonar)는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의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 [중략]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복음은 문학도 과학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아들을 통해 거저 주시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다.”그러므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도의 핵심은 성경의 진리이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분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에 관한 교리(레 11:45; 갈 3:10-11), 타락한 인류, 비참하고 처참한 인간의 상태(롬 5:12; 엡 2:1-3),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율법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요 3:16; 롬 5:18-19),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룬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충족(시 22; 요일 4:9-10), 셋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롬 4:22-25),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고후 5:19; 엡 2:8-9).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이 하늘의 영광으로 인도될 것이며, 여전히 그들의 죄 안에 있는 사람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지옥에 던져질 심판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마 25:31-46). 이것이 바로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확실히, 전도는 위협적일 수 있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이 마주하게 될 영원한 심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를 하나의 수행 과제, 이벤트 또는 방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한 삶 속에서 그분의 신실한 약속에 순종하고 기쁨으로 반응하는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전도를 바라본다면 전도에 대한 우리의 부담감은 훨씬 적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여, 가장 소중한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어찌 마냥 침묵하고만 있겠는가? 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nning the Souls of Unbelievers 번역: 무제
교회사역
불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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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래티우스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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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며
by Matt Chandler
2019-12-26
9년 전, 추수감사절에 나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 발작으로 오른쪽 전두엽에 종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2월 4일, 외과 의사들은 내 뇌의 종양을 제거했다. 그때 나는 34세였다.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왼쪽 팔과 다리에 힘이 없음을 느꼈다. 12월 16일 머리에 수술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로 재활 센터에서 퇴원했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18개월간의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첫 번째 외출은 한 주 후에 내가 다니는 교회의 성탄절 전야 예배에 갔을 때였다. 예배당 뒤쪽에 앉았지만, 예배에는 거의 참여할 수 없었다.‘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은’의사로부터 “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그 때는 침착한 척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가족에게도 힘든 크리스마스였다. 혹여 이번이 내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크리스마스를 망치고 내 삶을 마감시키려고 위협하던 종양이 내 희망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은 그 이야기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 이야기는 구유에 누운 아기나 십자가에 달리신 분, 혹은 산비탈에 있는 빈 무덤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 아기가 하늘의 통치자로서 이 땅에 다시 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말하는 날 이야기는 끝난다.우리 모두가 매우 기다리고 있는 그 날, 모든 것이 완전해질 그 날이 오고 있다. 올 해나 다음 해 혹은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날 아침은 아닐 것이다. 그 날은 우주의 왕이 다시 오시는 날일 것이다. 그 날 그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그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바라고 있듯이 완전해질 것이다. 더 이상의 우울함, 더 이상의 불안, 더 이상의 상실, 더 이상의 아픔은 없을 것이다.모든 슬픔, 모든 어둠, 모든 잘못된 것들은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요?”라고 묻던 혼란스럽고 의문 가득했던 순간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기대어 들쑥날쑥한 글라스의 조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크리스마스는 그 이야기의 시작이다. “살 날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상태로 크리스마스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마스를 더 좋아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관여하셨고, 내게 희망을 주셨다. 내 믿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음을 내가 감사하게 된 때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내게 훨씬 더 의미 있게 되었다. 일 년 내내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12월이 시작하기 전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올라가는 것도 좋아한다.궁극적인 크리스마스 선물방사선 항암 치료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후유증은 종종 끔찍했다.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내가 믿고 알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가족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9개월 후, 뇌 스캔 검사 결과가 깨끗하게 나왔다. 몇 차례의 방사선 치료 후에 나는 완쾌 판정을 받았다. 종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그 다음해 11월, 아내의 할머니가 추수감사절에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한 달 동안 이 선물을 거실 선반 위에 올려 놓고, 열어 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8살이었던 내 딸은 그것을 한 달 내내 그냥 쳐다보아야만 했다. TV가 방영되고 있어도, 그녀는 그 선물을 말 그대로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빨리 열어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2천 년 전,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 자신을 이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은 하늘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이 선물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모든 것을 기대해도 된다. 당신 앞에 최상의 날들이 있을 것임을 늘 알 수 있다. 삶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분이 언제 오실까”하는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그분이면 충분하다해마다 12월이면, 상업 광고들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약속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 완전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오래 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원히 완전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봄으로써 당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오신 분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봄으로써 말이다. 내게 종양이 있던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 텍사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쌓인 눈으로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이 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막 수술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난 후에 얼음 위에서 넘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실내에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하지만 나는 그때 예수님이면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셨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분은 내게 기쁨을 주셨고, 평화와 소망을 주셨다.그리고 뇌종양은 내게 중요하고 진정으로 기뻐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나는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11월이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나는 당신이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 어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기쁨이 넘치는 한 해를 보냈을 것이고,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멋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영원성에 초대해 주기를 기도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그분이 오실 때 함께 올 것의 그림자일 뿐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되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라.고대하라당신은 두들겨 맞고 부상을 입은 것처럼 느끼고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올 해가 배우자 없이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일 수도 있다. 외로울 수도 있다. 당신이 목표한 곳에 이르지 못했을 수 있다. 당신이 아프거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수도 있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로 당신은 모든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자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엉망인 이 세상에 관련되어 있기에 그는 지금 당신과 그분의 기쁨을 나눌 수 있고 언젠가 당신에게 그분의 완벽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분을 당신 안에 초청하고, 인생의 높고 낮은 순간들을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앞으로 다가올 것을 고대하라. 해마다 크리스마스는 재빨리 막을 내린다. 우리가 고대하는 것은 곧 우리 뒤에 숨는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끝나지 않을 날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미래를 고대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ok Forward to a Better Christmas번역: 정은심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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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자!
by Dave Harvey
2019-12-25
그날은 1984년 1월 22일이었다. 수퍼볼XVIII를 시청했을 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그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3쿼터가 진행되는 중에 애플은 첫 번째 매킨토시 컴퓨터의 출시를 홍보하는 블록버스터 광고를 방영했다. 80년대 초반을 기억할 정도로 나이가 많지 않다면, 지금 유튜브를 통해 그 광고를 확인해도 된다. “1984”라는 제목의 이 광고에는 큰 화면 속 영상을 보고 있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 큰 화면에서 빅 브라더, 즉 독재자는 검열의 미덕을 찬양하고 있는데, 갑자기 금발의 여자가 나타나 앞을 향해 도전적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망치를 화면을 향해서 던지자 독재자의 연설을 보여주고 있던 큰 화면은 산산조각이 난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는 모두가 다 획일화된 기술로 정체되어 있는 세상에서 개인을 해방시키고 있다. 아니,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부터 해방시키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스티브 잡스의 팬이든 아니든 그를 칭찬해야 한다. 그는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어떤 순간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애플에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고 있다면, 잡스는 그 일을 특별하게 알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애플 제품 출시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소비자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했다.하나님의 출시 이벤트나는 최근 이사야 9장 6-7절을 읽으면서 이 일을 생각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인류 역사에 기록된 가장 커다란 뉴스일 것이다.“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것은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과의 친숙함은 우리로 하여금 얼음에 구멍을 뚫어 흐르는 물 아래를 보게 하는 대신 표면에서 스케이트를 타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잠시만 이 얼음 아래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구절은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이 구절 속 좋은 소식은 출생 발표이다. 한 어머니에게 한 아기가 주어졌고, 그 아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신성을 가질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아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는데,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린다. 아들은 또한 독특한 권세, 즉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평화가 증진되고 영원히 확장되는 그런 독특한 권세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뉴스는 가장 위대한 뉴스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영원한 평화의 권세를 만든다는 뉴스 말이다.이런 뉴스는 단순한 위대함을 뛰어넘는다. 이런 뉴스는 애플이 발표하는 신제품 광고를 하찮게 만든다. 자, 그럼 하나님은 이런 아들이 세상에 오는 순간을 위해 어떤 종류의 놀라운 프로모션 행사를 준비했을까?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청중과 무대는 단지 몇 명의 목자와 양이 있는 들판이었다. 누가복음 2장 9-11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라면 이런 사실에 당황했겠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셨다.평범함 속의 비범함자정 이후 들판에서 한 무리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런 당황스러운 탄생 스토리를 지켜보았다. 파파라치들이 놓친 이 특별한 소식은 평범한 목자들을 통해서 그 반향이 울려 퍼졌다. 그렇기에 이 소식은 아름답다. 하나님께서는 이 좋은 소식을 힘 있고 고귀한 사람들과 IT 전문가와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듣도록 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과 교육받은 엘리트는 이 소식에서 제외되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뉴스는 궁전 발코니에서 발표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호위하는 측근에게 둘러싸여 도착하지도 않았다. 천으로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약한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복음은 평범하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었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세주를 보내셨고, 그것을 믿은 겸손한 이들만이 복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나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온 세상의 왕이고, 그런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는 상황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종종 회심한 사람들의 화려하고 강력한 간증을 들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간증은 하나님이 나를 만나러 오실 때 분명히 충격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는 내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의 회심에 화려한 불꽃놀이는 없었다. 적과의 치열한 세력 다툼도 없었다.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것도 없었다. 내가 회심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날짜와 시간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화려한 불꽃, 기억에 남는 기적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회심 과정은 훨씬 더 초라했다. 회심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기적이지만 때로는 화력이 뛰어난 대규모의 군대보다 잘 훈련된 소규모의 저항군에 더 가깝다.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의 욕망을 새롭게 혁신시켰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나를 예수님에게 끌리게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회심의 역사하심은 내게 하나님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여기 이 세상이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1. 표면 아래를 보기내 인생 대부분 크리스마스는 큰 행사였다. 집에 장식을 하고 교회에 가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었다. 산타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행동도 제대로 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 ‘평범’이라는 주파수에 맞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그 위대한 거룩함이 겉으로만 번쩍이는 화려함에 묻히게 된다. 진짜 아름다움, 진짜 의미,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주는 초월성은 외면의 화려함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 때 사라지게 된다. 성경적인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문화적인 요란함과 마케팅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를 보도록 만든다. 크리스마스 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물을 가장 평범한 광경 속에 감추었다. 그는 그 선물을 거룩한 단순함으로 포장했다. 선물을 열기 전에 말씀을 읽는 것, 선물이 열린 후에 감사를 표하는 전통, 식사 전에 하는 감사의 기도, 아이들과 베들레헴 드라마를 나누는 것, 나이든 손님에게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나누는 것, 친척과 함께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예수님이 들어간 그 이야기를 함께 하는 것 등이다. 이런 단순한 행동들 속에 어떤 번뜩이는 천재성은 없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간증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바로 이런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이제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영원히 중요한 사건으로 만드는 진정한 보물인 예수님이 구유 안과 밖에서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2. 크리스마스는 당신이 기대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하라당신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또 좋지 않은 크리스마스도 있었을 것이다. 그건 산타가 아이 (또는 마음이 아이인 사람)에게 선물 대신 양말에 석탄을 넣어두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우리가 받을 선물과 관련된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크리스마스 전통에 동조한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구세주는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이 세상에 도착함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오셨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성장하신 후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심판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았음도 상기시켜 준다. 크리스마스 희망 목록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받을 것이다.3. 크리스마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기회로 활용하라“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성탄절 이야기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모두 비웠다는 사실이 차지하고 있다. 바로 종이 된 예수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참된 능력을 볼 수 있다.크리스마스에 소파에 누워서, 풋볼을 보면서 프레즐을 먹으며 나무 늘보처럼 퍼져있는 것은 재미있다. 내게는 TV 리모컨을 완벽하게 제어할 자격도 있다. 그러나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서게 되면 완전히 다른 크리스마스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두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하나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이 수고하도록 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 이기심을 역행하는 방식이다. 구세주는 아기로 이 땅에 온 왕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또한 아기에 불과한 우리가 그를 닮아 이 세상에 역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이 세상에 역행하는 구세주라고 부를 수 있다. 놀랍고도 또 대담한J. I. 패커(J. I. Packer)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더 놀라게 된다.” 그런데 생각할 점이 있다. 애플처럼 엄청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하기 때문에 놀라는 게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또 해냈어!”라고 외치면서 놀라는 게 아니다. 놀라운 이유는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 가장 예상치 못한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처녀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아기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함으로 영원까지 변화시키도록 했다. 단지 “놀랍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위대함이 가진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이렇게 외치자. “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크리스마스를 보냅시다!”원제: Have Yourself a Subversive Little Christma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
구약성경
패커
역행
섬김
회심
아기그리스도
구세주
성탄의 큰 기쁨,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다
by David Mathis
2019-12-24
성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는 것 같다. 성탄의 분위기와 매력, 그리고 신비한 느낌마저 드는 매혹적인 느낌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성탄은 특별히 어른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대해 무뎌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방 점성술사들이 서쪽을 향해 길고 힘든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에 뭔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악한 왕이 죄 없는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을 보면 뭔가 놀라운 일이 임박했음이 분명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목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다가 자기 양 떼를 놓아두고는 갓 태어난 아기를 찾아 나선 것, 그리고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눅 2:18). 주님 되신 그리스도천사들이 선포할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알릴만한 이 위대한 신비의 핵심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에 담겨있다. 이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대하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특별히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신 것일 뿐 아니라, “주님”의 오심 이기도 하다. 하나님 자신이 오신 것이다. 오랜 기다림 후, 마침내 진정한 임마누엘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 이는 너무도 장엄한 소식이어서 한 번에 다 말할 수 없다. 이 아이의 삶 속에서 매일 가르침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이 사람에게 이스라엘과 열방의 “주”이신 하나님의 신성이 있음을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복음서의 각 페이지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분명히 인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점진적으로 더욱 잘 보여줄 것이다. “육신이 되어”(요 1:14) 오신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 동일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요 1:1–3). 그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 본 위대한 장관이 이것이었고, 이는 이 진리를 앎으로 복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성탄을 생각할 때마다 맛보기를 갈망해야 하는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그분의 오심은 단순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 구주 되신 그리스도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이는 재미를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창조주가 마음만 먹으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공개 시연 같은 것도 아니다. 이 불가사의는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죄, 그리고 죄의 영향, 덫, 그리고 파괴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천사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눅 2:11)라고 선포한다. 이 사자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라고 한다. 히브리어 ‘예슈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셨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순간마다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왕들을 구원의 도구로 보내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 자신이 오신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보화 되신 그리스도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속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최종적인 값을 치르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벧전 3:18)이고, 부활하신 그분께서 우리의 ‘큰 기쁨’(시 43:4)이 되신다는 사실이 큰 기쁨의 이 좋은 소식(눅 2:10)의 근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청교도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 따르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큰 기쁨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성취된 모든 유익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의 인격보다 훨씬 가치가 낮고, 그의 인격의 영광에 비교하면 그 가치는 더욱더 낮다. 그러한 유익들을 다 합쳐도 그리스도의 무한한 가치에 비할 수 없다”(‘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3쪽에서 발췌). 우리가 얻은 구원의 기쁨이 극대화되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지극한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이시다(마 13:44). 그는 극히 값진 진주(마 13:45–46)이시다. 그를 단순히 임마누엘이나 우리의 구주로만 묘사할 수는 없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인간이며, 인간의 영혼을 영원히 살게하시는 가장 큰 기쁨이요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시다. 영광 되신 그리스도성탄은 기쁨을 누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자는 수많은 천군과 함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선포한다. 원한다면 이를 성탄 희락주의(Christmas Hedonism)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가 신인(神人)으로 오셔서 자신의 인격을 통해 선사해 주신 그 기쁨은 모든 창조의 위대한 목적에 부합하고 그 목적을 성취한다. 성탄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짜릿한 기쁨을 흘려보낸다. 굿윈은 계속 이르기를,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부르시기 위함이었다 [중략] 그리고 모든 타락하는 것들을 작정하신 것, 심지어 구속 그 자체마저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했다. 마크 존스(Mark Jones)도 예수님이 주님이시오, 구주이실 뿐 아니라 보화가 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부록이 아니다 [중략]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극치이기에, 우리는 그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의 부요함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보다 우리 구원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진리는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4쪽). 성탄에 난 그 아기는 주님 이상이시다. 심지어 구주 이상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이시고, 우리가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안에 그의 영광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존재한다. 성탄의 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가 태어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당신은 성탄의 큰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You were made for Christmas번역: 이정훈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탄
큰기쁨
영광
창조
주님
구주
보화
토마스굿윈
악마들이 크리스마스 때마다 하는 일
by Greg Morse
2019-12-23
이 글의 형식은 C. S. 루이스의 고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를 반영한다. 원래 삼촌 악마인 스크루테이프로부터 편지를 받던 웜우드(Wormwood)가 여기서는 자신의 조카 글로브드롭(Globdrop)에게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에 관해 조언한다.사랑하는 글로브드롭에게,저번에 네가 아주 노골적으로 반응한 대로, 최근에 보낸 편지가 너를 꽤나 메스껍게 만들었나 보구나.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네 등골을 오싹하게 하고 토하고 싶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니. 그런데 아마도 나한테 그런 말을 쏟는 게 편하다고 느낀 모양인데, 잊지 마라 조카야, 넌 지금 삼촌이 아니라 상관에게 보고하는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이 사실을 너에게 상기시키기도 싫구나.뭐 네가 경솔하게 말하긴 했어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네 심정도 이해는 간다. 어떻게 내가 그 원수(예수 그리스도)와 싸워야 하는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정말 너한테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내라며 편지를 맺을 수 있었겠냐. 오히려 우리는 저 옛날, 바로 그날에 일어난 일만 생각하면 몸서리를 치는 자들이 아니냐. 다른 수많은 악마들도 그날에 대한 기억을 마치 전염병처럼 피하려 하더구나.원수가 이 땅으로 침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극한 혐오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 시작되었는지 바로 알아차렸지. 선전 포고도 없이 전쟁이 시작된 거야. 당시 나는 신참내기 악마였는데, 그때 내가 간절히 바라던 일은 하나밖에 없었단다. 우리의 대장(사탄) 뒤에서 격분하던 스크루테이프 휘하에 들어가는 일이었지. 그런데 바로 그 아기를 수색하며 모든 남자 아이를 다 집어삼키던 우리의 전략에 한 가지 결점이 드러나고 말았어. 당시 본부에서는 우리의 습격이 성공했다고 추측했지만, 그 아기는 애굽으로 탈출하고 말았던 거야. 그 기억의 트라우마가 가시지를 않는구나.하지만 우리가 저 음울한 날에 적군에게 패배했다고 단정 짓지는 마라. 지금도 약해 빠진 악마들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면 불을 끄고 문을 걸어 잠그지만, 제대로 된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적군으로 뛰어들어 싸우지. 그 결과 지금까지 많은 땅을 차지해서 원수에게 현혹되지 않은 영혼들을 우리 진영에 편입시켰어.악마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법물론 원수의 출현만 생각하면, 언제나 오싹해지는 이 기분은 영원히 피할 수 없을 게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끔찍한 휴일을 기념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이 또한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를 거다. 우리는 저들과 함께 노래하고, 축제를 벌이고, 선물을 주고받고, 구석구석을 장식하고, 영화를 관람하며 시간 때우는 일을 몹시도 좋아하지. 너는 그 휴일에 살그머니 물러나 상처를 어루만지며 전의를 다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우리에게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땅을 상당히 되찾았단다. 그 휴일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설마 못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1. ‘Xmas’를 기념하게 하라오랜 옛날에 그 아이를 제거하는 데 실패하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해 왔는지를 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봐 이야기한다.지금은 멋진 트리와 선물, 각종 장식과 반짝이는 조명, 산타와 눈사람, 달콤한 쿠키와 즐거운 파티, 이런 게 다 크리스마스를 말해 주지 않냐. 이렇게 우리는 그 아기를 건초더미 아래에 숨겨 두었단다. 이제 사람들이 말하는 메리 크리스마스란, 빈방이 없다고 외치던 여관들과 같지. 그들은 자기 양만 치는 목자들이 되었고, 서로 교환할 선물은 가졌어도 베들레헴을 향해 빛나는 저 별은 주목하지 않는 이상한 동방박사들이 되었어. 봐라, 기분 좋게도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축약되었는지. 우리는 그날을 단순히 ‘Xmas’라고 표기한단다(역주: 여기서 ‘X’는 헬라어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단어의 첫 자음이 아니라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는 미지수 ‘X’를 의미한다).그처럼 들뜬 날에는 스크루지도 필요 없지. 그저 초콜릿 생각만 저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돼. 아니면 칠면조라든가 화로에 구운 밤이나 호두를 맛보도록 유인해도 좋겠고. 그렇게만 해도 저 2천 년 전의 아기는 사라지게 되니까. 물론 우리가 저들의 마음에서 원수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더 많단다.2. 예수를 아기로만 생각하게 하라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통을 지키려고 하지. 저 종교 의식에 물든 인간들은 그 아기를 결코 버리진 않을 거야.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힘없고 귀엽기만 할 뿐, 사실상 위협이 안 되는 아기의 모습으로 저들의 마음에 두면 되니까. 이런 절기에만 생각하거나 찬양하는 또는 장식품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모습으로 두면 된다는 거야.저들이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날의 예수를 한번 봐라. 얼마나 포근하게 마리아의 품에서 쉬고 있냐? 얼마나 순하고, 고분고분하고, 유순한 모습으로 안겨 있는지를 보라고. 원수가 저렇게 불분명한 소리로 옹알거리고, 누구도 심판하지 못하는 연약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냐? 그러니 결코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가 성장하도록 놔두지 마라. 우리는 여태까지 죄라든가 거룩 또는 그 아버지의 영광 따위는 신경 쓸 수 없는 혀짤배기 젖먹이의 모습으로만 원수를 생각하도록 사력을 다해 왔다. 그 결과 원수를 바라보는 이들이 그 아기를 경외하며 예배하기보다 그저 사랑스럽게 여기며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 마는 그런 마음만 갖게 되었지.나의 경우도 말하자면, 저 구유에 있는 메시아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원수의 탄생은 하나같이 크리스마스카드에나 어울리는 장면으로 묘사되지 적군의 작전회의실을 떠올리게 만들지는 않거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임마누엘’을 아무런 명령도 못하고 깊이 잠든,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아기로 대체해 놓았단다. 그런 아기라면 저들의 용사가 될 수 없으니까. 심지어는 사람보다 못한, 한낱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하나님이 아니라 이유식 거버(Gerber)의 아기가 등장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구.3. 매사가 즐거운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라일단 원수를 아기의 모습에 묶어 두었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작업이 있다.너는 이 시즌이면 느껴지는 희망이나 평화 또는 기쁨 따위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냐? 모든 일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하는 훈훈한 정서를 느껴 본 적이 있냐는 말이다. 이런 분위기는 일종의 크리스마스 망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가족 모임, 연말 휴가, 선물 교환, 자선 사업까지 더 즐기게 만들어서 정작 왜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옛적부터 노래해 왔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게 해 놨단다.그러니 매사에 들뜨고 즐거운 날을 보내게 만들어라. 그렇게 자기 정서에만 집중하게 하면, 네가 다스리는 백성들은 결코 “큰 기쁨의 소식”을 알지 못하게 될 테니. 그래 센티멘털리즘, 조카야, 감상주의에 빠져들게 하라구. 기분이 업되어 헛된 감상에 젖어들수록 유리하단다. 잠시만 고통을 거두자는 거야. 그렇게 하루만 지나 봐라. 선물은 포장이 뜯긴 채로 놓여 있고, 거실은 텅 비어 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사라지고 없지. 다시 일터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면 12월 26일은 일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허탈한 날이 되지.4. 크리스마스용 신자가 되게 하라조카야, 마지막으로 이 사실을 기억해라.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추진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바로 스물네 시간짜리 기독교를 만드는 프로젝트지. 너도 이 시즌이면 사람들이 어떻게 종교적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지 알지? 그날에는 교회 출석률이 급등해도 개의치 않아도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날 하루만 신자같이 행동하도록 저들을 부추겨야 해. 가끔씩 치과 진료를 받듯, 저들의 종교 생활에도 연간 검진은 필요할 테니.글로브드롭,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사람들의 마음에 종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좋단다. 그러면 저들의 양심은 깊은 잠에 빠져들거든. 일회성 신앙으로 면죄부를 얻는다고 여기니 얼마나 편히 잠들겠냐. 물론 너도 알다시피, 원수는 크리스마스에도 출석 체크를 한다. 그리고 저들이 매년 교회에 들르려고 노력하는 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참석하는 비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들도 정죄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크리스마스용 신자들은 교회에서도 그저 쿠키 생각밖에는 안 한단다.즐거운 Xmas를 보내기를아무튼 그날이 원수의 승리를 상기시켜 사람들을 우리 손아귀에서 더 멀리 벗어나게 하려고 만들어졌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거라. 그런데 이 생일 파티에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선물을 주고받고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며 화목한 모임을 갖고 좋은 음식까지 나누는데, 정작 그 아기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는 상태란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최고의 Xmas를 꿈꾸고 있지.아직 그날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구나. 그러니 저들과 함께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지나간 캐럴이라도 부르면서 흥겨운 정취를 자아내라. 물로 일 년에 한 번이니까 교회에 가도록 좀 부추기고(그래야 출석 체크라도 받을 게 아니냐). 그러고는 저들의 내면에 집중하게 만들어라. 어쨌든 가난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일만 아니라면, 무슨 일로라도 저들의 스케줄을 다 채워도 좋다. 다만 누구도 그 아기와 직접 대면하게 해서는 곤란하다.아무튼 불결한 메시아를 예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게 요점이다. 물론 우리가 그 아기를 나중에 매달았던 저주스러운 나무 주변에도 모이게 해서는 안 되고. 한자리에 모여 기도한다든가, 성경을 읽는다든가, 아니면 영혼이 죽어 있는 우리 백성들을 꾀어내 시간을 함께 보낸다든가, 그런 일을 못하게 하라는 말이야. 그날은 그저 기분 좋게, 피상적으로, 안전하게 보내는 게 최고다.그러니 다시 말하지만, 즐거운 Xmas를 보내라!벌써부터 들뜬 너의 삼촌,웜우드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Dark Side of Christmas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과소명
루이스
악마
크리스마스
Xmas
아기예수
스크루테이프의편지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 전통 캐롤 10선
by Keith Getty
2019-12-22
해마다 12월 말이 다가오면 의미없이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를 꺼내 놓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내년을 맞기 위해 그냥 청소하고 정리해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단지 선물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크리스마스 전통 캐롤을 함께 부르면서 가장 근본적이지만 아마도 놀랍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첫 번 크리스마스 날 밤 황량한 세계가 구함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소망가운데 한 아기가 태어난다. 하지만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눕기 전에 그의 기이한 이야기가 이미 노래로 전해졌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송가’에서 이 아기에 대해 노래했다(눅 1:46-51). 사가랴는 ‘사가랴의 찬가’에서 이를 노래했다(눅 1:68-79). 그리고 아기가 탄생하던 날 밤, 들판의 목자들 위로 펼쳐진 하늘은 여러 천사들의 합창 무대가 되었다.우리는 모두 노래하도록 창조되었고 찬양하도록 명함을 받았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전통이 캐롤이라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여러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10개의 캐롤 찬송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1. ‘천사 찬송하기를’‘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작사하여 1739년 감리교 찬송가에 포함시킨 곡이다. 신학적인 메시지가 풍부한 이 고전은 후에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곡이 붙여졌다. 이 찬송은 원래 ‘하늘까지 울리는 찬송’(Hark, How All the Welkin Rings)으로 시작하지만,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사 찬송하기를’로 바꿨다.2. ‘오랫동안 기다리던’‘오랫동안 기다리던’(Come, Thou Long Expected Jesus)은 1745년 찰스 웨슬리가 펴낸 18가지 크리스마스 노래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는 수세기동안 기다리고 갈망하며 울면서 기다린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해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옛날 임금 다윗성에 낮은 마구 있더니 어머니가 갓난아기 구유 안에 뉘었네 어머니는 마리아 그 아기는 예수라”3. ‘참 반가운 신도여’‘참 반가운 신도여’(O Come, All Ye Faithful is a Christmas)는 경배를 촉구하는 노래로 존 프랜시스 웨이드(John Francis Wade)가 작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작사한 라틴어 원본(Adeste Fidelis)은 100년 동안 걸작으로 남아 있다가 프레드릭 오클레이(Frederick Oakeley)가 영어로 번역하여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이 곡은 회중 찬양과 아카펠라로 불러도 아름다운 찬송이다.4. ‘춥디춥던 겨울’‘춥디춥던 겨울’(In the Bleak Midwinter)은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가 작곡한 애처로운 멜로디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독창적인 캐롤이다. 1872년 처음으로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가사가 등장했다. 마지막 절의 내용은 이렇게 된다.“이 비천한 몸이 무얼 드릴까 내가 목자라면 내 양을 드리리동방박사라면 예물 드리리 나의 드릴 한 가지 나의 마음”5. ‘기쁘다 구주 오셨네’‘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는 영어 찬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이작 왓츠(Isaac Watts)가 작사한 곡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승리의 찬가와 같다. 이 곡은 1719년에 처음 선보였을 때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니었다.6. ‘곧 오소서 임마누엘’‘곧 오소서 임마누엘(O Come, O Come Emmanuel)은 중세 라틴 찬송으로 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마다 12월이면 부르는 교송(주로 행렬 때 움직이면서 반복적으로 부르는 쉽고 간단한 노래-역주) 중의 하나이다. 중세시대 외진 수도원 벽에서 울리는 이 찬송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곡은 영국 목회자이며 음악가인 존 메이슨 니일(John Mason Neale)이 발견하여 1851년 영어로 세상에 선보였다. 7. ‘기쁨이 시작됐네’‘기쁨이 시작됐네’(Joy Has Dawned)는 스튜어트 타운엔드와 필자가 2004년에 작사 작곡한 곡이다. 스튜어트는 다른 크리스마스 찬송에 나오지 않는 동방박사의 선물과 같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곡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전통 음악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멜로디로 만들어졌다.8. ‘천사들의 노래가’‘천사들의 노래가’(Angels We Have Heard On High)는 가장 즐거운 노래이며, 후렴구가 잘 짜여진 곡 중 하나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 이 곡은 부를 수록 영혼이 새롭게 되는 느낌을 받도록 작곡되었다. 9. ‘오 베들레헴 작은 골’‘오 베들레헴 작은 골’(O Little Town of Bethlehem)는 필라델피아의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 목사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받은 영감을 가사로 쓰고, 예배 인도자였던 루이스 렌드너(Lewis Redner)가 이에 멜로디를 붙인 곡이다. 이 곡은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 6명과 36명의 아이들에 의해 불려졌다. 10. ‘옛적 임금 다윗 성에’‘옛적 임금 다윗 성에’(Once in Royal David’s City)는 이 10개의 크리스마스 캐롤 중 가장 적게 알려졌을 수 있지만, 그 메시지와 악곡은 잊지 말아야 하는 곡이다. 아이리쉬 목사 사모였던 세실 프란시스 알렉산더(Cecil Frances Alexander)가 1848년 아이들을 위해 이 캐롤을 펴냈다.이 10개의 캐롤은 다른 여러 곡들과 함께 춥디추운 겨울 이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나눌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보화이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 다윗 성에 소망이 솟아났으며 우리 모두 하늘의 승리에 함께 기뻐하게 한다.“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Christmas Carols Everyone Should Know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캐롤
구스타브
아이작
스튜어트
찰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
by Brandon D. Crowe
2019-12-21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교리는 보통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처녀에게 탄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구약 성경의 맥락 속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걸까?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 예언을 이루었다는 걸까? 이사야 7장 14절은 처녀 탄생과 관련해서 중요한 핵심 구절 중 하나이다. 그러면 이 구절이 어떻게 예수와 연결되는지 살펴보자.먼저 여러 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구약적 맥락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사야 7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보냄을 받는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는 명령을 주기 위해서이다(10-11절). 이것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재앙을 대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보통 하나님께 어떠한 징조를 구하는 것이 믿음 없는 행동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이다(12절). 앗수르와 정치적인 결탁을 하는 대신(왕하 16:1-9) 아하스 왕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선지자의 말에 대한 아하스 왕의 거절,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결국 앗수르에게 침략당하는 결과를 초래한다(사 7:17-25). 아하스 왕은 징조를 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징조를 받았다. 이사야 7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셨는데, 바로 특별한 아기의 탄생이다. 그 아기가 히스기야 왕인가?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 중 하나인가? 여기서 이 아기가 어떤 아기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단지 그 아기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조라는 것만 명확한 것이다. 아기가 누구인가보다 더 명확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여인이 과연 처녀인가에 대한 것이다. 혹자는 이사야 7장 14절 속 히브리어가 처녀를 의미하지 않고 단지 지금껏 아이를 낳지 않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 탄생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약적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히 처녀를 말하고 있다.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는 그 단어는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처녀를 의미했던 단어이다. 게다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 성경은 이 단어를 분명히 그리스어 “처녀”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했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약 성경의 저자가 이사야 7장 14절은 분명한 처녀 탄생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 1:22-23).여기서 약속된 아이는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크리스마스 노래를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경고였다. 그에게 있어서 임마누엘은 축복이 아니라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는 경고이자 저주였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적용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복과 저주를 함께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 안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반응해야 한다.요약하면,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약속한 아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시이며, 아하스의 믿음 없음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은 우리의 도움과 피난처이며,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곳에 신뢰와 희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가까운 미래에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가 자라기 전에 아하스 왕이 두려워한 모든 정치적 위험은 사라질 것이다(사 7:16). 그럼에도 아하스에게 징조로 보여진 그 아이는 보다 더 완전한 성취를 가리키고 있다. 아하스 왕 시대에 이사야 7장 14절이 말하는 임마누엘 아기가 정말로 태어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분명한 징조였고,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면 저주였다. 이 예언은 틀림없이 아기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이라는 더 위대한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 이사야 7장 14절에서처럼 우리와 맺은 언약적 존재인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에 따라 복이 되거나 저주가 된다. 아하스 왕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힘을 주거나 경고의 메시지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에 대한 경고가 된다. 아하스 왕은 이방 신에게 제사하는 방식으로 그의 아들을 불에 바쳤던 것 같다(왕하 16:3; 대하 28:3).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축복을 가져다줄 아이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며,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회복을 약속하셨다. 마지막 임마누엘은 희생적인 죽음으로 그 희생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임마누엘이 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찬송하는 “천사 찬송하기를” 속의 가사처럼, 처녀의 자궁에서 태어난 이 아기는 “죄인들을 불러서…영생하게 하시니”를 실현하신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Of the Virgin’s Womb번역: 무제
복음
변증
예수님
처녀
이사야7:14
임마누엘
선지자예언
언약백성
피난처
우리 가정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자
by Jani Ortlund
2019-12-20
“혹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만 하는 특별한 일이 있나요?” 며칠 전 이웃과 저녁 식사를 할 때 그 집 아이가 물었다. 이 시즌에 나올 법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절기보다도 크리스마스를 더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을 둘러싼 신비로운 옛이야기에 경외심을 품기도 하고, 그 이야기에 담긴 영원한 메시지를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시즌의 의미가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또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기념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결혼 후 맞이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그때는 유난히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이전처럼 가족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출산 예정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에만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을 하며 집을 꾸미지도 못했다. 심지어 오 헨리(O. Henry)의 ‘크리스마스 선물’(The Gift of the Magi)에 나오는 짐과 델라 부부처럼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날은 어쨌든 크리스마스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니 일 년 중 가장 행복하고 믿음도 충만해져야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경이감을 회복하고 우리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사도 바울은 서로가 함께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밝혔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은 우리가 매해 만들어 온 크리스마스 전통의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묻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무엇을 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 또 무엇을 하면 그분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를 말이다.크리스마스 장식과 이야기, 그리고 함께 나누는 식사우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은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부엌에서는 칠면조 수프가 끓고, 거실에서는 캐럴이 들리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된다. 추수감사절 때 사용된 호박과 곡물 바구니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소품과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집이 꾸며진다. 그리고 성탄의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커다란 달력을 벽에 걸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우리는 서랍과 옷장을 열어 온갖 장식품을 꺼낸다. 오래 보관된 물건을 싸 놓은 포장을 벗겨 내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기도 한다. 힘들었던 결혼 첫해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쓰던 도구들도 나온다. 40년이나 된 쿠키커터도 보인다.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리본이 붙어 있다. 과거에 남편은 크리스마스트리 판매상을 찾아가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싼값에 사 온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트리를 장식할 만한 조명이 없었지만, 펠트 조각이나 손수 만든 장신구를 매달아 트리를 돋보이게 했다. 이와 같이 전통은 작게 출발하여 해가 거듭될수록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더해 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믿음과도 같다.우리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추수감사절부터 새해 전야까지 다양한 캐럴과 이야기를 즐기는 특색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크리스마스용 화환이나 그림 성경책을 사용하여 아이들이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른 크리스마스 책들도 구해 시즌만 되면 읽어 주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살펴보는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2천 년이 지난 그 오랜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려주는 책, 그러면서도 매번 성탄의 느낌을 신선하게 전달해 주는 책을 해마다 한 권씩 장만해 보기를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만 펼쳐보는 아름다운 책들로 작은 서재를 꾸미고 저녁 시간이나, 거실에 함께 모였을 때, 그 이야기를 나누며 성탄의 기쁨을 누려 보기를 권한다.만일 당신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크리스마스 당일에만 즐기는 음식을 준비해 볼 것을 추천한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즐겨 먹던 음식을 마련해도 좋겠다. 그런 음식이 없다면 현재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정해도 괜찮다. 나의 경우는 매년 어머니가 구워 주시던 다섯 가지 모양의 쿠키를 만든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남편의 고향 음식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식 뷔페를 즐긴다. 거기에 과일 수프나 쌀로 만든 푸딩을 곁들인다. 이렇게 전통 음식을 먹을 때 믿음의 대화도 함께 나눈다. 음식만이 아니라 믿음도 양가의 가족을 통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경우,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신 후부터 믿음의 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선물을 나누는 크리스마스 전통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밤늦게 ‘멋진 인생’(It’s Wonderful Life)이나 ‘스크루지’(Scrooge) 같은 영화까지 보고 나면,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조용히 선물을 꺼내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으면 계단 위에 막내부터 첫째까지 차례로 줄을 세우고 마지막 꼬리에는 내가 섰다. 남편은 앞사람의 눈을 손으로 가리라고 말한 다음, 우리 모두를 계단 아래 크리스마스트리로 인도했다. 거기서 하나, 둘, 셋을 세고 각자의 손을 거두게 하면 네 명의 아이들은 흥분과 호기심, 기쁨을 이기지 못해 껑충껑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양말을 열어 선물을 확인하고는 아침을 나누었다. 그 후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해가 지나며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선물을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는 경험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임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선물을 주는 이유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매년 서로에게 묻는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나눔으로써 그 ‘부요함’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베풀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며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때로는 우리가 저축해 놓은 돈에서 선물 비용을 마련하기도 하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그 예산을 절감하기도 한다. 해외에 있는 학생들에게 성경책을 보내기도 하고, 빈곤 가족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때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필요한 사역에 참여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우리의 형편이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을 때,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 당일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문 앞에 놓고 간 적이 있다. 자기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따라 선물로 놓고 간다는 쪽지만 붙어 있었다. 그날 우리는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을 크리스마스 전통으로 삼게 되었다.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전통은 한 해 동안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노트에 기록하는 일이다. 우리는 매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가족만이 아니라 집으로 초대한 친구들에게 이 소중한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씩 기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 감사했는지를 적고, 또 다른 이들은 기분 좋았던 추억이나 선물에 대해 기록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되면 작은 스냅 사진을 찍어 거기에 붙여 놓는다. 이 노트는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기록물인 셈이다. 매년 우리는 그 노트를 펼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떠올리며 기뻐하기도 하고, 또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기도 한다.이처럼 당신도 소중한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가며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이 시즌을 기념하다 보면, 어느덧 당신의 크리스마스도 그동안 이루어진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드러내고, 나누는 날이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Traditions: Fo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번역: 장성우
가족
전통
나눔
선물
은혜
믿음
진보
기쁨
성탄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by 이승구
2019-12-19
성육신에 대해서 가르칠 때 제일 먼저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모든 사실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과 독특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성육신이 다른 역사적 사실들과 같이 일어난 것으로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에게 수태된 것의 역사성, 그 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라나신 일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등을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이와 함께 잘못된 정보가 같이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매우 애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부모님과 교사들이 가르친 것 가운데 잘못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고 제대로 가르친 것까지를 의문시하도록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경건한 허구”를 섞어 가르치게 되면 후에 의심이 몰려 올 때 모든 것이 거부되기 쉽기 때문이다.이 때 유의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한 연대를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수님께 탄생하신 것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연대를 새롭게 기록해 보려던 소 스키디아(Scythia Minor) 출신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로마에서 525년에 시작한 계산법에 착오가 부가되어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난 연도를 BC 4년을 생각하지만, BC 6년, BC 7년, BC 12년이나 심지어 18년까지를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정확한 연대도 모른다. 성경은 대강의 기간을 제시하고 있지 정확한 연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2) 더구나 우리는 주께서 어느 날 탄생하셨는지 모른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c. 180-c. 250)에 의해서 221년에 처음으로 (부정확하게) 예수 탄생 기념일로 언급된 12월 25일은 로마 교회에서 이교 시절에 로마인들이 “패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Dies Natalis Solis Invicti, the birthday of the undefeated sun)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던 태양신 축제(solar festival)를 대신하여 “의의 태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정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 온 것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어린 아이들에게라도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인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3) 또한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한 천사 가브리엘(눅 1:26-38)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한 ‘주의 사자’(눅 2:9),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와 같이 있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양한 수많은 천군들은(눅 2:13-14) 결국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며, 가브리엘의 이름이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것임이 확실하다는 것과 특히 조각을 할 때나 이상(vision) 중에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천사가 직접 나타난 경우에는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유의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칼빈은 왜 천사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답하면서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 정도에 맞추어 표현하면서 신속히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잘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건전한 해석들에 근거한 사유를 하고 그런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4) 또한 천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선언을 듣고서 목자들이 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눅 2:15-20)과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찾아와 예물 드린 사건(마 2:1-12)은 시간적 거리를 지닌 사건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또한 동방 박사가 몇 명이 온 것인지를 성경이 명확히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 숫자를 셋으로 강조하여 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6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방에서는 8세기에 상당 보편적으로 그들에게 부가된 이름인 카스파르(Caspa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자르(Barthasar) 등의 이름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육신과 관련된 명확한 사실성을 분명히 하면서 가르치다가 초등부 고학년부터는 그 시기나 앞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극복시킬 수 있는 교육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중고등부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에 올려 올 수 있는 회의를 미리 극복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으며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회의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 발자국 앞서 가면서 그 역사성과 독특성을 미리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목회
설교와교육
성육신
성탄
마리아
가브리엘
역사성
독특성
일이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by Teena Dare
2019-12-18
“계속해야 할까 떠나야 할까? 내게 맞지 않는 일을 택한 아닐까? 아니면 나란 사람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평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건 당신의 고민이자 또 내 고민이다. 오늘, 다섯 번째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문득 예전에 하던 일이 떠올랐다. 남의 손에 들려 있는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다. 불만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다. 내가 지금 왜 불만인지조차 모를 때도 있다. 불만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불만의 원인이 각양각생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불만이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기에 그렇기도 하다. 성경을 여는 첫 장면에서 우리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푸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주가 주신 불만태초에 하나님은 세상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신중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하나님의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지으셔서 세상을 돌보고 가꾸고 누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시원한 시간에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니시며, 두 사람이 당신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운 면면을 찾아내고, 또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는 걸 보시며 미소 지으셨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와 규칙에 따라 세상을 가꾸어 나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일그러진 불만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권위를 거역한 결과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서로 보듬어 주지 못하고, 서로를 탓했다. 그들이 누렸던 창조 세계가 조화를 잃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이제 고생하며 일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요, 그 끝에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과 내가 느끼는 일그러진 불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는 현실은 이렇게 망가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 구속적 불만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계가 죽음과 부패에 빠져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창조세계를 죄의 손아귀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다. 당신이 직접 사람이 몸을 가지시고 조롱과 고문을 받으시고 맨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셨다.구속적 불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을 일깨우는 불만이요 우리로 하여금 오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게 하는 불만이다. 우리의 일은 허리춤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이 구속의 이야기에 들어가는 기회이다. 창조세계를 가꾸어 가는 만족그러면 우리 불만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불만인가? 자신의 안위와 현실에 집착하는 불만인가? 망가진 세상에서 좌절하여 생긴 불만인가? 흐트러진 창조세계를 다시 잘 짜 맞추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불만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다음은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천 방법들이다. 1. 당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라.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라.” “네 열정을 추구하라.” “네 꿈을 좇으라.” 주어진 일이 행복하지 않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행복의 원천이 있다. 부와 명예, 지위, 권력, 또는 우리가 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성취감과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일반적인 관념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온통 ‘우리’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야기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을 이 이야기에 맞추라. 성경 말씀에 시간을 쏟아라. 말씀을 읽고 외우고,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을 서로 이야기하고, 일상의 세세한 부분들에서 말씀을 적용하라. 일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시시때때로 점검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다시 맞추어야 한다. 로마서 12:2에서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상기시킨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2. 하나님은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이 이야기에 비추어 어떻게 여기실지 생각하라.다음 질문들을 가이드로 활용하라. •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당신의 동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 당신의 일은 상처와 실패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와 유익을 주는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3. 잘 섬기고, 잘 쉬라.교회나 공동체, 현재의 직업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세워 두신 계획에 맞는 일이 어떤 것인지 찾아 나가라. 예수님이 당신에게 사랑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듯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그리고 의도적으로 쉬도록 하라. 우리는 때로 일을 하면서 불만을 품는데, 이는 우리가 일이 우리에게 기쁨과 성공과 정체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상에 빠진 것을 회개하고, 잠시 멈추어 쉬면서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묵상함으로써 그 우상을 물리쳐라. 4. 조언을 구하라.당신을 좋아하고 잘 아는 경건한 사람에게 당신의 재능과 은사, 고민과 두려움에 대한 조언을 구하라. 공동체와 떨어져 있으면 자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가 적다. 가능하면 연장자이고 현명한 상담자와 이야기하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조언을 구하라. 막히고 답답한 삶의 큰 돌파구가 될 것이다. 현재 하는 일을 그냥 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주는 등 적어도 한 번쯤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해 볼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라.5. 적극적으로 기다리라.구직 정보를 계속 찾아보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잠잠히, 느긋하게 이렇게 하라. 가장 좋은 때 하나님이 다른 일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동안 당신은 현재 있는 곳에서 마음을 다해―신실한 만족과 불만 둘 다 품고서,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원제: Is My Job the Problem? Or Am I Just Discont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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