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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
by David Gibson
2020-01-10
“나는 그녀가 죽기 전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년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매우 아팠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중략] 그녀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악화되어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습니다. [중략]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교회입니다.”톰 라이너(Thom Rainer)는 ‘죽어가는 교회의 부검’(Autopsy of a Deceased Church)에서 이렇게 썼다. 죽어가는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교회 영안실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서 매주 출석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의 증상이 만연한 교회가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는 교회의 경우, 그게 더 번창하려고 힘차게 숨을 쉬는 건지 아니면 죽기 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건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의사로부터 받는 도움우리가 어떤 교회에 속해 있든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서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아서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언제라도 모든 것이 다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줄 수 있다. 지금 부서진 상태라서 상처받고 당황한 신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상처를 싸매줄 수 있다. 야고보서가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이유는 문제의 증상과 근본 원인을 모두 다 제대로 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단순한 기침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은 우리에게 천천히 숨을 쉬라고 하면서 더 근본적인 기침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하여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애정을 가지고 날카로운 메스를 사용한다. 어떤 것을 처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증상, 병, 그리고 죽어가는 교회에 필요한 치료약을 알려준다.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야고보서는 스스로 교회의 건강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증상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그어버린 경계선, 그리고 선한 일을 무시하는 증상이다. 1. 교회가 화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이 증상에 대한 첫 번째 힌트를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같은 주제가 1장 26절에 또 나온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3장에 이르러서 야고보서는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 진짜 재앙이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그럼에도 야고보서 저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주로 목요일에 발생한다. 왜 하필이면 이 날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날이 되면 우리의 혀가 최악의 말을 내뱉곤 한다. 인내심이 짧아지고 성질이 예민해지며 말이 날카로워진다. 형제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또 부모가 자녀와 싸우면서 집안은 화염에 싸이고 사람들은 화상을 입는다. 조절할 수 없는 혀는 하나의 증상이지 병이 아니다. 2. 교회가 더러운 선을 긋기 시작한다2장에서 이런 교회의 특징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을 편애한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를,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준다. 내부 군중이 있고 또 외부 군중이 있다. 각종 사회적인 수단과 부요함을 찾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교회는 아주 매력 있다. 이런 식의 사회경제적 구분선이 당신 교회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런 특정한 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선을 그을 수 있다. 그렇게 선을 그음으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과 사회 집단에 포함되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떤 특정 사람들과 유대를 맺거나 다른 특정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무시하게 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기혼자와 독신자, 직장인과 실업자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선을 긋는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줄 것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선을 그을 때 하나님과 다르게 긋는다. 하나님은 위험에 노출되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줄 게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눈앞에서 정결한 종교인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이고 이 세상이 주는 보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약 1:27).3. 교회가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야고보서가 도전적인 이유는 그 서신서의 수신자가 믿음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냥 교회도 아니고 복음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의 신학은 정통이었고 교회 전체는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다.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것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다.그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그런 사각지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한 일이 없으면, 행함이 없으면 그건 죽은 믿음이다. 너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죽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나쁜 말을 하고, 편을 가르는 선을 긋고, 선행은 없다. 우리가 그런 증상을 가지고 의사에게 갔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도움이 될까? 그게 제대로 된 치료가 될까? “좋아요, 그럼 앞으로 좋은 말을 하고, 선을 긋지 말고, 선행을 하세요.” 이런 죄가 어디에서 오는가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이 구절 속 용어는 인간 구성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두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두 영혼”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내 속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두 개”는 나의 하나됨(one-ness)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두 개로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살 때 조만간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당신에게 ‘분열된 자아’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증상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우물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내면은 외부로도 그 분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열된 마음은 분열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로 시들시들 죽어가는,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준 치료제, 은혜의 복음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Symptoms of a Dying Church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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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
by Collin Hansen
2020-01-09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사망 기사가 나지도 않았다. 조의를 표하는 어떤 소식도 TV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다.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견한 이들도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막지는 못했다. 사망의 조짐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DNA를 통해 나타난 바가 있었다.당신이 교회의 목회자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망 소식을 놓쳤을지 모른다. 물론 수많은 언론인과 문화 평론가 또는 미래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이 시대에 크게 성공할 상품인 양 선전해 왔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 예견해 왔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격을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견뎌 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11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례식이 열렸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그 양식과 전복의 역사, 1970-1990년”(Postmodernism: Style and Subversion 1970-1990)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판단 기준의 부재흔히 기독교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마치 철학과 윤리 분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혁명적인 사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선 모더니즘이 신뢰한 확실성에 반발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종의 대안 정신으로서 처음부터 흔들리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선택적으로만 각 분야에 적용되어 왔다. 그러면서 모더니즘을 초월한 형태로 자주 표현될 뿐 그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사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서 등장한 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예술과 문학에 뿌리내린 포스트모던 학파 역시 모더니즘 관습에 대한 산발적인 항변을 나타낼 뿐이었다. 런던 전시회의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과거 모더니즘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는 창문과 같았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깨진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열이 생긴 여러 조각의 유리 표면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지침은 복잡성과 자기모순에 있다.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에서 90년에 이르는 이십여 년 동안 그 스스로가 애초에 해체하고자 했던 돈과 권력의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시즘과 같은 근대 사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인간의 동기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이 모든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묘사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세대는 병원을 방문할 때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는 이상하게도 모던 세대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 실제로 가족 간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게 마련인데, 모더니즘과 그 방탕한 아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 아들은 돈과 권력에 탐욕을 낸 아버지처럼 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지만, 세월이 흘러 거울을 보고는 그 빼닮은 모습에 놀라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에드워즈 독스(Edwards Docx)는 ‘프로스펙트’(Prospect) 매거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락하며 소비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 아티클에서 그는 저자의 의도에 대한 반발로 문학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 경향을 설명했는데,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발언에 문을 열며 일부 계층에 자유를 허락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움직임이 결국에는 반지성적인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게 된 서구 자본주의는 잠시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이러니한 전술로 인해 도전에 직면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원체 모든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혼란과 불확실성의 기류도 함께 자라며 번성하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의 신조와 기술 또는 미학에 대한 확신도 결핍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어 누구도 스스로 안심하거나,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떤 대상의 진위를 가리거나 판별할 수 있는 방도가 정책적으로 마련되지도 않았다. 아무런 미학적 기준이 없다 보니,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역설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한 예로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를 쓴 댄 브라운(Dan Brown)을 들 수 있다. 그는 학회에서 자신에게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치 학자처럼 행세하며 진리를 오용함으로써 그릇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런 전제는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 또 그는 신뢰할 만한 학계의 표준적인 견해는 무시한 채, 이단적인 사설을 마치 교회의 정통적인 입장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럼 끌어올려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저급한 추리 소설을 대중 시장에 내놓았고, 많은 사람이 진정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된 것이다.어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당연하다. 시장은 상품의 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언제든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에드워즈 독스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탈포스트모던 세대(post-postmoderns)가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도한 소비 행태와 거짓을 진짜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그리고 각종 소셜 미디어를 채우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중략] 포스트모던 세대는 모던 세대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면, 현세대가 느끼는 문제는 그와 정반대이다. 즉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따라서 교회의 목회자가 시대에 적응한다는 명목하에 쓸데없는 시도를 하며 적실성만 추구한다면, 현세대에게 정작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다. 그 다음에 어떤 사조가 몰려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을지 몰라도, 그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판단 기준의 실재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지난 수십 년간 시대정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필요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이점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우리의 죄악 된 확신 내지는 교만을 점검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내포된 지혜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덕분에, 더 이상 계시와 분리된 이성만으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식의 계몽주의 사상은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문제가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인간의 탐구가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는 에드워즈 독스의 아티클에 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계속 들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속한 문화와 역사에 따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진리를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권력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해치고 말았다. 거기에는 진리와 정의와 권위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할지를 알려 준다. 교회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문화적 흐름에 대응하도록 가르치는지를 놓칠 때가 있다.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해 보겠다. 먼저 본디오 빌라도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들으며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진리이신 그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요 18: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듣는 귀를 주셔야만 진리를 증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요 18:37).다음으로 솔로몬은 돈과 권력을 다 거머쥐고 쾌락을 마음대로 누렸으면서도 인생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원론자처럼 외부로부터 새로운 신들을 다 받아들였다(왕상 11:1-8).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는 마치 에드워즈 독스의 탄식과 같이 들린다. 전도서는 그 결론부에서 신뢰할 만한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우리가 속한 문화적 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죽었지만, 그 정신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보편적 절망감을 반영하는 한, 여전히 우리 곁에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그분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와 정의, 권위의 근원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체하게 될 정신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공허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바로 그분께 속한 권위 외에는 다른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만이 거룩한 공의가 실현된 아름다운 역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죽음’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위한 영원한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ostmodernism: Dead But Not Gon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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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진 교회
by Derek Thomas
2020-01-08
이 땅에서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바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예수님은 과연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어떤 구조와 조직을 갖춘 교회를 세우고자 하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후에야 주어지게 된다. 우선 오순절 사건 직후에 탄생한 교회는 그 조직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그 교회는 사도들이 감독하는 하나의 모임으로서 네 가지 사역에 헌신했을 뿐이다. 즉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 간의 교제, 성찬, 그리고 기도에 집중했다(행 2:42).그러다가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특별한 구성을 갖추지 않은 가정 모임에서부터 조직화된 회중으로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집사와 장로라는 뚜렷한 직분을 통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신약교회의 ‘직분’에 관해 연구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리고 이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쟁점은, 항구적으로 부여되는 직분과 일시적으로 부여되는 직분을 어떻게 서로 구별할 수 있느냐이다.이러한 직분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 또 하나의 논점은,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예외적인 은사가 항구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인가, 아니면 일시적으로 주어진 은사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와 같은 은사중지론자는 신약에서 언급되는 일부 은사가 “사도의 표”(고후 12:12)로 주어졌다고 믿는다. 즉 구속 역사의 목적상 교회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신약성경에 의존하고 있던 시기에만 주어졌다고 믿는다. 당시 초기 단계에 있던 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데는 그처럼 예외적인 은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신약의 정경이 완성되고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사도라고 일컬어진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는, 집사와 장로 혹은 (해석자가 따로 구분할 경우에는) 목사와 같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직분만 존재하는 규범적인 상황이 교회 안에 확립되었다.교회의 조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와 같은 후기 서신들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이 서신들은 더 이상 특별한 직분이나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집사와 장로 그리고 디모데가 수행했던 복음 전파자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는 어떤 직분이나 은사가 교회의 유년기에만 허락되었고 성숙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집사의 직분집사라는 직분은 교회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처음부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을 수용하며 성장하자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문제의 정황은 이렇다. 당시 1세기 문화에서 과부는 취약 계층에 속했는데, 교회는 공동체 의식에 따라 그처럼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평등하게 음식이 배분되어 실망하는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행 6:1-7). 이를테면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과부들을 교회가 편애하여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이 음식을 받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익숙하게 경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사도들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곱 사람을 선택해서 문제 해결에 나섰다. 이런 해결책을 실행하여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자 하였다(행 6:4).물론 그런 편파적인 행동의 책임이 사도들에게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음식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행 6:2). 교회를 키우고 양육하는 데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이런 차원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되어 따로 세워졌다. 그들에게는 일정한 자질이 요구되었다.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다(행 6:3).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 교회에서 세움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임명을 받게 되었다(행 6:6). 이처럼 안수식과 임명식이 있었던 사실은 그들에게 분명히 구별된 사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그렇다면 이 일곱 사람은 정말로 집사로 세워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성경은 그들의 직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네오’라는 용어는 (‘집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디콘’(deacon)과 근접한 관계성을 지닌다. 그리고 일곱 사람이 집사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그들은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 일곱 사람을 집사의 원형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직분은 교회가 말씀 사역과 좀 더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사역을 어떻게 구분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결국 집사라는 직분은 성도의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가령 재물과 음식을 나누거나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섬기는 리더십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일정한 자격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은 언제나 섬기는 리더십을 전제로 한 직분을 강조한다. 그렇기에 집사와 장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더욱 돌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집사와 장로의 두 직분 가운데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경건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집사에게 요구되는 영적 자질을 나열할 때, 장로에게 요구되는 자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제시했다. 집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제외한다면, 그 신앙의 덕성과 영성에 있어 최고의 수준을 보여야 했다(딤전 3:8-12).앞서 언급한 사도행전 6장의 구제 사역은, 집사에게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샘플과 같다. 이에 따르면, 집사는 구제뿐 아니라 교회의 재물과 소유 전반에 관련된 일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직분임을 알 수 있다. 이후에 바울은 집사의 사역 범위 안에 특별히 과부에 대한 섬김을 중요한 항목으로 포함시킨다(딤전 5:3-16). 그리고 일반적인 과부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과부에게 초점을 맞추고 교훈을 제시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과부를 섬기는 일에 교회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는 교회의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관행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자원을 바르게 사용하는 분별력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지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따라 행동하는 영적 은사를 갖춰야 한다. 그리하여 어려운 문제를 처리할 때 정확한 사리 분별을 해야 한다.여성 집사에 관하여그렇다면 모든 집사는 남자여야 할까? 신약성경에는 여성 장로와 관련해서는 참고할 만한 본문이 없기 때문에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여성 집사의 경우는 다소 애매한 언급이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가령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자매 뵈뵈”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추천하는데, 이때 그녀에 대해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언급한다(1절). 여기서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안수식이 요구되는 직분은 아니어도 집사의 사역에 참여하는 직무를 의미할 수 있는 단어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은 집사의 자격을 설명하는 가운데(8-13절), 여자들에 대한 조건을 첨가한다(11절).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동일한 장에서 장로에 관해 설명할 때는 말하지 않는다(1-7절).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한다면,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서 “여자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귀나이카스’는 여성 집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로 읽을 경우에만 본문의 흐름이 산출하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내가 속한 개혁교단은 이러한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라 여성 집사를 인정하며 그 직분을 공식적으로 제정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입장이 여성 장로에 대한 논쟁으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장로의 직분이 글에서는 (오늘날 장로교단에서 ‘가르치는 장로’라는 명칭으로 구분하는) ‘목사’가 (‘다스리는 장로’에 해당하는) ‘장로’와 분리된 직분인지에 관해서는 다룰 수가 없다. 그 주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분량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 있는 또 다른 규범적인 직분으로서 ‘장로’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이 직분을 언급할 때 신약성경은 세 가지 타이틀을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한다. 그 세 타이틀은 ‘감독’(에피스코포스), ‘장로’(프레스뷔테로스), ‘목자’(포이멘)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17절과 28절에서 그 세 가지 개념은 모두 동일한 사람들에게 사용된다. 이 사실만으로도 지난 수백 년 동안 엄청난 분량으로 논의되며 쟁점이 되어 온 주장, 즉 각각의 타이틀이 독립된 직분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일축하기에 충분하다.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 장로가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지녀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열거한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장로 또한 특정한 덕목을 갖추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리더십이다. 성품의 결함은 그 어떤 재능으로도 메꿀 수 없기 때문이다.집사와 달리 장로가 갖춰야 할 특징이 있다면, 바로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2). 물론 모든 장로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딤전 5:17). 이는 일반 장로와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장로가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집사 또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딤전 3:9), 그중에서도 가령 나이든 여자는 젊은 여자를 가르쳐야 하고(딛 2:4), 나아가 전체 회중 또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골 3:16). 그리고 모든 신자는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벧전 3:15). 그렇기 때문에 가르치는 능력만으로는 장로의 직분을 얻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능력이 장로에게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또한 권한에 있어서도 집사와 장로 간에는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집사의 권한은 그 집사가 속한 지역 교회에 제한되지만, 장로의 권한은 그와 같은 지역 교회를 넘어서 행사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장로들은 예루살렘 공회에 참석해서 신약교회 전체에 구속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행 15:6-21).이와 같이 신약교회의 리더십은 집사와 장로라는 두 가지 직분을 통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여 교회 안에 그 두 직분을 공고히 세워야 한다. 잘 훈련받은, 경건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이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고전 14:40).출처: www.ligonier.org원제: Leaders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여성집사
직분
디아코네오
디콘
집사
장로
오늘날 요구되는 남성적 리더십
by Greg Morse
2020-01-07
남성성(masculinity)에 관해 가르치는 목록에 힘, 주도성, 열정, 용기와 같은 자질이 포함되는가? 우리가 교회 사무실에서 일할 남자를 평가할 때, 그리고 소그룹 지도자와 경건한 멘토를 찾을 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융통성있는 남자, 양을 보호하고 기꺼이 늑대와 싸울 수 있는 선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고, 정복하고,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성의 힘, 용기, 열심 및 주도성을 높이 평가하는가? 그럼 강하기 때문에 온화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는 강하기 때문에 온화함을 보일 수 있다.지금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라는 아슬란의 설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종(species)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생각은 남자를 안전하게 하는 데에 선함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선함과 상관없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로 중생한 남자는 상대가 불편해할 말은 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며, 주도적인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강요가 없다면 신념 없고, 열정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남자를 만든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중생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로움으로 훈련받은 남자의 경건함은 그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본성을 잃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더함으로써 성숙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친절, 자제심, 동정심은 그의 힘, 용기, 결단력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온화하고 강한 남자는 세상에 역설을 제시한다. 그의 손은 집을 짓고, 아들과 씨름하고, 딸들과는 차를 마신다. 그리고 칼자루를 들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운다(엡 6:10-20). 그는 갑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경건한 전사이다. 용기 있으면서 온유하고 선한 사람이다. 다음에 나오는 남자에 대한 묘사도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신은 홀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음식을 먹었던 가장 온유한 남자였다. 당신은 모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으로 적에게는 가장 무서운 장수이자 가장 용감한 기사였다.”_‘아서왕의 죽음’(Le Morte D’Arthur)우리는 남자의 성품을 강인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나눌 때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 사회는 점차 부드러운 남자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강인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남자를 특별한 인종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적극적으로 찾는 남자.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의 남자.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더 높은 가치를 얻기 위해 전진하는 남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남자.잊지 말자. 미지근한 종교는 미지근한 남성상을 만든다. 그리고 미지근한 남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교회를 지나쳐서 이슬람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또는 단순히 ESPN(미국 스포츠 방송-역주)을 지나 파괴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죽어가는 남성의 불꽃경건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 나타나는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을 느낄지가 궁금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래전 남자의 모습을 버려야 할 것인가? 방황하는 아브라함, 씨름하는 야곱, 싸우는 여호수아, 이방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엘리야, 융통성 없는 다니엘, 거칠게 말하는 세례 요한, 주도적인 바울과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는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못 되었다고 꾸짖어야 하는가?우리는 경건이 주는 불편함보다 친절함이 주는 편리함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 아버지, 남편, 교회 가는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한 남자가 잠들어있다”라는 비석 아래에 언젠가 내가 누워있지 않을까 두렵다. “나이스하다는 것”은 아픈 허리에 대해서,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 용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의로움과 바른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나이스하기 위해서 굳이 용기를 낼 필요도 없고, 특별한 신념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악한 자를 상대로 굳이 원수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적당하게 맞춰주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이제 우리는 길을 벗어난 것 같은 오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또 다른 도랑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만족하며 남자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한 힘과 자기희생을 통해 더 나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불길이 타오르는 남자회복을 위한 한 단계는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타협하지 않는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질투심이다. 우리는 거룩한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과 확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출 20:5). 그는 자신의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와 같은 거룩한 질투심으로 붙 타오르도록 남자를 창조했다. 이런 남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불타는 남자는 반드시 현재의 고착상태를 부수어 버릴 것이다. 문화적인 수용과 세속적인 민감함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은 성경이 말하는 남성다움을 연마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거룩한 질투심은 남자를 변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향해, 육체의 정욕을 향해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 투쟁하게 한다.모세를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민 12:3). 그는 백성의 우상숭배에 분노해 십계명 돌판을 부쉈고, 황금송아지를 녹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출 32:20).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거인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시를 쓰는 목자 다윗은 또 어떤가(삼상 17:2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흑인”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던 아프리카인 비느하스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졌던 그는 심각한 죄를 짓고 있던 두 명을 창으로 꿰뚫어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다(민 25:6-13).엘리야를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며 그는 괴로워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 대결을 요구했고, 우상에게 절하는 그들을 몇 시간에 걸쳐서 조롱했다(왕상 18:20-40).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것을 원했다.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어떤가?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대신 온 도시가 우상을 섬기는 모습에 자극을 받았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와 지도자들에게 도전했다(행 17:16). 그는 사람들이 놀리고 반대하고 때려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 사역을 위해서 살았다. 왕의 모든 남자들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는 채찍을 들었고 거칠게 말했으며, 무기를 손에 들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함께 노는 유다의 사자이다(막 10:14). 또한 그의 분노를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을 할 정도로 무서운 어린 양이기도 하다(계 6:16).그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고후 10:5), 용의 대가리를 부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사 42:3). 그는 갈보리로 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도둑과 쓰레기들과 함께 죽으려는 나이스한 마음으로 간 게 아니라 그의 신부, 그의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그 자신의 영광을 향한 불타는 정열 때문에 갈보리로 갔다(요 17:4; 롬 3:25-26; 벧전 3:18). 스펄전 목사가 강단에서 한 마지막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예수]는 대장 중의 대장이다. 선택한 왕자 중에 그분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부는 언덕의 가장 황량한 쪽에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의 가장 무거운 끝은 그의 어깨에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짐을 지라고 명령할 때 자신도 함께 짐을 진다. 자애롭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에 화려하고 풍성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항상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스펄전: 설교의 황태자')"왕의 남자는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음으로, 어떤 것에도 열정을 키우지 않음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 않음으로, 믿음의 요새를 세우지 않음으로, 어떤 영적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음으로, 짐을 지지 않음으로, 정복하지 않은 언덕 위에 깃발을 꽂지 않음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왕의 남자는 악의 세력에 맞서 거품 칼을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치열한 전투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나님 안에서 위험한 남자는 주위를 향한 책임을 지고, 내가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질 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곰이 공격할지라도 가만히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온유하지만 치열하다. 거칠지만 부드럽다. 리더지만 섬긴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다.바로 예수님과 같은 남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Not Safe, But Good: The Men We Desperately Need Today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성령의열매
남성의불꽃
거룩한힘
자기희생
스펄전
예수님같은남자
거룩한질투심
성경이 말하는 예배
by Albert Mohler
2020-01-06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심문관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통찰력을 던진다. “인간은 자유가 있는 한, 숭배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대심문관의 말이 믿을만한 신학 안내서로 부족할지라도, 이 부분에서는 그가 확실히 옳다. 인간 존재는 확실히 종교적이다-심지어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를 때에도-그리고 인간은 계속해서 숭배할 대상을 찾는다.인간은 또한 죄인이다. 우리의 예배는 자주 개인 선호에 따른 우리 자신의 이교도 신앙에 기반을 둔다. 존 칼빈이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다. 항상 예배하고 숭배할 새로운 우상을 만든다. 임의대로 부패한 공장은 절대 참된 예배를 만들 수 없을 것이며 대신에 자신의 발명품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교회는 예배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 모이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방법적으로 발견한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되며, 예배의 자리로 부름받은 사람들로 이뤄진다.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이다. 그리고 오직 구원받은 자들만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다.우리는 어떠한가?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은 자신의 동료 철학자에게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예배시간에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학책과 교리에 대한 문서는 회중이 무엇을 믿는지 드러낼 테지만 예배는 ‘정말로 이를 믿는가’하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큰 곤경에 처해있다.많은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예배라고 부르는 것들의 혼란스러움을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라기보다 혼돈의 축제와 같은 예배를 하는 교회들이 있다. 수년 전, A.W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오락의 최대치, 진지한 가르침의 최소화’라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깨닫는 장소’로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50여 년 전의 이런 말은 현재 행해지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듯하다.우리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추적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더니즘이 초현실주의를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수평화” 되어 인간에게로 이동되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단순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였고 근대성이 요구하는 신학적 타협을 이루었다. 예배는 경이롭고 위대한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복하는 행위가 아닌 예배자가 판단하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뀌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적 엘리트의 세계관과 문화의 가장 강력한 영향의 중심, 급진적 주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표식인 절대 진리에 대한 적대감은 일부 교회의 예배에도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을 넘어선 이미지의 승리를 축하하지만, 기독교는 말씀 중심의 신앙이고 하나님의 언어적 계시와 성육신한 말씀인 예수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진리는 만들어지지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급진적인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설교하고, 듣고, 믿고, 고백하는 훈련이라기보다 의미를 “만드는” 행위로 볼 것이다.많은 기독교인이 믿음을 경험적 차원의 필요성으로 이야기하지만, 경험은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예배에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임의대로 의미 있는 경험을 충족시키는 예배를 하거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예배 대신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예배를 찾고자 할 것이다.올바른 예배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의 중심이며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중심이다. 예배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배의 개념은 하나님을 바라고, 말씀을 이해하며,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의 비참함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휴스 올리펀트 올드는 개혁주의자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경외감, 존엄,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는 길이다. 인간 중심의 쇼에서 참된 예배의 길로, 참된 예배자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선택과 대안은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According to the Word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숭배
로저
복음주의
포스트모더리즘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
by Stephen M. Coleman
2020-01-04
시편 110편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약성경의 본문이다. 다윗 왕이 저술한 시편 110편은 미래에 오실 메시아, 왕의 승천과 통치를 예언하고 있다. 다윗은 이 왕이 주의 권능을 가지고 오시며(2절),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다(5절). 그는 뭇 나라를 심판하며(6절), 하나님의 원수들을 내치시고(1, 6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신다(3절). 특히 눈에 띄는 구절로, 다윗은 이 왕을 “나의 주”라고 부르며, 왕의 혈통을 가진 그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이 놀라운 예언의 한 중심에 구약성경의 가장 모호한 인물 중의 하나가 나온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절)라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북부 연합의 네 왕을 물리치고 조카 롯을 구해낸 후에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알려진 그를 만났다(창 14:18-20). 다윗은 이 신비한 인물에게서 위대한 왕이며, 그의 백성들의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인격과 사역을 발견한다.왕권을 가진 제사장고대의 왕은 보통 제사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간의 영역만이 아니라 성스러운 영역도 다스렸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제사장적 왕이 가능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왕권을 유다 지파에게(창 49:9-10), 특히 다윗의 자손에게만 허락하셨다(삼하 7:12-16). 제사장직은 레위 지파에게만, 특히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맡기셨다(민 17장).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실 왕은 제사장에게 주어진 성스러운 영역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떤 근거로 이스라엘의 왕이 제사장으로서도 섬길 수 있을까? 사울 왕의 제사장적 특권 행사는 결국 거부되지 않았는가(삼상 13:13-14)? 다윗이 멜기세덱에게서 발견한 것은 여느 제사장직이 아니라 더 나은 제사장직에 대한 소망이다. 유사한 논리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노략물 중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그에게 축복을 받은 점을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사람임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히 7:4-10). 그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으면, 그는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아들인 레위보다 높은 자이다. 멜기세덱의 이름은 “의의 왕”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그의 제사장직은 왕권을 가진 것으로 더 나은 제사장직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사역을 예시하는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며 왕이었다.예수님이 왕권과 제사장직을 함께 행사하신다는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격려가 된다. 예수님이 왕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하며 바르게 살아야만 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이 의로운 왕이 또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고 아버지 앞에서 중재자로 서시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기”(히 4:15) 때문에,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16절). 우리는 궁극적인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며, 우리의 은혜로운 주님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영원한 제사장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제사장직이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보다 우위에 있다. 다윗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말한다(시 110:4). 합법성을 얻기 위해 족보가 본질이었던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는 대조되게, 멜기세덱의 족보는 창세기나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출생이나 죽음, 그의 혈통 또는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히브리서 저자가 통찰적으로 말하듯이,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의 등장은 그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의 영원성을 보여준다(히 7:3).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이 감당해야 하는 책무 중의 하나는 제사장으로 섬길 때 불행하게 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희생이 끊임없이 필요했던 것처럼, 새로운 제사장도 끊임없이 필요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다르다.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스스로 완벽한 마지막 희생을 했더라도, 죽음은 그분을 붙들 수 없었다(16절).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영원히 서 계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영원한 대제사장직은 매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원천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고 그분이 우리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님을 상기시킨다. 불순종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다(히 13:5).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죄인을 구원하신 그분을 믿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완전한 중재자가 있다. 시편 110편은 영원한 제사장이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며 축하하고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Eternal Priest번역: 정은심
멜기세댁
레위지파
대제사장
중재자
시편110편
영원성
승천
우월성
복음
예수그리스도
당신의 배우자가 힘들어 한다면?
by Glen Scrivener
2020-01-03
한번은 아내가 자신이 겪은 정신적 문제를 용감하고 또 아름답게 글로 쓴 적이 있다. 나는 종종 남편으로서 그런 아내를 어떻게 돕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나는 여기서 내 아내가 인정한 열 가지 도움이 되는 생각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게 꼭 당신의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나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소중하다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그의 마음에 두셨다. 당신의 감정상태(혹은 감정의 부족)가 어떠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불안하거나 위험에 빠져서 감정적으로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누구라도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을 믿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당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지킨다는 사실만 믿으면 된다. 당신이 감정적으로 아무리 요동을 치고 흔들려도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지키고 있다. 영원히 깨어서 지키고 있다.2. 의지의 속박은 진짜이다인간은 결과를 계산해서 합리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이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주인을 마치 연인과 같이 생각하여 내 자신을 맡기는 어리석은 존재와도 같다.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이다. 중독의 이야기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타의에 의하여 중독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독의 틀에 갇혀 있다. 정말로 갇혀 버렸다.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다. 선택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들을 미워할 뿐이다. 의지의 속박을 믿지 않는 한 당신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3. 십자가 신학은 핵심이다마틴 루터(‘의지의 속박’에 대해 가르쳤고 깊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하나님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영광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스스로 힘을 통해 거기까지 올라간다. “터널 끝에 빛이 있어. 열심히 파고 나가.”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여기로 내려오신다. “어두워.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기 함께 있어.” 이것이 십자가의 신학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 우리 모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신학이다. 4. ‘괜찮았던 그때’를 목표로 삼지 마라당신은 알고 있다. 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들이 과거 그 오래전의 자아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가장 큰 유혹은 “그때 그 모습”을 되찾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명하지 않다. 구원 역사는 작동하는 방식이 다 다른 것 같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가 주던 음식과 머리 위를 덮어주던 지붕을 갈망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옛 장소로 다시 보내지 않았고 사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데려갔다. 진정한 고향은 앞에 있다. 아직 보지 못한 넓은 땅이다. 이것이 우리를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우리는 정원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괜찮았던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어쩌면 애초에 당신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혼란에 빠지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5. 무력감은 끔찍하나 좋은 것이다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간병인이 받는 가장 압도적인 느낌은 무력감일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갇히거나 이른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런 무력감을 피할 수는 없지만 좋은 것으로 바꿀 수는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육체의 노력만으로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만이, 오로지 그의 복음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무력감을 기도로 바꾸라. 남편으로서 나는 “주권”(headship)이 실제로 어떤 일을 수반하는지 100% 확신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군대 “머리”에서 천둥 소리를 내신다고 확신한다(요나 2:11). 나는 내 신부를 위해 전투를 해야 한다. 따라서 바른 형태의 무력감은 좋은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무력감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력감으로 인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다음 포인트이다. 6. 당신은 변해야 한다중독은 전염성이 있다. 중독자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부부로서 건강에 해로운 영향이 있기 마련이며 당신의 삶에서 해결해야 할 패턴과 죄가 있다. 당신이 죄인이라면 -당연히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이것은 정죄하려는 게 아니다. 도리어 큰 희망을 준다. 무력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회개하기 시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전투는 함께 싸우는 전투이다.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7. 부부의 하나 됨은 문제보다 더 깊고 심오하다결코 “당신 vs. 당신의 문제 있는 배우자”가 아니다. 이건 언제나 “당신과 배우자 vs. 이 문제”이다. 절대로 사탄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문제로 보도록 허락하지 말라.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6번째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계속 회개하라. 그것도 배우자가 보는 앞에서 하라. 당신이 당신 문제에 관해 투명하기만 하다면, 이런 기도를 통해 배우자는 당신과 하나 됨을 더 잘 느끼고 힘을 얻게 된다. 8. 굳건하고 융통성 있는 사랑이 핵심이다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파괴를 하는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두 가지 자연스러운 반응은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자기 파괴를 더 가속화 하거나 아니면 분노에 넘쳐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나는 둘 다 차례로 한다. 나는 한동안 멋지게 인내한다. 결국, 사랑은 “예스”라고 말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단 맛 나는 좋은 사람”과 “쓴 맛 나는 시무룩함” 사이에 숨어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답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굳건하고 융통성 있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주님의 방식이다. 사라가 아이를 준다는 약속을 듣고 웃었다. 하나님이 묻는다. “왜 웃니?” 사라가 대답한다. “안 웃었어요.” 하나님이 대답한다. “아니, 너 웃었어.” 이게 바로 이 장면의 마지막 단어이다.이건 놀랍다. 주님은 사라 때문에 위협을 느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를 위협하지도 않는다. 주님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도 또는 그 위에 군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진실을 위해서는 확고하다. 만약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중독으로 고통받는다면, 당신은 이런 굳건하고 탄력 있는 사랑을 보여줄 수많은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중에서 990번을 망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우리 주님의 성품을 드러낼 때도 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멸망하도록 놓아두지 않는 그런 사랑 말이다. 9. 함께 춤추며 빛으로 나아가라당신은 이런 영적인 융통성을 결코 혼자 힘으로 가질 수 없다. 춤을 비유로 삼아 이야기하자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주변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당신 부부에게 너무 중요한 공동체에서 도태될 수 있다.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당신의 부르심은 파트너를 빛으로 이끌어 승리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을 누구나 다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는 “십자가”가 고립의 “지옥”보다는 훨씬 낫다. 어느 시점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둠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기도와 교회 지체의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고립의 어둠에서 공동체의 빛으로 함께 움직여야 한다. 10. 이것은 진짜 삶에서 이탈한 것이 아닌 진짜 삶이다이런 고통은 당신이 머물고 싶은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인생은 끊임없는 상승으로만…잠깐만… 그건 영광의 신학이 아닌가?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 기꺼이 구속하시고 싶어 하신다(창 48:16).우리는 애초 계획에서 벗어난 이런 “출발”을 피하거나 우리의 능력으로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 주님은 메뚜기가 망쳐버린 그 엄청난 재해를 어떻게 극복할지 알고 있다(요엘 2:25). 아마도 당신은 고통 중에 받은 위로로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고후 1:4).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공동체에 들어가고, 당신의 죄를 바라보고, 배우자를 사랑하라. 무엇보다 기도, 기도,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런 힘든 상황에도 들어오셔서 말한다. “여기 내가 있다. 우리 함께 이겨나가자. 지금 바로 여기에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 Partner Is Down and Can’t Get Up번역: 무제
가정
결혼
융통성
마틴루터
무력감
중독
회개
사랑
기도
하나님께 별 볼 일 없는 도시란 없다
by Josh Manley
2020-01-02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작은 도시나 외진 곳에서 살게 하실 때, 그곳에서 하게 될 목회도 하찮을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곳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언젠가는 하늘이 빠짐없이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모든 생명, 그리고 영원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셨을 때, 놀라운 이야기 두 가지를 해주셨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양 아흔아홉 마리가 안전해도 길잃은 양 한 마리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 어떤 목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인은 동전 아홉 개가 남아있어도 잃어버린 한 개를 찾기까지는 멈출 수 없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었던 동전 하나를 찾았을 때 큰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5:1-10).예수께서는 심히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가르친 것이지만, 또한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서도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척박한 땅으로 가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길 원하신다.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눅 15:4) 찾아다니는 것에 큰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전략적이라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제대로 볼 수 있게끔 우리의 시각을 파격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대략 칠 년 전, 나는 세계적인 요충지 중 하나라 불리는 곳인 아랍 에미리트 연합국(UAE)의 두바이(Dubai)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 복음주의 교회를 개척하고자 미국을 떠났다. UAE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미리트의 집권 셰이크가 복음주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토지를 하사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거의 오지 않는 기회였다.하지만 내가 이주해 간 그 에미리트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남쪽 이웃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다. 국제적인 경제 허브(hub)도 아니다. 두바이에 비해 인구도 턱없이 적다. 내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이 곳은 전략적인가?’우리는 결코 외진 곳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다최근 들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 달란트, 그리고 자원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전략적 도시들’에 집중하자는 계획이 대두되었다. 전략적 도시라 함은 전 세계 곳곳에서 유입된 사람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살고 있는 거점 도시들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전략적 도시인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사역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오래 일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누가는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고 적었다. 전략적인 도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말은 전략 도시가 아닌 곳에서 사역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비전략적” 도시에서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일까? 피로 사신 바 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 모두는 이 땅에서의 짧은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어떻게 하면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고민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곳에 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지역이나 상황 속에서 사역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우리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들의 지혜와 얼마나 다른가를 기억해야 한다.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셨을 때, 그는 대도시가 아닌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라 하실 정도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미 5:2). 예수께서는 또한 인구가 기껏 이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사람들이 나사렛을 얼마나 무시했는지는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다나엘이 심각하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빌립에게 물었던 장면에서 드러난다(요 1:46). 전략적인 도시들의 목록이 있었다면, 우리 주께서 나신 곳은 결코 거기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감옥으로부터 세상을 바꾸다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던 바울 역시 항상 전략적인 도시에서 “전략적인” 사람들만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2차 전도여행에서 성령은 에베소와 기타 주요 도시들이 위치했던 그 전체 지역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셨다.대신 성령께서는 바울을 400마일에 걸친 도보 여정으로 이끄신 후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게 하셨다. 정말이지 비전략적일 수밖에 없는 그 감옥에서 바울은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회심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행 16:6–40). 만일 사람의 지혜로 그 여행을 계획했다면 우리는 분명 다른 경로를 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죄인 한 명이 그 감옥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감옥은 그날 밤 이 땅에서 가장 전략적인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의 교회가 복음의 영향력를 최대한 발휘하고자 애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지혜에 유혹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전략적이냐 비전략적이냐를 가르는 것은 전혀 다른 지혜에 근거하여 행해진다. 마지막 날에는, 과부의 두 렙돈이 억만장자의 거액보다 더 전략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인데, 이는 이 과부가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눅 21:4) 넣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께서는 당신이나 내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네팔 저 먼 곳에 사는 한 형제나 자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존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하는 일을 행하실 수도 있다. 우리 주께서 세상의 지혜,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의 지혜마저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천국에서 보게 될 놀라운 일들대서양을 건너, 전략 도시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도시로 들어간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전략적이고 무엇이 비전략적인지는 이 세상과 나의 기대와 가치를 기꺼이 뒤엎으시는 무한히 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 맡긴다. 결국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갈보리 언덕이라는 가장 비전략적인 장소로 가심으로 이 세상을 이기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어떠한 인간도 계획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일을 이루셨으며, 다른 모든 이름 위에 높임을 받으셨다.지금 “전략” 도시에서 “전략적인” 사람들과 함께 사역하고 있는가? 신실함 속에서 계속 정진하라. 복음 안에서 귀한 청지기의 책무를 지고 있음을 잊지 말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에서 사역 중이고 당신의 일이 별로 전략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면, 주를 위해 일하는 한 비전략적인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힘을 내기 바란다. 하나님은 마지막 양 한 마리까지 돌보신다. 무엇이 전략적이고 그렇지 않은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지혜가 마침내 그 모든 충만 속에서 드러날 때,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다.만일 당신이 사역 중인 도시나 마을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고민 중인가? 주권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금 있는 그 곳에 있게 하셨음을 기억하라(행 17:26).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행하시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롬 8:28). 그러므로 지금 현재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두신 사람들과 기회들을 둘러보라. 지역 교회를 세우라. 당신 주위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당신이 떠난 뒤에도 그곳에 오래 남아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주께서 당신을 불러 일하라 시킨 곳이 어디든, 그곳에서 기쁘고 신실하게 섬기고 증거 하라.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No City is Too Small for God: Reaching the Crevices of the World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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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꼭 필요한 셀프컨트롤
by Jen Wilkin
2020-01-01
새해가 밝았다. 올 새해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연말에 과식을 했다든가 이제부터 체중 관리에 좀 신경을 써야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해란 모름지기 셀프컨트롤에 다시 도전하는 시간이니 그런 대화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올해 나는 좀 다른 형식의 자기 훈련을 시작해 볼 참이다. 이 훈련은 허리 사이즈를 줄이려는 계획보다 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작년 이맘때, 나는 우연히 어느 신문 기사에 실린 1930, 40년대 광고를 읽게 되었다. 그 광고는 살찌는 식품을 선전하고 있었다. 내용이 하도 진지해서 얼마나 코믹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일주일이면 당신도 5파운드나 살을 찌울 수 있다.” “나는 10파운드를 늘렸다. 그 결과 원하는 상대를 자신감 있게 만나고 있다.” 내가 이 광고를 딸에게 보여 주자, 이렇게 반응했다. “엄마, 믿기지 않는데요. 이거 진짜 광고인지 인터넷에서 확인하셨어요?”물론 내용이 터무니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 광고는 모두 진짜였다. 말하기가 좀 창피한데, 내가 그 내용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보인 반응은 이랬다. “아, 나 너무 늦게 태어났어.” 오동통 살이 오른 부인이 매력적인 여성으로 존중받는 시대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남미 여자들이 그 문화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매를 갖추려고 히프에 살을 찌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가혹한 운명이 있나! 여기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히프에 살이 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데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먼 옛날부터 모든 여자는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하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인류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은 여자의 몸이 풍만하고 곡선이 뚜렷할 때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 조각상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관점에서는 ‘대형 사이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는 그렇게 살이 오른 여성이 아름답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한가하게 빈둥거릴 수 있는 부유한 여자만이 그런 몸매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풍만한 육체가 다산을 상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과거에 그런 풍만함은, 매일같이 잘 먹으면서 일은 안 해도 될 만큼 돈이 많지 않은 한, 대부분의 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의 몸매였다. 오늘날에는 트랜스 지방이나 과당, 시럽 등으로 인해 그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지금은 그와 반대로, 부유하고 한가한 사람들이 영양 결핍에 시달리며 과로한 상태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그렇다면 살찐 여성이 아름답다고 칭송받던 시대에 살았으면 정말 더 나았을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는 ‘뚱뚱하냐 말랐느냐’가 아니라 ‘완벽하냐 그렇지 않냐’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언제나 세상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평가해 왔다(혹은 스스로를 그 기준에 속박시켜 왔다). 그 기준은 시대가 흐르며 바뀌게 마련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우리가 도달하기 힘든 이상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이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풍만하기 힘든 시대에는 풍만해지기를 원했고, 날씬하기 힘든 시대에는 날씬해지기를 원하고 있다.이러한 완벽한 몸매에 대한 기대 의식은 오늘날 여성에게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중학교만 들어가도, 여학생들은 이상적인 신체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중년의 부인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의사에게 실제로 메스를 들어 자신의 몸을 시술해 주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실제로 육체의 살을 깎아 내며 몸에 새기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우상(몸)을 깎아 조각함으로써 스스로를 훼손시키고 있다. 현대 문화에서 완벽한 몸매는 과거 어느 때보다 여성다움을 더욱 드러내는 비결이 되었다. 이 비결은 엄마로부터 딸에게로 세심하게 전수된다. 이때 엄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친절, 화평, 관용을 추구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도록 본을 보이는 수고보다 더 정선된 말과 행동을 동원하여 그 비결을 전수한다.이런 현상을 볼 때,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곧 때가 이르면, 자기 혐오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리 자신의 겉모습을 기뻐하는 마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이다. 그날 우리에게는 썩지 않는 새로운 몸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몸은 더 이상 무덤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육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씬한 허벅지라든가 예쁜 외모에 마음을 뺏겨 장래의 소망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허영심이 각자에게 얼마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그렇다면 그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당연히 우리 각자의 신체를 청지기로서 잘 관리해야 한다.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두 명의 여자가 똑같은 러닝머신 위를 달릴 수 있지만, 그들의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렇게 뛰는 진짜 이유는 각자가 알 것이다.이미 말했지만 1월은 칼로리와 운동 또는 체중 감량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이야기를 안 해 보면 어떨까? 허리 사이즈가 변했다며, 친구나 자녀들 앞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 부활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오늘부터 우리의 몸을 건강하고 바르게 관리해 보면 어떨까?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절망적인 심정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보다, 또는 그렇게 때가 이르면 우리의 몸도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라며 미래의 소망에 호소하기보다, 그 영광스러운 진리 가운데 오늘을 똑바로 살아 본다면 어떨까?그래서 올해는 단순히 식사량을 줄이기보다 외모에 관한 대화를 줄여 보면 어떨까? 당연히 헬스장에도 가고, 식단을 짤 때 채소와 과일 섭취량도 늘리며, 목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운동복을 입고 하루에 10킬로씩은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노력에 대해 떠벌리며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친구에게 야위어 보인다는 말도 하지 말자. 그 대신 그녀의 매력적인 정신이 참 좋다고 말해 주자. 그런 식으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보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추구하도록 상대를 칭찬해 주자. 만일 상대가 우리의 외모나 몸매에 대해 언급한다면, 고맙다고 반응만 하고 얼른 주제를 바꾸도록 하자. 자신의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이런 끝도 없는 대화의 리스트에 몸에 관한 이야기도 집어넣자. 그리고 우리가 운동하며 키운 자기 통제력을 입술을 다스리는 데도 적용해 보자. 올해부터 다른 지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한 실천에 힘쓰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여성다움의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탄수화물을 피하는 데보다 성품을 일구는 데 힘쓰고, 미모를 가꾸는 데보다 경건을 이루는 데 주력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이여, 우리는 완벽한 몸매가 아니라 거룩을 이뤄 가도록 함께 부름 받았다. 그렇다면 새해에 우리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까? 더 이상 체형이나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로 영혼의 식단을 채우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즐기며 포만감을 누려 보자. 우리 자신과 친구와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한 해를 열어 주신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실천해 보자. 그러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ew Year, New Self-Control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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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랭 사인: 오래된 친구를 기억하며
by Jon Bloom
2019-12-31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부르고 사랑받는 이 노래는 후렴부에 “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오래전 스코틀랜드의 한 무명 음유시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시적(詩的) 감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 노래를 ‘아주 오래전’이나 ‘지난날’이라 부른다. 이 노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시인이며, 이 노래를 지은 이로 알려져 있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는 1700년대 후반에 한 스코틀랜드 노인이 올드 랭 사인을 부르는 걸 듣고는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말한 바 있다. 번스가 가사를 고친 흔적이 있지만, 번스의 말은 대체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올드 랭 사인”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뭘까? 이 노래는 새해맞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노래는 옛 친구에 대한 것이다. 이 노래는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한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언덕을 뛰놀고, 돌이 많은 강가에서 수영했던 소중한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오래된 우정의 소중함새해는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고, 연말은 지나간 것들을 묵상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해 교훈을 얻자는 식의 묵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우리에게 주신 것들, 그리고 앞으로 주어지지 않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상을 할 필요가 있다.옛 우정이란 그런 종류의 보물이다. 긴 여름날을 함께 보냈고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던 옛 동무들, 신나는 모험도 큰 어려움도 함께 겪었다. 함께 웃으며 기뻐했고, 함께 울면서 앉아있기도 했던 친구들, 젊은 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던 그 친구들처럼 소중한 선물은 우리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나게 된 이들이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우리 옆집, 바로 윗집, 같은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왔고, 같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거나, 내 옆 사물함이나 작업대를 쓰는 이들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을 때, 공통된 관심사가 있을 때, 그리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무언가 깊은 교감(삼하 1:26; 요 15:14–15)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고, 그 우정은 로맨틱한 사랑보다 나았다. 때로는 다투며 아주 가까운 이들만이 줄 수 있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곤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공격 앞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오래된 친구를 잊지 말라우리가 예부터 알고 지내는 이들, 특히 참되고, 정결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것을 보고 사랑할 수 있게끔 도와준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계속 기억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고,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친구이자 은혜로운 선물이기에(약 1:17)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현함이 마땅하다. 새로운 삶의 장(章)을 시작할 때 우리는 지나간 장에서 만난 존귀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소중한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거나,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아니면 옛날처럼 손편지를 써서 그가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였음을,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말해줘야 할 때가 지금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 친구의 연락처를 잃어버렸다면, 옛날의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추억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옛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도 좋겠다.지난 세월이 준 선물들을 기리며, 당신에게 주는 새해 선물로 아래에 ‘올드 랭 사인’의 가사를 약간의 도움말과 함께 적었다. 번스가 받아쓴 것을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읽은 것도 들어보라. 그것을 아름다운 노래로 부른 것도 있다.새해의 시작을 기뻐하며 축배를 들 때,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신 인자하심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잔을 들라. 1절오래된 친구를 어찌 잊고그를 어찌 떠올리지 않으리오래된 벗을 어찌 잊을까그리고 그 오랜 옛 시절도후렴지나버린 옛 시절을 위해, 친구여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우리 이제 우정의 잔을 드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2절자넨 자네 잔을 사고나도 내 잔을 살테니우리 이제 우정의 잔을 드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3절우리 둘은 언덕을 누볐고아름다운 데이지 꽃도 꺾곤 했지너무나 돌아다녀 발이 아팠네아주 오래전 그날 이후4절우리 둘은 강에서 노를 저었네아침부터 저녁까지허나 우리 사이의 넓은 바다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네아주 오래전 그날 이후5절내 진실한 벗이여, 여기 손이 있네내게도 자네 손을 주게나우리 이제 깊은 석별의 정을 나누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원제: Auld Lang Syne: In Gratitude of Old Friend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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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소중함
잊지말라
번스
스코트랜드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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