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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 생활의 중요성
by Ryan Huguley
2019-10-28
흔히 가장 중요한 식사가 아침 식사라고들 한다. 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란 세 개와 커피로 아침을 거르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아침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루 중 섭취하는 가장 중요한 한 끼가 있다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집중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의 식사다(시 1:1-2).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매년 1월이 되면 올해는 성경 전체를 읽겠다는 웅대한 목표를 갖고 시작하곤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레위기 속에서 제사 지내는 장면 정도에 도달할 즈음이 되면 새해 목표는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열정에서 무관심으로 끊임없이 마음이 바뀌는 걸까? 내 경험과 목회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할 때, 경건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속성과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왜 이런 경건의 시간이 그토록 중요한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항상 쉽고 재미있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노력과 훈련이라는 것은, 그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아야 하지만, 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동기 부여의 측면을 망각하게 되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나처럼 잘 알고 있을 것이다.성경은 경건의 시간을 최우선 순위로 두도록 하는 다양한 동기 부여로 가득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중에서 세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목사로서 나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하는 신자들과 상담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하는 결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말씀,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할 말씀을 소홀히 할 때가 너무나 많다. 시편 119:105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는 성경을 펼쳐야 한다.하나님의 뜻을 막연하게 추측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선물인가? 우리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숙고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의 길은 더 반듯하고 우리의 결정은 더 확고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성경을 깊이 파고 싶은 동기 부여를 더 강하게 일으키는 사실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상기시킨다로마서 7:7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등불과 같다. 우리집 응접실에는 오래된 장롱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다. 서랍이 열리고 햇빛이 비치기 전까지 이 장롱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하다. 햇빛은 수년간 써서 닳은 장난감의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낸다. 빛이 장롱 속 숨겨진 장난감의 본질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삶을 향해 비추는 말씀도 같은 역할을 한다.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보낼 때면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언제나 내 속에 숨은 문제를 보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표준을 보게 되고 도저히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나의 완전한 무능함을 본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나의 죄를 상기함으로 나는 온전히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린다나는 정기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는 내 정신을 새롭게 만든다. 잠은 육신을 새롭게 한다. 친구와 수다를 떨며 큰소리로 웃는 것은 내 감정을 새롭게 만든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만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시편 119:50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성경 전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등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열매로 채우신다(갈 5:22-23).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주신 책을 열어 오로지 그분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살리는 그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라. 분명한 것은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으며 지금까지 내가 나열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율법주의적 동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는 않는다. 동기는 중요하다. 왜 하는지는 무엇을 하는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려고 지불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하려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건 아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지는 경건의 시간이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은 수준으로 전락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당신이 갖는 경건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동기가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잘못된 이유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당신의 영적 기쁨을 빼앗아 가는 부담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오늘 하루 왜 경건의 시간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임을 생각하라.원제: The Importance of Our Devotional Lives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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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시간
최우선순위
동기부여
묵상과기도
왜 교회서도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야 하는가
by R. C. Sproul
2019-10-26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시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모세에게 맡겨진 임무는 곧 바로를 찾아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부하신 또 다른 임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백성에게 찾아가 역사상 가장 큰 탈출을 준비하라고 명해야 했다. 곧 바로의 통치와 권위에 대항하여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에서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여기서 모세의 임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수십 년 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세월을 보내다가 노인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인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애굽의 전차나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리라!” 모세가 이러한 말을 전해야 했던 백성은 도대체 어떤 노예였던가. 출애굽기 4장을 보면, 그 백성에 대한 모세의 걱정이 잘 기술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표적을 그에게 나타내셨다.이 장면에서 모세는 사실상 변증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이치에 맞는 방법으로 설명해야 하듯,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확신할 수 있게끔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내부자를 위한 변증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대로 하여 그분의 말씀이 지닌 진실성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득시키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변증의 사명, 즉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사명에는 최소한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그중 두 가지 목표에 대해서는 익숙하리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목표는, 기독교의 이성적 토대를 약화시키려 하거나 또는 다른 철학이나 종교의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려는 자들에게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그 당시 대중적인 철학 사상이었던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시도했던 변증이 그런 목표를 가졌다. 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과 같은 교회 역사의 초창기 변증가들 역시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쓰며 그런 성격의 변증을 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신들을 거부하며 그에 대한 경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 무신론자라는 거짓된 비난을 받거나 (이교도들이 성만찬 의식을 오해하여)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변증을 하는 두 번째 목표는, 세속 문화에서 형성된 지성적인 우상들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때의 변증은 다른 신념이나 세계관에 자리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며 공격적인 접근을 취하게 된다.그리고 변증의 세 번째 목표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성도를 격려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가 처음에 가졌던 우려가 바로 이와 같은 변증과 관련이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이런 생각이 그와 같은 변증을 가져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변증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개인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3년의 기간이 있다. 바로 신학교에 다녔던 시절이다. 그 이유는 당시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나와 달리 그 신학교에는 불신앙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매일 교수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서슴지 않고 공격하곤 했다. 어느 교수는 우리 클래스의 한 학생을 맹비난했는데, 다름 아니라 그 학생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전제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상태에서 신학교에 들어왔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교수는 어떤 학생이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자 그를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대속 교리에 관해 설교하는가!” 이처럼 그 시절에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나를 낙담시켰다. 학교에서는 온갖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나는 그러한 비판자들의 공격 이면에 있는 철학적인 전제를 이해하면서도, 그 수많은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직관적으로는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틀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그 당시 미국 전역에서 역사적 개혁신학에 충실한 입장을 견지하는 주요 신학교는 단 한군데였다. 바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의 책을 읽곤 했다. 예를 들어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존 머레이(John Murray), 에드 스톤하우스(Ed Stonehouse),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의 글을 읽었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그들로부터 얻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나보다 깊어 내가 답변하지 못하는 회의적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들을 하나님이 많이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수년 전에 리고니어(the Ligonier) 단체의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추진하는 변증의 내용을 접하는 모든 신앙인들이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며 기독교의 신뢰성을 보여주게 된다면,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은 회의주의의 목소리가 자신들을 둘러싸며 엄습해 올 때 그로 인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의 학생들 가운데 심지어 ‘기독교’ 기관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신앙의 위기를 맞은 경우들이 있다. 그들은 거의 가까스로 신앙을 연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조롱을 받거나 비웃음을 사며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변증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사역을 해야 한다. 또 비단 그런 학생들만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거두어 갈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신앙이 무력해질 때까지 우리를 두렵게 하여 이전과 같이 담대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전문적인 변증학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어도, 변증의 논점들을 공부하여 자신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할 소명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ost Valuable Aim of Apologetics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기독교신앙
모세
바울
출애굽기3장
사도행전17장
개혁신학
리고니어
육신의 가족? 영적 가족!
by Harriet Connor
2019-10-25
지난 주일, 축도가 끝난 뒤 목사님이 캐시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두 주 전 캐시의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캐시는 그날 할아버지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할아버지가 잘 회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캐시는 할아버지를 매주 교회에 모시고 온다. 그녀는 걸을 때 할아버지의 팔을 부축하고, 앉고 일어나시는 것을 도우며, 예배 중 어떤 순서인지 할아버지에게 알려 드린다. 캐시의 헌신은 우리 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이제 캐시의 할아버지와 교회에 다른 노령의 성도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캐시가 피아노를 치는 주일에는 다른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어떤 찬송을 부르는지 찾아 드린다. 어떤 노인이 일어나는 데 힘들어하신다면,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팔을 빌려드린다.당신의 가족은 누구인가?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를 우리의 ‘첫 번째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새롭게 하셨다. 이제 어느 누구든 혈통이 아니라 예수 안의 믿음으로 그 가족에 들어갈 수 있다(요 1:12-13; 갈 3:6-9). 하나님의 가족은 아이를 낳음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통해 커지고 있다(마 28:19-20). 따라서 배우자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가족 안에서 존중받는 자리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마 19:1-12; 고전 7:32-35).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과 영의 가족 사이 충성심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 대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눅 14:26). 만약 우리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혼자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 남는 것이 육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혹은 기쁘게 하기 위해 떠나는 것보다 낫다.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히 이 땅의 가족들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따라 사람들에게 결혼 생활에 충실하며(마 19:1-19), 부모님을 공경하라고(막 7:9-13) 가르치셨다. 사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고전 7:8-9; 딤전 5:14). 그들은 여전히 남편과 아내이고, 부모와 자녀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교회와 가족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하였다.가족: 본보기육신의 가족 관계는 하나님의 가족 관계의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선언하셨을 때, 예수님은 잘 알려진 관계의 범주를 사용하셨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딤전 5:1-2)라고 권하였다. 우리는 그런 여러 가족 관계의 역동성을 이해해야만 누군가를 우리의 형제, 자매, 어머니 또는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성경 시대에 가족이란 개인적인 애정의 안식처 그 이상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생산적인 단위였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y)는 그녀의 책 ‘네 공동체를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이렇게 설명한다.산업 혁명 이전, 집이란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을 보살피며, 가업을 운영하고, 고객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잉여금을 만드는 장소였다. 집은 보다 더 넓은 사회와 접촉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딤전 3:15)에 속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예수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는 가업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가족: 학교내가 어린이 사역을 위해 받은 제일 실용적인 훈련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데 좋은 훈련이 되고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집에서 매일 일어나는 상호 작용은 분명한 의사소통을 하고, 듣고 공감하며, 현실적인 기대치를 설정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실망스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도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과 같은 대인 관계 기술을 연습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가정생활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가족: 돌봄의 네트워크교회는 개인들을 모으는 것 외에도 가족들을 한데로 모은다. 그리고 평범한 상황에서 우리의 가족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보살핌을 제공하는 주된 원천이 될 것이다.초대 교회는 과부들이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어느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있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을 돌봄으로써 그들의 종교를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4, 8).교회의 성도로서 우리에게도 보살핌의 책임은 여전히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보살필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고, 자녀들은 그들의 나이든 부모와 조부모를 돌볼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유대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가족: 사명의 기반처음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가정집에서 모였다. 가정들은 사명의 기반이었다. 가족 전체가 함께 복음을 듣고, 믿고, 그리고 전파했다(행 16:30-34; 롬 16:10-15).집은 여전히 교회의 사명 중 많은 부분이 일어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곳이다. 집은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곳이다.기독교 가정들은 중심은 강하지만 가장자리는 유연해야한다. 가정 안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노인과 젊은 세대 사이의 강한 관계는 그 사랑의 공동체가 외부인을 포함할 만큼 확장되도록 돕는다.신학자 앨러스터 로버츠 (Alastair Roberts)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있어 “가족”이라는 말은, 교회가 육신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크게 의존한다.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것은 보통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가정들이다. 그것은 교회가 대가족으로서 기능하도록 수용력을 준다.우리의 교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복음을 우선시하도록 부름으로써 더욱 강해질 것이다. 교회: 새로운 가족?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우리의 가족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복음이 우리 가족 관계의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새로운 우선순위들은 교회를 강화할 것이다.청소년 때에 나는 혼자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가족이 집에 남아 있을 때 나는 스스로 교회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반겨 주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랑의 영적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육신의 가족 안에서 자매였고, 딸이었으며, 또한 손녀였다.나의 가족은 지금도 주일마다 내가 교회에 갈 때면 집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혼자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로 나를 축복하셨다. 그리고 기도하기는, 하나님이 어느 날 나에게도, 영적 가족이든 육신의 가족이든, 나의 늙어 가는 팔을 부축해 교회로 갈 캐시 같은 손녀를 주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uclear Family or Church Family? Yes번역: 허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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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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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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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y M. Richard
2019-10-24
리더십을 맡아 섬겨 본 자라면, 죽음과 세금만이 인생에서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비판’이다. 리더십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리더십의 역할이 공적일수록, 비판도 잦아지고 불공평해지며 그만큼 더 불쾌해진다. 그러나 결국 전장에서 적군이 퍼붓는 공격을 감당하며 그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더라도 진격을 해야 할 책임은 지휘자에게 있다.이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답변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비판을 다 피하면서 주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그분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비판에 대비할 수 있을까?’이다. 그래야만 비판이 찾아왔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 어떻게 그 공격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지를 알고 준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그 힌트를 다음 구절에서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전 7:21-22).첫 번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듣는 비판 중에 어떤 내용은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거짓된 비난과 악의를 담고 있는 험담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런 비판은 한시도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이는 거짓된 비난에 아무 대꾸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사역의 진정성을 지키고 리더십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비난에 대응해야 할 때도 있다. 사도 바울도 가끔씩 그렇게 대응했다. 특히 고린도후서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그동안 신실하게 수행했던 사역이 자칭 사도라고 높이는 사람들의 험담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그는 분명하게 대응했다(고후 11:5-6; 12:11). 그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자신의 사역을 변호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된 비난이 우리에게 쏟아질 때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런 비방을 굳이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런 비방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넘어뜨리게 하고 내면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집어삼키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는 그런 말을 무시하며 전혀 듣지도 않는 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비판이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라는 데 있다. 적어도 일부분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비판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비판도 그리 건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그런 비판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기보다, 또 그리하여 당사자를 세워 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단순히 그 사람을 공격하려는 마음에서 행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상대의 흠을 지적하려는 태도와 무례한 말투로 표현되곤 한다. 물론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그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표현되는 비판 정신과 거친 말투까지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강의안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에서 전도서 7장 21-22절에 대한 매우 유익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 제목은 ‘감긴 눈과 닫힌 귀’(The Blind Eye and the Deaf Ear)이다. 거기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의 귀를 닫고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비난과 해로운 비판이 주어질 때는 그 내용을 듣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는, 아니 최소한 그 파괴적인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감긴 눈’과 ‘닫힌 귀’로 대응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처를 아예 받지 않고자 사람들을 피해 홀로 고립된 상태에 처하거나 또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잘못된 방법으로 그 비판에 대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두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역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비판에 담겨진 파괴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그 내용을 마음에 두지 않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스펄전이 말한 ‘감긴 눈’과 ‘닫힌 귀’를 갖추어 그런 비판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두 번째로 전도서 7장 본문은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22절은 우리 각자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타인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을 받을 때, 우리 역시 그런 자세로 타인을 대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 비판을 받을 때 함께 비판하고 상처를 받은 대로 상처를 돌려주며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될 말까지 쏟아 놓으며 화를 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비판한 그 사람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까지 감수하게 된다. 심지어는 우리의 직장이나 리더십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훌륭한 리더라면, 작은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세 번째로 이 본문은 모든 비판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비판이 얼마나 과장되고 가혹하게 들리든, 거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된 비방이나 악의가 서린 험담은 예외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감긴 눈’과 ‘닫힌 귀’로 응수하며 무시해야 할 내용이 많은 비판에도 우리가 새겨들으며 마음에 담아야 할 교훈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스펄전은 그와 같은 비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지는 칭찬보다 ‘훨씬 더 커다란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내뱉는 칭찬은 우리를 자기만족에 빠뜨리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비판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분명 우리 모두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가령 우리의 리더십과 그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우리의 노력이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 주며 격려하는 칭찬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과한 격려나 무분별한 칭찬은 오히려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너무 과한 비판도 좋지 않다. 그런 비판은 우리의 마음을 쇠약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에 대해 골몰하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격려와 비판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와 빈도가 알맞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 간구하도록 하자. 비판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려를 받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비판이 찾아올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간직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비판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to Handle Criticism번역: 장성우
목회
난관
비판
대비
스펄전
관대
진실
칭찬
격려
하나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by David Mathis
2019-10-23
당신은 에너지를 ‘관리’하는가? 점점 더 많은 전문가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관리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 관리를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토니 슈워츠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과 증가하는 복잡성 사이에 더 많은 정보와 요구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장기간 고속으로 계속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높은 주파수와 낮은 주파수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심장은 다양한 간격으로 뛴다. 우리의 폐는 수요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한다. 숨을 잘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숨을 깊이 내쉴수록 더 차분해지고 더 유능하게 된다(Tony Schwartz, Manage Your Day-to-Day).슈워츠가 말하는 종교적 책임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라는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디자인’되었다. 인간은 무한한 창조주에 의해 경이롭게 만들어진 유한의 창조물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찾아내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슈워츠는 계속해서 “하지만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루 종일 에너지 저장소를 태워 버리는 전형적인 삶을 산다. 이는 은행 계좌에서 예치금 없이 자금을 인출하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순간 파산하게 된다.”라고 말한다.초자연적인 일슈워츠의 관찰은 통찰력이 있지만, 그의 해결책은 일천하다. 그리고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의 창조주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에너지를 관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능숙하게 함으로써, 당신은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더 높은 수준의 퀄리티로, 또한 더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의 더 나은 에너지 관리에 대해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영향력, 경영, 큰 생산성보다 훨씬 더 나은 깊고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닫힌 시스템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 상승과 하강을 전적으로 자연적 힘의 산물이나, 원인과 결과, 휴식과 회복, 영양과 운동의 산물로 여긴 채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인 요소들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손상, 심지어 위험으로까지 최소화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닫힌 시스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평범한 과정에 개입하실 수 있으며 종종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매 순간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를 유지시키신다(히 1:3; 골 1:17). 또한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유지시키고 다시 채우신다. 이는 실제로 바울의 편지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격렬한 직업 윤리골로새서 첫 장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가장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사역의 중심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이 내용은 사도직과 구별 없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특히 목사 및 장로들과 공유되어야 한다.“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바울은 철저한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에서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보다 일에 대해, 특히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특이한 배선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독신으로서의 삶이 엄청난 사역들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보다 “수고를 넘치도록 했다고”(고후 11:23)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며, “나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라고 말했다(고전 15:10).그러나 계속해서, 바울은 그의 흔하지 않은 에너지와 노력을 존경할 만한 예외의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할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능력 안에서 생산적인 노동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은 성장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공급하시는 그리스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이 지닌 놀라운 에너지의 ‘비밀’과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공유했다(빌 4:12).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그는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며 ‘어떻게’를 설명한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10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일부 번역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그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을 힘의 공급자로 여김을 확신할 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이와 유사하게, 에베소서 6장 10절은 신이시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공급된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을 ‘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침내,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영적 능력과 원천이신 예수님 사이에서 동일한 연결성을 정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건하여지고.”바울은 이뿐만 아니라 무한히 소중한 신적인 힘으로 강건하기를 주장한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는 신적-인간의 능력을 증언하고, 예수님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안에서 일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행해졌음을 증언한다.그분의 힘으로하나님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서 강건하게 하실 때,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실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로 닫힌 시스템의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산산조각 내실 때, 그분은 특별히 우리의 형제와 동료 인간,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우주의 주권자로서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왕의 왕, 주의 주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다. 인류는 하늘의 보좌에 앉았다.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한계와 창조된 세상의 유한성의 한계에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제한된 능력과 시간을 가진다는 것, 끝나지 않는 일들로 하루를 끝마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지치고(요 4:6) 휴식이 필요한 것과 휴식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막 6:31). 그분은 완성하라고 주신 일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요 4:34; 5:36; 17:4). 심지어 안식일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눅 13:14-17; 요 5:16-17; 막 2:27-28) 그분은 쉬지 않고 일하시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계셨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인간 에너지의 생산을 통해, 그는 아버지의 증인이자 그가 누구였는지 증명할 뿐 아니라(요 5:36-; 9:3-5) 그분 자신이 공급자이자 우리 믿음의 중심임을 보여 주셨다(요 10:37-38; 14:10-11).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형제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동료 ‘일꾼’(마 9:37-38; 눅 10:7)으로 부르셨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가진 에너지로 일할 것을 명령하신다(마 5:16).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자신의 에너지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모을 수 있는 활력, 단지 지혜로우며 중요한 에너지 관리를 통해서 생산할 수 있는 것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부르신 일에 대한 그분 자신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바울은 강력하게 일하신다고 강조하기도 한다.그분께 에너지를 요청하라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식이요법, 운동, 그리고 휴식을 통해 돌보라고 배운 것을 잘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과 잠이라는 선물들을 가볍게 다루면서 자연적인 방법 외에 우리에게 힘을 줄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제안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 하나님이자 인간인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강력한 에너지로 일하실 것이다.우리는 이것을 삶의 규칙적인 리듬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신실하게 청지기의 역할을 하며,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깨닫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 그분의 에너지로 우리를 정기적으로 채워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지친 독립 의식을 내려놓고 그분이 공급하는 힘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Give You the Energy: Working Hard in Another’s Strength번역: 송유희
생활
직업
슈워츠
초자연
공급자
한계
직업윤리
그리스도
청지기
종교 개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by John Piper
2019-10-22
근본적으로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죽음과 죄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벌인 논쟁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이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고 우리를 위한 완전함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 믿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이 두 가지 기적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결코 그것에 대해 공로를 주장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에서 완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거룩’의 기본 의미는 평범한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 정의를 모든 평범한 것들로부터 무한히 “구별”된 하나님께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무한히 “독특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완벽한 다이아몬드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본질은, 이렇게 무한히 귀할 뿐 아니라 무한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독특성이 피조계를 통해, 또한 역사 및 구속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의 본질적 가치와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필자가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이 지닌 아름다움이 밝게 퍼져 나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과(살후 1:9)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엡 1:6)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면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들 중 하나라도 잃으신다면 그분의 영광은 감소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즉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가치, 아름다움,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와 그분이 구속하신 백성들이 그것을 영적으로 목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2. 왜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것이 모든 피조계, 역사, 그리고 구속을 향한 그분의 목적과 디자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창조하심,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심, 그리고 구원하심을 통해 드러난다.시편 기자의 고백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가 보여주듯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조물들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중략]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렇게도 광활한, 아무도 살지 않는 은하(銀河)들이 셀 수도 없이 존재하는 이 우주에서 점 하나처럼 작은 지구에만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우주가 사람이나 피조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광대한 우주를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대한 분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완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경건치 못한 ‘솔리 데오 글로리아’들을 창조하셨고, 붙들고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 칭해 주신다. 3. 하나님은 의롭다 칭함 받은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어떻게 가장 충만하게 영광을 받으시는가?나는 기독교 희락주의자다. 나는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그분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이라는 종교 개혁 신앙의 위대한 요약본을 만든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썼을 때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이 그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그들은 영화롭게 함과 즐거워함이 독립된 두 목적이 아닌 하나의 목적임을 명시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깊이 고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상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는 길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고통 중에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광 안에서 무한한 만족을 누리길 바라셨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온 피조계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한히 영광스러운 하나님, 온 우주의 궁극적 가치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지극한 기쁨이 되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우리의 최고의 보화가 되심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도 영화롭게 될 것인가?우리가 “솔리 데오 글로리아(하나님께만 영광을)”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영광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누릴 때 그 영광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궁극적으로 만물의 원천이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만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놀랍도록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왜 그토록 확고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쁨, 즉 하나님이신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도 충만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5:11; 17:13). 하지만 747 점보제트기 엔진을 자그마한 스마트카(Smart Car: 독일제 2인승 극소형 자동차-역주)에 장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화산(火山)을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한 내 영혼의 찻잔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한히 영광스러운 기쁨은 영화롭지 못한 사람들 안에 담을 수 없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하여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요 17:24–26).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예수님께 이끌리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죄인 된 모습이었든, 그를 믿는 우리 모두는 이제 어떠한 인간적인 공로도 아닌 ‘오직 믿음의 방편을 통해,’ 다른 어떤 희생이나 의를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누릴 자격이 없지만 ‘오직 은혜’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고, 마침내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 삶의 최고의 보화로 즐거워하게 될 그 날, 그리하여 모든 영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he Reformation and the Glory of God번역: 이정훈
역사
종교개혁
하나님의영광
목적
의롭다
솔리데오글로리아
기독교희락주의자
#의롭다칭함
온유와 존중으로 신앙을 변론하자
by Jared S. Oliphint
2019-10-21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믿을 수 있거나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식과 다양한 진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기독교가 더 포괄적인 종교였다면 크리스천의 삶은 훨씬 더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진리들이 거기에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그냥 자연의 주기적 패턴에 의해 점진적으로 진화된 하나의 생물학적 종이 아닌가? 상처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왜 성별 문제를 사회적 산물로서 유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식당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듯이 성 정체성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대두될 경우, 보통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그 문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바로 지키려면 주변 문화 및 그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객관적 진리,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류의 특별한 신분, 그리고 결혼과 가족의 핵심 역할 등과 같은 문제를 중요한 사안으로 본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사안이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역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변 문화와 사상들에 반하여 살게 하셨다. 크리스천들은 자연 과학, 예술과 예능,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의 모든 학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이러한 학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사람 중에는 때로 기독교에 대항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 왔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 우리 편에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지적으로 어두워지지 않도록 말씀해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분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식론적 지식 또한 제공하신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전지전능하고, 주권적이며, 선하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성경 말씀이 기록되고 선별될 때 어느 것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채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든 단어가 쓰여질 때 그분은 거기에 계셨으며, 우리가 지금 읽는 성경 말씀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도 신성하게 지휘하고 흠이 없도록 안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역사를 전능하게 통치하시며, 그 말씀이 완성된 후에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다. 기독교가 공격을 받으면, 그 공격이 개인에 대한 것이든지 혹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것이든지,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증거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이라고 한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 사실은 인간이 모든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별됨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방대한 피조 세계와 그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그러므로 교회 밖의 사람들(혹은 심지어 내부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 기원과 인간의 지위와 역할, 옳고 그른 것 등에 대해 기독교 신앙과 상반된 신념을 따르면 놀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3:15–16).베드로는 이 본문에서 기독교 신앙이 주변 문화와 갈등을 빚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언제 방어를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온유와 존중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방어한다. 우리와 그분이 모욕을 당하면 그러한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원리를 제공했다면 바울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양쪽 모두에서 기독교 신앙을 신학적으로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자신의 믿음을 방어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성경 말씀으로 그들과 논쟁했다. 베뢰아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보려고 성경 말씀을 점검한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덴에서는 바울이 방어하는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과 변론할 때,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전함으로 방어했다(행 17:18).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당혹하게 하려고 할 때 이 주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그들이 신을 믿고 있지만 그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변증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은 아담과 그 자손들을 모두 창조하셨고, 모든 이들을 구원한 그리스도가 심판의 날에 다시 오기 전에 회개하라 하셨다고(행 17:30) 역설했다. 바울의 방법은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변론했다. 그는 아덴의 철학과 예술에 익숙했다. 바울은 상대방의 문화와 신앙을 잘 알고 존중하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균형 있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지적으로 쉬운 삶이 아니며, 또한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학문 분야가 끊임없이 도전하는 공격으로 교회를 에워싸려는 것을 보아 오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도전을 주권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도전에 답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셨다. 지적인 거물들과 변론할 때,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겠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은 우리 신앙을 항상 강하게 지켜줄 것이다. 상대방과 그 문화를 가능한 한 많이 아는 것은 설득력 있는 전술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를 방어하는 모든 내용은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온유와 존중으로 제대로 방어하면, 도전하는 사람과 도전을 받는 사람 모두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Defending the Faith번역: 정은심
영성
신안과소명
온유
존중
신앙
변론
베드로
바울
크리스천
예수님,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by D. Blair Smith
2019-10-19
대중적인 크리스마스 노래인 “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Mary, Did You Know?)는 마이클 잉글리시(Michael English)가 1991년에 처음으로 부른 곡이다. 이 드라마틱한 노래는 발표 이후로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가사를 보면, 장차 폭풍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도 살리게 될 한 아기의 어머니(곧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궁금하게 여길 만한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노래에서 연속되는 그 물음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진다. “마리아, 당신은 그 아기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나요?”이 노래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일 것이다. 이 곡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여 낳게 된 여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신비를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마리아는 분명 알지 못했다.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전달해 준 소식이 있었지만(눅 1:26-38),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감당하게 될 모든 일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리아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같이 그녀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녀가 가진 지식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그분은 정말 다 아셨을까?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정말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니케아 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으로서 피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그런 분이라면 말이다.그리 간단하지 않은 질문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삼단논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몇몇 본문만 떠올려 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분은 어느 물고기의 입속에 동전 한 개가 들어있다는 사실(마 17:27)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요 4:1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장소에 계시며 소식을 듣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다(요 11:14).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의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만 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인으로 자라야만 하는 아기이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님이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루는 인간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그렇다면 이 사실은, 그분이 알지 못하신 일들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를테면 목수의 집안에서 크신 분이 낚시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셨을까? 또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장하신 분이 5세기 영국 섬에서 자라는 게 어떤 경험일지를 아셨을까? 나아가 소년이셨던 분이 당시 소녀로 살아가는 게 어떤 과정일지를 아셨을까?모르시는 내용도 있음을 말씀하시다물론 성경은 이런 문제를 간단히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놀라운 구절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 곧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렇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셨다.이 놀라운 구절에 대해서는 지난 교회 역사 동안 다양한 방법의 접근이 이뤄졌다. 가령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구절이 함축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지식의 한계는 말씀 자체[곧 성자]의 불완전이 아니라 그 특성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성(the human nature)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단순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설명이다. 즉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분이 지치거나 허기지는 모습과 같이 오직 그분이 지니신 인성의 표현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까다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바로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요 17:1)에 관해 주석하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또한 모르시는 일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독론적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참고로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의 분야이다).본성과 위격에 관한 고전적인 기독론우선 주후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회의 진술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성육신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결합하셨다. 이는 새로운 본성을 더하신 일이지, 원래의 본성을 감하신 일이 아니다. 즉 바울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성을 버리신 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빌 2:7). 칼케돈 신경은 이를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른다. 곧 “혼합이나 변질이나 구분이나 분리 없이” 완전한 두 본성이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칼케돈 공회가 이 진술을 확정한 목적은, 두 본성 중 하나를 감하거나 또는 두 가지를 혼합시키거나 구분하려고 한 당시의 이단 사상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과 대조적으로 성자의 한 위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진술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예수님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다고 말씀하신 문제를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바로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그 문제를 풀 수 있게 도와준다.이 두 가지 본성은, 마치 스위치를 작동하여 켰다가 껐다가 하듯이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전지성(omniscience)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신 성자는 그 몸이 무소부재하지 않듯이 그 지식에도 전지성을 지니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본성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닌 채로 한 사람 안에서 교통하기에, 그분은 두 본성을 따라 동시에 행동하실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행동을 하는 주체는 본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성에 따라 행동을 하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다른 이들과 동일하신데, 다만 그분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간혹 예수님의 특정 행동을 보면, 어느 한 가지 본성이 다른 본성보다 더 반영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에서 주무시는 모습은 그분의 인성을 반영하지만, 물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은 그분의 신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배에서 주무실 때조차도 그분은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며, 또 물위를 걸으실 때조차도 그분은 인간의 발을 사용하시는 사람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행동은 결국 한 동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묘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 고유한 특성대로 작용하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러나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때로 어느 한 가지 본성에만 해당되는 행동을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본성 역시 지니고 계신 위격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눅 1:43; 요 3:13; 행 20:28).신비의 영역 속으로만일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처럼 예수님이 자기 지식의 한계를 언급하시는 구절이 성경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놓치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의 전지성에 대해서는 매우 정돈된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돈된 관점이란 게 사실은 우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견해일 때가 많다. 믿음은 우리에게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y of Poitiers)가 한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그분을 다 파악한 듯 완전히 정의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는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동시에 모르신다고 말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여전히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가진 지식의 한계 역시 죄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조차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분의 인성으로 인해 우리의 인성이 회복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신 29:29). 즉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이 글에서 나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인성을 따라 말씀하신 모습을 보여 준다고 논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성을 따라서는 동일한 내용을 아신다는 사실도 함께 설명했다. 예수님은 그 무한한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이 알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것이다.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알기도 하시고 모르기도 하신다.이는 성육신이 지닌 역설의 신비를 보여 준다. 이 역설은 외견상 드러나는 불합리한 모순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즉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 You Know?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예수님
마리아
마이클잉글리시
고전적인기독론
칼케돈공회
아타나시우스
신비의영역
위격적연합
교회 개척을 망치는 5가지 위험 요소
by Phil Newton
2019-10-18
당신 안에 잠복하고 있는 위험 요소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교회 개척을 하지 마라.왜 새로운 교회가 요청되는 이때에 위험 요소부터 거론할까? 그 이유는,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가 단지 개척 사역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사는 데 실패했을 경우, 그리하여 그 사역을 잘 마무리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다시 영화롭게 하기 위한 걸음을 떼지도 않고 머뭇거릴 경우, 그로부터 주어지는 슬픔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물론 어느 목회 사역에나 위험 요소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스스로의 생각을 의지하며 특별한 지인들을 곁에 두기 쉬운 교회 개척자들에게서 더 크게 나타난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모아 그룹을 짓고 세부적인 일까지 함께 하며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현장에는 늘 그런 위험 요소가 잠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개척은 위대한 일이면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개척을 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격려하고 충고하며 사역의 과정에서 책임감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 개척자라면,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몰락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 위험 요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1. 교만듣는 사람마다 칭찬하는 설교, 열기가 식지 않는 선교,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 그리고 새로운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비전 제시 등 그 모든 활동은 목회 사역에 엄청난 유익을 주면서도 교만에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교를 형편없이 하거나 전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선교에 동참하거나 아무런 비전도 없이 목회를 지속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설교나 상담을 성공적으로 하였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이 그 사역에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교회를 개척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교만에 특별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 그 결과,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힘써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사역을 얼마나 잘하든, 이 고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의 죄악이 너무도 막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삶에는 교만이 발붙일 곳이 없다.2. 권력32년 전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대개 그 문제들은 너무나 큰 권력이 나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행정 조직이나 당회와 같은 공식적인 의사 결정 모임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떤 일을 수행할 때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나 혼자서 그 모든 과정을 주관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게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권력이 넘치면, 이런 생각이 유혹으로 찾아올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교회가 마치 나를 섬기며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비뚤어진 개념을 갖게 된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멸에 이르는 길을 간다.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교회에서 권력은 흔히 담임 목사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경건한 장로들 여럿이 모여 그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담임 목사는 그와 같은 장로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그들이 지혜를 모아 전달하는 뜻에 복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교회를 돌보라고 세우신 장로들을 겸손한 태도로 섬겨야 한다.3. 책임 의식의 결여큰 권력은 책임 의식의 결여를 가져온다. 즉 스스로 책임을 질 만한 목회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담임 목사의 동기나 행동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장로들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전혀 통제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실패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떠한지 여러 소식을 통해 자주 접한다. 그들은 오직 자기 명예에 대해서만 책임 의식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머지않아 넘어지고 만다.왜 우리는 흔히 심각한 책임 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는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성향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죄악에 저항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여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에 기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다른 이들이 빠지는 함정에 자신은 걸려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런데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우리 모두는 철저한 죄인이다.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올바로 행하고 목사로 제대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조력자로 두신 모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경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약점을 대면하며 정직하게 인정하는 책임 의식을 갖춰야만 이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다.4. 이상주의마음에 큰 뜻을 품고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교회 개척에 관한 신학교 수업을 듣고, 교회 개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깊은 감명까지 받게 된다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바로 이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여기저기서 제안하는 A, B, C의 사역을 하게 된다면, X, Y, Z의 결과가 나타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교회 개척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고생이나 실패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사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만을 한다. 또 어쩌면 자신이 관심을 갖는 몇 가지 분야에 대해서는 박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 개척이란, 목회 사역이다. 따라서 목회 세계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고 이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개척하게 된다면,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능한 청년이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 갖가지 이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고 말았다. 이내 탈진해서 그만두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일 그가 개척하기 전에 다른 교회에 가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사역하며 훈련을 받았다면, 교회 개척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서서히 사역을 익혀 가도록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바울도 동일한 방법을 따랐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열두 명을 파송하신 후에 (누가복음 10장에서) 다시 칠십 명을 파송하셨다. 그리고 그 칠십 명이 돌아와 귀신들을 쫓아냈던 일로 한껏 들떠 있을 때, 마치 세상을 정복한 듯한 그 마음을 이렇게 가라앉히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우리도 이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5. 분주사역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교회 개척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더욱 힘들다. 교회 개척자는 모임을 조직하고 계획을 세워 장소를 모색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자리를 청소하며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와 상담과 심방 등 지속되는 목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 이는 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에 수반되는 일상생활이다.또 교회 개척자는 자신을 도와줄 아무 사역팀도 갖추지 못할 수 있다. 그저 자신과 대화하기 원하는 새로운 사람들만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심방하고 연락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매주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체력만 허락된다면, 그야말로 하루 24시간을 교회 사역에 쏟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 주님과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을 범하게 된다. 만일 교회 개척자가 다섯 사람을 더 심방하기 위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더 많은 모임을 구성하고 소그룹을 인도하려다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리고 열 명의 방문자를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정작 기존의 성도를 목양하는 일에는 관심을 잃게 된다면? 더 나아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컨퍼런스와 미팅을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추구해야 할 신앙의 성장은 이루지 못한다면?물론 교회를 개척한 목사는 힘을 다해 오랜 시간 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교회는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열심히 노력하며 부지런히 수고하되 모든 일이 주님의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또한 그 사역이 확장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더불어 계획을 세울 때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곁에 있는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다. 결코 그런 마음으로 애쓰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오직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날마다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현명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Dangers That Can Wreck Church Plants (and Planters)번역: 장성우
교회개척
교만
권력
책임의식
이상주의
분주
저축과 투자에 대한 성경적 원리
by Chris Cagle
2019-10-17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은퇴나 장애를 대비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돈을 관리하는 일에 신학을 적용하기 어려워한다. 특히 멀리 있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고 투자하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주제에 관하여는 기독교 안에서도 너무 많은 관점들이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어떤 관점은 사치스러운 삶을 부인하며 천국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점은 생의 후기에 더 큰 부를 누리고 쓰기 위하여 예산을 세우고, 빚을 지지 말며, 정기적으로 저축하라고 제안한다. 좀 더 극적인 관점 안에서는, 40세 이전에 은퇴할 수 있도록 극도로 절약하고 저축을 강조하는 재정 독립과 조기 은퇴(FIRE, Financial Independence/Retire Early)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있다.그러면 미래를 위해 실제로 저축하고 투자하는 면에서 성경적 정통 신학과 균형을 이루는 개인적 차원의 돈의 신학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이를 위해 7가지 성경적 원리를 나누고자 한다.1.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은 성경적이다어떤 크리스천들은 은퇴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을 (보통 마태복음 6장 19-20절을 인용하면서) 불순종이라고 믿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보다 다른 곳에 돈을 두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저축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은퇴 후의 삶도 돌보실 것이므로(사 46:4) 나중을 위한 저축은 필요치 않다고 믿는다. 그리고 저축하고는 싶지만 벌어들인 돈을 모두 다 써 버리기 때문에 저축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잠 13:18). 놀라겠지만, 성경은 실제로 저축을 장려하고 있다. 성경은 미래에 발생할 필요가 알려지고 예상되는 경우 저축하는 일을 용납한다(창 41; 잠 6:6–11; 21:5, 20).성경은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저축하고 투자하면서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일”로 “하나님께 부요[해]지는”(눅 12:21; 마 6:19-21)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2. 저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저축하는 일은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활동으로 여겨지기 쉽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저축을 하면서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않아도 된다. 저축하는 일은 돈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바르게 평가하는 일이므로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약 1:16-17). 돈을 무계획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어리석게 써 버리기보다는, 지혜롭게 저축하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더 잘 관리하는 일이다(눅 12:47-48). 청지기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일은, 중요하게 돈을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저축을 해 놓고 있으면, 그때 당신이 더 잘 도울 수 있는 입장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 4:28). 그러면 당신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잠 3:27). 저축은 유산을 남길 수 있게 하고, 당신의 후손들을 축복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게 한다(잠 13:22). 3. 지체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다우리는 모두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찍 저축하지 않으면, 비과세 혹은 복리 이자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재정적 힘을 잃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축을 미루는 이유는 저축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가처분 소득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축을 미루고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당장의 부채를 청산해야 하거나 저임금으로 인해 수입이 적기 때문이다. 즉 의료 비용 및 자녀 교육비 등 더 긴급한 필요를 먼저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저축은 나중으로 미룬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가 바뀌더라도 저축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퇴를 대비하며 저축하는 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돈이 쌓일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마 25:27). 그 의미는 당신이 오늘 저축을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돈에 비하여, 저축을 늦게 시작하면 결국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으로 바로 저축을 시작하라. 그러면 그 금액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진력을 얻어 조금씩 늘어난다. 4. 부채는 가정 경제를 쇠약하게 한다성경은 빚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에는 신용 카드나 자동차 구입 자금 대출은 없었지만,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성경은 빚을 엄격하게 금하지는 않지만, 빚진 상태를 종으로 구속되는 한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잠 22:7). 그 밖에도, 과잉 지출과 너무 많은 부채 및 낮은 저축률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부채에는 대가가 따른다. 부채를 청산할 때 지불하는 돈은 빌려준 사람에게 가기 때문에, 이는 그 외의 것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돈이다. 이것을 부채의 ‘기회비용’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빌리고 12%의 이자(120만원)를 지불하는 경우와 천만 원을 저축하여 그것으로 6%(60만원)의 수익을 거두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실제 경제적 차이는 18%(180만원)이다. 5. 지혜로운 투자는 바르고 좋은 일이다 투자는 주식 거래가 아니다. 건전한 투자는 처남이 알려 준 비밀 정보로 집을 담보하여 무리하게 돈을 집어 넣고 요행을 바라는 식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추측하여 요행을 노리고 돈을 투자하는 일은 대부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잠 28:19; 딤전 6:10).지혜롭게만 하면 투자를 통해 실제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투자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제품을 내놓거나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제 사업에 돈을 넣는 것을 말한다. 바른 투자는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잘 경영하여 투자한 금액에 상응하는 만큼의 돈을 돌려주기를 소망하는 것이다(잠31:10–31; 전 11:1–6).투자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개인은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기보다는, 비용이 적게 들고 간접 운용되는, 뮤추얼 펀드 및 상장 지수 펀드(ETFs)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또한 수익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높은 수수료와 비용이 드는 투자 상품은 피하고, 가능한 다각적으로 투자하며, 충동적으로 매매 타이밍을 결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투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므로 모르는 투자 상품은 사지 말아야 한다. 6. 유혹에 의해 저축할 수도 있다두려움이나 탐욕으로 혹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갈망 등과 같은 잘못된 이유로 저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축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딤전 6:17). 탐욕으로 하면 저축의 모든 이점을 놓치게 된다(잠 1:19; 막 8:36; 눅 12:15). 그리고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하고 난 다음, 전도서 5장 13절의 구두쇠나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들이 저축한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만 집중한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보다 부요함을 신뢰한 것이 문제였다. 부를 단지 쌓아 놓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위험을 감당하기보다는, 부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그들의 삶을 소모하게 된다. 그것은 저주(잠 11:26)와 심판(눅 12:16–21; 약 5:3; 시 39:6; 전 5:13; 슥 9:3)을 초래한다. 7. 균형이 핵심이다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핵심이다.따라서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투자해야 하면서도, 너그럽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공급의 원천이며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은혜와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시 107:8-9). 또한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근거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Biblical Principles for Saving and Investing Your Mone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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