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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특급 비밀
by Tim Savage
2019-11-04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름의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 운전자에게 사각지대는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어 사고를 일으키기 쉬운 곳이다. 크리스천들에게도 그들이 보지 못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사각지대가 있다. 그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며 삶의 기쁨도 적어진다. 목회를 하면서, 그 맹점을 보고 또 보았다. 나 자신 안에서도 그것을 보았다. 크리스천들이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받은 것은 즐거워하면서, 현재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간단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전치사구로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자그마치 164번이나 크리스천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주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말한다. 이 표현은 아주 짧지만, 황홀한 크리스천의 삶을 매우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우리가 ‘안에서’(in)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 문법적으로 그것은 아마도 장소를 명시하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위치해 있다.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끌어내기 위하여, 장소를 의미하는 전치사구 하나를 생각해 보자. ‘캘리포니아에서’(in California)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캘리포니아 주민으로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말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여행 잡지에 나와 있는 그대로 태양과 모래 및 파도타기의 삶을 경험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황금 주(Golden State, 캘리포니아 주의 속칭-역주)의 기쁨에 흠뻑 빠진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그리하여 그런 기쁨이 당신의 삶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다. 캘리포니아가 당신의 피 속에 흐른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캘리포니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전기를 가지고 비유하면 이를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모든 전기 기사들은 플러그와 소켓으로 가득한 도구 박스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플러그와 소켓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플러그가 소켓에 꽂아지면, 플러그는 소켓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소켓은 플러그에 모든 것을 준다. 소켓은 순간적으로 플러그 속으로 급전류를 보내준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플러그이고 그리스도는 소켓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그에게 꽂아져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로 말이다. 회심의 순간에,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길 때, 그분은 자신의 본질적인 것, 즉, 그분의 사랑과 능력, 평화와 기쁨 그리고 의의 전류를, 진정으로 그 자신의 생명의 흐름을, 우리 안에 갑자기 밀어 넣어 주신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엡 3:19). 이것은 놀라운 확증이다. 분명히 하나님만 그분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도 충만해질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성모독인 듯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모든 충만함으로 말이다.그리스도가 거주하는 삶의 능력이것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각지대와 같다. 우리는 충만함을 즐기기보다는 결핍감에 종종 무릎을 꿇는다. 때로 부적절하고 불안정함을 느낀다. 두려움과 죄책감 및 외로움으로 괴로워할 때도 많다. 내일 올 수도 있는 상실에 대해 미리 걱정하곤 한다. 평판이나 관계, 능력이나 소유물, 건강이나 행복을 상실할까봐 염려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짜증이 나며,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이 우리의 행로에 던지는 것들은 아무것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삶을 조금도 축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기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의미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무한한 충만함이 있을 것이다. 충만한 삶은 세상에게는 비밀이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주하는 성도들에게 이 비밀은 이제 나타났으며(골 1:26),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라는 아주 짧은 말로 함축하고 있다. 성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아마도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모든 서신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4장 19절, 고린도후서 4장 6절,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을 보라.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하셨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안에 풍성함을 공급해 주신다.바울은 이 현실을 생각해 보라고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만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리 쉽게 낙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그리 쉽게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해 그리 쉽게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원을 무한정으로 받으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은 바울의 가장 열정적인 기도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후략]”(엡 3:14-17). 그 후에 바울은 훨씬 더 열렬하게 탄원을 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말이다(엡3:18–19).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면, 이제 부족하다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성령의 임재로 활기가 넘치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 3:20)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현실적으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기독교의 일급비밀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ianity’s Best-Kept Secret번역: 정은심
영성
영적성장
사각지대
그리스도
분별
능력
비밀
십자가 빛 아래에서 사는 삶
by John Smith
2019-11-02
많은 개혁주의 신자들처럼 필자 역시 내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이후 이어지는 삶에서 은혜의 교리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한다.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마침내 알게 되었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오래 전에 내가 중생했던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닌(요 1:13) 나를 사랑하시고(엡 2:4) 오직 그리스도만 믿는 믿음만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로 나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2:8)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1:11), 그리고 내 삶과 미래가 그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요 10:28)을 깨닫게 되었다. “놀라운 사랑! 날 위해 죽으신 주 하나님”이라는 찬양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나는 새롭게 발견한 개혁주의 신앙을,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마저도, 파괴적이고 사악한 영적 교만을 쌓아 올리는 데 사용했다. 계속 겸손해지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에서 자라는 일에 헌신하기보다, 나는 나의 신학적 우월성을 뽐냈다. 내 안에 남아있는 깨어짐과 약함을 보여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내 구주의 놀라운 사랑이 내 삶으로부터 흘러나와 내 주위의 모든 깨어지고 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친 성령님의 성화 사역이 필요했다. 성경은 일반 계시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해준다. 이 땅에서의 삶은 연약함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가시덤불, 엉겅퀴로 인해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된 저주(창 3) 아래 있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또한 믿음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도(롬 3:24–25), 십자가의 말씀의 힘으로 구원을 얻은 후에라도(고전 1:18), 우리는 이 약한 육신 안에서 탄식하며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롬 8:23)이다. 또 우리가 기다리는 중에는,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고 약속하신 바 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의 지체로서 이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섬기고 사역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엡 4:12)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시키시는 일을 인식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눈을 뜨는 일이다. 탁월한 신학 지식을 자랑하기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후 5:14)고 ‘권고’하신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사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만지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아닌가? 우리에게 주신 진군 명령은 명확하다. 솔로몬의 시편에서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시 72:12–13)라고 하였고, 바울은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2)라고 선언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 삶의 전환점은 내가 살던 카운티 교도소에서 시간제 목사로서 “약하고 궁핍한 자들” 속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요한계시록 2장에 묘사된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신학적 이단은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으면서도 사랑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카운티 교도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나의 눈이 비로소 열렸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과 그의 권능의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가장 깨어지고 약하고 길을 잃고 상처받은 이들 가운데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중미 출신의 한 젊은 재소자를 만났던 그 날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 친구는 소위 ‘고상한’ 이들은 경멸할만한 중범죄로 기소되었는데, 절망에 빠진 그가 자살을 시도하지 않도록 감시받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스페인어로 된 성경을 갖다 주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온 부분을 펴준 후(눅 18:9–14) 크게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했다. 그의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그가 수감된 방 문 창살 사이에 놓여 있던 성경 위로 떨어져 누가복음의 페이지들을 적셨다. 거기 나온 세리처럼 그 재소자는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울부짖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셨던 거룩한 순간이었다. 그는 그날 밤 하나님께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자기 침대로 돌아갔고, 나는 잊을 수 없는 감격 속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나와 그 재소자가 이제 동일한 영적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약하고 상처 입은 죄인들이며,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 재소자와 나는 이전에는 서로 멀리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바로 지난주에, 재소자 중 새로 신자가 된 이 한 명이 내게 ‘고백할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가 아직도 로마 가톨릭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만났을 때 그가 내게 겸손히 말하길, 이전에 있었던 어떤 문제에 대해 자신이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까지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고 했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긴 한 것인지조차 의심이 든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과 성령의 권능이 행하시는 사역이 이 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역사하는 걸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로마서를 펼쳐 그가 마음의 고통을 경험했던 것은 칭의의 열매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고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투는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롬 6–7)임을 알려주었다. 8장을 펼쳐서는 그로 하여금 죄를 고백하도록 격려했던 것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임을 알려주었다. 나도 그를 용서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에(3:24–25), 복음의 약속 때문에(10:13), 또한 그의 안에 권능 있고 확신을 주시는 사역을 하시는 성령님이 계시므로, 구원의 확신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십자가, 그리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 아래에 설 때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생각한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4)약하고, 길 잃고,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개혁 교회를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인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한다. 또한 내 자신을 위해서도 계속 그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로 하여금 만나게 하시는 모든 영혼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했는지, 또는 얼마나 약한지 상관없이, 그들을 향해 제 눈을 여시고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빛 아래에 사는 삶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Life in Light of the Cross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개혁주의
연약함
보혈
기도
궁핍
사랑
교리
고난받는 이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말들
by Gavin Ortlund
2019-11-01
성경의 모든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롯은 선지자의 머리를 베었고, 유다는 스승을 배신했지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성경 구절로 친구 욥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욥이 실제로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욥기 1-2장에 간단하게 나오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35장에 걸쳐서 계속 이어진다. 나는 어느 것이 욥을 더 괴롭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처음에 겪은 상실의 고통일까 아니면 나중에 이어지는 위로하러 온 친구들의 추궁일까? 욥의 위로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욥과 대화를 할 때 지배적으로 사용한 그들의 도덕적 세계관이 문제이다. 그리고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추론하는 방식으로 찾아내도록 욥에게 강요하는 점이 문제이다.욥의 친구들을 비판하기 쉽지만 솔직해 보자. 우리는 모두 그들과 같을 수 있다. 사실, 욥과 같이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으면, 복음을 지지하던 우리의 마음도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로 테스트하듯이 반응한다. 우리가 은혜를 믿든지 인과응보의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고난은, 우리가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며 평소 적용해 온 신학을 겉으로 드러나게 한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특별히 네 가지 방식으로 조언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 네 가지 방식은, 욥의 친구들처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식으로 이미 잿더미에 앉아 있는 이들의 머리 위에 불이 붙은 석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언급함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롬 8:28),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창 50:20)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의 상황에 항상 알맞거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은 고난을 당하고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이 그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셨다고 말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다. 요셉의 분노와 좌절감을 상상해 보라. 그의 형들이 우물가에 모여 용기를 북돋우며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신다”라고 소리치는 말을 음침한 우물 바닥에서 듣고 있을 요셉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까를 짐작해 보라.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가르친 후에 얼마 안 되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고 조언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을 확실히 실천해 보자.2.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로 시작함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 자신의 경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목으로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숙을 나타내는 한 가지 표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보려 하지 않고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알기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이유로,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할 때 중요하다. 첫 번째로, 각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다 다르다. 우리 집이 불타서 무너져 내린 후에 하나님이 더 좋은 집을 주셨을 수도 있고, 친구의 배신으로 우리가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락하고 혼동스런 세상에서, 당신이 고난받은 후 경험한 그런 좋은 일이 현재 고난당하고 있는 당신의 친구에게는 죽을 때까지 전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슬픔은 천국에 갈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네가 이 일로 즐거워하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친구의 현재 상황이나 미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두 번째로, 우리의 이야기가 유사하더라도,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가 그 이야기를 지금 당장 들어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의 것과 유사하여,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친구가 원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나의 이야기와 비교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와 미세하게 다른 점을 인지하며 친구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3. 고난을 초래한 잘못을 최소화함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인과응보적으로 접근하려는 본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의미로 그렇게 했을 거야” 혹은 “그것이 그렇게 나쁘겠어?” 아니면 “글쎄, 모든 갈등에는 양쪽에 잘못이 있는 거지”와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진실은 누군가가 정말로 좋은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이 좋은 의미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나빴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잘못이 항상 양쪽에 똑같은 비중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잘못의 비중이 80/20, 때로 100/0처럼 일방적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인 듯하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에게 고난을 초래한 사람들의 죄를 최소화하지 말라. 변명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사악함을 정직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가볍게 해 주는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4.위로와 자비를 무시한 채 품성 형성을 강조함신약 성경이 고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경건한 품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는 점이다(참조, 롬 5:3-5; 약 1:2-4). 그러나, 누군가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일 때에는, 아마도 이 점을 강조할 때가 아닐 것이다. 신뢰 관계가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 점이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위로와 자비의 말과 함께 균형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극심한 고난의 경우, 아예 어떤 말도 하지 말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엘리바스가 본능적으로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2)라고 하듯이, 우리도 뭔가를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는 친구는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나 견해보다는 우리의 사랑과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풀어 주거나 혹은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고통 중에 있는 그들과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 어둠에 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에서 그 순간에, 그 공간에서, 그 고통을 그들과 함께 견디어 보라. 아슬란의 눈물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고난에 대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생의 삶에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으시고, 우리 삶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을 하지도 않으신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상했을 때 예수님을 가장 진실하게 발견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시 34:18).“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시 147:3).“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C.S. 루이스의 나이아 연대기 시리즈 2편인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에 디고리라는 한 소년이 아슬란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아프고, 그는 아슬란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두려워한다. 루이스는 그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그때까지 그는 사자의 커다란 앞발과 그 위에 난 거대한 발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절망에 빠진 채 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본 광경은 그의 평생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그를 놀라게 했다. 굽혀진 사자의 몸과 황갈색의 얼굴은 그의 얼굴 가까이에 있었고 놀랍게도 사자의 눈에는 반짝이는 큰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이 자신의 것에 비하면 너무 크고 눈부셔서, 디고리는 순간적으로 사자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틀림없이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슬란이 말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알아. 슬픔은 위대한 거야. 이 땅에서는 너와 나만 아직 그것을 알고 있단다. 우리 서로에게 잘 하자.” “내가 알아”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위로의 말이 함축되어 있는지. 그리스도는 큰 고난을 받았으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자들을 공감하신다. 그는 불의의 재앙에 시달린 궁극적 욥이며, 형제들에 의해 배신을 당한 궁극적 요셉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의 심판을 온전히 받아들였으며, 지옥과 버림받음의 깊은 속으로 가라앉으셨다. 누구도 이보다 더 큰 고난을 받지 않았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러한 깊은 사랑은 고통의 순간에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욥의 친구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Not to Help a Sufferer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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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담대함과 명확함의 빛
by Rosaria Butterfield
2019-10-31
지금과 같은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가 지향하는 신학은 우리가 행동하고 말하는 일상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2016년 11월 9일 수요일, 이웃 집 수선공 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우리 집 다락방 문의 경첩이 부러져서 흔들거리는 것을 알게 된 그가 그것을 고치러 온 것이다. 그가 우리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에게 다락방 문을 보여 주고 나서 부엌에 커피를 준비해 놓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홈스쿨링을 계속하러 갔다. 잠시 후 나는 누군가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필이 울고 있었다. 일을 마친 그가 부엌에 앉아서,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는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고 모든 것이 거기서 무너졌다. “기독교인은 위험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난번 선거가 그것을 증명했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관이 서로 다른데 우리가 어떻게 친구로서 잘 지낼 수 있겠어?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필과 나는 오랜 이웃이었다. 우리는 함께 파티를 하고 바베큐를 해 먹고, 가족의 장례식에도 참석하는 사이였다. 개집도 서로 빌려쓰고, 아이들의 자전거도 같이 나누어 쓰며, 아이리스 꽃도 서로 나눠 주는 사이였다. 그러나 선거를 한 다음 날, 우리 사이에는 선이 그어졌다. 필이 던진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결정적이었다. 내게도 깊은 고민이 생겼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서로 더 이상 대화도 나누지 않는 관계에서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나는 그에게 부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고 우리는 한참동안 함께 울었다. 때때로 이와 같이 서로 다름으로 나눠진 세상은 우리에게 깊은 신음과 슬픔이 된다. 이렇게 가치관과 의견이 극단적으로 나눠지는 시기일수록, 부정적인 의견과 나쁜 평판을 받을까 두려워서 나의 신앙을 협상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에 대해서 스스로 새롭게 정의를 내리고는, 상대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외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는다. 소위 말하는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은혜와 진리를 타협하고 싶은 유혹은 결코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담대하게 고백하는 교회와 목사, 장로를 비판할 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 문화를 움직이는 두 가지 우상에 무릎 꿇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성적 지향과 상호관계성에 근거한 우상이다. 성적 지향이 우상이 되면, 우리가 가진 성적 욕구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존재론적으로 가장 잘 보여 준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상호관계성이 우상이 되면, 우리가 누구인가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차별(victim-statuses)을 받는지에 의해 측정되고, 또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종류의 불일치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우리는 밖으로부터 온 박해와 내부에서 비롯된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통을 받았던 2세기의 초대 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다. 로마황제를 주로 고백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2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지금 우리 시대와 관련해서 살펴볼 한 가지 사실은, 2세기에 로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여러 신 중 하나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그리스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배타적인 믿음을 반역죄로 보았고, 그 죄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주권이 가진 배타성을 고백함으로 죽음에 처해졌다. 그러나 박해의 시기를 지나는 중에 교회는 더 커졌고 복음은 땅 끝까지 퍼졌다.거짓 가르침은 언제나 두 가지 형태로 온다. 첫 번째는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반대하는 적대적인 형태로 온다. 또 다른 하나는 복음을 문화와 타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2세기와 마찬가지로 지금 시대의 문화는 부활의 능력과 십자가의 피가 필요 없는 복음의 은혜를 제안함으로 복음의 생동력을 감소시키고 있다. 오늘날 그런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잘못된 가르침의 사례가 바로 LGBTQ(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의 약자로서 성의 해방을 상징한다-역주)가 내세우는 슬로건, “사랑이 이긴다”(Love Wins)이다. 사랑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기독교 복음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그럼 2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로, 그들은 매일매일 희생적이고 친절하게 행했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가 없다면, 복음의 진리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믿는 성경적 진리는 함께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진리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도 포함한다. 둘째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가르침이 박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21세기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 반대로 생각한다. 거짓 가르침보다 박해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전달하는 일에 종종 실패를 경험한다. 세상을 향한 빛이 되어 담대하고 확고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할 뿐 아니라 복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고통 가운데 계셨다는 것을 이웃이 다 알기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이웃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누구를 위해 사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서로 생각이 달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고, 식사가 끝나고는 말씀을 열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한 진리를 나눠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전하도록 위임하신 말씀을 나누는 데 있어서 우리는 무엇보다 투명해야 한다. 바로 그 장소에서, 불편하지만 정직하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웃을 대하는 조금은 어색한 바로 그 장소에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전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할 수 있다. 지식과 의와 거룩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지금의 탈기독교 시대에는, 이웃과 맺은 관계의 친밀도가 우리가 전하는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과 함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에도, 또 우리에 관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에도,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가능한 모든 기회마다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진실하고 대담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각각 50퍼센트씩이라는 식의 형편없는 방정식을 풀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우리는 100퍼센트의 은혜와 100퍼센트의 진리를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는 모두 다 100%를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지금의 탈기독교 시대에 우리는 단지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이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에서 회복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관계가 불편하거나 단절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함께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원제: Boldness and Clarity as a Light to the World 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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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기독교
제자로 세워가는 하나님의 훈계
by J. Mark Beach
2019-10-30
부모들은 자녀들보다 훈계의 유익을 더 잘 안다. 나는 어렸을 때 벌을 받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벌을 받았더라도 그것을 그리 크게 생각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받은 벌의 심각성을 고심하고, 부모님이 내리신 평결의 성급함과 죄와 벌의 불균형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었다. “불공평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야 나는 좀 더 명확한 시각으로 부모님의 훈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 나는 그때 부모님이 사랑으로 훈계해 주셨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보는가?우리는 믿는 자들로서 이러한 어린 시절의 교훈을 신앙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한다. 때로 철없는 아이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훈계를 바라보곤 한다. '왜'라는 질문이 충동적으로 일어나 괴로워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우리는 놀람이나 불만 혹은 의심으로 어리둥절해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의 동기를 묻는다. 아이로서 부모의 훈계를 대하듯이, 우리는 고난의 심각성과, 적절성 그리고 판결의 정당성을 묻는다. 내가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청중인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현재의 시험과 고난을 영적 성숙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방식이라고 기억하도록 격려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히 12:5). 이 말씀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앞에 나오는 권고의 일부분이다. “십자가와 죄인들의 거역을 참으신” 분을 기억하라는 훈계이다(12:2-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그러함과 같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이나 “격려”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사용된 특정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에 대해 사용된 단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옹호자” “위로자” 혹은 “조력자”로 불렸다. 요한복음에서 그 단어는 파라클레토스(paraclētos)이며, 히브리서에서는 파라클레시스(paraclēsis)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들에게 잊지 말라고 하면서 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러한 위로의 단어는 사실 잠언 3장 11-1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잠언의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전에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 둘째, 징계를 받았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훈계는 마치 아버지같이 우리를 돌보심에 근거하고 있다. 요점은 명백하므로 우리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당하여 씨름하고 있을 때, 실망과 핍박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고, 우리를 불량품이나 달갑잖은 존재로 취급하지도 않으셨다. 정반대로, 우리를 그분의 아들과 딸로 대우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주제를 확장한다. 그는 이것을 사방으로 포위된 신자들을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린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한다”(히 12:9)고 말한다. 저자는 “자기의 뜻대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부모들에게 잘못이 없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부모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키우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일반적인 상황 안에서, 성인으로서, 특히 자녀들을 두고 있는 우리는 자신을 키워주신 부모님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를 더 나아지게 하고 우리의 품성을 더 발달시키려고 노력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경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 충동을 저지하거나 혀를 제어하는 방법을 부모로부터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부모들처럼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훈계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아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키우는 데에 있어서 어느 것이든 모르거나, 잘못 인도하거나, 불공평하게 하신 것이 전혀 없다. 훈계가 즐거워 보이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12:11). 훈계가 불쾌하다는 점은 피할 길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정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훈계는 우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죄된 태도와 행동, 생각과 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만든다. 우리의 습관을 더 나은, 더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게 한다. 그 길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보상으로 복을 받는다.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은”이라는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유대 크리스천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도록 권고받는다. 다시 말하면, 훈계가 효과를 얻으려면, 그들이 고난받는 것을 그냥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배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는 것만으로 배움이 거저 보장되지 않듯이, 고난을 받는다고 “연단”이 그냥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큰 고난을 당했지만 그다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훈계로 “연단”받은 이들은 하나님과 우리가 볼 수 있는 “의의 열매”를 맺는다. 욥의 이야기는 이 점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욥은 가장 심한 믿음의 시련을 당했다. 그의 삶을 강타한 비극은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그의 죄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신실했기 때문에 시험을 당했다(욥 1:1, 8; 2:3). 사탄은 욥의 시련을 통해 그가 신앙을 저버리는지를 보려는 한 가지 목적만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가 연단을 받아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욥은 거의 모든 가족을 상실했고, 그의 부와 건강까지도 잃었다(이 모든 것이 지독하게도 시기가 잘 짜 맞춰졌다). 그의 아내도 그를 버렸다.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조언했다. 욥은 이 모든 무지막지한 일을 겪었다. 그 다음에 친구들이라 하는 사람들로부터 추궁을 당했다. 그들은 그에게 선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며, 그가 그의 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회개하라”(욥 8:5-6; 15:4-5 등)고 조언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 말씀을 교훈으로 아는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위로자들이어야 했던 사람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우를 변론했다. 그는 하나님께도 추궁했다. 혼란스러움으로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요청했다. 하나님이 설명해 주시기를 원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추궁을 받은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욥이었다(38장).결국,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42:6). 고난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그는 “낙심”한 것과 하나님께서 정의와 고난을 통해 그를 향한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의심한 것을 회개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호의와 사랑에 의문을 품은 점을 회개했다. 하나님이 그 시련을 그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점을 회개했다. 그리고 그것이 히브리서 저자가 유대 크리스천들에게 말하고 있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련을 “우리를 위한” 훈계로 사용하신다. 이것을 믿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를 훈계하신다. 하지만 상황들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이목을 끄는 상황들을 사용하신다. 실직, 장난이 심한 어린 아이, 문제가 있는 십대 자녀, 부상, 질병, 이혼, 사고 등 수없이 많은 상황들을 모두 사용하신다. 그 짐들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욥의 경우는 거대했다. 그의 시련과 비교하면 우리의 것은 작을 수도 있다. 시련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훈계하신다. 시련과 어려운 상황에 주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교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수정하고, 위로하며, 책망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아버지 같은 “훈계”이다. 훈계(discipline)라는 단어가 또 다른 성경적 단어인 제자(disciple)와 얼마나 가까운지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훈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 우리가 맞이하는 시련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더 봉사하는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설계이다.당신이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바르게 되고 “훈련”받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로 그리스도의 적합한 제가가 되어 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훈계는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생의 역경을 통해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도 시련을 겪은 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경이 그들을 성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훈계하시지만, 이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훈계는 사랑의 조치이다. 그것은 우리를 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함으로 사랑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훈계를 통해 우리를 제자로 만들고 계신다. 하나님의 훈계하시는 음성이 귀에 들린다면(아마도 우리가 대면하는 어려운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추고 그분의 음성을 경청하게 할 것이다), 불신앙에 작별을 고하고, 죄의 고리를 끊으며, 고집스런 습관과 태도, 악한 감정과 의문, 혹은 자기 연민으로부터 후회 없이 떠나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지혜로운 그리고 순종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 나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기도하기를 배우라.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lessing of God’s Discipline번역: 정은심
신학
신약성경
제자
하나님의훈계
히브리서
욥
그리스도
사랑의조치
훈련
설교자여, 전인적으로 적용하라
by Matthew Harmon
2019-10-29
설교문을 작성할 때, 깊이 있고 정확한 요점을 들어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적용을 준비하기란 쉽지 않다. 흔히 본문을 힘들게 해석하고 그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마친 후에야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문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지만, 그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하나님은 설교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듣는 자들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처럼 말씀을 듣고 믿는 일은, 구원받을 때 일어나는 회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져오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속적인 신앙의 성장을 이루는 원인이 된다(갈 3:1-5). 따라서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는 그들이 말씀을 듣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고후 3:17-18).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죄인을 흑암의 권세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신다(골 1:13-14).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히 반영하며 살아가게 하신다(엡 4:17-24).그러므로 성경의 특정 본문을 청중에게 적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는 일이란 설교 준비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물론 우리는 설교문을 작성하며 훌륭한 적용을 준비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습관에 빠지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예를 들어 더욱 ‘실제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다 못해, 성경 본문에 반응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춘 적용을 급하게 준비할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기독교 신앙이 근거하고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메시지는 예컨대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율법주의에 기초한 자기 의를 추구하게 만들 수 있고, 그와 달리 올바른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기준을 스스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낙심한 자들에게는 그 절망을 더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경우이든, 본문을 적용하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놓치는 결과만을 낳는다. 그 진정한 목적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전인(entire being)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적용을 과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전인적인 차원의 적용을 위한 네 가지 질문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마 22:34-40). 이런 점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적용 역시도 청중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계명을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아래에 소개되는 네 가지 질문은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전인적인 차원의 적용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1.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기를 원하실까?하나님은 신자가 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셨다(고전 2:16).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생각하던 대로 사고하려는 유혹을 받는다(엡 4:17-19).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요구하신다(롬 12:1-2). 올바른 설교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주변 세상에 대한 그릇된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리고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적 세계관을 갖추게 한다.2.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실까?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 그 진리가 우리의 생활을 빚어내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믿지 않고 단순히 지적 수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되 이내 뿌리가 없어 넘어지고 마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셨다(눅 8:5-15). 이런 사람의 문제는 이해의 결여가 아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눅 8:15). 올바른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거짓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 참된 믿음을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그뿐 아니라 비신자에게 도전하여 불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요청한다.3.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기를 원하실까?이 질문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우리 행동의 근원이라고 파악한, 갈망, 의향, 감정, 의지의 결합인 ‘정서’(affections)의 변화를 추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그분 자신을 갈망하라고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복음의 역사에서 멀어질 때 악한 일을 갈망하게 된다. 올바른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죄악된 갈망, 의향, 감정 등을 드러낸다. 그리고 경건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정서가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지향하도록 만든다.4.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실까?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실제로 믿는 내용 그리고 갈망하는 대상을 올바로 회복시키면, 자연히 우리의 행동에도 실질적인 변화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행동과 관련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주기도 한다(롬 12:9-17). 그러나 수많은 본문은 그보다 덜 직접적인 지침을 제공하며, 구속사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해 주의 깊게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올바른 설교는 죄악된 활동이라든가 하나님의 방식에서 벗어난 행동 패턴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의 진리를 실천하도록 하여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 표현될 수 있도록 돕는다.청중을 위해 적용의 모범을 보여 주기우리는 설교 시간을 통해서든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와 나눌 때마다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전인적인 적용을 보여 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1. 위에서 소개한 질문을 설교 시간에 분명히 제시하라본문 해설에서 적용으로 넘어가는 시간이 될 때, 위의 질문 가운데 한두 가지를 던지며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시는지 실제로 보여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매번 설교 때마다 모든 질문을 곧이곧대로 사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경우 설교가 불필요한 형식을 과시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각 질문을 설교 곳곳에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다.2. 해당 본문이 네 가지 질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라대체로 한 본문은 네 가지 질문이 다루는 적용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해당 본문의 메시지가 (야고보서 1장 19-27절에서와 같이)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에 비중을 두고 있다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거짓말이나 그릇된 믿음 혹은 악한 동기를 지적하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죄악된 행동을 낳게 만드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또는 해당 본문이 우리의 믿음이나 갈망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다면, 그러한 내적 상태가 어떻게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야기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3. 네 가지 질문이 추구하는 전인적인 변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적용을 준비하라간혹 우리가 다루는 본문이 네 가지 질문의 적용을 분명히 다루고 있지 않을지라도 청중의 마음이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설교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먼저 해당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을 취하여 우리가 그 가르침을 실제로 믿는 일에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후에 바로 그 실패가 드러내는 우리의 갈망에 대해 설명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참된 행동은 그와 어떻게 다를지를 묘사함으로써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적용할 수 있다.한 사람의 인생에 참된 변화를 가져오시는 분은 성령이다. 그런데 그 변화를 위해 그분이 사용하시는 주된 도구는 다름 아닌 올바른 설교와 적용이다. 이에 우리는 전인적인 변화를 위해 말씀을 적용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청중도 성경을 읽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할 것이기 때문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In Your Preaching, Aim for Holistic Applica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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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갈망
에드워즈
성령
적인적인변화
경건 생활의 중요성
by Ryan Huguley
2019-10-28
흔히 가장 중요한 식사가 아침 식사라고들 한다. 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란 세 개와 커피로 아침을 거르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아침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하루 중 섭취하는 가장 중요한 한 끼가 있다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집중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건의 식사다(시 1:1-2).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경건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매년 1월이 되면 올해는 성경 전체를 읽겠다는 웅대한 목표를 갖고 시작하곤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레위기 속에서 제사 지내는 장면 정도에 도달할 즈음이 되면 새해 목표는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왜 이렇게 열정에서 무관심으로 끊임없이 마음이 바뀌는 걸까? 내 경험과 목회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할 때, 경건의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속성과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왜 이런 경건의 시간이 그토록 중요한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항상 쉽고 재미있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노력과 훈련이라는 것은, 그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아야 하지만, 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부름 받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동기 부여의 측면을 망각하게 되면 결코 오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나처럼 잘 알고 있을 것이다.성경은 경건의 시간을 최우선 순위로 두도록 하는 다양한 동기 부여로 가득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중에서 세 가지만 다뤄 보도록 하자.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목사로서 나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하는 신자들과 상담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매일의 삶에서 하는 결정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습에 감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말씀, 반드시 곁에 두어야 할 말씀을 소홀히 할 때가 너무나 많다. 시편 119:105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는 성경을 펼쳐야 한다.하나님의 뜻을 막연하게 추측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선물인가? 우리가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숙고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의 길은 더 반듯하고 우리의 결정은 더 확고해질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성경을 깊이 파고 싶은 동기 부여를 더 강하게 일으키는 사실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상기시킨다로마서 7:7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등불과 같다. 우리집 응접실에는 오래된 장롱이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다. 서랍이 열리고 햇빛이 비치기 전까지 이 장롱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하다. 햇빛은 수년간 써서 닳은 장난감의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낸다. 빛이 장롱 속 숨겨진 장난감의 본질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삶을 향해 비추는 말씀도 같은 역할을 한다.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보낼 때면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언제나 내 속에 숨은 문제를 보게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표준을 보게 되고 도저히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나의 완전한 무능함을 본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나의 죄를 상기함으로 나는 온전히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린다나는 정기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는 내 정신을 새롭게 만든다. 잠은 육신을 새롭게 한다. 친구와 수다를 떨며 큰소리로 웃는 것은 내 감정을 새롭게 만든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능력만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시편 119:50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성경 전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이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성취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등 그분이 약속하신 모든 열매로 채우신다(갈 5:22-23).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주신 책을 열어 오로지 그분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을 살리는 그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라. 분명한 것은 경건의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으며 지금까지 내가 나열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율법주의적 동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는 않는다. 동기는 중요하다. 왜 하는지는 무엇을 하는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 진 빚을 갚으려고 지불하는 게 기도가 아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게 하려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 건 아니다.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지는 경건의 시간이 하나님께 잘 보이고 싶은 수준으로 전락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당신이 갖는 경건의 시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동기가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잘못된 이유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당신의 영적 기쁨을 빼앗아 가는 부담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오늘 하루 왜 경건의 시간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라.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임을 생각하라.원제: The Importance of Our Devotional Lives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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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기도
왜 교회서도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야 하는가
by R. C. Sproul
2019-10-26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시는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모세에게 맡겨진 임무는 곧 바로를 찾아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부하신 또 다른 임무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백성에게 찾아가 역사상 가장 큰 탈출을 준비하라고 명해야 했다. 곧 바로의 통치와 권위에 대항하여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로 나아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산에서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 이로써 출애굽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여기서 모세의 임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수십 년 간 광야에서 양을 치며 세월을 보내다가 노인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인 바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으니,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애굽의 전차나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리라!” 모세가 이러한 말을 전해야 했던 백성은 도대체 어떤 노예였던가. 출애굽기 4장을 보면, 그 백성에 대한 모세의 걱정이 잘 기술되어 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표적을 그에게 나타내셨다.이 장면에서 모세는 사실상 변증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이치에 맞는 방법으로 설명해야 하듯, 모세는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확신할 수 있게끔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내부자를 위한 변증인데,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대로 하여 그분의 말씀이 지닌 진실성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설득시키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변증의 사명, 즉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사명에는 최소한 세 가지 목표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그중 두 가지 목표에 대해서는 익숙하리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목표는, 기독교의 이성적 토대를 약화시키려 하거나 또는 다른 철학이나 종교의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려는 자들에게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그 당시 대중적인 철학 사상이었던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에 속한 사람들을 상대로 시도했던 변증이 그런 목표를 가졌다. 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과 같은 교회 역사의 초창기 변증가들 역시 로마 황제에게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려는 목적으로 편지를 쓰며 그런 성격의 변증을 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신들을 거부하며 그에 대한 경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 무신론자라는 거짓된 비난을 받거나 (이교도들이 성만찬 의식을 오해하여)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그릇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변증을 하는 두 번째 목표는, 세속 문화에서 형성된 지성적인 우상들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때의 변증은 다른 신념이나 세계관에 자리한 모순과 오류를 지적하며 공격적인 접근을 취하게 된다.그리고 변증의 세 번째 목표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성도를 격려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다. 모세가 처음에 가졌던 우려가 바로 이와 같은 변증과 관련이 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이런 생각이 그와 같은 변증을 가져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변증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개인적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3년의 기간이 있다. 바로 신학교에 다녔던 시절이다. 그 이유는 당시 열렬한 신앙인이었던 나와 달리 그 신학교에는 불신앙적인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매일 교수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서슴지 않고 공격하곤 했다. 어느 교수는 우리 클래스의 한 학생을 맹비난했는데, 다름 아니라 그 학생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같은 전제를 너무 많이 받아들인 상태에서 신학교에 들어왔다는 게 이유였다. 또 다른 교수는 어떤 학생이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자 그를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대속 교리에 관해 설교하는가!” 이처럼 그 시절에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적개심이 만연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나를 낙담시켰다. 학교에서는 온갖 종류의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나는 그러한 비판자들의 공격 이면에 있는 철학적인 전제를 이해하면서도, 그 수많은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직관적으로는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틀리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다.그 당시 미국 전역에서 역사적 개혁신학에 충실한 입장을 견지하는 주요 신학교는 단 한군데였다. 바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면,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의 책을 읽곤 했다. 예를 들어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존 머레이(John Murray), 에드 스톤하우스(Ed Stonehouse),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의 글을 읽었다. 그러자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그들로부터 얻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나보다 깊어 내가 답변하지 못하는 회의적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들을 하나님이 많이 일으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수년 전에 리고니어(the Ligonier) 단체의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추진하는 변증의 내용을 접하는 모든 신앙인들이 그 세부적인 내용까지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며 기독교의 신뢰성을 보여주게 된다면, 교회 안에 있는 그들은 회의주의의 목소리가 자신들을 둘러싸며 엄습해 올 때 그로 인해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의 학생들 가운데 심지어 ‘기독교’ 기관이라고 불리는 대학에 들어갔다가 신앙의 위기를 맞은 경우들이 있다. 그들은 거의 가까스로 신앙을 연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조롱을 받거나 비웃음을 사며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을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변증의 사명을 감당하며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사역을 해야 한다. 또 비단 그런 학생들만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변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거두어 갈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신앙이 무력해질 때까지 우리를 두렵게 하여 이전과 같이 담대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전문적인 변증학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어도, 변증의 논점들을 공부하여 자신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할 소명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ost Valuable Aim of Apologetics번역: 장성우
복음
변증
기독교신앙
모세
바울
출애굽기3장
사도행전17장
개혁신학
리고니어
육신의 가족? 영적 가족!
by Harriet Connor
2019-10-25
지난 주일, 축도가 끝난 뒤 목사님이 캐시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두 주 전 캐시의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캐시는 그날 할아버지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할아버지가 잘 회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캐시는 할아버지를 매주 교회에 모시고 온다. 그녀는 걸을 때 할아버지의 팔을 부축하고, 앉고 일어나시는 것을 도우며, 예배 중 어떤 순서인지 할아버지에게 알려 드린다. 캐시의 헌신은 우리 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은 이제 캐시의 할아버지와 교회에 다른 노령의 성도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캐시가 피아노를 치는 주일에는 다른 사람들이 할아버지에게 어떤 찬송을 부르는지 찾아 드린다. 어떤 노인이 일어나는 데 힘들어하신다면,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팔을 빌려드린다.당신의 가족은 누구인가?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를 우리의 ‘첫 번째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 속할 수 있는 자격을 새롭게 하셨다. 이제 어느 누구든 혈통이 아니라 예수 안의 믿음으로 그 가족에 들어갈 수 있다(요 1:12-13; 갈 3:6-9). 하나님의 가족은 아이를 낳음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통해 커지고 있다(마 28:19-20). 따라서 배우자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가족 안에서 존중받는 자리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마 19:1-12; 고전 7:32-35).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과 영의 가족 사이 충성심에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 대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다(눅 14:26). 만약 우리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혼자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 남는 것이 육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 혹은 기쁘게 하기 위해 떠나는 것보다 낫다.그렇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분명히 이 땅의 가족들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따라 사람들에게 결혼 생활에 충실하며(마 19:1-19), 부모님을 공경하라고(막 7:9-13) 가르치셨다. 사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갖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고전 7:8-9; 딤전 5:14). 그들은 여전히 남편과 아내이고, 부모와 자녀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교회와 가족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하였다.가족: 본보기육신의 가족 관계는 하나님의 가족 관계의 본보기가 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선언하셨을 때, 예수님은 잘 알려진 관계의 범주를 사용하셨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딤전 5:1-2)라고 권하였다. 우리는 그런 여러 가족 관계의 역동성을 이해해야만 누군가를 우리의 형제, 자매, 어머니 또는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성경 시대에 가족이란 개인적인 애정의 안식처 그 이상으로, 세대를 아우르는 생산적인 단위였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y)는 그녀의 책 ‘네 공동체를 사랑하라’(Love Thy Body)에서 이렇게 설명한다.산업 혁명 이전, 집이란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병자와 노인을 보살피며, 가업을 운영하고, 고객과 공동체에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잉여금을 만드는 장소였다. 집은 보다 더 넓은 사회와 접촉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집”(딤전 3:15)에 속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예수님의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나누는 가업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가족: 학교내가 어린이 사역을 위해 받은 제일 실용적인 훈련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버지가 되는 것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데 좋은 훈련이 되고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딤전 3:5).집에서 매일 일어나는 상호 작용은 분명한 의사소통을 하고, 듣고 공감하며, 현실적인 기대치를 설정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실망스런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도우며, 갈등을 해결하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과 같은 대인 관계 기술을 연습하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가정생활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가족: 돌봄의 네트워크교회는 개인들을 모으는 것 외에도 가족들을 한데로 모은다. 그리고 평범한 상황에서 우리의 가족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보살핌을 제공하는 주된 원천이 될 것이다.초대 교회는 과부들이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만약 어느 과부에게 자녀들이나 손주들이 있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족을 돌봄으로써 그들의 종교를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4, 8).교회의 성도로서 우리에게도 보살핌의 책임은 여전히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보살필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고, 자녀들은 그들의 나이든 부모와 조부모를 돌볼 궁극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유대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가족: 사명의 기반처음에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가정집에서 모였다. 가정들은 사명의 기반이었다. 가족 전체가 함께 복음을 듣고, 믿고, 그리고 전파했다(행 16:30-34; 롬 16:10-15).집은 여전히 교회의 사명 중 많은 부분이 일어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상대방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가까운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곳이다. 집은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길을 배우는 곳이다.기독교 가정들은 중심은 강하지만 가장자리는 유연해야한다. 가정 안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노인과 젊은 세대 사이의 강한 관계는 그 사랑의 공동체가 외부인을 포함할 만큼 확장되도록 돕는다.신학자 앨러스터 로버츠 (Alastair Roberts)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있어 “가족”이라는 말은, 교회가 육신의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크게 의존한다.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것은 보통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는 가정들이다. 그것은 교회가 대가족으로서 기능하도록 수용력을 준다.우리의 교회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복음을 우선시하도록 부름으로써 더욱 강해질 것이다. 교회: 새로운 가족?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우리의 가족을 대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복음이 우리 가족 관계의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이 새로운 우선순위들은 교회를 강화할 것이다.청소년 때에 나는 혼자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왔다. 나머지 가족이 집에 남아 있을 때 나는 스스로 교회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나를 반겨 주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랑의 영적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육신의 가족 안에서 자매였고, 딸이었으며, 또한 손녀였다.나의 가족은 지금도 주일마다 내가 교회에 갈 때면 집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혼자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로 나를 축복하셨다. 그리고 기도하기는, 하나님이 어느 날 나에게도, 영적 가족이든 육신의 가족이든, 나의 늙어 가는 팔을 부축해 교회로 갈 캐시 같은 손녀를 주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uclear Family or Church Family? Yes번역: 허예송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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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돌봄
사명
교회
캐시
헌신
낸시
피할 수 없는 비판, 어떻게 대처할까?
by Guy M. Richard
2019-10-24
리더십을 맡아 섬겨 본 자라면, 죽음과 세금만이 인생에서 불가피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적어도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비판’이다. 리더십에는 비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리더십의 역할이 공적일수록, 비판도 잦아지고 불공평해지며 그만큼 더 불쾌해진다. 그러나 결국 전장에서 적군이 퍼붓는 공격을 감당하며 그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더라도 진격을 해야 할 책임은 지휘자에게 있다.이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답변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비판을 다 피하면서 주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그분을 신실하게 섬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비판에 대비할 수 있을까?’이다. 그래야만 비판이 찾아왔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 어떻게 그 공격이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지를 알고 준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지 그 힌트를 다음 구절에서 얻게 되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전 7:21-22).첫 번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듣는 비판 중에 어떤 내용은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거짓된 비난과 악의를 담고 있는 험담이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런 비판은 한시도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이는 거짓된 비난에 아무 대꾸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사역의 진정성을 지키고 리더십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비난에 대응해야 할 때도 있다. 사도 바울도 가끔씩 그렇게 대응했다. 특히 고린도후서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그동안 신실하게 수행했던 사역이 자칭 사도라고 높이는 사람들의 험담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그는 분명하게 대응했다(고후 11:5-6; 12:11). 그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자신의 사역을 변호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된 비난이 우리에게 쏟아질 때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런 비방을 굳이 마음에 담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런 비방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넘어뜨리게 하고 내면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집어삼키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우리는 그런 말을 무시하며 전혀 듣지도 않는 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비판이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라는 데 있다. 적어도 일부분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비판을 대할 때조차,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비판도 그리 건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그런 비판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기보다, 또 그리하여 당사자를 세워 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단순히 그 사람을 공격하려는 마음에서 행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상대의 흠을 지적하려는 태도와 무례한 말투로 표현되곤 한다. 물론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그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표현되는 비판 정신과 거친 말투까지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다.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강의안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에서 전도서 7장 21-22절에 대한 매우 유익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 제목은 ‘감긴 눈과 닫힌 귀’(The Blind Eye and the Deaf Ear)이다. 거기서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의 귀를 닫고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비난과 해로운 비판이 주어질 때는 그 내용을 듣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에게는, 아니 최소한 그 파괴적인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감긴 눈’과 ‘닫힌 귀’로 대응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처를 아예 받지 않고자 사람들을 피해 홀로 고립된 상태에 처하거나 또는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잘못된 방법으로 그 비판에 대처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두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역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비판에 담겨진 파괴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그 내용을 마음에 두지 않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스펄전이 말한 ‘감긴 눈’과 ‘닫힌 귀’를 갖추어 그런 비판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두 번째로 전도서 7장 본문은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22절은 우리 각자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별로 유익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타인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을 받을 때, 우리 역시 그런 자세로 타인을 대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갖지 않는다면, 비판을 받을 때 함께 비판하고 상처를 받은 대로 상처를 돌려주며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될 말까지 쏟아 놓으며 화를 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비판한 그 사람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위험까지 감수하게 된다. 심지어는 우리의 직장이나 리더십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훌륭한 리더라면, 작은 싸움에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세 번째로 이 본문은 모든 비판에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비판이 얼마나 과장되고 가혹하게 들리든, 거기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짓된 비방이나 악의가 서린 험담은 예외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감긴 눈’과 ‘닫힌 귀’로 응수하며 무시해야 할 내용이 많은 비판에도 우리가 새겨들으며 마음에 담아야 할 교훈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스펄전은 그와 같은 비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지는 칭찬보다 ‘훨씬 더 커다란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내뱉는 칭찬은 우리를 자기만족에 빠뜨리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비판은 그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분명 우리 모두에게는 칭찬이 필요하다. 가령 우리의 리더십과 그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우리의 노력이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 주며 격려하는 칭찬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과한 격려나 무분별한 칭찬은 오히려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너무 과한 비판도 좋지 않다. 그런 비판은 우리의 마음을 쇠약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에 대해 골몰하게 만든다. 우리에게는 격려와 비판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정도와 빈도가 알맞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 간구하도록 하자. 비판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려를 받게 해달라고, 그리하여 비판이 찾아올 때 그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간직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비판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to Handle Criticism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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