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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음악보다 좋은 이유
by Bob Kauflin
2020-07-26
내 기억으로는, 여섯 살에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대학에서는 피아노 연주로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로는 8년 동안 전임 사역자로 찬양대를 이끌기도 했다.그러다가 1984년에 그 찬양대를 떠났다. 그러고 나서 근 40년 동안 음악을 작곡하고 편집하며 예배 인도자로 섬겼다. 지금도 내 스마트폰 앱에는 온갖 종류의 음악이 대기 중이다. 팝, 클래식, 재즈, 록, 가스펠, 랩, 포크송, 컨트리, 인디, 합창, 오케스트라 음악 등.이렇듯이, 음악은 내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음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음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 선물은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위로하며 공감대를 형성하여 함께 사역하도록 만든다. 또 힘든 시절에는 피난처가 되어 우리를 격려해 주고, 마음속에 자리한 정서를 대신 표현하며 깊은 감동을 끼칠 뿐 아니라, 때로는 말로 드러낼 수 없는 의미까지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특별히 교회에서 음악을 들을 때면 내 안에 감사가 솟구친다. 교회 음악이 늘 장엄하고 숭고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회중과 같이 노래하며 감격하다 보면 눈물까지 흐르곤 하는데,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다 셀 수도 없다. 우리가 함께 모여 노래할 때 성령께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엡 5:18-19).우리가 다 고민하는 문제그런데 음악을 사랑하는 만큼, 가끔씩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과 진리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이 서로 헷갈릴 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6세기 전에 활동한 어거스틴도 ‘고백록’(Confessions)에서 비슷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노래하는 일 또는 타인의 노래를 듣는 일 모두가 정말로 유익하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음악이 연약한 심령에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혹 음악이 전달하는 진리가 아닌 음악 자체에 더 깊은 감동을 받는다면, 이는 심각한 죄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때는 그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이 낫다.”어거스틴과 같은 영적 거인도 음악이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면, 우리 역시 그런 문제를 피할 수는 없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음악에 더 깊은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이를 “심각한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바울은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골 3:16). 우리는 음악의 여운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인 예술성, 음량, 기술, 탁월한 연주, 또는 단순한 ‘분위기’가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우리가 흔히 ‘복음’이라고 일컫는 메시지를 가리킨다. 물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 죄를 대신해 형벌을 치르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로운 백성이 되어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가 함께 모여 찬양할 때 바로 그 진리가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예수님이 음악보다 좋은 이유그런데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음악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마음의 주변부로 쉽게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우상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과연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위험을 암시해 주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ㆍ음악의 가사보다 곡조나 악기 연주에 정서적으로 깊이 반응한다.ㆍ주일 예배 때 찬양하는 일이 종종 지루하게 느껴진다.ㆍ찬양의 고백보다 찬양이 자아내는 느낌에 더 많이 신경 쓴다.ㆍ실제로는 아무 생각 없이 찬양하는 일이 흔하다.ㆍ좋아하는 음악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어렵다.혹시 이 중 한 가지라도 당신에게 해당된다면, 당신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음악도 좋지만, 예수님이 음악보다 더 좋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여기에 다섯 가지 이유를 소개해 보겠다.1. 선물보다 선물을 주는 이가 좋기 때문이다언젠가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근사한 저녁 식사를 손수 준비해 아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때 아내가 보인 반응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곧 주방에 차려진 음식을 보자마자 달려가서는 식탁을 끌어안고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거기에 입까지 맞추면서 연거푸 이렇게 말했다. “오 사랑하는 식탁아,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잠시 농담을 했다. 아내는 식탁이 아니라 나한테 그렇게 반응했다. 우리가 음악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말하려 했을 뿐이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8). 예수님과 비교한다면, 그 어떤 음악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분명 선물보다 선물을 주는 이를 알고 사랑하는 게 훨씬 더 좋은 법이다.2. 잠깐의 위로보다 영원한 위로가 더 좋기 때문이다인생에서 시련이나 아픔 또는 상실을 경험했을 때, 위로 받기 위해 좋아하는 음악이나 아티스트를 찾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하지만 음악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지속적이고 근본적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위로를 주실 수 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누가 우리를 위로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로하신다.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시는가?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노래하며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예수님과 더 선명하고 깊이 있고 진실한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음악은 잘못된 방향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3. 진리를 가리키는 음악보다 진리 자체가 더 좋기 때문이다아름다운 화음과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소리의 배열과 강약과 구성 등이 함께 어우러진 음악은 우리에게 신선한 동기와 감동을 전해 준다. 그리고 인생에서 큰 시련을 당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기운을 차리게 하거나 잠잠한 마음을 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그러나 음악이 그 자체로 “죄 없으신 구원자가 죽으사 죄로 물든 내 영혼 자유를 얻었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또 어떤 선율도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은 영원하니 내 영혼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할 수도 없다. 음악 자체는 우리의 믿음이 뿌리내리고 있는 굳건한 사실, 그 영원한 진리를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직 살아계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4. 연합에 대한 느낌보다 실제 연합이 더 좋기 때문이다회중과 하나 되어 목청껏 찬양하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모든 성도가 다 아는 가사로 함께 노래하며 누구도 딴 데 정신을 팔지 않고 하나가 된 그 느낌은 심히 감동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지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 되게 하신 그 연합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엡 2:14-15).물론 다른 지체들과 함께 노래하는 일은 콘서트장이나 스타디움 또는 노래방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우리가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예수님보다 음악 자체를 즐거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5.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ㆍ음악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를 수도 없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사탄을 무찌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실패한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다.ㆍ음악은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고, 그 즐거움을 누리고 계신다.이처럼 예수님이 좋은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그분보다 음악을 더 좋아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온전한 즐거움을 향하여그렇다면 음악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우리는 찬양에 동반되는 음악적 요소보다 우리가 노래하는 가사에 더 집중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낙담되거나 염려에 사로잡힐 때, 헤드폰을 쓰고 음악에 자신을 맡기기보다 성경을 펴고 시편의 고백을 깊이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운전할 때나 기도할 때, 아니면 성경을 암송할 때도 굳이 음악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어떤 단계를 밟아 가며 노력하든, 그런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격려한다.“만일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의 친구이자 상급으로 여긴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그분께 영원히 속하여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는 온전한 즐거움을 그분과의 관계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도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거룩한 즐거움에 대한 영혼의 목마름은 그때서야 온전히 채워질 수 있다. 아가 5장 1절의 초청과 같이, 그리스도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누릴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이 행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며, 그 무엇도 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이상 누리지 않아도 될 만큼 다 누릴 수가 없다. 영원히 그럴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그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본래의 목적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시 34:8). 그분이 허락하신 그 어떤 선물보다 그분 자신이 더 좋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od Music Can Become Your God: Five Reasons Jesus Is Better번역: 장성우
영성
예배
음악
선물
어거스틴
우상
위로
조나단에드워즈
개인 구원의 복음을 위한 옹호
by 김선일
2020-07-25
내가 즐겨 찾는 저자이자 신약학자인 스콧 맥나이트(Scott McKnight)는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복음이라는 단어가 ‘개인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납치되었다고 본다. 복음 그 자체는 ‘결정’을 용이하게 내리기 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The King Jesus Gospel, 26 - ‘예수 왕의 복음’) 나는 맥나이트의 진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한다. 그 책의 전반에서 전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성경의 복음이 우리 구원의 기초라는 논지에도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개인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 요소가 하나님 나라라는 어젠다의 유행에 의해 가려지는 역설적인 현상을 근래에 종종 보고 있다. 교회에서 그동안 개인 구원과 죄 용서의 복음을 편향적으로 강조하다 보니, 복음이 너무 개인주의적이 되어 신약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약화되었다는 주장이 점점 더 득세하고 있는 듯하다. 이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함몰됐으며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칫 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엄청난 잠재력을 간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개인 구원, 이신칭의, 죄 관리의 복음이 진정 문제인가? 개인 구원과 더불어 최근에 문제 제기의 대상이 된 교리 중에는 이신칭의도 있다. 물론 이신칭의가 종교개혁 교리의 핵심임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복음을 지나치게 대표하지 않느냐는 의문으로 보인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이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믿음에 합당한 삶의 변화 없이도 자동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확보한다는 천박한 풍조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은 늘 제기되어왔다. 또는 기독교 복음이 죄 관리의 복음으로 전락했다는 지적도 있다(달라스 윌라드).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죄를 용서받아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때로 자기 위안적인 메시지로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어린 아이를 유괴 살인한 자가 자신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 받았다고 뻔뻔하게 진술하는 것이 아마 이러한 죄 관리 복음의 가장 큰 폐해 사례일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전통적 교리들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은 개인의 욕망과 문화적 편견으로 인해 뒤틀리고 왜곡된 것이다. 만약 복음의 개인화(privatization)가 문제가 되어 그런 문제점들이 발생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복음의 공공화(publicization)도 복음을 왜곡하거나 축소할 위험을 내포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위험성은 어떤 경우에나 존재한다. 기우일 수 있으나, 공공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자칫 이 세상의 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더욱 높은 가치로 삼을 수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무관한 엘리트주의나 심지어 인간의 공적주의로 흐를 위험이 도사린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개인 구원이 유보되거나 극복되어야할 구습으로 간주되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참여할 근본적 잠재력을 앗아갈 수 있다. 충분하지 않았던 개인 구원의 복음평생을 산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구조해 온 한 전문 산악인은 사람들이 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사람들이 산길이 낯설거나 지도나 나침반을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고 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산에서 길을 잃는 가장 큰 이유는 충분히 올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제가 알려주는 대로 충분히 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개인 구원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구원, 즉 사회 구원으로 이동해야 하는 게 아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덧입혀져야 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개인 구원의 복음, 이신칭의의 복음, 죄 용서의 복음,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더 깊이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라는 문맥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새창조의 비전과 사명에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한국 교회가 시급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죄 용서의 복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근본적 죄성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더욱 처절하게 직시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된다. 인간은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로 오염된 성정과 욕망으로 죄악된 구조를 양산한다. 공적으로는 정의와 덕을 부르짖어도, 사적으로는 이기심과 인정 욕구가 자신의 동기를 지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은 지금도 존속하는 인격적 영향력으로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고 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고, 그와 연합을 이루는 삶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이고, 공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들어설 수 없다. 개인 구원의 더 깊은 발견 진보적 신학자인 강남순은 기독교 신앙의 지구적 연대성을 강조하면서도 개별 존재의 중요성을 멋진 말로 표현한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거창한 집으로부터가 아니라,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얼굴을 지닌 개별적 인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개별적 인간 한 사람의 존엄성을 어디로부터 찾아야 할 것인가? 나는 성경에서 개인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를 발견한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신적 존재인 군주의 소유물이거나 노예로 취급받던 고대 근동사회에서 구약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선언하며 다양한 약자보호법을 선호했다. 황제를 신격화했던 로마의 전제군주 시대에 신약성경은 공적 권력의 근처에도 갈 수 없던 노예와 여성 등의 평범한 개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같은 족속이자 제사장이라 불렀다(벧전21:9). 복음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무리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관심은 종종 지나치기 쉬운 한 개별 존재에게 집중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군중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혈루증 앓던 여인, 딸을 위해 극한의 낮아짐을 개의치 않았던 수로보니게 여인, 이방인에게 부역하며 유대인과 어울릴 수 없었던 세리 삭개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기독교는 단지 이처럼 소외된 개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애적 모본을 따르라는 규범을 제시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를 본받기에 앞서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며 그와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자존감의 근거를 찾는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갈2:20). 하나님 나라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일을 감당하기엔 자격도, 능력도 없으며, 항상 죄악된 본성과 유혹에 시달리며 넘어지고 좌절하는 나로 하여금 그 나라의 소망에 동참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때문이다. 더 이상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고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연연하지 않아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자존감과 정체성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깊은 구원의 메시지가 되고 있는가!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는 자야 말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품어주는 그 큰 사랑, 나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는 대영제국에서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시킨, 하나님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의 귀감을 자주 이야기한다. 그 윌버포스의 은사였던 존 뉴튼은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개하고 돌아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작사한 장본인이었고, 이 찬양을 가장 아름답고 은혜롭게 불렀던 윌버포스는 평생에 걸쳐 근대에 가장 숭고한 인권의 위업을 이룩했다. 뉴튼이 임종을 앞두고 전한 “비록 내 기억이 희미해지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지독한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했던 고백은 세상을 위한 모든 헌신과 사역에서 날마다 상기되어야 할 교훈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정의와 긍휼, 희생과 봉사의 삶은 더욱 필요하다. 대 사회적 이미지도 중요하고, 공공적 책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출발점은 한 개인의 삶을 근본으로부터 변혁시키는 강력한 은혜의 대속적 복음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한 준거점도 대속적 복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그의 왕국에 동참하도록 강권하시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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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읽어야 할 다섯 권의 소설
by Leland Ryken
2020-07-24
기독교인에게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학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약 20년 전에 글을 쓴 로마 작가 호라티우스(Horace)는 시간을 뛰어넘는 문학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기준을 남겼다. 그 후 후대 작가들은 흔히 지혜와 기쁨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여 문학이 가진 기능과 보상이라는, 호라티우스의 기준을 묘사해왔다.나 역시 이 두 가지 기준에 근거해서 문학 작품을 읽고 또 읽는다. 성장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종종 즐거움까지 따라오곤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깨달음을 주는 확실한 재미를 제공할 작품을 찾아서 읽기도 하는데, 그러다보면 또 성장이라는 부산물이 따라온다.성장과 즐거움이라는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삼아, 내가 생각할 때 어느 기독교인에게 권해도 좋은 다섯 권의 소설이 여기 있다.1.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읽다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서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이야말로 독자가 이야기 속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는 액션, 갈등, 배경과 성격 묘사, 그리고 서스펜스까지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누구나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이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으로 빠져들어간다. 나는 이 책보다 영국 땅과 영국 사람에 대해 제대로 소개한 책을 여태 만나지 못했다. 반짝거리는 문체 스타일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머는 실로 탁월하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적 지향점은 다름 아니라 가식과 반대되는 성실함, 동정심, 충성심, 자족함, 그리고 평범한 삶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같은 미덕을 고양시키는 기독교인이다. 2.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이 책은 말 그대로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또한 기독교 고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속적인 학교 교실에서 워낙 잘못 소개되는 바람에 이 책이 가진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죄책감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열쇠는 호손이 제시하는 세 가지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청교도 행동주의와 낭만주의 세계관 사이의 싸움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싸움에서 로맨틱 여주인공인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세 번째 세계관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진정한 청교도 정신, 또는 기독교 세계관이다.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 만나는 딤즈데일(Dimmesdale) 목사의 구원 달성은 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클라이맥스 장면 중 하나다. 호손은 실로 스타일의 대가다. 묘사와 상징 그리고 인물 묘사는 가히 탁월한 수준이다. 3.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 이 책은 긴 소설이 두려운 독자에게 알맞다. 약 60페이지로 중편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픽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철저한 기독교적(Christian) 작품이 될 수 있는 지 놀라울 따름이다. 스토리는 평범한 인물인 주인공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화자는 이반의 삶이 “가장 평범했고 그렇기에 가장 끔찍했다”라고 말한다. 이반이 살고 있는 사회가 지향하는 얄팍한 가치(이반 또한 그런 얄팍한 가치에 기대서 살다가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이끈, 그의 삶 전체를 바꾸는 사고를 만나게 된다)에 대한 묘사는 현대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다.이 책은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면에서 성경에 버금갈 만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 삶에 대한 냉철한 고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결국 끝에 이르러서, '주홍글씨' 속 개종 장면과 비슷한 방식으로 주인공은 구원을 얻는다.4. 보 기에르츠(Bo Giertz)의 '신의 망치'(The Hammer of God) 이 책은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기독교 소설이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스웨덴 루터교 교회의 저명한 성직자다. 3부작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간 동안 시골에 있는 같은 교구에서 사역하는 세 명의 목사들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의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각 소설은 첫 목회 현장에서 2-3년을 지내는 동안 그들이 경험하는 영적 회심을 추적한다. 주인공은 하나같이 막 신학 훈련을 마치고 사역지에 도착한,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 이름만 기독교인인 목사들이다. 이 책은 크게 볼 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명의 젊은 목사가 영적 순례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성숙하는 과정”이 하나고, 나머지는 스웨덴 어느 시골 교구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에피소드다. 내용과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가장 깊은 영적 현실을 복음주의 시각으로 따뜻하게 묘사하고 있다. 5.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방인'(The Stranger)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학과 비기독교 문학이 여러 면에서 모두 훌륭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더라도, 나는 비기독교 소설에서보다는 기독교 소설에서 얻는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기독교 소설이라도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라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방인이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 혐의를 받고 유죄 판결까지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의 스타일은 읽는 내내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실존주의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삶의 한 관점인데, 왜냐하면 우리 문화 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배경은 무엇보다 저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당시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가를 주셨다우리가 읽는 소설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까? 물론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을 잘 활용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은 여가를 잘 보내는 것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소명을 실천하는 시간임을 깨닫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여가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장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여가 시간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Novels Christians Should Rea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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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주일의 참된 의미
by 장대선
2020-07-23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함으로 말미암아 방역이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로막는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내에서는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입장과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일시적으로 폐하고 각자 온라인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 세대 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치명적인 위협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무엇보다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전염병 문제는, 주일예배와 관련된 신앙 전반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주의 날에 교회당에 온 회중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일시적으로라도 불가능하거나 곤란하게 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공적으로 예배해야 하며 어떻게 온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 위치한 주일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믿음의 유산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였던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그의 교리문답 ‘안식일의 거룩하게 함’(the sabbaths sanctification, 1641)을 통해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해준다.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주님은 안식일 규정과 관련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사람이 편리한대로 모든 것들을 다 행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수단으로 사람이 거룩하게 되며, 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주님은 모세의 자리(율법의 자리)에 서서 율법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도록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 보이셨다. 앞서 3절에서 주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율법의 가르침]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로마서 2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그런즉 율법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이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할 때,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한 개혁된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의 신앙은 전혀 개혁된 바 없이 여기저기 분란만 일으키는 사변적이고 문제투성이인 개혁자가 된다. 즉,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율법의 거룩함과 의가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선후 관계를 크게 오해한 자들이었다.한편,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을 안식일을 범하는 자로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7문답)에서 “그것들(봉사의 일들)이 경건의 의무들(예배의 의무들)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안식일에 봉사의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일이] 틀어지든지 간에, 반드시 교회당에 가야만 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엄격하게 속박하지는 않으십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라는 구절은,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암시합니다.”라고 가르쳤다.사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믿음을 보이고 율법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로서의 주일을 거룩히 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자칫 그처럼 생각할 수가 있다. 특히 주일에 행하는 공적인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마일리지를 적립이라도 하는 듯이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로부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사(예배)나 율법을 준행하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우리가 제사와 율법을 준행할 때 오히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를 행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율법과 제사가 전부 다 사실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인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따라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 결과 실제적으로 이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우리 자신과 이웃인 것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 즉 예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도록 섭리하셔서 우리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일하시기도 한다.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해와 우리의 타락한 습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는 말씀을 곧장 우리의 영적인 나태와 방종의 근거로 삼아버리려는 것이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서 다윗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유는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 규례에서 용인되는 경우는 사실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마 12:11) 것이 당연한 이유는, 속히 꺼내지 않으면 양이 죽거나 다쳐서 적잖은 피해를 입기 때문이라는 불가피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윌리엄 구지는 주일성수 교리문답(38문답)에서 “그것들이 경건의 의무를 방해한다 할지라도 수행해야 할 그러한 봉사의 일들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뒤, 답하기를 “보잘 것 없을지라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필요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와 관계됩니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일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심각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의 일들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나 재해들, 혹은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로 말미암아 때때로 우리는 예배와 경건의 일을 수행하는 데 심각한 방해를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는 이미 분명하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때로 하나님께서 제사, 즉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경건의 의무들을 바라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도들이 신앙과 주일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오해를 하여 이 상황에 성경적으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주일에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공적인 행사들에 참여하는 것 외에 각자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모습인지에 대한 이해나 훈련이 거의 전무한 것이 현실 아닌가?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1641년에 윌리엄 구지가 작성한 이 문답들이 영적인 ‘백신’과 ‘치료제’를 제공하고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봉사의 일들’과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일들, 예배당을 향하기 전과 예배당에서 돌아온 후 가정과 개인으로서 행하는 예배와 경건의 묵상, 그리고 기도 가운데서도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와 기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정은 과연 얼마나 온전히 서 있는가? 이제 교회는 신자들을 모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흩어져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는 성도들로 양육하고 훈련하는 데 진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수고해야 할 자들이 바로 장로들이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들의 열심만이 아니라, 다스리는 장로인 ‘치리장로’들이 성도들을 진실하게 돌아보는 본래의 직무수행 없이는, 각자 흩어진 가정에서도 주일을 거룩히 하도록 살피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했던 주일예배의 정의를 성경적으로 재정립하고,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경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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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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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by 이춘성
2020-07-22
타임(Time)지가 선정한 2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며, 20세기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을 대표했던 신학자 패커(J. I. Packer)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서의 그의 사명을 다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니며 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해 신앙의 깊이를 다졌던 나와 같은 X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성경과 세상을 보는 바른 관점을 형성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신학자이자 설교자들이었다. 특별히 이 세 명은 영국의 복음주의의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 둘은 현직 목회자와 설교자였지만 패커는 영국 버밍햄(Birmingham)에서의 3년간의 짧은 목회 기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역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자와 교회의 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였다. 특별히 그가 캐나다로 건너가 몸담았던 리젠트칼리지(Regent College)는 복음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역자를 길러내는 데 크게 기여한 곳이었다.패커는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단독 저자로 쓴 단행본만 26권 이상이며, 공저자로 참여한 책들과 단편 논문 등을 합하면, 그의 저술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앞에서 언급된 그의 동료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가 설교단과 목회 현장, 선교지에서 목소리를 통하여 영국과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면, 패커는 그의 낡은 수동 타자기를 통해 쉴 새 없이 생산했던 글과 책으로써 대화하였다. 그가 쓴 청교도 저작에 관한 연구들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와 실천, 예를 들어 ‘삼위일체’, ‘성경관’, ‘십계명’, ‘기도’ 등에 관한 책들은 그만의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로 읽는 이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그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 세계적으로 백만 부 이상 팔린 금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교적 패커의 초기작이지만 다른 어떤 책들보다 영향력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은 후 “패커가 다루고 있는 진리는 가슴에 불을 붙인다. 적어도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할 뿐 아니라, 돌아서서 경배드리고 기도하게끔 강권하는 힘이 있다.”고 극찬하였다. 패커의 대표 저작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앎에 대해 깨닫게 만들었다.이 책이 세상에 나온 1973년은 1968년에서 1972년에 완성된 프란시스 쉐퍼의 3부작(Francis A. Schaeffer Trilogy)으로 알려진 ‘존재하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이성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Reason),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 완성된 바로 그 다음 해였다. 쉐퍼는 그의 책에서 당시 서구 유럽 사회에서 내용 없이 종교적인 구호로 불렸던 ‘십자가’, ‘예수’, ‘하나님’ 등의 공허한 단어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적 용어들에 익숙하여 성령,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이 누구이며, 역사 속에서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이것들이 풍기는 이미지와 자신의 실존에 미치는 의미에만 집착하였다. 쉐퍼는 당시 교회 안에 만연한 이러한 신앙의 피상성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하였다.패커도 쉐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쉐퍼가 현대 사회의 세속적 문화와 사조에 물든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였다면, 패커는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화석화 된 기독교 교리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패커는 그의 책을 통해 지금도 유효하고 중요한 질문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했을 때의 앎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인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통한 앎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앎의 대상인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것을 통해 더 깊이 알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패커의 설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앎이 샤머니즘과 같은 신에 의한 일방적인 신탁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화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라는 의미다. 이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오래된 신화나 박물관의 화석이 아니라 창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이라는 사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 패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떠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나에게도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의도에 따라서 지금도 바르게 작동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매년 한 번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기로 다짐하였고, 실천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의 신앙을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칫 기독교와 교회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변하여, 감동 없이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나에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패커는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보물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처럼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메가폰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생전에 패커는 그를 영적으로 각성시킨 청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매년 한 번씩 읽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두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2016년 이후, 그는 더이상 ‘천로역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천로역정’을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의 몸 구석구석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패커에게 ‘천로역정’이 있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방법이 여럿이겠지만, 나는 그가 남긴 위대한 선물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책장에서 꺼내어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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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아는지식
존스토트
로이드존스
프란시스쉐퍼
인격적인지식
천로역정
제임스 패커로부터 얻은 세 가지 유익
by 고상섭
2020-07-21
J.I.패커 목사님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몇 년 전,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천국을 매일 묵상한다는 인터뷰를 보면서 임종의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의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패커라는 소중한 신학자 겸 목회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슬픔도 있었지만, 영적 거장들이 즐비했던 한 세대가 끝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젊은 시절 신앙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다. 조금은 이단같은 기도원에서 신앙을 시작했고, 또 잘못된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을 했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늘 혼란스러웠다. 그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좋은 신앙의 선배들이 쓴 저서들을 만났다. 존 스토트,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R.C.스프로울과 같은 영적 거장들의 책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동시대를 살고 있던 그분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것을 경험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J.I. 패커의 소식은 그렇게 한 시대를 함께 했던 영적 거장들의 마지막 남은 한 분을 떠나 보내는 것 같아서 더 힘들었다. 패커는 ‘교회를 위한 신학자’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다. 신학을 위한 신학과 목회를 위한 목회가 아닌 신학과 목회에 다리를 놓아주는 저서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그분의 저서들을 통해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세우는 신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패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저서들이 나의 인생과 목회에서 중요한 세 번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첫 번째, 거룩한 삶에 대한 가르침영적인 체험을 위주로 하는 기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선교단체식 제자훈련을 접하게 되었을 때 둘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특히 훈련으로 사람이 성장한다는 완전주의 성화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신앙이란 금욕적인 삶이라 생각했고 자기부인을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라 믿었다. 그때 패커 목사님의 간증을 읽었는데, 그는 옥스퍼드에서 기독교 서클을 다니면서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경험했지만 성화와 거룩에 대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고, 오직 믿음으로 평안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영적 진보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준 책을 만났는데 그것은 존 라일의 ‘거룩’과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이었다고 말했다.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나에게 패커의 안내는 한줄기 빛이었다. 곧바로 존 라일의 ‘거룩’을 읽고, 거룩은 금욕이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동적으로 변화 되는 것도 아니라 은혜와 감사의 반응으로서의 순종과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패커의 ‘거룩의 재발견’을 통해 거룩에 대한 개념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성화를 추구하는 거룩한 삶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주셨고 지금도 주시며 앞으로 주실 것처럼, 당신도 그분을 위해 전부를 바치라는 뜻이다. 이 철저한 헌신이 그분에 대한 당신의 감사와 애정을 표현하여 결국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완전한 헌신이야말로 당신이 그분께 드리는,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고 가능케 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다.” (거룩의 재발견, 119)두 번째, 기도에 대한 가르침 제임스 패커와 캐롤린 나이스트롬의 공저인 ‘기도’에서 패커는 기도를 ‘의무를 넘어 기쁨으로 나아 가는 길’ (Finding our way through Duty to Delight) 이라 정의한다. 당시 청년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내가 기도하는 것과 또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다. 나의 기도 생활도 풍성하지 못했고 또 청년들도 바쁜 시대를 살면서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 책은 먼저 기도라는 행위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에서 ‘의무’(duty)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기쁨’(delight)으로 변화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리를 알려주었다.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쉽게 식어버리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기도할 때 제멋대로 몽상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무력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나를 알게 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기도의 시작은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런 단계를 통해서 결국 기쁨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나의 기도생활에서 늘 넘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도 좋은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초점을 잃어버린다. 멍해져서 생각도 없는 말을 늘어 놓으며 더듬거리고 마침내 침묵에 빠져버린다. 그 침묵을 이용해 기도하려고 하면 제멋대로 몽상에 빠져버린다 … 우리의 말은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 우리 모두 지극히 잘 아는 이런 어리둥절함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의 영적 체계 안에 있는 반(反)하나님적 혐오감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교제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 좋은 기도는 의무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기도가 주로 의무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기도를 알고 실천하는 일에서 자라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을 성화시키실 것이며 그 결과 기쁨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기도, 13) 세 번째, 하나님과 교리에 대한 중요성 패커의 저서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 있다면 아마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Knowing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의 차이점을 구별하면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무력해진 이유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하나님의 도(way)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하나님 그분 자체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해준다. 찰스 스펄전이 “당신 자신의 슬픔을 잊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깊은 바다에 빠뜨려 보라, 그분의 무한하심 속에 빠져보라, 그러면 당신은 휴식의 침상에서 원기를 되찾고 다시 힘이 넘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고 선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기력하던 나의 신앙에 뿌리부터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심판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늘 불편하게 생각하고 설교할 때도 그런 본문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내가 지옥에 가서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모든 심판들은 하나님이 너무 과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죽어서 지옥불에 들어가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현대의 사조에 물들어서 성경의 표준이 아닌 세상의 합리성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결국 깨달았다. “만일 우리가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자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 일에 침묵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세상과 자신의 문제로부터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므로 그분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는 것이며 또한 가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된다.”(Puritan papers 1, kindle 3658 location)패커는 ‘복음에 뿌리를 내려라’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교리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고 또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하면서도 예의를 갖추어 토론하는 것과 인간의 이성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또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읽으면서는 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옛길’을 ‘선한 길’이라고 말씀했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패커는 청교도의 깊은 우물로 나를 인도하는 두레박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패커는 다양한 저서들을 통해 희미해진 우리의 신앙에 회초리를 드는 것 같이 정신이 들게 하고, 회개로 이끌며 결국 하나님 그분의 존전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앞으로 이렇게 기독교 교리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신앙적인 기초를 놓아주는 신학자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참된 복음의 길로 인도해주신 패커를 추모하며 앞으로 패커와 같은 귀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리더십
거룩의재발견
기도
하나님을아는지식
교리의중요성
청교도
Knowing_God
찰스스펄전
위대한 신학자 제임스 패커를 추모하며
by 이승구
2020-07-20
개혁신학자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가 하늘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의 사역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조금 정리해 보고자한다.나에게는 패커가 매우 조용한, 그러나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 안에서 개혁신학적 목소리를 강력하게 외친 사람의 하나로 여겨진다. 7세 때인 1933년 9월에 당한 큰 사고로 두뇌에 손상을 입어서 항상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언급되는 패커는 될 수 있는 대로 논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대개 성경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때였다. 성공회 안에 함께 있던 복음주의적 학자 겸 목회자인 존 스토트보다 좀 더 온건하고 정통적인 입장을 대변한 패커는 정통파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효과적으로 제시한 신학자였다. 후에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칼리지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할 때에는 “리젠트칼리지 말고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농담 섞인 조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세상 곳곳에서 강연하고 논문을 발표하곤 했다.기본적으로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초기 책들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잘 나타나는 관점이다. 그의 책들은 다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쓰였다. 특히 1960년대에 격월로 발간되던 ‘복음주의 잡지’(Evangelical Magazine)에 기독교가 갖춰야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시리즈를 5년 동안 정기적으로 기고한 것을 모아서 출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150만 부 이상 팔렸다. 사실 이 책에 그의 거의 모든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하면서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으며, 이 성경에 근거해서 참으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에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되어 주었다. 과거의 그들처럼 성경에 근거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된 것이다.특히,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그는 1978년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에 서명하고 발표했으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소책자를 내기도 했다. 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그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옹호한 학자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기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그는 기본적으로 성공회 교인(Churchman)이었다. 이는 영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고전을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한 후(1948), 런던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학교인 오크힐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직임(instructor, tutor)을 감당했다(1948-49). 그 후, 영국 성공회 사제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하나인 옥스퍼드의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에 입학하여(1949)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1952년에 부제(deacon)가 된 후, 1953년에 버밍햄 대성당에서 성공회 사제(priest)로 임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버밍햄의 하본(Harborne)에 있는 세인트존스교회에서 부목사직을 수행하면서, 옥스퍼드에서 리처드 벡스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D. Phil., 1954). 조지 너트올(Geoffrey Fillingham Nuttall, 1911–2007)의 지도하에 그가 쓴 논문 “리처드 벡스터 사상에서의 인간의 구속과 회복”(The Redemption and Restoration of Man in the Thought of Richard Baxter)은 4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방대했다.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영국 성공회 목사들을 훈련하는 기관에서 가르쳤고, 옥스퍼드 학부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인 지질학자 제임스 휴스턴(James Houston)의 초청에 따라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의 신학 교수로 갔을 때(1979)도 캐나다 성공회에 속한 밴쿠버 소재 세인트존스성공회(St. John's Vancouver Anglican Church)에 속해 있었다. 그는 성공회에 속한 복음주의파를 대변하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성공회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가 좀 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애썼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회 자체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패커는 오래 전인 1966년 10월에 로이드 존스 목사가 복음주의자들의 전국 회의(the 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영국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한 교단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 제안했던 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회들로부터 나와서 독립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체를 형성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 회의의 의장 역할을 하던 존 스토트 목사가 이를 공개적으로 반박함으로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패커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그 날 밤에 전화로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성공회 안에 남아 싸우면서 영향력을 발휘해 가는 편을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성공회 대회(총회와 노회 사이의 의결 조직)에서 일종의 면직을 당할 정도로 성공회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말년의 패커는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패커는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에 푹 빠져서 청교도를 연구하고, 청교도를 전하고,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를 성경적으로 변화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영국 교회 안에서 영국 교회를 변화시키기 원했던 청교도들을 아주 많이 닮았다. 그는 대학 때, 거의 실명한 은퇴 목사가 옥스퍼드 기독학생회(Oxford ICCU, 현재 IVP의 전신)에 기증한 많은 책들 가운데서 청교도들의 작품들, 특히 오웬의 글을 발견하여 읽고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며, 자신이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흔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말하는데, 그 청교도의 유산을 오늘날 새롭게 드러내는 일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의 하나로 패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그는 특히 신론과 구원론에서 개혁신학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리하여 형벌 받으셨음과 하나님의 주권 및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신학의 모든 측면에서 개혁신학을 잘 드러낸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였다. 특히 성령론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초기 논문은 케직 사경회가 지향하는 성령 세례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제시한 것이었는데, 이는 후에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더 폭넓게 정리되었다. 패커는 성령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르친다. 그는 믿음으로 칭의받은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계속되는 성화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함에 이를 수 없음을 성경과 역사로 증명한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님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며, 성경을 중심으로 살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실제를 제시하고 가르쳐 준다.한편, 패커는 미국 교도소선교회 사역으로 유명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천주교 신부이자 공적 신학의 선구자인 리처드 노이하우스(Richard J. Neuhaus)와 함께 천주교인들과도 같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설명하는 내용을 편집하여 낸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함께: 공동의 사명 수행을 위하여’(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 ECT: Toward a Common Mission)라는 책에 기고했는데, 이로 인해 굉장한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 이 문제가 복잡한 것은 패커가 그가 강조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에 패커가 개혁파적인 칭의 이해에서 물러섰다면 이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하지만, 칭의 이해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이해가 성경적 입장이라는 것이 아주 확고하기에 이 ‘함께 한다’는 것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운동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연합 운동은 맥아더나 스프로울 또는 케네디도 동의하는 바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아마 이 논쟁이 패커의 삶에서 가장 복잡하게 일어난 논쟁 같다. 이제는 이런 논쟁 밖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쉬고 있는 패커는 이 땅에 있을 때보다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패커가 제시한 성경적인 입장을 우리 시대에 잘 지켜내는 것이다. 패커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이 시대에 허락해 주셔서 20세기와 21세기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붙잡고 갈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리더십
제임스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성공회
성경무오성
복음주의자
청교도
개혁주의자
제임스 패커, 이 시대의 마지막 청교도
by 신상목
2020-07-19
금세기 최고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I.Packer) 캐나다 리젠트칼리지 명예교수가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그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등과 함께 20세기 복음주의 대표적 신학자로 꼽히는데, 4년 전 황반변성으로 인한 실명 이후 천국을 향한 여정을 준비해왔다. 패커 교수는 영국 성공회 소속 목회자를 지냈고 이후 캐나다에서 활동했다. 90여 년 생애 중 70년을 저술 활동과 교수로 사역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주된 신학적 주제였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회개와 거룩을 촉구했으며, 성령 안에서의 동행과 자신의 내밀한 죄와의 투쟁을 강조했다. 또한, 성경적 권위를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패커 교수는 자신을 ‘사람들을 진리와 지혜의 오래된 길로 부르는 목소리’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것을 중시하며 최신 것은 다 옳다는 식의 현대적 가치관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다.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체스터시어 북부 트위닝 마을에서 태어난 패커 교수는 성공회 신앙을 가진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랐지만 한동안 그는 명목상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7세 때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그 상처 부위가 눈에 띌 정도로 평생 흉터가 남았다. 1944년 옥스퍼드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 진학한 그는 기독학생회가 주관한 저녁예배에 참석하면서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게 된다. 세인트알데이트교회에서 접한 복음적 설교를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도전을 받았다. 그는 찬송가 ‘내 모습 이대로’를 부르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내 모습 이대로’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한 흉터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사고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옥스퍼드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고전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 무렵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의 내부 기독인연합회에 기증된 옛날 책을 정리하다가 16, 17세기 기독교 고전을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먼지 쌓인 지하실에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들을 만난다. 그는 거기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와 ‘죄 죽임’을 읽으며 청교도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신앙인이 됐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현대판 청교도로 생각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그가 저술한 ‘청교도 사상’은 청교도 신앙 입문서로서는 최고의 책으로 청교도와 성경, 복음, 성령, 생활, 목회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청교도들의 비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실생활에서 발휘했던 적극적인 능력과 함께, 그들에게 대조적으로 명성은 주어지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패커 교수는 청교도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비전을 잃어버리고 도덕적인 방종 속에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치료제’를 제공했다. 패커 교수의 첫 논문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청교도적 논의’(1952)였다. 앞서 1948년 옥스퍼드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런던의 오크힐신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1948-1949년에는 매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당시 50세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들었다. 패커 교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탄복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마치 전기쇼크를 당한 것 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패커 교수와 존스는 서로 알게 되면서 가까워졌고 패커 교수는 존스에게 청교도적 관점을 이해시키고 적용하는 정기 모임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20년간 지속된 ‘청교도 콘퍼런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대 위클리프홀에서 성직 서임을 연구했고 1952년 성공회 부제로, 1953년 버밍햄성당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1954년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연구’로 400쪽 짜리 논문을 제출했고 석사 학위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박사 논문은 너무 길어서 그 이후부터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 논문 글자 수를 제한했다고 한다.패커 교수는 그 해 간호사였던 키트 뮬렛과 결혼하고 루스, 나오미, 마틴 등 세 자녀를 입양했다. 1955년 브리스톨로 이주한 패커는 틴데일홀에서 6년간 강사로 사역했다. 여기서 그는 ‘케직’이란 제목의 개혁주의 칭의 교리 논문을 저술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며 이신칭의 교리를 수호했다. 이는 패커 교수가 격론을 벌인 주제로 개인적 신앙 경험과 목회자의 마음에서 비롯됐다.칭의와 관련해서는 1986년 ‘칭의의 여러 얼굴들’ 등을 펴내고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끊임없이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가 있고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며 형태가 왜곡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진실로 생명줄이자 송영이며, 찬양의 외침이자 승리의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그는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1958년에 출간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신교의 역사적 위치를 서술했다. 당시 팽배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답변이자 변증의 성격을 띤 이 책에서 패커 교수는 확고한 성경무오를 설파하는 것을 비롯해, 성경 말씀이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진리임을 힘있게 제시했다.흔히 근본주의라 할 때 좁은 의미로 우파적 기독교제국의 관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데, 패커 교수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 크리스천의 역사와 신학적 유산의 공통점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균형 잡힌 성경 해석과 합리성, 역사적 맥락 등을 기반으로 설명했다. 이후 펴낸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계시와 성경’(1965), ‘하나님은 말씀하셨다’(1979) 등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패커 교수는 1960년대 격월간 ‘복음주의 매거진’의 시리즈물로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안내하는 연속 기고문을 썼다. 나중에 이 기고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는데, 이 책이 50만부 이상 팔리며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패커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오늘의 교회를 약화시키는 뿌리가 된다”고 썼다.패커 교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섭리’(1961)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을 성경 속에서 반추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신학과 철학이 논쟁을 벌였던 지점이기도 하다. 패커는 이를 명료하게 설명했는데 복음 전파와 기도, 고난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풀어냈다.1977년 패커 교수는 R.C.스프로울, 존 게르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그 반센 등과 함께 미국에서 콘퍼런스를 열고 국제성경무오협회를 구성한다. 이는 1978년, 성경은 무오하다는 시카고 선언을 이끌어내는 기초가 됐다. 패커 교수는 1979년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칼리지로 자리를 옮겨 사역하다 1996년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강의와 강연 등을 이어갔다.패커 교수는 종종 자신이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고전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추천 목록에는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 J.C.라일의 ‘거룩’, 존 번연의 ‘천로역정’, 리처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 마르틴 루터의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 그리고 존 오웬의 저작들이 있다.이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고전은 ‘천로역정’이었다. 패커 교수는 천로역정을 매년 한 번씩 읽었는데 2016년 그가 시력을 잃을 때까지 읽었다. 일반 도서도 즐겨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했고 미스터리물과 탐정 소설류도 자주 읽었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패커 교수가 후반기 생애에서 공헌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ESV(the 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 편찬이었다.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 소재 크로스웨이북스 출판사 레인 데니스 박사는 패커를 새로운 성경 번역을 위한 총괄 편집자로 초청했고 패커는 여기에 부응했다. 성경 이름인 ESV도 패커가 직접 제안한 것이다. 이 성경은 현존하는 성경 중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영어로 직역한 최고의 성경으로 꼽힌다. ESV스터디바이블은 칼뱅의 개혁신학을 충실하게 반영한 연구 성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패커 교수의 마지막 사역 여정은 교회가 교리문답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 되기: 성공회 교리문답’은 그 정점이었다. 패커 교수는 삶 속에서 구약의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냉소주의에 빠졌던 그는 전도서를 읽고 치유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며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지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은혜의 교리와 은혜의 삶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교회 안의 개인주의는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기념하는 교회 자체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현대 교회를 향해 네 개의 영어 단어로 권면했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시오”(Glorify Christ every way).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D.A.카슨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 수호,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중요성, 청교도 신학의 재발견 등이 패커 교수가 남긴 유산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판 청교도이자 마지막 청교도로서 그가 보여준 보수적 복음주의는 적어도 서구 교회에서는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성결혼을 반대하면서 캐나다 성공회를 탈퇴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패커 교수는 캐나다성공회(ACC)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ACC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세인트존스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교회는 교단의 신학 성향과는 전혀 달랐다. ACC는 동성결혼을 찬성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 수임 후보자도 동성애자를 받아들였다. 이에 세인트존스교회는 토론과 논쟁을 거쳐 ACC를 탈퇴했다. 세인트존스교회가 ACC를 탈퇴했을 당시 교회의 재산은 교단법에 따라 몰수당했다.패커 교수는 2008년 자신의 뉴웨스트민스터 주교 면허를 포기했다.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패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갈채를 보냈다. 카슨 교수는 “패커 교수가 논쟁적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인들’이란 청교도적 유산에 속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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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중요하다
by 고상섭
2020-07-18
존 스토트의 ‘현대 교회와 설교’의 원제는 ‘Between Two Worlds’며, 설교란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존 스토트의 책이 나오기 이전 설교학의 관심은 Text, 즉 성경이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주해하는지가 관심이었다면,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는 또 다른 세계인 Context(청중의 상황)도 고려해야 하는 주제라는 것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또 하나의 Text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설교자의 내면의 정서인 Subtext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Text인 성경말씀을 바르게 주해해야 한다. 그리고 Context인 청중의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내면의 정서인 Subtext다. 아무리 주해를 바르게 하고 청중의 상황에 맞는 적용을 하더라도 설교자의 내면에서 사람을 싫어하고, 편을 가르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연합을 설교할 때 청중들은 은혜를 경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물론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가능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Subtext를 이렇게 정의했다. “서브텍스트는 설교자 메시지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다. 그것은 메시지가 의도한 진정한(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로서,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보다 깊다. 예를 들어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진술은 ‘저는 관심 없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라는 서브텍스트를 품고 있을 수 있다.”이 서브텍스트는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어조, 얼굴 표정, 자세, 제스처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숨길 수 없는 그의 내면의 정서다. 1. 내부 강화(Reinforcement)의 서브텍스트설교를 아름다운 말로 하지만 설교자의 내면에서 ‘우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라는 정서를 품고 설교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은연중에 퍼뜨리면서 소속감을 증진시키고 내부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신학에 집착하여 '우리 교회'의 설교와 신학만이 최고의 신학이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다. 어떤 설교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말보다 ‘우리 교회’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강화될지 모르지만 대체로 교만해질 위험성이 있다. 좋은 설교를 계속 듣는데 왜 사람들이 교만해질까를 고민하고 있다면 설교자 자신의 내면에 ‘내부 강화’의 서브텍스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2. 과시(Performance)의 서브텍스트과시의 서브텍스트는 ‘나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다. 자의식이 강한 설교자는 Text와 Context보다 설교하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청중들의 관심을 그리스도가 아닌 설교자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지만 그렇게 좋은 설교를 통해 자신이 환심을 사고 싶은 것이다. 과시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면 설교자 자신은 유명해지고 높아지지만 청중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오직 설교자에게 집중하는 영적 교주의 형태로 변화되어 간다.3. 훈련(Training)의 서브텍스트훈련의 서브텍스트는 ‘이 진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다. 목표는 듣는 이들의 지식을 키워서 그들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런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설교자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전에 듣지 못한 새로운 것’을 설교하고 싶어한다. 새신자나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신학과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단단한 음식’을 지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탁월하고 새로운 가르침에 집착하기 때문에 때로는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어 보이는 해석들도 새롭기만 하면 과감하게 설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서브텍스트를 가진 설교자의 교회는 주로 엘리트 중심의 지성적인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복음을 통해 연합되는 교회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로 고립되어 끝없이 어려운 신학적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복음을 거부한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훈련의 서브텍스트를 가진 설교자의 내면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4. 예배(Worship)의 서브텍스트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서브텍스트가 바로 ‘예배의 서브텍스트’다. 이 서브텍스트의 본질은 ‘그리스도 정말 위대하지 않아요?’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얼마나 더 경이로운 분인지를 보세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이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겠나요?”팀 켈러는 이것이 진정한 설교의 심장이라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핵심은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그 전에 설교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는가?’ 설교하는 바로 그 순간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께로 침잠하고 있는가? 입을 열어 그분이 찬양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진심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있는가? 이런 일들이 실제 우리 설교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설교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도와 묵상을 통해 정기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들이 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은 설교단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나의 간절한 소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싶은 것인가?
목회
설교
팀켈러
존스토트
서브텍스트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
Reinforcement
예배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by Moses Y. Lee
2020-07-17
성경에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가장 애매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왕과 제사장이라는 영광스런 두 직분(dual honor)을 예수님이 어떻게 동시에 감당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이 신비스런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이 멜기세덱 왕조의 순서를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왕과 제사장 역할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만찬을 준비한 왕성경에 등장하는 아주 적은 양에 비해 구속사에 있어서 멜기세덱이 감당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고 그는 살렘(“샬롬” 즉 조화로운 평화를 의미한다)을 다스렸다.그의 삶과 사역을 묘사하는 세 구절에서(창 14: 18-20) 우리는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그를 만난다. 그는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권한다. 아브라함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일조을 드렸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이 가진 영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속에는 성찬식에 대한 함의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왕을 기다리며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시편인 시편 110편은 왕과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세심한 관찰이 필요한 구절이다. 다윗 왕은 미래의 왕을 생각하며 이 구절을 썼다. 어쩌면 기원전 971년 왕위에 오르기 전 솔로몬을 생각하면서 썼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다윗의 핏줄에서 나올 후대 메시아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시편은 미래의 왕이 과거 그 어떤 왕보다 더 큰 영광과 능력 그리고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선포로 시작한다. 그는 야훼의 대리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런 자리인 야훼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110:1). 그렇게 함으로 그는 야훼로부터 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왕의 권능을 행사하며 주의 원수를 굴복시킨다(110:2). 또한 왕의 왕국과 그의 백성을 보호한다(110:3). 그러나 이런 메시아적 인물은 단지 왕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제사장이기도 하다(110:4). 한마디로 이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 다윗 가문의 왕은 레위 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예배를 인도하고 전체 기도를 주관하며 또한 제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제사장적” 역할까지 수행했다.그러나 이 구절은 다윗 왕조의 제사장 기능을 더 발전시켜서, 한때 예루살렘을 통치했던 여부스 가문의 왕-제사장과 완벽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 결과, 다윗 왕조는 약속의 땅을 통치하는 데 하나님의 신성한 지지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창세기 14장 18절부터 20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향한 멜기세덱의 축복도 성취하게 되었다.5-6절은 다윗 왕과 야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2-3절과 평행을 이룬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절을 보면 왕이 야훼의 오른쪽에 앉아있지만, 5절을 보면 야훼는 왕의 곁에서 그를 신성한 힘으로 지키고 도와주고 있다. 2-3절이 왕을 전쟁의 주역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5-7절을 보면 야훼, 또는 신성한 전사(Divine Warrior)가 주인공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왕으로 하여금 적을 물리치도록 돕는데, 그 적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그리고 우주적 차원의 적이다(“여러 나라”, “뭇 나라” 등). 이것은 기존 이스라엘 영토를 크게 벗어나는 확장이다. 달리 말해 그 적장 왕들은 혼란에 빠진 우주적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야훼는 그 적들을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나라를 대신해서 그의 궁극적인 멜기세덱 족속의 제사장-왕을 통해서 물리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야훼의 구원 속에 있는 적용점은 단지 개인의 영혼 차원을 넘어서 육체적 측면 또 집단적 시스템, 나아가서 전 우주적 힘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편은 시냇물을 마시면서 원기를 회복하는 야훼의 모습으로 마친다(110:7). 이 구절이 처음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야훼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영원한 멜기세덱 족속의 왕-제사장신약에 가면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의 수준을 아예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pre-incarnate Christ-figure)의 모습으로까지 끌어올린다. 멜기세덱은 영원한데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이 바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에 대한 확증이다(히 7:4). 멜기세덱을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한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은 진정한 의의 왕(“멜기세덱”)이 된다. 또한 희생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예수님은 진정한 평화의 왕(살렘)이다. 예수님은 또한 레위 계통이 아니기에(히 7:14), 그의 제사장직은 훨씬 더 우월하며(히 7:11)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히 7:17)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었다(히 7:22).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한다”(히 7:24).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예수님이 무한한 능력과 공의로 다스리는 완전한 왕이시기에 우리 믿는 자들은 안심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무한한 자비로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히 4:15) 완전한 제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에도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이제 믿는 자들은 우리도 멜기세덱 족속의 한 사람으로서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 왕국의 가족으로서 진리와 공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국을 확장하고 또한 이 세상 뿐 아니라 언약의 공동체를 향해 자비와 치료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o Is Melchizedek?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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