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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악플
by 정요석
2020-08-15
“내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진 잘 모르겠지만, 죽는게 쉽진 않겠지만 … 많이 미안해 엄마 그냥 미안하단 말밖에 못하겠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 …”위의 글은 2020년 7월 30일에 스물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한 배구 선수의 마지막 글이다. 그녀는 2013-2014시즌 프로배구 선수로 데뷔했을 때 별을 딴 듯 기뻐하였다. 하지만 주전이 아닌 백업과 다른 포지션의 대체 선수로 뛰면서 자신의 기량을 100퍼센트 펼치지 못했고, 그때마다 “네가 리베로냐”, “네가 배구 선수냐” 등의 악플에 시달렸다. 그녀는 7월 12일에 있었던 마지막 인터뷰 영상에서 “계속해서 (악플에) 시달리고 부담감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분석도 많이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며 감독님께 찾아가 “너무 힘들다”, “악플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시즌이 종료되기 전에 은퇴를 결심하고 팀을 떠났다. 하지만 “돈 떨어졌다고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는 식의 악플이 이어졌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먹던 수면제의 복용량이 점점 늘어났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운동도, 경기도 하기 싫었다. … 다 내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도 그렇고 어긋나 있었다”라고 마지막 인터뷰에서 토로했다.IOC 유승민 선수위원은 8월 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스포츠 뉴스 댓글 금지법” 발의를 요청하였다.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는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이미 작년 10월과 올해 3월부터 시행하였다. 다음과 네이버는 8월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도 잠정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선수의 죽음으로 인해 그나마 이런 조치가 가능했다. 그런데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를 향한 댓글이 폐지되면, 앞으로 악플은 사라질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한 나라의 정신과 도덕과 절제의 수준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번 코로나19 대감염 속에서 “K-방역”이란 호칭을 들으며 경제와 방역과 인터넷 보급망 등에서 세계적 수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어 세계로부터 구호를 받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선진국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언론의 감시 기능과 여야의 치열한 경쟁도 중요한 이유에 속한다. 언론은 여러 분야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름 대안을 제안함으로써, 여와 야는 상대방의 조그마한 잘못도 비난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자랑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그런데 언론과 정당의 감시와 비판 기능이 도를 넘어 종종 비난과 악담으로 이어졌다. 일반 국민까지도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달 수 있고, 유튜브 제작으로 수익 창출이 되면서 악플과 과장과 왜곡으로 그 대열에 참여하였다. 조회수와 시청률과 지지율의 제고에 관심이 많은 언론과 정당과 유튜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였다. 일반 국민도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연관이 없는 사항임에도 연예인과 운동인에 대한 험한 악플을 집요하게 생산하였다. 그 결과 그 선수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과 공인 중 일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정당한 비판과 징계를 받기보다 언론과 정당의 과다한 비난과 악플러들과 유튜버들의 모욕과 조롱을 피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비평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함께 문학의 5대 장르에 속한다. 비평가는 비평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미추(美醜), 선악, 장단, 시비를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치열한 사고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가 먼저 좋은 철학과 시대정신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것이 비평이다. 창작자의 관점을 넘어서는 참신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탄탄한 철학 사상과 풍성한 사례에 근거하여 제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과 다양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결혼식 주례처럼 작품의 장점만 이야기하는 주례사 비평은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식구 감싸기의 짬짜미로 사회 전체를 답보와 퇴보에 빠지게 한다. 따끔한 지적과 통찰이 없는 비평은 창작자와 사회 전체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결점만 들추어내고, 가능성을 짓밟고, 인격 모독과 성 희롱과 악담으로 가득 찬 비평과 댓글은 인격을 부수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살상무기다. 당사자만 아니라 그 비평과 악플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렇게 비난하여도 괜찮은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또 다른 비난자와 악플러를 꾸준히 생산하여 우리 사회를 더 황폐하고 더 악하게 만들므로 역시 없어져야 한다.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갖기 마련이다. 실수와 다른 시각에 대하여 기본적인 존중과 수용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를 물고 뜯는 형국이 될 뿐이다. 자신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물 때는 괜찮겠지만, 그 칼날이 반드시 자기를 향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야하지 않는가? 조그마한 실수와 죄라도 짓는 날에는 엄청난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므로 늘 긴장하고 남을 의식하고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게 된다. 매 앞에 장사 없듯, 비난과 악플에 장사가 없어, 쌓이다 보면 어느덧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게 되고, 극단적 선택에 이를 수 있다.건전한 비평과 선플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 일만 달란트의 죄와 실수로부터 용서 받은 자가 신자들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지금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격려하여 주시지 않는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가혹한 비난과 악플이 아닌 생명과 부활이라는 사랑과 세움으로 가득 찬 판결문을 받은 신자들이 어찌 조롱과 모욕과 희롱이 배인 비난과 악플로 공격할 수 있는가?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고, 바보라고 말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살인에 해당하여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마 5:22) 말씀하셨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이 “평화롭고,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을 요구하고(제135문), “격동시키는 말”을 금지한다고(제136문) 서술한다. 바로 평화로운 말은 생명을 살리고, 격동시키는 말은 생명을 죽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최근에 격동시키는 비난과 악플에 의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아홉 번째 계명이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보존하고 조장하고, 마음으로부터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고자질과 아첨과 중상을 하는 자들을 좌절시킬” 것을 요구하고(제144문),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해치고, 거짓 증거를 제공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왜곡하고, 부당한 침묵을 유지하고; 진리나 공의에 대해 편견을 갖도록 의심스럽고 애매하게 왜곡하고, 틀림과 거짓과 중상과 험담과 고자질과 냉소와 욕설을 말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작은 실수들을 악화시키고,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고, 거짓 소문을 내고, 악한 의심을 품고, 불명예와 추문을 기뻐하는” 것을 금지한다고(제145문) 서술한다. 신자라면 각 계명의 요구와 금지 사항들을 읽을 때 마음속 깊이 파고들지 않는가?통제되지 않는 혀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고,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다. 신자는 마음속의 독한 시기와 다툼을 말과 글로 자랑하면 안 된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면 안 된다. 이러한 지혜는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고, 정욕과 악한 영의 것이다. 시기와 다툼이 묻어나는 글과 악플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발생시킨다. 건전한 비평과 선플은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가져오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약 3장). 신자들은 인터넷에 올리는 짧은 글과 댓글에서도 절제함을 갖추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좋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화평과 관용이라는 기본적 자세는 더 중요하다. 의도치 않게 틀린 내용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거두어들일 수 있지만, 악의가 담긴 비난과 악플은 주워 담을 수 없다.치열한 경쟁과 일등주의가 일상화된 우리나라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선진국 대열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과 효율주의로 인해 억눌린 마음과 팽팽한 긴장은 배출구를 찾아다닐 것이고, 쉽게 비난과 악플로 표현될 여지가 많다. 신자는 이런 치열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완충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일등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이는 것은 더 중요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더 크게 발전하게 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대한민국의 자살률 완화는 신자들이 일등의 경쟁에서 승리할 때가 아니라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일 때 이루어진다. 기독교야말로 사회 전체에 새로운 관점과 통찰이 담긴 건전한 비평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미 그런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십계명의 각 항목에 대하여 서술한 요구와 금지 사항에 풍성히 나와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귀한 보물을 사장시키고, 잠시 도움이 되는 자극적이고 가벼운 내용에 심취하고 있다.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잠 15:23), 또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다(잠 25:11). 신자는 바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 일등의 실적을 올리려고 하기보다 기쁨의 대답을 주려하고, 악플 대신에 선플을 다는 화평과 관용의 삶을 살아 사회에 맑은 물을 흘려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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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여성들
by Rebecca VanDoodewaard
2020-08-14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주로 남자들에게 집중되기 마련이다. 설교자, 신학자 그리고 (남자) 순교자. 그들의 사역은 종교개혁의 틀을 잡았고, 그만큼 중요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또한 여성들의 활동도 매우 중요했던 시기였다. 여성들의 사역은 주로 다음 세 가지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정에서 봉사함으로 개혁을 가속화하고 다음 세대 개신교인(Protestant)을 키워낸 것; 권력의 자리에서 봉사함으로 개신교의 자유를 수호하거나 증진시킨 것; 그리고 글과 출판을 통해서 개신교 사상을 고양시킨 것. 가정 개혁초창기 개혁가들의 아내는 가정을 사역의 기초로 삼는 데 탁월했다. 가정은 단지 남편이 휴식을 취하거나 가족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는 곳만이 아니었다. 가정은 복음 사역과 복음 전파에 필요한 전진 기지(outposts)였다. 가정은 여행자들이 쉬면서 충전하는 곳이었다. 가정은 여성들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이를 주는 식료품 저장실이었다. 경건한 가정은 종교개혁의 풀뿌리였으며 종교개혁에 연료를 공급하는 충전소였다. 이런 가정 사역에 있어서 단연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카타리나 루터(Katharina Luther, 1499–1552)다. 유명한만큼 신경 쓸 일이 많은 그의 남편은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많은 역할을 맡겼다. 그녀는 개신교 아내들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닦은 사람이고, 과거 수도원이었던 곳을 생산적인 가정으로 바꾸었다. The Black Cloister(루터의 집으로 사용됐던 수도원)은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의 본부가 되었다. 거기서 마틴 루터는 공부하고 글을 썼고, 카타리나는 저녁이면 그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주었다. 루터가 학생들을 초대하면 카타리나는 그녀가 직접 재배한 재료로 음식을 준비하고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테이블에 함께 앉았다. 아이들은 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루터의 친자식들 외에 그가 입양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수도원에서 미래의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인 가족이 어떻게 살고 움직이는지를 목격했다. 낡은 수도원이 카타리나의 손에 의해 개혁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느끼는 구원의 기쁨이 그녀 속에서만 끝나지 않았기에 그녀의 가정을 통해 육체적 그리고 관계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만 같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에서 카타리나의 가정과 비슷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안나 불링거(Anna Bullinger, 1504–64)의 가정이다. 아이가 열한 명이나 있음에도 그녀는 엄청난 숫자의 개신교도 손님들과 열두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을 한 번에 집에 받아들였다. 이 부부의 가정은 한마디로, 안나가 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기독교인에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집 또는 교회에 있지 않을 때면, 안나는 취리히의 빈민들을 찾아서 음식과 옷, 그리고 돈을 주었다. 그녀는 남편 훌드리히(Huldrych)가 전투에서 사망한 후 내내 돌보던 안나 츠빙글리(Anna Zwingli)의 모범을 따랐다. 안나 불링거는 손님들을 통해, 또 결혼과 가족 생활에 대해서 쓴 남편의 글을 통해 온 유럽으로 알려진 모범이 되었다. 종교개혁 시절 목사의 부인들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집과 가족을 개방하는 것은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수도원 생활(monasticism)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었다. 이런 성경적인 생활 방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 결혼 등에 관한 교리에 직접적인 도전이었을 뿐 아니라, 수녀원과 수도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신교 목사의 부인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수도사과 수녀가 해왔던 것과 똑같이 기도하고, 책을 읽고, 정원을 가꾸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여행객을 맞았고, 또 학구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개신교인의 부인들은 수도원주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비록 그런 활동이 항상 눈에 띄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가정 사역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이 당연시 여기고 있던 전제를 공격함으로써 로마 가톨릭이 수세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자녀 양육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에 직면해서도 오로지 성경만을 붙잡고 설 준비가 된 새로운 세대의 개신교도를 키워냈다. 권력(authority) 개혁여왕과 공주들은 종교개혁 기간 중에 공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왕족 여성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들은 남자 혈족들보다 훨씬 더 쉽게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 시류도 따르지 않았다. 유명한 개신교도들은 종종 쉽게 표적이 되었다. 고위직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녀원장은 종종 귀족 출신이었고, 개신교로 개종하는 경우에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려야만 했다. 종교개혁자의 부인들이 무대 뒤에서 엄청난 양의 사역을 감당한 반면, 종교개혁에 참여한 여왕들과 수녀원장들은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고립과 협박, 그리고 폭력에 직면해야만 했다. 잔느 달브레(Jeanne d’Albret , 1528–72)는 알콜중독자이자 외도를 일삼던 남편이 1555년에 죽자, 나바르 왕국(Navarre)의 여왕이 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위치한 나바르 왕국 여왕의 위치는 취약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그녀는 지체하지도 또 낙담하지도 않았다. 이미 수년 전에 종교개혁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잔느는 그녀의 왕국을 로마 가톨릭의 바다에서 안전한 안식처를 찾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만들었다. 그녀의 아이들이 납치되었고, 그녀의 삶은 위협을 받았으며, 반란과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이 모든 환난보다 더 컸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작은 공주”라고 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에스더처럼 자신을 지금 이 위치에 두었다고 믿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종교 전쟁 내내 위그노(Huguenots, 프랑스인 개신교도를 부르는 말)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녀는 고난을 견디는 믿음의 본보기였다. 그녀의 용기와 교리적 확신은 국제적으로도 논의가 되었고, 고통받는 다른 신자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카타리나 본 지먼(Katharina von Zimmern, 1478–1547)은 힘든 유년기를 보냈고 결국은 수녀원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자매는 사제들에 의해 성추행을 당하고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마 후 카타리나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갔고 결국 취리히 전체를 책임지는 수녀원장이 되었다. 엄청난 양의 토지와 현금 그리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로마 가톨릭은 자신들이 지명한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고 관대했다. 그러나 취리히 전체 도시와 마찬가지로 카타리나도 개혁주의 신앙에 노출되었고, 어느 시점에서 개신교로 회심하게 되었다. 그녀는 개신교 목사들을 초대하여 수녀들의 라틴어 교육과 영적인 관리를 부탁했다. 츠빙글리(Zwingli)는 수녀원장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개신교 활동을 폭로할 수도 있었고 또 로마로부터 지원세력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츠빙글리의 우려와 달리, 1524년 말에 카타리나는 수도원과 모든 재산을 취리히 시에 넘겨주었다. 이것은 로마가 잘못되었고, 그런 로마에 저항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확신을 평화롭지만 강력하게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재산 양도는 이 도시에 경제적 이익 이상을 가져다주었다. 취리히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내전 없이 개신교도에게 공개적으로 자유롭고 안전한 장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이제 로마의 공개적인 적으로서 매우 취약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녀를 보호했고 남편과 딸까지 주었다. 그리고 대중을 향한 카타리나의 리더십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녀는 시의회에서 활동했다. 카타리나와 잔느는 단지 개신교로 회심한 여성 정치인과 여성 종교 지도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로마 가톨릭 왕실과 교회 정부의 부패한 시스템을 사용하여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로마의 성문은 무장한 교회에 비하여 결코 우세하지 않았다.펜의 개혁여성이 종교개혁에 기여한 세 번째 중요한 방식은 바로 글쓰기를 통해서였다. 글쓰기는 아주 현대적인 형태 같지만, 중세에도 글을 쓰고 출판까지 하는 여성들이 더러 있었다. 교육과 문맹퇴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종교개혁은 수많은 개신교 여성 작가들을 만들어냈다.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여성들에게 지배적인 장르는 종교시였다. 개신교 여성들은 이 전통을 버리는 대신에 그 장르를 발전시켰다.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1492 -1549)는 개신교 최초로 출판한 여성 시인이었다. 초기 로마 가톨릭에서 시작해서 칼빈주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시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시는 그녀의 영적 여정을 반영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단지 이 시들이 개인적인 묵상의 기록이 아니라 개혁주의 교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마르그리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완전하고 완벽한 구속 사역을 이룬 것을 강조하고, 그 사역을 향한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그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그녀는 성자, 방종, 참회, 그리고 미사에 관한 로마의 가르침에 도전했다. 그녀의 작품은 결국 오직 믿음과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공개적인 선포였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신학적 내용을 담은 개신교 작품을 쓴 여성들도 있다.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성직자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로마 가톨릭 교리에 반해서 얼마든지 성직자도 결혼해도 된다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그것은 카타리나 젤(Katharina Zell, 1497–1562)이 사제이기도 한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쓴, 매우 개인적인 방어이기도 했다. 카타리나 부부는 당시 성경법에 위배되는 결혼을 한 것 때문에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카타리나 젤은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한 매춘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아무런 문제점을 찾지 못하는 교황이라면, 그런 교황이 신실한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이 책에서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근거로 내세운 카타리나는 일종의 금기로 취급되던 결혼 문제를 공공 토론의 자리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결혼한 사제들에게 찍히는 낙인을 상당 부분 제거하는 데도 기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고록도 인기를 얻었다. 샬롯 드 모네(Charlotte de Mornay 1550-1606)는 남편의 삶에 대한 글을 썼고, 그 결과 그녀의 남편은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근면한 노동과 신실함, 그리고 고난으로 인한 괴로움에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고난 속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이 기간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개인 성장과 여가 활용을 위해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또 많은 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개혁 교회를 위해서 글을 썼다. 그들의 명백한 지적 능력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두뇌를 사용해야 한다는 개신교의 신념과 일치했다. 또한 차세대 종교개혁 여성들을 교육하는 개신교 어머니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은 차세대 어머니, 작가, 설교자, 여왕을 키우는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훈련을 제공하고 있었다.이런 이야기를 시대별 또 인물별로 분류해서 잘 보이는 곳에 두는 식으로 대충 흘려 듣는 것은 쉽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어떤 여성들은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영역 전부에서 활약했다. 또 어떤 이는 한 영역에서 특별히 탁월했다. 그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놀라웠는데, 그것은 그들이 섬기는 구주가 전지전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여성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섬겼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도 여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들이 지금도 변치 않고 교회를 섬기는 것을 기대해도 되는 것이다. 원제: The Women of the Reformation 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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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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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6: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
by 김은득
2020-08-1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1909년 7월의 제네바(Geneva)는 존 칼빈(John Calvin)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여 매우 들뜨고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유럽 전체와 북미의 개신교도들이 다 함께 바스티옹 공원(Parc des Bastions)에 모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존 칼빈, 테오도르 베자(Théodore de Bèze), 존 녹스(John Knox)의 전신상이 새겨진 종교개혁 기념비의 제작을 알리는 주춧돌을 놓았던 바로 그 순간은 마치 모든 교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칼빈을 통해 모든 개신교도들이 하나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참석한 칼빈주의자들은 “하늘에 계신 주님께 찬양을! 우리가 칼빈주의자이기에!”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으로 고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반응이 네덜란드, 그것도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개혁파 개신교도들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제네바의 초대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400주년 행사에 대한 실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습니다. 제가 설립한 일간 신문인 De Standaard가 논평하길, 칼빈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는데, 제네바의 기념행사는 그런 순종의 모습을 그렇게 많이 살펴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칼빈주의는 칼빈이라는 영웅을 위해 어떤 기념비도 세운 적이 없다. 제네바의 한 비석만이 그저 칼빈을 생각나게 할 뿐이다. 심지어 칼빈의 무덤조차 잊혀진 상태다. 이게 배은망덕한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제네바의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들은 종교개혁가들의 전신상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후원 부탁마저 매몰차게 거절하였습니다.이런 네덜란드 개혁주의의 제네바 거절과 냉대는 아마도 한국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매우 이상하게 느껴질 만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칼빈 사랑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칼빈 탄생 500주년(2009년 7월 10일)과 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 10월 31일)이라고 제네바를 방문한 사실만 봐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저 역시 칼빈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에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칼빈주의자입니다. 그러나 400년 전의 칼빈(물론 한국 교회 성도분들에게는 500년 전)을 무조건적으로 숭상하는 것만이 진정한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칼빈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칼빈이 이랬다’는 역사적 칼빈도 중요하지만, 칼빈을 현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로 저의 신칼빈주의(Neo-Calvinism)가 칼빈의 사상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현대 시대에 걸맞게 잘 활용한 일례가 될 것입니다.한편 여러분들 가운데 제가 그렇게 칼빈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서 굳이 400주년 행사를 참석하지 않고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칼빈에 대한 혐오가 극대화된 18세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칼빈에 대한 숭상이 절대화된 19세기의 상황과 연관이 큽니다. 계몽주의 이후 칼빈에 대한 비판적 묘사만큼 혹독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관용없는 칼빈", “종교적 심문관”, “은혜를 모르는 다혈질”, “굶주린 늑대”, “제네바의 공포 정치”, “이단 사냥꾼”, “개혁파 교황”등이 그러합니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대의 칼빈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Servetus)나 카스텔리오(Castellio)의 죽음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모두 칼빈을 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지어 개혁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칼빈과 거리를 두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영향이든, 혹 현대 산업사회의 복잡함에 기인했든지 간에, 난세에 영웅을 필요로 하자마자, 칼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의 칼빈 전집 7권이 1899년에서 1927년에 이르러 출판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프린스턴 신학저널(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칼빈과 종교개혁(Calvin and the Reformation)”이라는 제목으로 당대 최고의 칼빈주의 4인방(에밀 두메르그, 아우구스트 랑, 헤르만 바빙크, 벤자민 워필드)의 글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칼빈에 대한 예찬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아까 언급했던 제네바의 종교개혁 기념비, 즉 네 명의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전신상의 설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교회사에서 어떤 이름(심지어 힐데브란트(Hildebrand), 루터, 혹은 로욜라(Loyola)를 포함해서)도 칼빈 만큼이나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미움을 받는, 존경을 받으면서도 경멸을 받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비판을 받는, 축복을 받으면서도 저주를 받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저 역시 칼빈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고 칭송하고 축복했을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샤프의 모든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칼빈을 칭송하면서도 비판했다”는 그 표현만큼은 제가 칼빈에 대해 가진 입장을 잘 묘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의 칼빈에 대한 비판적 예찬론은 제가 네덜란드의 개혁파 민중들이 공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돕는 일종의 공공신학을 전개할 때 두드러집니다. 저는 칼빈의 사상들(예를 들어,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론, 하나님의 선택 교리, 일반 은총 교리 등)이 칼빈주의자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 특히 공적인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탁월한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사제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적 관계를 주장했던 로마 가톨릭과 달리,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주창했습니다. 그런데 칭의 교리를 중심으로, 인간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주관적인 관계에 집중한 루터주의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중심 원리를 통해 칼빈은 우주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주의에서는 주관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교회의 지위가 향상되고 평신도들의 지위가 하강되었습니다. 반면, 칼빈주의에서는 객관적인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를 매개자나 선생으로서 교회가 공인해 줄 필요가 없어지면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각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 누구의 간섭이나 가르침 없이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어떻게 국가가 자유와 권위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그 자유와 권위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신학적 근거를 제시했고, 역사적으로 다양한 나라들(영국, 미국, 네덜란드)의 민주 공화주의(republican democracy) 제정에 기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칼빈이 발견한 일반 은총 교리를 통해서 칼빈주의자들은 기꺼이 학문과 예술 세계에 참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학문과 예술 세계의 열매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대(Golden Age)에 대해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17세기의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대국으로 여기는 것은 비단 정치 경제의 발전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유명한 레이든(Leiden) 대학교(저와 바빙크의 모교)나 브릴(E. J. Brill) 출판사, 혹은 렘브란트(Rembrandt)로 대표되는 17세기 화가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적 눈치가 빠른 분들은 제가 칼빈의 교리들을 전통적인 신학적 범주에 따라 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 교리(central dogma)로 두고, 이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들을 삶의 실제에 누구나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공리적(axiomatic)으로 사용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교리의 역할을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저울추로 한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으로서의 역할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후자의 역할을 위해, 저는 칼빈의 교리를 현대사회에 걸맞게 재조정하였습니다. 이런 재조정의 방법론으로 사용된 중심 교리 이론은 슈바이처(Alexander Schweizer)가 주창하고, 저의 레이든 스승 스홀튼(Johannes H. Scholten)이 네덜란드에 소개한 현대신학의 일원론적 방법론입니다. 중심 교리 이론은 루터주의는 칭의를 중심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주권 혹은 예정 교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이론입니다. 지금은 리차드 멀러(Richard A. Muller)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되어 분쇄되었을지라도, 여러분이 잘 아는 트뢸취나 조지 밴크로프트 등의 동시대 지성인들에게서도 드러나듯이, 제가 공부하던 시대에는 누구나 받아들였던 전제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저는 칼빈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 전개된 칼빈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무관용으로 칼빈을 이끈 그의 정교일치적 경향성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세르베투스 문제와 관련해 칼빈이 저지른 실수가 아무리 시대적 한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어느 누구라도 종교나 신앙의 문제로 국가의 간섭을 부당하게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국가는 종교의 문제에 올바른 정답을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정교분리의 사회에서 그럴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칼빈이나 도르트, 웨스트민스터가 고백하는 교회와 국가 간 관계는 국가가 참된 종교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에 관련된 칼빈주의 교리는 저와 바빙크를 통해 프랑스 혁명 이후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화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 처럼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의 교리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칼빈주의 교리 사용의 변화로 인해 제가 설파하는 칼빈주의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는 비판의 의미로 신칼빈주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다수의 칼빈주의자들이 제가 제시한 비전, ‘현대 사회에 걸맞는 칼빈주의’에 함께 동참하면서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는 칼빈주의의 부흥을 목격하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노동, 교육 등에 칼빈주의의 원리들이 칼빈주의자들의 삶을 통해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네덜란드 사회를 변혁시켰던 칼빈주의 원리는 사실 칼빈이 주창하고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칼빈주의 원리가 칼빈의 씨앗을 통해서 많이 드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각 시대에 필요한 열매를 맺도록 칼빈주의자들 스스로 노력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저는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한 제네바의 초대를 거절하고 그런 전신상을 세우는 것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하거나 불경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편적 진리의 요소로 가득한 칼빈의 사상을 저의 시대에 적실하게 활용하는 것이 더욱 칼빈을 참되게 기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 특히 개혁주의 성도 여러분, 칼빈이나 투레틴, 혹은 에드워즈나 바빙크와 같이 여러분이 간직한 귀중한 칼빈주의의 역사와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실 것입니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저 그들의 동상을 세우기만 하면 될까요? 아마도 칼빈주의의 위대한 사상의 씨앗들은 여러분들의 노력을 통해 여러분의 시대와 토양에 걸맞는 열매를 맺도록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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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비판하기 전에 물어야 할 세 가지 질문
by John Beeson
2020-08-12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비전도 바뀌었다. 나는 당시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나름 갖고 있던 리더십 경험에 근거해서 지혜를 좀 나눠야겠다는 좋은 마음으로 새로 오신 목사님께 편지를 보냈다.지금도 그 때 편지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목사님이 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 편지를 잊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목사님과는 그 이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 편지 이후 그가 나를 의도적으로 밀어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목사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내가 종종 편지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COVID-19 위기를 지나면서, 내 사역 기간 어느 때보다 많은 메시지를 받는다. 하나같이 다 나름 배울 게 있고 내게는 지혜와 겸손이라는 면에서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모든 메시지는 받는 이에게 언제나 감정적 그리고 영적인 피해를 입힌다.그럴 때면 나는 오래 전에 내가 썼던 그 편지를 기억한다.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어떤 면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는 “배나 존경할 자”라고 했다(딤전 5:17). 그럼 어떻게 해야 비판을 하면서도 우리가 목사님에게 배나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여기 내가 오래 전에 그 편지를 보내기 전 스스로에게 물었으면 하는 질문이 있다.1. 얼마나 친한가?나는 당시 목사님과 통성명 정도만 한 상태였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맘 잡고 보내는 메시지가 비판이라는 게 현명한가?생각해보자. 설교를 막 끝내고 들어온 내게 누구인지 잘 모르는 교인이 와서 한다는 말이 설교 중에 틀린 것에 대한 지적 뿐이라면 어떻겠는가? 목사로서 나는 사실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 비판을 잘 수용하고 싶지만 더 중요하게는 비판하는 성도들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다.당신과 당신 목사는 지역 교회에서 하나된 지체의 일부다. 그리고 하나님은 서로가 더 강한 유대감을 갖기를 원하신다. 물론 교회가 클수록 그것은 힘든 일이다. 그 어떤 관계라도 건강하기 위해서 신뢰는 필수다. 서로 간의 관계라는 맥락도 없이 이뤄지는 비판은 쌓여가는 관계에 심각한 도전을 준다. 당신은 교회의 고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함께 담당하는 파트너다. 당신의 첫 번째 목표는 교회의 생산품을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관계를 공고하게 다지는 것이다.목사를 잘 모르는 상태라면 제 3자에게 하는 비판을 포함해서 모든 비판을 자제하라. 비판하기 전에 먼저 목사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기를 권고한다.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지금 어떤 기도가 필요한지 물어보라. 상담사인 헨리 클라우드(Henry Cloud)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번의 비판이 있기 전에 최소한 다섯 번의 의미 있는 격려가 있어야 한다.”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내가 우리 목사님께 다섯 번 의미 있는 칭찬을 한 적이 있나? 페북에서 ‘좋아요’를 누른다던가 몇 개월 전에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설교 좋았어요'라고 던진 말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목사는 아마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여전히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의미 있는 칭찬 또는 격려를 떠올려보라. 어떻게 해야 그와 비슷하게 목사님께 할 수 있을까? 목사님으로 하여금 당신이 그의 편임을 알게 하라. 하나의 몸이 되어서 봉사하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라. 그러고 나서 하는 비판은 관계라는 맥락이 형성된 이후기 때문에 목사님은 당신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2.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이 질문은 상당히 수준 높은 자아 성찰을 요구한다. 오래 전 나는 당시 당면한 이슈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지를 보냈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것은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었다.스스로를 확인하라. 새로운 사역 방향, 목사님의 옷 입는 스타일, 목사님이 보내는 문자 스타일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살펴보라. 존경받는 어떤 단체가 지금 목사님이 시작한 사역과 비슷한 것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존경받는 어떤 목사님이 지금 목사님과 비슷하게 옷을 입거나 비슷한 투로 문자를 보내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일단 다른 존경받는 목사들도 지금 이 목사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시작하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실은 생각만큼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소규모 그룹이나 교회 친구들과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슈를 나누지 말라. 소문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3. 스스로 얼마나 잘났는지 증명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스무 살 때 나는 이 점을 확인했어야 했다. 당시 누가 내게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해도 내가 그리 순순히 그렇다고 수긍하지는 않았겠지만, 편지를 보낸 내 동기에는 분명 당시 나의 신학적 지식을 새로 온 목사님께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 편지를 읽고 그가 나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를 바랬다.어리석었다!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교인들 중에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습득한 신학적 지식이 성품보다 더 중요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나라면 거만한 천재 신학자 한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신학에 무식한 천 명의 사람을 선택하겠다.존경과 격려오늘날 많은 서구인들이 권위를 의심하고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비웃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모습은 섬기는 리더고 또한 리더십 아래 있는 사람들에겐 그들의 리더와 동료를 존경하는 모습이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자신의 권위를 악용해 개인의 이익을 착복하고 돌봐야 할 교인을 괴롭히는 목사들을 보호하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전혀 아니기에, 독자들은 내 말을 왜곡하지 않으면 좋겠다. 비판의 근본 이유와 동기에 관계없이 모든 지도자는 다 비판을 통해서 자랄 수 있다. 목사로서 나의 책임은 더 겸손해지고 모든 비판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다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호소했다.“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이와 비슷하게 히브리서 저자도 말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오직 권하여”(히 10:24–25).우리의 모습은 격려로 나타나야 하고(딤전 5:1),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같이 장로를 닮아가야 한다(히 13:7).교회를 이끌고 섬기는 데 격려가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주변 사람들을 세우고 또 모든 격려의 원천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 높일 수 있게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Questions to Ask Before Critiquing Your Pastor번역: 무제
리더십
교만
교회생활
비판
교회
자아성찰
존경
창조 신앙으로 몸과 성을 바라보기
by 이춘성
2020-08-1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성(性)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성은 인간의 생명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창1:27)은 인간은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성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번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성의 사용을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하지만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성’과 ‘생명 번영’이라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생명 없는 성', '성 없는 생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성 없는 생명'이란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 밖에서도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 의학과 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 복제를 통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생명 없는 성'이란 성을 단지 남녀 사이의 쾌락만을 위한 놀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단지 감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책임감 없는 사랑과 같다. 책임을 제거하고 직감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은 단지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남용하는 세속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가속되었다.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난자와 정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어 아이가 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이것은 불임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임신 걱정 없이 순전히 섹스만을 즐길 수 있도록 각종 피임 방법을 고안해 내게 하였다. 결국, 피임법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 생명의 신성하고도 거룩한 연결 고리를 제거하고, 성을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성인 놀이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신학자 칼 투르먼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시하였던 과거 사람들과 달리, 현대 사람들은 성을 경시하고, 개인화시켰다고 말하였다.유튜브, 트위터 등의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과 텔레비전, 신문 등의 대중 매체들은 성을 성인들의 놀이 정도로 취급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매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 100여 년 전 1880년대에 미국에서는 YMCA, YWCA 등의 기독교 단체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시행하였다(Carrera). 당시의 성교육은 일종의 순결 서약 운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중 매체는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고, 10대 임신율이 오르고, 불법 낙태로 여성들의 건강이 위험해지자 성교육은 방향성을 새롭게 갖췄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보다는 호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나쁜 결과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성교육을 시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쳐 안전한 성관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미국 청소년들의 약 40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질병관리본부의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의 5.7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고, 최초 성경험은 만 13.6세로 나타났다. 최근 소셜 벤처 EVE의 “2019 청소년 성(性)문조사”에 의하면 약 54.7% 이상의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다. 비록 임신율은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성교육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라는 비뚤어진 인식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과 생명을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난 것이다. 결국 성의 경시와 도구화는, 나의 생명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장기매매와 같은 생명 경시와 생명의 도구화를 가속 시킬 것이다.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성교육이란 성에서 책임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다. 그 결과 성은 일종의 성인 놀이로 폄하되고 있다. 그리고 어른을 흉내 내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성교육이 오히려 성적 호기심을 더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에 관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성교육 전문가들과 교회에서는 조기 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교육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와 비신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공적인 영역에서 현대적 성교육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교회가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다. 또한 현대의 성교육 중에서 몸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무시할 부분이 아니다.초기와 중세 기독교는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몸을 분리하고 이를 차등하는 영육 이원론이 지배하였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이다. 더러운 육체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쾌락으로 탕진하는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영육 이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정정숙).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시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창1:27).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몸과 영혼이 유기적으로 연합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간접적이지만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구들(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이해하고 이를 균형 있게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번영하게 하고자 하신 문화명령을 시행하는 창조자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기본적인 통치 자질이다. 비록 이 자질이 타락으로 어그러지고 무너졌지만, 이 기능은 여전히 인간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 신자는 타락 이전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창조의 세계관을 회복하고 이에 따른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가족, 새로이 태어날 아이들을 양육하고 언약의 자녀들로 키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신자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자들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라는 자녀들에게 신체가 얼마나 소중하며 가치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과 부모부터 신체의 여러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며, 왜 창조되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몸의 창조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교육도 이러한 맥락 가운데 이해하고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 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춘기의 이차 성징이 일어나는 아이들이 신체 변화를 무방비로 맞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 신앙 안에서 이것들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마지막으로 몸, 특별히 성과 관련된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아이들이 질문하거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인터넷, 잡지, 동영상, 친구, 책 등)을 찾지 않는 한 일부러 가르칠 필요는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호기심이 생겼을 때, 그때 구체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답하는 것이 좋다.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에는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3:5;8:4)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다(Thomas). 참된 사랑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만을 깨운다면 이것은 욕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교육에 있어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자극에 노출되어 있고, 아직 깨우지 말아야 할 성적 호기심이 조기에 발달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의 성과 신체에 대한 질문 앞에서 교회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성에 대한 창조신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가지고 신체의 의미를 가르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성과 몸에 대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 외에 현대의 타락한 성문화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 성교육은 이 시대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며, 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신학은 모든 신자가 알아야 할 신앙을 위한 지식이다.
생활
건강
창조
타락
성
생명번영
쾌락
세속문화
성교육
아내를 이끌어 주며 사랑하는 법
by Brad Merchant
2020-08-10
결혼은 완전한 실재를 보여 주는 불완전한 그림이다.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신성한 진리를 드러내는 메타포, 즉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받는다는 진리가 어떠한 의미인지를 이 가시적인 세상 속에 잠깐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결혼이 계획되었다고 설명한다.하나님은 모든 결혼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드러내기 원하신다. 어떻게 그런 모습을 드러내실까? 자신의 아내를 경건하게 리드하며 그녀의 성장에 유익을 끼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통해 그리하신다.바로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남편이 감당해야 할 여섯 가지 실천 사항이 있다.1. 선한 의도를 가지고 질문하라잠언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선한 의도를 가지고 아내에게 질문하는 일은 그녀의 영적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 된다. 그 시작 단계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아내에게 규칙적으로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당신의 신앙생활에 격려가 되는 일은 무엇일까?- 지금 당신의 신앙생활에 낙심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내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내가 남편이자 아빠이자 한 사람의 신자로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2. 아내를 섬기라매일 자문해야 한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아내의 일상을 좀 가볍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세탁을 하거나, 그릇을 씻거나, 애들을 데리고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우리는 남편으로서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말이다(막 10:45). 그분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필요를 돌보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반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시며,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셨다.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의 가정은 휴식을 취하기 위한 피난처일 뿐 아니라 섬김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하루하루 가정에서 아내를 섬기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3. 결혼 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라결혼 생활을 위해 시간을 일부러 ‘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시간을 ‘갖지’ 못한다. 인생은 언제나 바삐 돌아간다. 따라서 건강한 결혼 생활에 우선순위를 두고 한 해의 스케줄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일부러 결혼 생활을 돌보기 위해 스케줄을 세우지 않는다면, 결혼 관계는 곧 메말라 가기 쉽다. 부부마다 생활 패턴이 다르기에 스케줄이 일정할 순 없지만, 우리 부부의 경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리듬을 따라 계획을 세운다.매일마다 기도하기 (자기 전에)주마다 데이트하기 (금요일 저녁에)달마다 일상에서 탈출하기 (하루 온종일)분기마다 가볍게 여행하기 (1박 2일로)해마다 휴양하기 (며칠 간 둘이서)이처럼 규칙적으로 아내와 사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스케줄을 짜서 달력에 표시하기 바란다.4. 아내에 대해 알아 가라베드로는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권면했다(벧전 3:7). 이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아내에 대해 알아 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스포츠팀의 연간 성적만큼이나 아내의 마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의 아내가 요즘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또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이 물어본다면, 이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1) 계획적으로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2) 말하기보다 듣기에 더 신경을 써야만 올바른 답변을 할 수 있다.그러므로 TV 리모컨이든 스마트폰이든 무엇이든 간에 아내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다 내려놓고, 그녀에게 집중해서 대화하기를 바란다. 야고보서 1장 19절의 원리를 결혼 생활에 구체화하라. 그리고 아내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그녀에 대해 알아 가라.5. 둘이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라건강한 결혼 관계는 배우자의 성장을 상호적으로 추구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우리는 배우자가 예수님을 더 닮아가도록 도와야지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명목 하에 배우자의 변화를 바라지도 않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내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그녀를 사랑하는 핵심적인 방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서로 같이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어 보라. 또한 좋은 컨퍼런스에도 함께 가고 주일 설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보라.하나님은 아내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라고 남편인 우리를 부르셨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 함께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알아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라.6. 아내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나는 결혼 생활에 관한 성경구절 중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라고 권면하는 잠언 5장 19절을 좋아한다. 여기서 “연모하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구약성경의 다른 데서는 사람이 술에 취해 길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사 28:7). 이 단어를 통해 잠언 기자가 남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아내와 사랑에 푹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잠언을 하찮은 조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이후에 깨닫게 되듯, 결혼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대 사회에서 결혼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치러지곤 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잠언에 담긴 지혜가 더욱 놀랍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모든 조건을 뒤로하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정신을 못 차릴 만큼 사랑에 푹 빠져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아내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수 있겠는가? 여기에 몇 가지 팁이 있다.왜 아내를 사랑하는지 말해 주라: 당신이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구체적인 이유를 카드에 써서 건네주라.타인 앞에서 아내를 칭찬하라: 다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를 더욱 존중해야 한다. 그녀의 삶에 드러나는 아름다운 덕목을 볼 수 있도록 타인에게 알려 주라.따뜻한 행동으로 아내를 놀라게 하라: 당신이 애들을 돌보고 아내는 밤새도록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하라. 또 꽃다발을 들고 그녀가 일하는 회사에 찾아가라. 아니면 출근하기 전 그녀에게 작은 쪽지라도 남겨 마음을 전하라.아내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이야기하며 그녀를 격려하라: 아내와 데이트하며 천천히 구체적으로 그녀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말해 주라. 그녀가 더욱 참을성 있고 지혜로우며 친절하면서도 담대할 뿐 아니라 경건한 모습까지 갖춰가고 있다면,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해 주며 그녀의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는 변화를 지켜보라.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에 빠져 세상이 그들을 볼 때 마치 사랑에 취한 자들처럼 보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6 Ways to Lead and Love Your Wife번역: 장성우
가정
결혼
아내
섬김
시간
연모
오틀런드
칭찬
격려
성장
강을 보며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라
by Brett McCracken
2020-08-09
사막같은 날씨에 강 근처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시원한 물과 초록빛 강둑이 주는 신선함을 느낀 적이 있다면, 시편 126편 4절은 당신에게 그 어떤 구절보다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흐르는 물만 있다면, 아무리 말라 비틀어진 땅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유타에 있는 자이언 캐니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버진(Virgin)강이 사막과 다름 없는 마른 협곡 사이를 지나며 그곳을 푸른 빛과 야생의 생명으로 채운다. 미국 땅에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다 마찬가지고, 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강이 다르지 않다. 강은 그 어디에서 흐르던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한다. 강은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생명을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매년 여름이면 언제나 사람들은 강가에 모인다. 수영과 낚시같은 놀이를 위해서든 또는 강가에 앉아서 삶이 주는 위대한 경이감을 맛보는 명상을 위해서든, 강은 전 세계 모든 인류로부터 사랑받는다. 그렇기에 성경에 강과 관련한 이미지 상징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성경 중에서도 가장 위로가 되는 시편 46편을 쓴 글쓴이는 그 누구보다도 이 강의 이미지를 잘 사용했다(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사도 요한은 또 이렇게 말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계 22:1). 성경 저자가 “강”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임재라는 메시지를 표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지구에 사는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강으로부터 배우는 세 가지 교훈감각이 둔하지 않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시 19, 롬 1 참조),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도 특히 왜 강이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에게 설명하는 도구로 자주 사용되는지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은 자연의 이미지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도구로 자주 사용했는데,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그 안에는 그분의 특징(signature)이 자연스럽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자세히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에서 몇 시간에 걸쳐 집중해서 그의 작품을 보다 보면 그 유명한 추상화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종종 스크린이나 디지털로부터 벗어나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건강에만 좋은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유익한 이유다.하나님이 창조한 강 주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신학적인 교훈을 더 잘 얻을 수 있다. 여기 세 가지를 소개한다.1. 강에 가까이 있을수록 더 번성한다시편 1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이 내용은 4절에서 말하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와 완전히 대비된다. 이런 이미지는 사막에서 강가에 다가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메마른 나무에서 갑자기 가지와 잎사귀가 자라면서 무성해지더니 참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강가에 있는 나무는 지속적으로 물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결코 마를 일이 없어서 잘 자란다.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런던과 파리 그리고 카이로와 로마같은 도시가 다 강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강은 비옥한 농지, 살아 움직이는 자연환경 그리고 무역의 통로까지 제공한다. 강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생존 여부는 생명의 강이 되시는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유일한 “생수”(요 4:7–15)의 근원이기에 우리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유지시킨다. 2. 강의 힘은 우리를 만들어간다강이 평화롭다고 해서 거기가 항상 안전하다고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목양적인 평안을 주는 자이언의 버진강은 종종 치명적으로 바뀔 때가 있는데, 그것은 폭풍우가 엄청난 물길을 쏟아내릴 때다. 강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졸졸 흐르던 시냇물도 물살을 거슬러 헤엄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강하게 흐를 수도 있다. 그랜드캐니언을 보면 협곡을 따라 꾸불꾸불한 길을 만들어낸 강의 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능력을 가진 만큼이나 강은 우리에게 엄청난 두려움이 무엇인지도 알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아슬란으로 등장하는) 주님이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하나님이라고 썼다. 기독교인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길들이려고 한다. 단지 토마스 킨케이드(Thomas Kinkade)의 그림에나 등장하는 평화롭게 흐르는 강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낙원을 장식하기는 하지만 결코 위험한 방식으로 우리를 만들어가거나 방해하지는 않는 평화로운 물줄기 정도로만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세고 거칠게 흐르는 강이다. 그렇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강둑에 안전하게 서 있으려는 생각 대신 그 흐르는 물살에 몸을 던져야 한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가 주시는 신선한 물을 마시도록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흐르는 물살과도 같은 강한 능력이 우리를 움직이고 다듬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산 돌”(벧전 2:5)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3. 우리는 강 같은 통로가 될 수 있다하나의 물줄기가 여러 지류로 나뉘어 흐르면서 각각 주변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물과 침전물을 공급하는 지점인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다. 통로(channel)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도구(vessel)가 되어 강이 가진 축복을 배분하는 데 쓰임 받는다는 의미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복음에 적대적인 땅에서도 번성하는 삶의 양식을 축적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른 땅에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해서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 땅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 44:3–4).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주변에 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가? 동네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이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독성이 있는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고 있는가? 기독교의 존재가 새로움과 생명을 주고 성경 말씀을 축적하여 삼각주를 만들게 하는가? 행여나 우리의 존재가 가져다주는 것이 오염되었거나 유독성 있는 물은 아닌가? 이 타락한 세상은 바짝 말라서 이제 불모지가 되었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희망이 사라진 사막이 되었다. 이 세상은 실로 갈급하게 생수를 원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우리가 예수님 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생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수가 우리의 삶에 확실한 증거를 남길 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시원함을 주는 작은 시냇물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삶과 공동체는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세상 안에서 푸르른 녹지가 되어야 한다. 비옥한 삼각주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가 되어서 생명을 주는 이 강가로 지치고 힘든 이들을 초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다른 이들을 강가로 이끄는 초대장이 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부르던, 종종 강가에서 가졌던 수련회에서 부르던 이 노래를 다시 기억하자. “강 같은 삶이 내 안에서 흘러 넘치네…. 더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 영혼 안에서/ 넘쳐라,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나를 온전케 하소서/ 넘쳐라, 오 좋다(철썩 철썩)/ 내게 주소서/ 풍성한 삶을 주소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ok at a River, Learn About God번역: 무제
영적_성장
영성
시편126편
임재
하나님성품
CS루이스
피카소
생수의근원
축도에서 목사는 왜 손을 들어 올릴까요?
by 노승수
2020-08-08
우리가 매주일 만나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다. 축도에서 항상 목사는 손을 들어서 축도를 행한다. 이 시간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드린다. 기도라면 굳이 손을 들 필요가 있을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고 보이기 위함이니 당연히 축도 시에는 눈을 뜨고 목사의 들린 손을 바라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에는 낯설다는 것을 안다. 같은 이유로 사도신경 역시 기도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며 눈을 뜨고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축도 후 폐회를 알리는 송영의 찬송을 드리는 동안에 그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축도에서 왜 눈을 뜨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아야 할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이지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의 영어 표현은 “pronounce a benediction”이다. Benediction의 라틴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며 pronounce는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 등을 담은 동사로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다. 즉, 복에 대한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이라는 의미다. 기도를 의미하는 “도”자를 쓰니 기도라 생각하기 쉽지만 토마스 레쉬만(Thomas Leishman)은 “강복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약속에 의하여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목회의 전달 행위일 수밖에 없고, 조건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WPA, 102-103쪽)라고 말한다. 즉,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복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성례전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가 그렇듯이 자격 있는 직분자만 하는 게 맞다. 교회사적 전통에서도 동방 교회에서 사제는 한 손을 들었고 주교는 두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안수례와도 같았다. 특히 그날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할 것이라는 선포다. G. 판도른(G. VanDooren)도 축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칠 때 하는 축도는 다음 주일까지 우리의 전 삶을 ‘감싼다’. 이 축도는 하나님의 복과 평화와 은혜와 함께하심이 모든 날들 동안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약속이다. 이 축도는 거룩한 기원도, 예배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언약적 관점에서 본 예배의 아름다움’ 안재경 역, SFC, 68~69쪽).그러므로 축도를 할 때, 지나치게 문자에 얽매여서 고린도후서나 민수기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그날에 주어진 설교의 말씀을 삼위하나님을 대리해서 그 날의 메시지의 핵심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선포할 필요가 있다. 축도는 그날 선포된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위탁하며 하나님을 대리해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다. 신자는 예배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된 약속이 한 주간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축도는 축원문의 형식, 곧 “~하옵니다”보다는 선포 형식, 곧 “~지어다”로 이뤄지는 게 더 바람직하다.이런 관점에서 축도는 당연히 그날 말씀을 선포한 목사가 직접하는 게 맞다. 준비한 메시지의 본질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도권과 축도권을 분리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법은 일종의 파행이다. 강도할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축도할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이 맞겠다. 강도사에게 축도할 권리를 주든지 아니면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강도사 제도를 없애든지 하는 게 맞겠다.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면 장로교회에서 목사 회원의 평등의 원리에 맞게 강도권을 주었다면 축도 역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장로교회 원리상 맞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축복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축복하여 기도하는 것은 기도지 ‘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와 가정에서의 ‘축복 기도’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설교와 성례전, 그리고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격 있는 직원의 대리가 필요한 것이다.그리고 목사가 손을 드는 것에 관한 성경 상의 근거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세가 아말렉의 전투 중에 손을 든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출애굽기 17장 16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런데 이 개역개정역은 약간 의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좀 까다롭고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완전 직역 형태인 YLT로 보면 이렇게 번역해 두었다. “and saith, ‘Because a hand is on the throne of Jah, war is to Jehovah with Amalek from generation-generation.’(Exod. 17:16 YLT)” 사실 16절의 전반부는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손 하나가 야훼의 보좌 위로 들리리니 야훼와 아말렉 사이에 대대에 전쟁이 있을 것’이다.”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부림절의 기원이 되는 에스더 사건의 대적이었던 하만이 바로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 전투했던 아말렉 족속이다. 왜 하나님은 이 전쟁이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단지 전쟁을 하면 될 텐데 모세의 손을 들게 하셨는가? 이것은 구원 계시적 사건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단지 아말렉 민족이라는 특정 대적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대적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높이 들린 모세의 손이 장차 있을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세상에서의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 직접 나섰던 장수가 여호수아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예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의 아말렉과의 전투는 하나님 보좌 위로 들린 손이 그 승리를 결정했다. 이 본문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대리인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그 대리인이 올린 손을 바라보며 이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신자는 축도에서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세상 가운데서 영적 전투를 하면서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받은 것이다.
예배
축도
성례전
동방교회
대리인
아말렉전투
모세의기도
여호수아
영적전투
용서받음, 하나님 경외의 원리
by Michael Reeves
2020-08-07
시편 130편 4절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이 구절은 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이다”라고 해야 맞지 않은가? 굳이 경외,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구절이 “그러나 심판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그런데 시편 구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더 이상한 것은, 이 시편 저자가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4절을 지나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5-6절). 그는 이렇게 확신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인다.“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새 언약이 주는 경외C. I. 스코필드(Scofield)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구약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구절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단지 구약의 경건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은 사실상 새 언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예레미야 33장에서 새 언약이 가진 경외감의 특징을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예상을 허물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물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예레미야 33장에서 주님은 순전한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풀어놓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바로 이런 모든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을 통해서 묘사한 경외감의 일종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것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향해서 가지는” 경외감이다(행 9:31 참조).효심으로서 경외이것은 또한 신학자들이 종종 “종들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두려움”과 비교해 “효심”으로 표현하는 경외감이기도 하다(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마음). 사실상,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졌던 효심이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그 효심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1–3)효심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기쁜 공경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 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반대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한 성령님은 주를 향한 경외감의 성령님이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이는 참으로 그 경이로움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용서는 경외감이 자라는 토양이다시편 130편 4절은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감이 자라도록 하는 비옥한 토양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공포스런 심판자고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인으로서의 자연적인 두려움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가지는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때문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자에게,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만 하는 자에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떨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ould Forgiveness Possibly Lead to Fear?번역: 무제
구약성경
신학
시편130편
사유하심
두려움
스코필드
예레미아
이사야
호세아
존번연
신학적 비전을 놓고 깊이 고민하는 목회
by 김상일
2020-08-06
“교회 지도자들은 늘 복음을 사람들의 마음과 중심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만 복음이 단순한 신앙 문답이 아니라, 깊고 지속적인 변화의 능력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복음 적용 없이 단지 교육이나 설교, 세례, 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센터 처치, 115쪽) 팀 켈러의 ‘중간 지대 신학하기’ 작업을 통해서 성경과 교리를 어떻게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위한 뼈대로 세워갈 수 있는지를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다. 삶을 흡수하는 성경이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그리고 삶으로 들어가는 교리와 전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배운 것은 성경 안에, 교리와 전통 안에 이미 실제적인 목회 사역과 프로그램, 방법론에 관한 풍부한 시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말한 신학적 비전이기도 하다. “그럼 무엇이 신학적 비전인가? 그것은 복음을 충실하게 재서술한 문장으로서, 역사의 현 시점에서, 그리고 한 특정 문화의 삶과 사역과 선교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지에 대한 풍성한 시사점을 포함하는 것이다”(센터 처치, 29-30쪽)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란, 다름 아닌 신학적 비전 세워가기다. 특정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비전은 여타의 성공하는 교회들의 그것을 그대로 베끼거나 반복해서는 절대로 세울 수가 없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비전은 오직 그 교회의 상황적, 문화적, 시대적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와 일꾼들이 한마음으로 자신들이 속한 교회적 전통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며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와 교리 풀어내기라는 작업 안에 이미 목회와 사역에 관한 고민과 질문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때만 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의 방향성을 알고, 또 실제로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그렇다면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중간 지대 신학하기의 뼈대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어떻게 해야 중간 지대 신학하기에 합당한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세워갈 수 있을까? 일단 먼저 전제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교회에 잘 맞는 목회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서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찾아 나간다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창의성과 목회적 맥락에 대한 고민을 필요로 한다. 이런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많은 경우 성도들의 고민과 질문을 한 축으로, 그리고 성경 해석과 교리가 복음에 대해서 전하는 메시지를 다른 축으로 해서 어떻게 교인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의 목적이 혹시 교회 성장은 아닌가? 만약 그것이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고안하는 구체적인 목표라면, 켈러의 이 말을 들어보라.“교회 성장 운동은 사역 현장에 지속적인 공헌을 해왔다. 하지만 기법과 결과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사역자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긴 것도 사실이다. 무리한 교회 성장 운동이 경건한 성품과 하나님의 주권의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센터 처치, 18쪽)교회 성장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법과 결과를 강조하는 운동이다. 목표가 교회 성장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심리적, 경영학적 기법을 도입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일이 목표가 되면 저절로 기법이나 결과가 중요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목표는 중간 지대의 신학함과는 전혀 맞지 않다. 그런 기법이나 결과는 복음 메시지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음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특정한 목표 즉, 교회의 양적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만을 위한 기법과 결과는 도리어 교회 공동체가 복음에서 유리되어 복음과는 별 상관없는 길을 가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만든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치 고고한 백로처럼 목회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목회자들이 더 낫다는 말도 아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말은 단지 기법이나 결과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복음이 자신들의 삶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면 바로 알아차리게 되어 있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지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성장을 경험하게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목회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목회자들을 은근히 깔보면서 자신들은 오직 교단적인 전통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즉, 교인들의 삶의 맥락에 대한 관심은 접어둔 채로 오직 성경 본문의 본래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또한 중간 지대에서 신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서 뼈대가 되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이 상정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팀 켈러는 그것을 복음 부흥이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적 복음 회복은 종종 ‘부흥’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신자들 전체가 개인적인 복음 회복을 함께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교회들은 아무리 그들의 신학이 건전하다 하더라도 복음의 고유성을 간과하기 시작하고 다른 종교들에 빠지거나 불신앙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교리 교육은 각각의 교리들이 복음의 메시지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놓치게 되고 윤리 교육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완성된 사역에 근거하지 않게 된다.”(센터 처치, 114-115쪽)만약 수적인 성장 대신 복음 부흥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가 된다면, 기법이나 결과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목회자와 사역 리더들은 복음이 무엇인지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이 과연 어떤 메시지인지를 계속해서 묻는 일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성경으로 돌이키도록 이끌고, 교리와 전통 속에서 밝혀진 복음으로 되돌아가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다. 목회자와 사역자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더불어 그 복음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성도들은 특정한 문화적, 지역적,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나름의 질문과 고민,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어떤 메시지인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그들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들에 비추어서 하는 고민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가 복음을 피부에 와닿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사역의 조직과 프로그램을 갖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이런 고민은 조직과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세워가는 일은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직 교회를 섬기는 리더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 성장 대신 정말로 복음 부흥을 놓고 고민하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켈러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복음이 가슴에 깊이 들어올 때—신자들이 더 이상 유능하고 의로운 자기 이미지를 고수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방해하는 장벽들이 무너지며,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경험을 더 깊이 할 수 있다. 더 이상 핑계나 회피를 할 필요도 없다. 복음으로 인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공감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겸손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서 교회 안의 모든 관계들은 더 깊어지고 두터워진다. 기존의 문화와 뚜렷이 차별되는 이러한 교회의 특성들은 바깥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센터 처치, 170-171쪽)복음은 메시지를 전하며, 그 메시지는 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면서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며, 고민하는 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관계 맺는 방식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체면 문화 속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게 하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이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게 하는 목회 프로그램이나 방법론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세워가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처음도 그리고 마지막도 복음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는 일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 질문을 놓고 고민하는 많은 목회자들과 사역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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