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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by Sam Allberry
2020-10-08
서구 세계가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동성간의 결혼이 결코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주제 또한 결코 주류 사회가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고 현대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변화를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보의 필수 신호이자 바꿀 수 없는 선(good)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견해가 비록 서구 사상으로부터 크게 지지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합법적인 것으로는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는 점점 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지금부터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발생한 최소한 네 가지의 변화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안을 제시하겠다.1. 도덕적 직관이 바뀌었다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그의 획기적인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우리의 도덕적 신념이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직관적인 이유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직감적으로 안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반응을 유도하는 인간의 직관은 무엇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아주 많이 바뀌었다. 특정한 도덕적 미각이 새로운 싹을 틔우더니 작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 과정이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가 아닌가의 여부, 자유롭게 하는가 억압하는가의 여부 그리고 공정한가 차별적인가의 여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고, 바로 이런 요인이 우리의 도덕적 결론을 결정한다고 하이트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감안할 때 서양 문화가 왜 동성 결혼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새롭게 싹을 틔운 도덕적 미각 중 첫 번째를 적용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 아닌가? 길거리에서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성애 커플이 결혼한다고 할 때, 그런 경우 과연 내게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까?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건 누가 봐도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 번째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어떤 커플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데, 어떤 커플은 그렇지 않다면, 그걸 어떻게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옳은 것 같다. 그렇기에 한때 동성 결혼에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각을 바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추론이 왜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변화하는 인간의 새로운 도덕적 직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현재를 사는 세속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도덕적 추론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TV 토론을 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도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여자 토론자는 청중들이 듣기에도 매우 설득력 있고 간결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랑, 당연히 교회도 축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여기에 반해서 상대 토론자로 나온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는 계속 앵무새처럼 이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시청자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무언가에,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성경의 권위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주장에 대한 응답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게 우리 인간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에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에 어떤 순서를 매겨야 옳은지 알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2. 우선순위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세속적인 사람들은 소수자(LGBTQ+,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향해서 자행되었던 과거의 차별을 되돌아보고 끔찍해한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동성애 공포증과 게이 커뮤니티의 악마화로 인해 그들이 받았던 끔찍한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과 같은 영화와 ‘트랜스페어런드(Transparent)’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한때 명백하게 희생양으로 만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오히려 연민을 가진다. 여러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 왕따와 이런 식의 괴롭힘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행되었던 차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은 이제 교차 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사회가 주는 피해로 인해 소수자가 침묵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해자 위치를 하나의 특권으로까지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교차 지점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소수자 지위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공 광장에서 가지는 신뢰도는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평등한 경쟁의 장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불공정의 현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흑인, 여자, 레즈비언이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보다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이러한 역학 변화는 또한 소수자가 정서적 또는 심리적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얼마 전 나는 한 일반 대학 캠퍼스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게 성생활과 복음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캠퍼스의 소수자 옹호 단체가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시위자들을 만나 그들의 우려를 들었고, 내가 행여라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이 그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은 행여라도 그 모임에 참석한 동성애 기독교인이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상처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좀 더 알아보았더니, 아무리 온유하게 표현을 해도 단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소위 말하는 진보적 사고라는 게 사실은 왜 그렇게도 많은 검열을 자행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관점이 해를 끼친다면 그런 관점은 더 이상 거론될 수도 또 토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은 그냥 침묵하거나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3. 성과 결혼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이런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이뤄졌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성적 혁명은 1960대로까지 거슬러간다. 첫 번째로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섹스를 출산과 연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섹스는 이제 단순히 즐거움의 방법이고 굳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초음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감수성 및 발달 등에 대한 의학적 이해가 점점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찬성하는 로비가 왜 그렇게 열광적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궁극적으로 낙태는 태아에 관한 게 아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섹스를 하는, 바로 그 권리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현재 많은 서방 국가들이 동성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현실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훨씬 더 중요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자녀 출산을 포함해서 평생 지속해야 하는 거룩한 약속이 아니다. 그 대신 결혼은 이제 사실상 유연성을 가진 하나의 낭만적인 계약이다. 상대를 향해서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감정이 사그라드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게 결혼이 되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득세하는 한 굳이 상대 배우자가 이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이 단지 낭만적인 감정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이다. 4.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진짜” 당신은 당신 자신이 내면 깊이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 가지는 서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 다음에,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진짜”는 오로지 당신만이 발견할 수 있고,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이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이 가진 몸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이다. 무신론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몸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붙어있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의미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진화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리적인 것은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몸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진 몸이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비록 몸이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그 어떤 식으로도 결코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네 가지 변화는 우리가 사는 이 문화적 시대를 탐색할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성 윤리와 성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이해는 결코 기이하거나 구식이 아니다. 그건 단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들이 단지 세속 사회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교인들의 의식 깊숙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물다섯 살 아래의 청년이라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들이 숨 쉬고 살아온 산소이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교회에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성경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록 성경적으로는 확신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10월 9일 아티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집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번역: 무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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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하이트
참된 신앙이 가져다주는 변화
by 노승수
2020-10-07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신앙 감정론에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표현을 읽을 때 마음에서 떠올리는 것은 가슴에서 뜨겁게 솟아오르는 감격과 같은 감정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신앙 감정론이 말하는 참된 신앙의 감정이란 어떤 끌림이다. 동물들 중에 밤에 다니는 동물을 야행성이라고 하고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들을 주광성이라고 한다. 이런 본성에 새겨진 성질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초자연적인 본성”이다.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믿음을 정의하기 위해서 몇 가지 심리학적인 개념을 동원했는데 habitus라는 습관의 개념을 동원했다. 통상 습관이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반복 숙달된 일종의 적응 기제다. 이런 적응 기제는 기본적으로 획득되는 성질을 지닌다. 그런데 이렇게 획득된 습관이 아니라 “주입된 습관(infusa habitus)”을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성품을 향해 끌리는 감정을 말한다. 인간은 부모가 생식을 통해 유전해준 오염을 가진 채 태어난다. 인간의 전 존재는 죄가 스며들어 그 부패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 그 부패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독특한 습관을 형성한다. 구체적 예시로서 나 자신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내 십대와 이십대에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 혼자 짝사랑 할 때는 가슴이 뜨겁다가 막상 상대가 관심을 보이면 마음이 식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경우에도 거절당하는 것 같은 정서가 늘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인 게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기까지 한 평생이 걸렸다. 지금도 나를 지배하는 밑바닥 정서로 남아 있다. 내 첫 연애는 이런 나를 각성하게 했다. 헤어짐의 과정도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말에 아르바이트를 마치던 날 잠깐 보고 가라는 점장의 말에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음에도 관두라는 말을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은 추석 선물이고 상여금이다. 이런 태도는 어린 시절 주요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양육자의 태도를 거절로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했던 내 태도와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정말 거절당하지 않으려는 생존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정말 진심을 다하는 태도도 거절에서 비롯되었다. 상대를 진심을 다해 이해하려는 태도도 내가 거절당할 때 아팠던 것을 다른 사람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이 일었다. “그분이 날 사랑할리가 없어”라는 막연한 느낌은 늘 나를 괴롭혔고 어떤 성경공부나 지적 이해도 이런 내 정서와 정체성을 바꿔놓지 못했고 늘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움츠러드는 나는 늘 자신을 관계에서 소외시키는 선택을 했었다.이제 그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가이드를 할 만큼 사랑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이다. 이런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결의 습관이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분명한 정서가 내 안에서 생겼다. 내 청년 시절 이 습관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설명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표현의 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은 주입된 습관이고 본성의 한 부분에 심겨진다. 이 습관은 초자연적인 습관이다. 자연적 방식으로 체득되지 않으며 이 심겨진 습관은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자란다. 믿음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여 은혜의 수단을 강구하게 되면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성화이다. 은혜는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렇게 주입된 은혜는 믿음의 습관이 계속 자라고 강성해지게 한다. 믿음의 습관이 자라서 소망과 사랑의 습관을 불러온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습관은 모두 은혜의 주입의 결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난 초자연적인 습관 곧 덕이다. 이 습관은 그 시초에서 심겨지기는 했으나 은혜의 주입을 통해서 은혜를 먹고만 자라난다. 그것이 자라나는 현장이 교회며 공동체의 현장이다. 성화는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종교개혁 전통은 특정 개인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향해 거룩한 무리라고 일컬은 바울 사도의 저술을 따라 “성도”라고 부른다. 이것은 거룩함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너희 안에”는 우리 개개인 안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midst)” 혹은 “사이에(among)”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관계 가운데 임한다. 바벨탑 사건은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한 것은 생물학적 본성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의 죄의 습관을 유전했다. 그 습관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습관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내가 사람들의 호의가 모호한 신호로 전달될 때, 나도 모르게 거절로 해석하는 것처럼, 또 그 해석이 우리를 소통하지 못하게 하고 움츠러들게 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한다. 바벨탑은 단지 언어의 장벽만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이 각기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하는 것은 단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믿음의 습관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고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은 심겨진 것이지만 사랑은 연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강화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습된 습관이라는 말이다.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므로 은혜의 의해서 형성된 습관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바로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신뢰 관계 속에서 영적 걸음마를 배우는 일이다. 가정과 어머니로부터 우리가 걷고 말하고 일어서며 좌우를 분간하고 옳은 일을 배우는 것처럼 영적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우리는 이 영적 습관을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 소통의 감정이 바로 거룩한 감정이다. 현대 심리학은 아이가 어려서 형성하는 애착이 아이가 장차 사회성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건강한 애착은 타인을 신뢰하게 만들고 그 신뢰의 경험이 공동체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사람의 성장과정이 이러하듯이 영적으로 출생한 신자는 교회로부터 이런 애착을 경험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건은 주권적이며 우리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으나 성화의 과정은 바로 이 은혜의 분여(impartation) 과정을 통해서 사랑의 교제에 대한 경험의 누적으로 형성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교제 속에 있다.
생활
감정
조나단에드워즈
신앙감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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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본성
바벨탑
공동체
현대심리학
고린도전서 7장이 이혼에 관해 말하는 것
by David Schuman
2020-10-06
결혼은 신성한 것이다. 결혼할 때 당신은 친구, 가족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배우자 한 사람만을 평생 동안 사랑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폭력이 조금씩 심해진다. 분노로 인해 종종 발생하기 시작한 게 어느새 밀침과 구타 그리고 또 다른 공포의 상황을 만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수치스럽고 슬프고 화가 난다. 아니, 이 모든 감정이 다 뒤섞여 있다.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고 갈등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과 배우자에게 다 신실하고 싶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더 이상 집에 있는 게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학대(abuse)를 싫어하신다. 그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다. 남을 학대하는 사람은 힘과 영향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이 되셨다(빌 2:5-11). 학대자는 당신을 가치없고, 외롭고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보시며 그 고통이 끝나기를 원하신다.결혼과 외도하나님은 결혼을 신성한 결합으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3–6).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신 24:1-4). 그래서 그들은 다시 물었다.“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7–9).하나님이 바라시는 결혼은 평생 동안 유지되는 연합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으로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시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한다. 첫 번째 상황은 “성적 부도덕”이다. 섹스는 오로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 공유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외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은 결혼의 유대를 끊게 되고, 그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당신의 배우자가 외도를 저질렀다면, 당신은 용서하고 화해를 모색할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목사나 또는 상담사에게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얼마든지 이혼해도 된다.결혼과 버림(Marriage and Desertion)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시는 또 하나의 상황을 알려준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이다. 만약에 믿지 않는 배우자가 돌아오겠다는 의도가 없이 떠나는 경우라면, 그 자체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깨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해 또는 이혼 중에 무엇을 선택해도 관계없다.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학대가 일종의 버림이라고 간주한다.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야할 정도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그런 식의 강제적인 유기(abandonment)는 배우자가 돌아올 생각 없이 가방을 싸서 떠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집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다면 도망가야 한다. 목사 또는 경험 많은 상담사에게 조언을 구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폭력적인 경우, 주저하지 말고 119에 신고하라. 당신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이런 식으로 고통 받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배우자의 행동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아니면 하지 않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당신은 결코 배우자로부터 학대를 받아서는 안된다. 배우자는 모든 게 다 당신 책임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의 죄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어떤 일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내면에서 나온다. 배우자가 학대하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학대는 이혼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런 결정을 혼자서 내려서는 안된다. 교회의 장로나 목사님의 조언을 구하라. 그들은 당신과 함께 곁에서 진짜로 학대가 일어나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학대인지를 분별할 뿐 아니라 당신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 지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다(불행히도 이런 학대의 피해자를 돕는 시스템이 없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으라.)앞에서 살펴 본대로 고린도전서 7장 15절은 이렇게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학대를 자행하면서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권징을 실천해야 한다. 가장 먼저 배우자를 훈계하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출교 처리해야 한다. 출교는 실질적으로 당신의 배우자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선언이고, 따라서 당신은 이제 얼마든지 이혼해도 된다. 학대를 알아차리기미국 여성 세 명 중 거의 한 명은 일생의 어느 시점에서 애인 또는 배우자로부터 폭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폭력 중에 40에서 45 %는 성폭력이다. 비극적이게도 가정 폭력은 아주 흔하다. 그러나 그런 폭력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대를 일삼는 배우자는 종종 매우 교활하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학대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앞으로는 좋아질 거라고, 그리고 다름 아닌 당신이 그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라고 설득할 것이다. 게다가 당신의 배우자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의 지도자인 경우에는 학대를 인식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경우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으로 하여금 혼란을 초래하여 무슨 생각을 해야할 지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누구도 배우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면 목사나 다른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라. 종종 제 삼자인 그들이 상황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배우자는 당신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명확한 학대의 신호이다. 집을 나갈 수 없다고 느끼거나 아는 사람과 이야기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라면 전국 가정 폭력 상담소인 ‘지역번호+1366’으로 전화하라. 모든 학대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다 글로서 기록해 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기록은 나중에 학대 패턴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학대는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된다. 자신의 안전이나 자녀의 안전이 염려되는 경우에는 꼭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하나님에게 당신의 안전은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보고 계시고 그 고통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신다. 학대는 절대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학대가 존재하는 결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배우자가 당신을 학대한다면,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교회의 장로와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당신을 사랑과 지혜로 인도해달라고 간구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1 Corinthians 7 Says About Desertion and Divorc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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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이혼
고린도전서7장
배우자
학대
연합
어떻게 하면 상식적인 신학을 할 수 있을까?
by 김상일
2020-10-05
팀 켈러의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은 상식적인 신학을 추구한다. 여기서 상식적이라는 말은 켈러의 신학이 1) 일상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인 동시에 2) 공익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켈러의 신학이 상식적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뜻하지 않는 것도 있다. 우선 1) 켈러의 신학에 드러난 복음이 시대의 상식 안에 갇혀버린 나머지 동시대인들에게 아무런 도전을 주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는 뜻은 아니며, 또한 켈러가 자신의 신학을 상식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 2) “기독교 고전 교리에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센터처치, 563). 왜 이런 신학함이 켈러에게 중요하게 되었는가. 켈러는 그 시대적 배경을 후기 기독교 왕국 시대(post-Christendom)의 도래에서 찾는다.“우리는 후기 기독교 시대 또는 후기 기독교 왕국 시대에 진입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서구 사회에서 교회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이제 문화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로 이동했다. 예전에는 교회가 사회 문화 제도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압력과 관행을 뚫고 교회로 발걸음을 향할 것이라 기대할 수가 없다. 이미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센터처치, 536)요약하면, 기독교 국가라는 맥락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 문화를 이해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따라서 켈러는 영국 출신의 인도 선교사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을 인용하면서 서양 교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서구 문화권이 기독교 세계라는 안일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서구 문화권은 이미 기독교에서 멀어진 문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켈러가 사역했던 뉴욕 맨하탄은 계몽주의 시대부터 서서히 진행되어온 서구 문화권의 이런 기독교 이탈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며, 기독교적인 용어가 당연히 외부 문화에서도 통용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사역하는 교회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켈러는 앞에서 언급한 뉴비긴이 창안한 선교적 교회 담론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란 무엇인가. 비록 이 공간에서 선교적 교회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개념을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는 있다. 켈러의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은 모두 선교적 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란, 외부 문화가 교회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며 문화적으로 동일성을 가진다는 안일한 가정을 벗어나서, 마치 제3세계의 선교사들이 그러하듯이 서구 문화를 이방 문화,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문화로 접근하려는 교회이다.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켈러는 자신이 사역했던 리디머 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이해하고. 맨하탄에서의 사역을 펼친다. 하지만 켈러가 바라보는 선교적 교회는 기존의 선교적 교회와는 약간 다르다. (켈러가 리디머 교회의 상황에서 선교적 교회론을 채택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면 센터 처치 518-573쪽을 참조하라) 그리고 그런 차이는 켈러의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 드러난다. “나는 한 교회가 고전적인 복음 교리를 강력하게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여전히 선교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여전히 서구 문화와 선교사적 만남을 가지면서 동시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비전통적인 비그리스도인들을 전도하고 제자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센터처치, 562-563)이 질문에 대해서 켈러는 교회가 서구 문화와 선교적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답하고, 선교적 만남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바로 상식적인 신학의 추구이며, 그러한 신학은 특별히 일상용어의 사용과 공동선의 추구가 두드러지는 신학이다. 우선 일상용어의 사용부터 생각해 보자. 켈러는 신학이 일상용어로 표현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 내부와 외부의 언어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초기 미국 의회의 문서들은 성경의 인용과 암시로 가득 차 있어서 당시 비교인들도 신학적 용어를 이해했다. 그렇지만 선교적 교회에서는 용어들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비신자들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이웃들이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듯이 말한다면, 결국 더 많은 이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거나 초대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는 교회만의 언어나 기도와 예배를 위한 특수하고 고어체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피해야 한다.” (센터처치, 566) 상식을 추구하는 신학, 선교적 교회의 신학은 신자들과 비신자들, 교회의 직분자들과 초신자들 사이에 담을 쌓지 않는다. 오히려 켈러에 의하면 이런 신학은 “투과성”을 가지고 있다. “투과성”이란 교회 내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언어나 문화를 가능하면 만들지 않고, 대신 항상 교회가 외부인들을 향해서 열린, 좀 더 유동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 비신자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모든 활동을 진행하면 교회에 비신자들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이미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이 신앙이 없는 자신들의 친구를 교회로 데리고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투과성의 효과는 신앙이 없는 이들이나 초신자인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 어떤 메시지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살아내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으로 이끄는지를 실제로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복음이 삶 가운데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복음 메시지를 소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센터처치, 567) 하지만 이렇게 투과성을 가지는 공동체, 즉 선교적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목표가 전통적 교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켈러는 특히 복음을 설명하는 고전적 교리들이 여전히 서구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속적 속죄와 법정적 칭의의 고전적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보다 검소하게 살며 정의를 행하는 강력한 신학적 토대와 내적 동기 부여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서구 문화와의 만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센터처치, 563). 그렇다면 신학이 상식적이 되어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투과성을 가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히려 고전 교리를 공교하게 맥락화함으로써 아직 온전히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복음 제시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센터처치, 563).즉 고전적 복음의 메시지를 타협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메시지를 어떻게 맥락화시키느냐의 문제가 바로 켈러가 말하는 “투과성”이다. 따라서 이런 상식적인 신학,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담을 쌓지 않는 신학을 만들어 간다고 해서 굳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지켜내야 할 복음의 맛을 잃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켈러는 여전히 교회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켈러는 자신이 추구하는 상식적인 신학이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교회와 외부 문화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준다. 연결과 소통이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교회는 복음을 공고히 붙잡을 때에만 공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복음을 공고히 붙잡는 교회는 저절로 반문화(counterculture)적이 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복음을 추구함으로써 반문화적 공동체가 되지만, 또한 정확히 복음을 붙잡을 때에만 공익을 섬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교적 교회는 섬기는 공동체로 반드시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이다. 서구에서 수백 년 동안 교회는 종교적 관심사에만 자신을 제한했으며 광범위하게 절반 정도만 기독교적인 큰 문화권 안에서 느슨한 모임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비기독교적인 주변 문화와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하게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조합이나 동호회와 같은 것이 될 수 없고, ‘두터운’ 대안적 인간 사회로서 관계들이 강하고 깊다. 그 안에서 성, 가족, 정체성, 권력 등이 경건하고 구별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실천되는 곳이다. 그리스도인 교회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는 또한 주변에 속해야 하며 주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웃들에게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만 하며, 희생적으로 시간과 제물을 도시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센터처치, 566)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어떠한가. 장년층에서는 비록 여전히 기독교 신자가 상당하지만, 청년층으로 내려가면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에게 친숙한 집단이 아니다. 더군다나 최근 코로나-19에 대한 일부 교회의 비상식적인 대응이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마구 퍼지면서 이미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교회의 대사회 신뢰도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가 투과성을 추구하는 일을 놓치게 된다면, 즉 불필요하게 특수한 언어 사용을 고집함으로써 사회와의 담을 스스로 쌓거나,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복음이 가진 공익적 특성을 놓치게 된다면 교회는 한국 사회 안에서 앞으로도 더욱 환영받지 못하는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상식적인 신학을 할 것인가. 일상 언어로 복음의 핵심 개념을 소통할 뿐만 아니라 교회 문화 안에서 오직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특수성을 걷어내고, 비신자와 신자, 오래된 신자와 초신자 사이의 모든 벽을 헐어내는 신학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말은 동시에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통해서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이런 명확한 목표들을 가지고 교회가 각각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어떻게 이런 일들을 이뤄갈지를 고민한다면, 성령께서 분명히 각 교회에 지혜를 주실 것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외부 문화에 열려 있는 공동체였다. 하지만 동시에 외부 문화와는 다른 공동체였다. 특히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섬김, 사회 전체의 공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달랐다. 오늘날 많은 한국 교회가 이런 복음의 공익적 성격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명령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서로 완전히 다른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다면, 교회는 한국 사회 속에서 환영받는 공동체, 한국 사회를 섬기는 공동체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회를 향해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그 일을 할 수 있다.
팀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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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배우는 다섯 가지 목회 멘토링
by Pete Schemm • Vince Oliveri
2020-10-04
목양, 설교, 전도, 양육 및 상담을 비롯해서 목사가 짊어진 책임은 적지 않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가지, 많은 이로부터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역할이 하나 있는데, 기독교 리더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멘토십이라는 책임이다. 멘토십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견습뿐 아니라 개인적인 제자 훈련을 포함하며 특히 인격 형성과 방향 설정 및 친밀함을 중시하는 현대 교회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에도 적합하다. 멘토링은 교회의 건강을 증진하고 목사의 삶과 사역에 활기를 불어 넣을 뿐 아니라, 미래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잠재력까지 가지고 있다.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멘토가 될까? 목회적 멘토십의 핵심이 되는 활동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행히도 오늘날 멘토십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에게 방향이 없는 게 아니다. 성경과 개인 멘토링 외에도 교회 역사는 이와 관련해서 풍부한 통찰력의 유산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 워낙 유명한 신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숙련된 멘토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리스 베잔트(Rhys Bezzant)는 최근에 출간한 저서 ‘에드워즈, 멘토(Edwards the Mentor)’에서 에드워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그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목회적 멘토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베잔트의 책에서 발췌한 다음 다섯 가지 관행은 미래 목회자 개발과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취한 전략적 접근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우정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답답한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잔트가 지적했듯이 인류 번영과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가졌던 비전은 특히 그가 멘토링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우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에드워즈가 그의 친구이자 사역의 멘티(mentees)였던 젊은 남성들에게 가졌던 신뢰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가 뉴저지 대학(현재의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직을 맡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결정까지 그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불렀고, 자신은 총장직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라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릴 통일된 지혜로운 결정에 복종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에드워즈의 멘티들은 그가 총장직을 맡아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일치했고, 에드워즈는 약속한대로 그들의 결정에 따랐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멘티 중 한 사람은 에드워즈가 프린스턴에 안착하는데 도움이 준 일종의 조사위원회를 맡기도 했다. 동료애, 지혜, 다양한 목소리, 깊은 신뢰가 특징인 기독교 형제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요소가 에드워즈의 우정 속에 수렴되었다. 교회에 복음 변화(gospel change)를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기독교 우정에 기반한 목회적 멘토링이다.2. 대화에드워즈의 첫 전기 작가인 새뮤얼 홉킨스는 우정의 멘토링 내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에드워드의 의도적인 훈련 방법 중 하나라고 제안했다. 대화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라는 맥락에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는 18세기 런던과 뉴 잉글랜드에서 유행했으며 커피 숍, 클럽 및 기타 공공 장소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대화를 단지 교양있는 기술,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대화는 은혜의 수단,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함으로써 서로 복음 안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멘토링 관계 내에서 대화는 중요하다. 대화는 강의가 아니기에 단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지시 수준을 뛰어넘어서 사람을 발전시키는 방법이다. 베잔트가 설명했듯이 에드워즈의 대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형제애와 박애감을 조성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모두가 창조받은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높이는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유용한 대화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만든다.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할 때,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교만과 과시하려는 마음 없이 지식을 바로 전달할 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상호 교화와 교육을 위해 마음을 여는 진지한 대화에 더 많이 참여하려고 할 때,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더 경건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를 에드워즈는 궁금하게 생각했다. 3. 견습견습은 목회 훈련에 의도적으로 맞춤화된 실제 상황 안에서 사역을 배우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 학습자의 고유한 요구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하나의 교육적 모델(pedagogical size)을 모두에게 다 적용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모델을 만든다면, 그건 멘토링의 천재일 것이다.”여기 에드워즈가 채택한 몇 가지의 견습 모델이 있다.- 에드워즈는 제자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그의 멘토링에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는 금식, 기도, 겸손, 자기 성찰, 회개의 반복되는 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한 후에만 멘티들이 다른 사람들을 훈련할 수 있도록 했다(딤후 2:2 참조).- 에드워즈는 목회를 배우는 학생들이 설교뿐 아니라 더 넓은 사역 분야에서도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왔다. 에드워즈는 결코 능력있는 설교자가 아닌 학생들조차 성경 신학적 이해와 웅변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 에드워즈는 대화식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멘토링에 대한 그의 이해는 우정과 대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종종 소크라테스식 토론 방법으로 전환하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 경청과 질문 기술이 목회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기독교 가정이 멘토링을 위한 이상적인 맥락이고 에드워즈가 종종 그 사실을 실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베잔트는 신학 교육에 대한 에드워즈의 새로운 실험을 우정, 교리 및 영적 형성이 수렴되는 가정을 의미하는 “목사 사택 신학교"라고 불렀다. 4. 편지대면 대화와 견습을 통해 제자에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때면 에드워즈는 편지를 통해 그들을 지도했다. 그의 편지는 누구라도 목사로부터 기대하는 “친절하고 대화적이며 교육적인 자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편지는 단순히 목회적, 신학적 문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기르던 양을 판매하는 계획에서부터 결혼의 역동성에 대한 고찰,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교리에 대한 토론에서부터 빨리 방문해 달라는 간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편지를 그의 멘티였던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에게 보냈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에드워즈는 직접 대면하는 대화를 선호했겠지만, 멘토링 관계는 편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만족스럽게 구현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신학적인 의견, 개인적인 관심사 또는 행정 지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를 편지를 통해 나누었다. 에드워즈가 특히 멘토링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 그가 편지를 통해서 … 자신의 개인적이고 목회적인 목소리를 멘티들에게 전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오늘날 목사는 전화, 이메일, 문자, 소셜 미디어 등 의사 소통을 하는 데에 유용한 훨씬 더 많은 옵션을 가지고 있다. 편지 쓰기가 비록 다른 방식에 비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다. 개인 편지, 특히 손으로 쓴 편지는 미래의 리더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멘토들은 사라져버린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손편지를 통해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줄 좋은 때이다. 5. 리더십베잔트는 기독교 리더십을 모방할 가치가 있는 “영웅적인 영성”이라고 썼다. 리더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예배 뿐 아니라 희망을 전하는 모든 노력이 다 포함된다. 에드워즈는 목회 리더십이라는 도전에는 희생적인 헌신과 봉사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베잔트의 말대로, “절망적인 시기는 헌신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1743년에 있었던 한 안수식에서 그는 “영혼을 위한 파수꾼의 큰 관심사”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에드워즈는 비싼 값을 치러야만 하는 리더십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며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이 세상 백성을 향해 그리스도 대신에 우뚝 서서 그의 대사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쫓아가는 동일한 영을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이 다른 영혼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수준의 동일한 사랑을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 .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아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또 자신을 부인하며 고통까지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리더십은 멘티와 친구들을 위해 내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나의 전부를 다 소진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또한 기독교 리더십에는 우리가 멘토링하는 사람들의 번영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이 에드워즈로 말미암아 목회적 권한을 사용하여 열망에 찬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의 성장 및 효율성을 높이도록 만들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를 비싼 값을 치른, 또 희망을 보여주는 기독교 리더십의 가장 좋은 예들 중 하나로 보았다.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와 뉴저지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브레이너드의 모범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에드워즈는 그의 개인 일기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The Life of David Brainerd)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해 그의 짧은 인생을 기리기도 했다. 브레이너드는 수년 동안 약하고 병들었을 지 모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절뚝거리면서도 인도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19세기 선교사 사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하나씩 · 특별하게 · 친밀하게베잔트는 에드워즈가 윌리암 페퍼렐(William Pepperrell)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멘토링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을 포착하는 세 단어를 찾아냈다. “하나씩, 특별하게, 친밀하게(singly, particularly, and closely).”- ‘하나씩’은 한 번에 한 명씩을 의미한다. 이는 미래의 리더가 조립 라인에서 수천 명씩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리더는 의미있는 우정과 대화 그리고 편지를 통해 만들어졌다. - ‘특별하게’는 개인별 맞춤을 의미한다. 미래의 두 지도자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어떤 견습생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역 훈련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미래의 지도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게 맞춤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 ‘친밀하게’는 멘토링 과정에서 실제 공유된 삶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정, 식사, 동지애, 실망, 웃음, 신뢰 및 상호 존중은 우리가 멘토링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하나씩, 특별하게, 친밀하게”는 차세대 목회자, 선교사, 교회 개척자 및 기타 지도자에게 투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잘 훈련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5 Ways Jonathan Edwards Teaches Us to Mentor Future Pastor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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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십
조나단에드워즈
데이비드브레이너드
편지교제
영성
소크라테스
삶 속에 자리잡은 찬양의 자리
by 김돈영
2020-10-03
잃어버린 한 가지아무도 없는 예배당, 문 여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진다.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가 예배당으로 향하는 존재를 알리는 듯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뒷자리에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 앞에 있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경이 쓰인다. 자꾸만 그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기에 더욱 집중된다. 이윽고 아주 작은 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뭐라고 말하는데 소리가 너무 작다. “나 주 일 광……거 주 해 주”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규칙적으로 들리고, 반복해서 읊조리는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젠 호기심이 생긴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고 말겠다는 괜한 오기가 발동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듣는다. 시간은 흐른다. 소리에 적응하니 제법 귀에 들어온다. 그제야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찬송가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첫마디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 가사가 ‘나주일광’이라고 들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일’이 아니라 ‘잃’이 맞는 것이다. 가사는 있는데 음을 들을 수가 없다. 도무지 어떤 멜로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음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따라 부를 수 없는 완전한 ‘프리스타일’이다. 노래가 아닌 것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 나이 많은 집사님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 누구라도 웃을 것이다.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눈물이 나온다. 웃음 대신 눈물이 나오는 상황이 당황스럽다. 참는다.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온다. ‘읍읍’ 소리를 내면서까지 참아본다. 어금니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며 참고 버틴다.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계치에 다다랐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숨을 결국 내쉬고 말았다. ‘읍~크허헉’하는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그냥 포기하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분명히 웃긴 상황인데 말이다.왜 그랬을까? 반주도 없고, 좋은 음향도 없는 노래, 악보에 충실하지도 않고 심지어 누구도 따라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듣고 왜 눈물이 난 것일까? 그 노래에는 무언가 있다. 평소에 부르던 노래에는 없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진심이다. 작곡자와 작사가의 노래가 아니다. 연주자의 노래도 아니다. 부르는 이가 자신의 말로 고백하는 자신의 노래다. 진실한 고백이다. 믿음의 고백이었다.진심으로 부르는 노래, 나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말하는 노래, 찬양이다. 찬양하는가?애굽을 떠나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눈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고 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다. 기적을 보이셨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환호한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기적,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며 기뻐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한다. 추상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으로 하나님을 그려내지 않는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 전에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찬양하는 것이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무엇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의 전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다른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찬양의 내용인 것이다.믿음으로 부르는 노래, 진심으로 부르는 노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나 같은 죄인 살리신’수없이 많이 부른 노래, 가사를 외울 정도로 익숙한 노래다. 그런데 진심인가? 가사대로 고백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긴 첫 사람의 죄, 그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고, 적용하며 사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정하려고 했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그것이 죄다. 쉽게 말하면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창조주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사극에서 말하는 왕의 자리를 탐한 죄, 바로 역모이자 반역죄인 것이다. 죽어야 하는 죄인 것이다. 죄인에게 형벌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대신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신 의를 죄인에게 넘겨주셨다. 대신 받으신 형벌과 넘겨주신 의를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이다. 죽을 처지에서 살아난 것이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받은 것이다. 거저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을 믿는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진심으로 찬양한다면 삶은 변해야 한다. 진심이라면, 믿는다면 입으로 말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삶에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노래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자리에서, 운동하고,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서, 심지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살며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삶은 터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다. 곧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삶에서 찬양하는 것이다. 모든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노래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가능한 것이다. 믿어야 온전하게 찬양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거기서’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거기서’를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막연하게 언젠가 갈 곳이라는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와 관계있는 것 같은데 아직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별로 와 닿지 않는가? 그곳으로 가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감해야 한다.신앙의 선배들은 거기, 곧 우리의 육체가 죽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했다.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있게 되는 날을 기대한 것이다. 비록 육체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야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뵙는 그 순간을 참으로 기다린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이자 기쁨의 순간일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다.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우리는 다른 모습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믿는 가장 좋은 곳, 영원한 기쁨과 안식이 있는 곳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소풍을 앞둔 아이의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영원한 시간을 생각하며 설레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믿는 것이고, 소망하는 것이며,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현실의 도피가 아니다. 현실이 어렵기에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심정으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나빠도, 현실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을 대면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에 소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과는 상관없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곳이며, 가슴 뛰게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야 한다.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3)고 말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만 했던 것이 아니다. 메신저 이전에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신자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진심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진심인가 하는 것 말이다. “나는 믿는가”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좋은 메신저로 활동할 수 있다. 얼마든지 좋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믿는 신자인가, 내가 전하는 것을 나는 믿는가’하는 것을 말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하고 책망하셨던 예수님의 그 말씀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너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 찬양의 자리‘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중략]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멜로디를 따라 가사를 읽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가?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구원의 사실과 감격을 깨닫는가? 우리는 가사를 읽으며 이러한 사실이 머릿속에 그려져야 한다. 그 내용이 떠올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며 진심으로 고백해야만 하는 것이다.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기적을 본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죄에서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신 사실을 믿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백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입술에서는 진정한 찬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노래가 아닌 찬양 말이다.비록 음정도 없고 박자도 없으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멜로디로 노래하더라도, 진심으로 믿고 부르는 것이 찬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진심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달으며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힘들고 변하지 않는 현실이지만, 녹록하지 않은 하루하루지만 그곳에서 감사와 소망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말이다. 찬양은 멜로디와 음정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며 진심으로 부르는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으로 부르는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자리가 찬양의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찬양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잃어버린 진심을 회복하자. 믿음으로 부르는 노래가 삶에 넘치게 하자.“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영성
예배
찬양
찬송가
출애굽
하나님나라
찬양의자리
창조주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왜 논쟁을 좋아할까?
by Russell Moore
2020-10-02
월터 퍼시(Walter Percey)의 소설 ‘영화보러 가는 사람’(The Moviegoer)의 주인공인 빙크스 볼링(Binx Bolling)은 이렇게 회고한다.“기분이 좋지 않으면 난 도서관에 가서 논쟁적인 잡지를 읽는다. 나는 자유주의자도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도 아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상 내게 있어서 미움은 이제 이 세상에 몇 개 남지 않은 생명의 증거(signs)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돌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제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은 내게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미워하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퍼시는 아마도 이 한 구절 속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요약하는 거 같다. 아니, 그는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게 세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논쟁이야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기 마련이고, 또 종종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가를 놓고도 서로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사도 바울이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딤전 6:4)라고 경고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바울 자신도 그 누구보다 기꺼이 논쟁에 뛰어들곤 했던 인물이다. 한때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로 베드로를 면전에서 꾸짖었고,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아주 거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난교와 다른 것 만큼이나 바울의 경우는 논쟁 자체를 위한 논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바울이 경고하는 다툼은 바로 난교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일”(갈 5:17-21)에 대한 경계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 다툼과 성적 부도덕은 결국 정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된다(갈 5:21). 끊임없이 “어리석은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시정되어야 하고, 경고와 꾸짖음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뒤틀린 자” 그리고 “스스로 정죄한 자”(딛 3:9-11)로 간주되어야 한다. 주님의 종이라면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또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다툼이 나오기” 때문이다(딤후 2: 22-23).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경이 성적 부도덕을 논쟁하고 싶어하는 투쟁심과 연결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왜 그런 걸까? 가십거리가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열정지난 수년 간 나는 필요할 때 논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논쟁에 뛰어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선함에 대한 사랑과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을 바로 인도하기 위한 열정 때문이지 결코 논쟁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진리를 위한 열정” 때문에 논쟁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냥 열정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깊은 상처와 종종 심각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죄를 숨기던 사람들의 진실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어느 연로한 목사님은 내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게 만드는 것도 없어.” 그말은 수없이 진실로 입증되었다.그러나 퍼시의 소설 속, 영화관에 가는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생명을 주는 성령님이 없을 때 인간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오로지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서만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소설가, 퍼시가 죽은 개구리의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 전기 충격과 비교한 인간 삶의 모습이다. 종종 다툼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거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 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갉아먹는 지루함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또 다른 노 목회자는 오래 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얼마나 절망감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내게 토로한 적이 있다. “누구누구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게다가 지난 주 설교에 관해서도 그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등등.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 말에 신경쓴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문제는 내가 신경을 너무 쓴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모든 게 물론 삶의 계획과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여부에서 나의 가치를 찾는 쪽으로 나를 유혹하거든요. 또 다른 문제는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가 정말로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들이 나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몰랐다면 훨씬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요.” 나는 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목사님에 관해서 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옮겨다주는지 물었다. “글쎄요. 내가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고요. 또 그들이 내 편이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인간의 본성 때문이에요. 가십거리는 재미있거든요. 게다가 가십에 관한 가십은 더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가십거리를 옮기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드니까요.”잠시 멈췄다가 목사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직장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교회든지 간에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일종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비슷한 거거든요.” 목사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병원 심방을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목사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SNS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하다.다시 말하지만, 때때로 다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 그러한 논쟁이 성령님께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적인 부도덕에 연루된 사람이 그런 부도덕을 “사랑”, “소울 메이트” 또는 “운명”이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스스로 특별하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논쟁에 대한 불건전한 갈망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초래한 논쟁 열정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죄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끊임없는 다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연민이 우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연민을 가진다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에 두거나 대화 과정을 지시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웃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전도지 배포를 담당하게 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자기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논쟁을 위한 논쟁이라는 불건전한 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사랑하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의 종말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살펴보면 된다. 남북 전쟁 당시 역사 재현(Civil War re-enactor)을 주장하거나 또는 한때 이단 사냥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말이다. 자신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가치를 주던, 쓰라린 분노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내내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모든 게 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진실이다. 위협과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시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결코 주거나 받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확실히 예수님도 논쟁을 많이 하셨지만, 그의 논쟁은 결코 선민사상(tribalism)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민사상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마 21:45–22:22; 눅 4:26–28; 19:7). 더욱이, 예수님이 촉발한 논쟁을 볼 때,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줄을 잇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논쟁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이 덧붙여서 논쟁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젤롯파는 헤롯파와 원수였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을 반대하는 등, 예수님 시대에 이런 식의 적대감은 만연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들이 제기한 논란이 되는 질문에 대답하셨고, 때로는 그들이 실제로 진실에 관여하기보다는 단지 다투고 싶어하는 진심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아예 대답을 거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을 던짐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성전이 실제로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인지 여부에 관해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지 여부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 말이다. 드물지만 우리는 분노한 예수님도 만난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가치관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 관행과 관련한 분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권력을 얻는 것과 관련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다툼을 위한 게 아니었다. 동물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체의 소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는 것은 마귀이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마귀는 갇힌 동물에 불과하지 결코 양치기도 또 양도 아니다. 결국 다툼을 위해 다툼으로 이끄는 지루함과 생명 없음은 논쟁에서 당신이 옳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 조차 당신으로 하여금 논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데, 그건 논쟁이 주는 즐거움이 지루함과 생명 없음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다르는 곳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선함이 아니다. 그건 단지 행여나 “적”이 말실수를 하길 기다렸다가 함정에 가둘 기회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이어질 뿐이다.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견디신(마 22:15) 예수님은 결코 스스로 그런 본보기를 만들지는 않았다.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주체인 상처 입은 영혼들이 의제를 정하고, 누군가가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도자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화재의 원인이 가솔린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칭찬(요 15장)과 다른 사람들이 정한 다툼의 의제(마 26:51-56)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셨다. 어리석은 논쟁으로부터 멀리하기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논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논쟁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온유함과 이성이고, 다른 쪽의 반응에 따라 논쟁에 더 깊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논쟁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추수감사절 테이블에서 총기를 휘두르거나 가구를 뒤집으면서까지 굳이 논쟁에서 이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기꺼이 감수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논쟁에서 마지막 말을 뱉는 사람은 아마도 거칠게 욕설을 지르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혀 아니다. 당신의 결론이 다음과 같기를 원하는가? “내년에 우리 의견이 좀 더 영향력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코카인과 무기가 더 많이 필요할 겁니다.” 아니다. 대신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역기능입니다. 내년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아니, 우린 지금 떠납니다.”오래 전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을 썼는데, 그가 말한 스캔들이란 제대로 된 지성이 별로 없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현재의 스캔들은 복음적 변연계(limbic system, 성적 흥분을 포함해서 흥분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의 스캔들이고, 스캔들이라고 해봐야 그나마 변연계가 남아있는 전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논쟁 중에 던질 “한마디 말”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전혀 다른 방법을 모델로 삼는 것이다. 다툼이 생명인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방법은 논쟁이라는 게임 자체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Unhealthy People Crave Controversy번역: 무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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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다툼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가십거리
엔터테인먼트
복음주의지성의스캔들
가짜 뉴스 가짜 복음의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by 김형익
2020-10-01
가짜 기도제목?언젠가 잘 아는 분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인도의 한 지역에서 무슬림들에 의해 교회당들이 불타고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긴급기도를 부탁하는 메시지였다. 매우 구체적으로 사건의 날짜들이 적혀 있었고, 이 기도제목을 널리 알려달라는 전언까지 있었다. 고약한 버릇이랄까, 그 뉴스를 검색해보았고 그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똑같은 기도제목이 수년 전부터 유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기도제목에 언급된 지역은 무슬림 지역이 아닌 힌두교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기도제목을 보낸 분에게 이것을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았고, 그분은 이것이 가짜 기도제목이었으며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해보았으리라. 기도제목 만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가짜 뉴스들이 퍼날라지고 있는가?비록 가짜라도, 그것이 기도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힘써 기도하였다면 그리고 선교지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면 그로써 유익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참되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민 23:19).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물건을 팔아넘기려 하는 속이는 장사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참된 지식에 근거하여 참된 동기를 유발시키시고 참된 결과를 얻어 내신다. 가짜 뉴스의 시대가짜 기도제목은 그나마 양반(?)이다. 우리가 퍼나르는 뉴스들 중에는 기도제목이나 건강에 관한 뉴스들도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 뉴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종종 노회의 단체 카톡방이나 혹 개인 메시지로 가짜 정치 뉴스를 공유하는 목사들도 있다. 한 번만 검색해보면, 가짜 뉴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만한 내용들도 적지 않다. 이런 가짜 뉴스의 폐해는 개인의 의식과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사회 전체를 거의 붕괴시킬 정도다. 가짜 뉴스들은 그 제작자의 의도를 따라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고 행동을 부추긴다. 그리고 사회(심지어 교회조차도)를 혐오와 멸시로 양분시키고 파괴한다. 단지 비중 있는 정치인의 말이라고 해서, 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언론이 쓴 기사라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저마다 자칭 전문가가 되어 뉴스를 해설하고 사실과 자기 의견을 구분하지 못한 채 뭔가를 퍼나르는 사람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다.퍼나름의 문화가짜 뉴스의 전성시대를 특징짓는 문화가 퍼나름의 문화다. 퍼나른다는 말은 그 뜻 그대로라면 어떤 물질을 퍼서 날라야 하는 일이기에 많은 수고를 전제하는 일이다.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하지 않을 일이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판단이 섰을 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퍼나르는 대상이 유형의 물질이 아닌 말과 글이라면 그건 다른 문제다. 발을 가지지 않은 말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는지는 동서고금의 만인이 인정하는 바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말이 전파되는 범위와 속도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떤 소식이 하루 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시대다. 지난 6월, 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가 유튜브 뮤직비디오 사상 최단 시간에 1억 뷰를 돌파했다는 뉴스가 나왔다(이건 진짜 뉴스일 것이다!). 6월 26일 오후 6시에 공개된지 32시간 만에 1억 뷰를 돌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퍼나름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대기록이다.문화적 컨텐츠도 따져볼 것들이 있겠지만, 그 내용이 의도된 가짜 뉴스라면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거짓이 만드는 결과는 혼란과 혐오와 다툼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퍼나르는 일을 명백히 금하셨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하지만,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사람에 대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퍼나르는 일이 허용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퍼나르기 전에 고려해야 할 실제적 지침들 SNS 덕분에 퍼나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시대가 되었다. 단 몇 초 만에, 수많은 지역, 수많은 사람에게 퍼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무언가를 퍼나르기 전에 혹은 당신의 생각을 공시(公示)하기 전에 고려해야만 할 사항 몇 가지를 성경의 원리를 따라 제안하고 싶다. 1. 언제나 사실을 먼저 확인하라.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면 퍼나르지 마라. 특히 익명으로 쓰여졌거나 인용된 글은 퍼나르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내용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글이다. 2. 사실관계를 확인했다면, 당신이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했는지를 확인하라.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라면 퍼나르지 마라. 많은 학자들, 많은 이론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3. 사실을 확인했고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했다면,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라. 사실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람에 관한 판단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4. 그러므로 사람에 관한 사실일 경우, 한 번 더 조심하라. 그에 대한 거짓 증거가 되지 않을지 한 번 더 생각하라. 5. (퍼나르기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판단을 공시하려면, 충분한 자료들을 가지고 내린 판단인지 다시 자문하라. 6. 그 판단을 글이나 말로 공시할 때, 당신의 글도 퍼날라질 수 있으며, 당신이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가짜 복음의 문제우리 사회 속의 가짜 뉴스의 문제만큼이나 교회 안에서의 가짜 복음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것이 가짜 뉴스이든 가짜 복음이든 뿌리는 동일하다. 모든 거짓, 모든 가짜의 원천은 주님께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 마귀다(요 8:44).바울 사도의 복음 사역으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어댔고 무너뜨리려고 한 것은 가짜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펜을 들었고 편지의 처음부터 무서운 저주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갈 1:6-8). 사도들의 시대에 거짓 교사들이 전한 가짜 복음의 문제는 비단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도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가짜 복음의 문제는 사도 시대 이전, 에덴동산의 뱀에게서,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쉬지 않고 나타났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들에서 선포되는 가짜 복음의 문제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라고 다 믿을 수 없고 목사라고 다 믿을 수 없으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와 목사를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 열매로써 그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7:15-16),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고 말씀하였다. 분별이 필요한 말씀들유튜브나 팟캐스트 또는 웹상에는 매주일 수많은 설교가 올라온다. 물론 거기에는 가짜 복음이 섞여 있고 그 설교들을 퍼나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당신은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가? 설교의 영역에서도, 성경에 근거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베뢰아 사람들이 했던 것이 말하자면 성경에 근거한 팩트 체크였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가짜가 넘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바울 사도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에베소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엡 4:15).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말하여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넘쳐나는 가짜로 불신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나는 믿을만하고 신중하고 신뢰할만한 사람들의 존재를 보고 싶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사회 속에서 그런 존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두워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참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참이라고 하는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참 뜻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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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를 살피는 목자의 책임
by R. C. Sproul
2020-09-30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이야기를 살펴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곧 8장 1-2절에 소개되는 상황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 8:1-2).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이런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여기서 우리는 당시에 두루 다니며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 사도들이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모두 1세기 교회의 평신도였다. 그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피해 흩어진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 우리는 평신도를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파하게 하는 일이 초대교회 리더들의 주요 임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전례를 염두에 두었던 루터도 16세기에 만인제사장 교리를 내세웠다. 그 교리를 통해 평신도와 성직자의 차이를 없애려 한 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사명을 성취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런데 신약성경은 교회에서 평신도와 달리 지도자로 임명되는 자들이 있음을 또한 밝힌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일반적으로 목회자라는 직분을 들어 그러한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목회 사역에 있어 최고의 패러다임 내지 최고의 모델은 단연 예수님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이 그분에게 적용하는 명칭 중 하나도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다. 자기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는 한 교회의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사역을 보여 주는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양떼를 살피는 목자란, 과연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우선 목자는, 양떼를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만일 어떠한 목자도 돌보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펴보지 않아, 말 그대로 아무에게도 인도를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양들의 행동을 관찰한다면, 제멋대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질서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양들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는 한, 길을 잃고 상처를 입고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양떼도 그러한 특징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양떼를 인도하는 일은, 그들을 목양하는 목회자의 가장 주요한 임무가 아닐 수 없다.그런데 오늘날 교회, 특히 개신교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비극은, 목회자가 한 교회를 인도해야 할 책임은 부여받아도, 그에 부합한 권한은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이든 집사이든 당회와 같은 치리 기관을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고용된 일꾼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 목회자는 치리 기관에 종속된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양떼를 지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전에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의 눈치부터 살피게 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복음 설교를 올곧게 전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말씀을 너무 대범히 전하거나 양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드러내면 혹 해임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편으로는 양떼를 살피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을 살핀다. 이는 성경이 제시하는 목회자의 모습이 아니다. 모세가 활약하던 구약 시대부터 이후로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로나 집사의 자리에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목자를 돕고 보조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고 목자는 양떼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부여받았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에서 나오는 매력이나 리더십 기술 등을 사용해서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둘째로, 목자는 양떼를 먹여야 할 책임을 지닌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베드로를 만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시며 이 책임을 강조하셨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양떼를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다. 잘 먹지 못하는 양들은 이내 마르고 약하고 수척해지며 쉽사리 병에 걸려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돌보는 양들이 균형 잡힌 말씀으로 양식을 먹고 영양분을 섭취하며 건강하게 성장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목회의 급선무이다. 신약성경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과 같이 소화하기 힘든 말씀은 피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는 신자들을 책망한다. 선한 목자는 어린 영혼에게만 해당하는 젖, 다시 말해 기초 원리만을 양들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튼튼하게 자라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다음 단계의 식단을 제공한다. 이러한 식단을 마련하는 일이 목회자에게 주어진 임무이다.셋째로, 목자는 양떼를 보살펴야 할 책임을 지닌다. 요한이 사용한 목양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 보면, 한 마리의 양이 상처를 받거나 병에 걸렸을 경우, 선한 목자가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다른 양떼로부터 아픈 양을 분리시켜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도록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선한 목회자도 교인들의 아픔과 고통, 즐거움과 슬픔을 알고 그들의 필요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육체의 질고나 영혼의 고통 또는 마음의 괴로움에 교인들이 짓눌리지 않기 때문이다. 목자는 양들을 격려하고 돌보아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결국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끝으로, 목자는 양떼를 가르치고 훈련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여기서 가르치는 사역과 훈련하는 사역에는 차이가 있다. 가르치는 사역은 다른 사람에게 지식과 같은 정보를 전달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훈련하는 사역은 그 과정에 참여하여 훈련받는 대상에게 어떻게 특정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 줘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양들에게 강해설교를 통해 단순히 어떤 정보를 전달하거나 믿음의 교리를 설명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그들이 신앙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를테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구제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어야 할 책임이 목회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역에서 목회자는 예수님의 사역을 반영하고 드러내야 한다. 즉 성부가 맡기신 양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주신 그분의 사역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모든 성도를 바라볼 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맡기신 양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복음을 통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잘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hepherding the Flock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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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양떼
말씀
코로나 시대의 소그룹 사역
by 김선일
2020-09-29
21세기 들어서 교회의 중요하고 전망 있는 사역 형태로 소그룹이 부상했다. 그러나 현재의 팬데믹 방역 정책은 교회의 대면 예배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 예배 외의 다른 모임들을 더욱 규제하는 양상으로 가고 있다. 물리적 거리를 두고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 용인하지만, 사람들이 더욱 밀착할 수 있는 소모임은 위험한 감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교회는 공예배 외에도 성경공부, 기도회, 부서별 모임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소그룹들을 통해서 양육과 친교의 필요를 충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소모임 규제는 사역의 활성화 측면에서 상당한 난관을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을 통한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인간의 본질적 욕구인 관계와 만남을 대체하기에는 미약하다. 비대면이 교육과 정보제공에서는 매우 유용하지만,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오감 동원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고려사항이 있다. 현 상황의 변화는 비록 코로나로 인해 증폭되긴 했지만, 이미 코로나 발생 이전부터 존재하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온라인 교육과 재택근무 등의 비대면 기술은 코로나 이전부터 증가세에 있었고, 코로나는 그것을 훨씬 앞당기고 보편화시켰다. 온라인 기술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전부터 인간의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거대한 변화의 조짐들이 일어났다. 교회는 전통적인 관계와 공동체에 익숙했을 뿐, 코로나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서 인간의 관계 맺는 양상은 변화했던 것이다. 1.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찾는 시대약 1년 전에 출간된 트렌드 전망서들은 2020년에 나타날 중요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예기하는데, 주로 관계와 공동체를 집중 조명한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낸 ‘트렌드코리아 2020’(김난도 외 지음),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의 ‘라이프트렌드2020: 느슨한 연대’(김용섭 지음), 생활변화관측의 ‘2020 트렌드노트: 혼자만의 시공간’(염한결 외 지음) 등은 종래의 익숙했던 끈끈하고 집단주의적인 공동체에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개인의 취향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네트워크의 시대가 왔음에 주목한다. 새로운 변화가 공동체를 버리고 개인주의로 도피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본질적이고 생래적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관계와 공동체를 찾고 있다. 어느 한 집단에 귀속되어 단일한 자아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에 다양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소속되는 것이 더욱 편하다. 유목민주의라 불리는 ‘노마디즘’ 시대에는 개인의 정체성이 단일하지 않고 상황과 시간에 따라 다원화된다(김난도 외, 198). 혈연, 학연, 지연에 의해서 형성되는 태생적인 소속감은 힘을 잃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의무감 없는 느슨한 연대가 많은 모임들의 성격이 된다. 가족, 회사, 종교는 전통적으로 끈끈한 연대를 기반으로 유지되어왔는데, 이제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가족의 다변화, 회사의 수평적 관계 등이 새로운 변화라면 교회도 이러한 문화적 변화를 ‘일정 부분’ 이해하고 수용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탐구해야 할 시점이 왔다. 우리 사회의 관계 문화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넘어가면서 종교의 힘이 퇴색한다는 진단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소 일반화된 도식이지만, 기존의 공동체와 새로운 공동체의 차이를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새로운 공동체들의 특성은 취향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을 대상으로, 취향에서는 살롱 문화가 증가하고 있다. 가족의 집과 같은 분위기의 홍대입구 ‘취향관’,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인 ‘문래당’ 등의 공간 중심 살롱이 있고, 유료 독서모임인 ‘트레바리’나 글쓰기, 요리, 영화토론 등의 취미모임인 ‘문토’ 등이 자발적 선택에 의해 모이는 살롱 문화를 대표한다(김용섭, 92)2. 교회의 새로운 공동체들소셜 살롱과 취향 네트워크의 문화가 교회의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과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우선 이러한 취향과 수평적 문화가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와 배치된다는 선입견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은 책임감과 소속감이 없는 피상적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측면에서, 필자도 오랫동안 이러한 식의 공동체에 의심을 보내왔다. 그런데 현재의 코로나 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의 그룹핑(grouping) 방식을 근본에서 재고하게 만들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의미를 새로운 상황에서 추구해야 할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자발성, 취향, 수평성이라는 코드가 헌신과 희생을 기반으로 할 기독교 공동체와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전자에서 근본적으로 긴장을 일으키는 것은 헌신과 희생이 아니라,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이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거부하는 서열, 연줄, 가부장과 같은 관습적 공동체의 구심점들은 오히려 성경적 정신과도 명백하게 어긋난다. 그 동안 개인주의와 익명성의 증가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향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연결되는 소모임이나 공동체를 불편해했다면, 이제는 안전과 위생의 차원에서도 자신들이 편안하고 신뢰할 수 없는 이들과의 교회 모임을 꺼려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불편함은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에 헌신해야 할 성숙한 신앙인들로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신앙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도록 초대하는 길은 지금까지 익숙한 방식의 소그룹이나 공동체만은 아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인간에게는 상호 연결을 이루는 네 가지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것은 공적 공간(public space), 사회적 공간(social space), 인격적 공간(personal space), 친밀한 공간(intimate space)이다(‘숨겨진 차원’ 한길사 2013). 규모를 기준으로 나누자면 공적 공간은 서로 익명적 관계이면서도 소속감을 갖는 공동체로서 대략 40~5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인다. 사회적 공간은 가벼운 대화와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서 10~15명에서 50명까지 이를 수 있다. 인격적 공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명~12명의 소그룹으로서 정기적인 나눔이 가능한 규모다. 친밀 공간은 서로 은밀한 고민을 나누고 삶의 공유를 할 수 있는 2~3명의 가족적 관계다. 홀의 이러한 이론을 교회 공동체에 적용한 조셉 마이어스(Joseph Meyers)는 최근 교회들이 공동체를 지나치게 소그룹 위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공동체는 위와 같이 네 가지의 다양한 공간과 관계를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음’(togetherness)만이 아니라 ‘연결됨’(connectedness)이라고 주장한다(The Search to Belong, Zondervan 2003, 44).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공적 공간에서 연결됨을 느낀다. 또는 교회의 각종 양육모임이나 교구와 같은 규모 있는 사회적 공간에서도 소속감과 가벼운 교제를 나눈다. 인격적 공간의 소그룹은 좀 더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의 나눔과 격려를 원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일대일 상담이나 멘토링을 통해 더욱 깊은 친밀한 교제를 원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네 가지 공간이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각기 다른 차원의 공동체적 필요를 채워준다는 사실이다(Meyers, 51). 대규모 예배와 미리 조직된 소그룹의 두 날개로 사람들의 필요와 상황에 부응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의 수평적 취향 네트워크 성향을 고려한다면 더욱 난감하다. 네 가지 공간 모두가 일정한 공동체적 필요를 채워준다. 오랫동안 소그룹에 머물러 잠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소그룹으로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이들의 처지를 존중하는 것이 각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자세일 것이다. 공동체적 관계는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분위기도 누군가에는 불편한 압박이 될 수 있다. 3. 코로나 시대의 교회 소모임 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어떠한 식으로 공동체를 이루셨는가?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소그룹 공동체로만 대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교회 소그룹의 상징적 규모인 열 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만이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다. 전도를 위해 파송하신 제자들은 사회적 공간의 규모를 약간 상회하는 칠십인이었다(눅 10:1).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의 수는 공적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일백 이십인(행 1:15)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께서는 종종 중대사가 있을 때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친밀 공간을 만들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며 그들을 훈련시키셨고 우리와도 늘 함께 있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마 28:20), 그것이 꼭 외형적, 신체적 근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실 때는,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아픈 종 뿐 아니라 심지어 백부장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극찬하시며 그의 종을 고쳐주셨다(눅7:1-10 누가는 유대인의 장로들과 백부장의 벗들이 와서 예수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한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의 상황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간 익숙했던 대면 중심의 사역 방식에 혼란과 당혹감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기를 교회 소그룹과 공동체 사역을 다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구성원들의 가벼운 친교와 양육은(현재도 많은 교회들이 하는 것처럼) 상당부분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개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나누는 것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라면 온라인이(때로는 오프라인과 결합할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적인 대면을 여전히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젊은 세대일수록 외부에 의해서 배치되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모임에 대해서는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5~6인 이하의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마이크로 소그룹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내가 적정 소모임의 규모를 6인 이하로 구상하는 것은 경험적 근거도 있지만, 일반적인 독서 소모임에서 상호 교류의 역동성을 위해서는 6인 이하가 적합하다는 진술에 기인한다). 교회는 모임의 주제와 구성원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기보다 여러 다양한 소모임들이 생겨나도록 리더들을 양성하고. 모임을 장려하며 후원하는 역할을 맡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게 좋을 듯싶다. 정리하면, 교육이나 양육중심의 소그룹은 온라인 중심의 사회적 공간으로 전환하고, 기도와 나눔 중심의 소그룹은 규모를 더욱 줄여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발적이고, 가족적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의 정기적 소그룹 모임이 10명 내외였다면 여기서는 5명 내외, 혹은 그 이하로 줄여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소그룹 사역을 활발하게 해왔던 어느 교회에서는 다시 3~4명의 단위로 체제를 개편하고 있다고도 한다. 어느 목회자의 경험에 의하면,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 체제를 만들지 않아도 (사실 그 전에 시도를 해봤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소모임들이 형성되고 자기들끼리 교류한다고 한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소그룹 사역의 예비적 단계일 수도 있다. 그동안 교회가 공동체의 결성을 도맡아하는 프로그래머의 기능에 몰두했다면, 코로나시대에는 다양한 공동체 공간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소모임의 구심점이 될 평신도 리더들을 양성하고, 각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찰하고 후원하는 섬세한 환경조성자(environmentalist)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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