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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이중주
by 김선일
2020-09-02
팀 켈러는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이머징 교회 운동가인 디이터 젠더(Dieter Zander)가 말하는 낯선 복음(alien gospel)과 왕국 복음(kingdom gospel)의 대비를 소개한다. 낯선 복음을 줄여서 AG로, 왕국 복음을 KG라고 부른다. AG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 하세요. 그러나 인간은 모든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를 대신 갚게 하셨어요.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지불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실 겁니다.” 젠더가 이를 낯선 복음이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온전하게 드러내는 복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젠더는 복음의 핵심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되면서, “다른 종류의 삶이 도착했는데, 이는 현존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의도적으로 만물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구속하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AG는 개인주의적이고 율법적이며, 사후에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지옥에 가느냐로 복음을 채색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해서 지옥의 위협으로부터 구출을 받는 것이 초점이다. 반면 KG는 이 세상의 개선과 변화에 무게를 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 두 종류의 복음과 거리를 두며 평가한다. 먼저 AG 모델이 지니는 약점을 이렇게 말한다.① 이 모델은 규칙을 어기는 것을 죄로 판정함으로, 죄의 자기 주장성이나 우상숭배에 대한 이해가 약하다. 죄가 얼마나 내재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오히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②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 순복하고 자비를 간청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③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치 나쁜 삶을 사는 것에서 죄를 용서받고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 전환된 정도로 생각한다. 그는 또한 KG 모델의 약점을 이렇게 지적한다.① 이 모델은 십자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대속자이신 예수님을 강조하기보다, 용기와 사랑의 특별한 삶을 산 모델로서의 예수님이 부각된다. ② 죄 용서와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온 삶을 다해 진리를 믿고 실천해야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고 그 안에서 살도록 초청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에서 이타적이고 공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 것처럼 보인다. 팀 켈러는 그가 가장 강력하게 지적하는 율법과 복음의 혼동을 이 두 모델의 대비에서도 발견한다. 두 모델 모두 ‘만일 내가 바르게 산다면 나는 용납될 것’이라는 전형적인 율법의 내적 논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메시지는 죄의 모욕성, 깊이, 파괴성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검의 ‘날카로움’을 놓친다.”나는 어릴 때 부흥회에 참석해서 AG의 메시지를 강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또는 ‘성령이나 방언을 받으려면’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다 실토하며 회개해야 한다는 부흥사의 엄중한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기껏 초등학생 나이에 내가 몰래 지은 죄들까지 낱낱이 다 기억해내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특별히 뜨거운 확신도, 신묘한 경험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 신앙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가장 간절했던 순간이었으나,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영적 열등감과 좌절감이 자리 잡은 시점이었다. 물론 회개하려는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복음과 대면함에 있어서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깊고 오묘한 은혜의 역사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철저한 회개의 성과를 이루었느냐에 맞춰질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의식 뿐 아니라 자기 인정의 욕구가 강해지면, 비록 신앙의 지식이 쌓이더라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을 위해서, 은혜에 보답하여 그분을 감동시키기라도 해야 한다는 욕구에 쉽게 넘어간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부응하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KG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최근의 필요와도 잘 연관된다. 세상 변혁의 비전 자체가 비성경적이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AG와 마찬가지로 KG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하신 일에 우선적으로, 깊이 천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있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셨는지,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급진적 은혜를 베푸시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셨는지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시종일관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는 AG와 KG를 저울질하며, 상황에 따라 한쪽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혼돈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종종 일어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복음의 계명(또는 예수 신경 Jesus Creed)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종종 예수께서 명시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이유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독교 복음의 대표 메시지로 제시한다. 그러다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하나님 사랑에 치중하고, 진보적인 신앙인들은 이웃 사랑을 더 강조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해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 계명은 복음이 아니다. 이는 말 그대로 명령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큰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복음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이 가장 큰 계명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대 전제에 철저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나 개인에 대한 사랑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사 회복케 하시려는 창세 이전의 계획으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디이터 젠더는 낯선 복음(AG)을 극복하고자 KG(왕국 복음)을 제안했고, 팀 켈러는 그 두 모델 모두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한 유형임을 지적했다. 이에 나는 갱신된 AG와 KG의 공존과 통합을 제안하고 싶다. 단어를 살짝 바꿔보자. A는 Atonement Gospel이라 부르고, KG를 His Kingdom Gospel이라 하자(인간의 이상향이 아닌,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예수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속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된다. 우리에게는 AG와 KG가 항상, 동시에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구원 사역은 깊이 있으면서도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은혜는 나의 모든 죄와 허물, 약함을 친히 아시고 어루만지시며 용서하실 만큼 섬세하고 심오하다. 또한 그의 구원은 나라는 개인 뿐 아니라 온 우주를 회복시킬 만큼 포괄적이고 총체적이다. 톰 라이트가 스콧 맥나잇의 책 ‘예수 왕의 복음’(The King Jesus Gospel)의 서문에서 개인적 속죄의 복음을 헬리콥터의 회전날개에 비유한 적이 있다. 회전날개 없이는 헬리콥터가 이륙할 수 없기에 회전날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회전날개만이 헬리콥터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초적 추동력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속죄의 복음으로 새롭게 출발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며 지향해야 할 모든 여정이다. 속죄의 복음은 단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헬리콥터의 정상적이고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 회전날개는 지속적으로 기능을 해야 한다. 속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나라 여정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력을 공급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신다는 담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담대하고 멋진 희망의 이야기 속에서 왕이신 하나님이 바로 나와 같은 이방인이고 사소하며 희망 없는 개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지옥을 면하게 하는 구원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 사역에 동참하게 할 정도로 존귀하게 하시고 자녀와 상속자로서의 권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이 복음을 듣고 나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어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는가?
복음
예수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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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복음
왕국복음
예수신경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by John Perritt
2020-09-01
나는 잠을 잘 못 이룬다.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마치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처럼 내 모든 불안을 불러내 “자, 와서 먹어라” 하는 것 같다. 마감일, 약속, 관계의 어려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정, 그리고 교회의 책임, 모두가 1순위가 되기 위해 밀고 밀치고 있다. 나는 데이비드 머레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몇몇 가지는 수면처럼 신학적이다. 내게 잠자는 패턴을 보여주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신학을 보여주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잠결에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많은 수면 전문가들은 잠자리에 들고 한 시간 이내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나오라고 말한다. 여러 날 밤마다 나는 그렇게 해왔고 결과는 매번 엇갈렸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몰래 침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면 한 번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게는 무릎에서 나는 소리를 조용히 시킬 능력이 없다. 조용한 밤을 깨우는 건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갈라지는 큰 소리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종종 내 아내에게 남편이 침대로 되돌아왔다고 알린다.나의 모든 치밀한 계획과 닌자 같은 은밀한 솜씨가 내 몸 때문에 좌절된다는 것이 종종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내 무릎이 갈라지는 소리는 수면방해보다 더 큰 문제를 보여준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가? “존, 너는 죽어가고 있어.” 필연적인 죽음의 무덤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위해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에덴동산에서 창조주에게 저지른 인류의 반역의 결과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성경은 바로 지금 우리가 영원한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끊임없이 이 사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육체이기도 하다. 관절이 쑤시든지, 수면 부족이든지, 만성적 통증이든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현실이라는 진리이든지 간에, 이것들은 우리 영혼에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지구상에 모든 존재는 걸어 다니는 역설이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게 될 영원한 존재이다.우리 몸은 닳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도중에도 늙어가고 있다. 여러분 중 몇몇이 쓰고 있는 안경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시력은 유통기한이 있다. 이 글의 문장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뇌가 피곤하고 지쳤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일종의 만성적 통증일지 모른다. 당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일 수도 있다. 그들의 끊임없는 필요는 우리가 다른 곳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켜 준다.더 냉정하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묻히는 것을 이미 목격했거나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다. 당신이 죽음과 병에 대해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무언가가 잘못된다는 증거이다. “원래 이런 식이 아니었어! 이것은 내가 창조된 삶과 모순되는 것이야.”텅 빈 무덤질병과 죽음이 당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다고 생각할 때 당신이 느끼는 두려운 감각과 감정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신은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조주와 함께 육체와 영혼의 대연합을 갈망한다. 요컨대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지만, 사후에 당신의 영혼이 부활한 육체와 재회할 때까지 어떤 불완전성이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들은 창조주 앞에서 몸과 영혼, 완벽한 존재를 누리기를 갈망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벽한 존재를 가지셨고 인간의 본성에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더해주셔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그분은 신성에 인성을 더하셨다. 그분은 병과 슬픔의 존재로 들어오셨다. 천사들의 기쁨을 주는 소리를, 부정과 거짓, 가십, 기만 등의 비명소리와 맞바꾸셨다. 불화와 분열을 위해 평화와 연합을 제쳐두셨다. 채찍과 가시, 창, 못 박힘의 고통을 느끼셨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 박동이 멎고 눈이 죽음으로 감기는 것을 경험하셨다.창조주는 스스로 창조세계에 내려오셨다. 왕은 종이 되셨고 무죄한 사람이 형을 선고받았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써 우리의 자리에서 벌을 받으셨다.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 어려움, 질병, 슬픔 그리고 심지어 당신의 죽음까지도 떠맡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안고 무덤으로 가셔서 그곳에 남겨두고 몸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어 걸어 나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모든 백성들을, 영혼과 몸 둘 다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 원제: Fear of Disease and Disability번역: 송유희
죽음
질병
두려움
예수_그리스도
불면증
부활
건강
창조를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8-31
이전에는 성경을 믿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진리에 대해 단순함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나오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복잡해진 이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17세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20세기 초까지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므로 넓게는 지난 300년 동안, 그리고 좀 좁혀 본다면 지난 100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이 매우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으면 이전 시대의 순전함에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제2의 순진성이라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창조에 대한 기본적 논의를 해 보자.신조들과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고대 교회의 신조들과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문들을 제시하신 분들은 창조에 대해서 믿는다고 할 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말했다고 할 수 있다.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②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교부들과 개혁자들은 성자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한다.③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결국에는 창조주를 섬기게 하기 위해서, 그 존재와 형태와 외관과 다양한 기능들을 부여해 주셨다.④ 섭리와 연결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그의 영원하신 섭리와 무한한 능력으로 유지시키시며 통치하셔서, 인간들을 위해 있게 하시며, 다시 그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여기까지는 창조를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 신조들과 종교개혁기의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를 더해 ⑤ 이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창조를 믿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창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앞의 네 가지를 성경에서 이끌어낸 창조에 대한 가르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창조를 인정한다는 것의 함의우선 위의 ①~④까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믿고 주장하는 것인지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첫째로, 이런 의미의 창조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이전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존재하셨었다고 단언해야 한다. 만일에 창조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든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지 실질적으로는 없는 것이라고 하든지, 창조자와 피조계는 이를 테면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으로 모두가 자연이라고 한다든지(Baruch Spinoa)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믿는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피조되지 않으셨으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홀로 삼위일체적 교제를 나누며 계셨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정에 따라서 그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유신론적 창조 이해이다.하나님에 대해서 아직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 전통적인 서구 철학적 유신론(the classic theism)인데, 이를 말하면서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아직 삼위일체 개념을 생각하지 말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의 상당수는 끝까지 삼위일체 개념을 넣지 말고 생각하자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하는 유신론을 기독교 유신론(the Christian theism)이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지나치게 먼저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접근은 창조에 대해서도 다양한 잘못된 이해를 이끌어 내며, 결국 하나님 이해도 왜곡하게 된다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로 분명히 하였으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우리들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창조 이전”이 있었으며, 그 때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하고 깊은 사랑의 교제만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그러므로 흔히 성경에서 “하늘과 땅”(天地)이라고 언급되는 것은 그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온 세상 모든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그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이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 처음 창조하실 때 창조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과 공간은 피조계 밖에 있는 것이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의 오성형식(悟性形式)이므로 그저 사유의 틀일 뿐 사물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 사유하려고 할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가지고 사유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칸트적인 틀보다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하셨다는 어거스틴적인 이해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진정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적 창조 신앙의 출발점이다.둘째로,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했지만, 창조사역에서의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할 때,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창조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을 가지고 성부께서만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함께 성자께서 창조의 과정에 함께 하셨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그로(즉, 요 1:1이 말하고 있는 로고스,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한다. 또한 10절에서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고 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한 후에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또한 성령님께서도 창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을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또 창세기 1장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창 1:2)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과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연결지어 이해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말씀으로 언급된 성자를, 창조의 객관적 원리라고 하고, 성령님을 창조의 주관적 원리라고 표현해 오고 있다.셋째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결국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피조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이시다. 이 때 우리가 언급할 만한 유명한 구절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이 주에게서 기원하였으며, 주를 통해서 이 땅에 있게 되었으며 결국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일종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나 그것을 현대적으로 보충한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으로 오해하면서 그와 같은 것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본래적으로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성과 비교하면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우연성(偶然性)을 강조한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연히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필연적 존재(必然的 存在)이신데 비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작정과 창조에 의해서 있게 된 존재이니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옛날부터 그렇게 표현해 온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들이 신에게 속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인 것이다. 피조물들이 하나님에게 들어가서 합류하는 것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형태의 만유재신론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이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와 존재와 양상을 지닌 존재들은 그 다원성과 다수성과 독특성이 다 인정되나, 특히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에 비추어 우리의 당위를 찾는 방식의 윤리적 논의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판단 받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한 후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였는지가 나타나게 된다.넷째로, 창조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만 하시고 그냥 자연법칙을 따르게 하셨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 즉 자연신론(自然神論)은 기독교적인 창조론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또한 섭리가 창조의 과정이라고 하면서 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어떤 과정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창조론은 아니다.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최소한 이 네 가지를 바르게 인정해야 기독교적 창조론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① 그 창조의 하나님께 참으로 경배하며,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여 나가는가? ② 하나님께서 피조하신 피조계를 참으로 잘 돌보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잘 드러내어 나가는가? 를 통해서 우리가 과연 창조를 실천적으로 인정하는 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그 하나님의 전능성을 나와는 관련 없는 것으로 생각하든지, 배제하려 하든지 하는 것은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려는 책임을 가지게 된다. 참으로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여기 하나님의 자녀들의 책임이 나타난다. 따라서 창조를 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피조계를 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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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이런 상투어, 이제 그만!
by Matt Smethurst
2020-08-30
존 파이퍼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한 문단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아니, 심지어 몇 문장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좋은 문장은 선물이다. 간결하고 명확할 뿐 아니라 외울 수 있을 정도의 문장 속에서 깊고 심오한 진리를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찰스 스펄전이나 C. S. 루이스의 훌륭한 문장이 당신이 받는 뉴스피드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책 전체의 내용을 다 담아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 속이 꽉 찬 문장을 좋아하신다.그렇다고 짧은 문장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종종 진리를 간결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진리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진리를 가리기도 한다. 결국 진리를 가리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여기 그리스도인이 자주 쓰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가 있다. 이것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1. “하나님은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이 말 뒤에 숨은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렘 32:27). 그렇기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잠 16:9)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신다(히 13:5).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깨달음일 수도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때에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령님이 문만이 아니라 창문까지 전부 다 닫아버리시는 이야기로 가득하다(예, 잠 16:9; 19:21; 행 16:6-7).나는 언젠가 “소명”을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의 삼중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그걸 좋아하는가, 그걸 할 능력이 있고 또 문이 열려 있는가?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세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문을 부숴서라도 결단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순교한 선교사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막연하게 “소명”을 기다리고만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들의 엉덩이를 차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다른 경우는 어떨까? 누군가 어떤 도시로 가서 직장을 얻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또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면? 그게 문이든 창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라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다시 재점검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내적 갈망과 확인된 은사와 실질적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2.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때는 없다.”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또는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영광스러울 정도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 안전을 말한다. 몇 년 전 내가 어느 폐쇄적인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몇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으니까 어떤 피해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거 같다.“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 21:16-18).“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그런데 완벽하게 안전할 거라고?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AD 100-165)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분명히 이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죽일 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에게 그 어떤 해도 입힐 수는 없다.”나는 이 말을 너무 좋아한다.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이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너무도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적 안전은 그 중 하나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맞는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 3.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아주 좋게 봐서 이 말은 항복의 가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의 이력서, 변명, 두려움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이 말은 마치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안락한 소파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 말은 아주 교묘하게도 싸우고 노력하고 또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거는 용도로 사용된다.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 말이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 심’(justification)을 의미할 때만 쓰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상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면서 결과적으로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녹녹치 않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바울은 석양과 낮잠 대신 군인과 운동선수, 농부를 생각했다(딤후 2:3-6). 그는 달리기 트랙과 권투 링을 생각했다(고전 9:24-27).하나님이 이미 우리 속에서 이뤄놓으신 것을 열매로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또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결과를 드러내면서 살도록 우리는 부름 받았다(빌 2:12-13). 평안 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역동성(마 11:28-30; 16:24)은 청교도들이 “거룩한 땀”이라고 부르던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하는 덕목이다. J. 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되어야 한다.”4. “당신이 감당 못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동기부여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물론 도전이 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결코 그 한계를 넘는 일까지 시키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 할 일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지난 몇 년간 전직 노예 상인이었고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지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편지보다 내 영혼에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과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이렇게 썼다.우리가 생각하는 틀과 인식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의 시간]에 관한 믿음이 알려주는 바는 동일합니다. 주님은 대개 죽어가는 시간에 꼭 필요로 하는 힘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다가 주님이 정한 시간에 따라 죽음을 맞았을 때 주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두려움을 압도하고, 당신의 모든 적을 침묵시키며, 그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편안한 승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죽으심으로 죽음의 쏘는 것을 이기셨고 무덤을 정복하셨고 또한 믿는 사람들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이다. 5.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성경 구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자주 성경 구절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라는 사실보다 더 좋은 뉴스는 오늘날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을 돕는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우리를 위해서 오셨다(마 9:12-13; 눅 19:10).이 말로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요약이 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찰스 스펄전이 언젠가 말했듯이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겸손해지는 사람들,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도우신다.진리는 사랑하는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이 다섯 가지 말에 숨은 의미가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은 단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진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 오로지 진리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지킬 수 있고, 또 말씀을 바로 지킴으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오로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고전 13:6).원제: 5 Christian Cliches that Need to Di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소명
변명
상투어
진리
거짓말
의롭다하심
칭의
성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by Brett McCracken
2020-08-29
몇 주일 전 우울한 헤드라인 소식과 한숨만 나오게 하는 소셜 미디어에 지친 한 주를 끝내고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한 살이 된 아들 체트는 나뭇가지를 모으거나 벌레를 잡았고 나는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 뻗은 캘리포니아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있었다. 위를 향해 뻗은 나뭇가지는 마치 내 눈에 찬양을 하기 위해 위로 올린 팔처럼 보였다. 이사야서 55장 12절에 나오는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는 구절과 더불어 이 나무는 실로 창조된 모습 그대로, 창조 질서에 순종하며 기쁨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나무는 끝없이 이어지는 디지털 인생에도 무심하며 오로지 단순하고 조용하게 나무로서 받은 소명인 가지를 뻗고, 그늘을 만들어주며, 산소를 생산하고, 그리고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향해 위로 또 위로 뻗어가는 소명을 완수하며 묵묵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나무의 나무됨을 온전히 느끼던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평안과 경이로움 그리고 예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가 다 이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창조주를 향한 끝없는 찬양을 올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우리 인간은 사실상 이런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쁨에 찬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단순한 생활을 하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바쁘기만 하다. 아마 당신도 이런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과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향과 목적을 느끼던 순간 말이다. 꼭 나무 아래 누었을 때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강, 바닷가 또는 놀라운 산세를 바라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우리에게 말을 한다(시 19).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게 하며 또 감사하게 한다(롬 1:19-21).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자연은 가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혼란 속에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줌으로 온라인 세상을 견디며 생긴 트라우마와 피로를 치료하는 반가운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의 지혜 피라미드에서도 자연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은 이유이다.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언제나 웹 서치를 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삶에 활력을 주고 지혜를 솟구치게 한다. 여기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연은 객관적이다사실과 진실은 이제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객관성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좌파에 대한 비판적 이론과 더불어 “전문가는 엘리트주의자!”라는 우파에 대한 회의론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고, 그 결과 이제 현실은 “사실(facts)”이란 것은 거의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조차도 객관성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연이다. 몇 년 전 LA 타임즈에서 나는 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탈 진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정치에 신경쓰지 않는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을 무시하고 날씨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날씨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뿐이다. 그게 다이다. 눈이 내리고 또 태양이 떠오른다. 날씨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에게 똑같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입관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당신이 스스로를 수퍼맨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자기가 원래 물고기인데 인간이라는 잘못된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물 속에 들어가면 몇 분 안에 죽을 뿐이다. 자연은 이래야 하고 또 저래야 한다는 인간이 가진 주관성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티모시 트레드웰(Timothy Treadwell, 미국의 곰 애호가이자 환경보호론자)에게 비극이 생긴 이유이다. 그는 알래스카 곰과 함께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결국 곰에게 잡아먹혔다.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는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Grizzly Man)’을 제작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미친 세상에서도 여전히 온전함을 유지하는 자연에는 선천성(givenness)이 있다. 그 선천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연이 주는 선천성을 무시하고 마치 생물학적 성이 존재하지 않는 양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을 그리스도인들이 더 포용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점점 더 손상되어만 가는 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또 뭔가를 진정으로 제대로 아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면, 그런 사람에게 과학은 적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밖으로 나가서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라. 그렇게 함으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이 우리 시대가 가진 형태가 허물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도록 만들라. 우리 속에 제대로 된 생각을 불어넣도록 만들라. 자연은 지친 마음과 영혼에 안식을 준다너무도 바쁘고 자극성이 강한 지금 사회에서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우리를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영혼과 폐와 뇌에 좀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자연은 고친다: 왜 자연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만들까(The Nature Fix: Why Nature Makes Us Happier, Healthier, and More Creative)’에서 플로렌스 윌리암스(Florence Williams)는 실제로 도시 생활이 인간의 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생활은 정신분열증, 불안감 그리고 정서적 장애의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인다. 게다가 오늘과 같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필터링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엄청난 과부하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있을 때 뇌가 처리하는 정보량은 훨씬 더 줄어든다. 그 결과 깊은 사고와 명상 또는 묵상과 같이 높은 수준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뇌가 최적화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두 개의 논문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에 중독된 아이들을 숲으로 보내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돌아온 후 뇌를 조사했는데, 뇌 속의 코르테솔(cortisol, 부신피질 호르몬의 하나) 분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늘고 초조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안정 효과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한국과 일본과 같은 국가로 하여금 과도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유령이 지배하는 도시를 탈출해서 걷기와 산소 호흡, 그리고 재조정 등을 할 수 있는 “치유의 숲”까지 지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도 “숲 요법”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으며 일부 의사들은 “자연 처방전”을 작성해서 환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도록 처방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이 효과가 있을까?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영적인 현실이 그 답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평화를 느끼는데, 그건 인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그건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인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 거칠게 숨을 쉴 때나 또는 습도 높은 벌판에서 땀을 흘릴 때 등등),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조주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바른 곳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자연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가 웬델 베리(Wendell Berry)가 쓴 ‘거친 것들의 평화’인데, 이 시는 정신적으로 초조한 세계에서 자연이 주는 선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세상에 대한 절망이 커지면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다가 깬다나와 내 아이들의 삶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무서워서나는 청둥오리가 있고 큰 왜가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물가로 내려가 눕는다나는 야생이 주는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거기에는 아무도 슬픔을 미리 예측하면서 고통을 주지 않는다나는 고요한 물이 주는 존재감을 느낀다그리고 나는 내 머리 위에 뜬, 찬란하게 빛날 시간을 기다리는 별들을 느낀다아주 잠깐 나는 세계가 주는 은혜 속에서 쉬면서 자유를 느낀다‘거친 것들이 주는 평화’는 내가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를 보면서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관점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깨달음이었는데,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정신없고 분주하더라도 이 자연은 여전히 원래 갈 길을 변함없이 간다는 것이었다. 새 아침을 맞아 우는 새소리에서부터 석양에 우는 귀뚜라미까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서 여름날 습기찬 천둥번개까지, 아기의 첫 울음에서부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숨까지, 자연의 사이클과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전 3:1).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창조라는 설계 속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게 함으로 평화를 준다. 절벽 끝에 한번 서보라. 굉음을 내는 폭포 앞에 서보라. 아니면 그냥 별들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당신이란 존재가, 그리고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라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작은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인간됨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다. 놀라운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종의 예배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이라는 영감을 불어넣는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3-6)우리의 작음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크심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이야말로 진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개미집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만드신 분, 플라타너스 나무의 견고한 몸통 뿐 아니라 장미의 섬세한 꽃잎까지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rained and Depressed by the Internet? Go Outsi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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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양심을 따라 하겠다’는 말에 관하여
by 김형익
2020-08-28
신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은 지난 2천여 년의 역사 동안 교회가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다. 이 말은 성경의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도 예외가 아니다. 불현듯 찾아온 이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면도 없지 않다. 책상 앞에서는 결코 생각할 이유가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생각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에 강제적으로 떠밀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슈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사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감염원 중 하나로 교회가 매일의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는 상황에서 주일예배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준수하여 영상예배의 형식으로 드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결정이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성경이 기준이라고? 물론 당연히 성경이 기준이다. 그런데 다들 성경이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내리는 결정들은 다르고 심지어 논쟁까지 벌이는 상황이 아닌가? 며칠 전, TGC코리아 작가로 활동하는 고상섭 목사가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글의 첫 두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옥한흠 목사님이 에베소서를 순장반에서 강의하실 때, 이런 말을 하셨다. ‘여러분,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상식이 부딪치면, 신앙적으로 생각되는 일을 따르지 말고 상식을 따르세요’”십분 공감하는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신앙 양심을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신앙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가령, 살인, 간음, 도둑질,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 탐욕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그 적용에 있어서 특수한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는 신앙 양심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개신교의 출발에는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유럽의 통치자들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했던 그 용감하고 멋진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for to go against conscience is neither right nor safe.)”하지만, 우리가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말할 때,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뮤얼 아네슬리의 말이다(Samuel Annesley, “How May We Be Universally and Exactly Conscientious?” Puritan Sermons, 1:13,14).“양심은 때때로 거짓 규칙을 참된 규칙으로, 오류를 하나님 뜻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무지를 통해 기만을 당한다. 때로는 올바른 규칙을 그릇된 행동에 잘못 적용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지를 통해서도 기만을 당한다. 나쁜 정보를 가진 양심은 사람의 전통과 거짓 교리를 신적 권세를 가장해서 하나님 뜻이라고 제안한다. …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악하다. 또 오류에 빠진 양심을 따르는 것도 악하다. 하지만 안전하고 선한 중도가 있다. 그 길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잘 채워지며 그런 양심을 따르는 길이다.” 양심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감독자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말씀과 일치하도록 길들여져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염려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다. 신자의 양심은 양심을 찢어 마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설교를 통해 일깨워져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강단이 많지 않다. 조엘 비키는 제임스 패커를 인용(James Packer, Quest for Godliness_Crossway,1990, p.48)하여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에 따르면, 강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지는 사람들의 양심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의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21세기 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이런 설교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더더욱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말을 조심히 써야 하지 않을까? 자칫 이런 표현은, “아, 나는 그냥 내 고집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는가?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찢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점검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이라는 영적 습관은 생경하기만 할 것이다. 자기 점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영적 습관이자 훈련이다.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목사들은 어떤가? 정상적인 목사라면 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성경과 신학의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다.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중세 말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제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성경과 신학의 훈련이 거의 전무한 목사들, 성경 대신 자기 소견을 따라 목회하는 거짓 목사들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신앙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솔직히 겁이 덜컥 난다. 무엇을 말하려고 그는 신앙 양심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나는 신앙 양심에 따라 하기로 했다”는 말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비록 그 뜻조차도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신앙 양심에 따르겠다’는 말이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들리거나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의 말처럼 들려서야 되겠는가?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양심’(딤전 1:5,19)과 ‘깨끗한 양심’(딤전 3:9; 딤후 1:3)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본연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이 지리하고 괴로운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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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그 가치의 아름다움
by Greg Morse
2020-08-27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창조의 핵심이 되는 질서에 타격을 받게 된다. 하늘에서 별을 없애거나 땅을 바다로 덮거나 또는 태양과 달을 사라지게 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된다고?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이야기했어?”남자와 여자라는 그 아름다움을 손상하려는 사탄의 노골적인 시도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등한 사회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후 10:15). 이 말씀처럼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용감하게 싸워왔다. 우리는 다 각자 할 일이 있다. 공식적인 변증을 하는 것 외에 미학적인 변증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가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모든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는 자체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단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단과 개혁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household of God)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남자됨’과 ‘여자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자웅동체 양성과 그로 인해 결국 빚어지게 될 성적 혼란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네 가지 초대장이 있다.1.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춤추라변태적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단지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가정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의 거룩함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통해서 발휘된다. 성적인 차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리지 않는 것을 결코 기독교인의 미덕이라 말할 수 없다. 막연하게 예수님께서 성을 구분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라고 여기며 닮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닮아서 빛이 나는 여인은 여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여자다워질 때 그 빛이 더 강해진다. 예수님을 닮아 강인함을 발휘하는 남자는 그 남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남자다워질 때 그 강인함이 더 두드러진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오로지 구세주만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녀 구분이 없는 그냥 도덕적이기만 한 사람이 산다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남자와 여자로 그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스스로가 더 진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종종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남자, 여자, 아이, 지도자, 독신자, 남편, 부인 그리고 과부를 구분해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결혼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리더십과 희생, 복종과 신뢰,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결혼 생활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적을 무너뜨리고, 세상 또한 우리 결혼 생활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자녀라는 축복을 만끽하라자녀는 단지 성경에 나오는 축복, 즉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 때 주시는 새 소유물이나 지위 같은 수준의 축복이 아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전체에 떨치도록 하는, 인류를 향한 사명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다.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이 세상을 채우고 또 다스리라고 했다(창 1:28). 여기에 새 언약으로 인해서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이 추가되었지만, 그렇다고 창조 당시에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원래의 부르심이 무시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중 다음 시편 저자의 찬양에 동참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이 땅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주님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방식 대로 양육하는 것이다(엡 6:4).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결코 우리 삶과 목적에 있어서 곁길로 새는 게 아니다. 거룩한 가문이 되는 것은 여러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유산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셨다(마 19:14).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녀들을 기뻐하지 않을 때 사탄의 속삭임은 더 커지게 된다. 자녀들을 향한 목표를 잃거나 귀찮아질 때, 남녀라는 성적인 문제는 오로지 우리 자신과 욕망의 문제로만 전락하게 된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소중히 여길 때, 지금 이 사회가 겪고 있는 성적 비정상 상태, 특히 아이들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의사까지 존재하는 이런 사회를 고칠 수 있다. 3.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회복하라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 앞에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소명 받은 삶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 학교가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똑같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교육한다.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유니섹스적인 커리큘럼 외에 학교에 무슨 다른 커리큘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디도서 2장 3-5절을 보면 젊은 여자를 남자와 연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늙은 여자가 옳은 것을 가르치며, 또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또 남편에게 복종하고 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등등이 다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집과 가정이야말로 여성적인 미덕이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하는 무대이다.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젊은 여자를 향한 나이 드신 여자 분의 책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딸로서 받은 소명에 따라 순결을 강조하고 거룩한 아내와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육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여인은 젊은 여자로 하여금 단지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4. 성별 간의 싸움을 거부하라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은 서로를 보완하라는 것이지 경쟁하라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육신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창 2:18)이었지 결코 아담에 대항하는 라이벌이 아니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결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문화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차이를 가볍게 여기는 교육을 받곤 한다. 오늘날 차이라는 말은 일종의 상하조직으로 인식된다. 공정함은 동일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동일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이상적인 생각은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G. 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그의 짧은 시, “비교”(Comparisons)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달 옆에 태양을 놓으면바다 옆에 땅을 놓으면과일 옆에 꽃을 놓으면나라 옆에 마을을 세우면남자를 여자 옆에 두면어떤 바보가 이런 얘기를 할 것 같아뭐가 더 나은 지에 대해서 말이야. 신부가 없는 아들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이유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기쁘시고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신부가 없는 아들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결혼식,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결혼식들은 다 마지막 때에 한 남자와 한 교회 사이에 있을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대한 준비이다. 역사는 결국 신부와 성령님이 신랑에게 “오라”(계 22:17)고 하는 날 울려 퍼질 다음 선언을 준비하는 전주곡이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계 21:9).시간이 시작되던 때 하나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형태를 역사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해 바르고 신성한 기준을 세운다.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마지막 날에 있을 가장 성대한 결혼식 날까지 우리가 힘을 다해 보호해야 하는 가치일 뿐 아니라 기뻐서 함께 춤을 춰야할 아름다움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Lost Art of Male and Femal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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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성정체성
자녀양육
창조질서
성별
결혼
그리스도의신부
남과여
체스터턴
‘포스트 코로나’, 적응을 말하다
by 김돈영
2020-08-26
새로운 환경‘아차’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동네 마트를 향하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집으로 되돌아갔던 일이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마스크를 써 본 일이 없다. 내가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일이며, 번거로운 일이다. 반복되는 실수에 급기야 현관문에 ‘마스크’라고 크게 써 붙였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요즘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다. 집을 나설 때 열쇠와 지갑을 챙기듯이 마스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낯설고 불편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몸에 밴 것이다. 거리에나 식당, 영화관, 마트 등 모든 공간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볼 때면, 원래부터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변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다.전망하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데 제동이 걸렸다.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성도의 교제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어려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며 다양한 전망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내놓는다.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 과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현재 상황과 향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전망한다. 이런 정보와 전망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전망을 한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성경을 교육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할 것인가, 어떻게 성도와 교제할 것인가 등 많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그런데 이런 전망과 대안을 듣다 보면 불편한 마음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방안은 온라인, 영상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대안이고, 중요한 방안이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혹은 ‘위드 코로나’의 정답이 온라인만은 아닐 것이다.시작은 비슷하다오랜 시간 함께 직장 사역을 했던 분 중 비슷한 시기에 개척한 두 교회가 있다. 두 곳 모두 직원들이 교인이 되어 개척한 곳이다. 성도의 대부분은 직장과 연관된 사람들로 이전에 신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야말로 맨땅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교회인 셈이다. 두 교회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한 곳은 최대한 성도를 배려하고자 했다. 매일 직장에서 보고 주일에도 봐야 하니 예배 외에는 최대한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청소와 봉사, 식사까지도 외부의 사람을 썼다. 매주 식당에서 배달한 음식을 먹고, 짧게 설교하려고 애썼다. 주보를 만들거나 안내하는 것, 예배당 정리하는 것도 혼자서 직접 했다. 예배시간 외에 어떤 모임도 만들지 않았다. 대다수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반면에 다른 곳은 매일 직장에서 보지만 교회는 또 다른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소와 봉사, 식사 준비 등 역할을 나누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주일에는 강해 설교와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고 필요에 따라 주중에 모이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적응’한다3년 정도 지났을 때, 두 곳은 분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공통점은 두 곳 모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처음에 동참했던 사람의 절반 정도가 떠난 것 같다. 물론 나간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새롭게 들어온 사람도 있어서 전체 수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떠나간 이유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본인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나갔거나 반대로 맡겨진 일이 부담스러워서 나갔을 것이다.반면에 분명한 차이가 눈에 보였다. 배려를 많이 했던 곳은 3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사람조차도 예배에 늦거나 고의로 빠지기도 했다. 여전히 봉사하는 사람은 없다. 식당에서 배달해오는 밥을 먹은 후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각자 갈 길로 흩어지기 바쁘다. 식사 후 그릇을 정리하는 일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지만, 하는 이가 없다. 남은 뒤처리는 오롯이 교역자의 몫이다. 예배와 봉사를 위한 담당자가 정해져 있으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붙잡아 놓고 교육을 하거나 강요하지 못한다. 부담스러워 할까, 혹시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아니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곳은 제법 조직적인 모습이었다.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당 청소를 하는 사람까지 각자가 맡은 역할을 감당했다. 예배 후에는 성경공부 모임이나 다른 소모임을 갖기도 했다. 물론 리더로 세워진 몇몇 사람이 주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것을 보면 크게 거부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일에는 리더 모임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도 진행된다고 한다. 이들도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다.작은 차이 큰 변화두 곳 모두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로 시작했다. 3년이 지난 후,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쪽은 리더로서 활동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쪽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보살펴야 하고, 혹시 떠나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내면의 신앙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두 곳을 언급하는 것은 어느 쪽이 바람직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적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두 목회자의 출발은 비슷했다.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소망했고, 처음 믿는 성도들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서기를 바랐다. 여느 목회자와 같이 성도들을 사랑했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고,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성도를 생각하고 위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배려’한 것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교육’한 것이다.적응하더라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말을 한다. 사람들이 ‘적응하더라’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느 쪽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새롭고 낯선 일이라는 것이다. 매 주일 예배에 나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잡음이 있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몸에 익숙해지면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배려가 어색하지만 편해서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익숙해지니 당연한 것이 되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봉사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익숙하고 적응하니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이러한 모습을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상황에 어떤 방법 혹은 어떤 절차를 내놓아도 결국 그것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쉬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고, 좀 더 복잡한 일도 적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겠는가? 목회자로서 무엇을 생각하며 코로나 시대의 대안을 마련해야 하겠는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바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히 섞어 놓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편의성, 접근성, 다양성, 재미와 감동 등이 가장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성경,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정상인듯 비정상인 상황에서우리는 지금 정상인듯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 예배와 찬양을 마음껏 하기 힘들고,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부르짖던 기도시간이 그립다. 예배 후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으며 수다 떨던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성도를 꼭 안아주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모일 수 없어서 영상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은 흐려졌다. 빨리 끝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한다. 그것에 적응하고 있다. 주일 시간이 많이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이 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이럴 때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온라인 예배’, ‘온라인 성경공부’, ‘온라인 수련회’ 등 지금 상황에서는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온라인 성찬’, ‘온라인 세례’, ‘온라인 교회’ 등 점차 확장된 개념으로 시도하는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정말로 그것이 바른 것인지, 최상의 방법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인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 포기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조금도 아쉬워하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아야 한다. 번거롭고 불편한 것, 비효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하고, 말씀대로 사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택해야만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 많이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배려하고, 조금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쉬운 방법을 제시하겠는가?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 그것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포스트 코로나’는 ‘온라인’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혹여 돌아가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바른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 누구나 성경을 읽고, 성직자가 아닌 그리스도께 고백하고, 가운을 벗고 설교단에 서는 일 등은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확신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가는 길을 버리고 바른 것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다. 아니 목숨까지도 내놓고 대항해서 변화시킨 것이다.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기보다는 내게 맡겨주신 곳에서부터 고민해보자. 전해 들은 것을 어떻게 바르게 전달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말이다.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더라도 불편하고 번거로울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무엇을 하든 결국 적응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생길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방식’이 아닌 ‘방향’을, ‘형식’이 아닌 ‘본질’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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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마신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by Benjamin R. Merkle
2020-08-25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나는 교회에 있으면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복음주의에 심취한 순진무구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냥 교회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바짝 마른 내 몸에 근육을 키울 수 있으면 좀 더 안정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병대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가 살던 동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탱크를 담당하는 예비 부대가 있었고, 그 덕에 나는 주중에는 대학을 다니고 주말이면 탱크를 모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만세! 나는 이제 “내가 말이야, 해병대에 있을 때….”와 같은 말을 남들에게 할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된 것이다. 화생방 훈련이 기억난다. 방 하나에 최루가스를 잔뜩 채워놓고 훈련 교관은 우리를 그 방안에서 한참 뛰도록 한 후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교관이 주먹을 들면, 우리는 다시 마스크를 쓸 수 있었다.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고 교관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마스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마스크 필터를 손으로 빼서 마스크 안에 있는 공기를 밖으로 세게 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마스크 안에 있던 모든 최루 가스가 사라지고,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쉽다. 내가 속한 화생방 훈련 그룹의 시작은 괜찮았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숨을 참았다. 일 분 정도 지났을 때 교관은 우리에게 다시 마스크를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잘 참았다. 이제 다시 마스크를 쓰고 그 속의 공기만 깨끗하게 만들면 된다.나의 어리석은 생각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루 가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다호 주에서 자란 깡마른 기독교 청년들 중에 나 같은 이런 경험을 한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제 나는 피부와 눈으로는 최루 가스의 위력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가스가 폐로 들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결심이 섰다. 마스크 쓰기 전에 가스를 조금만 마셔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나는 새로운 또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경험 때문에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루 가스를 아주 조금 마셨다.내 폐는 순식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터질 것 같았고, 나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네이팜 폭탄이 내 목구멍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나는 급히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속 오염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숨을 내쉴 산소가 내 폐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스크 속 최루 가스까지 마시고 있었다. 엄청난 패닉이 몰려왔고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문으로 달려가 이 방을 나가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 속 최루 가스 속에서 끙끙거리고 헉헉거리며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의 일부라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참았다. 금지된 지혜사실 그것은 엉뚱한 충동에 빠진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와, 잘 했네”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누구나 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했는데?”라고 물을 뿐이었다. 애초 내 생각이 멍청했고, 게다가 실행까지 한 것은 더 어리석었다. 멍청하게 들린다는 걸 알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그때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구분시켜줄 아주 좋은 기회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경험한 적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기회는 더 근사하게만 보였다.이런 어리석음은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기본적인 오류고, 그것은 우리의 첫 선조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뱀은 금지된 과일을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눈이 떠지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를 유혹했다(창 3:3). 사탄의 유혹이 가진 매력은 단지 선악과의 맛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탄의 말을 들은 하와는 그 유혹에 굴복했다.이런 식의 유혹은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또한 금지된 무언가의 맛을 보게 됨으로써 엄청난 지혜를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 눈에도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직까지 짓지 않은 여러 죄를 짓게 됨으로 얼마나 큰 수치심을 느낄지를 말이다. 게다가 스스로 봐도 너무 순진하기 그지 없었다는 생각에 더 부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순진하고 경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까? 결혼할 때까지 성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동정(virginity)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기독교 학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혼란 속에서 순수함은 어느새 불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이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죄를 통해 얻는 경험이 당신을 더 지혜롭게 만들까 아니면 더 어리석게 만들까? 진짜 죄에 빠지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는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까 아니면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책하도록 만들까?진짜 남자는 경건한 남자다이 원칙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여기서는 남자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기독교인 남자는 경건하면서도 남자답고 싶은 부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진 이 세상에서 사탄은 진짜 남자라면 남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유혹한다. 술에 취해서 정신도 잃어봐야 하고, 이곳저곳에서 섹스를 하고, 또 주먹질도 몇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하는 남자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사람이 나중에 구원받으면 간증 때 할 얘기는 아주 많다.)이 세상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말한다. 이 세상 기준에 따르면, 남성다움은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Christlessness)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이 말하는 남성다움은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세상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 거짓말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코 남성다운 기독교(masculine Christianity)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맛보는 것이 더 나은 남자로 만들 거라는 생각은 최루 가스를 마시는 게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만큼이나 어리석기 그지 없다. 이미 충분하다죄에 찌든 세상 경험이 우리를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 마약과 방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듣기 좋다고, 그런 간증하는 인생을 꿈꿔서는 안 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간증이 지루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죄를 많이 지었든지, 아니면 적게 지었든지, 죄는 그것으로 족하다. 지루한 간증을 한다고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독과 지혜를 혼동하지 말자. 지혜는 결코 죄를 맛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시고, 또 그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할 때에만 생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pping Poison Won’t Make You Wise (Take My Word for It!)번역: 무제
에덴동산
영성
영적성장
최루가스
죄의유혹
경건
남성
지혜
화생방훈련
마스크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by 이춘성
2020-08-24
현대의 정의론: 공정과 정의많은 사람은 정의(justices)를 공정(fairness)과 같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정의는 반드시 공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John Rawls)는 이러한 주장을 이론으로 발전시켜 정치, 경제에 적용하였다. 모든 사람은 동일 조건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공평이며 정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마다 타고난 배경과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거나 결정된 조건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경쟁에서 불공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롤스는 단순히 기회만 동일하게 주는 것만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존 롤스에게 불공정이란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롤스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무지의 장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모의 도움과 같은 선천적 조건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용시험에서 모든 조건을 공개하고 면접을 보는 것보다 성별, 출신지, 학력과 학교, 인종, 나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롤스는 공정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공정이란 조건을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출발의 조건, 아니면 과정의 조건 둘 중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출발을 아무리 같게 만든다고 하여도 같을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롤스의 정의는 장애인을 제외한 정상인을 위한 정의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였을 때, 누군가는 더 노력해서 남들보다 앞설 것이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을 들어, 남보다 노력해서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공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공정성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에게는 흑인의 공정성, 여자에게는 여자의 공정성, 남자에게는 남자의 공정성, 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공정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정의론의 다양성세상에는 정의에 대한 이론이 매우 다양해서 그 이론들을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성경의 정의 개념조차도 열 개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정의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정의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예수님의 시대의 유대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하나님과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이들 또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따른 가변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서로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위선적인 삶을 정의로운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이 아무리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만들어도, 결코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서 ‘더 나은 의’라고 부르신 그 정의란 무엇일까?더 나은 정의팔복(마5:3-12)에는 의,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디카이오수네(δῐκαιοσῠ́νη)가 두 번 나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팔복의 구조를 보면, 정의에 대한 복인 네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앞의 1, 2, 3번째의 복의 결론과 5, 6, 7번째 복의 결론이다. 이것은 문학적 구조상 ‘정의’라는 덕목이 팔복이라는 집을 떠받치는 두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1) 죄를 응시하는 정의팔복을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팔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자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고통하고 아파하는 자다. 셋째로 “온유한 자”는 자신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다. 이 세 가지 복은 모두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있다. 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 안에 정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정의를 갈구하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상태다. 그러므로 정의는 죄를 바라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의 차이점이다. 세상은 죄를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규칙과 윤리를 찾는다.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정의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의의 규칙을 만든들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가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정의를 이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2)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정의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복은, 정의로 충만해진 신자를 향한 복이다. 다섯 번째 복은 정의에 충만하면 타인의 어려움과 궁핍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여섯 번째 복은 정의로 가득하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대면한다. 일곱 번째 복으로 정의는 화평(평화)을 추구하게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일어나고, 불화한 사람들을 화해시킨다. 그런데 세상 속에 이기적이지 않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해보라. 세상은 그를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출현은 자기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탁월한 정의 앞에서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정의는 빛바랜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예수의 정의팔복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규칙이나 윤리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정의의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정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 정의를 규정하고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전적인 무능을 깨닫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단계는 정의에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에게 정의를 먹여줄 어떤 존재를 요청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정의를 공급해주고 채워주신 후에,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고, 평화를 사랑하며, 이런 가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의 본질은 아니다.예수님의 정의의 본질은 네 번째 복에 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고 마셔서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 바로 예수님 자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것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비교해보자.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체의 구조상 수미쌍관(인클루지오)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팔복, 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가 마태복음의 후반부에서 가시적이며 육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예수님 자체다. 예수님이 정의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도덕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다.그리스도인의 정의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예수님 자체다. 윤리적 항목이나 원리가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열매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그분을 통째로 먹고 마시는 놀라운 일, 그 신비를 경험하지 않고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산다하여도 그 안에는 정의가 없다. 반대로 정의의 열매가 없는 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잘 알아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일이 없는 자, 곧 정의가 없는 자다.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한때 천사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부터 추락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은 종교인, 정치인, 교육자 등 다양하다. 멀리서 보면 정의롭던 사람이 가까이 가면 악취가 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복 받은 자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 정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복 받은 자라는 선언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갈구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실패하고 낙망하여 다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지하여 의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의 의, 정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정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호도 윤리 운동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에서 시작하여 신비로 끝난다. 이러한 신비가 없는 정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며 여기에 닿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가 빠진 윤리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교회는 수많은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한 공명선거 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인 청년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은 교회가 윤리적이지도 않고,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없다는 비판이다. 이 시점에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외치던 정의가 예수님의 정의였는지, 아니면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윤리 운동들 중 하나로 결국 위선으로 막을 내린 그런 유의 세속의 정의였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성찬의 신비가 사라진 정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런 정의로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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