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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양심을 따라 하겠다’는 말에 관하여
by 김형익
2020-08-28
신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은 지난 2천여 년의 역사 동안 교회가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다. 이 말은 성경의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도 예외가 아니다. 불현듯 찾아온 이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면도 없지 않다. 책상 앞에서는 결코 생각할 이유가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생각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에 강제적으로 떠밀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슈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사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감염원 중 하나로 교회가 매일의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는 상황에서 주일예배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준수하여 영상예배의 형식으로 드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결정이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성경이 기준이라고? 물론 당연히 성경이 기준이다. 그런데 다들 성경이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내리는 결정들은 다르고 심지어 논쟁까지 벌이는 상황이 아닌가? 며칠 전, TGC코리아 작가로 활동하는 고상섭 목사가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글의 첫 두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옥한흠 목사님이 에베소서를 순장반에서 강의하실 때, 이런 말을 하셨다. ‘여러분,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상식이 부딪치면, 신앙적으로 생각되는 일을 따르지 말고 상식을 따르세요’”십분 공감하는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신앙 양심을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신앙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가령, 살인, 간음, 도둑질,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 탐욕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그 적용에 있어서 특수한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는 신앙 양심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개신교의 출발에는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유럽의 통치자들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했던 그 용감하고 멋진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for to go against conscience is neither right nor safe.)”하지만, 우리가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말할 때,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뮤얼 아네슬리의 말이다(Samuel Annesley, “How May We Be Universally and Exactly Conscientious?” Puritan Sermons, 1:13,14).“양심은 때때로 거짓 규칙을 참된 규칙으로, 오류를 하나님 뜻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무지를 통해 기만을 당한다. 때로는 올바른 규칙을 그릇된 행동에 잘못 적용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지를 통해서도 기만을 당한다. 나쁜 정보를 가진 양심은 사람의 전통과 거짓 교리를 신적 권세를 가장해서 하나님 뜻이라고 제안한다. …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악하다. 또 오류에 빠진 양심을 따르는 것도 악하다. 하지만 안전하고 선한 중도가 있다. 그 길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잘 채워지며 그런 양심을 따르는 길이다.” 양심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감독자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말씀과 일치하도록 길들여져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염려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다. 신자의 양심은 양심을 찢어 마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설교를 통해 일깨워져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강단이 많지 않다. 조엘 비키는 제임스 패커를 인용(James Packer, Quest for Godliness_Crossway,1990, p.48)하여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에 따르면, 강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지는 사람들의 양심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의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21세기 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이런 설교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더더욱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말을 조심히 써야 하지 않을까? 자칫 이런 표현은, “아, 나는 그냥 내 고집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는가?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찢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점검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이라는 영적 습관은 생경하기만 할 것이다. 자기 점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영적 습관이자 훈련이다.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목사들은 어떤가? 정상적인 목사라면 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성경과 신학의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다.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중세 말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제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성경과 신학의 훈련이 거의 전무한 목사들, 성경 대신 자기 소견을 따라 목회하는 거짓 목사들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신앙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솔직히 겁이 덜컥 난다. 무엇을 말하려고 그는 신앙 양심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나는 신앙 양심에 따라 하기로 했다”는 말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비록 그 뜻조차도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신앙 양심에 따르겠다’는 말이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들리거나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의 말처럼 들려서야 되겠는가?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양심’(딤전 1:5,19)과 ‘깨끗한 양심’(딤전 3:9; 딤후 1:3)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본연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이 지리하고 괴로운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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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 그 가치의 아름다움
by Greg Morse
2020-08-27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없애버릴 때 우리는 창조의 핵심이 되는 질서에 타격을 받게 된다. 하늘에서 별을 없애거나 땅을 바다로 덮거나 또는 태양과 달을 사라지게 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된다고?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이야기했어?”남자와 여자라는 그 아름다움을 손상하려는 사탄의 노골적인 시도에 대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한가? 평등한 사회라고 불리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후 10:15). 이 말씀처럼 훌륭한 정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용감하게 싸워왔다. 우리는 다 각자 할 일이 있다. 공식적인 변증을 하는 것 외에 미학적인 변증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가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한 신앙 고백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모든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을 손에 들고 있다는 자체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일단 그 출발점을 삼아야 할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단과 개혁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household of God)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남자됨’과 ‘여자됨’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시대에 유행하는 자웅동체 양성과 그로 인해 결국 빚어지게 될 성적 혼란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네 가지 초대장이 있다.1.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춤추라변태적인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것은 가정에서 시작한다. 단지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가정교육으로 연결되어야 한다.우리의 거룩함은 남자와 여자라는 성을 통해서 발휘된다. 성적인 차이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리지 않는 것을 결코 기독교인의 미덕이라 말할 수 없다. 막연하게 예수님께서 성을 구분하지 않을 것 같은 분이라고 여기며 닮아가려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닮아서 빛이 나는 여인은 여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여자다워질 때 그 빛이 더 강해진다. 예수님을 닮아 강인함을 발휘하는 남자는 그 남자다움을 잃을 때가 아니라 점점 더 남자다워질 때 그 강인함이 더 두드러진다.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오로지 구세주만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남녀 구분이 없는 그냥 도덕적이기만 한 사람이 산다는 게 아니다. 점점 더 남자와 여자로 그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 우리는 스스로가 더 진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종종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에게 동일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남자, 여자, 아이, 지도자, 독신자, 남편, 부인 그리고 과부를 구분해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결혼 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리더십과 희생, 복종과 신뢰,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결혼 생활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적을 무너뜨리고, 세상 또한 우리 결혼 생활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해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자녀라는 축복을 만끽하라자녀는 단지 성경에 나오는 축복, 즉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 때 주시는 새 소유물이나 지위 같은 수준의 축복이 아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 전체에 떨치도록 하는, 인류를 향한 사명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존재이다. 에덴동산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이 세상을 채우고 또 다스리라고 했다(창 1:28). 여기에 새 언약으로 인해서 영적인 자녀를 낳는 일이 추가되었지만, 그렇다고 창조 당시에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원래의 부르심이 무시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 중 다음 시편 저자의 찬양에 동참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이 땅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주님 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훈련방식 대로 양육하는 것이다(엡 6:4).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결코 우리 삶과 목적에 있어서 곁길로 새는 게 아니다. 거룩한 가문이 되는 것은 여러 세대를 통해 이어지는 유산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아이들을 기쁘게 맞이하셨다(마 19:14). 우리도 그래야 한다. 자녀들을 기뻐하지 않을 때 사탄의 속삭임은 더 커지게 된다. 자녀들을 향한 목표를 잃거나 귀찮아질 때, 남녀라는 성적인 문제는 오로지 우리 자신과 욕망의 문제로만 전락하게 된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소중히 여길 때, 지금 이 사회가 겪고 있는 성적 비정상 상태, 특히 아이들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의사까지 존재하는 이런 사회를 고칠 수 있다. 3.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회복하라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 앞에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소명 받은 삶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와 여자로서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 학교가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를 똑같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교육한다.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유니섹스적인 커리큘럼 외에 학교에 무슨 다른 커리큘럼이 있었는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다. 디도서 2장 3-5절을 보면 젊은 여자를 남자와 연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늙은 여자가 옳은 것을 가르치며, 또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고 또 남편에게 복종하고 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 등등이 다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집과 가정이야말로 여성적인 미덕이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하는 무대이다.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젊은 여자를 향한 나이 드신 여자 분의 책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딸로서 받은 소명에 따라 순결을 강조하고 거룩한 아내와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육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여인은 젊은 여자로 하여금 단지 하나님의 자녀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자가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4. 성별 간의 싸움을 거부하라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은 서로를 보완하라는 것이지 경쟁하라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육신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창 2:18)이었지 결코 아담에 대항하는 라이벌이 아니었다.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결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되었다. 문화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차이를 가볍게 여기는 교육을 받곤 한다. 오늘날 차이라는 말은 일종의 상하조직으로 인식된다. 공정함은 동일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동일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이상적인 생각은 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러나 G. K. 체스터턴(G.K. Chesterton)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그의 짧은 시, “비교”(Comparisons)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달 옆에 태양을 놓으면바다 옆에 땅을 놓으면과일 옆에 꽃을 놓으면나라 옆에 마을을 세우면남자를 여자 옆에 두면어떤 바보가 이런 얘기를 할 것 같아뭐가 더 나은 지에 대해서 말이야. 신부가 없는 아들남자와 여자가 중요한 이유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기쁘시고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신부가 없는 아들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류 최초의 결혼식,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결혼식들은 다 마지막 때에 한 남자와 한 교회 사이에 있을 어린 양의 결혼식 만찬에 대한 준비이다. 역사는 결국 신부와 성령님이 신랑에게 “오라”(계 22:17)고 하는 날 울려 퍼질 다음 선언을 준비하는 전주곡이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계 21:9).시간이 시작되던 때 하나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창조가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은 결혼이라는 형태를 역사의 중심에 두기로 결정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해 바르고 신성한 기준을 세운다.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마지막 날에 있을 가장 성대한 결혼식 날까지 우리가 힘을 다해 보호해야 하는 가치일 뿐 아니라 기뻐서 함께 춤을 춰야할 아름다움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Lost Art of Male and Female번역: 무제
변증
창조
성정체성
자녀양육
창조질서
성별
결혼
그리스도의신부
남과여
체스터턴
‘포스트 코로나’, 적응을 말하다
by 김돈영
2020-08-26
새로운 환경‘아차’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동네 마트를 향하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집으로 되돌아갔던 일이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마스크를 써 본 일이 없다. 내가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일이며, 번거로운 일이다. 반복되는 실수에 급기야 현관문에 ‘마스크’라고 크게 써 붙였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요즘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다. 집을 나설 때 열쇠와 지갑을 챙기듯이 마스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낯설고 불편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몸에 밴 것이다. 거리에나 식당, 영화관, 마트 등 모든 공간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볼 때면, 원래부터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변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다.전망하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데 제동이 걸렸다.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성도의 교제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어려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며 다양한 전망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내놓는다.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 과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현재 상황과 향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전망한다. 이런 정보와 전망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전망을 한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성경을 교육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할 것인가, 어떻게 성도와 교제할 것인가 등 많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그런데 이런 전망과 대안을 듣다 보면 불편한 마음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방안은 온라인, 영상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대안이고, 중요한 방안이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혹은 ‘위드 코로나’의 정답이 온라인만은 아닐 것이다.시작은 비슷하다오랜 시간 함께 직장 사역을 했던 분 중 비슷한 시기에 개척한 두 교회가 있다. 두 곳 모두 직원들이 교인이 되어 개척한 곳이다. 성도의 대부분은 직장과 연관된 사람들로 이전에 신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야말로 맨땅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교회인 셈이다. 두 교회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한 곳은 최대한 성도를 배려하고자 했다. 매일 직장에서 보고 주일에도 봐야 하니 예배 외에는 최대한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청소와 봉사, 식사까지도 외부의 사람을 썼다. 매주 식당에서 배달한 음식을 먹고, 짧게 설교하려고 애썼다. 주보를 만들거나 안내하는 것, 예배당 정리하는 것도 혼자서 직접 했다. 예배시간 외에 어떤 모임도 만들지 않았다. 대다수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반면에 다른 곳은 매일 직장에서 보지만 교회는 또 다른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소와 봉사, 식사 준비 등 역할을 나누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주일에는 강해 설교와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고 필요에 따라 주중에 모이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적응’한다3년 정도 지났을 때, 두 곳은 분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공통점은 두 곳 모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처음에 동참했던 사람의 절반 정도가 떠난 것 같다. 물론 나간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새롭게 들어온 사람도 있어서 전체 수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떠나간 이유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본인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나갔거나 반대로 맡겨진 일이 부담스러워서 나갔을 것이다.반면에 분명한 차이가 눈에 보였다. 배려를 많이 했던 곳은 3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사람조차도 예배에 늦거나 고의로 빠지기도 했다. 여전히 봉사하는 사람은 없다. 식당에서 배달해오는 밥을 먹은 후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각자 갈 길로 흩어지기 바쁘다. 식사 후 그릇을 정리하는 일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지만, 하는 이가 없다. 남은 뒤처리는 오롯이 교역자의 몫이다. 예배와 봉사를 위한 담당자가 정해져 있으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붙잡아 놓고 교육을 하거나 강요하지 못한다. 부담스러워 할까, 혹시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아니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곳은 제법 조직적인 모습이었다.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당 청소를 하는 사람까지 각자가 맡은 역할을 감당했다. 예배 후에는 성경공부 모임이나 다른 소모임을 갖기도 했다. 물론 리더로 세워진 몇몇 사람이 주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것을 보면 크게 거부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일에는 리더 모임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도 진행된다고 한다. 이들도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다.작은 차이 큰 변화두 곳 모두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로 시작했다. 3년이 지난 후,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쪽은 리더로서 활동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쪽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보살펴야 하고, 혹시 떠나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내면의 신앙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두 곳을 언급하는 것은 어느 쪽이 바람직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적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두 목회자의 출발은 비슷했다.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소망했고, 처음 믿는 성도들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서기를 바랐다. 여느 목회자와 같이 성도들을 사랑했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고,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성도를 생각하고 위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배려’한 것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교육’한 것이다.적응하더라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말을 한다. 사람들이 ‘적응하더라’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느 쪽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새롭고 낯선 일이라는 것이다. 매 주일 예배에 나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잡음이 있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몸에 익숙해지면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배려가 어색하지만 편해서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익숙해지니 당연한 것이 되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봉사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익숙하고 적응하니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이러한 모습을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상황에 어떤 방법 혹은 어떤 절차를 내놓아도 결국 그것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쉬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고, 좀 더 복잡한 일도 적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겠는가? 목회자로서 무엇을 생각하며 코로나 시대의 대안을 마련해야 하겠는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바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히 섞어 놓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편의성, 접근성, 다양성, 재미와 감동 등이 가장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성경,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정상인듯 비정상인 상황에서우리는 지금 정상인듯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 예배와 찬양을 마음껏 하기 힘들고,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부르짖던 기도시간이 그립다. 예배 후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으며 수다 떨던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성도를 꼭 안아주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모일 수 없어서 영상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은 흐려졌다. 빨리 끝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한다. 그것에 적응하고 있다. 주일 시간이 많이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이 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이럴 때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온라인 예배’, ‘온라인 성경공부’, ‘온라인 수련회’ 등 지금 상황에서는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온라인 성찬’, ‘온라인 세례’, ‘온라인 교회’ 등 점차 확장된 개념으로 시도하는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정말로 그것이 바른 것인지, 최상의 방법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인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 포기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조금도 아쉬워하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아야 한다. 번거롭고 불편한 것, 비효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하고, 말씀대로 사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택해야만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 많이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배려하고, 조금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쉬운 방법을 제시하겠는가?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 그것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포스트 코로나’는 ‘온라인’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혹여 돌아가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바른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 누구나 성경을 읽고, 성직자가 아닌 그리스도께 고백하고, 가운을 벗고 설교단에 서는 일 등은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확신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가는 길을 버리고 바른 것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다. 아니 목숨까지도 내놓고 대항해서 변화시킨 것이다.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기보다는 내게 맡겨주신 곳에서부터 고민해보자. 전해 들은 것을 어떻게 바르게 전달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말이다.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더라도 불편하고 번거로울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무엇을 하든 결국 적응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생길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방식’이 아닌 ‘방향’을, ‘형식’이 아닌 ‘본질’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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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을 마신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by Benjamin R. Merkle
2020-08-25
지혜로운 사람이 항상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나는 교회에 있으면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복음주의에 심취한 순진무구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냥 교회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바짝 마른 내 몸에 근육을 키울 수 있으면 좀 더 안정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병대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내가 살던 동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탱크를 담당하는 예비 부대가 있었고, 그 덕에 나는 주중에는 대학을 다니고 주말이면 탱크를 모는 두 가지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 만세! 나는 이제 “내가 말이야, 해병대에 있을 때….”와 같은 말을 남들에게 할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된 것이다. 화생방 훈련이 기억난다. 방 하나에 최루가스를 잔뜩 채워놓고 훈련 교관은 우리를 그 방안에서 한참 뛰도록 한 후에 마스크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잠시 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교관이 주먹을 들면, 우리는 다시 마스크를 쓸 수 있었다.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고 교관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다시 마스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마스크 필터를 손으로 빼서 마스크 안에 있는 공기를 밖으로 세게 불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마스크 안에 있던 모든 최루 가스가 사라지고,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쉽다. 내가 속한 화생방 훈련 그룹의 시작은 괜찮았다.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숨을 참았다. 일 분 정도 지났을 때 교관은 우리에게 다시 마스크를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잘 참았다. 이제 다시 마스크를 쓰고 그 속의 공기만 깨끗하게 만들면 된다.나의 어리석은 생각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루 가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다호 주에서 자란 깡마른 기독교 청년들 중에 나 같은 이런 경험을 한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은 계속되었다. 이제 나는 피부와 눈으로는 최루 가스의 위력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가스가 폐로 들어오면 어떤 느낌일까? 결심이 섰다. 마스크 쓰기 전에 가스를 조금만 마셔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나는 새로운 또 하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경험 때문에 조금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최루 가스를 아주 조금 마셨다.내 폐는 순식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터질 것 같았고, 나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네이팜 폭탄이 내 목구멍 안에서 터진 것 같았다. 패닉에 빠진 나는 급히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 속 오염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숨을 내쉴 산소가 내 폐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스크 속 최루 가스까지 마시고 있었다. 엄청난 패닉이 몰려왔고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 속에는 어떻게든 문으로 달려가 이 방을 나가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스크 속 최루 가스 속에서 끙끙거리고 헉헉거리며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깨끗한 공기의 일부라도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참았다. 금지된 지혜사실 그것은 엉뚱한 충동에 빠진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듣고 “와, 잘 했네”라고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누구나 다 “아니, 왜 그런 짓을 했는데?”라고 물을 뿐이었다. 애초 내 생각이 멍청했고, 게다가 실행까지 한 것은 더 어리석었다. 멍청하게 들린다는 걸 알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그때 그것을 하나의 기회로 보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를 구분시켜줄 아주 좋은 기회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코 경험한 적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기회는 더 근사하게만 보였다.이런 어리석음은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기본적인 오류고, 그것은 우리의 첫 선조 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뱀은 금지된 과일을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눈이 떠지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와를 유혹했다(창 3:3). 사탄의 유혹이 가진 매력은 단지 선악과의 맛만 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는 사탄의 말을 들은 하와는 그 유혹에 굴복했다.이런 식의 유혹은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우리 또한 금지된 무언가의 맛을 보게 됨으로써 엄청난 지혜를 갖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 눈에도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아직까지 짓지 않은 여러 죄를 짓게 됨으로 얼마나 큰 수치심을 느낄지를 말이다. 게다가 스스로 봐도 너무 순진하기 그지 없었다는 생각에 더 부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그 누가 순진하고 경험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할까? 결혼할 때까지 성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동정(virginity)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 기독교 학생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혼란 속에서 순수함은 어느새 불안정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런 혼란은 이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짐으로 정리될 수 있다. 죄를 통해 얻는 경험이 당신을 더 지혜롭게 만들까 아니면 더 어리석게 만들까? 진짜 죄에 빠지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꿈꾸는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까 아니면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자책하도록 만들까?진짜 남자는 경건한 남자다이 원칙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여기서는 남자들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기독교인 남자는 경건하면서도 남자답고 싶은 부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진 이 세상에서 사탄은 진짜 남자라면 남이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유혹한다. 술에 취해서 정신도 잃어봐야 하고, 이곳저곳에서 섹스를 하고, 또 주먹질도 몇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하는 남자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런 사람이 나중에 구원받으면 간증 때 할 얘기는 아주 많다.)이 세상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고 말한다. 이 세상 기준에 따르면, 남성다움은 그리스도가 없는 상태(Christlessness)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이 말하는 남성다움은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세상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 거짓말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교회는 결코 남성다운 기독교(masculine Christianity)의 바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죄를 맛보는 것이 더 나은 남자로 만들 거라는 생각은 최루 가스를 마시는 게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만큼이나 어리석기 그지 없다. 이미 충분하다죄에 찌든 세상 경험이 우리를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 마약과 방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구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듣기 좋다고, 그런 간증하는 인생을 꿈꿔서는 안 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간증이 지루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죄를 많이 지었든지, 아니면 적게 지었든지, 죄는 그것으로 족하다. 지루한 간증을 한다고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독과 지혜를 혼동하지 말자. 지혜는 결코 죄를 맛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시고, 또 그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할 때에만 생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pping Poison Won’t Make You Wise (Take My Word for It!)번역: 무제
에덴동산
영성
영적성장
최루가스
죄의유혹
경건
남성
지혜
화생방훈련
마스크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by 이춘성
2020-08-24
현대의 정의론: 공정과 정의많은 사람은 정의(justices)를 공정(fairness)과 같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정의는 반드시 공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John Rawls)는 이러한 주장을 이론으로 발전시켜 정치, 경제에 적용하였다. 모든 사람은 동일 조건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공평이며 정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마다 타고난 배경과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거나 결정된 조건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경쟁에서 불공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롤스는 단순히 기회만 동일하게 주는 것만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존 롤스에게 불공정이란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롤스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무지의 장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모의 도움과 같은 선천적 조건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용시험에서 모든 조건을 공개하고 면접을 보는 것보다 성별, 출신지, 학력과 학교, 인종, 나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롤스는 공정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공정이란 조건을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출발의 조건, 아니면 과정의 조건 둘 중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출발을 아무리 같게 만든다고 하여도 같을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롤스의 정의는 장애인을 제외한 정상인을 위한 정의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였을 때, 누군가는 더 노력해서 남들보다 앞설 것이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을 들어, 남보다 노력해서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공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공정성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에게는 흑인의 공정성, 여자에게는 여자의 공정성, 남자에게는 남자의 공정성, 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공정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정의론의 다양성세상에는 정의에 대한 이론이 매우 다양해서 그 이론들을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성경의 정의 개념조차도 열 개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정의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정의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예수님의 시대의 유대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하나님과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이들 또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따른 가변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서로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위선적인 삶을 정의로운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이 아무리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만들어도, 결코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서 ‘더 나은 의’라고 부르신 그 정의란 무엇일까?더 나은 정의팔복(마5:3-12)에는 의,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디카이오수네(δῐκαιοσῠ́νη)가 두 번 나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팔복의 구조를 보면, 정의에 대한 복인 네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앞의 1, 2, 3번째의 복의 결론과 5, 6, 7번째 복의 결론이다. 이것은 문학적 구조상 ‘정의’라는 덕목이 팔복이라는 집을 떠받치는 두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1) 죄를 응시하는 정의팔복을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팔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자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고통하고 아파하는 자다. 셋째로 “온유한 자”는 자신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다. 이 세 가지 복은 모두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있다. 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 안에 정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정의를 갈구하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상태다. 그러므로 정의는 죄를 바라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의 차이점이다. 세상은 죄를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규칙과 윤리를 찾는다.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정의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의의 규칙을 만든들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가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정의를 이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2)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정의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복은, 정의로 충만해진 신자를 향한 복이다. 다섯 번째 복은 정의에 충만하면 타인의 어려움과 궁핍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여섯 번째 복은 정의로 가득하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대면한다. 일곱 번째 복으로 정의는 화평(평화)을 추구하게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일어나고, 불화한 사람들을 화해시킨다. 그런데 세상 속에 이기적이지 않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해보라. 세상은 그를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출현은 자기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탁월한 정의 앞에서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정의는 빛바랜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예수의 정의팔복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규칙이나 윤리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정의의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정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 정의를 규정하고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전적인 무능을 깨닫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단계는 정의에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에게 정의를 먹여줄 어떤 존재를 요청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정의를 공급해주고 채워주신 후에,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고, 평화를 사랑하며, 이런 가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의 본질은 아니다.예수님의 정의의 본질은 네 번째 복에 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고 마셔서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 바로 예수님 자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것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비교해보자.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체의 구조상 수미쌍관(인클루지오)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팔복, 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가 마태복음의 후반부에서 가시적이며 육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예수님 자체다. 예수님이 정의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도덕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다.그리스도인의 정의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예수님 자체다. 윤리적 항목이나 원리가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열매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그분을 통째로 먹고 마시는 놀라운 일, 그 신비를 경험하지 않고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산다하여도 그 안에는 정의가 없다. 반대로 정의의 열매가 없는 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잘 알아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일이 없는 자, 곧 정의가 없는 자다.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한때 천사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부터 추락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은 종교인, 정치인, 교육자 등 다양하다. 멀리서 보면 정의롭던 사람이 가까이 가면 악취가 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복 받은 자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 정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복 받은 자라는 선언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갈구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실패하고 낙망하여 다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지하여 의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의 의, 정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정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호도 윤리 운동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에서 시작하여 신비로 끝난다. 이러한 신비가 없는 정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며 여기에 닿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가 빠진 윤리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교회는 수많은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한 공명선거 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인 청년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은 교회가 윤리적이지도 않고,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없다는 비판이다. 이 시점에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외치던 정의가 예수님의 정의였는지, 아니면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윤리 운동들 중 하나로 결국 위선으로 막을 내린 그런 유의 세속의 정의였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성찬의 신비가 사라진 정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런 정의로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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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제한 명령’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by 장대선
2020-08-23
전 세계적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잘 대처해 오던 우리 사회가, 최근 교회질서를 어지럽힌 한 목회자의 일탈로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나 그 목회자는 그동안 현 정부에 대해 좌파정권 혹은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며 온갖 시위를 해오던 상황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까지 뒤엉켜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는, 단순히 방역상의 문제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올바른 이해의 요구까지 참으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각 사안들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정리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현 사태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먼저 바이러스의 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공교롭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질서의 상황 가운데서 그 확산이 급격해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동안 방역당국과 국민들 전체가 상당한 질서와 협조를 보여준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방역당국의 혼란과 국민들의 무질서 가운데 있던 사회에서는 심각한 피해와 확산을 보여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신천지 그리고 앞서 말한 그 목회자의 경우는 혼란과 무질서가 낳은 전형적인 결과를 입증한다. 특별히 신천지의 문제는 차치하고 지금 불거진 한 목회자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방역지침과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무질서한 인물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와 교회 사이는 분리로서 규정지을 수 없는 지점이 있으며, 그 지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너무도 중요하다. 방역의 문제에 있어서 국가는 불가피하게 교회의 예배와 관련하여 지침과, 심지어 통제를 단행해야만 하는 경우가 명백히 있음을 지금 우리들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 모인 가운데서 수행한 행위가 실정법에 벗어나거나 저촉되는 경우, 예컨대 불미스런 스캔들이나 허위와 같은 것으로 인해 교회에서 소송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국가의 공권력은 불가피하게 교회의 운영에 관한 조사와 행정적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정치의 사실상의 부재 가운데서 교회의 재산권과 관련된 무수한 분쟁들이 대부분 실정법의 판결 말고는 다른 중재가 되지 않는 형편에서, 교회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부득이하게라도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서, 국가가 과연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로 그 역할을 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 혹은 여전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 또 한 번 다루어 보기로 하고 우선 불거진 정부의 통치행위, 혹은 통제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에 관해 논의해보도록 하자.그런데 정부의 통치, 혹은 통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정교분리의 원칙이 확고한 편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학적 전제들로서는 정확한 원리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16세기말 스코틀랜드의 교회가 산출한 스코틀랜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 1578)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정교분리가 아닌 독특한 연계와 구별 가운데 아주 잘 규정되어 있어서, 비로소 이를 근거로 이 주제를 정확한 장로교회정치의 원리에 따라 정립해 볼 수가 있다.먼저 제2치리서는 1장의 “교회와 교회정치의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세속정치와의 차이점”이라는 주제 가운데서 4항에 이르기를 “교회의 권세와 정치는 세상 권세 혹은 국가[공화국]의 시민 정부에 속한 권세 및 정치와는 속성상 다르다.”라고 하여, 교회와 국가 운영의 정치원리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곧장 4항은 이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권세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로서,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는 것이 되고 경건하고 선한 백성들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즉 국가의 권세와 교회의 권세[권위]는 공히 하나님께 속한 목적에 따라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후자의 문맥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서는 거의 상실했지만,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결코 교회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들을 자신의 주권과 뜻에 따라 다스리시고 섭리하신다는 우리의 기초적인 믿음으로 볼 때,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만일 이를 부정하고 현재와 같이 엄격히 정교분리의 원칙만을 고수한다면 국가의 정부와는 별개의 교회 정부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단적인 예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바티칸 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과 같이, 세속 정부와는 전혀 별개의 시스템으로 교회들이 성립해야만 할 것이다.그렇다면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관원들과 직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이해와 자세로서 대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제2치리서 1장 9항에서 명확히 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9항은 이르기를 “교회에 속한 사역자와 그 외 모든 사람은 세상 관원(civil magistrate)에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 하고, 교회 정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즉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인 국가와 교회의 권세를 시행하는 자들 모두 상호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로마서 13장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는 말씀에서 인출하는 것이다.그런데 제2치리서 1장 9항은 또한 규정하기를 “이 두 재판관의 권세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즉 국가의 권세가 교회의 권세까지 가져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교회의 권세가 국가의 권세까지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어지는 규정에서 이르기를 “세상의 권세는 칼의 권세[사법권]이고, 다른 하나[교회의 권세]는 열쇠의 권세[영적 권세]다.”라고 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즉 교회의 권세는 말씀[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늘(Heaven)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수행하고, 세상의 권세는 ‘칼’[사법권]에 따라 악을 벌하고 선을 권장하는 권세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즉 두 권세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교회에 속한 사역자[목회자]와 그 외 모든 사람[신자들]은 세상 관원에게 순종해야 하며, 세상 관원도 영적으로는 교회에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세상 권세도 말씀[성경]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이며, 다만 그 기능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에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세속 권세인 정부의 행정력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의 차원에서 기독교회들의 예배를 잠정적으로 비대면으로 수행하도록 했다. 그런즉 얼핏 그 모양이 그 권세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러한 외적인 수단 즉 칼의 권세로는 결코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없다. 영적인 교회의 속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은 오히려 영적인 것, 곧 말씀의 권세다. 그런즉 말씀의 진리를 희석해버리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적인 속성을 통제하거나 제거해 버릴 수 있는 방편이다. 심지어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수 없도록 예배를 폐지한다고 해도,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4)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칼의 권세로서는 결코 영적인 권세를 행사할 수가 없다. 바로 그 사실을 제2치리서 1장 13항에서 언급하기를 “관원은 칼과 다른 외적인 수단들에 의해 순종을 요구하지만, 목회자는 영적인 칼과 영적인 수단들로서 순종을 요구한다.”고 한 것이니, 칼로서는 결코 영적인 순종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억지로 교인들을 강압하여 끌고 가는 방식은 전혀 영적인 방식인 목회의 방식이 아니다.사실 우리 정부는 현재 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외적인 형식을 일부 제한하려는 것이다. 예배의 본질이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영과 진리”에 있는 한, 그런 정부의 지침이나 행정력은 전혀 예배의 본질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지나친 월권이라 생각하여 저항하려고 하다가는 자칫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2)는 말씀에 스스로 저촉되려는 것이 아닌지 신중해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롬 13:4)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제어하여 더 큰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을 대적하는 악을 행하여서 공연히 칼의 두려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지 더욱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즉 정부가 기독교의 예배를 방해하려는 목적일 리가 없는 한, 지교회와 사역자들 모두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 내의 일부 무분별한 사역자가 현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 상태에 관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대면하여 모이는 회중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진지한 상황인식을 토대로, 바로 지금이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임을 인식하고,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고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The Discipline of the Reformed Churches of France. 1559) 10장 3조의 문구를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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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은 표적과 이적을 행했나
by Greg Morse
2020-08-22
기적을 믿지 않지만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한 의대생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 보리떡과 생선으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그는 “그런 종류의 일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원칙과 이성 그리고 과학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불과 연기를 보고 놀라던, 자연현상을 보면서 신이 인간 영역에 침범했다고 두려워하던, 그런 무식한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기적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가능한 방도는 다 취하고 싶어했다. 설혹 그가 이해하는 범위 밖의 어떤 일이 생긴다 해도, 그는 기꺼이 그런 일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누리고 싶어했다. 그는 예수님께 아픈 가족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고,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여자와 데이트하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으며 또 종종 식사 기도도 하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도 기도했다. 그는 표적과 이적을 갈구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기적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비비디 바비디 부(Bibbidi Bobbidi Boo)신데렐라의 요정 대모는 지팡이를 물결치듯 흔들어서 호박을 마차로, 쥐를 암말로, 말을 마부로, 개를 시종으로, 그리고 넝마를 가운으로 바꾸었다. 바로 비비디 바비디 부라는 주문을 통해서. 뜻도 없는 횡설수설을 늘어놓는데 기적이 일어났다.이것은 복음서에 있는 우리 주님이 일으킨 기적과 완전히 대조된다. 말(words)이 기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적이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다. 예수님은 독백으로 하는 그의 말에 밑줄을 긋고, 강조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였다. 기적을 통해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 왕국은 그의 설교에 신성한 빛을 비추었다. 그 기적들은 선포하고 있다. “하늘의 왕이 여기 있다. 그의 말을 들어라.”선한 목자가 군중을 앉히고 기적적으로 많아진 빵과 물고기로 그들을 먹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나는 세상의 빵이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감으로, 그는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 더 큰 논란의 여지를 줄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 죄를 용서하는 이가 있다.” 죽은 나사로를 일으킴으로 예수님은 바로 다음 메시지에 강력한 느낌표를 찍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예수님의 목소리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풍랑이 잔잔해지며, 귀신들이 살려달라고 사정하며 돼지 속으로 들어간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다음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누구이기에”(막 4:41).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의심하는 기적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 의대생은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무관심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나도 오랫동안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단지 요정 대모가 마술 지팡이를 돌리면서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다음과 같은 주문을 외워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살라 가둘라 메칙카 불라비비디 바비디 부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마법사가 아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 안에서 그냥 죽도록 놔두지 않는다. 기적을 행하는 설교자우리 주님의 대속과 그에 따른 부활을 가장 잘 예언하는 구절 중간에 이사야는 이런 말을 넣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하나님의 종이 받은 이런 고통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기 위해서다. 마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가서 열병을 앓는 그의 장모를 고쳤을 때 이 구절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물론 그날 저녁 예수님이 병을 고친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 8:14-17). 요점은? 예수님은 삶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들을 외면하지 않는 동정심이 많은 구세주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해 기꺼이 가던 길을 돌려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분이며, 또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듯이 우리를 고치는 분이다. 단지 영원한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대신 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우리의 지금과 영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주된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던 즈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기적을 찾는 와중에 돌연 기적을 행하던 동네를 떠남으로써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 1:38). 그는 동네에서 멀어졌다. 그는 물론 천국도 떠나 이 땅에 왔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갈릴리에 있는 아픈 사람들을 다 고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기적, 표적 그리고 놀라운 일들은 다 청중으로 하여금 앉아서 열심히 듣고 메모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니고데모는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지 단지 떠돌이 기적 연출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구세주다. 비록 그의 기적은 수천 명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라고 한탄하게 만든 가르침과 함께 왔지만, 그중에서 소수는 그와 함께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바로 “영생의 말씀”(요 6:68)임을 그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정 대모는 우리로 하여금 쇼를 구경할 준비를 시키고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준비하도록 하고 그의 영광과 탁월함에 걸맞는 수준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벧후 1:3).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 놀라운 일을 이루도록 했다. 우리가 사악한 이복 누이의 희생자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서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비디 바비디 부가 아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안전한 지시 사항을 주었고(마 28:20), 그로 인해 우리는 이제 그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요 15:10).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배를 채워주고, 병을 고쳐주며 또 이적으로 놀라움을 주는 왕에 대한 생각을 사랑했지만, 그들은 (그리고 우리도) 막상 그 왕이 세상에 와서 회개하라고 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했을 때, 무엇보다 그를 가장 사랑할 뿐 아니라 그를 유일한 길, 하나뿐인 진리, 유일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왕관을 씌워 주었다. 우리는 하늘의 위로를 땅에 가져다 주는 선지자를 좋아했다. 우리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드러내고 대신 당신의 의를 드러내신 하나님을 미워했다. 와인은 다 떨어졌고 식사와 함께 오락도 끝났다. 우리는 이제 이 정도면 하나님도 충분히 할 말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바라바를 예수 대신 선택했다. 기적이 돌아올 때왜 이것이 중요할까? 한 가지 이유는 공개적이고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의 날이 반드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불신을 자아내는) 자연주의라는 가짜 신은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적을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할 날이 올 것이다. 또 인터넷에서도 보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소위 말하는, “그런 것들”은 믿지 않는 계몽주의 시대의 사람들 조차 보고 놀랄 날이 올 것이다. 내가 알던 그 의대생은 그가 믿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상이 될 것이다. 기적은 이제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연적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해 우리의 배가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에게 해가 되는 이것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많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계 13:13-14) 것과 같은 “큰 표적”이 올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불법의 사람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실제 표적과 놀라운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세상이 항상 원하는 그런 구세주가 될 것이다. 그는 우리를 놀라게 하고, 우리를 치료하고 예언하고 또 우리의 배를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가 싫어하는 설교 없이 이뤄질 것이다. 이 불법의 사람은 너무나 설득력 있고, 매력있고,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고, 매력적이기에 심지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조차도 속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위험한 날에 사탄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바로 지금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에 휩쓸려서 속은 사람은 “진리를 사랑함으로 구원받는 길을 거부한 자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자애롭고 능력에 넘친 기적과 표적 그리고 이적을 일으키면서 “가르친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허락한 가짜 기적들, 우리가 과연 온 마음과 영혼으로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기 위해 하나님이 페이스 북 페이지와 저녁 뉴스를 채우도록 허락한 가짜 기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신 13:2-3).베들레헴의 별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했듯이, 그분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듣도록, 그리고 듣고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기적이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인도하게 하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angerous Miracles: Why Jesus Did Signs and Wonders번역: 무제
기적
복음
구원
구세주
의대생
마법사
이사야
예언
예수그리스도
정치도 우상이 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0-08-21
팀 켈러는, 고대의 우상숭배란 머리에 뿔 달린 악마에게 경배하는 것 또는 신상에게 절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우상이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대개의 경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좋은 것이 한층 더 좋아질수록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욕구와 희망이 충족되리라는 기대감을 더욱 부풀리게 된다. 무엇이든지 특히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야말로 짝퉁 하나님, 혹은 거짓 신이 될 수 있다. 결국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당신의 마음과 공상의 세계를 하나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거짓 신들의 세상, 25쪽)정치가 우상이 될 수 있다그런 우상의 종류 중에 현대에 자주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념과 정치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유념해야 될 부분이 바로 정치적 발언과 정치에 대한 관심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탕한 선지자’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라는 질문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라고 대답한다. 질문에는 민족에 대한 질문이 세 번째 질문이지만, 요나는 ‘히브리 민족’임을 첫 번째로 대답한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을 가장 먼저 밝히고 그 다음에 종교를 밝혔으니, 그가 속한 민족이 그의 자기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추론할 수 있다.”(방탕한 선지자, 71쪽)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모성애와 애국심 같은 충동은 선한 것이고 반대로 성욕이나 투쟁 본능 같은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대해 부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모성애, 애국심은 좋고 선한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치가 우상이 된 증거 정치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면 어느 한쪽 정당을 절대 선으로 어느 한쪽 정당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생긴다. 정치가 우상이 되면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단순히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악한 사람으로 간주해버린다. 또한 자신들의 학파나 당파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기독교 교리를 전면 거부하는 사상으로 결국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한때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악이란 환경의 부산물이므로 환경을 개선하거나 제거하여 악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의 교리와 반대되는 이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정치의 바른 관계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정치의 바른 관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첫째,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동선 또는 공공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초월해서 복음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정치적으로 되지 않으려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이미 피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 노예제도에 침묵하기도 했다. 둘째, 개별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참여해야 마땅하지만,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정당을 유일한 기독교 정당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회심을 하려면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정치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지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명확한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이름으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가난한자를 학대하는 것 등의 분명한 도덕적 명령을 위반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특정한 그리스도인 집단이 도덕적 이상을 구체적인 사회 안에서 정확히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최선일지에 대한 생각은 성경의 원리를 넘어 지혜와 분별의 영역일 때가 많다. 정부를 축소하는 것이 좋은지, 확대하는 것이 좋은지, 자본을 시장에 맡기는 것이 좋은지,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좋은지 등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명확히 제시된 영역이 아니다. 최고의 사회 정책들은 이 양극단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성경은 모든 시간, 장소, 문화에 딱 들어맞는 그 지점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또 교회가 특정 정당과 연계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윤리적 일괄 거래’(Ethical Package Deals) 때문이다. 현대의 정당은 모든 사안에서 적절한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공식 입장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 정당의 정책이 좋다고 말하게 되면 그 하나의 정책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의 모든 정책을 다 좋아하는 것처럼 청중들은 느끼게 된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는 딜레마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있다고 할 때, 성경의 기준으로 보면 두 정당 모두의 정책 중에는 지지하는 정책과 지지할 수 없는 정책이 섞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노동자들이 대우받는 사회를 원하지만 동시에 결혼 전에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노동자와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진보적으로 보이지만, 결혼 안에서만 성적인 관계를 허용하는 입장은 보수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회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현대의 정치적 지형과는 100 퍼센트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선택지로 몰리게 된다. 어느 한쪽의 정책이 성경과 맞지 않다고 해서 그 정당의 모든 정책이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동일하게 어느 한쪽 정책이 성경과 일치한다고 해서 모든 정당의 정책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리디머교회의 교인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정당에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정당의 정책을 다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하면서 제도적 교회로서의 사명은 말씀과 성례를 시행하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는 것이지만, 유기적 교회로서의 사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정치와 상관없는 이원론으로 세상의 죄악에 방관하든지, 이와 대조적으로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하여 아주 세세한 정치적 사안까지 위압적으로 입김을 불어넣으며 심지어 입법 활동까지 하려는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교회는 정치 집단이 아니다. 교회를 통해 힘의 방식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 개인이 어느 정당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정책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지혜와 분별이 필요하다. 복음보다 정당의 지지가 우상이 되면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한쪽 지지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중요한 영역이지만, 정치가 우상이 되지 않도록 균형이 필요한 시기다.
문화
사회이슈
우상숭배
팀켈러
방탕한선지자
CS루이스
순전한기독교
아브라함카이퍼
정치참여
세계 선교에 도래한 혁명
by Darren Carlson
2020-08-20
세계는 이주하고 있다.2010년에 세계 이민자로 추정된 숫자는 총 2억 1400만 명이었으며 이는 가히 21세기 초를 이민의 시대라 부를 만하다. 보편적으로 이민자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당신은 정치적 논쟁을 생각할지 모른다. 본 글에서 나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이민의 한가지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단순 이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영국에는 15,000명의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계열의 선교사들이 있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선교사로 분류되는 1세대 이민자들이다. 그리스에 존재하는 복음주의 교회들의 대다수가 아테네에 있는 복음주의 이민 교회들이다. 런던의 경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영어를 제2외국어로 사용한다.Deeper Life Christ 교회의 나이지리아 선교사인 이케 느와오바시(Ike Nwaobasi)는 독일어를 배웠고 호주에 세 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이스라엘 올로핀자나(Israel Olofinjana)는 런던의 한 침례교회를 섬기는 나이지리아 목사다. 그는 “역(逆, reverse)선교”를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교차 문화(Cross-cultural) 사역자들을 교육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제3세계 선교 센터(the Centre for Missionaries from the Majority World)를 설립하였다.세계 선교의 다음 혁명은 디아스포라의 출현 가운데 이미 도래했다. “역선교”는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아시아, 그리고 남미와 같은 선교지역의 개종자들이 서구 세계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교차 문화 선교에 참여할 때 발생한다. 향후 몇 년 동안, 서구 사회 이외의 선교가 유럽 (그리고 아마도 미국)에서 감소하는 기독교인 인구에 미치는 영향은 교회 인구 통계가 변화함에 따라 느껴질 것이다.19세기와 20세기에 (이민보다는) 선교가 기독교를 서구 사회 밖으로 이끌었다면, 오늘날 이민은 선교를 서구 사회로 이끌어가고 있다.성경 속 이민자들이민은 성경만큼이나 오래되었다.하나님께서는 아담이라는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만드셨다. 최초의 가족은 에덴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다. 가인은 떠돌아 다녔고(창 4:23), 열방은 결국 언어의 혼잡으로 흩어지게 되었다(창 11:8–9).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이주했으며(창 12:1–9), 롯은 땅 분쟁 이후에 이주했다(창 13:5–12). 야곱은 도망하였다 귀향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요셉을 강제로 애굽에 보낸 뒤에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성경의 첫 두 책만 보아도 도망자, 노예, 기근의 피해자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후대의 이웃 나라 왕들도 유대인 인구의 일부를 메소포타미아와 메디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왕하 15, 17). 느부갓네살 왕은 고대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망명 보냈으며 그곳에서 더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생겨났다. 구원의 역사 역시 이민에 대한 이야기다. 구원자의 가족들은 압제를 벗어나 애굽으로 강제로 이주했다. 복음은 로마 전역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선포되었다. 기독교는 결코 지리적인 요충지를 가져본 적이 없다. 베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라고 묘사한다(벧전 1:1). 여기서 끝인가? 새 예루살렘을 향한 이주가 남아있다. 초대교회의 선례초대교회 또한 선교로 이어지는 이주의 많은 예들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주하는 백성들을 사용하신 완벽한 실례(實例)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신자들은 AD 31년–32년에 있던 핍박을 벗어나 스데반의 죽음을 따라 도망하였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 그룹이 구브로와 구레네로부터 이주해 와서 교회를 세웠다. AD 45년 경에는 구브로에서 온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일하며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 소개하였다. 사울과 바나바는 수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했다.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신자들은 사울의 핍박 때문에 끝내 안디옥에 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교회는 성장했다. 신자들을 그곳에서 먼저 이끌었던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데려왔다. 사울은 1년간 가르치는 사역을 했으며 그리고 나서 과거 그에게 핍박당했던 신자들이 세운 그 교회는 사울을 다시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이주는 여러가지 방법, 특히 두 가지 방식으로 선교 사역을 이끌어 냈다. 첫째, 이주했던 불신자들은 복음 사역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사도행전 2장을 보라). 이는 많은 무슬림들이 서구 사회로 이민을 오면서 처음으로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둘째, 우리는 의도치 않은 신자들의 흩어짐(예, 행 8:4; 11:19)이 복음 전파로 귀결되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에리트레아에서 핍박 받던 신자들이 현재는 유럽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오늘날 사람들의 움직은 전례없는 범위다. 이는 다양한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문화가 어떤 대상을 “정상”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들을 확장한다. 또한 복음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특별히 무슬림 가운데서)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이끌며 또한 서구 사회에 복음의 부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다음은?복음주의 기독교는 이전보다 더욱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부분 복음주의 선교사 영웅들은 문화적 관행에 가리워진 복음과 함께 직권을 가지고 있던 백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새로운 선교사들은 백인이 아니다. 그들은 문화적 힘의 위치로 접근하지 않으며 또한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께 인도한 사람들의 수가 지난 200년간 힘있는 나라에서 파송 된 선교사들에 의해 인도된 사람들보다 더욱더 많아지기를 기도해야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Revolution Has Come to World Missions번역: 정진호
선교지침
디아스포라
세계선교
이민
구원
나그네
복음
문화
지역사회
기독교 신념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란
by 이승구
2020-08-19
특히 문제가 되는 세 영역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행 법률로도 잘못을 드러내고 시정하고 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번에 제안된 법률안은 이렇게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기본적으로 이 법안에서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과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그리고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등도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을 이 법안이 언급한 점이다. 이것의 심각성을 발의된 법안에 근거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1. 소위 차별 피해의 내용이 법안을 발의한 한 국회의원은 그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직접차별 뿐만 아니라 간접차별,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 및 집단에 대하여 신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및 차별의 표시ㆍ조장 광고 행위를 차별로 금지함(안 제3조제1항2호부터 제5호까지)”라고 하고 있다. 대개 이 법안을 설명하면서 제3조 1항 1호를 중심으로만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법안이 말하는 차별 금지에는 “교육기관 및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이용에서”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및 차별의 표시ㆍ조장 광고 행위”도 차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더구나 3조 1항 5호에 의하면, 소위 네 가지 영역에 대한 언급이 없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광고 행위”도 다 “금지 대상 차별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광고”라는 말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 5호는 상당히 많은 것을 문제로 삼을 수 있는 조항이 된다. 2. 소위 차별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과정(1) 본인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차별 행위의 피해자”)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41조 1항). (2)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서 “피해자의 신청에 의하여 또는 직권으로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42조 1항)그러므로 어떤 차별 피해 사례가 진정되면 일차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에 의한 권고가 주어지는데, 이 때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면, 그에 대한 시정명령이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3) “시정권고를 받은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시정명령 및 시정명령 불이행시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안 제41조부터 제44조까지) 한다고 했고, 이 이행강제금이 반복해서 부가될 것으로 여겨지니 이에 따라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4) “위원회는 차별행위로 인정된 사건 중에서 피진정인이 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당해 사건의 소송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함(안 제49조)”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서 소위 차별 가해자는 자신이 모든 소송비용을 감당하여야 한다.(5) 그리고 “법원이 피해자의 청구에 따라 차별의 중지 등 그 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 및 손해배상 등의 판결을 할 수 있도록 함(안 제50조)”이라고 했으니, 앞서 언급한 이행강제금 뿐만 아니라 후에 법원이 다른 법들과 특히 이 법에 근거하여 내릴 판단에 근거해서 손해 배상금도 지불해야 하는 형태로 법이 구성되어 있다. 특히,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고의성, 지속성 및 반복성, 보복성, 피해의 규모 및 내용 고려하여 판단),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을 지급할 수 있도록”(안 제51조) 되어 있다.더구나 이 법안은 피해를 받았다는 입증 책임이 피해를 받았다고 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제52조는 “이 법률과 관련한 분쟁해결에 있어, 차별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주장하면 그러한 행위가 없었다거나,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점은 상대방이 입증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3. 특히 동성애 등의 문제와 관련한 이 법안의 문제점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동성애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법안이 말하는 바를 드러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도록 하겠다.첫째, 이 법안은 성별에 대해서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제2조 1항)고 하여 대한민국 법 중에서 최초로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성별로 인정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현행 헌법이 “양성 평등”을 말하던 바를 “성 평등”으로 대체하려는 그 동안의 지속적인 노력을 아주 구체화하는 시도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현행 헌법과 모순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행 헌법은 “그 외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법안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2조 4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호의적·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고 친밀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을 수 있는 개인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하니, 이 법이 통과되면 이성애 뿐 아니라 동성애와 양성애도 다 같이 우리 사회 안에서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된다. 후에 구체적으로 논의되겠지만, 각급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성애나 양성애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이 법안에 의해서 완전히 제거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면서 어떤 가르침이나 충고를 하게 되면 그것도 차별을 한 행위로 판단되어 그에 따른 조치를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성별 정체성”도 “자신의 성별에 관한 인식 혹은 표현을 말하며, 자신이 인지하는 성과 타인이 인지하는 성이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 상황을 포함한다.”(제2조 5항)라고 하고 있으니, 직장과 특히 학교 등 공적 영역에서 자신은 여성이라고 주장하려는 남성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표현을 하는 행위도 차별을 한 행위로 간주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공적 영역에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에 대해서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그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를 한 것이 된다. 이 법안의 발의자들의 의도에 따르면, 이 법안으로 우리 사회가 이성애뿐만 아니라 동성애와 양성애 등을 모두 정당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4. 특히 각급 학교와 교육에 대한 이 법안의 문제점특히 교육과 관련하여 이 법안은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교에서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근거로 동성애나 양성애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학생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한다든지, 학업 과정 중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해서 전혀 조치를 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경우에는 학교가 처벌 대상이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31조). 그러므로 이것은 기독교 계통의 각급 학교와 특히 신학교에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법안이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와 신학교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다.또한 교육 내용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니, 이 법안에 따르면 기독교 계통의 각급 학교와 신학교에서도 자신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동성애와 양성애도 다 평등하게 여겨야 한다고 교육하게 되어 있다. 5. 과연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문제가 없을까?대개 이 법안에 대한 저항을 없애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들 홍보한다. 그러나 우선 다음 몇 가지 정황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첫째,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를 하는 경우에 이런 모임을 반대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문제가 된다. 3조 1항 5호에 의하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광고 행위”도 금지 대상 차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공적인 영역에서 동성애 비판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둘째, 기독교 계통의 교육기관에서 행하는 설교 중에도 동성애가 죄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이 법에 저촉되는 것이어서 문제가 될 수 있다.셋째, 각 교회 공동체의 예배 실황이 공적으로 노출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온라인으로라도 어떤 사람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듣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정신적 차별을 받았다고 진정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같은 조항에 근거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는 경우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떻게 판단할지도 모르는 것이다.대개 국가인권위원회가 다시 그리하지 말라고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나는 어찌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 앞서 말한 일련의 피해 구제 과정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목사들은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자들로 판단될 것이고, 결국 이 법안이 규정한 것을 어긴 범법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법안을 발의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결국 교회마저도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일단 교회 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교회의 설교 중에는 그렇게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의 설명을 존중하면, 이런 정황은 차차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첫째, 둘째 문제는 이 법이 통과되고 나면 당장에 발생할 문제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교회조차도 여러 면에서 피해를 받게 되고, 종국적으로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변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하는 매우 잘못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또한 어떤 교회 공동체 사역자 중에 어떤 분이 동성애자로 드러난 경우, 이 법안에 근거해서 자신은 계속해서 교회에서 사역할 것을 주장한다면 이 법안이 통과된 상태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그 사역자의 사임을 요구할 수 없고, 이를 요구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정관에 미리 명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성애자를 교회의 직원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정관의 내용을 과연 어떻게 판단할지도 모를 일이다. 6. 나가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열 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이 “차별 금지법”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 국가를 개조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차별금지법이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는 평등법이라는 제목으로든지, 또 다른 의원들의 안으로 제안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반대하는 일을 할 때 절대로 화내거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항상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 구별, 제한, 배제, 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을 존중하며 사는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그러나 성경이 동성애나 양성애 같은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죄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들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이런 삶의 형태를 취하여 그 몸과 삶이 경험하게 될 큰 문제들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잘못된 데서 벗어나 바른 길로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이 사회가 동성애와 양성애를 있을 수 있는 것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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