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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by Matt Smethurst
2019-02-07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친구의 논증을 들어보면, 외딴 섬에 살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가 등장하곤 한다. 어쩌면 당신도 동일한 의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어떻게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정서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이런 질문에 대한 입장은 포용주의(inclusivism)와 배타주의(exclusivism), 두 가지로 양분된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의식적인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 중 하나의 견해에서만 강조된다.포용주의의 유혹포용주의는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지만 그분을 알지 못하고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이와 같이 포용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2장 1-16절을 하나님의 특별계시 없이도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본문으로 자주 인용한다. 그러면서 일반계시의 내용, 즉 사람의 외부에 있는 창조 질서(롬 1:19-20)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보고 그분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의 내부에 자리하는 도덕성(롬 2:14-15)이 바로 구원에 대한 충분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구원에 대한 포용주의적 견해는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데, 이는 일반계시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의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라고 설명한다.포용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은 구약 성도들의 사례를 그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해 에릭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의 긍휼이 어떻게 제공되는지를 모른 채, 자기 자신을 창조주의 긍휼에 맡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사람은 구약 성도들과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교리는 구약 성도들에게 완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지되 이는 창조주의 자비에 의해 이루어질 뿐, 그들 자신의 행위에 기초해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들은 복음의 전체 내용은 알지 못했어도 그 형태는 인식한 채로 구원을 받았다.”그런데 이런 설명이 혹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하찮게 만들지는 않을까? 에릭슨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혜택의 근원이시기에 전혀 그럴 수 없다고 강조한다.“[구약 성도들의 경우처럼] 비록 구원받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작용하는지를 알지 못할지라도, 이때도 구원의 근거는 역시 그분의 사역이다. [중략] 이 구원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이 점에서 바뀐 것은 없다.”포용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반계시에 반응하는 인간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목회자는 이런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믿기로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나님은 복음에 반응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매우 엄숙하게 경고하셨지만,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실지에 대해서는 계시하지 않으셨다.”많은 포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클락 피녹(Clark Pinnock)은 “포용주의는 성경에서 다루는 주된 논제도 아니고 그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 너무나도 명백해서 이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배타주의의 증거포용주의와 대조되는 배타주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교회사 전체에 걸쳐 견지되어 온 기독교의 주된 관점이며, 오늘날 성경에 그 믿음의 기초를 두는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지속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경 본문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다섯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1. 로마서 1장포용주의자들은 로마서 1장 18-23절을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이 본문은 배타주의적 견해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창조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구원이 아닌 심판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 외딴 섬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롬 1:21), 자연에서 나타나는 그분의 존재에 대한 진리와 이에 대한 인식을 억누르기 때문에(롬 1:18),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롬 1:20). 인간은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죄인인 이유는 그에게 어떤 것(믿음)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반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이 외딴 섬에만 있는 결백한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말인가? 이는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결백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긍휼과 용서를 흐릿하게나마 갈망하는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은 의식이나 제례나 희생물 등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섬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겠는가? 포용주의자의 상상으로는 그가 막연하게라도 긍휼과 용서를 갈구하며 자신의 공로를 부정하는 겸손을 보이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는 우상숭배적인 민속 신앙에 참여할 것이다.2. 로마서 10장로마서 10장은 구원을 받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중략]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3-15, 17).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논리는 명백하다.1.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2.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3.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듣는 것이다.4.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 본문과 조화되기 어렵다.3. 요한복음 14장우리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포하신 내용을 정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포용주의자들은 이 내용이 믿음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결국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 있다(요 20:30-31). 이 목적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요 3:36; 5:23-24; 7:38; 8:19, 24, 42; 11:25; 12:46).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믿음에 대해 아흔일곱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조건은 “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4. 사도행전 4장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점은 베드로가 단순히 세상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말하며 포용주의자들도 동의할 만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자의 이름을 아는 것, 그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구원받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이다.5. 사도행전 10장사도행전 10장에는 우리가 지금 다루는 질문을 분명하게 풀어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고넬료라고 하는 독실한 이방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신다(행 10:5). 그래서 그가 보낸 사람들은 이튿날 베드로의 집에 도착해서는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라고 알렸다(행 10:22).이에 베드로는 그 사람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때 고넬료는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한다(행 10:3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고넬료가 베드로에게서 아무런 말이나 듣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1장 14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의 모든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넬료가 아무리 진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 말씀이 없이는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를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정말 복음이 닿지 않은 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하신 것처럼 선교사나 꿈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이유를 들자면, 혹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받는 일이 가능하다면 고넬료야말로 이미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독실했고 그가 받은 계시에 대한 최고의 경외를 하나님께 표현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며 드러나는 사실처럼, 그의 놀라운 신앙적 열심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베드로가 원래 있던 집을 떠나 48km를 넘게 이동하여 그에게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러 가야만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보여 주는 사실은 복음의 메시지 없이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장 잘 반응하는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런 주제가 왜 중요한가결국,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는 추상적인 신학 관념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적실성과 영원한 중요성을 두루 갖춘 질문이다. 예를 들어, 선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외딴 섬에 있는 사람의 운명 등과 같은 긴급한 현실성과 그 본질적이고도 영원한 사명 모두에 따라 형성된다.여전히 배타주의가 불공평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결국 측량할 수 없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한다. 어쩌면 이 말이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대답은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가 가진 유한하고 타락한 개념으로서의 공평함이라는 기준에 종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인 우리의 방식과는 다르고 또 그보다 훨씬 높다(사 55:8-9). 하나님은 조언자가 필요 없으시다. 그분은 선해서 늘 선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시 119:68; 롬 11:34).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롭게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창 18:25).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혜의 절정이며 공의와 사랑이 교차하는 지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온 세상의 심판자가 이 로마 제국의 나무 형틀 위에서 그분을 거절한 반역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기 위해 대신 매달리셨다.언젠가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좋은 책들이 잠시 방문해야 하는 장소라면, 성경은 당신이 살아야 하는 집이다”(Visit many good books, but live in the Bible)라고 조언했다. 이 글에서 다룬 주제와 같이 우리가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 있는 주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겸손한 자세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한 후에, 그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Happens to Those Who Never Hear the Gospel?번역: 조현빈
복음
변증
구원
포용주의
배타주의
로마서1장
로마서10장
요한복음14장
사도행전4장
사도행전10장
자비를 베푸는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
by Dave Dunham
2019-02-07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목회 사역이 두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예상을 깨고 두려움과 긴장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바로 커다란 몸집의 남성이 나를 찾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내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분노 조절 장애가 있고 전과 기록도 있다고 말하며, 내게 상담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와 상담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돌발적인 상황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남성이 자신의 분노에 직면하게 하려면, 나는 그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그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켜서 나를 공격하게 할까봐 두려웠다. 그 공격성 때문에 그 남자가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몹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 상처 입은 남성은 여전히 겁을 주며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며 내 앞에 앉아 있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에는 위험이 따른다자비를 베푸는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이들이 자비에 대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 때 마주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자비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이를 베풀어야 하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예를 들어 자비를 베푸는 행위에는 학대나 실망이 따를 수 있다. 내가 전에 섬겼던 교회는 ‘한부모 축체’(Single Parent's Fair)를 연례 행사로 열어 한부모와 그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그 행사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 중 몇몇은 물품이 떨어지거나 의료 검진의 줄이 길어지면 화를 내고는 했다. 그 몇몇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음에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성을 드러냈다. 또 한번은 우리 교인 중의 한 젊은 여성은 지역 매춘부들을 돌보려 하다가 몹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자비를 표현하는 일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베푼 자비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하지만, 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내고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얻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섬길 의지가 있는가? 그런 의지가 없다면, 당신의 교회는 아직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외로운 일이다오하이오주 남부 시골에 모여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전혀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치료 중인 사람들과 전과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한 여성이 내게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중독자들이 너무 많아서 무섭고 불안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마약 거래를 돕는 조직으로 오해하며 비난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사역을 복음 전파의 일환으로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방문하지도, 또한 우리 교인들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그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자비를 베푸는 일은 종종 외로움을 동반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자비를 베푸는 교회는 단일 프로그램이나 행사에만 의존할 수 없다. 나는 코너스톤침례교회(Cornerstone Baptist Church)에서 함께 사역 중인 자원봉사자들을 좋아한다. 교회가 위치한 그 도시는 우리가 도와야 할 일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도 없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공동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가 생기면 달려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방식은 다양하다. 법원에서 내린 시행명령에 따라 매일 오후 5시까지 학업 대신 일터로 향하는 청소년과 상담하는 일, 병으로 몇 주 동안이나 회복을 못하는 남성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일, 그리고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왜 그런가 살피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는 일 등이 그 예이다. 때로는 우리가 그동안 돕고 있던 노숙자가 거의 죽어가며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 봉사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에게 향하기도 한다. 강간 피해자를 상담하는 일, 부모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은 절대로 봉사자의 일정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 자비를 베푸는 일이 사역자의 편리를 봐준 적은 한 번도 없다. 자비로운 교회가 되는 과정에는 몇몇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나누어 줄 음식 창고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 교회나 개인은 때때로 자비를 베풂으로써 발생하는 불편 자체를 감당하기 힘겨울 수도 있다.물론 우리가 자비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이를 베푸는 행위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비의 최고봉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곧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희생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그 아들을 잠시 분리시킨 행위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자비를 명하는 복음은 자비에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모범으로 보여 준다. 교회가 자비를 베푸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려면 이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당신의 도움으로 매춘 생활을 접고 스스로 살아가게 된 여인이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그녀를 계속 섬길 수 있겠는가? 그동안 당신이 멘토링으로 섬겨 왔던 젊은이가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조차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를 계속 돌볼 수 있겠는가?인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 주신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혹은 그것을 먼저 찾아 나섰기 때문에 자비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자비를 베풀면서 실망을 느낄 때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낙심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진정으로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편함이 따르는 사역이다. 하지만 자비의 하나님을 안다면, 그 두려움은 진정되고, 외로운 마음은 위로받을 수 있으며, 불편함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cary Merc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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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tine Hoover
2019-02-04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 생애의 가장 큰 선물로 친구를 주셨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친구 관계를 만들거나 유지해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가장 큰 고통 중의 몇 가지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이거나, 아니면 친구가 아예 없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다. 친구 관계라는 선물 바구니를 어떻게 열기 시작해야 할까?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는 고통과 고민들이 따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성도의 공동생활’(Life Together)에서 ‘소망하는 꿈’이라고 부른, 즉 이상적인(완벽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공동체의 모습을 꿈꾸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여성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꿈을 품었기 때문에, 계속 실망했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씁쓸해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만 집중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을 보여 주었는지 고려해 보기 시작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하셨고,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살피셨다.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우리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친구 관계를 추구하고, 친구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우리의 초점을 바꿀 수 있을까? 이제 5 가지 실천적 방법을 살펴보자. 1.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라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실망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아니면 맹목적인) 기대에서 나온다. 우리가 귀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오직 그분에게서 나와야 한다. 우리가 친구에게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항상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고, 우리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기를 요구하면, 그 관계는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렘 2:13)을 만드는 대신, 주님 안에서, 우리의 완벽한 친구 안에서 우리가 만족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관계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으면, 실제로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선물로서, 불완전하지만 성숙해 가고 있는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2. ‘주님께 하듯’ 하라내가 소망했던 꿈에 의하면, 나는 내가 뭔가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겼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섬김을 받기 보다는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려 하면 우리가 그분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처럼 친구를 섬겨야 한다. 헌신하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친구 관계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좋은 친구 관계로 이끄는 하나의 초대장이 된다. 그것은 분명히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3.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추구하라친구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너무 간결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 친구 관계에서 우리가 가장 놓치고 있는 점일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모든 이들이 다채롭고 특이하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나이, 생애 단계, 피부 색, 결혼 여부, 혹은 삶의 경험에 상관없이 우리가 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친구와 사귀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에게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좋은 질문을 하고 더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가치롭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라하나님이 기꺼이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신다는 진리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시 34:18)라고 선언하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두운 모습, 우울함, 질병이나 질환, 까칠한 모습이나 우리가 처한 곤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친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상투적으로 틀에 박힌 방식이 아니라, 함께 있어 주고, 긍휼함을 가지고, 그들의 아픔을 감당해 줄 의지가 있어야 한다. 동시에, 친구를 축하해 주고 그와 함께 기뻐하는 친구가 되자. 하나님은 우리로 인해 기뻐하므로, 우리도 서로 기뻐하자. 친구가 그날 하루를 승리했을 때, 그녀의 기도가 응답받았을 때, 그녀가 계획했던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혹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시는 것을 볼 때, 그것을 크게 외치고(왜냐하면 친구가 그것을 스스로 알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파티를 열고, 친구와 관계된 것을 기쁨으로 자랑하자.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든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넘치게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넘쳐나게 하자. 5. 인내하라마지막으로, 인내가 필요하다. 친구 관계는 커피 한 번 마시는 것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만들어지고 발전된다. 하룻밤 재미 있는 게임을 함께 했다고 좋은 친구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친구 관계는 다양성을 함께 나눔으로 이루어진다. 서로 용서를 비는 것과 용서를 해주는 것, 서로 심경을 건드리는 것을 넘어가 주는 것과 다루어야 할 것을 다루어 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서로 취약함을 보여 줌으로써 친구 관계는 깊어진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으로, 우리도 서로에 대해서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자.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신 친구 관계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의 필요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사귀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다른 사람의 곤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깊은 비밀을 발견했다. 위험의 다른 한 쪽에는 하나님이 친히 주시는 친구 관계라는 선물을 열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Be the Friend You’ve Always Wanted번역: 정은심
생활
관계
친구
섬김
기대
경청
디트리히본회퍼
‘오직 믿음’에 대한 묵상
by Thomas Schreiner
2019-02-04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중 하나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이 표어가 선포하는 내용은, 구원이란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들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되지 않고,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바라보는 데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한 갈망에서 시작된 이 구호는 교회를 개혁하고 성경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외침이었다.종교개혁 이후 5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오늘날도 여전히 ‘오직 믿음’의 교리가 중요한 문제인가? 이신칭의 개념은 단지 지나간 시대의 향수만을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유물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오늘날에도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르짖음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외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코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전파된다.누군가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오직 믿음’의 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에 지켜 내야만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경직되고 까다로운 정통의 산물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역사 전반에 걸쳐서 우리의 사고와 마음에 호소하는데, 이는 인간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가운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78)은 이신칭의가 갖는 목회적인 연관성을 입증한 바가 있다. 튜레틴은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에만, 칭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우리는 하늘의 법정에 이르러 눈앞에 계신 재판장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광명함은 별들도 어둡게 하며, 그 능력은 산을 녹이고, 그 진노하심은 땅을 진동케 한다. 그의 공의하심은 그 어떤 천사도 나타낼 수 없고 유죄인 자를 무죄라 판결하지도 않으며, 죄에 대한 그의 형벌은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이른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헛된 믿음은 소멸하고 멸망하며,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윗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며 울부짖는다. 죄 의식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의와 불완전한 거룩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 때문인가?”여전히 상관 있다우리는 왜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인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신학적인 논쟁이 좋아서 신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튜레틴이 지적하는 바 문제의 핵심은 개인적인 차원에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오직 믿음’의 교리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서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그런데 우리가 최후 심판 때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라고 동의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오직 믿음’이 쉽게 오해 받기 때문에, 이를 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사용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검증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이 슬로건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는 사실 모든 신학적 진리에 적용된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자주 오해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용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삼위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신중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의미하지 않는 바가 무엇인지에 주의해서 설명해야 그 설명을 듣는 이들이 크리스천은 삼신론자(tritheist)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용어가 때때로 잘못 해석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단어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지키기만 해서는 안 된다간혹 개혁주의 크리스천들은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나 전통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과도한 힘을 들인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백하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교리적 충성만 강조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하지만 믿음을 수호하는 일은 고귀하면서도 성경적인 노력이다. 유다서 3절은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분명히 요구한다. 또한 갈라디아서나 디모데후서 둘 다 강조하는 바는 심지어 다른 이들이 복음을 거부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수호하며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보다 그 복음을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키는 이유는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고요하게 있을 때, 우리의 수많은 죄와 무가치함을 떠올리고는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오직 믿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통합 찬송가 188장)라는 고백을 드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 누구도 사람을 자랑할 수 없도록 하며(고전 1:31),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만든다(고전 4:7).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오직 교리(the five solas)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오직 믿음’은 특별히도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긴밀히 연결된다. 믿음은 구원을 위해 내 행위가 아닌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그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수학(math)이 아니라, 지도(maps)와 같다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과 교리 사용에 대한 마지막 말을 전하고자 한다. 안토니 레인(Antony Lane)은 교리란 지도요 본보기이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순한 구호 사용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 용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대화 가운데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그 대신 우리는 ‘오직 믿음’ 교리를 거절하는 자들이 이 교리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갖게 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과 인정하는 자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과거의 판단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오직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염려가 오히려 이 교리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그에 대한 정당한 반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물론 나는 모든 의견의 불일치가 단순한 오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속단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대화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오직 믿음’과 같은 슬로건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런 슬로건은 우리의 신학을 명료하게 요약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혹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다른 정의와 개념을 가지고 대화 속에 참여하기 때문에, 슬로건은 또한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도록 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ustification = Faith + Nothing번역: 정진호
역사
종교개혁
오직믿음
묵상
오직은혜
오직그리스도
개혁주의
프란시스튜레틴
세계 선교가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변화
by Jason Johnson
2019-02-01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은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명령이다. 예수님이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6-20)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라는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선포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것이 세계 선교의 원동력이고 궁극적 목적이다. 세계 선교는 모든 종족, 모든 민족, 모든 언어, 모든 방언, 모든 문화, 모든 나라, 모든 정부, 모든 도시, 모든 이웃, 모든 가정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이며, 온 세상에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도록 하는 일이다. 선교는 이를 위해 세상 끝까지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으로 찌들어 있는 동아프리카의 슬럼가에서부터 신유럽의 반종교적 사상에 물든 사람들까지, 그리고 무슬림 교리로 깊이 물들어 있는 중동 국가들까지 확장된다. 복음 전파에는 지리적, 사회적, 경제적 혹은 민족적 경계가 없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 중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선교 명령에는 다른 차원도 있다. 흔히 선교를 예수님의 좋은 소식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낯선 상황 안으로 들어가서, 그 문화의 사람들을 훈련시킴으로써 환경을 개선하고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역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선교에는 훨씬 더 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고 명령한 말씀 안에는 우리가 그들을 변화시키는 차원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차원도 포함된다. 이것이 세계 선교의 또 다른 측면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려 하든지 그것은 종종 우리 자신의 변화를 수반한다. 하나님의 세계 선교 명령의 본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모든 민족을 제자화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제자가 되는 데 있다.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예를 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한 일은 우리가 단지 그들의 환경을 바꾸는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교를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우리의 시각도 바꿀 수 있기를 원하신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극심한 빈곤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 그 상황에 변화를 주고 싶은 동기가 생겨 어떤 식으로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의해 우리가 변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중심이 영원히 변화된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이제 그러한 경험을 하기 전의 모습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그러한 극심한 환경을 경험함으로써 당신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역사가 선행될 때, 비로소 온 세계에 퍼져있는 극심한 빈곤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세계관이 한번 바뀌고 나면, 당신의 삶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극심한 빈곤을 낳는 이 현실에 대해 눈감을 수도 없고, 그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복음주의가 하나님의 마음과 함께 가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민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의 문화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 하며, 우리의 가치체계와 관점이 뒤집히고, 우리의 안이한 세계가 예수님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그곳의 불편한 현실로 인해 뒤흔들려야 한다. 또한 애정의 대상이 영원히 바뀌고, 우리의 우선순위가 재조정되며, 모든 백성들 가운데 끊임없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해야 한다. 어떤 비용이 들고, 어떤 개인적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리고 도중에 우리의 개인적 꿈이 사라지더라도, 그 기쁨은 매우 클 것이다. 최근에 온두라스의 큰 도시 외곽에서, 나는 슬럼가에서 홀로 사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기쁨과 미소로 가득했고, 나는 그분의 열정적 기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통역가를 통해 들은 그 할머니의 말씀은 큰 감동을 주었다. “돈은 내 삶의 상태를 지배할 수 있지만, 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한다.” 빈곤으로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과 평화의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이 순간, 극적인 것이 신비스럽게 대비되는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오랜 관점이 참된 진리로 옮겨 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세계 선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자 복음을 들고 선교지로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우리 자신이 영원히 변화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보편적 명령이기도 하다.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는 동아프리카 대륙의 한가운데 있어보라. 멕시코 남부에서 난민들을 위해 집을 지어보라. 허리케인이 훑고 간 하이티 거리를 걸어보라. 또한 불가지론자들로 가득한 유럽의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어 보라. 중동에서 무슬림의 오후 기도를 관찰해 보라. 당신의 생각과 관점과 사상이 영원히 바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경험한 후에는, 당신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안락한 당신의 집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며, 당신의 가족, 일, 이웃, 교회, 도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 심오한 은혜가 표현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Other Side of Global Missions번역: 정은심
선교지침
세계선교
변화
세계관
빈곤
관점
사상
은헤
섭리
자녀의 성공을 숭배하는 부모들에게
by Christina Fox
2019-02-01
우리는 지나치게 성취를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인이나 아이나 모두 성공이라는 우상에 취해있다. 특히 아이들의 불안과 우울이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연구 결과는 경종을 울린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라고, 친구들보다 더 뛰어나라고 몰아붙인다. 그들에게 스포츠와 학업, 그밖의 활동들에서 각각 최고가 되라고 한다. 최상위 대학에 들어가고, 손꼽히는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궁극의 행복이자 목표로 여기면서 말이다. 우리는 '자녀의 성공'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 이 우상은 당신에게 완벽한 부모가 되어야 하며 최고의 자녀를 만드는 일에 소망을 두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여러 다른 우상과 마찬가지로, 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이 우상은 뭔가 좋은 목적과 기대들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좋은 목적과 기대부모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이다. 우리는 자녀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하고, 그들을 가르치고 훈육하여 잘 살아가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또한 자녀들이 학교에서 최선을 다하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취하며,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되기를 원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는 크리스천 부모로서 자녀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양육하여, 그들이 자신을 창조한 분을 알고 사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좋은 일들이다. 한편, 잘 양육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양육에 대한 목적과 계획이 분명해야 하고, 자녀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우리는 부모로서 양육과 관련된 문제를 결정할 때, 물론 특정한 기법과 전략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지혜를 먼저 구해야 한다.그런데 이러한 좋은 목적과 기대가 과도한 열망과 우상으로 변질될 때,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우상 대신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까? 자녀의 성공이라는 우상자녀의 성공을 숭배하게 되면, 당신의 가장 큰 관심과 갈망은 아이들이 최고의 결과를 내는 데 있게 된다. 따라서 모든 희생을 바쳐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며, 생산적이기를 원한다. 그 예로 우리는 그들이 최상의 교육을 받도록 고군분투한다. 최고의 코치에게 스포츠 훈련을 받고, 최고의 음악 레슨을 받으며, 모든 면에서 가장 좋은 교육 조건의 수혜자가 되기 원한다.우리는 또한 자녀들의 행동, 성과, 사회적 인정 등에서 너무 쉽게 결과를 얻기 바란다. 내가 잘하면 자녀들이 최고가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양육에 모든 것을 건다. 알맞다고 생각하는 양육 모델을 따르기만 하면, 자녀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될 것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성공에 두면,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그 갈망을 채우는 데 쓰게 된다. 자녀가 학급에서 일등을 하고, 팀에서 골을 제일 많이 넣는 선수가 되며,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모든 교리문답을 다 아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자녀들을 최고가 되도록 몰아붙이면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려 간다.거짓 안전감우리가 자녀의 성공을 숭배하면, 자녀들은 우리의 전리품이 된다. 마치 우리가 자녀를 얼마나 잘 양육했는지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시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자녀가 실패하면, 그들이 나를 창피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화가 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제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내가 세운 목표를 우리 아이가 달성해야 했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가? 이와 같이 우리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생각의 늪에 빠져들고는 한다. 팀 켈러(Tim Keller)는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에서 우상을 이렇게 정의한다. “개인적 성공과 성취는 우리 자신이 신이며 우리의 안전과 가치가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과 성과에 있다고 느끼게 한다. [중략] 성공을 우상으로 만든 하나의 징조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거짓 안전감이다. [중략] 거짓 안전감은 우리의 성취를 신격화하고 그것이 삶의 어려운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우리가 기대할 때 생긴다.”자녀의 성공과 성취를 숭배하면 우리는 자신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그리스도 안에서 훌륭한 존재자녀의 성공이라는 우상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다음 단계의 성공을 추구하려고 한다.하지만 복음의 메시지는 이와 다르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행한 일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동네에서 가장 훌륭한 부모이거나 우리 자녀가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한다(엡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8). 성령이 사망에서 우리를 일깨우시고 새 생명을 주셨음을 기억하라.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에서 구원을 받았다(롬 6:23). 나의 자녀가 최고가 되거나 문제아가 되거나 상관없이, 성령은 우리 안에 거주하고, 위로하며, 인도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중보하고, 그분의 의로 우리를 덮으신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 모든 것을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주신다. 이를 얻거나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부모들이여,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가치는 우리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므로 부모로서 자녀의 성공에 기여하는 노력에 관한 것이 아니고, 자녀가 얼마나 잘 되느냐에 관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가치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누구인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성취하셨는가에 근거한다.오늘, 우리 존재 자체를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 보기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eware the Idol of Parenting Succes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부모의역할
목적과기대
열망과우상
자녀의성공
우상
팀켈러
전리품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이상을 행하셨다
by Gavin Ortlund
2019-01-31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대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했던 다음의 말을 인용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신앙, 그들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중략]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이는 개혁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데—성경을 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다.”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와 같은 십자가 중심성은 성경적인 근거가 탄탄한 진리이다. 우선 십자가는 대속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하나님과 회개한 죄인 사이의 화목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어느 중심적인 사건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할 경우, 거기에는 언제나 다른 주변적인 사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외에도 더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그 죽음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었다면, 그분은 자기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던 그 목요일(혹은 금요일 이른 아침)에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곧바로 다시 살아나서 해가 지기 전에 승천하셨을지도 모른다. 하루 만에 죽음으로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죽음 이전에 30년을 허비하는 일이나 그 후에 40일을 낭비하는 일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죽음 이외에 성육신이라든가 부활 이후의 영광스러운 상태와 같은) 나머지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도 그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과 그에 함축된 의미가 그분의 죽음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신약성경의 각 본문들이 가진 미묘한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롬 4:25). 또한 베드로는 구원의 효력을 다름 아닌 부활에서 찾고 있다(벧전 1:3; 3: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윗 언약의 성취이자(행 2:30-32; 13:30-37), 성령 강림의 이유이며(행 2:33), 최후에 있을 심판의 현재적인 증거(행 17:31)라고 선포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빈 무덤이라든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또는 마지막 날의 나팔 소리 같은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고도 십자가의 중심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느 정도로 성(聖) 금요일만이 아니라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복음을 설명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분이 시험을 받으신 일이나 형체가 변화되신 사건에 대해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 단순히 취급하여 그 중심적이며 역동적인 의미를 상실해서도 안 될 것이다.결국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십자가뿐 아니라 (심지어는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더욱 넓게 자리한 다른 이야기도 함께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다른 요소들을 언제나 십자가와의 관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르는 터닝포인트뿐 아니라 그 포인트가 자리하고 있는 넓은 문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나는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보여 주는 더 넓은 문맥에 대한 사고를 열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 외에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포인트를 설명하고자 한다.1. 성육신 및 동정녀 탄생(Incarnation and Virgin Birth)중세 교회의 라틴어를 공부하며 예배문을 살펴보던 중, 나는 초대 및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코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얼마나 강조했는지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는 브룬너와 같이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들의 무모함을 드러내 준다. 그들의 주장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만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예배의 무게 있는 전통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레니우스(Irenae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또는 안셈(Anselm)과 같은 신학자들은 성육신 자체가 인성(human nature)을 회복하고 영화롭게 하는 사건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이런 관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을 이루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관복음서들에서 쉽게 지나치는 이야기인 변화산 사건(the transfiguration)의 의미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몸이 심지어는 부활 전부터 독특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외부적인 영광을 그분에게 부과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축된 의미가 처음부터 성육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2. 무죄한 삶(Sinless life)그리스도의 무죄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사명에 실패했던 아담이나 이스라엘을 새롭게 재현하고, (최소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차원 모두에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여 신자들이 회심할 때 그 의가 전가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혹자는 재현(recapitulation)이라든가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일에 불편해하거나 주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삶의 연장에서 대속적인 죽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반드시 구원 사건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이 보여 주신 무죄한 순종의 일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으로 어느 한순간에 ‘무죄한 삶’이 끝나고 ‘대속적인 죽음’이 시작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나는 팀 겔러(Tim Keller)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사셨고,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죽으셨다”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켈러가 진술한 그 명제의 두 부분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능동적인 성취(positive fulfillment), 즉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과 수동적인 수용(negative absorption), 곧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 두 가지 측면은 성경에서 “그 안에서”(in him)라고 표현되는 대표(representation)와 “우리를 위해”라고 표현되는 대체(replacement)의 원리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실재(one organic reality)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삶에서 이미 시작된 과정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커다란 ‘교환’(exchange)의 ‘한 순간’(one moment)이라고 언급했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간의 분리를 철폐하셨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호의를 가지시도록 의를 획득하셨는가? 이에 대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바는, 그분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그 일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중략] 그분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자유의 값을 지불하기 시작하셨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3절).3. 장사(Burial)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활동에서 발생된 사건 또는 사실이 그 목적이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와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이 단지 몇 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일만이 아니라 실제로 거기서 죽으신 일이 중요한가?” 또는 “왜 그분이 죽으신 후에 곧바로 살아나지 않고 죽음과 부활 사이에 시간(즉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새벽에 걸친 시간)을 두신 일이 중요한가?”이 질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중세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구원이란 죄의 범위만큼 넓어야 하며, 죄 자체만이 아니라 죄책이나 죽음과 같은 죄의 결과까지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가 언급한 고전적인 격언인 “떠맡으심 없이는 치유됨도 없다”(that which is not assumed is not healed)라는 말을 조금 변형한다면, 이런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대속할 수 없다.” 병을 고치기 위한 해독제는 모든 아픈 부위에 닿아야 하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즉 죄악, 진노, 죄책,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만이 아니라 결국 영육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말했듯이 ‘생명’(요 14:6)이신 이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갈 때에만 죽음 자체가 ‘후퇴’하는 것이다. 곧 해독제는 전 영역에 퍼져야 한다.4. 부활(Resurrection)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주목을 받지만, 흔히 그 사건의 역사적 신뢰성 또는 변증적 목적과 관련해서만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자주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을 인용하며 부활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왜 이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자주 살펴보지 않는다. 부활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사건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이 주제와 관련하여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의 ‘부활과 구속’(Resurrection and Redemption)은 특히 통찰력이 있는 책으로서 더욱 널리 읽히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는 바울의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같이 전적으로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며, 그 부활이 없이는 심지어 대속도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5. 승천 및 천상 사역(Ascension and Heavenly Session)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에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삶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육체를 가진 삶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분이 지상에서 지니셨던 인성을 지금도 지니고 계시며 또한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지금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이다.” 왜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로도 육체를 지닌 삶을 영위하신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 이유는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시고(롬 8:34; 히 7:25; 요일 2:1-2), 열방을 통치하며 다윗 왕에게 약속된 그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실 뿐 아니라(행 2:30-31), 성령을 보내셔서 비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신케 하심으로써 교회를 이루시기 때문이다(행 2:33; 요 16:7-11; 엡 4:7-8). 이처럼 지금 이 순간과 모든 교회 역사 가운데 예수님은 구원 활동(곧 중보와 통치와 성령을 보내 주시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하신다.6. 재림(Second Coming)그리스도의 재림도 신약성경에서 구원 사건의 일부로 묘사된다(히 9:28). 그 이유를 생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흥미를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사실은 바빙크(Bavinck)와 같은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가 재림 이후에도 하나님과 이미 영화롭게 된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 사역을 지속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곧 (성육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행동이었음을 고려할 때) 삼위일체의 제2위(the second member of the Trinity)는 언제나 신인(the God-man)이시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중보의 역할도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빙크는 그리스도가 맡으신 ‘화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reconciliation)은 마지막 날의 새 땅에서는 중단되겠지만, ‘연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union)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성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인성을 벗어버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발상이다”(개혁교의학 3권).이제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중심성’(cross-centeredness)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도 전체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십자가 사건의 주변부에 자리한 모든 ‘순간들’이 동등하게 주변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가 40일 동안 받으신 시험이라든가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드리는 기도보다도 우리의 구원에서 훨씬 더 지배적인 역할을 행사한다. 물론 의미의 차이는 있겠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함께 중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할 때, 우리는 마치 중심부와 주변부가 관심을 끌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것처럼, 즉 그 요소들이 서로 경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다양한 ‘순간들’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십자가에 대해 제한된 시야가 아니라 확장된 시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순간들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위대한 한 순간과 관련을 맺게 될 때 가장 심오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메타포를 다시 사용한다면, 소설의 넓은 문맥에 자리한 주변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강화하듯이, 주변부가 주변부로서 보여질 때 우리의 시야에서 이 중심적인 사건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은 (그분의 인격이 이루는 하나의 연합처럼) 각 요소가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 없는 한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 More to Save Us than Die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존스토트
그리스도의십자가
성육신
동정녀탄생
무죄한삶
부활
승천
재림
교회를 정하기 전에 물어야 할 4 가지 질문
by Brian Croft
2019-01-31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거치는 절차가 있다. 먼저 거주할 집과 일터를 찾고, 아이들이 다닐 학교에 등록을 한다. 정착할 교회를 찾는 일은 종종 더 오래 걸리는 과제로 밀리기도 한다. 새로 이사한 지역에서 교회를 찾는 것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받는 질문들 외에도, 최근에 내가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살펴보면, 주로 4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어떤 교회에 등록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될 때, 이 질문들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1. 우리 가족이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을 교회인가? 이것이 첫 번째로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나와 우리 가족의 영혼을 양육하기에 충분하가? 다시 말하면, 교인들에게 꾸준히 성경 강해를 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교회가 나와 내 가족의 영혼을 성장시켜 줄 것인지를 평가하기에 좋은 첫 질문이다.2. 영혼의 돌봄을 가장 우선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교회인가? 이 교회의 목회자가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고 감독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진정한 리더인가? 그들이 강력하고 성경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여 그것이 당신 개인의 영혼이 제대로 돌봄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에게 물으라. 그리고 그 교회 교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음으로써,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 이 교회의 우선 순위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3.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가족이 의미 있는 교제와 책임감을 경험할 수 있는 교회인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교회에서 어느 정도의 헌신을 하고, 관계를 맺고, 또 행사에 참석하며 목회자와 지도자를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당신이 아직은 정식으로 등록한 교인이 아닌 한, 그들의 일원인 것처럼 소속되어 교제할 수 있기를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수 있고 내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교회인가?당신의 은사가 무엇이고 그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교회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발적인 필요들은 당신이 잠깐 예배에 참석하고 헌신하는 것만으로도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에 살펴본 결과만을 가지고 어떤 영역에서 도움이 필요한지를 모두 안다고 쉽게 추측하지 말라. 한 교회에 몇 달 이상을 다니다보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네 가지 질문에 모두 긍정적인 답을 얻을 수 있으면, 당신이 정착할 교회를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는 확신이 서면, 등록을 더 지연시키지 말고 그 교회에 정착하라고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정착할 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마지막 요소는 인내이다. 그 교회에서 당신과 가족들은 아직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권위 아래에 있지 않고 또 등록 교인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어느 정도 지속적인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새 교회를 찾는 여정에서 당신이 느끼는 자유와 이와 동반된 책임의 부재는 현 상태에 안주하는 죄를 낳을 수도 있다.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당신이 목자의 돌봄을 받지 않고 양 떼를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을 즐기는 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여정이 한때는 재미있고 신나는 느낌을 줄 수 있더라도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Questions to Ask Before Joining a Church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하나님의말씀
영혼의돌봄
교제
하나님의백성
은사
예배
빈 무덤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
by Paul Rezkalla
2019-01-30
십자가 처형을 받은 나사렛 예수의 무덤이 실제로는 빈 무덤으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빈 무덤의 역사성은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빈 무덤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1. 빈 무덤에 대한 믿음은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 기록되기도 전에 존재했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초대 교회가 고백했던 가장 이른 형태의 신조를 언급한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여기서 ‘받은 것을 전하였다’라는 공식적인 표현은 바울이 그 당시 교회가 공유했던 구전 전통(oral tradition)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이 서신을 대략 50년대 중반에 기록했다. 따라서 이 신조의 내용은 그보다 더 일찍 형성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기원후 30년 즈음에 죽으셨다면, 이 신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십자가 처형 이후 25년 정도가 지났을 때는 완성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18-20절은 바울이 이 신조를 30년대 어느 시점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오늘날 바트 어만(Bart Ehrman), 제임스 던(James Dunn), 게르트 뤼데만(Gerd Lüdemann)과 같은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이 신조의 형성 연대를 예수님의 죽음 이후 2년에서 5년 정도로 생각한다. 그중 뤼데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전 전통의 내용은 십자가 처형이 있고 나서 2년 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고, 3년 이상 넘어간 시점에 만들어 졌다고는 추정하기 어렵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출현에 관한 공식 내용은 대략 30년에서 33년 경에 그 기원을 둔다.”즉 예수님이 죽으시고 3년도 채 지나기전에, 초대 교회는 이미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확증하는 신조를 구전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의 빈 무덤도 공인된 사실로서 그들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전제한다.2. 예수님의 육체는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우리는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장사되셨던 바로 그 도시에서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녔다. 이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일으키던 운동을 진압하려면, 그냥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서 그 죽은 육체를 끄집어 내어 제자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세상에 드러내면 되었을 것이다. 또는 로마인과 유대인이 모두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 몸의 일부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기독교 운동의 불씨를 끌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전개하는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무덤에서 그 몸을 끄집어냈다든가, 아니면 무덤 속에서 결국 죽은 몸이 발견되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다.3. 예수님의 빈 무덤은 여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이 소제목이 함축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여자들은 그 성(性)의 특성상 경솔하면서도 뻔뻔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증언을 인정하면 안 된다. 또한 노예들은 그 영혼이 비천하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 역시 인정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어떤 이익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실을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요세푸스(Josephus)“여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유효하지 않으며, 그들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일도 정당하지 않다. 예를 들어, 랍비가 강도라고 간주하는 사람이라도 여자가 제시하는 증거와 동일한 증거를 제시할 만한 자격을 가진다.” — 탈무드 중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율법이 여자한테 전달되기 전에 태워지는 편이 낫다.” — 탈무드 중 소타(Sotah)모두 얼마나 거친 표현들인가! 당연히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따위를 기념할 일도 없었다.이처럼 여자들은 신뢰할 만한 증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족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복음서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인으로서 여성을 거론했을까? 만일 그 저자들이 빈 무덤에 대해 기록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실증하고 싶어했다면,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유력한 제자들을 첫 번째 증인으로 언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 제자들 중에 누구를 선택했더라도 여자들보다는 그 결과가 나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복음서 저자들은 여자들을 첫 번째 증인으로 거론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아마도 빈 무덤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어떤 기록이 가진 당황스러운 요소(embarrassment)는 역사가들이 기록된 사건의 역사성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한 가지 기준이 된다. 만일 어떤 저자가 자기 글의 역사성이 의심 받을 수 있는 위험 부담을 끌어안으면서까지 당황스러운 요소를 삽입했다면, 그가 그 글의 내용을 지어냈을 가능성은 희박해 진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저자들이 빈 무덤의 증인으로서 구체적인 여자들을 거론하는 특징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요소로서 그 빈 무덤의 이야기가 꾸며졌다고 주장하기에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몸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주장했다마태복음 28장 11-15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왜 굳이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겠는가? 또 만일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 무덤이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런 소문이 두루 퍼졌다는 이야기를 했겠는가?2세기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 소문이 당시에도 여전히 돌아다닌다는 내용을 기록했다. 곧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밤에 한 무덤을 찾아갔는데, 그 무덤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풀려난 후 안치된 곳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그 몸을 빼내어 훔쳐갔고, 결국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우리는 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릴 필요도 없고, 또 그 소문이 퍼질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 모든 정황을 미루어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이 십자가 처형이 있고 3일째 되는 날 몇몇 여자들에 의해 빈 무덤으로 발견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할 때에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는 위의 정황들과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복음서 저자들이 빈 무덤을 둘러싼 세부적인 정황들을 진실하게 기록했다면, 그 기록의 역사성이 드러내는 하나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to Believe in the Empty Tomb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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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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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에 관한 9 가지 사실
by Joe Carter
2019-01-30
성경에서 기도에 대하여 몇 번이나 언급하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경우에 기도가 응답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우리는 기도에 관하여 성경에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기도에 관한 9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자. 1. 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언급이 650번 나온다.2. 그중 응답받은 기도는 약 450번 기록되어 있다.3.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도는 창세기 4장 26절이다(하나님이 이에 앞서 인간에게 직접 대화를 시도하시는 예도 있다. 창 3:8-13; 4:9).4. 성경에는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기도하신 사실이 25번 기록되어 있다.5. 성경에서 바울은 기도를 41번이나 언급한다(기도, 기도 보고, 기도 요청, 기도에 대한 권고).6. 어떤 자세로도 기도를 할 수 있지만, 성경은 5가지 특정한 자세를 언급한다. 앉아서(삼하 7:18), 서서(막 11:25), 무릎을 꿇고서(역 6:13; 단 6:10; 눅 22:41; 행 7:60; 9:40; 20:35; 21:5; 엡 3:14), 얼굴을 땅에 대고(마 26:39; 막 14:35), 손을 들고(딤전 2:8) 하는 기도 자세들이다.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면서(눅 11:1-4), 기도의 5가지 영역을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기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의 현재에 초첨을 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의 과거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미래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기도(“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8. 성경은 적어도 9가지 기도 유형을 언급하고 있다. 믿음 기도(약 5:15), 공동 기도(행 2:42), 간구 기도(빌 4:6), 감사 기도(시 95:2-3), 경배 기도(행 13:2-3), 헌신 기도(마 26:39), 도고 기도(딤전 2:1), 토설 기도(시 69), 성령 기도(고전 14:14-15).9. ‘아멘’이라는 말은 ‘진정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민수기 5장 22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구약에서는 백성들이 죄나 질병의 문제를 하나님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 구절에서는 제사장의 판단 결과를 인정하는 의미로 백성들에게 아멘이라고 말하도록 명하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Prayer in the Bible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과기도
성경
기도
자세
아멘
예수님
바울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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