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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여, 당신 자신을 알라
by Aaron Menikoff
2020-09-23
지금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종종 오래된 교인들에게 전임 목사에 대해서 묻곤 했다. 무슨 험담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그들의 대답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다. 거의 언제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참 좋은 목자였어요.” 결국 나는 행간을 읽어내야 했다. 그 목사의 강점(목양)을 강조함으로 그들은 동시에 그의 약점(설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전임 목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특히 목사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굳이 목사가 이런 사실까지 다 알 필요가 있을까? 목사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너무 너무 중요하다. 좋은 목사는 자신이 뛰어난 분야와 채워야 할 분야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왜 목사에게 자기 점검이 필요한지 네 가지 이유를 밝혀보자.1.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야고보 사도는 모든 좋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고 말한다(약 1:17). 여기에는 우리의 강점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적 은사로 당신을 채우셨다. 인내심이 뛰어난 경우라면 설교 준비를 위해 시간을 쏟는 게 더 쉬울 것이다. 희락을 느끼는 면에서 뛰어나다면, 더 큰 열정을 쏟으면서 설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궁극적으로 다 은사이다. 그러므로 강점에 주목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뛰어난지 이해하는 것은 결코 오만한 게 아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는 자이시기에, 그는 찬양을 받으신다. 자신의 강점을 더 잘 알수록 우리는 더 정확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건 약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의 약함을 자랑하는 법을 배웠다(고후 12:9). 약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더 잘 알면 알게 될수록, 바울은 그의 삶속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더 집중했다. 2. 강점과 단점은 고정된 게 아니다약점 때문에 패배감을 느끼기 쉽다. ‘나는 너무 형편없는 설교자야.’, ‘내가 조언하는 사람 중에 변한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어.’, ‘책상 서랍도 제대로 정리 못하는 내가 교회를 운영한다고? 어림도 없지.’ 반대로 자신의 강점을 보고 교만해지기 쉽다. ‘외향적이어서 그런지 난 전도가 참 쉬워.’, ‘나는 타고난 리더라서 회의 진행하는데 탁월해.’이 두 가지 반응 모두 현명하지 않다. 강점과 약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결코 굳어져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는 강점과 약점을 서로 조절하고 배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설교에 있어서 그저 그런 목사라고 해도 기도와 타인의 피드백, 피나는 연습을 통해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평소에 자연스럽고 웅변적인 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침체기를 만날 수 있고, 그에 따라 설교 능력과 효율성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해야 할 지점을 바로 안다면 그 성장은 일어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성장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그럼에도 모든 목사는 진보하기 위해 싸워야한다. 그러나 정확한 자기 점검이 없다면 어떤 분야에서 싸워야 할지 결코 알 수 없다. 3. 누가복음 6장 40절의 원칙“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4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목사는 선생이다. 그들은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단지 지식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가 본받고 싶을 정도로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이 말을 깊이 새기라. 교인은 목사인 당신을 닮기 마련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이 목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당신이 섬기는 회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금 전반적으로 성경 공부는 훌륭하지만 전도에는 좀 부진한가? 쉽지 않겠지만 거울 속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 여기에도 누가복음 6장 40절의 원칙이 적용된다. 사과가 나무에서 결코 멀리 떨어진 곳에 떨어지지 않듯이, 제자는 선생을 닮게 되어있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나무 둥치만큼 엄청난 이두박근에 얇은 나뭇가지 같은 장딴지를 가진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큰 강점과 더불어 아주 큰 약점까지 가진 교회는 보기 흉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목사는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4. 디모데전서 4장 16절의 명령언젠가 신학교 예배당에 앉아서 들었던, 이 구절을 본문으로 돈 휘트니(Don Whitney)가 했던 설교를 결코 잊지 못한다. 메시지의 세부 사항은 기억나지 않지만, 쩌렁쩌렁한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내 귀에 울린다. “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사님, 자기 자신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건전한 교리 이상으로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건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아마도 디모데전서 4장 16절과 누가복음 6장 40절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내가 보여준 삶의 모범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목사의 가르침과 삶을 사용하여 양들이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와주신다.신실한 목사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17세기 런던의 목사였던 아브라함 부스(Abraham Booth)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설교를 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어느 젊은 목사의 안수식 설교에서 그는 디모데전서 4장 16절을 가지고 “너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했다.부스는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데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만약에 사탄이 우리가 사역하는 중에 스스로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사역에서 추락하는 길을 열심히 닦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스의 말은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에 영향을 주는 여러 동기들을 중시하면서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오로지 강단에서 존경받고 싶은 마음만으로 열심히 읽고 공부한다면,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더 얻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모든 동기는 육신적이고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천국에 갈 때까지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히 순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내 속에 숨은 동기가 육신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Know Thyself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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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_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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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찰
아브라함부스
목회자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 ‘언약과 성취’
by 고상섭
2020-09-22
복음은 단순하지 않다. 틀에 맞춘 복음은 늘 식상해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동일한 복음의 선포는 오늘날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단일표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의 풍성함을 깨닫고 전하려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통해 복음의 씨줄과 날줄을 엮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다양한 주제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세 가지 주제로 소개하고 있다. 추방과 귀향, 언약과 성취, 왕국과 도래이다. 추방과 귀향에 대해서는 2020년 3월 19일 칼럼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추방과 귀향’에서 다루었고 오늘은 ‘언약과 성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언약과 성취(The covenant and its fulfillment)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과 그것의 성취로 이루어져있다. 구약과 신약이라고 말할 때도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을 의미한다. ‘추방-귀향’의 주제에서 우리에게 세상을 치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언약-성취’는 우리가 법을 어긴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아무 약속이 없으셔도 피조물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순종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인간은 하나님과 신실한 언약적 사랑의 관계를 맺는 대상이 된 것이다. 2. 죄의 정의와 결과는 무엇인가?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에는 기준이 있다. 만약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는 적극적 범죄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소극적 범죄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단순히 한 번의 실수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신뢰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이다. 모든 죄는 교만이 뿌리이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악한분노, 선한분노’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차가 막힐 때 짜증과 분노가 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내 마음대로 세상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세상을 통제하고 싶은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이스라엘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래서 율법을 수여받았지만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2)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결혼 언약이었으며, 하나님이 남편이 되었지만 언약을 깨뜨렸다고 고발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긴 대가를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럼에도 공의를 지키셔야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4. 예수님은 무엇을 행하셨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지키시면서도 그의 백성을 사랑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은 언약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사야는 그 해결책을 말하면서 언약의 주님과 고난당하는 언약의 종을 둘 다 강조한다. 예수님은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써 언약의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15)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저주를 받는 언약의 법칙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언약을 지키지 못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자신이 지키신 언약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조건적인가 무조건적인가?‘ 라는 질문에 둘 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순종적이고 신실한 언약의 종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완벽히 성취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신실한 언약의 주님으로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5. 마지막 날의 언약의 회복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맞춤한 곳이다. 하나님의 법과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었다. 언약을 깨트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도시에는 더 이상 저주도 정죄도 없다. 유월절의 어린양 되신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과 신부가 될 것이며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언약과 성취의 역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완성된다. 우리가 본래 지음 받은 궁극적 사랑의 관계가 성취되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아담의 저주가 언약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된 것이다. 성경은 언약하시는 하나님과 그것을 깨뜨리는 인간,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이 모든 언약을 이루는 힘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언약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칼빈의 고백처럼 지옥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죄를 멀리 하는 것이다. 언약을 깨뜨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 때문에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오래된 찬송가 가사처럼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내 삶의 모든 헛된 것들을 버리게 된다. 언약을 깨뜨린 인생들을 언약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삼으시기 위해 가장 고결하신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
복음
십자가
창조주
악한분노선한분노
데이비드폴리슨
마지막날
칼빈
언약
성취
혼인잔치
부모가 가르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by Melissa Kruger
2020-09-21
엄마로 산다는 건 기쁘지만 벅찬 일이다. 아이가 계속 크기 때문에 엄마로서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아장아장 걷던 아기가 금방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 대해서 좀 이해했다 싶으면 어느새 눈앞에는 사춘기가 된 아이가 서있고, 거기에 조금 적응하다 보면 아이는 손을 흔들고 대학으로 떠난다. 부모라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바른 교육을 위한 주제들로 항상 분주하기 마련이다. 두뇌가 잘 발달하도록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세요. 장난감은 가장 교육적인 것으로 선택하세요.여행을 하면서 경기하는 스포츠 팀을 일찍 시작하여 대학에서도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건강한 음식만 먹도록 하세요.악기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게 하세요. 좋은 학교에 가려면 좋은 이웃이 있는 동네에서 살아야 합니다.과외 선생을 고용하여 모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도록 하세요. 부모로서 할 일을 모두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종종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목적을 찾고 있고 또 성공이라는 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 바로 그 목표를 놓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잊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Wherever You Go, I Want You to Know)’를 썼는데, 그건 우리 아이들에게 최대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따르는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갖든지, 어떤 운동을 하든지, 성공 또는 실패를 하든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이다. 이게 바로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어린 자녀들은 계속 들어야 한다우리의 자녀들은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잔소리를 듣는다.방 치워라.양발 주워라.머리 빗어라.안전벨트 매라.숙제해라.삶의 모든 오고가는 일에서 일상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영원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인 나의 입술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은 선하고 친절하며 참되다는 것을 말이다. 책은 우리가 가장 소통하고 싶은 이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대신 말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책은 아이들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를 따뜻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제공함으로 부모를 도울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자리 잡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갖게될 것이다. 십대는 계속 들어야 한다나는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을 때에도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를 썼다. 사람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얼굴의 변화 때문에도 십대는 쉽지 않은 시기이다. 아이들이 듣는 세상적인 성공과 칭찬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는 십대에 접어 들면서 점점 더 커지고 빈번해진다. 주변에서 받는 압력은 강해진다. 선의를 가진 어른들은 정기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니?”, “대학은 어디로 갈건데?” “전공은 뭐로 할 거니” 등을 묻는다. 아이들 주변의 모든 것이 올바른 대학에 진학하고, 올바른 전공을 선택하고, 올바른 배우자를 찾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만 같다. 그 누구도 당신이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17 살 때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매일 이런 질문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받는 느낌은 어른의 생각과는 다르다. 십대에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스포츠 팀에서 뛰고 또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압박 중에서도 우리는 최대한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는 계속 상기해야 한다‘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는 어린 자녀와 십대에게는 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부모에게도 하나의 책이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시험 점수를 조작하고 또 불법적으로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는 부모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부모도 자신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지금 자녀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잘못된 것을 바라고 있다.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이다.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칠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부모가 하는 양육만으로 자녀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가정을 사용하신다. 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희망, 자녀를 위한 기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아이들과 함께 하는 날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다. 부모라면 여러 활동과 교육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전달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전부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Most Important Lesson Parents Teach번역: 무제
가정
자녀양육
복음전달
자녀교육
세상적성공
관계
오직예수
십대교육
십계명에 나타난 복음
by 박용기
2020-09-20
복음은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에도 나타난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서 복을 받는 ‘복음’(갈 3:8)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복음은 모세의 율법에도 담겨 있고 십계명에도 녹아 있다. 복음의 안경을 쓰고 십계명과 율법을 살펴보자. 1. 십계명은 복음으로 시작한다십계명에는 ‘하라’는 두 가지의 명령과 ‘하지 말라’는 여덟 가지의 명령이 나온다. 그러나 십계명은 이런 명령들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먼저 선포한다. 구약성경에서 복음은 내가 행한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신 일이다.“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십계명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행해야 할 일보다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선포되고 있다. 김형익 목사는 ‘율법과 복음’에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은 문장구조로 설명한다. 율법은 ‘만약 이렇게 행하면, 그러면 살리라’(if/then)는 문장 구조를 갖지만, 복음은 ‘내가 너를 위해서 다 했다. 그러므로 너는 살 것이다’(because/therefore)는 순서를 가진다고 강조한다. 십계명에서 이런 복음적 문장 구조가 발견된다. 십계명은 ‘만약 네가 이 일을 행하면 그러면 내가 너를 구원 하겠다’로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너는 살았다’는 복음의 구조로 시작한다. 2. 십계명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된다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네 하나님 여호와’(The Lord your God)로 소개하며 시작한다(2절). 이것을 행하라, 행하지 말라는 명령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먼저 소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출애굽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창세기 족장들이 경험하지 못한 구원자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되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십계명에 나타나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를 모른 채로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행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을 오해하게 만든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관계가 먼저 선포한다. 3. 십계명은 매력적인 공동체를 만든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 19:6)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려고 십계명을 주셨다. 십계명은 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신자의 구원이 외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십계명은 구원받은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이웃을 배려하고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알게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명령은 구원받은 개인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세상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명령하셨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사람들 앞에서 ‘행함’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게 된다(약 2:24). 4. 십계명은 ‘계명’을 포함하는 ‘말씀’이다“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And God spoke all these words), 십계명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열 마디 말씀’(아세렛 하데바림, The Ten Words)표현된다(출 34:28; 신 4:13; 10:4). ‘계명’은 히브리어로 ‘미츠봐’(mitswah)이다. ‘계명’은 종종 ‘말씀’(다바르)과 동의어로 사용되나, 일반적으로 계명은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을 의미하며, 말씀은 계명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십계명에는 열 가지 ‘계명’도 있지만, 구원자 하나님(2절), 창조주 하나님(11절)을 소개하는 말씀과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 5. 모세가 설교한 복음 모세는 신명기에서 신세대를 대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다바르)을 선포한다(신 1:1).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는 한복판에서 갑자기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그 백성에게 알게 하실 것이며(신 18:18),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신 18:15)라는 말씀을 전한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서 모세의 율법에 예언된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며(행 3:22; 7:37), 그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율법이 완성된다는 복음을 설교한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그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절정에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선포한다. 모세는 율법이 지키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황당한 말씀을 전한다(신 30:11-14). 어떻게 인간이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는 이런 말씀을 전한 배경에는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적 사건이 있다.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신 30:6)이라는 미래적 사건을 전제해서 율법을 전했다. 바울은 이 말씀(신 30:11-14)을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말씀(로고스, 다바르)이 네게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을 선포했다(롬 10:8-10).모세가 선포한 ‘말씀’은 토라, 율법으로도 불린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토라(torah)는 130회가 사용되는데, 원래 의미는 교훈(instruction), 지시(direction)이다(The Lexham Bible Dictionary). 예수님은 ‘모세의 토라’를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으로 말씀하신다(눅 24:44). 유대인들은 토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에서 248개 ‘하라’는 명령과 365개 ‘하지 말라’는 총 613개의 명령을 찾아낸다. 이 613개 명령이 강조되면서, 토라는 후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율법(노모스, law)으로 번역된다. 토라는 넓은 의미로 모세 오경, 좀 더 좁히면 613개 율법들, 더 축약하면 십계명이 되며,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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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우리의 고통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0-09-19
최근 나는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내 첫 반응은 화를 내는 것이었고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상처 받았던 모든 다른 경우를 떠올리며 불만에 대한 목록을 정신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우연히 A. W. 토저의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이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그것은 많은 불안을 해소한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와 같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예외는 없다. 기쁨과 고통. 평안과 혼란. 충만함과 공허함. 고통과 안락함. 나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무시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밀한 것까지 다스리신다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하여 나를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나를 덜 근심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은 결코 하나님의 정죄하심이 아니다(롬 8: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다(롬 8:32). 그분은 나의 영원한 선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계획해 주신다(롬 8:28). 내 삶의 모든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한다. 진정 그러하다.갑자기 난 친구의 조언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중단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내 삶에 허락해 주셨을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았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대해서 더 많이 밝혀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얼버무리고 넘어 갔을지 모르는 내 삶의 죄의 한 꺼풀을 드러내기 위해 내 친구의 행동을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내 반응 속에 드러난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었다.짜증나고, 좌절하고 혹은 화가 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내가 외부에 집중하는 것 대신에 마음을 잘 점검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나의 불편한 감정은 아마도 나를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초대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보다 내 안에서 더욱 더 중요하고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길에 마주하는 모든 일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경험도 결코 버릴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 선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내 삶의 경험은 전부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어려운 상황들은 그리스도께 의존하도록 장려한다. 더 간절하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며, 사역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성공의 순간들은 내가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 교만함을 발견하게 하여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순간 속에서도 낮은 자리를 취하게 하시며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 삶의 모든 일들이 거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벼랑 끝의 축복친구의 배려심 없는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배우자의 배신이나 쇠약케 만드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과는 동 떨어진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초대와 동일하다. 난 세 가지 이 모든 시련을 경험했고, 비록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을 사용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 품에 안기게 될 때에, 나는 더욱 그분의 아들처럼 되어 갔다. 유진 피터슨(Eugen Peterson)의 산상 수훈 강해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아름다운 울림을 준다. 그가 쓴 ‘메시지’(The Message)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4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기록하였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벼랑 끝에 서있을 때 복이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에 복이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신 나간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축복”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그 이상을 소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서있는 상황이나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축복을 받는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인간적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확장되는 순간이다. 우리의 자아는 더 약화 되며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던 것을 잃게 된 그 순간,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맞아주심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된다. 그분의 안아주심은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사랑스러우며, 더 소중한 것이며 더 경이로운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라1600년대 프랑스 가톨릭 작가인 마담 귀용(Madame Guyon)은 질병과 무시와 수치로 얼룩진 힘든 삶을 살았다. 그녀가 16세 때, 아버지는 그녀를 속여서 22살이나 나이가 많고 통풍을 앓고 있던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후에도 시어머니 집에 살면서 남편의 간병을 맡아 끊임없이 그를 돌보았다.귀용의 기도는 그녀의 깊은 신앙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오 하나님, 제가 수녀가 되고자 했을 때 당신은 아버지가 나를 속이게 하셨고 그래서 제가 주께로 향하며 주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오 나의 하나님, 주님은 제 시어머니가 나에 대한 거짓을 퍼뜨리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제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의 순간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며 억울함과 분노를 키우는 것 대신에, 그녀는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모든 그녀의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모든 그녀의 상황이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기회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꺼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내려놓았다.모든 만물이 그분의 종시편 119편 90–91절은 말씀한다.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더욱 더 거룩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짜증냄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육체의 질병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반항하는 자녀들은 우리가 멈추지 않고 기도하도록 훈련시킨다. 우리 삶에서 힘들고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그분의 초청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온전하게 살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매 순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드러내시는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심을 인지하고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더욱 더 그리스도 닮은 자들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Uses Everything: Why Our Suffering Is Never Wasted번역: 정진호
영성
영적성장
고통
축복
사랑의손길
유진피터슨
메시지성경
산상수훈
마담귀용
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
by 이춘성
2020-09-18
1.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종의 시민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의 3대 요소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 한다. 거주지가 있고 주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간의 계약 관계 속에서 정부와 국가가 탄생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지금과 차이가 있다. 고대의 나라란 국가(Nation)보다는 왕국(Kingdom)에 더 가깝다. 약 2000년 전의 나라는 지금처럼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나라는 다윗 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의 개념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로 이후에 메시아의 의미가 더하여져, 국가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지금도 적용된다. 현재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 개인의 주권을 굴복시키고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구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의 소금과 빛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마 5:13-16)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을 두 단어로 규정하셨다. ‘소금’과 ‘빛’이다.2. 로마의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소금첫 번째는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라는 선언이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다. 땅이란 단어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을 땅 혹은 흙이라는 물성을 지닌 물질로 이해하고 이 물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다른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그 특유의 짠맛 때문에 물질이 변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에 대해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면 대부분 변치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소금의 기능을 성결하게 하는 기능이라고도 규정한다(출 30:35).당시에 이스라엘과 주변의 사람들은 사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였다. 바닷물을 정제하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로마에서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소금을 생산하는 기술 때문에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후에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평화란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로마의 막대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 그러나 로마만의 평화의 시대를 견인한 권력은 소금에서 나왔다. 라틴어 ‘sal’은 소금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솔져(soldier), 샐러리(salary), 샐러드(salad) 등의 영어 단어들이다. 로마에서 소금을 임금으로 받았던 군인들을 솔져라 불렀으며, 그 군인들의 급여가 샐러리였다. 후에 소금에 절인 채소를 샐러드라고 불렀다. 로마는 소금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소금이 지니는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예수님의 소금 정체성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는 소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 대항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정체성에 대한 선언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충격보다 더 강력하였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의미하였다. 소금으로 민족과 종교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로마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3. 참된 권위와 거짓 권위만약 소금이 특유의 짠맛이 없다면 그 소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그러한 소금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순도 높은 로마의 소금과 달리 순도가 높지 않고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금이 짠맛의 기능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런 소금은 소금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소금처럼 투명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알갱이에 불과하며, 단지 쓰레기 덩어리였다. 로마의 권력, 권위에 대항하여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제자와 신자들이 세상의 순도 높은 소금 보다 그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가득해서 정작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의 웃음거리,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순도 보다 더 높고 성결한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4. 소금의 존재감과 지혜예수님이 제자들을 소금이라 규정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상승했을 것이다. 소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막강한 소금의 권력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쓸모없는 소금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 중에 소금처럼 생긴 쓸모없는 소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성경학자들은 소금이 주는 은유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당시 랍비 문헌을 연구하면 소금을 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는 소금이 말, 더 자세히는 말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프란스(R. T. France)는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감, 자존감은 지혜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자의 존재를 세우는 지혜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제자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순도 높은 소금의 존재감과 기독교 윤리를 세운다.5. 그리스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두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선언하셨다. 이것도 직역하면 “너희는 질서의 빛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cosmos)는 ‘질서’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도 구체적인 통치 질서와 법이 있다. 그리고 ‘빛’은 이 질서를 세상에 밝히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빛’을 ‘이성’, ‘오성’의 유비로 사용하였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삶의 원리(윤리)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성인 자유인 중에서도 소수의 철학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질서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빛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9:5;요 12:35-36, 46).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이다. 만약 어둠 속에서 길을 찾던 어떤 여행자에게 빛이 비치고 그가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이들에게 복음일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고 복음이다.6. 빛을 본 사람의 삶빛, 바로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이 요한복음 9장에 나와 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이때 난데없이 제자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일어났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자는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의 대화의 주제를 바꾸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호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이 사람은 말씀대로 하였고,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다는 놀라운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시 신학 논쟁을 시작하였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하였다. 예수님과 시각장애인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이 비취는 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0–33).바리새인은 진리를 말하는 시각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빛을 본 자들, 빛을 통해 사실을 본 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본 빛을 증거 한다. 그래서 그들도 그 빛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에게 주신 그들의 정체성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진리를 알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신자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다. 하지만 빛과 소금의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7. 도덕적 우월주의가 아닌 감동을 통해(소금과 빛의 역할)예수님의 삶은 빛이 되어 스스로 빛나고 주목받는 인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빛이라 하면 주목받고 돋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을 밝게 하여 빛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인 원리와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들은 빛의 자존감을 자랑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겸손이다. 교만한 빛은 빛이 아니다. 나만을 따라오라는 것, 주목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빛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빛이다. 하나님 나라의 빛은 내가 아닌 타인과 하나님을 빛나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가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성부 하나님을 만난다.뉴욕 시 한 가운데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목회하는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말하였다. 켈러 목사는 1997년 5월 4일 주일 예배 “Thomas Meets Jesus”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상의 복음은 ‘나(I)’, ‘자아(ego)’에 대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그(He)’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설교하였다. 복음은 내가 아닌 나 밖의 존재에 대한 소식이며,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먹을지, 내가 누구인지 등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정작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나야 함에도 말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나 밖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기독교의 복음은 나를 벗어나 나 밖의 어떤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와 우리를 보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세상과 같이 나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나’라는 유사 복음을 말하는 아류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그 복음’(The Gospel)이 될 수 없다.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타자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마주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수의 눈은 있는데, 예수님의 손과 발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빛이라는 증거이다. 빛과 소금의 삶을 매진해야 하는 우리 삶의 이유이다. 빛이 눈에서 손과 발로 내려 올 때까지….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의 정체성은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신약성경
하나님나라
정체성
소금
빛
팍스로마나
신학논쟁
팀켈러
리디머장로교회
산상수훈
세속화로 도전받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by 장대선
2020-09-17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헌법적으로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입장이 너무도 분명하지만, 소위 극우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성명, 그리고 가두시위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모양새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가 철저히 분리되어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논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어떤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야말로 현실 가운데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인 원칙에 불과하다.사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용인되고 제국의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황제’의 통제 아래에 기독교가 존재하며 확장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Ⅰ, 재위 306-337)야말로 국가교회의 원형을 만든 가장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국가교회로서의 기독교는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황제까지도 교회에 복속되는 역전이 이뤄졌는데, 제국을 아우르는 교황의 막강한 위세를 지녔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바로 그러한 역전의 대표적인 체제였을 것이다. ‘세속화’의 본질, ‘이원론’에 있어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를 ‘신정정치’(theocracy)의 정치체제였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는 결코 신정정치의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왕’과 ‘제사장’의 권한이 엄격히 구별되며, 또한 왕과 제사장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체제 가운데 있었다. 특별히 ‘왕’뿐 아니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구별되는 독특한 체제야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 까지 지지하게 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진정하고도 바람직한 관계설정과 체제였다.그런데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적인 기초와 19세기의 본격적인 ‘세속화’(secularization) 가운데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철저히 분리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사실 세속화의 본질인 ‘이원론’(dualisme)에 근거한 하나님의 소외와 배제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저 멀리 천상으로 축출되고, 지상의 모든 영역들은 철저히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의 영역, 즉 ‘세속’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론적 배경 가운데서 급기야 ‘사신신학’(Gott-ist-tot-Theologie)이라는 괴물까지도 세속적 교회들 가운데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일부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국가 외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지지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사실 바로 이러한 세속화를 향한 이론적 디딤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팬데믹(pandemic)의 상황 가운데서의 방역을 위해 여러 나라들이 시행한 국가적 통제 가운데서, 현실 가운데 정교분리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질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고 말았다. 오히려 방역을 위해 종교적인 모임과 회합들조차도 잠정적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뜻하지 않게 봉착하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설정에 있어서의 분별의 문제가 우리 현실상황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르게 된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자유 … 강제할 수 없는 자유그런데 교회와 국가의 행정력에 의한 예배의 통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국가와 관원들이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의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약 4:12; 롬 14:4),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는 신앙고백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정적 명령을 현재 여러 국가들의 행정부가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해묵은 이데올로기(Ideology)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소위 좌파정권의 기독교 억압을 포석으로 하는 정권 차원의 정책이라고 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그 자체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결코 콘크리트 장벽과 같은 것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별개일 수가 없음을 암묵적으로 입증하고 있다.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국가와 관원들이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게 된 심령의 참된 자유로움과 아울러 그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강제적인 조치에 의해 그 자유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가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의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고 한 문구는, 곧장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골 2:20, 22-23; 갈 1:10, 2:4-5, 5:1).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 16-17; 렘 8:9).”라는 문구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구로 된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독교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광장에 나가서 반정부적인 시위를 벌였던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강요에 의해서든 금전적인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별 깊은 사고와 통찰이 없이 군중심리로 따라 나간 자들까지도 모두 ‘맹목적인 신앙’ 혹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양심의 자유를 그 스스로 파괴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성경을 따르고자 하는 장로교회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판) 제20장은 4항에서 또한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심으로 세운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간 보존하게 하기 위해 의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의 권세이거나 교회의 권세이거나 간에 어떠한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마 12:25).”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할 때에도, 혹여 그것이 합법적인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합법적[법률이나 제도로 보장된]이고 정중하게[정식적이고 불필요한 잡음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 않게] 이의를 제기해야만 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자유 … 스스로 저버리기 쉬워그러나 사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양심의 자유는 결코 인위적인 법률이나 억지에 의해 제한되거나 속박될 수가 없는 성격을 지닌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서 얻게 되는 자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 곧 원죄(original sin)와 그로 말미암은 죄책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또한 정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뿐 아니라 무엇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으로서의 율법에서 온전히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으로 인해 얻게 되는 자유와 적극적인 율법에의 순종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능동적이고 진정한 자유다.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한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바로 그 자유함과 해방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그 어떤 정권, 그 어떤 이데올로기, 그 어떤 정책이 방해하거나 파괴할 수가 있겠는가?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있어 우리들이 항상 유의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저버리거나 파괴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한 연약함이라는 점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우리에게 가해진 탄압과 핍박, 그리고 모진 고문과 사형의 박해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속에 있는 욕망과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일본신사에 참배하는 것조차도 배교와는 무관한 국가적 충성이라 변명했던 것,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맞춰서 기독교 스스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온갖 의식들과 미신적인 것들까지 예배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여겼던 역사야말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생생한 실례인 것이다.지금,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누구에게 매여 있는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이 생길 때에, 과연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는가? 당장에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목사를 찾거나, 심지어 도움을 주는 교회의 목사와 그 교회의 규모를 의식하여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종속됨이야말로 양심의 자유는 물론이고 이성의 자유조차도 저버리고 스스로를 노예와 같이 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직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누군가 마치 독재자와 같이 우뚝 설 때에, 그 자가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심지어 집사 혹은 회중(flock)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제정된바 합당한 교회의 질서와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의사를 투영하고 관철시키는 독재자로서, 교회 안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옭아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와도 같은 행실을 일삼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유념하고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교리
정교분리
콘스탄틴황제
세속화
신정정치
팬데믹
자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행위언약
원죄
교회가 나를 해고했다. 이제 어떡하지?
by Jeremy Todd
2020-09-16
압도적인 투표로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했다는 그 교회의 전화를 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와 교인들은 흥분했고,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빛났다.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고 나는 잊을 수 없는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몇 가정이 나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나를 해고했고 나는 사역지를 떠나야만 했다. 목사를 해고할 때 성경적인 바른 이유도 있겠지만, 강제로 쫓겨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선택도 없다고 느끼면서 교회를 떠나는 목사의 경우라면,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그런 해고를 당하는 경우 어떻게 생각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분명히 잘못된 이유로 교회에서 해고되었다. 그런 해고를 당하고 난 이후 깨닫게 된 다섯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 싶다.1.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해고되거나 사임하고 난 이후는 고독의 시간이다. 실패, 후회, 불확실 등의 감정이 당신을 감쌀 것이다. 자존심은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인생과 사역에 관해 “당신이” 가졌던 계획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어두운 날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아야 한다.그런 일은 왜 당신에게만 생기는 거냐고 사탄은 속삭일 것이다. 믿지 마라.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당신이 겪은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그로 인한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해고로 인해 고통과 불확실성을 겪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2. 슬퍼하고 치유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당신이 겪은 건 일종의 영혼의 트라우마이고 그로 인해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을 것이다. 조금의 안도감도 주지 않겠지만, 단지 직장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지금 주님께서 당신을 믿고 맡기셨던 지역교회를 잃은 것이다. 시시비비를 떠나서 이런 자각은 고통스럽다. 고통은 몸이 잘리는 것과 다르지 않고 상처는 결코 빨리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크면 클수록, 당장이라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그런 충동을 거부해야 한다. 당장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환자의 상처 부위에 대일밴드를 붙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또 가족과 미래에 만날 교회에게도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자존심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아주 잠시라도 사역 외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보라. 설교 초청이 온다고 해도, 또 청빙 인터뷰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공개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좋은 선택이다. 대신 교인들을 돌보던 삶에서 잠시 떨어져서 오로지 당신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상처를 치유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3.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라, 그러나 다시 교회를 시작하지 마라지금 상황을 교회를 개척하는 기회로 바라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기회가 맞다며 충동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절대 교회를 개척하면 안 된다.개척을 시작해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당신도 또 당신에게 그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상처를 유발할 수 있다. 대신 건강한 교회를 찾고 조사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또 그런 교회를 찾아 뿌리를 내려 보라.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건강한 공동체를 찾는데 이사까지 해야 한다면, 기꺼이 이사를 가라.치유 과정에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지금 당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랑과 지원 그리고 격려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런 시간을 하나의 선물로 바라보라.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것이고, 또 당신 속에 남은 쓴 뿌리의 원인을 파악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겪은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는 게 꺼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당신과 가족이 한 단계 더 도약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사랑과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교회로 하여금 당신을 다시 건강하게 회복시키도록 하라. 그건 결국 미래의 사역에 필요한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큰 도움일 될 것이다. 4. 주님을 기다려라기다림은 힘들지만 그 속에는 목적이 있다. 오월에 꽃이 피기 위해서 사월에 비가 와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꽃이 자라고 향기를 내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하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 중 하나이다.지금과 같은 시간은 다름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역을 바라보고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준비한 기회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 그토록 불타던 목양 사역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 주님께서는 목양 사역 밖에도 삶과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양 사역과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 크게 불타고 있음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 부서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주님께서 치유하시도록 기다리라. 가장 큰 소리로 비판하던 사람들로부터라도 배울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역에 마음이 준비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5.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식하라“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지금 당장은 마음 속에 대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에는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도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을 대적하겠는가(롬 8:31)?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인가?비록 부당한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건 결코 우연히 생긴 사고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지금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y Church Fired Me as Pastor. Now Wha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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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교회개척
사임
해고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여덟 가지
by Matt Smethurst
2020-09-15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다다르는 길은 오로지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계시 또는 추측,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우리가 추측하는 것이다.그리고 중요한 건,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한 권의 책을 통해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달리 말하면 우리와 친구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포기했다.” 성경은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 위한 만능 패스이다. 사실상 성경은 그 누구나 인정하듯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다. 성경에 찬성하든지 아니면 반대하든지 간에 성경에 관한 글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쓰여지고 있다.‘성경을 펴기 전에’(Before You Open Your Bible)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에 대해서 스스로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을까? 여기 여덟 가지가 있다.1.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성경이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이건 무슨 의미일까? 영감은 하나님과 성경 저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그렇다고 오늘날 흔히 쓰는 식의 영감을 받은 건 아니다. 바울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면서 영감을 받아 갈라디아서를 쓴 게 아니다. 또한 바울이 어떤 최면 비슷한 상태(catatonic state)에서 친구에게 몇 단어를 암송하고는 곧 양피지를 집어들고 “하나님이 뭘 썼는지 보자!”라고 말한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영감받았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성경 전체는 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성경을 흔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그럼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면,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과 요한 같은 사람은 다 뭐란 말인가? 성경을 쓴 저자는 그들이 아니던가? 맞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쓰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했다.“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저자들이 글을 쓸 때 하나님이 거기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확실하게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한 글자를 더 쓰지 않도록 하셨고, 한 글자도 덜 쓰도록 그냥 두시지 않으셨다.그렇다고 이런 저자가 단지 수동적인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성 또는 지성을 무시하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들 또한 쓰면서 생각하고 느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교육 그리고 배경과 경험을 사용해서 영감을 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쓰도록 하셨다.2. 성경은 진리이다진리이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진리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성경 속에 있는 “영적인” 개념들을 다 진리로 여기지만 다른 내용들, 예를 들어 역사적 또는 지리적 세부 사항 등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진실하게 말하는 주제의 종류에 대해서 그 어떤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부분에 대해 성경이 정말로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완벽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부분도 진짜 맞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실성에 대한 많은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예, 시 12:6; 19:7–9; 119:160; 잠 30:5–6; 요 10:35; 17:17). 모든 말씀은 흠이 없고(시 12:6; 잠 30:5), 영원하고(시 119:89; 사 40:8; 마 24:35), 깰 수 없고(요 10:35), 완전함에 경계가 없고(시 119:96), 그리고 완벽하게 믿을 수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벧후 1:19).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이 사실을 확인하셨다. “말씀은 진리이다”(요 17:17). 성경의 진리됨은 워낙 포괄적으로 당연시되고 있기에 어떤 주장을 하는 전체 내용이 한 단어를 어떻게 불렀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경우도 있고(마 22:45), 또 특정 명사의 숫자에 달려있는 경우도 있으며(갈 3:16), 심지어 동사의 시제에 달려있는 경우도(마 22:32) 있을 정도이다.그렇기에 성경은 제대로만 해석된다면 결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없다. 성경이 하는 말은 모두 하나님 말씀이다.3. 성경은 권위가 있다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한 이 우주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그의 사랑의 권위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났다. 하나님은 자신과 말씀을 아예 하나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믿지 않거나 거역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거역하는 것과 같다. 물론 성경이 유일한 권위는 아니다. 부모(엡 6:1–2), 목사(히 13:17; 벧전 5:5), 그리고 정부 관리(롬 13:1–7; 벧전 2:13–14)와 같은 다른 권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성경은 바로 대법원이다. 이것은 모든 신념, 가치, 의견, 진술 및 설교의 정확성은 오로지 다음 질문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예수님 자신이 “성경의 모든 부분, 모든 요소는 결코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권위”라고 인정하셨다.왕은 명령하지 충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J. C. 라일(J. C. Ryle)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성경을 읽는 자는 더 행복하다. 가장 행복한 자는 단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라일의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문화 및 사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자유를 찾을 수 있다.4. 성경은 명확하다성경은 고대 문서이다. 그래서 생소할 수도 있다. 어떤 부분들은 혼란스럽기도 하다(벧후 3:16). 그럼에도 성경은 충분히 명확하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하나님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신 6:6-7).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어린아이가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얕지만 또 동시에 코끼리가 수영을 해야 할 정도로 깊다. 이 말은 참으로 심오할 정도로 옳다. 때때로 성경은 복잡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 그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애초에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성경과 관련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경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는 부분 때문이다.” 즉, 성경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어렵다는 것이다. 5. 성경은 충분하다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히 믿고, 완벽하게 순종하고 또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말씀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경은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에 “모든 선한 일에 완벽하게 충분하다”라고 했다. “모든” 일에, “완벽하게” 충분하지 결코 “일부분”과 “대부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딤후 3:16). 성경 이상으로 더 충분할 수는 없다. 성경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 성경이 알려주는 진리는 100%는 아니다. 그러나 충분하다(신 29:29; 잠 25:2). 성경에는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진리(딤후 3:15; 약 1:18, 21; 벧전 1:23)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에 순종하는데 필요한 모든 진리(딤후 3:16; 벧후 1:3–4)가 다 담겨있다. 그렇기에 성경에 내용을 추가하거나 빼는 것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신 4:2, 12:32; 잠 30:5–6).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 기독교의 타락은 언제나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원칙에 대한 양보로부터 시작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확립한 기독교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성경에 뭔가를 추가하거나 제거함으로 시작된다. 모든 이탈은 성경에 뭔가를 플러스 하거나 또는 마이너스하는 것이다.”6. 성경은 능력이 있다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하고(렘 23:29), 또 삶을 바꾼다(요 17:17; 참고. 롬 1:16; 살전 1:4–5).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성경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달리 하면 성경이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성령님은 성경을 사용해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해 가신다(사 55:10-11).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있는 팔이 일하실 때 쓰시는 도구이다.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당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니다. 성경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쓰여졌다.”7.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시다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성경은 윤리적 원칙, 도덕적 사례 또는 추상적인 인생 교훈을 모아놓은 모음집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소름돋는 스토리이다.그 스토리는 당신과 나에 대한 게 아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한 구세주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서 나타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나중에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부활하신 이후에만 이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다.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중에도 예수님은 소위 당시 “성경 전문가들”에게 이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39–40, 46).그렇기에 이 말은 옳다. 구약에서 “예수님은 가려졌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드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구조는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자 아들을 기다리며 비추다가 때가 되어 궁극적으로 드러내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드라마 속에 숨은 가장 놀라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성경의 주인공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8. 성경은 소중하다성경은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소중하다. 우리의 음식(렘 15:16), 생명(신 32:46–47), 위로(시 119:50), 힘(시 119:28), 인도(시 119:105), 열망(시 119:20), 소망(시 130:5), 사랑(시 119:97), 기쁨(요 15:11), 그리고 보물(시 119:72)이다.레위기와 역대기 그리고 오바댜조차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무엇이든지. 바울은 구약 전체가 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쓰였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물론 저자보다 성경을 더 소중하게 하는 '성경 우상주의'(bibliolatry)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사실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시 56:4; 119:48). 그렇기에 성경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눈으로 목도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귀로 듣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하나님의 성경을 하나님의 얼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우리가 녹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녹는 것이다.” 또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기에 나는 성경의 음성을 들을 때면 언제나 경외감을 느낀다.”성경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무한 보물 상자이다. 성경의 주장은 이것이다. 성경은 영감 받은 말씀이며 진실 되고 권위 있으며, 명확하고, 충분하고, 능력 있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또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성경 스스로가 성경을 증거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Things Your Bible Says About Itself번역: 무제
복음
변증
영감받은말씀
성경우상주의
계시
추측
성경의증거
JC라일
진리
실직했지만
by Laura Baxter
2020-09-14
코로나19 여파로 직장을 잃었습니다. 실직했지만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뻔해서인지 점점 더 게으름이 주는 권태감에 지쳐가는 느낌입니다.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오히려 격려가 된다. 먼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는 질문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할 최고의 목표이자 최상의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게다가 게으름이 주는 무게감을 점점 더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전자기기가 넘치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게으름을 느끼는 대신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서 멍하니 지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게으름과 친해져서는 안 된다(잠 16:26; 살전 5:14). 우리 삶은 생산적이고 열매 맺는 삶이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게으름이라는 죄와 맞서서 싸우고 있고, 그것은 성령님이 당신 안에서 일하신다는 증거이다.동시에 당신은 지금 영적 침체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없기에” 스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을 때를 생각해 본다. 임신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을 때, 몇 년을 공들인 사업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용기 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지금 그 자리에 당신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성장시킨다.지금처럼 별난 시기에 생각해야 할 네 가지 교훈이 여기 있다.1. 실직 상태인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네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일을 하라고 명하고(출 20:9),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열매 맺는 일이 보수를 받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 그게 뭔지 모르겠으면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을 보내 물어 보라. 교회가 운영하는 여러 봉사단체도 알아보라. 이웃에, 양로원에,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에도 알아보라. 이런 기관도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2. 영성 훈련―기도와 말씀 읽기와 다른 성도들과 대화(이를 위해서는 전자기기가 도움이 된다)―을 쌓으라.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을 따로 떼어 놓고 기도하라. 도움이 되는 말씀을 골라서 암송하거나 묵상의 소재로 삼으라. 참여할 수 있는 성경공부를 찾아서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라. 은혜의 보편적인 방식에 의지하며 당신의 영적 귀를 활짝 열라. 이를 통해 지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은지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3. 꿈꾸는 시간을 가지라.코로나바이러스가 닥치기 전, 한참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에 아마 당신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몇 가지 꿈을 뒤로 미뤄놨을 것이다. 운동을 한다거나, 취미를 갖는다거나, 집을 고친다거나 하는 계획 말이다. 어쩌면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도 바빠서 시간을 못 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전에 미뤄두었던 그런 목표를 성취할 시간이다. 시작하는 데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면, 친구들에게 결심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도록 하라.4.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라.당신의 가치는 직장이나 생산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진정한 결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그 은혜가 당신을 통해 흘러넘치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다(요 15:4)). 모든 상황이 느리게 흘러갈 때 스스로 뭔가 더 활발히 움직여서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시 130:5-6). 당신의 초조함과 공허함을 모두 다 주님께 맡기라.침대에 누워서 지낼 때 하나님은 나를 엄마라는 바쁜 시간을 위해서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사업이 암담했던 그 시절,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은 내게 기도를 훈련시키셨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 그때를 되돌아볼 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토록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서 나를 준비시키셨는지 놀랄 정도다. 하나님이 이와 동일한 역사를 당신의 삶에서도 이루실 것이다.원제: How Can I Glorify God When I Have No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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