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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독교 문화일까?
기독교 문화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by 서나영
2024-04-15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뮤지컬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려던 열심당의 역사적 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데, 기마전차를 타고 대결하는 화려한 장면, 카타콤에 숨어 작은 촛불을 들고 조용히 소망을 노래하는 강력한 음향 효과, 노예에서 장군의 양아들이 되는 드라마틱한 순간 등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모습에서 오열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가장 의아했던 순간은 빌라도가 남창들의 화려한 춤을 즐기는 장면인데, 관중석에서 가장 크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 일이다. 두 시간 반가량 이어졌던 수많은 곡 가운데 압도적으로 가장 큰 환호와 박수 소리였다. 관중에게는 예수님의 골고다 길보다, 빌라도의 은밀한 파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랐던 경험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기독교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사탄의 계급사회에서 선배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멘토링을 하는 이야기인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민 상담을 통해 “믿는 자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 전략을 제시하는 서른한 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에필로그에 루이스는 이 소설에 대해 시대에 맞게 확대 개정을 하자는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개정판을 쓰지 않은 이유와 함께, 소설 속 편지를 서른한 편밖에 작성하지 못한 이유를 밝힌다. 그가 실제로 마귀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다 보니 영적으로 거의 녹다운이 되어 더 쓸 수 없었으며, 다시는 그런 영적 시련을 겪을 수 없어 개정판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루이스는 마귀 입장에서 썼듯이 천사들의 입장도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만약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아니라 천사장 ‘미가엘’의 편지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련하게도 본성이 죄인인 인간은 선보다는 악이 더 매력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자석을 장착하고 있다. 동시에 영적 거장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마귀 입장의 편지 소설을 쓰며 마음과 삶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복음 사역 중에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 고백하며, 이에 대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 세상과 소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많은 문화적 노력이 있어 왔다. 그들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이질감을 없애고 복음을 전할 틈새와 기회를 엿보는 노력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고칠 권능의 사역을 꿈꾼다(마 9:10-13).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민요 가락을 빌려 힘찬 찬송가를 만들었을 당시, 그가 받았을 종교적 공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웨슬리 형제가 서정적 찬송을 만들고 개혁을 꾀했을 당시, 그들은 매일 달걀을 맞아 멀쩡한 양복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일컫는 찬송들은 문화전쟁을 이기고 마침내 울려 퍼지는 승리의 나팔과도 같다. 그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타락한 매개체인 줄로만 알았던 추상화, 영상예술,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는 오늘날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된 듯하다. 문화와의 동행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었음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최근 한국의 유명한 워십팀의 ‘게임방 시리즈’ 편곡을 들었다. 게임 슈퍼마리오와 카트라이더의 음원 또는 BTS의 다이너마이트의 음원 등을 전통 찬송의 간주에 넣어, “장로님들 뒷목 잡고 쓰러지는 편곡”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려 수준 높은 공연 실력을 보였다. 또 다른 잘 알려진 CCM 그룹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편곡이 화제다. 기존 찬송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재즈 화성의 반주에, 악기팀과 보컬 전원 선글라스를 끼고, 메인보컬은 미니스커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영상이 ‘세상 힙한 찬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 감독이 만들고 그리스도인 배우들이 참여했다는 흥행 가도에 진입한 무당 주제 영화도 있다. 큰 이슈가 된 워십팀들의 담당 목사의 간증들, 감독과 배우들이 매번 기도하고 시작했다는 오컬트 영화의 뒷이야기들이 기사와 영상으로 그들의 작품의 ‘선교적 마인드’를 뒷받침한다. 복음을 위한 세상과의 소통, 복음을 위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의 소통,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통의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고,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기독교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고 오해가 없으며 뜻이 서로 통한다’는 명제는 참으로 이상하다. 세상 문화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고 있다면, 세상과 소통이 너무 잘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을 보고 육성으로 말씀하셔도 종교주의에 물든 세상은 듣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설교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귀가 없었다. 복음은 소통이 아니라 선포해야 하는 엄청난 소식이다. 이 세대는 문화 점검을 위한 모든 처방을 혐오한다. 윤리, 사랑, 선, 진실, 질서, 희생 등의 의미들로 기준을 세우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성과 생명의 자기 선택권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 예술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 사조는 종교와 정권과 윤리도덕의 참견을 막아낼 기가 막힌 방어막이다. 이 세대와 닮은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 속에, 그들이 가진 생각의 틀을 닮겠다는 결심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변화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듣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문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태도에 깊게 머물러봤던 학자의 양심으로, 소란스럽지 않더라도 강력한 에너지를 들여 점검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그 첫걸음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 함께 변하는 기독교 문화를 점검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1. 복음 전파인가, 종교적 구걸인가?최근 중고등학생 학습과 세례 문답 교육에서 한 학생이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세례와 입교를 위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억지로 앉아 있고, 담당 교역자 목사님이 이제 대답해야 한다고 구걸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가장 큰 기쁨과 은혜의 순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한 응답을 구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 듣는 순간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취급을 당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차라리 바보로 불릴 때가 좋았다. 바보라는 말이 듣기 싫은 현대인들은 언제부턴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자처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며 “그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겔 16:32)로 비유했다. 창기는 오히려 선물을 받고 값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행음하고,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겔 15:33) 한탄하셨다. 차라리 값을 받는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생명과 같은 귀한 것을 내준다는 의미다. 최근 유행하는 “힙하다”라는 표현은 유행을 따르면서도 개성이 돋보이는 모습에 대한 칭찬이다. 힙한 퍼포먼스와 함께 펼쳐지는 찬송가는 선교적 도구인가, 아니면 귀한 것을 포기하며 내어주고 세상 문화의 관심을 구걸하는 행위인가,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한 번 들어달라고 사정하며 대중의 인기를 위해 포기한 것이, 그리고 얻은 문화와의 소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중의 안목이 두려워 장착한 ‘힙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보다 앞서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주님께 물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루터와 웨슬리는 아니며 바울과 루이스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이 최고로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위상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지를 않기를, 정말 소중한 것을 자존심 없이 내어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2. 기쁨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성경에서 최고의 기쁨 표현은 ‘할렐루야’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는 시편에 23번, 계시록에 4번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외쳤던 ‘할렐루야’는 그 편지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외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고난과 핍박과 환란 속 매일 죽음의 위협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호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쇠고랑을 차고 찬양했듯이(행 16:25), 할렐루야의 기쁨은 그런 것이다. 상황에 관계 없는 영원한 구주와의 연합으로 인한 기쁨이다. 반면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성 기쁨은 다른 종의 기쁨이다. 물론 오락성 놀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핵심 신학이 담긴 그의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을 읽어보라. 즐거움과 희락은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할 귀중한 가치다. 다만 좋고 신날 때 춤추며 노래하는 단면적인 기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게임 음원을 넣어 신나게 놀며 찬양하는 모습에 오락성이 보인다고 비판하는 경우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고난 속 피어나는 기쁨을 아는 자들의 우려일 것이다. 할렐루야를 가장 진지하게 외쳤던 다윗과 요한의 상황적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진정성을 점검하기에 적합하다. 기쁠 때 찬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한다. 기독교의 참된 기쁨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감정 상태다. 우리가 대하고 만드는 기독교 문화 콘텐츠가 요한이 말했던 할렐루야의 기쁨인지, 아니면 이방인이 단순히 춤추게 하려는 오락성 도구인지 점검하자. 3. 사랑과 인내로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보통은 두 가지의 태도 중 하나를 택한다. 첫 번째 태도는 부정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잃어버리려고 애써 무시한다. 두 번째 태도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화를 쏟아낸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 그렇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땅도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이 땅에 무균실은 있어도 죄 없는 땅은 없다. 우리가 성화를 이뤄야 할 곳은 먼지가 쌓인 땅 위며, 아무리 더러워도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땅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엡 4:13)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하고 인내하기 위해서다(살후 3:5).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지혜롭게 성령 안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무시와 비판이 아닌, 사랑으로 단호함과 겸손함을 지키는 것은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1:31) 호소했다. 한국의 교회는 비판이 아니라 바울처럼 인내함으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가르칠 그리스도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문화를 꿈꾸며, Soli Deo gloria!
그리스도인을 위한 심미안 기르기
by 서나영
2024-03-27
어린 시절부터 악기들을 다루고 듣다 보니 얻은 것은 예민한 귀다. ‘예민’의 다른 말은 섬세한 구분이 빨리 가능한 상태다. 초등학교 때는 3년간 베이스 리코더로 리코더부에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소리만 들어도 아는 텅잉 기술과 섬세한 핑거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3년간 현악부에서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는데, 포지셔닝의 손가락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색, 활털의 재질, 브릿지가 정확한 위치에 놓여 음이 울리는지, 심지어 연주자 팔 길이에 따른 다이나믹 차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다룬 피아노는 물론, 기타는 음색만 들어도 대충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구별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관을 자주 들여다 보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항아리가 왜 모조품인지 지나가는 화면 찰나에도 구별이 가능해졌다. 많은 경험과 감상의 시간들은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선물해줬다.‘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살피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이라는 단어는 눈의 보는 활동을 넘어 “포괄적으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을 의미하고, ‘살핀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는 적극적 행위를 뜻한다. 즉 심미안을 풀어 이야기하면,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애써 찾으려는 열정적인 눈과 귀와 그 외의 감각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심미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척 어울리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사람들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주했던 성경인물들은 그를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했고, 거룩의 내적 의미는 ‘다르다’라는 사실에 대한 감탄이다. 그분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면 죄로 타락한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구별이 가능해진다(이사야 6장). 구별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다름과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사는 그들의 삶은 세상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영역을 포함하며,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나라 속에서, 그리고 모든 관계와 행위와 선택들이 세상과는 구별된다.개혁주의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 신학자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의 ‘신학적 미학’의 역사를 애써 외면해 왔다. 아름다움은 감각의 영역이라 신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거두지 않았다.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인류를 대표하는 화가인 반 고흐(Vincent can Gogh)나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반 고흐는 사후 15년 뒤에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열린 회고전(1905)을 시작으로, 바흐는 사후 100년 후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바흐, 1729 초연) 재연(1829)을 계기로, 지금까지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다. 즉,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맥락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며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는 것에 그 복잡함이 있다. 맥락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개인의 믿음과 취향과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어 추적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떤 아름다움은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지, 왜 역사는 특정한 작품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는 익숙하지만, 인간이 만든 예술을 대할 때의 태도와 취향은 극과 극을 오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단어가 가능한 말인지를 늘 의심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형성은 중차대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사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심미안은 순례길에 있어 장식품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것들도 꼼꼼하게 볼 수 있고, 다름과 차이에 그 누구보다 민감해지는 것, 그 길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성화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눈으로 분별하여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섬세한 훈련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꼭 가져야 하는 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큰 강줄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시작은, 순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열망은 세례받은 심미안 시작의 모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잊지 못할 장면들이 있다. 그중 예전 한 미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가운데 트럭에 매달려 목숨을 담보로 레이싱을 즐기던 한 소년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마약 기운에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장면이다. 그 외에도 많다. 평생에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고 온갖 헌신과 봉사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한 여집사님이, 14년간 이어온 불륜 내연남과 호텔에서 심정지로 사망한 참담한 사고의 기억이다. 설교 강단에서 몇십 년을 가르쳤지만 동성애를 지지하고 애완견에게 세례를 주는 목사들이 존재하는 등의 놀라운 경험들이다. 후에 세계관에 관한 공부는 내가 놀랐던 이유를 꽤 명확하게 말해줬다. 현대사상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섞여 있는 세계관들’이 그 이유다. 성경의 진리 말고도 동양의 범신론적 일원론 사상,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 자연주의 이신론 사상,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등 다른 믿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섬겼던 고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처럼, 한 사람 안에 두 마음 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약 4:8). 이러한 세계관의 공존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정함이 없게 만든다(약 1:8), 그리스도인 속에 숨어서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만큼 분별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선과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죄악의 은밀한 공존은 남도 자신도 특별한 노력의 시선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다.성경의 진리와 함께 갖가지 다른 세계관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먼저다. 연단의 과정을 거쳐 정금같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를 바란다. 죄가 세련된 멋으로 가장해 가짜 아름다움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유작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개정 6판이 출간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자 쓴 (대학 축제 비판에 관한) 작문 과제물에 대해 F 성적을 받았던 한 학생은, 후에 기독교 세계관의 순전함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사이어와 같이 순전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옥같은 학자들의 책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해 매섭게 파고든 현대사상들을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사상들을 쪼개어 다듬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훈련된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모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기독교 예술학과가 개설되고 학생들을 뽑을 때, 첫 번째 조건은 예술에 대한 학위가 있는 자들이었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하는 문헌들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예술적 심미안’이 어느 정도 길러진 사람을 뽑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하며 마주한 사실은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양의 문헌들이 평생을 괴롭힐 것이라는 슬픈 진실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군분투한 세월에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많이 경험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평생을 미술관을 다니며 얻은 심미안을 엿보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의 글을 외우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대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탐욕의 엔진으로 돌아간다.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한 우물을 팠던 사람들의 경험을 읽어라. 그리고 경험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 선별해서 경험하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은 게걸스럽게 모든 세상 문화 예술 콘텐츠를 즐기고 경험할 시간이 없다. 구별하는 시각을 갖겠다고 매력적인 모든 것을 깊숙이 자세히 경험하고자 하면 너무 많은 죄악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결국 탐욕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다. 예술 세계의 마지막은 소유다. 소유만이 만족을 주기 때문에 결국 세례받지 않은 심미안의 끝은 원작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며, 라이브로 들어야 만족을 느끼고, 거창한 건축물을 지어내야만 만족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소유의 과정은 심미안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면 덕이 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많은 세계관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사상들은 최대한 간단히 핵심만 보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심미안을 훈련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잊으면 안 된다. 작은 십자가라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마지막 큰 줄기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름다움은 늘 감춰져 있다. 그 숨은 의도를 발견하고 감춰진 내용을 들춰보는 것이 심미안의 묘미다.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든 그 숨겨진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은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자만 획득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댄스, 사진, 영화와 드라마, 시와 소설, 건축 등 수많은 영역의 예술이 존재하고 각자 다 다른 색과 맛의 미학적 노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본질을 파헤치기를 원하는 자, 성경을 열정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와 손을 통해 주신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성경은 쉽지만 어려운 말씀이다. 누구나 명확하게 복음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지만, 알수록 깊어지며 수많은 연구와 묵상의 과정이 필요한 책이다. 살아 있는 거룩한 언어가 문자로 남겨져 있는 것이 성경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본질을 파헤치는 자만이 그 안의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 빛과 색과 소리와 움직임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로 모두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데, 실로 생명의 아름다움은 실존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일차로 하나님으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많은 버전의 성경을 읽어보고, 충분히 묵상하며, 쉬운 주석부터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기를 기도하라. 심미안을 가장 온전하게 형성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다. Soli Deo gloria!
소셜네트워크의 몰락과 현대인의 세 가지 욕구
by 이춘성
2024-03-22
지난 2월 4일로 대표적인 소셜네트워크(SNS)인 페이스북이 설립 2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20년 동안, 페이스북은 폭발적인 성장으로 전 세계 30억 이상의 사용자와 시가총액 1.2조 달러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페이스북 등장 이후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소셜네트워크들이 개발되었으며, 페이스북을 포함한 소셜네트워크 앱은 현재 스마트폰 평균 사용 시간의 1/4을 차지하고 있다.초기 소셜네트워크는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의사소통과 개인과 불특정 다수 사이의 대중적 의사소통을 통합하는, 이전과 다른 새로운 매체로 주목받았다. 소셜네트워크 이전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첫째는 편지, 유선 전화와 휴대 전화 등과 같이 개인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사적 매체들이 있었으며, 둘째는 신문, 라디오, 책, 텔레비전과 같은 개인 혹은 단체와 다수 간의 일방적인 전달을 위한 대중 매체 혹은 레거시 미디어로 이분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두 미디어는 용도와 윤리적 책임의 정도, 사회적 의미에 있어 확연히 구분되었다. 예를 들어 사적 매체는 소문과 사적 대화가 허용되는 공간이었다면, 대중 매체는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 높은 윤리적 기준과 공적 역할이 요구되었다.소셜네트워크의 명과 암하지만 소셜네트워크의 등장은 이러한 구분을 통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소통 방식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전통적인 소통 방식을 무너뜨리는 미디어 혁명을 일으켰다. 예컨대 2010년에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은, 대중 매체가 그 공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을 때, 개인이 소셜네트워크 상에서 일인 미디어가 되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과 동시에 사적 통신 수단 역할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랍의 봄’은 정치적 혁명과 동시에 네트워크 혁명이었다. 소셜네트워크 혁명은 긍정적인 면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 전통적인 소통 방식의 해체로 일어난 부정적인 결과도 있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첫 번째 결과는 대중매체와 레거시 미디어의 공적인 역할이 해체되고, 언론이 개인과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진실에 대한 전달과 비판 역할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결과는 오히려 사적인 의사 표현에 공적인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어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약화되고 자기 검열이 강화되었다. 공적 미디어는 대중에 영합하여 진실을 왜곡하고, 개인은 개인의 의견을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의 출현과 발전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이 불분명하게 되는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재발견하게 하였고 사적인 영역에서의 공적 책임감을 확대시키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의 이면에서는 사실과 진실의 기준을 낮추고 기대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이 강화되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것은 공적 영역의 축소를 의미했으며, 결국 서로 다른 의견를 제시하고 사실과 논리를 통해서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만을 강화하고 대결하는 정체성의 대결 정치를 강화하였다. 소셜네트워크 탈출 현상 위와 같은 이유로 현재 젊은 층은 소셜네트워크를 탈출하여 자신의 의견을 더욱 강화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소규모 단위의 대화방과 모임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는 인터넷 가상공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거의 반수가 소셜미디어를 떠나고 있으며(40% > 28%), 텔레그램과 같은 메신저 내의 대화방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작년 갤럽 조사(2023년 11월 16일)에 따르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이용자는 30퍼센트 중반이지만 모바일 메신저 이용자는 93퍼센트로 압도적으로 높다. 이제는 전화나 편지와 같이 사적인 매체에 가까운 메신저가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메신저가 현대인의 의사소통에서 핵심 수단이 된 이유는, 단순히 문자 기능을 넘어서, 개인이나 작은 공동체의 생각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대화방’ 때문이다. 메신저 대화방의 최대 장점은 대화의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메신저 대화방은 사적 매체가 지닌 거짓 소문의 진앙지가 될 수 있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긍정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적절한 범위의 사회관계망을 형성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현재 소셜네트워크는 각각의 극단적인 생각을 강화하거나 상품을 선전하는 일종의 광고판 역할로 변질되어 있다. 일부 영향력 있는 사람과 단체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개인은 소비자일 뿐이다. 소셜네트워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온라인 광고판이 되어 버렸다.자유와 안전, 인정현재 일어나고 있는 소셜네트워크의 약화와 메신저 앱이 강화되고 있는 현상은 인간의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욕구들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와 안전에 대한 욕구이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욕구이다. 안전하게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셜네트워크는 현대인에게 늑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목장과 같은 위험한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누구든 끼어들어 DM(Direct Message)을 보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답글을 달고, 원하지 않는 광고를 봐야 하는 위험하고 불편한 공간이 소셜네트워크인 것이다. 또한 개인의 의견에 과도한 공적 의무를 부과하고 혐오적 대응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인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열린 공간이 아니라, 안전한 문과 벽이 있는 집과 같은 곳을 원하게 되었다. 메신저 앱은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메신저 앱은 자신이 남긴 글들이 60초 안에 사라지고, 지정한 사람들만 볼 수 있으며, 추적이 불가능한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여기에 더해 메신저 앱은 인간의 인정 욕구의 복고풍을 소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셜네트워크의 성공은 개인이 불특정 다수에게서 받은 ‘좋아요’의 숫자를 통해 인정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는 절대다수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추측을 만들어내었다.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억측인 것이다. 인정 욕구의 무제한은 미움과 증오의 무제한이기도 하다는 것이 소셜네트워크의 ‘좋아요’의 함정이다. 언제나 ‘좋아요’를 누르는 분자의 수보다 누르지 않는 분모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분모의 수가 제한적이고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소규모 공동체와 메신저 앱의 대화방은 소셜네트워크에 비해서는 ‘좋아요’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 할지라도 가성비에 있어서 더 큰 만족과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다. 현대 젊은이들은 메신저 앱의 대화방을 통해 소수의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자신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했던 과거 마을 공동체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진리 없는 자유, 안전, 인정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진실의 측면에서 보면 결코 환영할 만한 현상이 아니다. The Economist는 네트워크가 엔터테인먼트로 전환된 이후에 인터넷 이용자들이 보는 내용의 3퍼센트만이 뉴스이며, 젊은이들의 거의 절반이 소셜미디어와 메신저를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다고 통계를 인용하면서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비교적 자유롭고 안전한 메신저 앱으로 이동한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진실과 사실의 측면에서 본다면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현대인은 자유와 안전, 인정이라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디지털 유목민처럼 이런저런 미디어를 찾아 배회하고 있으며, 그 결과 진리의 영역은 더욱 축소되고 회의적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진리 안에서 자유와 안전, 인정의 욕구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환상이 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 앱과 같은 현대인의 의사소통 수단의 변화와 가상 세계를 통한 소통의 강화는 진리를 희생하면서라도 자유와 안전과 인정을 얻으려는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 없는 자유와 안전과 인정은 과연 진짜 자유와 안전과 인정일까? 끝으로 페이스북이 처음 나왔을 때 팀 체스터는 페이스북과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나타내며, 보여준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준다. 성경은 진짜 페이스북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궁극적인 인스턴트 메시지이다. 교회는 진정한 소셜 네트워크이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지식의 빛을 보는 장소이다.복음은 이렇게 주장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기초 없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빙산의 어름 잔해처럼 곧 녹아 없어질 자유와 안전, 인정(‘좋아요’)의 세계 속에서 교회와 성도는 영원히 녹지 않고 떠다니지 않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진리의 소식인 복음이 현대인의 진정한 소셜네트워크와 메신저가 될 날이 오길 기도한다.
김은득의 ‘카이퍼 통신’
by 김은득
2024-03-03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카이퍼 통신 3 직장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카이퍼 통신 4 미국형 칼빈주의를 극복하라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카이퍼 통신 6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카이퍼 통신 7 영역 주권의 역사적 배경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카이퍼 통신 9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카이퍼 통신 10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참여와 초청의 예배, 그리고 음악
by 서나영
2024-02-05
우리는 각자 다른 음악에 감동한다. 그래서 ‘어떤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예배를 준비하는 수뇌부가 거쳐야 하는 유격 훈련과도 같다. 예배학 저서에서 볼 수 있는 ‘예배 전쟁’(Worship War)이라는 용어는 현장에 나와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때로 예배음악 수업 전에 임하는 나의 태도는 전장에 나가는 채비를 갖추곤 한다. 교회마다의 사정도 비슷하다. 담임목사와 음악목사의 갈등, 찬양팀과 장로님의 갈등, 지휘자와 예배팀의 갈등 등, 그들의 뒷 여담은 꽤나 흥미롭다. 이 전쟁은 예배를 준비하는 최전방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휴전과 침공이 끝나지 않는다.마르틴 루터는 1544년 개신교 예배를 위해 최초로 지어진 교회의 봉헌 예배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시간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조지 플로로브스키도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했다. 후에 수많은 예배신학자들의 매혹적인 정의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정의를 어렵지 않게 읊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할렐루야로 ‘송축’하는 자세, 즉,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예배라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문제는 ‘참여’라는 단어는 그 본래 의미를 한없이 축소가능한 단어라는 것이다. 나는 강의 현장에서 실제로 수업 내용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출석을 놓치지 않는 학생들을 줄곧 봐왔다. 수업에 관심이 없지만 출석으로 학점을 따고 졸업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참여한 것이 아니다. 수업을 주도하는 교수자는 이런 종류의 인격모독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한다.이와 마찬가지로 주일 예배시간에 참여는 하지만, 몸만 와서 앉아 자신의 죄를 가리는 은신처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 도피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배 장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든 파렴치한 삶의 유다 백성의 예배(렘 7:22)는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치부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그들은 평일에는 강탈을 일삼다가 일말의 양심을 털어낼 때와 장소로 안식일과 성전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범행을 피해 은신의 방법이 더 세밀해지고 다양해진 듯하다. 개신교에서 알맞다고 정해 놓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맞춰 예배를 선포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축도까지의 시간을 마치면 복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다. 마치 출석의 의무를 끝내 안도하는 학생들처럼, 어딘가에서 보고 계실 하나님 앞에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 개인의 입맛에 맞는 음악, 눈을 즐겁게 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적당한 조명이면 좋은 예배였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신박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몰랐던 것을 깨닫거나 삶과 일에 적용할 유용한 통찰력을 얻으면 은혜로운 설교였다고 고백한다. 긴장한 마음이 풀어지고 위로를 얻었으면 성령충만한 예배였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인지 여부는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체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이 일은 너무도 교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깨어 있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체가 된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자리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는 것이 자신이 될 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찬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묘한 뒤바뀜의 결과는 끔찍하다. 아무리 하나님을 의식하는 점유율이 높아도 보좌의 주인이 자신인 이상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이 아니다. 이것은 냉철한 진실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이 가장 중요해진 오늘, 사회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문인들을 고용한다.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는 자신의 전문분야 안에서 일어나는 예외사항과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슬픈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통제권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내 감정을 위로하는 찬양에는 은혜 받았다고 매일 듣지만, 내 행동을 교정하려는 오래된 신앙교육적 찬송가 가사에는 음악과 가사가 촌스럽다며 부르질 않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부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인이 부르던 찬송 문헌으로 남겨지기 직전이다.예배의 임무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예배의 음악에 있어 통제권을 갖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예배음악을 논하고 싶은 자들은 평생에 단 한 번의 예배도 느슨한 선택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임해야 한다. 예배에 사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들어왔다. (대개 질문자들은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시험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배학 책을 수십 권을 읽어도 음악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 기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 지문만큼 각기 다 다른 미학을 지닌 곡들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성경에 나온 찬양 용어와 내용을 다 파악하고 외운다 해서 좋은 예배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와 좋은 교회음악 대학원을 졸업한다 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성경 전체를 밤낮으로 즐겨 읽으며 묵상하고, 매일 기도하며, 예수님의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주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평생에 걸친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온전한 예배자로 서겠다는 갈망함이다.온전한 예배자는 두 단어를 목에 걸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첫 번째는 ‘초청’이라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최근 한 젊은 과학도가 주일 회중예배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말했다.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 회중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서든 명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예배신학의 인용과 설명은 모두 회중예배의 필요성과 유익성을 설명해 주시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당위성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이다. 회중예배 순서 속에 만들어진 형식의 강요가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도 뒤따랐다.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교회예배의 모든 것이 설명 불분명하다고 교회와 예배를 떠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방구석 온라인 예배를 맛본 사람들은, ‘사실은 예배의식이 그저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발적인 참여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초청에 응하여 참여하는 인격적인 관계에 행복해하시는, 그 파격적인 선물에 관해서 말이다. 예배에 관해서도, 예술에 관해서도,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진리들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신비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청하는 자유로운 초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과 참여를 뼈저리게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를 로보트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식을 만날 날만 기다리지만 자식을 사랑해서 강제로 앉혀다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이다. 나는 열두살 난 딸에게 때때로 시를 쓰도록 지도하지만, 한번도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방해를 받으면 진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로의 초청과도 같다. 구약의 까다로운 제사법이 종료되고 예수님이 명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뀌며, 긴 시간동안 선조들은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방법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나라가 갈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신약에 듬성듬성 나오는 성찬과 기도와 찬송, 말씀, 구제(헌금) 등의 예전적 요소를 추적할 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확한 예배의 설명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침묵하신 것일 수도 있다. 예배는 강제로 행해지는 의식이 아니라 초청에 참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온전한 예배자가 품어야 할 단어는 “참여”다. 초청자에게 화답할 때 예배자가 된다. 찬양은 주님을 경외하고 감사하고 감탄한다는 참여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성찬이 절기 의식으로 남은 오늘날, 예배 속에서 찬양 외에 우리의 감탄과 감사와 경외함을 소리칠 수 있는 예배 순서가 또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안전한 기준은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밴드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어떤 발성법으로 인도하든, 음악은 온 회중을 태워 움직일 수 있는 대형 에스칼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회중이 응답할 마땅한 내용으로,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음역대와 박자와 소리로 울려야 할 것이다. 감각의 폭발을 유도하는 행위가 주된 목적이었던 바알의 제사(왕상 18:26-29)가 되지 않게 늘 주의하고, 음악의 기쁨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며 그 관계 속에 참여할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다.예배는 하나님의 세계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 흘러 넘치게 받은 힘과 능력과 기쁨의 잔으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적시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일터과 가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사소한 언어 한마디까지도 그 거룩함 속에 잠기는 것이 예배다. 예배는 우리의 종착지인 새 땅과 새 하늘과 새 도시의 건물에서 새 삶을 살며 부를 희락의 노래를 연습을 하는 시간이다(계 21:1-4).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주인의 보좌에 앉지 말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 초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누리고,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참여하자. Soli Deo gloria!
C. S. 루이스를 얌전하게 길들인 이상한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4-01-1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는 20세기 지적 거물이었고, 그들이 무신론과 기독교 변증분야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종교, 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생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두 사람의 토론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정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서인지, 300페이지 책, 4시간짜리 PBS 시리즈, 연극, 그리고 현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아만드 니콜리가 쓴 The Question of God을 읽었고, 몇 년 전에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책과 연극 모두를 즐겼기 때문에 탁월한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을, 그리고 매튜 구드(더 크라운, 다운튼 애비)가 루이스 역을 맡은 영화의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그러나 안타깝게도, Freud’s Last Session(맷 브라운 감독, 12월 22일 개봉)은 과거에 나온 다른 형태의 가상 대화를 다룬 작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루이스 팬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홉킨스가 때때로 흥미롭게 또 대체로 좋은 연기를 펼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 루이스식보다는 프로이트식을 강조한 실존적 만가이다.표면적으로만 봐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큰 폭발성을 가진 두 가지 전혀 다른 전망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강렬함과 더불어서 최소한 루이스가 만든 토론 모임인 잉클링(Inklings)에서 있었을 법한 수사적 정력과 활력이 스며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하기만 한 꿈 장면,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의 암시, 그리고 안나 프로이트(Liv Lisa Fries가 연기)에 대한 과장된 레즈비언 서브플롯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지성인들 사이의 치열한 지적 전투의 생생한 불꽃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도리어 기이하고 차가운 톤만을 뿜고 있다. 가상 회의니콜리의 책보다는 연극에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낸 이 영화 (PG-13 등급)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었을 1939년 회의를 상상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루이스는 여든세 살이 된 프로이트가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휘감은 끔찍한 나치즘을 피해서 살고 있던 런던의 집으로 찾아간다. 죽기 불과 몇 주 전, 병든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맞이한다. 옥스퍼드 수사인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저자이자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이드는 그런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싶은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공습 사이렌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전쟁 선포 등으로 강조되지만, 영화 대부분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관이 중간중간 충돌하면서 이어지는, 들쭉날쭉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주는 장점이라면 관심 있는 시청자로 하여금 니콜리의 훌륭한 책을 보고 싶도록 자극하는 에퍼타이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서 시청자는 진정 풍부한 메인 코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독자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가진 차이점의 범위와 규모 및 본질을 영화 스크린 보다 훨씬 더 큰 화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에 흥미로운 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갈망에 관한 부분을 즐겼다.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갈망(Sehnsucht)에 생각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서로 비교했다. 나는 프로이트가 가진 커다란 불일치와 모순을 표현한 영화의 전개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는 내가 믿음과 예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논평이 루이스에게는 친숙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같은 무신론자였을 때 느꼈던 “모순의 소용돌이”를 회상한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느낀 다른 불일치와 함께, 영화 속 루이스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었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보고 내가 좌절감을 느낀 이유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말다툼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뤄진다. 악의 문제에 대해 몇 분 그리고 성경이 왜 신화가 아닌지에 대한 잠깐 언급하는 등등. 더욱이, 거의 모든 대화에서 비대칭적 역동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많은 프로이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면, 젊은 루이스는 겁에 질려 있다. 프로이드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루이스는 자신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만나는 경우에 정중하게 맞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실제 대화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프로이트가 유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도, 루이스가 그 앞에서 주저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성적 도덕에 관해 탐구되지 않은 차이점일례로, 영화에서 두 남자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다 차지해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주제이다.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프로이트는 그것이 조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섹스가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물론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어서 구약과 신약 전체 흐르는 성경의 성적 규범은, “섹스는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이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만약에 루이스가 지금 살고 있다면, 이 말은 그를 헌신적인 동성 결합을 “확언”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영화가 섹스처럼 극명한 차이와 거기에 따른 논쟁이라는 좁은 주제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니콜리의 책에는 섹스, 쾌락, 그리고 사랑에 대한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두 장(6장과 7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루이스가 욕망 및 성적 활동과 관련된 억압과 억제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랑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을 가진 프로이트와 달리 다양한 유형의 사랑(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사이의 미묘한 구별을 강조하는 루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이스와 같은 정통 그리스도인과 프로이트와 같은 유물론자 사이의 성적 도덕성에 대한 확장되고 실질적인 논쟁이 지금처럼 더 시의적절하고 더 설득력을 발휘했을 때도 없었을 테니까. 정복된 루이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만나는 루이스는 나니아의 작가로 그를 알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의 편지, 책, 시, 전시 BBC 강연 등에 등장하는 “잭”은 구드가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재치 있으며, 확신 뿐 아니라 기쁨에 가득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구드는 훌륭한 배우지만, 루이스 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비참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게 내가 영화관을 떠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가 진짜 루이스의 통찰력(루이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거나 조금 바꾼 경우에)을 대사로 전달할 때조차도, 그 모든 게 억제된 확신과 거의 숨죽임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표현될 뿐이다. 프로이트가 어떻게 세상의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며 소리칠 때, 루이스는 “쾌락이 하나님의 속삭임이라면 고통은 그의 메가폰입니다”라고 말한다(고통의 문제에서 의역).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드가 연기하는 루이스는 루이스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홉킨스가 연기한 프로이트도 중간중간 이 프로이트가 정말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가 항상 더 과장되게 말을 한다. 비록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할에 푹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섀도우랜드에서 그가 보여준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루이스와 프로이트 역할을 둘 다 연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상호 배타적인 세계관맷 브라운 감독의 요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주장이 각자의 견해에 관계없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며,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절충하면 완전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문화적 양극화 시대에서 이 영화가 차이점을 뛰어넘는 대화의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나름의 제공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나는 과학과 종교를 믿으며,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당신이 원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이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한쪽이 옳고 한쪽이 틀리기보다는 ‘대화’에 대한 강조이다. 옥스포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준 선물을 펼친다. 그건 루이스가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이다. 그리고 책 안에는 비엔나 의사가 직접 쓴 인용문이 적혀 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럼으로 사람은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오류가 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은 정반대이며 상호 배타적이다. 결코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루이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대화는 선의의 토론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 단결을 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쪽의 사고를 더 깊이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봐야할 지 고민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제: ‘Freud’s Last Session’ Tames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샬롬! 아름다운 도시여
by 서나영
2024-01-11
나는 매일 아침 도시 안 오래된 아파트숲 속 좁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이 도시는 한민족이 역사를 지나며 일군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땅이자, 기술 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문화강국의 주역을 이룬 공간이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터넷 속도로 손가락 터치 한 번에 음식과 생필품이 배달되고, 식료품은 신선함을 위해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 편리한 도시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불행과 불의 세 가지 중에 “추한 도시”를 언급했다. 그는 공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에 탄식하며 “도시의 미학”에 무관심한 세대를 불행한 세대로 보았다. 물리적 실재, 즉 이 땅과 자연과 우리의 실재 공간 속에 내재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것인데, 온전한 샬롬을 위해서는 “기쁨과 희락”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데, 그 감각은 오늘날 모던한 세련미나 최첨단 기술로부터 느껴지는 편리한 느낌이 아닌, 칼뱅이 말했던 절제된 우아함이 있던 인간 생활 방식과 장소의 아름다움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그러나 과연 이 시대는 말과 마차가 다니던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그리워하는 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와 여러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대단했다고,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현대 건축술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 건설로 인해 도시가 한껏 추해졌다고 확신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미학관에 대해 말이다.현재 몸담고 있는 도시의 추함에 대해 묵상하자면 끝이 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 홍수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반지하의 가난한 삶들, 배달의 민족이라는 훈장 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듣는 배달기사들의 불의한 사고들,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뉴스들, 믿지 못할 청년 실업률 및 자살률, 그로 인한 미혼율과 저출산 문제, 세계 최고를 찍은 노인 불행 지수와 자살률 등등,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의 아픈 자식들이다.고도로 발달된 이 도시에서 이런 추함의 현상을 미학과 연결해 본다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형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형식과 인간의 삶은 직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긴 말을 재해석하자면, 도시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거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 생활방식을 이끌고 가며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월터스토프가 말한 “도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지각할 수 있는 재료에 심겨진 가치”이며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처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도시의 샬롬을 미학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어떤 기준의 미학관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샬롬을 ‘기쁘고 행복하며 질서정연함 속에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해할 때, 내가 밟고 있는 공간의 미학을 어떻게 기준할 것인가? 그 기준을 탁월한 예술과 일치되는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둘 것인가? 이미 많은 도시가 심미적 즐거움을 위해 설치예술을 통해 환경예술, 대지예술 등등의 새로운 용어가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추함으로 인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계몽주의 이전 시대, 즉 기계화 되기 전의 자연과 친밀하고 자동차가 아닌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좁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둘 것인가?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기술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말과 나귀가 다니는 자연과 친밀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자 마자 통탄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재가 도시의 불행임을 암시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께서 그 도시를 보고 우셨다. “네게 유익한 모든 것을 오는 네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 네 원수들이 포병대를 몰고 와서 너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네 아이들을 바닥에 메어칠 것이다. 돌 하나도 그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가, 너를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네가 알아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눅 19:41-44).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도시와 연관된 공간미학의 고민은 정확히 성경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운명은 에덴동산과 같이 대자연과의 화합과 일치를 고집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꿈꾸게 되는 “새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삶이다(계 3:12, 21:10). 이는 타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새로운 기쁨의 도시에 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예루살렘 도시는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을” 뿐 아니라 벽옥으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정금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서 새 몸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백성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요한계시록 21장). 성경은 주의 백성이 마침내 아름다움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진짜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곳이 ‘샬롬의 도시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보석과 정금 때문이 아니다. 인격적 생활방식 때문만도 아니다. 샬롬의 진짜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되시고 그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뿐 아니라 찬양하고 감탄하며 경외하는 삶의 연속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역작 센터처치에서 강조하는 ‘도시 사역’에 관한 설명은, 철저하게 도시의 샬롬을 이루는 사역적 비전을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샬롬의 기준은 ‘복음’이며, 이 ‘복음’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부터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능력의 이름이며, 모든 추함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의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 되어야 하는 이름이며, 끝도 없이 아름답고 정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름이다.신이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도시에서, 하나님을 뺀 온갖 인본주의적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도시에서, 인간을 이용하고 등급을 매겨 비인격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추함을 예언한 학자들의 미학관을 답습하고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고 숨어서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가?나의 경우에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도무지 칼뱅의 주장대로 평생 시편가만을 부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편가는 음악 안의 클라이막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고양을 방지한 밋밋한 선율 위에 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다. 칼뱅이 그렇게 경계하고 금지했던 수많은 신앙고백의 찬송과 아름다운 음악들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어도 나는 이미 칼뱅의 예배음악관에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갖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칼뱅이 삶으로 말했던 미학관 이면의 진지하고 엄격했던 자세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배우고 싶다. 편리함이라는 우상, 화려함과 인기를 갈망하는 우상, 많음과 큰 것에 최고가치를 두는 온갖 우상으로부터 미혹되고 싶지 않다. 날아가는 새를 포착해 정교하게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씀 안에 진지했던 그 미학관으로 세상을 포착해 정확하게 분별해서 읽고 싶다. 그것이 팀켈러 목사가 말한 ‘문화적 상황화’의 이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최근 신도시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지인을 만나 나눈 대화 중 중요했던 주제는 다름아닌 “교회의 주차장 크기”였다. 한 대형교회가 그 신도시에 지교회를 세우며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편리한 주차장을 건설했고, 많은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려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의 이유가 단지 최고시설의 주차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교회를 정할 때 주차장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소문이 실재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 속 제사를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요 4:23) 예배하라고 새롭게 명하셨지만, 한번도 편리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시가 주는 형식 안에서 그저 도시가 추구하는 기준대로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심각성은 크다. 오늘의 도시가 섬기는 신은 힘과 권력이고, 돈과 개인의 이기적 안위이며, 화려함과 인기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말한, 땅에서 올라온 미혹하게 하는 짐승(계 13:11)과 같이 새끼양처럼 두 뿔을 가져 어린양 그리스도와 비슷한 선한 차림을 한 ‘거짓의 영’일 것이다. 미혹 당하는 자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자는 도시의 슬로건에서, ‘오직 예수’라고 외치면 무식하고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아름다운 도시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도시에 기쁨과 샬롬이 임하는 비전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도시 속에서 그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들어도 반드시 최우선으로 바꿔야 하며, 매일매일 흐트러져도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렬해야 한다.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불행이며 빈곤일 수밖에 없다”는 월터스토프의 말은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밟고 서 있는 도시 속 한 평이라도 변혁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방향은, 단지 평화와 공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예비하며 보수하는 일이다. 복음의 길을 닦는 일이다. ‘복음의 도시’를 이룩할 그날까지, 용기 내며 걷는 작은 한 걸음의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당신 안에서 책이 나오고 싶다고 꿈틀거리지 않는가?
by Trevin Wax
2024-01-03
나는 적지 않은 야심만만한 작가들로부터 자신 안에서 책이 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건 한 장(chapter) 정도이다. 그게 아니면 블로그에 올릴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책을 써야 한다고 말할 때도 있다. 누군가가 괜찮은 집필 아이디어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일 수도 있다. 글쓰기 아이디어 또는 실제 글쓰기에는 뭔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내 속에 과연 책을 낼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가졌다. 작가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때로는 출판사 모자를, 또 때로는 작가의 모자를 쓴다. 상황에 따라서 양쪽에 다 참여하기도 하고 또 둘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무슨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책으로 가능할지, 아니면 좋은 칼럼이나 에세이, 블로그 게시물로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책을 쓰고 출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시작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훌륭한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제안서는 다른 책을 읽는 데에서 시작한다.글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말이다. “작가의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데 소비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작가라면 도서관의 절반을 뒤집을 것이다.”관심 있는 주제를 충분히 읽고 나면, 책의 개요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안서에 그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충분한 콘텐츠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제안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사라진다. 어느 지점에선가 아직 내가 책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쌓은 경험과 역량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계속 읽고 계속 고민하라. 플랫폼 질문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전작이 없는 초보 작가의 책을 집어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요즘 들어서 작가들은 대체로 출판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플랫폼 구축이나 신뢰도 구축 등의 노력을 거쳐야 한다. 좋든 싫든 출판사는 수요가 많은 주제를 다루는 플랫폼을 찾기 마련이다. 이것은 초보 작가에게는 가장 낙담스러운 측면일 수 있지만, 글쓰기의 리듬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 작품을 게시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청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작가와 연결을 맺거나 다른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당신의 동기가 단지 출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 시작하라: 계속하라열망에 찬 작가 지망생들과 대화할 때, 나는 그들의 글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무슨 주제를 파고 드는지 알고 싶다. 그들 속에 과연 좋은 책을 낼 아이디어가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기사거리라도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돕고 싶다. 나는 또한 책을 쓰는 데에 필요한 체력도 알려주고 싶다. 작가 지망생이 내게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방법이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간단한 생각을 게시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으로 대답한다. 시작하기 전 첫 달을 계획하라. 일주일에 세 번 글을 쓰고 싶다면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라. 블로그의 경우 매주 2-3편의 글을 써서 첫 달에 9-12편의 게시물을 만든다. 웹사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게시물을 작성하고 일단 초안을 준비해 놓으라. 다른 사이트의 경우 장기적으로 하고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해서 최소한 15-20편의 글을 준비하라.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사람의 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이다. 대부분은 첫 달에 10-12편이 아니라 괜찮은 글 두어 편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싣는 정도이다. 종종 작가들은 큰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블로그를 작성하고 싶어 한다. 아니면 심지어 몇 달 안에 책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1-2 마일 달리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마라톤을 뛰겠다는 목표를 세운 초보 주자들처럼 일을 시작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뛰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 잘 쓰려면 먼저 못 쓴 글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글쓰기의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현실을 직시하자. 대부분의 경우에 글쓰기는 힘든 일이다. 게시물에 별 다른 반응이 없으면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요점은 청중의 반응이 아니라 훈련 내지 규율이라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어떤 습관을 들이는가이다. 요점은 입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잘못된 글도 그럴 수 있음), 기술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마라톤 뛰는 것과 같다. 여러 개의 작은 목표를 먼저 달성하지 않고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나은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 노력할수록 더 나은 작가가 될 것이다. 배움을 활용하라아무도 당신에게 글쓰기 속도를 지정할 수는 없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항상 더 나은 사람을 찾아서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쓰기 빈도 또는 길이에서 동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규격화하지 말라. 어떤 작가는 알렉산더 해밀턴(“왜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글을 쓰는가?”)과 같은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해야 한두 가지를 기여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글을 씀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작가가 되기를 갈망하는가? 내 충고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관심 갖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읽으라. (2) 당신의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도 자주 쓰라. (3) 각 장의 개요와 요약, 같은 분야의 다른 책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여 완전한 제안서를 만들라. 당신이 발견한 내용이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한번 지켜보라. 계속해서 기술을 연마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글쓰기는 학습이다. 멈추면 안 된다. 원제: Is There a Book in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화 Past Lives: 가벼운 로맨스 세상에서 발견하는...
by Brett McCracken
2023-12-21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영화로 올해 최고작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반대가 종종 권장되거나 적어도 반대하는 모습이 더 “진정성이 있다”라고 단정하는 세상에서 도덕적 자제와 자기 부인, 헌신의 고수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상쾌함을 준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로맨틱 서사를 지배해 온 예측 가능한 대본(“당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라”)을 180도 뒤집는, 매우 할리우드답지 않은 러브스토리이다. 이십사 년에 걸친 세 번의 연결영화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북미로 이주한 여성 노라(그레타 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노라의 생애 중 세 시기를 다룬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다. 노라(당시에는 나영)는 같은 반 남학생 해성과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은 로맨스의 정점에 다다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로맨스가 결실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노라의 가족이 한국을 떠나고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 장면은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한 세트의 계단을 올라가는 노라와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골목길의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는 해성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려졌다.)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뉴욕에 사는 이십 대의 극작가 지망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해성(성인 역할은 유태오가 연기)은 최근에 군 복무를 마쳤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재회하고 장거리 로맨스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상 통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연결(이건 결국 2011년경의 인터넷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먼 거리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꿈꾸는 미래에 “올인”하고 싶었던 노라는 온라인 관계를 청산한다. (해성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노라는 자꾸 한국에서의 과거에 집중하는 거 같아서 불편해 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각자의 길을 걷는다. 다시 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아서(존 마가로)라는 유대인 작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여전히 서울에서 살던 해성이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하고, 이십사 년 만에 노라를 직접 만나자,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잊혔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시점에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라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삼각관계 플롯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노라는 결혼한 미국 남자와 그녀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도 있는 한국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가 아니다. ‘이게 내 삶이야’(스포일러 주의) Past Lives를 보면서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1995년 비포 선라이즈, 2004년 비포 선셋, 2013년 비포 미드나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삶이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삶의 지점에서 해성과 노라를 만나는 것처럼, 링클레이터의 비포 영화도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세 가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을 관찰한다.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과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둘 다 별(star)이 교차하는 로맨스[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로맨스를 의미_번역 주]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가능하도록 한 것만 같다. 그러나 비포에서는 주인공이 “소울 메이트”(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혼까지 감행하더라도)의 자석 같은 매력에 빠지지만, Past Lives는 “소울 메이트”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장을 던진다. 해성이 뉴욕을 방문하고, 노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남편 아서를 안심시킨다. “이게 내 삶이야. 내가 같이 사는 사람은 당신이야.” 그리고 그녀는 덧붙인다.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해성을 향한 노라의 복잡한 감정이 진심일지라도, 또 ‘만약에 해성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면?’ 등의 물음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고 해도, 그것은 추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일 뿐 “이게 내 삶이야….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 주는 “만약에…”라는 낭만보다 현재의 삶과 약속이라는 현실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냥 낭만적이며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사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주도하는 정신은 그 반대를 외친다. 모든 선택의 여지를 열어 두고 또 모든 가능성을 즐기라고 한다. 약속은 언제라도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쓰지 결코 잉크로 쓰지 않는다. 놀랍게도 노라의 여정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저항한다. 관객이 이십사 년 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뒤에 무언가를 남겨두면 얻는 것도 있다”라는 지혜에 노라가 귀를 기울인 게 분명하다. 한국에서 살았던 노라의 ‘지나간 삶’은 실제였고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러나 뒤에 남긴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녀는 지금 손에 쥔 현실이라는 ‘얻음’에 감사하기로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식의 과거와 현재의 긴장은 친숙한 위안과 매력을 지닌 우리의 “옛 자아”와 비록 원하지만, 종종 거슬리고 불편하며 생소하기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새 자아”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익숙한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 같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후회와 고통, 향수라는 진짜 감정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다. 노라는 해성이 자신의 삶에서 가진 과거의 의미, 현재의 가치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씨름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를 뛰어난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복잡한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주인공은 단지 달콤한 로맨스를 위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을 성숙한 지혜에 복종시킨다. Past Lives는 때때로 가장 스릴 있고 낭만적인 선택이 가장 “지루한” 일이 될 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헌신하라. 그리고 신실하라. ‘인연’ 그리고 인도함을 갈망함 Past Lives는 사랑과 로맨스 이야기인 동시에 떠남과 다른 문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민이 가진 “중간” 성격에 대한 반자서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민자는 동시에 두 문화와 연결되고 두 문화로부터 함께 형성되는 느낌을 받는다. 노라에게 있어 해성과 아서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은 한국 출신과 미국이라는 미래 사이의 긴장과 유사하다. 이야기 속의 두 남자가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두 개의 “집”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을 강조한다. 인연(영어에는 딱 맞는 단어가 없다)이라는 한국어 개념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노라가 아서에게 설명하듯이 인연은 환생을 수반하는 불교적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낯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야. 왜냐하면 전생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이거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팔천 생애 동안 팔천 겹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래.”영화 제목은 환생과 인연이 만들어 냈을 수많은 ‘지나간 삶’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키며,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 노라, 해성, 그리고 아서 사이의 연결을 알리는 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노라와 해성이 브루클린의 회전목마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움직임은 아마도 서양의 선형적 시간 개념과 반대되는 순환을 중시하는 동양적 시간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노라가 실제로 환생과 인연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이 영화가 인간보다 더 큰 무언가(인연이든 신의 섭리든)가 인간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의 아름다움과 위안을 전한다고 해서 어떤 신비적인 색채를 띄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신비는 다름 아니라 만물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이다(골 1:16-17). 비록 기독교 세계관보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더 많이 반영하지만, 무언가 가치를 주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갈망을 이 영화가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삶은 더 장엄한 “계획” 안에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무작위의 충돌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갈망을 다중 우주 추세와 “정경 사건”(canon eventt) 및 “필연적 교차점”이라는 가짜 영적 개념을 포함하여 대중문화의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무엇이든, 노라는 자신이 단지 삶에서 수동적인 플레이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기로 맹세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녀가 누리고 있지 않은 “만약에 그러면 어떨까”의 삶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사는 “내가 직면한 삶”(비록 불완전하더라도)을 포용하는 바로 그 선택이다. 바로 그 선택에서 그녀는 드물고도 신선한 지혜의 모습을 제시한다. 원제: ‘Past Lives’: Mature Wisdom in an Indie Rom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 S. 루이스의 마지막 날들
by Trevin Wax
2023-12-09
C. S. 루이스는 예순다섯 생일을 며칠 앞둔 1963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비교적 일찍 죽은 그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십 년을 더 살았던 그의 형 워렌(와니)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을 잘 알았던 루이스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비극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았다.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영원한 행복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쇠약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한 루이스는 1961년 6월 신장염을 앓았고, 이로 인해 패혈증이 발생해서 그해 케임브리지 가을 학기를 쉬었다. 1962년 봄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지만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학생 중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는 전립선 수술이 불가능하고, 전립선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병원과 나는 이상한 “악순환”에 빠진 상태이다. 전기 작가 A. N. 윌슨은 루이스의 친구이자 의사인 로버트 하바드가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며, 루이스의 이른 죽음의 탓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나 다른 전기 작가들은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1950년대 내내 하바드가 권장했던 음식 제한(루이스는 한번도 장기간 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을 제외하고, 당시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루이스는 홍차를 과도하게 마셨다. 당시는 카페인 섭취와 고혈압 사이의 상관관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전립선 비대 치료법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일부 보고서를 통해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3년 여름루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다가오는 죽음을 볼 만큼 현명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현명하지는 않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1963년 여름, 루이스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6월 17일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의지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메리 윌리스에게 썼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죽을 때 우리는 후회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가 뒤에 놓고 떠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편지에 “끝나가는 여행에 피곤을 느끼는 여행자”라고 서명했다. 그달 말에 루이스는 메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당신을 이 지구에서 인내심을 갖고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해 봐. 정원사가 정한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저기 진짜 세상에서, 진짜 깨어나서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곳에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는 여기 생활은 아마도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고 반쯤 조는 상태로 보일 거야.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꿈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데 닭까마귀가 오고 있어. 그날은 이제 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어. 루이스의 건강은 여름 동안 더 악화되었다. 그의 신장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수혈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투석 치료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피로와 집중력 저하에 놀란 그는 7월 15일 다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판단에, 그는 죽기 전 신자에게 행하는 종부성사를 받았다.하지만 루이스는 그날 오후 2시에 깨어났고,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때때로 오락가락했지만, 그는 천천히 회복했다. 무어 부인의 딸이자 그의 친구 패디의 여동생인 모린 블레이크가 병원에 있는 루이스를 방문했다. 루이스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잘 알았고, 그녀는 한동안 루이스의 집(Kilns)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모린이 스코틀랜드 Caithness에 있는 Hempriggs의 Baron Dunbar의 George Cospatrick Duff-Sutherland-Dunbar 경의 재산을 상속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모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온 모린이 “잭, 나 모린이에요”라고 말하자, 루이스는 “아니지요. Hempriggs가의 Lady Dunbar가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모린이 말했다. “아니, 잭,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요?”그러나 루이스가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기억하다니? 어떻게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다시 집으로퇴원한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 사용이 금지된 그는 침실과 서재로부터 차단되었다. 거실에 침대가 설치되었고, 루이스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남자 간호사가 육 주 동안 집에서 같이 살았다. 다시 가르치는 건 루이스에게 벅찬 일이었다. 결국 그는 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 사직서를 냈다. 평생 친구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9월에 쓴 편지에서 그는 형의 부재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형은 나를 완전히 버렸어. 아마도 어디선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을 “병자”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아주 편안하고 쾌활하다”라고도 썼다.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끝난다. “아서, 오 내 친구야,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구나!”여름이 가을로 바뀌면서 루이스는 이런저런 편지에서 자신을 “사화산이기는 하지만 나름 여전히 활발한 상태”라고 묘사하곤 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문턱을 넘지 않고 되돌아온 그였다. 그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그 경험을 언제가 자신이 두 번 죽어야 했던 원형 순교자 (protomartyr)라고 묘사했던 나사로의 경험과 연결 지었다. 당시 루이스의 서신을 살펴보면, 그는 끊임없이 “명랑하고” “자족한” 상태를 선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나빠진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상했다.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 이렇게 썼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훈련한 대로 거짓말하는 의사, 거짓말하는 간호사, 거짓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든 인간이 값비싼 요양원에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질병으로 인해 모든 죄(indulgence)가 다 사해진다는 믿음을 주입하고, 거기에 행여라도 사제가 진실을 말해서 환자가 자기의 진짜 상태를 알아채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일꾼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만 해준다면, 우리 일이 얼마나 편해질까?” 그러나 루이스에게는 그런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죽음을 직면했다.와니는 10월에 돌아왔고, 동생의 삶에 남은 마지막 몇 주를 책임졌다. 종종 친구들이 방문했고, 또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달 어느 시원하고 화창한 날, 친구 조지 세이어가 가을빛으로 물든 너도밤나무를 보여 주겠다며, 루이스를 런던 로드 자락에 있는 비콘 힐로 데리고 갔다. 루이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올해에 누릴 마지막 정취 속에 빠져든(soak) 거 같아.” ‘soak’는 시골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며 창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기쁨을 표현할 때 그가 쓰는 단어였다.대기실로서의 집지상 생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루이스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나는 정원 산책보다 더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라고 썼다),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개인 도서관을 다시 방문했다. 10월 29일에는 “내가 과연 다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조금 전 일리아드를 다시 읽었는데,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다음 주에 그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 테니슨의 ‘In Memoriam’을 다시 읽었다.집은 루이스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쉼을 누리는 조용한 피난처이자 대기실이 되었다. 10월 31일에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동정녀 탄생,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속죄 이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르는 몇 주 동안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나중에 팀 켈러가 아내가 된) 젊은 캐씨 크리스티에게는 일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보냈다. 마지막 주루이스의 생애 마지막 주는 조용했다. 11월 15일에는 Lamb and Flag(Eagle and Child 길 건너편에 있는 펍)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Roger Lancelyn Green은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루이스의 집을 찾았다. 루이스는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그의 마지막 에세이가 될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원고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이 글은 무엇보다 ‘성적인 행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사회를 향한 놀랍도록 예지력 있는 분석이다. 그 주 후반에 방문한 J.R.R. 톨킨과 그의 아들 존은 루이스의 건강 이야기 대신 토마스 말로리(Thomas Malory)가 쓴 ‘아서왕의 죽음’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1월 18일 마지막으로 Lamb and Flag에 간 루이스는 콜린 하디를 만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루이스는 집에 머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형과의 시간을 즐겼다. 와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바퀴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원을 이루었다.” 어머니를 잃은 고통스러운 슬픔을 겪으며 형제들끼리 서로 의지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한 번 더 우리는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는 우리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대신 알 수 없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 학기가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은 용감하고 침착하게 새로운 시작을 직면했다. “형,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고, 이제는 떠날 준비가 되었어.” 어느 날 저녁 동생이 내게 말했다.11월 21일, 그는 한 어린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편지를 썼다. 그 아이의 편지를 “놀랍게도 좋은 편지”라고 칭찬함과 동시에 나니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데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더불어서 재판에서 발견한 오타를 알려주겠다는 데에도 고맙다고 썼다. 11월 22일1963년 11월 22일 금요일은 정해진 루틴 그대로 흘러갔다. 루이스와 형은 아침 식사를 즐겼고, 후원자들에게 몇 통의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매일 나오는 십자말 풀이를 했다.점심 식사 후 루이스가 의자에서 잠이 들었고, 와니는 침대가 더 편할 거라고 말했다. 거실 건너편 “음악실”은 루이스가 더 이상 위층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침실로 바뀌었다. 오후 4시, 루이스에게 차를 가져다준 와니의 눈에 루이스는 졸려보였지만, 한편 편안해 보였다. 5시 30분에 와니는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발견한 건 침대 옆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루이스였다. “약 3-4분 후에 루이스가 숨을 거두었다”라고 와니는 썼다.그날 오후 루이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 즉 텍사스 달라스에서 발생한 존 F.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가려졌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 이상한 세 죽음의 합류는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가 쓴,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변하는 세 남자가 천국 외곽에서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담은 C. S. 루이스 천국에 가다의 배경이 되었다.죽음을 앞둔 루이스가 남긴 유산1963년 11월 26일, 루이스의 장례식이 그가 가장 자주 참석했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교회 마당에 묻혔다. 십 년 후 와니는 동생 옆에 함께 묻혔다.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이야기꾼 루이스의 마지막 몇 달은 그가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소망,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생의 약속에 대한 가슴 아픈 그림을 보여 준다. 마치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쪽배를 타고 파도 위로 향하는 리피칩이 그랬듯이, 루이스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 때문에 슬퍼하면서.” 그러는 동시에 “행복에 떨면서.” 그의 시와 산문에 생기를 불어넣은, 위로할 수 없는 그리움의 찌름과 같은 기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조용하게 보낸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육체의 고통을 인내와 뛰어난 유머로 이겨냈다. 그는 이 세상이 단지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막에 불과하며 신성한 사랑의 깊은 마법으로 가득 찬 새롭고 경이로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원제: The Last Days of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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