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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C. S. 루이스를 얌전하게 길들인 이상한 영화
by Brett McCracken2024-01-1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는 20세기 지적 거물이었고, 그들이 무신론과 기독교 변증분야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종교, 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생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두 사람의 토론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정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서인지, 300페이지 책, 4시간짜리 PBS 시리즈, 연극, 그리고 현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아만드 니콜리가 쓴 The Question of God을 읽었고, 몇 년 전에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책과 연극 모두를 즐겼기 때문에 탁월한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을, 그리고 매튜 구드(더 크라운, 다운튼 애비)가 루이스 역을 맡은 영화의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Freud’s Last Session(맷 브라운 감독, 12월 22일 개봉)은 과거에 나온 다른 형태의 가상 대화를 다룬 작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루이스 팬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홉킨스가 때때로 흥미롭게 또 대체로 좋은 연기를 펼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 루이스식보다는 프로이트식을 강조한 실존적 만가이다.


표면적으로만 봐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큰 폭발성을 가진 두 가지 전혀 다른 전망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강렬함과 더불어서 최소한 루이스가 만든 토론 모임인 잉클링(Inklings)에서 있었을 법한 수사적 정력과 활력이 스며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하기만 한 꿈 장면,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의 암시, 그리고 안나 프로이트(Liv Lisa Fries가 연기)에 대한 과장된 레즈비언 서브플롯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지성인들 사이의 치열한 지적 전투의 생생한 불꽃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도리어 기이하고 차가운 톤만을 뿜고 있다. 


가상 회의


니콜리의 책보다는 연극에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낸 이 영화 (PG-13 등급)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었을 1939년 회의를 상상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루이스는 여든세 살이 된 프로이트가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휘감은 끔찍한 나치즘을 피해서 살고 있던 런던의 집으로 찾아간다. 


죽기 불과 몇 주 전, 병든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맞이한다. 옥스퍼드 수사인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저자이자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이드는 그런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싶은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공습 사이렌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전쟁 선포 등으로 강조되지만, 영화 대부분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관이 중간중간 충돌하면서 이어지는, 들쭉날쭉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주는 장점이라면 관심 있는 시청자로 하여금 니콜리의 훌륭한 책을 보고 싶도록 자극하는 에퍼타이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서 시청자는 진정 풍부한 메인 코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독자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가진 차이점의 범위와 규모 및 본질을 영화 스크린 보다 훨씬 더 큰 화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에 흥미로운 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갈망에 관한 부분을 즐겼다.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갈망(Sehnsucht)에 생각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서로 비교했다. 나는 프로이트가 가진 커다란 불일치와 모순을 표현한 영화의 전개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는 내가 믿음과 예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논평이 루이스에게는 친숙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같은 무신론자였을 때 느꼈던 “모순의 소용돌이”를 회상한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느낀 다른 불일치와 함께, 영화 속 루이스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었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보고 내가 좌절감을 느낀 이유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말다툼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뤄진다. 악의 문제에 대해 몇 분 그리고 성경이 왜 신화가 아닌지에 대한 잠깐 언급하는 등등. 


더욱이, 거의 모든 대화에서 비대칭적 역동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많은 프로이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면, 젊은 루이스는 겁에 질려 있다. 프로이드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루이스는 자신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만나는 경우에 정중하게 맞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실제 대화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프로이트가 유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도, 루이스가 그 앞에서 주저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성적 도덕에 관해 탐구되지 않은 차이점


일례로, 영화에서 두 남자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다 차지해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주제이다.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프로이트는 그것이 조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섹스가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물론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어서 구약과 신약 전체 흐르는 성경의 성적 규범은, “섹스는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이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만약에 루이스가 지금 살고 있다면, 이 말은 그를 헌신적인 동성 결합을 “확언”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영화가 섹스처럼 극명한 차이와 거기에 따른 논쟁이라는 좁은 주제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니콜리의 책에는 섹스, 쾌락, 그리고 사랑에 대한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두 장(6장과 7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루이스가 욕망 및 성적 활동과 관련된 억압과 억제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랑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을 가진 프로이트와 달리 다양한 유형의 사랑(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사이의 미묘한 구별을 강조하는 루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이스와 같은 정통 그리스도인과 프로이트와 같은 유물론자 사이의 성적 도덕성에 대한 확장되고 실질적인 논쟁이 지금처럼 더 시의적절하고 더 설득력을 발휘했을 때도 없었을 테니까. 


정복된 루이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만나는 루이스는 나니아의 작가로 그를 알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의 편지, 책, 시, 전시 BBC 강연 등에 등장하는 “잭”은 구드가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재치 있으며, 확신 뿐 아니라 기쁨에 가득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구드는 훌륭한 배우지만, 루이스 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비참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게 내가 영화관을 떠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가 진짜 루이스의 통찰력(루이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거나 조금 바꾼 경우에)을 대사로 전달할 때조차도, 그 모든 게 억제된 확신과 거의 숨죽임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표현될 뿐이다. 프로이트가 어떻게 세상의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며 소리칠 때, 루이스는 “쾌락이 하나님의 속삭임이라면 고통은 그의 메가폰입니다”라고 말한다(고통의 문제에서 의역).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드가 연기하는 루이스는 루이스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홉킨스가 연기한 프로이트도 중간중간 이 프로이트가 정말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가 항상 더 과장되게 말을 한다. 비록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할에 푹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섀도우랜드에서 그가 보여준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루이스와 프로이트 역할을 둘 다 연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상호 배타적인 세계관


맷 브라운 감독의 요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주장이 각자의 견해에 관계없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며,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절충하면 완전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문화적 양극화 시대에서 이 영화가 차이점을 뛰어넘는 대화의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


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나름의 제공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나는 과학과 종교를 믿으며,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당신이 원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이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한쪽이 옳고 한쪽이 틀리기보다는 ‘대화’에 대한 강조이다. 옥스포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준 선물을 펼친다. 그건 루이스가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이다. 그리고 책 안에는 비엔나 의사가 직접 쓴 인용문이 적혀 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럼으로 사람은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오류가 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은 정반대이며 상호 배타적이다. 결코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루이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대화는 선의의 토론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 단결을 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쪽의 사고를 더 깊이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봐야할 지 고민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제: ‘Freud’s Last Session’ Tames C. S. Lewi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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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