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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여, 쉼 없이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갈망하라
by Trevin Wax
2024-03-26
몇 주 전, 나는 The Keller Center 설교 섹션에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서리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모서리를 찾는 것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 본문 속 전제, 태도 및 적용이 우리가 세상에서 “상식”으로 간주되는 요소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본문이 세상적 또는 삶의 사고방식과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 탐구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길고 종종 지루한 설교에 안주하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모서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타협의 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인의 유익이라는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여라도 이런 접근 방식이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하는 것보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의미일까?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건 아닐까? “구도자에게 민감”해지도록 성경의 거친 부분을 깎아내거나, 설교를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 설교자로서의 신념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함부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신약성경에도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목회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제쳐두고,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치 또는 사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결집하려 하거나, 복음과는 동떨어진 조언이나 제공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설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설교의 목적이 인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얕고 피상적으로만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견고하고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 리는 없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의 심각성이 어조에 잘 반영되도록 열정을 담아 전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주석가의 영원한 관심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유창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On Christian Doctrine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애정의 표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 또는 반드시 다양한 담론이 듣는 이들이 짜증 내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 동경하거나 회피하게 하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발명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존 카바디니는 그의 글 “The Sweetness of the Word”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요 목표는 단지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건전한 가르침”을 제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르침이 “지혜”롭거나 “건전”한 경우라면, 거기에 유창함이 더해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설득이 목표가 아니라면 연설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다. 몸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 접시가 절반만 찬 식사, 쓴맛 때문에 환자가 삼킬 수 없는 약 등등, 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달콤하게 말하고, 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건전하게 말한다. … 그러나 치유의 힘이 있는 달콤함, 혹은 달콤한 치유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맛을 더욱 간절하게 갈구할수록, 치유의 힘은 더 쉽게 발휘된다. 유창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는 교만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교인들이 “저 설교자 참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고 진리와 더욱 사랑에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이 흥미로울 것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 목사로 섬겼다. 2021년부터는 두 번이나 임시 목회직을 맡아 주간 메시지를 전했고, 또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나 콘퍼런스, 대학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어디에서 설교하든 내 목표의 하나는 설교가 시종일관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게 힘들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설교가 쉼 없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딴짓하는 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잘한다는 건 아니다. 이 목표가 쉽지 않기에 나는 되도록 설교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삼십 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거 같지만(물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삼십오 분을 넘기면 아주 힘들어진다. 설교 길이에 관해서 물었을 때, 한 설교학 교수가 말했다. “정해진 길이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교하세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설교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실제보다 교인의 집중력을 십오분 정도 더 오래 잡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의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출처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피드백 없이 발전은 힘들다. 교인들이 당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이 과연 교인들의 주의력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기에 설교 내용과 전달은 중요하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썼다.설교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설교 중간에 회중에게 임한 이상한 침묵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기침하던 사람이 기침을 멈추며, 산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눈도 또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듣고 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대상은 더 이상 앞에 선 설교자가 아니다. 어느새 설교자는 잊히고, 교인들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팀 켈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설교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통찰로 가득 차야 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설교에 펜과 메모지를 다 제쳐두고 우리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외에 차서 멍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다면, 결국에는 실패한 설교이다.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설교를 듣는 것은 강의 듣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에게 집중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다시금 주목하자.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설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설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영광을 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설교를 하자.원제: Preachers, Aspire to Be Relentlessly Interes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당신의 설교에 ‘모서리’가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3-19
THE KELLER CENTER 설교는 위대한 소명이다. 우리는 열린 성경을 들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 서서 성령의 능력으로 권면한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말씀을 연다.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는 이 거룩한 책임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메시지와 성경의 메시지가 일치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주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거룩함의 성장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이다.우리는 약을 조제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완화하고 그들의 영적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올바른 성분을 혼합하는 약사이다. 우리는 또한 경건한 삶을 위해 사람들을 훈련하고, 그들의 영적 근육이 강해지고 체력이 증가하도록 위로하고 도전하며, 그래서 그들이 믿음의 경주를 더욱 효과적으로 달리도록 격려하는 체육관 코치이다. 모서리 실종여기에 모든 설교자가 직면하는 도전이 있다. 청중의 주의를 끌고 사로잡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관심사와 제대로 연결하지 못할 때,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효율성은 감소한다. 성경적이지만 얼마든지 지루할 수 있다.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에서도 성경 본문은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다. 식사는 분명히 푸짐했지만, 너무 밋밋해서 손님들이 음식을 반 이상 남긴 채로 자리를 뜬다. 우리가 조제하는 약에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꼭 필요한 핵심 성분이 부족할 수 있다. 항상 쓰는 근육만 단련시키는 영적 훈련에 사람들은 당신의 메시지에 흥미를 잃고 들뜨기는커녕 오히려 지쳐 버린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나는 좋은 설교의 몇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르다. 없을 때는 당장 눈에 띄지만, 있을 때는 그 즉시 설교를 짜릿하게 만드는 그것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 나는 그것을 예리한 “모서리”(edge)라고 부른다. 좋은 설교자라면 이 경쟁력을 놓치는 법이 없다. 설교를 준비할 때 꼭 자문하라. 지금 내가 본문으로 삼은 성경 구절, 즉 거기에 담긴 전제, 태도, 적용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을 어떻게 거스르는가? 이 본문이 세상의 사고방식 또는 삶의 방식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지점은 어디인가? 성경 본문과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를 확보하라. 세상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건 전혀 다르다. 그 모서리가 분명해질 때까지 설교 준비를 마치지 말라. 바로 그 모서리가 당신이 준비하는 음식의 맛을 내는 양념이다. 바로 그 모서리가 당신이 조제하는 약을 만병통치약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게 훈련받는 사람의 모든 근육을 사용하게 한다. 교인이 휴대폰을 보는 대신 설교에 집중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설교는 반드시 반문화적인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하라. 성경은 단지 세상의 문화에만 반대할 뿐 아니라 우리가 교회 속으로 당연하게 갖고 들어가는 세상의 가정들(assumptions)에도 반대한다. 현대의 사고방식이 성경과 일치하는 부분,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부분을 보여줄 때, 성경 강해라는 드라마가 극적으로 고조된다. 단지 성경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왜 중요한지를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설교를 듣는 성도를 어떻게 세상에서 구분되게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례 하나몇 년 전, 나는 Cedarville University의 예배당에서 주기도문을 가지고 두 번 설교했다. 첫 설교의 초안은 나쁘지 않았다. 개요는 본문과 잘 연결되어 있었다. 설교 원고는 확고한 성경 주석을 바탕으로 신학적으로 건전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원고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뤄야 할 모든 기초가 담겨 있었지만, 리허설을 하는 내가 지루한데 그 설교를 들을 학생들이 몰입할 거라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더 많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무엇이 빠졌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묻지 않았다. “모서리가 무엇이지?” 설교 메시지에 틀린 건 없었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짓과 충돌하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일단 모서리를 찾기 시작하자 설교가 바뀌어 갔다. 나는 주기도문의 모든 구절을 다시 살펴보며 원래의 의미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더욱 예리한 적용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지금 이 구절은 어떻게 세상의 상식 또는 교회의 현재 관행에 어긋나는가?• 아버지께 기도한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개인주의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한다는 사실이 하늘과 땅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와 땅과 하늘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자기 이름이 영광 받는 것을 삶의 목적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과 자립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등모서리 탐색이 설교를 향상시켰고, 설교 이후에 몇몇 학생들은 내 설교가 그들의 기도, 특히 주기도문 암송에 미친 영향을 놓고 내게 연락하기도 했다. 문화적 서사 드러내기모서리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은 오늘날 서구의 지배적인 문화적 서사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팀 켈러의 작업이 필수적이다. 설교에 관한 책에서 그는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다섯 가지 믿음 또는 스토리를 설명한다. (1) 인간 합리성, (2) 역사, (3) 사회, (4) 도덕성, 그리고 (5) 정체성. • 합리성: 자연계가 유일한 실재이라는 관점은 오늘날의 기술 문화의 기초를 형성하며, 객관적이고 분리된 인간 이성(사회학, 심리학, 기술, 과학)만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 역사: 세계 사건을 과학, 기술, 심지어 삶의 도덕적 영역까지 진보를 향한 전개로 보는 관점으로 조상들의 미련하고 퇴행적인 견해와는 달리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더 낫다고 가정한다. • 사회: 우리 사회 질서의 목적이 어느 한 집단의 이익을 증진하거나 가치와 미덕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는 견해이다. 다만 이 자유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한 해방이 아니라,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 도덕성 또는 정의: 인권과 정의를 위한 노력은 하나님의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창조한 도덕적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 정체성: 정체성은 외부(의무 또는 공동의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외부 제약에 반대하여 나 자신을 찾고 표현하는 내부에서 기인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서사를 식별하는 것은 성경과 사회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선인 모서리를 더 잘 찾는 데 도움을 준다. 주의 사항모서리를 찾는 이유가 세상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켈러는 복음에 흠뻑 젖은 설교가 교인들에게 “전투라기보다는 탈옥”처럼 느껴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문화적 서술의 허위를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지금 아예 실행 불가능한 약속을 남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진단된 모서리 이후에 제시되는 약은 안도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모서리를 찾는 것이 “우리 대 그들”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치 성경이 교회 밖의 모든 사람을 대적하고, 그 결과 교인들은 독선이 주는 안도감을 느껴도 된다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문화적 내러티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구 또는 이웃과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산다. 예를 들어, 켈러가 언급한 정체성 서술에는 표현적 개인주의, 즉 삶의 목적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고 표현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있다. 이것은 단지 저기 딴 세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복음이 필요한 것처럼 (불신자는 구원을 위해, 신자는 성화를 위해)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모서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세상 철학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또한 모서리를 찾는다는 것은 모든 설교가 다 동일한 세상적 관점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를 주도하는 것은 문화가 아닌 언제나 본문이다. 모든 설교가 언제나 한두 가지 동일한 문화적 서사에 반대하는 틀에 박힌다면, 교인들은 더 이상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상식이나 현재의 교회 관행을 역행하는, 성경의 다양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매주 설교 준비에서 반박해야 할 현대 사상과 실천 분야를 단 한두 가지 식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 공부와 더불어서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주석 연구까지 수행해야 할 것이다. 특효약은 없다그렇다고 모서리 탐구가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설교를 위한 유일한 기술은 아니다. 성경적 충실성, 탄탄한 구조, 꾸준한 속도, 좋은 일러스트레이션, 목소리의 다양성과 같은 다른 많은 요소가 다 중요하다. 그러나 모서리 탐구는 오늘날 우리 세계와 성경의 필요한 만남을 촉진함으로써 설교를 향상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할 때 회중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영은 말씀을 마음에 적용하는 분이시다. 우리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성령은 하늘의 음식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성령은 하늘의 약을 내려주신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동안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모서리를 탐구한다. 그리고 그분이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의 검을 휘두르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원제: Find the Edge in Your Preach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스펄전, 그는 사실 청소년 목회자였다
by Will Standridge
2024-03-15
스펄전이 청소년 사역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청소년 목사였다. 그가 목회한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학생 사역이 없었다. 하지만 스펄전은 그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품고 자주 글을 썼으며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의 중요성과 실용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스펄전은 십대 시절에 회심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는 글과 설교에서 일관되게 다음 세대를 고려했다. 목회자라면, 맡은 부서에 상관 없이 청소년 사역에서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를 스펄전에게서 배워야 한다. 부모의 책임스펄전은 자녀의 신앙 형성에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그는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녀에게 구주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는 또한 단지 예의에만 신경 쓰고, 복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겉만 번지르르한 신앙”을 경고했다.스펄전은 부모에게 신명기 6장의 명령을 수행하라고 말했다. 자녀 양육의 최전선에 지속해서 복음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거나 도덕적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죄와 중생의 필요성에 관한 솔직한 대화가 있어야 했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자녀에게 너는 타고난 본성이 선하니까 발전만 좀 하면 된다는 식의 망상에 가까운 헛소리로 아첨하지 마십시오. 복음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세요. 행여라도 자신이 죄가 없다는 식의 환상에 아이가 빠지는 일이 없도록 아이에게 그의 죄를 보여주십시오.”스펄전은 부모의 역할에 대한 지침을 교회의 젊은이에게까지 확대했다. 그들이 부모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경건한 모범의 가치를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영이 지혜로운 자의 입을 통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진리의 종교가 모범을 보이는 부모를 통해서 전해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젊은이를 훈련하라는 부름을 받은 목회자젊은이의 영적인 삶을 양육하는 데서 부모의 주된 역할을 강조했던 스펄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목회자의 책임을 무시한 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목회자가 청소년의 제자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훌륭한 교인조차도 이 사역을 맡기에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다른 사역이 있다고 해도, 청소년 사역이라는 거룩한 소명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스펄전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로운 그리스도인과 어린아이의 영적 양육을 우선시하라는 부르심으로 해석했다. 그는 목회자가 특히 젊은 성도에게 세심하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다. 이런 목회적 사명은 단지 신입 목회자를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누구나 중심으로 삼아야 할 과제이다. 청소년 목회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스펄전은 단순한 오락을 피하고 청소년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데 필요한 지도와 멘토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목회자에게 다음 세대를 향한 가장 큰 격려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젊은 신자의 초기 신앙 여정과 관련해서 의구심을 갖지 말라고 했다. 의심이나 회의 없는 영성을 키움으로써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에 엄청난 축복을 가져올 수 있다.아이를 교리로 훈련하라스펄전에게 차세대 사역 환경의 목적은 어린아이를 단지 “질서 있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단순한 교리에 그치지 않고, 분명하고 확신에 찬 복음 교리의 학습을 우선시했다. 그에게 모든 교리는 다 어린이의 영적 발달에 필수적이었다. “왜 더 수준 높은 교리, 즉 은혜의 교리를 그들로부터 멀리해야 합니까? 진정으로 회심한 어린이에게, 단지 그가 어린이라서 너무 어려운 교리가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어린이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교리에 대해서 교사가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청소년 사역이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강의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교리를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작업의 주요 부분이 될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린 그의 심장은 교리적 명료성에 대한 사랑으로 고동쳤고, 그리고 그 열정은 젊은이를 향한 설교로 이어졌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교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활력을 불어넣는지 … 은혜의 교리를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사탄은 곧 당신에 대한 공격을 포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화살도 뚫을 수 없는 판금 갑옷과 같기 때문입니다.재미가 중요하고 교육이 뒷전으로 밀린 미국 교회는 스펄전의 가르침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부모의 의도, 목회적 돌봄, 청소년의 건전한 교리 교육을 방해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어린 양”을 먹일 때 학생들은 주님에 대한 지식과 열심에서 자랄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 사역자의 모델사역이 분명하게 구분된 시대에는 내가 맡은 교인만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스펄전은 목회자라면 모든 교인을 다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방위에 걸친 스펄전의 목양과 교리 교육은 우리에게 훌륭한 역사적 모델이 된다. 모든 지역 교회 목사와 장로는 자신이 돌보는 청소년을 (다른 사람이 목회할) 내일의 교회가 아니라 오늘 내가 목회하는 교회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를 목양하는 데 그치지 말고 자녀를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과 동역해야 한다. 그렇기에 설교는 단지 어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향한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회 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에 직접 뛰어들기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만 한다. 격려가 필요한 십대, 어려움을 겪는 십대, 교리 교육을 받는 새 신자 어린이, 그리고 신앙 간증이 가능한 성숙한 청소년을 찾아라. 그들에게 성경의 깊은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말라. 당신이 씨름하는 수준 높은 신학 개념을 절실히 듣고 싶어 하는 5세, 10세, 그리고 15세 어린이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놓고 고민하라. 그리고 당신의 교회에 전임 청소년 목사라는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를 전폭 지원하고 성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하라. 젊은이를 돌보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펄전의 지침을 따르자. 당신의 사역 타이틀에 ‘청년’이라는 단어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목사라면 맡은 부서와 관계없이 교회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청소년이 포함되어 있다. 원제: Spurgeon the Forgotten Youth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모를 그만두고 싶을 때
by Glenna Marshall
2024-03-14
작은 시골 교회 목회를 위해 다른 주로 떠날 때, 우리 부부를 파송한 목사는 우리가 앞으로 사역지에서 겪게 될 고통을 잘 이겨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당시 나는 그가 왜 그런 기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는 우리가 어떤 고통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 목사 부부에게 교회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런 기도를 한 걸까?그건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만일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과거의 내게 충고할 수 있다면, 목사에게 지역 교회보다 더 큰 슬픔을 가져다주는 곳은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역 중에 겪는 모든 고통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덧붙일 것이다. 아군이 쏠 때 가장 아프다사역이 십 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다. 목회는 힘들었고 삶의 다른 부분으로 도무지 풀 수 없는 정서적, 영적인 부담이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교회에서 친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다. 교회에 충성하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떠났다.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거의 언제나 인신공격으로 이어졌고, 남편에 대한 사람들의 안 좋은 이야기는 어김없이 내 귀에 들어왔다. 각종 댓글과 불만이 나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느낀 고통은 잔혹했다. 목회라는 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알고 나는 놀랐다. 교회가 하나의 가족이다 보니 형제와 자매가 입히는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혼란을 겪던 초기에 안식년 중인 한 선교사가 우리집에 머물렀고, 우리는 그에게 당시 겪던 어려움을 일부 나누었다. “아군이 쏘는 총이 가장 큰 상처를 줍니다.” 그가 말했다. 자신도 선교지에서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교회 내에서나 다른 선교사가 일으키는 문제만큼 상처를 주는 것은 없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이 복음으로 연합하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서로 화목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형제 우애”(롬 12:10)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맞서면 하나님이 이루신 화해가 무너질 위험에 처한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사랑을 느껴야 할 곳이 가장 무서운 곳으로 바뀔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일이 내게 닥쳤다. 교회가 나에게 두려운 곳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떠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슨 방법을 찾아서라도 나도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신약 전체에 걸쳐서 신랑으로 불리는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그분은 교회를 아버지 앞에 순수하고 흠 없는 신부로 올려드릴 것이다(엡 5:27). 교회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기 위해서 바울은 결혼을 비유로 사용했다. 그분은 교회를 새롭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바치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죄로 인해 교회에서도 서로간의 관계가 손상될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음의 성화와 인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교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히 10:25). 애초에 서로 관계 없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로 모으시고 각각에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사랑의 선물이 교회이다. 교회는 우리를 성화시키고, 가르치고, 훈련하고, 또 격려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바울은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살전 5:14)라고 썼다. 그리스도의 몸은 방황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하고, 가난한 자들을 공급하고, 모든 사람을 가르친다. 요한은 신자에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순종을 실천하라고 거듭 촉구하며 그런 사랑이야말로 그들을 세상과 구별한다고 여러 번 지적했다(요 13:35; 요일 4:20-21; 5:1).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선의를 전제하고, 서로를 은혜로 인도하며, 어려움 겪는 사람을 참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순종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교회는 상처를 주지만 또한 치유한다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회는 10년의 혼란을 극복하고 치유의 과정에 들어갔다.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복음연합 여성 대회에 참석했다. 나는 ‘교회 상처’를 다루는 소그룹에 등록했고, 재키 힐 페리(Jackie Hill Perry)의 “하나님은 교회를 사용하여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눈물을 흘렸다. 내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바로 그 교회에서 치유가 가능할까? 나는 믿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하라고 부르신 그 몸을 사랑하겠다는 새로운 열정을 갖고 교회로 돌아갔다. 교회 가족이 더 가까워지고 다시 서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오늘까지 변함없는 깊은 우정을 하나씩 시험적으로 만들어 갔다. 우리 부부는 곧 우리 교회 모든 가족과 함께 19주년을 축하할 예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선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증언하는 산 증인이다. 그분은 사역 중에 고난을 받도록 우리를 부르실 수도 있고, 우리에게 신실한 인내를 가르치기 위한 교훈을 갖고 계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모은 게 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가족을 사랑하는 기쁨은 슬픔보다 훨씬 크다. 우리가 항상 옳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우리를 아버지 앞에 순결하고 흠 없이 세우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만은 언제라도 굳게 붙잡을 수 있다.원제: When the Pastor’s Wife Wants to Qu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물인터넷 시대의 목회
by 전재훈
2024-03-04
나는 식물에 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다. 화분을 선물 받으면 100퍼센트 죽게 된다. 그래서 교회 안에 식물은 이미테이션만 존재한다. 꽃꽂이도 싫어한다. 무엇인가가 내게로 와서 죽어가는 것이 너무 싫다.시대는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꽃의 정보를 내가 알아보고 관리해야 했지만, 이제는 일방 소통의 시대가 종식됐다. 꽃을 파는 사람이 꽃에 대한 정보를 화분에 팻말 형태로 전달한다. 꽃 주인의 배려로 꽃의 이름과 물 주는 시기, 관리 방법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이 시대는 스마트한 시대이다. 화분에 팻말이 아닌 태그가 붙어있고 거기에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꽃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는 스마트링크 기능을 통해 스케줄화 시킬 수 있으며, 알람 기능을 통해 물 주는 시기와 흙갈이 시기를 통보받을 수 있게 된다. 시기를 놓쳐 식물을 말려 죽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더욱 광범위한 소통의 시대가 된다. 즉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다자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화분에 심어둔 센서가 꽃의 특성에 따라 흙의 상태를 파악해 주인에게 알려주게 된다. 물이 필요한지, 비료가 필요한지 즉각적인 안내를 해 준다. 가끔 교회에서 물을 이중으로 주어 꽃을 죽게 만드는 일 따위는 없어진다.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 화분 온도는 어떤지, 앞으로는 화분이 내게 말을 거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물인터넷 시대의 다자간 소통은 화분이 스프링클러에게 대화하고, 전기스토브에게 말을 걸게 된다. 스프링클러는 화분의 요구에 따라 물을 정확하게 줄 것이고, 전기스토브는 온도를 조절해 줄 것이다. 나는 화분의 꽃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물인터넷 시대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상용화되어 있어서 비닐하우스 농장에서는 현재 사용 중이다. 예전처럼 일일이 하우스마다 들어가 온도를 체크하고 습도를 조절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심어 두고, 때가 되어 거두기만 하면 된다. 꽃에 말을 거는 친구들을 4차원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있다. 나 역시 사물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사물의 인격화 놀이를 많이 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사물과 대화하는 날이 오고, 사물 간에 소통하는 일이 생겨난다. 밤이 되면 장난감들이 상자에서 나와 서로 놀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상자 속으로 숨어 버리는 상상이 더 이상 상상만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신학적인 생각 속에는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믿음과,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믿음까지 있었다. 자연은 우리가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은혜를 받고 나면 자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고 찬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상은 모든 사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사물인터넷 세상이 온다면 자연 숭배 사상이나 범신론 같은 것은 더 이상 그 의미를 발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어 다자간 소통이 일어나면 신의 능력보다 과학의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하게 될 것이고, 영적 영감보다는 객관적 데이터를 가진 빅데이터가 그 빛을 더 크게 발휘하게 된다. 이럴 때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은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과학을 생각하게 되고, 기도에 의지하기보다 정보에 의지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이는 분명 신학의 큰 도전이 될 것이고, 시대에 맞게 신학을 재정립해야 할 때를 맞게 될 것이다. 분명 과학의 발달은 인류를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쓸데없이 고민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고, 천형 같았던 많은 질병도 극복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과학에 의지해 살아갈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고, 이런 현실들을 직시하여 목회를 다시 점검해 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사물인터넷 시대가 되면 교회의 현장에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해도 당일 출석수를 예배 중에 실시간으로 인지하게 될 것이고, 주차장의 효율성을 높이게 될 것이며,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는 등 아주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과 목회를 미리 정립하지 않으면 과학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절약하듯 교인 수도 절약하게 될지도 모른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by 최창국
2024-02-28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는 어떻게 실행돼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설교자에게뿐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연설 형식의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형 교회에서는 연설식 설교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소수의 성도가 예배하는 상황에서도 연설식 설교만을 지향하는 설교자나 목회자가 많다. 이는 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문화에서 연유한 측면도 있다. 설교는 원래 일방적 연설식 설교 방식이 아니라 대화가 있는 설교, 호밀리아(homilia)였다. 따라서 설교와 관련된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여러 의미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첫째, 설교를 지칭하는 최초의 용어는 호밀리아이다. 이 단어는 ‘서로서로 이야기하다’라는 뜻을 가진 호밀리엔(homilein)에서 파생된 명사로 2세기경 폴리캅(Polycarp)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신에서 처음 발견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회중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지칭하는 전문어’로 형식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강론하는 강론식 설교(homily)에 해당한다. 호밀리아로서 설교는 주로 교훈의 말씀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의 발현으로 인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설교와 관련된 또 하나의 용어는 프래디카치오(praedicatio)이다. 이 용어는 4세기에 이르러 라틴어가 예배의 공식 언어로 확정되면서 호밀리아가 락탄티우스(Lactantius)에 의해 프래디카치오라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용어는 ‘공적으로 알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때부터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회중 설교를 지칭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영어권에서 설교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는 프리칭(preaching)은 ‘프래디카치오’로부터 연유되었다. 셋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설교와 관련해 등장한 용어가 세르모(sermo)이다. 이 용어로부터 파생된 설교가 오늘날 주로 행해지고 있는 연설식 설교(sermon)이다. 연설식 설교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 예배 참여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보다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중세에 이르러서는 연설식 설교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행해지기보다는 설교자의 관심과 회중의 흥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주제 설교가 주로 행해졌다. 넷째, 종교개혁 시기에 이르러 설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종교개혁자들의 말씀 이해에 근거해 새롭게 제시되었는데, 바로 콘치오(contio)이다. 이 용어는 예배에서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와 관계된다. 콘치오 형태의 설교는 예배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중세 교회의 공 예배에서 성찬 예식에 비해 이차적인 위치에 있었던 말씀 예전이 다시 중요한 위치를 되찾게 되었고, 설교자들의 관심과 회중을 만족시키는 데로 흘러갔던 설교를 다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 행해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다섯째, 설교의 내용과 관련하여 신약성경에 나오는 단어로는 케리그마(kerygma)를 들 수 있다(롬 10:17; 16:25; 고전 2:4; 골 3:16). 복음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설교의 가장 근본적 그리고 원형적 개념으로 예수의 생애, 고난, 죽음, 부활로 인해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 부활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여섯째, 케리그마와 함께 선포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는 단어가 디다케(didacke)이다. 이 단어는 케리그마와 함께 예수의 마지막 분부를 포괄하는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중적인 것으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는 것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이다. 디다케는 회당적 의미에서의 교육(마 4:23), 선교(행 4:2), 기독교 교리의 요약(딤후 4:3)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용어는 설교가 추상적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차원이어야 함을 내포한다. 일곱째, 설교와 관련하여 또 다른 용어는 세례받은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말씀을 지칭하는 파라칼레오(parakaleo, 고후 5:20)이다. 이 용어는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삶의 실천과 관련한 의지와 행동으로서 ‘권고’(롬 12:1)와 신앙의 토대로서의 확신을 근거한 ‘위로’의 의미가 있다(고전 1:6). 설교는 말씀을 통한 위로의 성격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의미 있게 논의되고 있고 상담 설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행할 필요가 있다.물론 케리그마와 디다케와 파라칼레오는 기독교 초기에 설교가 어떤 내용을 주된 메시지로 취급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용어들은 설교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보다는 설교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용어들을 통해 설교의 주된 방향과 기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기독교 역사에서 광의적인 차원에서 설교는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와 연설식 설교가 주로 행해져 왔다. 따라서 두 유형의 설교의 목적과 구조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 중요하다. 이 두 설교 유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연설식 설교와 대화식 설교 또는 강론식 설교의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나누는 데 있다. 둘째는 하지만 설교 실행의 구조적 차원에서 차이가 있다. 연설식 설교는 좀 더 구조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강론식 설교는 비형식적이고 대화적일 수 있다. 셋째는 연설식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거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강론식 설교는 성경 텍스트를 설명하거나 대화를 통해 해석하는 데 있다. 강론식 설교는 대화를 통한 말씀 이해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강론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토론 또는 대화를 통해 어떤 주제나 내용을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강론식 설교란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일방적으로 전하며 연설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형식의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조셉 피츠너는 설교를 “기독교적 삶에 관한 대화”로 설명하면서, 설교와 대화를 서로 연결하였다. 헬라어 호밀리아(homila)에서 파생한 호밀리(homily)는 ‘익숙한 대화’(familiar conversation)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과 같은 대화이다(Joseph Fichtner, To Stand and Speak for Christ: A Theology of Preaching, 124).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진행되는 대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누가복음 24:14에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나눈 대화와 사도행전 24:26에서 바울과 벨릭스 총독 사이의 대화를 사례로 든다. 설교를 대화로 보는 사람들은 이 두 사례에 근거하여 호밀리아는 때로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연설이나 강의보다는 대화에 더 가깝다고 이해한다. 그러한 대화의 목적은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거나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이전에 갖고 있던 지식이나 태도를 더욱 명백히 나타내거나 강화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설교자와 회중은 하나님 앞에서 함께 신자로서의 공통의 정체성을 공유한다.조지 스웽크는 대화식 설교는 1세기 유대인들의 설교로부터 그 역사적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유대인들의 설교에는 회중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고, 질문과 웃음, 돌연적인 비평과 다른 여러 형태의 개입이 가능했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신약성경에 기록된 설교는 마치 논쟁과 비슷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누가복음과 특별히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설교의 대화적 패턴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결론한다. “기독교 설교가 시작되는 첫 단계에서부터 설교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활동으로 여겨졌었다. 당시 설교는 그 자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업무였다”(George W. Swank, Dialogic Style in Preaching, 23, 46-49).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의 대화로 이해한다는 의미는 설교자와 회중의 연대감, 즉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그리고 만인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분별하고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설교를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이해한다고 해서 예배 중에 설교자뿐 아니라 예배 참가자들이 모두 다 말하거나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좌담 설교(dialogue sermon)나 상호 대화 설교(interactive sermon)는 대화 설교를 위한 한 가지 방식일 수 있지만, 대화 설교가 좌담 설교 같은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대화 설교는 설교자가 신앙과 삶의 문제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회중과 동등한 동료의 관점에서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지속적인 대화를 키워가면서 이를 반영하는 설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화 설교가 추구하는 핵심은 교회 공동체의 대화를 촉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대화 설교가 촉진하는 중심적인 대화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교회와 그 안의 여러 구성원 간의 대화,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상호 대화, 그리고 설교자와 회중과 하나님 삼자 간의 대화이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연구해 설교문을 작성하여 일방적으로 회중에게 연설식 설교로 마치는 것은 바람직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설교의 원래 의미와 방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설교는 원래 대화를 통한 복음 이해와 나눔 성격이 강하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회중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로 이끌지 못한 설교는 진정한 설교라고 할 수 없다. 헤셀은 설교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인식했다. “기도하기 위해 설교하라.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하라. 참된 설교를 판별하는 것(test)은 그 설교가 기도로 전향되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Abraham J. Heschel, Man's Quest for God: Studies in Prayer and Symbolism, 80).설교자는 연설식 설교 시간을 5-10분 정도 줄이고, 설교 후에 전한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자와 회중이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해야 한다. 메시지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설교를 들은 후에 다양하게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주중에 목장이나 구역별로 모여 들은 메시지를 함께 나누며 기도할 수 있다. 목장별 설교 적용 기도 실천을 위해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을 질문이나 내용 요약 형식으로 작성하여 주보에 게재하여 예배 전에 성도들에게 나누어 준다. 성도들이 설교 시간에 주보에 있는 질문이나 내용에 따라 설교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 한 후에 집으로 가지고 가서 설교 본문과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인이 실천한 후에 목장이나 구역 소그룹에서 함께 나누며 기도할 때 신앙 체험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공략할 상대는 무관심의 문화이다
by Glenn Wishnew
2024-02-27
책 이름에 교회 이탈(dechurching)이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어조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갖고 있는 소망은 지난 25년 동안 교회를 떠난 4천만 명 중 대다수(51%)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낙관론에서 비롯한다. 그 51퍼센트는 나름 참작할 만한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일상적” 이탈자로 볼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22퍼센트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했기 때문에 떠났고, 16퍼센트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리고 15퍼센트는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출석이라는 습관”을 벗어던진 경우이다. 결국 종합할 때, 한때 신앙에 헌신했던 복음주의 교인의 53퍼센트가 평범한 이유로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하지만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를 꿈꾸게 하는 소망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평생 자유주의 주류 교회의 교인이었던 딘 켈리는 1973년에 발간한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는가)에서 보수 교회가 사람들에게 “고차원적 (large-scale)”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수준의 의미는 삶을 인도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도록 한다. 보수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고통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주의를 부끄럽게 생각한 주류 교회는 진짜 위로를 제공하는 핵심 교리(부활 등)를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권고로 대체했다. 켈리에 따르면 이것은 운명적인 변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도덕적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메시지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품과 함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켈리가 발견한 사실은 단순하다. 종교 공동체의 회복력은 그 공동체 외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우주적 목적”에 따라 살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켈리의 통찰력과 탈기독교시대 교회를 결합할 때, 지금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생각 없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경우, 그건 자신들의 삶을 인도할 대안이 되는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우리 시대 영적 질병: 무관심우체 아니조르(Uche Anizor)는 Overcoming Apathy(무관심 극복하기)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에는 미지근하다”라고 주장한다. 무관심이 반드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황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니조르는 수도승인 존 캐시안(John Cassian)의 말을 인용하여 무관심은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불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무관심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조르는 시트콤 Seinfeld를 사례로 든다. 아니조르 역시 90년대 시트콤의 팬이었지만, 이 시트콤은 “크고 의미 있는 일(예: 결혼, 가족, 종교, 사회적 관심, 심지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무관심과 삶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예: 좋은 주차 공간,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주는 성가심, 오락기에서 높은 점수 받기)에 집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은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인필드 사회의 시민이다.” 사인필드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이다. 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상을 더 우선시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는 우리는 조만간 그 차이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켈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무관심한 문화가 양산하는 시민은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행 축구, 골프, 오락기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전능하신 주님은 이제 부차적인 주제로 전락한다. 영적 무관심이 교회를 침범하는 지금, 교회 지도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제자도 실천이 과연 주변에 만연한 무의미함이라는 독소로부터 성도들을 제대로 예방하고 있는가이다. 수백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치료제: 예배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잔소리가 아니다. 데이비스와 그레이엄의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는 가톨릭이나 주류 교회의 교회 이탈 교인들에 비해서 정통 교리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의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에게 부족한 건 교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즉, 무관심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게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초기 목회 시절 버지니아 시골에서 상담했던 한 어린 소녀에 관해서 들려준다. 그녀는 영적으로 퍽 우울한 상태였는데, 켈러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즉 어떻게 그녀를 용서하셨고, 당신의 피로 그녀를 사셨으며, 또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증하셨는지 일깨워 줌으로써 그녀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목사님, 그거 다 알아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거, 다 압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애가 하나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요?” 켈러는 그녀의 영적 곤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주는 관심 또는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격려였고, 더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자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하는 원천이었다.”그 소녀에게 부족한 것은 복음이 그녀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고 있는 신앙 교리를 마음의 갈망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 예배, 주중 소그룹, 매일의 묵상 등 다양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회복하려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정문”을 여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뒷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초점을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에게 맞춰야 한다. 기독교를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주류 교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이탈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관심 문화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대응적 실천을 오히려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서 더 큰 만족을 맛볼 것이다. 복음만이 제공하는 고차원적 의미만이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왕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원제: Why Discipleship Must Target Apat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4-02-2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반대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문제 제기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의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에서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성경 본문의 주제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특정 본문에서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저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설교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동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본문을 갈보리와 십자가상의 속죄와 연결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단순히 속죄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레이다누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하나님의 옛 언약 약속들의 성취로 선포했으며, 또한 성령님을 통한 이 예수님의 오늘날의 임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2]즉,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란 단순히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연결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사 전 영역을 포함한 설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정의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는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저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이 아니다.[3]클라우니는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더 큰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 드러나면,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초청할 수도 있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를 싱클레어 퍼거슨의 표현을 빌린다면,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며 그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이라는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면 복음이 아닌 종교적 설교, 윤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선행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선행이기에 모든 순종과 선행은 칭의라는 은혜가 동기로 작용한다.결국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쉬운 적용은 “칭의가 성화로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설교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고 하면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열심은 은혜의 만족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그것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의 열심의 동기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은혜와 만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이 열심의 동력이 되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게으름은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열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미도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서 늘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십니까? 요한복음 13:1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게으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열심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잠언 6:6이 포함된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위험하지 않아도 내면의 동기만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온갖 구실로 작아 보이는 일탈을 삼다가 빈궁이 닥쳐오면 깜짝 놀란다. … 이런 삶은 예수님의 삶과 크게 대비가 된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일하지 않아 사라져버린 부분은 없는가? 우리는 일할 때도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4]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은 성경의 본문에서 무조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런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스펄전이 한 웨일즈의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설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다”고 하자, 그 설교자는 “글쎄요. 성경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것을 설교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그러자 스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사랑하는 형제여, 자네의 직무는 본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로 통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말하고 곧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거대한 대도시, 즉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달리면서 설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5]스펄전은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연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도 이렇게 조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미하게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덤벼서는 안 된다. 라합이 창문에 걸어 둔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연상될 수는 있지만(수 2:18)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그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길을 가리키고, 바로 그 길을 여행하라”[6]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는 팀 켈러의 표현처럼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1.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p.29.2. 같은 책, p.32. 3. 에드먼드 클라우니,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30.4.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p.28.5.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95. 6. 같은 책, p.96.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2-22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연구한 마이클 그레이엄과 짐 데이비스의 유익한 책,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를 계기로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교회 이탈(dechurching)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최근에 있었다. 여기에는 떠난 이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도 들어 있다. 나는 교회 이탈 현상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내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Reconstructing Faith에 그레이엄과 데이비스, 라이언 버지를 초대해서 인터뷰했다. 왜냐하면 교회 이탈은 지금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는 뜨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 이탈을 논하려면 거기에 수반된 다른 질문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왜 교회에 가는가?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 왜 교회에 가는지를 까맣게 잊곤 한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거기에 뭐가 있기에 매주 가는 걸까? 당신은 왜 교회에 가는가?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간단한 답이 없는 것처럼(The Great Dechurching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왜 다니는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다.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다양한 이유 앞에서 놀랄 것이다. 교회 지도자라면 신자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 같이 고상하고 또 강력한 신학적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자극적인 예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안다.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온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습관적 참석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The Lamp에 기고한 글에서 매튜 왈더는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미사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식료품점이나 쇼핑몰, 동네 고등학교의 풋볼 경기에 가는 것처럼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 그게 항상 하는 일이고 또 항상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교회 다니는 게 당연한 동네가 있다. 거기에서는 이웃에게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전혀 불쾌감을 일으키는 질문이 아니다. 습관적 참석자(the regulars)는 교회에 가는 게 일상이고, 그건 사회적 결속과 가족 안정을 위한 중요한 일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이런 사람은 점점 고령층이 되어간다. 여기에 해당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습관적 참석자가 누구인가? 어머니날이나 아버지날에 자녀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나 그들의 일상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와 조부모들이다. 책임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두 번째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책임자”(the Responsibles)라고 부른다. 안내자나 집사, 주일학교 교사거나 유아반 봉사자, 성가대 또는 주차 봉사 등, 가지 않으면 당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소그룹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맡은 책임 때문이다. Everybody Loves Raymond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이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성당에 가기를 꺼렸던 과거를 반성하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성당에 열심히 참석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그가 성당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건 아버지가 성당을 열심히 다닌 게 신앙 때문이 아니라 헌금 봉사와 헌금 계수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는 잡담을 좋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경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세 번째 이유는 가족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회적 혜택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존경자”(the respectables)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도덕적 본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도덕적으로 존중받는 곳,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 스미스와 에이미 아담스직이 쓴 Handing Down the Faith(신앙 전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담고 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토대’ ‘베이스’ ‘기초’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존경자는 교회 출석이 자녀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도덕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들이 선하고 도덕적이며 품위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들은 가지 않았으면서도 부모들이 굳이 십대 자녀를 교회 청소년 모임이나 교회 캠프에 보내는 이유이다. 자기네는 이미 교회가 제공하는 도덕적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추구자교회에 가는 네 번째 이유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인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매주 미국 전역의 교회에는 영적으로 갈구하지만, 아직 신앙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다. 대부분은 다른 부류에 해당하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지만, 일부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 다니거나 온라인에서 검색을 한 후 출석하기도 한다. 추구자(the reachers)는 규모가 가장 작다. 왜냐하면 교회 출석이 그들의 영적 여정에서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나중 단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확신자마지막 부류지만 의미가 있는, 굳건함과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 이들은 가장 명백하게 중생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교회 출석자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서 역사한다. 확신자(the resolute)의 열정과 헌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가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따라서 오로지 성경적인 이유만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확신자는 교회를 성경적 렌즈로 본다는 측면에서 가장 독실한 신자이다. 확신자는 신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사랑한다. 신약성경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갈구한다. 그들은 또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올바른 영성 형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교회 참석자의 대다수가 이 독실한 그룹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교인을 구상하는 건 다양한 수준의 영적 성숙도를 지닌 다섯 가지 범주의 사람들 모두이다. 또한 습관적 참석자인 동시에 책임자일 수도 있다. 교회 출석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이 교회 출석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습관적 참석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그건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동시에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자 그룹에서도 지속적인 쇠퇴를 예상할 수 있다. 교회 이탈이 계속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고립됨에 따라 해결해야 할 요구 사항과 더불어 각종 서비스와 활동까지 줄어들기에 서로를 연결하고 의무를 이행할 장소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존경자 사이에서도,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고수하다 보면 주류 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교회 출석이 초래하는 사회적 대가가 너무 높으면 상당수가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문화의 광기에 대응하여 신앙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도덕적 건전성의 원천으로 보며 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성 혁명은 필연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사상자를 낳을 것이다.추구자 중에서는 영적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 신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따뜻하게 환영하는가에,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들에게 어떤 지혜와 가이드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 확신자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변화가 계속된다면, 이 그룹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대다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세대에까지 자신들과 같은 확신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확신자가 과연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추구자를 더 많이 찾고 초대하려고 할까? 교회 리더들에게 좋은 소식이 모든 건 교회 출석과 관련한 하나의 시험적인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소개한 분류를 비판하거나 보강하려는 모든 의견을 환영한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당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처음 세 가지 범주와 더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도 긍정적인 면이 숨어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이 확신자가 되도록 인도하라.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책망하고 강권하며 참된 회심을 가져온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순종을 단순한 의무에서 기쁨으로 바꾼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자유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으로 봉사하게 한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 때,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일어서게 한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성화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이유에 관해서 점점 더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향기를 더 많이 발산할수록, “교회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다. 원제: Why Does Anyone Go to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사역 현장의 “허용된 죄들”
by Jen Oshman
2024-02-08
우리 가족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 있을 때, 우리가 있던 나라에서 죄악에 빠진 모습을 찾기란 매우 쉬웠다. 동남아시아는 거리 모퉁이마다 사원과 신사, 제물(祭物)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거짓 신을 숭배했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대낮에 버젓이 매음굴이 영업을 하고 불법 마약이 거래되었다.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운 어둠을 보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 술 취함, 성적 부도덕 등을 찬양하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이러한 노골적인 죄의 모습이야말로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큰 이유이다. 우리는 어둠을 보고 언덕 위의 도시로 출발한다(마 5:14-16).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진단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악은 너무 자주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7:3-5). 제리 브리지스는 Respectable Sins(허용된 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 속에 담긴 죄를 식별하는 건 쉽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바로 ‘믿는 자들이 짓는 허용된 죄’이다. … 사실상 우리는 전반적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내가 짓는 죄를 부인하며 살고 있다.”브리지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런데 이 진리를 평신도를 넘어 국내외 사역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정직하다면, 몇몇 “허용된 죄”에 관해서는 교회 지도자라고 해도 쉽게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죄에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는 종종 당연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 걱정한다사역에는 돈이 많이 들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자금이라는 상황은 수시로 만나는 현실이다. 재정을 둘러싼 두려움은 종종 우리를 자린고비의 사고방식으로 사역하게 만든다. 자원을 비축한다. 불안에 사로잡혀 관대함에서 멀어진다. 걱정하는 마음을 현명한 청지기의 태도라는 식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불안과 걱정이 어떻게든 재정적인 바닥은 치지 않도록 지켜줄 거라는 심정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 삶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분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마 6:25-34).2. 소유권을 주장한다 지금 다룰 허용된 죄도 자린고비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종종 흙이 건조한 곳에서 사역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척박하던 토양에서 싹이 트고 뿌리가 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열매 맺는 사역 자체가 성공했다는 증거이고, 언젠가부터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다른 교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내 사역을 더 키우려고 하고, 또 우리가 키워낸 제자들이 다른 곳에서 봉사하려는 것을 막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독려하곤 했다. “우리만 성장하는 소문자 나라(kingdom)가 아니라 대문자 하나님 나라(Kingdom)을 추구합시다. 다른 교회도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에 좌절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막 9:40).3. 떠들고 비방한다사역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게 있다. 비공개로 모일 때, 짜증을 분출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거 말이다. 지혜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같은 교회를 섬기는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다른 사역자나 교회까지 뻔뻔스럽게 비방한다. 사역 팀이라면 서로 통찰력과 정보를 공유하는 게 맞다. 하지만 때로는 선을 넘어 험담할 때도 있으면, 그럴 때면 기분이 좋다는 사실에 솔직해야 한다. 누군가 내 자녀를 욕하고 다닌다고 할 때, 화가 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욕할 때,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화를 내실지 한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35).4. 불평한다어둠에 맞서려면 편안함, 안전, 편의성, 지위 등을 희생해야 한다. 불평은 해로운 습관이 될 수 있다.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 감사가 부족한 사람, 문화에 얽힌 죄 또는 만연한 불의를 보며 한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너무 뻔한 진실처럼 들릴지 몰라도, 불평하는 사람의 진짜 마음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틀렸고 내가 더 잘 안다’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의문을 제기한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요 6:43-44).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5. 과로한다허용을 넘어서 존경까지 받을 만한 이 죄는 근면과 노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참혹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구원자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과 나의 방법에 의존할 때, 우리의 목회는 자립으로 변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깊은 안식과 성령님을 뒷전으로 미룬다. 사역으로 인한 탈진은 현실이며, 동시에 하나님만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그의 이름으로 사역하도록 파송하신 후(막 6:7-13), 그들은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예수께 고했다”(30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절)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혼자 가시는 습관이 있었다(마 14:13). 하나님은 우리를 제한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주어진 한계에 따라 섬기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허용된 죄를 회개하기이런 죄를 나열하는 건 사실 내가 스스로 내 속에 오물을 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이 모든 죄에서 유죄이다. 이런 죄는 짓기 쉽다. 가면을 쓴 이런 죄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활보한다. 그냥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존경받을 만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독과 다르지 않다. 각각의 죄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이 모든 하나하나의 죄가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동시에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상기시킨다. 복음을 맡은 자로서 우리는 숨은 죄를 회개하고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히 12:1-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로서 우리는 입의 말 그리고 모든 마음의 묵상이 그분 앞에 열납되기를 바라야 한다(시 19:14).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란다. 원제: Respectable Sins in Christian Minist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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