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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터지고 반년, 이스라엘인 목사는 고백한다. “나는 ...
by Sarah Eekhoff Zylstra·David Zadok
2024-04-12
전 이스라엘 육군 장교이자 개혁파 목사인 데이비드 자독은 그날 받은 아내의 전화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0월 7일 이른 아침에 그는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이스라엘에 있는 집을 떠나 밤새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에 도착한 지 불과 한두 시간 뒤였다. 그의 여행은 스칸디나비아 교회들과 맺은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여보, 들었어요? 전쟁이 일어났어요.” 머리가 멍해지며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그리고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를 떠올렸다. “여기 핀란드에서?”“아니요, 이스라엘이에요. 가자에서요.”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자독은 귀국 편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이 폐쇄되었다. 보통 400달러 정도 드는 베를린에서 텔아비브까지의 비행이 1,200달러로 올랐지만, 그것도 바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고, 그동안 핀란드에서 두 번 설교했다. “호세아 1장을 설교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짧은 장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발견되는 것처럼 성경의 전체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니라 심판과 구원에 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죽음과 삶에 관한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국가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랐습니다. 그건 사실상 영적인 싸움입니다.”하마스와의 전투도 영적인 싸움이라고 그는 말했다.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돈에 하마스가 만족할 리 없었다. 하마스는 여호와를 미워하고 아브라함 시대부터 그의 이름과 연관된 사람들을 멸망시키고 싶어 했다. 자독은 십 대 때 이란을 떠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예수를 믿었고,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IDF)에서 복무했다. 그런 그에게 육적인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 전쟁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복음연합은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처음 들었는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마지막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의 사역을 위한 문을 어떻게 여시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하마스와의 전쟁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는지 물었다.이스라엘에서 태어나서 이란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거지요? 우리 가족은 아마도 바빌로니아 유대인의 후손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이라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바그다드의 유대인이 살해당했고, 특히 파르후드의 밤(Farhud Night)에 집과 회당이 불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란 국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전쟁 내내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아랍 국가에서 이스라엘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는 사실상 나중에 IDF로 알려진 조직의 일원이었습니다.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이스라엘에 정착했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세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 여동생을 데리고 이란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도 없고 결혼 생활도 어려운 삼촌, 이모네에 나를 맡겼습니다. 아마도 아이가 있으면 결혼 생활이 괜찮아질 거라 여겼던 거 같아요. 그들의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내가 같이 있음으로 다행히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이모, 삼촌과 함께 이란에서 자랐습니다.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 일 년 넘게 인질이 억류되었던 거 기억합니까? 글쎄요, 우리는 이스라엘인이 미국인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영사관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삼촌 부부는 나를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거기서 신앙을 가진 건가요? 친구 하나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에서 열린 성서 연구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네비게이토가 주최하는 거였어요. 내 영어 실력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그날 내 평생 들었던 거보다 더 많이 예수의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몇 명이 창세기 3장을 나와 공유했고, 나는 그 이야기에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전에 내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오실 메시아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약성경에 오더니, 거기서 만나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거기에 관해서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요. “아니,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벌써 열일곱 살인데,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물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요한복음을 읽으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내게는 주말에 유학생을 초대하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기독교 성경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의상 받았던 겁니다. 나중에 버릴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거기에는 구약도 들어 있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거룩한 성경은 버리면 안 되니까요. 우리는 절대로 성경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이 오래되면 묘지 입구의 특별한 장소에 놓아두거나 어딘가에 묻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요한복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정도 읽었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마치 하나님께서 새로운 퍼즐을 하나씩 맞추는 거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회심했습니다.가족이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메시아를 찾았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편지로 전했습니다. 그때까지 이란에 있던 삼촌과 숙모에게 히브리어와 페르시아어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무런 답이 없었습니다. 편지가 분실된 게 아닌가 싶어서 한 번 더 썼습니다. 이번에는 답장이 왔지만, 회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다른 내용에만 답을 썼더군요. 내 믿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왜 그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몇 주 후에 삼촌이 미국에 왔습니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디저트가 나오자 삼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데이비드, 아마도 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구나. 우리 생각을 지금 솔직하게 전달하마. 네가 마약 중독자나 감옥에 갇힌 범죄자가 되었다면, 차라리 우리는 훨씬 덜 부끄러웠을 거다.”그는 나를 다시 이스라엘로 데려가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수줍음이 많았고 크게 당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냥 이렇게만 말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내가 계속 미국에 머물게 허락했고, 나는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요? 학사 학위를 받고 군 복무를 위해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나는 IDF에서 약 구 년을 복무했고, 국방부의 일급비밀 프로젝트에서 수석 엔지니어링 및 시스템 분석가로 일했습니다.삼촌과 이모는 이란을 탈출해서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자 두 분이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들이 없다. 너는 이제 우리에게 죽은 사람이다.” 나는 교회 근처의 아파트에 세를 얻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졌고요. 하지만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어요. 약 십사 년 전, 형이 뇌종양으로 죽었습니다. 나는 형이 호스피스 병동에 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병문안을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데이비드, 네 형이 왜 죽어가는지 알아?”“아니요?” “네가 예수를 믿어서 그래.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 복수를 하시고 계셔. 너 때문에 말이야.” 어머니의 말은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 삼촌, 그리고 이모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고 또 보살피기 위해서 나는 이스라엘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했습니다.그리스도와 동행한 이후 당신은 거의 처음부터 개혁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을 통틀어서 내가 속한 건 단 두 교회가 전부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다녔던 교회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였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교회는 Grace & Truth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은혜의 교리를 배운 이스라엘 그리스도인에 의해 1976년에 개척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가까운 선교사님의 추천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니까요. Grace & Truth Church in Kanot, Israel / Courtesy of David Zadok 아내와 두 번째 데이트할 때 나는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TULIP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두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처음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히브리어로 번역했습니다. Robert Godfrey가 서문을 썼습니다.당신이 번역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HaGefen 출판사에 대해서 알려주세요.로버트 맥체인(Robert M'Cheyne)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그가 이스라엘에 온 건 1839년입니다.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보고하기를 유대인을 위한 기독교 선교 단체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CWI(Christian Witness to Israel) 가 되었고, 그 단체는 1974년에 HaGefen Publishing을 시작했습니다.히브리어로 책을 내는 기독교 출판사는 전 세계에 두세 군데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나마 규모가 가장 크지만 한 해 동안 인쇄하는 책은 고작해야 8-9종이고 350부씩 정도만 인쇄합니다. 그렇지만 그 필요성은 엄청납니다. 성경 66권 중 14-15권만 히브리어 주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주석을 다 출판했습니다. 우리는 매튜 헨리 주석, 스펄전의 Checkbook of Faith, R. C. 스프로울, 그리고 존 맥아더와 폴 워셔의 책 몇 권을 출판했습니다.우리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책 제작에는 보조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 책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재고의 약 25퍼센트를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모든 프로젝트 전에는 모금이 필요합니다. 막 완료한 대규모 프로젝트 중 하나는 (무려 이십 년이 걸렸습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를 위해서 단어별로 또 구절별로 모든 구약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잠깐만요. 구약이 원래 히브리어인데, 구약을 히브리어로 번역하고 있다고요? 다윗 왕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지금 약 3000년 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언어는 발전하고 변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2000년 동안 히브리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어요. 히브리어는 사실상 19세기 후반에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에 의해서 “부활”했을 뿐입니다. 거기서 출판한 책을 누가 읽나요? 이스라엘에도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인구가 9백만이 조금 넘는 나라입니다. 신자 수는 최대한 잡을 때, 삼만 명 정도에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더 폭넓은 그리스도인 독자를 대상으로 출판합니다. 수년 동안 Grace & Truth는 유일한 개혁 교회였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개혁교회연합 (Fellowship of Reformed Churches)이라는 네트워크에 속한 교회는 아홉 개로 늘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 교회는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대규모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했거든요. 교회 중 한 곳은 북부에 있었는데 하마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피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전쟁이 다른 부분에서는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그리고 당신에게는요? 전쟁이 시작되고 첫 삼 주 동안 내 안에는 엄청난 투쟁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마스가 행한 일, 여성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아기를 오븐에 넣고, 임신한 산모의 자궁을 여는 만행을 보았습니다. 나는 우리 공군이 가자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모두를 죽여 버리길 바랐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을 이해하는 데에까지 몇 주가 걸렸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었고, 그 과정을 겪어서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원수와 대적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우리는 이스라엘에 있는 그리스도인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인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스무 가족에게 수백 달러 상당의 상품권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군인들을 위한 구명 장비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삼천 개 이상의 식료품 팩을 제공했습니다.우리 교회 성도는 백칠십 명쯤 되는데, 우리 딸을 포함해 서른다섯 명이 예비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 아들은 예비군 과정을 밟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예상보다 훨씬 일찍 지난주에 입대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지난주에 병원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군인을 심방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구하셨지만, 그는 부상을 입었고, 몇 주 동안 입원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치료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그의 부모에게 거의 만 달러를 보냈습니다.북부 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어느 에티오피아 가정의 큰아들이 전쟁에서 사망했습니다. 몇 달 전에 어머니는 신장과 간 이식을 받아야 했고, 남편은 아내를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다섯 있는데,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가서 자금을 제공할 예정입니다.10월 7일 우리 교회의 다섯 가족이 집에서 대피했습니다. 한 가족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예비군이고, 아내는 어린 자녀를 돌보고 있는데 임신 중이어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도 돕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사역을 이어가고 있나요? 내게 정말 도움이 되고, 지금도 나를 이끄는 것은 심판과 구원의 큰 그림을 보는 눈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창 50:20).나는 어떤 면에서 그 사실을 이미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 도움이 너무나 절실하기에 작은 도움이라도 큰 힘이 되는 시기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육군 고위 간부들 그리고 병원장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기부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전쟁 전에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화입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이라크에서 유대인들이 흩어지는 일, 1973년 전쟁, 이슬람 혁명, 코로나19, 심지어 이번 하마스와의 전쟁까지 세계적인 수많은 사건이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이 모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봅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다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즉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사건을 하나님께서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서 그분의 개인적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은 심판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찬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류에게 가장 끔찍한 재앙이 닥친 바로 그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슬픔, 죽음, 심판에서 구원, 갱신, 찬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삶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심판과 죽음, 그리고 부활, 무엇보다 지금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입니다.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출처: 6 Months Later, Israeli Pastor Says, ‘I’m Commanded to Love My Enemies’
글로벌과 로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복음주의 교회
by 문상철
2024-03-09
로잔 운동의 지도부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지역별, 이슈 네트워크별로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를 초청하여 공청회(listening calls)를 개최했다. 2024년에는 지역별 리더들과 함께 총 12회의 지역 간담회, 그리고 23개의 이슈 네트워크(issue networks)와 YLGen(청년 지도자 세대, Younger Leaders Generation) 네트워크로 구성된 24회의 간담회도 개최했다. 회의는 2020년 9월부터 2021년 7월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각 그룹의 리더들이 회의에서 정리한 회의록을 제공했다.회의록의 질적 데이터는 근거 이론(grounded theory)의 절차에 따라 글로벌 공청회 팀(Global Listening Team)에 의해 분석되었다. 귀납적 분석 과정은 캐시 차마즈(Kathy Charmaz)의 코딩 전략에 따라 일차 코딩(라인별 코딩), 집중 코딩 및 이론적 코딩의 3단계로 진행되었으며[1] QSR 인터네셔널사의 제품인 윈도우용 NVivo라는 QDA(질적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코딩 및 분석이 진행되었다.회의록은 경청 과정에서 사용된 5가지 질문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1)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틈(gaps) 또는 남아 있는 과제는 무엇인가?2)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가속화할 수 있는 유력한 돌파구와 혁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3)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하여 어떤 영역에서 더 큰 협업(collaboration)이 이뤄지는 것이 필요한가?4)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주제는 무엇인가?5) 경청의 과정으로 우리가 추가로 의견을 들어야 할 대상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지역 보고서 개요12개의 보고서를 한 줄씩 코딩하여 분석한 결과, 총 285개의 주제 코드가 도출되었다. 이후의 집중 코딩 및 분석은 4개 이상의 공청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56개의 코드에 대해 진행되었다.남아 있는 격차에 대한 첫 번째 질문에 나타난 주요한 주제는 ‘제자도의 필요성’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사랑과 연합’ ‘리더십의 다양성’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않는 교회’ ‘남아 있는 미전도 종족집단(UPGs)’ ‘이슬람의 팽창과 무슬림 전도의 필요성’ ‘환경 위기와 창조세계 돌봄’ ‘타문화 선교의 부족’ ‘상황화의 부족’ ‘직장 및 일터 사역의 필요’였다.돌파구와 혁신에 대한 두 번째 질문에서 분석된 지배적인 주제는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 사용’ ‘자생적 선교 운동’ ‘사역의 돌파구와 혁신’이었다.협업에 대한 세 번째 질문의 범주에 속하는 주된 주제는 ‘협력의 필요성’과 ‘플랫폼으로서의 로잔운동’이었다.추가 연구에 관한 네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이민자’ ‘사역의 사회문화적 상황’ ‘COVID-19 팬데믹이 사역에 미치는 영향’ ‘미전도 종족집단’ ‘신학의 상황화’ ‘교회 성장’ ‘교회의 협력’ ‘Z세대와 젊은 세대’ ‘리더십‘이었다.경청해야 할 추가 대상자들에 대한 다섯 번째 질문에서 중요한 주제는 ‘Z세대와 청년들’ ‘성령’ ‘현장의 사람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 ‘불신자들과 타종교의 사람들’ ‘서로’ ‘여성’ ‘학계의 목소리’ ‘현지인’ ‘정치 지도자’였다.이슈 네트워크 보고서 개요24개의 보고서를 한 줄씩 코딩하여 분석한 결과 총 247개의 주제 코드가 도출되었다. 집중 코딩 및 분석은 4개 이상의 이슈 네트워크 공청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59개 코드로 진행되었다.첫 번째 질문의 범주에서 나타난 주요한 주제는 ‘제자도의 필요성’ ‘청소년 참여’ ‘사랑, 일치, 동반자적 협력관계’ ‘새로운 외부 사역에 대한 교회의 수용’ ‘총제적 관점의 부족’이었다. ‘상황화 부족’ ‘외부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교회’ ‘사역자과 지도자 훈련’ ‘자원의 격차’ ‘현대 기술과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 ‘비전과 신뢰의 부족’ ‘미전도 종족집단(UPGs)’ ‘언어 장벽과 성경 번역’ ‘반기독교적 입법과 정치’였다.두 번째 질문에 대한 중요한 주제는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 ‘사역의 돌파구’ ‘교회의 영적 각성’ ‘교회들과 지도자들의 연합’ ‘자생적 선교 운동’ ‘새로운 지도자들의 부상’이었다.협업에 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한 주된 주제는 ‘협업의 필요성’ ‘플랫폼으로서의 로잔’ ‘정보 공유의 필요성’이었다.네 번째 질문의 범주에 속하는 중요한 주제는 ‘모범 사례 연구’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 ‘전도사역 연구’ ‘미전도 종족집단 연구’ ‘기금 마련 및 자금 조달’ ‘Z세대 및 젊은 세대에 대한 연구’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보는 사역에 대한 연구’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에 관한 연구’ ‘현재 이슈에 대한 성경적 이해에 관한 연구’ ‘신학의 상황화에 관한 연구’였다.다섯 번째 질문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는 ‘Z세대와 젊은 사람들’ ‘세계 다수의 지도자들’ ‘현장에 있는 사람들’ ‘토착민’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 ‘여성’ ‘성령’ ‘불신자와 타종교인’ ‘서로’ ‘비즈니스 리더’ ‘디아스포라와 이민자’였다.글로벌 종합 및 이론적 논증전체 그룹의 회의록에는 총 391개의 주제 코드가 나타났다. 주제 코드 중 115개는 4개 이상의 회의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10회 이상 회의에서 총 38개의 코드가 나왔고 20회 이상 회의에서 6개의 코드가 나왔다. 그 코드는 다음과 같다: ‘협업의 필요성’(36회의 회의);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술 사용’29회); ‘Z세대 및 청년 세대의 소리 듣기’27회); ‘제자도의 필요성’25회); ‘사랑, 화합, 동반자적 협업’(20회); 및 ‘사역의 돌파구’(20회). 36개의 모든 공청회에 협업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 네트워크와 이슈 네트워크 회의에서 총 102개의 집중 코드(이슈를 다루는 4개 이상의 그룹)가 나타났다.틈과 남은 기회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도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사역에 참여하는 사역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한 제자도와 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제자도와 사역 훈련의 기본 접근 방식은 사역 혁신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기독교 교육의 기본이 되는 또 다른 강조점은 사랑, 연합, 동반자적 협력 관계였다. 지도자들은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다양한 도전에 대처하는 데 있어 교파적 배경과 조직적 경계를 초월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일치에 기초한 협력적인 노력을 요청했다.복음주의 교회가 당면한 남은 과제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패러다임 전환의 측면이 증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2] 지도자들은 사역의 접근 방식에서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축적된 사역 지식을 통해 프로그램과 활동의 수행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길 원했다.돌파구와 혁신사역에서 사용되는 첨단 기술과 미디어의 유용성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새로운 기술과 미디어의 사용 덕분으로 사역의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많은 지도자들이 공감했던 것은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눈에 띄는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그 지도자들은 더욱 연합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혁신적인 지도자의 출현에서 기인할 수 있다.다양한 사역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공감한 바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의 사역에서 돌파구가 목격되고 있다. 혁신적인 과정을 지속적으로 진행하려면 젊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사역 접근 방식을 혁신하는 문제는 사역의 관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며 이것은 바로 상황화 작업의 일부이다. 창조적인 과정으로서의 혁신은 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황화를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획기적인 혁신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사역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3]협업협업의 필요성은 많은 그룹에서 길게 논의되었다. 로잔운동을 글로벌 협력을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한다는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지도자들은 로잔운동에 대해 대단한 신뢰를 표명하고 다양한 수준에서 그 역할을 더욱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정보 공유에 대한 강조는 협업을 위한 상호 노력의 기반이 되고 있기에 주목할 만하다. 사역의 협업을 위한 촉진자(faciliator)이자 플랫폼으로서 로잔운동의 역할을 설정하는 데 그런 기대감은 매우 건설적인 것으로 보인다.연구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역과 관련된 관심과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반영한 미래 연구 과제에 대해 제안했다. 연구 부족이라는 주제는 복음주의 선교계에서 취약한 영역을 드러낸다. 이 분야에서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복음주의 교회와 단체들은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해결하는 데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전반적으로 향후 연구에 대한 논의와 제언은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미래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과 더 많은 연구에 대한 요청은 인류의 상황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포함하는 선교 신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 현실적인 접근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4] 연구 결과를 세계 교회와 효과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섬김의 표현이 될 것이다.추가적인 경청의 대상은?사람들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를 넘어서는 생각이 필요하다. 성령님께 귀기울인다는 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규범이지만 많은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같은 교단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말을 듣느라 너무 분주하다. 동시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공동의 훈련으로 가능하다.[5]경청에 대한 학제간의 접근을 요구하는 제안들이 많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연구는 체계적인 경청의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경청은 연구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총제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세분화되거나 계층화된 접근 방식보다는 학제간의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결론복음주의 교회 앞에 놓인 격차와 도전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에서 다루어야 할 현재의 문제와 도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사역에 대한 전망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지 않다. 그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역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을 동원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대체로 글로벌화는 기독교 사역에서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수년 동안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글로벌화는 많은 사역의 현장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다.공청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복음주의 공동체에서는 연합에 대한 확고한 결의가 표명되었다. 지역적, 교파적, 세대적 배경의 다양성 속에서도 강력한 연합이 느껴졌다. 동시에, 다른 사역의 경계를 넘어 더 높은 수준의 사랑과 일치를 보고자 하는 강한 열망도 있었다.사역의 전략적 제휴와 사역의 혁신을 위한 특별한 결집을 위하여 2024년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4차 로잔대회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복음주의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다년간에 걸친 다중심적(polycentric) 접근은 합리적인 방식이다. 경청하려는 노력은 발전을 이루는 의미있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공청회에서 공유된 공동체적 지혜로 우리는 사역 현장에서 창의적 접근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안에서의 약속을 기억하게 된다.[6]1. Kathy Charmaz, Constructing Grounded Theory, 2nd Edition (London: SAGE, 2014). 근거이론의 초점은 귀납적인 분석의 과정의 결과로 이론을 생성하는 것이다. 차마즈의 일차코딩, 집중코딩, 이론적코딩의 개념들은 근거이론의 구성주의적 패러다임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제안들이다. 2. Larry Laudan, Progress and Its Problems: Towards a Theory of Scientific Growth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139. 또한 Larry Laudan의 다른 책들도 참고하라, Science and Relativism: Some Key Controvers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1-32; Larry Laudan, Beyond Positivism and Relativism: Theory, Method, and Evidence (Boulder, CO: Westview Press, 1996), 21-25. 3. 그러나 시장창조형 혁신(market-creating innovation)이 지속형 혁신이나 효율성 혁신 만큼 필요하다. See Bryan Mezue, Clayton Christensen, & Derek van Bever, ‘The Power of Market Creation: How Innovation Can Spur Development,’ Foreign Affairs, January/February 2015을 참고하라,https://www.foreignaffairs.com/articles/africa/2014-12-15/power-market-creation. 4. Paul Hiebert, The Gospel in Human Contexts: Anthropological Explorations for Contemporary Mission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44-53, 127. 5. 폴 히버트(Paul G. Hiebert)는 초대교회가 교리적인 선언문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기보다 하나의 신학적인 과정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예루살렘공회를 해석학적 공동체(a hermeneutical community)의 성경적 모델로 이해한다. Hiebert, P. G. (1994). Anthropological Reflections on Missiological Issues. Grand Rapids: Baker. p. 95. 6. 이 기사는 공청회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요약한 것입니다. 분석 보고서의 전체 내용은 로잔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깊이 경청하라! 세계 선교를 상상하라!
by Xiaoli Yang
2024-02-24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로잔운동의 지도부가 발표한 글로벌 공청회(global listening calls) 분석 보고서[1]를 읽고 난 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경청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경청하고 (재)상상해야 변혁적인 힘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깊은 경청과 (재)상상의 방법과 특징은 무엇인가? 삼십 년 전, 존 스토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이중 경청’의 기술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2] 하지만 그는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다각적인 변화를 이루는 기술적인 행위로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언어, 육체, 침묵의 세 가지 중요한 수단을 다루는 방법을 통하여,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은혜로 경청과 (재)상상하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함께 듣고 응답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지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계 선교(Missio Dei)에 참여할 수 있다.다문화적 지혜다양한 전통에 나타난 고대의 지혜는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보물을 제공한다. 호주 원주민 공동체들은 앉는 것, 배우는 것, 아는 것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배우고 실천해 왔다. 탄다냐(Tandanya) 국제 원주민 문화 기관에서 ‘야바라(Yabarra)-빛 속에서 꿈꾸기’라고 불리는 예술 축제에 손님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은 “당신은 우드리(Wodli)에 앉도록 초청되었고 당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해의 길을 보고 들으십시오”라고 노래했다.[3]이런 종류의 경청은 단지 지식이 아닌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앉기, 바라보기, 이해하기와 함께 완전히 구현된다. 2021년 올해의 시니어 호주인(Senior Australian)인 미리암 로즈 웅건머(Miriam-Rose Ungunmerr)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을 두드리기”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은 응강이쿠룽쿠르(Ngangikurungkurr)인데, 이는 ‘깊은 물소리’[4]를 의미한다.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내면에서 ‘깊은 샘물’이 솟아오를 때까지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다.고대 중국인들은 다섯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경청’의 총체적인 구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 ‘Ting/청’(듣다, 聽)이라는 단어의 중국어 어원은 듣기에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 듣는 귀, 보는 눈, 생각하는 사고, 느끼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주의를 위한 한 획으로 구성되는 건설적인 모델을 제공한다.[5]완전히 구현된 종류의 경청은 자신의 편견, 전제, 예상을 제쳐두고 상대를 향한 존중과 공경을 요구한다. 이해(understanding)를 얻으려면 상대방의 ‘밑에 서 있어야(stand under)’ 한다. 그러므로 경청은 겸손, 취약성, 인내의 행위이다.언어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규범적이고 권위가 있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의 상상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말씀을 읽는 고대의 방법인 신성한 독서(Lectio divina)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사색적인 접근은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를 읽게 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에 응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팬데믹의 격동,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인종 차별, 기후 변화, 그리고 경제 침체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겪은 폭풍에 비유할 수 있다(막 4:35-41; 눅 8:23-25). 우리의 상상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바람과 거친 물살 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황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 혹은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으시는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동료, 협력 단체, 선교 협력 기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등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인 우리는 듣기보다는 더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열고 듣는 것이 다른 사람들, 특히 취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며,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첫 번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토착민 선교, 상황화 선교는 우리 자신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그 지역의 땅에서 듣고 상상하는 깊은 감각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경청에 있어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은 내면의 자기 대화이다. 혼잣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자라게 한다. 뒤에서 하는 혼잣말은 우리를 자기 부인이나 강박의 유혹에 빠뜨릴 수도, 혹은 생명을 주는 길로 끌어줄 수도 있다. 우리 내면의 소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분별하며,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응답할 수 있다.육체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신성하고, 거룩하며, 그리고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사람이자 하나의 주체이다. 마치 화가에게 캔버스, 시인에게 단어처럼, 육체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존엄하게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의 진심 어린 통곡을 들으셨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셨다(눅 5:18-20; 17:11-19).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의 육체의 언어(body language)를 들으셨고,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보셨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연약한 육체를 알아보셨다(막 26:36-46). 또한, 예수님은 적대하는 자들의 육체의 언어를 들으시고, 그들 마음속의 문제를 알아보셨다(눅 5:17-26; 7:36-40).오늘날,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하며 육체적인 피로, 탈진을 자주 경험한다. 만약 그들이 신체의 중요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많은 탈진(burnout) 현상들을 초기 단계에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 사역 혹은 세계 선교에 참여할 때,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를 통해 깊은 의식이 표면으로 나오게 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험될 수 있다.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창조 전체로도 확장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성경뿐만이 아니라 나무, 꽃, 구름, 별에도 기록하신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각각의 영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 전체를 위한 것임에 대해 많은 것을 일러준다. 복음주의의 전통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중요한 계명에 큰 강조를 두는 것이 맞지만(마 28:18-20),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위대한 극장 안에 앉아서 하나님의 창조물이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둘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연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침묵많은 그리스도인이 침묵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임은 보통 소리, 말,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침묵은 매우 중요한 언어이며 사랑의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침묵이 꼭 움직임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혹은 새로운 돌파구의 탄생 전 매우 의미심장한 멈춤의 시간일 수 있다. 사무엘상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듣는 데 네 번이나 걸렸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삼상 3:1-10). 구원자의 오심을 인내하며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은, 오랜 멈춤 후에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눅 2:26; 37-3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심문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시며,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요 8:3-11). 강력한 두 번의 멈춤(6절과 8절)은 고발자들이 죄로 물든 자신들의 삶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자신들의 손가락을 거두도록 하는 침묵의 순간이 된다.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기에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질문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은 모든 우리의 고통 가운에 함께 계시며, 우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며, 극복해 나가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처럼 그분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는가? 때때로 가장 좋은 응답은 이야기, 시, 혹은 그림을 통해 모양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재)상상력이 솟아올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의 공간일지 모른다.일상속에서 성경의 날개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공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화나 건축물의 여백은 내용을 비우지 않고, 오히려 가득 채운다. 침묵의 공간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찾고 해석할 수 있도록 표면에서 그들을 향해 흐른다. 시에서 발생하는 멈춤은 우리를 친숙한 세계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이 공간이 없이 우리는 형체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침묵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집에서 발견되는 ‘셀라’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칠십인역 성서는 이 단어를 구분점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멈추다, 가늠하다, 듣다를 가리키는 묵상의 멈춤, 중단을 의미한다.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주고 받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영향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신성함,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멈춤은 우리가 메시지를 씹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침묵의 케노시스(kenosis)[6]상태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된 비어 있고 부서진 열린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는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거하는 곳이 된다(엡 4:24).결론로잔 운동의 세계적인 모임이 열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다중심적(polycentric)이고 다성적(polyvocal)인 사명 안에서 경청하고, 현명하게 분별하며, 그리고 창의적으로 (재)상상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자.거룩한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을 발달시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2024년 서울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가 육체와 침묵이라는 수단을 통해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을까?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성령의 바람이 더 강하게 불고,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들려올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되는데, 희생은 본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 ‘순교자’(martyr)라는 단어와 종종 연관된다.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는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귀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낼 때, 우리는 혼란스럽고 양극화된 세상 속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힘을 볼 수 있게 된다.1. ‘The Evangelical Church Interacting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An Executive Summary of the Analysis of Lausanne 4 Listening Calls,’ Lausanne Movement, Dec 1, 2021,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2. John R. W.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An Urgent Plea for Double Listening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2). 3. Dean Eland, ‘Eyes on the Street: See What is Around You,’ Loving the Neighourhood, August 17, 2020,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lyn.unitingchurch.org.au/2020/08/. 4. Miriam-Rose Ungunmerr, ‘Listening to Another,’ Compass Theological Review 22 (1988). 1. ‘5 Listening Insights from the Chinese Character for Listening,’ SkillPacks,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www.skillpacks.com/chinese-character-listening-5day-plan/. 6. ‘Kenosis’ meaning ‘self-emptying of Christ’. 원제: The Transformative Power of Deep Listening출처: lausanne.org
팀 켈러가 알려주는 공격적 변증법
by Ross Bowerman
2024-02-20
공격과 수비 없이 스포츠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수비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약점의 은폐라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공격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한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 변증에도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변증, 두 가지가 있다. 방어적 측면으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한다. 반대로 공격적인 변증을 통해 우리는 세상 세계관의 약점을 드러낸다. 수비에도 능했던 팀 켈러지만, 그는 동시에 공격적 변증의 이유와 방법을 가르쳤던 사람이다.공격적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기독교를 수호하는 대중 옹호자로서 켈러는 이 세상에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라도 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핵심 사항에 관해서 많은 가정을 한다. 이러한 신념은 폭로되고 조사되어야 한다. 켈러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이 가진 의심을 의심하라”이다. 사람들은 (비록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디어 시장’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켈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중 한 사람인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건 아주 작은 시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 세계관은 고작해야 물질주의, 범신론, 그리고 유신론 세 가지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격적인 변증이 될까켈러는 내용과 태도 면에서 모두 다 훌륭한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다. 콘텐츠와 관련하여 켈러는 절대적 증명이 가능한 믿음 체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믿음 체계와의 비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평가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은 세 가지 기준이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일관성의 기준)? 그 믿음이 우리의 지식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증거의 기준)? 그 믿음이 삶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생존의 기준)? 켈러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 체계가 의미, 도덕성, 진실, 정체성, 인권 등 기본이 되는 서구 문화의 가정과 욕구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성과 자원을 제대로 제공하는지 고려하라고 말했다. 믿음 체계가 성공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 체계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켈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공격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냉철한 정신, 최고의 경청 기술, 그리고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를 수행했다. ‘성찰하는 경청’의 헌신적 옹호자인 켈러는 자신의 목표가 상대의 주장을 상대방보다 더 잘 설명해서 상대방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허수아비 전략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상대의 주장이 가진 강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켈러는 상대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 다음에 켈러는 프랜시스 쉐퍼가 원조로서 선보인 전술을 사용했다. 쉐퍼는 이를 “집에서 지붕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불렀다. 쉐퍼는 청중의 믿음을 비에 노출시켰다. 달리 말해서, 그건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였다. 쉐퍼는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집은 결코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싶었다.기독교가 진리임을 원하도록 하라블레즈 파스칼로부터 켈러가 배운 점은 기독교가 참되다고 믿기 전에 먼저 그것이 참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변증에 있어서 켈러의 전략을 공격적인 전략으로 이끈 주된 원인이었다. 누구나 핵심 믿음이 필요하고 또는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탐구하고 공유하며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의 기준으로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기꺼이 현재 믿음을 의심하고 기독교를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기독교 진리가 가진 긍정적 증거를 계속해서 탐구할 것이고, 나아가서 방어적인 변증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열망까지 가질 것이다. 변증 게임에서 켈러는 열심히 그러나 공정하게 플레이했다. 그는 상대팀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수였고, 사람이 아닌 공을 다루는 선수였다. 켈러처럼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사람이 그토록 다양한 공격 전략을 가르쳐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원제: How Tim Keller Taught Us to Be Offens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선교지에 기독교 화가와 음악가가 필요하다
by Byron Spradlin
2024-02-1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몇 년 전 볼리비아 인디언 목장 일꾼들이 사는 한 마을 전체가 주님께 나아왔을 때, 내 친구 선교사들은 몇 가지 어려운 질문에 직면했다.이제 주님을 구주로 알게 된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없는데, 그들에게 어떤 노래를 부르도록 권할까? 그들의 문화적 표현에 예전(liturgy)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동체의 어떤 관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고백, 찬양, 경배를 표현해야 할까?이 질문들에 대해 나의 선교사 친구들은 옳은 일을 했다. 그들은 볼리비아 인디언 신자들이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을 만들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합당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원주민들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친숙하고 진심 어린 표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할 것이라고 인정했다.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복음화가 충만하게 일어날 때, 새 신자들의 목표를 나는 그들이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일으키는 자신들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드리는 믿음과 예배를 의미한다. 참된 예배는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핵심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숙한 표현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1]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복음으로 구원받고 해방되고 변화된 그 마음에서 노래와 춤, 의식과 전례 및 장식의 고유한 표현이 샘솟게 된다.또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종종 문맹으로 인해 많은 의사 소통이 필연적으로 예술적 또는 상상적 표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 드라마, 스토리텔링, 그림, 건축, 마임, 인형, 공예, 축제, 운동, 의식, 음식, 장식 등은 공동체가 이를 통해 예배하고, 배우고, 제자 삼고, 축하하는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서구 세계에서 흔히 ‘예술’이라고 부른다)이 문화적으로 친숙하지 않다면,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되기 어렵고, 복음의 전달은 덜 효과적일 것이며, 공동체의 성장은 더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거나, 단순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술적 소통가와 예술적 표현 전문가들은 종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진전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표현 전문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과 표현에 있어 비범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이 개념은 장인(craftsman, 상상력을 요하는 디자인이나 표현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개념과 관련된 용어에 근거한 것이다. 음악가와 가수도 이 큰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 음악가, 화가, 작가, 관리자, 공장 노동자, 농부 또는 주부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특출한’ 상상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상상력’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적절한 노래나 가사, 시, 이야기, 움직임, 시각적 표현, 환경적 감수성 등을 만들어 내는 미적 감수성의 비범한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적절한 예술 형식과 방법을 예배나 가르침, 제자도 훈련, 전도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비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듣고 이해하기 훨씬 전에 마음으로 듣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자나 변증가가 아니라 예술가와 시인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는 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세계 복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상명령이 진정으로 수행된 곳에 침투된 문화에서 자신의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로 예배하고 신앙을 선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이다.이러한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은 예술 사역 전문가 또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인 토착 예술가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시각과 음악, 스토리텔링 또는 기타 집합적인 표현의 역학이 사용되는 의식이나 예전 또는 공식 대회에서 공적 및 사적 예배의 표현에서 믿는 공동체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술 사역 전문가이다.“현재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에서 잃어버린 보석입니다. … 그것은 현대 교회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며, 나는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썼다.[2]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보석은 자신의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예배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징과 은유, 의식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예배는 머리의 언어를 넘어 마음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진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술적 표현의 영역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격과 나라의 실재를 말을 뛰어넘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현대의 예배 예술가들을 특별히 준비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을 교회와 그 사명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배치해야 한다.남아프리카 북동부 콰줄루나탈(KwaZulu-Natal)의 광대한 시골 지역 출신의 기독교 공예가들이 성경에 대한 진정한 아프리카의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밝은 구슬 장식의 태피스트리. 출처: 로잔운동 예술 및 음악 사역 인력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저항젊은 신자로서 나는 두 가지를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는 교회 지도부가 예술 전문가를 신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계가 기독교 예술가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나는 세계 복음화의 더 큰 대의를 위해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셨음을 느꼈다. 나는 또한 이러한 예술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역 구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열정은 음악가와 예술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창조적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선교 기관인 국제 기독교 증인 예술가회(Artists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ACT Intl)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토착 예배와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에 헌신된 사람들이다.이 분야의 역사가 50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비록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사역과 선교에서 예술적, 음악적 전략의 중요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적 표현과 방법 및 전략에 대한 전략적 성격을 이해하는 소수의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제공되는 “사역 촉진 구조”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육과 교회 개척, 하이브리드 예배 큐레이팅 등의 사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실험을 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필요: 예술가와 음악가를 위한 선교적 구조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처음부터 ACT Intl은 사람들이 적절한 문화적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선포하도록 돕고, 교회가 적절한 예배를 열방에 가져오게 하는 세계 복음화와 총체적 사역을 위해 음악가와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전념해 왔다. 이 일들은 음악과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문화를 되찾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명령의 열쇠이다. 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 그래서 ACT Intl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예술 사역자를 찾고 파송하려는 더 많은 선교 기관이 필요하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모든 문화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예술가들을 사역에 동원하는 유사한 운동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주님은 우리에게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하도록 지시하셨다. 이곳은 현재 음악의 도시이자 기독교 음악의 본고장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큰 녹음 계약을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음악가와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보수나 팡파르 없이 교도소 사역을 통해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ACT Intl의 교도소 사역은 실습을 통해 배우는 전도 훈련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교도소 사역이 성장함에 따라 예술가, 음악가, 무용수, 배우들에게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화된 기회를 제공했다.필요: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더 많은 제자 훈련과 교육우리는 또한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예술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더 심도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필요는 현재 uSeminary.org 및 Worshipedia.org라고 하는 예술-사역 훈련 프로그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경험 많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이 그들의 지혜를 구체화하고 전달할 수 있는 고품질, 저비용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예술 사역을 위한 성경적 신학, 성경적 전략 및 성경적 기술을 탐구한다. 우리는 현재 uSeminary, Worshipedia, uSeminary Publishing 세 가지 교육 서비스를 위한 온라인 포털을 보유하고 있다.ACT Intl 창작 예술가 커뮤니티는 이미 사역 중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 명의 초기 예는 현대 음악가인 마티 맥콜(Marty McCall)과 스캇 웨슬리 브라운(Scott Wesley Brown)이다. 두 형제는 내슈빌 음악가를 돌보는 데 중점을 둔 월간 ACT Intl Christian Musicians Fellowship을 주최하는 데 서로 다른 시간에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마티와 스콧의 목회적 강점이 표면화되자, 하나님은 순회 사역에 예배 목회를 추가하여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도록 두 사람을 감동시키셨다. ACT Intl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은 해외에서 단기 음악 봉사 활동을 했다. 일단 지역 교회의 지경 너머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예술적 방법과 전략을 통한 단기 선교와 지속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쉬워졌다.봉사할 준비가 됨: 예배 예술과 다른 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과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은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잡아당김을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이 멘토링과 지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을 배치하는 구조를 개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의도적으로 격려해야 한다. 세계 복음화는 예술 사역의 실천가와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의 참여 없이는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므로 당신이 창의적이라면, 매일의 예배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집중력과 사명을 주님께 간구하고, 당신의 예술적 열정과 기술을 그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에서 섬기는 리더라면 어떤 자격으로든, 당신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에서 예술적인 사람들을 찾으라고 나는 촉구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을 볼 때,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결하고, 긍정하고 존경하고, 지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강력한 방법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에서 그의 영광을 표현하고, 용서와 접근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성령께서 많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특히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해방된 주님의 예술 영역의 종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복음 전도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복음을 위한 이 풍부한 창조적 예술가 그룹을 참여시키고 돌보는 일을 지지하게 되기를 바란다.주1. ‘Christian Communities For Every Context’ by Michael Moynagh in the September 2020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9/christian-communities-for-every-context. 2. A. W. Tozer, Worship: The Missing Jewel (Camp Hill, Pennsylvania: Christian Publications, 1961), 9.원제: The Critical Role of Christian Artists and Musicians in Missions출처: lausanne.org
“가나안 성도” 현상: 목회적 반성과 대응
by 김선일
2024-02-13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목회자들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가나안 성도의 증가는 정당화시키기만도, 또는 질타하기만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목회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점과 고쳐야 할 점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뉴질랜드의 신학자 앨런 제이미슨(Alan Jemieson)이 말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에 민감한 교회를 위한 여섯 가지 지침과 미국의 목회자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말하는 가나안 성도를 위한 목회적 권면 다섯 가지를 우리의 상황에서 음미하고자 한다. 먼저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의 탈 기독교 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오늘날의 가나안 성도 상황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목회적 권면을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이 교회와 신앙을 떠나는 것은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새삼 놀랄 필요가 없다. 가나안 성도 가운데 교회로 돌아오려는 사람들도 있으나, 어떤 이들은 애당초 믿음이 없거나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없었다. 가족이나 주변의 지인들을 따라 교회를 다녔던 명목상의 관습적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신앙의 동기부여를 얻지 못하고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가나안 성도 가운데 교회로 돌아올 의향이 있다는 이들은 42.9퍼센트나 된다. 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이들은 36.7퍼센트인데, 이들 중에는 신앙 수준이 1단계에 머문 자들이 가장 많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 조사, 110쪽 이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 신앙의 부재가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신앙을 버리는 일은 과거 교회 중직자나 목회자 중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요일 2:19)이라는 사도 요한의 조언을 냉정하게 되새길 필요도 있다. 둘째, 극단적 반응은 신앙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교회를 떠난 이들이 모두 믿음이 없거나 약해서라고 그들을 탓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를 더욱 증가시킬 수 있다. 분명히 더 많은 사람이 교회에 대한 실망과 상처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순수하고 확고한 믿음의 사람들만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믿음에 관해서 다양한 경험과 인식을 지닌 이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자들이다. 일률적인 신앙의 강요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하곤 한다. 가나안 성도들은 권위적, 위계적 교회 문화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 너무 방임적이어서도, 너무 율법적이어서도 곤란하다. 그래도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는 말씀은 교회 문화의 근간이어야 한다. 셋째, 가나안 성도에 대해서 인내하라. 그들이 교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 기존 교회를 떠나는 그들의 고민은 관습적 신앙생활에 대한 경종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히 교회나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일 수도 있다. 실제로 새로운 모습의 선교적 교회들에서 기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한 가나안 성도들이 참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넷째, 목양의 중심성을 회복하라. 가나안 성도들 가운데 소그룹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석한 경험이 있는 이들의 82.7퍼센트가 교회에 재출석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소그룹 활동을 경험한 적이 없는 가나안 성도들에게서는 교회 재출석 의향이 있다는 응답(40.7%)과 재출석 의향이 없다는 응답(37.8%) 간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잠 27:23) 일은 목양의 중심이다. 목양은 목회자가 오롯이 떠맡아야 하는 몫은 아니다. 교회는 진실하고 책임 있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돌보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소그룹 사역은 그러한 공동체적 돌봄을 제공하는 가장 유력한 사역 모델 가운데 하나다. 서로 누구인지를 알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예방하는 주요 전략이다. 다섯째, 성도를 구비시키라(equip the saints). 소그룹과 공동체를 통한 목양적 돌봄이 가나안 성도의 양산을 막는 방어적 전략이라면, 성도를 구비시키는 일은 가나안 성도를 넘어서는 건설적인 전략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직분자를 삼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히 구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엡 4:11-12). 교회의 직제는 성도를 구비시키기 위함이다. 봉사의 일이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성도가 세상의 일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 위함이다. 최근 조사에서 개신교인 청소년 가운데 가나안 성도 비율이 36퍼센트로서 성인보다 더 높게 나왔다. 인생의 목표를 세워나가는 젊은 세대에서 신앙이 인생의 소명과 방향을 제공하는 일은 미래의 건실한 성도를 양성하는 데 필수다. 이상의 다섯 가지 권면은 목회자들이 가나안 성도 현상을 이해하고, 그 현상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조언들이다. 여기에 덧붙여 가나안 성도의 양산을 예방하는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과제도 대두된다. “떠나는 이에게 민감한 교회”(leaver-sensitive church)가 되라는 앨런 제이미슨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동안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seeker-sensitive church)라는 용어에 익숙했다. 이제 탈교회 시대와 마주하며 떠나는 이에게 민감한 교회라는 모델을 고려할 때가 됐다. 이는 단순히 교인 관리 차원이 아니라 회중을 더 깊이 알고 적절한 교회의 사역을 찾기 위함이다. 제이미슨은 여섯 가지의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다(A Churchless Faith, 146ff)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의문과 의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라.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불만과 고민을 표출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은 대답 속에서만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질문 속에서도 임재하신다. 둘째, 여정의 신학을 제공하라. 신앙은 구원의 확신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에는 고통과 방황도 포함된다.셋째, 신앙에 대한 의문을 정죄하지 말고 관용하라. 신앙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표현하는 이들을 신앙을 잃은 자로 단정하지 말고, 많은 이들이 신앙의 갈등 여정을 지나왔음을 알려주라. 넷째, 하나님은 특정한 신학 관점보다 훨씬 크시다. 현재 교회의 신앙 전통이 절대 기준이고 그 기준을 벗어난 탐구와 의심은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 다섯째, 율법적 신앙보다 정직한 신앙의 모델을 제공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복음을 주셨지만, 너무나도 많은 교회가 금기와 법칙을 강요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과 진실하게 대면하게 하라. 여섯째, 감정과 직관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 상태를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숨기는 습관을 지녀서는 안 된다. 공 예배 중에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절규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목회 사역에 대한 반성이자 교회의 영성을 제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는 단순히 가나안 성도들을 교회에 돌아오게 하는 실행 전략을 넘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정체성과 교회의 영성 문화에 대한 깊은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
로널드 J. 사이더의 유산
변혁적 선교를 형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by Al Tizon
2024-02-03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선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실천에 대한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여정의 역사는 북미 신학자이자 활동가인 로널드 J. 사이더(Ronald J. Sider)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그는 2022년 7월 27일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그를 기념하고 그의 업적이 교회 선교에 끼친 지속적인 영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준다.그는 거의 45년 동안 필라델피아 인근의 파머(Palmer) 신학교에서 신학, 통전적 사역, 공공 정책 분야의 저명한 교수이자 사회행동을 위한 그리스도인(Christians for Social Action)의 설립자이기도 했지만, 다문화 선교사로 섬긴 적이 없었다. 영혼과 사회를 모두 다루는 온전한 기독교에 주목하던 그의 연구와 사역은 주로 북미라는 자신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북미 대륙은 그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었고, 사이더의 영향력은 대륙의 경계를 넘어 교회의 세계 선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는 순전한 우연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국제 로잔대회에 세 차례 모두 참석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 그와 함께했다. 제1차 대회와 제2차 대회 사이 1980년도에 사이더는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Fellowship, 현재는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윤리 및 사회 부서(Unit on Ethics and Society)에서 일하며 단순한 생활방식과 공동체 개발에 관한 두 차례의 협의를 조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 적절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 안에는 전 세계가 담겨 있었다.그는 변혁의 운동을 촉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선교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인페미트(INFEMIT,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 옥스퍼드 선교 연구 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그가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저널 트렌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국제 레그넘 북스(Regnum Books)와 같은 지속적인 단체에서 잘 드러난다.변혁 운동 혹은 ‘변혁으로서의 선교’는 신학적인 학문에 뿌리를 둔 통합적, 상황적, 관계적 선교를 실천하는 성찰하는 실천가들의 느슨한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변혁주의자들은 평화, 정의, 구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해방 없는 복음화, 구조의 변화가 없는 마음의 변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화해가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화해, 공동체의 구축이 없는 교회 개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1]고 주장한다.이 운동의 뿌리와 열매를 파헤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매번 로널드 J. 사이더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르네 파디야(Rene Padilla),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비나이 사무엘(Vinay Samuel), 멜바 마가이(Melba Maggay), 콰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피터 쿠즈믹(Peter Kuzmic) 같은 인물들도 친구 혹은 ‘협력자’로써 함께 ‘변혁으로서의 선교’에 동참했다.온전한 복음에 대한 변혁적 이해를 기초이자 배경으로 삼아, 사이더가 이 운동을 형성할 때 기반으로 한 다섯 가지 주요 방법을 살펴보자.변혁과 제자도: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첫 번째 요소는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제자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이더를 사회 정의와 연관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더의 대답은 분명했다. “나는 사회 운동가가 아닙니다.”[2] 이 답변은 선언적이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이더가 스스로를 사회 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주의 구주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3]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동기는 인본주의적 이타주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도, 즉 세상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고 근본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부와 빈곤: 기아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제 여섯 번째 판을 출간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Christianity Today의 복음주의 세계를 만든 50대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 영향력만 놓고 볼 때, 사이더가 복음주의 선교의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삶을 위해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부의 추구는 신처럼 떠받드는 소와도 같으므로 이에 도전하는 것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그러함에도 사이더는 부를 복음의 사역을 방해하는 강력한 우상이라고 불렀다.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생활 수준은 21세기 북미의 신이며, 광고인들은 그들의 메신저이다.”[4]사이더의 비판은 성경적 신앙의 규칙이 아닌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의심 없이 부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의 시대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 성경적 진리보다는 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이단에 굴복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5]고 적었다. 성경 속 선지자들의 정신에 따라 사이더는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고, 즉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부유한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이더의 추궁은 교회의 전 세계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팔아 그 수익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요청으로 해석되었다(참조. 막 10:17-27; 마 25:31-40).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우리의 부가 선교의 자산이라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조나단 봉크(Jonathan Bonk)의 저서 ‘선교와 돈’[6]은 부유함이 선교 사역에 미치는 영향에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면, 사이더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교 공동체 전체가 물질적 자원에 대한 태도와 관리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경제적으로 의식적인 선교에 영감을 주었다. 우리에게 맡겨진 풍부한 자원은 복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가?[7]단순한 생활방식: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대로 살기의심할 여지 없는 부의 추구에 대한 경고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의 실천적인 헌신은 선교적 신실함에 필수적인 단순한 생활방식에 대한 그의 부르심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 속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사이더는 전 세계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이러한 신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빈곤에 우리 모두가 충격을 받으며, 이 빈곤의 원인인 불의에 대하여 분개한다. 우리 중에 풍요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검소한 생활양식을 개발해서 구제와 전도에 더욱 공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확신한다”(언약 9항)는 로잔 언약의 내용을 마음에 새겼다.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영감을 받은 사이더는 1979년 미국 뉴저지와 1980년 런던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협의체를 조직했다. 이 모임을 이끌었던 주된 질문은 “부유한 이웃의 생활 수준이 아닌 가난하고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기준으로 우리의 생활방식을 측정할 수 있는가?”였다.[8]단순함(Simplicity)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더에게 있어 단순함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고, 이는 교회의 사명에 신뢰성을 준다. 실제로 단순함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향하게 한다. 또한 여유로운 시간과 자원으로 선교에 더욱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리고 제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마음을 키운다.평화와 비폭력: 예수가 주님이시라면비폭력에 대한 사이더의 신념은 그에게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선교의 윤곽을 제시한다. 확고한 평화주의로 유명했던 사이더는 비폭력 행동을 ‘“적”의 인격까지 존중하며 악에 맞서는 활동가로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억압을 종식시키고 억압하는 자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9]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저서 ‘비폭력 행동(Nonviolent Action)’에는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잔혹한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 등 비폭력이 사회 변화를 일으킨 역사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10]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이더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사이더가 비폭력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따분한 평화주의 대 정당 전쟁(just war)의 논쟁에만 국한하지 않고, 교회 전체가 평화를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진정한 정당 전쟁의 관점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전술 목록의 제일 마지막에 두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폭력에 의존하기 전에 모든 비폭력적 가능성을 시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 행동에 대한 요청은 평화주의자, 정당 쟁 이론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땅에서 ‘평화를 쟁취’하라고 손짓한다.예수의 정치: 사회정치 참여[11]마지막으로 사이더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정치에 부합하는 자세로 공공의 문제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주로 북미 지역의 신자들에게 사회정치적 참여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각자의 상황에서 정치 과정에 참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권력에 진실한 목소리를 내며 하나님의 평화, 정의, 공의를 반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그의 메시지는 세계 교회에도 뚜렷하게 전달된다.[12]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오해에 도전한 것이다. 또한 단순히 교회됨을 통해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사회 윤리적 책임을 줄이는 일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와도 대립하였다. 카터 행정부의 정책입안팀에서 일했던 사이더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치의 주된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그렇긴 하지만, 사이더는 당파적 정치를 반대했다.[13]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 참여는 정당을 초월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당파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 나에게 “알, 정치 노선의 양쪽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화나게 하면 자네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거야!”라고 말했다. 이념적으로 어딘가에 사로잡히거나 당의 노선을 따르기를 거부한 그는 ‘예수님의 정치’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정치는 “친생명, 친빈곤, 친가족, 친인종정의, 친평화, 친창조세계돌봄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모두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14]강력한 기반 위에 구축요약하자면, 나는 오늘날 복음주의 세계 선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로널드 J. 사이더의 업적에서 다섯 가지 요소를 강조했다. 선교에 대해 진정한 총체적, 상황적, 관계적, 신학적 접근을 지지한 변혁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이더가 크게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통합적 선교를 제자도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 (2) 부와 빈곤의 문제를 선교 의제로 집중시킨 것; (3)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로잔 언약의 선언을 개발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4) 세상에서 교회의 정의 사역의 일환으로 비폭력 평화 만들기를 외쳤다는 것; (5)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변화와 취약 계층을 위해 각자의 상황 속 정치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는 것이다.나에게 로널드 사이더의 추도식에서 연설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나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마음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과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자원을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주1. Al Tizon, Transformation after Lausanne: Radical Evangelical Mission in Global-Local Perspective (Oxford et al: Regnum, 2008), 6.2. See Ronald J.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Making Jesus the Agenda (Scottdale, PA: Herald, 2008). 3.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1. 4. Ronald J.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Moving from Affluence to Generosity. Sixth edition (W Publishing, 2015), 28. 5. Sider, Rich Christians, 25. 6. Jonathan Bonk, Missions and Money. Revised and Expanded (Maryknoll: Orbis, 2006). 7.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A Holistic Approach to Poverty Alleviation in Asia’ by Kumar Aryal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a-holistic-approach-to-poverty-alleviation-in-asia. 8. Ronald J. Sider, ‘Introduction,’ in Living More Simply: Biblical Principles and Practical Models, ed. Ronald J. Sider (Downers Grove, IL: IVP, 1980), 16. 9. Ronald J. Sider, Nonviolent Action: What Christian Ethics Demands but Most Christians Have Never Really Tried (Grand Rapids, MI: Brazos, 2015), xv. 10. Sider, Nonviolent Action, 63-77. 11. This section is adapted from ‘Leading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in Religious Leadership: A Reference Handbook, ed. Sharon Henderson Callahan (Los Angeles et al.: Sage reference, 2013), 459-460. Used by permission. 12.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Working for Freedom in a World of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by Marion L. S. Carson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working-for-freedom-in-a-world-of-exploitation-and-trafficking. 13. 그렇지만 그는 트럼프를 분명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매우 드문 이런 경우에도, 그는 특정 정당의 입장에서 그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See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ed. Ronald J. Sider (Eugene, OR: Cascade, 2020). 14.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03. 원제: The Legacy of Ronald J. Sider출처: lausanne.org
“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공동체에 던지는 질문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4-01-29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지난 10년간 한국 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 대표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에 ‘안나가’기 때문에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의 비율은 2012년의 10.5퍼센트에서 2017년의 23.3퍼센트로 훌쩍 뛰었고,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로 더욱 높아졌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02쪽 이하). 이 수치는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높아졌을 개연성도 담고 있다. 이들 중 25퍼센트는 코로나 기간 중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최근 조사인 2023년 10월 통계에서는 가나안 성도들이 26.6퍼센트로 약간 낮아지기도 했다.이러한 증가세가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탈-교회 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신앙생활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새로운 신앙표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라도 “가나안성도”라는 이름 붙이기가 그동안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을 우려도 있다. 2012년 이전인 1998년 조사에서는 가나안성도가 11.7퍼센트, 2004년에는 11.6퍼센트였으니 2012년까지의 조사들에서는 가나안 성도 비율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그 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비율이 뚜렷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어쨌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어느 한 가지 지배적인 원인만을 지목하는 것은 이 현상에 접근하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는 소위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가능성이 제시됐다. 현대인들이 더 이상 교회라는 집단에 의존하거나 소속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갱신되고 변화되더라도 이러한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심지어 1인 교회라는 단어까지 나오기도 했다. 과거 조사에서도 30퍼센트 이상의 가나안 성도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했다. 한국 교회의 위계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아의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진지하게 추구하기에 탈 교회를 한 것일까? 실제 조사를 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생 때가 높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다가 스스로 교회 출석 여부를 선택할 즈음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조사에서도 청소년(38%)과 청년(45%)의 연령대에서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앙에 대한 관심이나 구원의 확신 비율은 낮다. 반면, 교회생활 경험과 구원의 확신까지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주로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떠난 경우가 많다. 이들의 탈-교회 원인으로는 주체적인 신앙의 추구라기보다는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상처나 실망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43%)는 교회가 변화된다면, 혹은 좋은 교회를 찾는다면 여전히 교회로 돌아오길 원한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11). 나는 ‘소속 없는 신앙’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 어떤 신학적 동감도 느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시대와 타협하고 변질되었을 때, 제도권 교회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은 교회의 참된 본질을 찾으려는 반성적이며, 실험적인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움직임들을 통해서 교회는 갱신되었다. 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모여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됨의 소명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양보하거나 약해질 수 없는 신앙의 중심이다. 비록 현실 교회가 허물이 많고 신뢰를 잃었다 하더라도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교회됨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교회됨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인간이 자율적이며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한다는 발상은 근대적 자아주의 신화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습관과 신념을 형성한다. 그리고 특정한 공동체와 전통이 바로 그러한 경험과 이야기를 제공한다.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부정적으로 단죄하는 태도는 더더욱 곤란하다. 혹자는 가나안 성도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히 10:25)에 빗대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질타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본문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권면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전통을 버린 자들이라고 질시와 고난을 받을 때 주어졌다. 율법과 제사를 뛰어넘고 완성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더 이상 유대교인들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모임을 늘리라거나 교회당에 더 많이 오라는 차원이 아니다. 히브리서 10:24은 무슨 모임인지를 명료하게 알려준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이는 돌봄과 격려를 위한 모임을 말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갖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돌아보고, 더 나아가 사랑과 선행의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열심이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는 탈-교회 현상에 대한 해법이 전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교권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험성까지 지닐 수 있다.이러한 교회됨의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의 신비를 말할 때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주의 만찬이라는 맥락에서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18절)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곧 교회로 모이는 것이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절)나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는 표현을 보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교회로 모일 때에 주의 만찬이 중심순서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식구(食口)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듯, 함께 먹으러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위해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 함을”(18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쟁으로 말미암아 먹으러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그의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만찬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했다. 비록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식사할 때 갈등과 반목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의 몸을 이룬다는 깨달음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며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희생을 배워가야 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 주의 몸을 이루는 신비였다.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최고의 덕목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한 공동체에 소속되고 헌신한다는 것은 분명히 유행과는 어긋난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갈망하고 찾아 나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삼위일체라는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다. 가나안 성도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추구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혹은 교회와 신앙에 대한 실망과 회의 때문에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아니면 애초부터 진정한 신앙을 확립하지 못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그 모든 탈 교회의 원인과 해법은 모두 교회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떠한 관계와 습관의 공동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과제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통해 더욱 중대해진다.
전인적 돌봄에 참여하는 교회
by Florence MuindiI
2024-01-2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교회 없이 추구하는 전인적 선교? 종종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일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할 때가 있다. 고집이 센 의사가 많은데,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이 고집을 꺾기 위해서는 혼란스러운 경험이 필요하다.나는 약 30년 전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열정으로 선교지에 헌신했다. 그 이후 3년을 열심히 일했고,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무릎을 꿇었다. 실패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무렵 나는 영적인 돌봄과 육체적 돌봄을 병행하고 있었다. 약 5,000명의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역사회 기반의 의료 사역을 운영했다. 여기에는 우리 집 뒷마당에서 열린 어린이 400명을 위한 크리스마스 전 방학 성경학교(Vacation Bible School) 등의 취약 계층 어린이를 위한 사역도 포함되었다. 게다가 나는 남편과 두 아이도 보살피고 있었다.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모인 방학 성경학교였다.나는 아주 일찍 일어나 성경학교에 필요한 빵을 구하기 위해 여러 빵집을 들렀다. 안개가 자욱하고 추운 아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한 광경은 나를 완전히 충격에 빠뜨렸다. 우리 선교센터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5살, 7살, 10살 아이들이 새벽 6시부터 추위에 떨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물리쳐야 했다. 방금 산 빵을 아이들에게 줄까도 생각했다. 우리 가족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더하여 보육원도 시작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어떻게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정서적, 정신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데 어떻게 계속해서 건강상의 필요를 위한 처방만 내릴 수 있겠는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전인적인 돌봄을 경험할 수 있을까?계기나는 며칠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그 이후 사역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빵을 나눠주는 일, 보육원 운영, 계속해서 나병 환자들을 위한 지역사회 기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더 이상 내가 담당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더 이상 ‘내’가 맡는 것이 아니다. 대신, 교회가 전인적인 돌봄과 지역사회의 돌봄을 책임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전략을 전인적 사역(holistic ministry)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통해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응답을 제시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회를 일으켜 세운다.• 각 지역사회에서 취약 계층에 힘을 불어넣어, 가장 작은 자들에게도 존엄성을 가지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시스템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여 피해자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결과를 경험하지 않도록 예방한다.이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3년 후 이 교회들이 지역사회의 변화 과정을 완전히 주도하며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잘 준비된 출구전략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국제 LIA(Life in Abundance)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접근 방식이다.[1]교회 참여 접근 방식과 성경적 근거이 모델은 예수님의 사명을 설명하는 이사야 61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 이사야 61장은 공의가 나타날 때까지 어떠한 회복이 수반되는지, 그리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예수님의 이 사명은 그의 제자인 우리가 뒤따라가는 전인적인 사역이다.우리는 지역사회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해하고 환영하기 위해 먼저 그 지역사회의 안팎에서 기도로 시작한다. 그다음 전략적으로 배치된 교회의 리더들을 모아 비전 수립 세미나를 열고 교회의 총체적 사역이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 세미나에 참여하는 리더들은 훈련자를 위한 훈련(Training of Trainers)에 초대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기초적인 참여형 조사를 공동으로 실시한다. 지역사회 동원과 조직화가 이어진다. 그리고 우선으로 다뤄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달성가능한 해결책을 가지고 단계적인 실행을 시작한다. 교회는 3년의 기간 동안 지역사회 건강, 교육, 경제적 역량 강화, 사회 참여 분야에서 추가적인 참여를 해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된다.여기에서의 초점은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총체적인 접근 방식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교회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 일부이며, 성령님께서 인도해 가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찾고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참여하게 된다.국제 LIA 촉진자들(facilitator)은 3년 동안 교회와 멘토링의 관계를 맺으며, 교회가 섬길 준비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격려한다. 지역 교회는 전략적으로 빈곤한 지역사회 내에 위치하게 된다. 지역 교회는 변화의 주체이다. 그들이 바로 빛과 소금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교회를 중심에 두고 이사야 61장에 묘사된 예수님의 사명을 실행해 나간다.연구에 따르면 지역 공동체가 변화된 모습으로 살 때, 그들은 LIA나 우리가 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교회를 언급한다.참여하고 있는 교회로부터의 영향력우리는 25년 전, 10년 전, 가깝게는 3년 전에 우리가 떠난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이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우리가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왔을까? 우리의 사역이 마무리된 지역사회에서 우리와 협력 관계를 맺은 수백 개의 교회를 통해 보고받을 만한 지속적인 영향이 있는가? 과거와 현재에 대한 투자 가치가 있었는가?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2015년 우리는 과감하게 독립 그룹에 영향력에 대한 평가를 의뢰했다. 이 그룹의 임무는 우리가 함께 일했던 모든 지역사회 중에서 무작위로 6개의 지역사회를 선정하여 단기 및 장기 모델을 평가할 수 있는 정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 데이터를 통해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모델이 구현되면, 촉진자가 떠난 후에도 그 지역사회에서 총체적인 변화가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가설에 답했다.평가자들은 여섯개의 지역사회를 선택하고 전인적 돌봄의 관점에서 6가지 핵심 분야를 중심으로 그 지속성을 평가했다:• 경제적 역량 강화• 지역사회 건강• 교육• 환경 영향• 사회적 참여• 영적 변화또한 지역사회 내 직접적인 수혜자와 초기 지역사회를 넘어선 영향력을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영향력의 수준을 평가했다.[2]데이터 분석 결과 직접 수혜자에게 지속적인 영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년 동안의 참여형 프로그램 서비스를 통해 대상 수혜자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직접 수혜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이웃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는 평가 대상이었던 모든 지역사회에서 나타났다.또한, 이 평가 대상 중 세 곳의 지역 교회는 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새로운 지역사회에서 동일한 프로젝트를 재현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개발자가 떠난 후에 영향력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기존의 개발 및 인도주의 활동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이다. 놀랍게도 몇몇 현장의 연구원들은 지역사회 내 영향의 파급효과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큰 감동을 받았지만, 그 결과에는 놀라지 않았다.그 연구 보고서는 세 가지 요점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사역은 촉진자가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다.• 방문한 모든 현장에서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효과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를 통한 총체적인 돌봄의 모델이 필수적이다. 이 모델의 구성 요소는 모두 함께 기능하며, 어느 하나도 독립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상호의존성은 모든 현장에서 깊고 복잡한 수준으로 분명하게 드러났다.나는 하나님께 우리와 교회를 통해 행하신 일들에 감사드린다. 1999년에 열린 이 구령 활동은 지역 교회로 이어졌고, 그리고 첫 번째 훈련자의 훈련, 3년간의 시범 운영, 그리고 아프리카 12개국과 카리브해 2개국에서 현재 진행 중인 사역으로 이어졌다.수년 동안 2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인적인 돌봄을 받았다. 직접적인 돌봄을 받은 사람 중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3,500곳 이상의 교회가 준비되어 있으며, 14개국과 전 세계에서 계속해서 더 많은 교회가 준비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역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전인적인 돌봄의 사역을 해나가고 있다.현재 동향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반응하기를 요구하시며,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의 사건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여전히 첫 번째 공동체에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영웅처럼 그들을 위해 일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나는 의존해야 하는 곳이 점점 더 많아지며, 지치고, ‘선한 일’이라고 불리는 일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신부를 비하하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이기적인 해를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영웅이 되고 영광을 차지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지역 교회를 준비시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을 배웠고, 그렇게 우리의 발자취를 남긴 곳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고,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축복하시는 것의 핵심적인 특징을 담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명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영적으로, 내적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 행동하고, 육체적인 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다.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며, 증거하고, 선포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이를 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속적인 영적인 목소리이다. 지역사회가 교회 기반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교회의 기능을 받아들이고 프로그램 활동 내에서 교회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교회의 통합적 선교는 이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효과적인 선교의 현 추세이다. 이사야 61장의 말씀처럼, 선포된 말씀은 변혁적인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가지고 있다.영적으로, 내적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영적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 행동하고, 육체적인 변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루기 위해 오신 구속 사역이며, 예수님은 이 사역을 축복하시며 자신의 교회 위에서 세우신다.1. ‘Defeat Poverty. Restore Dignity’, Life in Abundance International, accessed 28 August 2023, https://lifeinabundance.org. 2. This comprehensive study produced a thorough 53-page report available from www.lifeinabundance.org. 원제: The Church and Whole-Person Care출처: lausanne.org
내 아버지 팀 켈러,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역사에 ...
by Michael Keller
2024-01-22
THE KELLER CENTER 작년 암 치료를 받고 있던 아버지(팀 켈러)에게 나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물었다. 구체적으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 신칼빈주의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형성하던 초기 단계에 내적 경건보다는 기독교가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신칼빈주의의 영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카이퍼와 바빙크가 체험적 경건에 관해서 남긴 저작물이 없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단지 영어로 번역된 그들의 책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다.)그리고 그는 내적 경건에 관한 글을 더 많이 읽기 위해서 영국 작가들을 찾았다. 그 결과 개혁신학을 개인적이고 체험적 모델로 삼은 에드워즈와 존 오언, 그리고 여러 청교도의 책을 읽었다.켈러는 우리가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믿음과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진 마음의 변화는 전혀 다르다. 켈러는 신칼빈주의 자료를 통해 점점 더 탈기독교화해 가는 공간에서 체험적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개혁주의를 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웬과 에드워즈로 인해 형성된 “경건주의적” 성향을 카이퍼, 반틸, 그리고 바빙크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에서 비롯한 “문화주의” 성향과 독특하게 융합했다.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긴 하지만, 이 두 개혁파의 전통을 하나로 합친 사람이 팀 켈러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켈러가 그 방법을 택한 것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에 걸쳐서 떠오르는 세속 문화에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켈러가 추구한 신칼빈주의/문화주의 형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의 경건주의적 감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그가 추구한 맥락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두 번째로, 역사적 순간에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경건주의적 가치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적용점을 살펴보겠다. 역사적 맥락우리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비판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켈러의 삶과 사역이 다루고자 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독교가 당연하게 공공의 도덕적 권위로 여겨지던 분위기가 쇠퇴하던 1950년에 태어났다. 1700년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면했던 계몽주의 개인주의가 서구의 중심 이야기로 성장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뉴욕에 도착했을 때, 켈러가 만난 가장 뚜렷한 미전도 그룹은 경력 압박에 압도되어 어려움을 겪는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계층 이동이 활발했다. 성적으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외롭고 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조직화된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불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리학적 용어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딘가에 헌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삶에서 만나는 더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일을 하지? 켈러가 만난 사람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을 직업과 통합하려고 애쓰는, 도시가 개인 생활에 가하는 윤리적 압력을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은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켈러는 복음을 과연 어떻게 전했을까?켈러 사역에서 만나는 두 가지 경건적 적응켈러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가지 혁신 기술을 사용했다.1.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재발견하면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대각성 운동 내내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로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뚜렷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반대 경우를 흔하게 접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 악의, 비통함, 전반적인 비열함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부흥을 단순한 감정주의로 일축한 찰스 천시와는 반대로),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가 단지 외적인 표현에 뿌리를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고전 13:1-3). 심지어 순종의 행위도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부흥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시종일관 오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eternal acceptance)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마찬가지로 켈러는 1980년대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다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켈러의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지적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칭의에 기초를 둔 성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성화에 기초를 두고 칭의를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영적 쇄신이 가져다준 역동성의 실천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깨우고 세속적 불신자를 개종시켰다. 켈러가 자주 말했듯이, “당신은 순종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관용구는 러브레이스가 들려주는 에드워즈 해석의 요약이기도 하다. 모든 순종은 감사하는 믿음의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이것을 어떻게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종 제자도와 전도를 분리했던 1980년대의 많은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비그리스도인의 핵심 문제인 불신앙이 사실상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문제와 하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죄를 짓는 순간에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우주의 창조주로부터 자신들이 사랑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로지 성화만을 칭의의 증거로 여기는 한, 결코 구원을 주는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단지 “열심히 노력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가 아님을 깨닫도록 도움을 받았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 살고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간단하게 표현할까?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거의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 전문 용어의 도움이 없이도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이 메시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켈러가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인이고 결함 투성이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꿈꾸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이 간결한 문구는 복음의 본질을 요약한다. 죄많은 인간의 본질적인 깨어짐과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무한한 사랑과 수용 사이의 긴장을 분명히 설명함으로써, 켈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신학적 개념을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메시지로 뽑아냈다. 이 말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교회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들로 하여금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이는 또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나아가서 변화와 구속, 회복을 은혜 안에서 누리도록 인도하고 촉진하는 빛의 역할을 한다. 2.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1980-1990년대에 걸쳐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는 그리스도인과 믿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속성 있는 목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못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여기에 답을 준다. 즉, 정서적 (마음) 영역이 인지적 (머리) 영역과 얽혀 있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확언이다. 진정한 이해는 지식을 넘어 체험까지 포괄한다. 에드워드는 설교 “하나님의 그리고 초자연의 빛”에서 지식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이 인지할 수 있도록 부여하신 선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단지 개념적일 뿐이다. … 다른 하나는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어떤 개념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와 같다. …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은혜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꿀이 달콤하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생각은 켈러의 설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설교는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플랫폼도, 그렇다고 감정적 반응만을 끌어내는 통로도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성경의 진리를 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이루었다. 설교를 통해서 진리가 만져지고 체험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에드워즈의 확신을 받아들인 켈러는 생생한 이미지와 가슴 아픈 삽화가 지닌 상상력을 통해, 설교에는 이 땅과 궁극적 실재 차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에드워즈는 결코 “무조건 말씀을 선포하라”는 뻔한 격언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사명이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만지고 체험하는 실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켈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당신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녹이고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지향해야 할 변혁적 목표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의 만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켈러는 에드워즈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관해서 개인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내게 지금 만연한 20세기 강해설교가 실제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었다. 설교가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단순히 … 감동을 자아내는 감성적인 이야기로 설교를 채우는 건 결코 아니다. 답은 이미지, 예화, 내러티브 등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있다. 신학교 시절에 나는 에드 클라우니(Ed Clowney)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배웠다. … 그리고 러브레이스로부터는 에드워즈의 부흥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 그러나 내가 복음주의 하위문화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내 설교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모든 게 다 빠진 전통적 강해 설교라는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 나는 그때에도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단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그분처럼 살라고 교인들을 다그쳤을 뿐이다.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뉴욕에서 설교하는 강렬한 경험이 필요했다. …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했을 때, 사실상 내게는 필요한 모든 신학적, 역사적 자원이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켈러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춰서 질문하게 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우리 속 자원을 다르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면, 그 자원이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현재 상황을 반영하는 필요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달하는 나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개념, 진리, 범주 및 내용까지 보유하고 있던 켈러였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상황이 가져다주는 긴급한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고 변혁적인 변화가 성경의 진리나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재형성했다. 그는 복음이 다양한 청중의 귀에 다 들릴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야말로 효과적인 상황화를 위한 필수 프로세스이다. 모든 세대를 위한 복음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켈러의 경건주의적 가치를 분석하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은 재창조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막 부임한 목사였을 때, 나는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자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로서 켈러가 말했다. “내 몸에 원래 내 것이었던 뼈는 하나도 없다. 내가 설교하는 모든 내용은 따지고 보면 다 다른 곳에서 나온 거야.” 이것은 중요하다. 재창조가 목사나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고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바뀔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임무가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자. 둘째, 복음은 불변하나 문화는 변한다는 게 켈러가 지향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만 해도 교회에는 “죄”와 같은 용어를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경 지식을 갖춘 교인이 대부분이었고, 목사는 그런 사실을 전제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 켈러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복음을 아예 새롭게 바꾼 건 아니다. 단지 접근 방식을 조정했을 뿐이다.켈러가 활용한 공식은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무질서한 사랑을 품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좋은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순간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죄 많은”(sinful)이라는 용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우상 숭배의 언어를 활용했다. 즉,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수준에까지 이른 현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특정 범주가 부족하다고 개인을 비난하는 대신, 켈러는 복음을 청중이 접근할 수 있는 용어로 바꿔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켈러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끊임없이 상황에 맞게 조정함으로(바꾸는 게 아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발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려는 대상에게 과연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셋째, 문화적 변화 속에서는 역사적 맥락 전반에 걸쳐서 지속해온 유사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 현대에 필요한 소통을 위해서 귀중한 자원이다. 우리의 과제는 죄, 수용, 사랑에 관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그 용어를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불신앙과의 싸움은 보편적이며,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전달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지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은 체험적 참여와 변혁적 변화를 모두 요구한다. 복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당장 우리부터 복음으로 인해서 움직이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부지런히 분별하고 있는가? 그럼으로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가 과거와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격차를 효과적으로 메우고 있는가?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해서 사람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쉬지 말고 새롭게 번역해 내야 한다. 단지 이론으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좋은 삶을 살고 있기에,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 거야. 이러한 불일치는 만연한 초조감, 불안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경우에 복음은 현실이 아닌 이론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결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힘이 단지 교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깊이 느껴지고 실천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제야 비로소 그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불안, 분노, 시기, 취약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만족, 감사, 평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단지 “순종하면 받아들여진다”는 또 하나의 수행 모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럼으로써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방식임을 깨달을 때야 그들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원제: My Dad (Tim Keller) Listened to History to Speak the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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